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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⑧세상과 함께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⑧세상과 함께 <끝>

◆가톨릭시보 사장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맡았다. 비서신부 시절 교황청 산하 통신사의 대구 통신원으로 일한 적은 있지만 신문을 만들어 보지는 않았기에 막막했다. 신문사 형편도 열악했다. 기자와 직원 다 합쳐 10명이 안되는 데다 봉급 주기도 힘들었다. 사장, 기자, 영업사원 3역을 했다. 사설은 거의 다 썼고 수금도 다녔다.월급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후원금을 관리하던 직원이 입학금이 없어 쩔쩔매던 추기경 생질녀에게 몰래 돈을 보냈다가 혼이 났다. 가족보다는 직원들이나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쓰고 싶었다. 동고동락한 직원들과는 말년까지 소식을 주고받았다.가톨릭시보는 1927년 천주교대구교구 청년연합회가 발간한 천주교회보로부터 시작했다. 종교 신문이지만 비신자도 보고 싶은 신문을 만들고자 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과 함께해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 밖의 문제도 신앙적 시선으로 다뤘다. 목사나 스님 교수들의 글도 받았다. 가톨릭을 비판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지만 보내 온 원고대로 실었다. 가톨릭 신문이 이래도 되느냐며 장면 전 총리는 걱정스런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세상이 가톨릭을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고치고 바로잡을 것이란 믿음대로 밀고 나갔다. 복음 선교에 있어 매스컴이 소중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독일에서 전공한 그리스도교 사회학 공부는 신문사 일에 보탬이 됐다. 독일 현지 신부들과 일반시민들은 물론 한국 간호사 및 광부들과의 만남과 체험은 그의 시각을 폭넓게 했다. 무엇보다 크고 소중한 배움과 경험은 로마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일흔일곱의 고령에 교황에 오른 요한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다. 교황은 세간의 추측과 달리 전통과 관습을 벗어던졌다. 세상을 향해 교회의 문을 열고 변화와 쇄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추기경에게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대에 적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였다. 독일에 살면서 마음은 로마에 가 있었다. '성령께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교황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가톨릭시보사가 같이 쓰던 대구 남일동 매일신문사 건물에는 통신사도 입주해 있었다. 외신 중 공의회 관련 뉴스는 죄다 달라고 했다. 기사와 사설 칼럼을 통해 공의회 정신을 알렸다. 신년호 연두사도 직접 썼다.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생각과 생활태도를 바꾸어야 사회가 변화되고 인류 구원이 이뤄진다는 요지였다.타 종교와의 소통과 대화 역시 공의회 정신의 하나였다. 천주교회 안으로만 묶여 있던 시선을 세상으로 돌렸다. 소통은 이해였다. 철학자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서로 등지고 살던 시절 추기경이 대화의 문을 열었다"고 했다. 최연소 추기경 선임 역시 그가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실천할 적임자였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추기경은 가수 인순이의 삶을 사랑하고 격려했다. 인순이가 물었다. "하느님, 하나님 뭐가 맞아요?" 한 음반에서 둘 다 불렀다는 말을 덧붙였다. 딸에게 하듯 추기경이 답했다. "글쎄, 나도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것 같은데……."소통과 이해는 평생토록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게 했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도록 열심히 기도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말년의 추기경이 웃으며 한 말이다. "기도 너무 많이 하지마라. 실망한다."◆사형수를 사랑한 추기경가톨릭시보 사장 시절 교도소를 자주 찾았다. 죄를 뉘우치는 재소자들을 대할 땐 교도소 바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려 애쓰는 수형자들의 눈에서 순백의 영혼을 만나기도 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실감났다.살인강도를 저지른 사형수와 만났다. 사형수는 뉘우치며 하느님 품에 안겼다. 사형 집행 날 죽음 앞에 선 그는 평화로웠다. 죽음을 행복으로 받아들였다. 대신 일상으로 돌아갈 추기경이 울었다. 형틀이 고장나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진 채 죽지 못한 사형수가 웃으며 다시 사형대에 앉았다. 계산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올렸다. 추기경의 가슴에 그는 이미 용서받은 사람이었다.추기경 시절 사형제도 반대에 앞장섰다. 강론과 언론을 통해 "사랑은 용서인데 사형은 용서가 없다"고 호소했다. 대통령에게도 사형을 집행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1997년 말 강원룡·한경직 목사와 함께 퇴임을 앞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사형 집행을 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다음날 23명의 죄수가 사형됐다. 우리나라 마지막 사형 집행이었다.가톨릭시보 사장 시절 대구 희망원과 행려병자 시설, 영세민 판자촌도 틈틈이 찾았다. 치료 한번 받지 못한 병자와 거지, 장애인이 뒤섞인 희망원은 절망원에 가까웠다.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사랑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이 부끄러웠다.추기경 시절에도 빈민촌과 판자촌, 탄광촌, 교도소, 복지시설 등 낮고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사는 사람들과 자주 만났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녀원도 단골 방문처였다. 일부러 반찬 투정을 했다. 겨울에도 맨발에다 일년 내내 고기 한번 먹지 않는 수녀들에게 그렇게라도 해서 먹이고 싶었다.추기경 시절 영적 갈등 때문에 한 달 피정을 갔다. 하느님이 내 존재의 바탕이라며 열심히 기도했다. 숙소 근처 동네 이발소에 갔다. 아무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숙소에 들어서다 문득 '아까 만난 사람들이 내가 누군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란 우월감이 들었다. 신분과 환경, 받는 대접이 귀한 몸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에 놀랐다. 모든 이의 종이 될 만큼 가난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느새 귀족이 된 자신이 부끄럽고 슬펐다.◆길 위에서 길을 찾아신설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됐다. 마산은 외가가 있어 낯설지 않았다. 주교 사목표어는 '여러분과 많은 이들을 위하여'로 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옮겨 갈 땐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로 손을 봤다. 