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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논설위원

[야고부] 봄은 오는가

노자(老子)는 '대음희성'(大音希聲)이라고 했다.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봄이 오는 소리는 너무도 위대한데 자연에서 멀어진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봄의 소리는 정녕 시구나 노랫말에나 나오는 문학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인가. 그래도 가만히 귀 기울이면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법도 한데, 올봄은 그 같은 치기(稚氣)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이 판국에 무슨 봄 타령인가.가족이 보름째 칩거 생활 중이다. 인근 마트에 물건 사러 가는 것은 물론 아파트 엘리베이터 타는 것조차 두렵다.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이 못내 께끄름하다. 기침 소리라도 나면 호흡을 멈추고 저만치 비켜서야 한다. 친한 벗들과 막걸리 한잔 나눌 수 없고, 그럴 만한 대폿집도 모두 문을 닫아버렸다. 유학생인 아들은 방학을 맞아 일찌감치 북경(北京)을 잘 벗어났다고 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개학을 하더라도 중국에서 대구 출신을 받아줄지 걱정이 태산이다. 아예 재택근무에 돌입한 채 삼시 세 끼 음식해대느라 손에 물이 마를 겨를이 없는 아내의 남은 관심사는 오로지 마스크 구입이다. 비록 오후 한나절이지만, 마감을 위해 신문사를 오가며 콧바람을 쐬는 내가 어쩌면 집안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이다. 드나들 때마다 마스크를 끼고 손을 씻지만 불안감은 숙지지 않는다.출퇴근길 바깥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인적이 드문 썰렁한 거리와 문 닫힌 가게들을 보면 가슴이 황량해진다. 창궐하는 전염병 바이러스와 나날이 늘어나는 확진자들, 방역 현장에서 감염이나 과로로 쓰러지는 의료진과 공무원들, 혹세무민으로 감염 확산을 부추겨온 종교집단, 시종일관 뒷북 정책과 영혼 없는 언행도 모자라 시민들 가슴에 생채기나 덧내는 집권 세력과 그 주변 무리들….이 황망한 시절에 산기슭마다 피어나는 화사한 꽃망울인들 눈에 들어오겠는가. 육십 평생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봄이다. 오늘은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 대구 시민들은 아직도 겨울 속에 갇혀 있다. 이 어두운 터널에도 출구가 있을까. 마스크를 벗을 날이 올까. 다시 봄비가 내리고 서러운 풀빛이 짙어올 것이다. 오는 봄조차 빼앗겼는데 가는 봄은 또 얼마나 느꺼울지….

2020-03-05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야고부] 대통령의 '희망고문'

영화 '타짜'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화투판에서 사람 바보로 만드는 게 뭔지 아세요? 바로 희망. 그 안에 인생이 있죠. 일장춘몽." 지금은 계속 잃고 있지만 '다음 판에는 꼭 터질 거야'라는 '희망 고문'의 심리를 표현한 대사다. '희망 고문'은 한때는 가수 겸 기획자 박진영이 1999년 수필집 '미안해'에 처음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원조는 19세기 프랑스 작가 빌리에 드 릴아당의 단편소설 '희망이란 이름의 고문'이다.고리대금업을 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힌 유대교 랍비가 탈출구를 찾아내고 마침내 탈옥에 성공했으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종교재판소 소장에게 잡히고 만다는 내용이다. 그 순간을 릴아당은 이렇게 묘사한다. "이 운명적인 저녁의 매 순간이 다 예정된 고문이었다. '희망이란 이름의 고문'."희망 고문은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물론 죽음으로 이끌기도 한다. 베트남 전쟁 때 포로가 돼 8년간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으나 끝내 살아남은 미군 장교 제임스 스톡데일의 경험은 이를 잘 말해준다.포로수용소 동료 중 쉽게 풀려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꼭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다진 사람은 살아남은 반면 '크리스마스 때는 풀려날 거야' '이번 부활절에는 풀려날 거야' '추수감사절에는 꼭 그럴 거야'라며 근거 없는 희망에 매달린 사람이 가장 먼저 죽었다는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막연한 희망에만 기대를 걸었다가 더 큰 실패를 초래한다'는 의미의 '스톡데일 패러독스'라는 말의 유래다.우한 코로나 국내 확산이 통제 불능 상황인 데도 문재인 대통령의 대(對)국민 희망 고문은 멈출 줄 모른다. 문 대통령은 2일 국군대전병원을 방문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때에 비하면 투명하게 모든 정보가 국민에게 공개되고 있는 것은 좋아진 점"이라며 "감염병 대응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다"고 했다.행간을 읽자면 그 의미는 '우한 코로나는 곧 잡힐 것'쯤 될 듯하다. 논리적으로 그렇다. 굉장히 높아진 전염병 대응 수준의 논리적 귀결은 우한 코로나 퇴치일 것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는 지난달 13일 발언과 다르지 않다. 국민은 우한 코로나에 시달리고 대통령의 희망 고문에도 시달리고 있다.

2020-03-04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사회적 거리' 두기

미국 경찰아카데미 범죄심리학 교재에 범행을 자백 받으려면 용의자와 최대한 가까이 앉으라는 내용이 있다. 심문자와 피심문자 사이에 테이블이 놓일 경우 자백 가능성이 크게 떨어지는데 상대에게 편안한 심리 상태를 만들어 자기 방어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통상 사람이 낯선 상대와 대면할 때 유지하는 간격은 1m 20㎝ 안팎이다. 이를 '중간(개인적) 거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좁은 '밀접 거리' 즉 45㎝ 이내에서 서로의 무릎이 닿을 정도가 되면 용의자는 그만큼 심리적 불안감이 커지고 진실을 말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1959년 저서 '침묵의 언어'에서 '인간의 역사는 타인으로부터 공간을 탈취하고 외부인으로부터 그것을 방어하려는 노력의 기록이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근접학'(Proxemics) 이론을 처음 제시했는데 미국 중산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개인 간 거리 의식을 토대로 각 나라·문화권마다 거리 의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관찰해 평균 모델을 제시했다.그는 후속 저서 '숨겨진 차원'(1966년)에서는 사람이 대화할 때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를 4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45㎝ 이내의 아주 가까운 거리를 '친근(밀접) 거리', 45~120㎝ 안팎의 일반적 대화 간격을 '개인적 거리'로 불렀다. 또 회의나 낯선 사람과의 대화 시 유지하는 1.2~4m 간격을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연설과 강의 등에서의 4m 이상 거리를 '공적 거리'로 분류했다.코로나19 사태가 확산하자 정부가 재택근무나 근무시간 유연제, 모임 제한 등 대면 접촉을 최소화하는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강조했다. 중앙방역대책본부는 1일 정례브리핑에서 지금이 코로나19 유행의 중요한 분기점이라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피하고 부득이 사람을 만나더라도 2m 이상 거리를 둘 것을 당부했다.그제 서로 마주보지 않고 나란히 앉아 식사하는 대구시교육청 구내식당 상황을 담은 보도 사진도 일종의 사회적 거리두기다. 손 씻기·마스크 착용 등 개인위생 수칙도 중요하지만 밀접 접촉을 피하는 사회적 거리두기나 자발적 격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행동 요령이다.

