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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대구시 청년정책과장

[광장] 새해에는 '꼰대 탈출' 합시다

인터넷에서 '꼰대'라고 검색하면, '꼰대 테스트', '꼰대 6하원칙' 등 젊은이들이 '꼰대'를 풍자한 글과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만큼 '꼰대'는 이미 '꼰대 문화'로 우리 생활 속에 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꼰대'는 '늙은이'를 뜻하는 은어 혹은 학생들이 '선생님'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청년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는 현대적 의미의 '꼰대'는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을 근거 없이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이다. "나는 꼰대가 아냐!"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꼰대 테스트'를 먼저 추천한다.청년들에게 '꼰대 문화'는 직장을 떠나게 하고, 도시를 떠나게 하는 청년들이 탈출하고 싶은 갑갑한 문화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대졸 신입사원이 입사 후 1년 이내 퇴직하는 비율은 2012년 23.6%였던 것이 2014년 25.2%, 2016년 27.7%로 꾸준히 늘고 있다. 어렵게 입사하고도 4명 중 1명이 1년 안에 회사를 떠난다. 힘들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조직이나 일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해 가장 많았다.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기업 문화로 인한 이직이나 퇴사가 53.9%로 나타났는데, 남성보다 여성, 직급이 낮은 사람일수록 비율이 높았다.이미 기업에서는 '꼰대 문화'를 '꼰대 비용'으로 인식하고 있다. '꼰대'는 사고의 경직성으로 인한 조직의 비효율을 발생시키고, 공감력 부족으로 인한 조직원의 몰입 저하와 이탈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또 업무의 자율성을 저하시켜 직장인 10명 중 4명이 회사에 대한 소속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도시의 '꼰대 문화'는 청년이 떠나는 도시를 만든다.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화를 성취한 기성세대의 눈에는 청년세대가 나약하게만 보인다. "우리 때는 말이야…,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어서…"라며 기성세대가 왕년을 이야기할 때, 청년은 미래를 말한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청년세대와 소통이 불가능한 꼰대세대가 되었다. 꼰대들의 조직 문화는 많은 젊은이들이 보수적인 대구의 직장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도시를 떠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2016년 대구청년실태조사에 의하면, '좋은 취업 기회를 얻기 위해서(43.0%)'뿐만 아니라, 보수적폐쇄적인 지역 분위기(19.4%)도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는 주요한 이유로 나타났다. 그만큼 '꼰대 문화'가 강하단 말이다.지난 11월, 대구경실련에서 흥미로운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른바 '꼰대 탈출 프로젝트'다. 청년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청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는 취지였다. 많은 기성세대 참석자들이 처음에는 '꼰대 문화' 지적에 약간의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때와 태도'가 중요함에 공감하게 됐다. 토론시간 이후에는 세대 간 '시간과 경험의 격차'를 인식하면서 우선 자신의 자녀부터 새로운 자세로 대해보겠다는 이들도 많았다.'꼰대 탈출'은 떠나는 청년을 위해서도, 외로운 기성세대를 위해서도, 우리 도시의 역동성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청년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새해에는 '꼰대 탈출'에 함께 동참해보자. 2019년 새해, '꼰대 탈출' 준비되셨습니까?

2019-01-18 20:19:10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광장] 현재, 과거의 지배자

우리 아파트의 승강기는 느려서 17층까지 43초가 걸린다. 관리실에서 주민들을 위해 승강기에 좋은 글귀를 붙이곤 한다. 한번은 "세상에서 제일 비싼 금(金)은?"이라는 퀴즈를 붙여 놓았었다. '황금' '백금' 등을 생각하며 답을 보니 '지금'이다. 지금(只今)의 '今'을 '金'으로 바꿔치기한 솜씨가 놀랍다. 지나간 과거나 불확실한 미래보다 현재가 더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현재 중심의 이러한 관(觀)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 잘 반영되어 있다. 빅 브라더(Big Brother)가 지배하는 당의 슬로건인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말 속에 잘 압축되어 있다. 여기서 '지배한다'는 말은 '조절·조작한다'(control)는 말을 의역한 것인데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조절'조작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기록국 직원이다. 빅 브라더가 공언한 약속이 실현되지 못했을 때 약속을 했던 과거의 기록(신문, 서적, 사진 등)을 모조리 찾아 과거의 약속과 현재가 일치하도록 조작하는 것이 임무이다.가령 내년도 초콜릿 배급량을 줄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해가 바뀌고 4월쯤에 30그램을 20그램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고 치자. 그러면 '줄이지 않겠다'는 작년의 기록을 모두 찾아 '내년 4월경엔 배급량을 20그램으로 줄인다'라고 조작하여 과거를 현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빅 브라더는 공약을 완벽하게 지켜내는 지도자로 우상화된다.비슷한 맥락에서 황보영조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기억의 정치와 역사'에서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고, 그 기억마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바뀌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보면 역사 바로 세우기와 역사 조작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현재 권력이 완벽한 도덕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조작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에 황보 교수의 지적은 긴 여운을 남긴다.이처럼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미화 또는 폄하할 수도 있다는 것은 문제다. 미화나 폄하의 대상이 개인의 주관적인 호불호에 따라 달라지고 개인의 호불호는 개인의 이념, 출신 지역 및 계층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이념, 지역 및 계층 간에 생각의 편차가 큰 편이라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우호적인 사람이나 단체의 과(過)는 무조건 감싸며 편들고 공(功)은 역사적인 업적이라며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적대적인 사람이나 단체의 공은 무조건 깎아내리고 과는 부풀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무조건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 문제다.새해는 왔고 무술년은 기억 공간에 저장되었다. 과거를 재단할 수 있는 힘을 현재가 지녔지만 현재도 곧 과거가 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현재를 사는 우리는 현재가 과거가 된 후 그때의 현재도 우리를 재평가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념, 지역 및 계층에 바탕을 둔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어떤 것을 미화하거나 폄하하는 일이 새해엔 없길 바란다. 잘하는 정책엔 박수를 보내고 잘못하는 정책엔 회초리를 드는 객관적 대한민국 시민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2019-01-11 06:30:00

김계희 그림책 화가

[광장] 사랑이 커리큘럼이다

오래전 아이들을 가르칠 때 미술학원을 개원하려는 친구들이 커리큘럼에 관해 자주 묻곤 했다. 그럴 때 나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교수법이니 커리큘럼이니 하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을 진실로 사랑하면 그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고 모든 언어와 행동이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해 나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수업 방식은 사라지고 그 아이에게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교수법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그게 아니라면 모든 계획과 수업법은 그저 커리큘럼을 채우는 수많은 답습에 불과해진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사랑이 처음인 남자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방법이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사랑 속에서 저절로 방법이 나오는 것이다. 서툰 솜씨의 화살이라도 진정한 사랑에서 쏘아 올린 화살은 정확히 심장에 가서 꽂힌다. 그러니 나의 말이, 나의 칭찬이, 나의 방법이 이 아이의 심장에 닿고 있는가에 대한 매 순간의 인식이 필요하다.사랑은 물이 끓는 온도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비등점에 도달하지 못하면 감동을 줄 수 없고 상대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많은 교육이 참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못해 우리는 아이들에게 헛된 노력을 강요하며 소중한 시간을 소모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우리는 과연 아이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많은 부분 그렇지 않을 수 있다.아이가 공모전에 나가기 위해 선생님이 구성한 그림이나 공모전 입상작을 조합해 몇 번씩 따라 그리고 그것으로 상을 받아올 때 부모가 기뻐한다면 그것은 아이들에게 거짓과 불명예를 가르치는 것이다.많은 어머니가 말한다. "아니라는 건 알지만 아이가 좋아하니 그냥 두었어요."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그것은 불명예스러운 상이라고 왜 말하지 못하는가? 이 단적인 예를 보더라도 우리는 아이를 참사랑으로 기르고 있지 못한 부분이 많다.자부심과 명예가 무엇이며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쳐야 할 어른들이 불명예를 가르치는 일에 공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자라 다시 교육을 하고 사업을 하고 정치를 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교육이 바뀌어야 하고 교육이 바뀌려면 사랑을 찾아야 한다.코엘료의 '오자히르'에는 단테의 신곡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인간이 진실한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는 날, 잘 짜여 있던 모든 것은 혼란에 빠지고 확고한 진실로 여겨졌던 것들은 모두 뒤흔들릴 것입니다. 인간이 사랑하는 법에 눈뜰 때, 비로소 참된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사랑을 안다고 생각하면서 살겠지만, 사랑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용기는 갖지 못할 겁니다."우리는 탐욕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짓의 삶을 생산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진실로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면 그들의 미래와 삶을 염려하게 되고, 지금 하고 있는 많은 방식이 틀렸음을 알게 될 것이다.단테가 지적한 바대로 우리가 진실로 사랑할 때 확고한 진실로 여겼던 모든 것들이 거짓의 실체를 드러내며 뒤흔들릴 것이고, 교육은 바뀔 것이고,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우리의 비정상은 정상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2019-01-03 14:03:51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광장]回(돌아올 회)

