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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대통령의 메시지

[이른 아침에] 대통령의 메시지

며칠 전 대통령이 SNS에 굳이 안 올려도 좋을 글을 올렸다. "코로나19와 장시간 사투를 벌이며 힘들고 어려울 텐데, 장기간 파업하는 의사들의 짐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시겠습니까?" 간호사들을 격려하는 형식이나, 파업 중인 의사와 간호사를 갈라놓는 내용이다.행여 알아듣지 못했을세라(?) 그 아래에 발언의 의도를 더 분명히 해 두었다. "지난 폭염 시기, 옥외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벗지 못하는 의료진들이 쓰러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국민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의료진이라고 표현되었지만 대부분이 간호사들이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코로나19의 방역에 의료진 모두가 애를 썼는데, 굳이 대통령이 나서서 노골적으로 갈라치기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나마 사실도 아니다. 지난 6월 1일 누적 기준 코로나19 방역에 임한 의료진은 의사가 1천790명, 간호사·간호조무사 1천563명, 임상병리사 등 기타 인력 466명 등으로 의사가 가장 많았다.이것이 문제가 되자, 문제의 글을 쓴 이가 대통령이 아니라 오종식 청와대 기획비서관이었다는 얘기를 흘린다. 대통령은 그저 간호사를 격려하라 했을 뿐인데, 기획비서관이 그 뜻을 잘못 받들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계정의 트위터 글은 대통령이 직접 쓴다고 밝혀왔다. 이 또한 거짓이었던 것이다.이마저 문제가 되자, 청와대에서는 글의 작성은 기획비서관이 했으나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올린 것이라 재차 해명했다. 대통령 계정의 트위터 글을 누가 쓰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일단 그 글이 대통령 이름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대통령이 쓴 글이며, 책임 또한 대통령이 져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메시지의 성격이다.오종식 기획비서관은 문재인 대통령을 만든 광흥창팀의 멤버다. 정권이 출범하면서 NL 운동권 출신인 이 팀의 멤버들이 대거 청와대로 자리를 옮겼다. 국정 운영에 운동권 멘탈리티가 스며드는 것은 당연한 일. 그 결과 대통령의 메시지가 이간질로 적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얄팍한 운동권 전술로 악용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왜 그 메시지가 대통령의 손에서 걸러지지 않았을까? 청와대의 해명과 달리 대통령이 아예 안 봤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참모들이 대통령을 제치고 운동권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반면 대통령이 읽고 게재를 허락한 것이라면, 대통령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어느 경우든 문제다.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윤건영 의원은 청와대 상황실장 시절 대통령에게 조국 임명 강행을 권했다고 한다. 공공선에 입각해 처리해야 할 윤리적 상황을 청와대 참모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파할 군사적 상황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이 정권의 폭주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윤건영 상황실장 역시 광흥창팀 멤버였다.이 사소한 해프닝에서 통치의 패턴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정책의 문제를 이념화한다는 것이다. 정책을 수립해 관철시키는 것을 이들은 '이해의 조정'이 아니라 '선악의 결전'으로 바라본다. 자기들은 선이요, 상대는 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개혁의 '주체'로 놓고, 상대는 그저 개혁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대상으로 전락한 이들의 목소리가 개혁안에 담길 리가 없다. 그러니 격렬한 저항은 예정된 셈. 저들은 이를 '자신들의 실수'가 아니라 '기득권의 저항'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반란의 효과적 진압을 위해 의료진을 반으로 갈라쳐 그중 한쪽을 고립시키려 한 것이다. 이렇게 정책의 수립만이 아니라 관철 역시 군사주의적이다.문제는 대통령 자신이 이 운동권의 논리에 투항을 해버렸다는 데에 있다. 대통령은 한 정당이 아니라 온 국민의 대표다.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에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여 국민을 통합하는 대통령의 역할이 사라졌다. 이번 SNS 메시지 소동이 보여준 것은 이 나라에 대통령이 부재한다는 민망한 사실이다.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2020-09-06 15:20:10

[이른 아침에] 원칙주의자 김부겸이 아쉽다

[이른 아침에] 원칙주의자 김부겸이 아쉽다

지난 4·15 총선에서의 미래통합당 패배 원인 중 하나로 '공천 파동'을 꼽는 데는 이견이 없다. 평론가들의 비판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나는 방송에서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대구 수성갑 공천에 관해서이다. 수성을 주호영 의원을 수성갑 지역에 공천한 것은 이른바 자객 공천이었다. 자신의 지역구에서 당선이 가능한 주 의원이다. 명분은 차치하더라도 굳이 김부겸을 떨어뜨리기 위해 이리저리 동원되어야 할 군번(?)은 아니다. 물론 한 석이 아쉬운 게 선거 국면이다. 하지만 주호영도 김부겸도 지역과 대한민국의 소중한 정치 재목이다. 까치밥을 남겨 놓는 여유, 보수 정치의 품격이 아쉬운 대목이어서 비판적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정치인 김부겸의 행보를 새삼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난하게 다선 의원이 되어 안정적인 정치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대구에 도전하는 길을 택했다. 큰 꿈을 위해서이건 아니건 그의 길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나도 그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고 학연, 지연 어느 것 하나 연결고리도 없다. 당파를 떠나 성원하고 싶은 정치인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유였다. 지난 2월 비례위성정당 창당이 이슈화되었을 때이다. "비례정당은 소탐대실이다. 국민을 믿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당시 김부겸 의원의 공개적 언급이었다. 야당에 대한 비난은 구색일 뿐 결국 여당 위성정당 창당이 기정사실화되던 시절이었다. 극렬 지지자들의 비난을 자초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그런 평소의 모습에 비해 이번 당 대표 경선에서 보여준 그의 행보는 실망과 아쉬움 그 자체이다. 내년 4월 예정된 부산·서울시장 보궐선거에 관한 언급이 대표적이다. 중대한 잘못으로 열리는 재·보궐선거의 후보자를 공천하지 않는다는 민주당 당헌에 따르면 민주당 후보자를 내지 않는 게 순리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여당은 후보를 낼 것이다. 명분에만 집착할 수 없는 게 냉엄한 정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부겸 후보가 당헌을 개정해서라도 서울·부산시장 후보를 내야 한다고 앞장선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일부 교회가 코로나 방역에 있어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은 다들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지지자들의 바이러스 테러'라는 김 후보의 언급은 도를 지나쳤다. 당원들의 표심을 얻어야 하는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어대낙(어차피 대표는 이낙연)이라는 구호가 흔들리는 기미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당내 정치를 위해 무리수를 둔 김부겸은 게도 구럭도 놓친 형국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평소처럼 원칙과 소신을 강조했다면 국민의 성원과 지지는 더 높아졌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지난 1월 19일 자 뉴욕타임스는 민주당 경선 후보 중 엘리자베스 워런과 에이미 클로버샤 등 두 여성 후보를 지지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흥미 있는 부분은 버니 샌더스, 조 바이든 등 선두권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였다. 샌더스 후보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샌더스는 많은 진보적 의제를 미국 주류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도록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샌더스는 트럼프 못지않게 분열적이다. 국민에 대한 편 가르기를 주된 통치 수단으로 삼는 트럼프에 이어 샌더스가 대통령이 될 경우 국민적 분열과 상호 적대감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분열 대신 통합을 추구하는 게 정치인의 가장 큰 덕목이라는 것이었다."뚜벅뚜벅 국민 통합의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총선 실패 후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 전 의원이 강조한 제목이다. 미국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하게 분열의 정치가 횡행하는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이다. 국민에 대한 편 가르기와 상대에 대한 비난만이 정치의 기술인 듯 보인다. 이번 경선에서 보여준 김부겸의 아쉬운 모습은 어쩔 수 없는 당내 정치의 한계라 대신 변명해 주고 싶다. 의기소침해 있을 김부겸 전 의원에게 당부한다. 국민만 바라보고 국민 통합의 정치를 다시 시작해 달라고. 그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 달라고. 스스로에 대한 다짐도 국민이 그에게 바라는 바도 그것이다.

2020-08-30 15:51:58

[진중권의 이른 아침에] 이상한 나라의 구속영장

[진중권의 이른 아침에] 이상한 나라의 구속영장

사법부를 존중한다는 생각에서 그동안 채널A 이동재 전 기자에게 발부된 구속영장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가 왔다. 하지만 검찰에서 증거로 확보한 두 개의 녹취록이 공개되고, 수사심의위에서 한동훈 검사장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중단하라는 권고가 내려진 이상, 이제 발부된 구속영장의 정당성을 따져볼 때가 됐다.영장을 내주며 김동현 영장판사는 "검찰 고위직과 연결해 피해자를 협박하려 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자료가 있는 점, 매우 중대한 사안임에도 광범위하게 증거를 인멸해 수사를 방해한 점" 등을 사유로 들면서 "실체적 진실 발견, 나아가 언론과 검찰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도 구속 수사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이 사유들이 내 눈에는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고작 '미수' 사건에 영장씩이나 발부된 것은 아마도 이 일이 '검찰 고위직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심' 때문이리라. 하지만 '혐의가 소명'된 것도 아니고, 그저 '의심'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인신을 구속하는 게 과연 자유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의심스럽다.게다가 검찰이 신청한 영장에는 일단 이 일이 피의자의 단독 범행으로 적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사가 영장에 적시되지 않은 사안에까지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동재 전 기자의 변호인이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는 검찰이 청구한 범위 내에서 사안을 판단해야 한다는 '불고불리의 원칙'에 위배된다.또 검찰 고위직과의 연결을 의심할 '상당한 자료'가 있다고 했으나, 정작 수사심의위에서 '상당'하다는 그 자료들은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다. 대체 그는 무슨 '자료'를 본 걸까? 녹취록엔 공모 혐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한동훈 검사장의 명시적 언급이 등장한다. 이 견고한 사실을 뒤집을 만한 '자료'란 대체 뭘까?취재원 보호를 위해 핸드폰을 초기화한 것을 증거인멸로 본 것은 그렇다고 치자. 도대체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는 인식론적 필요가 인신을 구속할 사유가 되는가? 더 황당한 것은 그 다음이다. "언론과 검찰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도 구속 수사가 불가피하다." 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이 판단의 바탕에는 검찰과 언론이 유착되어 있다는 선입관이 깔려 있다. 논리적으로 '선결 문제 전제의 오류'에 해당한다. 그런 판단이 가능하려면 먼저 두 사람의 '공모'가 사실로 입증돼야 한다. 아울러 그와 유사한 사례가 다수 확인돼야 비로소 '검언 유착'이라는 일반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우리는 '검언 유착'이라는 것이 작년 조국 사태 이후에 여당 측에서 검찰의 예봉을 꺾으려 만들어 낸 정치적 프레임이라는 것을 안다. 검찰과 언론은 그 사태의 전이나 후나 늘 똑같이 행동해 왔다. 하지만 검찰이 이른바 '적폐 청산'을 하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그 행태를 '검언 유착'이라 비난하지 않았다.'언론과 검찰의 신뢰 회복'이라는 말은 한 기자와 한 검사의 개별적 일탈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상황에 대한 어떤 '일반적' 판단, 즉 검찰 집단과 언론 집단이 모종의 유착 관계에 있다는 판단이다. 물론 그 판단은 보편성을 결여한 것으로서 명백히 정치성을 띤다. 그래서 이 사태는 심히 우려스럽다.이 우려는 좀 더 넓은 지평에서 나온 것이다. 이 정권은 자신들이 세운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을 공격하며, 이제 사법부마저 개혁하겠다고 공언한다. 검찰과 감사원에 이어 사법부마저 저들 식으로 '개혁'당하면 이 나라에 권력을 견제할 기관은 모두 사라지는 셈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의미한다.사법부는 정의의 최후의 보루다. 조국, 윤미향, 박원순 사태를 거치면서 이 사회의 '윤리'는 진영의 희생물이 되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 운운하며 그들은 윤리의 문제를 모두 법원에 떠넘겨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사법부뿐인데, 법마저 진영에 가담한다면 이 나라에서 '정의'라는 말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2020-08-02 15:44:42

