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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춘추칼럼]불통과 침묵은 파멸의 전주곡이다

[김형준의 춘추칼럼]불통과 침묵은 파멸의 전주곡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지난 11월 24일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 기습적으로 징계 요청과 직무 정지 처분을 명령했다. 그러자 전국 59개 검찰청의 모든 평검사와 검사장, 고검장들이 "부당하고 위법하다"며 들고일어났다. 급기야 검찰총장 직무대행은 "검찰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 우려가 있다"고 반발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검란(檢亂)이라고 부른다.하지만 법을 수호해야 할 법무부 장관이 헌법과 법치를 훼손한 것에 대해 검찰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총체적으로 저항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정치가 검찰을 내려친 '추미애의 난'(秋亂)은 법원과 검찰 감찰위원회에서 제압됐다. 법원은 윤 총장 직무 정지 명령이 "검찰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몰각하는 것"이라면서 윤 총장 복귀 결정을 내렸다. 감찰위는 추 장관의 조치에 대해 "중대한 절차적 흠결이 있다"고 만장일치로 의결했다.사태가 이쯤 되면 추 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문재인 대통령은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럼에도 징계위원회를 강행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발상으로 법과 국민에 대한 도전이다. 리처드 E. 뉴스타트는 「대통령의 권력」이라는 책에서 대통령의 힘은 설득에서 나온다고 했다. 대통령의 간결하고 명쾌하며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는 설득의 요체가 될 수 있다. 검찰이 집단 반발하는데 "모든 공직자는 집단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받들어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메시지는 공허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검사와의 담판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야 울림이 생기는 법이다. 대통령의 침묵은 설득의 적이고, 불통보다 더 나쁘다.문 대통령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월성 1호기 평가 조작, 윤석열 직무 배제 등 현 정부에 불리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침묵을 지켜 왔다. 근본 이유는 자기부정에 대한 부담감 때문으로 보인다. 가령, 문 대통령은 과거 "검찰 독립이 중요하고 검찰 독립에는 검찰총장 임기 보장이 결정적이다"고 했다. 따라서, 윤 총장 해임은 문 대통령이 공언했던 검찰권 독립 및 검찰 개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여하튼 대통령이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은 스스로 권위를 훼손시키고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다.「대통령의 위기」라는 책을 쓴 크리스 윌리스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부터 조지 W. 부시 대통령까지 16명 대통령의 통찰력과 결단력을 분석했다. 핵심은 대통령의 '용기 있는 결단'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의 암묵적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추 장관의 일탈과 독선은 결국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집권 3년 6개월이 경과하면 예외 없이 위기를 맞고 레임덕에 빠졌다. 실패한 대통령의 공통점은 위기인데도 위기인지 모르거나, 위기인지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는 유아적인 생각과 "자신은 역대 대통령과는 다르다"는 허황된 믿음 때문이다.현 정권은 경기 침체, 부동산 정책 실패, 추미애의 난 등으로 위기로 치닫고 있다. 최근 문 대통령 지지도는 작년 조국 사태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고, 여권의 유력 대권 후보들의 지지도는 링에도 오르지 않은 윤석열 총장에게 역전되기도 했다. 심지어 유권자 절반이 내년 재·보궐선거에서 야당 후보 지지 의사가 있다는 조사도 나왔다. 문 대통령이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추미애 블랙홀'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국민 10명 중 6명(59.3%)은 추 장관과 윤 총장에 대한 국정조사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지금 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지지층으로부터 미움을 받더라도 국민들의 이런 요구를 관철시키는 책임과 용기다.우리는 평소 대통령제를 '대통령 중심제'라고 부른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대통령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한국 정치의 비극은 대통령이 중심에만 있고 침묵하면서 책임지지 않는 데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믿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대통령 책임제'로 전환해야 한다. 설득과 용기는 위기 극복의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지만, 불통과 침묵은 불행한 대통령의 역사를 종식시킬 수 없다.

2020-12-03 14:26:29

[춘추칼럼] 다시 좋은 세월이 오면

[춘추칼럼] 다시 좋은 세월이 오면

최근 코로나19 대란으로 우리의 삶은 많이 제한적이다. 예전에 일상적으로 편안하게 하던 일들조차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모여서 식사를 한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하는 일조차 편안하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 보는 일도 쉽지 않고, 대단위 회의나 축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그런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은 외국 여행이다. 가끔 여행 가방을 들고 인천 영종도 공항을 거쳐 외국 바람을 쐬고 오는 것도 우리들 삶의 에너지를 보충해 주고 지루한 일상을 새롭고 싱싱하게 만들어 주는 요인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아주아주 막혀버린 것이다.나는 외부 나들이가 잦아 공주 시외버스 터미널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이다. 이것도 코로나 이후에 일어난 변화인데 시외버스 시간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매표구 앞에 걸려 있는 시간표를 보면 검은색으로 가려진 부분이 많은데 그것은 모두 버스 노선을 줄인 증거다. 아예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 시간표는 완전히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아예 공주에서는 인천공항으로 버스가 한 대도 가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것은 또 그만큼 비행기가 안 뜬다는 얘기다. 그러니 관광업이든 숙박업이든 제대로 되겠는가.이제는 누구나의 꿈일 것이다. 하루속히 코로나 대란이 평정돼 예전처럼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외국 여행 한번쯤 다녀오는 것 말이다. 만약 나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겨 다시금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스페인을 들고 싶다. 그냥 멀리서 생각할 때는 투우의 나라, 집시의 나라, 피카소의 고국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정작 가 보니 스페인이야말로 자연이 아름답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였다. 햇빛이 다르고 바람이 달랐다. 가슴이 확 열리는 느낌, 자유스러운 느낌이 있었다.그런 가운데 똘레도가 가장 좋았다. 내가 똘레도를 찾은 것은 오후의 시간 한나절. 똘레도의 골목과 관광 명소들을 둘러보며 기분이 좋았다. 발길이 허뚱허뚱 허공을 딛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백두산에서나 미국 세도나에서 느꼈던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그렇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저녁 식사 시간. 여행사 직원이 준비한 식당이 그럴듯했다. 포도주와 애저꼬치뇨 요리가 메뉴였다. 애저는 새끼돼지를 이르는 말이고, 꼬치뇨는 돼지 통구이의 스페인 말이란다. 이른바 새끼돼지 바비큐. 돼지 다리 하나씩을 줬다. 조그맣고 먹음직스러웠으나 나는 차마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애기돼지를 죽여 바비큐로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다. 나는 내 차례로 온 바비큐를 다른 사람에게 밀어 주고 대충 요기를 한 다음, 음식점 밖으로 나와 한동안 서성였다. 골목길이 아주 좁았다.그 길을 사각형 조그만 자동차들이 요리조리 빠져 다녔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길가에 만들어 놓은 턱에 올라가 자동차를 피했다. 자동차들도 조심조심 지나갔다. 그럴뿐더러 거리의 불빛이 매우 흐렸다. 어른어른 먼 거리에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애상적이고 환상적이었다. 어디선가 문득 카르멘의 후예인 예쁘고 젊은 아가씨가 불쑥 나타나 나에게 웃어줄 것만 같았다. 나는 한동안 길거리에 버려진 돌멩이처럼 멍하니 서서 울먹이고 있었다. 울먹임. 까닭도 없는 울먹임. 울먹임 그 자체의 울먹임.그런 애상 때문에 그랬을까. 나는 골목길을 저만큼 걸어 낯선 가게를 하나 발견하고 불쑥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 플라멩코 춤을 추는 집시 아가씨 인형을 두 개 사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 안 될 것 같은 목마름이 그때 있었다.아, 다시금 좋은 세월이 오면 스페인이란 나라에 한 번 더 가보고 싶다.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도 좋고, 프라도 미술관도 좋고,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도 좋고, 가우디의 성가족성당은 더욱 좋았지만, 그 어디보다도 똘레도에 한 번만 더 가보고 싶다. 몬주익 언덕에서는 황영조 선수의 조각상을 보기도 했었지!하루만 똘레도의 골목길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서성이고 싶다. 낯선 가게, 낯선 음식 앞을 기웃거리며 걷고 싶다. 그런 날이 과연 오기나 할 것인지! 어쩌면 이것은 나 혼자만의 꿈이 아닐 것이다. 하도 지루하고 답답하고 우울한 날이 계속되다 보니 내가 별별 생각을 다 해 본다.

