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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풍] 입법이라는 이름의 독재

[세풍] 입법이라는 이름의 독재

'이물지'라는 중국 고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동북 지방의 황량한 땅에 '해치'라는 뿔 하나 달린 짐승이 산다. 해치는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사람들이 서로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문다."해치는 우리나라에 '해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상상 속의 동물이다. 해치는 '법'(法)이라는 한자와 관련이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법의 원래 글자는 '灋'(법)인데 여기에 들어 있는 '치'(廌)가 바로 해치를 의미한다. 법(灋)을 파자(破字)해 보면 '해치가 물처럼 고요하게 판단해서 그릇된 행동을 하는 자를 뿔로 들이받아 밀어낸다'(水+廌+去)는 함의를 읽어낼 수 있다.법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법은 '만인 대 만인' 투쟁의 장이 될 수 있는 사회를 질서 있게 유지시켜 준다. 하지만 법이 많다고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강제력 있는 사회적 규범으로서 법은 개인과 집단에 대한 자유를 제한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법이 많은 사회는 규제도 많다. 하지만 사람들은 '법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사회적 공분을 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관련 법이 없다"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라는 말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법 만능주의 탓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입법 발의 건수가 국회의원 평가 잣대가 되는 이상한 나라가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늘도 국회의원들은 새로운 법을 만드는 데 열심이다. 특히 21대 국회 들어서는 무엇에 홀린 듯 법안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21대 국회는 임기 시작 석 달 만에 3천여 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국회의원(300명) 1인당 10건꼴이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현행 법률 총건수 1천480개의 2배나 되는 수치를 석 달 만에 발의했으니 의욕은 가상하다 하겠다.문제는 졸속 발의 및 심의다. 집권 여당은 176석 거대 의석을 무기로 쟁점 법안들을 대거 통과시키고 있다.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고 있다는 자신감 아래 법안 심사 소위조차 열지 않았다. 부동산 관련 법 등 사회적 이해가 첨예하게 맞선 법안들과 이념 편향적 법안들마저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소급 입법 같은 위헌적 내용이 들어 있는 법안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사회적 논란과 이해 충돌을 부르며 부작용이 예상되는 법안들이 무더기로 통과되는데도 야당은 너무나 무기력했다.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31일 정부와 의료계 간 갈등이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2명의 여당 의원이 유사시 의료인들을 북한에 차출할 수 있도록 하는 법 제정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터져 나왔다. 사실상 의료인을 강제 징용하는 내용이라는 논란이 거세자 해당 의원은 "우려의 시각이 있다면 당연히 수정 또는 삭제 가능성이 있다"는 해명을 내놨다. 이런 섣부름과 무책임함도 없다.잘못 만든 법은 생사람을 잡는다. 법률을 제정할 때 숙고에 숙고를 거쳐야 하는 이유다. 법 취지가 제대로 작동할 것인지, 부작용은 없는지 각계 의견을 들어보고 숙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무더기로 통과되는 법안 가운데 특정 집단만의 이익을 강화하고 이념에 부응하는 이른바 '청부 입법'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면 입법 독재마저 우려해야 할 판이다. 자신의 신념과 선택이 무결(無缺)하다는 오만함으로 법을 마구 만들다가는 결국 '승자의 저주'에 걸려들 수 있다. 차라리 이렇게 주문하고 싶다. 의원님들, 예전에 그랬듯이 일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시고 세비나 타시는 게 어떨지.

2020-09-01 06:30:00

[세풍] 그래도, 환장하지 맙시다!

[세풍] 그래도, 환장하지 맙시다!

"여기서는 환장(換腸)해야 합니다."대구 사람으로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을 펼친 이상정 장군이 1925년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도 수백 리 떨어진 퉁허현의 한국인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 주민에게 들은 충고이다. 먹을 것이 모자라는 곳이라 쌀밥은커녕 좁쌀(粟米)밥으로 허기를 때울 때니 속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었다. 식민 시절이니 나라의 안이든 밖이든 한국인의 배고픔은 같았다.특히 그는 한국을 떠나기 전 이미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쌀밥과 보리밥 대신 좁쌀밥으로 배를 채우는 모습을 보고 울었던 바였다. 그런데 또다시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저 항우(項羽) 번쾌(樊噲) 같은 기골'의 학생들이 영양분도 적은 좁쌀밥을 먹고 견뎌야 하니 '부지중(不知中)에 눈이 흐려지고 코끝이 뜻끈뜻끈하여졌든 일'을 겪을 수밖에 없는 터라 어찌 가슴이 미어지지 않았을까그는 남의 땅, 중국 북쪽 하얼빈에서부터 남쪽 상하이, 서쪽 윈난성 쿤밍까지 드넓은 대륙을 종횡(縱橫)하며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1947년 8월 귀국 때까지 현지에 적응하는 '환장'의 삶을 견뎠다. 고달픈 '환장'의 이력은, 귀국 2개월 만에 51세로 급서(急逝)한 뒤 1950년 대구 사람들이 그의 문집 '표박기'를 바탕으로 대구에서 펴낸 '중국유기'(中國遊記)로 남아 전한다.이처럼 이상정 장군이 겪은 '환장'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환장'도 있다. 한자는 같지만 뜻은 부정적이다. 사전 풀이처럼 '마음과 내장이 바뀌어 미치겠다'는 뜻의 '환장'이다. 코로나19라는 중국 우한발 괴질이 나라를 다시 덮치면서 사람들이 곧잘 뱉어내는 말이 바로 '환장하겠네!'이다. 특히 대구는 더 그렇다. 지난 2월 18일부터 터진 코로나 전쟁에서 겨우 벗어났으려니 했는데 다시 번지니 말이다.한때는 하루 최고 741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나올 만큼 대구는 모든 일상이 사라지고, 거리는 텅 비다시피 했다. 다행히 대구 사람은 특유의 인내심과 공동체 의식으로 개인적 희생도 기꺼이 감수했다. 방역 당국의 지침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철저한 준수에도 동참했다. 덕분에 끝이 보이지도 않던 국가적 재난의 최전선에서도 잘 버티며 방역 모범 사례로 나라 밖에서조차 조명을 받기에 이르렀다.게다가 나라 안에서는 선거 결과를 갖고 특정 정치세력과 연계한 보수적인 지역임을 내세워 대구를 폄훼했다. 일부 정치권에서는 대구에 대한 봉쇄라는 언급도 서슴지 않았다. 대구를 마치 코로나 방역 실패에 따른 국민적 분노의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샀지만 대구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외환(外患)에 내우(內憂)까지 꿋꿋이 견디고 버틴 덕분에 한동안 '0'의 행진을 했던 대구였다.그런데 최근 도진 코로나 전파와 확산이 심상치 않자 정치권을 중심으로 또다시 코로나 확진자 급증의 원인을 두고 '네 탓' 공방전이 한창이다. 과학적 원인 찾기보다 정치적 공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못된 버릇이다. 국민들로선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특정 집단이나 집회에 따른 전파와 확산 관련 원인 규명은 마땅하지만 지금처럼 서로 탓하기가 과연 방역에 무슨 도움이 될까. 이러고도 방역 성공을 바라지 않을 수 없으니 환장할 만도 하다.어느 때부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부 세력의 '네 탓' 공방을 보고 있노라면 '내 탓이오!'라며 세상을 안으려고 했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커 보인다. 물론 나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대구경북인이여, 부디 '환장'하지 말고 다시 한번 코로나 잘 이깁시다.