어영부영 많은 시간이 지났다. 앞마당 채마밭엔 뭐가 자라고 있었는지, 뒤꼍 앵두나무 옆에는 김장독이 몇 개나 묻혀 있었는지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마루 밑에는 감 따는 장대(전짓대) 말고 또 뭐를 쟁여두었는지도 역시 세월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다만 그 겹겹의 시간에도 한 가지, 반질반질 윤기 나던 툇마루만큼은 여전히 또렷하다. 하루 한 번씩 꼬박꼬박 햇살이 찾아와 쉬고 가던 그곳은 네댓 살 남자아이에겐 무척 특별한 공간이었다. 어른들이 없을 때, 거기에선 요새가 생겨나고 진지도 만들어졌다. 섬돌 위 난간 따라 곧게 뻗은 찻길도 있었는데 트럭이 아슬아슬 잘도 달렸다.어느 가을날이었다. 마당 건너 신문지 조각 하나가 바람을 타고 툇마루로 날아들었다. 그걸 주워든 아이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엄마를 찾았다. "엄마 이것도 글자가? 네모 안에 네모가 있다." "아 이거 한문이다. 돌아올 회자다." "돌아올 회?, 뱅글뱅글 돌 거면 동그라미를 하지 와 네모를 하노?"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툇마루로 돌아오다 생각을 했다. "우리 엄마는 참 모르는 게 없다니까!"그게 아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물음이었다. 그리고 '回'(회)자는 태어나 알게 된 첫 번째 한자였다. 그 후로도 아이는 궁금한 게 생길 때면 엄마를 찾았고 그때마다 답을 얻었다. 그런데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난 엄마가 낳고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낳고 그렇게 계속 올라가면 시작은 누구며 그 사람은 또 누가 낳았느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엄마는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다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물어보라고 했다. 아이의 마음 가득 섭섭함이 일었다. 엄마가 모를 리 없는데 알면서도 안 가르쳐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생님께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곧 잊었다. 어차피 학교에 가면 알아야 할 것들과 외워야 할 것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학년이 올라갈수록 엄마에게 묻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대신 가끔 옛날이야기, 정확히는 옛날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몇 백 년 전의 조선 사람부터 더 멀리 삼국시대의 사람들까지, 그리고 가깝게는 조봉암과 해공 신익희를 들었고 시인 한하운도 이야기로 들었다. 그런데 이야기들이 재미있긴 했어도 궁금한 게 단박에 풀렸을 때처럼 그런 알싸한 맛은 없었다. 게다가 엄마의 이야기는 크게 실익이 없었다. 그런 건 학교 숙제에도 시험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돌아보면 그때, 세상이 참 조용했다. 매미가 잠시 울음을 멈추면 적막한 여름소리가 들렸다. 겨울에도 눈 내리는 날이면 이불 속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도 늘 그대로였다. 길가의 풀꽃도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피었고 돌담 사이 구멍도 더 커지거나 줄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 몰랐던 거다.엄마는 영원할 줄 알았다. 더는 물을 수 없는 날이, 더는 들을 수 없는 때가 올 줄 몰랐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어른이 된 아이는 엄마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땐 아주 천천히 왔던 연말이 이젠 순식간에 돌아온다. 새해도 많이 새롭지 않다. 대신 이맘때가 되면, 아무도 없을 때면 가끔 혼잣말을 한다. '돌아올 回(회)'자처럼, 햇살 들던 그 툇마루도 좋고 아니라도 좋으니 '엄마, 언젠간 어디서든 우리 꼭 다시 만납시다'.

2018-12-26 14:21:50

하응백 문학평론가

[광장]대충 살자

1960년대 이후 우리는 '하면 된다'는 신화에 사로잡혀 살았다. 식민지 시대의 패배 의식과 전쟁의 상처와 절대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신 무장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앞장서서 국민정신 개조에 나섰고, 정주영 같은 기업인은 맨땅에 조선소를 건설하는 등의 추진력을 보임으로써 '하면 된다'가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려 했다. 그런 '하면 된다'의 정신은 사회적 화두로 등장해, 군대·기업·학교·가정 등 사회의 전 분야에 침투해 주류 이데올로기로 형성되었다. 군대에서는 '까라면 깐다'라는 이른바 'KK정신'으로 미화되기조차 했다.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과 2002한일 월드컵에서 놀랄 만한 성적을 올리면서 '하면 된다'는 정신은 한국인들에게 더욱 내재화된 것으로 보인다. 86아시안게임에서 가냘픈 소녀 임춘애는 중거리 육상 800m, 1500m, 3000m 세 종목을 석권하면서 '하면 된다' 정신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이 소녀는 당시 '라면 먹으면서 운동' 했다고 해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라면을 먹고도 세 종목을 석권한 것은 '하면 된다'는 불굴의 정신이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어 가능했다는 믿음이, 온 국민에게 종교처럼 퍼져 있던 시절이었다. 임춘애가 훗날 "코치 사모님이 간식으로 라면을 끓여 주셨다"가 한 언론사에 의해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고요"로 둔갑한 것은, '하면 된다'는 신화에 온 국민이 얼마나 몰두하고 있었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그러나 세상에는 해도 안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레슬링 선수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발레리노가 되기 어려운 것처럼, 애초에 안 되는 일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한 개인으로 보자면 안 되는 일은 수없이 많다. 몸치인 사람은 총검술과 태권도, 무용이나 사교춤에는 젬병이다. 음치인 사람은 일류 성악가가 될 수 없다. '갓바위'에서 부모가 아무리 열심히 절을 해도, 그들의 모든 고교 3학년 자녀가 일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자명한 이치다. 모두 부자가, 모두 성공한 기업인이, 모두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면 된다'는 수십 년 동안 주류 이데올로기가 되어, 해도 안 되는 일이 많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억압을 형성했다. 해도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식에게 혹은 사회 후배들에게 '하면 된다'의 신화를 강요했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며, 그들을 윽박질렀다. 하지만 이제 젊은 세대들은 '하면 된다'가 거짓임을 깨닫고 있다. 우리 자신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하려 했던 그 사실을, 기성세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젊은 세대들은 보다 본격적으로 간파하기 시작했다.최근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의 제목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이다. 나이 40세인 저자는 "열심히 살수록 예상과 다른 결과에 상처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대충, 설렁설렁 살 수도 있고,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오히려 편안해졌다고 말한다.절대 빈곤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하면 된다'의 신화에서 벗어나, 해도 안 될 수도 있으니 대충 살자, 또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면서 살자. 좀 편하게 살자.