2020-03-02 19:44:58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3.1절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고부] 고장난 문 타령, 어쩌나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대구 남산동 도심에 천주교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역이 있다. 천주교 순례자 발길이 이어지는 이곳을 드나들 때 입구 출입문 두 벽돌 기둥에 새겨진 'HODIE MIHI', 'CRAS TIBI'라는 낯선 라틴어 글씨의 뜻을 알면 옷깃을 여미곤 한다.낯선 글귀가 새겨진 이곳 문의 안팎은 다른 세계이다. 안과 밖이 이처럼 구분된 쇠문도 있지만 다른 문도 있다. 절집 특유의 일주문(一柱門) 또는 불이문(不二門)이란 문이다. 뜻하는 바처럼 승속(僧俗)이 따로 없고, 하나이다 보니 문짝 역시도 없어 드나듦이 자유롭다.세상은 이런 문으로 가득하다. 특히 세속의 문은 실용적 목적으로 짠 장치다. 오를 수 없는 높은 성벽도 작은 문 하나면 성 안과 밖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다. 문의 안이냐, 밖이냐에 따라 '나'와 '남'이 되고, 유행가 가사처럼 '님'과 '남'이 되기도 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도 다르지 않다. 국경이란 문이 생긴 까닭이고, 지금껏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리라.지금 중국발 '코로나19' 괴질(怪疾)로, 특히 대구경북은 잇따라 아까운 목숨을 잃는 참담한 현실이다. 무엇보다 중국의 문을 한결 연 우리에게 되레 다른 나라는 앞다퉈 문을 걸어 잠그니 '문 타령'은 저절로다. 그 수도 갈수록 늘지만 우리는 요지부동이니 속내를 알 수 없다.1일 현재 20명의 사망자 중 19명이 대구경북에서 나왔다. 지금도 죽음과의 싸움이니 또 나올 헛된 희생자가 두렵다. 이번 괴질로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기 바란 내일'인 오늘을 사는 우리는 혹 '내일은 나에게'라는 재앙이 닥칠까 두려워 문 타령은 더욱 그럴 만하다.게다가 대구경북에선 쏟아진 환자로 미처 병실을 구하지 못해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바람에 산 목숨까지 잃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지경인데 대구경북 환자를 받기는커녕 나라 안의 문은 더 굳게 닫히는, 한 번도 없던 사태마저 겪는 나라 꼴이 그저 암담하다.이러니 3·1절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대구경북은 결코 외롭지 않다"는 위로가 공허할 뿐이다. 닫히지 않는 창문을 둔 채 무더운 여름과 찬바람 부는 겨울, 아무리 모기를 잡고 이불을 덮는들 무슨 소용이랴. 고장 난 문부터 제때 고치거나 바꿔야 할 터인데 말이다.

2020-03-02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야고부] 낭만닥터

최근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TV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는 공간적인 배경부터가 도시의 거대병원이 아닌 지방의 초라한 돌담병원이었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이 저마다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의사로서 그리고 한 인격체로서 성장해 나가는 모습들을 가슴 뭉클하게 그렸다. 드라마의 주요 성공 비결은 제목 그대로 주인공인 닥터 김사부의 낭만적 캐릭터이다.괴짜이면서도 천재적인 외과의사 김사부를 중심으로 열정이 넘치는 젊은 의사들이 '진짜 닥터'가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자본과 권력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오직 환자의 생명을 중시하는 의사로서의 소명의식 그리고 사람다움의 가치를 존중하는 인간미가 시청자들이 가슴에 와닿은 것이다. 이 드라마의 인기는 '낭만닥터'에 대한 현대인들의 갈증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조선시대 대표적인 낭만닥터는 '동의보감'을 집필한 명의 허준이 아닐까. 드라마 속의 허준은 상처받은 마음까지도 위로해주는 의원이었다.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의원으로서의 소신과 사명감을 버리지 않았던 허준의 파란만장한 역정에 '낭만'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허준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의녀(醫女) 대장금 이름 앞에도 '낭만'이라는 형용사를 붙여볼 만하다. 초기 한류의 대명사였던 드라마 '대장금'에서 주인공은 수라간 궁녀에서 왕의 주치의가 되기까지 영욕의 삶을 살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았다. "'코로나19로부터 시민들을 구하자"는 이성구 대구시의사회장의 호소와 솔선수범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수백 명의 의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여러 개의 조를 나눠 지역거점병원에서 야간 당직을 맡는가 하면, 각 병원과 보건소에 마련된 선별검사소를 찾아 바이러스 검사를 위한 검체 채취 역할을 하고 있다. 연령층도 다양하고, 여성 의사도 상당수이다. 경북도의사회 자원봉사단도 자신의 병원 문을 닫은 채 23개 시·군 현장으로 달려갔다. 코로나 현장을 누비는 대구경북의 '히포크라테스'. 그대들 또한 자랑스러운 낭만닥터들이다.