2020-11-19 14:40:11

[춘추칼럼] 백넘버 51

[춘추칼럼] 백넘버 51

취미로 야구를 시작했다. 공을 좋아해서 축구와 농구, 당구, 족구, 탁구 등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했지만, 야구는 주로 '시청'하는 것에 만족했던 종목이다. 운동 역시 자신과 맞는 것이 있어서인지 주로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것을 좋아하면서 야구라는 스포츠는 직접 참여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야구 경기라는 것을 해본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투수로 나서 '완투'했던 기억인데, 경기 후 한동안 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이번에 야구를 시작한 것은 건강관리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경기 안 되었지만 현재까지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타율도 아직은 좋은 편이다. 직접 선수로 뛰면서 느낀 것은 그동안 야구라는 스포츠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구나 하는 점이다. 흔히 야구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야구 선수들은 거의 뛰지 않고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는 식으로 약간의 조소가 담긴 표현이다. 그런데 야구는 축구나 농구와 같은 체력을 요하진 않지만 매우 섬세한 집중력을 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비 위치를 선정하는 것이나 공을 잡고 던지는 것, 심지어 주루를 할 때 베이스를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등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를 하거나 부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타격을 하는 것도 투수가 던진 공을 배트 중심에 맞힌다는 것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무엇보다 야구의 가장 큰 매력은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축구는 한두 사람이 잘 못 뛰거나 실수를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 축구 경기에 퇴장을 뜻하는 '레드 카드'가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야구 경기는 9명의 선수가 수비와 공격에서 자신의 자리와 타석에서 고유의 역할을 해야 한다. 수비에서는 자신의 포지션에서 날아오는 공을 온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타석에 들어서서도 투수의 공을 보고 치는 것은 자신만의 몫이다. 물론 투수의 비중이 절대적이고 소위 강타자의 역할이 큰 것은 맞지만,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퍼즐을 맞추듯이 모여서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그럼에도 야구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각자 다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배치가 가능하다. 투수와 포수, 내야수와 외야수 등 각자의 포지션에 따라 다른 역량이 요구된다. 유격수처럼 순발력과 강한 어깨가 더 요구되는 포지션이 있는가 하면, 1루수처럼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많지 않은 자리도 있다. 타선 역시 1번부터 9번까지 그 나름의 배치 이유가 존재한다.각자의 자리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집중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야구의 본질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야구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세 명이 아웃되지 않으면 이닝이 끝나지 않는다. 축구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면 끝이 난다. 후반전에는 힘이 있는 선수가 더 많이 뛰어 경기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는 각 선수가 자신의 위치에서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도 그 끝을 알 수 없다. 어려운 순간이나 절망이 찾아오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집중하고 걸어갈 때에야 공격과 수비가 교체되듯이 상황은 바뀔 것이다.유니폼 뒤에 새겨진 백넘버는 51번이다. 51세에 야구를 시작했다는 의미로 정해 주었다. 지금은 신발과 헬멧 외에 글러브와 배트 등 대부분을 빌려 쓰고 있지만,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축구나 농구를 할 때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다. 내가 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잘 못하는 것을 보면 답답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역량과 역할을 생각하고, 내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팀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들이 내게 부족한 것들이다.

2020-11-12 15:23:45

[김형준의 춘추칼럼] 역사를 잊은 정당에게 미래는 없다.

[김형준의 춘추칼럼] 역사를 잊은 정당에게 미래는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악수를 뒀다. 당헌을 바꿔 가면서 속전속결로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민주당 당헌(제96조 2항)에 따르면,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의 중대한 잘못으로 재·보궐선거를 실시하게 된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 모두 성 추문으로 인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무공천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후보자를 내지 않는 것만이 책임 있는 선택은 아니며, 오히려 후보 공천을 통해 시민의 심판을 받는 게 책임 있는 공당의 도리"라는 구차한 논리로 약속을 뒤집었다. 이런 민주당의 태도는 자기부정의 참 나쁜 정치다. 더욱이, 여성시민단체의 지적처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명백한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2월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4월에 치러진 네 곳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다. 정치적 타결책으로 문 대표는 5월에 김상곤 전 경기도 교육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혁신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김상곤 혁신위는 사무총장제 폐지, 부정부패 등으로 직위 상실 시 재보선 무공천, 당원소환제 도입 및 당무감사원 설립 등의 혁신안을 제시했다. 문 대표는 2015년 10월 새누리당 소속 경남 고성 군수의 선거법 위반으로 재보궐선거가 열리게 되자, 현장 유세에서 "새누리당이 책임져야죠, 후보 내지 말아야죠"라고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불과 5년 전에 문 대통령이 정치 발전의 출발점이라고 자랑했던 '무공천 당헌'을 손바닥 뒤집듯 바꿨다는 것은 반개혁의 적폐다.민주당은 지난달 14일 당 체질 개선을 위한 가칭 '2020 더혁신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런데 혁신위 구성 2주 만에 당헌을 바꿔 스스로 가장 혁신적인 방안이라고 자랑했던 무공천 약속을 파기하는데 더 이상 무슨 혁신을 하겠다는 것인가? 국민 기만이고 우롱이다. 절차적 정당성에 기대어 당헌을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근간을 마음대로 흔들 수 있다. 명분은 없고 탐욕만 취하는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3마리 원숭이'에 빗대어 눈 가린 문재인 대통령, 귀 막은 이낙연 민주당 대표, 입 닫은 이재명 경기 지사가 차례로 등장하는 만평을 게재했다. 문 대통령이 민주당의 서울·부산 후보 공천 결정을 못 본 척하고, 이 대표가 비난 여론을 못 들은 척하며, 이재명 지사가 신뢰를 쌓을 목적으로 일부러 함구하고 있다는 것을 풍자했다. 국민을 우습게 보는 오만과 입만 열면 거짓 혁신을 외치는 위선의 대가는 즉시적이다.한국갤럽 조사 결과,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도는 지난 5월 1주 71%였지만 지금은 40%대로 추락했다. 최근 리얼미터의 차기 대선 후보 지지도 조사(10월 26~30일)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이 17.2%로 자체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이낙연 대표(21.5%)와 이재명 지사(21.5%)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윤 총장은 전달 대비 6.7%포인트 급상승하면서 범야권 1위 후보가 됐다. 당분간 대선 판세는 이낙연·이재명·윤석열 '빅3' 구도로 형성된 흐름이 유지될 전망이다.윤 총장의 지지도 상승이 던지는 메시지는 다차원적이다. 윤 총장 지지도는 추미애 장관과의 대립과 국정감사 때 여권과 확실히 각을 세우면서 급상승했다. 결국 윤 총장을 키운 것은 오만한 권력이다. 권력이 윤 총장을 때리면 때릴수록 오히려 존재감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대선 경기장'에 들어와 트랙을 돌고 있는 이재명·이낙연과 비교해 아직 경기장에 들어오지도 않은 윤석열이 오차범위 내에서 선두를 뒤쫓고 있고, 이낙연·이재명의 지지도가 20% 안팎에 머무르는 정체 현상을 보이는 것은 분명 여권엔 위기 상황이다. 특히, 지지도가 지속 하락하고 있는 이 대표에게는 빨간불이 켜졌다. 유력 여권 대선 주자들이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권력과 전략적 차별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국민과 함께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비겁하게 권력 눈치만 보면 결코 미래는 없다.

2020-11-05 12:32:11

[춘추칼럼] 근근이 먹고산다

[춘추칼럼] 근근이 먹고산다

'우리 집은 아빠가 선생질을 해 근근이 먹고산다.' 지금도 이 문장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온다. 이 문장은 우리 집 아들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다닐 때 여름방학 숙제로 쓴 일기장에 들어 있던 문장이다. 마침 그때는 나도 아들아이가 다니던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시절인데 여름방학이 지나고 여름방학 숙제 검사를 하던 아들아이 담임 선생님이 일부러 나를 불러서 보여준 문장이기도 하다. 아들아이가 일기장에 쓰기는 했지만 이 말은 애당초 아들아이의 것이 아니다. 아이의 엄마가 아들아이에게 자주 해준 말이다. 그러기에 아이가 그것을 외워두었다가 마침 일기장에 아무것도 쓸 거리가 없는 날 이 말을 기억해내고 무심히 옮겨 적은 것이다.우리가 살던 집, 아주 작은 단독주택 앞에는 동네 사람들이 홍가가게라고 부르던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들아이는 그 장난감들에 눈독 들여 살았다. 들락날락 가게 문을 드나들며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장난감을 넉넉하게 사줄 만한 돈이 아내에게 있을 까닭이 없었을 터. 늘 푼돈으로 쪼개어 써도 돈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쌀값, 연탄값, 반찬값을 제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었으니까 말이다.그런데도 아이는 새로운 장난감에 마음을 뺏기고 자꾸만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으리라. 그럴 때마다 아내가 아이의 등짝을 한 대씩 때리면서 했던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우리 집은 아빠가 선생질을 하여 근근이 먹고산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나 아이의 등짝을 때리며 경각심을 심어주던 아이의 엄마나 그것을 바라보던 나나 참으로 한심한 인물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한심한 사람은 바로 나. 그래, 학교 선생으로 일한다는 사람이 아이에게 장난감 하나 시원시원 사주지 못하고 아내에게 그런 소리를 하게 만들고 또 아이에게는 그걸 또 일기장에 쓰게 했단 말인가!이제 와서 가족들에게 참 미안하고 송구한 심정이다. '근근이'란 말은 일상 흔하게 쓰이는 말이 아니다. '어렵사리 겨우'란 뜻의 부사이다. 또 이 말은 한자에 그 뿌리를 둔 말이기도 하다. '근근이'에 쓰여지는 근(僅)이란 글자는 여러 가지 뜻인데 한결같이 부정적이며 마이너의 뜻이다. '겨우, 거의, 가까스로, 다만, 단지(但只), 희미(稀微)하게, 적게'의 뜻이 그것들이다.정말로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삶이 그러했다. 매우 왜소하고 매우 부족하고 매우 썰렁하고 매우 춥게 살던 시절이다.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형편이나 상황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우리가 사는 것은 근근이 어렵게 사는 삶이다. 시간이 그렇고 건강이 그렇고 인간관계가 그렇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두루 그러하다.오늘날 우리는 단군 임금 이래 가장 잘 사는 세상을 살고 있다. 들쑥날쑥이 있기야 하겠지만 의식주가 그런대로 해결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한껏 보장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이런 나의 발언이 선뜻 짐작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대로 나잇살이나 먹은 내 눈으로 보기엔 우리는 지금 분명히 잘 사는 사람들이다. 그냥이 아니라 기적처럼 잘 사는 사람들이다.그런데도 사람들은 불평불만이 많고 자기만 낙오자라고 투덜거린다. 마이너라고 루저라고 한숨을 짓는다. 모두가 상대적 비교 탓이다. 자기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의 것만 흘낏거린 탓이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기에 앞서 자기의 것을 소중히 아름답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을 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길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자존감을 높여야 할 일이다.'근근이 먹고산다'는 이 말을 우리는 지나치게 부끄럽게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상 우리는 모두 오늘날도 여전히 근근이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오히려 안쓰럽고 아름답고 눈물겨운 사람들이다. 비록 근근이 먹고살지만 마음만은 더욱 너그럽게 부드럽게 풍부하게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길이 정말로 물질로 마냥 풍요로운 오늘날 우리가 잘 사는 길이라 생각한다.

