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시니어 문학상] 관련 기사 목록입니다.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분이(4) - 김옥순(김아가다)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분이(4) - 김옥순(김아가다)

내 기도 덕분에 저놈이 그래도 인간 구실을 한다. 저놈 철들 때까지 꿇어앉은 내 복사뼈가 이렇게 흉하게 되었다. 아가, 한 번 봐라. 거북이 등가죽 같제. 그래도 그놈이 제일 효자이기는 하지.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하지 않더냐. 전부 서울로 떠났지만 일곱째는 나랑 살잖아. 사고를 치면, 감옥 보내지 않으려고 합의금으로 들어간 돈이 집 세 채쯤 된다.사람 됨됨이만 그릇되지 않는다면 그다지 살아가는 데 문제 삼을 일은 없지 않으냐. 범죄자의 신원을 조회하면 빨간 줄이 그어진다고 하더라. 그놈의 빨간 줄이 자식 인생 갉아 먹는 줄 알고 애간장 태운 것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대마초 사건이다.얼뜨기 같은 놈이 제 이모 집에 가서 사고를 쳤다. 소죽 끓이는 아궁이 벽에 삼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이거 뭐냐고 물었다. 이모가 '대마초'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놈이 이모 몰래 한 줌 떼어 갔니라. 참 시건 없제. 시내에 돌아다니는 껄렁한 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우리 이모 집에 대마초가 있다고 속닥거리며 자랑을 했단다. 그놈이 한창 담배에 맛을 들일 때였다. 패거리들과 삼 이파리 한 줌을 양담배 한 보루와 바꾼 것이다.못난 놈, 제 신세 망칠 줄 모르고. 한창 연예인이 대마초 사건에 연루될 때였지. 그놈들이 봉덕동에 있는 봉봉 여관에서 대마초를 빨다가 인검 나온 경찰에게 들켜버렸다. 저희만 붙잡히면 될 것을 일곱째 이름을 불어서 순경이 찾아왔다. 그때는 심문과 고문이 심했다고 하더라. 말도 마라 순경이라는 신분증을 보여주는데 내가 알기나 하나, 이 또한 무슨 일인고 싶어서 얼마나 떨었던지, 아래턱이 얼얼하더라.이모 집 툇마루에 서면 범물동 종점이 보인다. 순경을 앞세우고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일곱째 같다고 우리 집에 전화가 왔더라. 자초지종 이야기할 새도 없이 빨리 삼을 태우라고 내가 소리를 질렀제. 이모는 기함하고 삼을 걷어서 쇠죽 아궁이에 쑤셔 넣었다. 수갑에 채여 골목에 들어오는 것을 본 이모는 온몸이 삼발이 사발이 떨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단다. 순경이 다짜고짜 삼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길래, 소가 설사를 해서 삶아 먹였다고 했다. 조카가 물어서 "대마초"라고 한 것이 잘못이니 선처해달라고 손발이 닳도록 빌었다. 잘못하면 이모도 잡혀갈 뻔했다.대학생이었으니 감옥에 가면 장래도 문제가 되겠지만 가문의 똥칠이었다. 그놈을 빼내려고 여러 군데 줄을 대느라 집 한 채가 또 들어갔다. 그뿐만 아니다. 다른 자식들한테 말 못 한 사건도 수두룩하다. 좀 미안하기도 하지만, 내가 번 돈으로 해결했으니까 괜찮다. 아가, 내 인생에 눈앞이 아찔한 일이 있었다. 천주님을 믿지 않았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될 뻔했다. 빙의라고 했던지, 무병이라 했는지 잘은 모르겠다. 병명도 없이 내가 많이 아팠다. 점을 보고 굿판을 벌여도 소용이 없었다. 자식은 줄줄이 있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돈이 있어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무병이다. 조선천지 용한 의원을 다 만나서 진맥을 해도 내 병을 알아내지 못했다.먼 일가 중에 점바치가 하나 있다. 그 사람이 내 꼴을 보고 신우대를 잡아야 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신내림을 받으라고 했느니라. 기가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살자고 자식들 앞을 가로막아서야 되겠냐. 무당 새끼 만드는 것은 절대 못 할 일이었다. 차라리 그냥 죽겠다고 버티었다. 온몸이 퉁퉁 붓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으니 산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하루는 옆집에 사는 노인네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성당에 가서 천주님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다녀도 병명도 모르고 낫지를 않았는데 긴가민가했다. 우리 집은 사대 봉제사를 지내는 집이다. 성당은 제사도 지낼 수 있다는 소리에 영감의 귀가 번쩍 띄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속아보기로 마음먹고 옆집 노인네를 찾아갔다. 그 양반이 매일 삼덕성당에 나를 데리고 갔다. 만신창이가 된 몸은 걸을 수가 없어서 소달구지를 타고 갔다. 글도 모르는 내가, 귀로 듣고 입으로 달달 교리문답을 외웠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살려만 주시면 가족들도 모두 천주를 믿게 하겠다고 빌었다.일 년을 다니다가 세례를 받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매달린 기도를 하늘이 들어주셨지. 그날 기적이 일어났느니라. 집으로 오는 도중에 치맛말기가 스르르 풀어졌다. 참말로 놀랍제. 붓기가 있던 몸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다 쏟아냈다. 오줌을 싼 줄 알았다.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천근만근 무겁던 몸이 가벼워져서 사뿐사뿐 걸어서 집에 왔다.그 물은 눈에서도 흘렀다. 집으로 돌아오니 식구들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단다. 저승 문 앞까지 간 사람이 천주님의 은총으로 살아났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느냐. 그때부터 가족들이 모두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천주님을 믿고부터 우리 집안이 평안했다. 영감도 세례를 받고 대봉성당 전교 회장까지 했단다. 이날까지 내가 성당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는 이유다. 참 많은 축복을 받았다. 아가, 매일 감사 기도를 잊지 말아라. 너도 세상을 살다 보면 순간순간이 주님의 안배하심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하더니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한 번 그릇되면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고 했다. 아베한테 버림받고, 이를 악물고 독하게 살았더니 신랑이 엉뚱한 짓을 했다. 또, 자식들은 별수 있겠냐. 부모가 밑거름 되어 준 것을 아느냐 말이다. 저 혼자 잘 자란 줄 알고, 머리 굵어지면 부모를 헌신짝 버리듯 관심도 없다. 손가락 마디마디 굽어지고 등이 휘어진 것을, 나이 먹어 그렇다고 뒷집 개 짖는 소리로 듣고 있으니.내 한 세상 살아온 것을 뒤돌아보니 바들바들 떨면서 보낸 시간이 분하다. 버림받아 분해 떨고, 아까워서 바들바들 떨고, 늙어 기운 빠져 부들부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떨고 살았다. 이제는 저승 가서 지은 죄 심판받으며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겠제. 그래도 할 말은 하고 가야겠다. 그 많은 재산, 자식들 나눠주고 달랑 요양병원 침상에 누운 것이 내가 가진 전부구나. 빈손이다.촛불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오늘이 시월 열사흘이구나.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풍요로운 계절이다. 좋은 때, 좋은 시절에 가겠다고 했더니 내 기도를 들어주신 모양이다. 이승의 끝자락에서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신새벽이라 아무도 없더구나. 자식들은 한 놈도 보이지 않고 불러도, 목이 쉬도록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날 데리러 온 사람이 문밖에 서 있더라. 할 수 없이 입고 있던 껍데기를 벗었다.아가, 욕심 내려놓고 미운 사람 용서하며 맺힌 것 풀면서 살아야 한다. 나도 돌아보니 전부 욕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독하게 자린고비로 살았다. 아귀같이 모은 것이 아까워 이웃을 위해 자선도 한 적이 없구나. 비렁뱅이로 사는 이들을 보면 게으른 사람이라고 욕이나 해댔다. 그 사람 안의 고통을 바라볼 줄 몰랐다.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사람을 선하게 대하여라.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모두 평등하다는 말은 수평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내 가슴에는 멍이 많다. 이제 생각하니 분하다고 하는 것은 억울하고 분한 것이 아니라 모르고 살아 온 것들의 잘못을 말한다. 깨달음을 거울삼아 제대로 한 번 살아보려니 갈 길이 바쁘구나. 저기 하늘에서 빛이 보인다. 너도 네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너를 잘 보듬어 주어라. 너는 후회 없이 살기를 바란다. 사랑한다, 아가.〈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논픽션 '분이' 5편은 다음주 목요일(8월 5일)에 게재합니다.〉

2021-07-29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분이(3) - 김옥순(김아가다)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분이(3) - 김옥순(김아가다)

그 후 소식은 젊은 년이 폐병에 걸려서 죽었다더라. 옥이는 내 자식으로 호적에 올리고 키워서 시집보냈다. 키운 정도 정이더라. 낳지 않았지만 내 손으로 키운 딸이니 똑같은 자식이다. 옥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 그런데 옥이 팔자도 기가 막힌다. 초가을이었는데 웬 총각을 하나 데리고 왔다. 배는 불룩하고 옷도 없는지 여름 반소매를 입고 벌벌 떨면서 둘이 왔더라. 동네 사람 알까봐 얼른 끌고 들어와서 옷을 입히고 집에 재웠다. 한 달간 데리고 있다가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옥이는 그 이후로 친정에 발길을 끊었제. 지지리도 없는 남자를 만나서 고생을 푸지게 한다고 소문에 들리더라. 아가, 남자들은 마음에 정분이 나서 색을 탐하기보다 본능이 앞서서 저지른다고 한다. 너도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 그럴 때는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 그 아비 핏줄이니 어련하겠냐. 내 한평생 그런 염려하면서 살았다.삼대독자 집안에 아들을 여섯이나 낳아주었는데 나한테 소홀히 해서야 되겠냐. 외아들로 자란 영감은 자신밖에 몰랐다. 맛난 음식, 좋은 옷, 대접받는 것 좋아했다. 돈 잘 쓰고 술 잘 사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용두방천에 보를 막는 일에도 한밑천 갖다 넣었다. 사람들이 추켜세우면서 잘한다고 하면 정신을 못 차렸다. 징, 북, 장구, 꽹과리. 사물놀이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량이었다. 기생집에는 오죽 들락거렸을까. 알고도 모르는 채 들어도 귀머거리로 살아야 했다. 그뿐 아니다. 말로 어떻게 다 하겠노. 글을 쓸 수 있다면 책 한 권은 넘을 게다.집안 큰살림에 자식은 많지 들어갈 돈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세상일에 촉이 빨랐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궁리하던 중에 집안 아저씨가 돈 넣고 돈 먹는 빠찡꼬를 소개했다. 뭣인지 잘 모르면서도 돈이 된다는 소리에 구미가 당겼다. 돈 벌어서 땅 사고, 밭 샀더니 부동산이 자꾸 불어나더라. 친정 아베가 가지고 떠난 전답 문서가 생각이 나서 그랬다. 요샛말로 하면 트라우마라고 하제. 비옥한 수성 뜰이 전부 내 것이 되더구나. 돈은 내가 벌었는데 일일이 영감한테 말하고 타 써야 하려니, 나 원 참 더러워서. 금고에 돈을 꽉 채워놓고 혼자만 야금야금 썼단다.신명 많고 흥이 많은 영감은 인기가 있었다. 인물 좋고 기운 좋아 전국 씨름대회에서 황소를 두 번이나 탔단다. 왜정 때 일본 순사를 개 패듯이 패준 적도 있다. 쥐뿔, 애국자인 척 주먹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다. 못마땅한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래도 살 부딪히고 사는 영감인데 어쩌랴. 고추를 못 달고 태어나 버림받은 한이, 나를 억세고 강하게 살게 했는지 모른다. 분함에서 너그러움도 같이 습득한 모양이다.내가 평생 살면서 영감한테 딱 한 번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 홀시어머니에 외동아들은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다. 내가 아무리 잘해 드리려고 노력해도 흉잡고 삐치는 시어매를 감당하기 힘이 들었다. 청상에 혼자되어서 아들 하나 믿고 살았으니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동네에서도 게살궂은 어른이라고 소문이 났더라. 이웃집 제삿날은 어찌나 여물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더라. 음복하러 오라는 기별이 없으면 뒷짐 지고 제사 지낸 집 앞에 얼쩡거리면서 잔소리를 했다. 진중하지 못한 어른 때문에 남세스러운 것 말도 마라.동이 트면 들에 나가 해거름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면 부엌이 싸늘했다. 불이나 때놓고 가마솥에 물이나 한 솥 끓여놓으면 좀 좋을까. 아랫목에 드러누워 내다보지도 않았다. 허둥대며 저녁을 준비하는데 밥상 올리지 않는다고 구시렁거리더라. 피우던 장죽을 재떨이에 탁탁 치는 소리가 나면 성질났다는 신호다. 속에 천불이 나지만 어른이라 어쩌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랬더니 어른 말씀 하시는데 대답하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악을 지르더라.마침 영감이 집에 들어오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앞뒤 경우도 살피지 않고 부엌으로 쫓아와서, 들고 있던 삽을 나한테 던졌다.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고 있었는데 피할 겨를이 없었다. 말도 마라, 머리를 맞았는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라. 오기가 발동했지. 이놈의 집구석 제대로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피가 얼굴로 타고 흘러내려도 꼼짝 않고 노려보았다. 영감이 오히려 놀래서 피를 닦아주고 난리가 났다. 그 시절에는 병원은 생각도 못 할 때였지. 된장 한 덩어리를 퍼 와서 머리에 싸매주더라. 자식들은 울고불고 집안이 한바탕 시끄러웠다. 그때 영감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짓은 잘했던 것 같다. 분이 좀 풀리더라. 여자라고 숨도 못 쉬고 살아서는 안 된다. 옳은 일은 끝까지 옳다고 해야 한다. 알겠느냐.뙤창으로 바깥을 살피던 시어매는 놀랐는지 다음부터는 별나게 닦달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노망들어서 벽에 똥칠까지 했다. 똥 수발 삼 년을 시키더니 북망산천으로 떠나셨다. 나는 며느리한테 시집살이 시키지 않겠다고 그때 맹세했었다. 자식들이 그때 놀래서 아직 제 마누라 두들겨 팬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너그러운 시어미가 되려고 나도 숱하게 노력했지만, 며느리들은 섭섭한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너도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다오. 아가, 아들 많이 낳은 내가 보속할 일이 많다. 하나같이 제 아비 닮아 성질 급하고 힘이 불쑥거리니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들놈들 전부 정관수술 시킨 것도 이유가 있었니라. 아랫도리 힘까지 불쑥거려 바깥에서 씨앗 받아올까 봐 애면글면 살았니라. 그래도 내가 누구냐. 천하의 '허분이'다. 하나도 삐뚤어지지 않고 제대로 제 몫을 하면서 살도록 키웠지 않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하더니, 이놈을 다스리면 저놈이 껄떡거리고, 말도 마라. 첫째와 둘째는 점잖고 심성이 곱다. 셋째부터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알제. 돈푼깨나 있고, 사는 것이 번듯하니 자식들이 세상 있는 폼은 다 잡고 다녔다. 잘생긴 내 아들들 대구 시내를 주름잡았니라.부모가 돈 벌었는데 쓰는 놈은 따로 있더라. 힘자랑하는 저거 아버지를 닮아 건들거리고 다녔다. 주머니에 손 빠르게 넣어 돈 쓰는 시늉은 어찌 그리 빼다 닮았는지 하나같이. 다른 사람이 돈 내는 꼴은 못 본다. 돈 먼저 내는 놈이 잘난 놈이라고 생각하는지, 나 원 참. 그 꼴 보는 내 심정은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더라. 손톱 밑이 여물도록 살았는데 내 고생을 자식들은 아무도 모른다.재산을 억척같이 끌어모은 것은 이유가 있다. 천석꾼 만석꾼이 되어서 아베한테 복수하고 싶었지. 아들만이 집안의 대를 이어가고 가문을 빛낸다는 것은 오산이다. 아베의 아들인 '허씨' 성을 가진 동생들이 내 돈을 빌려갔지만, 꿀꺽 삼킨 것도 제법 있다. 나는 치마를 둘러 여자이지 남자가 하는 일은 모두 해내었다. 사람들이 나더러 여장부라고 하더라. 신랑도 데데하게 놀면 한마디로 매조졌다."달고 있으면 뭐 하노, 남자 행실을 제대로 하시오!"하고 호령을 했다.산을 하나 넘으면 강이 나오고 그 강 건너면 또 더 큰 산을 넘어야 하고, 한고비 두 고비 겪어낸 세상살이 고달팠다. 나도 어지간 하제. 왜정시대를 살아냈고, 광복과 6.25동란을 거치며 시대의 격랑을 다 헤쳐 나왔다. 까막눈이 한이 되었기 때문에 기를 쓰고 옆 가지에서 싹이 턴 자식까지 모두 고등교육을 시켰다.옛날에 우리 집이 대봉동 미군 부대 곁에 있었다. 영어를 배운 첫째와 둘째가 미군 부대에 취직해서 우리 집에는 미제물건이 풍족했다. 그것도 은근히 자랑스럽더라. 아마 좀 우쭐거리기도 했을 것이다. 햄, 커피, 맥주. 꼬부랑글자가 적힌 상품을 대청마루에 있는 자개 찬장에 넣어놓고 좋아했지. 냉장고가 많이 없던 시절에 도시바 냉장고가 우리 집에 있었다. 사람들이 부러워했지. 못 배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돈 자랑밖에 할 수 없더구나.자식 여덟 키우는 동안 내 속을 제일 많이 긁은 자식이 일곱째 네 신랑이다. 내 복사뼈가 왜 이리 딱딱하고 굳은살 박인 줄 말해줄까. 그놈은 나가면 사고를 쳤다. 누구를 두들겨 패든지, 야간통행 금지에 걸려 파출소에 있든지. 하이고 몸서리난다.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면 또 우리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릎 꿇고 성모님께 기도했다. 아무 일 없게 해달라고, 우리 아들 지켜달라면서 등짝에 땀이 물처럼 흘러내릴 때까지 온 힘을 다해 기도했다.〈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논픽션 '분이' 4편은 다음주 목요일(29일)에 게재합니다.〉

2021-07-22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노인 보호 구역' - 이명희(필명 이희명)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노인 보호 구역' - 이명희(필명 이희명)

노인 보호 구역 - 이명희 (필명 이희명) 미군부대 뒷길눈 감아도 보이는 크고 붉은 글씨'노인보호구역' 낙엽이 그 길을 걷고 있다 몸 반쪽에는 이미 겨울이 와 버린가랑잎 같은 한 목숨이 흘림체로 걷고 있다물고기가 지느러미를 흔들어 물속 길을 찾듯뻣뻣한 팔로 허공에 노를 저으며물풀 같은 그림자 따라 걷는다 체본 없이 완성한 그의 글씨체벼루도 먹도 없어맨몸으로 길바닥에 쓸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력서 깊게 팬 이랑마다 수북이 쌓인 낙엽걸음걸음 굽은 그림자유서 같은 긴 편지를 쓰면서 간다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당신의 빈자리' - 홍영수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당신의 빈자리' - 홍영수

당신의 빈자리 - 홍영수 냉기를 머금은 침대 하나하얀 시트 위에 적막함이 누워있다.깊게 파인 육순의 자국 위에 귀를 기울이니떠나지 못한 당신의 심장 소리 여전히 들려오는 듯창문 틈새로, 바람을 안고 들어온차가운 체온이 침대 위에 눕는다.온기 없는 온기가 따스하다.숨소리 잃은 베개를 당겨 안으니한숨에 실린 베갯잇이 긴 한숨을 짓고메말랐던 눈물 자국이 촉촉한 눈물을 흘린다.한 생이 저물기 전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이제야 당신의 고단했단 삶의 한 자락을 휘감으니따스한 그림자로 가만히 다가와타오른 그리움의 내 가슴을 감싸준다.당신은 알고 있을까.움푹 들어간 베갯속의 허전함을아직도 세탁하지 않은 침대보에 스며든 고단한 숨소리를곁에 없어 더 사랑하게 되는이 절절한 모순 앞에나의 심장에서 잊혀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과당신의 기억 속에 내가 지워지는 두려움을꽉 찬 공허의 그리움으로동살 잡히는 새벽녘까지당신으로 하얗게 지새운 밤이다.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두부를 말하다' - 피귀자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두부를 말하다' - 피귀자

두부를 말하다 - 피귀자 순종적인 나는 뼈가 없어 칼도 두렵지 않죠 상처를 잊는 법을 알고 있어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죠 자존심의 각에 따라 모서리가 생겨나도심장만큼은 물컹하죠 바깥에서 바라본 중심은 아득하지만굳이 나를 고집하려 하지 않아서들러리와 어울려 맛을 내죠 바스러진 꽃 스미고 뭉쳐 몽글몽글해진 하얀 살갗비로소 당신 살과 피가 되고 싶죠 뜨겁게 쥐어 짜인 기억마저 노래하는 칼날에 잘려지죠 토막처지는 내 삶의 어설픈 구간은맷돌의 어처구니를 돌린 당신의 방식이죠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만남' - 박인숙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만남' - 박인숙

만남 – 박인숙 그것은 꿰매는 일너와 내가 등 기대고 하는 바느질이다.시침이든 홈질이든 박음질이든촘촘하든 듬성듬성하든 시침으로 만났다 헤어진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홈질로 만나 가끔씩소식 오가는 친구들 이제는 헤지고 바래고 찢어졌지만결코 뜯어지지 않은 당신과의 만남은박음질일까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다는사랑의 실로 꿰매졌을까, 아님무연히 질기기만 한 애증의 실고래 심줄로 만들었다는신유실로 꿰매졌을까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말이 가는 길' - 김만옥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말이 가는 길' - 김만옥

말이 가는 길 - 김만옥 앞에서 하는 말만 듣고 살았습니다앞에서 하는 말만 들어도 이렇게 힘든데뒤에서 하는 말은 얼마나 아팠을까요저 나무 저리도 굽어진 이유가들을 수 없는 말을 듣기 위해 생을 구부린 걸까요힘든 말 견디느라 세월 따라 구부려진 걸까요나에게 가장 먼 곳은 등 뒤였지요늘 함께한다 생각했지만언제나 몇 보 혹은 서너 걸음 뒤쳐져왔다는 것을어긋난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색깔 있는 말들을 받아먹으며 알았어요살면서 또 나를가장 낯설게 하는 것은 거울이었어요틈만 나면 바라보면서도유리 밑에 깔린 미소는 찾아보지 못했으니까요거울을 뚫을 수 있는 말은 없더라구요거짓도 진실도 아닌 현실그 현실의 벽에 매번 반사되고 말았으니거울 속에 있는 난 외톨이가 될 수밖에요거울도 등 뒤는 비춰보지 못하더라구요말이란 생을 조곤조곤 되짚어 가는 일인데도말(言)이 가는 길에는 곧잘 피멍이 들기도 해요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부문 '개구리 무름' - 박노욱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부문 '개구리 무름' - 박노욱

나는 잠이 많은 편이다. 집안 내력이고 어머니가 으뜸이었다. 손자를 등에 업고 재우다 방바닥에 엎드려 손자보다 먼저 잠든 어머니 모습은 자주 보는 광경이었다. 팔순에 접어든 누님도 잠이 많아졌다고 하소연한다. 가히 잠보집안이다.닮은꼴이 있다. 농장 구석에 두 평쯤 연못을 만들고 미꾸라지를 넣었는데 온데간데없다. 미꾸라지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다닌다는 옛말이 사실이었던가. 대신 개구리천국이 되어있다. 비단개구리인데 이 녀석들이 잠이 많다.연못바닥에 까맣게 깔려있던 알집이 도롱뇽인 줄 알았는데 비단개구리였다. 덩치가 큰 참개구리는 다 자라면 인근 풀숲이나 제법 먼 거리로 행동반경을 넓히지만 비단개구리는 그렇지 않다. 밤낮으로 연못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참개구리처럼 밤새울지 않는 건 다행이다.비단개구리는 떠들고 노는 것보다 잠자는 시간이 더 많다. 이른 아침 연못 가장자리에 턱을 걸치고 있는 무리는 대부분 수면 상태다. 아침잠이 적은 참개구리가 텀벙대며 이들을 깨운다. 작고 날렵한 몸매를 하고도 참개구리보다 굼뜨다. 해가 중천에 걸린 대낮에도 수면 위에 큰대자로 널브러져 있는데 자세가 좀 이상하다. 콧구멍이 달린 머리는 물 밖으로 나와 있다. 앞다리 두 개는 수면과 수평으로 떠 있고 뒷다리는 물풀처럼 가라앉아있다. 헤엄치는 모습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눈까풀주름이 눈을 덮고 있다.중고등학교 때 기차통학을 했다. 새벽밥을 먹고 십여 리나 되는 역으로 달린다. 어머니는 더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그날도 화들짝 밥을 먹고 숨이 차도록 달리는 중이다. 아까 무름을 먹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촉과 맛이 떠오른다. 고추나 가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밀가루에 반죽하여 밥솥에 쪄서 간장에 찍거나 살짝 버무려 먹는 반찬이 무름이다. 몇 차례 경험으로 어슴푸레 느낌이 오지만 달음박질하는 터라 대부분 금방 까먹는다. 오늘따라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답이 나왔다. 고기 맛이 돌았고 씹힌 것은 분명 뼈였다. 고기가 왜 거기서 나왔을까.전기가 없을 때였다. 어머니는 깜깜한 새벽에 뒤뜰 우물물로 아침을 지었다. 면서기를 하던 이웃 집안아저씨 우물은 깊었는데 우리 집은 그렇지 못했다. 비라도 내리면 우물가에 앉아 바가지로 물을 뜰 정도로 턱이 낮다보니 개구리가 많이 찾아들었다. 뭍보다 물을 좋아하는 비단개구리들이다.어머니는 잠자기 전에 반찬거리를 준비했다. 풋고추는 통으로, 가지는 보드라운 것으로 골라 새끼손가락 크기로 자른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소쿠리에 담아 우물가에 둔다. 새벽에 물을 길어 한 번 헹구고 부뚜막으로 옮겨 밀가루에 버무리는데 이때 비단개구리가 함께 들어간다. 간밤에 녀석이 제 발로 소쿠리에 찾아들었거나, 잠이 덜 깬 상태로 두레박에 실려올라온 것이다.잘 때는 업고가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바가지에 담겨 엎치락뒤치락 밀가루 범벅을 당하는 와중에도 눈만 껌벅거린다. 진득한 밀가루를 온통 뒤집어쓰니 눈까풀이 더 무거워진다. 삼베에 얹혀 밥솥으로 들어가면 포근한 게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아궁이에 불이 지펴진다.한 입에 딱 맞다. 고추나 가지토막과 덩치뿐 아니라 생김새도 비슷하다. 연못에서 큰대자로 늘어지게 놀다가도 무름이 될 때는 몸통을 사이에 두고 앞 뒷다리를 일자로 뻗는다. 거기다 희미한 호롱불 아래 허겁지겁 먹다보니 개구리를 골라내기는 불가능하다.아직도 개구리 무름이 궁금하다. 어머니 생전에 한 번 물어볼까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의 단백질 보충을 위해 개구리 반찬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다. 어쨌든 나는 몸에 좋다는 개구리반찬을 가끔 먹었다.상수도가 들어오면서 고향집 우물이 사라졌다. 그래도 샘터인지라 지금도 실핏줄마냥 흐르는 물로 조그마한 둠벙 모습을 하고 있다. 채소밭에 물을 주거나 허드렛물로 쓴다. 샘은 용도가 없어져도 완전히 메꾸지 않는 풍습이 있다.지난번 벌초 때 비단개구리를 만났다. 그 둠벙에서다. 반세기가 넘도록 우물터에서 대를 이어온 비단개구리를 보니 어머니를 만난 듯 반가웠다. 동생과 조카들을 물리치고 어머니 산소는 내가 예초기를 잡았다. '어머니, 그때 개구리 무름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초기 소음에 어머니가 듣지 못한 것 같다.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부문 '귀명창' - 정연원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부문 '귀명창' - 정연원