2020-08-25 06:30:00

[세풍] 마사(馬死)의 길 계속 가는 文 대통령

[세풍] 마사(馬死)의 길 계속 가는 文 대통령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災殃)은 홀로 오지 않는다고 했다. 'Misfortunes never come single'이란 영어 격언도 있다. 여러 재앙들이 한꺼번에 닥쳐와 위기에 빠진 이 나라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수해(水害)로 국민 고통이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코로나19가 2차 대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부동산 폭등, 경제난 고통 가중, 나랏빚 폭증, 탈원전 폐해, 구멍 뚫린 안보 등 제대로 돌아가는 것을 찾기 어렵다. 총체적 난국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 적힌 A4 문서를 줄줄 읽으며 염장을 지르는 대통령에 국민은 절망하고 분노한다. 대통령 리더십 실종이 이 나라에 닥친 또 하나의 재앙이다.문재인 대통령 역시 자초(自招)한 재앙들로 그로기(groggy) 상태에 빠졌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과 그를 감싼 여권, 국정 독주, 부동산 정책 실패 등에 따른 민심(民心) 이반으로 지지율이 3개월 만에 30%포인트 이상 추락했다. 급기야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199주 만에 미래통합당에 역전당했다. 청와대 수석 몇 명을 갈아 치웠지만 민심은 더 냉랭해질 뿐이다. 총선 압승 불과 넉 달 만에 문 대통령은 집권 후 가장 큰 위기에 직면했다.민심의 경고(警告)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데도 문 대통령은 '역시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해법을 선택했다. 조국 사태 때 써 먹었던 수법을 들고나왔다. 정책 실패 인정, 국민에 대한 사과, 국정 기조 전환이 아닌 정반대 길을 골랐다. "집값 안정" "경제 선방" 등 현실과 괴리된 주장에 야당·언론에 책임을 돌렸다. 홍남기 경제부총리에 대해 "경제 사령탑으로 총체적 역할을 잘하고 있다"며 힘을 실어줬다. 잘못을 인정 않고 기존 정책을 그대로 밀고 가겠다는 것이다. 조국 사태 때처럼 이렇게 하면 민심이 돌아올 것으로 문 대통령은 기대하는 것 같다.결론적으로 이는 문 대통령의 대단한 착각(錯覺)이다. 떠난 민심을 되돌릴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민심 이반을 불러온 부동산 문제는 세금·주거비 증가 등 재산과 직결돼 있다. 주택 보유자는 세금 폭탄, 무주택자는 집값 폭등, 전세자는 전세 상승에 분노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는 용서할 수 있지만 재산을 뺏은 사람은 용서 못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정권이 내 호주머니에 손을 대는데 가만히 있을 국민은 없다.국민의 각성(覺醒)도 빼놓을 수 없다. 윤희숙 미래통합당 의원의 '저는 임차인입니다' 국회 5분 연설에 국민이 박수를 쳤다. 정권 탄압에도 책무를 다하는 윤석열 검찰총장, 최재형 감사원장에게 국민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촛불이 일렁였던 광장에서 '문재인 타도'가 터져 나오고 있다. 지지율 격변과 함께 문 정권 실체를 깨달은 국민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문 대통령은 수해 상징이 된 전남 구례의 '지붕 위의 소'를 두고 "큰 희망의 상징"이라고 했다. 이 소는 물에 잠긴 외양간을 빠져나와 헤엄쳐 지붕 위로 피난했다. 헤엄이 서툰 소는 물살에 몸을 맡겨 떠내려가다가 물가에 닿아 목숨을 구한다. 반면 말은 제 헤엄 실력을 믿고 물살을 거슬러 가다가 지쳐 끝내 익사하고 만다. 여기에서 우생마사(牛生馬死)란 말이 나왔다.최대 위기에 직면한 문 대통령이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힘을 믿고 민심을 거슬러 마사의 길을 계속 가고 있다. 이제라도 문 대통령이 우생의 지혜를 깨닫고 그 길을 걷기 바란다. 마사의 운명을 맞는 것은 문 대통령은 물론 이 나라에도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2020-08-18 06:30:00

[세풍] 정부 손에 쥐여준 취수원 해법

[세풍] 정부 손에 쥐여준 취수원 해법

지난 4월 중순, 뉴욕타임스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도는 메콩강 사태를 집중 보도했다. 동남아시아 최대 젖줄인 메콩강 유역의 심각한 물 부족 상황과 국제분쟁을 다룬 것이다. 신문은 사태의 이면에 도사린 중국의 수자원 무기화 등 패권 야욕을 들춰 내고 중국 정부가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을 경우 메콩강 사태는 모두에게 큰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000년대 들어 중국은 수자원 개발을 이유로 메콩강 상류 지역에 많은 댐을 짓는 등 물 독점을 노골화했다. 메콩강 상류인 란창강에 11개의 댐을 건설한 것도 모자라 8개를 더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중국의 물 독점이 몰고 온 파장은 컸다. 메콩강의 흐름이 막히자 하류 지역 쌀 수확량과 어획량은 급감했고 역내 국가 간 갈등은 거꾸로 폭증했다.메콩강은 중국을 포함해 미얀마와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등 6개 나라 4천880㎞에 걸친 공동의 자산이다. 메콩강 유역 주변의 인구만도 6천만 명이 넘는다. 중국과 미얀마 동부 국경에 이르러 '메'(어머니) '콩'(강)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메콩강에 대한 동남아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풍부한 수량과 식량, 일자리 등을 안겨준 '어머니의 강'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2002년 착공해 8년 만에 완공한 샤오완댐은 동남아시아 각 나라의 저수 시설 용량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을 정도다. 그런데도 중국 정부는 "메콩강 유역의 물 부족은 단지 100년 만의 가뭄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러자 뉴욕타임스는 기후학자들의 보고서를 인용해 "위성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위성이 관찰한 란창강의 수량은 평소와 같은데도 중국이 국제사회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이다.물길을 사이에 둔 다툼은 메콩강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대구와 구미는 취수원 이전을 두고 계속 등을 돌리고 있고, 경남도와 거창군은 황강 취수원 선정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운문댐 물 공급을 바라는 울산과 이에 난색인 경북도의 입장도 계속 평행선이다.취수원 해법을 두고 갈팡질팡해 온 환경부는 최근 취수원 다변화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구미경실련도 대구취수원의 구미 이전에 있어 가변식 다변화 방안을 제안했다.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 보겠다는 시도이나 구미와 안동, 거창 지역 주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여전히 수자원의 공유라는 접근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다.부산 지역 미래통합당 의원들이 지난 6월 발의한 '낙동강 수계 물관리 및 주민 지원 등에 관한 법' 개정안이 눈에 띈다. 취수원을 제공한 지역에 지원의 길을 열자는 취지다. 취수원을 제공하는 지역 주민에 대한 보상을 제도화한다면 문제 해결이 한결 빨라질 수 있어서다. 지난해 낙동강수계관리기금 지출 금액 2천699억원 중 주민 지원에 고작 234억원(8.7%)이 쓰인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환경부도 일단 긍정적이다. 그러나 물이용부담금 인상이나 수혜 지자체의 상생기금을 통한 보상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역 자체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해법이 요구되는 이유다.작가 브라이언 아일러는 '위대한 메콩 최후의 날들'이라는 책에서 "물을 특정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중국 권력 엘리트들의 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취수원을 둘러싸고 공방을 벌이는 우리의 현실은 조금 다르다. 물은 함께 공유하는 공공의 자산인 동시에 한정된 자원이라는 점이다. 계산법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한다. 지역사회의 대립과 주민 갈등만 키울 게 아니라 국가가 해법 도출에 앞장서야 한다.

2020-08-11 06:30:00

[세풍] 더 교활하고 더 위험한 이 땅의 ‘문민 쿠데타’

[세풍] 더 교활하고 더 위험한 이 땅의 ‘문민 쿠데타’

쿠데타는 후진적 민주주의의 증상이다. 쿠데타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시간이 부족하거나 뿌리내리게 할 민도(民度)가 갖춰지지 않은 나라에서만 나타난다. 현대 민주주의 역사는 이를 입증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알제리를 독립시키려 한 드골 대통령에게 알제리 주둔 공수부대가 반기를 들었던 프랑스다. 그러나 쿠데타는 실패했다. 반란군은 알제리 수도 알제를 장악한 뒤 프랑스 본토로 진격하려 했지만 여론이 반군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이를 쿠데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TV 연설에서 군사 반란을 "항명 사건"이라고 낮추면서 "중남미 국가에서 벌어지는 희극 오페라 수준"이라고 조롱했다.이제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문제는 '이런'이란 단서이다. 바로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하는 '고전적' 쿠데타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非)무력 쿠데타라는 것도 있다는 말인가. 미국 정치학자 낸시 버메오는 그렇다고 한다. 바로 민주주의의 외양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도 쿠데타라는 것이다.('쿠데타, 대재앙, 정보 권력-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들', 데이비드 런시먼)이런 쿠데타는 민주주의를 한 번에 산산조각 내지 않고 서서히 무너뜨린다. 그래서 국민은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쿠데타로 인식하지 못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와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 간의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머릿수만 많으면 어떤 법이든 만들 수 있는 '다수결 민주주의'가 바로 그렇다. 이를 신봉함에서 문재인 정권과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똑같다. 법안 통과 전 거치도록 한 민주적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임대차 3법'을 '기립 투표'로 통과시켰다.버메오는 이런 행태를 '선거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장악하는 공약성 쿠데타'라고 했는데 여당이 21대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한 것은 이를 압축해 보여줬다. '독식'은 한마디로 말해 '야당의 견제'라는 '민주적 통제' 장치를 없애고 입법부를 통법부(通法府)로 바꾼 것이다. 민주주의를 '장악'한 것이다.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쿠데타'는 '이른바 검찰 개혁'에서 절정을 이룬다. 문 정권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식물'로 만들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사실상 검찰총장을 겸하는 '제왕'으로 만들려고 한다. 검찰을 정권의 사냥개로 만들겠다는 소리다.이와 짝을 이루는 사법부에 대한 쿠데타는 이미 완성됐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코드'가 맞는 사람들로 채워 입맛에 맞는 사법적·헌법적 판결을 준비해 놓았다. 그대로 되고 있다. 대법원은 괴상한 논리로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장과 도지사를 무죄 방면했다. 민주주의를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그뿐인가. 윤미향에 대한 수사는 소식이 없다. 추 장관 아들의 휴가 미복귀 의혹, 라임·옵티머스 펀드 의혹,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수사도 마찬가지다. 덮겠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공정과 정의에 대한 쿠데타라고 하겠다.런시먼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제 모습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군사적 전복이 실패했다고 해서 쿠데타의 위협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어쩌면 민주주의가 외부적인 위협에 처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의 내부에 진짜 위험이 숨어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했다. 지금 문 정권이 벌이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점진적인, 그래서 더 교활하고 더 위험한 '문민 쿠데타'는 이 경고가 남의 일이 아님을 일깨운다.