2018-12-25 14:37:27

성승모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장] 대구에서 도쿄돔까지

어느 블로그에서 우연히 '대구 비틀즈 모임'의 활동을 접했다. 작년 4월 폴 매카트니 콘서트를 도쿄돔에서 단체로 관람하고 일본 비틀스 팬클럽 회원들과 모임도 가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폴 매카트니 콘서트를 이미 관람했지만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지난봄 도쿄돔 시티홀을 방문했다. 1988년 완공된 도쿄돔과 함께 각종 놀이기구를 갖춘 유원지, 호텔, 쇼핑 시설이 들어서 있으니 '도쿄돔 시티'라는 명칭이 적절해 보였다. 비틀스의 공연이 열린 도시들의 변화를 다룬 어느 학자의 '비틀스 도시론'이 떠올랐다. 1966년 일본 부도칸(武道館)에서 열린 비틀스 콘서트가 '도쿄돔 시티'를 계획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도쿄돔에서는 프로야구 경기와 함께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고 있다.폴 매카트니의 콘서트가 일본 도쿄돔과 나고야돔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11월 1일 도쿄돔 공연을 관람하기로 했다. 영국 BBC 방송이 '21세기의 비틀스'라고 극찬한 방탄소년단(BTS)의 콘서트가 같은 달 도쿄돔에서 열린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도쿄돔 호텔 로비에는 11월 9일 도쿄돔 시티홀에서 열린 '제58회 미스 인터내셔널 대회'를 홍보하는 부스가 눈에 띄었다.공연 전 잠시 짬을 내서 간다(神田) 고서점가를 찾았다. '제59회 간다고서축제'가 거리 곳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자주 찾았던 곳이지만 세계 최대 규모의 고서축제는 처음으로 경험했다. 올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혼조 다스쿠(本庶佑) 교토대 교수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대담이 전자책으로 출간되었다는 소식도 눈에 띄었다.기대했던 대로 폴 매카트니의 공연은 대단했다. 지난 9월 그가 내놓은 솔로 앨범 '이집트 스테이션'은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 앨범을 발표하고 열정적인 콘서트를 이어가는 폴 매카트니를 보면서 건강한 노인이 성인(聖人)이라고 주장한 김용옥 선생의 '도올세설' 칼럼이 생각났다.비틀스 시절 노래부터 올해 발표한 신곡까지 주옥같은 노래들을 기타와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쉬지 않고 들려줬다. 사랑을 고백하는 피켓을 들고 있는 남녀 관객을 무대로 불러서 프러포즈를 할 기회를 주고 피켓에 친필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헤이 주드, 렛잇비(Let It Be), 블랙버드 등의 명곡을 들은 것이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비틀스의 명반 '애비 로드'에 실린 '골든슬럼버'도 깊은 감동을 줬다.최근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의 공연을 보기 위해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이매진 존 레논전(展)'이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시회를 보기 위해 예술의전당을 다시 찾았다. '음악이 죽은 날'이라는 제목이 실린 1980년 타임지 표지를 비롯해 존 레논 추모 기사를 특집으로 다룬 신문 지면으로 장식된 전시장 입구가 인상 깊었다. 911테러 직후 세계 각국의 신문 1면이 전시된 미국 워싱턴 D.C의 '뉴지엄'을 연상시켰다. 폴 매카트니가 헤이 주드를 열창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도쿄돔 공연이 생각났다. 내년 3월 10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대구에서도 개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전시회와 함께 폴 매카트니의 내한공연도 실현된다면 더욱 좋겠다.

2018-12-21 06:30:00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광장] '거짓말'의 참 의미

나무 위에 앉은 까치를 가리키며 "저기 까치가 앉아 있다"라고 하는 말은 화자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말을 하는 순간 아직 사실로 입증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가령 친구를 기다리다 "차가 막히는가 봐"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내년엔 돈 더 많이 벌어"라고 기원하기도 한다. "3시까지 이 일을 끝내야만 해"라고 의무를 지울 수도 있고, "선진국이 되려면 꼭 통일이 돼야만 해"라고 당위(當爲)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뛰어와!"라고 명령하기도 하고, "오늘이 무슨 요일이에요?"라고 질문할 때도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추측·기원·의무 등으로 표현하므로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 우리 언어생활에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영역이다.거짓말은 화자가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장해야 할 '착한' 거짓말이 있다. 이것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대화 현장에서 금방 드러나는 말'이다. 손님을 위해 잘 차려 놓고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라고 겸양법을 쓸 때, 잘 차려진 상과 "차린 것이 없다"라는 말의 불일치가 거짓임을 즉각 드러낸다. 커피잔을 엎어버린 아이에게 "자~알 했다"라고 반어법을 쓸 때도 잔을 쏟은 행위와 표현의 불일치, 그리고 진짜 잘했을 때와는 다른 부모의 말투와 표정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이 외에 각종 유머나 "남자는 늑대다"와 같은 은유적 표현에서도 착한 거짓말은 유용하게 쓰인다.'나쁜' 거짓말은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인 것처럼 꾸며 상대로 하여금 거짓임을 눈치챌 수 없도록 하는 기만행위'이다. 보통 "거짓말하지 마라"라고 할 때 바로 이 나쁜 거짓말을 뜻한다. 이것은 사기이며 십계명의 아홉 번째를 위반하는 중죄이다. 이토록 나쁜 짓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을 하는 사람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는가? 자신, 가족, 친인척 또는 자기 집단의 부당한 이익을 위해서 이것을 일삼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짐승도 자신과 자기 집단의 이익은 챙길 줄 안다. 따라서 작금에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동물의 왕국을 연상시키며 나라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당연히 모범을 보여야 할 분들조차 나쁜 거짓말을 하고 있다. 교육자, 종교인, 관료, 의료인, 기업인은 물론이고 법을 만드는 사람과 법을 집행하는 사람까지 이것을 일삼는 자들이 있다. 이 땅의 착한 딸과 아들들, 그리고 건전한 시민들은 기만당한 믿음에 좌절한다. 그렇게 쌓은 부 아닌 오물, 명예 아닌 오욕, 위엄 아닌 허장성세가 신기루임을 모르는가? 되물어 보자. 그리하여 행복해지셨습니까?올해가 저물기 전에 비라도 흠뻑 내려 탐욕과 부정, 반칙과 불법, 특혜와 차별이라는 때를 씻어가 주면 좋겠다. 마라도에서 철원군 동송읍까지, 호미곶에서 태안반도 끝자락 안면도까지, 그리고 독도에서 연평도까지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더불어 잘살게 되는 날은 너무 먼 꿈이란 말인가? 작가 전우익의 말이 생각난다. "혼자만 잘 살믄 별 재미 없니더. 뭐든 여럿이 노나 갖고, 모자란 곳을 두루 살피면서 채워 주는 것, 그게 재미난 삶 아니껴."

2018-12-15 05:30:00

하응백 문학평론가

[광장] 대충 살자

1960년대 이후 우리는 '하면 된다'는 신화에 사로잡혀 살았다. 식민지 시대의 패배 의식과 전쟁의 상처와 절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신 무장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앞장서서 국민정신 개조에 나섰고, 정주영 같은 기업인은 맨땅에 조선소를 건설하는 등의 추진력을 보임으로써 '하면 된다'가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려 했다. 그런 '하면 된다'의 정신은 사회적 화두로 등장해, 군대·기업·학교·가정 등 사회의 전 분야에 침투해 주류 이데올로기로 형성되었다. 군대에서는 '까라면 깐다'라는 이른바 'KK정신'으로 미화되기조차 했다.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2002 한일월드컵에서 놀랄 만한 성적을 올리면서 '하면 된다'는 정신은 한국인들에게 더욱 내재화된 것으로 보인다. 86아시안게임에서 가냘픈 소녀 임춘애는 중거리 육상 800m, 1500m, 3000m 세 종목을 석권하면서 '하면 된다' 정신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이 소녀는 당시 '라면 먹으면서 운동' 했다고 해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라면을 먹고도 세 종목을 석권한 것은 '하면 된다'는 불굴의 정신이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어 가능했다는 믿음이, 온 국민에게 종교처럼 퍼져 있던 시절이었다. 임춘애가 "코치 사모님이 간식으로 라면을 끓여 주셨다"가 한 언론사에 의해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고요"로 둔갑한 것은, '하면 된다'는 신화에 온 국민이 얼마나 몰두하고 있었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그러나 세상에는 해도 안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레슬링 선수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발레리노가 되기 어려운 것처럼, 애초에 안 되는 일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한 개인으로 보자면 안 되는 일은 수없이 많다. 몸치인 사람은 총검술과 태권도, 무용이나 사교춤에는 젬병이다. 음치인 사람은 일류 성악가가 될 수 없다.'갓바위'에서 부모가 아무리 열심히 절을 해도, 그들의 모든 고교 3학년 자녀가 일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자명한 이치다. 모두 부자가, 모두 성공한 기업인이, 모두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면 된다'는 수십 년 동안 주류 이데올로기가 되어, 해도 안 되는 일이 많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억압을 형성했다. 해도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식에게 혹은 사회 후배들에게 '하면 된다'의 신화를 강요했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며, 그들을 윽박질렀다. 하지만 이제 젊은 세대들은 '하면 된다'가 거짓임을 깨닫고 있다. 우리 자신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려 했던 그 사실을, 기성세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젊은 세대들은 보다 본격적으로 간파하기 시작했다.최근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의 제목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이다. 나이 40세인 저자는 "열심히 살수록 예상과 다른 결과에 상처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대충, 설렁설렁 살 수도 있고,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오히려 편안해졌다고 말한다.절대 빈곤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하면 된다'의 신화에서 벗어나, 해도 안 될 수도 있으니 대충 살자, 또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면서 살자. 좀 편하게 살자.