주교 취임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 달라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한다"고 강론했다. 평신자도 신부 수녀와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고 했다.성직생활에서 그에게 가장 큰 주제는 인간이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위한, 인간다운 사회를 갈구했다.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는 교회를 이루고 싶었다. 교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추기경에게 정의와 자유는 인간을 위한 길이었다. 인권이 유린되는 사건에는 침묵하지 않았다. 세상과 함께한 추기경 덕분에 서울 명동성당은 온 국민의 마음속에 정의와 자유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투사는 아니었다. 그 시대 기울어진 언덕을 바로잡고자 했을 뿐이었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희망했기에 독재 정권에는 정의와 자유를 외치며 맞섰고 이념 대결로 사회가 흔들릴 땐 애국과 질서를 말했다.소통하기 위해선 우선 정직해야 했다. 죽음이 임박한 그를 환하게 웃게 만든 집안 손자손녀들에게 가르친 말도 "정직해라"였다. 이 땅에 천주교 씨앗을 뿌리느라 교회 밖 나라와 사회를 외면했던 선배들을 대신해 안중근 의사에게도 고백하고 사과했다. 시대의 어른으로 떠받들어졌지만 죽을 때까지 나는 죄인이라며 하느님께 용서를 구했다. 삶의 마지막까지 '길 위에서 길을 찾은' 추기경이었다.〈서영관 스토리텔러〉

2020-05-25 11:54:13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 ⑦평생 잊지 못한 본당신부 생활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 ⑦평생 잊지 못한 본당신부 생활

◆그리운 본당 시절성직의 길에서 추기경이 가장 행복했던 때는 가난한 신자들과 눈물과 웃음을 같이했던 본당 신부 시절이었다. 두세 해에 불과한 안동과 김천에서의 본당 생활은 꿈처럼 아름다웠다. 후일 그 시절 신자들이 찾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추기경 때에도 돈 많고 힘 센 사람들보다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초대가 더 편하고 기뻤다.너무 빨리 출세한 사람만이 느끼는 불편함과 외로움이 적지 않았다. 문고리까지 아랫사람들이 열어주는 추기경의 하루하루가 편치 않았다. 법정 스님에게 털어놓았다. "다시 태어나면 추기경 같은 직책은 맡고 싶지 않다. 그냥 평신자로서 살아가고 싶다." 교구장 시절 시골 본당으로 발령 난 후배 신부들이 달갑지 않은 내색을 보이면 "내가 대신 가서 본당생활 하고 싶다"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가끔은 로만 칼라를 벗고 남방셔츠 차림으로 외출했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 "혹 추기경님 아니시냐"는 인사를 곧잘 받았다. "나도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라며 같이 웃었다. 정월 대보름날엔 세뱃돈을 들고 성매매피해여성 쉼터를 찾았다. 옆집 가듯 점퍼에 구겨진 바지를 그대로 입은 그에게 쉼터 사람들이 "바지 좀 다려 입으시라"고 했다. 추기경이 뭔지도 모르는 몇몇은 아저씨라고도 불렀다. 밤늦도록 어울려 윷놀이를 했다. 세뱃돈으로 막걸리를 사오면 같이 마셨다. 낮고도 낮은 곳에 엎드린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편하고 좋았다.◆안동본당 신부초임지인 안동에서의 추억을 평생 잊지 못했다. 저녁이면 교리반을 열었다. 갈 곳 없는 신자들에게 성당은 사랑방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남성 신자들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대구 출장을 가면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신자들도 정류장에 나와 흙먼지를 맞으며 신부를 기다렸다. 힘든 시절이라 구호품을 얻으려는 밀가루 신자들도 없지 않았지만 순박하고 정겨운 사람들과 한 가족이 됐다. 성탄절이면 안동 사람 모두가 듣도록 스피커 볼륨을 한껏 높여 캐럴송을 틀었다.당시 안동 주민 거개의 삶은 궁핍했다. 전쟁 중이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미국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으로부터 적잖은 돈을 얻어 성당 보수작업을 벌였다. 신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품삯을 넉넉히 주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신자들에겐 집안형편을 따져 따로 돈을 쥐어 주었다. 영혼뿐 아니라 가난까지 구제하고 싶었다. 삶이 신앙이고 신앙이 곧 삶인 가족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다.그래도 신자들이 확 늘지는 않았다. 그보다 나을 것 없는 동창 신부는 인근 성당에서 기관장들까지 척척 입교시켰다. 전교는 하느님이 함께 해 주셔야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기경 시절에도 신자 수 늘리기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후배 신부들에게 신자 수를 늘리기보다 세상에 복음을 얼마만큼 적시느냐에 온힘을 다하라고 당부했다.◆목성동성당과 종교타운목성동성당은 안동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성당이다. 1927년 율세동에서 시작해 안막동을 거쳐 해방 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안동교구가 새로 설정된 뒤 주교좌성당이 됐다. 성당 이름도 안동성당에서 목성동성당으로 변경했다.목성동성당은 우리나라 민주화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무대다. 유신 말기 '안동농민회 사건', 이른바 '오원춘 사건'으로 가톨릭과 정권이 충돌했다. 목성동성당에서 열린 시국기도회에 추기경도 참석했다. 추기경은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들의 삶과 민주주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캐럴송, 자유와 정의의 외침이 안동 시내에 울려퍼져갔다. 안동 최초의 촛불시위와 농성에 시민들이 격려를 보냈다.정부에 맞선 추기경의 행보를 두고 교회 안에서도 딴 목소리가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상대권 요구를 비판한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 때도 그랬다. 추기경은 이렇게 회고했다. "누군가 그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내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성당이 자리한 목성동 일대는 종교타운이다. 백년이 넘은 개신교 교회와 불교 사찰, 안동김씨 종회소, 유교문화회관에 신흥종교 포교원까지 한 울타리에 자리를 잡았다. 성당과 교회 사이 화성공원에는 각 종교의 상징물과 문화재 모형도 마련돼 있다.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정신을 이으려는 안동시의 작품이다. 정신문화의 도시이자 양반의 고장 안동이 보여주는 화이부동의 생생한 모습이다.성당 입구에선 예수 성심상이 두 팔을 벌리고 사람들을 맞는다. 그 아래 돌비석에는 '기쁘고 떳떳하게'로 시작하는 안동교구 사명선언문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추기경이 원했던 가족공동체가 새삼 떠오른다.◆김천 성의학교 교장김천본당(현 김천황금성당) 신부 땐 성의학교 교장도 겸임했다. 학생들에게 격의 없이 대했다. 아버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다가오는 그에게 학생들이 별명을 붙였다. 웃으면 코가 벌렁거린다고 '인자하신 콧님'이라고 불렀다. 제자 둘은 수녀원에 들어가 차례차례 수녀회 총원장을 지냈다.4월 1일이었다. 아이를 안은 여성 신자가 병자성사를 가자고 했다. 허겁지겁 챙겨 택시를 타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오늘 만우절이래요." 