[이른 아침에] 수도 이전은 부동산 정책이 아니다

[이른 아침에] 수도 이전은 부동산 정책이 아니다

행정수도 이전론, 행정수도 완성론 등이 무성하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운을 띄우고 정부·여당에서 일사불란하게 논의를 끌고 가는 형국이다. 충청 표를 의식한 미래통합당은 어정쩡한 자세지만 본격적인 논란이 불거지면 가만히 있기는 불가능하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개헌론까지 들고나오는 마당에 언제까지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 부동산 정책 실패의 역풍, 단체장들의 연이은 성 추문 등 모든 이슈를 빨아들일 수 있는 '이슈의 블랙홀'이 현실화하기 전에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우선 용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청와대와 국회를 세종시로 옮기는 것은 수도 이전이라는 사실부터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에서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는 국회와 행정을 통할하며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소재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은 수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라고 했다. 국회와 대통령의 소재지가 수도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청와대와 국회를 옮기는 것은 따라서 대한민국의 수도를 이전하는 것으로 행정수도를 이전하거나 완성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정치적 선택이다. 헌재가 "이 사건 법률에 의한 신행정수도의 이전은 곧 우리나라 수도의 이전을 의미한다"고 못 박은 것도 그 때문이다.헌재의 '관습헌법론'을 비판하며 국회에서의 특별법 제정으로 수도 이전이 가능하다고 하는 견해도 문제가 있다. 관습헌법론의 논거에는 개인적으로도 동의하지 않는다. 성문법 국가에서, 그것도 엄격한 개정 절차를 거쳐야 하는 성문헌법을 가진 나라에서 헌법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는 '관습헌법'은 인정하기 어렵다. 수도가 서울인 '사실'이 수백 년간 이어져 왔다고 해서 수도가 서울이어야 한다는 국민의 확신이 헌법적 차원의 '규범'으로 격상되었다는 논리도 수긍할 수 없다. 하지만 헌재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과 헌재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은 다르다.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은 헌재에 의해 명시적으로 변경되기 전까지는 존중되어야 할 선례이다. 일단 법으로 밀어붙이고 헌재의 위헌 심판을 받아 보자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최종 결정 시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를 혼란도 그렇고, 현재의 헌법재판관 구성으로 보아 정부·여당에 유리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관측도 헌재를 정치적으로 편향된 기관으로 당연시하는 불편한 의견이다.정치적 목적의 수도 이전론 역시 마땅치 않다. 당장은 심각한 부동산 문제의 해법으로 제기된 행정수도론이지만 비판이 일자 국가균형발전 명분을 덧붙이고 있다. 부동산 정책은 그 자체로 엄중한 민생 문제이고 반드시 해법을 찾아야 하는 사안이다. 수도 이전은 부동산 문제에 대한 엉뚱한 해답일 뿐이다. 행정수도론이 나오자 세종시 집값이 폭등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국가균형발전론 역시 합당한 논거가 되기 어렵다. 국토균형발전은 헌법에서 요구하는 국가의 의무이다. 정권에 따라 부침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공공기관 이전 등을 통해 꾸준히 추진되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 소재 공공기관 등의 이전을 재차 추진하겠다고 한다.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간의 정책 성과를 면밀히 검토한 후 보완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전한 공공기관과 그 직원들이 해당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 발전에 기여해 왔는가. 소요된 비용과 노력에 비해 성과가 크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지역 대학 졸업생에게 가산점을 부여하여 해당 기관의 취업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등 다양한 균형발전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대한민국의 수도가 반드시 서울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적 필요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도 있다. 하지만 부동산 정책 실패의 시선을 돌리려 하거나 선거에서 '재미 좀 보기 위해' 던지는 화두여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수도는 국가의 백년대계와 통합의 상징성 그리고 미래지향성을 염두에 둔 곳이어야 한다. 만약 수도를 이전한다면 개헌이나 국민투표 등 국민적 합의를 위한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020-07-26 14:23:31

[이른 아침에] 부동산 정책 실패의 교훈

[이른 아침에] 부동산 정책 실패의 교훈

우격다짐.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이른바 7·10대책이 특히 그렇다. 정부는 3주택 이상의 경우 취득세율은 최고 12배로, 종합부동산세율은 2배 혹은 거의 2배로, 양도세 최고 세율은 최고 20%포인트를 한꺼번에 인상하기로 했다. 부동산을 사고, 팔고, 보유하는 모든 단계의 세금을 대폭 올리겠다는 것이다. 주택 임대사업자 혜택을 소급해서 없앤다는 대책도 나왔다. 법치주의와 예측 가능성 무시 등 세계 10위권 나라의 정책이라고 믿기 어렵게 거칠다. 국민에 대한 징벌이나 화풀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다주택 공직자의 집 팔기 강요 역시 우격다짐이다. 가뜩이나 정부 정책의 신뢰성을 상실한 마당이다. '반포 말고 청주' '아니 반포까지'로 이어진 블랙 코미디는 정부 정책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일단 정부의 조급함을 이해하려 해본다.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지만 정부 정책은 백약이 무효다. 정책 발표 때마다 집값이 오른다. 문재인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지지율은 동반 하락 중이다. "부동산은 자신 있다"던 문 대통령의 공언이 역풍으로 돌아오는 형국이다. 여권에 비상이 걸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 해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문제가 많다. 22번째인지 5번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6·17대책 발표 한 달도 되지 않아 새로운 정책이 나온 사실 자체가 이전의 정책이 모두 실패했음을 방증한다. 과거의 문제점을 반추하지 않은 채 서둘러 내놓는 정책은 실패를 예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의 일차적 관점은 규제 강화이다. 지난 2017년 6월 19일 정부의 첫 부동산 정책부터 규제 정책이다. 조정대상지역 추가 지정, 민간택지 전매 제한 강화, 조정대상지역 대출 강화 등이 내용이었다. 규제 지역을 확대하고 기존 규제책을 강화하는 8·2대책, 투기과열지구를 확대 지정하고,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 적용을 용이하게 한 9·5조치 등이 이어졌다. 주택 관련 대출 규제인 10·24대책도 나왔다. 정책의 실효성은 논외로 하고 규제 일변도 정책이 주는 신호만은 분명했다. 앞으로 주택 공급이 줄어들고 집 사기가 어려워질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수요 공급의 원리상 값이 오르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인사 실패도 한몫했다.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 기용부터 실책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자인한 과거 동료에게 문 대통령이 개인적 명예 회복의 기회를 준 것인지는 모르겠다. 역량의 한계가 명확했지만 모두가 상처를 입은 뒤에야 물러나게 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긴급 호출을 통해 특별 지시를 내려야 할 정도로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책임자를 문책해야 한다. 그럼에도 김 장관은 누구에겐가 화난 표정으로 5번째 정책을 스스로 발표한다. 정치인 장관의 강점도 있지만 그 단점도 분명하다. 정책 실패의 원인을 박근혜 정부 탓으로 돌리는 '정무적 감각' 때문이다. 현 정부는 전 정권과 달리 "부동산을 경기 부양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민생 자체의 해결이 아니라 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목표로 한 민주화 투쟁식 정책의 한계가 단적으로 드러난 게 부동산이다.부동산 가격 폭등은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서울의 강남과 강북, 서울과 수도권, 수도권과 다른 지역 사이의 격차를 부채질한다. 집값이 오른 지역 주민 역시 불편하다. 시세 차익을 손에 쥔 것도 아닌데 세금만 다락같이 오른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보유세 강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거위가 비명을 지르게 해서는 깃털을 뽑기 어렵다. 우선 실패를 실패로 인정해야 길이 열리는 법이다. 현재의 진용을 그대로 둔 채 규제와 징벌적 세금 강화 일변도로는 해결책이 보일 리 만무하다. 부동산 자체에만 관심을 두어서도 안 된다. 지역 균형발전, 일자리 정책, 교육 문제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정책의 재점검이 필요하다. 그에 앞서 투쟁식 정책, 국민과 싸우는 정책, 국민을 벌하려는 정책은 실패가 예정된 정책임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공약'임을 내세워 무리하게 밀고 나가는 다른 정책 역시 다시 돌아볼 수 있다면 부동산 정책 실패의 교훈은 쓴 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20-07-12 15:15:35