2020-08-04 06:30:00

[세풍] 시장의 코브라

[세풍] 시장의 코브라

영국이 인도를 식민 통치하던 시절, 코브라에 물려 사람이 많이 죽자 총독부가 머리를 짜냈다. 코브라를 포획해 오는 사람에게 포상금을 지급한 것이다. 총독부는 코브라 개체수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지만 순진한 생각이었다. 포상금을 노리고 사람들이 코브라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총독부가 포상금 지급을 중단하자 인도인들은 사육하던 코브라를 방생했다. 코브라 개체수는 오히려 더 늘어나고 말았다.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이 역효과를 부르는 현상을 '코브라 효과'(Cobra effect)라고 부른다. 독일 경제학자 호르스트 시버트가 만든 용어다. 탁상행정식 제도와 정책이 현장에서 어떤 실패를 부르는지 설명할 때 곧잘 인용되는 말이다. 요즘 현 정부가 내놓는 일련의 정책을 보자니 코브라 효과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부동산 대책이 대표적이다.한 분야 정책을 3년 동안 22번 내놓았다는 사실만으로 이 정책은 처참한 실패작이다. 부동산 정책의 최우선 가치는 주거 안정인데, 집값 상승에 화들짝 놀란 정부가 두더지게임하듯 세금과 규제 방망이질을 해대다 보니 시장 신뢰를 잃고 집값·전월셋값 상승을 부추겼다. 또 하나의 코브라 효과가 아닐 수 없다.여기에 속칭 '임대차 5법'이라는 여권발 초대형 코브라가 기다리고 있다. 임대료 상승률을 규제하고 임차 기간 제한을 풀어 세입자를 보호하겠다는 발상인데, 부작용이 심히 우려스럽다. 한 번 임대하면 세입자를 내보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집주인은 세입자를 가릴 수밖에 없다. 전세보다 반전세와 월세를 선호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른 주거 비용 상승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임대차 5법이 시행되면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이나 유럽 대도시에서나 볼 법한 월 수백만원짜리 임대료가 일상화할 가능성이 크다.사람들은 이익은 독점하고 피해는 나누려고 한다. 모든 정책이 나오면 시장 참여자는 꼼수를 찾아 대응한다. 정부가 가진 자를 적대시하면서 온갖 규제와 징벌적 과세를 가하면 그 피해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약자를 보호하려고 만든 숱한 법과 제도가 오히려 약자의 목을 죄는 이유는 이런 연유에서다. 그래서 정부와 국회의원이 정책과 제도, 법률을 만들 때에는 신중해야 하고 무수한 시뮬레이션을 거쳐야 한다.하지만 현 집권 여당은 가볍고 즉흥적이다. 게다가 176석 거대 여당은 '입법 폭주'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부동산값을 안정화시키겠다는 취지야 좋지만, 다주택 고위 공직자에 대해 승진 페널티를 가하고 안 팔고 버틸 경우 형사 처벌하겠다는 황당무계 법안을 발의한 여당 의원이 있다. 아예 1가구 1주택을 법으로 못 박자는 '부동산 민주화' 법안 추진 목소리마저 여당 지도부에서 나오고 있다. 시장경제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는 주장과 다름없다. 지리멸렬한 야당이 이런 무지막지한 법안 통과를 막을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혹여라도 국회가 이런 '코브라 효과' 법안을 통과시킨다면 대통령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해야 할 텐데, 그런 장치가 작동할지 장담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적 안목에 대한 신뢰가 안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얼마 전 대통령이 코로나19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퍼포먼스로 난생처음 펀드에 가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심경이 복잡했다. 실물경제 경험이 부족해 보이는 대통령이 좌파 경제 참모와 능구렁이 관료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상상되어서이다. 난감한 노릇이다.

2020-07-27 22:23:09

[세풍] 정권이 열 번 더 넘어져야 하는데도…

[세풍] 정권이 열 번 더 넘어져야 하는데도…

이 지경이면 정권이 열 번 더 넘어져도 모자랄 판 아닌가. 박원순·오거돈·안희정. 대한민국 제1·2의 도시인 서울·부산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고소돼 극단적 선택을 하고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한 사람은 성폭행으로 징역을 살고 있다. 송철호·김경수. 문재인 대통령의 '30년 지기(知己)'인 울산시장은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 및 하명 수사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경남지사는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으로 기소돼 재판 중이다. 다섯 명 모두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박근혜 정권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문 대통령을 비롯한 지금 집권 세력이 가만 있었겠나. "이게 나라냐"며 연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시위를 벌였을 것이다.문 정권이 넘어질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부동산 대책에 실패해 집값을 천정부지로 뛰게 만들고, 세금 폭탄을 안기고, 청년들과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꿈을 부숴 버렸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은 다주택을 보유하면서 집값 상승 이익을 톡톡히 챙겼다. 툭하면 문 대통령은 민생(民生)을 들먹이지만 일자리를 비롯한 경제 지표들과 현장 비명(悲鳴)으로 확인되는 '경제 폭망'은 정권을 거덜 내고도 남는다.국민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 준 조국·윤미향 사태, 북핵 해결은 간데없이 국민 자존심만 뭉개 버린 대북 정책 실패, 국가 안위와 직결된 한·미 동맹 붕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온 정권 관련 의혹과 비리, 이를 수사하는 검찰총장을 겁박하는 작태(作態) 등 정권이 넘어질 일들이 숱하게 많다.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늘어놨던 말들과 정반대 일들이 벌어지는 게 이 나라 현실이다.정권이 넘어질 일들이 차고 넘치지만 문 정권은 박근혜 정권처럼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해 헌법재판소까지 갔던 노무현, 탄핵을 당해 대통령에서 물러난 박근혜를 통해 이 정권 사람들은 정권이 넘어지지 않을 수법을 체득(體得)했다. 여기에 야당 복(福)까지 타고났다.첫째는 잘못 인정하지 않기다. 박원순 사건을 비롯해 정권이 흔들릴 일들이 터져도 문 대통령은 사과는커녕 유감 표명도 하지 않는다. 시간을 벌면서 집권 세력이 총출동해 물타기, 본질 흐리기, 덮어씌우기, 버티기로 사태를 무마하는 데 탁월하다. 덜컥 사과를 한 박근혜는 너무도 순진했다.둘째는 대통령 탄핵 루트(route·경로)를 장악하는 것이다. 여론을 형성하는 방송·신문을 틀어쥔 지는 오래됐다. 총선 압승으로 국회를 수중에 넣어 탄핵 경로를 완전 차단했다.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다. 광장에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민노총·전교조는 애초 같은 편이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셋째는 정권 대체 세력의 부재(不在)다. 문 정권이 넘어지면 대체할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세력이 없다.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은 수권 정당과는 거리가 멀다. 국민에게 정권은 애증의 대상이지만 야당은 아예 괄호 밖이다.결정적인 한계는 국민에게 있다. 국민이 갈수록 정권의 선전선동에 휘둘리고, 국가에 의존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정권이 넘어질 실정(失政)들이 쏟아지는데도 대통령 지지율이 40%를 넘는 게 이를 방증한다.혹자(或者)는 내년 서울·부산시장 선거, 2022년 대통령·지방선거에서 정권 심판·교체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이 깨어나지 않는 한 선거에서 이기는 데 능수능란(能手能爛)하고 나라 곳간까지 꿰찬 집권 세력이 선거에서 계속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의 '20년 집권론'이 꿈이 아닌 현실로 닥쳐올 우려가 농후하다.

2020-07-21 06:30:00

[세풍] 태백에서 한라까지, 그들 죽음을 기리며

[세풍] 태백에서 한라까지, 그들 죽음을 기리며

죄(罪)에 따른 벌(罰)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이 죽음 즉 사형(死刑)이었다. 그래서 범법자를 가둔 감옥에서도 사형수가 입고 있는 수의에 붙은 번호의 색깔도 달리했다. 붉은 색깔이다. 사형수의 하루하루는 '언젠가 다시 돌아갈' 일상(日常)을 꿈꾸는 어떤 죄수와도 비교할 수 없는 번민의 날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들을 '대우'하라고 따로 구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그러나 우리 역사에는 같은 사형이라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맞았던 죽음의 인물도 많았다. 그랬기에 이들 죽음은 날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았고, 세월이 흐를수록 되레 기리고 추모하는 죽음이 되기에 이르렀다. 뒷사람들이 이들 죽음 앞에 당당히 '의(義)로운'이라는 말을 붙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들이 바로 의병이요, 독립운동가 같은 이들이 아니던가.일제가 한국인을 억지로 옭아매기 위해 만든 법을 어겼으니 분명 '범법'이요, '불법'이었다. 나라 찾기 위한 독립의 마땅한 행동을 했으나 일제 저들에겐 사형감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범법과 불법의 허울을 덮어쓴 채 형장에서 사라진, 의병과 독립운동가로서 의로운 삶을 살다 죽음을 맞은 한국인이 얼마인지는 알 수조차 없다.마침 대구에서는 지난 2018년 '대구독립운동사' 발간(광복회 대구지부)과 함께 2019년 3·1운동 및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대구의 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다시 살펴 조명하고 기리는 일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춰 올해 들어서 코로나19의 국가적 재난 속에서도 의로운 죽음에 처한 순국선열을 기리는 움직임도 조용히 이뤄져 다행스럽다.하나는 지난 2월, 가칭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 추진을 위한 민간 차원의 모임 출범이고, 이미 지난 5월 정부와 당국에 타당성 조사를 요청해 놓고 있다. 다른 하나는, 대구에서 순국한 의병과 독립운동가 등 180명의 행적 등을 처음으로 추적하여 조명한 책 '묻힌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를 지난달 세상에 내놓고 알리게 된 일이다.특히 대한광복회 백산 우재룡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이 책에서는 대구감옥(형무소)에서 순국한 애국지사 180명의 출신지, 활동 분야 등을 분석했는데, 여기에는 영호남과 제주도는 물론 충청도와 강원도 인물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는 이들 지역까지 관할한 사법(재판) 제도 때문이었다. 대구는 바로 그들의 순국터였던 사실이 드러났다.강원도 태백에서 제주도 한라에 이르기까지 이들 180명의 순국 애국지사와 그 유족들에게 대구는 잊을 수 없는 곳, 아니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현장이나 다름없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와 달리 대구감옥(형무소)은 지금 사라지고 잊혔으니 지난 2월 닻을 올린 민간 차원의 기념관 건립 추진과 같은 활동은 더욱 절실하다.오는 20일 오후 전국의 생존 독립운동 지사와 여러 독립운동가 후손 등 300명 넘는 발기인들을 초청해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가질 예정인 행사는 그래서 코로나19도 꺾을 수 없는, 뜻깊게 여기는 까닭이다. 비록 대구에서 열리지만 영호남과 충청, 강원, 제주까지 아우르는 만큼 삼남(三南)을 넘는 독립운동 기리기 모임 성격도 있다.최근 며칠간은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백선엽 장군의 별세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논란으로 어수선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지금 대구에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순국자의 죽음을 기리는 일이 이뤄지고 있으니 죽음의 의미가 남다르게 와 닿는 요즘이다. 한 번뿐인 이승의 삶, 어찌 살아야 하나.