2020-02-28 19:48:11

이대현 논설위원

[야고부] '이런 나라는 없었다'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다."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에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선사할 것을 약속했다. 그 이후 33개월 동안 문 대통령이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람에 국가는 만신창이가 되고, 국민은 생명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코로나19 대재앙과 관련 문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서명한 사람이 100만 명을 넘었다. '문 대통령의 코로나19 대처를 보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중국 대통령을 보는 듯하다'는 청원자 글에 공감한 사람들이 많아서다. 중국에 활짝 문을 열어줘 코로나 창궐을 가져오고, 중국에 마스크를 '진상'한 탓에 우리 국민이 마스크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을 초래한 문 대통령을 두고 '중국 대통령'이란 비아냥까지 나왔다. 우리 대통령이 '중국 대통령'이란 소리를 듣는 것을 국민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우리 국민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입국을 배척당하고, '코리아 포비아'란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국민이 역병(疫病)으로 고통받는 와중에 대통령 부부가 청와대에서 짜파구리 오찬을 하고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모습도 국민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문 대통령이 중국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는 등 실책을 범하는 바람에 국민 가슴을 후벼 파는 언사를 하는 장관들, 여당 국회의원들을 문책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국민 생명 보호를 이렇게 안중에 두지 않는 지도자를 국민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조국 사태,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공작, 검찰 대학살, 무리한 최저임금 인상, 탈원전, 한·미 동맹 균열, 북한에 대한 굴종, 국정 독주, 세금 퍼주기, 경제성장률 추락, 부동산값 폭등…. 그를 이은 코로나 대재앙까지. 문 대통령은 끝 간데없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안겨줘 국민이 비명을 지르게 했다.더 기가 막힌 것은 국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도 문 대통령과 집권 세력은 성과라며 자랑한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과 집권 세력이 장기 집권과 잘못된 이념에 계속 목을 맬 게 뻔해 국민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더 숱하게 감당해야 할 처지다. 모골이 송연하다.

2020-02-28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코로나의 추억'

봉준호의 영화 '살인의 추억' 엔딩은 오래 여운을 남긴 명장면이다.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진 시골의 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의 표정과 시선을 클로즈업한 이 장면은 감독의 제작 의도를 압축한 상징 프레임이라는 점에서 압권이다.대체로 중의적 해석으로 이 장면에 접근한다. 하나는 감정적이고 비과학적 수사로 일관하다 좌절하고 경찰 옷을 벗은 두만의 애환을 한 화면에 각인시킨 것이라는 해석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전지적 감독 시점에서 '너'(범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는 무언의 메시지라는 것이다.'봉 테일'(봉준호 디테일) 별명답게 감독이 영화에 엮어 놓은 극적 장치와 상징 고리 중 두만과 서태윤(김상경)의 성격 대립과 갈등 또한 스토리 전개의 큰 줄기다. 자청해 수사본부에 참여한 서 형사는 육감과 자백 강요 등 폭력적인 수사 방식이 몸에 익은 두만과는 다르다. 작은 단서에서 실마리를 찾아 사건을 풀려는 태윤의 캐릭터는 과학과 논리, 사회 변화 등 시대성을 암시한다.그렇지만 사건이 미궁에 빠지면서 이 둘은 그렇게 욕하고 경멸하던 서로의 스타일을 향해 바뀌어나간다. 좌충우돌하던 두만은 차분해지고, 냉정하던 태윤은 반대로 감정적으로 변한다. 이런 변화는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 환경과 절박한 상황이 인간 심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여주는 영화 문법이다.코로나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두만과 태윤이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주었듯 한국 사회가 대립하고 갈등 중이다. 확진자가 열흘 가까이 매일 세 자릿수로 늘면서 사태가 미궁인 데도 여야가 갈리고 국민은 패를 이루며 진영 논리가 판을 친다. 질병관리본부와 의료진만 바이러스와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사회도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논객, 유튜버, 댓글꾼 등 제각각 상황을 해석하고 비판하며 제 생각을 보태느라 여념이 없다. 바이러스나 국가 위기는 뒷전이고 특정 지역을 향해 거칠고 저급한 언어폭력을 동원해 헐뜯고 공격해댄다. 사스·메르스 사태에서 보듯 시간이 흐르면 코로나도 잠잠해질 것이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 엔딩처럼 막이 내릴 때 과연 어떤 우리의 모습이 클로즈업되고 또 어떤 메시지가 남을지 궁금하다. 가히 '코로나의 추억'이다.

2020-02-27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야고부] '문재인 폐렴'

다운증후군(Down syndrome)은 21번 염색체가 1개 더 많아서 나타나는 유전성 질환이다. 1866년 영국 의사 존 랭던 하이든 다운이 처음으로 그 존재를 발표하면서 '몽골리즘'(Mongolism)이라고 명명했다. 얼굴 모습이 동부 아시아인(Mongolian)을 닮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운은 이 질병이 퇴보한 격세유전의 결과 우수한 백인종이 열등한 동양 인종으로 퇴화 변이를 일으킨 것이라는 가설까지 제시했다.어이없는 인종차별적 병명이었지만, 거의 100년을 버텼다. 1965년 몽골 정부의 요구로 세계보건기구(WHO)가 공식 명칭을 다운의 이름을 딴 '다운증후군'으로 정하고서야 의학계에서 사라졌다.반대로 당사자의 강력한 요구에도 바뀌지 않는 병명이 있다. '냉방병'으로 불리는 레지오넬라증이다.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 재향군인회 행사에 참석한 참전용사 221명이 감염돼 34명이 사망한 것이 그 유래다. 사망자 대부분이 재향군인(Legionella)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에 재향군인회는 항의했지만,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특정 국가나 인종, 집단을 매도하지 않는 중립적 병명이 창조되는 경우도 있다. Syphilis(매독)가 그렇다. 이탈리아의 의사이자 시인인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가 1530년에 발표한 라틴어 시 '매독 또는 프랑스병'(Syphilis sive morbus gallicus)에서 이 단어를 처음 썼다. syphilis는 그리스어 'sys'(돼지)와 'philos'(사랑)의 합성어로 시의 주인공 이름이다.그러나 매독보다는 '프랑스병'이 더 파급력이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매독은 유럽에서 '이탈리아병' '스페인병' '폴란드병' 등 앙숙인 국가들이 서로 매도하는 병명을 갖게 됐다.일부 온라인 매체와 SNS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를 '문재인 코로나' 또는 '문재인 폐렴'으로 부르거나 부르고 싶다며 문재인 정권에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 수하(手下)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중국 시진핑의 눈치를 보며 중국인의 입국을 전면 금지하지 않은 것이 국내 감염 확산의 도화선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댕겨진 감염의 불길은 이제 통제 불능 상태이다. '문재인 폐렴' '문재인 코로나'라는 소리가 맹목적 비난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2020-02-26 06:30:00