[이른 아침에] 권언유착과 공작정치

[이른 아침에] 권언유착과 공작정치

"물론 조국을 자랑스러워할 이유야 수천 가지가 넘지. 그런데 막상 대려고 하면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 독일에서 들었던 노래 가사다. 요즘 '검찰 개혁'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 가사가 떠오른다. 나도 검찰 개혁에 찬성했다. 아니, 지금도 찬성한다. 검찰을 개혁해야 할 이유도 수없이 많다. 근데 정작 대려고 하면 떠오르는 게 없다. 왜 그럴까?검찰총장을 임명할 때 대통령은 그에게 "산 권력에도 칼을 대달라"고 당부했다. 그 말이 빈말이 되는 데에는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정작 그의 검찰의 칼이 조국을 향하자, 당정청은 물론이고 어용 언론과 어용 지식인, 광신적 지지자들이 일제히 검찰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들의 '검찰 개혁'은 애초에 공정이나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검찰총장을 향한 공세는 파상적이었다. 1차 공격은 정권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자들과 한겨레신문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검찰총장에게 성 접대의 누명을 씌우려 했다. 본인을 향한 공격이 불발로 끝나니, 주변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2차 공격은 그의 장모를 향했고, 한창 진행 중인 3차 공격은 그의 측근을 향하고 있다.발단은 채널A 기자의 무리한 취재였다. 그가 빌미를 제공하자, 그들은 곧바로 '윤 총장의 측근 한동훈 검사장이 채널A 기자와 짜고 수감 중인 이철 씨를 협박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비리를 캐내어 4·15 총선에 영향을 끼치려 했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MBC의 함정취재를 활용해 이 허구를 현실로 만들려 했다.채널A 기자가 유시민을 낚으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한 검사장은 "유시민에는 관심 없다. 신라젠 사건은 다중 피해가 발생한 서민·민생 금융범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보도를 반박한 서울중앙지검에서도 이 발언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 검사장은 애초에 유시민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총선 얘기도 마찬가지다. 녹취록을 보면 총선 얘기는 제보자 지모 씨가 꺼낸다. 하지만 채널A 기자는 미끼를 물지 않고 '선거 전이든 후든 상관 없다'고 대답한다. 기자는 선거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검사와 기자가 짜고 유시민의 비리를 캐서 총선에 영향을 끼치려 했다'는 스토리의 골격이 무너진 셈이다. 이 음모론, 누구의 작품일까?단서는 황희석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의 SNS에서 찾을 수 있다. 제보자 지모 씨와 채널A 기자가 세 번째 만나던 날, 황희석 최고위원은 페이스북에 최강욱 의원과 찍은 사진을 올리며 "이제 둘이서 작전에 들어갑니다"라고 썼다. 이것으로 보아 문제의 음모론이 최강욱-황희석이 "작전"을 위해 작성한 시나리오라고 추정하는 게 합리적일 게다.제보자 지모 씨가 거짓말을 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는 언론에 나와 자신이 이철 씨의 "오랜 지인"이라고 했으나, 실은 그와 전혀 면식이 없었다고 한다. 그를 이철 씨와 연결시킨 것은 여당 의원의 법무법인에서 일하는 변호사였다. 또 지모 씨는 이철 씨가 로비를 한 정치인들의 리스트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이철 씨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단다.문제의 지모 씨는 사기·횡령·협박죄로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다. 이 또한 처음이 아니다. 조국 사태 때는 언론플레이에 수상한 금융 브로커들을 활용했고, 한명숙 복권운동에도 역시 전과를 가진 이들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황당한 것은 사기 전력이 있는 이가 거짓말까지 해가며 연출한 음모론 시나리오가 법무부 장관의 머리에까지 입력됐다는 데에 있다.진상도 밝혀지기 전에 장관은 사건의 성격을 '검언유착'으로 규정하고 들어갔다. 왜 그러는 걸까? 문제의 한 검사장은 이미 좌천되어 쫓겨나 있던 상태이니, 윤석열 총장을 노린 공작이라고 봐야 할 게다. 사상 두 번째로 이루어진 지휘권 발동 사태. 그 시작에는 사기꾼을 동원해 벌인 사기극이 있었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다. 이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이다.

2020-07-05 15:36:15

[이른 아침에] ‘볼턴 회고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이른 아침에] ‘볼턴 회고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이 태평양을 사이에 둔 한미 양국을 흔들고 있다. '그 일이 일어난 방'이라는 제목처럼 볼턴의 책은 당대에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운 백악관 내부 모습을 폭로하고 있다. 미국 정가는 볼턴의 책이 오는 11월 대선에 미칠 영향력에 관심을 쏟는 듯하다. 우리는 볼턴이 밝힌 북핵 협상 관련 기록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김여정의 언어 폭탄에 이은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군사적 도발 예고, 김정은의 군사 행동 보류 지시 등으로 모두 예민해진 시점에 회고록이 공개되어서일까. 볼턴의 책은 본토에서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관심 대상이 된 것 같다. 청와대와 전·현직 참모들도 말을 보태고, 정치권과 언론도 한마디씩 거든다.이른바 진보 진영은 볼턴이 일본과 함께 "한반도 통일의 역사적 전환이 될 천재일우의 기회"를 방해한 존재라고 본다. "존 볼턴 스스로 누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눈물겹게 애쓰는지 말하고 있다."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의 말이다. 반면 소위 보수 진영에 볼턴은 구세주다. 트럼프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한 채 영변 핵시설 파괴와 제재 해제를 교환할 수도 있었던 재앙적 선택을 볼턴이 막았다는 것이다.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분식평화, 남북 위장평화 쇼와 관련된 여러 의문에 대해" 국정조사라도 하겠다고 한다. 언론의 시각도 진영에 따라 극단으로 나뉜다. 아쉬운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정치권과 언론은 늘 외교안보 문제에 대한 초당적 대처를 주문한다. 하지만 실제는 대개 구두선에 그치고 만다. 이번 사안 역시 마찬가지다. 한반도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외교 비사가 공개된 마당에 '토착분단세력' '대국민사기극'으로 상대 진영 비난과 험담만 주고받을 뿐 진지한 성찰과 대안 모색에는 관심이 없다.국제 정세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식견과 경험 부족, 참모들의 분열이 초래한 백악관의 외교적 난맥상은 사실 새롭지 않다. 볼턴 회고록은 그에 관한 자세한 실상을 밝힌 것뿐이라는 게 6월 25일 자 미국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의 평가이다. 포린 폴리시의 분석은 우리 청와대와 진보 진영의 평가와는 결이 많이 다르다. 볼턴은 이란 문제와 관련, 미국 국익보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익을 앞세운 인물이다. 볼턴은 트럼프가 이란과의 협상 결정을 내리면 즉시 그만두려고 두 줄짜리 사직서를 준비했다고 한다. 반면 북한과의 협상은 큰 불만이 없었다. 볼턴은 김정은의 북한에 대해 '용인할 수 있었다'(can stomach)고 한다. 사실이라면 북핵 협상 실패는 볼턴의 방해보다 '완전한 핵 폐기'라는 미국의 원칙에 북한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이를 포함해 볼턴 회고록은 다방면에서 우리에게 큰 과제를 안겼다. 볼턴이 새로운 비밀을 폭로하진 않았어도 미국 외교의 깊숙하고 내밀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외교문서 해제 시에나 알 수 있는 일들을 시차를 두고 중계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자신의 관점에서 본 사실관계이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왜곡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놓고 보수·진보가 진영에 따라 아전인수만 해서는 우리가 얻을 게 없다. 이념을 떠나 모든 전문가들을 모아 상황과 맥락을 덧붙이며 볼턴 회고록을 분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실패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미래의 지침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북핵 해법은 미국에만 맡길 수도 없고, 볼턴만 없으면 만사형통일 수도 없다. 한반도 평화가 우선인 대한민국. 체제 생존이 당면 과제인 북한. 국민과 언론에 비치는 모습이 가장 큰 관심사인 미국 지도자. 그 사이에서 비핵화와 제재 해제를 놓고 벌이는 협상이 수월할 리 만무하다. 트럼프가 재선이 되든,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든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피지기라고 백전백승할 수는 없지만 지피지기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최근 북한 도발에 직면하여 민주당과 통합당은 외교안보 연석회의를 가진 바 있다. 다시 한번, 아니 여러 번 정치권이 전문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 볼턴 회고록을 놓고 지피지기를 위한 분석과 대안 모색이 있어야 한다. 북한 핵 문제는 보수·진보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020-06-28 14:39:57

[이른 아침에] 라스트 댄스

[이른 아침에] 라스트 댄스

대구시는 억울한 게 많다. 코로나19로 그 고생을 하고도 자꾸 욕을 먹는다. 심지어 지난 민선 6기 때는 하는 게 없다는 소리도 들었다. 대구 혁신, 특히 산업의 구조를 바꾼다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닌데 말이다. 특히나 통합신공항은 칭찬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비난에 시달렸고 급기야 가당찮은 이유로 시장이 고발을 당하기까지 했다. 다 억울한 일들이었다. 굳이 말을 하자면 대구시가 이뤄낸 성과는 많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 현대로보틱스, 롯데케미칼을 대구로 유치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2·28민주운동은 국가지정기념일이 되었으며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도 선정되었다. 그뿐만 아니다. 15년 동안이나 끌어온 신청사 문제를 해결했고 대구의 동서 균형발전을 위해 서대구역세권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잘 알아주지 않는다. 대신 대구시의 잘못은 작은 것도 크게 다룬다. 긴급생계자금 부정수급 논란도 그렇다. 대구시가 마치 엄청난 죄라도 지은 것처럼 성토를 하지만 사실은 좀 억울하다. 3천900여 명의 부정수급자 중 대구시 공무원은 74명이었고 그중에서도 본인이 직접 신청한 경우는 5건이 전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푼의 돈이라도 시민에게 더 나눠주려는 충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물론, 대구시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그렇다면 대구 시민은 괜찮을까? 애석하게도 시민의 입장에선 그런 노력들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 IT 기업들은 대구시가 예전보다 더 불공정하고 편파적이 되었다고 한다. 긴급생계자금 지원도 그렇다. 좋은 뜻에서 그랬다지만 왜 그렇게 매사에 시민과 공무원을 구분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코로나19, 그 혹독했던 '대구살이'를 치르고도 단지 동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생계자금을 못 받은 시민이 많았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남의 집에서 사는 것일 뿐, 건강보험, 가족관계 등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정부보다 대구시가 더 세심히 챙겨줄 거라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의 제기 신청도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한 방송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묻자 '어차피 기준이 바뀌면 그에 따라 또 못 받는 사람은 생기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러면 시민이 억울해진다. 너희들의 사정이야 어떻든 우린 총합만 맞으면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에서 주는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하러 갔더니 5부제가 해제되었는데도 해당 요일에 맞춰 다시 오라고 한다. 심지어 대기자가 한 명도 없는데 그런다. 재난지원금 선불카드 지급 방식도 개선한다고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현장에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시민은 자꾸 억울하다. 어떨 땐 대구에 살아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미 프로농구 NBA 1997-98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시카고 불스 구단은 시즌이 끝나면 필 잭슨 감독을 해임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선수들에게도 팀 해체 수준의 리빌딩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심지어 제리 크라우스 단장은 필 잭슨이 82승 무패, 즉 시즌 전승을 달성한다고 해도 그를 자를 것이라고까지 했다. NBA 우승컵을 무려 다섯 번이나 가져온 감독과 선수들이었다. 팀 전체가 술렁거렸고 마이클 조던을 비롯한 선수들과 팬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시즌이 시작되자 감독과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필 잭슨은 이번 시즌의 주제를 발표하겠다고 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핸드북을 나눠주었고, 그 표지엔 '라스트 댄스'(Last Dance)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해, 시카고 불스의 선수들은 구단이 아니라 팀을 위해, 자신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팬과 관중을 위해 뛰었다. 그들의 플레이는 현란하고 창의적이었으며 아름답고 격렬했다. 마치 춤을 추듯 그들의 농구에는 그들만의 리듬이 있었다. 그리고 필 잭슨 감독은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카고 불스는 여섯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대구시가 대규모 조직 개편과 인사 혁신을 단행할 것이라고 한다. 시민을 위하는 마음과 용기가 그 기준이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더 잘할 수 있는지, 그런데 그게 왜 잘 안 되었는지 권영진 시장은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내야 한다. 대구 혁신이 제대로 되려면 그래야 한다. 민선 7기, 남은 날들이 '라스트 댄스'처럼 되기를 바란다.