2020-10-22 15:25:56

[춘추칼럼] 체념과 희망

[춘추칼럼] 체념과 희망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그동안 삶에서 익숙하지 않았던 단어들이 훅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주름, 흰머리, 뱃살, 노안 등이 대표적이다. 이것들이 주로 외모나 신체와 관련된 것이라면, 실패와 좌절, 절망, 불안, 우울 등은 심리적이고 정서적 표현들이라 할 수 있다. '체념'이라는 단어 역시 그중 하나다. 실패나 좌절이 더 깊고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라면, 체념은 기대를 접는 데 있어서 뭔가 순간적 감정이나 판단 등 일시적 느낌으로 남는 듯하다.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웠다'라고 썼다. 칼 폴라니는 죽음이라는 좀 더 궁극적인 절망 앞에서 '체념'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은 일상의 다양한 체념에 익숙해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의 시간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이제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체념 사이에서 흘러간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곳을 갈 수 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던 꿈은 이제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체념의 숫자를 늘려가는 중이다.이처럼 우리의 삶은 수많은 체념으로 구성된다. 동그란 공으로 하는 스포츠라면 거의 좋아했다. 잘한다는 말도 꽤 들었다. 하지만 이제 내 몸은 과거의 몸이 아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부모들이 이어달리기에서 많이 넘어지는 이유도 머리가 과거의 몸을 기억하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제 조심해야 할 때가 되었다. 무엇보다 체념할 때가 된 것이다. 가장 정확하게 내 몸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체념과 포기는 다르다. 체념이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시간에 따른 판단 행위를 뜻한다면, 포기는 미래를 포함한 시간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다. 그런 점에서 체념은 새로운 시작과 출발로 이어질 수 있다. 체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체념 이후의 판단과 행위가 중요하다. 체념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체념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찾거나 발견하기도 한다. 체념이 없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아 새로운 것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체념한다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나 과거와 단절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한 단절이야말로 새로운 상상,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절망과 죽음이라는 극단의 비극에서 비로소 희망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살면서 더 필요한 일은 수많은 체념 속에서 희망을 엿보는 일이다.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Lady Windermere's Fan)라는 작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빠져 있다네. 하지만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지."(We are all in the gutter, but some of us are looking at the stars) 사실,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희망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인간은 항상 '시궁창' 같은 현실에 절망했고 좌절했다. 그 속에서 체념은 지극히 당연한 대다수의 선택이었다.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체념 가운데 별을 바라보는 일이다. 시궁창에서 허우적대면서도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저 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시궁창에 있다는 사실을 잘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시궁창 안에서도 탐욕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기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있다고 말을 해주어야 한다. 칼 폴라니가 말한 '죽음이라는 현실을 기초로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것'은 어쩌면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현실적인 노력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온통 주식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하는 방법만 강조할 때, 누군가는 저기 사람이 살고 있다고,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있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손을 내밀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체념 가운데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2020-10-15 13:57:49

[춘추칼럼] 야당이 야당다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

[춘추칼럼] 야당이 야당다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가 약 1년 6개월 정도 남았다. 역대 정부에서는 통상 이 시점이 되면 대통령의 지지도가 30%대 이하로 추락하면서 레임덕이 시작됐다.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기대와 성취 간의 인내할 수 있는 격차가 커지고, 대통령의 핵심 지지 계층에서 균열과 이탈이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추석 이후 문 대통령 지지도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면서 이런 패턴이 재연될지 주목받고 있다.데일리안·알앤써치가 추석 직후에 실시한 조사(10월 5~6일)에서 문 대통령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42.3%다. 반면, 부정 평가는 53.2%였다. 문 대통령 '핵심 지지층'인 40대에서 긍정 평가는 전주보다 19.6%포인트(p) 급락한 44.6%, 부정 평가는 18.8%p 급등한 51.7%였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아들 군 복무 특혜 의혹, 북한의 공무원 피살 사건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론된다.문재인 정부의 지난 40개월을 회고해 보면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우선, 정부는 정책 실패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줄기차게 야당 탓, 언론 탓을 한다. 가령,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비정규직 보안검색요원의 정규직화로 불공정 논란이 확산되자 보수 언론의 가짜뉴스와 왜곡 보도 탓으로 돌렸다. 정부의 미숙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일자리가 줄어들고 민생 경제가 나빠져도 야당의 정치 공세와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정부의 이런 무책임한 태도는 정책 방향(목적)이 옳으면 그것을 추진하는 방식이 잘못돼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기인한다.둘째,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위선의 모습이 자주 연출됐다. 집권 세력은 줄곧 표현의 자유를 외쳤지만 자신들을 비판하면 고소·고발을 남발했다. 입만 열면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조국 사태에서 보듯이 권력을 이용한 특권과 반칙이 판을 쳤다. 문 대통령은 신임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해놓고 현 정권의 권력형 비리를 수사하자 검찰을 무력화시켰다.셋째,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을 닮아가고 있다. 현 집권 세력은 자신들의 의견이나 가치만 옳다고 주장하고, 국민들을 노골적으로 갈라치기하면서 정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힘에만 의존하는 정치로 야당과의 대화·타협은 실종되었다.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8월 '한국의 리버럴 정권이 내면의 권위주의를 드러내다'는 기사에서 "현 정부가 민주를 표방하면서 권위주의적 통치를 한다"고 비판했다.그렇다면 촛불로 탄생한 자칭 민주주의 정부에서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문 대통령의 독특한 인지 스타일,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학습, 소위 '문빠' 팬덤 정치에 대한 과신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그러나 야당이 야당답지 못한 것이 핵심 이유다. 야당은 분열되고, 무능하고, 비겁해서 2016년 총선 이후 지난 네 번의 전국 선거에서 연패했다. 그런데 야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여전히 친박과 비박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고, 정부 여당에 대해 비판만 하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대안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런 정당에 국민이 어떻게 호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한국갤럽 조사(9월 22~24일)에 따르면, 국민의힘에 '호감이 간다'는 비율은 겨우 25%였다. 18~29세와 30대에서는 그 비율이 각각 15%와 17%에 불과했다. KBS 조사(9월 26~28일)에서는 국민의힘의 쇄신 노력에 대해 '잘하고 있다'는 비율은 38.6%인 반면, 국민 10명 중 6명 이상이 '잘못하고 있다'(39.4%) 또는 '모르겠다'(22.0%)고 했다.집권 세력이 유례없는 야당 복을 타고 났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다. 정부 여당은 호감도 가지 않고 혁신도 제대로 못하는 야당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국민들이 야당보다 가수 나훈아의 말에 더 공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언컨대, 야당이 힘이 있어야 정부 여당이 국민을 두려워하고 함부로 못한다. 보수 야당은 참회하고, 실력을 쌓고, 혁신해야 한다. 그래야만 존재할 수 있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대학 교수(정치학)