활짝 웃는 새댁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는 추기경의 사진을 당시 갓난아기가 간직하고 있다.마음 아픈 기억도 있다. 학교 경영을 책임진 터라 수업료 독촉도 해야 했다. 나이 지긋한 교육자들이 음담패설을 나누는 교장 모임에서는 실망도 했다. 그러나 젊은 신부이자 교장에게 보여준 김천 사람들의 따뜻하고 정겨운 맘씨를 잊지 못했다.성의학교에서의 경험 덕에 평생 젊은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추기경 은퇴 때와 선종 후 명동성당 마당에 모인 사람들이 손팻말을 들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영원한 젊은 오빠, 사랑해요'.김천성당은 가실성당에서 1901년 분리됐다. 한국인 여덟 번째 사제인 김성학(알렉스) 신부가 가실성당을 거쳐 이곳 초대 주임을 맡았다. 초가로 시작해 기와 성당을 거쳐 붉은 벽돌 고딕식 성당을 세웠다. 100주년이던 20년 전 옛 건물 옆에 새로 성당을 마련했다. 옛 성당과 새로 지은 성당이 마주보고 나란히 섰다. 성당 마당에는 김천지역 초기 순교자 현양비도 세웠다.김 신부는 특히 교육사업에 열정을 바쳤다. 가실성당 시절 이루지 못한 학교 설립의 꿈을 김천에서 이뤘다. 성의학교를 세웠다. 오늘날 김천 성의중·고등학교와 성의여중·고등학교의 시작이다.당시 교황청이 관심을 기울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상실감에 빠진 패전국 일본으로 선교사를 대거 파견했다. 한국의 선교사 파견 건의는 외면당했다. 추기경의 머리에 한국교회는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가톨릭 정신이 깊은 나라에서 더 배워야 했다.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교구장도 흔쾌히 허락했다.처음에는 벨기에로 가려 했다. 서강대 설립을 준비하던 은사 게페르트 신부가 독일 뮌스터 대학의 요셉 회프너 신부를 소개했다. "신부인지 교수인지도 모르지만 그의 책을 읽어보니 사회학 이론이 매우 깊고 건전하다"는 충고였다. 새로운 세계가 그를 찾고 있었다. 한국 교회가 가야할 새로운 여정에의 준비와 단련의 시간이 추기경을 기다리고 있었다.〈서영관 스토리텔러〉

2020-05-18 11:29:50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⑤방황하던 신학생 시절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⑤방황하던 신학생 시절

◆성유스티노신학교유스티노 소신학교(예비과) 기숙사 생활은 고역이었다. 새벽 종소리에 일어나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엄격한 규율의 수도원과 다르지 않았다. 여름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한겨울 매서운 추위는 어린 학생들에게 뜨뜻한 온돌방을 그립게 했다. 싸늘한 침대에서 일어나면 또 살얼음 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잡담은 금지였고 침묵을 가르쳤다.추기경도 집에 가고 싶었다. 옷 속에서 동전 하나가 나왔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쫓겨난다고 들었다. 서랍 속 잘 띄는 곳에 동전을 두었다. 들킬 것은 뻔했고 집으로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신부님이 고해성사실로 오라고 했다. 쫓겨난다는 기쁨에 달려갔더니 청소하라는 말뿐이었다.성유스티노신학교는 대구교구 초대교구장인 드망즈(안세화) 주교의 열정과 기도로 세워졌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아들을 바칩니다. 신학교를 세워주십시오'라며 세계 곳곳에 호소했다. 익명의 기부자가 성 유스티노의 이름으로 설립해 달라며 큰돈을 보내왔다.학교는 1914년 개교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완성시킨 신부가 맡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이 벽돌을 구웠다. 그 바람에 대구에도 중국인 거리가 생겼다. 가운데 성당을 두고 양쪽 날개 건물에 대신학교와 소신학교가 들어섰다. 1950년대까지 경상북도에서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67명의 사제가 배출됐다. 주교도 7명이 나왔다. 전주· 광주·부산·마산·제주교구가 여기서 뿌리를 찾는다.◆100주년 기념관유스티노 신학교는 일제 말 강제 폐교됐다. 그 맥을 이어 1982년 재개교한 선목신학대학이 1991년 이전해오기까지 경찰학교, 미군부대, 육군병원 등으로 쓰였다. 대건중·고등학교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선목신학대학은 의학과가 생기며 대구가톨릭대학으로 개명했다가 효성여대와 통합하며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로, 다시 2000년에는 대구가톨릭대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그때 신학대학은 대구가톨릭대학교 대구관구 대신학원이란 이름을 얻었다.헐고 새로 지어진 날개 건물에는 신학교 학부동과 본부동이 자리했다. 대구관구 소속 성당의 사제들이 여기서 배출된다. 옛 모습 그대로인 중앙 건물은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이다. 겉모습만으로도 근대 건축문화의 중요 자료인 기념관은 경당과 성 유스티노홀(건축관), 드망즈홀(설립자관), 앗숨홀(문서관), 옴니아홀(100주년관)로 나눠져있다.각각의 홀에는 드망즈 주교를 비롯한 역대 교수 신부들과 학생들의 사진에서부터 건축물의 100년 변화상까지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폐교 당시 신암성당으로 옮겨졌던 종탑의 종도 돌아왔다. 라틴어 사전과 교재, 오르간도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새로 마련된 경당도 백년 전 그대로다. 유스티노 100주년 기념관은 안팎으로 근대 백년의 대구 역사를 간직한 소중한 문화재다.◆마음을 다잡아 준 스승들예비과를 마친 추기경은 연합소신학교로 운영되던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들어갔다. 여전히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 않았다. 꾀병으로 퇴학당할 궁리도 했다. 꼭 신부가 돼야 하나, 나 같은 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나 하는 회의와 갈등이 이어졌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한 형은 어린 동생이 신부가 되려는지 독립운동가를 꿈꾸는지 걱정스러웠다.어느날 공베르 교사 신부가 "양을 훔치려는 도둑 같은 심보를 갖고 온 학생은 지금이라도 보따리 싸는 게 낫다"고 했다. 자신에게 하는 말로 들렸다. 신학교를 나가겠다고 했더니 공베르 신부가 말했다. "신부는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게 아니다."어느 일간지가 '김수환 추기경 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인가'란 설문조사를 했다. 제일 많은 대답이 '인자한 웃음'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추기경에게 미소를 가르쳤다. 영적 성숙을 위해선 먼저 너그러워야 한다고 했다. 추기경도 생전 주변 사람들에게 웃는 연습을 하라고 권했다.졸업반 수신(윤리)과목 시험문제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이었다.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이튿날 교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학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며 꾸짖는 교장 선생에게 말대꾸를 하다 뺨까지 맞았다. 졸업을 앞두고 대구교구 무세 주교가 학교에 들렀다. 주교와 교장은 '위험하지만 될성부른' 제자에게 일본 유학을 추천했다. 그때 교장이 장면 전 총리다. 훗날 장 총리의 아들 장익 주교에게 추기경이 당시 심정을 이야기했다. "장 선생님이라면 속을 털어 놓아도 될 거라고 믿었다."일본 상지대 유학시절 만난 게페르트 신부는 사제의 길을 결심하는데 어머니 못지않게 영향을 준 스승이다. 