2018-12-08 05:30:00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광장] 수능 국어 31번 문제

아침 신문을 넘기다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가 실린 걸 보고선 책상 한편에 접어두었다. 유독 국어가 어려웠다기에 슬며시 호기심도 생긴 데다 은근히 '어려워 봤자 국어잖아!'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래서 재미 삼아 한번 풀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자 그 신문 위로 다른 신문과 종이가 쌓이고 찰나에 일었던 호기심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물론 게으른 탓이겠지만 이래저래 시간도 나질 않았다.그런데 수능, 특히 국어 영역을 둘러싼 논란이 자꾸만 커져갔다. '지나치게 어렵다'에서 '이건 국어 문제가 아니라 과학 문제다'까지, '뭐 그러다 말겠거니' 할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논란의 여파와 사회적 파장이 점점 늘어나더니 급기야 수능과는 까마득히 먼 거리에 있는 나에게까지 영향이 미쳤다. 급작스레 책상 위를 뒤적여 예의 그 국어 31번 문제만 찾아서 먼저 들여다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봤다. 그리고 몇 초 뒤엔 눈에 힘을 주고 봤으며 다시 몇십 초인지 아니면 1분 정도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신문을 집어던질 뻔했다.꽤 이름이 알려진 한 인사는 이 문제를 두고 올해 수능 국어 31번 문제는 "과학 문제가 아니라 국어 문제가 맞다"고 했다. 국어 시험의 목적은 독해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니 평소에 책을 많이 읽은 수험생이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라고도 했다. 그래서 다시 봤다.지문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골라내는 문제, 그 핵심 내용인 만유인력에 관한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1. 만유인력은 두 질점이 당기는 힘이다. 2. 만유인력의 크기는 두 질점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3. 어떤 천체가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질점을 당기는 만유인력의 값은 그 천체를 잘게 나눈 부피 요소들이 각각 어떤 질점을 당기는 힘(이 힘도 만유인력이다)을 모두 더한 값과 같다. 단, 이때의 조건은 지구를 포함하는 천체들이 밀도가 균질하거나 구 대칭을 이루는 구라야 한다.'이다.정리해봐도 여전히 어려운 이 내용을 국어 31번 문제는 새끼줄 꼬듯 이어 붙여 2개의 문장으로 늘어놓았다. 이렇게 말이다. "이때 가정된 만유인력은 두 질점이 서로 당기는 힘으로, 그 크기는 두 질점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지구를 포함하는 천체들이 밀도가 균질하거나 구 대칭을 이루는 구라면 천체가 그 천체 밖 어떤 질점을 당기는 만유인력은, 그 천체를 잘게 나눈 부피 요소들 각각이 그 천체 밖 어떤 질점을 당기는 만유인력을 모두 더하여 구할 수 있다."국어를 이렇게 쓰면 안 된다. 우리말은 아름답고 명료하다. 국어 31번 문제의 지문은 지시대명사 '그'를 남발하고 '만유인력은 만유인력을 더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식의 문장 구성으로 보는 이를 헷갈리게 한다. 그리고 주저리주저리 늘어진 문장에 복잡한 어순으로 초점마저 흩트린다. 이건 국어 문제냐 과학 문제냐를 떠나 국어사용법상 함량 미달의 문제다. 그리고 난이도와도 관계없고 독해 능력과도 상관없는 문제이다. 국어시험은 국어에 관한 것을 물어야 한다. 수능 첫 시간, 문제지를 받아들며 국어 생각으로 가득했을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대입 수능 국어 31번 문제는 시험이라기보단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한 정신적 폭력에 가깝다.

2018-12-01 05:30:00

성승모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장] 음악으로부터 읽어낸 시간 

최근 김광석 길 끝자락에 있는 '김광석 스토리하우스'를 방문했다. 2년 전 홋카이도를 여행하면서 들렀던 '이시하라 유지로 기념관'이 생각났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에서 영화박물관과 함께 언급된 곳이다. 일본의 국민배우이자 가수였던 이시하라 유지로(1934~1987)는 고(故) 신성일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도 등장한다. 1991년 개관한 기념관은 방문객의 감소와 건물 노후화로 작년 8월 폐관했다.10월 27일 제1회 대구 레코드 페어가 열린 김광석 길을 찾았다. '제5회 방천아트페스티벌'과 함께하는 축제였다. 대구 레코드 페어는 음악 애호가들과 교류하면서 귀한 음반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신성일, 엄앵란 부부가 다정스럽게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실린 앨범을 챙겼다. 영화배우 윤정희 씨의 사진이 포함된 1968년 음반도 구했다.작년 여름 일본 오사카에서 '세계를 변화시킨 레코드전'을 참관하면서 엘피(LP)음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준 높은 재킷 디자인의 음반은 눈으로 감상하기 위해 구입하게 된다. 1989년 제1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기념 음반에는 서도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서도호 작가는 백남준, 이우환에 이어 한국을 대표하는 설치미술가로 주목받고 있다.27일 저녁 경북대 대강당에서 '이은하 대구콘서트 with 프레스리'를 관람했다. 이은하 특유의 매력 넘치는 허스키 보이스가 인상 깊었다. 대구에서 경험하기 힘든 최고의 공연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공연 직전 대구 팬들과 함께 이은하 씨를 만나서 음반에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우리나라에서 발매된 음반에는 제작 날짜가 표기되어 있다. 뮤지션의 친필 사인에도 대개 날짜가 함께 적혀 있다. 음반에 적힌 날짜를 바라보면서 그 시기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가족과 친지들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되돌아본다.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는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에서 '자기 역사 연표' 만들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좋아했던 아티스트가 발표한 음반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한국 포크블루스 거장인 이정선 동덕여대 명예교수가 11월 16일 대구에서 박강성, 김희진과 함께 '7080 낭만콘서트' 공연을 펼쳤다. 이정선 선생이 작사, 작곡한 '뭉게구름'은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다. '쇼! 음악중심' 프로에서 걸그룹 '여자친구'(GFriend) 유주, 은하, 신비가 불렀던 곡이다.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정선 선생은 김광석 길을 언급하면서 김광석이 다시 불렀던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들려줬다. 이정선 선생이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된 이정선 7집 앨범 '30대'에 수록되어 있다.7080 낭만콘서트 공연이 열린 웃는얼굴아트센터 청룡홀은 이은하 콘서트가 열린 경북대 대강당과 마찬가지로 최근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곳이라 음향시설이 뛰어났다. 중장년층을 위한 유익한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KBS '콘서트7080'이 11월 3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종영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TV로 만나기 힘들어진 7080 가수의 라이브 콘서트가 공연문화도시 대구에서 더 자주 열리면 좋겠다.