판소리에는 귀명창이 있다. 귀명창에는 추임새가 날고 있다.판소리 공연장에 갔다. 그곳에서 귀명창을 만났다. 부채를 쥔 소리꾼과 북과 북채를 쥔 고수(鼓手) 뿐인 단촐한 무대다. 고수가 엇! 기합 소리를 내며 북채로 타당 탁, 북을 치자, 소리꾼이 춘향가의 쑥대머리 대목을 시작한다. '그때 춘향이는 옥중에서 머리를 풀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설인 아니리를 한다. 다시 고수가 엇! 타당 탁, 북을 치면 소리꾼은 '쑥대머리~' 하며 본격적인 창으로 들어간다. 고수는 시작이나 변화, 음절마다 박을 치며 '얼씨구' '잘한다.' '좋다' 등 추임세로 소리꾼의 목을 풀고 흥을 불러낸다. 소리꾼의 창과 고수의 추임새에 몸짓의 발림이 어우러지면 조용하던 관중석이 소란해진다. 판소리를 들을 줄 아는 관중이 고수와 같은 추임새를 터트리며 연주회장의 분위기를 띄운다.추임새를 하며 어울리는 관중들이 귀명창이었다. 일반적인 음악예술의 공연장에서 관중인 청자(聽者)와는 다른 관중이다. 판소리의 관중은 전문 소리꾼과 고수의 연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단출한 연주를 귀명창의 추임세가 흥을 불러내어 큰 마당을 이루게 하는 연주의 구성 요소가 된다. 이로서 판소리의 소리꾼을 명창이라 부르듯 청자를 넘어선 듣는 자를 '귀가 명창'이라는 뜻으로 귀명창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부르는 자와 같이 듣는 자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작명은 탁월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관중을 연주자 처럼 높여 부르는 곳은 우리의 판소리뿐이다.판소리의 소리꾼은 득음(得音)을 한다. 고수는 박(拍)을 이루어야 하고 관중은 지음(知音) 즉 귀명창이 되어야 한다. 셋이 어울려 만드는 음악이 판소리다. 명창은 득음을 위해 깊은 산속이나 폭포수 아래에서 목을 다듬어 앞섶이 몇 번이나 붉게 물든다. 고수는 박은 물론 변화와 전체를 헤아리는 반주자와 지휘자 역할을 익힌다. 귀명창은 지음을 위해 구조며 역사를 막론하고 듣기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중국 전국 시대 현금의 달인인 백아(伯牙)는 자기의 연주를 듣고 알아주던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크게 슬퍼하며 현금의 줄을 끊었다. '나의 연주를 알아주는 종자기도 없는데 연주는 해서 무엇 하랴.'라는 지음의 우정이 담긴 귀명창의 고사가 전한다. 이처럼 자기의 연주를 제대로 들어주는 귀명창은 연주자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후원자며 보호자이다. 무대 위의 예술인은 관중의 박수를 먹고 산다고 하지 않는가. 이처럼 관중은 나무를 키워내는 흙이나 물과 같은 존재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이해하는 종자기 같은 친구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한때 터무니없는 헛소문에 휘둘려 화를 참고 있을 때다. 평소 아껴주던 선배가 자초지종을 듣고 싶다며 자기 집으로 초대였다. 술잔을 나눴다. 술잔이 비면 채워주고 안주를 만들어내었다.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쯧쯧' '그래서' '괜찮아' 등의 동의를 하면서 들어주었다. 이런 동의와 격려가 나의 억울한 이야기를 쏟아내게 했다. 그때의 내가 소리꾼이라면 선배와 형수님은 고수며 귀명창이었다. 술병이 쌓이는 만큼 마음은 비워지고 가벼워졌다. 다행히 그 선배가 나서서 음해를 밝히고 오해가 풀린 일이었다. 처음 선배 집에 갈 때는 몸과 마음이 비틀거렸지만, 집에 들어설 때는 추임새의 날개짓과 취흥으로 비틀거렸다. 귀명창은 경청보다 적극적인 소통이고 나눔이었다.판소리는 오페라와 비교된다. 오페라 반주를 맡은 관현악단과 지휘자가 고수라면 창은 아리아(Aria)이고 아니리는 이야기풍의 노래 레시타티보(recitativo)이다. 발림은 가수들의 무대 연기와 조명 춤사위를 나타낸다. 이에 비해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이 수많은 오페라 출연자의 역할을 하는 일인다역이다. 오페라의 다양한 무대장치와 화려한 의상에 비해 판소리는 돗자리 하나 바닥에 깔고 병풍 하나면 족하다. 선비차림에 쾌자(快子)를 걸치거나 한복차림의 명창 의상은 어디서나 어울릴 수 있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음악 유산이다. 오페라의 관중은 대부분 귀족이나 부유층이었다. 초기에는 극 중의 유명한 아리아가 나오면 앙코르를 외치며 몇 번이고 같은 노래를 부르게 하여 피곤하고 시간을 지체시켰다. 판소리의 관중은 그 마을의 양반이나 부잣집 뜰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마을 사람 모두가 관중이 되어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는다. 소리가 시작되면 주인장은 물론 누구나 추임새로 소리꾼의 흥을 불러내어 즐기는 한마당을 이뤘다.판소리 춘향가 완창 공연에 참석했다. 연주가 5시간이 넘었다. 명창이 여자 분이어서 장면마다 옷을 갈아입을 때가 쉬는 시간이고 중간에 잠시 시간이 주어졌다. 오래 쉬면 명창의 흐름이 끊어지기 때문이리라. 고수는 번갈아 가면서 함께한다. 소리꾼의 긴 시간을 견뎌내는 체력과 인내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추임새를 하면서 호응하는 귀명창이 없다면 완창을 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귀명창은 명창과 고비마다 정을 나누며 함께하는 부부와 같은 관계였다. 귀명창이라는 이름도 아마 여기에서 연유한 것 같다.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전라도 땅에 들어서 들녘에 일하는 농부를 보고 농부가를 부른다. 판소리에서 관객이 창을 따라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비를 넘길 때마다 귀명창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농부가를 같이 부른다. 나도 한 자락 따라 했지만 울컥한다. 더구나 모인 귀명창들의 높은 수준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추임새는 칭찬의 몸짓이며 언어다. 판소리 나라에서 귀명창의 언어는 추임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그 칭찬이 추임새라 하겠다. 자라는 아이나 시름에 빠진 사람에게 격려의 추임새 한마디가 삶을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이다. 판소리에는 칭찬을 아끼거나 쉬지 않는다. 나는 처음 만난 추임새가 어색하고 서툴렀다. 칭찬과 격려와는 너무 멀리 살아온 탓일 게다. 판소리 나라의 추임새를 일상생활의 언어로 옮겨본다.사람은 누구나 연주자가 되기도 하고 관중이 되기도 한다. 스타를 만들어내는 것도 관중이고 퇴출시키는 이도 관중이다. 관중과 연주자는 서로 소통하며 하나가 된다. 연주자의 신명과 흥을 불러내어 자기의 능력을 최대로 펼치게 하는 것도 관중의 몫이었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도 주위의 활력소가 되는 귀명창의 역할에 반해 버렸다.보는 것이 사물과의 연결과 단절이라면 듣는 일은 관계의 연결과 단절이 된다. 듣는 것은 함께하는 일이고 귀명창은 마음과 흥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관심도 줄어들고 멀어지게 된다. 판소리 열두 마당이 다섯 마당으로 줄어 들었다.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등 우리의 질박한 정서가 담긴 다섯 마당이 남아있다. 격과 결이 다른 우리의 판소리가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재에 등록되었고 우리나라 무형문화제 제5호로 지정되어 보존하려고 힘쓰고 있다. 소리꾼을 명창이나 인간문화재로 아끼고 보호한다. 귀명창은 평소 판소리를 좋아하고 집중과 몰입으로 그와 공감하고 존중하는 습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판소리와 흥을 함께하는 귀명창의 이름과 역할, 의미까지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보존될 수 있을까.귀명창이 우뚝하다. 칭찬과 배려가 부족한 나와 마음이 매마른 이웃들에게 귀명창은 삶의 활력소다. 코로나 19도 그렇고 시절 정서도 그렇다. 개나리와 진달래, 단풍처럼 빠지지 않고 모두에게 귀명창의 추임새를 전하고 싶다. 나부터 생활의 마디마다 숨표나 쉼표마다 귀명창이 되어보련다.엇! 타닥 탁……!나도 모르게 '얼씨구 좋다. 그렇지, 잘한다.' 추임새가 한꺼번에 날아오른다.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부문 '마지막 선물' - 김영순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부문 '마지막 선물' - 김영순

사립문 열고 들어서면 감나무 사이로 금반지처럼 둥근 달이 떠 있는 옛집, 그 시댁이 내 추억 속에는 늘 있다. 반짝이는 달빛을 받으며 맨드라미가 장독대를 받치고 있는 집이다. 적적하고 외로운 날이면 나는 마음속에서 무작정 그 집을 찾아간다. 못다 한 사랑 남기고 떠난 시어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그 시절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아가, 한이 엄씨야."어머니는 나를 늘 다정하게 불렀다. 입담 좋은 이야기로 살기가 바빠 메마른 나의 가슴에 화사한 융단을 깔아 주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 저녁은 푹신했고 부드러웠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꽃이 피지 않았는데도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이야기꽃으로 화사했다."아가, 한이 엄씨야. 아무리 힘들어도 꾹 참고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아들의 겉을 낳지 어찌 마음대로 할 것이냐. 그래도 생긴 것 저만치 반반하니 어디를 가더라도 네 남편이라 자랑할 만하제. 안 그러냐?"불편한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칭얼대는 아이 달래듯 토닥여 주었다.어머니와의 인연은 처음과 끝이 하나인 금반지처럼 늘 아름답게 빛났다. 내 나이 21세 되던 꽃다운 시절에 그 인연은 시작되었다.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등에 막둥이를 업은 채 전라남도 고흥에서 광주로 달려왔다. 울퉁불퉁한 신작로를 오며 멀미를 하였는지 얼굴이 샛노랗게 지쳐 보였다. 나는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여리고 수줍음 많은 여대생이었다. 첫 만남에서 어머니는 나의 첫인상이 좋고 청순하게 보인다고 했다. 마치 딸에게 이야기하듯 다정한 대화가 오고 갔다. 어머니는 원래 마을에서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서 쌀을 싸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녀도 며느릿감 못 구할 거라고 동네 분들이 수근대곤 했던 분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이게 인연이라는 것일까. 그렇게 시작된 40여 년을 고부간에 별 갈등 없이 오순도순 지냈다. 어머니는 내게 닥치는 비비람을 대신 막아주며 배려해 주었다. 꽃이 향기를 만나 제 인연을 찾아가듯 나는 어머니를 만나 남편과의 인연을 결혼으로 완성시켰다. 어머니와의 사이가 유별나게 좋아 시누이들이 오히려 샘을 낼 정도였다.결혼 후 새댁 시절에 어머니는 나에게 시골 시장에 같이 가자고 하더니 색깔이 예쁜 파라솔을 선물로 사 주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나는 가는 곳마다 가지고 다니며 자랑하곤 하였다.하루는 다리미질을 하다가 어머니 저고리를 태워 먹었는데 겁에 질린 나를 오히려 다독거려 주었다. 여러 가지 음식 만드는 방법도 자상하게 알려 주었다. 늘 나에게 아들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들려주고 가문의 내력도 소상히 알려 주었다. 일요일이면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나란히 교회로 향하곤 하였다. 교회에 같이 가는 게 별것이냐 하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일생 일대의 중요한 결정과 다름없었다. 남편이 8대 종손인데도 어머니는 나의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어머니는 나와 함께 교회에 다니기 위해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골에 있는 논밭을 정리한 후 광주로 이사했다.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다짐하곤 하였다. 씨줄과 날줄처럼 어머니를 만나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비단 한 필을 짤 수 있었다.그러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재미나게 살아가는 고부간을 하늘이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어머니는 병원에 다녀오더니 자궁암이라고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해 주었다. 담담하게 병마를 받아들인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속울음 삭이며 아픔을 견디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병중에도 꿋꿋하게 가족을 위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여전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금반지처럼.긴 세월을 묵묵히 투병 생활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나를 이 세상에서 불꽃처럼 열정적으로 살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병이 깊어지면서 어머니는 입맛이 떨어지고 살이 빠져 갔다. 나는 바쁜 직장 생활과 자녀를 돌보는 주부로 힘들었지만 간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암이 말기에 이르러서는 좋아하는 과일도 생선도 보기 싫다고 했다. 죽을 쑤어 떠 넣어 드려도 입을 다물고 거절했다. 웃자란 아쉬움만 나의 삶을 온통 휘젓고 있었다. 슬픔을 떼어 놓고 담담한 얼굴로 어머니를 대해야겠다는 다짐만 수없이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69세 되던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조용히 나를 불렀다. 방안은 여기 저기 약봉지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암과의 마지막 결투를 벌이는 격전장처럼 어지러웠다. 곱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퀭한 눈은 더 움푹 들어가 있었다. 수척해진 모습에 기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무심한 별들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창에 비친 달빛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아가, 한이 엄씨야, 아무래도 내 수명이 다한 것 같다. 그동안 어려운 살림 꾸려 나가고 손주 셋 잘 길러 주어서 고맙다. 성질 급한 내 아들이지만 네 남편이니 사랑하고 잘 살거라. 부탁한다."평소와는 달리 호흡이 가빠지고 무척 힘들어 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어머니!"나는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펑펑 소리내어 통곡했다.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어 뜰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두고 갈 한 생이 안타까워서 울고 나는 먼저 갈 한 생이 안타까워서 울었다."그만 울거라.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 이거 받아라."깡마른 손으로 나의 옷깃을 잡은 어머니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선물을 건네준 어머니의 몸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무정한 밤바람만 야속하게 불어왔다. 하얀 종이에 싼 조그마한 선물을 조심스레 펴보니 금니 세 개와 어머니의 세월처럼 닳아진 금반지가 있었다. 금반지는 어머니의 병과는 무관하게 반짝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영원히 곁에서 나를 지켜줄 듯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금반지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어떠한 유산보다도 귀한 선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그 금붙이는 녹여서 금반지와 목걸이로 만들어 내 몸에 지니고 다녔다. 어머니가 언제나 나와 함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어머니는 아들 대학교육 시킬 때 미역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행상을 다녔다. 물려줄 재산이 없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을 부끄럽게 여기며 하소연하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물기 하나 없는 푸석푸석한 숨소리가 삭고 삭아 어머니는 깡말라 있었다. 섧게 섧게 울음 울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신 어머니. 너울너울 나비처럼 날아가 버린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가끔 보인다.금반지처럼 둥근 달이 감나무 사이로 떠오르고 있다. 금테를 두른 감나무가 환하다. 한이 엄씨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는 듯하다. 손에 낀 금반지가 반짝거린다. 어머니가 감싸주고 있는 듯 포근하다.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부문 '은색 비늘 같은 강의 기억' - 이상열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부문 '은색 비늘 같은 강의 기억' - 이상열

먼 산자락을 휘감은 물안개가 서서히 옅어지며 강은 아침을 맞는다. 물결은 잔잔하게 흐르고 이따금 가마우지에 쫒긴 물고기들이 강물 위로 튀어 올랐다가 잽싸게 달아난다. 고기잡이 배 위에 백로 한 마리 하염없이 홀로 서 있다.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부의 손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녀석이 애처로이 고개 떨구면 어부는 못이긴 척, 작은 고기 서너 마리를 던져준다. 백로는 긴 목을 주억거리며 단번에 물고기를 집어 삼킨다. 나른한 강 수면에 비친 백로의 모습이 어인일로 낯이 익다. 요즘 나는 부쩍 시간을 잊은 채 세상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잦다.여름이면 나와 아버지는 서로를 찾으면서 눈을 맞추기 바빴다. 집 근처의 금강으로 투망 메고 고기 잡으러 가고 싶기 때문이었다. 누가 더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도 나만큼이나 고기잡이를 즐겼다. 아버지가 투망을 던지고 나는 어망 들고 따라다니면서 잡힌 고기를 들쳐 내고 담는 역할을 했다. 등짝이 따끔거릴 정도로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타원형을 그리며 투망을 던지는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아버지가 그물을 감아 잡고 물가로 나올 때는 어떤 놈들이 걸려있을까, 항상 궁금했다. 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파닥거리는 물고기의 하얀 비늘이 손바닥에 묻어 미끈거려도 그저 좋았다. 가슴은 들리고 콧구멍은 벙싯거리면서 입으로는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강 밑바닥에 큰 돌이 많을 경우에는 아버지는 그물을 잡고 계시고 나는 물에 들어가서 그물 아래를 누르며 돌을 피해 살살 걷었다. 우린 환상의 콤비였다. 물고기들이 도망가려고 정신없이 맴돌다가, 그물이 들리는 틈사이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내 손에 부딪치기라도 하면 아예 강 밑바닥으로 파고들었다. 그물을 들어 올리면 주렁주렁 물고기들이 매달려 나왔다. 피라미, 가라지, 마지, 동사리, 치러, 모래무지, 꺽지, 빠가사리, 메기, 돌고기 등 종류도 다양했다. 손 안에서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엄지와 검지로 눌러서 배를 따고 내장과 부레를 꺼낸 다음, 물에 휘휘 헹궈 양념고추장에 푹 찍어서 입안으로 날름 넣으면 촉감과 미각과 청각이 다 동원 되어 황홀하였다. 힘 좋은 놈들은 그 순간에도 고추장 묻은 몸을 틀어대며 요동치는 바람에 입 언저리를 빨갛게 물들여놓곤 하였다.친구 같던 아버지가 내 곁을 떠난 것은 내가 입대해서 근무 중이던 한 겨울의 일이었다. 위독하다는 관보를 받고 급히 기차를 타고 가는데 창밖으로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겼다. 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를 다시 뵐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지난 기억들이 아련해졌다.추운 겨울에 군대에 보내놓은 큰 아들 생각이 나서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없다고 불도 안 때고 자려 해서 어머니를 울리셨다. 또 경찰서 의경 숙소에 찾아가 히터를 모든 내무반에 설치해 주시며, 이렇게 하면 내 아들도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지 않겠냐고 좋아하셨다고 한다.아버지의 부재는 내게 깊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도록 마음의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동생을 파트너 삼아 아버지의 투망을 고향집 마당에 던지며 연습을 해 보아도 매번 반 정도 밖에는 펴지지 않았다. 서툰 솜씨로 강가에 가서 여러 번 그물을 던져봤지만, 빈 어망과 빈 가슴만 쓸어 담고 집으로 터덜거리며 돌아오기를 얼마나 많이 했던가. 그래서 다음에는 어항을 들고 강으로 나가 작은 피라미들을 잡아 튀김을 하고 어죽을 끓이기도 했다. 여름이면 얼마나 자주 강가에 가서 살았는지, 지금은 큰딸이 어항기술자로 성장하여 나보다 물고기를 더 잘 잡는다.어느새 백로는 어부로부터 서너 차례 더 물고기를 얻어먹는다. 아마 거의 십 분마다 한 번씩 먹이를 던져주는 어부의 마음이 고마워서 고기잡이배를 떠나지 못하나 보다. 하도 오랫동안 강 쪽으로 목을 빼고 바라보느라, 나도 백로처럼 길어진 목을 주억거린다. 프로답게 어부의 손길은 재빠르다. 그물을 건져내는 솜씨가 익숙한 장인답다. 잘박잘박 소리 내며 강의 기억을 길어 올리는 그물코마다 은색 비늘 같은 싱싱한 시간들이 매달린다.물안개가 말끔하게 걷히고 아침 해가 비친다. 구부정한 등으로 눈부신 해를 안고 그물을 던지는 아버지 모습이 부챗살처럼 강물에 퍼져나가고 있다. 상념에 젖어 강을 바라보다 흠칫 놀란다. 아버지가 손짓을 한다. 내내 물음표로 서있던 백로는 기다란 목을 끄덕인다. 배가 강을 헤치고 나아간다. 고깃배 난간에 앉은 백로의 눈에 설핏 강물이 흐른다.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부문 '조팝꽃' - 김춘기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부문 '조팝꽃' - 김춘기

강 둔치는 온통 꽃밭이다. 시민의 정서를 배려해 만든 화단에는 튤립과 수선화가 줄지어 앉았고 그 둘레를 따라 조팝꽃이 띠를 이루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셔터를 눌러댄다. 눈은 여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있으면서 머리로는 조팝꽃에 대한 팍팍한 기억과 보호받지 못한 그분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서 몹쓸 병마로 서러운 생을 살다간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다.여섯 살 어림의 봄이다. 진달래가 진 고향마을 산야는 조팝나무가 점령했다. 긴 가지에 자잘한 꽃송이가 닥지닥지 붙은 꽃나무가 밭둑이나 산기슭에 지천으로 깔렸다. 꽃 모양이 튀긴 좁쌀 같다 하여 좁쌀밥나무 즉 조팝나무라 부른다. 가까이에서 보면 좁쌀처럼 까슬까슬한 식감으로 다가온다. 입안에 넣으며 푸석해서 목구멍으로 쉬 넘어가지 않는 조밥이 된다.봄날은 나른하고 입맛을 잃기 쉬운 계절이다. 윤기 흐르는 쌀밥이라면 모를까 보리에 좁쌀을 섞어 지은 조밥은 작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잘 먹지 못해 볼에 마름 버짐이 피어오를 때 쯤 조팝꽃이 수두룩하게 피어오른다. 화려함이라곤 조금도 없는, 풀 섶에 시무룩하게 핀, 조밥 닮은 흔하디흔한 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맘때 산골 아이들은 꼴을 캤다. 아직 풀이 덜 자라 낫으로 베기는 이른 계절이라 호미로 캐는 것이다. 언니는 친구들과 함께 다래끼를 메고 꼴을 캐러 나섰다. 성가시다고 집에 있으라는 언니의 말을 귓가로 흘리고 따라 붙었다. 봄날에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심심하기도 하지만 무서운 일을 겪을 수 있어서이다. 혼자 있을 때 상이용사들이나 나병환자들이 떼를 지어 들어와 동냥을 요구하면 감당하기 힘들다. 이미 겪은 일이다.1950년대 말은 나병환자들이 수용소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전국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때이다. 천형이라 생각하는 무서운 병이기에 걸리게 되면 가족 곁에 머물 수가 없다. 발병 후 얼마동안은 골방에 숨어 지낼 수 있지만 멀지 않아 이웃에게 알려지면 그때부터 마을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이 시작된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만나 집단을 이루고 양지바른 곳에서 추위를 피하다가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면 사방으로 동냥을 하며 흘러 다닌다.나병은 인육을 먹으면 낫는다고 아이를 잡아다 술밥에 쪄서 술을 만들어 먹는다는 낭설이 마을을 건너다녔다. 어느 동네 아이가 없어졌다거나 어떤 환자가 인육으로 담은 막걸리를 먹었더니 벌레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등 검증도 되지 않은 소문이 그들보다 먼저 날아왔다.우리는 강가에 이르렀다. 강 건너 풀이 많다고 언니들은 강을 건넜다. 비가 와서 강물이 불은 상태라 여섯 살짜리가 건너기에는 무리였다. 혼자 남겨진 나는 돌무더기를 쌓으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놀다가 건너다보니 언니들이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끊긴 주위는 정적이 감돌고 무서웠다. 언니를 불러대며 울고 있을 때 두런두런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나타났다.길 가던 이들이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오는 것이다. 마을 어른들이 늘 주의를 주던 말이 떠올랐다. "문둥이들이 어린 아이를 잡아가니 혼자 다니지 말라. 혹시라도 그들을 만났을 때 엿을 주겠다고 꼬이면 따라가서는 안 된다." 노상 듣던 말이다.'이 사람들이 그 무서운 문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온 몸이 곤두서고 머릿속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잡히면 술밥이 되겠다는 공포감에 강가를 거슬러 올랐다. 그들은 오라는 손짓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다가 왔다. 곧 잡힐 것 같아 강으로 뛰어 들었다.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물살이 세어 쓰러질 듯했지만 기를 쓰고 강을 건넜다. 그들은 강가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나병은 피부가 짓무르는 병이라 환자들이 물을 싫어한다던 어른들의 말이 생각났다.강폭이 넓지 않아 건너편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네댓 명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 등에 망태기를 걸머지기도 하고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도 있었다. 한 참을 노려보며 손짓을 하던 그들은 돌아섰다. 긴장했던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털썩 주저앉은 발아래에 조팝꽃이 즐비했다. 강둑은 온통 조팝꽃 천지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공간에서 만난 꽃은 눈물로 된 한 덩이 슬픔이었다. 슬픔에 묻혀 아득해진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조팝꽃은 서러움의 표상처럼 각인되었다.전쟁 직후의 나라는 가난하고 무질서했다. 나병환자만이 아니라 상이용사들도 나무로 의족을 하거나 쇠갈고리로 의수를 해서 무리지어 다녔다. 참전용사로 전쟁터에서 몸을 바친 그들에게 국가는 보상하지 못했다. 국민들도 따스한 시선을 보내지 않고 피했으니 달랠 길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허기지고 피폐해진 그들은 분노의 갈고리를 쳐들고 불만의 언어를 뱉어내던 시절이었다.산야를 덮던 조팝꽃이 공원에서 환영받게 된 변화에 위로를 느낀다. 흡사 서럽던 그날 그들이 귀한 자리에 초대받은 느낌이다. 나라가 힘이 생기니 끼니를 구걸하는 절박함에서 벗어났다.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을 공원으로 모셔 와 찬사를 보내는 달라진 세상이다. 이제는 조밥마저 별미가 된 세상이니 조팝꽃은 더 이상 서러움의 표상이 아니다. 한 많은 생을 살다간 그분들의 서러움과 분노도 이제는 풀렸으면 한다. 공원을 거니는 이들의 표정은 꽃보다 더 꽃 같다. 살만한 세상이 마냥 고맙다.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코로나19와 마주치기' - 이주희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코로나19와 마주치기' - 이주희