2020-06-21 16:09:05

[이른 아침에] 그 모든 순간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른 아침에] 그 모든 순간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1963년 박정희 혁명정부의 '의료보험법' 제정은 우리나라 의료보험(건강보험) 도입의 최초 시도였다. 시범사업이던 의료보험은 박정희 정권이 1977년 공무원과 대기업 근로자 등을 대상으로 강제 가입 방식의 직장의료보험을 실시하면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전 국민 의료보험은 1986년 전두환 정권이 도입 계획을 발표하였고, 1989년 노태우 정권 때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직장·지역별 조합과 재정 통합으로 지금의 국민건강보험을 완성한 것은 2000년 김대중 정권이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게 단기간에 도입됐다고 한다. 독일은 100년, 일본은 36년 걸린 일을 한국은 1977년 기준으로 불과 12년 만에 전 국민 의료보험을 달성했기 때문이다.건강보험의 역사는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적 역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본격적인 의료보험 시행을 결정할 당시 각료들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하였다. 하지만 북한 주민은 무상 의료를 제공받는다는 선전이 박 대통령의 결단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신 말기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의식한 유화적 조치이기도 하였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걸쳐 실시한 전 국민 의료보험도 1987년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다. "전 국민 의료보험은 노태우 정권의 정치적 승부수"라는 평가도 그 때문이다. 건강보험 통합 역시 시대적 산물이다. 2000년 통합 전까지 227개 지역의료보험조합, 139개 직장의료보험조합 등이 난립해 있었다. 직장과 지역, 부유한 조합과 가난한 조합 간 첨예한 이해관계 대립으로 이들의 통합은 고도의 정치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사회적 대타협을 추구한 김대중 정부의 공이 크지만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상황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코로나19 위기 극복에 전 국민 건강보험을 중심으로 한 우리 의료체계가 절대적 역할을 했다. 일부의 주장처럼 박정희 대통령만의 공도 아니고 과거 정권의 기여를 무시한 채 문재인 정부의 치적으로만 내세울 일도 아니다. 주권자인 국민과 역대 정권이 함께 만들어 온 것이다. 한마디로 이른바 보수와 진보 정권을 통해 완성된 대한민국의 총체적 역량이다. 수십 년간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2020년의 우리가 '방역 선진국'을 자랑하며 의료 한류를 외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정치적 약점을 들어 특정 정권 혹은 지도자를 폄하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우리의 방역과 보건의료체계가 세계 최고 수준임을 확인했다. 사스와 메르스 때 경험을 살려 대응체계를 발전시켜온 결과다"라고 언급한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3주년 연설도 그런 맥락이다.'포용과 협치'를 내세운 문재인 정권이 3년을 넘어섰다. 범여권이 190석을 석권한 총선이 끝나고 새로운 21대 국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대만으로 그친 포용과 협치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현충원에 있는 이른바 친일파 묘소 '파묘'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다짐한다. 과거 왕조시대에나 들어온 '부관참시형'의 재연인 듯 섬뜩하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수많은 모순과 문제가 '친일파' 때문이라는 단순한 역사 인식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백선엽 장군이 서울 현충원에 안장될 경우 묘소가 뽑혀 나갈지 모른다는 말로 대전 현충원을 권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곳곳에서 박정희, 전두환의 이름과 이미지를 없애고 지우는 작업에 분주한 것도 마찬가지다. 극한 가난을 물리치고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어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이 우리의 목표"라는 대통령의 다짐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 낸 역사를 부정하는 것인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정호승 시인은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알지 못했음을 "가끔 후회한다"고 노래했다. 과거를 부정하고 묘소를 파묘해야 역사가 전진하는 게 아니다. 설사 부끄러운 역사라 해도 관련 유적을 부정적 유산(negative heritage)이란 이름으로 일부러 보존하는 게 선진국이다. 새로 시작하는 정치인들은 존재하지 않는 순백의 역사에 대한 집착보다 미래를 향한 징검다리 돌 하나 놓는 일에 천착해야 한다. 의료보험의 역사에서 보듯 그때 그 사람이 대한민국의 꽃봉오리였음을 나중에라도 알 수 있게 말이다.

2020-05-31 16:02:34

[이른 아침에] 윤미향 당선자는 사퇴하는 게 맞다

[이른 아침에] 윤미향 당선자는 사퇴하는 게 맞다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습니다.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합니다." 이달 7일, 기자회견을 끝내며 이용수 할머니가 한 말이다. 파장은 컸다. '이용수 할머니, 위안부 단체에 이용만 당해'라는 제목의 뉴스가 줄을 이었다.보통의 경우라면 뭐 이런 나쁜 사람들이 다 있냐며 화를 냈을 법도 한데 이번엔 좀 달랐다.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혹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에 대한 평소의 생각이 그랬다. 그들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30여 년을 노력해온 사람들이다. 피해자 할머니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고 반인륜적 범죄의 진상을 밝힘으로써 더 나은 사회,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써온 사람들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래서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있고 나서도 감히 윤미향 당선자를 함부로 의심할 수가 없었다.오히려 정의연을 악의로 대하고 사태를 정쟁으로 몰고 가려는 듯해 보이는 몇몇 언론의 태도와 저의가 더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왠지 신나고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정의연을 공격하는 단체들도 볼썽사나웠다. 소녀상 철거 주장에 이어 윤미향 당선자가 수요집회를 통해 성노예, 매춘 등의 개념을 청소년들에게 주입했다며 그를 청소년보호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고발하는 대목에 이르면 정의연에 대한 없던 호의도 생길 지경이었다.그런데 정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의연과 윤미향 당선자가 의심스럽다.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의혹이나 비난의 목소리 때문이 아니다. 검찰 수사 또한 지켜보면 될 일이다. 정작 정의연과 윤미향 당선자가 뭔가 이상해 보이기 시작한 건, 그리고 그게 갈수록 심해지는 건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해명' 때문이다.이를테면 기자회견이 있은 다음 날, 정의연은 이용수 할머니에게 성금 1억원을 전달한 영수증을 공개했다. 피해자 할머니와 자신들이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라면서 말이다. 이건 낯설고 삭막하다. 설사 부모가 돈 때문에 화를 냈기로서니 돌아서기 무섭게 그 부모에게 얼마를 줬다며 영수증을 공개하는 자식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그 태도로만 보면 그들에게 이용수 할머니는 이미 '저쪽 사람'이었다. 쉼터 관련 해명은 더 이상하다. 굳이 경기도 안성까지 간 이유, 건물을 비싸게 사서 싸게 되판 이유 등이 말은 될지 몰라도 납득이 안 된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이 어쩜 그렇게 연달아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자신의 부친을 쉼터관리인으로 고용한 것에 대한 윤미향 당선자의 해명은 좀 기가 막힌다. 우리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는 건 시민운동 단체의 대표가 할 소리는 아니다.그리고 한나절 만에 말을 바꾼,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사게 된 경위에 대한 해명도 이해가 안 된다. 적금 3개를 깨고 가족들로부터 돈을 빌려 집을 샀던 겨우 8년 전 일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도무지 있을 것 같지가 않다.그들의 말처럼 정의연의 활동이 피해자 지원에만 국한되는 게 아닌 건 맞다. 하지만 피해자 할머니들은 정의연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시작이며 끝이다. 할머니들의 마음이, 할머니들의 생각이 당연히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 만큼 윤미향 당선자는 출마하기 전에 먼저 이용수 할머니에게 허락을 구했어야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자고 했으면 그랬어야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이 급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쉼터 관련 해명에서도 당시 '상황이 급박해서'라고 했다. 앞으로 그 '급박한 상황'이 얼마나 더 생길지 모를 일이다.정의연은 국회로 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다른 시민운동단체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활동 이력은 금배지를 달기 위한 경력이 아니다. 이번 논란으로 친일파가 준동하는 것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왜곡하던 사람들이 정의를 떠벌리는 것도 문제지만 먼저 윤미향 당선자는 사퇴하는 게 맞다. 피해자 할머니가 가슴 아파 한다. 더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그리고 하나만 덧붙이면 윤미향 '당선인'이 아니라 윤미향 '당선자'가 맞다. 후보일 때는 '자'(者)였다가 선거에서 이기는 순간 '인'(人)이 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헌법에도 당선자가 있을 뿐 당선인은 없다.

