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유승민론(論)

김해용 논설위원

김해용 논설위원 김해용 논설위원

하루 수백㎏의 먹이를 먹는 아프리카코끼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남아나는 것이 없다. 사바나 초원에 수풀이 없는 것은 나무조차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코끼리의 습성 탓도 원인이다. 요즘 대구'경북의 정치적 지형도를 보면 마치 코끼리가 휩쓸고 지나가 자양분이 고갈된 자리 같다. 대통령이라는 코끼리를 다섯 명이나 배출했지만 향후 대한민국 정치권을 쥐락펴락할 만한 싹수 있는 정치인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서다.

대구'경북 출신인 이명박'박근혜 두 정치인이 내리 대통령이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대구와 경북에서는 유력 정치인들이 자라날 토양이 척박해졌다. 이명박'박근혜 집권 9년 동안 대구'경북 정치인들의 경쟁력은 오히려 퇴행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19대 대선은 대구'경북 미래 정치 상황을 예상케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에 대해 지역 표심이 압도적으로 쏠릴 것으로 예견된 상황이어서,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가 지역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표를 받는지가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유승민 후보 입장에서도 박근혜 배신자 취급을 받아 지역민으로부터 버림받느냐, 의미 있는 지지를 받아 미래를 기약하느냐가 달린 절체절명의 선거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대구'경북사람들은 홍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면서도 유 후보에게도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지(대구 12.6%'경북 8.75% 득표율)를 보내는 등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

대한민국 정치 무대에서 유승민은 흔치 않은 캐릭터다. 안보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경한 보수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만 경제나 복지 분야에서는 정의당 못잖은 좌클릭 성향을 보인다. 해박한 경제 지식에 능숙한 토론 솜씨까지, 유승민은 이번 대선 토론회를 통해 네임 밸류를 확실히 높여놨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구'경북민들의 시선은 타지역보다 오히려 싸늘하다. 혹자는 "자기밖에 모른다"고 하고 누군가는 "서민 코스프레하는 금수저"라고 평가한다. 당사자로서는 그런 지적이 마뜩잖겠다. 동창생들의 평가를 빌리자면 그는 잘 놀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부당하게 맞고 집 나간 친구를 찾겠다며 아버지 사무실 사무장으로부터 3만원을 빌린 뒤 가출을 감행한 전력도 있다. 귀가할 때 부모님께 사죄하는 뜻으로 머리를 빡빡 깎았다는 후일담으로 미뤄볼 때 그는 샌님이라기보다 쾌남에 가까운 듯싶다.

일전에 신문사를 찾은 그와 20~30분 정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후보 사퇴하라는 당 안팎의 압력이 최고조에 달할 때였다. 원래 등 뒤에서 쏘는 아군의 총질이 가장 아픈 법이다. 완주할 것이냐는 물음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그날 그의 눈빛에서 그 말이 허언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는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을 사람인 듯 보였다.

이런저런 평가를 차치하고서라도 본란이 정치인 유승민을 거론하는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명예 퇴진 이후 대구'경북이 처한 정치적 공백 상황 때문이다. '친박' 후광 효과에 기대 금배지를 단 정치인, 유권자는 안중에도 없고 중앙당만 쳐다보는 '해바라기' 국회의원들이 어디 한둘인가. 대선 주자급 정치인이 허다한 부산'경남과 너무 대조적인 대구'경북의 정치 지형도이다.

결선보다 예선이 더 어려운 경우가 있다. 국가대표만 되면 올림픽 금메달은 따 놓은 당상인 양궁, 쇼트트랙이 그런데, 유승민으로서는 2020년 총선이 딱 그 짝이다. 전국적 인지도를 높여놨지만 다음 총선에서의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대구 동을을 버리고 서울로 지역구를 옮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굳이 유승민이 아니더라도 대구'경북의 정치적 위상을 이끌 유력 정치인은 많을수록 좋다. '선수(選數)가 깡패'라는 말이 있듯이 중진 국회의원들을 많이 키워내도록 대구'경북 유권자들도 전략적 투표를 할 필요가 있고, 그 명단에 유승민을 올려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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