6학년 5반에 진급하면서 "나이를 맛있게 먹자!"는 좌우명으로 살기로 했다. 잘 나가는 듯 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는 내 평생에 1년 반을 칩거하게 만들었다. 내 노년의 꿈을 앗아가는 동시에 7학년에 편입시켜 버렸다. 초기 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메르스'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단순하게생각했지만 어부부하는 사이에 온 세계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고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을 옥죄며, 생명을 노리고 있다. 나이를 맛있게 먹으려 다짐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그 원하지 않았던 박탈감을 이 기회에 토로하고 싶다. 〈시니어 기자〉 10년 전 6학년에 진입하면서 1모작을 불만족스럽게 끝내고, 2모작은 모 연수원을 위탁받아 성공적(?)으로 운영하다가 5년 만에 퇴직했다. 쌈박한 3모작 꺼리를 헌팅 하고 싶었다. 전공 관련 월간 잡지사의 책임자로 초빙을 제의 받았지만 휴대폰이 잡지를 밀어내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그쪽에서 기대하는 것과 나의 역량에 비추어 볼 때 거리감이 느껴져 고사했다.인터넷을 밤낮으로 서핑 한 결과 은퇴한 사람들의 활동영역은 생각보다는 좁지는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 같은 이른바 어르신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영역은 취미활동, 학습활동, 봉사활동, 자유여행, 용돈 벌기 등을 확인하였다. 분석 끝에 일단 '부부동반 자유여행'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중국어를, 아내는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결국 2년만인 6학년 7반과 8반인 2018~19년에 걸쳐 중국 자유여행을 부부동반으로 30일씩 네 번 다녀왔다. 나름 뿌듯했고 다양한 자연자원과 문화유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성취감에 도취된 나머지 6학년 9반이 되는 2020년에, 두 번 더 중국 자유여행하면 명실상부한 중국여행 통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친김에 중국여행 경험과 에피소드를 책으로 엮어 7학년 기념으로 출판할 생각을 마음먹고 있었는데 느닷없는 가 우리 부부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붙들지 못하고 누에고치처럼 칩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맛없는 나이만 마시고 먹느라고, 그동안 꼬박꼬박 모아놓은 자유여행비를 야금야금 까먹고 있을 뿐이었다. 6학년7반 그러니까 2018년 연초. 3모작으로 '배낭 여비라도 벌자'는 영양가가 넘치는 생각이 나를 부추겼다.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여 터득한 나만의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배낭여행을 떠날 여비를 벌어 저축할 수 있다면 일거양득이 아니랴!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거리를 찾으러 인터넷에서 5대양 6대주를 걷고 헤엄치며 누볐다.그 과정에서 XX구 문화원에서 '시니어 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내 눈에 포착되었다. 기자란 기사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거리의 하나라고 생각되었다. 누군가 내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책 읽기와 글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책읽기'라는 선행투자를 통해서 여물게 된 나의 '글쓰기' 취미는 나에 대한 아내의 불만 사항 1호로 찍혀 있다. 눈뜨고 숨 쉬는 시간의 3분의 1 이상을 글쓰기에 매달려 살아왔기 때문이다. 원고 청탁을 받으면 결코 거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메뚜기도 한 철'이듯, '원고 수탁도 한 철'이라고 생각했다. 직장 생활을 국책연구원에서 시작하여 교수로 직장을 퇴직할 때까지 반평생을 '원고의 노예'로 살았다. 내가 쓴 원고들을 한 장씩 한 줄로 이어 간다면 몇 킬로쯤 될까? 저작물의 총 쪽수로 벽돌 쌓기를 한다면 내 키를 훌쩍 넘을 것 같아서 흐뭇하기도 하지만, 이 풍진 세상에 적잖은 쓰레기를 보탠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다. 지난 40년을 '원고의 노예'로 지내다 보니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즐거움이나 여유로움 따위와는 담을 쌓고 살아야 했다. 방학 때마다 한 달 이상 배낭여행을 나가는 역마살이 낀 아내가 수차 동반 배낭여행을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밀린 청탁이나 용역 원고 때문에 '딴죽'을 걸고 방콕하면서 원고 채우기에 매진했다. 아내는 나더러 글쓰기를 포기하고 '아내의 노예'로 변신해주기를 주문했지만 얼렁뚱땅 아내의 소망을 팽개치는 상습범이 되고 말았다."미안해 여보야! 이번만 친구랑 배낭여행을 다녀와요. 요다음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같이 여행 갈게"아내에게 '여행 약속어음'을 발행하고 그때마다 부도를 내니 아내는 나를 '신용불량자'의 빨강 딱지를 붙여버렸다. 나는 학계에서 수여하는 논문상과 저작상과 공로상등 몇몇 개의 상을 수상할 수 있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들 시상식장에서 수상 소감을 피력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을 품은 헌사(獻詞)를 잊지 않았다. 책을 펴낼 때는 서문에서 여느 작가들처럼 아내에게 사사문(謝辭文)을 한 줄 끼워 넣어 아내를 위로했다."…이 자리를 빌려 나를 '원고의 노예'로 방치해준 아내에게 무한 감사드린다."든가,"…이 책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친다."는 등등.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나에게 면죄부를 주기는커녕 바가지가 넘치는 핀잔과 야유를 쏟아냈다."피~ 맨날 똑같은 소리! 진심이라면 제발 자기가 쓴 책을 나에게만은 바치지 말아요! 잘 팔리지도 않는 당신의 책들은 우리 부부를 이간시키는 애물단지에 불과하거든요. 내가 원하는 것은 앞으로 당신이 '원고의 노예' 말고 '아내의 노예'로 살았으면 정말 좋겠어요."아내의 가슴에는 분서갱유의 진시황 마귀가 씌웠는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자치구에서 개최되는 문화행사를 취재해서 계간인 문화원 기관지와 월간인 자치구청 홍보신문에 싣는 일이 '시니어 기자'의 할 일이란다. 시니어 기자가 되고 싶은 어르신은 ① XX문화원 지원서(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② 이력서 ④ 경력증명서 ⑤ 자기소개서 ⑥ 문화예술 관련 기획 콘텐츠(기사 또는 영상제작 1편) ⑦ 에세이 1편(A4 2매 내외, 기 발표된 원고도 무방함)을 제출하라고 알렸다. 기자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까다롭고 복잡한 조건을 내거는 것은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좀 과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제출서류에 국세 및 지방세 완납증명서나 지도교수 추천서까지 요구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했다.3일 동안 공고문에 나열한 제출서류를 모으고 작성했다. 글쓰기가 취미이고 전공에 관련된 3개 잡지에 편집위원을 역임한 경력에다 그동안 쓴 글의 목록을 제시하고, 응모 동기를 거창하게 작문했지만, 자기소개서는 격식을 파괴하여 다음과 같이 세 문장으로 작성하여 제출했다. "어르신이라는 소리 안 듣고 싶어 입은 닫고 귀를 열고 살다보니, 눈칫밥과 나이만 맛도 모른 채 포식하고 지냅니다. 맥락 없는 자기 자랑, 잇단 실수의 방패로 쓰곤 했던 나이 타령, 과도한 건강 염려 따위는 화제로 삼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건망증 때문에 자주 탈선합니다. 올해 중국으로 두 달간 부부 배낭여행을 준비하며 여비를 마련하는 길을 찾고 있는 천하제일의 백수랍니다." 꿩 먹고 알 먹는 라는 자리를 탐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나에게 라는 지식 산업의 역군으로 기회를 준다면 천만다행이었다. 설령 기회를 안 준다 해도 아내와 나 사이에 식어버린 애정을 데우기 위해서 '부부동반 배낭여행'을 떠나면 된다는 배수진을 치고 응모했다. 3일 후에 이 메일로 서류심사 합격통지와 함께 면접시험 시간과 장소를 통보해왔다. 30년 만에 모처럼 받아보는 1차 서류심사 합격 통지라서 마음이 뿌듯했다.면접장 대기실에는 시간에 맞추어 나온 응모자는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었다. 어르신 여사 한 명과 노신사와 나. 세 명을 뽑는데 세 명의 응모자가 서류심사에 합격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전원 합격인 모집에 응모서류를 너무 진지하게 작성한 내가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통성명하고 악수를 하는 순간부터 상대방을 간보기 시작했다. 앞에 앉은 할매와 할배는 이미 이 방면에 이력이 화려하고 빠삭한 사람들 같았다. 내가 이들과 함께 장돌뱅이 대열에 끼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왠지 켕기기도 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그 시간대에 참석한 후보가 세 명일 뿐이고, 전체적으로는 21명을 시간대 별로 분산시켜 면접을 보게 배려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무려 다섯 명의 면접관이 '시니어 기자직' 나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들의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지… 명패에 신분을 밝혀 투명성을 강조하려는 조치가 아닐까 싶어 퍽이나 이채롭다. 세 사람은 문화예술 관련 교수들로서 나랑 친분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지만 매스컴을 자주 타는 유명 인사들이었다. 6학년 8반까지 이 지역에서 40여년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나를 알아보는 면접관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면접은 5년 전에 모 정당의 중앙당사에서 면접관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한 국회의원 후보 공천 심사를 위한 면접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자기소개 1분, 지원동기 30초, 타이머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예상문제였지만 응모서류에 기재되어 있는 사항을 묻는 것은 결례가 아닌가? 5학년생들이 6학년생 어르신께 질문의 화살을 거침없이 쏘아대기 시작했다.일등 자치구의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를 골탕 먹이려는 질문이라고 면접관에게 내 본성이 감추지 못하고 일침을 놓을까 말까? 자치구 문화원장에 응모한 사람들에게나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냐고 따질 뻔 했다. 서울역 노숙자에게 왜 소주를 안마시고 맥주를 마시냐며 시비를 거는 것만큼이나 맥락 없는 질문 아닌가? 나는 문화원장을 응모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다만, 시니어 기자로 뽑아주면 구청이나 문화원이 펼치는 문화·예술 사업에 대한 뉴스나 리뷰를 구민들에게 정직하게 전달하는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15분간 면접은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며칠 후 위촉식장에서 예쁘고 경륜이 넘쳐 보이는 여자 문화원장은 우리 세 사람에게 서류심사까지 포함하여 70대 1의 경쟁을 물리친 어르신들을 모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라고 말했다. 위촉장을 건네주고는 차례차례 카메라를 향하여 포즈를 취하는 순서로 진행했다. 사무국 직원들은 기자증과 명함, 기자가 할 일을 메모한 서류가 들어 있는 봉투를 세 사람의 '시니어 기자'에게 건네주었다. 문화예술회관 공연 관람에 자동으로 초대되는 특전과 구내식당을 유료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 등등. 앞으로 1년간 기자로 재직할 수 있으며 성과가 좋으면 1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특전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공간, 즉, 기자실이 따로 없으니 재택근무를 하면서 기사를 쓰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실망 모드로 추락하고 말았다. 사무실도 없는 일 년짜리 '시니어 기자'를 뽑는데 요구하는 방대한 서류를 준비하고 까다로운 면접 절차를 꼬박꼬박 성실하게 대응한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재택근무자를 뽑는 일련의 절차와 격식이 너무 관료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기에 은퇴 달인들이 나에게 간접적으로 이르지 않았던가?'과거를 잊지 못하겠거든 미래를 포기하라!'고.씁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나를 아내는 더욱 쑥스럽게 만들었다."축하해요. 이제 아침마다 어디론가 출근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임기가 1년인 기자로 위촉된 지 2개월 가까이 재택근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취재하라는 지시가 없어 나를 맥 빠지게 만들었다. 월급 받아먹기가 좀 미안하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사무국 직원 말에 의하면 월급은 따로 없고 기사를 쓰면 나오는 원고료가 '보수'라는 설명이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 왔던 관행 때문에 e메일으로라도 모종의 명령이 내려오겠지 싶어 매일매일 메일을 체크해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위촉장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자치구 양재천변에서 열리는 'XX천 벚꽃 축제'를 취재하라고? 기자 3명이 회의한 결과 나는 음악계의 유명가수들이 출연하는 개막공연, 야외조각전, 이트 플리 마켓(Eat flea market)과 에코(Eco) 등(燈) 터널 현장에서 취재하기로 일을 분장했다. 축제기간 6일중 4일을 현장에서 취재하여 A4 용지 한 장짜리, 2백 자 원고지 5장정도 기사를 써서 e메일로 사무국으로 보냈다. 내가 작성한 기사가 엄지 손톱만한 프로필 사진과 함께 기관지에 실리고 원고료를 지급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원고료는 1편당 2만 원인데 원고 량이 2백 자 원고지 다섯 장이 넘을 때에는 1만 원을 보너스를 얹어서 3만 원이 입금된다고 했다. 돈 때문에 '시니어 기자'에 응모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예의일지 모르지만 내 자존심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원고료가 실비에도 목 미치는 적은 액수라서 분노가 머리끝을 향해 치솟았다. 나흘간 취재해서 공들여 쓴 기사의 원고료가 고작 3만 원이라니 나 자신이 불쌍하고 너무 처량했다. 도랑만 치고 가재는 한 마리도 못 잡은 사례일 것 같았다. 이렇게 싼 원고료를 일찍이 받아 본 적이 없어 너무 실망한 나머지 원고료를 사양하고 말았다. 사무원은 그 예산을 집행해야 된다며 통장번호를 알려달라고 채근했지만 무시하고, 대신에 기자직 사퇴서를 작성해서 e메일로 제출했다."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시니어 기자' 직책을 수행할 수 없어서 이에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동료인 두 시니어 기자는 서울시 산하 25개 구청이 똑같이 이런 대접을 한다면서 이런 자리라도 여러 군데 위촉을 받으면 용돈이 보충 된다며 나의 사직을 말렸지만 따르지 않았다. 일자리를 구청별로 세 명씩 위촉했다고 가정한다면, 3인*25개 자치구=75명의 '노인 일자리 창출'라는 거룩한 이름의 실적으로 계산될 것 같아서 싫었다. 허울 좋은 라는 직함에 대한 사직서는 이 땅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오기'이자 '저항'이었다.결론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산 경험이었다. 〈지뢰 발견〉 때문에 아내는 지난 30년 동안 계속해 왔던 매일 아침 '에어로빅 운동'을 일시 정지하게 되었다. 나 역시도 지난 20년간 실내 체육관에서 매일 저녁 두세 시간 즐기던 배드민턴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해외여행을 나가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떠날 배낭여행에 필요한 체력을 다지는 기회로 활용하기로 의기가 투합 되었다. 아내의 버킷리스트에는 5년 전부터 '산티아고 가는 길'을 한 달 간 여행하려는 프로젝트가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체력을 단련해 두겠다는 각오를 했다. 나 또한 세계 제일의 '계단의 나라' 중국에서 배낭여행을 다시 하려면 이 기회에 걷기를 달인의 경지까지 올려놔야 할 사명 때문에 와 마주치는 기회가 많았다. 아내에게 걷기는 이미 신앙이 되었다. '걷기'는 사람의 신체구조와 뇌신경 기능상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포괄적인 활동'일 것이다. 홀로 걷기는 단순한 운동이나 자극이 아니라 모처럼 사색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함께 걷기는 가까운 가족이나 벗과 함께 나누는 따뜻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아내는 당차게 선언하고 실천에 들어갔다."나는 아침부터 걷는다. 고로 나의 저녁이 존재한다."휴대폰에서 걷기가 취미인 사람들이 회원으로 등록한 앱에서 자동적으로 집계한 수치를 보면 아내는 전국 120만 명의 회원 중에서 상위 1% 수준에 들어갔다고 기염을 토했다. 아내의 건각(健脚)은 이미 중국 배낭여행 때 그 자질과 역량이 증명되고도 남았다. 그 때 나는 6학년 8반, 아내는 6학년 4반이었는데 한 달 씩 네 번 135일 동안 하루 평균 2만3천보를 걸어 다닌 눈부신 실적을 기록했다. 아내를 따라 다녀야 했던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걷는 코스는 서울 강남의 병풍이라고 할 수 있는 우면산의 둘레길이다. 트레킹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비상사태에 마스크를 안 쓰고 숲속을 자유롭게 누비며 마스크 쓴 사람을 비웃으며 지나가는 트럼프 족, 마스크를 턱에 걸치면 일단 정부 방침에 협조했다고 생각하며 제멋대로 살고 싶은 꼰대들, 5인 이상 몰려다니면서 중국 단체 관광객들처럼 떠들어 대는 띵하오 족,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기침을 하면서 영역을 표시하고 다니는 보우소나루(브라질 대통령)족들과 수시로 마주친다. 주말이면 우리 부부는 친구인 두 부부들과 더불어 트레킹 하는데 우면산 둘레길에는 사람들이 꽤나 몰렸다. 의 공격을 피해서 '집콕' 하던 사람들이 주말에 산이나 들로 몰려나오기 때문이다. 트래킹 족이 잘 다니지 않는 샛길을 찾아 걷자는데 일행은 전원 동의 했다. 우리가 선택한 샛길은 우면산의 중턱에 보일 듯 말 듯 감추어진 멋진 오솔길이었다. 우면산에는 공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그 주변이 군사시설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오솔길조차 차단된 곳이 많다. 부대 주변에는 일 년 반 동안 지뢰제거 작전 중이라는 현판이 놓여 있고, 둘레길목 곳곳에 게양된 현수막에는 '지뢰를 발견하면 인근 부대나 경찰서에 신고하라'고 쓰여 있다. 샛길로 접어들어 10여분 만에 오르막 비탈에서 우연찮게 지뢰 유사물체가 내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그 물체를 손으로 건드려보다가 제풀에 놀라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했다. 지축이 흔들리는 듯, 하늘이 노랗게 변하면서 온몸에 전율이 물결쳤다. 겁도 없이 흙과 낙엽으로 덮인 부분을 살짝 사려낸 뒤 일행들에게 확인시킨 결과 '지뢰'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일행 여섯 명중 반은 군대 근처도 가보지 못한 여사님들이고, 그녀들의 남편 둘은 방위 출신이다. 나 현역 때 '방위가 군인이라면 파리도 새' 라고 저들을 놀렸었다. 일행 여섯 중에 나만 홀로 현역으로 군에 다녀온 남아였기 때문에 일생들의 다수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군악대 출신인 나는 군악대에서 악기만 열심히 닦았기 때문에 지뢰라는 실물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사실이 그렇지만 지뢰 비슷한 물체가 땅에 뿌리를 박은 채 머리만 약간 들어내 보여 주고 있는 상태에서 저것이 지뢰가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의 정신 상태를 감정해야 할 것 같았다. '붕어빵은 붕어가 먹는 빵이다' 라거나 '칼수제비는 수제비가 아니다' 라고 우겨도 할 말이 없다. 만약에 내가 발견하지 못하고 지뢰를 밟아버렸다면 우리 일행은 어찌 되었을까? 9학년2반인 양친이나 MZ 세대인 두 아들은 7학년도 되기 전에 지구를 떠나버린 나의 죽음을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보호하사 오늘은 목숨을 부지한 날! 나의 공화국의 국경일로 지정해야 될 것 같았다. 지뢰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거나 팔다리를 떨어져 나가게 한다는 사실은 17년 전 1모작 직장에서 캄보디아에 출장을 가서 그 참상을 일찍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캄보디아 내전 때 매설된 불발된 지뢰로 인한 사상자는 6만 5천 명이나 된다고 들었다. 그때 프놈펜에는 지뢰 피해자들, 한쪽 팔다리가 잘려나거나, 양쪽 다 없거나, 하반신이 잘려 나간 사람들이 시내 곳곳에서 구걸을 하는 모습이 뇌리에서 재생되면서 현기증이 넘쳐났었지. 사지가 멀쩡한 나는 엄청 행복한 족속이라는 사실을 그때 확인하지 않았던가? 등산로 길섶에 지뢰가 뿌리는 땅속에 감추고,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었다. 막상 지뢰 발견을 신고하려니까 아내가 말렸다. 지뢰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지뢰라면 진작 발견되고도 남았을 것이라며. 우면산을 찾는 시민들이 하루에도 수 백 명이고, 이 길을 다니는 사람이 우리뿐이 아닌데 그들 눈에 여태까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괜히 신고했다가 오라 가라, 따따부따 하면 귀찮으니까, 신고하지 말라고… 전직 공직자인 나의 신고 정신이 아내의 말림으로 빛을 바래게 할 수는 없었다. 둘레길목에 군부대가 걸어놓은 현수막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신고전화를 받는 저쪽은 우면산 정상에 주둔한 공군부대였다. 지뢰 제거는 육군에서 파견대가 담당한다는데 주말이라서 출근하지 않았다며, 요즈음 때문에 외출이 통제되기 때문에 즉각 대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어쨌든 신고전화를 접수하여 그들이 연락드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현장에 비닐 새끼 끈으로 줄을 쳐서 이 길을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접근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고 산을 내려왔다. 월요일 오전까지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시민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이 어디 있다고?! 관계기관에서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못 마땅해서 구청 공원과에 다시 신고를 했다. 그쪽 담당자의 대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산속에 있는 지뢰의 위치를 바로 알 수 있도록 지형지물 배경 사진을 찍어, 우면산 지도 위에 지뢰 유사물의 위치를 표시한 뒤에 다시 사진을 찍어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잠시 후 구청에서 군부대로 연락했는지 신상 불명의 군인이 전화를 걸어와 나더러 '6하 원칙'에 입각하여 질문을 퍼부었다. 이어지는 질문들이 나를 피곤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이 전화번호는 당신 거 맞느냐? 언제 어디서 그 물체를 발견했느냐? 신고자님이 사는 곳은 어디냐? 뭐 하러 그 길로 등산을 했느냐? 둘레길 아닌 다른 길로 다니면 매설된 지뢰 때문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데 그런 길을 다니면 안 된다고 훈계까지 끼워 넣었을 때 문제의 본질과는 괴리된 질문이라서 언짢음을 이겨 바르지 않을 수 없었다."질문하는 내용은 이미 구청에 죄다 알려 주었는데 다시 반복해서 질문하는 이유가 뭔가요?"휴대폰에서 그 대답이 어정쩡하게 흘러나왔다."보이스 피싱이나 허위 신고가 아닌지 확인하는 중입니다요."신고한 지 3일 만에 대응하는 당국의 답변치고는 할배 개그 수준이었다. 그 후에 파출소 순경과 공군부대 장교라며 또다시 6하 원칙에 따른 질문을 쏟아내려는 기미를 보여 구청에 내가 접수한 정보를 이용하라고 전화를 끊었다. 신고하지 말라던 아내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셈이었다. 지뢰를 제거하는데 사실관계를 파악해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으로 전화로 확인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더 이상 전화가 안 오겠지 싶었는데 또 한 번 신호음이 울렸다. 육군 소속 지뢰제거 담당 소대장이란다."선생님 보내주신 사진만으로 판별하자면 우리들이 찾고 있는 '대인지뢰'는 아닌 것이 분명하고, 저희 판단으로는 '대전차지뢰'로 보입니다요. 지금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가능하면 둘레길 초입에서 만나서 동행해 주실 수 없을까요?""내 나이 70이라 다시 산에 올라가기 싫어서 사진 6장을 찍어 보냈으니 이것만 가지고도 지뢰 위치를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요.""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산에 올라가서 찾아보고 못 찾으면 어르신께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반시간 후에 전화가 육군 부대로부터 걸려왔다."어르신께서 신고해 주신 지뢰 유사 물체를 찾아서 저희가 발굴했는데요. 땅에 묻힌 물체는 대인지뢰도 대전차지뢰도 아니고요. 코펠 뚜껑이 흙과 낙엽 속에 반 이상이나 묻혀있어서 겉으로 보기에 '대전차지뢰'처럼 보였던 것입니다요."통화를 끝낸 후에 자기들이 발굴한 코펠 뚜껑 사진을 휴대폰으로 보내 주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내가 지뢰가 아니라고 했잖아!"아내는 군대도 갔다 오지 않았는데도 지뢰가 아닌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내가 신고하지 말라고 말릴 때 내 말을 들어야죠. 아내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는 속담도 몰라요?"앞으로는 아내 말을 금과옥조로 잘 새겨들어 자다가 떡을 얻어먹기로 했다. 〈장모님 고이 잠드소서〉 장모님은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서 5년간 무의식 속에서 병마와 싸우다가 와중에 세상을 떠나시어 하늘의 별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나 아들딸들에게도 마지막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5년의 침묵을 유지한 채로 세상을 떠나셨다. 5년 전, 아내가 직장 은퇴 기념으로 백 일간 남미 배낭여행 중일 때 장모님은 어느 날 저녁 TV 연속극을 보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 불명 상태가 되고 말았다. 119 응급 앰뷸런스로 당직 전문의가 없어서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다가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때늦은 뇌수술을 받았다. 장모님의 의식불명은 뇌실내출혈 때문이었다. 뇌실내출혈은 뇌의 탈장이 숨골을 압박하여 호흡장애가 생겨 의식을 잃는 병이라고 한다. 병원은 뇌실내출혈인 장모님의 뇌 안의 압력을 신속히 낮추기 위하여 머리를 열어 혈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뇌수술을 한 이후에도 의식이 회복되지 않아 인공호흡기를 달았지만 가래 때문에 산소 호흡량이 부족하게 되므로, 목에 1, 2센티 생 구멍을 내서 그곳을 통해 관을 삽입해서 산소를 공급하였다. 출혈이 발생한 좌뇌 쪽이 아닌 우뇌 쪽에서 두개골 바로 안쪽에 물이 차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이를 방치하면 뇌압이 증가하게 되므로, 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수술까지 했다. 그러저러한 여러 차례의 수술이 장모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되고 진행되었다. 장모님의 의식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간 여유가 있는 두 딸과 친손자와 외손자, 그리고 며느리가 교대로 간병에 필요한 일들을 휴대폰 문자를 주고받으며 공유했다. 간병을 하는 식구들은 무의식 상태인 장모님에게 하루에 물 1.5L를 주사기로 주입하여 탈수를 막았다. 아침 8시, 점심 13시, 저녁 18시에 농도가 낮은 묽은 미음을 호스로 통해 주입하고 뒤처리를 했다. 복용 약은 물과 섞어서 하루 3회 투여했으며 소변 배출량을 매 시간마다 기록하고 소변주머니가 다 채워지면 통으로 옮겨서 화장실에다 버렸다. 대변은 환자가 매일 자의적으로 배설할 수 없어서 간호사가 관장을 실시했다. 몸에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2시간마다 체위를 변경해 주어야 했다. 매일 환자를 재활치료실로 이동하여 치료를 받고 10시 30분~11시에 머리를 가눌 수 있는 휠체어에 태워 병원 구내를 산책시켜야 했다. 가래가 생기면 2시간마다 썩션(suction)을 해서 제거해 주어야 했다. 장모님이 병원에 입원한 지 3개월이 지나도록 의식은 돌아오지 않아 식물인간으로 세상에 존재했다.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배가 고파도 배고프다는 말을 입으로 못 하고, 눈을 감은 채 숨만 내쉬며 살았다. 최초 수술이 있은 후 한 달 만에 남미 배낭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는 엄마와 한마디의 대화도 나눌 수 없는 실상을 접하고 대성통곡했다. 몇 달 동안 수차에 걸쳐 소통을 시도한 끝에 아내는 엄마가 자기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아내가 엄마에게 숨을 크게 쉬라면 크게 쉰다면서. 나름 집중해서 관찰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았지만 아내에게 아니라고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4년간 자손들과 간병인의 돌봄을 받았지만 조금의 차도도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5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계신 장모님께도 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감염을 피하기 위해서 가족들의 면회가 전면 금지되었다. 장모님의 병세는 매일 담당 간호사를 통해서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10개월 동안 면회도 가지 못한 채 가 끝나기를 희망했지만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요양병원에서 장모님이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간 그날 장모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지난 5년 동안의 투병과 간병의 보람도 없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셨다. 40년 전 처음으로 장모님을 뵙던 날. 장모님과 나는 신경전과 설전을 벌여야 했다. 장모님은 나를 퍽이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예비 장모님은 자기 딸이 나랑 결혼하면 고생문이 훤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딸을 나에게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직장도 없이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나?"그때 나는 궁하기 짝이 없어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대답 아닌 대답으로 임기응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대학교수로 채용되기 전까지 집안 살림은 제가 하고 아내는 직장생활을 하면 되겠지요.""남자라서 집안일이 얼마나 힘든 줄 모르는 모양인데요.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요."무슨 근자감인가 싶어 장모님은 의아하고 뜨악한 얼굴로 나를 정면으로 꼬나보셨다."저는요. 군대에서 대령의 숙소 당번, 속된 말로 '따까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를 잘하는 '밥빨청설 도사'거든요. 약속컨대, 따님 손에 절대 물을 묻히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나는 신혼 때부터 '밥빨청설'의 도사답게 가사를 훌륭하게 처리했다. 아내의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도 확실하게 지켰다. 손에 물을 묻히지 않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아내에게 고무장갑을 계절마다 지속적으로 선물했다. 내 덕분에 아내는 방학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5대양 6대주를 가리지 않고 배낭여행을 띵까띵까 다녀올 수 있었다. 5년 전 뇌졸중으로 병원에 실려 오기 직전 장모님 생신날 아내는 자유여행중이나라 혼자 참석한 나에게 안쓰러운 얼굴로 말씀하셨다."이 서방! 자네 결혼 반대한 거 정말 미안해. 이렇게 훌륭한 사윗감을 미처 몰라 봐서 미안하네. 