2020-10-08 14:18:03

[춘추칼럼] 사람 나이 50쯤이면

[춘추칼럼] 사람 나이 50쯤이면

사람이 나이 50살쯤이면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좀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공자님은 사람의 나이 50을 일러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하셨다. 지천명이라? 공자님 당신께서 50 나이에 이르러 하늘의 명령, 하늘이 뜻을 헤아려 알게 됐다는 말씀이다.글쎄. 보통 인간들도 50쯤 나이가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될까? 어림없는 말씀이시다. 그것은 오직 공자님이니까 그렇게 아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대놓고 자기 나이가 50이 됐으니 지천명의 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망발 가운데 망발이다.나이 50과 관련 지어 또 생각나는 사람은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다. 톨스토이는 50세 이전까지는 아주 자유롭고 호기롭게 산 사람이었다.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누릴 것은 모두 누리며 산 사람이었다. 건강과 돈과 명예와 사랑이 모두 그와 함께 있었다. 모든 일을 가능한 일로 알고 살았던 톨스토이. 그는 50세에 이르러 자신의 인생을 스톱시켜 놓고 회심(回心)의 기회를 갖고 통렬히 반성하고 나서 그 이후의 삶을 완전히 바꿔 살았다 한다. 지금까지 산 인생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 인생이었다면 그 이후의 인생은 남을 위한 인생이었다. 비로소 자기가 쓰고 싶은 작품을 쓰면서 자기가 얻은 재화를 자기가 아닌 타인, 세상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32년. 참으로 장한 인생이고 보통 사람은 꿈꾸기조차 어려운 아름다운 인생이다.인도 사람들은 또 어떻게 인생을 경영했을까? 인도의 힌두교에는 인생 4단계론이 있는데 25세까지를 학습기(學習期), 50세까지는 가주기(家住期), 50세를 넘어 75세까지를 임서기(林棲期), 75세가 넘으면 유랑기(流浪期)라 한다고 한다. 참 특별한 인생 경영이다. 어쨌든 인생살이에서 50살은 매우 중요한 나이이고 계기로 보인다. 50살이 돼 무언가 이전의 삶과 다르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의 보살핌이 있고 신의 도움이 큰 사람, 행운의 사람이라 하겠다.나의 생각은 그렇다. 사람이 비록 50살이 돼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 지어 살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무언가는 좀 다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전의 삶과는 다르게 살아보려는 노력, 자기 삶의 족적을 돌아보고 스스로 반성해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누구나 유소년기에 사람은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가족이 생기고 이웃이 생긴 뒤로는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으로 산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사람으로 사는 삶이다. 그렇게 살아 늙은 사람이 된다. 필경 그가 늙은 사람이 되어 신의 축복을 받고 선택을 입은 사람이라면 그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시간이 허락되리라고 본다. 누군가의 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나, 독립된 한 개체로 살아가는 기간이 열리리라고 본다. 더욱 좋은 축복이 있고 신의 선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기를 위해서 살면서 다시금 타인을 위해서 사는 삶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혼자만의 능력으로 늙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협력 안에서 늙은 사람이 된 것이다.늙은 사람이 된 것도 커다란 은혜 입음이다. 그러므로 갚음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나눔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내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식을 나누고 내가 재능이나 재물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들을 나눠야 한다. 그것만이 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나누게 되면 늙은 사람의 한탄과 고독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늙어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젊은이 흉내를 내는 일이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늙은 사람은 늙은 사람이다. 만족이 있어야 한다. 유지하려고 해야지 확장하려고 해서는 낭패다. 진정 그렇게 사는 것이 늙은 사람의 삶이고 또 그것이 늙은 사람의 명예를 지켜주는 좋은 길이다. 요즘 인생은 60부터다, 70부터다 하는 말은 지나친 억지다. 거짓말이다. 속지 말고 속이지 말 일이다. 나는 70살이 넘어서 조금이라도 타인을 생각하면서 사는 삶을 알게 돼서 매우 기쁘다.

2020-09-17 14:30:00

[춘추칼럼]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법

[춘추칼럼]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법

지금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기차를 타고 '코로나'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중이다. 도착지는 서로 다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암울한 나날이다. 잠시 출구가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어두운 터널이 계속되고 있다. 모든 세대, 모든 공간에서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답답한 심정만 토로할 따름이다. 남아 있는 것은 터널을 달리는 규정 속도와 안전 수칙뿐이다. 기차 객실을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도 쉽지 않고, 최소한의 이동만 가능하다. 객실에서 웃거나 떠들 수도 없고, 음식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긴장감은 높아지고, 감정은 날카롭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설프게 제안하거나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모두의 견제를 받게 된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언제쯤이면 이 터널의 끝을 만날까?' 정도이다. 아무도 알 수 없고 예측 불가능한 질문만 붙잡고 하루하루 살아간다.더 큰 문제는 달리는 기차 안에도 다양한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상황에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누군가는 생존 자체가 위태롭고, 답답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도 있다.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삶의 질적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터널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편차는 커질 수밖에 없다.우리의 상태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우두커니'라는 단어가 아닐까. '우두커니'라는 단어는 사전에 '넋이 나간 듯이 가만히 한자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양'으로 정의되어 있다. 처음에는 외부의 요인에 의해 우두커니 있었다면, 지금은 우두커니 있는 모습이 일상이 되고 말았다. 언제 나올지 모를 출구를 기다리면서 마냥 '우두커니' 있을 것인가. 혹여 지금 지나고 있는 터널의 끝을 만날 수 있겠지만, 만약 또 다른 터널이 그 앞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두커니'라는 단어를 만난 시를 읽어본다."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전문(문학과지성사/1989)대부분의 사람들은 터널의 끝과 출구만 생각하고 기다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는 것은 '후회'뿐이다. 한 게 없으면 추억도 없다. 삶의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지속가능성'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처음 이 개념을 사용한 것은 임업 분야였다. '나무를 베는 만큼 나무를 심는다'는 의미에서 출발한다. 현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는 일은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10년 후, 100년 후, 나아가 1천 년 후를 상상하는 일이다. 지금 모든 것이 멈추고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우리의 삶은 끝을 모르는 터널의 연속이다. 코로나라는 터널이 아니라도 원래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게 삶이다. 시인의 말처럼,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하자'. 우두커니 앉아 있지 말자. 일어나 걷자. 홀로, 같이 걷자. 서로 안부를 묻자. 더 많이 보고, 더 자주 듣고, 더 깊이 생각하자. 누군가는 터널을 탈출해야 가능하다고 말하겠지만 속지 말자. 터널 안이든 밖이든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자. 그 결과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만약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10년 후, 100년 후, 1천 년 후 미래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2020-09-10 14:57:19

[춘추칼럼] '이낙연 정치'로 협치하고 혁신하라

[춘추칼럼] '이낙연 정치'로 협치하고 혁신하라

이낙연 국회의원이 8·29 전당대회에서 60.8%의 압도적 득표로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로 선출되었다. 결국 '어대낙'(어차피 당 대표는 이낙연) 이변은 없었다. 이 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코로나 전쟁 승리, 국민의 삶 지키기, 코로나 이후 미래 준비, 통합의 정치, 혁신 가속화' 등 "5대 명령을 이행하는 데 역량을 쏟아 넣겠다"고 다짐했다. 가장 시급한 건 "코로나19 극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대표에게는 이에 못지않은 중대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무엇보다 '이낙연 독자 정치'를 펼쳐야 한다. 핵심은 대통령과 당·청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공언한 '민주당 정부'는 사라지고 오직 청와대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청와대 정부'만 존재했다. 청와대는 민주당을 수직 통치했고, 민주당은 '청와대 여의도 출장소'로 전락했으며 청와대가 집권당을 통해 국회를 지배하는 정치 적폐가 지속되었다. '엄중 낙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대표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역력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진다. 통상 대통령과의 관계는 크게 일체화, 독자화, 차별화로 구별된다. 이 대표는 현직 대통령과 섣부른 차별화를 했다가 실패한 2002년 새천년민주당 이인제 후보와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이 대표가 6개월 남짓한 임기 동안 대통령과 철저하게 일체화하면서 친문에 얹혀 가려고 한다면 이재명 경기지시와의 경쟁 구도에서 밀릴 수도 있다. 국민들은 '문재인 시즌 2'를 선호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범주류였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일체화되기보다는 독자화 노선을 걸으면서 성공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둘째, 인식의 대전환을 통해 '용기 있는 협치'를 실천해야 한다. 이 대표는 "원칙은 지키면서도 야당에 양보할 것은 양보하는 '원칙 있는 협치'에 나서겠다"고 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친박 일색으로 망한 게 미래통합당인데, 민주당은 친문 일색으로,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칙 있는 협치"란 친문의 눈치를 보면서 야당이 협조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어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 대표가 진정 통합 정치의 물꼬를 트기 위해선 야당과의 '닥치고 협치'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자신의 지지층으로부터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셋째, 시대정신에 맞는 비전과 가치를 제시해 호남과 친문을 넘어 확장성을 확보해야 한다. 역대 대선에서 승리한 후보는 예외 없이 자신이 추구하려는 가치를 통해 '이슈 파워'를 선점했다. 가령, 노무현 후보의 '특권과 차별이 없는 사람 사는 세상', 박근혜 후보의 '원칙과 신뢰' 등이 대표적이다. 김해영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임기를 마치면서 "지도부가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국민께 진솔하게 말씀드려야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문재인 정부와 여권 인사들에 대해 "남에 대한 비판은 잘하면서 남의 비판은 못 참는다"고 지적했다. 현 집권 여당이 안고 있는 거짓과 위선, 무능과 교만의 한계를 극복하고 향후 유력한 대권 후보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선 이 대표가 추구해야 할 핵심 가치로 '정직과 소통'이 바람직할 것 같다. 이를 기반으로 '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넷째, 정책 성과를 통해 혁신의 가속화를 이뤄내야 한다. 집권당이 중심이 되어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효과가 없으면 혁신 성장으로, 수요 억제 중심의 부동산 정책이 집값 폭등의 주범이라면 공급 확대 정책으로, 회전문 인사가 잘못되었으면 대탕평 인사로 기조와 방향을 바꾸어 성과를 내야 한다. 이 대표는 국무총리 시절 정책 세부 영역까지 관장한다고 '이테일'(이낙연+디테일)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의과대학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 정책으로 촉발된 의료계 파업은 국회가 문제 해결에 나서고 협의체를 통해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향후 정책을 추진하는 데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실용과 디테일로 성과를 내야 한다. 이것이 혁신이다.

