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 스케치] 진보세력의 자기 고백

박병선 논설위원
박병선 논설위원

개인적으로 자서전 읽기를 좋아한다. 개인의 굴곡진 삶과 시대상을 일별하고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자서전을 읽을 때 주의할 것은 자기 미화와 과장으로 포장돼 있어 이를 헤아릴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정치인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생전에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평한 적이 있다. "YS는 절반쯤 사실과 달라. DJ는 그보다 낫지만 미화와 과장이 아주 많아."

필자가 좋아하는 자서전은 시인 김지하의 '흰 그늘의 길'이다. 이 자서전은 꾸밈이나 가식이 없고 솔직하다. 그의 사상적 궤적과 고난은 익히 아는 바이나, 자신의 약점이나 여자·가족 문제, 방탕한 생활까지 가감 없이 써놓았다. 공술 얻어먹고 술주정 부린 다음 날의 허탈감, 타인을 욕한 뒤의 후회, 남에게 신세 진 부끄러움 같은 인간적인 면모가 곳곳에 들어있다. 심지어 정신병 병력이나 국정원에 끌려가 덜 맞기 위해 잔꾀를 부린 부분까지 나온다.

김지하 선생이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세력에게 영웅에서 경원시되는 인물로 급전직하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NL이니 PD니 하면서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가 판치는 시대에 생명·개벽사상이라는 '낭만적 사회주의'를 주창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꾸밈없고 소탈한 시인의 감수성은 가식과 음모·조직생활 따위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애시당초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인간형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설전을 벌인 일이 있다. 황 대표가 "임종석 씨가 무슨 돈을 벌어본 사람인가"라고 하자, 임 전 실장이 "아직도 좌파 우파 타령을 하니 공안검사 시절 인식에서 한 걸음도 진화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별것 아닌 일을 끄집어낸 이유는 여기에 진보세력의 모순이 담겨 있는 듯해서다.

황 대표가 '진화 못 한 공안검사' 비판을 받는 것은 처신을 볼 때 당연하다. 그보다 눈여겨볼 점은 임 전 실장은 남을 탓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한 번이라도 고백이나 반성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전대협 의장 출신인 임 전 실장은 자신이 한때 주사파였다는 사실을 밝힌 적이 없다. 대학 시절 임 전 실장이 김일성주의를 신봉했음을 증언할 사람은 아마 작은 교실 하나 채우고 남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주사파의 대부였던 김영환 씨는 "임 전 실장 등 전대협 핵심은 주사파 언더조직의 지도를 받았다"고 했다. 물론 임 전 실장이 아직도 주사파일 리 없고, 한동안 학생운동권을 휩쓴 사상에 경도됐다고 해서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과거 행적은 미화와 찬양으로 일관하면서 남의 허물만 손가락질하는 '내로남불'은 볼썽사납지 않은가.

'반성 없는 자기 미화'는 임 전 실장만이 아니라 진보세력 모두가 비슷하다. '죽창가'를 외친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도 사노맹사건으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한때 공산주의를 신봉했음이 분명하지만, 한 번도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민주화운동이니 학생운동을 내세울 뿐이지만, 본질은 공산주의 신봉자였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세대가 다르니 '한때 공산주의자'가 아닐 개연성이 높지만, 당시의 지식인 그룹처럼 독재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젊은 날의 사상을 온전히 갖고 있지 않지만, 새 시대의 새 사상으로 갈아타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옛날 젊은 시절의 사고·사상 가운데 무장혁명 같은 극단적인 요소만 제거한 채 남은 찌꺼기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친북, 친중, 반미, 반일'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이다.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도 없고, 토론할 수도 없으니 내면에서 고체화되고 수구화되는 것은 필연이다. 보수정권보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약간의 비교우위가 있어 정권을 잡았지만, 낡고 진부한 생각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자기 고백과 반성이 없다면 한국의 진보세력도 보수세력의 행로와 비슷해질 것이다. 이들이 훗날 자서전을 쓸 때 김지하 선생처럼 솔직하게 자기 고백을 할 용기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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