2020-07-14 06:30:00

[세풍] 다시 목민(牧民)을 생각하며

[세풍] 다시 목민(牧民)을 생각하며

요 며칠 각 지역 신문에서 독자의 눈길을 끄는 지면을 꼽자면 지방의회 후반기 의장단 선출 소식이다. 의회 본회의장 단상을 배경으로 꽃다발을 든 광역 지방의회 지도부 사진이 자세한 경선 보도와 함께 지면을 장식 중이다. 대구경북 31개 기초의회 중 선거가 끝난 지방의회의 의장단 선출 소식도 속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후반기 의장·부의장의 사진은 하나같이 미소를 머금은 득의양양한 표정이다.지난 2018년 6·13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한 의원의 임기가 이제 반환점을 돌아섰다. 남은 2년의 의회 운영을 책임질 의장단을 새로 뽑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지만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솔직히 심드렁하다 못해 착잡한 심정이다. 내년이면 30년이라는 연륜을 쌓게 될 지방의회 존재 자체가 별로 특별할 것도 없고, 의원들 또한 지역에 반드시 있어야 할 일꾼이라는 기대감과 평가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돌이켜보면 지금의 지방의회가 '새로운 의회'를 표어로 내걸고 새로운 생각·새로운 행동으로 성장하는 의원상을 입 밖에 내지만 바뀐 것은 거의 없다. 관례와 구태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4년간 제자리 지킴을 하는 지방 유력 인사의 모임이라는 껍질만 더 단단해졌다. 지방자치를 이끌고 지역 발전을 견인하라는 뜻에서 1960년 이후 31년 만에 되살려 놓은 지방의회가 그 공백기와 같은 30년의 세월을 허송세월했다면 국민 입장에서 그것만큼 고약한 일도 없다.꼭 10년 전인 2010년 이맘때 이 지면에서 '새 목민관들에게'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통상 6·2 지방선거라고 불리는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다. 짧게 요약하면 '앞으로 4년간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무거운 마음으로 고민해야 한다. 만약 유권자와의 약속을 게을리하거나 지방 권력으로 주민 위에 군림하려 할 경우 4년 후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주민 대표의 자리에 선 지방의원들의 바른 마음가짐을 환기시키는 글이다.그런데 강산이 변할 만큼의 세월 동안 지방의회가 성숙해지고 꼭 필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았는지 되묻는다면 대답이 궁해진다. 지역 발전의 지렛대 역할이나 목민은 고사하고 주민에게 무거운 짐이자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대구경북 490명의 광역·기초의원 중 일부의 사례이지만 되풀이되는 지방의원들의 낯 뜨거운 행적은 지방의회 불신과 무용론을 부르기에 충분하다.조선조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관원이 많으면 토색질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백성은 더욱 곤궁해진다'며 경계했다. 오늘날의 사정도 결코 다르지 않다. 나무의 기운이 막히면 좀이 생기고 사람의 기운이 막히면 병이 생기듯 나라의 기운이 막히면 온갖 폐단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방의원의 자리가 꽉 막힌 민생의 기운을 소통시키고 해소하는 결울(決鬱)의 촉매가 아니라 주민 위에 군림하고 지방에서 호령하는 토색질의 온상이 되고 있다면 민주주의와 지방자치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질식하는 건 시간문제다. 더는 쓸모없는 자리, 꼭 필요하지 않은 벼슬아치를 파직시키는 '파용관'(罷冗官)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지방자치와 민생 안정은 지방의회의 역할과 그 굳은 결단에서 출발한다. 지방자치 30년이라면 성현들이 즐겨 써온 '삼십이립'(三十而立)의 표현처럼 세상을 향해 우뚝 자립할 때다. 남은 2년만이라도 바뀐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2020-07-07 06:30:00

[세풍] 얻어맞고도 꼬리 치는 문 정권의 조현병

[세풍] 얻어맞고도 꼬리 치는 문 정권의 조현병

"나는 당 중앙을 대신하여 사과합니다. 옌안(延安) 전체가 과오를 범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훌륭한 목욕을 시켜줄 의도였지만 약품이 너무 많이 뿌려져 여러분의 예민한 피부가 손상됐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적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편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때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앙심을 품지 마십시오. 이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싸우러 나갑시다."마오쩌둥(毛澤東)이 장제스(蔣介石)의 토벌에 쫓겨 옌안으로 도망간 뒤 현지에서 벌인 '정풍(整風)운동'(1942~1945)의 희생자들에게 한 말이다. 정풍운동은 말하자면 육체적·정신적 고문을 동원한 '사상의 외과수술'로, 훗날의 '반우파투쟁'(1957~1959)과 '문화대혁명'(1966~1976)의 원형(原型)으로 일컬어진다.그 희생자는 지독한 후유증을 앓았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확고한 공산주의자로 자부했는데 '반동'으로 몰렸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옌안을 떠나지도 못했다. 전면적 자기부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남은 길은 아서 쾨슬러의 소설 '한낮의 어둠'의 주인공 루바쇼프처럼 숙청됐음에도 더 철저히 당에 충성하는 것뿐이었다.이를 위한 미끼가 마오의 '사과'였다. 대성공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청년 당원들은 비애와 안도감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그들을 잔혹하게 학대한 공산 체제를 위해 싸웠고, 그다음에는 중국인민을 고문하는 기계로 작동했다."('새로 쓰는 중국혁명사 1911-1949', 나창주)북한 김정은이 '4대 군사행동'을 '보류'하겠다고 한 직후 문재인 정권이 보여주는 행태가 이를 빼다 박았다. "항구적 평화 시대 전환을 위해서는 종전선언이 필수적"이라고 하고, "정전 협정 상태를 종식하고 항구적 평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하며, "유엔 대북 제재 위원들을 만나 제재 일부 완화를 강력히 요청할 것"이라고 하고, "미국이 반대한다고 우리가 (대북 지원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한다.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지 열흘도 안 돼 이런 소리들을 쏟아냈다. 주인에게 얻어맞고도 금방 좋다고 꼬리 치는 충견의 모습이라고나 할까.남북 관계가 '화해'냐 '긴장'이냐를 결정하는 상수(常數)는 '북핵'이다. 북핵이 존재하는 한 '종전선언'도 '항구적 평화 시대'도 '대북 제재 완화'도 잠꼬대이다. 자명한 사실이고 기본 상식이다. 문 정권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식을 찾을 수 없다. 어리석거나 '종북'-기분 나쁘다면 '친북'이라고 해주겠다-이거나.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6·25전쟁 70주년 기념사에서 '종전'을 강조하면서도 북핵에 대해서는 함구했다.국내외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의 핵무장은 사실상 완성됐다. 남은 것은 탐지와 요격이 어려운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인데 이것의 완성도 임박했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은 "비핵화는 개소리"라고 한다.현실이 이런데도 예고한 도발을 '철회'도 아닌 고작 '보류'한다는 김정은의 말에 감읍(感泣)했다는 듯 종전과 평화 체제로 가자고 하는 것은 존 볼턴 전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현병'이다. 볼턴은 회고록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를 불가역적 비핵화의 첫 단계라는 문 대통령의 주장을 '조현병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조현병은 '정신분열증'을 순화한 표현이다.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처칠은 나치와 협상을 강요하는 전시 내각 각료들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처넣고 어떻게 호랑이와 대화를 하라고 하나!" 문 정권이 바로 그렇게 하려고 안달하고 있다.