2018-11-23 06:30:00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광장] 걷기, 여섯 가지 감각 운동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움직임은 동물이 생존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이며 움직일 수 없음은 죽음을 뜻한다. 옛날에는 생존을 위해, 즉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일의 대부분이 육체노동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작업은 소수에 국한될 뿐 다수와는 상관이 없게 되었고 다수는 정신노동을 하고 있다. 신체 활동의 부족으로 허약 체질, 비만, 각종 성인병은 물론,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까지 앓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걷기가 가장 쉽고 경제적이며, 안전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밖으로 나갈 형편이 안 되는 분들은 실내에서라도 걷기와 스트레칭을 하면 좋다. 인근 운동장, 공원 및 야산으로 갈 수 있는 분들은 거기서 즐기면 된다.더구나 대구는 팔공기맥과 비슬기맥 사이에 위치해 있고 양 기맥 사이엔 신천과 금호강이 흐르는 명품 도시이다.(「팔공산하」. 매일신문사 발행. 2017) 팔공산 인근엔 아홉 개의 올레길이 있고 대덕산엔 앞산 자락길이 마련되어 있다. 신천과 금호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도 많다. 산행을 원하면 가산에서 서봉, 동봉을 거쳐 갓바위까지, 앞산 달비골에서 대덕산 정상을 거쳐 파동까지 산줄기를 향해 열려 있는 수많은 등산로를 이용하면 된다. 걸을 곳이 지천이니 걷기만 하면 된다.걸으면 기초 체력은 물론이고 오감(五感)에 한 가지를 더한 여섯 가지 감각 모두가 좋아진다. 우선 오감이 좋아진다. 펼쳐진 풍경이 눈(視)을 맑게 하고, 새소리, 바람 소리가 귀(聽)를 밝게 하며, 솔향과 낙엽 내음이 코(嗅)를 즐겁게 한다. 땅의 기운이 발바닥으로, 바위의 서늘함과 나무둥치의 따스함이 손끝(觸)으로 전해온다. 반쯤 지쳤을 때 준비된 음식을 먹으면 진수성찬(味)이 따로 없다. 체력과 면역력이 강해지므로 병을 예방하고 치유할 수가 있다.오감을 넘어서는 여섯 번째 감각을 '육감'(六感)이라 부른다. 육감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직감·예감·영감이다. 오감이 받아들이는 정보를 바탕으로 마음에 형성되는 통찰력이다. 결국 건강한 오감이 창의적 육감을 만든다. 통찰력이 좋아지므로 당면한 문제에 최상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갖게 된다. 덤으로 마음에 이는 스트레스와 걱정 근심도 씻어낼 수가 있다.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까지, 때로는 한나절, 때로는 온종일 대자연 속을 걸어보라. 자연과 나의 경계가 점점 엷어지고 생의 수많은 시시비비들이 한낱 흩날리는 낙엽임을 절감할 것이다. 고뇌와 번뇌는 용해되고 결국 물아일체(物我一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르게 될 것이다. 돌아와 숙면을 취하고 나면 현안에 대한 뜻밖의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다. 고뇌와 번뇌는 그 자체를 붙잡고 있다고 풀리는 것이 아니다. 던져 놓고 걸으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병이 나으며,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고, 사업을 잘하는 법도 떠오르게 된다.퇴계 선생도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라는 시에서 "사람들이 말하길 글 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지만/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라고 하였다. 걸으면 공부도 된다. 걷자! 나와 가족과 나라를 위해! 나태주의 시 '멀리서 빈다'의 끝 행이 생각난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2018-11-17 06:30:00

하응백 문학평론가

[광장] 정조 임금의 양어장 낚시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낚시를 좋아했다. 창덕궁 규장각 앞 연못에서 신하들과 낚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에 여러 번 나온다. 정조의 낚시는 고기를 잡는 단순한 낚시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연출이었다.정조는 1795년, 꽃이 한창인 창덕궁 내원(內苑)으로 영의정을 비롯한 신하 54명을 초대해 연회를 열었다. 정조는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이다. 그러니 이런 기쁜 경사를 빛내고 기념하는 일을 나의 심정 상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서두를 연다. 천 년에 한 번 경사스러운 해라고 말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 전달에 수원 화성으로 행차했던 '을묘원행'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화성 건설이 진행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내밀하게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모 사업이 정점을 찍은 해이니 정조로서는 그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그런 심정을 감격적으로 말하지만, 그 말에는 화성 건설이나 아버지 추모에 토를 달지 말라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다.이어서 정조는 내원에서의 연회는 원래 임금의 친인척만 참여하는 것이지만, 자신은 친인척을 멀리하고 어진 사대부를 가까이하기에 특별히 신하들을 초대했음을 밝힌다. 생색을 있는 대로 다 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발언을 한다."필경 귀근(貴近)의 폐단이 일어나더니 요즘에 이르러서는 그 극에 달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아오면 물러가게 되고 느슨해지면 펼쳐지게 되는 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이치라고 할 것이니, 척신(戚臣)이 이 뒤를 이어 나아오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귀근이란 왕의 최측근 인물을 말한다. 정조는 즉위 때부터 정동준(鄭東浚)을 가까이 두면서 신임했다. 하지만 정동준은 권력 남용과 부정 축재 혐의로 탄핵을 받았고, 조사도 시작되기 전에 자살해 버렸다. 정조는 정동준 사건을 환기시킨 것이다. 자신은 신하를 가까이 해서 궁궐까지 불러서 낚시를 같이 할 정도로 총애하지만, 그렇다고 임금의 총애를 믿고 신하의 도리를 벗어나는 경우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경고를 날린 것이다.신하들은 등골이 서늘했을 것이다. 이때 영의정 채제공이 대표로 발언을 한다. 예로부터 밝은 임금의 성덕(盛德)은 친인척과 척신을 배척하는 데서 나온다고 하면서, "신들로 말하면 직접 성대한 이 기회를 만나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순결한 마음을 지니고 만분의 일이라도 성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한다. 충성 맹세이자 청렴 서약인 셈이다. 정조 치세(治世)의 바탕에는 이토록 철저한 측근이나 관료 관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물고기들도 정조의 양어장 낚시 연출에 협조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신하도 많았지만 이날 정조는 네 마리나 잡았다. 임금이 낚시할 자리에 미리 밑밥을 듬뿍 뿌려 놓았을 것이다. 임금이 물고기를 잡을 때마다 뒤에서는 풍악이 울렸다. 출연한 물고기는 도로 놓아주었다고 한다.

2018-11-10 05:00:00

[광장] 새로운 시대는 말씀과 함께 왔다.

새로운 시대는 '말씀'과 함께 왔다. 벼락처럼 느닷없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온갖 매스컴이 하나같이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 즉,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클라우스 슈바프'(klaus schwab)의 '말씀'을 전했지만 선뜻 와 닿진 않았다. 그가 누군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당장의 내 삶이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어제도 오늘처럼 살았고 내일도 오늘같이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처음엔 약간의 저항도 있었다. 진짜 새로운 세상이 온 게 맞는지 한번 따져보자는 거였다.하지만 그런 목소리들은 끊임없이 전해지는 '말씀'에 묻혀 사라져 갔다. 그리고 '말씀'이 계속될수록 사람들은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게 뭔지,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야만 했다. 특히나 대한민국은 지난 몇 년간 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느라 온 나라가 들썩였다. 별안간 수많은 전문가가 나타나 4차 산업혁명을 설파했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갈수록 더해질 태세다. 그들의 가르침은 대개 '슈바프'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인공지능, 빅 데이터, 초연결사회 등을 열거한 다음 우리 앞에 다가온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면 살 것이요, 외면하면 몰락할 것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얼핏 결론만 보면 무슨 종교 같기도 하다. 전문가는 사도처럼,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새로운 세상은 믿음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낙원처럼 말이다.그런데 이토록 대한민국이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말씀'의 성지가 된 데는 이른바 '리더'라 불리는 이들과 정부의 역할이 매우 컸다. 분야를 막론하고 어찌나 4차 산업혁명을 강조했던지 이젠 4차 산업혁명 없이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어떤 것도 도모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것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그렇다면 잠시 이전 시대, 그러니까 2016년 1월 '슈바프'의 선언이 있기 전으로 돌아가 보자. 그때도 일상에서 지금과 거의 같은 성능의 스마트폰을 지금과 거의 같은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따지자면 우리의 생활에 연결, 공유, 개방 등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요소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인공지능, 빅 데이터 또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 조금 더 이전으로 돌아가 보면 어땠을까?대한민국은 국민 2명 중 1명이 소위 '싸이질'을 했을 만큼 연결과 공유에 있어 세계 최강국이었다. 서드파티(third party)를 창출하는 강력한 플랫폼을 '아이폰'의 등장 훨씬 이전에 이미 만들고 경험한 것이다. 요즘 '말씀'마다 따라붙는 과거 '추격형 인재'(Fast Follower)의 시대가 가고 '도전형 인재'(First Mover)의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호들갑은 그래서 더 뜬금없다.2000년 한 해 동안 1만 개가 넘는 벤처기업이 탄생했고 그 주역들은 모두 '퍼스트 무버'였다. '말씀'만 넘치는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실, 4차 산업혁명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을 담고 있는 아직은 불확정적인 하나의 용어일 뿐이다. 이것으로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말은 그냥 막연히 경제를 살리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사회적 토양과 환경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사라진 '퍼스트 무버'들부터 다시 돌아오게 해야 한다.