우리 딸 역마살 때문에 예순 다섯 나이에도 집안일 하느라고 정말 고생 많이 하네. 우리 맏딸을 자주 배낭여행을 보내줘서 너무 너무 고맙네! 여행 다녀오면 자네한테 잘할 것이야"이것이 장모님과 내가 생전에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상황에서 조문객을 받으면 감염을 초래할 지도 모른다. 장모님 부음을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는가? 부음은 알리되 조문은 마음으로 받겠다는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왜냐하면 조문객들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서도 최소한 일주일은 불안한 마음으로 조신하게 지내야 하므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고인의 사인을 꼬치꼬치 묻기도 했다. 그 이면에는 를 사인으로 의심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연초(2020년 2월)에 어느 날 의 확진자가 별로 많지 않을 때 먼 친척의 빈소에 조문을 갔었다. 대구에서 31번 환자가 나타난 뒤에 같은 교회 소속 교인 중에 확진자가 많이 발생해서 대구가 쑥대밭이 되었지만, 서울은 다른 나라같이 조용해서 장례식장을 별로 부담감 없이 조문을 갔었다. 처음 만난 고인의 사위이자 상주(喪主)의 매제가 되는 사람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소주를 몇 잔 기울이며 고인을 추모하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직업이 목회자라고 했으며 대구 쪽에 지인의 장례식에 운전을 하고 다녀오는 길이라는 말을 귀전으로 들었다. 대구가 코로나 때문에 야단이 났는데 그곳까지 뭐 하러 갔을까 라는 생각은 했지만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 사위의 목회자로서 사역구역이 내가 살고 있는 동네라서 더 치근해져서 속 깊은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다.그러면서도 그 사위는 접견실내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구가 봉쇄될지도 모른다는 급박한 사정을 보도했다. 그날 나는 한 시간 만에 엉거주춤 장례식장을 떠나면서 나중에 동네에서 만나 식사나 한번 하자면서 목회자에게 명함을 달라고 했더니, 명함이 떨어졌다면서 대신 내 전화번호를 그의 휴대폰에 찍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9시 뉴스에 바로 우리 동네에 있는 X천지 비밀 교육장에서 확진자가 여럿 나왔다는 뉴스가 있었다. 우리 동네와 대구 확진자의 원천이 그 유명한 X천지라는 보도 때문에 나의 머리칼이 한꺼번에 곤두서며 깊은 시름에 빠지고 말았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고인의 사위가 문제의 X천지 교회 집단 소속 목회자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자기가 근무하는 교회 이름도 위치도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분명 X천지 교인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생각이 밀려들어 그가 목회자라는 심증을 굳히자 시간이 흐를수록 만약에 감염되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에 몸에서 열이 나고, 기침이 심하게 났지만 마신 술이 과했기 때문에 나타난 일시적인 증상일 것이라고 그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싶어서 코로나 감염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에서 알려준 증상과 엇비슷하여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선 집에서 아내와 격리에 들어갔다. 일단 낮에 조문 간 상가(喪家)의 상주에게 전화해서 우리 동네에서 목회자로 있다는 상주의 매제가 우리 동네 어느 교회 목회자인지를 파악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상주도 자기 매제가 어느 교파, 어느 교회 소속인지 알지 못한다고 얼버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 의심은 더욱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사위가 경북 청도에서 있었다는 교주 형님의 장례식에 다녀온 목회자가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상주가 매제의 소속 교회를 확인해서 전화로 알려주겠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으나 소식이 없었다. 상주가 자기 매제의 교회를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면서 X천지에 관련이 있는 목회자가 틀림없는 것 같아 더욱 불안해졌다. 이튿날 아침까지 상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아 동네 내과로 달려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 에 감염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의사가 말했다. 그래도 2주간 찜찜하고 불안하게 지내는 동안 아무런 추가적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무증상인가 의심도 했지만 별일 없어서 괜한 사람을 의심한 것 같아 정말 미안했다. 종합병원의 상황이라 장례식 규정은 엄격했다. 조문객들이 장례식장을 출입할 때 발열이나 호흡기 증상을 체크는 병원 당국에서 해주었다. 상주인 처남은 조문객을 맞이할 때나 쉴 때에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지인들과는 악수가 아닌 목례로 인사를 시종했다. 빈소에서 식사를 할 때 서로 마주 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앉아서 식사를 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식사를 하고 간 사람보다는 식사를 하지 않고 빈소를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식사를 권하지도 않았고 못했다. 조문객들은 떠날 때에도 악수를 하지 않고 고개만 숙여 위로의 마음을 표시하거나 서로의 주먹을 맞댄 후 빈소를 떠났다. 장례식 진행은 장의사의 요구대로 최소 인원만 참여하였고, 화장장과 공원묘지에 납골 절차도 정부 방침에 따랐다. 상주와 참가자들은 마스크를 쓴 채 제를 올렸고 음식은 나눠 먹지 않았다. 장모님 장례식에 올만한 사람도, 와야 할 사람도 가 막아 버렸다. 결과적으로 장모님을 간병하느라고 5년간 고생했던 유가족들을 약간은 편하게 해 주었다. 장모님은 그렇게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우리 처가댁의 아들딸들은 자녀들에게 "연명치료는 절대 하지 마라"는 유언을 문서로 작성하여 공증하기로 했다. 〈며느리의 임신〉지금 9학년 2반인 우리 양친은 55세에 손자를 품에 안았지만, 나는 7학년이 되도록 아직 손(孫)이 없다. 아들 W가 결혼한지가 3년이 지났는데도 아이 소식이 없다. W에게 애는 언제 가질 것이냐며 재촉을 했지만 반응은 뜨악했다."맞벌이인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누가 키우게요?"아내는 늘 명백하게 대답했다. 아기는 엄마 아빠가 키워야 한다고. 며느리가 아기를 가졌다는 카톡 문자가 휘파람 부는 이모티콘을 타고 날아왔다. 우리 집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실로 36년 만에 듣게 된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가슴 한쪽이 심란해지면서 기쁨이 반감되고 말았다. 상황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임산부라는데… 이를 어쩌나? 오래전부터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산부인과나 소아과 의사들이 생활고(?)를 겪자 의대 본과생들이 산부인과 전공을 지원하지 않는 추세라고 한다.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갔을 때, 산부인과 교수라는 주례자가 산부인과 의사인 30대 후반의 신랑과 신부에게 '자네들이라도 아기를 많이 낳아 사양화되는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살려내라'는 당부하던 말은 나를 웃프게(웃고 슬픈) 만들었다. 사실 아기를 낳아서 키우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내 어릴 적, 그러니까 60년 전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아기 보기'의 육체적· 정신적 부담은 아직도 내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장남인 나는 어릴 적부터 '아우 돌보기'를 하느라고 4, 5년 동안을 힘겨운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여덟 살 먹은 나에게 '어린애 돌보기'는 요즘 말하자면 어렵고(difficult), 지저분하고(dirty), 위험한(dangerous) 이른바 3D 분야였다. 60년 전. 농촌에서 어른들은 들일에 바쁘다 보니 나는 집에서 아우를 데리고 놀아야 했다. 한창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 나이에 아우를 돌보는 일은 그야말로 중노동중의 중노동에 해당되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우를 등에 업혀주면서 아우가 허리를 다치면 안 된다며 긴 띠로 나와 아우를 세 바퀴나 칭칭 감아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들어 놓고 일터로 나갔다. 또래들과 술래잡기나 공치기를 할 때는 등에 혹처럼 붙어있는 아우 때문에 기민성을 발휘하지 못해 놀이에서 술래는 늘 내 몫이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띠로 아우를 나무에다 묶어 놓고 놀다가 엄마한테 들켜서 덕장의 명태처럼 얻어맞았다. 형아에 대한 아우의 정을 떼면 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영악한 생각까지도 했다. 아우를 거꾸로 목에 매달아 발목을 붙잡고 얼마간 왔다 갔다 하면서 흔들면 어지러워 나를 멀리 할 것이라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그러나 아우는 그게 아니었다. 재미있다며 자꾸자꾸 해달라고 졸라대니 내 쪽에서 힘이 빠져 숨겨진 목적을 스스로 포기해야 했다. 이제 맞벌이인 며느리가 아이를 낳게 되면 백조와 백수인 우리 부부가 손주를 봐줘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떡 애기 때 옹알이 하면서 어른들의 시선을 붙들어 두는 아기 얼굴, 커가면서 재롱을 피우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나의 삶을 즐겁게 만들 것이며 나이를 맛있게 먹게 할 것 같았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유모차가 있어서 업어서 키우지 않아도 되고, 지능을 향상시키는 장난감이나 애들이 쉽게 빠지는 게임기도 많이 나와 있으니까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아기를 돌본 경험이 있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그 증거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요컨대, 아기 돌보기는 '황혼의 자유'를 구속할 뿐만 아니라 아기를 가르치면서 돌봐야 하므로 이중고라고 했다. 내가 아우를 돌보던 시절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정도의 깔끔한 '위생 관념'과 고도의 '육아 지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아기 돌보기는 나 역시 싫지만 아기 얼굴은 언제까지라도 보고 싶다. 평생을 직장인으로 보낸 아내는 자기 경험상 '아기는 엄마가 키워야 하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 신념의 근원은 무엇일가? 아내가 직장이란 트랩에 갇혀 자식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자책감에서 비롯된 결론일까? 아니면 일생동안 직장에 매달리다 개인적인 삶을 가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 여생을 즐기려고 명퇴를 감행한 마당에 손주를 돌봐야 한다면 또다시 억매는 삶이 싫어서 내린 결론인지도 모른다. 아내의 굳은 신념은 며느리가 아이를 낳고 육아를 위해서 퇴직을 했다면 몰라도 복직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적극적으로 아기를 봐주겠다고 선언했지만, 나의 다짐이 궁극적으로 아내의 부담으로 전가 될까봐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며느리는 임신 4개월 만에 직장을 휴직했다. 아내는 며느리가 내린 휴직조차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임신 4개월부터 출산휴가를 써버리면 육아 휴직기간이 짧아져 육아가 더욱 힘들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하지만 임신한 상태로 직장인 학교에 나가게 되면 며느리 본인은 물론이고 태아도 에 감염될 우려가 크다는 점, 감염을 피하기 위해 하루 종일 마스크를 끼고 강의를 하게 되면 태아에게 좋을 리가 없다는 점, 자신의 임신 때문에 고3들에 대한 입시지도가 소홀하게 되면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해서 막다른 결단이라고 했다. 전대미문의 에 임산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경험적 연구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저 '예방이 최대의 방역'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며느리가 일찍 휴직하기로 내린 결단을 잘 했다고 추켜세웠다. 이제 임신 5개월이 된 며느리는 1주에 한 번씩 병원에 다녀야 된단다. 담당 의사의 진찰에 의하면 며느리의 경구가 짧아 조산기가 있어서 이를 막는 시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산부인과를 종합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가 기승을 부려 확진자가 하루 평균 700명대로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수많은 환자들이 들락거리는 대학 종합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아야 했다. 대기업 사원인 아들 W은 직장 내에서 확진자가 많이 발생해서 그동안 선별 검사를 네 번이나 받아야 했다. 코로나 때문에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6일은 재택근무하고 3일은 출근해서 근무를 해야 했다. 선별검사를 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자가 격리 수준으로 각자 방을 따로 쓰며 집에 머물러야 했다. 재택근무 경험이 없는 나는 학생들이 방학을 맞는 즐거움과 비슷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옆에서 본 결과로는 그게 아니었다. 재택근무라 해도 항상 업무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집안에서 임산부인 와이프의 시중을 들지 못했다. 임산부들이 상황에서 많은 환자가 드나드는 병원을 출입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2주에 한 번씩 병원에 다녀야 하는데 만삭인 며느리를 누가 병원으로 데려갈 것인가?W 결혼식 때 주례자를 세우지 않고 아버지인 내가 주례자를 대신했다. 주례사에서 W에게는 아들이 없는 '처가댁의 아들'이 되라 했고, 며느리에게는 딸이 없는 '우리 집안의 딸'이 되라고 주문했었다. 그들은 맞벌이를 하면서도 우리 부부보다 훨씬 알콩달콩 사랑하면서 잘 사는 것 같아 여간 흐뭇하지 않다. 비록 출산은 많이 늦었지만 기다리던 임신도 했다. 상황만 아니라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가면 되지만 혹시라도 감염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결국은 우리 부부 중 둘 중에서 한 사람이 며느리를 병원으로 픽업을 해야 했다. 나는 시아버지가 픽업하는 것보다는 시어머니가 픽업하는 것이 며느리를 더 편안하게 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는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며, 당신이 손주 낳으면 돌봐 준다고 했잖은가? 뱃속에 있는 손주도 손주니까 애를 봐야한다면서,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주겠다고 선심을 썼다. 그런 아내의 채근은 워낙 부도를 많이 낸 나의 과거의 행적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산부인과 병원으로 픽업하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니며, 오히려 집안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라면 하지요! 라고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손녀를 잉태한 며느리의 픽업을 시아버지더러 하라는 아내의 월권은 받아들이기 싫었다. 내가 며느리를 픽업한다면 며느리가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아내가 며느리의 입장을 전혀 역지사지 하지 않고 나한테 핑퐁을 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산부인과로 픽업해야 한다고 한사코 주장했다. 이에 아내는 W의 결혼식 때 며느리에게 주문하고 선언한 바와 같이 "딸 같은 며느리"가 병원에 진료 받으러 가는데 당연히 아빠인 당신이 픽업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아내는 나에게 '며느리 바보'가 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대학원 졸업하고 입대해서 군대생활을 늙은 졸병으로 마친 내가, 손녀를 손꼽아 기다리던 내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정작 고객인 며느리가 원한다면 픽업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며느리가 스스로 불편하기 때문에 시아버지를 선택하지 않고 비교적 덜 불편할 것이 분명한 시어머니를 택할 것이라고 백% 확신했다.고객제일주의를 내세워 며느리에게 선택권을 주자고 제안하여 그 의사를 물었더니 며느리의 대답은 나의 예상과 기대를 한참 벗어난 대답이 돌아왔다."어머님과 아버님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아버님이 픽업해 주시면 더 좋지요."며느리의 선택은 나를 무척 당황하게 만들었고, 솔직히 말해서 황당했지만, 결국 나는 '딸 같은 며느리'를 병원에 모시고(?) 다녀야 했다. 우리 아파트에서 W네 아파트까지 자동차를 20 여분 몰고 가서, W네 아파트에서 대학병원까지 30분 픽업을 해주면 끝나는 일이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어려워하지 않는 점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지만 멋쩍게 만든 것은 틀림없었다. 남산만큼이나 부른 배를 내민 며느리에게 자동차 문을 열어서 조수석에 앉혀서 대학병원으로 운전해 갔다. 처음에는 엄청 민망하고 거북했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스스럼이 없어졌다. 나의 생각과 신세대인 며느리의 생각에 갭이 제법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원 건물 정문에서 차에서 내린 아내는 며느리를 부축하여 QR코드로 인증을 한 후에 병원 출입구를 통하여 산부인과에 가서 진찰 수속을 밟아주었다. 며느리는 대기실에 들어갈 수 있지만, 보호자는 임산부들이 에 감염될 것을 우려하여 대기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통제했다. 대기실 밖에는 앉을 의자가 없어서 병원 건물 밖에서 며느리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결국 아내와 나는 며느리의 병원 행차에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병원 언저리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면서 며느리의 호출을 기다려야 했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며느리가 좋아하는 돈가스와 김밥을 '테이크아웃' 해서 점심 식사를 때우게 해 주었다. 연속적으로 몇 번 픽업을 하다 보니 며느리와 관계가 엄청 돈독하고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머지않아 세상에 태어날 손녀의 이름을 지어놓고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둘째 아이부터는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원격 진료 프로그램'이 개발되면 좋을 것 같았다. 임산부가 병원을 찾아가지 않고도 집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이자 백신을 맞지 않고 세상을 그대로 하직하겠다고 옹고집을 부리시는 걸 설득하려고 친가를 찾아가 두 분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마침 그날은 어머니를 50년간 시집살이를 시키고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의 17회 기일이었다. 때문에 지난 설과 추석에도 조상께 차례를 모시지 못해 할머니가 대노할 것 같다면서 이번 제사는 간단하게라도 모시자는 어머니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평소에는 15명 정도의 친척들이 참석했지만 5인 이상 모이면 안 된다는 정부의 방역방침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우리 부부만 참례해서 제사를 모시기로 했다. 넷 중에서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9학년2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릎 관절이 고장 나 큰절을 못한다며 제사에는 참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종교적 이유 때문에 음식 장만은 해주지만 제사는 못 모신다고 빠져버렸다. 나는 최근에 유튜브를 제작하면서 배운 온라인 Zoom을 이용해서 불참한 할머니 직계 비속들에게 제사 모시는 실황을 영상으로 중계하기로 했다. 휴대폰 카메라를 삼각대에 설치하여 제사를 모시는 장면이 친척들에게 실시간 전달되도록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막 강신을 하려는 찰나에 아우에게서 문자가 카톡! 하고 날아왔다. 제사상에 지방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버지가 손수 써 놓으신 지방을 제상에 올려놓고 강신 재배부터 시작했다. 7학년인 내가 혼자 촛불을 켜고, 술잔을 올리고 내려 잔을 비우고 다시 술을 따르고, 큰 절을 두 번씩 하고 삽시를 하다 보니 무릎이 불편해서 제사가 순조롭게 모셔지지 않았다. 2년 만에 초대받고 제사상에 앉으신 할머니가 한참 어지러워 하셨을 것 같다. 정성을 다해 제사를 모시려 했지만 내 관절도 굳어서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께 우리 가족들이 상황을 잘 극복하게 잘 보살펴 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할머니께 술 한 잔 올리겠다고 자청하고 제실로 들어오셨다. 거동이 불편하고 관절이 굳어 몸을 구부려 절을 하지 못하고 앉을 수도 없는 사람이 억지로 큰절을 하시면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며 기도하셨다. "어머니! 때문에 이렇게 조촐하게 제사를 올려서 죄송합니다. 기쁜 소식이 하나 있어요. 두 달 후에 어머님 진 손녀가 태어난대요. 어머님이 잘 챙겨서 순산하게 도와주세요! 어머니 잘 부탁합니다!" 올해 제사를 간단하게라도 모시자는 어머니의 숨겨진 의도가 이제야 드러났다.할머니 임종 때 나는 캄보디아 해외출장을 갔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도 못 했다. 나를 실질적으로 키워주신 할머니의 영혼을 뵐 면목이 없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며 끄적거려 놓은 '할머니'라는 제목의 시, 시답지 않은 시, 한 수를 지어 축문 삼아 낭독해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가족들에게 동영상으로 중계하였다. '할머니' 동생들한테 엄마 젖꼭지를 빼앗겨칭얼대던 나에게할미 젖은 두 개다 네 거라며앞가슴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아장대는 나에게 맛난 거 걷어다 먹이며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나중에 커서할미 비행기 태워줘야 돼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칸방에서 궁박하게 자취하던 중3 때밭이랑에서 우거지 줍어다가시금치나물 한 접시, 시금치 된장국 한 사발 퍼주며'돈 주고 사 온 거라 맛이 기가 막히다'며 시치미를 떼셨습니다. 양변기 통에 머리 감았다고기겁을 하는 나에게 그러면 왜 안 되냐며따지던 우리 할머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시면서울 엄마와 티격태격 잘도 싸우시더니70 고개 넘은 울 엄마더러 치매라고 괴롭히시더니 외국 출장 다녀오겠다고 안부 전화했을 때넌 참 좋겠다. 하늘을 날아갈 수 있어서…나도 살아생전에 한번 비행기 타고하늘을 날고 싶으시다더니 출장에서 돌아왔는데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나요?비행기도 타지 않고 하늘공원으로 날아가벽제 골 항아리 속으로 숨어버리셨네할머니가 내내 그립습니다. 〈백신접종을 위한 공청회〉우리나라는 2021.03.20.부터 AZ백신 접종을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일반 의료진과 요양병원 종사자들에게 접종하였다. AZ백신에 대한 제원이나 정보는 전문 의사들이 만든 유튜브 동영상으로 일반인들에게 폭넓고 깊게 소개되었다. AZ를 접종한 의사들의 경험담도 유튜브나 TV에서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그러나 AZ 백신이 다른 백신보다 혈전 생성 비율이 높을 뿐 만 아니라 부작용이 큰 것으로 보고되는 사례가 많다는 언론이나 유튜버들의 의도적인 왜곡 보도 때문에 접종 대상인 우리 연령대인 국민들의 불안을 한껏 키워놓았다.그러나 정부는 접종 후 신고 된 부작용이 AZ백신 접종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정부가 분석한 것이 아니라 WHO가 'AZ 백신과 혈전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반복했다. 국내 전문가 중에는 AZ접종 후 사망한 사람의 사인과 상관관계가 없다는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야당에서는 말썽 많은 AZ를 대통령부터 시범을 보이라는 요구조차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의 백신접종 연령 계층에는 해당하지는 않지만 항체가 생긴 뒤에 출국하여 외국 정상들을 만나서 국제회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AZ 백신을 우선 접종하는 장면이 TV에 공개되기도 했다. 그 장면에서 간호사가 AZ백신을 다른 백신으로 바꿔치기 했다는 의심을 담은 '가짜뉴스' 가 보도되기도 했다. 질병관리청은 2021. 5.27.부터 내 연령층에 속하는 65세에서 74세까지의 국민들에게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접종 예약 5.6.~ 6.3.까지 받는다고 발표했다. 이에 해당되는 우리 나이 어르신들은 방콕하면서 단톡방에서 AZ를 맞아야 하는지 맞지 말아야 하는지를 놓고 끊임없는 설왕설래(說往說來)와 갑론을박(甲論乙駁) 토론이 봇물을 이루었다. 친구들은 AZ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교환하면서 접종여부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썽 많은 AZ백신을 나 같은 7학년 초반의 국민을 접종 대상으로 지정한데 대하여 당사자들은 은근히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7학년생인 대학 동창들이 초대된 단톡방에서는 의 예방을 위해 AZ 백신 접종과 관련하여 공청회를 방불하게 의견교환을 하면서 정보들을 공유하면서 걱정을 가중시켰다. *4:32, 친구1: AZ는 미국에서 승인이 되지 않는 백신인데 왜 이걸 맞으라는 걸까? 왜 부작용이 가장 심한 AZ백신을 하필 우리 연령대에게 맞으라 하지? 난 미제 화이자 백신을 맞고 싶은데…*4:34, 친구2: 국민이 접종할 백신을 선택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고 하네요. 3일 정도 죽을 만큼 아플 각오로 AZ백신을 맞으려고 하는데… 솔직히 두렵고 걱정 됩니다. 특히, 나같이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질병관리청에 관계하는 의사들이 체온계, 타이레놀, 혈압계 등을 준비하라네요. 근육통과 발열 체크하고 해열제 복용하라고…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 보도에 의하면, 지금 나온 CVID-19 백신들은 워낙 화급하게 1년 만에 나온 탓으로, 그 효능과 이상 반응이 불투명해서 우리가 모르모토가 되는 기분이네요.*5:01, 친구3: 그래도 백신은 모두 맞도록 합시다. AZ 조차도 없어서 못 맞는 상황이니까 안 맞고 걱정하느니 맞고서 안심하고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우리 동창모임도 가능하고 조만간 붕우들과 소주도 한잔 마실 수 있겠지요.*5:06, 친구4: 이상 증상 대비 각오하시고, 타이레놀 충분하게 준비하시고, 여차하면 응급실 갈 준비 등 완비하시고요~*5:09, 친구5: 우리 나이 또래 아무도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 담담하게 있다가 맞을 때가 되면 그냥 맞으면 될 것 아닐까요?*5:22, 친구2: 친구5님 같이 건강에 자신 있으면 담담하게 있다가 턱~~ 맞으면 되지만 소인은 몸 상태가 나약하기 그지없고 1인 가족인지라 쓸 데 없지 않은 걱정을 대폭 하는 중… *11:16, 친구4: AZ백신에 관해 이런저런 학설도 많으니 두루 참고하시길~~ 어제 내가 만났던 지인의 사위가 건장한 40대 외과의사인데, AZ백신을 맞고 3일간 아주 힘들었다며 가족들에게는 맞지 말라고 했다고 하데요.*11:26, 친구6: AZ에 대한 정보를 자주 확인하고 카톡에 올려주시니, 친구4 자네가 동기들께 큰 봉사하시는 것이네.*12:07, 친구7: S의과대학 모 교수는 백신 무용론을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백신 맞은 사람들은 모두 속아서 헛짓한 거야? 뭐야? AZ나 화이자, 모더나 등등 제약회사들이 돈벌이를 위해 지구촌 인류를 상대로 사기를 쳤단 말인가? 백신 맞는 거 심각하게 고려해봐야겠네. AZ 백신 접종 후기를 두루 읽어본 후 그 내용을 나름 정리합니다.- 접종 후 10시간 후부터 서서히 증세 심해짐. 공통 증세는 발열, 오한. 전신에 극심한 통증. 정신몽롱, 오심, 구토… 타이레놀 안 먹으면 거의 죽음 직전… 일반인 70세 접종 5월부터 시작, 곧 닥칠 일. 신경 쓰지 않는 분들은 가서 맞으면 되고, 나같이 신경 쓰이는 분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시죠. 백신 안 맞을 권리도 물론 있겠지만. ㅋㅋ*12:13, 친구8: 이번 맞을 권리를 포기하고 다시 권리를 회복하려면 아마도 연말에 가야 가능한대요. 전 국민의 70%만 맞으면 항체가 형성이 된다 하니 나머지 30%는 안 맞아도 된다는 말인가? ㅋㅋ*12:15, 친구5: 내과 의사인 59세 조카가 며칠 전에 AZ백신을 맞았는데 하루반 정도 가벼운 몸살 기운이 있다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고 함*12:15, 친구7: 친구4가 올린 동영상 보니 갑자기 무서워지네. 난 아직은 죽으면 안 되는데. 할 일이 많이 남아서…*12:30, 친구6: 큰사위, 막내처남, 큰딸, 모두 우선 접종대상임. 맞고 나서, 하루, 이틀 가벼운 몸살기? 정도였다고 합니다. 부작용은 결국 확률의 문제일 듯. AZ의 부작용 발생 건수는 100만 건당 20건 정도 발행한다니까. 참고하세요. *5:09, 친구5: 까이꺼 이판사판 빨래판! 바이러스란 놈은 인간보다 지구에 먼저 존재했고, 이제 숨은 실력자로 등극했으니 조심스럽게 다뤄야지요.*5:10, 나: 전문의들은 안 맞고 확진되어 고생하는 것보다는 맞고 약간 고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해서 맞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담담하게 예약 했습다.ㅡ 일시 / 2021년 5월 31일 (월) 09:00ㅡ 장소 / XXX내과의원ㅡ 백신 종류 / AZ 백신ㅡ 예약번호 / *********● 참고로 접종장소는 주소지와 전혀 상관없이 예약할 수 있음. 예약 일시나 장소를 변경하시려면 접종일 기준 이틀 전까지 http://ncvr.kdca.go.kr에서 가능합니다.*5:11, 친구7: 어떤 병원의 의사는 AZ백신인 줄 알고 접종했는데 알고 보니 폐렴 백신을 잘못 주사했대나 봐요. 어떤 간호사가 백신을 2회 접종했는데도 항체가 생기지 않아 글쎄 확진자가 되었다네요. 접종을 예약하는 병원은 노련한 큰 병원이 좋을까 붐비지 않는 작은 의원이 좋을까? 접종 예약시간은 아침이 좋을까? 오후가 좋을까? 누구 의견 있나요?*5:13, 친구5: 문외한인 우리들에게는 복불복! 각자 지성과 이성으로 판단해서 예약합시다. *6:05 친구2: 드디어 접종 후 안정을 취하고 있음*6:07 친구5: 접종으로부터 24시간 경과했는데 몸은 괜찮음. 친구들도 걱정은 안 해도 될 듯…*6:09 친구6: 이번에 예약한 사람 중 No Show한 사람 때문에 생긴 여분의 백신을 예약하는 사람이 엄청 늘어나 그나마도 품절이라 하네요. 우리 모두 예약된 대로 접종하고 와의 전쟁에서 이기도록 합시다.*6:09 친구3: 시중에 타이레놀도 품절되었대요. 성분이 같은 다른 이름의 의약품도 많다 하니 약사와 상의하시도록! 나는 2021.5.31.09에 예약한 병원에서 AZ 백신을 접종했고, 다음 날 하루 근육통으로 괴롭긴 했지만 타이레놀은 복용하지 않았다. AZ백신을 1차 접종한 결과 카톡방 멤버 11명 중에 타이레놀을 한 알이상 복용한 사람은 5명이고, 6명은 무사히 지나갔다.무엇보다도 머지않아 태어날 손녀를 안심하고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여간 다행이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6학년을 뒤로 하고 7학년에 진급되는 것은 너무 무의미하고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긴급 상황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얼굴 맞대며 어울리지 않더라도 의사를 소통할 수 있으며, 필요한 정보와 지식과 지혜를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하였다. 포스트 시대가 되면 '나이 먹는 즐거움'을 다시 만끽하고 싶다. -(끝)-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실버 취준생 분투기' - 이순자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실버 취준생 분투기' - 이순자

