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동 스케치] 지역주의라는 망령의 부활

박병선 논설위원 박병선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을 두고 일부에서 '좌파'니 '빨갱이'니 하면서 극단적으로 공격하지만, 필자가 볼 때는 '고지식한 정치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고집이 세고 자신의 생각을 거두지 않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거 정치인과 다를 바 없이 지역주의에 기반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신봉하는 '북한 중시, 친(親)노동' 정책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민주개혁 세력'으로 자칭하는 이들이 밟아온 길을 답습하고 있을 뿐, 문 대통령 개인의 독창성이나 개성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보잘것없다. 차별성이 있다면 앞의 두 대통령은 정치·경제 상황, 국제 관계를 고려해 자신의 이념과 지향점을 일시 멈추거나 우회하는 융통성을 발휘했지만, 문 대통령에게는 그만한 유연성이나 폭넓은 사고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지지파는 '원칙주의'라고 칭송하고, 반대파는 '불통 정권'이라 비판한다. '원칙'과 '불통'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사상가·직업 운동권이라면 모를까 정치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문 대통령이 '골수 좌파'가 되기 힘든 이유는 퇴행적인 지역주의 세례를 받은 정치인이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취임 초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선언은 애초부터 지키기 불가능했다. 현 정권은 호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는 '전라도 정권'이다. 인사·예산이 호남에 편중되고 수도권에서 호남 출신이 득세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문 대통령은 2015년 새정치연합 대표 시절 정계 은퇴를 고심할 정도로 호남 사람들에게 혼쭐난 경험이 있다. 당시 문 대표의 호남 지지율은 5%에 불과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보다 뒤졌는데, 이유는 '호남 인사 홀대론'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여러 차례 광주를 방문해 고개를 숙였고, 문 대통령은 '호남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정계은퇴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정숙 여사가 광주에 상주하며 봉사활동을 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호남에 진력한 결과,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문 대통령이 올해 5·18 기념식에 참석해 '독재자의 후예'라는 강성 발언을 쏟아낸 것은 개인적인 신념도 있지만, 내년 총선에 대비한 포석일 가능성이 높다. 내년 총선은 그야말로 정권의 명운을 거는 선거인 만큼 호남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5·18 기념식에서 봤듯 호남의 지지가 견고한 탓에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년 총선을 절망적으로 보는 여권 인사는 많지 않다. 여권 인사의 말을 종합하면 수도권은 전체 인구의 30%가 넘는 호남 출신과 30, 40대 지지층만으로 승산이 충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PK 지역을 중점 공략 대상으로 보고 있다. 여권 일각에서는 자유한국당세가 강한 TK 지역을 독재와 적폐, 친일파 프레임을 씌워 고립·분리시키려는 움직임마저 있다. 관가에서 'TK 출신은 씨가 말랐다'는 말은 역겨운 지역 차별의 결과물이다.

지역주의를 한국 정치의 숙명이니 구조니 하면서 애써 간과하려 해서는 안 된다. 호남 출신은 민주 세력이고 영남 출신은 수구 세력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도 특정 세력에서 나온 논리다. 문 대통령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한때 사라진 듯한 지역주의가 되살아나 오히려 심화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 특정 지역과 출신에 자리와 특혜를 몰아주는 정치는 적폐와 같지만, '적폐를 척결하겠다는 정권'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진보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알맹이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분열의 정치일지 모른다. 지역주의는 선동과 유언비어, 증오, 분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내년 총선에 지역주의의 망령이 휩쓸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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