2018-11-01 11:40:58

성승모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장] 케이팝의 고향을 찾아서

한글날 징검다리 연휴를 이용해서 도쿄에 다녀왔다. 지난 6일 태풍 콩레이의 북상 영향으로 대구공항 도쿄행 항공편이 결항됐다. 항공기 결항은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예정보다 하루 늦게 출발은 했지만 미리 계획한 여행 일정에 차질을 빚었다.키노쿠니야 서점과 가까운 신주쿠의 호텔을 이용했다. 대구 출신의 한국인 직원이 근무하고 있어서 편리했다. 지난 3월 키노쿠니야 서점 건물 8층에 중고 음반 매장이 문을 열었다. 규모가 크고 음반 가격이 저렴하다. 이번 주말 가수 이은하 콘서트가 열리는 대구에서도 김광석 길 야외공연장 앞에서 제1회 대구 레코드 페어가 열린다.7일 저녁 산토리홀에서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의 피아노 독주회를 관람했다. 폴리니는 아직 한국 땅을 못 밟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다. 객석을 가득 채운 2천 명의 관객들은 다시 보기 힘든 거장의 연주를 숨죽이며 관람했다. 산토리홀은 1986년 개관한 도쿄 최초의 클래식 전용홀이지만 대중가수의 공연도 열리고 있다.2005년 10월 김연자는 도쿄교향악단과 함께 산토리홀 무대에서 아리랑을 열창했다. 김연자의 일본 데뷔 30주년 기념 앨범에는 길옥윤 선생이 88서울올림픽을 위해 작곡한 '아침의 나라에서'가 수록되어 있다.8일 오후 도쿄에서 드라마 '옥중화'의 주인공인 진세연의 첫 팬 미팅과 '더블에스501'(SS501) 출신 가수 김규종의 콘서트가 열렸다. 신주쿠역 가까운 곳에서 열린 김규종 콘서트를 선택했다. 해외에서 처음으로 한국 가수의 공연을 봤다. 관객 대부분이 다양한 연령대의 일본 여성이었다.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옆자리의 20대 일본 여성과 인사를 나눴다. 공연이 끝난 뒤 콘서트홀 입구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할머니와 어머니도 김규종의 팬이라고 했다. 김규종 때문에 최근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의 한국식 이름도 지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가방에는 한글로 김규종 이름이 새겨진 명찰이 붙어 있었다. 한국에 가서 김규종의 고향도 꼭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방탄소년단(BTS) 멤버 2명이 대구 출신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해외에서 방탄소년단을 특집으로 다룬 서적에는 방탄소년단의 팬이라면 한국에서 꼭 방문해야 할 성지(聖地)가 여러 곳 소개되어 있다. 대구와 경북도 각각 한 곳이 포함되어 있다. 방탄소년단의 콘서트가 대구경북에서 자주 열린다면 뷔와 슈가의 고향 방문과 성지 순례를 겸해서 찾아오는 해외 팬(아미)들이 무척 많을 것 같다. 이는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큰 보탬이 될 것이다.'레드벨벳'의 아이린, '걸스데이'의 소진 등 여성 아이돌그룹 멤버 중에 대구경북 출신이 적지 않다. 2일 SBS MTV '더쇼'에서 '부탁해'라는 노래로 첫 음악방송 1위의 영광을 차지한 '우주소녀'의 보나는 대구 출신이다. 우주소녀 보나는 지난 8월 종영한 KBS 드라마 '당신의 하우스헬퍼'에서 여주인공을 맡아 열연을 펼치는 등 최근 활약이 눈부시다. 우주소녀의 단독 콘서트가 열리면 꼭 관람하고 싶다. 대구경북 출신 케이팝(K-POP) 스타의 공연을 보기 위해 어쩌면 다시 신주쿠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2018-10-25 15:55:38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광장] '학생'의 참 의미

학생(學生)은 '배우는 사람'이고 영어의 student는 '공부하는(study) 사람(-ent)'이다. 인간은 배움과 공부를 통한 앎·깨침을 사랑하는 동물이다. 길을 가면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 "저기 왜 사람들이 몰려 있지?" "저 강아지는 종(種)이 뭐지?"와 같은 의문을 던지게 된다. 연구와 사색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하는 일이며, 그것을 통한 깨침은 열락(悅樂)을 준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모두가 학생이다.학생의 본래 뜻이 이러하지만 보통은 학생을 '학교에 다니는 사람'으로 본다. 이러한 정의는 좁은 의미의 학생이다. 넓은 의미의 학생은 우리 모두이다. 교육자도 학생이다. 학자로 불러도 마찬가지이다. 학자(學者)도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 분야에서 깨침의 경험을 더 쌓았기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깨침의 길로 안내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된다.첫째, 배웠느니 못 배웠느니 하는 심리적인 차별이 없어질 것이다. 넓은 의미의 학생 개념으로 보면 살아온 세월만큼 누구나 학생이었다. 더불어 노인들에 대한 존경심도 자연히 생길 것이다. 지나온 세월만큼 지혜가 켜켜이 쌓인 분들이 아닌가?둘째, 공교육의 질을 높여 사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공교육자가 수업 내용과 방법에서 어떻게 사교육자에게 뒤처질 수 있는가? 임용되는 순간부터 공교육자의 지위만 누렸고 학생·학자의 신분임을 망각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공교육자도 갈고닦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학생·학자이기 때문이며 갈고닦음 없이 수업과 강의의 질을 높일 수 없기 때문이다.셋째, 교실의 분위기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과 강의는 교육자가 학생들에게 깨치는 과정을 보여주고 그들을 깨닫게 하는 행위 예술이다. 깨치는 과정과 깨친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앎을 사랑하는 인간의 또 다른 욕구이다. 깨친 것을 자랑하는 아이의 신난 눈망울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수업은 신명나는 잔치판이 될 것이고 수업이 힘들다거나 학생의 태도가 나쁘다는 푸념도 사라질 것이다.넷째, 대한민국을 초일류 국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학생·학자의 자세로 연구와 사색을 한다면 최고의 문화·문명국가가 될 것이고 부강한 나라도 될 것이다. 앞선 나라의 대중교통을 이용해보면 책을 읽고 있는 시민들을 더 많이 목격할 수 있지 않은가? 끝으로, 졸업과 퇴직을 이유로 책을 놓아서도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평생교육, 독서의 생활화 등도 자연히 실현되며 노년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시험의 계절이다. 수험생 누구나 깨침의 환희를 체험하기 바란다. 작든 크든 새로운 것을 스스로 깨쳐보라. 세상이 잠든 시간에 홀로 깨어 연구와 사색을 해보라. 깨친 기쁨의 눈물을 흘려보라. 눈물이 당신의 책장을 적시면 문을 열고 새벽을 맞아보라. 신선한 공기가 밤의 피로를 씻어주는 순간, 이 길을 가다 죽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려워말고 나아가라. 가다 죽어도 된다는데 어떤 장애가 당신을 막겠는가? 꿈은 이루어진다. 힘이 들거든 기억하라. 시련이 크면 당신의 깨침도 커지고, 따라서 꿈도 커진다는 것을.