2020-05-24 15:52:11

[이른 아침에] 위안부 문제는 정쟁 대상이 아니다

[이른 아침에] 위안부 문제는 정쟁 대상이 아니다

"고무신이 벗겨진 채 소녀는 끌려갔네/ 부를수록 집은 멀고 총칼은 목에 닿고/ 악문 채 몸을 봉해도 군홧발에 녹아갔네/ 총을 물고 울었건만 목숨은 욕(辱)을 넘어/ 헐은 몸 닦고 닦아 옛집 앞에 섰건만/ 코 베인 고무신처럼 생이 자꾸 벗겨지네."(정수자, '슬픈 고무신')시에서처럼 '고무신이 벗겨진 채 끌려간 소녀'였던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제는 편안한 여생을 보내시는 줄 알았다. '정의연'(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주최 수요 시위 덕분에 위안부 문제는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후원금 등을 통해 그분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곤 한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은 피해 할머니들이 여전히 마음고생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코 베인 고무신처럼 생이 자꾸 벗겨지는' 경험이 아닐까 싶다.정의연 관련 이용수 할머니의 분노는 크게 두 가지다. 후원금 사용과 지금까지 정의연의 운동 방식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우선 회계 문제에 대한 여러 지적은 정의연이 귀담아들어야 한다. 정의연은 '공익'재단법인이기 때문이다. 법에 따라 정의연은 기부금과 국고보조금을 받고 세금 혜택이 부여된다. 대신 모든 활동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무관청의 엄격한 감독을 받아야 한다. 공개된 기록만 보아도 회계 기준에 비추어 엉성하고 투명하지 않은 돈의 쓰임새가 드러난다.이런 상황을 방치한 국가인권위원회와 세무 당국의 감독과 함께 정의연은 외부 감사 등을 통해 의혹에 대해 성실하게 해명해야 할 도덕적·법률적 의무가 있다. 책임질 일이 있다면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게 정의연 활동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회계에 대한 비판이 그간 정의연의 활동과 성취를 부인하는 게 아님은 당연하다. 따라서 '친일파' '보수세력' 운운하는 여권 일각의 대응은 어처구니없다. 생뚱맞은 프레임 전환 시도는 의구심을 키우는 일이다.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당선인의 개인적 의혹을 여권이 정쟁으로 확대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권력형 비리 등 야당이 거들어야 할 사안도 아니다.정치권은 오히려 이용수 할머니의 다른 지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의연 활동 방식에 대한 재검토가 그것이다. 이 할머니는 "학생들에게 증오만 키우는" 수요 시위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용당할 만큼 당하고 참을 만큼 참았다는 이 할머니의 증언에서는 피해자들의 진정한 의견이 배제된 활동가 중심의 운동에 대한 서운함이 드러난다. 그간 위안부 관련 활동을 해 온 여러 인사들이 국회와 행정부 요직에 진출한 바 있다. 윤 당선인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국회의원이 되면 안 된다는 이 할머니의 발언은 그간 많은 이들이 위안부 문제를 출세(?)의 관문으로 삼아온 데 대한 피해 의식의 발로라 생각된다. 이른바 피해자 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의연 활동에 대한 반성과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할머니의 발언처럼 위안부 관련 운동이 미래지향적이 되려면 실질적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진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2011년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문제 등의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 정부의 부작위가 위헌이라고 결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강국 재판관 등은 반대의견을 남겼다.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위안부로 동원된 후 인간으로서의 삶을 송두리째 박탈당하고 그 가해자인 일본국으로부터 인간적 사과마저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이 사건 청구인들의 절박한 심정을 생각한다면…어떻게든 우리 정부가 국가적 노력을 다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우리 모두 간절하다…청구인들이 처해 있는 기본권 구제의 중요성, 절박성을 해결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을 헌법이나 법령, 기타 헌법적 법리에 의하여도 발견해 낼 수 없다면, 결국 이들의 법적 지위를 해결하는 문제는 정치권력에 맡겨져 있다…."친일·반일 논쟁을 떠나 정치권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개원도 하기 전에 정쟁부터 시작하는 21대 국회라면 그 전도는 보나 마나다. 여야는 정치적 드잡이를 그치고 위안부 할머니들 생전에 발에 꼭 맞는 고무신을 신겨드리는 일부터 시작하기 바란다.

2020-05-17 15:58:27

[이른 아침에] 보수 세력·정당에 미래가 있으려면

[이른 아침에] 보수 세력·정당에 미래가 있으려면

지난주 초까지 계속된 미래통합당의 내홍은 총선 참패 후 질서 있는 퇴각으로 후일의 전쟁을 대비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곧 물러날 지도부가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정하고 김종인 위원장을 모시기 위해 애면글면한 게 사달의 시작이다. 비대위 체제로 전환할지, 비대위로 간다면 누구를 대표로 내세울지, 조기 전당대회로 새 지도부를 꾸릴지는 21대 국회 새로운 당선인들이 결정하도록 맡겼어야 한다. 반성과 수습은 고사하고 내부 총질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고 보수의 미래가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비대위 문제 등 당의 진로는 8일 선출되는 원내대표를 포함해 21대 당선인들에게 맡겨졌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했으니 당연히 새 사람들이 결정해야 할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당선인들이 우선 고민해야 할 것은 보수 정당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다. 개혁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방향이다. 벌써 40대 대선 주자 운운하는 것은 당내 갈등부터 부르는 성급한 김칫국이다. 난파된 배를 수리하기도 전에 선장부터 내정하자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향후 그려야 할 보수의 청사진은 한마디로 "정체성 확립은 분명하게, 정책적 대응은 유연하게"라고 말할 수 있다. 영국 보수당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영국 보수당은 1945년 7월 총선에서 노동당에 참패한다. 1935년 총선에서 얻은 432석의 절반도 안 되는 213석에 그쳤다. 보수 대학살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2차 대전 전쟁영웅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었지만 국민은 이들을 외면했다. 전쟁 후 국민의 요구가 달라진 사실을 주목하지 못한 결과였다. 먹고사는 문제, 생존의 문제에 봉착한 국민을 위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의 비전이 제시되었지만 보수당은 그에 필요한 사회개혁을 사회주의로 터부시했다.선거 참패 후 보수당은 비로소 시대의 흐름을 수용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1947년 발표한 '산업헌장'에서 보수당은 산업에 대한 국가 개입, 노사 간 협력 인정, 국가보건서비스(NHS) 설립 등 복지에 대한 국가책임을 대폭 수용하는 개혁 방안을 발표한다. 청년보수운동과 재정 및 당 후보 충원 구조 개혁을 통해 젊고 유능한 청년들이 정치에 입문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중·하류층 출신이지만 나중에 쟁쟁한 보수당 총리가 된 에드워드 히스,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등이 정치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도 과거의 귀족적 정당에서 탈피한 보수당의 개혁 덕분이었다. 향후 20년은 집권이 불가능하다고 자조했던 보수당은 1951년 정권 탈환 후 1964년까지 장기 집권 시기를 구가하게 된다.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이 가야 할 길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가. 여당의 실정이 두드러짐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야당을 외면한 것은 시대 흐름과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보수 세력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현 정부 일자리 정책에 문제가 있지만 일자리 자체가 사라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보수정당의 대안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긴급재난구호금 얘기가 나왔을 때 재정건전성을 들고 나온 것은 당장 굶고 있는 국민에게 나중에 있을 잔치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안도 공감 능력도 부족하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보수주의란 모든 변화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곧 사라져버릴 일시적인 시대적 유행이나 사고방식에 저항하며 사회적 균형을 잡는 것이다." 영국 보수당이 경제·사회정책 등 현안에 대해 최대한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노동당과 거의 차이가 없었던 데는 이 같은 인식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영국 보수당은 정책적 유연성과 별개로 보수주의의 이념적 정체성만은 분명히 하고 있다. 지금까지 통합당을 비롯한 우리나라 보수 정당이 말하는 이념적 정체성은 완고한 고집으로 느껴지기 쉽다. 국민들에게 왜 보수주의가 사회주의보다 우월한지 한마디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국민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믿는다. 보수주의자들은 국민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영국 보수당이 밝힌 보수의 정체성이 우리나라 보수의 정체성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2020-05-03 18:30:00

[이른 아침에] 우린 이미 선진국이다

[이른 아침에] 우린 이미 선진국이다

1970년대 말 즈음이었나 보다. 대통령이 그랬다. 세계가 알아주는 부자 나라, 1980년이면 우리도 선진국이 된다고 했다. 그래 봤자 고작 몇 년 뒤지만 그땐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순순히, 의심 없이 믿었다. 우리가 미국처럼, 일본처럼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그 대망의 서기 1980년에 우리나라는 여전히 선진국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밖에 못 되었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가끔 TV나 라디오에서 우리 국민들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할 뿐이었다. 안타까웠다. 대통령이 불의의 사고만 안 당했더라도 착착 계획대로 선진국이 되었을 성싶어 더 아쉬웠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듯 선진국은 우리의 소망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쉼 없이 우리를 나아가게 했다.1990년대, 나라에선 한층 '선진국 되기'에 박차를 가했다. 시대는 포스트 모던했어도 방법은 같았다. 온 국민이 똘똘 뭉쳐 함께 노력하는 것이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아 기업은 나날이 성장했다. 국민소득 1만달러도 달성했다. 그러나 20세기 막바지에 찾아온 외환위기가 그 성과를 앗아갔다. 선진국이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는 해외발 뉴스가 전해지자 국민들은 마치 내 탓처럼 여겼다. 유력한 인사들은 '사람들이 너나없이 해외여행 간다고 할 때 알아봤다'며 그런 마음에 가책을 더했다. 이른바 지식인들은 이로써 우린 또다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했다며 판정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선진국 문턱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자리매김되었다.2000년대, 인터넷이 열어젖힌 새로운 세상에서 남다른 노력으로 IT 강국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산업의 지평이 넓어지고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었지만 우리가 위치한 곳은 변함없이 선진국 문턱이었다. 심지어 IMF가 우리를 선진국이라고 해도 우린 아니라고 했다. 각계의 유력 인사와 전문가, 그리고 언론과 '사회의 어른'들이 나서서 그랬다. 국민소득이 1만달러일 때는 적어도 2만달러, 2만달러를 넘기면 다시 3만달러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3만달러에 이르자 우리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낮아서 아직은 선진국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고는 30여 년 전 부모 세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식 세대에게도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요구했다. 혹시라도 정부에 따라 이런 태도와 정책 기조가 바뀔라치면 가만있지 않았다. 지난해, 한 원로 경제학자는 소득주도성장과 근로시간 단축을 가리켜 '우리가 무슨 선진국이라도 된 줄 아느냐?'며 정부를 질책했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선진국과 싸워서는 절대 못 이긴다는 논리로 청년들을 타일렀다.돌아보면 선진국 문턱에서 보낸 세월이 어언 40여 년이다. '선진국에선 이렇게 한다더라'며 무엇이든 선진국을 따라 했다. 논쟁을 벌일 때도 선진국을 예로 들었고 정책을 수립할 때도 먼저 선진국의 사례부터 찾았다. 그렇게 선진국은 모든 것의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했다. 현실에선 미국과 유럽의 주요 나라, 그리고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관념적으론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신기루나 이상 같은 것이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상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이른바 선진국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치자 '한국은 이렇게 한다더라'며 우리를 배우고 따라 하려 든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한다. 한 국가의 총체적 역량과 정부의 실력은 위기 시에 드러난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일찍부터 신종 감염병을 인류에게 닥칠 중대한 위협으로 꼽으며 선진국들의 선도적 역할을 주문했다. 지금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우리다. 요즘 같아선 오히려 우리나라가 미국 같지 않고 일본 같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의 길이 세계의 길이 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몰랐다 해도 우린 이미 선진국이다. 선진국 문턱을 진즉에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다른 나라들이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에 찬사를 보내든 말든 우린 정부를 마음껏 비난하고 옥죄어도 되니 더욱 선진국이다. 소망은 이루어졌다. 그동안의 간절함은 좀 줄이고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더 많이 찾아보자. 선진국은 결국 그런 것이니 말이다.