2020-09-03 15:39:00

[춘추칼럼] 마당을 쓸었습니다

[춘추칼럼] 마당을 쓸었습니다

나는 어려서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로부터 별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학력이라야 고작 고등학교 졸업. 12년 동안 나를 특별하게 귀여워해 줬다든가 사랑해 준 선생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키가 작고 말썽을 부리는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특별히 미움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그저 그런 아이였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데 어른이 돼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한 선생님을 다시 만나고 그분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다름 아닌 김기평 선생님. 그분은 내 고등학교 시절인 공주사범학교 학생 때 국어 선생님이셨던 분이다.1979년 30대 초반의 나이로 공주교육대 부설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부터이다. 그 학교로 내가 갈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의 추천 덕분이다. 선생님은 당시 공주교육대학 교무과장 직책에 있으면서 내가 그 학교로 갈 수 있도록 디딤돌을 놓아주셨다.그로부터 40년 세월이다. 나는 선생님을 지근거리로 만나면서 인생 후반기에 많은 교훈을 얻었다. 먼저 온유한 성품이다. 선생님은 어떤 경우에도 말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든 겸허하게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는 분이었다. 몸에 밴 인품이었다.그다음은 호학(好學)과 성실함이었다. 선생님은 65세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신 뒤 26년 동안 혼자서 공부해 중국의 고전인 사서삼경을 완역해 주해서를 출간하셨다. 인생 후반부의 삶과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란 것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신 실례다.그리고 무욕의 삶이다. 선생님은 식사나 일상생활, 대인관계에도 일말의 사심이 없었고 무엇이든지 줄여서 조그만 인생을 사시려고 애썼다. 그리고 부지런하셨다. 90대에 들어서 시력이 극도로 나빠지신 후에도 선생님은 하루하루 무언가를 하시면서 부지런히 사셨다.어쩌다 선생님 댁을 방문해 보면 무슨 일이든 일을 하고 계신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책을 읽지 못하니까 정원의 꽃들을 살핀다든지 텃밭에 나가 채소를 가꾼다든지 그런 일을 하면서 소일하시는 것을 보았다. 틈이 나시면 몽당비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와 도로를 쓸기도 하셨다.나의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이기도 한 '시'라는 작품을 쓴 것도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감 덕분이다. 대문 밖 도로를 쓰시는 모습이 나에겐 그렇게 잔잔한 감동이었다."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2009년 내가 공주문화원장이 돼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셨을 때 선생님은 흔쾌히 수락하시면서 나의 강력한 후원자가 돼 주셨다. 해마다 1월 초순이면 어김없이 후원금을 들고 원장실로 오신 선생님은 조용히 돈을 놓고 가시면서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당부하시곤 했다. 액수도 적지 않았다. 어느 해는 100만원을 주시고 어느 해는 200만원을 주시기도 했다. 일단 돈을 주셨다면 선생님의 기준은 100만원이셨다. 노인이 연금으로 생활하시면서 어쩜 그렇게 배포가 크신지 번번이 놀라는 바가 있었다.2017년 7월 문화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이임식이 있던 날, 나는 비로소 해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선생님'이 바로 그분임을 말했다. 그 자리에도 선생님은 와 계셨다. 이미 90대 중반의 노인인지라 지팡이에 의지하고서도 따님과 사위 되는 분의 부축을 받고 계셨다.왈칵 눈물이 솟았다. 문화원장에서 물러나는 것이 서러운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보살핌과 사랑이 마음에 와닿아 그랬다. 그로부터 3년. 선생님은 건강이 아주 힘들어지셨고 드디어 100세가 됐다. 놀라운 일이다. 내 생전에 100세 되신 분을 가까이서 뵙다니!비록 나는 정식으로 학교 다니던 시절 학생으로서 선생님들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지는 못한 사람이었지만 학교를 떠나 어른이 돼 살면서 한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인생의 교훈을 얻은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선생님과의 아름다운 인연에 감사한다.

2020-08-20 14:49:29

[춘추칼럼] 내가 살고 싶은 동네

[춘추칼럼] 내가 살고 싶은 동네

코로나와 장마, 부동산과 주식.만약 지금 한국 사회를 표현한다면 이 4개 단어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 단어들이 함축하는 바와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다. 이 단어들을 구분하자면, 코로나와 장마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큰 영역이라고 한다면, 부동산과 주식은 개인의 선택과 관심, 조건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는 영역이다.예를 들어, 코로나 확산을 개인위생과 방역을 통해 어느 정도 막을 수는 있지만 코로나의 발생과 소멸을 인간이 통제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장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520억원짜리 슈퍼컴퓨터를 갖고 있는 기상청을 비난하지만, 사실상 오늘날 기후변화는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가깝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일은 더 자주, 더 강하게 닥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부동산과 주식은 상황이 다르다. 지금 온 나라가 부동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다양한 조건들을 제외하고 보면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욕망의 격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 다양한 생활문화시설 등 인프라를 갖춘 시설, 출퇴근 등 이동이 편리한 교통 환경 등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추구하는 동시대인의 욕망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주식은 또 어떤가. 요즘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주식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물론 주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테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탐욕의 리그가 안타까울 뿐이다. 적절한 노동과 그에 따른 보상,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 등 온전한 삶이 불가능해지고 있다.결국 인간의 삶은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부동산과 주식이라는 영역을 놓고 보면 더 나은 돈과 환경 등 물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욕망의 결과이다. 문제는 '더 나은'이라는 상대적 비교에 그치지 않고 점차 '모든'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필자 역시 어렸을 때는 삶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을 거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 결코 그렇지 않음을,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부추긴다.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그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과연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대단한 지름길이나 확실한 해법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발견하는 일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가 아무리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삶을 꾸려가야 한다. 삶의 대부분을 살아가는 지루한 일상을 건너뛰고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외치면서 우리를 유혹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목소리도 있다.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논리와 힘을 갖고 있다. 그 유혹을 이기는 힘은 오히려 가장 작은 일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동네'에서 가능하다. 동네는 군 단위나 작은 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포함한 모든 지역에 '동네'가 있다.2020년은 문명의 전환을 이야기할 정도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이다. 코로나와 기후 위기만 생각하더라도 삶의 방식 자체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결국 '가치'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가치를 앞자리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학습과 경험 또한 이 문제를 중심으로 펼쳐질 필요가 있다.동네는 그러한 학습과 경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골목에서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어 공동체를 경험한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를 향한 욕망이 생겨날 것이다. 서로의 욕망이 모여 지금까지와 다른 욕망의 길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삶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방법을 찾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을 함께할 수 있는 동네를 만들어가자. 17개 광역시·도가 아니라, 226개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1천 개의 동네, 아니 1만 개의 동네를 만들자.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만들자.

2020-08-13 14:23:28

[춘추칼럼] 찰나의 권력으로 오만에 빠지면 실패한다

[춘추칼럼] 찰나의 권력으로 오만에 빠지면 실패한다

민주국가 의회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30일 계약갱신청구권제와 전월세상한제 도입을 담은 주택임대차보호법을 일방 표결로 통과시켰다.지난 4일에는 세금 인상을 골자로 하는 부동산 3법(소득세·법인세·종부세법)도 표결로 일방 처리했다. 민주당은 국민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법안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회법(제58조)이 규정한 소위원회 법안 심사, 축조 심사, 찬반 토론 같은 절차를 무시했다. 21대 국회는 삼권분립 헌법 정신과 국회법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오로지 청와대 하명에 따라 군사 작전하듯 법안을 밀어붙이는 통법부로 전락했다. 미래통합당은 "입법 독재의 완성"이라고 반발했고, 정의당조차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원의 입법권마저 침해했다"고 비판했다.현재 민주당 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유신 독재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하명을 받아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했던 '유정회'가 떠오른다. 이런 와중에 윤석열 검찰총장의 작심 발언이 주목받고 있다. 그는 신임 검사 신고식에서 "헌법의 핵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발언은 선출된 권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작금의 '신종 독재' 상황을 에둘러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당장 정부 여당에 역풍이 불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지도는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보다 앞서는 데드크로스가 발생했고, 서울 지역에서 민주당 지지도가 통합당에 역전되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향후 정부 여당이 정책 실패에 무감각해지고 국민 공감 능력을 잃는다면 이런 추세는 더 악화될 것이다.5년 단임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 정치에서 경험적으로 입증된 이른바 '집권 4년 차 증후군'이 있다. 절대 권력을 누렸던 역대 대통령들이 집권 4년 차로 접어들면서 예외 없이 국정 운영 리더십에서 큰 위기를 맞이했다. 통상 역대 정부는 집권 초기엔 인사 실패로 휘청거리고 중반에는 정책 실패로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며 임기 말엔 대통령 친인척 및 측근 인사 비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대통령은 '레임 덕'(lame duck)이 아니라 정치적 뇌사 상태에 빠지는 '데드 덕'(dead duck)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현 정부는 작년 조국 장관 임명과 같은 인사 대참사로 도덕적 파탄을 맞이했고, 올해는 총선 압승에도 불구하고 남북 관계 경색,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과 부동산 정책을 둘러싼 논란 등으로 민심이 급격하게 이반되고 있다. 향후 정권 핵심 인사들이 연루된 비리가 터지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현 상황으로 봐서 민주당이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 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 후엔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 간의 충돌로 집권 세력은 깊은 혼돈에 빠져들지 모른다. 임기 말에 관료 사회가 등을 돌리면 권력 누수 현상이 심화되고 결국 현 정부도 역대 정권과 같은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런 실패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정부는 인적 쇄신을 통해 최고 정책 전문가를 등용하고, 새로운 국정 과제의 성과를 도출해야 하며, 야당과의 협치를 강화해야 한다.한국리서치는 매월 정부가 추진하는 12개 정책에 대한 국민 평가를 실시한다. 7월 3주 차 조사 결과, 주거·부동산 정책에 대해 '잘하고 있다'는 긍정 평가는 19%로 가장 낮았다. 정책 중요도 평가에선 일자리∙고용 정책을 최우선으로 꼽은 응답이 58%로 가장 높았다. 그다음으로 사회 안전(47%)과 주거·부동산(45%)이었다. 주거∙부동산 정책은 3월 넷째 주 조사 결과와 비교했을 때 중요도가 10%포인트 증가했다. 주거·부동산을 최우선 과제라고 인식하는 비율이 아주 높은 반면, 긍정 평가가 지극히 낮다는 것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여당은 집값 폭등을 이전 보수 정부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야당과 머리를 맞대고 협치를 통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최고의 부동산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단언컨대, 정부가 정책 실패를 무시하고 찰나의 권력에 도취되어 다수결 폭력이라는 오만함에 빠지면 결국 '집권 4년 차 증후군'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2020-08-06 13:32:38