이글은 내가 62세에서 65세까지 겪은 취업 분투기다.퇴근 시간이 가까운 취업창구는 한산했다. 담당자에게 이력서를 내밀자 이력서를 훑던 담당자 입꼬리에 묘한 비틀림이 스쳤다."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만면에 미소 짓고 대응하지만 내 눈엔 보인다.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무언의 압박."이력서에 있는 자격증 중 가능한 직종이면 좋고요.""재능이 많군요. 자격증도 많고 그런데……"자격증 시대지만 자격증의 우선 조건은 나이다."나이가 너무 많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거나요."환갑을 넘은 취업지망생에게 자격증은 장식품일 뿐이라는 걸 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직원이 뜸 들이는 동안 재빨리 내가 할 수 있는 업종의 경력을 나열한다."사실은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전공이 문창과라 도서관에서 독서 지도나 글쓰기 수업도 가능하고요. 옛날에 어린이집을 몇 년 해서 아이 돌봄이나 방과 후 도우미도 할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 봉사활동 이십 년 이상해서 환자 돌보는 것도 가능하고 미술 문학 음악 상담 치료 쪽으로 1급 자격증 다 있어서 상담 치료도 가능합니다. 솔직히."솔직히. 라고 말해놓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화려한 자격증을 열거해놓고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동안 뭐하고 노후준비를 하지 못했냐고 문책당할 것만 같다. 그동안 뭘 했을까? 먹고사는 걱정 없어 병원으로 복지관으로 봉사만 하고 다닌 게 잘못일까? 혼자가 되어 생계를 책임져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내 탓이다. 평균수명이 점점 길어진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요 몇 년 나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자격증이 책장 한 면을 도배할 만큼 준비했다. 어쩌면 현실을 직면하기 겁나 자격증에 몰두했는지도 모르겠다. 직원도 당황스러웠던지 험한 일 하실 분 같지 않으시네, 곱게 나이 드셨네. 라며 위로랍시고 몇 마디 거든다. 직원이 이력서를 들고 이렇게 많은 능력이 사장된다는 게 안타깝다고 애석한 표정을 짓는다. 연기 굿이다. 나도 안다. 너도나도 구직활동에 나선 초로의 구직자들의 아직은 대접받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걸. 그걸 적당히 다루는 방법도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잔뜩 근심 어린 표정으로 혹시 청소나 단순 작업 같은 일도 하실 수 있겠냐고 공손하게 묻는다.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재고 따지고 할 여유도 없다. 이력서 용지를 주며 이력이나 경력이 화려하면 채용이 어려우니 다시 작성하라는 시청직원의 말에 얼른 순응한다. 어디까지 잘라야 하지? 두 장 빼꼭한 이력서를 내려다보다 이력서를 구겨버렸다. 롤러고스터다. 중졸 한 줄로 마감한 이력서를 받아 든 직원이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구인회사를 훑다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회사 위치를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1)물어물어 찾아간 P산업은 아현동 재래시장을 지나 몇 개의 골목을 돌아 막다른 골목 구석진 곳에 창고를 임대한 가건물이었다. 타이탄 트럭만 한 드럼 세탁기 네 대의 우렁찬 소리가 골목 어귀까지 들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수건 뭉치들 사이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검은 손이 재빨리 접히고 있었다. 사장은 가져간 이력서는 보지도 않고 나이부터 물었다."언제부터 일할 수 있으세요?""아 네, 지금 당장이라도……""그럼 내일 아침 9시 출근하세요."골목을 몇 개 돌아 굴레방다리를 지나자 바로 찻길이 나왔다. 갈 때는 멋모르고 물어물어 갔는데 나오다 보니 젊은 시절 직장동료가 살던 동네여서 길이 낯익었다.첫 출근이라고 일찍 서둘렀는데도 아가씨들 앞에는 벌써 정리된 수건이 산더미같이 쌓였다. 도대체 몇 시에 출근한 건가? 외국 근로자들의 열악한 근로 환경의 현주소다. 괜히 특별대접 받는 것 같아 마음이 언짢았다. 수건 더미를 밀고 앉았다. 사장은 개어놓은 수건을 묶느라 정신이 없다. 바닥에 앉아 무한정 쏟아내는 수건을 접는 단순노동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어깨에 힘이 들어가 어깨가 아프다. 얼마 전 연골이 찢어진 무릎이 아파 수건 두 장을 말아 무릎에 고였다. 사장이 지나다 보고 웃는다. 이국의 아가씨들은 손을 재게 놀리며 저들끼리 뭐라 솰라대고, 나는 죽어라 속력을 내는데도 따라잡지 못한다. 종종 아가씨들이 나를 쳐다보며 웃는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이 바로 작업 시작이다.저녁 6시가 되자"일은 할 만하세요? 내일도 9시까지 오세요."사장은 대답할 새도 없이 휙 가버렸다. 외국 노동자들은 퇴근할 기미가 없다. 나는 수건 더미 속에 처박힌 신발을 꺼내 들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에 삐진다."얼른 퇴근 하세요?""다들 퇴근 안하는데?"맹하게 묻자, 외국 노동자들은 야근이라며 그냥 가라고 한다. 외국 노동자들은 어려 보였다. 잘해야 스물 남짓 되어 보인다. 오지랖 넓은 나는 타국에서 고생하는 어린 그들을 생각하며 밤새 잠을 설쳤다. 사흘째 되던 날, 등과 목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자주 일어나 목운동과 허리 들리기 운동을 했다. 사장이 물끄러미 쳐다보다 '빨리하세요.' 한마디 툭 던진다. 외출했던 사장은 퇴근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옆의 아가씨가 손으로 천천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말은 안 통했지만, 엄마뻘도 더 되는 내가 애쓰는 게 안쓰러운 모양이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뭔가 표현을 하고 싶어도 영어도 아닌 그들의 언어로 소통은 불가능했다. 아가씨들은 일하면서도 옆 사람과 무언가 계속 재미있게 대화를 나눈다. 타국에서 외로울텐데 다행이다. 일에만 열중해도 나는 그들을 따라잡지 못한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아가씨들이 퇴근하라고 손짓한다. 딱해 보였던 모양이다. 사장이 없어 망설이다 아가씨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섰다.추적추적 가랑비가 내린다. 굴레방다리 안에서 할머니가 호박잎을 팔고 있다. 노점상 할머니에게서 호박잎을 산다. 밥해 먹을 힘도 없는데 그저 할머니가 우중에 장사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다. 매사 이 모양이다. 이런 성격, 이것도 성격장애의 일종 아닐까? 지금 누가 누구를 배려 하나 싶다. 저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밤새 앓았다. 파스를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도 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다. 첫 취업은 닷새 만에 끝났다.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나는 사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힘에 부쳐서 못하겠습니다. 그동안 일한 임금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xx은행 계좌번호 xxx-xxxx-xxxx-xxx 아무개'나는 딱 하루, 한 시간에 몇 번씩 핸드폰을 확인하고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포기했다. 사장한테서는 영영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일주일 이상 일하지 않으면 임금 지급 의무가 없다. 근로기준법을 잘 준수하는 사장을 원망하는 짓은 부질없는 짓이다. 파스와 버스비만 날렸다. 나 말고 다 외국인 근로자인데 나를 채용한 이유가 무얼까?학력과 경력을 없애고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을 버리니 취업은 쉬웠다. 역시 일자리센터 직원의 충고는 적중해서 한방에 백화점 청소부 자리를 얻었다. 나는 주문을 외웠다.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해야 한다. 나의 다짐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2)첫날 지하 식품부.아침 조회시간. 고객에 대한 친절 교육과 인사복창을 한 다음, 그날 일터와 청소에 필요한 용품을 배당받아 둘씩 짝을 지어준다. 짝꿍은 나보다 5살 아래였지만 손자가 초등학교 3학년이란다. 오랜 경력을 쌓은 그녀의 일머리는 경이로웠다. 자그마하니 땅땅한 몸매를 어찌나 재게 놀리는지 미처 따라잡지 못해 대걸레를 질질 끄는 나에게 대걸레를 질질 끌면 cc tv에 찍힌다고 질겁했다. 걸레는 항상 앞으로, 알았지요? 그녀는 '항상 앞으로'를 대 여섯 번이나 복창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cctv에 찍힐까 봐 엔간히 겁이 나는 모양이다. '한 손은 대걸레 위를 꼭 잡고, 다른 한 손은 중간지점을 잡아 돌려가며 마포 질을 해야 깔끔하게 된다고요.' 설명은 쉬워도 막상 하려면 어려웠다. 신입 교육 잘못시키면 자기가 문책당하니 잘하라며 어깨를 들썩였다.쉬는 시간이 되자 짝꿍 아줌마 수다가 시작됐다. 쉴 새 없이 지껄이는 와중에 무심한 척 내 신상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요 몇 년 혼자 조용히 살던 버릇이 들어있던 나는 죽을 맛이다. 육체를 놀리는 일보다 이야기를 듣는 일이 더 힘들었다. 최선을 다해 고개를 끄덕여 장단을 맞추는 일, 감탄사를 섞는 일, 적당한 질문을 준비하는 일이 시를 쓸 때보다 더 골똘하게 한다. 그래도 열심히 분위기를 맞춘다. 결혼하고 삼십 오 년간 매일 하던 청소가 손에 익지 않아 짝꿍 아줌마 잔소리를 자주 듣다 보니 정신이 혼미했다. 짝꿍 아줌마는 내 실수를 즐기는 것 같다. 청소전문가의 긍지려나. 변기 뚜껑에 입이 닿도록 코를 박고 변기 몸통을 닦고, 뚜껑을 닦고, 변기 속을 닦으면서 이 일로 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자고 중얼거린다.때로는 중얼거림이 약이 되기도 한다. 괜찮아, 괜찮아. 잘했어. 혼자 묻고 답하면서 청소 아줌마들의 신입이 되었다. 점심시간에 청소 아줌마들이 모였다. 계단 밑 공간에 라면상자를 깔고 둘러앉아 왁자지껄 수다가 시작되었다. 신입은 김밥과 사과로 내일 신고식을 치러야 한다고 짝꿍이 귀뜸한다. 둘째 날, 1층신입의 첫째 임무, 되도록 빨리 전 층을 돌며 백화점 구조를 익혀야 한다. 1층 엘리베이터가 가동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엘리베이터 문과 주변 벽을 닦는다. 엘리베이터 앞 휴지통도 손자국 하나 없이 닦고 액자나 팻말도 먼지 한 톨 없이 닦는다. 엘리베이터가 가동되자 안쪽 문과 벽, 엘리베이터 짬 새를 손닿는 곳까지 닦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전에 순식간에 해치워야 하는 게 포인트다. 특히 층 표시는 지문이 많이 묻으므로 신경 써서 닦아야 한다고 짝꿍이 일러준다. 넓은 홀 마포 질은 청소 아저씨들이 청소차를 몰고 다닌다. 청소차가 신기해 돌아다보다 넘어질 뻔했다.밖으로 난 대형유리창과 쇠창살은 양손을 동시에 휘둘러 닦는다. 어설픈 나는 자꾸 한쪽 걸레를 떨어트린다. 유리를 닦은 걸레로 홀 중간에 있는 소파를 닦다가 짝꿍에게 혼이 났다. 딴엔 시간을 절약한답시고 그랬는데 유리 닦던 걸레로 소파를 닦으면 유리에 먼지 앉는다고 성질을 부렸다. 백번 맞는 말이다. 청소도 요령이 있다. 백화점 청소는 집 청소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청결을 요구했다. 고객들이 잠시 앉아 쉬는 소파를 걸레로 닦고, 건물 주변에 떨어진 것이 없나 확인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다.점심시간이 되자 김밥과 음료수와 사과를 사 들고 가 아줌마들이 있는 계단 밑 공간에 라면상자를 펼쳐 자리를 만들었다. 수다 삼매경이 한창일 때, 반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식품부 채소류 냉장고 밑에 물이 떨어졌으니 어서 가보라는 불호령. 총 근무시간은 열 시간, 점심 시간과 쉬는 시간 합쳐 두 시간의 휴식시간이 있지만, 쉬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고로 눈치껏, 요령껏 몸을 쉬어야 한다. 매장을 한 바퀴 돌면서 마포 질을 하고 나면 숨이 차고 숨 쉴 때마다 명치와 가슴이 쪼개지듯 아프다. 지병인 심장병 탓이다.요령껏 움직여야 하지만 요령이란 일이 몸에 익숙해져야만 가능하다. 더구나 나는 고관절과 퇴행성 관절염 골다공증을 합친 부실한 몸이다. 처음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요령을 피울 줄 모르는 나는 몸만 힘들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뜰히 살림만 하던 나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겪는 노동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집안일치곤 다른 집보다 4대가 사는 대가족이어서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는데도 말이다. 셋째 날, 2층.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다."그렇게 약해 빠져서 이 일을 어떻게 하겠어요.""그러게요."여기저기 파스를 붙인 나를 보고 짝꿍은 못마땅한지 쫓아다니며 투덜거린다. 내가 부족한 만큼 자신의 일이 늘어나니 왜 안 그렇겠나 싶다. 그렇기는 해도 나보다 어린 그녀에게 종일 핀잔을 듣다 보니 은근히 화가 치밀기도 했다. 화를 낼 일이 아니라 미안해할 일인 줄 알면서도 화가 났다. 힘에 부치니 입이 마르고 갈증에 시달렸다. 이번엔 오래 다녀야 한다고 최면을 걸어보지만. 점점 다리에 힘이 빠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고부터 현저히 체력이 떨어진다 했더니 세 시 반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잘 버티나 싶었는데 설마 오늘이 또 마지막 출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퇴근 시간에 반장이 내일은 쉬라고 한다. 그녀는 오랜 경험으로 신입은 사흘쯤엔 몸살이 난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하루 푹 쉬고 영양 섭취하고 모레 보자는 반장 손을 덥석 잡고 나도 모르게 감사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정말 고마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구나 3, 4일에 한 번씩 쉰다고 했다. 나만 견디기 힘든 건 아닌 것 같아 위로가 됐다. 퇴근길에 소고기를 사 구워 먹었다. 몸이 견디려면 컨디션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반장 말이 아니라도 견뎌내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넷째 날, 지하 슈퍼하루 쉬고 났는데도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반장이 처음이라 몸이 적응하기 힘들 거라면서 지하 식품부로 구역을 정해줬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는 뜻으로 느껴져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맥이 풀렸다. 식품부는 다른 매장보다 마포 질을 자주 해야 해서 체력이 달렸다. 한 시간 일하고 배가 고파 두유 두 개를 사서 짝꿍과 화장실로 들어가 얼른 마시고 나왔다. cctv에 찍힐까 노심초사했다. 마포 질이 익숙하지 않기도 하지만 워낙에 힘을 쓰지 못하는 나는 걸레에 끌려다니다 딱 걸렸다. 걸레에 끌려다니면 자국이 다 나는데 청소를 하는 건지 더럽히는 건지 모르겠다며 반장이 호통을 쳤다. 손발이 벌벌 떨리도록 해도 내겐 힘에 겨웠다."죄송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 몸이 따라주지를 않아서""그렇게나 힘이 없는데 이런 일을 한다고 나섰어요?""그러게요."반장도 어이가 없는지 등을 툭툭 두드리고 일단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다. 십 분에 열 번도 더 시계를 쳐다보며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락커룸에 가자 반장이 다가왔다."어때요? 계속 할 수 있겠어요?""……""그동안 애쓰셨어요. 일이 힘들어서 하시기 힘들 거에요. 원래 하시던 분들도 그 나이엔 그만두세요. 괜히 병원 신세 지지 말고 쉬세요.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일주일 후 통장 확인하시고, 사무실 가서 퇴직순서 밟으시고, 근무 기간 짧아 퇴직금 없는 거 아시죠?""……"반장의 말은 다 옳다. 내 입으로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통장엔 정확히 사흘 뒤,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왔다. 휴무 날 임금까지 쳐서 들어온 금액을 한참 쳐다보다 세탁공장 사장이 떠올라 입맛이 썼다. (3)낯익은 전화번호가 떴다."건물청소 하실 수 있겠어요? 신규 입점하는데 매장 청소는 아니고 화장실과 사무실만 하면 되니까 백화점보다 쉬울 거여요."벌써 백화점 그만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일자리센터였다. 요즘은 일자리 구해 주는 것도 실적인가보다. 그동안 육체노동으로 얼굴이 반쪽 된 나는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네 이력서랑 주민등록등본 사진 두 장 가져가면 되지요."얼마 전 G마트가 망했다는 소문과 함께 L마트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사실인가보다.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라 차비는 안 들겠다 싶어 기뻤다. 맥도날드를 통한 임시로 드나드는 문으로 들어서자 건물 안은 분진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 다시 4층으로 내려오니 임시 사무실이 보였다. 건물 안에 들어선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가슴이 조이고 아팠다. 남자 직원이 청소도구는 창고에서 알아서 갖다 쓰고 구역은 사무실 1층 현장직원용 남자 화장실과 화장실 옆 비상계단 1층부터 8층까지, 그리고 지하 2층부터 B 7층까지 주차장이란다."저 혼자 그걸 다 해요?"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할 거 없어요. 슬슬 쓰레기 보이면 줍고 화장실 물기 없게 닦고 계단 마포질 하시면 돼요."남자 화장실 드나들며 화장지 채우고, 휴지통 비우고, 짬 짬이 8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포 질을 하는 일은 백화점일 보다 몇 배 힘들었다. 공사로 인한 분진으로 청소는 하나 마나였다. 싸 온 주먹밥을 사무실 귀퉁이에서 먼지와 함께 먹으며 눈물이 났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다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공사 중인 지하 주차장은 어둡고 더러웠다. 나무토막, 시멘트 덩어리. 광고지, 껌, 과자 부스러기, 가래침까지. 혀를 빼 입술을 축이면 먼지가 씹혔다. 물 마실 곳조차 없었다. 1층 맥도날드 매장을 기웃거리다 GS편의점에서 물을 샀다. 문 앞에서 한 병을 단숨에 다 마셨다. 지하 5층부터는 캄캄했다. 시멘트 작업만 끝낸 캄캄하고 넓은 공간은 으스스했다. 왠지 무서워 가끔 뒤를 돌아다보며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공사 중이라 엘리베이터도 운행하지 않았다.지하 7층에서 엉금엉금 기다시피 4층 사무실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직원에게 못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용역회사에 전화를 걸어 세 사람이 해도 못 할 일을 어떻게 한 사람에게 시킬 수 있냐고 항의하자 대충하지 그랬냐며 오히려 면박이다. 좀 쉬어야지 하는데 문자가 왔다. 일자리센터다. 이제 스토커 수준이다."병원 청소 해 보실래요?"문자를 무시했다. 어째 기분이 묘하다. 일자리센터 직원이 자신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뺑뺑이 돌리는 느낌이다. 뉴스에 나오는 취업률이 진짜일지 의심스럽다.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을 한 달에 몇 군데씩 돌리면 취업률은 가파르게 오를 것이다. 세탁공장 사장이 떠올랐다. 며칠씩 일하고 그만두는 노인취업자를 쓰면 노 임금으로 일 시키고 절세도 되고 꿩 먹고 알 먹기 아닐까. 능력치대로 취업을 시켜야지 이렇게 무작위로 취업을 시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탁상공론이거나 짜고 치는 고스톱, 둘 중 하나일 것 같다. 이제 청소라면 신물이 났다.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데 '어린이집 주방 선생님 구함' 광고가 보였다. 쉬어야지 했던 마음을 접고 전화를 걸고, 이력서를 챙기고, 사진을 챙기면서 이게 몇 번째지? 이번만은 좀 오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주방 일에 '선생님은 무슨'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어린이집은 우리 집 길 건너 아파트 1층이었다. (4)원장은 나이가 좀 많으시지만 깔끔하실 것 같다며 한 달에 삼십 만원인데 괜찮으시겠냐고 물었다. 맙소사 한 달에 삼십이라니 아무리 세 시간 일이라 하더라도 주말까지 치면 시급 사천 원도 안된다. 주방 담당을 채용하는 일은 어린이집 개원 시 필수 항목이어서 할 수 없이 쓴다며 자기가 해도 충분하단다. 잠시 고민하다 노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나를 설득 시켰다. 어린이집은 오전 10시에 출근해 바로 아기들 간식 차려주고 간식 접시 설거지 후 점심준비에 들어간다. 11시 반, 밥 안칠 시간 전에 반찬 네 가지를 찌고 볶고 끓이고 정신이 없다. 손이 기계처럼 움직여도 시간이 부족했다. 사흘은 좀 힘들었지만, 평소 하던 부엌일이라 그런지 금방 적응됐다.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말끝에 문창과 출신인 걸 알게 된 원장은 시간 되실 때 아기들 이야기 할머니 수업 좀 하시면 좋겠다고 한다. 봉사로 하시면 보람 있지 않겠냐는 말에 어이없어 원장을 빤히 쳐다봤다. 저임금에 공짜로 아이들 수업까지 시키려 든다. 이럴 땐 그냥 무시가 답이다.아이들 식단은 매주 주말 계획표와 나간다. 인쇄물을 보고 웃음이 났다. 골고루 영양밥에 반찬도 다채로웠다. 실상은 원장이 퇴근하며 들른 마트에서 그날, 그날 떨이로 재료를 산다. 식단 안내장 맨 밑에 메뉴는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별표까지 쳐서 집어넣은 문구가 함정이다. 보혐 계약서가 생각났다. 원장이랑 선생님들이 내가 해 주는 반찬이 맛있다고 하니 어쨌든 열심히 했다. 이제 나한테 딱 맞는 일을 찾았는데 문제는 보수가 최소 생활비가 안 된다는 것. 놀면 어쩌겠는가.아기들을 보니 힐링이 되었다. 내 손주들 먹이던 생각이 나 일이 즐거웠다. 금요일 아기들 소방서 현장학습 가는 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아이들이 먹을 걸 생각하며 초밥을 일일이 하트 모양으로 쌌다. 원장은 같이 가자 했지만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아쉬워했다. 가면 아이들 밥 먹이는 뒷바라지는 물론 아이들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 급료는 코딱지만큼 주면서 이 핑계 저 핑계 부려먹으려는 원장의 속셈이 얄미웠다.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 만드느라 잠도 못 잤는데 굳이 현장학습까지 따라가 수발들 일은 없겠다. 나도 이제 세상인심에 조금씩 눈이 뜨이는 모양이다. 어쩐지 그게 또 서러웠다. 내가 나를 잃어가는 것 같아서.일주일이 지나고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냉장고에 씻어놓은 지 오래되어 누런 쌀을 꺼내 밥을 하라는 원장과 의견이 부딪혔다. 손가락으로 쌀을 비비니 식혜 밥처럼 끈적거리면서 뭉개진다. 이 쌀은 내가 오기 전부터 있던 쌀이다. 몇 번을 씻어도 이상한 냄새가 나서 밥을 할 수 없다고 하자, 원장은 괜찮다고 자꾸 그 쌀로 밥을 하라고 요구했다. 괜찮다고 우기는 원장을 이길 수 없어 밥을 안쳐놓고 심란했다. 커피색 밥이 되었다.원장은 그 밥을 14개월 된 자기 아이에게 보란 듯이 먹였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먹이라는 무언의 시위다. 선생님들이 불안하게 원장을 쳐다보다 식판을 들고 각자 담임 방으로 들어갔다. 8개월 영아부터 4살까지 아기들이다. 고등어는 신선도가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고 채소는 물렀다. 여기까지 인가보다. 굶어 죽어도 이렇게 아기들에게 부당한 일은 할 수 없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주방을 맡은 내 책임이기도 하다. 저 어린 아기들에게 이런 걸 먹이다니. 부모들이 알면 당장 잡혀갈 일이다. 집으로 오는 신호등 앞에서 문자를 보냈다.'일 그만두겠습니다. 다른 사람 구하세요.'원장은 이미 눈치챘는지 다른 말 없이 통장번호를 보내 달라고 했다. 교육청에 신고할까 말까 고민하다 그만둔다. 동네라 자주 볼 수밖에 없는데 껄끄러운 일이다. 마음이 불편했다.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이라도 직언을 했으면 좋겠는데 아마도 선생님들도 직장을 계속 다니자니 쉽게 신고할 맘을 먹지 못하는 것 같다. (5)집에 오자마자 인터넷을 켰다. '아기 돌봄'을 입력하니 돌봄 무료 사이트가 나왔다. 신상정보와 함께 예전에 집에서 놀이방 했던 사진과 이야기를 올렸다. 일주일 후 11개월 된 여아와 집안일을 좀 해 줄 수 있냐는 전화가 왔다. 입주를 제시하며 보수는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했다. 나는 예민해서 남의 집에서 잠을 자지 못한다고 했더니 아기 엄마가 저녁 시간에 면담을 요청했다. 예전에 어린이집운영 할 때 찍은 사진과 손주들 간식 조리 과정을 찍은 사진을 보여줬더니 나한테 신뢰감을 가지는 눈치다. 안방에서 할머니가 나오셨다. 할머니 계시다는 말은 못 들어서 난감했다. 할머니를 도와줄 일은 없고 점심과 저녁만 드리면 된단다. 집에 어른이 계시면 여러 가지 할 일도 많지만, 어르신과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 반갑지 않은 환경이다. 시집살이 아닌 시집살이를 하게 됐다. 나쁜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다.아기는 처음 보는 나를 보고도 낯을 가리지 않았다. 까다롭지 않은 아기여서 마음이 놓였다. 아기는 잘 따랐지만, 50펑이 넘는 집이라 첫날부터 청소와 집안일로 진을 뺐다. 이유식과 동화책을 읽어 주라는 아기 엄마의 요구는 들어줄 시간이 없다. 할머니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세끼 밥만 드셨다. 밥이나 반찬도 요구사항이 많았다. 할머니는 아기를 전혀 돌보지 않아 화장실 갈 때도 아기를 안고 가야 했다. 일하는 짬짬이 아기를 쳐다보며 마음이 아팠다. 하루 일해 본 나는 집안일과 아기 돌보는 일을 병행할 경우, 아기를 책임 있게 돌볼 자신이 없다. 아기 돌봄 비에서 청소 도우미 비용을 내가 지출하겠으니 청소 도우미를 쓰자고 제안했다. 아기 엄마는 집에 다른 사람 들이는 일이 신경 쓰이는지 난색을 지었다.결국, 아기 엄마는 아기가 처음 보는 나를 잘 따르자 아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것 같다며 청소는 자기네가 알아서 할 테니 아기만 잘 봐 달라고 사정했다. 이튿날부터 청소는 할머니가 하고 나는 아기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 세끼 각기 다른 이유식을 정성껏 끓여 먹이니(지난번 이모님은 한꺼번에 많이 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일주일씩 먹였다고 한다) 금방 조리한 이유식이라선지 아이가 입맛을 다시며 잘 받아먹었다. 할머니는 아기가 이렇게 잘 먹는 거 처음 봤다고 좋아하셨다.청소를 안 해도 할머니 점심과 저녁 준비, 세끼 이유식 준비, 빨래, 아기 목욕 등 바빴다. 가족들은 아기가 잘 먹으니 모두 좋아했다. 나도 아기가 잘 먹고 잘 노니 기뻤다. 나와 아기의 노는 소리가 거실 안을 가득 채웠다. 아기들은 몸으로 놀아줘야 좋아한다. 할머니는 청소하면서 아기와 뒹구는 내가 못마땅한지 툴툴거렸지만 못 들은 척 넘겼다. 아기는 할머니에게 잘 가지 않는다. 그동안 할머니와의 관계 형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할머니는 손녀딸을 예뻐하기는 하지만 한 번도 안거나 업어주는 걸 본 적이 없다. 몸을 유난히 챙기셔서 각종 건강식품과 영양제가 싱크대 한 칸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저녁때가 되자 아기가 칭얼댔다. 할머니는 전기를 아낀다고 거실 불을 껐다. 거실 등을 모두 켜자 다시 잘 논다. 아기가 있는 집은 밝아야 한다. 시력에도 문제가 생기지만 성격에도 문제가 생긴다. 어른도 어두컴컴한 집에 있으면 우울증 걸린다. 아기들은 밝은 데서 밝게 키워야 밝은 성격으로 자란다. 냉장고를 다섯 대씩 켜면서 거실 불을 켜지 못하게 하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냉장고엔 각종 곡식과 마른 건어물이 넘쳐났다. 집에서 밥 먹는 사람은 할머니와 아기뿐인데 냉장고 다섯대가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기가 전날 잠을 못 자 아침부터 칭얼거렸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11시 반부터 낮잠을 잤다. 세 시간을 자고 일어난 아기는 기분이 좋았다. 준비해둔 밤 이유식을 쩝쩝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할머니가 날이 갑자기 추워지니 목욕부터 시키자고 했다. 목욕을 끝내고 나오자 이유식 먹인 그릇 치우지 않았다고 할머니가 노발대발이다."아기 잘 때 뭐하고 주방이 이게 뭐요?"이유식 먹인 아기 그릇과 수저 하나가 물에 담겨 있었다."아기 잘 때 다 치웠었는데 자고 나 먹인 그릇이에요. 금방 치울게요.""저번 이모는 아기 잘 때 같이 자도 일 다 해 놓고 아기 일어나면 같이 뒹굴고 놀았는데 일을 도대체 하는 건가 마는 건가."할머니는 청소 때문에 심기가 불편함을 이런 식으로 푸는 것 같았다."아기 잘 때 늘어 논 게 아니고 아기 일어나서 이유식 먹인 거라고요.""뭘 잘했다고 말대꾸는, 어른이 말하면 네 다음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 것이지.""그게 아니고 상황을 설명하는 거지요.""상황? 이 상황을 보고 그런 말이 나와?""이유식 먹자마자 할머니께서 목욕시키자고 하셨잖아요.""아기 잘 때는 뭐 했냐고?"할머니의 이야기는 거기서 맴돌고 있었다."할머니 제가 할머니와 지내는 게 힘들 것 같네요.""뭐야 그만두겠다는 거야?""할머니 마음에 들게 할 수 없으니 저도 답답합니다.""우리 집은 할 일 없어, 뭐 할 일 있어? 저번 이모는 맨 날 애기끼고 잠만 자더만."그러니 아기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았냐고 하려다 말았다. 무슨 말이 먹히겠는가."저는 할머니하고 잘 지내고 싶은데 제가 능력 부족이라 아무래도 빨리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아기도 사람 자꾸 바뀌면 좋을 거 없고요. 저랑 정들기 전에 그만두는 게 좋겠네요."할머니와 잘 지내지 못하리라던 내 우려는 정확하게 맞았다. 옛날 마음대로 식모 부리던 버릇이 몸에 배어있는 할머니와 나는 어차피 평행선일 뿐이다."이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듣네. 박카스 파는 것보단 이게 훨씬 떳떳하지""네? 박카스를 팔다니요.""공원에 가면 얼굴 반반한 좀 젊은 5, 60대 할마시들이 할아버지에게 박카스 팔잖아.""그게 무슨?""이런 눈치 없기는 자네처럼 얼굴 반반한 할마시들이 박카스 사세요, 하면 할아버지들이 오천원, 만원으로 몸도 산다잖아. 그것보다는 우리 집에서 일하는 게 백번 낫지 않겠어?""?……"할머니는 딸에게 지청구 들을 생각에 아무 말이나 던졌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아기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기 엄마가 달려오고 상황을 다 들은 아기 엄마가 당황하며 사과를 했다. 할머니가 같이 계시는 한, 똑같은 일은 계속 벌어질 것이다. 휘청거리며 아이 집을 나섰다. 