2018-10-18 13:17:24

하응백 문학평론가

[광장]인구 정책, 이제 가보지 않은 길을 찾자

"아, 칵, 이장입니다. 안녕하시지라우. 어제는 금산면 청년 체육대횔 했는디, 우리 마을은 청년이 없는 관계로, 아, 출전은 못하고 술만 디지게 마싰지라요. 다 잘 계시고 이장은 추석 때 서울 아들집에 가서 없을꺼이. 아, 칵. 마을에 별 일 없을꺼구만요. 그럼 잘 계시지라우. 방송 끝."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방파제에서 낚시하다가 들었던 마을 방송의 멘트다. 웃다가 고기 한 마리를 놓치고, 그 멘트의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체육대회에 나갈 청년조차 없는 마을…. 청년이 없으면, 결혼하는 남녀도 없고, 당연히 아이들도 없다.청년이 없는 섬이 어디 거금도 뿐일까? 섬과 같은 도서지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농촌 지역도 청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포항과 구미를 제외한 경상북도의 21개 시군도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농어촌 지역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국가 전체의 출산율이 점점 낮아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이비붐 시대에 한 해 90만 명에 이르던 신생아 수는 곧 30만 명 선으로 줄어든다. 이민을 받아들이는 등의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전체 인구는 당연히 감소하게 되어 있다.지난 10년간 정부에서는 저출산 대책에 13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했다. 대통령 직속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도 가동 중이다. 하지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결혼과 출산 장려금, 아동 양육수당 지급 등 여러 대책을 마련하고 각종 인센티브를 준다고 해도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헛돈만 퍼붓는 셈이다. 차라리 인구 감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이 훨씬 미래지향적이지 않을까?우리나라만큼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도 드물다. 5천만 명이 10만㎢의 땅에 살고 있다. 1인당으로 나누면 약 200㎡가 할당된다. 우리는 그 좁은 땅을 학대하고 착취하면서, 집값과 땅값이 오른다고 악다구니를 써가며, 개발과 환경보호를 양쪽에서 외치며 살고 있다. 뉴질랜드에는 대구 인구의 두 배가량인 약 500만 명이 우리나라 면적의 약 2.5배 정도 땅에서 '널널하게' 살고 있다. 핀란드와 스웨덴이나 뉴질랜드와 같이 땅덩어리에 비해 인구가 적은 나라도 얼마든지 잘 살고 있다. 국민의 행복지수는 오히려 더 높다.청년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지 말고, 엄청난 국가 예산을 인구 증가 대책에 투입하지 말고, 인구가 줄어들어도 잘 살 수 있도록 국가 개조 설계에 착수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훨씬 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마침 인류의 기술적 진보는 눈부신 것이어서, 자율주행 자동차와 같이 인공지능을 활용한 각 분야의 여러 자동화 시스템은 곧 현실화될 것이기에 노동력의 부족은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가보지 않은 길은 개인이나 국가나 다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인구가 감소한다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두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장률과 증가율의 미망(迷妄)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 길로 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2018-10-10 14:29:17

권은태 사) 대구콘텐츠플랫폼 이사

[광장] 청년문제만 문제인가?

여기 큰 배가 있다 하자. 그 옆엔 작은 배도 있다. 이 배들은 모두 '사회'라는 바다에 떠 있다. 부두에 가득한 사람들은 이제 막 길을 나선 새내기 여행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큰 배를 타고 싶어 한다. 번듯한 배에 올라 근사한 여행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배웅 나온 부모도 그걸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바람을 만나도 안전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에 오르는 게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청년의 사회 진출, 즉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는 뜻이다.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생각은 이렇다. '청년들이 취업을 못 하니 사는 게 힘들어지고 결혼마저 미루게 된다. 이렇게 되면 출산율이 떨어지고 언젠가는 나라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라가 나서 청년을 구해야 한다.' 정부의 뜻도 다르지 않다. 청년 정책의 골자는 첫째도 둘째도 '일자리 창출'이다. 저간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하루가 멀다고 청년 일자리 대책이 쏟아진다. 다만, 유난을 떠는 셈 치곤 아직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을 뿐이다.일자리로 시작하는 청년 문제는 매스컴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하다. 청년은 부채, 좌절, 포기 등과 이미지가 포개진다. 그런 와중에도 매번 빼놓지 않고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보태긴 하지만 그래도 큰 효과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언제쯤이면 청년이 빛난다는 소식을 듣게 될지도 짐작하기 어렵다.당사자인 청년들은 할 말이 많다. '어학연수에 봉사 활동, 실무 경험까지, 취업을 위해선 갖춰야 할 스펙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앞 세대는 우리를 구해야 한다고 하지만, 심지어 어떤 이는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돈을 번다지만 우린 노력에 비해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세상이 청년에게 불리한 구조로 짜여 있다는 이야기다.그런데 맥락을 조금 달리하는 이야기도 있다. '청년들은 우리를 하찮게 여긴다. 채용 공고를 내도 좀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면접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노쇼(No-Show)는 허다하고 심지어 확인 차 연락하면 전화도 안 받는다. 시간도 빼앗기고 기운도 빠지지만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이건 중소기업 대표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요즘 분위기상 꺼내기 조심스럽다. 자칫하면 강퍅한 '꼰대'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없이 전한 위로의 말과 수없이 내놓은 갖가지 정책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더러는 다른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짚어봐야 한다. 우리의 청년들이 작은 배의 가치를 알고 있는지, 함께 노 젓는 법을 잊은 건 아닌지,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약자를 외면하면 그 다음 순서는 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큰 배든 작은 배든 배에 오르는 목적은 결국 그 배에서 내리는 데 있다. 하늘도 보지 않고 바람도 느끼지 않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오직 큰 배에 올라 안전하기만을 바란다면 진짜 소중한 걸 잃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기업의 인사담당자가 이렇게 말했다. '달리 차이가 없으니 스펙을 볼 뿐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사랑하듯 조금만 더 이웃과 세상에도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 우린 토익점수의 차이보다 사람의 차이와 생각의 차이를 더 많이 본다.' 이쯤에서 슬그머니 묻고 싶어진다. 청년 문제만 문제인가? 청년도 문제인가?

2018-10-05 17:12:53

성승모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장] 돈의문이 열려있다

지난 9월 1일 서울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시간안의 상처' 컨템포러리 발레 공연을 관람했다. 미국 애틀랜타 발레단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약했던 안무가 김유미 씨가 연출과 안무를 맡았다.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서 공연을 펼친 김유미 씨의 모습을 지난 2월 KBS '요리인류 서울의 맛'에서 시청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강북삼성병원과 서울역사박물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일주일 뒤 다시 찾았다. 돈의문(서대문) 터 근처의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조선시대 한옥과 일제강점기 가옥, 근현대 골목길까지 옛 시간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다.'시간안의 상처' 공연이 열렸던 서울도시건축센터부터 들렀다. 무용 공연 때는 임시로 설치된 무대 때문에 제대로 관람하기 힘들었던 '돈의문이 열려 있다' 사진 전시회를 살펴봤다. 보도사진가 이경모(1926~2001) 작가가 촬영한 1957년 여의도 공항과 시기미상의 덕수궁 사진 작품을 구입했다.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 자리에 들어서는 서울도시건축박물관을 소개하면서 마음에 드는 이름과 로고 디자인에 투표해 달라는 안내문도 눈에 띄었다.경주의 한옥호텔 '라궁'과 대구 '임재양외과'를 설계한 구가도시건축 조정구 대표의 해설과 함께 돈의문박물관마을 개발 과정이 돈의문 전시관에서 상세히 소개되고 있었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연대표가 인상 깊었다.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신간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에서 강조하고 있는 '자기 역사 연표' 만들기는 지역사회에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울로 올라와서 한식집을 운영하면서 2015년 이사 갈 때까지 동네 얼굴 같은 역할을 했던 '안동회관' 김여환 사장의 인터뷰 동영상이 흥미로웠다. MBC 드라마 수사반장을 제작할 때 중국집 배달통 등 소품을 빌려주었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손님으로 수사반장 최불암과 킹레코드에 소속됐던 가수들을 꼽았다.커뮤니티센터에서 커피 한잔을 마신 뒤 돈의문박물관마을 방문을 마무리하려고 대로변으로 이동했다. '고스트타운레코즈' 간판이 걸린 1층 점포가 눈에 들어왔다. 고스트타운레코즈는 음악가, 퍼포머, 디자이너들이 본인의 작품 소개와 홍보,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쇼케이스 형태의 공간으로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새로 시작한 음악, 예술 프로젝트다.고스트타운레코즈에서 싱어송라이터 이인혜가 이끄는 드림팝 밴드 '변화무쌍'의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도심 대로변에서 홍대 인디밴드의 공연을 무료로 관람하게 되어 반가웠다. 13㎡(4평) 규모의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변화무쌍'이 발표한 2장의 앨범을 구입해서 들어봤다. '바람'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는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복합문화공간은 더 이상 하나의 공간에 하나의 장르나 형식을 다루는 것이 무의미하게 된 데서 생겨난 것'이라는 어느 신문 기사에 공감한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서울을 대표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역동적인 복합문화공간이 공연문화도시 대구에서도 늘어나길 소망한다.