괴로워하는 식민지 학생에게 하느님이 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영적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신부가 되면 더 고독하다며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라고도 했다. 한국에서 살고 싶어 한 게페르트 신부는 소망대로 1960년 서강대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어머니의 기도-성모당일제의 학병 강요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유학시절을 같이 보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추기경의 형편을 설명했다. "소속 교구와 가족이 시달릴 것을 뻔히 알면서 자기 한 몸 편하자고 도망갈 수 있었겠나." 근무지로 향하던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만났다. 갑자기 어머니 품에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 눈앞에서는 죽지 않겠다던 평소 생각과 달랐다. 생각과 본심에는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 '가슴 깊은 속 본심은 무엇일까'는 이후 추기경의 화두가 됐다.해방 다음해 귀국선을 탔다. 추기경은 '다시 만난 어머니가 그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회상했다. 어머니가 성모당으로 데려갔다. 기도하던 사람들이 말했다. "어머니 기도 덕에 살아 왔네." 어머니는 사지로 끌려간 막내아들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성모 마리아 앞에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추기경의 가슴에 '어머니의 사랑이 이렇게 큰데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클까'라는 감동이 밀려왔다.성모당은 드망즈 주교의 기원과 약속의 결실이다. 서상돈 선생이 기증한 대지에 사제들의 집과 신학교를 세워주시고 계산성당을 증축할 방도를 마련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주교관 내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루르드의 성모동굴을 세워 성모 마리아를 모시겠다고 약속했다.넓은 풀밭을 앞에 두고 북향으로 세워진 성모당은 성지답게 장엄하다. 주교의 약속대로 교구청 내 가장 높고 아름다운 자리에 섰다. 적색 벽돌 구조물의 내부는 암굴처럼 꾸며 성모 마리아상을 봉안했다. 전면 위에 새겨진 라틴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기도에 힘입어'라는 의미다. 왼편 '1911'은 대구교구 설립연도이며 맞은편 '1918'은 주교의 소원이 모두 이뤄진 해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보성인이다.성모당은 사시사철 기도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언제 어디서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숙연하고 아름답다. 찬양하고 감사하거나 고백하며 축복을 빌거나 모두 영성으로서의 인간을 느끼게 한다. 정호승 시인의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이란 시가 떠오른다.〈서영관 스토리텔러〉

2020-05-04 11:15:18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④신앙의 싹을 기른 고향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④신앙의 싹을 기른 고향

◆신앙의 싹을 뿌린 어머니보통학교를 다닐 때 추기경은 어머니와 동한 형과 살았다. 누나들은 일찍 출가한데다 위로 형들은 돈 벌러 객지를 들고나는 탓에 깊은 정도 몰랐다. 동한 형은 대구 소신학교로 옮길 때까지 늘 함께 있었다. 싸운 기억도 없다. 방학 때 형이 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어머니는 두 아들을 각별하지만 엄하게 키웠다. 행실을 바로하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야 신부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행상을 다니느라 파김치가 된 밤에도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추기경도 어머니 등에 기대어 흉내를 냈다. 어머니는 하늘 천 따 지 정도만 알았지만 틈틈이 성경과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 옛적 효자 이야기도 자주 했다. 그럴 때면 '나도 커서 성인되고 효자돼야지' 라고 생각했다.추기경은 희한하게도 우린 왜 이렇게 못 살까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끼니를 거르더라도 궁티를 내지 않았다. 두 아들에게 돈 많은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재물보다는 믿음의 영성이 먼저라고 했다. 돈과는 거리가 먼 사제로 살도록 권하며 아들의 마음 밭에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회고록에 남아있는 추기경의 말년 독백이다. '예나 지금이나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고향 풍경과 어머니 품이 느껴진다. 어릴 때 저녁이 가까워지면 신작로에서 행상 나간 어머니를 기다렸다. 내 나이도 이제 하느님 곁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하늘나라에 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어본다.'군위 고로면의 인각사는 일연 스님이 머물며 삼국유사를 완성한 고찰이다. 스님이 인각사로 온 까닭은 구순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세속 인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입방아에 스님은 "칠십여 년 살면서 한순간도 어머니를 잊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이나마 맘껏 모시려한다"며 낙향했다. 세속을 떠난 추기경이나 국사 스님에게도 어머니는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었고 효는 만행의 근본이었다.◆ 바보야코흘리개 시절 싸운 기억이 있다. 자치기를 하다 생떼를 쓰는 동갑내기 생질과 싸웠다. 엎치락뒤치락 뒹굴다 생질이 졌노라고 항복했다. 추기경은 이겼지만 슬펐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노라고 훌쩍거렸다. 생질 생각에 외삼촌은 이기고도 우는 바보였다.군위군 군위읍에 있는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에는 둥근 얼굴에 눈, 코, 입이 그려진 그림이 전시돼 있다. 추기경이 그린 자화상이다. 모교인 동성고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내놓은 파스텔 드로잉이다. 그림 밑에 '바보야'라고 썼다. 사람들이 왜 바보인지 물었다.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고 알면 또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가든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로 바보지요. 그러고 보면 내가 가장 바보처럼 산 것 같아요."자신을 부족하고 허물 많은 바보라 했지만 사람들은 추기경이 말한 바보를 나눔과 사랑의 정신으로 받아들였다. 지난해 사랑과 나눔공원 성물 축복식에서 조환길 대구대교구장은 바보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 물정에 약삭빠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하지요. 자기한테 필요한데 다른 사람이 원한다면 얼른 주는 사람이 바보입니다. 추기경이 그렇게 살았습니다."추기경은 '밥이 돼야 하는데' 라는 혼잣말을 자주 했다. 십자가의 죽음을 자청하며 밥이 돼 준 예수님처럼, 먹는 것이 아니라 먹히는 삶을 살자는 말이었다. 추기경의 정신을 기리고자 지난해 군위에서는 추모뮤지컬 '밥처럼 옹기처럼'이 초연됐다. 조만간 '바보 밥상'도 재현하려고 한다. 