할머니가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 잇자국과 함께 피가 베어 나왔다.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가 쇠망치를 얹어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슈퍼에 들러 대용량 맥주 두 개를 샀다. 두통약을 꺼내 먹다 이쯤에서 생을 마감한들 아까운 생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파트는 정서향이어서 저녁놀이 지는 풍경이 일품이다.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늘을 물들인 노을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와인 잔과 맥주병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풍경이 죽인다. 이 풍경 속에 죽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와인 잔을 치켜들자 맥주가 노을에 붉게 물들었다. 맥주에서 와인 맛이 날 것 같다. 베란다에서 일몰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오후 여섯 시 경이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자꾸 웃음이 나왔다. 무엇을 위해 그리 열심히 살았던가. 밤새 싸우고도, 죽게 아플 때도, 남편의 바람으로 일주일 굶으면서도 식구들 밥은 악착같이 차렸다. 밥을 하는 일을 나는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을까? 35년 밥순이 마지막은 허망했다. 노을이 맥주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맥주를 마시며 부질없는 내 생에 자꾸 헛웃음이 났다. 미친 걸까? 미쳐가는 걸까? 이래도 저래도 좋다. 나를 여기서 끝낼 수 있어서 황홀하다. 약통에서 약을 꺼내 술 한 모금에 약 몇 알씩 털어 넣기 시작했다. 대용량 맥주 두 병에 소염제, 진통제, 두통약 안주는 술술 넘어갔다. 무엇이든 많이 먹으면 잠들지 않을까? 약이던, 술이던. 자 복잡한 인생이여 안녕! 약통 한구석에 있던 시신 기증서와 장기기증 증서를 식탁에 꺼내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먼지로도 남고 싶지 않다.'는 한 문장과 함께 잠이 들었다. 그날, 구차한 생 버리고 결단코 죽어버리겠다고 실행했던 그 일은 낌새를 알아챈 동창이 후배를 시켜 방해했다. 119와 경찰차가 오고 평소에 문을 잠그지 않고 살던 내가 겹겹이 문을 잠그고 실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불발로 끝났다. 베란다 창문을 잠그는 걸 깜빡해서다. 걸쇠를 채운 현관을 열 수 없자 119소방대원이 윗집 베란다를 통해 자일을 타고 우리 집 베란다로 진입했다. 동창이 그 일을 알아챈 것은 내가 시그널을 보냈기 때문이란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부디 잘살라고 전화를 했단다. 난 기억에 없다. 이 동창은 시각장애인이어서 자기가 올 수 없으니 우리 동네 가까이 사는 친한 후배를 시켰다. 내가 많이 아픈 것 같으니 가보라고 했단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던 후배는 평소에 문을 잠그지 않던 현관문이 잠긴 걸 보고 느낌이 이상해 119를 불렀다. 잠긴 문을 열기 위해 경찰을 부르고 집에 들어온 후배가 나를 일으켜 앉히고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 바짝 압박하자 술과 약들이 토해졌다. 이 후배는 간호사 출신이다. 몇 번의 토사로 정신이 들었다. 그렇게 자살 해프닝은 해프닝으로 끝났다.살면서 내 주변엔 사람이 참 많다. 먹이는 거 주는 거 좋아하고 얘기하기 좋아하는 내 성격 탓이다. 나는 어쩌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려 했을까? 고생을 모르고 살아서? 라고 생각하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한 생각이 떠올라 억울했다. 각종 폭력을 세트로 휘두르는 남편은 사랑과 전쟁 드라마를 쓰라면 백 편도 쓸 수 있다. 아직은 보이고 싶지 않은 내 치부여서 내어놓지 못한다. 내 아이들이 받을 상처 때문이다. 억울해도 함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짐을 쌌다.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다. 언니가 비워둔 집에 임시로 살고 있었다. 나는 내게 베푼 언니에게 하마터면 큰 상처를 줄 뻔했다. 떠나는 게 옳다. 강화도로 가 무상거주자가 됐다. 강화도는 추웠다. 함께 사는 분들의 배려로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육을 받으며 일단 생활비가 필요했다. 결혼한 아들에게 마지막 비상금을 털어주고 한 달에 오십 만 원씩 갚으라고 했다. 그걸로 생활비를 쓰고 교육을 마쳤다. 시골은 생활비가 많이 들지 않아 그럭저럭 견뎠다.교육을 끝내고 실습을 한 요양병원은 김포에서 가장 큰 요양병원이었다. 2주일은 요양병원에서 2주일은 주간 보호 센터에서 실습을 했다. 호스피스 봉사를 장기간 한 덕에 실습이 어렵지 않았다. 다른 실습생보다 앞장서 일하며 이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욕하는 날, 목욕실 앞에 어르신들 줄 세워놓고 목욕을 시키다 쓰러졌다. 뼈가 드러난 어르신들을 보면서 돌아가신 엄마의 뼈가 드러난 이마와 볼과 갈비뼈가 생각났다. 살이 없어 시퍼렇게 멍들었던 엉덩이도 생각났다. 그 모습에 내가 겹치면서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갑자기 목이 막히며 현기증이 났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같이 교육받던 사람들은 그동안 열심히 앞장서서 일하던 내가 쓰러지자 어리둥절했다.주간 보호 센터에는 거의 치매 어르신들이 오신다. 경증 치매 어르신이라 소통도 가능하고 오락도 가능하다. 낯을 잘 가리고 남 앞에 서지 못하던 나를 벗어버리고 어르신들 앞에 서서 노래도 하고 춤도 췄다. 포장된 나를 하나씩 벗어버리고 다섯 살 어린아이처럼 뛰어놀았다. 이전의 나를 기억하면 견뎌낼 수 없을 것이므로 이전에 할 수 없던 것들을 용감하게 하기로 작심했다. 그래 인생 이모작이다. 이제부터 예전의 나는 없다. 실습주간 보호 센터에서 만난 두 할머니가 있다. 김 할머니는 말씀이 없는 조용한 분이고 노 할머니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노래와 춤으로 흥을 발산하는 할머니다.김 할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만 짓다 치매가 시작되어 아들 집으로 오셨다고 한다. 종일 말 한마디 없는 할머니께 나는 주로 몸으로 대화한다. 어깨를 안는다거나 두드리거나 주무르거나 두 손을 마주 잡고 일어서서 흔든다. 일부러 바짝 앉아 무릎과 무릎을 끼우고 장난질을 치기도 한다. 몸짓언어가 익어가자 가끔 할머니가 수줍게 웃었다. 체조도, 그림 그리기도, 노래도, 따라 하지 않는 할머니 옆에서 나는 몸으로 장난질을 친다. 할머니 옆에서 혼자 춤추고 혼자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혼자 노래를 부른지 사흘 만에 할머니가 먼저 내 팔을 톡톡 쳤다. 모른척하자 팔을 잡아 흔들더니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까 입에 넣어 준다. 간식시간에 준 사탕이다. 이제 됐다. 걸쇠가 풀렸으니 천천히 다가가면 되겠다 싶었는데 다음날 할머니가 배탈이 났다고 오시지 않았다. 이틀 후 오신 할머니는 많이 초췌해지셨다. 눈으로 나부터 찾았다. 나를 보고 벌쭉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먼저 손잡아주고 먼저 등 두드려주고 먼저 무릎을 치며 장난을 걸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다. 처음으로 스스로 그림도 그리고 노래는 따라부르지 않아도 손뼉도 치고 나와 손잡고 춤도 췄다. 점심시간에 밥에 생선을 발라 올려 나 보고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먼저 드시라 하니 도리질 치며 '내해여, 내해여' 단호했다. 그렇게 할머니와 나는 주간 보호 센타 cc가 됐다. 원장님과 면담으로 할머니 사정을 알게 됐다. 치매로 혼자 시골에 계시는 게 위혐해 아들 집에 오셨는데 냉담한 며느리와 지내며 우울증에 걸렸단다. 평생 나고 살던 곳 떠나 낯선 곳에 처음 오신 할머니는 치매보다 우울증이 더 깊었다. 종일 말 한마디 걸지 않는 며느리와 한집에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드셨을까. 말씀도 안하고, 식사도 안하고, 그동안 아무리 선생님들이 애를 써도 마음을 안 열더니 이 선생님보고 마음을 연 것 같다며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어차피 나는 실습 끝나면 떠나야 한다. 이제 마음 열었는데 걱정이라는 원장님 말씀대로 나도 걱정이 됐다. 실습 마지막 날, 할머니와 마주 앉았다. 그날 처음으로 할머니는 나에게 살아온 긴 이야기를 하셨다. 어렵게 마음을 연 할머니의 눈동자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실습이 끝나 내일부터 못 온다는 내 말에 두 손을 꼭 잡고 결국 눈물을 떨구셨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시 한 수 지어봤다.제목 : 내해여, 내해여평생 땅만 바라봐서 / 땅하고만 이야기 할 줄 안다는 어르신 / 여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여/흙 한줌 없는 곳이 어데 사람 살데여 / 아들 따라 낯선 동네 와보니 / 겨울바람처럼 쌩한 며느리 밥 / 그냥 목구멍에 처넣으면 죽기야 하련 / 밥을 퍼 넣다 혼절 하셨다던데 / 밥 위, 얹어드린 생선 토막과 나를 한참 쳐다보다 / 일주일 만에 처음 입 여셨다 / 샥시도 묵으야지 수저를 내민다 / 눈물 한 방울 얹어 밀어 넣자 / 내해여, 내해여 / 한껏 신명 나셨다 / 무엇이 내해일까? / 아무것도 내해인 것이 없었던 서울살이 / 병원 밥은 아들 밥이니 / 내해인 걸까? /아님, 할머니 마음이 내해인 걸까?*내해여-내 것이여 라는 전라도방언지루박 노 할머니는 흥이 많아 늘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 메이커다. 노 할머니와 전 할머니가 할아버지 한 분과 삼각관계가 벌어졌다. 할아버지를 두고 두 할머니의 신경전이 주간 보호 센터 가십거리 되었다. 할아버지는 노 할머니보다 음전한 전 할머니를 더 좋아하셔서 몰래 가방 선물을 했다가 노 할머니한테 들켰다. 성격이 화통한 노 할머니는 할아버지 앞에서 한바탕 춤을 추며 자신의 매력을 발산했다. 다시 한번 기회 주는 거니 나한테 넘어오라고 검지를 까닥거리며 춤을 추어 모두를 배꼽 빠지게 웃겼다. 여기도 치열한 한 세상이다.제목 : 지루박 할머니허리가 예전 같지 않아 박자를 놓친다며 / 앉아서 들썩들썩 춤사위 펼치는 노 할머니 / 노인대학에서 갈고닦은 실력, 20여 년이라며 / 이어폰 꽂고 간들간들 앉은뱅이 춤추다가 / 그것도 힘겨운지 까딱까딱 졸다가 / 겨우 5분 쪽잠 자고 일어나 / 이어폰 다시 꽂고 춤 삼매경 / 오 분 전, 지루박 가락 타고 어디 가셨다 / 생의 박자 놓친 걸까 / 신나게 지루박 차차차 스텝 밟으며 / 아~싸 머리 위 열 손가락 / 엇박자로 어깨 추임새 넣으며 / 인생 뭐 별거 있냐며 / 뒤로 갔다, 앞으로 왔다 / 제대로 즐기는 살아있는 시간 (6)실습을 끝내고 요양보호사가 됐다. 첫 출근 한 집에는 청각장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쉬는 꼴을 못 봤다. 할머니가 넘어져 허리 수술을 받고 요양 보호를 받게 됐는데도 쉬려고 집에 있으면 밭에 일거리 두고 논다고 역정을 냈다. 당뇨가 심한 할머니는 깡마른 몸으로 땡볕에서 종일 일을 한다. 반대로 멀쩡한 할아버지는 가끔 보일러나 경운기를 살피는 일 외엔 하는 일이 없다.할아버지가 볼일 보러 읍내 나간 날, 할머니께 조심스레 지금 할머니 건강상태가 일할 상황이 아닌데 밭일은 할아버지가 해야 하지 않냐고 물었다."시집올 때 친정이 찢어지게 가난해 입하나 던다고 땅뙈기나 있는 영감한테 시집와 이날 이때까지 나는 종이오 종. 밥 먹여주는 조건으로 귀머거리 영감한테 시집와 평생 땅만 파고 있다우. 오 남매 낳아 애들 키우며 밤낮으로 밭으로 논으로 살다 보니 몸이 이 지경이 되었고만. 자식들도 지 애비가 날 우습게 여기니 어미를 지들 수족처럼 부리는 하인으로만 여기는 것 같소. 팔자가 그런 걸 어쩌겠소. 여적지 내가 한일 노임이나 받아 나도 한바탕 여행이나 댕기다가 죽고 싶고만."할머니를 돌보러 갔는데 돌봐 드릴 새 없이 일하는 할머니. 밭일 할 수는 없어 할아버지 밥해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보호자 일은 하지 않는 게 요양 보호 원칙이었지만 아픈 몸 끌고 종일 밭일에 매인 할머니를 위해 부엌일이라도 덜어드리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이곳은 아직도 1900년대 조선 시대에 머물러 있다.서울과 인천에 사는 자녀분들은 어머니의 이런 생활을 알고 계실까? 딸 전화번호를 물어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의 몸 상태로 밭일 하는 건 무리이니 아버님께 말씀드려 좀 쉬시게 해 드리자고 했다. 어머니를 바꾸라고 하더니 긴 통화가 이어졌다. 얼굴이 빨개진 할머니는 아무 말씀 없었지만, 전화기 밖으로 따님의 목소리가 격양되어 대충 짐작이 갔다. 요양사에게 어머니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오히려 어머니께 잔소리를 늘어놓는 모양이었다. 공연히 할머니 심정만 더 상하게 해 드려 죄송했다.평생 돈 한 푼 만져본 적 없다는 할머니. 파마하러 갈 때도 할아버지께 허락받고 미용실에 전화 걸어 비용을 물어보고 준단다. 그래도 당뇨 검사는 아침마다 거르지 않고 해 주는 할아버지 마음은 무엇일까. 할머니가 건강해야 일을 더 부려먹을 수 있다는 욕심이 아니길 빈다. 여기서 일을 끝내면 한시다. 한시에 이웃해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더 돌보게 됐다. (7)아흔 살 김 할머니는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가끔 쌍지팡이를 짚고 마당을 산책하며 2층을 올려다보는데 정면으로 보는 게 아니라 흘깃 옆 눈으로 본다. 2층에 가시고 싶으시냐고 물으면 화들짝 놀라 다리아파 못 올라간다고 한다. 종일 사위가 일하는 헛간을 바라보거나 마당을 어슬렁거리다가 강아지에게 느닷없이 욕을 하며 지팡이를 휘두른다.2층에 사는 딸이 반찬을 해오면 할머니는 늘 '안 먹어 너나 처먹어.'라며 역정을 냈다. 휴가철에 서울 사는 자녀와 손자들이 왔다. 얼굴에 빛이 나며 마중 나간 할머니 걸음은 그들을 따라잡지 못해 2층 계단 앞에 딱 멈췄다. 계단 앞에 앉아 할머니가 나를 손짓했다. 안다시피 올라가 현관문을 열자 딸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할머니가 털썩 마루에 앉자 거실에 둘러 앉아있던 자녀들과 손녀들이 뜨악한 표정이다. 누구도 할머니를 반기거나 마주나오지 않았다.황급히 내려오는데 죄지은 것처럼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다음 날 할머니는 천상에 다녀온 것처럼 밝은 표정으로 어제 먹은 음식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딸은 나를 불러 어쩌려고 올라왔냐고 눈살을 찌푸렸다. 자녀들이 다녀가고 며칠 후부터 할머니가 식사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밥상을 뒤엎기 시작했고 파리채로 나를 때리기도 했다. 창살 없는 감옥이다. 주위의 시선 때문에 요양원은 못 보내고 함께 지내는 건 싫은 자식들. 요양보호사 일하면서 보니 자식들이 부모에 대한 예의가 없다. 부모를 홀대하는 자식들 저들은 평생 늙지 않나? (8)아들한테서 쌍둥이 손녀들을 돌봐 줬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강화도를 정리하고 성남 아들 동네로 이사를 왔다. 오자마자 센터를 찾아 일거리부터 예약해 놓았다. 쌍둥이 손녀들은 어린이집에서 오후 4시에 오니 그동안 일을 할 수 있다.93살인 권 할머니는 60살 미혼 아들과 살고 있다. 이른 아침 아들은 문을 잠그고 외출하고 내 퇴근 시간에 맞춰온다. 명절이 지나고 할머니 얼굴에 생기가 돈다. 자식들이 선물한 과일이며 과자 등을 내보이며 자랑할 때면 꼭 어린아이 같다. 나를 붙들고 자식들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어렸을 적 이야기로 신이 난다. 내가 활동하는 3시간 내내 혹시나 자식 이름 하나라도 잊을세라 칠 남매 이름을 외우고 또 외우는 할머니.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손가락을 접으며 똑같은 이름이 되풀이 호명한다. 명절이 멀어지면 할머니의 기억도 퇴색되어가고 콱 죽고 싶다며 삶의 의욕이 떨어진다. 식사량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할머니는 아직 화장실 갈 때 혼자 가시는데 혹시라도 들여다보면 불같이 화를 냈다. 어느 날 팬티를 갈아입다 팬티에 배변 덩어리를 본 할머니는 곧 식사 거부와 함께 몸져누웠다. 배뇨 장애는 어르신들이 가장 난감하게 여기는 마지막 보루다. 밤에 팬티에 실례를 한다고 아들이 점점 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께 함부로 대하는 아들은 어머니 몫으로 나오는 기초생활비가 필요해 어머니를 요양원에 입소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아들은 매일 교회로 출퇴근 한다. 어머니 식사는 씹지 못한다는 핑계로 늘 배추에 된장 풀어 끓인 것이 유일한 반찬이다. 덕분에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지만, 종일 똑같은 말씀에 맞장구를 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날, 할머니께 폭력을 쓰는 아들을 말리다 그 일로 나와 크게 다퉈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9)동창이 장애인 활동 보조인 교육을 권했다. 요양 보호 자격증이 있으면 2주 교육 후 활동이 가능한데 요양 보호보다 급료가 많다고 했다. 요양 보호 일을 잠시 쉬고 교육을 받았다.가까운 센터에 등록하자마자 바로 연결이 되어 정신장애 2급인 여자분을 돌보게 되었다. 이분은 말이 없다. 내가 먼저 말을 걸면 그저 웃거나 고개를 젓는다. 만난 지 일 년 다되어 가도록 우리의 대화는 내가 "비둘기가 많이 모였네." 하면 "비둘기", 산에 올라 지저귀는 새들의 합창 소리에 "새소리 참 맑지요." 하면 "새" 먼저 말을 거는 유일한 단어는 가끔 용변 볼 때 "화장실" 정도다. 아침 9시에 정신병원 데려다주고 오후 세 시에 데리러 간다. 세시부터 여섯 시까지 사회생활 적응 활동으로 나와 함께 움직인다. 우리가 가는 곳은 정해져 있다. 보건소, 지하철역 지하상가, 우체국. 중앙시장. 세이브 존, 이마트, 동네 뒷산, 세 시간 동안 이곳들을 돌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용자는 의사 표현을 전혀 하지 않아 표정으로 뭔가 불편함을 알아채서 대처해야 한다. 항상 무표정이어서 특히 몸이 아플 때 난감하다. 아픔을 못 느끼는 건지 참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을 하지 않아 곤란한 일을 몇 번 겪었다. 돌아다니는 것도 지겨울 즈음 이용자분에게 그림 그리기를 시켜보니 그림을 썩 잘 그렸다. 며칠 신나서 그리더니 갑자기 그림 그리기를 멈췄다. 강요하지 않고 같이 책도 읽어보고 뜨개질도 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다. 몇 번은 열심히 하는데 세 번 이상 시키면 그대로 멈춤이었다. 영화도 보러 가고 요리도 같이 해 보고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즐겁게 하루를 보내도록 노력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왠지 녹녹지 않다. 내 학력을 묻더니 선생님이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평생 데리고 산 나만큼 잘 알겠냐는 말은 물론 수긍한다. 그러나 이용자를 위해 의논 차 꺼낸 말끝마다 '해 보시던지' 흥흥 콧방귀에 비웃음이다. 느낌이 이상해 출근 시간을 정확히 하자며 보호자 분이 원하는 시간으로 쐐기를 박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일찍 가서 혼나고, 어제는 늦게 가서 혼나는 날들. 나의 출근 시간은 항상 비슷하다. 8시 20분에서 30분 사이. 그러나 출근하면 어김없이 퉁을 놓는다. "왜 이렇게 일찍 와!" 또는 "늦게 오면 어떻게 해" 출근 시간 일정하지 않았냐고 항의했다가는 대문 앞에서 삼십 분 설교를 들어야 한다. 왜 화를 내는지 이유도 모르고 당하는 나는 죽을 맛이다.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니 나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노릇. 감기 걸려도 내 탓! 생니가 빠져도 내 탓! 하혈해도 내 탓! 살찐 것도 내 탓! 매일 매일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힘들어 저녁이면 녹초가 됐다. 더구나 퇴근 시간을 멋대로 조정해 난감하게 한다. 근무 할당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 시간을 채워야 급료를 받을 수 있다. 출퇴근 시간은 물론 어떤 때는 몸이 불편하다고 보름씩 출근을 못하게 하니 내 월급은 반 토막이 났다. 그렇다고 그분과 계약이 되어 있어 다른 분 일도 할 수 없다. 센터에서 정해준 시간을 가짜로 체크해 시간을 채우란다. 체크카드를 가지고 다니며 내 맘대로 체크하는 것은 불법이다. 걸리면 그동안 타 먹은 급료 다 토해내고 자격증 반납이다. 그게 아니라도 선뜻 내키지 않는 행동이다. 당신은 입에 지퍼 채울테니 일 안하고 돈 버는데 뭐가 문제냐고 했다. 다른 선생님들도 다 그렇게 했다며 바보 취급이다. 단호하게 그건 불법이라 할 수 없다고 하자 배가 부른 게라고 눈을 흘겼다. 이런 일 하는 주제에 잘난 척이라도 하는 거냐고 비웃는 어르신도 내가 보기엔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보였다, 두 달 실랑이 끝에 센터에 보고하고 일을 그만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제일 오래 했다고 한다. 먼저 하셨던 선생님이 나를 보면 걱정스런 얼굴을 하셨던 이유를 알겠다. 어쨌든 그 이용자 때문에 일 년 동안 먹고 산 것은 사실이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10)과장님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호흡기 환자인데 급해서 그러니 잠깐 고정인원 배치할 때까지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과장님이 특별히 부탁하는 이유는 나는 남자환자는 맡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잠시만 맡기로 하고 보호자를 만났다. 수더분한 보호자는 첫 만남부터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오랜 투병 생활로 예민한 환자라 걱정이 되긴 했지만, 보호자의 후덕한 인상으로 거절하기 힘들었다.호흡기 환자라 침대 옆에 복잡한 산소 호흡기가 있다. 기계를 다뤄보지 않은 나는 겁이 났다. 이용자가 작동 방법을 아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유사시에 이용자가 혼절하거나 하면 응급처치를 내가 해야 한다. 기계 다루는 방법을 숙지해야 했다. 그런데 기계에 손만 대면 이용자는 예민해졌다. 일반 산소 호흡기와 달리 복잡했다. 산소 호흡기 옆에 식염수를 채워 넣는 기계가 있는데 수압에 예민하게 작동한다. 늘 수압을 체크하고 식염수가 줄어들면 채워 넣어야 한다.아침에 출근해 이용자 거처를 청소하고 점심준비를 했다. 보호자가 점심때 먹을 밑반찬을 칸이 있는 사각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찌개나 국만 끓이면 되었다. 점심을 안치는데 이용자분이 밥물을 보잔다. 밥물 계량법을 설명하기 시작하더니 같은 말을 계속하다가 가만히 듣기만 하는 나를 보고 역정을 냈다. 밥물 교육을 삼십 분이나 받은 나는 어이가 없었다. 반찬 할 때도 마찬가지다. 총각 때 자취를 오래 해서 음식을 잘한다는 이용자분의 이상한 조리법은 맞출 수가 없다.이 이용자분의 눈은 종일 내 동선을 따라 다닌다. 세평 남짓 공간에서 이용자의 눈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묘연했다. 정면으로 바라보면 좋으련만 자꾸 곁눈질로 바라보니 더 이상하다.족욕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발을 담그자 각질이 둥둥 떴다. 준비해 간 일회용 장갑을 끼고 때수건으로 발바닥이며 발을 문지르니 때가 둥둥 떠다녔다. 물을 세 번이나 갈았는데도 여전히 둥둥 뜨는 이물질들. 바가지로 물을 끼얹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마무리했다. 용품을 정리하며 개운하냐고 묻자 손을 내밀었다."왜 그러세요? 화장실 가실래요?"손을 잡으니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이고 내 손을 조물락 거린다. 소름이 끼쳤다."거기는 내 발 닦아주며 어떤 느낌이 들어? 난 아무 느낌이 없어.""내가 남자로 느껴져? 뭐가 느껴 지냐구?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이거 성추행이에요. 이러시면 앞으로 케어 못 받으시니 조심하세요."과장님과 면담을 요청했다. 이건 아무래도 성추행 전초전이다. 과장님은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니냐고 했다. 그 후로 발을 닦아 주는 일을 그만두고 그냥 수건에 따뜻한 물 묻혀서 닦아줬다. 최대한 신체 접촉을 피하고 싶어서다. 제 복을 찬 셈이다. 이용자의 시선이 나를 감옥에 가뒀다. 센터에서는 장기 근무자를 구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그 말은 이 이용자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이용자가 응급실을 두 번 다녀오고 점점 호흡이 나빠졌다. 그날은 유난히 날씨기 화창했다. 이용자의 호흡이 이상 증상을 보이며 기계의 눈금이 정상보다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달려가 이용자를 안아 침대에 눕히려는 순간 내 허리를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경련 증상인 줄 알고 마주 안고 괜찮냐고 물어보다 기겁을 했다. 이용자의 손이 내 허리에서 엉덩이 쪽으로 내려오며 쓰다듬는 느낌에 소름이 쫙 돋았다. 손길을 뿌리치고 물러나,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만족한 미소가 드러나는 이용자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입술이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용자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혼란 속에 이용자 손을 잡으니 자꾸 앞으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앞으로 가니 아까처럼 또 허리를 끌어안는다. 잠시 생각을 해봤다. 분명히 기계에 이상 증상이 표시됐는데 도대체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호흡에 이상이 와 힘들었을 텐데 이용자의 행동은 자살행위다. 이용자는 숨쉬기 힘들면서도 가까이 가면 또 허리를 더듬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던 것 같다."무슨 짓이에요? 이거 성추행이에요. 제 돌봄은 여기서 끝입니다."이용자가 손을 저으며 가라는 시늉을 했다. 얼굴이 백지장 같은 이용자를 두고 나와도 괜찮을지 갈등하다 도저히 진정되지 않아 부들부들 떨며 센터로 향했다. 남자 이용자를 기피하는 이유는 거의 성추행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을 하는 선생님들은 차라리 의식이 없는 분이 아니면 남자 이용자는 기피목록 1위다.내가 돌봄 했던 이용자분들 중 좋은 분들도 많다. 때로는 고구마 한 개, 옥수수 한 개, 또는 알사탕 하나로 고마움을 전하던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열악한 환경은 너그러움보다 짜증을 유발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숨이 깔딱거리면서도 성추행하는 이용자를 만나면 분노가 치민다. 요양 보호와 장애인 돌봄을 하면서 만난 이용자와 보호자 생활 수준은 대체로 낮았다. 대개 저소득층으로 기초생활 수급자가 태반이다. 또한, 교육수준도 낮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욕구가 뒤엉켜 있어 피해의식도 많다. 정상적인 소통이 힘든 부분이 많아 대화할 때 항상 조심스럽다. 그 반면 자신의 현재 위치가 사람을 부리는 위치라는 걸 지나치게 인식해 요양보호사와 장애인 돌봄 인을 하대하는 경향이 있다. 요양 보호법은 가족이 가족을 보살피면 요양 보호 자격증이 있어도 보수를 주지 않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요양보호사를 쓴다. 그래서 보호자들은 없는 살림에 요양보호사가 받는 보수가 배가 아픈 것이다. 이용자가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하면 가족들은 우리가 이용자로 인해 벌어먹는데 뭐가 고맙냐고 화를 냈다. 어느 순간부터 이용자도 심심하면 그 이야기를 곶감 빼먹듯 한다. 그분들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어쩐지 슬프다. 물론 그렇지 않고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분도 있다. 요양보호법은 저소득층을 보호하기 위한 복지법이다. 나라에서 지급하는 임금은 국민의 세금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부린다는 계급의식이 있다. 그래서 뜬금없는 갑질을 한다. 그런데 이 갑질이 왠지 짠하다. 물론 요양보호사나 장애인 돌봄인의 학력을 문제 삼을 수도 있겠다. 학력 제한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 일을 위한 교육과 시험을 통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6개월의 교육과 실습은 하루 8시간씩 강행되고 공부하지 않으면 시험에 합격할 수 없다. 에필로그내 나이 예순아홉, 내년이면 일흔이 된다. 늘그막에 먹고 살기 위해 학력과 이력을 속인 내 인생은 아이러니다. 결혼과 함께 시어른들 모시고 남매 낳아 기르며 한 번도 나 자신의 삶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그 벌을 60대 초반에 톡톡히 치렀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온갖 일, 다 겪으며 그것이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명절이면 백 명의 손님을 치렀고, 시동생 결혼식 음식도 시할머니 상을 당했을 때도 집에서 삼백 명 손님을 혼자 치렀다. 심지어 시 외삼촌 상을 당했을 때도. 그 집 딸과 며느리는 방안에 앉아 울기만 해 그 많은 손님 수발을 혼자 하느라 상 나던 날 쓰러졌다. 그때는 관혼상제를 다 집에서 했다. 하다못해 친척들 돌 백일 약혼식 결혼식까지. 시댁은 물론 시할머니 친정 시어머니 친정 일까지 불려 다녔다. 그곳의 내 역할이 내 한평생이었고 그 일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황혼 이혼으로 이 모든 역할이 해제됐다. 내가 지은 건물을 버리고 이혼을 택했던 이유는 오직 남편으로부터의 자유였다. 대학생 남매를 데리고 나온 나는 이미 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 들었다. 어쩌면 나를 찾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평생 하고 싶던 문학 공부를 하기 위해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나의 늦은 공부는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글쓰기보다 호구지책이 먼저였다. 취업 분투기가 나온 배경이다.나는 글쓰기 수업에서 아이러니가 어렵다고 고백한 적 있다. 그러나 나의 삶이 아이러니다. 육십을 넘기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나의 직업 분투기는 치열했다. 일흔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이른이다. 이른(일흔) 前 나의 분투기가 이른(일흔) 後 내 삶의 초석이 되길 기원한다.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경험이 글이 되었다. 기초 수급자가 되어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기초생활이 해결되니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 사방 벽 길이가 다른 원룸에서 다리미판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쓴다. 하나, 둘 작품을 완성하는 기쁨은 나를 설레게 한다. 이제 시작이다.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이른 결심을 축하받고 싶다.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버즘나무 댁' - 박정화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버즘나무 댁' - 박정화