2020-06-30 06:30:00

[세풍] 권영진의 상상력

[세풍] 권영진의 상상력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되어갈 무렵, 시청을 출입하던 기자는 조해녕 대구시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연임 도전 하십니까?" 조 전 시장이 사고 수습에 매진하느라 점심을 배달음식으로 몇달째 해결하다가 대외활동을 막 재개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답변이 뜻밖이었다. "4년도 너무 기네요."실제로 나중에 조 전 시장은 지하철 참사 책임을 지겠다며 재선 포기를 공식 선언했다. 2002년 시장에 당선됐을 때 그는 의욕에 차 있었다. 추진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취임 반년 만에 터진 지하철 참사는 그의 연임 의지를 완전히 꺾어놨다. 선출직 공직자에게 대형 참사 후유증은 이렇게 크다.요즘 권영진 대구시장을 보면 2003년 조 전 시장과 비슷한 심경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하철 방화참사와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는 지역사회의 감당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규모의 재난이다. 사태를 수습하느라 공직사회가 천신만고인데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다. 안 그래도 '고담 대구'라고 불리는 판국에 신천지 교인 집단감염으로 지역 이미지가 더 나빠졌다.권 시장은 전전임 시장이 배달음식을 시켜 먹던 그 공간에서 한달 이상 야전침대 생활을 하면서 코로나19 사태 수습에 몰두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 상황을 맞았고 시의원과 설전 끝에 쓰러졌는데 '실신쇼' 비아냥마저 들었다. 권 시장으로서는 '노이무공(勞而無功·애썼는데 보람이 없음)' 고사성어가 절로 떠오를 법한 상황이다.국가물산업클러스터 유치에 성공했고 난제 중의 난제이던 대구시청사 이전지도 정했지만,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과 취수원 이전 같은 백년대계는 지지부진의 늪에 빠졌다. 코로나19사태를 모범적으로 극복했건만 정작 영남권 감염병 전문병원 유치는 부산에 밀렸다. 공직사회의 매너리즘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난국 속에서 최근 권 시장이 깜짝 '협치 카드'를 내들었다. 홍의락 더불어민주당 전 국회의원에게 경제부시장 직을 제안한 것이다. 정부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전국 꼴찌 수준인 대구에서 민주당 재선 의원을 경제사령탑으로 쓰겠다는 발상인데, 두 사람 모두에게 적지않은 리스크일 터이다.사실, 이념이 판이한 다른 당 소속 정치인에게 같이 일하자고 손을 내미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새누리당)가 2014년 경기도 사회통합부지사를 신설해 이기우 전 통합민주당 의원을 임명하고, 그 뒤에 경기도 연정부지사로 바꿔 강득구 전 경기도의회 의장을 임명한 사례가 거의 유일하다.권 시장의 '홍의락 삼고초려'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홍 전 의원은 국회의원 시절 산자위 간사 자격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정기적 독대 자리를 가지면서 현 정부와 대구경북간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서울로 출장온 대구경북 공무원에게 국회내 자기 사무실을 사랑방처럼 쓰도록 편의를 제공할 정도로 지역 사랑도 돈독하다. 권 시장은 지난 총선 결과로 생긴 대구의 정치적 고립을 보완하는 데 홍 전 의원이 적임자라고 보는 듯하다.제안에 대한 홍 전 의원의 첫 반응은 "권 시장의 상상력이 놀랍다"이다. 사실, 보수적 기질 탓인지 대구경북 정치권의 상상력은 척박한 편이다. 선택은 개인몫이지만 홍 전 의원은 권 시장의 상상력에 화답하기를 희망한다. 리스크를 떠안지 않고서는 정치적으로 도약할 수 없다. 더구나 지역 발전은 소속 정당 및 이념보다 아래에 있지않은 가치다. '보수의 심장' 대구에 민주당 경제사령탑이라! 멋진 상상 아닌가.

2020-06-23 06:30:00

[세풍] 또 6월을 맞고 보내며

[세풍] 또 6월을 맞고 보내며

한국 고전소설 '춘향전'에는 기생 춘향을 괴롭히며 술판을 벌이는 수령 변 사또를 준엄히 꾸짖는 암행어사 이 도령의 '어사시'가 나온다. 널리 알려진 '금잔의 좋은 술은 온 백성의 피요'로 시작해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구나'로 끝을 맺는 네 구절에 각 일곱 글자로 된 7언(言) 한시이다.조선 옛 소설 속에 나온 뒤 상대의 아픈 곳을 비판하고 나무랄 때 자주 인용된다. 문재인 정권을 겨냥해 지난 2018년 자유한국당 김성원 원내대변인도 '적폐 인사 임명하고 버티는 것은 문 정권의 오만이요'로 바꿔 '서해는 천대하면서 북한에 아첨하니 근심 소리 높구나'로 끝낸 개사도 그 사례다.이 흘러간 시가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7월 5일 대구의 한 초교 강당의 군사 법정에서도 울려 퍼졌다. 북한의 남침에 맞서 아수라장이 된 싸움터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겹게 여길 때, 낯선 군사재판의 임시 법정에서 웬 술타령을 엄히 꾸짖는 검찰관(김태청)의 논고문까지 등장했을까.'금잔에 담긴 좋은 술은 방위군 장정들의 피요(金樽美酒民兵血)/ 옥으로 만든 상 위에 차려진 음식과 안주는 장정들에게서 짜낸 기름이라(玉盤佳肴壯丁膏)/ 물 쓰듯 항목 바꾼 예산 탕진에 장정들의 눈물이 흐르는구나(項目流時兵淚流)/ 웃음소리 높은 뒤꼍에는 울음소리 높은 줄 알아라(笑聲高處哭聲高).'논고를 들은 죄인은 우리 국방사에 길이(?) 남을 부정부패 사례인 이른바 '국민방위군사건' 관련자 16명. 이들은 후방 군병력 확보를 위해 1950년 12월부터 모은 수십만 젊은이에게 줄 돈과 쌀, 옷 등을 빼돌려 5만 명을 굶겨 병들고 얼어 죽게 만들고 술판 등에 50억원 넘는 돈을 흥청망청 쓴 혐의다.어찌 그들만의 잘못이랴. 그들이 전쟁의 한가운데 겁 없이, 매일 죽어가는 젊은 예비 군인들의 뻔한 사정을 알면서도 빼돌려 헛되이 쓴 일이 저들만의 소행일까. 오죽했으면 어느 누가 '옛일을 말해버릴까'라고 했다가 '덮고 가자'며 달래는 상사의 호소(?)에 억울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고 하지 않는가.공범이 누구였든, 또 다른 윗선이 누구였든, 이들 가운데 5명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그해 8월 13일 대구 달성군 화원면 앞산 자락, 오늘날 달서구 송현동의 한 골짜기에서 총살로 한 삶을 마쳐야만 했다. 매일신문은 당시 8월 14일 자에서 '세인(世人)의 이목(耳目)을 끌던 국민방위군 의옥사건'의 끝을 전하며 '영화(榮華)의 주인공들 이슬로 사라지다'라는 제목을 달았다.한국전쟁 기간(1950. 6. 25~1953. 7. 27) 가운데 34일(1950. 7. 16~8. 18), 잠깐 한국 수도였던 대구는 이런 슬픈 한국전쟁사 일부를 품고,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보루였기에 군대와 전쟁에 남다를 수 있다. 잇따른 군의 부정부패나, 최근 불거진 지휘자의 갑질과 같은 꼴불견의 여러 일탈은 더욱 그렇다.최근 청와대에 한 기업인 아들이 군 복무 중 멋대로 휴가를 가고 홀로 생활관을 쓰거나, 부사관을 심부름꾼처럼 부린 일 등 '황제 군 복무'의 일탈을 고발한 글이 올랐다. 공군은 15일 수사를 시작했다고 밝혔고, 원인철 공군 참모총장은 "대국민 신뢰가 이렇게 무너진 적은 거의 없었을 정도"라고 고백했다.군기 문란의 극치로 국민 심기가 불편하고 어수선한데, 북한은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으로 연일 험한 말을 내뱉지만 문 정부는 말이 없다. 여기에 범여권 국회의원 173명은 북핵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종전선언' 몰이에 나설 모양이다. 뭔가 불안이 나라를 휘감는다.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자녀를 군에 보낸 힘없는 부모들 속앓이가 산하를 울리는 요즘이다.