추기경이 생전 즐기던 시래기 밥상을 통해 나눔과 사랑의 정신을 되새기고 향토 음식도 널리 알리겠다는 계획이다.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군에 사랑과 나눔의 고장이란 브랜드가 보태지고 있다.◆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공원은 조성된 지 겨우 두해가 지났다. 그 탓에 외관의 아름다움은 덜하다. 나무와 풀도 어리고 생가와 옹기는 옛 맛이 적다. 그러나 여느 공원에서 느끼기 어려운 편안함을 안겨준다. 그래서일까 공원을 찾는 사람은 끊이지 않는다. 누구나 떠나간 사람이 그리울 땐 그가 남긴 자취를 찾기 마련이다. 두고 간 삶의 여운이 남아있기 때문이다.추기경이 생전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은 사랑이었다, 동상을 껴안고 즐거워하는 어린아이들에게나 성모상과 십자가의 길을 거닐며 생각에 잠기는 사람들에게 추기경은 한결같이 말한다. "서로 사랑하세요."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사랑과 나눔공원 문은 활짝 열려 있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자는데 천주교면 어떻고 불교면 또 다를까.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영적으로 소통했다. 길상사와 명동성당을 바꿔가며 이교도 앞에 선 두 사람은 사랑과 나눔을 말했다. 사람들은 소통의 문을 열어 준 큰 스승이라고 두 분을 기렸다. 법정 스님의 눈에 추기경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실천자였다. 불교의 하심과 같은 의미다.추기경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살고 싶었다. 그러나 직책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故) 제정구 의원과 정일우 신부가 일군 철거민 정착촌을 자주 찾았다. 자고 가라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공동화장실을 같이 써야하는 등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꽁무니를 뺐지만 실은 용기가 없어서였다." 훗날 추기경은 미안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겸손하고도 꾸밈없이 털어놓았다.공원을 관리하는 신부님에게 추기경은 꾸며진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르지 않게 노력한 분이다. 바보라는 말은 "바보인 내가 하느님의 사람을 받은 것처럼 너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도 한다. 말한 바대로 살려고 애쓴 추기경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라는 말을 남겼다.◆ 떠밀려 간 길성적표를 받아든 추기경은 어머니에게 미안했다. 성적표에는 갑보다 을, 병이 많았다. 어머니는 그냥 웃어 넘겼다. 그러나 그날 밤 교리 공부 숙제를 못한 그에게 보인 어머니의 노기 띤 얼굴은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죄스런 마음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선 신부가 돼야겠다고 장래 소망을 바꿨다.다음날 눈을 뜨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옹기 터에서 일하던 형이 대구 누나 네에 가셨다고 일러줬다. 돈도 10전을 주었다. 꼬깃꼬깃 감춰둔 5전을 합쳐 주머니에 넣었다. 어머니를 찾아 대구까지 백리도 훨씬 넘는 길을 무작정 나섰다. 지나가던 마부에게 떡 사먹고 남은 돈 10전어치만 태워달라고 했다. 다부동 고개 넘어 내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될 때까지 걸었다. 밤늦게 누나 집에 들어가니 길이 엇갈려 어머니는 다시 군위로 가버린 뒤였다. 누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어떻게 알았던지 어머니는 이튿날 일찍 찾아왔다. 그렇게 고향 군위를 떠났다. 그리고 60년이 흐르도록 고향 군위에 가보지 못했다. 어머니를 찾아 나선 길이 사제의 길로 가는 첫걸음이었다.무엇이 되기를 바란다고 꼭 그렇게 되는 인생은 드물다. 20여 년간 가까이에서 모신 강우일 제주교구장이 학술 심포지엄에서 추기경의 삶을 평가했다. "사제로 들어선 처음부터 유학을 가고 추기경이 된 것이나 독재정권에 맞서고 약자 편에 선 것 모두 떠밀려 갈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 계획한 적이 없었다. 항상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한발 내딛었을 뿐이다. 그 분을 떠다민 것은 하느님이셨다."〈서영관 스토리텔러〉

2020-04-27 11:39:43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③유년의 기억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③유년의 기억

◆고향 군위 용대리추기경의 마음속 고향은 군위 용대리였다. 대구는 태어나 학교(소신학교)도 다니고 사제로 첫발을 내디딘 곳이지만 아련한 고향의 추억은 군위보다 못했다. 다섯 살에 옮겨가 보통(초등)학교 5학년까지 지낸 용대리는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나를 길러 준 그리운 고향이었다. 애창곡 '향수'의 구절처럼 추기경에게 군위는 꿈엔들 잊힐 리 없는 고향이었다.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각별했다. '내 강아지' 하며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던 어머니. 기도하는 어머니의 등에 기대 잠들곤 했던 기억을 따라가면 군위 옛 집이 떠올랐다. 한방 쓰던 동한 형의 따사롭던 맘 씀씀이도 또렷하게 남았다. 추기경의 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아버지는 몇 해 못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행상으로 살림을 꾸렸다. 그래도 두 아들이 가난한 티를 내지 않도록 잘 먹이고 깨끗이 입혔다. 학교가면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다. 잘못한 일에는 엄했다.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욕을 먹지 말라고 가르치며 키웠다.어린 시절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읍내 점포에 취직해 대여섯 해 다니다 내 점포를 열고 싶었다. 예쁜 색시와 결혼해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자 했다. 떠돌이 행상의 철없는 아들 생각에 점포를 열면 큰 돈을 벌 것 같았다. 돈 벌어 어머니에게 인삼을 달여 드리고 싶다는 게 코흘리개 시절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군위보통학교등굣길은 십리가 넘었다. 버들피리를 불며 오가기도 했다. 남학생 여학생 반이 따로 있었지만 저학년 때는 여학생 반에서 공부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순한아'로 불릴 만치 생김새나 행동거지가 얌전한 때문이었다. 고학년에 올라가자 한반에 장가든 학생이 열이 넘었고 아들과 함께 다니는 아저씨도 있었다. 공부를 잘한 기억보다는 성적표를 받으면 어머니에게 미안했다는 기억이 더 많았다. 선생님이 장래 소망을 발표하게 했다. 신부님이 가르쳐 준 말이 생각났다. "하느님의 아들답게 살려고 공부합니다." 아이들이 수군댔다. "하느님, 신부님이 누구야?"추기경 시절인 1993년 봄, 고향 나들이를 했다. 추기경 이야기를 연재하려던 소년 한국일보사가 주선했다. 고인이 된 정채봉 작가와 김병규 기자가 제안했다. 안동본당 신부 시절 대구를 오가던 길에 버스가 군위정류장에 서면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떠난 지 59년만의 고향 나들이였다. '오세암'을 쓴 정 작가는 뒷날 추기경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자 했다. 추기경이 반대했다. 위인전에 나올 만치 아름답게 살지 못했다며 거절했다. 책은 추기경 선종 이후 '바보 별님'으로, 다시 '저 산 너머'로 출간됐다. 동행한 둘은 추기경의 고향 나들이를 기록했다.군위국민(초등)학교는 옛 모습이 아니었다. 