2020-04-26 15:48:31

[이른 아침에] 마음껏 투표하자

[이른 아침에] 마음껏 투표하자

서울 광진을이 뜨겁다. 종로도 관심사다. PK 지역 판세도 연일 뉴스거리고 강원과 충청 지역 또한 흥미진진하다. 그 밖의 다른 곳들도 만만치 않다. 마치 자신들 지역구에 이번 총선의 운명이 걸린 듯 접전을 벌이며 화제를 낳고 있다. 그런데 TK는 조용하다. 4년 전만 해도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유승민이 자신의 정치적 가치를 입증할 수 있을지, 김부겸은 지역과 당색을 넘어 당선의 고지에 오르게 될지, 이른바 '진박'에 밀려난 흰색 점퍼들은 과연 얼마나 살아서 돌아올지, TK 지역은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 게 없다. 우리의 대표를 뽑는 일인데도 예전처럼 설레지 않고 별 재미도 없다는 사람들만 늘어났을 뿐이다.사실, 미래통합당이 대구경북 지역의 공천자를 발표하던 그날, 대구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판은 거의 파투가 나고 말았다. 듣도 보도 못한 '듣보잡'들이 난데없이 공천을 받았고 지역의 중진 현역은 너무나 간단히 다른 곳으로 지역구를 옮겨야 했다. 몇몇은 당을 위한 험지 출마라는 허울 아래 황망히 고향을 떠나야 했고 표밭을 갈고닦으며 공약 개발에 열중하던 지역의 예비후보들은 제대로 된 평가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싹이 잘려 나갔다.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던 대구 시민들은 기가 막혔다. 공천 발표 내용 중에 무엇 하나도 그럼직한 게 없었다. 하지만 황교안 대표는 이만큼 공천을 잘하기도 어렵다며 자화자찬을 했다. 공천을 진두지휘한 김형오 공관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공관위에는 대구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에게 대구는 장기판, 후보들은 졸처럼 보이는 듯했다. 결과적으로 동(洞)도 없고 구(區)도 없고 역사도 없는 도시처럼 취급당한 것과 별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TK가 보수의 성지라는 찬사는 그야말로 말의 성찬일 뿐이었다.지역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화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고 지역 언론들은 마구잡이식 '막천', 특정 인물을 꽂아 넣기 위한 '사천', 기준도 없고 원칙도 없고 전횡만 있는 '기원전 공천'이라며 거듭거듭 비판했다. 지역 인사들 또한 'TK 지역과 지역민들을 이렇게 무시해 놓고도 또 표를 달라고 할 것이냐?'며 미래통합당을 질타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잘못된 공천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바로잡히지 않았고 우리 또한 우리가 가진 유권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한 비판과 성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TK 지역민들만 딱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대개 끝이 났다. 희한하게도 선거철에 유권자가 '을'이 된 것이다.말할 것도 없이 유권자에겐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며 그건 유권자에게 주어진 신성하고도 불가침한 절대적 권리다. 아무도 그것으로 유권자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분히 그 권리를 선택적, 제한적으로 사용해 왔다. 보수를 지키기 위해, 우국충정에 못 이겨 표만 주고 무시를 당해도 참고 30여 년째 GRDP(지역내총생산)가 꼴찌인 것도 참고 갈수록 살림이 쪼그라들어도 참았다. 좋은 것들을 서울에 빼앗기고 경기에 빼앗기고 부산에 빼앗기는 걸 보면서도 한 번도 지지 정당을 바꾸지 않았다.이번 총선, 여든 야든 TK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쪽은 어차피 찍어줄 테니 그렇고 다른 쪽은 어차피 안 찍어줄 거라서 그렇다고 한다. 계속해서 이러면 보통 버림받거나 무시당하게 된다. 지금까지 그만큼 했으면 되었다. TK 정치가 다양해진다고 해서 보수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외연이 확장된다고 해서 진보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 나라가 망할 일은 더욱 아니다. 그러니 호락호락 보이지 말자. 현수막을 보면 다들 지역 발전을 위해 무엇무엇을 하겠다는데 왜 미래통합당의 것에는 대통령 타도와 좌파 척결밖에 없는지 물어보자.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할 건지, 생각하고 있는 대구경북의 청사진은 무엇인지도 들어보자. 이참에 포항 지진의 원인 규명과 피해 복구를 위해 누가 무엇을 했는지도 따져보자.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맞아서는 또 어느 정당 어떤 인물이 대구경북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살펴보자. 대구의 사전투표율이 가장 낮다고 한다. 이럴 때일수록 더 투표해야 한다. 4월 15일, 이번에는 아무것도 말고 오직 나와 우리 지역을 위해 마음껏 투표하자.

2020-04-12 15:41:15

[이른 아침에] 선거는 중간고사 시간이다

[이른 아침에] 선거는 중간고사 시간이다

국민이 주권자임을 실감할 기회사실상 선거로 평가 외에는 없어정책 기조 원하면 집권 세력 선택바꾸기를 바라면 야당 세력 선택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학생이 시험을 싫어하는 것은 성적에 대한 두려움이 큰 이유일 것이다. 시험을 열심히 준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선생 된 입장에서도 시험이 썩 달가운 건 아니다. 학생들의 답안을 보면서 열심히 가르친 결과가 이런 정도인지 나의 능력을 반성하게 된다. 보다 직접적 이유는 시험 문제에 있다. 객관식 문제는 출제가 번거롭지만 주관식 문제는 채점이 힘들다.모두가 반기지 않는 시험이어도 교육과정에서 시험을 통한 평가는 필수적이다. 교육학에서 평가는 그만큼 중요한 개념이다. 교육과정과 평가의 관계에 관하여 랠프 타일러(Ralph W. Tyler)는 "의도한 목표와 실제 얻어진 산출 간의 비교"라고 정의한다. 처음 설정한 목표와 실제 얻어진 결과를 비교하여 교육의 성취도를 측정하는 것이 평가이다. 최우수(A)부터 낙제(F)까지 과거의 성취를 평가하여 미래의 질적 향상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시험을 중간과 기말로 나누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선거 역시 시험과 유사하다. 선거의 기능 중 하나가 바로 평가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대표성의 부여, 평가와 선택, 정책 결정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한다. 평가와 선택은 특히 중요하다. 정당이나 후보자들은 선거에서 국민에게 다양한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선택받는다. 다음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그들이 제시한 목표와 성취 결과를 비교 평가하여야 한다. 평가를 통해 같은 선택을 할지 다른 선택을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국정을 위임받은 정권 담당자들이 흡족할 만한 성과를 올렸는지 검증하고 평가해야 한다. 잘했다면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상을, 잘못했다면 기회를 박탈하는 벌을 과해야 한다.미국은 선거의 평가 기능이 비교적 확실하게 작동한다. 4년의 대통령 임기 2년 차에 하원의원과 상원의원 일부에 대한 중간 선거가 치러진다. 자연스레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중간 평가가 이루어진다. 중간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국정 운영의 기조를 유지하지만, 패배 시 국정 운영의 기조 변화가 뒤따른다. 우리는 총선의 중간 평가적 성격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4년 임기의 국회의원 선거가 대통령 임기 중간에 치러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집권당이 총선을 통해 국정 운영 방향을 새롭게 점검할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이번 21대 총선은 중간 평가라는 총선의 성격에 적합한 선거이다. 2017년 5월 출범한 현 정부 임기 3년 차를 지난 마당이다. 지난 3년의 국정 운영 성과를 검증하고 평가함으로써 유권자들이 미래의 국정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집권 세력이 향후 2년 동안 국정 운영 기조를 유지할지 변경할지 국민의 뜻을 확인하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선거의 형식은 객관식이지만 내용은 주관식이다. 채점자 나름대로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꼼꼼하고 세밀한 채점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집권당이 내민 답안지를 예리한 눈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권력에서 소외된 야당보다 국민의 위임에 의해 권력을 장악한 집권 세력이 주된 평가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단순한 정파적 시각이 아니라 대의 민주주의의 당연한 요청이다. 선거법 개정 등 집권 세력이 야당과 국민을 상대로 권력을 운용해 온 정치 기조,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주 52시간제·탈원전 등 경제 정책 기조, 한미·한중·한일 관계 등에서 드러난 외교 정책 기조, 공수처 설치와 검찰 개혁 등을 내세운 사회 정책 기조 등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로 가려진 선거의 평가적 기능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간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기 원하면 집권 세력을, 바꾸기를 바라면 야당 세력을 선택하면 된다. 진영 논리에 치우쳐 허술한 답안지에 합격점을 매기면 안 된다. 그 반대 역시 곤란하긴 마찬가지다. 채점자가 중간고사에서 까다롭게 점수를 매겨야 학생이 기말고사를 열심히 준비하게 된다. 집권 세력이 성적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해야 한다. 국민이 주권자임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선거 외에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

2020-04-05 16:06:44

[이른 아침에] 대구경북이 만만한가?

[이른 아침에] 대구경북이 만만한가?