2020-06-15 20:03:48

[세풍] 文 대통령은 무엇을 팔고 있나

[세풍] 文 대통령은 무엇을 팔고 있나

철학자 미셀 푸코의 역사에 대한 정의는 신랄(辛辣)하다. 그는 "역사란 객관적인 과학이 아니라 한 계급, 혹은 한 세력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도구"라고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문재인 정권의 '역사 뒤집기'가 푸코의 명제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집권 세력에게 역사는 반대 세력을 제압하는 '투쟁의 도구(道具)' 역할을 하고 있다.총선에서 177석으로 몸집을 불린 더불어민주당이 '적폐 청산 시즌 2' 깃발을 올렸다. 시즌 1에선 전·전전 정권 단죄(斷罪)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엔 역사 뒤집기를 무기로 들고나왔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의 선전포고는 섬뜩하다. 그는 의원들에게 "잘못된 현대사에서 왜곡된 것들을 하나씩 바로잡아 가는 막중한 책무가 여러분에게 있다"고 했다. 여당은 역사 바로잡기라고 강변하지만 역사 뒤집기다.민주당이 고쳐 쓰려는 역사는 나열하기가 숨이 찰 정도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을 비롯해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사건, 5·18 민주화운동, 유신, 여순 사건, 제주 4·3 사건에다 구한말 동학운동까지 들먹이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등 현충원에 묻힌 인사들을 타깃(target)으로 한 친일파 파묘(破墓) 법안 제정도 서두르고 있다.집권 세력의 역사 뒤집기는 오랜 시간 뜸을 들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 직전 대담집에서 "가장 강렬하게 하고 싶은 말은 주류 세력 교체"라고 했다. 갈아치우고 싶은 주류 세력은 보수·산업화 세력이다. 이들에게 친일·독재·부패의 낙인을 찍어 주류 세력 교체를 도모하겠다는 것이다.역사 뒤집기가 목표로 하는 것은 명확하다. 집권 세력의 정권 연장 도구이자 반대 세력의 집권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수단이다. 문제는 정권이 정치적 이익을 목적으로 역사를 활용할 때 일어나는 '역사의 정치적 남용'(political abuse of history)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조사한 KAL 858기 폭파 사건 결과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한 전 총리에 대한 대법원 판결마저 뒤집겠다는 것이 딱 그렇다. 조선시대 사화(士禍), 부관참시(剖棺斬屍)가 재연될 판이다. 역사의 정치적 남용은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념·진영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다.역사에 대한 집권 세력의 해석 독점과 이중 잣대도 문제다. 우파 흠집 내기에는 집요한 반면 좌파의 흑역사에 대해서는 모르쇠를 넘어 관대하다. 대법원에서 진보 성향 대법관까지 만장일치로 판결한 한 전 총리 사건은 다시 들추면서 위안부 할머니를 수십 년간 정치적·사적으로 이용한 의혹을 산 윤미향 국회의원에 대해서는 감싸기에 급급하다. 또 하나의 내로남불이다.문 정권의 역사 뒤집기 종착역이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만드는 데 있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정권을 잡은 세력이 정치적 이익에 따라 역사를 뒤집는 악순환이 반복하는 길을 문 정권이 활짝 열었다.힘을 모아 위기 극복에 나서도 모자랄 판에 과거를 다시 들추는 프레임으로 갈등을 증폭시키고 국력을 소진하고 있다. 문 대통령부터 '6·25 남침 주역'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로 칭송하고, 툭하면 친일 잔재 청산을 들먹이는 등 과거로 달려가고 있다. 문 대통령의 롤 모델(role model)이자 경제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희망이 없는 국민은 반드시 멸망한다"고 했다. 나폴레옹은 "지도자는 꿈을 파는 상인(商人)"이라고 했다. 희망·꿈은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 문 대통령은 지금 국민에게 무엇을 팔고 있나?

2020-06-08 18:51:24

[세풍] ‘18대 0’과 의회 민주주의

[세풍] ‘18대 0’과 의회 민주주의

21대 국회 4년 임기가 지난달 30일부터 시작됐다. 여야는 다음 주초 원 구성을 끝내고 국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법정시한인 5일 국회의장단 선출에 이어 8일까지 상임위원회 구성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21대 국회가 출발부터 삐걱댈 수밖에 없다.역대 국회가 그러했듯 21대 국회도 조짐이 좋지 않다. 개원에 앞서 상임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여야 힘겨루기가 만만찮아서다. 177석으로 몸집을 불린 헤비급 여당과 위축될 대로 위축된 제1야당을 보면 국회 풍경은 뻔하다. 범여권(190석)까지 계산에 넣을 경우 보수의 단기필마인 미래통합당(110석)은 사실상 '곤마' 형세다. 이는 여당에 압도적인 힘을 실어준 국민 선택의 결과이지만 야당에는 4년 내내 악몽의 연속일 수 있다는 의미다.따지고 보면 지금의 야당 현실은 미래통합당이 자초한 결과다. 영남의 유권자들이 표를 몰아주었으나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으로 간판을 바꿔 단 보수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솔직히 그리 높지 않다. 보수의 신념과 지역색에 따라 선택지를 고정해 놓은 유권자를 빼면 마지못해 뽑아준 유권자가 적지 않다.특히 그동안 보수 정치 세력이 보여준 국정 운영 능력과 민주주의 인식은 누가 보더라도 낙제점이다. 이런 미래통합당의 위상과 정체성은 '보수=적폐'라는 패러다임으로 굳어졌다. 이런 국민적 시각이 여전한 상황에서 미래통합당이 하루아침에 집권 세력을 견제하는 대안이자 민생 안정의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총선 투표함이 열리자마자 여당 지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180석의 의미'를 환기시킨 것도 야당에 끌려다니지 말고 엄하게 다루라는 신호탄이다.그런데 의회 정치의 무대인 국회의 운영 원칙은 '프리 플로우'(Free Flow)가 아니다. 프리 플로우는 교통 밀도가 낮은 도로에서 차량이 합류할 때 서로 별다른 방해 없이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을 일컫는 용어다. 문제는 대부분의 도로 합류 구간은 프리 플로우 상태가 아니라 '멀지'(Merge)나 '일드'(Yield·양보) 규정이 적용될 만큼 복잡하다는 점이다. 멀지 구간의 경우 차량이 본선과 지선에서 서로 합류할 때 어느 차로에도 우선권을 주지 않는다. 지선 차량의 원활한 합류를 위해 본선 차량이 교통 흐름을 보고 차로를 바꾸도록 규정하고 있다.우리 국회에 이를 적용해 보면 한결 이해가 쉽다. 여야의 양상이 완전히 뒤바뀐 18대 국회도 좋은 참고 자료다. 당시 한나라당은 비례대표 22석을 포함해 153석을 얻었다. 반면 제1야당인 통합민주당은 81석에 그쳤다. 국회 상임위원장 배분을 두고 여야가 충돌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18개의 위원장 자리를 한나라당(11)과 통합민주당(6), 자유선진당(1)이 나눠 가졌다. 21대 국회에서 미래통합당이 '야당 몫'이라고 주장하는 법사·예결위원장 자리도 여야가 나란히 나눴다.최근 여당 내부에서는 '18대 0' 소리가 공공연히 나온다. 물론 정치가 프리 플로우와 같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번거롭게 자리를 나누고 협력이니 견제니 따질 이유가 없다. 각자 제 노선대로 지지 세력의 입맛에 맞춰 파벌 정치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의회 민주주의는 정당이 협력하고 때로 견제하면서 합의를 이뤄가는 게 핵심이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에다 미·중 갈등 등 '전시 상황'과 마찬가지다. 여당은 책임 정당으로서 국정 주도권을 잡고 물샐틈없는 정책 수행에 나서야 하고, 야당은 야당대로 제 고집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협력 정치의 묘수를 찾아야 할 때다.

2020-06-01 19:12:35

[세풍] 윤미향에게 ‘운동’은 수익성 높은 ‘비즈니스’였나

[세풍] 윤미향에게 ‘운동’은 수익성 높은 ‘비즈니스’였나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수한 마음에 불타는 열정이 보태졌고, 바로잡고야 말겠다는 의협심과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끌어안는 감정이입이 상승(相乘)하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운동'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성금과 기부금이 들어오고 액수도 갈수록 커졌다. 어느 순간 '딴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처음에는 찜찜했으나 딴마음이 하는 일을 들여다보려는 사람도 없고, 들여다보려 해도 '운동'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주눅이 들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고착되면서 찜찜함은 점차 엷어져 갔을 것이다.그러자 '운동'에서 생각지도 못한, 꽤 쏠쏠한 수익이 나는 '비즈니스' 모델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즈니스는 철저한 비밀 유지가 보장된다는 점에서, 또 '운동'의 성스러움 때문에 운동을 마쳐야 할 전기(轉機)가 도래해도 이를 거부하고 계속하겠다고 해도 외부인이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리스크 0'의 마르지 않는 샘으로 보였을 것이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의기억연대의 기부금 유용 의혹과 그 중심에 있는 윤미향 씨의 행적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스토리'를 구상하게 할 것 같다.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속속 드러나는 팩트는 이런 '스토리텔링'을 억누르지 못하게 한다.회계 부정 의혹에 대한 저들의 '해명'을 보면 그렇다. "기부금 내역이 투명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말뿐이다. 이 말을 믿게 하는 것은 참 쉽다. 그 '투명한 관리'를 투명하게 공개하면 된다. 그러나 거부했다. 세상 어느 NGO(비정부기구)도 그렇게 하지 않으며, 기부자가 공개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냥 믿으라는 소리다. 오래전 개그맨 김상호의 배꼽 잡는 멘트가 생각난다. "나는 나를 믿는데 너는 나를 왜 못 믿어?"그리고 이런 억지 해명에 대한 비판은 '친일 세력의 공격'으로 몬다. 광복된 게 언제인데 지금 무슨 친일 세력이 있다는 것인지 아연(啞然)하지만 그렇다 치자. '그X의 친일 세력'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라도 공개해야 하지 않나?정대협이 불완전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면 할 수 있었다. 바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다. 정대협은 피해자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에 따르면 '피해자의 의견'은 '빨리 일본과 합의해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생존 피해자 47명 중 35명이 일본 자금을 받은 사실로 보아 천 전 수석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하다. 최근에는 윤 씨가 일본 자금을 받지 말라고 종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결국 정대협과 윤 씨의 '피해자 중심주의'와 피해자들의 '피해자 중심주의'가 달랐던 것이다.윤 씨는 왜 그랬을까? 천 전 수석의 '증언'이 그 해답의 실마리가 될 듯하다. 그는 일본 국가 예산으로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일본 측 안을 설명하자 윤 씨가 아주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한 천 전 수석의 '해석'은 이렇다. "제가 구상하던 해법이 할머니들에겐 나쁠 게 없지만, 정대협으로서는 이제 문을 닫을 준비를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정대협엔 사형선고를 전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사실이라면 윤 씨가 곤혹스러워했을 만도 하다. 피해자의 '피해자 중심주의'대로 되면 위안부 문제 해결의 '본좌'라는 명망(名望)을 안기고, 어떻게 썼는지 아무도 들여다볼 생각을 못 하는 기부금이 몰려드는 수익성 높은 '운동 사업'을 접어야 할 테니 말이다.