"뜨겁다 빨리 나온나 집에 가자"1200도의 불 속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컴컴한 수렁 같은 화구 속을 들여다보며 목이 터지도록 그를 불렀다. 영혼도 불에 타는지 그렇게 혼을 불러내야 한다고 화장장의 늙은 인부가 일러 주었다. 넉넉하게 얹어준 저승길의 용돈으로 기분이 좋은지 화장장의 인부는 실실 웃고 있었다. 내 속에서도 1200도의 불길이 솟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어 던져 버렸다. 이 부당한 죽음 앞에서 살겠다고 마스크를 끼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숨이 막혔다. 누가 풀무질을 하는지 울화가 불길처럼 일어난다. 그녀를 보내는 여름날은 태풍 마이삭이 미친 듯 북상하고 있었다.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던 나무가 쓰러졌다. 한차례 분탕질을 치다가 시침을 뚝 떼고 있던 바람이 목쉰 휘파람을 불며 내려꽂힌다. 금방이라도 와락와락 달려들어서 남김없이 부숴버릴 것 같은 분노는 폭발하듯 휘몰아친다. 세상의 마지막처럼 불어대는 바람 앞에 쓰러진 나무 한 그루는 우리 집 앞 도로에 서 있는 흔한 가로수 버즘나무였다. 밤새 태풍과 싸우면서 명줄을 잡고 있던 나무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허연 뿌리를 하늘로 솟으며 누워있는 버즘나무의 모습에서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죽지 않으려고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고 얼마나 애원하고 바들바들 떨었을까. 어느 죽음인들 당연한 죽음은 있을 수 없겠지만 그녀의 죽음만큼은 왜 그리 부당하고 억울한지,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그녀 혼자 견디고 있었을 시간이 너무도 애처로웠다.그녀는 버즘나무의 얼룩같이 얼굴과 온몸에 얼 옻을 달고 있었다. 얼룩얼룩한 하얀 반점이 버즘나무 같다고 남편이 붙여준 별명이 택호가 되어 버렸다. 한길의 가로수로 서 있는 일명 푸라다나스라는 나무의 모습과 그녀의 얼굴은 너무 흡사하다. 그녀의 전신에 분포되어있는 얼 옻은 의학적으로는 곰팡이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는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평생을 얼 옻을 달고 살았다. 버즘나무의 얼룩덜룩한 껍질처럼 그녀의 모습도 얼룩덜룩하고 그녀의 삶도 버즘나무 껍질처럼 거칠거칠하다. 크림 한번 발라보지 못한 그녀의 척박한 얼굴처럼 그녀의 팔자도 참으로 척박했다.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아이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얼 옻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 여자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흑인처럼 검은 피부에 입술은 툭 튀어나오고 머리까지 곱슬 이라서 누구든지 외면하고 싶은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마나 깊고 길면 바늘과 실 같아서 바느실 골짜기라고 불리는 산골에서 입하나 덜자고 먼 친척 집으로 보내진 게 열다섯 살이었다. 그 후 형제와 부모의 소식마저 단절되어 버리고 이어진 끈이라고는 우리 집뿐이었다. 태어난 이후부터 세상을 떠나던 그 순간까지 그녀는 한 번도 행복이란 것에 선택되어보지 못한 여자였다. 태어났으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독한 그녀의 삶은 이번 생으로 끝나기를 빌어본다. 그녀는 나의 팔촌 언니였고 이름은 늠이 였다."빨리 들어오이라 안들어 오고 머하노"모시 적삼이 땀으로 젖은 아버지의 뒤에 조그마한 보따리를 움켜 안은 낯선 처녀가 서 있었다. 나는 용수철처럼 퉁기듯 일어나 공 구르듯이 뛰어나갔다."세상에 이럴 수가 옴마야""깜디 아이가, 기가 막히네""아부지 또 새 여자 들어오는거 맞지예?나의 서슬이 담을 넘어서고 엄마는 담 너머 먼 하늘만 보고 있었다"저리 비키라 고마, 니가 머를 안다꼬"아버지는 요상 하게 생겨 먹은 처녀를 데리고 뜨락으로 올라선다. 뭐가 그리 당당한지 큰소리마저 친다."물 한 사발 떠 온나 목말라 죽겠다"마당의 쫑이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이 상황이 의아한지 그 처녀의 생김새가 짐승의 눈에도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댓돌 위에서 물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킨 아버지는 요상 하게 생긴 처녀를 손짓한다."야야 여 와서 할매한테 인사 드리라""어무이요 야가 영일에 사는 육촌 행님의 맞이 아입니꺼 밥이나 멕여 달라고 부탁을 하길래 데불고 왔심더 우짜겠습니꺼"할매는 담뱃대만 놋쇠 재떨이에 땅땅 떨고 엄마와 나는 쿵 하고 심장이 마당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우리 아부지가 인자 미쳐 부렀구나 우짤라고 저런 여자를~"우는 게 웃는 것 같고 흑인 같은 피부에 입술마저 툭 튀어 나와서 못생겼다 하기도 송구하리만큼 추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열다섯 살이라 하기는 너무도 조숙한 처녀였다. 우리는 아버지가 미쳐서 저런 아이까지 첩으로 데리고 왔다고 아연실색을 하고 있었다. 희대의 카사노바였던 아버지는 철 따라 여자를 바꿔가며 데리고 온다.새로운 여자가 아버지의 허리춤을 잡고 들어오는 날이면 엄마는 분홍색 깃을 댄 명주이불을 하루 왼 종일 만들고 있고 할매는 '썩을 놈 죽일 놈' 욕을 리듬 삼아 옥색 사기요강을 닦고 또 닦았다. 어둡사리가 슬금슬금 눈치 보듯 댓돌 위를 기어오르는 시간이면 문간방으로 엄마의 명주 이불과 할매의 요강이 들어가고 어린 나의 눈에도 꽃같이 예쁜 색시가 그 방으로 든다. 헛기침 뱉으며 슬그머니 아버지가 그 방으로 숨듯 들어가면 엄마는 소리 없이 대문을 빠져 나와 뒷산으로 오른다. 어린 나를 끌어안고 밤이 이슥하도록 토해낸 엄마의 한숨은 몇 번쯤이었을까. 복사꽃 피던 봄밤의 처연했던 엄마의 모습은 아직도 내게 아픔으로 각인되어 있다. 문간방에 불이 꺼질 때까지, 쫑이가 아버지의 구두에 주둥이를 박고 잠들 때까지, 엄마는 움직일 줄 모르는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의 몸에서 담배 냄새가 짙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이해되지 않는 그 시절의 우리 집 풍경이다. 열 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랄 만큼 수많은 여자가 다녀갔다. 그러한 시절 그녀가 아버지의 여자가 아니라는 게 참 다행이긴 하나 그때부터 그녀와 내가 한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 앞에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내 옷을 세탁하고 내 도시락을 싸준다는 것은 너무도 끔찍했다. 너무도 못생긴 그녀의 외모는 불결하기까지 해서 벌레 보듯 했던 나의 오만을 오롯이 그녀가 겪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머슴과 할매와 일꾼들, 많은 식구를 건사해야 하는 엄마에게 그의 출현을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 후 내가 그녀에게 가했던 표독과 심술들은 지금까지 많은 후회와 반성으로 남아있는 부분이지만 그때 나는 열세 살 풋사과 같은 소녀였다고 변명을 해본다. 그녀의 웃음을 본 적이 있었던가 전혀 기억이 없다.그녀를 만나러 가고 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녀의 집으로 피접을 가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게 맞다."늠이네 집으로 가거라 아~들 걱정은 잊어뿌고 한참 쉬다 보면 맴 정리가 되지 않겠나. 전화 넣어 놨응께 창지까지 깨끗하게 씻고 오이라."엄마에게 등 떠밀려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과연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 상처에 피가 동이동이 쏟아질 것 같아서 내 가슴만 싸매고 오느라 옆도 뒤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이기였나를 그녀의 삶에 들어와서 알았다. 불혹의 중간지점에서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을 끌어안고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중압감에 나는 철퍼덕 앉아 버렸다. 일어서야 할 지팡이 하나 없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과 살아야 할 방법마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었다. 생채기가 나도록 할퀴며 살았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사별 앞에 서버린 나의 당혹감은 무기력하고 대책이 없는 우울로 나를 끌고 갔다. 커튼을 무겁게 내리고 현실을 밀어내며 모든 것과의 단절을 원하던 지독한 우울 앞에 엄마의 처방은 나를 그녀에게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지 몇 년 만인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나는 그녀에게 한 번도 안부를 물어보지 않았다. 잊어버린 그녀의 집으로 가는 유월의 하늘은 왜 그리도 푸르던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친척 언니가 아닌 우리 집 식모였다. 한 번도 그녀에게 언니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나는 갑이었고 그녀는 철저한 을이였다. 집안의 자잘한 일들은 모두가 그녀의 차지였고 당연한 줄 알았다. 나는 공주였고 그녀는 나의 시녀라는 게 정해진 운명인 줄 알았다. 항상 윗목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아 안고 잠들던 그녀였다. 숨 한번 크게 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항상 아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녀에게 살갑게 대해 본 기억이 없다. 그녀의 추한 얼굴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우리 집 간장 단지 같은 그녀의 뚱뚱한 몸도 내 친구들에게 챙피스러웠다. 친척 언니라는 걸 누구에게도 부정하며 밥도 같이 안 먹고 쳐다보지도 않고 철저하게 무시하던 어린 날이었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엄마의 주선으로 시집을 갈 때까지 나는 그에게 군림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아니오 라는 말을 모르던 사람이다. 네 하는 대답만 아는 사람이다. 그녀의 삶은 그렇게 길들여 저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 차려진 초례청에 선 그녀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산 밭을 일구며 산다는 도둑놈같이 생긴 그녀의 신랑과 우리 집을 떠나간 후 나는 그녀를 잊고 살았고 내가 그에게 가했던 악행들도 잊어버렸다. 우리의 인연은 그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끔 그녀가 떠난 후 살강 위에 얹혀있던 퇴색된 누런 가방이 눈에 밟혔다. 명료한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무엇인가가 없어진 빈자리 같은, 약간의 허전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 년이란 동거가 무시할 세월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그게 무슨 마음이었는지 몰랐다. 가끔 한숨 묻은 엄마의 푸념 속에서 그녀의 일상이 비극으로 흘러나오긴 했지만 내겐 옛날이야기 한 자락쯤으로 치부되고 말았다중학교 2학년 봄이었다. 엄마와 그녀가 항상 모든 걸 챙겨 주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그날도 도시락 챙기는 걸 잊고 등교를 했다. 그날 역시 그녀가 다림질해준 교복을 낚아채듯 입고 갔다. 오전 수업 끝난 직후였다. 도시락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도시락을 든 그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쭈뼛쭈뼛 나를 향해 오는 그녀를 확 밀어 버리고 교실 밖으로 도망을 쳤다. 얌전하게 나의 책상 위에 도시락을 두고 돌아가는 그녀를 숨어서 바라보며 나는 울고 있었다. 왜 그리 창피하고 부끄러웠을까? 우리 집 식모라는 소리를 수십 번도 더 하고 절대로 나의 친척이 아니라는 걸 수도 없이 말을 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실실 웃고만 있었다. 그날 끝까지 그 도시락을 먹지도 않고 가져와서 그녀 앞에 집어 던져 버렸다. 고픈 배를 참아가며 무슨 오기였을까? 그때의 표독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녀에게 한마디 사죄도 없이 오랜 공백을 넘어 나는 어떻게 그녀의 삶 속으로 올 수 있었을까."어서온나 덥제?"덥석 손을 잡지도 않는다. 역시 웃지도 않는다. 어느 월세방 싸구려 벽지 같은 포프린 몸빼바지를 입고 우는 듯 웃는 듯 찡그리고 서 있다. 나 역시 눈을 마주할 수 없어 하늘만 보고 섰다. 그녀의 옷에서 쉰 술빵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온 나를 후회하긴 늦었다. 나를 내려놓은 버스는 천식 기침 뱉어내듯 털털거리며 황토 먼지 속으로 떠나고 이미 그녀가 내 가방을 들고 산비탈을 오르고 있었다.잠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암담함이 산 그림자처럼 나를 짓눌렀다. 말없이 따라 오르는 나를 기다려 주는 듯 섰다가 다시 걷는다. 슬쩍 쳐다본 그녀의 얼굴은 옛날보다 더 심한 얼 옷이 피어 있었다. 푸른 수트를 입은 것 같은 유월의 산은 런 웨이를 걷는 모델 같다. 뽕나무밭에는 여인네의 젖꼭지 같은 검은 오디가 가지가 휠 듯이 달려 있고 그들의 산 밭은 기름을 부은 듯 윤기가 나게 가꾸어져 있었다.분통만 한 방이었다. 내가 온다고 준비를 했는지 새로 산 것 같은 조그마한 경대 하나가 윗목에 놓여있고 남자가 만들었을 것 같은 나무 책상 하나가 세간의 전부였다. 살강 위에는 올이 굵은 삼베이불이 얹혀있고 기름 먹인 것 같은 오래된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정갈 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녀의 냄새와는 또 다른 냄새가 났다. 산이 주는 냄새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마음이 주는 정갈함 같아서 조금 낮 설었다. 먼 옛날 잠들어 있는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이며 멀리 떨어지라고 소리 지르던 어린 나를 회상하며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내 방에서 밤새 뒤척거리며 편안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을 왜 이제야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공주병에 걸려 자기를 학대했던 계집애의 불행이 고소하지 않을까? 그녀와 나의 어린 날을 생각하며 싱그러운 유월의 산 밭에서 나는 또 우울의 늪으로 빠졌다."쪼매 쉬고 있거라"나지막한 말 한마디 남겨놓고 산 밭으로 종종걸음 걷는 그의 등 뒤에서 유월의 산바람 한줄기가 살랑이며 들어왔다. 정갈한 삼베이불에 어깨를 감아 안고 비스듬히 기대앉아 스르르 잠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뻐꾸기의 긴 울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흙내가 폴폴 날아다니는 조그마한 토방이 초라한 나를 숨기기에 맞춤이어서 그런 건지, 내 상처의 진액이 마르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한 번도 언니라 불러주지 않았던 그의 삶 속에 들어와서 이렇게 달콤한 오수에 빠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충분한 산소를 마신 것처럼 마음이 개운해지고 있었다."고마 일어나라 밥 묵자"열다섯 살 속의 그가 아닌 너무도 더 늙어 버린 중년의 산골 여인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산 밭에 걸음의 간격이 느린 초여름 저녁이 내려앉아 있었다. 뭘까? 지금의 이 편안함은, 이렇게 편해도 되는지 잠을 깨우는 그의 손길이 고향 같았다. 어쩌면 나의 기억 속에 그의 온기가 저장되어 있었을까? 밤눈 어두운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나서는 데 한 무더기의 짓푸른 향기가 와락 가슴에 달려든다."오니라고 욕봤소"화가 잔뜩 난 것 같은 그녀의 남편을 저녁상과 함께 만났다. 오가피 순, 가죽나물, 각종 산나물과 막걸리 한 주전자가 양은 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형부가 되는 사람이 떫은 감 씹은 얼굴로 왜 왔느냐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대패질도 안 된 송판 몇 장으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마루에 앉으라는 인사도 없이 벌컥벌컥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그의 남편과 차마 저녁상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밥 생각 없다고 토방으로 건너왔다. 가시처럼 찌르는 눈빛이 등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가끔 흘려들었던 그녀의 일상이 그제야 기억나기 시작했다."팔자 도망은 못 한다 카드마는. 도적놈, 썩어 뒈질 놈, 그리도 두들겨 팬다 카더라. 우째 살겠노, 불쌍한 늠이를 우짜모 좋겠노, 다부 데불고 올수도 없고, 에이그 쯧쯧"당장 내일 아침에 첫 버스로 돌아가리라. 불도 켜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어쩌면 처음으로 그녀의 삶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보다 더 아픈 것 같은 그녀의 삶과 만나고 있었다. 버거운 내 삶 위에 더 무거운 그녀의 삶까지 다가왔다. 작은 쟁반 위에 나물 한 접시와 밥 한 그릇을 들고 조금 이슥한 시간에 그가 토방을 들어섰다. 알전구 불빛에 서로의 시선이 거북해서 눈길을 피하면서 마주 앉았다."니는 늙지도 않았구마 고등학생 가시나 같다 아이가"얼굴을 피하면서 웃는지 우는지 특유의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씰데없는 소리 고마해라"마음과는 달리 툭 던지는 내 말에 미안한 듯 나 역시 고개를 숙였다. 잊었던 냄새가 훅 전해진다. 땀 냄새와 반찬 냄새와 빨랫비누 냄새 그리고 흙냄새까지 그 모든 것들이 옹 집 되어있는 시큼털털한 냄새를 그리도 싫어하던 나의 어린 날이었는데 마주 앉은 나에게로 폴폴 스며드는 그 냄새가 어쩌면 친숙한 느낌이었다. 오류였던 나의 지난 삶이 많은 걸 깨우쳐 주었는지 어느새 나는 그녀의 삶을 연민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과 상관없이 나의 허기는 밥 한 대접을 다 비워냈다. 얼마 만에 가져보는 포만감일까. 건너가지 않고 미적거리는 그와 무슨 말이 던 해야 하는 데 오랜 세월의 빈 공 간을 어디부터 열어야 할지 애꿎은 손톱만 뜯고 있었다."막걸리 한 병 없나? 아까 그 사람 마시는 것 같던데~"깊은 산골이라 아직 취나물이 여리다며 새파랗게 금방 데친 나물 한 접시와 막걸리 두 병을 들고 들어선다. 몇 잔의 막걸리가 침묵 속에서 비워졌다. 쟁반을 마주하고 앉아 마음을 조금씩 게워내기 시작할 때 달빛은 어찌 그리도 곱던지, 사르르 마음이 달빛에 씻기고 있었다. 누에는 석 잠이나 잔다는데 사람인 나는 반 잠도 자본 적이 없다며, 가슴에 돌덩이 같은 게 너무 많아서 죽으면 부처님 사리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가슴을 쳤다. 학부모들 부를 때도 절대로 학교에 못 오게 하고 졸업식 때도 어미가 오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는 자식들이라며 내 새끼가 아니라고 도리질을 했다. 열다섯 나이에 너희 집으로 식모살이 갈 때 네가 아무리 날 미워해도 네가 너무 예뻐서 밉지가 않더라 했다. 다시 환생하면 너처럼 예쁘게 태어나는 게 소원이라고 웃던 그녀였다. 나는 그날 밤 그녀를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백번쯤 빌었던 것 같다. 그 날밤 막걸리 몇 잔에 그와 내가 풀어낸 회한으로 산도 잠을 설쳤으리라 생각된다. 그녀와 나의 암묵적이던 오랜 세월의 침묵이 스르르 풀어져 버렸다.쨍그렁 쾅쾅!!!!​"썩어 뒤질 년 엊저녁에 내 적삼 데리 놓으라꼬 캣나 안캤나. 귓구녕에 쇠 말뚝을 처 박았나. 넘이 말 할때는 귓구녕을 영천 장에 보냈나. 첫차 놓치모 니 년이 걸어서 읍내 꺼정 같다 올끼가?"쇠스랑을 집어던지며 거품을 물고 욕을 하고 있는데도 정지문을 붙들고 선 그는 하늘만 보고 섰다. 낯설긴 하지만 자기의 처제가 되는 사람이 손님으로 와 있는데도 연신 칠 듯이 설쳐댄다. 외면하고 뽕밭 둔 턱으로 내려섰다. 산 허리춤에서 안개가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지 자욱한 회색의 아침이었다. 그놈의 인간은 아직도 패악질을 멈추지 않는다."낯짝에는 버짐이 주렁주렁 붙어서 입인지 똥구녕 인지 분간이 안되는 년, 저런 년이 사람이라고 입 구멍에 밥숟가락 처넣는지 말귀도 못 알아듣는 저런 년을 귀신도 무심하제 와 안 잡아가노"숯불이 내 속처럼 이글거리는 다리미를 쥐고 대꾸 한마디 없이 적삼을 다림질하는 그녀를보며 이곳으로 나를 보낸 엄마를 원망하고 있었다. 패악질하는 남자의 등 짝을 후려치고 싶은 울분을 다스리는데 익숙한 광경이 내 머리에 포개어지며 나락으로 떨어진다. 지금은 가고 없는 내 남편이었던 사람의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가슴을 치며 내 삶을 물어내라고 악착을 떨던 나의 모습과 수행하듯 다림질을 하는 그의 마음이 무엇이 다를까 그녀의 기막힌 삶을 만나라고 엄마는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그녀와 나의 인연이 처음 시작 되었던 그곳에서 예비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들의 이 고통이 내 아버지의 지독한 이기의 꼭짓점에서 시작된 것 같은 생각으로 아침의 안개가 내 머리까지 스멀거렸다. 엄마가 반대했던 그녀의 결혼이었다. 옥답도 아닌 산 밭 몇 뙈기 부쳐 먹고 사는 사람이라 반대를 했다고, 더구나 심성도 고와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서 반대를 했으나 아버지의 호령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늘 후회하고 있었다."지지리도 못생긴 지집아를 누가 데꼬 갈끼고. 데불고 갈놈 있을 때 보내야제 시집도 못가 본 처녀 구신 만들랑가"아버지의 말은 곧 우리 집의 법이었던 시절이었다. 열아홉의 꽃이 하르르 지던 날 나의 오류도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완고한 이기로 대학교를 포기하며 내 삶도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하겠다고 바락바락 아버지를 기어오르던 내게 아버진 하나뿐인 외동딸을 밀어내며 내 인생을 아버지의 생각으로 포인트를 맞추고 있었다."문학은 무신~ 가시나가 공부 많이하모 팔자가 사나워 못씬다 조신하게 바느질이나 배우다가 시집 가야제 씰데 없이 공부는 무신놈에 공부 쯧쯧"당신은 처첩을 둘씩 셋씩 거느리며 그 시대에 턴테이블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사는 신식 사람이었다. 여자는 공부를 많이 하면 팔자가 사납다는 아버지의 사고는 흔들릴 수 없는 고착된 생각이었다. 나의 어떠한 반항도 엄마의 간곡한 애원과 부탁도 아버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시대를 원망하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나의 팔자가 그때 아버지의 이기로 예비 되지 않았나 싶다. 그녀와 나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며 그 날 아침 우린 어색했던 침묵에서 나올 수 있었다."손바닥만 한 화전을 이만큼 금 싸레기 밭으로 맹글어 논 게 뉘긴데 저 혼자 잘나서 그란 줄 아는 인간이다. 지나 내나 글 한 자 모르는 거는 마찬가진데 눈곱만큼도 잘난기 없음시록 욕질에 매질에 ~새끼들도 지 에미 무시하는 건 딱 지 애비 닮 았더라, 그란들 우짜겟노 내가 워디 갈데가 있어야제 이 꼬라지를 하고는 어디가서 식 모 살이도 못한다 아이가 우짤 수 없이 참고 참고 살아야제. 목심이 웬수구마"막걸리 한잔에 생전 처음으로 속내를 울컥울컥 토해내던 그녀였다."신발 벗고 도망 댕기도 팔자 도망은 못 한다 카더라. 그란데 늦었지마는 그 팔자 도망 을 한 번만 해 보고 죽으모 한이 없겠구마""내 같은 것도 사는데 맴 단단이 묵고 얼릉 몸을 추스리라 아이들 때문에라도 일어나야 안되것나 정신 채리라 그리 이쁘고 똑똑하던 니가 팔자가 와 이렇노"훌쩍거리며 내 손을 잡던 그녀의 치마폭에 그만 엎어지고 말던 그 날 밤, 물먹은 솜 같던 내 마음이 가벼워 지고 있었다. 삶을 팽개치고 싶던 그 시간에 그곳은 분명 내게 커다란 동아줄 같은 희망이었다. 그녀의 남편 패악질이 있던 그 후 산 밭의 토방에서 거의 한 달을 머물렀다. 밥 먹듯 부리는 남자의 욕질은 모른 척 외면했다. 그가 해주는 나물밥과 세심한 배려의 손길과 산이 주는 안락함 속에 묻혀 조금씩 생의 촉수가 자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장기처럼 내 삶이 고파오고 아이들이 밟혀올 때, 가방을 챙기는 내 등을 가만히 쓸어 주는 그녀. 상상도 하지 못할 그녀와 나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산 밭의 그 후 나는 그녀를 언니라 불렀고 오랜 세월까지 나는 그의 동생으로 그는 나의 언니로 의지하며 위로하며 살고 있었다. 항상 바빠서 사는 게 폭폭 해서 전화마저 소홀한 내게 감자며 옥수수며 산에서 나온 제일 좋은 것들을 한 아름씩 보내오는 엄마 같은 그녀였다. 아프면 오라고, 언제든지 와서 쉬어 가라고, 다독이는 나의 엄마였다. 사건이 일어난 그 날까지 아프면 아픈 데로 참으며 견디며 우린 그렇게 살고 있었다."그 사람 거 안 갔능교?"이제는 매질할 힘도 없다는 다 늙어버린 형부의 전화가 이른 새벽을 두드렸다. 갈 곳은 우리 집뿐인데 대체 어디 갔을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손전화기도 꺼져있고 집 나간 지 사흘이라고 했다. 버즘나무 같은 그 얼굴로 집을 나선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언니였다. 일 년에 한 번쯤 우리 차를 타고 우리 집을 다녀가는 것 외엔 서울 구경 한 번마저 손사래를 치던 언니였다. 산 밭과 집 외엔 언니의 삶과 연관되는 곳이 전혀 없었다. 늙어도 성질은 못 버리는지 형부는 전화기가 들썩거릴 정도로 고함을 질러댄다."은행 갈 줄도 모리는데 돈 찾아갔다고 카더라 이년이 뒈질라꼬 노망이 났다. 적금도 찾고 아래 밭 팔아 둔 것도 내 도장 갖고 가서 찾아가고 도대체 이기 무신 일이고 빨리 좀 내리오소 나는 해결 할 수가 아이가. 새끼들은 아직 모른다 알모 난리가 뒤집어 질끼다, 아~들 알기 전에 얼릉 찾아야 할낀데"은행 업무는 언니의 능력 밖이라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삼 자의 개입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칠십 후반의 언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마음이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 세균전이 태풍처럼 휩쓸고 있는 펜데믹 시대에 어떠한 바람이 휘몰아칠지 두려운 걸음이었다.몸빼바지를 입고 기다려야 할 언니 대신 북유럽풍 호텔 앞에 몇십 년 더 늙어 버린 것 같은 형부가 서 있었다. 세상의 멋진 도시를 옮겨 놓은 것 같은 비탈이 아직도 낯설었다. 바람 나다니는 길목에 차들이 바람처럼 다니고 샹송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레스토랑이 언니의 산밭을 침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부자가 되어버린 형부와 두 아들은 어깨가 올라가고 읍내 네온이 화려한 술집에서 사장님의 대우를 받는다고 가끔 언니의 걱정 같은 푸념이 있었다. 노을을 등지고 호텔로 들어서는 남자와 여자를 쳐다보며 늙은 형부는 부러운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집에 올라갈 것도 없고 따라오소"양복 입고 짚신 신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카페를 들어선다. 언제부터 친해 졌는지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젊은 여인의 호들갑스러운 환대를 받으며, 내 집처럼 편안하게 커피를 시킨다."라뗀지 뭔지 그거 두잔 주소"내 입맛은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통행이다. 막걸리만 마시던 입으로 라떼를 후후 불어가며 마시는 형부의 거들먹거림이 그간의 상황을 말해주었다."양복 입은 사람들이 가끔 집에 다녀가는 걸 봤다 카드마는 나는 그것밖에 모른다. 책임지고 찾아주소. 바람 넣을 사람은 처제 밖에 없는기라. 이 인간이 누구를 믿고 이런짓을 하겠능교. 뻔할 뻔자 아이가. 언니야 찾든지 말든지 내 돈만 돌리주라 카소.""삼사일 된 사람을 실종신고를 하는 건 좀 그렇고 하루 이틀 더 기다려보소. 아지매가 화가 나서 가출했는지도 모른다 아닙니꺼. 영감님하고 쌈하고 나갔는 갑네."실종신고 하러 간 사람의 절박한 심정도 모르는 듯 시골 경찰의 안일하고 판에 박힌 말을 듣고 화가 났으나 며칠 더 기다려보자고 겨우 달래 놓았다. 산은 어둠에 들지도 않았는데 별빛보다 더 반짝이는 불빛들로 산이 꽃처럼 피던 어느 날이었다. 도시가 되어버린 산비탈에서 왜 아직도 몸빼 바지를 벗지 못하냐고 눈을 흘기는 내게 내 주제에 이것도 과하다며 같이 눈을 흘기던 언니였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읍내 사는 큰아들놈이, 나를 보고도 인사 한마디 없이 못 볼 걸 본 것처럼 가래를 캭 하고 뱉으며 산 아래로 내뺀다. 기름지던 산 밭은 분명 아니었다. 농사를 작파한 아들놈과 남편은 밭농사를 팽개치고 번갈아 가며 읍내를 드나들고 있다고 아들놈 뒤에서 힘없는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 언니는 아무도 모르게 그때부터 준비를 하였을까? 그러나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이었다.음성 메시지를 수도 없이 남겼다. 살아 있으면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나에게까지 숨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 내게 한 말을 생각하며 뭔가 약간의 실마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언젠가는 갚아 줄끼다. 냄편이고 자식이고 다 원수 같은기라."맞아서 갈비뼈가 두 대 부러졌다고 압박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언니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던 날이었다. 어쩌면 언니의 이해 못 할 지금의 행보는, 갚아줘야 한다는 그때가 아닐까? 어쩌면 약간의 안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 언니의 얼굴을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산 밭에서 키운 배추라서 달다고 겨울 김장을 차에 실어주던 작년 가을, 손을 흔들고 섰던 노을 속 모습이 마지막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 1200도의 화구 속으로 언니를 밀어 넣으며 끓어 오르던 울화를 삼키던 그 날까지 이별의 연습도 없었는데~ 언니는 그렇게 갔다.언니가 보낸 장문의 편지가 도착한 날은 코로나 19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여름이었다. 누가 대필을 했는지 A4 용지 두 장의 분량으로 그동안의 과정과 지금의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소상하고 담담하게 적혀있었다. 대필한 사람의 성격이 보일 정도로 언니의 심적 묘사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언니의 편지를 쥐고도 언니를 만나러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발신지의 우체국 소인을 보고 찾아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도시는 코로나 19의 잠식으로 거의 고립되어 있었다. TV에서 연일 그 도시의 상황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전국이 세균전이란 거대한 회오리바람 앞에 대문의 빗장을 걸고 마스크를 낀 상태로 살고 있었다. 납 득이 되지 않고 이해는 더구나 불가한 이 현실을 세게는 펜데믹 시대라고 했다. 내 친정이 있고, 내 형제가 살고 있고, 나의 언니가 그곳 어딘가에 있다는데 아무도 만나러 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갇혀 버렸다."걱정하였을 줄 알지만 나도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니 너무 서운하다고 생각 말거라."누가 썼는지 간결한 문장으로 언니를 대변한 편지를 읽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너도 알다시피 나는 한 번도 내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신의 저주인지 너무도 흉하게 생긴 내 몰골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때까지 고개를 들어보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사랑이란 걸 받아보지도 못하고 누구를 사랑해본 적도 없이 평생을 살아왔 다. 남편이나 두 아들도 내겐 남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갈 데가 없어 서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곳을 나올 수가 없었다. 죽으라고 일궈놓은 그 곳에 도 로가 생기고 관광지가 생기더니 평생을 바쳐 만들어 온 산 밭들이 비싼 값으로 팔리기 시작하더라. 농사밖에 모르던 남편도 자식새끼도 돈에 환장한 것처럼 읍내 술집으로 돌 기 시작하고 조금씩 산 밭은 어느새 반 토막 나더라. 그때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다."하나님을 만났다고 했다. 행복을 알았다고 했다. 그 하나님의 품속에서 처음으로 사랑을알았고 못생겼다고 비웃음당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평등했다고 했다. 모르던 세계에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무언가 조금씩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게 느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길 바라면서 유서 같은 언니의 편지를 읽었다."이젠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꺼야. 가지고 나온 돈은 내 몫이라고 그 사람에게 전해. 이 정도는 나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어쩌면 내가 일궈놓은 것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지만 나에겐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잖아. 네 형부와 아들들에게 따로 소식 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네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날 찾아올 생각 말아라. 내가 가끔 소식 전할게. 너라도 있어서 그동안 숨을 쉬고 살았다. 고맙다 하늘에서 만나자."한동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멍하게 앉아 있었다. 행복하다고, 평안하다고,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사랑하며 사랑받고 살고 있다고, 거듭거듭 강조하는 언니의 편지는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어떤 하나님을 만났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톱만큼 남은 짧은 세월이나마 행복하고 웃으며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종교적인 문제를 나는 말할 생각이 없다. 그의 하나님을 논할 이유는 없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의 편지를 덮어두기로 했다. 찾을 수가 없다고 아무리 찾아봐도 모르겠다고 가족이 실종신고를 하든지 알아서 하라고 언제부터 그렇게 언니가 소중했냐고 큰소리를 치며 언니를 숨겨 버렸다. 그러면서 점점 횡포가 심해지는 세균전에 지치고 있었다. 더구나 언니의 편지에 찍힌 편지의 소인이 고립된 도시였다는 것과 하나님이라고 자처하는 늙은 남자가 국민을 상대로 엎드려 사죄하는 장면이 TV 화면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하나님의 성전에서 세균이 전파된 도시는 스톱워치에 걸린 것 같이 일상이 정지된 것 같다. 상가들이 셔터를 내리고 사람들의 물결로 넘실대던 대로변이 고적하게 텅 빈 체 유령의 도시 같았다. 물 위로 떠 오르는 그 하나님 성전의 실체는 사이비 종교라며 하나님이던 그 사람을 사기꾼으로 몰아갔다. 모든 언론과 가짜뉴스까지 합세해서 세균을 전파한 곳이라고 떠들고 있었다. 나의 우려는 적중했다. 새로운 천지를 개발한 종교 집단에 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코로나 19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였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것 만 알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무엇인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오래된 감나무에 까치가 울었다. 어수선한 시절에 반가운 소식이 있을 리 없겠지만 행여 기다려본다. 나의 유년이 있었고 지금도 내 형제가 살고 있고, 그곳의 어느 병원에 언니가 누워 있다. 나는 갈 수 없는 그 도시의 소식에 하루 왼 종일 귀를 열고 있다. 고위험군에 속한 언니의 목숨은 어떤 고비를 넘고 있을까. 신의 노여움일까. 노아의 방주가 필요한 시점일까. 모호한 안개속을 헤매고 있었다. 언니의 하나님은 그를 살려주실까? 해보지도 않는 기도를 하며 하루를 TV 뉴스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온몸의 신경 줄이 살아 오르는 것 같았다."갔다네 내리 올라요?"아직도 퉁명스러운 형부라는 사람의 전화에 가만히 앉았다. 달칵! 사슬 하나가 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힘들게 오르며 들숨 날숨을 헐떡이든 삶의 고리가 풀어지는 소리였다.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느슨해진다. 편안한 그녀의 삶이 실루엣처럼 내 창가에 미끄러진다. 고달팠던 그녀의 삶이 끝났다는 생각을 한다.어느 날 찾아온 한 줄기 빛 속으로 걸어가며 웃음이란 걸 배웠다고 했다. 얼룩덜룩 한 얼굴도 흉이 되지 않는 세상, 처음으로 간절하게 사랑을 해본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늘나라까지 가버린 언니의 행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삶의 또 다른 유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언니의 삶이었다. 누가 인간을 평등하다고 말했는가? 못나고 흉하다고 제 어미를 부정하던 자식들과 개 패듯이 패던 서방이라는 작자는 언니의 죽음 앞에서도 일말의 예우를 거부하고 섰다. 말기 위암 판정을 받고 병원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겠다고 간 언니를 나는 이해한다. 텅 빈 도시의 병원에서 홀로 죽음과 싸울 때 언니의 하나님은 그의 곁에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죄하는 그의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잠시 언니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으면 그것으로 고맙다. 세균의 온상이라고 질시 하던 그 성전에서 웃으며 기쁨에 충만한 찬송가를 불렀으면 더 무엇을 바랄까. 비록 그 성전에서 옮겨온 세균으로 언니의 죽음을 초래했다 하더라도 그곳이 어디 든 언니의 마지막 삶의 시간을 웃음으로 채워졌다면 너무도 감사한 곳이다. 항시 얼음을 업고 살던 등허리가 따뜻하게 사랑으로 데워 젓길 바라며 나는 그녀를 웃으며 배웅하자고 가슴을 쓸고 또 쓸었다. 어쩌면 이승보다 저승이 더 안락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역설 같은 위로를 한다.​우린 아직 태풍 속에 있다. 세균전이라는 거대한 태풍의 소용돌이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아직도 거리엔 마스크만 동동 떠다니고 표정을 잃어버리고 결벽 한 환자처럼 손을 씻고 또 씻는다. 마이삭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쓰러진 늙는 버즘나무 대신 덜자란 버즘나무 한그루가 얼룩덜룩한 얼굴로 서 있다. 가만히 내 언니의 안부를 물어보며 언니를 만지듯 나무를 쓸어본다. 1200도의 불 속으로 언니를 밀어 넣으며 불같이 끓어 올랐던 나의 울화도 이제 삭고 있다. 곧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고 버즘나무 댁 내 언니도 언니의 하나님과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이기에 나는 예약된 면역 주사를 맞으러 갈 것이다."안녕 언니야 다음 생은 버즘나무 옷을 입고 오지 말기를~ 하늘에서 만나자"​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꿈꾸는 숲' - 이승영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꿈꾸는 숲' - 이승영