서문시장 한 바퀴 휙 돌고 나서는TK가 자기 것이라도 되는 양 행세미래통합당의 내리찍는 공천 행태지역 정서 안중에도 없는 업신여김역동적이다. 그리고 변화무쌍하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나뉘고 더불어민주당은 줄곧 이어져 이달 들어 위성 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낳았다. 그새 국민의당은 바른정당을 만나 바른미래당이 되었고 이때, 민주평화당이 갈라져 나왔으며 민주평화당은 지난 1월 대안신당을 파생시켰다. 바른미래당은 파행을 거듭한 끝에 양대 세력이 당을 나가 새로운보수당과 한 번 더 국민의당을 만들고 민주평화당과 대안신당이 껍데기만 남은 바른미래당과 살림을 합쳐 민생당이 되었다. 이게 다 3년 남짓 만에 일어난 일이다. 복잡하고 어렵다. 그래서 잘 모른다.다시, 새누리당이 이름을 바꿔 자유한국당이 되고 지난달에 새로운보수당과 미래를향한전진4.0 등 군소 정당을 통합해 미래통합당이 되었다. 이어 스스로 자매정당이라 일컫는 미래한국당을 낳았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한국당 출신이 만든 대한애국당은 우리공화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유통일당을 만나 자유공화당이 되었으나 금세 또 헤어져 지난주부턴 도로 우리공화당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우리공화당에서 갈라져 나온 친박신당도 있다. 이것도 3년 남짓 만에 일어난 일이다. 마찬가지로 복잡하고 어렵지만 이건 집안 족보 꿰듯이 안다. 대구경북 사람들이 그렇다.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다시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으로 이어지는 이 정당을 우리 편, 우리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이 정당과 관련된 일 또한 우리 동네 우리 일처럼 받아들인다. 스포츠로 치면 대구FC나 삼성라이온즈 격인 셈이다. 물론 대구경북 사람들이 시민축구단 만들 듯 힘을 모아 자발적으로 이 정당을 만든 건 아니다. 그리고 원래부터 이렇게 애착했던 것도 아니다.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대한 지지율은 부산경남이 대구경북보다 훨씬 더 높았다. 즉, 이 정당의 가장 강력한 연고 지역이 TK가 아니라 PK였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자당과 민정당에 대한 정서도 지금과는 성격이 좀 달랐다. 그땐 우리 정당이라기보단 집권여당 또는 전국정당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덧붙여 이보다 더 전인 1971년의 제7대 대통령선거는 영호남 지역 간의 표 쏠림 현상이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고 또 더 전인 1960년에는 이 당의 원조 격인 자유당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TK 지역에서 제일 먼저 터져 나오기도 했다.하지만 이 모든 과거를 뒤로한 채 지금, 면면히 이름을 바꿔온 이 미래통합당의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연고지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대구경북이다. 오래전 이 지역 출신들이 대통령을 할 때에 비해 근래 특별히 더 그럴 만한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고 대구경북에 사는 사람들이 이 정당으로부터 무슨 대단한 혜택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현재 미래통합당은 보수정당의 맥을 잇는 적장자, 그리고 대구경북은 그 보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내지는 보수의 심장이 되어 있다. 1990년 민자당 창당 당시 노태우 최고위원의 인사말이 '우리 당은 중도, 민주, 민족 세력의 믿음직한 결집처'였던 것에 비하면 지금 맹렬히 나부끼는 보수의 깃발이 좀 맥락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 최후의 보루, 즉 보수지킴이 역할을 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지난 총선 때는 소위 진박감별사의 온갖 추태를 참아내야 했고 어느 날 갑자기 내려온 이른바 서울 TK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4년을 감내했건만 이번 4·15 총선의 미래통합당 공천 행태를 보면 그건 약과였다. 사천, 막천, 기원전공천, 호떡공천 등 별별 말이 나올 만큼 기준도 원칙도 없이 일방적으로 내리찍은 공천이었고 어찌나 만만하게 보였는지 그 대부분이 대구경북에서 행해졌다. 그야말로 TK의 정서나 형편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대구경북 사람들을 철저하게 업신여긴 '능천'(凌薦)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그러고 보면 근래에 들어 이 정당에서 득세한 이들이 서문시장 한 바퀴 휙 돌고 나선 마치 TK가 자기 것이라도 되는 양 행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신동이 어딘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말이다. 우리가 무슨 보수지킴이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이제 그만하자. 대구 사람들은 그냥 대구를 지키고 경북 사람들도 그냥 경북을 지키자. 이 끝 모를 업신여김을 더는 못 하게 해야 한다.

2020-03-29 16:35:32

[이른 아침에] 절망의 늪, 희망의 늪

[이른 아침에] 절망의 늪, 희망의 늪

제 밥값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절망의 늪이 아닌 희망이 가득한 늪대구여! 경북이여! 대한민국이여!코로나19 극복을 위해 힘을 냅시다!'밥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밥을 먹는 데 드는 값'이 본디 뜻이겠지만 '밥을 먹은 만큼의 일이나 대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더 많이 쓰입니다. 밥값을 해라. 밥값 좀 했다. 밥값을 하고 있다.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밥값은 하며 사는지 묻는 것이지요. 강의 등으로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는 내가 선생으로서 밥값 하며 살고 있는지 느끼기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데 나 덕분에 용기를 얻어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는 학생의 고백을 들을 때 그래도 밥값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 따분하지만 아주 드문 이런 경험을 통해 그나마 밥값과 삶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정호승, '밥값') 시인은 밥값을 하기 위해 지옥에 다녀와야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옥은 종교와는 관계 없는 인생의 바닥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한번 성찰해 보기 위해서는 인생의 바닥에 다시 가봐야 한다는 게 시인의 생각입니다.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어 보이는 절망의 늪이 곧 바닥이요 지옥일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마찬가지겠지요.작금의 코로나19 사태는 우리에게 바닥이요 지옥입니다. 누가 원해서 이런 바닥에 이르렀겠습니까. 시인의 비유처럼 아무리 '밥값'하는 사람이 된다 해도 일부러 경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특히 대구경북 주민들에게는 정말 날벼락이지요. 외환위기와 같이 모든 국민이 겪는 위기라면 다를 수 있습니다. 대구경북 지역과 주민들에게만 유독 가혹한 시련은 더 견디기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런 바닥의 경험을 통해 더욱 성숙한 사람들로 거듭난 전력이 있습니다. 외환위기를 함께 극복해낸 경험이 그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감추기 바빠야 할 금붙이를 꺼내든 대한민국 국민들을 보고 외국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때도 그랬습니다. 시커먼 기름에 전 바위를 맨손으로 닦아내다니. 미친 거 아닌가라는 게 외부 관찰자들의 솔직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달려온 수많은 국민이 함께 자갈과 바위의 기름을 닦아낸 태안은 놀랄 만큼 빠르게 자연을 회복했습니다. 대구도 그럴 것입니다. "대구에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다. 고요함만 있다." 대구가 조용한 가운데 코로나19 종식을 선언하는 날, "대구가 코로나19 극복 모델이 될 것"이라는 외신의 관측은 과장이 아닙니다. 이제 바이러스와의 공존은 인류의 일상이 될 것입니다. 그때 대구는 집단적 인생의 바닥을 경험한 시민들 모두가 밥값을 해내는 지역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의료진과 공직자들의 헌신 역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인류에 봉사하는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히포크라테스 선서).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나이팅게일 선서). 의료진이 멘 십자가는 피하려 했으면 피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감염의 위험을 느끼며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는 전신 방호복을 그들은 기꺼이 입었습니다. 인류에 대한 봉사와 헌신이라는 숭고한 첫 맹세를 지키고 있는 것이지요. 생명을 구했다는 보람, 밥값을 제대로 했다는 충만함은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료인이 된 것은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다시 시인의 말입니다. "지금부터/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겠다/ 남은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희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겠다…만일 절망의 늪이 있다면/ 희망에도 늪이 있다/ 희망의 늪에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가득 빠져 있다."(정호승, '늪'). 아무리 어둡고 힘들어도 절망의 늪이라고 하지 맙시다. 모두가 제 밥값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희망의 늪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구여! 경북이여! 대한민국이여! 힘을 냅시다!

2020-03-08 15:38:32

[이른 아침에] '세상의 하루'를 지키는 힘

[이른 아침에] '세상의 하루'를 지키는 힘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 들 때까지 어제처럼 하루를 보내지 못하면 그런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변고가 생긴 것힘든 세상이다. 봄이면 찾아오는 황사 걱정하던 그때가 차라리 호시절이었다.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시커먼 수돗물, 원인을 알 수 없는 유독가스, 여기에 더해 일본 정부는 120만t에 달하는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겠다고 한다. 이래저래 걱정거리가 사방에서 옥죄어 온다. 그래도 사람들은 열심히 산다. 먹는 물이 걱정되면 정수기를 사고 마시는 공기가 나쁘다고 하면 공기청정기를 들여놓는다. 밖에 나갈 땐 KF80 황사마스크를 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KF94, KF99를 착용한다. 그렇게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매우 나쁜 날'에도 출근을 하고 수돗물 파동이 터져도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공기가 나빠 밖에서 운동을 못하면 집에서 이른바 '홈 트레이닝'이라도 한다. 그만큼 일상은 소중하다. 누구도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이 돌아간다. 각자의 하루가 모여 세상을 만들고 각자의 하루가 이어져 세상이 계속된다. 그렇기에 각자의 일상이 깨지면 세상도 깨진다.아침에 일어나서 늘 하던 일을 못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어제처럼 하루를 보내지 못하면, 그리고 그런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다면 세상에 변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건 대개 전쟁 아니면 질병에서 온다. 이번에도 그랬다. 우리가 그토록 아득바득 지켜온 일상이 코로나19에 흔들리고 있다. 늘 하듯이 출근을 못하고 늘 하듯이 쇼핑을 못하며 늘 하듯이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서로들 안녕하시라 말은 하지만 속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티를 내진 않는다. 두려운 마음도 꾹꾹 눌러 참는다. 이런 비정상적인 날들이 끝나지 않을 리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쨌든 버티려 애쓴다.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끼고 동료와 이야기할 때도 몇 발짝 떨어져서 하며 점심은 가급적 도시락을 싸 오거나 배달시켜 먹는다. 손을 자주 씻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또다시 열심히 산다. 바이러스에 밀려나 확 좁아진 영역에서도 어떤 이는 운전을 하고, 어떤 이는 배달을 하며,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서류 더미와 씨름을 하며 각자의 하루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여전히 세상은 계속된다. 그들이 일상의 끈을 부여잡고 놓지 않는 이상 세상은 삐걱대도 멈춰 서지 않는다.박 사장은 벌써부터 다다음 달을 걱정한다. 지금 영업을 못하니 그때 가면 더 어려워질 거란 이야기다. 그에겐 코로나19 못지않게 그것도 무섭다. 어쨌든 월세는 내야 하고 월급날은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처져 있던 목소리를 높이며 성을 낸다. 이 판국에 틈만 나면 대통령 비난하고 대구시장 욕하고 정부 관계자들의 말꼬리를 잡아 시비 거는 사람들은 대체 뭐냐는 거다. 하긴, 그건 적군이 앞마당까지 쳐들어왔는데 우리 장수에게 돌을 던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의 처절한 모습과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 대구시장의 얼굴과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의 부르튼 입술이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서울 사는 최모 씨도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다 '문재인폐렴 대구시민 다 죽인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 한 예비후보의 사진을 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구사람인 것이 부끄러워졌다고 한다. 그 역시 묵묵히 자신의 일상을 지키려 애쓰는 '각자' 중의 한 사람이다.사실 이들의 말처럼 변고가 생기면 "이건 다 쟤 때문이야"라며 증오를 부추기는 자들은 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갖다 대는 이유가 쉽고 빠르고 간단할수록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를 낳았다. 중국과의 내왕을 제한했을 때, 우리 자동차 생산라인이 멈춰 섰다고 난리를 치던 사람들이 왜 더 세게 막지 않았냐며 아우성이다. 코로나19를 빌미로 국민혈세를 퍼붓지 말라던 야당대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부를 비난한다. 이웃집에 암 환자가 있다고 해서 그들을 '암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최소한의 양식임에도 여전히 코로나19를 우한폐렴, 대구폐렴이라 부르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그렇게 전열을 흩트러뜨린다. 하지만 역사에서 그들은 이긴 적이 없고 '세상의 하루'를 만드는 그 '각자'들은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 그러니 이번에도 버티고 버텨 이길 것이다. 이겨서 빼앗긴 우리의 일상을 되찾을 것이다.