2020-05-25 18:40:26

[세풍] 코로나19와 문명 대전환

[세풍] 코로나19와 문명 대전환

지난해 10월 18일 미국 뉴욕에서 '이벤트 201'이라는 행사가 열렸다. 당시 큰 주목을 못 끌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깜짝 놀랄 프로그램이었다. 미국 존스홉킨스 보건안전센터가 주최한 이 행사에는 세계경제포럼과 감염병 전문가 등이 참석했다. 행사에서는 가상 시나리오가 제시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박쥐→돼지→사람으로 전파되는 것을 가정한 도상 훈련이었다.시뮬레이션에 의하면 브라질 돼지농장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로 확산된다. 이 바이러스는 2002년 중국에서 발원해 29개국으로 퍼진 사스(SARS)를 모델로 삼았지만 전염력이 훨씬 높다. 감염자는 매주 두 배씩 증가하는데 어떤 정부도 바이러스를 통제하지 못한다. 첫해에 사용할 수 있는 백신은 없다. 6천500만 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인류의 80~90%가 노출되는 18개월이 돼서야 사태는 종식된다.지금 세계를 충격과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을 발생 몇 개월 전에 족집게처럼 예시한 행사가 있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발원지가 중국이고, 박쥐와 인간 간 매개동물이 천산갑이라는 점을 빼면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벤트 201 도상 훈련이 가정한 처음 몇 달 상황과 판박이처럼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다.이날 행사에 돈을 댄 사람은 뜻밖에도 빌 게이츠다. 빌 게이츠는 인류의 가장 큰 위협이 신종 바이러스 감염병이라며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2000년에 설립했다. 그는 지난해 촬영돼 올해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코로나바이러스를 해설한다'에도 출연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게이츠는 팬데믹에 대해 거듭 경고한다. "세상은 아직 준비를 못 했다." 그의 경고는 몇 달 뒤 현실이 됐다.코로나19 사태가 발발한 이후에도 인류에겐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중국 정부가 은폐·축소에 급급하지 않고 3주만 빨리 공개 대응에 나섰다면 중국 내 확산 지역을 95% 이상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중국에서 터진 상황을 본 세계의 감염병 전문가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을 막기 위해 총력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지만 각국 정부는 귀를 닫았다.코로나19는 충격과 공포 속에 이기심, 편견, 혐오, 각국도생(各國圖生) 등 인류의 민낯도 끌어냈다. 세계 양강 국가라는 G2의 현주소를 보자. 어영부영하다가 미국은 확진자·사망자 1위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중국은 축소·은폐 의혹에다 바이러스 유출 의혹까지 받는다.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두 나라는 아웅다웅하며 네 탓 타령을 하고 있다. 우리가 동경해 마지않던 선진국들도 부실한 공공의료와 팬데믹에 전혀 힘을 못 쓰는 영리 의료 시스템, 정부 부문의 무능을 속속 드러냈다.코로나19의 공식 명칭은 'SARS-COV-2'다. 풀어보자면 '사스2'라는 뜻이다. 2002년 발생한 사스는 팬데믹으로까지 번지지 않았다. 이름이 운명을 정한다면 코로나19는 '사스의 길'을 가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상황만 놓고 보면 코로나19는 100년 전 5천만 명(추정치)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독감과 닮은 길을 가려 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스페인독감 시즌2'가 돼서 절대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역설적으로 대유행병은 인류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적이 여러 번이다. 흑사병은 14세기 유럽 봉건제도를 무너뜨렸고 천연두는 17세기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코로나19도 21세기 문명 대전환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 길은 미지의 길이며 개척 동력원은 인류의 연대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잘 이겨내고 지구촌 삶의 대전환을 이끄는 과제가 인류에게 주어져 있다.

2020-05-19 06:30:00

[세풍] 코로나에 묻을 수 없는 이름이여

[세풍] 코로나에 묻을 수 없는 이름이여

'권재갑 김문진 김윤섭 박용규 우기돈 윤학조 이보식 그리고 정휘창….'대구에 중국발 우한 폐렴으로 시작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2월 18일 이후, 괴질(怪疾)의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대구는 모든 일상이 사라졌다. 코로나를 뺀 다른 일이나 사람들 이야기는 묻혔고 잊혔다. 확진자 역시 마치 수인(囚人)처럼 어느덧 이름 대신 숫자가 주어졌다. 그렇게 대구는 2020년의 봄날을 보내야만 했다.온통 코로나19가 세상을 뒤덮었으니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럴 만했겠지만 결코 코로나19에 묻혀 잊고 그냥 지나가기에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은, 일상이었으면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던 이름들이 분명 있었다. 그래서 비록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라도 시간을 거슬러 그들 이름을 마음에 새기는 게 도리라 여겨 불러본다.앞의 일곱 이름은 대구 출신으로 101주년 3·1절을 맞은 날, 독립운동 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들이다. 이들은 1919년 대구 만세운동 참여로, 혹은 다른 독립운동으로 뒤늦은 서훈을 받게 됐다. 코로나19의 회오리 속에 이들 이야기는 제때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세인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으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랴.이어 이틀 뒤 3월 3일, 조용히 다른 세계로 떠난 분이 있었으니 아동문학가로 널리 알려진 주인공 정휘창 전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이다. 그를 오늘 떠올린 까닭은 대구와 한국 아동문학에 끼친 공로도 크지만, 직접 발품 팔아 대구경북 독립운동사를 다룬 지역의 첫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를 지난 1991년 펴낸 업적 때문이다.전문 역사가도 아닌 그가 대구경북의 피맺힌 항일 독립운동 현장 곳곳을 직접 누비고 다니면서 내놓은 책은 뒷날 대구경북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데 길라잡이가 됐다. 이후 그의 책을 바탕으로 대구경북의 빛나는 항일 투쟁사를 다룬 책이 경북 안동과 대구에서 잇따라 나왔고 독립운동도 조명되었으니 어수선한 날을 보낸 이제라도 그를 기억함은 마땅하리라.또 다른 14명 이름도 있다. 생존 독립지사 2명(권중혁 장병화)과 독립운동가 후손 12명(허경성 나중화 이종찬 문희갑 박유철 우대현 정대영 이재윤 김진 김능진 박중훈 윤주경)이 그들이다. 이들은 지난 100일 동안 대구를 초토화한 코로나19 회오리바람 속을 뚫고 대구에 독립운동기념관(역사관)을 세울 뜻을 세우고 발기인을 모으며 동분서주한 바로 그분들이다.전국에 흩어져 사는 이들이 항일과 독립운동의 역사, 흔적, 자산이 풍부한 대구에 독립운동을 위한 변변한 시설 하나 마련하자며 처음 모인 게 지난 2월 13일. 대구 첫 모임 뒤 곧바로 덮친 코로나로 일상이 휩쓸리는 바람에 모든 게 중단됐다. 그러다 보니 뜻 맞는 발기인 모으는 작업도, 당초 3월 26일 예정의 발기인 행사 준비도 밀렸다.하지만 코로나 괴질도 14명의 열정만은 막지 못했다. 300명 발기인 명단도 그래서 그럭저럭 채워졌다. 300명 동참자 대부분은 참여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도 알았다. 먼저, 앞장선 14명 주인공 나이가 70~90대여서 그랬다. 또 대구 밖 인물도 여럿이고, 모두 독립운동가 집안이고, 한 후손은 3만3천㎡(1만 평) 넘는 땅까지 내놓은 기증에 또 놀랐다.2월 이후 대구 일상은 코로나에 눌려 묻히고 잊혔다. 그러나 대구 독립운동과 관련한 일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그냥 묻고 넘길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실종된 봄을 보내며 뒤늦었지만 그들 이름을 이리라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에 쓸려 간 대구의 봄 속에서 잊힌 그들 이름을 건져 지상에 올리니 미안함을 조금 덜 수 있어 다행이다.