[야고부] 스파게티 괴물교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lying Spaghetti Monster, FSM)교'라는 종교가 있다. 이 종교 신자들은 돌출된 눈 2개 달린 스파게티 뭉치 모양의 신을 믿는다. FSM은 과음 상태에서 의도치 않게 천지를 창조했다. FSM이 4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3일은 숙취로 몸져 누웠기 때문에 이 종교에서는 금요일이 안식일이다. FSM이 '신성한 면발'을 움직여 사람들을 인도하기에 신자들에겐 '면식의 생활화'가 필수다. '그분'에 대한 기도의 마무리는 '아멘'이 아니라 '라멘'(r'Amen)이다.FSM은 미국 오리건주립대 물리학 석사인 바비 헨더슨이 2005년에 창시했다. FSM은 수만 년간 비밀에 감춰져 있었다가 '위대한 예언자' 헨더슨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고 너스레를 떤다. 신자들은 율법이나 종교적 규제에 구속되지 않으며 의식을 지킬 의무가 없다. FSM교는 풍자로 시작했지만 유명세를 타면서 신자들이 늘어나 미국, 네덜란드, 호주, 러시아 등에서 종교로 인정받았으며 한국을 포함해 10여 개 나라에 지부를 두고 있다.FSM 같은 패러디 종교로 '보이지 않는 분홍 유니콘' '서브지니어스교회' '자본주의교' 등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방송인 유재석을 신으로 받드는(?) '무한재석교' 등이 있다. 이들 패러디 종교들은 허무맹랑하고 황당하지만 논리구조상 기성종교를 코스프레한다. 유머스러울 뿐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교주 신격화, 신도 착취, 재산 헌납 강요, 종말론 같은 특징을 띠며 사회 규범과 곳곳에서 충돌하는 여느 신흥종교들과 구별되는 대목이다.우리나라의 신흥종교단체 중 하나인 신천지교회가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와중에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안 그래도 특유의 폐쇄성과 기성종교에 대한 잠입형 포교 때문에 논란이 많은 단체다. 그런데 이만희 신천지교회 총회장은 21일 내부 SNS에 올린 글을 통해 '금번 병마사건은 신천지가 급성장됨을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마귀의 짓'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라는 주장을 폈다. 코로나19 집단 전파로 나라를 대혼란에 빠트려 놓고 사과는커녕 대한민국 법을 따르지 않겠다고 대놓고 선언한 격 아닌가. 그 억지에 말문이 막힌다.

2020-02-25 06:30:00

지난 21일 오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폐쇄된 경북 청도대남병원에서 격리된 관계자가 창문을 통해 가족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고부] 코호트 격리

코로나19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감염자가 발생한 의료 기관을 통째로 봉쇄하는 조치가 이번 사태 들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내려졌다. '코호트 격리'(Cohort Isolation)다. 이는 질병이 퍼지는 것을 막고자 특정 질환에 함께 노출된 사람을 동일 집단으로 묶어 격리하는 것을 말한다.'동일 집단' '지지자'의 뜻을 가진 코호트는 사회학에서 같은 특색이나 행동 양식을 공유하는 그룹을 의미한다. 코호트는 고대 로마 군대의 기본 편제인 라틴어 '코호스'(Cohors)에서 파생됐는데 360~800명(통상 500명)으로 구성된 코호스는 오늘날 대대(Battalion) 규모다. 의학에서 코호트는 특정 공간에 있는 특정 질병 감염자나 의료진 모두를 외부와 물리적으로 단절시키고 질병 확산을 막는 것을 말한다.중세 유럽에서는 전염병이 돌면 발병 도시나 지역을 봉쇄하는 방역 전략을 썼다. 특히 14세기 중엽 페스트가 창궐하자 베니스와 제노아, 라구사 등 이태리 항구마다 페스트 유행 지역에서 온 모든 선박의 입항과 하선을 한 달간 금지하고 선상 격리했다. 이 기간이 점차 40일로 늘었는데 영어에서 검역이라는 뜻의 '쿼런틴'(Quarantine)이 된 것이다. 라틴어로 '40'을 뜻하는 '콰드라긴타'(Quadraginta)가 어원이다.보건복지부는 22일 코로나19 확진자가 100명을 넘어선 청도 대남병원을 코호트 격리했다. 환자는 물론 병원 내외부 의료진도 함께 병동에 격리됐다. 대구에 왔다가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된 육군 사병의 확진 결과가 나오자 국방부도 22일 소속 부대 전체를 코호트 격리 조치했다. 앞서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감염자가 대량 발생한 대전 을지대병원과 대청병원 등이 코호트 격리된 사례가 있다.우리 속담에 '병은 알려야 낫는다'고 했다. 주변 사람에게서 유익한 정보를 모아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어서다. 감염병에서도 발병 사실을 외부에 널리 알리면 그만큼 경계의 강도가 커진다. 그런데 병은 제대로 알리지 않고 누구 때문에 병이 커졌느니 입만 살아있다면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다. 병은 보지 않고 근거없이 대구경북을 헐뜯는 일부 미디어와 타 지역민의 행태는 몹쓸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나은 게 없다.