[춘추칼럼] 회복기의 삶

[춘추칼럼] 회복기의 삶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따분하고 지루하다. 그날이 그날 같고 하나도 신나는 일, 즐거운 일이 없다. 그렇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번 생각을 바꿔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관점과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에머슨이라는 미국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헛되게 불평하면서 보내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었던 내일이다."바로 이것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날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는 날은 오늘뿐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날인가!그래서 나는 오늘은 나의 생애에 남은 날 총량 가운데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새날이고 첫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또 어떤 사람들인가? 그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새날과 첫날에 있어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첫 사람이고 또 새 사람이다.이런 생각 하나만 바꿔도 세상은 갑자기 눈을 뜨는 세상이 되고 눈부신 세상, 찬란한 세상이 된다. 부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루한 세상, 짜증 나는 세상, 누더기같이 낡은 세상이라고 꾸중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만 그런 세상에 살게 되는 것이다.이쯤에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의 말을 인용해 보고 싶다. 보들레르는 시를 이야기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은 회복기에 이른 환자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회복기란 마치 어린 시절로의 회귀와도 같다. … 아이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본다. 그는 언제나 도취해 있다.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아이가 형태와 색채를 흡수하는 기쁨과 가장 닮아 있다."우리도 주변에서 가끔 이와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 암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시라. 그에게 세상은 오직 눈부신 세상이고 새로운 세상이고 아름다운 세상이고 찬란한 세상일 뿐이다. 그에게 있어 무엇 하나 새롭지 않고 감사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그는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는 사람이고 감동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암이란 질병에 걸렸던 것은 분명히 불행이고 악운이고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그 이후의 날들은 축복의 날들이 될 것이다. 실은 나도 그런 일을 겪은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2007년의 일이니까 벌써 13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분명히 죽을병에 걸렸었지만 끝내 살아서 병원을 빠져나왔다.그런 이후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날마다 나는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됐고 사소한 일에도 취한 사람이 됐고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됐다. 보는 것마다 새롭고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그것은 취한 삶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도 취하는 날들이었다.믿지 못하실 것이다. 그냥 그것은 터닝포인트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반전의 인생이었다. 비록 몸은 병들고 왜소해졌으며 많은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지만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충분히 감사하고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겨우 이만큼밖에 남지 않았다고 투정하는 사람에서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진정 인생이 지루하신가? 따분하신가? 아무것에도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시나? 그렇다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져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세상만사 살아가는 기대 수준을 조금쯤 낮출 필요가 있다. 조금쯤 부드럽고 다정한 눈길이 준비되어야 한다.지금 우리는 너무나 외부 지향적이고 타인 지향적이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 사태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그런 경험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일상적인 일, 흔한 일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립게만 느껴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도 한 사람 한 사람 보들레르식으로 말한다면 회복기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부디 자기 자신을 해바라기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때로는 채송화라고 여겨 보시라. 세상이 대번에 달라져 보일 것이다. 큰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채송화는 애당초 키가 작은 꽃이기에 해바라기처럼 넘어지거나 줄기가 부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2020-07-23 15:28:50

[춘추칼럼] ‘문화도시’의 길

[춘추칼럼] ‘문화도시’의 길

'문화도시' 사업 공모 마감이 이달 24일로 다가왔다. 현재 전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문화도시 사업을 준비하면서 과열 양상을 띠고 있다. 2018년 처음 시작된 '문화도시' 사업은 2022년까지 30개 문화도시 선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첫해에는 '예비문화도시'로 지정되고 1년간의 활동을 바탕으로 '법정문화도시'로 최종 선정되면 5년에 걸쳐 최대 200억원(국비와 지방비 매칭 각 50%)이 투입된다. 올해에는 작년 말 법정문화도시로 선정된 7개 지방자치단체(부천·원주·천안·청주·포항·영도(부산)·서귀포)가 사업을 시작했으며, 10개 지자체가 예비문화도시로 추가 선정되었다.그렇다면 전국의 지자체와 지역문화재단이 이처럼 문화도시 사업에 집중하는 것은 왜일까? 일단 법정문화도시로 선정되면 5년이라는 기간 동안 사업 예산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중장기 계획을 가질 수 있다. 열악한 지방 재정을 고려할 때 문화 관련 예산은 항상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 사업은 충분한 매력을 갖는다. 그다음으로 기초생활권 차원에서 문화 영역은 시민들과 직접 대면하는 서비스라는 점에서, 정치인으로서 자치단체장 입장에서 괜찮은 손익 계산이 되기도 한다.마지막으로 지자체의 지역문화재단 설립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현재 전국적으로 약 100개 내외의 지역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있고, 그중 기초문화재단은 설립 과정에서 많은 반대에 부딪히거나 설립 이후에도 재단의 방향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점에서 문화도시 사업은 지역사회에서 재단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셈이다.결론적으로 전국의 모든 지역이 '문화도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다. 그것은 문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궁극의 꿈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진행되고 있는 문화도시 사업에 대해서는 검토와 대안이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과열 양상과 대응에 대해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지나친 경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문체부가 공모 절차나 사업 실행을 더 세밀하고 빡빡하게 만들어가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하고, 그 과정이 잘 드러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업 공모 과정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향식의 일방적 공모 방식이 아니라 상향식 공모의 모델을 고민하는 지점이기도 하다.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지역사회가 작은 공간과 사례, 사람이 얽히고설킨 곳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사업으로만 접근하면 갈등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프로그램 사례는 민관 영역의 다양한 주체들이 이미 많은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공간과 주체와 사례들을 어떻게 지역문화예술생태계 차원에서 연결하고 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역사와 문화 자원이 이야기가 되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콘텐츠로 생산될 수 있어야 하고,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위해 잠시 지역에 머무르는 이들이 아니라 지역문화 활동의 실질적인 주체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문화도시의 성과라 할 수 있다.이 과정에서 나쁜 사례는 걸러야 한다. 지역사회 네트워크는 무시한 채 공공기관 중심으로 '문화도시'를 주도하거나, 외부 전문가 중심의 문화도시 사업을 상정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애초에 지속 가능한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문화도시 사업의 목표와도 맞지 않는다.'문화도시'는 '예술도시'와 다르다. 문화도시는 도시의 체질이 '문화적으로' 바뀔 때 가능하다. 지역 축제가 늘어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대형 공연장이 들어선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문화도시는 목표선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그것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담고, 다양한 역사와 문화로 축적된 시간의 켜들이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유산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2020-07-16 16:06:40