2020-03-01 15:21:32

[이른 아침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다

[이른 아침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다

스산한 대구 거리 풍경에 마음 아파'지역민 힘내시라' 응원메시지 보내정부·시민 협력하면 통제 가능 질병전문가 말 경청·중국인 입국 제한을폭발적인 증가세.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지난주 순식간에 400명을 넘어 버렸다. 22일 하루 새 확진자가 229명 늘어 지난달 20일부터 한 달간 발생한 확진자(204명)보다 많아졌다. 광역단체 기준 전국 17개 시도가 모두 환자 발생 지역이 되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이런 기세가 쉽사리 꺾일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대학이 개강하면 중국인 유학생들의 복귀와 함께 또 한 번 증가세가 폭발하지 않을까 걱정이다.특히 마음이 아픈 것은 SNS에 올라오는 대구 지역 풍경이다. 한마디로 스산하다. 텅 빈 거리가 마치 전쟁을 피해 사람들이 사라진 도시를 연상케 한다. 1992년 LA 폭동 당시 휑한 거리 한복판에서의 두려움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흑인 폭도들과 북쪽에 경계선을 설치한 경찰 사이에 낀 코리아타운에서 느끼던 공포감과 무력감.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염병 소식에 조금이라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대구경북 지역민들이 있다면 힘내시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지금은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부와 시민들의 협력을 통해 충분히 통제 가능한 질병이라는 점, 많은 국민들이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기운 내실 것을 당부드린다. 정부의 말이 아니라도 지금은 여야, 이념, 지역을 떠나 모두 손을 잡고 마음을 모아 사태 해결에 총력을 기울일 때다.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환자가 있는데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를 따질 때가 아니라는 말도 당연히 공감한다. 일선에서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은 물론 질병관리본부, 지방자치단체 관련 공무원들께 특별히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너무 과로해서 다른 불상사가 없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모든 국민들의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전제로 지금 시점에서 짚어야 할 건 반드시 짚을 필요가 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정부에 우선 촉구하고 싶은 건 이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하라! 의료 전문가들은 사태 초기부터 중국발 감염자의 강력한 유입 차단 조치와 지역사회 확산에 대비한 선제적 대응을 줄곧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또한 지역사회 감염 확산도 미리 경고해왔다. 그런데도 정부는 그런 충고와 지적을 흘려들었다. 전문가들은 이제부터 시작일 수 있다는 말로 장기전을 예고해왔지만, 정부의 인식과 대응은 단기전에만 쏠려 있었다. 정부 입장이 의료 전문가들과 똑같을 수는 물론 없다.정부는 의학적 견해 외에 정치, 경제, 외교 등 수많은 다른 변수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정무적 판단의 최우선 고려 사항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어야 한다.코로나19 사태가 아니라도 정부와 국가의 일차적 존재 이유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 시절 박근혜 정부를 호되게 비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세월호, 메르스 사태 등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에 미흡했기에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신천지 신도들의 행태는 물론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신천지 신도도 어딘가에서 감염된 것이고 그 근원은 중국인일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제라도 의료 전문가들의 견해를 경청하고 중국인 입국 제한 등의 조치를 고려해야 한다.컨트롤 타워의 부재 역시 야당이 정부를 비판하던 단골 메뉴였다. 이번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지방으로 갈수록 마스크나 일상 생활용품의 결핍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린다.대구에 파견된 의료 인력 등에 대한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할 일은 이런 것이다. 일차적 대처는 의료인에게 맡기되 그들의 지원에 추호의 소홀함이 없도록 대응해야 한다. 곧 끝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이나 세계가 칭찬한다는 자화자찬은 금물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소홀히 한다면 선거도, 정권도, 그보다 더한 어떤 명분도 국민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런 결과를 직접 목격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2020-02-23 15:44:41

[이른 아침에] '많이 본 뉴스'

[이른 아침에] '많이 본 뉴스'

포털 제공 '연령별 많이 본 뉴스' 1020과 5060 관심 완전히 달라세대 간의 공감은 관심에서 생겨 한 번씩 서로 곁눈질이라도 하길하루 몇 번은 휴대폰으로 뉴스를 본다. 실은 포털 사이트가 차려주는 대로 읽는 거지만 꽤 장점이 있다. 우선, 언제 어디서고 주요 뉴스를 한눈에 훑을 수 있다. 그리고 뉴스 정보를 데이터마이닝(data mining)한 결괏값, 즉 실시간으로 생산되는 부가 정보도 확인할 수 있다. 뉴스포털 'N'사의 '연령별 많이 본 뉴스'는 그렇게 제공되는 서비스 중 하나다.지난달 24일, 역시나 폰으로 뉴스를 뒤적이다 이곳에 눈길이 꽂혔다. 한 종류의 뉴스가 화면 가득 줄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데 1020세대가 '많이 본 뉴스'의 헤드라인이 모조리 '신종 코로나' 아니면 '우한 폐렴'이었다.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사람도 잘 없을 때였고 첫 번째 환자가 발생했다고는 하나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심각하진 않았다. 그건 바로 옆, '3040세대가 많이 본 뉴스'만 눌러 봐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코로나 관련 뉴스가 단 한 건도 순위에 올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러다 바이러스보다 괴담이 더 빨리 퍼질 수도 있겠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랬다. 아래 세대의 관심은 여전히 '신종 코로나'에 있었고 위 세대의 관심은 역시 다른 곳에 있었다.그런데 1월 말을 지나며 상황이 급전직하 나빠졌다. 감염 지역과 의심 환자 수가 대폭 증가하고 감염 환자 수도 두 자리로 늘었다. 사람들은 부랴부랴 마스크와 손 세정제를 찾았다. 수요가 폭증하자 물품은 금세 동나고 화면에 뜨는 '품절' 표시는 다시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켰다. 상황을 설명하는 정부 관계자들 얼굴에도 긴장이 묻어 났다. 사태의 추이를 전하는 속보가 이어졌고 확인을 하려면 더 자주 휴대폰을 꺼내 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5060세대의 '많이 본 뉴스'가 눈길을 끌었다. 1위에서 5위까지를 남김없이 정치 관련 뉴스가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사회 공통의 관심사로 떠올랐음에도 그곳은 그야말로 '코로나 무풍지대'였다.이 '많이 본 뉴스'를 확인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슬며시 궁금해졌다. '세상이 온통 난리인데 여긴 언제쯤 순위에 올라올까?' 하지만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5060세대는 끄떡하지 않았다. 그날, 50대가 '많이 본 뉴스' 1위에서 5위까지의 모든 헤드라인은 '추미애 아들 군 휴가 미복귀'였고 60대 이상은 여기에 '조국 아들 인턴 증명서'가 하나 더 있었다. 그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일은 전에도 있었다. 태풍 '링링'이 왔을 때도, 고성에 산불이 났을 때도, 화성연쇄살인의 범인이 잡혔을 때도 이들 세대가 '많이 본 뉴스'는 언제나 '정치'였다. 그리고 지난주,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꿈같은 일어 벌어졌을 때도 이들 세대가 제일 많이 본 뉴스의 헤드라인은 '사법 농단 폭로자라던 이수진의 두 얼굴'이었다.그런데 같은 맥락에서 보면 아래 세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나라의 중대사보단 언제나 '연예인 스캔들'이 먼저이고 자신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고 모르는 것을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듯 말하기 일쑤다. 이토록 위 세대와 아래 세대의 관심이 한 번을 겹치지가 않는다. 나라가 휘청거릴 만한 일이 생겨도 그런다. 대신 '꼰대'니 뭐니 하는 부박한 말들은 일상에 잦아들었다. 영국의 BBC는 '본인이 늘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을 '꼰대'라고 소개했지만 그건 나이 어린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들 사이에 공감대란 없다. 심지어 나와 다른 세대의 사람 또한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어쩌면 이게 '코로나19'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세대 간의 공감과 연대가 사라지면 사회가 황포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회를 유지 존속하게 하는 힘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연령별 많이 본 뉴스'를 쉽게 보아 넘기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지닌 내력은 이렇지 않다. 국채보상운동 때도, 2·28민주운동 때도 세대와 세대가 공감하고 연대하며 서로를 지켜주려 애썼다. 이해는 관심에서 생기고 공감과 연대는 이해의 바탕에서 자란다.오는 21일은 국채보상운동의 '그날'을 기려 새롭게 제정된 '대구 시민의 날'이다. 그런 만큼 다른 세대가 '많이 본 뉴스'에 한 번씩 곁눈질이라도 해보자.

2020-02-16 15: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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