2020-02-24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느리게 살기

지구상에서 한국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사회나 나라도 없을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한국인은 늘 시간에 쫓기듯 마음이 급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억척스레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기술과 시스템의 빠른 변화는 '앞서가는 한국인'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한몫했다.이런 현상은 불과 반세기 만에 압축성장한 우리 현대사와 국민 기질 변화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서두르다 보면 정확성이 떨어지고 느리면 그만큼 뒤처지는 게 이치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말하기는 힘드나 명암이 함께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재(財)테크나 시(時)테크는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다. 이는 많은 돈과 생산적인 시간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이르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풍요로운 삶을 뒷받침하는 수단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동시에 다른 방식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뜻하는데 채우는 것에 쏠려 그 반대의 경우는 눈이 어둡다는 말이다.코로나19 사태가 급반전했다. 지역 감염이 확산하면서 활기차던 인구 250만 명 대도시가 마치 정지화면을 보듯 멈춰서고 정적마저 감돈다. 평소 많은 사람이 오가던 곳은 인적이 거의 끊겼고 붐비던 거리도 한산하다.지난 5일 이후 거의 변동이 없던 코로나19 감염병 확진자 수가 18일 39명으로 뛰어오르더니 76명, 104명, 156명, 204명으로 계속 치솟고 있다. 발생 지역도 대구경북의 경계를 넘어 경남 제주 전주 충북 등으로 번졌다. 이는 '슈퍼 전파자'로 불리는 일부 확진자의 동선이 말해주듯 현대인의 분주한 활동과 국경을 넘나드는 이동의 자유를 증명한다. 2014년 1천608만 명이던 한국인 해외여행자 수가 2018년 2천869만 명으로 급증한 것은 실로 놀랍다.바이러스 확산은 인명과 경제적 피해 등 큰 손실을 낳는다. 하지만 위기는 새로운 기회의 서막이자 변화의 계기이기도 하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거울삼아 현재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도 의미가 크다. 조금 더 절제하고 조금 더 느릿한 삶, 바이러스에 발이 묶인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2020-02-21 20:28:01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진인탄 병원에서 지난 13일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의 진료기록을 학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고부] 흑사병, 체르노빌, 우한

대재앙은 사회를 뒤흔들어 놓는다. 종국에는 그 사회를 붕괴시키는 경우도 흔하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가져온 천연두로 인구가 몰살되면서 멸망한 잉카 문명과 아즈텍 문명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재앙은 의외의 발전적 변화를 낳기도 한다.유럽 인구 2천500만~3천500만 명이 희생된 흑사병이 그렇다. 중세 장원경제를 붕괴시키고 근대의 문을 연 것이다. 페스트는 농노(農奴)를 격감시켰다. 이에 따라 노동자 임금이 크게 뛰었다. 흑사병이 유행하는 동안 평균임금은 2배 상승한 반면 땅값(지대)은 50% 이상 하락했다.그 결과는 영주들의 줄파산이었다. 이를 막아보려고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흑사병 발생 이전으로 동결하는 법까지 만들었으나 소용없었다. 임금 상승은 이후로도 100년간 더 지속됐다.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도 마찬가지다. 이 사고로 엄청난 인명이 희생됐지만, 강대국 소련의 실체도 함께 폭로됐다. 미국과 함께 2대 슈퍼 파워라는데 알고 보니 비도덕적이고 허약한 국가임이 드러난 것이다.국가보안위원회(KGB)는 1982년과 1984년 3호기와 폭발한 4호기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는 기밀에 부쳐진 채 아무런 개선 조치도 없었다. 사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련 당국은 4일간이나 '보안'을 유지했다. 그러다 대기 중 방사능 물질 증가에 놀란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이 진상 공개를 촉구하자 마지못해 시인했다. 그런데 그게 기가 막혔다. "몇 가지 문제가 있지만 결코 위험하지 않다." 그 끝은 소련 붕괴였다. 사고 뒤 '개혁'과 '개방'을 들고 나온 고르바초프는 훗날 "체르노빌이 소련 붕괴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회고했다.우한 폐렴 사태로 중국의 시진핑 1인 독재체제가 흔들릴 조짐이다. 폐렴 확산 초기부터 지금까지 중국 정부는 실상을 은폐·축소하는데 급급했다. 이에 지식인들이 시진핑 체제의 무능과 비도덕성을 비판하자 이들을 모두 체포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현재 이들의 행방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의 SNS상에는 우한 사태를 체르노빌 사고에 빗대며 정부와 공산당에 대한 노골적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우한 사태가 공산독재 중국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2020-02-21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야고부] 전염병의 역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염병의 창궐은 국가와 민족의 생사와 존망이 걸린 엄중한 위기 상황이었다. 중국 역대 왕조에서 전염병의 파괴력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그 이상이었다. 전란이 그칠 날이 없던 왕조 교체의 혼란기는 말할 것도 없고, 송·명·청대의 태평 시기에도 수시로 전염병이 나돌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곤 했다. 대륙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 때만 해도 모두 80건에 이르는 대규모 전염병이 발생했다.의료 기술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역대 왕조들이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서 취한 최선의 수단은 다름 아닌 전염원의 차단이었다. 철저한 격리조치와 나름의 위생방역이 뒤따랐다. 국가 경제와 의료 역량을 동원하는 것도 오늘날과 비슷하다. 각종 역병과 역질이 유행했던 조선시대의 양상도 다를 바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에 대한 대응의 성패는 정권의 흥망을 좌우하는 시험대이기도 했다.인류 문명을 강타한 가장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흑사병(페스트)이었다. 흑사병은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가버린 공포와 죽음의 사신이었다. 전쟁이 전염병을 몰고 왔지만, 전염병의 공포가 전쟁의 참화를 막기도 했다. 몽골군은 스스로 몰고 온 흑사병 때문에 막바지 유럽 정벌이 좌절되었지만, 유럽은 몽골의 말발굽보다 더 혹독한 흑사병 쓰나미에 무너져내렸다.흑사병은 당시 유럽의 크고 작은 전쟁을 종식시키며 인간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전염병 창궐에 무기력했던 중세 교회의 권위를 뒤흔들며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민족의 개념이 싹트고 인간 중심의 사상이 출현했다. 노동력 부족이 임금 상승과 농민 폭동으로 이어지며 사회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전염병은 치명적인 재앙이지만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일신하며 인류 문명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분기점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인간 사회의 경이로운 의학적 성과와 보건 위생의 향상에도 신종 전염병은 이를 비웃듯이 한발 앞서 횡포를 부린다. 중국 우한에서 비롯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공포와 파동이 중국 공산당 정권의 행보에 어떤 악재로 작용할까. 그리고 21세기 세계 문명에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2020-02-20 06:30:00

