매일신문

[야고부] 적반하장의 번역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국가 간 소통에서 오역(誤譯)은 치명적인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1956년 11월 소련 지도자 흐루쇼프가 모스크바 주재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NATO 회원국 대사들에게 한 연설의 오역도 그런 경우다. 당시 흐루쇼프는 "당신들이 좋든 싫든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은 이를 서방에 대한 공격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We will bury you"로 번역된 연설문의 러시아어 원문은 'My vas pokhoronim'으로, 직역(直譯)하면 영어 번역문과 똑같은 의미지만 실제 의미는 "우리는 당신들보다 오래 살 것이다" 또는 "우리는 당신들보다 오래 살아 당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다"이다. 즉 흐루쇼프가 의도한 것은 "우리는 자본주의를 끝장내버릴 것이다"가 아니라 "공산주의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파멸을 고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였다.('오역의 제국', 서욱식)

그러나 서방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설 다음 해인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린 충격은 이런 의심에 기름을 부었다. 흐루쇼프의 '연설'이 괜한 엄포가 아니라고 믿게 된 것이다.

이에 흐루쇼프는 경악했다. 미국과 같은 핵보유국이 됐지만, 아직 전체적인 핵전력에서 미국에 열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연설'의 진의(眞意)를 해명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멸망하고 사회주의가 그 뒤를 이을 것이라는, 자신이 굳게 믿는 역사 발전 전망을 얘기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비판을 두고 양국 정부가 치고받으면서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게 된 것은 일본 언론이 적반하장을 사전에 나오는 대로 "도둑이 정색하고 뻔뻔하게 나온다"고 번역했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정색을 하면서 강하게 나온다"고 의역한 마이니치 신문을 제외하고 NHK 등 상당수 일본 매체가 그렇게 번역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적반하장은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화를 낸다"는 정도의 의미로 쓰인다. 일본 언론이 번역에 좀 더 세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문 대통령의 적반하장이란 표현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굳이 그렇게 표현했어야 했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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