전쟁 통에 교사도 불탔고 학적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추기경이 뭔지도 모르는 꼬맹이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단에 선 추기경은 어릴 적 학생으로 돌아갔다. "청소할 때 나이 많은 여학생이 물 떠 오라면 물 떠오고, 걸레 가져오라면 걸레 가져오고 하다가 가끔은 얻어맞기도 했지. 구구단을 못 외워 벌을 선 날 밤, 또 벌을 설까 무서워 꿈속에서 구구단을 몽땅 외웠지"라고 했다. 추기경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에 아이들은 웃고 재잘대며 즐거워했다.당부도 빼먹지 않았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돼달라고 했다. 떠나는 추기경을 아이들이 매달리며 둘러쌌다. 그 속에 서 있는 추기경의 행복한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추기경은 10년 뒤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만득이가 삶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기차를 타게 됐다는 겁니다. 한참을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 하는 겁니다."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어른의 무겁고 경건한 말씀을 기다리던 학생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가끔은 일상의 가벼운 말이 더 가슴속 깊이 다가올 때가 있다. 유머로도 사람들이 알아주던 추기경이었다.◆군위성당점심은 신자들이 군위성당에 마련했다. 점심 자리에서도 웃음판이 이어졌다. 추기경은 장사꾼의 꿈을 포기하고 신부가 된 건 어머니의 권유였다고 했다. 그러나 동한 형과 달리 추기경은 어머니의 권유가 싫었다고 털어놓았다. 형은 그 자리에서 '예'라고 대답했지만 자신은 새신부와 맞절하는 모습이 먼저 떠올라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성당 마당에선 또 난리가 났다. 너도나도 사진을 찍자며 졸랐다. 떠나는 추기경에게 신자들이 배웅 인사를 했다. "신부님 또 오세요."군위성당은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다. 오솔길을 두고는 향교와 유림회관이 버티고 있고 교회도 이웃해 있다. 서로 소중하게 여기며 같이 사는 종교타운이라고 부를 만하다. 군위성당은 왜관본당에서 분리돼 세워졌다. 신나무골에서 가실성당으로, 가실성당에서 다시 왜관성당으로 흐른 전교의 맥이 이어졌다.오솔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넓혀졌지만 여전히 옛 정취가 대단하다. 성당 마당에 서보면 사람들이 명당으로 꼽는 까닭을 알 만하다. 마당 가장자리 나무 탁자에서 커피를 대접하는 신부님의 맑은 눈이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을 부른다. 가을이면 '단풍 낙엽 음악회'가 열린다. 군위 사람들의 소중하고 즐거운 잔치다.◆용대리 옛집용대리 삼거리에서 추기경은 긴가민가했다. 읍내와 의성을 잇는 길은 포장길로 변했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천주교 공원묘지 이정표가 걸렸다. 옹기 가마터는 보이지 않았고 기와집에 슬레이트집이 초가를 대신했다. 비탈길을 따라 돌계단을 올라가니 허름한 기와집에서 쉰줄의 집 주인이 추기경 일행을 맞았다. 살던 집이 아니었다. 집 주인이 뒷마당으로 앞장섰다. 폐가 한 채가 힘겹게 서 있었다. 60년 시간이 순식간에 되돌아갔다. "어 그대로야, 바로 이 집이야."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을 뿐 옛날 그대로였다. 부엌과 방 두 칸에 작은 툇마루. 창고로 쓴 탓인지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방으로 고개를 들이민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네." 옹색하고 초라한 방은 아버지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작은 방에는 두고 온 연필이나 구슬, 딱지가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무쇠 솥이 걸린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밥 익는 냄새가 툇마루에 앉은 추기경에게 풍겨왔다.어머니는 이 집에 신부님을 모셔와 미사를 드렸다. 신부님이 오는 날은 잔치 날이었다. 풀을 쑤고 창호지와 벽지를 새로 발랐다. 툇마루 밑까지 쓸어냈다. 조랑말을 타고 온 신부님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엎드려 절했다. 밥상엔 구경도 못한 반찬이 올랐다. 남긴 것을 얻어먹는 즐거움도 컸다. 생일보다 나았다.동한 형의 친구라는 노인이 찾아왔다. 구부정한 허리에 주름살이 가득했다. 두 손을 맞잡은 노인은 "내가 니 형 동한이 친구다"고 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추기경은 깍듯했고 노인은 반말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노인이 안부를 물었다. "참, 니 서울 가서 천주굔가 어디서 되게 출세했다며." 중국 선종의 황금시대를 연 마조가 시를 남겼다. '고향에 가지마라. 개울가의 할미 여전히 내 옛 이름을 부르네.' 추기경과 함께한 사람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마음의 행로 끄트머리 고향에 추기경은 옛날의 '순한아'로 남아 있었다.〈서영관 스토리텔러〉

2020-04-20 13:04:42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②영남 천주교의 요람 칠곡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②영남 천주교의 요람 칠곡

◆고난의 시절소년시절 홀로 남은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김영석 요셉)에게 김보록 신부는 울타리였다. 서양 신부들은 순교자의 아들을 기꺼이 거두었다. 옹기와 숯을 굽고 파는 일도 익히게 했다. 지금은 골프장으로 변했지만 칠곡 장자동은 당시 옹기 굽는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이었다. 클럽하우스 옆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추기경 아버지가 이곳에서 도공으로 일했다는 구전이 새겨져 있다.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연 김보록 신부가 그를 장자골로 불렀을 터다.추기경 아버지와 어머니(서중화 마르티나)는 믿음 하나로 부부가 됐다. 가진 것 없는 그들에게 옹기 굴만한 보금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한 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옹기 구울 흙을 찾아 신나무골과 장자골에서 왜관, 김천 지대골로 떠돌았다. 추기경은 생전 '우리 팔남매는 태어난 곳이 저마다 달랐다'고 가난한 시절을 떠올렸다.아버지는 추기경이 겨우 보통(초등)학교 1학년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그저 '마음씨 착한 충청도 양반'이라는 정도였다. 서울 동성학교에 다니던 시절 친척 고모가 "꼭 네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아버지 생각이 날 때면 거울을 들여다봤다.어머니는 꿈에도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 내 어머니'라는 추기경의 글에는 기르고 가르쳐 성직의 길로 이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이 절절이 넘친다. 어머니는 세 살 터울의 형(김동한 신부)을 빼면 위로 누나와 형들은 공부를 시키지 못했다. 떠돌이 행상의 고단한 일상에도 어머니의 믿음과 소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늦게 본 두 아들은 가르치고 싶었다. 꼭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싶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며 뿌리 없는 꽃이 어디 있으랴. 추기경이 지녔던 믿음의 뿌리는 순교자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피눈물과 땀으로 자라났다.