김해용 논설실장

[야고부] 색깔 전쟁

빛의 반사체인 색깔은 맛, 냄새처럼 뇌가 느끼는 주관적 감각이다. 그래서 색은 고유의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다. 색은 곧 문화이고 이미지 그 자체이며 기업의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다.정치도 색깔을 이미지 도구로 삼는다. 정당의 상징색은 크게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 파란색은 보수 진영을 상징했지만 2012년 2월부터 흐름이 바뀌었다. 그해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상징색을 빨간색으로 바꾸는 파격을 단행했다. 반대로, 그해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통합당은 2013년 5월 당명을 민주당으로 개칭하면서 상징색도 파란색으로 바꿨다.정당이 많아지면 정치판의 색상도 알록달록해진다. 파란색과 빨간색을 거대 양당이 선점했으니 남은 것은 노란색, 초록색 등 나머지 색들이다. 바른미래당의 상징색은 초록색과 하늘색을 섞은 민트색이다. 안철수가 이끄는 국민의당은 오렌지색을 상징색으로 채택했다. 그러자 오렌지색은 자신들의 상징색인 주황색과 같은 색이라는 민주노동당 항의를 받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런데 국민의당 해명이 재미있다. "(우리의 상징색은) 좀 더 비비드(vivid: 밝고 선명하며 생생하다는 의미)하다."자유한국당의 새 통합당인 미래통합당은 새로운 상징색을 핑크빛으로 정하고 이를 '밀레니얼 핑크'라고 이름붙였다. 대한민국 정당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상징색이다. 핑크빛은 곱상해서 여성스럽게 비친다. 하지만 색상에 대한 이미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랐다. 1927년 타임지에서 미국의 주요 백화점이 아이의 성별에 따라 어떤 색깔의 옷을 권장하는지 정리한 표를 보면 상당수 대도시에서 남자아이에게 권하는 옷의 색깔은 분홍색이었다.국민의당의 오렌지색 논란, 미래통합당의 밀레니얼 핑크는 우리나라 정치 무대의 색깔 품귀 현상이 빚어낸 산물이다. 양당제를 선호하는 국민 기대와 달리 군소정당 난립과 정당 간 이합집산으로 인해 우리 정치판은 때 아닌 색깔 전쟁을 경험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요란한 색깔들이 거리를 장악할 것 같다. 일곱 색깔 무지개는 조화롭기나 하지, 정치권의 색깔 전쟁은 눈만 아프게 할 것 같다.

2020-02-19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야고부] '0'으로 끝난 올해는?

"경(庚)의 해는 끝자리가 '0'인 해로서 우리나라를 둘러싼 커다란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100년 전의 경술국치(1910), 6·25전쟁(1950), 4·19혁명(1960), 새마을운동(1970), 5·18민주화운동(1980), 소련과 수교(1990), 남북정상회담(2000년)…."2010년 1월 4일, 당시 경북 구미 사무실에 근무하던 김경룡 전 대구은행장 내정자가 매주 월요일 800여 명의 고객에게 보낸 전자편지의 한 부분이다. 2000년대 새로운 천년의 해를 맞아 첫 10년을 보내고 다시 맞은 10년의 첫해, 첫 주 편지에서 '0'으로 끝나는 경인(庚寅)의 해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담았다.아니나 다를까 그해 경인년 365일 동안 나라 밖도 그렇지만 특히 남북 강산에서는 큼직큼직하고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들이 어김없이 일어났다. 그해 2월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세계기록을 깨고 금빛 정상에 올랐고, 11월엔 세계 20개국 정상이 서울에 모여 정상회담을 갖는 등의 경사스러운 일도 펼쳐졌다.반면 3월에는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사건으로 나라를 지키던 젊은이 46명이 고귀한 목숨을 잃는 참사로 분노와 함께 세상을 경악시켰다. 또 9월엔 북한 김정일이 아들 김정은을 공식 등장시켜 세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며 오늘날 정치사에 그 유례가 없는 3대 세습이라는 통치 방식을 알리는 암흑사를 거듭했다.그리고 10년 세월이 흘러 다시 맞은 '0'으로 끝난 2020년의 새해 한 달이 지나면서 겪은 경험은 앞으로 빚어질지도 모를 일의 조짐처럼 예사롭지가 않아 걱정이다. 먼저 나라 밖 중국 우한 폐렴 전파로 시작된 괴질(怪疾)의 공포이다. 다음은 국내 정치적 혼란의 나쁜 전조이다. 나라를 뒤흔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 이후의 뭇 사례가 그렇다.우리는 재난과 큰일이 느닷없이 오지 않음을 오랜 경험으로 배웠고 미리 경계했다. 이를 위해 나라가 앞서고 국민은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언제쯤부터 이런 방식이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되레 바뀌고 있다. 정부는 어수선하고 국민이 정부를 걱정하는 세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새해부터 뜨거운 법(法) 권력을 둘러싼 정부 내 갈등 회오리, 경제난 등 악재가 넘쳐도 정부는 보이지 않으니 스스로 살길을 찾을 일이다. '0'의 해, 부디 잘 보내세요!