[춘추칼럼]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춘추칼럼]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 국정 운영 지지도가 크게 요동치고 있다. 한국갤럽의 7월 1주 차( 6월 30일~7월 2일) 조사에 따르면, 문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한다'는 긍정 평가는 50%였다. 5월 1주 차(71%)와 비교해 두 달 만에 지지율이 무려 21%포인트 하락했다. 지난 총선의 총유권자 수가 4천400만 명인데, 숫자로만 보면 무려 1천100만 명 이상이 이탈한 셈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화 논란, 북한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한 대북 관계 악화, 6·17 부동산 대책 실패,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격돌 등 악재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러나 근원적인 요인은 총선 압승 이후 드러난 정부 여당의 '견제받지 않는 권력' 때문이다.최근 대통령 한마디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행정 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대통령의 하명에 역대 최대 규모의 35조원 추경 예산이 국회에서 5일 심사 만에 처리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법무부 장관과 여당이 정권 비리를 수사하고 있는 검찰총장을 압박해 사퇴시키려고 하는 것도 실상 절제되지 않는 권력이 몰고 온 기현상이다. 이렇다 보니 "모든 권력이 국민이 아닌 문재인으로부터 나온다"는 '문주주의'(文主主義)라는 신조어마저 등장하고 있다. 통상 견제받지 않는 권력에 도취된 정부는 정책 실패에 무감각해지고, 자신들의 무능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의 탓만 한다.가령, 부동산 대책 실패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토부 장관은 "지금까지 정책은 다 종합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책임을 회피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회가 오랜 기간에 걸쳐 쌓아온 규범과 관행이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있다. 제16대 국회(2004년)부터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야당에 주었던 법사위원장을 여당이 차지했다. 제13대(1988년) 국회부터 의석 비율대로 여야가 상임위원장을 나눠 가지던 협치의 전통마저 깨지고 여당이 17개 국회 상임위원장을 독식했다. 여하튼 민주화 세력을 자부하는 정부 여당이 '제도적 자제와 상호 존중'의 규범을 무시하면서 '일당 독재'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효율적이고 건강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권력은 스스로 견제받아야 한다. 야당, 언론, 시민단체, 지식인, 그리고 시민들에 의해 권력이 무차별적으로 견제받아야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성숙한다.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은 어떠한가? 보수가 몰락하면서 야당은 무기력해졌고, 일부 언론은 '진실 보도'를 외면한 채 정치적·정파적·이념적으로 이용되는 소재에만 치중하고 있다. 권력을 감시해야 할 시민단체(NGO)가 정치권력 비판의 칼을 내팽개치고 정치권 진입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오히려 권력화되고 있다. 양식 있는 지식인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는 가운데 '어용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몰염치한 인간이 활개를 치고 있다. 촛불 혁명 이후 시민들의 능동적, 자발적 참여는 늘어나고 있다. 깨어 있는 시민의 힘이 코로나19 재난 극복의 견인차 역할도 했다. 그러나, 최근엔 팬덤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일명 문빠로 불리는 열성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은 진영 내 어떠한 이견과 비판도 허용하지 않으며 정부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내면 적폐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다.이런 기형적인 상황에서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는 없다. 한국리서치는 '국정 방향 공감도'를 격주로 발표하고 있다. 지난 5월 1주 차 조사에서 "우리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응답은 54%로 '올바르게 가고 있지 않다'(32%)보다 12%포인트 많았다. 그러나 7월 1주 차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43% 대 44%로 역전되었다. 더구나, 16개 정책별 긍정 평가가 대통령 국정 운영 평가보다 훨씬 낮았다. 주거·부동산 긍정 평가는 25%에 불과했다. 이것은 현 정부의 정책 능력이 아주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책 실패로 인한 성난 민심을 잡으려면 정부 여당엔 지금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점이다. 더욱 겸손한 자세로 권력을 제도적으로 자제하고 최고의 전문가를 등용해서 정책 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분명 겸손과 유능이 최상의 정책이다.

2020-07-09 15:44:15

[춘추칼럼] 코로나 이후

[춘추칼럼] 코로나 이후

세상살이가 많이 달라졌다. 몇십 년은 뒤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적막하다. 길거리 자동차들이 많이 줄었다. 당연히 행인들도 줄었다. 어쩐지 그것이 딴 세상에 온 듯 낯설고 서툴다. 공주와 서울을 오가는 버스의 횟수가 줄었다. 배차 간격이 떠서 많이 기다려야 한다.공주 시외버스 터미널의 표지판을 보았더니 인천공항행 버스 시간표 위에 까만 표시가 모두 붙어 있다. 공항버스 운행을 전면 중단했다는 증거다. 그것은 또 공항에서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는 얘기다.가치관이 바뀌었다. 이전에 가치 있는 것들이 가치가 없어지고 예전에 가치 없던 것들이 다시금 가치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대단위로 무슨 일인가를 하는 일부터 불가능하다. 무조건 사람 많은 데는 피하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제는 혼자서 하는 일들이 가치 있는 일이 되었다.비대면, 비접촉,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는 길이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는 혼자서 무슨 일인가를 하면서 사는 연습을 해야만 하겠다. 코로나 사태를 건너오면서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도 절실히 학습해야만 했다. 인생이 외롭고 쓸쓸한데 더욱 인생이 외롭고 쓸쓸하게 되었다.이렇게 오프라인의 삶이 위축된 데 비하여 여전히 작동하는 것은 온라인의 삶이다. 절대적인 단절과 고독과 속박의 시대에 온라인마저 막혔다면 어쨌을까? 사람들은 걱정하고 또, 안도한다. 그런대로 답답증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온라인의 역할이 컸다. 어쩌면 앞으로는 이 온라인의 영향이 더욱 증대되겠지 싶다.내가 주로 만나거나 소통하는 사람들은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 한 분과 이야기하다가 조용히 놀란 일이 있다. 그분은 출판사 대표인데 코로나 사태 속에서 자기네 출판사에서는 매일같이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코로나 이전보다 책의 매출이 더 늘었다는 것이다.무슨 일로? 문제는 책의 종류다. 그분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은 대부분 생활실용서인데 그 가운데서도 꽃 기르기, 실내 화단 꾸미기, 반려동물 돌보기와 같은 책들이 그렇게 잘 나가더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달 실내에 갇혀서 사는 동안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한 것은 아이들과 함께 종이접기나 종이 오리기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그러니까 디지털과 어울린 아날로그의 삶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 방식은 디지털이되 그 내용은 아날로그로 가야 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코로나 이후의 우리네 삶의 새로운 국면이요 피하기 어려운 한 방향이 아닌가 싶다.이런 시기를 맞이하여 시 쓰는 한 사람으로서 생각해 본다. 비대면 비접촉이 강화되다 보면 인간은 더욱 고립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고독감, 소외감, 우울감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이런 때 필요한 것은 마음을 다스려 주는 그 무엇일 것이다. 울퉁불퉁해지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고 쓰다듬는 그 어떤 심리적 작용일 것이다.그것이 그러할 때,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 시라는 문학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인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문장 형식이다. 산문이 작정하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쓰는 글이라면 시는 작정 없이 언뜻 떠오르는 감정을 급하게 쓰는 글이다.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문장이라 하겠다.그러므로 좋은 시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격한 마음을 다스려 준다. 말하자면 마음의 묘약인 셈이다. 만약에 시가 그런 역할을 감당하기만 한다면 시를 읽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히 나의 책은 변함없이 팔렸다. 물론 오프라인 서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라인 주문을 통해서였다.코로나 시대. 코로나 이후 시대. 활기차게 자유롭게 살았던 어제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시대. 정작 그것이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평안해야 한다. 마음의 평안이 행복의 기초다. 그렇게 소중한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시인들은 더욱 정성껏 시를 써야 하겠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고 또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다.

2020-06-25 15:30:00

[춘추칼럼]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다른 세 가지

[춘추칼럼]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다른 세 가지

지난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를 맞이했다. 현 집권 세력은 입만 열면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한다. 이 정신의 핵심은 "사회적 약자 곁에 함께 있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꿈꾼 것은 '사람 사는 세상'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었다.그런데 최근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펼치는 언행을 보면 '껍데기 노무현 정신'이 판을 치고 있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족 비리와 '감찰 무마' 의혹 등 혐의로 기소된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했다. 조 전 장관 아들에게 허위 인턴 증명서를 발급해 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최강욱 국회의원에게는 축하 전화를 걸어 "권력기관 개혁에 대한 역할"을 당부했다.평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각별했던 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국회의원이 정의기억연대 운영에 참여하면서 불거진 각종 논란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최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이라도 만들라"고 엄포를 놓자 정부는 4시간 만에 "법을 만들겠다"고 기민하게 대응했다.보수가 몰락하고 총선 압승으로 여권이 권력에 도취되어 상식 밖의 '친문 사는 세상' '특권과 차별이 있는 세상'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씁쓸하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국회법에도 없는 '4+1 연대'를 통해 제1야당을 배제한 채 누더기 선거법인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관철시켰다. 그 후에 각종 꼼수와 편법으로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만들고 총선 후에 통합했다. 민주당은 총선에서 전례 없는 압승을 거두었지만 노 전 대통령이 평소 가장 싫어했던 '원칙 없는 승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여 세력은 종종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 2기'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노·문 정부의 뿌리는 같지만 정치 열매는 전혀 다르다.첫째, 노무현 정부는 '실용적 진보'를 표방한 반면, 문재인 정부는 '교조적 진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진보 세력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자"라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관철시켰다. 이라크 파병과 제주 해군 기지 건설도 밀어붙였다. 이 모든 것이 이념을 넘어 국익을 위한 실용적 행보였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친문과 운동권 세력을 중심으로 이념 과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주류 세력 교체와 체제 변혁을 핵심 목표로 삼으면서 '토착 왜구' 등 이념으로 가득 찬 구호만 난무했다.둘째, 노무현 정부에서는 '협치 실천'이 돋보인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협치 절벽'이 지배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4월 사학법 개정으로 정국이 경색되자 청와대로 초대한 여당 원내대표에게 "야당 원내대표 하기 힘든데 양보 좀 하시죠"라면서 통 큰 정치를 주문했다. 2005년 8월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권력을 통째로 내놓겠다"고도 했다. 177석의 슈퍼 여당인 민주당은 53년 만에 21대 국회를 사실상 단독 개원했고, 그동안 야당 몫으로 지정된 국회 법사위원장마저 차지하겠다면서 원 구성을 지연시켰다. 힘없는 야당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여당이 양보하는 것이 상식이다. 야당을 적폐 세력으로 몰아가고 진영 논리에 갇혀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면 협치와 공존의 정치는 불가능해진다.셋째, 노 전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핵심 원리로 당·정 분리를 강조했다. 따라서 청와대와 집권당 간에 수평적인 관계가 구축되면서 겸손한 권력이 만들어졌다.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당·정 일치가 강조되면서 청와대가 집권당을 수직·통치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심지어 여당 지도부는 강제 당론을 통해 의원들을 거수기로 만들고 있다. 정당 민주화는 퇴보하고 오만한 권력이 꿈틀거리고 있다. 정부 여당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코로나 국난 극복의 생산적 정치를 위해 '실용 강화 원칙과 상식' '행동하는 협치' '당정 분리'라는 '노무현 국정 운영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언컨대, 국정 안정은 국회 의석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집권 세력의 제도적 자제와 관용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2020-06-11 15:21:58