◆영남 천주교의 터전 칠곡박해 시절 천주학은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모르는' 서양 오랑캐의 사악하고 해괴한 짓거리였다. 그러나 죽어나가는 교인이 수천수만으로 쏟아질수록 사람들의 눈과 귀는 달라졌다. 처형장에 끌려온 '천주쟁이'의 마지막 모습은 희한했다. 벌벌 떨기는커녕 되레 태연한 사람들이 적잖았다. 목이 잘려 나갈 판국에 '천당 가서 만나자'며 미소 짓는 얼굴에서는 두려움을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천주교가 무엇이기에….' 발 없는 소문과 호기심은 금방 천리를 갔다.김보록 신부에게 칠곡 신나무골은 영남 전교의 교두보로서 안성맞춤이었다. 대구까지는 하루 길이었다. 낙동강 물길도 고마운 존재였다. 기존의 신자촌 말고도 칠곡 여기저기서 신자들이 늘어갔다. 한티 사람들과 서양 신부는 백리 산길을 오가며 신앙을 나누었다. 김천, 상주, 문경에서도 신자들이 찾아왔다. 전교는 대구로 이어져 다시 밀양, 울산으로 뻗어갔다.천주교를 일찍 받아들인 까닭일까, 칠곡은 상대적으로 천주교 신자 수가 많다. 고찰과 석탑, 마애불도 있고 유교 강학소와 선비들의 고택도 즐비하지만 어느 고장보다 천주교 사적이 쉽게 마주친다. 순교 마을은 물론이고 성당과 수도원은 고스란히 역사의 현장이 됐다.◆ 가실성당과 한티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한 가실성당은 우리나라 11번째 성당이다. 미끄럼틀이 아담하게 꾸며진 성당 초입의 작은 풀밭에는 철없는 아이들이 뛰놀고 백년을 이어 온 종소리는 방문객을 편안하게 맞이한다. 6·25 전쟁의 격전지였지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야전병원으로 쓴 덕분이다.김보록 신부는 처음 초가집 성당을 열었다. 경상도 북부지역 전교를 맡은 파이야스(하경조) 신부가 오늘의 모습으로 세웠다. 계산성당 다음의 대구교구 2번째 성당이다. 설계는 계산성당을 지은 신부가 맡았다. 가실성당의 주보성인은 예수의 외할머니 안나다. 성당 안 제대 오른편의 안나상은 신축 당시 프랑스에서 가져왔다. 추기경의 아버지도 가실성당을 다녔던 모양이다. 큰 딸의 세례를 여기서 받게 했다.누군가 가실성당은 눈 내리는 겨울이 좋다고 했다. 붉은 벽돌과 흰 눈의 조화가 일품이라고 평했다. 굳이 겨울이 아니라도 가실성당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영화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고즈넉한 천년 고찰의 첫 인상과 다르지 않다.추기경의 토함산 석굴암에 대한 회상이다. '석굴암을 봤을 때 무엇인지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로마 바티칸의 세계적인 미술품 성상들을 볼 때도 한 작품을 5분 이상 본 적이 없었다. 내 안에 불교적인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종교와 대화를 나누고, 고유하고 불멸하는 가치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추기경은 유학자 심산 김창숙의 묘소도 참배했다. 유교식 예법대로 술을 따르고 절을 했다. 우리 역사 속 천주교와 유교의 해묵은 질곡을 벗어버린, 아름다운 만남이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마뜩찮다는 시선도 있었다. 이에 대한 추기경의 대답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꼿꼿한 선비로 살아온 분에게 존경의 예를 표함은 당연하다. 그분의 종교가 무엇이든, 참배를 유교식이나 불교식으로 하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가실성당은 그 자체가 소중한 우리의 역사다.한티성지는 천주교 신자들이 난리를 피해 숨어 살던 곳이자 목숨을 잃은 곳이다. 유해도 묻혀 있다. 그래서 신자들은 완벽한 성지라고 한다. 확인된 순교자의 묘 37기 중 이름을 남긴 이는 서넛뿐이다. 한티 순교자들에게는 전시 군율인 선참후계가 적용됐다. 심문도 없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목이 잘렸고 집은 불태워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흩어진 시신을 묻으며 다짐했다. 거룩한 땅을 자자손손 보존하겠노라고.순교자 묘역 대형 십자가 오른 편의 크고 작은 돌은 한티마을 사람들을 상징한다. 말없이 서있는 돌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한티 가는 길길은 사람과 함께 했다. 사람이 다니면 공간으로서의 길이 됐고 삶의 과정, 시간도 길이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에 따라 오만가지 길 이름이 생겨났다. 꽃가마 타고 가는 비단길만 길이 아니었다. 꼬부랑길에 오르막길이 더 많았다. 인생을 길로 비유한 동서고금의 선인들은 길 위에서 참고 견디는 즐거움을 배우라고 충고했다.가실성당에서 신나무골을 거쳐 한티까지의 45.6km는 '한티 가는 길'로 불린다. 산티아고 순례 길을 본 따 '한티아고'라고도 한다. 걷기열풍이 불며 온갖 이름의 순례 길, 힐링의 길이 사람들을 부른다. 한티 가는 길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고난을 참고 견디며 희망을 찾아간 옛 사람들의 마음을 전해준다.한티 가는 길 다섯 구간은 서로 다른 이름으로 이어진다. '돌아보는 길' '비우는 길' '뉘우치는 길' '용서의 길' '사랑의 길'이다. 절박했던 옛 사람들의 고난의 길을 오늘 사람들은 나누고 함께하는 소통의 길로 걷는다.추기경은 대구서 태어났다. 서너 살 쯤에는 선산, 한두 해 뒤에는 군위에서 자랐다. 추기경의 기억에서 길은 단골이었다. 선산에서 군위로 큰 고개를 넘어 간 어린 시절의 기억은 만년까지 선명했다. 해 지는 저녁 고갯마루를 바라보며 행상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모습도 생생하게 남았다. 추기경은 참고 기다리는 행복을 길에서 배웠을까.〈서영관 스토리텔러〉

2020-04-13 11:39:08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① 신나무골 성지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① 신나무골 성지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고(故)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은 일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며 민주화와 인권, 사회정의를 위한 버팀목이 되어줬다. 생전 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며 사랑을 실천했던 그는 정치·사회적 고비 때마다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기도 했다. 이런 추기경에 대해 젊은층들은 명동성당과 서울대교구장 등의 이미지와 결부시켜 대구경북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 경북 군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대구대교구에서 활동한 대구경북 사람이다. 이에 본지는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에서의 족적을 살펴보는 연재를 통해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정신을 되새기는 한편 추기경과 관련된 장소들을 한데 묶어 관광자원화하는 일에도 초석을 제공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1)신나무골 성지 (2)영남 천주교의 요람 칠곡(한티가는 길) (3)유년의 기억(군위 용대리) (4)신앙의 싹을 기른 고향(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5)방황하던 신학생 시절(유스티노 소신학교, 성모당) (6)사제의 길에 서다(계산성당) (7)본당 신부 시절의 추억들(안동성당, 김천성당, 대구대교구청) (8)세상과 함께(대구가톨릭시보사)◆옹기김수환 추기경의 호는 '옹기'다. 추기경 시절까지는 호를 쓸 일이 없었다. 은퇴 후 지인들과 함께 장학회를 설립할 때 알려졌다. 장학회 이름에 세례명인 스테파노 대신 옹기를 붙여 자신의 호를 세상에 알렸다. 태어나자마자 조상이 지어 준 이름과는 달리 살면서 스스로 지은 호는 그가 어떤 삶을 바라며 어디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보여준다. 