2020-02-18 06:30:00

이대현 논설위원

[야고부] 정치인의 설화

2004년 3월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대구에서 가진 청년층과의 인터뷰에서 "60, 70대 이상 어르신들은 투표하지 않고 집에서 쉬셔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분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할 분들이 아니니까요"라고 발언했다. 노인 폄하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정 의장은 2007년 대선 때까지 이 악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후일 정 의장은 "열심히 투표를 하는 어르신들을 본받아 어르신들은 집에서 쉬시더라도 대학생들은 나가서 투표를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말로 먹고사는 것이 정치인의 속성인 만큼 세 치 혀를 잘못 놀렸다가 설화(舌禍)를 당하는 정치인들이 많다. 표를 왕창 깎아 먹는 것을 넘어 정치 수명이 단축되는 경우까지 있다.부정적 의미에서 '뉴스메이커'로 떠오른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툭툭 내던지는 말로 인해 곤욕에 처한 일이 종종 있었다. 2017년 7월 '머리 자르기' 발언이 대표적이다.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추 장관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지원·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문준용 씨 특혜 채용 의혹 제보 조작을) 몰랐다는 것은 머리 자르기다. 꼬리 자르기가 아니다"라고 했다. 국민의당은 "여당 대표가 야당 대표 참수 운운했다"며 강력 반발했다. 결국 청와대가 '대리사과'를 했고 '추미애 패싱'이란 조어를 낳기도 했다.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경제 현장을 찾은 정세균 국무총리가 한 발언이 도마 위에 올랐다. 정 총리는 손님이 뚝 끊겨 거리가 한적하고 상점도 텅텅 빈 서울 한 상가를 방문했다. 한 상인이 "코로나 때문에 아무래도 (손님이 줄었다)"며 고충을 토로하자 정 총리는 "원래 무슨 일이 있으면 확 줄었다 좀 지나면 다시 회복되고 하니까 그간에 돈 많이 벌어 놓은 것 갖고 조금 버티셔야지"라고 했다. 이어 정 총리는 한 식당 종업원에게 "손님이 적으니 편하시겠네"라고 발언을 했다.가뜩이나 어려운 이들에게 민생을 책임진 공직자가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생업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진심을 다해 위로하기는커녕 웃지 못할 농담을 했다. 성경에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혀를 조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입술을 조심하라"고 했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하는 법이다.

2020-02-17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야고부] '나도 고발하라'

1933년 4월 12일부터 5월 10일까지 베를린 등 독일 전역의 22개 대학 도시에서 '독일 정신에 위배되는 책'이 불길 속으로 던져졌다. 이른바 나치의 분서(焚書)로 에밀 졸라, 지그문트 프로이트, 토마스 만,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비독일적' 작가 학자들의 책 2만여 종이 재로 변했다.이런 야만에 지식인들은 분노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오스트리아로 건너간 독일 작가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도 그랬다. 그는 분서 목록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것을 알고 1933년 5월 12일 '빈 노동자신문'을 통해 이렇게 조롱했다. "나도 불태워라. 나의 삶 전부와 저술 활동 전부에 의거해서 나는 권리가 있다. 내 책들을 장작더미의 순정한 불길에 넘기라고 요구할 권리, 갈색 살인도당(나치당을 지칭)의 피에 젖은 손과 썩은 두뇌에 바치지 말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역시 나치를 피해 덴마크에 머물던 브레히트는 이 글에서 영감을 받아 같은 해 가을 풍자시 '분서'를 썼다."위험한 지식이 담긴 책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리라고/ 이 정권이 명령하여, 곳곳에서/ 황소들이 끙끙대며 책이 실린 수레를/ 화형장으로 끌고 왔을 때…추방된 어떤 시인이 분서 목록을 들여다보다가/ 자기의 책들이 누락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화가…집권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나의 책을 남겨 놓지 말아다오!/ 나의 책들 속에서 언제나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인제 와서 너희들이 나를 거짓말쟁이처럼 취급한단 말이냐!/ 너희에게 명령한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똑같은 사태가 이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민주당만 빼고'라는 칼럼을 쓴 임미리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를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하자 김경율 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등 진보 인사들이 잇따라 '나도 고발하라!'는 격문(檄文)을 쏟아냈다. 그러자 민주당은 화들짝 놀라 곧바로 고발을 취하했다. 그런다고 '고발'로 드러난 문재인 정권의 추한 민얼굴은 가려지지 않는다. '고발'은 문 정권의 실체를 재확인할 수 있게 했다. 감사를 표하고 싶다. 민주당, 땡큐!

2020-02-14 19:36:51

조향래 논설위원

[야고부] 교도소를 부탁해

다양한 군상의 범죄인들이 드나드는 곳에 걸맞게 교도소는 그 별칭도 다양하다. '큰집' '학교' '깜빵' '국립호텔' 등이 그 사례들이다. 조선시대에는 감옥으로 불렀고 일제강점기에는 형무소로 통했다. 범죄인 수용시설이 교도소로 바뀐 것은 인권 의식의 성장과 교정·교화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였다. 그러나 범죄인에 대한 인식이 그렇듯 교도소에 대한 이미지 또한 여전히 우호적이지는 않았다.징역 20년 이상의 악질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태국의 방쾅 교도소는 3개월 동안 쇠사슬을 차고 있는 게 기본이다. 살인범은 죽을 때까지 쇠사슬을 동반자로 삼아야 한다. 식사도 동물 사료 수준으로 최소한만 제공한다. 영양실조로 다시 죄를 짓고 싶은 생각마저 사라진다. 미국의 ADX 플로렌스 교도소는 수용자들을 온종일 독방에 가둬 놓아 가장 높은 자살률을 자랑(?)한다.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국경 근처에 있는 한 교도소는 최고의 흉악범들만 가둬 놓는 수용시설답게 악명이 높다. 단 1%의 희망도 없이 오로지 죽어야만 나갈 수 있는 공간이다. 완벽한 감시체계 때문에 자살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이동할 때는 수갑을 채우고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눈마저 가려버린다. 끝내 하늘 한 번 쳐다볼 수 없다. 생명만 유지시킬 뿐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다.경북 청송에 있는 경북북부교도소는 최고 흉악범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조직폭력배 김태촌과 조양은, 대도 조세형과 성폭행범 김길태·조두순, 토막 살인범 오원춘 등이 거쳐간 곳이다. 그래서 한때 교도소 이름 앞에 '청송'이라는 지역명을 빼달라고 호소하던 청송군이 교도소 신규 유치에 나서 또 한번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기피 시설을 끌어들여 지역 경제의 회생을 도모하려는 역발상 때문이었다.포항교도소와 상주교도소 그리고 머잖아 주민개방형으로 준공 예정인 대구교도소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교도소를 혐오시설이 아닌 효자기관으로 반기는 분위기이다. 지역에서 생산하는 대규모 식자재 공급과 수많은 접견 방문객들이 뿌리는 경제적인 효과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시설의 대명사였던 교도소가 지역 발전의 효자 시설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격세지감이다.