[춘추칼럼] 하얀 제비꽃

[춘추칼럼] 하얀 제비꽃

모처럼 데레사 수녀님이 공주에 왔다는 전갈에 서둘러 외부 일정을 마치고 루치아의 뜰로 갔다. 루치아의 뜰은 공주의 옛 거리에 있는 찻집으로 오래된 한옥 하나를 고쳐서 만든 찻집이다. 공주 바닥 사람들에게보다는 외부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잘 알려진 찻집이다.왜 루치아의 집인가 하면 찻집 주인의 세례명이 루치아이기 때문이다. 짐작하시겠지만 루치아는 천주교 신자. 그래서 찻집 이름도 '루치아의 뜰'인데 이 집에는 그런 연고로 바깥에서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자주 찾아오신다.내가 찻집에 들어섰을 때 수녀님 세 분과 운전을 맡은 남자 한 분이 루치아 내외와 함께 있었다. 데레사 수녀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안의 수녀님이다. 마치 동화 나라에서 등불 하나를 들고 이 세상으로 나왔다가 다시 이 세상의 등불로 바꿔 들고 동화 나라로 돌아가는 아이와 같다.그렇구나. 데레사 수녀님에게는 우리 공주가 동화 나라일 수도 있겠고 또 다른 세상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기에 그렇게 수녀님은 수녀원에서 짬만 생기면 공주를 찾는 것이고 또 루치아의 뜰과 우리 풀꽃문학관을 방문하는 것이겠구나.들어 보니 수녀님 일행은 이미 풀꽃문학관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러나 마침 월요일이라 직원이 출근하지 않았으므로 문학관 안은 들어가 보지 못하고 집 둘레와 꽃밭만 보았노라 한다. 그런데 일행 가운데 나이가 좀 드신 수녀님이 문학관의 꽃밭에서 제비꽃 사진을 여러 장 찍었노란다.알고 보니 그 수녀님이 데레사 수녀님이 머물고 있는 수녀원의 원장 수녀님. "수녀님, 왜 제비꽃 사진을 찍으셨어요? 다른 꽃들도 많은데." "네, 보통 제비꽃은 보랏빛인데 문학관의 제비꽃은 하얀 색깔이더라구요. 그래서 찍었어요."그러하다. 우리 문학관에는 하얀 제비꽃이 있다. 있더라도 아주 많이 있다. 본래 문학관에는 하얀 제비꽃이 없었는데 문학관 관장 일을 보는 조동수 선생이 다른 데서 캐다가 심어서 하얀 제비꽃이 살고 있다. 심더라도 아주 많이 심었다. 문학관 둘레 마당과 담장 아래에 촘촘히 가득 심었다.그걸 또 야생화 연구가인 백승숙 여사가 와서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원장님, 이 제비꽃 이렇게 많이 심으면 안 돼요. 이 녀석들 번식력이 강해서 나중에는 아예 제비꽃 밭이 됩니다." 그래서 꽃을 심어 준 조동수 선생의 눈치를 살피며 제비꽃들을 대충 뽑아냈다.결국은 지금 문학관 뜨락에 피어 있는 모든 하얀 제비꽃들은 그때 조동수 선생이 심었는데 뽑지 않은 몇 그루 제비꽃들의 후손이다. 말하자면 조동수 선생의 제비꽃인 셈이다. 그래서 나도 더러는 그 꽃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둔다.그러면 왜 조동수 선생은 그렇게도 많은 제비꽃을 캐다가 문학관 뜰에 심었을까?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조동수 선생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이미 오래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한 분밖에 남아 있지 않던 육친마저 돌아가신 것이다.젊은 나이이고 집안 대소가도 많지 않아 두서없이 간소하게 어머님 상을 치렀다 한다. 적적하게 어머니 상여 뒤를 따라가면서 둘러보니 자기의 슬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더란다. 그때 문득 눈에 들어온 꽃이 길가에 피어 있는 하얀 제비꽃이었다는 것이다. '그래, 내 슬픔을 알아주는 것은 너뿐이구나.' 그런 뒤로 조동수 선생에게 하얀 제비꽃은 어머님의 꽃이 되었고 어머님을 생각하는 꽃이 되었단다. 그러니 어찌 내가 문학관 뜰에 심은 하얀 제비꽃을 깡그리 뽑아낼 수 있었겠나. 몇 그루라도 하얀 제비꽃을 그냥 놔두기를 잘했다 싶다.이런 조동수 선생의 마음이 해마다 하얀 제비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하얀 제비꽃이 조동수 선생의 어머니이고 조동수 선생의 마음이다. 이것을 원장 수녀님이 느끼시고 영혼의 손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래서 수녀님은 다른 예쁜 꽃들, 화려하고 큰 꽃들을 제치고 초라하고도 작은 하얀 제비꽃을 사진기에 담으신 것이리라.그러고 보면 또 수녀님 마음이 하얀 제비꽃의 마음이고 조동수 선생의 마음이고 또 조동수 선생 모친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세상의 일들은 참으로 깊고도 멀고도 아득하다. 유정하다. 서럽도록 아름답다. 노을 속으로 꽃잎을 싣고 가는 저녁 강물 하나를 본다.

2020-05-28 16:30:00

[춘추칼럼] 한 사람의 힘

[춘추칼럼] 한 사람의 힘

이탈리아 작가 파올로 조르다노는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2020)라는 책에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전염병은 어쩌면 지금 꼭 필요한 '생각으로의 초대'일지도 모른다. 유예된 활동, 격리된 시간들은 그 초대에 응할 기회이다.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고? 우리는 단지 인간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 섬세하고 숭고한 생태계에서 우리야말로 가장 침략적인 종이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어떻게 되돌아가고 싶은지 등을 생각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서 "이 모든 고통이 헛되이 흘러가게 놔두지 말자"고 말한다.정확한 지적이다. 이 '전염의 시대'에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거나 쓸모없는 생각을 한다. 그저 매일 업데이트되는 정보를 보면서 불안과 안도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할 뿐이다. 그리고 불안을 야기하는 바이러스 확산 주범을 찾아 분노하고 비난한다. 그런가 하면 알 수 없고 어찌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 빠져 있기도 한다. 사람들은, 언제쯤이면 상황이 나아질 것인지,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묻는다. 하지만 묻는 이들도 알고 있다. 여기에 정확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그저 서로에게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잠시나마 불안을 떨쳐보려고 애쓸 뿐이다. 수많은 예측은 빗나가고, 막연한 희망은 무너진다. 상황이 바뀌는 것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일상으로의 복귀가 지연될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다시 제자리에 서 있다. 이 지연과 반복을 견디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이다.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상황의 한복판에서 그나마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건너가고 있는 이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고, 여기까지 이르게 된 인류의 삶을 생각하고, 언젠가 종식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상황 이후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으면서 국가의 역할과 정체성, 기본소득의 필요성, 수많은 방역과 검사와 역학조사, 진료 등을 통해 지방정부와 공공의료에 대해 생각한다. 일상의 변화에 따라 삶과 인생, 가족, 공동체, 생태환경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한다.그중에서도 '감염'과 '전염'의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해본다. 언론에 보도된 '학원강사발 코로나19 감염 확산'이라는 감염 경로는 '한 사람'이 어디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일터와 삶터를 통해 만나는 타인에게 일종의 '감염'이 진행되고, 감염된 주체는 또 다른 타인을 감염시킨다. 이렇게 반복되는 감염이 결국 전염으로 이어지는 것이다.모든 전염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한 사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생명'이 귀하다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전염병 대란이 고작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한 사람은 대구 신천지 신도나 인천 학원강사의 사례처럼 부정적인 사례인 것은 맞지만, 역설적으로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생각해보면 다른 상상이 가능하다. 바이러스 감염의 주범으로서 한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회적 가치들을 감염시키고 확산시키는 '한 사람'을 상상하는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힘'을 생각하자는 말이다. 이때 '힘'은 일방적인 권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효과'에 가까울 것이다. 한 사람이 무제한적인 힘을 행사함으로써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조와 관계, 우연성, 상호성 등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것이다. 한 사람이 의도하거나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시작점을 찍는 행위에 가깝다. '한 사람'은 악하고 부정적인 것의 숙주가 될 수도 있지만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나누는 최소이자 최선의 단위이다.그 '한 사람의 힘'을 주목해보자. 내가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 동물, 풍경에 보내는 눈빛과 몸짓, 말이 모여 그 사람이 감염되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또 다른 사람을 감염시킨다고 상상해보자.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라 공존과 협력, 연대와 희망, 우정과 환대, 공감과 위로, 감동과 찬사를 전파하고 전염시키자.

2020-05-21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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