2018-09-27 15:28:13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광장] 택민(澤民)선생 옛이야기

택민은 김광순 경북대 명예교수의 아호이다. 한문학의 거두였던 고 연민(淵民) 이가원 연세대 교수가 선사했다. 택민(澤民)은 '사람들에게 베풀다'라는 뜻이다. 그는 평생 모은 자료로 이 분야를 전공하는 후학들에게, 나아가서 우리 모두에게 혜택을 베풀고 있다.그는 반세기 동안 우리 옛이야기들을 수집·정리·분석해 왔다. 여든이 넘은 지금도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지(韓紙)에 붓으로 쓴 옛이야기 500편을 모아 84권의 고소설전집으로 출판했고 정리가 덜 된 것도 300여 편이나 있다. 출판된 것 중에는 오일론심기, 승호상송기와 같은 10여 종의 국내 유일본과 남계연담, 미인도와 같은 20여 종의 희귀본도 포함되어 있다. 정리가 덜 된 자료를 놓고는 아직도 그는 씨름하고 있다. 한마디로 택민의 문헌은 고전문학의 보고(寶庫)이다.그는 필사본 고소설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다. 고소설이 발견되면 값에 상관 않고 수집했다. 소장자가 기증해 줄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엔 작품 해제 속에 내력을 세밀하게 밝혔다. 기증을 받을 수 없을 때는 월급 전액을 들여 구입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구매도 불가한 경우에는 복사본을 만들어 보관해 왔다. 이렇듯 긴 세월 동안 자료 수집에 혼신의 노력을 다해왔다.택민이 수집한 자료는 전달 매체의 특성에 따라 오페라, 연극,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자료의 문학, 교육 및 경제적 가치는 지대하다. 고유한 문화유산이고, 국어국문학 연구에 새 지평을 열 수 있는 초석이며, 문화 콘텐츠 산업 육성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고소설을 현대국어와 외국어로 옮기는 작업과 자료의 보존 및 연구를 위한 공간과 인력을 확보하는 숙제는 남아 있다. 정부가 자료의 가치를 인정하고 과제를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길 바란다.그가 설립한 택민국학연구원의 학술지 「국학연구론총」은 지난 11년간 21집까지 발행됐다. 600여 명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학회가 되었고 여기서 간행되는 학술지는 한국연구재단이 공인한 등재지가 되었다. 한국은 물론 미국'중국'일본을 비롯한 세계 70여 개국의 한국학 연구기관들이 구독하고 있다. 이처럼 교육부가 공인한 등재지가 되어 외국의 연구기관들까지 독자로 두게 된 연구원(院)의 성취에 박수를 보낸다.필자는 40년 전에 택민 선생의 강좌를 수강한 적이 있다. 하루는 조식의 '칠보시'(七步詩)를 일필휘지한 후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했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안에서 우는구나/ 본디 한 뿌리에서 태어났거늘/ 어찌 이다지 급히 삶아대는가/" 조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조비는 동생 조식을 불러 "네가 시를 잘 짓는다고 하니, 내가 '일곱 걸음'(七步)을 걷는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중벌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때 조식이 지은 시이다. 원문에 나오는 '동근생'(同根生)은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자매'를 뜻한다.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동근생인 '콩'과 '콩깍지' 간의 달라진 운명에 비유한 시이다. 이렇듯 택민 선생은 제자들의 인성교육에도 열정을 보였다.추석이다. 뿌리(根)인 부모와 조상께 감사하고, 동근생(同根生)끼리 정을 나눌 때이다. 더불어 우리 것, 그중에서도 옛이야기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2018-09-19 15:50:24

하응백 문학평론가

[광장]세종 7년 한 갖바치의 죽음

세종 7년(1425년) 가죽신을 만드는 이상좌라는 사람이 집 앞의 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개국 초기부터 조선 조정은 화폐개혁에 착수했다. 고려 때부터 화폐를 만들어 거래에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으나 거의 실패를 했기에, 태종은 종이돈인 저화(楮貨)를 본격적으로 유통시켰다. 하지만 저화의 화폐 가치가 날로 떨어지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태종은 "나중에 명군이 나오면 이를 시행할 것이다(後有明君出而行之)"라는 말을 남기며 저화 유통 정책에서 한 발 물러났다. 세종은 아버지의 실패를 교훈 삼아 새로운 시도를 했다. 저화와 함께 조선통보라는 동전을 제조하여 온 백성이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세종 5년부터 조선통보를 제작, 유통에 착수해 세종 7년 2월 18일 공식적으로 이를 사용하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면 백성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백성들은 포나 쌀로 교환하는 관습을 바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벌금이나 세금도 조선통보를 내도록 했으며 일반 소액 상거래에도 반드시 조선통보를 사용하도록 했다. 만약 상인이나 장인들이 조선통보를 사용하지 않으면, 중범은 사형에 처하고 경범은 장 100대에 가산 몰수 후 수군(水軍)에 편입시키도록 하는 어마어마한 처벌 조항을 함께 제시했다. 이런 조치가 시행된 직후에 갖바치 이상좌는 자신이 만든 가죽신을 쌀 1말 5되와 바꾸었다가 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시서(京市署·상인 및 시장 감독관청)에 잡혔다. 법대로 하자면 가죽신을 팔아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쌀을 사야 했으나 그는 관습대로 거래했던 것이다. 경시서에서는 이상좌의 나이를 감안하여 곤장을 때리지 않고 8관의 벌금을 내도록 했다. 가난했던 이상좌는 이웃에게 빌려 1관의 벌금을 냈으나 경시서의 독촉이 계속되자, 자살로 삶을 마감해 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세종은 깜짝 놀라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나라에 입법(立法)한 것은 돈을 많이 이용하도록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죽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상좌가 죽은 것은 반드시 경시서에서 가혹하였기 때문이니 내 마음이 아프다. 너희는 그 실정을 조사하여서 아뢰어라. 만약 가혹하였다면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 더불어 이상좌의 집에 쌀 3섬을 주고, 받았던 속전은 되돌려 주도록 명했다.(1425년 8월 23일 실록)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삶을 기름지게 하려 했던 태종과 세종의 화폐개혁은 결국 실패했다. 숙종 대에 이르러 상평통보가 주조되면서 태종과 세종이 그토록 바랐던 동전화폐의 유통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라의 새로운 정책이 백성을 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정책 입안자의 의욕이나 논리적 당위성만으로는 백성들의 삶이 실제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책의 입안이나 입법도 중요하지만, 세종도 그랬듯이 그 시행 과정에서의 부작용을 세심히 살피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부작용이 심하다면 그 입안 자체를 무효화할 수도 있어야 한다. 세월이 몇 백 년 지났어도 그러한 원칙은 변함이 없다.

2018-09-13 11: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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