추기경은 많고 많은 이름들 중에서 왜 하필 옹기를 호로 골랐을까.옹기는 우리 조상들의 일상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쓰였다. 물이나 술을 담는 항아리였으며 소중한 쌀과 간장 된장을 갈무리하는 쌀독, 장독이기도 했다. 떡을 찌거나 콩나물을 키우는 시루로도 썼고 똥오줌을 담으면 똥항, 똥장군이 됐다. 추기경은 생전 사제들에게 "옹기는 곡식뿐만 아니라 오물도 담는 선조들의 삶의 그릇이었다"며 "세상에서 꼭 필요한 옹기 같은 인물이 돼 달라"고 말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하는 사제가 되라는 당부였다. 장학금을 받는 후배 신학생들에게는 "주님 말씀을 질그릇에 담아 전하는 북방선교의 일꾼이 되라"고도 했다.한국 천주교 초기인 박해시절의 옹기는 집과 논밭을 버리고 산으로 피신한 가톨릭 신자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었다. 숨어 다니던 처지에 농사는 아예 엄두도 못 냈다. 대신 옹기나 숯을 구워 양식을 마련했다. 옹기를 짊어지고 이리저리 팔러 다니는 일은 고단했지만 고마운 점도 있었다. 숨죽이고 사는 교우들을 만나도 의심받지 않았고 나라의 단속 소식도 얻어들었다. 50여년 전 발표된 논문에는 '지금 옹기장수나 도공들의 조상은 열이면 여덟아홉은 천주교인'이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오래된 옹기 중에는 십자가 등 천주교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도 적지 않았다.김수환 추기경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 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본관이 광산인 조부 보현(요한) 공은 독실한 신자로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충남 논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하셨다. 그 바람에 나의 아버지(김영석 요셉)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그랬듯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대구 처녀인 어머니(서중화 마르티나)와 결혼해 대구에 정착하게 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순교자 집안의 가난한 옹기장수 막내 아들이었다.◆신나무골 순교자 묘19세기 초 박해의 파도가 몰아치자 천주교인들은 난리를 피해 살길을 찾아나섰다.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신나무골은 예부터 피난지였다. 이곳 사람들은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김종한) 가족들이 신나무골로 이주한 게 천주교인 이주의 시초라고 말한다. 안동에서 붙잡혀 대구감영으로 옮겨진 종조부의 옥바라지를 위해 가족들이 임시 거처를 여기에 마련했다는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서상돈의 외조부도 한때 이곳을 피신처로 삼았다. 큰 난리가 난다는 소문이 돌 때마다 신나무골로 숨어들어온 이가 하나둘 늘어났다. 피난 온 천주교인들은 다시 한티나 옹기골 장자동으로 넘어갔다. 장자골은 지금 골프장이 들어섰다.신나무골 성지 오른편 언덕에 자리한 순교자 묘의 주인 이선이(엘리사벳)도 그랬다. 칠곡 골버실(국우동)에서 농사를 짓다 난리를 피해 신나무골로 피난 온 천주교인이었다. 숨어 온 이들이 늘어나니 소문도 나는 법, 신나무골도 안전하지가 않았다. 이선이의 가족들은 다시 한티로 피했지만 곧바로 붙잡혔다. 시퍼런 칼날 앞에 남편은 이후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며 믿음을 버렸다. 대신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선이와 아들은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다"며 작두에 머리를 내밀었다.대구에서 왔다는 중년의 여인 둘이 묘역 주위를 둘러싼 14처(예수의 마지막 십자가 행로 14자리)조각을 돌며 기도하고 있다. 믿음과 목숨을 바꾼 순교자의 강렬한 마음을 생각해 본다.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살아남은 남편의 슬픔과 부끄러움은 또 얼마나 컸을까. 순교는 피와 죽음을 요구했다.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내일을 기다리며 지금 이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순교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새롭게 태어남의 희망으로 죽음에의 두려움을 이겨냈다.순교의 현장에 서면 내 종교가 무엇이냐 따위는 의미가 없다. 종교는 달라도 감동의 울림은 다르지 않다. 순교성지 나들이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게 좋다. 철부지 아들 딸 손잡고 거닐기에 제격이다. 아이들의 빈 마음에 감동적인 옛사람의 이야기가 저절로 전해진다. 김수환 추기경은 근 60년만의 고향 나들이 때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 "어머니가 하느님을 잘 믿어야 천국에 간다고 하신 말씀을 나는 천국을 청국(청나라)으로 들었거든요. 기껏 청국에 가려고 하느님을 믿어? 청국은 싫은데, 이런 고민도 했어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영남지방 전교의 요람신나무골 성지 앞마당에는 신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골 이름을 두고는 난리를 피해 온 신자와 신부들이 나무 아래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하여 신나무골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신나무골은 영남지방 천주교 선교의 교두보였다. 천주교 신앙을 내놓고 밝히지 못하던 시절에도 조선교구 역대 교구장들은 참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영남지방까지 전교 선교사를 파견했다.병인박해 당시 붙잡혀 충청도 보령에서 순교한 조선 5대 교구장 다블리(안돈이) 주교의 일기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이 지방(신나무골)은 매우 작고 의심을 받는 곳으로 20~30명 밖에 성사를 집행할 수 없지만 그래도 큰 읍내(대구)의 작은 핵심이 될 수 있다.' 한반도 남쪽지방 전교에 나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첫 걸음은 이곳 움막에서 비롯됐다.신나무골 성지 입구에선 아킬레 바오르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흉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천주교 대구본당 첫 주임신부다. 박해의 광풍이 지난 뒤 조선을 찾은 그에겐 영남 전교의 사명이 맡겨졌다. 먼저 들어와 살고 있던 신자의 도움을 받아 경상도 첫 사제관을 신나무골에 세웠다. 학당도 열었다. 현재 사제관은 마루와 방 두 칸의 초가집으로 복원돼 있다. 그가 조선교구장 블랑(백규삼) 주교에게 보낸 사목보고서에는 사제관을 세운 사연이 들어 있다. '경상도 신자들은 1년에 한번 순회선교사가 왔다가 훌쩍 떠나가면 버림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1886년 4월 마침내 경상도 첫 사제관을 신나무골에 두었다.' 대구본당의 출발이었다.청년이 된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는 옹기나 서양 선교사들이 가져온 학질약 금계랍 장사로 생업을 삼았다. 금계랍 봇짐 메고 대구에 들른 추기경의 아버지를 김보록 신부가 찾았다. 김보록 신부는 추기경의 아버지를 어릴 적부터 돌봐온 터라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추기경의 아버지에게 신심 깊은 처녀를 소개했다. 집안에서 왕대라고 불릴 만치 곧고 듬직했던 처녀였다. 추기경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서영관 스토리텔러

2020-04-06 11: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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