2020-05-11 19:44:39

[세풍] ‘거지 같은 나라’에서 살아갈 미래 세대

[세풍] ‘거지 같은 나라’에서 살아갈 미래 세대

오늘은 어린이날! 초롱초롱한 어린이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이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나라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아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못한 '거지 같은 나라'에서 살아갈까 걱정이 앞선다.기성(旣成)세대는 미래(未來)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 서산대사는 '답설'(踏雪)이란 한시로 이를 명료하게 설파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지금 이 나라의 기성세대는 미래 세대의 이정표가 되기에 부끄럽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는가란 화두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미래 세대가 물려받을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거지 같은 나라일 확률이 매우 높다. 첫째, 나라 곳간은 텅텅 비고, 빚만 잔뜩 진 나라일 것이다. 중앙·지방정부가 반드시 갚아야 할 국가채무가 이달 초 819조원에 달해 국민 1인당 1천500만원을 훌쩍 넘었다. 문재인 정권 출범 후 국가채무가 192조원이나 늘었다. 경기침체에 따른 세수 결손에 재정적자 보전을 위한 국채 발행이 대폭 늘어난 탓이다.경제 규모가 커지고 나라 살림이 늘어날수록 국가채무는 증가하지만 문제는 '과속' 우려가 나올 정도로 증가 속도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문 정권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42%를 넘자 이제는 60%까지 가도 괜찮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고령화 지출에 통일 비용까지 고려하면 국가채무 비율이 이미 100%를 넘는다는 게 기획재정부의 경고다.더욱이 정권이 나랏돈 퍼주기에 계속 올인할 것으로 보여 국가채무 비율이 60%를 넘어 80%, 100%를 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한 가정에 비유하면 가장(家長)인 아버지가 돈은 벌어오지 않고 "항구에 배만 들어오면 모든 게 해결된다"며 빚을 끌어와 마구 쓰고만 있다. 가장을 말려야 할 어머니마저 같이 빚을 내 쓰는 데 정신이 없다. 얼마 안 가 가정 살림은 거덜나고 자식들은 빚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거지가 되기 십상이다.둘째, 어느 상인이 말한 '거지 같은 경제'가 지속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5년마다 1%포인트씩 성장률이 추락한 한국 경제는 급기야 제로(0) 성장도 아닌 마이너스 성장에 직면했다. 경제 추락에 따른 국민 고통은 계속 커질 것이다.셋째, 국가 안위조차 남에게 구걸하는 나라도 거지 신세이기는 마찬가지다. 핵무기 버튼을 가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깜깜이 행보에 가슴을 졸이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가. 코로나 긴급재난지원금 재원 마련을 위해 정부는 국방 예산을 뭉텅 자르고, 이에 군(軍)은 "문제 없다"고 하는 나라를 정상 국가라 할 수 있나.가장 우려하는 것은 국민 사이에 거지 근성(根性)이 똬리를 트는 것이다. 나라에서 공짜로 주는 돈에 맛을 들인 국민, 포퓰리즘에 눈을 감고 노예가 된 국민, 밥그릇 싸움과 편 가르기에 빠진 국민, 스스로 일어서지 않고 남에게 기대는 국민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국민이 천민(賤民)으로 전락한 나라에 찬란한 미래가 없다는 사실은 동서고금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미래 세대들이 2020년을 산 기성세대에게 무슨 말을 할까. 거지 같은 나라를 만들어 물려줬다고 온갖 욕(辱)을 쏟아내지 않을까 두렵기만 하다. 우리가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간 구한말의 기성세대를 욕했던 것처럼.

2020-05-04 18:46:00

[세풍] 봄날은 간다

[세풍]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가수 백설희의 데뷔곡 '봄날은 간다'는 대구에서 탄생했다. 6·25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어느 봄날의 애상이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너무나 화사하던, 그래서 더욱 슬펐던 봄날의 역설이다.여가수의 낭랑하면서도 체념적인 목소리는 그렇게 전쟁의 상처를 껴안은 사람들의 한스러운 내면을 위로했다. 코로나 전염병 대란 속에 환란과 모멸을 감수하며, 설마했던 상반된 투표 결과에 고개 숙인 대구경북 사람들의 2020년 봄날 또한 그러할까. '봄날은 간다'에는 한국인이 공감하는 한(恨)의 정조가 스며 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마흔 중반은 넘겨야 제맛과 멋을 낼 수 있다고 한다.농익은 가사와 구성진 가락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려면 그만한 세월의 숙성이 필요할 것이다. 한때는 독립운동의 성지였고, 6·25전쟁의 최후 보루였으며, 민주화와 산업화의 현장으로 역대 권력의 본산이었던 대구경북이다. 70년 전 전쟁의 폐허에서 그러했듯이 올봄 코로나 사태와 총선 후유증으로 피폐한 대구경북민의 가슴에 이만큼 짙은 서정과 깊은 공감으로 와닿는 노래도 없으리라.화려한 봄날에 배어든 회한의 정서, 그것은 정녕 가버린 세월을 한탄하는 정한만은 아닐 것이다. 끝자락에 선 봄날의 처연함이란 종말의 변주를 거쳐 또 새로운 희망을 머금는다. 봄날에 대한 애사(哀詞)와 절창(絶唱)은 시공을 초월한다. 당나라 시인 왕유는 송춘사(送春詞)에서 '기쁘게 서로 술잔 마주하고 있으니, 꽃잎 흩날린다고 아쉬울 게 무엇인가'(相歡有尊酒 不用惜花飛)라고 했다.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도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 섬돌 앞의 오동잎은 어느새 가을 소리인고'(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라며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속절없이 가는 봄에 대한 애틋한 심사가 현대의 시인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김소월은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 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기형도 시인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는 몇 장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라고 했다. 어느 시인은 '손님 없는 노래방에서 술에 취한 봄날이 간다'고 서러워했고, 어느 시인은 '알뜰한 맹세를 한 적은 없지만, 시들시들 내 생의 봄날은 간다'고 했다. 시인의 송춘(送春)은 계절과의 작별 그 이상일 것이다.'떨어지는 꽃은 뜻이 있어 흐르는 물을 따르지만, 흐르는 물은 무심히 꽃을 흘려보낼 뿐'(落花有意隨流水 流水無意送落花)이란 시구에서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경지를 읽는다. 어차피 가려고 오는 봄이다. 화려한 봄날일수록 더욱 허망하게 스러지기 마련이다. 부질없는 미련이 무슨 소용인가. 판소리 단가 사철가에는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보내는 아픔을 감내하고서야 더 성숙한 계절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이형기 시인은 '낙화'(落花)에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했다. 알뜰한 맹세가 실없는 기약이 되는 슬픔의 봄날이 영욕의 민족사와 함께해온 대구경북민의 서정과 더불어 또 한 번 저물어 간다. 꽃다운 낙화일수록 더 농염한 술단지가 필요할 것이다. 격정과 굴욕을 감내한 나의 한 시절도 이렇게 결별을 고하려 한다.

2020-04-27 18:29:59

[세풍] ‘현민’(賢民)인가 ‘우중’(愚衆)인가

[세풍] ‘현민’(賢民)인가 ‘우중’(愚衆)인가

총선이 여당의 압승으로 끝나자 보수 언론과 지식 분자들이 미래통합당을 두들겨 패는데 정신이 없다. 수구(守舊)이고, 냉전사고의 포로이며,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불감증에 갇혔다고 입에 거품을 문다. 총선 직전까지 문재인 정권을 두들겨 패 놓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영혼을 팔아넘긴다.이렇게 싸구려로 전락한 영혼은 여당에 갖은 찬사를 늘어놓는다. 국내 유수의 한 일간지는 그 대표격이 될 만하다. 민주당이 '이타적 공감 능력을 갖췄다'라느니 '남북 화해와 사회적 약자 보호 정책은 유권자 다수가 동기를 이해했다'라느니 보는 이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이 정권의 '묻지마 퍼주기'를 '이타적 공감 능력'으로, '북한에 저당잡힌 안보'를 '남북 화해'로, '후대에 빚을 떠넘기는 당대의 도덕적 파탄'을 '사회적 약자 보호'로 둔갑시키는 언어의 타락 아닌가.총선에서 국민이 집권 세력의 국정운영 결과를 평가하는 '회고적 투표' 대신 미래를 바라보는 '전망적 투표'를 했다는 해석도 마찬가지다. 일견 그렇게 보인다. 경제 파탄을 초래한 '소주성', 에너지 수급 교란을 몰고 올 탈원전, 대북 유화정책과 그 결과물인 북한의 사실상 핵보유국화, '평등·공정·정의'를 외치면서 뒤로는 그 반대로 갔던 위선 등이 '결과적'으로 심판받지 못했으니 말이다.과연 그런가. 개탄스럽게도 문재인 정권과 그 추종자는 그렇다 쳐도 반문(反文)과 보수를 견지해온 지식 분자들까지 그렇게 믿는다는 사실이다. 대중이 어떤 결정을 하든 '위대한 국민의 현명한 뜻'으로 떠받드는 속물 민중주의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로 멍이 든다.잘 보자. 지역구에서 민주당은 163석, 통합당은 84석을 얻었다. 더블 스코어 차이다. 그러나 득표율을 보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민주당은 49.9%, 통합당은 41.5%로 격차는 8.4%포인트이다. 작지 않지만 그렇다고 큰 격차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 정권의 실정에 대한 심판과 속물 민중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야당 심판'이 길항(拮抗)하고 있었다는 얘기다.그런 점에서 '전망적 투표' 어쩌고저쩌고 하는 해석은 통합당의 41.4%를 허수(虛數)로 뭉개버린 편의적·소망적 해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루쉰(盧迅)의 '아(阿)Q'식 '정신 승리'라고 비웃고 싶은가? 분명히 해 두건대 기자는 '회고적 투표'가 이겼다고 하지 않았다. 이번 선거 결과를 '전망적 투표'로 몰아가는 게 아전인수이며 '야당 심판' 못지않게 '정권 심판'을 갈망한 국민도 많았다는 것이다.그러나 진 것은 진 것이다. 그게 보통선거 민주주의이다. 이는 언제든 중우(衆愚)정치로 전락할 수 있다. 보통선거의 주체인 '민'(民)은 '현명한 국민'이 되기도 하지만 '어리석은 군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라를 망친 정치 세력들이 선거로 집권하거나 선거 이외의 방법으로 집권한 뒤 선거로 그 정당성을 추인받은 현대 민주주의 역사가 말해주는 바다. 이 나라의 민은 어느 쪽일까. 앞으로 문 정권이 어떤 길을 가느냐가 결정해줄 것이다. 지난 3년과는 반대로 가면 '결과적'으로 현명한 국민,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군중이 될 것이다. 참 처량하게 됐다. 어느 쪽이 될지 가늠케 하는 '신호'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여당의 비례대표 정당 대표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향해 "당신의 거취를 묻는다"고 하고, 조국 아들에게 허위 인턴증명서를 발급해준 혐의로 기소된 범여 비례대표 정당 당선자는 검찰과 언론을 향해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고 한다.

2020-04-21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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