2020-02-14 06:30:00

지난 10일 영화 '기생충'이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달성하면서 주인공 기택(송강호)네 반지하 집의 세트장이 지어졌던 '고양아쿠아특수촬영스튜디오'가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은 영화 속에서 폭우가 쏟아져 기택네 집이 물에 잠긴 장면. 연합뉴스

[야고부] '기생충'과 신 포도

기생충은 다른 생명체에 달라붙어 양분을 가로챈다. 그래서 저급 생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상당히 성공한 생명체다. 살아남기 위해 기생충은 고도의 전략을 구사한다. 양의 몸속에 기생하는 간충의 신비로운 생존 전술을 보자.간충은 양의 체내에서 부화할 수 없다. 그래서 일단 양의 몸 밖으로 나가 자란 뒤 되돌아와야 한다. 양의 대변에 섞여 배출된 간충의 알은 애벌레가 되어 중간숙주인 달팽이를 거쳐 개미 몸속으로 침투한다. 간충은 개미의 뇌를 조종한다. 감염된 개미는 밤만 되면 몽유병 환자처럼 개미굴을 떠나, 양이 가장 좋아하는 풀의 꼭대기에 올라앉는다. 풀과 함께 양에게 잡아먹힐 때까지.톡소포자충도 비슷한 전략을 쓴다. 쥐를 중간숙주로 하고 고양이를 최종숙주로 삼는 기생충인데, 쥐에 기생할 때는 쥐의 겁을 없애고 고양이 냄새를 좋아하게끔 조종한다.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쥐는 고양이를 겁내지 않아 잘 잡아먹힌다. 이처럼 빌붙어 사는 신세라고 해서 기생충을 얕잡아볼 일이 아니다. 숙주와 공생관계인 기생충도 있고 기생충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숙주도 있다고 하니 자연의 섭리가 참 오묘하다.'기생충' 제목을 단 우리 영화가 세계 영화계를 호령하고 있다. 상류층과 반지하 하류층, 상류층 저택 지하에 숨어 사는 최하층, 세 가족의 만남을 이보다 더 재미있고 유쾌하게, 스릴 넘치게, 여운 많이 남게 만들 수는 없다. 영화 속 하류층이 교묘한 수법으로 상류층을 속이며 기생하는 모습이 간충, 톡소포자충 빰칠 만큼 기상천외하다. "빈부 격차는 인류 전체의 문제"라고 공감하면서 세계는 이 걸작 영화에 온갖 찬사를 쏟아내고 있다.그런데 영화 '기생충'의 찬란한 질주가 불편한 사람도 있는 듯하다. 일본 매스컴들은 "'기생충'이 한국의 징병제, 부동산 문제, 빈부 격차, 한국의 어두운 부분을 세계에 알렸다"며 슬며시 비꼬았다. 북한의 대외 선전 매체인 '조선의 오늘'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을 전하면서 "남한은 빈부 격차가 심한데 비해 우리 공화국은 누구나 공평하고 평등한 삶을 누리고 있어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논평을 냈다. 이솝우화 '여우와 신 포도'를 연상시키는 시샘이다. 참으로 소인배스럽다.

2020-02-13 06:30:00

(왼쪽부터) 봉준호, 유승민, 추미애

[야고부] 대구의 세 남녀

추미애, 유승민 그리고 봉준호.2020년 새해는 대구 사람이 '일'을 내고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먼저 시작했다. 1월 3일 취임과 함께 검찰 흔들기부터다. 자신을 발탁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보답이든, 소신이든 국민 관심은 진행형이다. 아마 윤석열 검찰총장이 백기를 들 때까지 이어질지도 몰라 법(法)을 다루는 두 수장의 대결은 슬프지만 흥미진진한 볼거리이다.다음은 추 장관처럼 1958년생인 유승민 국회의원이다. 지난 9일, 4월 총선 불출마와 함께 보수진영 결속 추진 발표로 이목을 끌고 있다. 2004년 비례대표 당선에 이어 2005년 재보궐 선거에서 뽑혀 '대구의 아들'로 잘나가던 그가 낯선 미답(未踏)의 야인(野人) 길을 걷겠다고 나섰으니 역시 관심거리가 됐다.다음 날, 미국에선 봉준호 영화감독이 더 큰 일을 냈다. 한국 영화 101년사뿐만 아니라, 92년의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의 4개 부문을 휩쓴 '새 역사 쓰기'의 위업(偉業) 달성이다. 1969년생인 그가 저지른 일은 11살 많은 두 선배보다 더욱 빛났다.새해 벽두부터 시선을 끈 3인의 대구 남녀의 지난 발자취를 보면 앞으로 디딜 발걸음 역시 특별할 것 같다. 추 장관의 별명(추다르크)에 비춰 지금 펼치는 검찰과의 한판 승부는 처절한 결과를 점쳐도 그럴듯해서 그가 지금 추는 검찰 개혁의 칼춤을 지켜보는 고향 사람 마음은 앞선 걱정에 조마조마할 지경이다.세탁소 딸로 스스로 앞길을 낸 추 장관과 달리 법률가 아들로 온실 속 같은 비단길 삶에다 고향 사람 덕에 한 세월 누린 유 의원 역시 나름 '머리'가 있는 만큼 역할을 기대할 만도 하다. '민주공화국'을 밝힌 헌법 1조 정신을 강조한 그가 머리에 버금갈 '가슴'까지 갖춰 야인의 길을 잘 디디면 추 장관과는 다른 결과도 가능할 터여서 그나마 낫다.특히 봉 감독의 앞길은 더욱 희망적이고 사람 마음을 당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영화 세계가 추구하는 가치를 꿰뚫어본 나라 밖 사람이 이번에 보인 행동만 봐도 그렇다. 그의 업적은 높이 살 만하다. 대구 사람에게 자긍심을 줄 만도 하다.중국 우한 폐렴만 빼면 지금 한국은 이들 대구의 세 남녀 이야기로 하루를 여닫는다면 좀 지나칠까.

2020-02-12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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