〈꺼지지 않을 '소망의 등'〉나는 숲을 좋아한다. 사색에 잠긴 채 숲속을 산책하는 것은 내 큰 즐거움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숲속을 걸으면서도 평온한 주변을 둘러보기보다 여러 가지 복잡한 현실에 빠져드는 나를 자주 접하곤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문제를 비롯해 생각할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숲속을 걷다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든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 사람들 한 명 한 명은 모두 한 그루의 나무와 같지 않을까. 결국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룬 것이 사회라는 숲일 텐데. 다만 제대로 된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나무들 하나하나가 한마음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움직이는 숲의 일원인 나무 한 그루로서 숲과 함께 행복해질 수는 없을까. 십이지 간 중 첫 번째인 쥐는 영리하고 똑똑한 존재로 여겨진다. 설화에 따르면 자(쥐), 축(소), 인(호랑이),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가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소가 일등을 할 뻔 했으나 소뿔에 매달려 있던 쥐가 재빨리 뛰어내려 일등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꾀가 많은 쥐는 '미키마우스'나 '톰과 제리'와 같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친근한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편이다.한아름 희망과 기대 속에서 경자 년 새해를 맞았건만 2020년은 기대와 달리 절망의 끔찍한 해로 기록될 것 같다. 해가 바뀐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간다. 벽두에 머리를 내민 괴물 코로나가 방문을 차고 들어온 뒤, 주인 행세를 하며 여전히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쥐가 번식력과 먹을 복을 타고났기에, 올해는 번영의 해가 될 것이라 덕담을 나누며 두 손을 모으지 않았던가. 그런데 분명해진 것은 우리를 위한 경자 년이 아니라 쥐의 경자 년이 되었다.올여름은 긴 장마와, 또 열흘 새 이어진 태풍 바비, 마이삭 및 하이선의 위세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이들 장마나 태풍은 온난화로 바다 수온이 높아지면서 생긴 이상기온의 산물이다. 거기에다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아야 살 수 있는 정치 현실은 숨을 막히게 한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틈틈이 둘레길을 걸으며 자연이 베푸는 맑은 공기를 마음껏 심호흡하고, 그런 자연의 이타심에서 감사할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오늘 오후도 기분 좋게 둘레길의 예정된 구간을 걸었다. 땀에 젖은 몸을 샤워로 식히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땅거미가 조용히 내린다. 아직도 내 귓가엔 숲 속의 바람소리가 속삭이는 듯하다. 나무 가지가 끊어지면 뱀의 밥이 되는 순간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다. 이런 아슬아슬한 절명의 순간에 우리 사회는 위기에 처한 것도 잊은 채 나뭇잎에 벌이 만들어 놓은 꿀을 혀로 핥아먹느라 혈안이다. 오늘밤엔 이상하게도 나무 밑동을 갉아 먹는 쥐가, 너나 할 것 없이 찍찍거리며 살길을 찾아 울어대는 우리의 자화상으로 겹쳐 떠오른다. 어느덧 나는 우물 구덩이에 빠져,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쥐가 된다. 낯익은 그 쥐는 2백여 년 전 러시아 땅에 살았던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떠올리며 무언가 열심히 찍찍댄다. 아무리 외쳐대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소리를 가슴에다 적고 적었다. "당신, 초저녁부터 무슨 잠꼬대야!"아내가 무슨 꿈을 꾸느냐며, 얼른 저녁 먹으라고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뜨거운 여름날 땀을 쏟으며 둘레길을 도느라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잠깐이었지만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구청장 앞으로 보낼 협조공문 비슷한 것을 구상했던 것 같기는 한데…….저녁 창가에, 아주 조용히, 하루 종일 햇빛을 머금은 머그잔 모양의 자연조명등(Solar Mason Jar Lid Lights, 자연에너지 가정용 조명등)이 고요로 반짝인다. 집안 가득 평화가 내린다. 투명한 유리잔 속의 텅스텐전구가 달빛보다 은은하게 온몸에 스며든다. 평안이 숨 쉰다. 행복이 핀다.나는 이를 '소망의 등'이라고 부르는데, 언제 부터인가 이 소망의 등을 거실밖에도 밝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집 앞 생태공원에 '소망의 등' 길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느끼는 이 고요와 평화를 선물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조그만 바람이었다.정신이 좀 들면서 막연하지만 분명하게 떠오른다. 수신인과 '소망의 등' 설치 의뢰'라는 제목이다. 수신 : 구청장님참조 : 공원녹지과장님제목 : '소망의 등' 설치 협조 의뢰 어떻게 뭐라고 썼는지 본문을 되살리고 싶지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뿐 종착점에 이르지 못한다. 기억이 아물아물하다가 반갑게도 하나가 더 생각났다. 마지막의 추신 부분이다. 추신 : 생태공원의 역사를 담는 타임캡슐 매설. 아마도 오래 전부터 품고 있던 바람이 꿈에서 실현된 것 같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타임캡슐에 관심이 많았다. 마치 어릴 때 종합선물세트를 받고 그 안의 내용물을 가슴 두근거리며 하나씩 확인하던 느낌을 누구나 타임캡슐을 열면서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안초산 생태공원의 과거와 오늘에 대해 마음먹고 정리했던 글, 유관기관에 보냈던 질의서 및 건의서를 담은 usb, 기록 사진 등, 역사적 자료들을 타임캡슐에 담아 남기고 싶었다. 타임캡슐이 훗날 언제 개봉될지 모르지만 이곳과 관계된 역사가 그냥 잊혀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오늘도, 특히 공휴일이나 주말이면, 주민들이 공원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과연 몇 사람이 공원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더구나 훗날을 생각하면 누가 잊힌 진실을 제대로 기억할까. 진실을 usb에 담아 타임캡슐에 넣어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고 싶은 바람이 크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의 과제가 생겨난다. 무엇을 타임캡슐에 더 담을까 하는 고민이다.나는 머그잔 모양의 타임캡슐을 만지작거렸다. 여기에 무엇을 넣을까. 이것을 정말 언젠가 땅에 묻을 수 있을까. 어릴 때 소풍을 가면 보물찾기가 빠지지 않았는데, 보물을 찾는 재미 못지않게 보물을 숨기는 기분도 이제 좀 알 것 같다. 타임캡슐에 무엇을 담을까 벌써 가슴이 띈다.이 밤, 우선 타임캡슐에 첫 번째로 담을 글들을 찾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읽을 것이다. 우리 마을의 자랑스러운 공원을 위해, 자연친화적 환경보전의 한 사례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그 글들의 마지막 교정을 보려한다. 밤이 깊을수록 소망의 등이 더욱 밝게 빛을 발한다. 밤이 깊으니 여명도 가까우리라. 〈까치 가족의 장례식〉 나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베란다 유리창을 힐끗힐끗 보곤 한다. 요즘 하루에도 여러 번 이런 행동을 한다. 그날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생긴 습관이다. 그 사건은 거실에만 앉으면 아직도 두 눈에 선명하게, 유리창 스크린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래 전, 서울 안초산 자락에서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순응하며 만족스럽게 살던 때에 일어난, 아주 짧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사건이다.어느 청명한 초가을 오후였다. 베란다 밖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상상할 수 없는 까치 이웃의 슬픔이 한 순간에 장엄하게 펼쳐졌다. 놀랍게도 거실 베란다 창 밖에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 수많은 까치가 떼를 지어 선회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불시에 시작된 까치들의 황급한 울음소리에는 다급함과 긴박함이 느껴졌다. 햇빛으로 환하던 거실이 갑자기 까치 떼로 인해 먹구름이 낀 듯 어두워졌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검은 숲처럼 보였다. 숲이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창가 가까이 가서야 나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꽤 커다란 까치 한 마리가 아파트 아래 화단 잔디바닥에 날개가 꺾인 채로 너부러져 있었다. 그 위로 마치 까치 가족 친지가 문상이라도 하는 듯 날고 있었다. 아니 가족 뿐 아니라 공원 안팎의 까치란 까치가 다 모인 듯했다. 놀라웠다. '세상에 이런 일이'란 tv 프로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일이었다. 안방에 있던 아내가 뛰쳐나와 내 곁에 서서 같이 보았다. 정말 둘이 보기에도 아까운 장면이었다."이건 동영상으로 찍어두어야 하는데~ 아쉽다.""정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야.""어떻게 새들이 의사소통을 하는 거지?""정말 놀라와! 얼마나 장엄한 장례식이야."신나게 숲 공원을 날던 까치가, 솔거의 나무그림이 너무 사실 같아 새가 내려와 앉으려 했듯이, 베란다 유리창에 비친 나무를 사실로 착각하여 날아 앉으려다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받고 추락한 모양이었다.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된 듯해서 미안하고,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까치들이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다는 걸 상상인들 할 수 있으랴. 나는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을 목격한 것이다. 1992년 가을, 지금의 아파트에 이사와 30여 년을 살면서 내 생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름다운 슬픔이었다고 해야 할까.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동영상을 찍어 놓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얼마 전 이런 일이 2층 우리집 베란다 창문에 또 일어났다. 깃털자국이 창에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유리문을 열었다. 깃털이 붙은 부분에 손이 닿을 것 같았다. 팔을 뻗어 창에 붙은 깃털 하나를 간신히 떼어냈다. 깃털 하나. 너무도 가벼워 존재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를 소중히 보관하고 싶었다.예전에 음식점에서 서두르다가 무심코 머리로 유리벽을 들이받은 일이 있었다. 큰 사고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얼마나 당황스럽고 아파했던가. 남의 눈을 의식하며 참느라 정말 혼이 났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까치의 주검은 단순히 한 생명체의 죽음이 아니라 동네 숲 정원의 죽음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생태계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순교자적 조종이었다.나는 거실 장식장 안에 놓아둔 작은 종이상자 속에서 깃털을 꺼냈다. 여전히 너무도 가볍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아주 무겁게 느껴지는 가벼움이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숲이 남긴 소중한 흔적이 아닌가. 슬픈 기억이지만 깃털 또한 상징적인 의미에서 타임캡슐에 2호로 넣을 수 있는 목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식만 갖추는 공청회〉 지난해에 구청 공원녹지과에서 개최했던 '안초산근린공원' 발전을 위한 주민 설명회가 있었다. 일시는 9월 3일 월요일 저녁 7시 30분, ㅊ중학교 정문에서부터 구청 직원들이 친절하게 안내하고, 회의장 입구에서 구의원들이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맞아주었다. 선거의 표를 의식한 가면의 얼굴에 익숙하다 보니 감동은 있을 리 없었다.의례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공원 문제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고마운 얼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하지만 서로가 앉은 자리에서 가벼운 목례 정도만 나눌 뿐 모두가 비장한 표정이었다. 한바탕 결전을 치르려는 것처럼 분위기가 무거웠다. 처음부터 이 행사의 취지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참석 자체가 유쾌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계획을 수립하고 예산을 확보하기까지 들인 담당자들의 일련의 노고와 공은 인정한다. 하지만 설명회의 절차나 기획의 내용에는 아쉬움이 많다. 이 모임 자체가 주민의 의견을 수렴했다는 명분을 쌓기 위한 요식행위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량한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원 운영의 내실을 위한 충정의 마음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나는 어디를 가나 표시 나지 않게 지내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다. 가능하면 말을 아끼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려고 한다. 그럼에도 오늘은 앞자리에 앉아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시력이 좋지 않아 파워포인트의 내용을 제대로 읽기 위함이기도 했다.구청 직원의 상투적인 인사말이 끝나자 용역회사 사장이 단상에 오르고 정면 스크린에 화면이 켜졌다. '동네 뒷산 공원화 사업'이라는 큼지막한 자막이 떠올랐다. 시작부터 이래선 안 되지만 불신의 마음이 일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발표자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참았던 손이 올라갔다.우선 진행의 문제점부터 지적하기로 했다."수고 많으십니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설명회의 주체가 누구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용역회사에 의존해 설명회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구청 담당자가 설명을 하고, 혹시 기술적인 면에서 보완설명이 필요하다면 그 때나 발언했어야 했습니다."'사업'이란 제목부터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공원화 사업'이라는 제목도 문제입니다. '사업'이란 용어는 여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기획을 용역회사에게 맡긴 것인지, 아니면 용역회사가 주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업이란 용어는 회사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말 아닙니까. 이 지역, 세금을 내는 주민의 입장에서 선택한 용어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 배경과 저의에 대해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주최 측의 당혹스러움이 엿보였다."제목의 '동네 뒷산'도 귀에 거슬립니다. '동네 뒷산' 공원화가 아닙니다. 이 공원은 우리 주민에게 단순한 뒷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의 공원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때부터 주민의 앞마당이자, 얼굴이요, 허파입니다. 남의 동네 이야기하듯 그저 동네 뒷산이 아닙니다."이런 생각을 가진 담당자나 용역회사의 머리에서 무슨 애정 어린 발전 방안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 묻고 싶었다. 이렇게 시작된 질의는 몇 가지 건의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진심을 담은 주민들의 항변이 마이동풍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부디 계획안에 반영하고, 반의반이라도 참고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누가 봐도 순진하다 하겠지만. 공청회가 주민들의 불만에 찬 성토의 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공원 조성계획 속에 엉뚱한 목재체험장 및 정원학교 건립에 따른 위치 재고의 목소리가 높았다. 사회자가 폐회를 선언하려는 순간에 뒷좌석에서 "긴급발언이요!" 하는 날카로운 고성이 터졌다. 뒤돌아보니 골프연습장 건립을 앞서 반대 했던 부녀회의 논리적인 김 여사였다."공원에 한강의 폐 유람선을 옮겨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네, 먼저 말씀 드린다고 했는데 깜빡했습니다. 늦게라도 보고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상으로 기증 받는 것입니다. 산자락에 배가 떠오르니 기발한 역발상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비가 올 때나 추운 겨울에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것입니다.""여기는 주민의 의견을 묻는 자리이니, 반대합니다. 무상이라고 하셨는데, 배 자체는 무상일지 몰라도 운반비만 5천만 원, 여기에 개조 및 내부 시설비용이 2억 원이라고 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나아가 생태공원 정면 한가운데에 위치해 공원 전체의 시야를 가리고, 기존의 나무들을 베어가며, 꼭 그렇게 자연을 거슬러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제성을 따져도, 미관상으로도 상식 이하의 결정입니다.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실내 공간도 비좁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에도 비현실적입니다. 꼭 재고하시어 취소해 주시기 바랍니다."안타깝지만 근래 공원 입구 안쪽으로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폐유람선이 자리 잡아 경관을 해치고 있다. 주민들이 그토록 설치를 반대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내부를 아이들 놀이터로 개조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노란 테이프를 둘러 접근을 금하고 있다.문학 수사법에서 부조화의 극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예가 공원 속의 이 폐유람선일 것이다. 늦은 밤에 공원을 지나갈 때면 유령선을 지나는 것만 같은 기분 나쁜 느낌마저 든다. 멋진 공원을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들여 망치는 행정당국의 안목이라니! 주민 설명회가 끝나고 내 발길은 무의식적으로 공원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공원 조성 전부터, 이미 잘려나간 나무들이 마치 인간의 잘린 팔다리처럼 느껴져 잠시 소름이 돋는다. 나는 걸음을 멈춘다. 발아래 떨어진 나뭇잎이 나무의 실망한 마음 같이 느껴져 안쓰럽다. 성형 광고에서 볼 수 있는 수술 전‧후 사진의 대비처럼 타임캡슐에 공원 조성 전‧후 그리고 가로수길 전‧후 사진과 함께 이 잎사귀를 3호로 넣기로 하자. 〈주민이 바라는 공원〉 십여 년 전만 해도 아름다웠던 배밭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생태공원'으로 둔갑했다. 벌써 옛날이야기가 되어 아련한 향수만 자아낸다. 그 과정은 주민들이 온몸으로 이루어낸 슬픈 역사이다. 과오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후대의 교훈으로 오래 기억되어야 한다.당시의 아름드리나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과거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생태공원'이라 하면 말 그대로 사람과 자연 또는 환경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공생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공원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조성된 생태공원은 자연과 환경을 송두리째 갈아엎고 인위적으로 꾸며낸 특색 없는 공원 중의 하나이다.그런데 이번에 생태공원을 야심차게 확장 발전시키겠단다. 예를 들면, 허브식물 재배 단지를 만들고, 장미공원을 조성하고, 분수를 만들고, 쉼터를 꾸미고, 정원학교를 세우고, 텃밭을 만들고, 둘레길을 조성하겠단다. 조성만 하면 끝나는 것인지, 유지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묻고 싶다.안초산 자락에 위치한 도심 속 '숲정원'은 거부감 없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그 이름에 걸맞은 공원 조성을 주문하고 싶다. 철학이 있는 공원, 자연과 어우르는 공원, 지역의 특색이 느껴지는 수준 높은 공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초산 높이 오르지 않더라도 안초산을 느낄 수 있는, 안초산 숲이 마을로 마실 내려온 것 같은 자연 그대로의 '숲정원'이 조성되기를 간절히 바란다.주민은 유지비가 적게 들면서, 인공적이지 않은 공원, 사람 냄새가 적게 나는 공원, 자연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갖춘 공원을 갈망한다. 위치가 지역의 정보문화도서관 바로 옆이니 도서관이 책을 읽는 도서관이라면, '숲정원'은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읽는 사색의 공간으로 조성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안초산 숲이 마실 내려온 '숲정원'을 유일무이한 공원의 모델로 가꾸고 싶은 의향은 없는지 묻고 싶다. 공중화장실에도 상을 주는데, 아직 공원에 주는 상은 없는 거 같다. 아름다운 건축물에 건축상을 수여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공원에 수여하는 대한민국 첫 '아름다운 공원 대상' 수상의 꿈을 숲정원 조성에 실어본다.나는 공원을 가로질러 시내에 나가거나,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약간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문득 순교자적 모습으로 죽은 까치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론 코로나가 발붙일 수 없는 행복한 동네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마을은 꽃밭이고, 공원은 꽃다발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자연 그대로의 행복〉 작년 주민 설명회를 거의 잊고 있던 나는 최근 구청으로부터 주민 의견수렴이라는 공문을 전달받았다. 제목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도로다이어트 사업'이라니, 도로에 다이어트라니, 용어부터 궁금증을 자아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주민 설명회가 어려우므로 동별로 게시판 홍보를 통하여 의견수렴을 한다는 말도 박스로 처리하여 시선을 끌었다.사업내용은 간선도로 4길 4차로를 2차로로 축소하고 보도를 확장하는 것이다. 곡선형 차도를 조성하여 차량의 통행속도들 늦추어 보행자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란다, 보행 안전성 및 경관을 고려한 색채 블록을 설치하여 차량과 보행자를 분리하고, 차도 횡단거리를 줄여 어린이 등 교통약자의 사고위험을 감소시키겠단다.기특한 발상이다. 인사동이나 명동의 걷는 길처럼 차량이 통제되는 보행 길이 연상되어 낭만적이기도 하다. 도로 양쪽의 인도가 좁고, 인도에는 보통 10미터 간격으로 심어진 가로수로 인해 마주 오는 사람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특히 비오는 날엔 우산을 쓰고 혼자 걷기도 불편하다. 따라서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그런데 개선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문제점이 적지 않다. 발상 시점도 다분히 의심스럽다. 지난해 시월, 주민 설명회에서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의 유람선과 무관하지 않았다. 꼴불견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제2의 결단이 바로 도로 다이어트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누군가의 배를 채워주고, 주민들에게 생색이나 내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역시 주민들의 반발이 이어졌다."잘못된 다이어트는 건강을 해칩니다.""행정의 비효율을 규탄합니다.""관료는 자기 주머닛돈 쓰듯, 가정경제를 꾸리듯 해야 합니다. 세금으로 무슨 선심 쓰듯, 이건 아니지요.""돈 들이지 않는 다이어트를 해야 합니다."사람들의 이러한 불평은 여기저기,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 동네라고 예외가 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협조요청이라는 말은 보통 의견수렴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계획대로 시행한다는 통보이기에 많이 염려스럽다.우리 동네는 숲이 좋고, 사통오달 터널을 이루는 가로수가 일품이었다. 4~5층의 저층 아파트와 초등학교 및 중학교가 주를 이루고 있는 주택 단지에 가로수가 터널을 이루니 어쩌다 택시를 타면 기사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가로수는 주민의 자부심이고 자랑이었다. 학교 앞이니 자동차 속도를 줄이라 하지 않아도, 경관을 즐기기 위해 스스로 속도를 줄일 만큼 아름다운 거리였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가로수 가지치기라는 미명하에 수형도 멋졌던 그 나무들이 불구가 되어 있었다. 30여 년 자란 그 멋진 느티나무들은 큰 가지들까지 무지 막지 잘려나가 초라한 행색으로 변해 있었다. 여름에 그늘도 충분히 주지 못하는 빈약한 가로수들이 된 것이다. 공원 녹지과에 항의하니 원래 가로수 가지치기를 제대로 하려면 30억이 필요한 데 10억 밖에 없어 유감이라는 대답이어 기가 막혔다.언젠가 택시기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이 길도 이제 다 망가졌네요.""그렇죠. 안타깝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예전에는 속도를 줄이고 경관을 즐길 정도로 아름다운 거리였는데요."운전기사의 말을 듣는 동안 마음이 착잡했다.수령 30년의 가로수는 한여름의 온도를 5도나 낮추어 준다. 또 가로수가 내뿜는 피톤치드는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간판을 가린다는 민원 때문이라며 가로수에 단발령을 내렸던 것이다.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겐 가로수의 장점이나 지역적 특성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곳은 누가 봐도 학교가 두 개나 있는 주택가가 아닌가. 어이가 없다. 도로 다이어트를 하기 전에 가로수 터널부터 복원하려는 자세를 보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가로수길이 내뿜던 피톤치드와 서늘한 그늘을 타임캡슐에 넣고 싶다.어쨌든 나는 자연이 어우러진 지역에서 안초산이 내뿜는 공기를 마시며 녹지의 혜택을 푸짐하게 누리고 있다. 간간이 구청 공원녹지과에 아쉬움과 불평을 토로하면서도, 이것이 내가 안초산 자락에 기쁨으로 사는 이유이다. 북한산과 도봉산을 올려다보며 지역의 시골스러운 자연과 환경에 감사한다. 〈이 동네를 못 떠나는 이유〉 정년을 하면서부터 내가 바라던 삶이 있었다. 나무를 닮는 삶이었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고도 온갖 세상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세월을 이기고 자신을 성찰한다. 나무는 한 자리에 조용히 뿌리내리고 서 있지만 바람으로 새들을 불러들이고, 열매로 짐승을 불러 모으고, 그늘로 사람을 끌어들인다.날짐승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젊음을 구가했던 나는 이제 안초산 자락에서 노구를 이끌며 나무를 닮아가며 산다. 틈틈이 안초산을 산책하며 나무들과 대화를 나누노라면 마음이 편안하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다 오랜 친구처럼 친근하고 편안하다.어쩌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섶에 작은 꽃나무를 보면 밟히거나 다칠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주변의 돌을 가져다가 주위에 돌담을 쌓아 울타리를 쳐준다. 옆으로 길을 넓혀주고, 내가 마실 생수도 부어준다. 몇 년을 오르내리다 보니 이미 모두가 가족이다. 지나칠 때마다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눈다.이곳 제2의 고향, 안초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지는 벌써 삼십여 년이 되었다. 거리에 나설 때마다 북한산 인수봉이 손짓을 하고, 거실에서는 이웃과 백운대가 창문을 통해 반긴다. 동네가 처음부터 어릴 때 고향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사는 이 동네를 사랑하고,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살다가, 마치 나무가 대지에 뿌리를 내리듯, 이 동네에 뼈를 묻겠다는 생각이다.돌이켜 생각하면 정년을 마치고 왔어도 늦지 않았을 텐데. 내 자신이 너무 일찍 이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잘못된 결정이다. 생각하기 싫지만 경제적으로 보면 얼마나 바보짓을 했는지 후회스럽다. 거기에다 분당과 판교로 출가한 딸들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오라고 보챈다. 하지만 여기를 쉽게 떠날 것 같지는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이곳 아름다운 녹지 환경을 처절한 몸부림으로 지켜내며, 내 스스로가 공원의 분신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예전에 DJ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공약이 앞 다투어 시행되었다. 그중 하나가 일부 그린벨트지역의 해제였다. 그 바람이 평온하게 살고 있던 우리 마을에도 불어 닥쳤다. 그동안 우리 집 정원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던 안초산 자락에, 갑자기 체육시설이 들어선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법적으로 묶여있던 그린벨트 내에 최소의 공공시설 건립이 허용된 것이었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로 변에 3층 건물로 수영장과 헬스클럽이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환영할 만 했다. 인근에 헬스 센터가 생긴다는 것은 크게 나쁠 것이 없었다. 얼마 후 반장이 소문으로만 들리던 내용을 활자화한 주민 동의서를 들고 가가호호 서명을 받았다. 주민들은 거의가 기꺼이 서명하였다. 선의의 피해자인 녹지 소유주에 대한 연민의 정과 일말의 미안함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해가 바뀌자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동의서 내용이 둔갑하여 엉뚱한 사태가 벌어졌다. 헬스 센터가 골프연습장으로 둔갑하여 당국의 인가가 났다. 펜스가 쳐지고 황무지 개발 같은 무자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근린 생활공간에 골프연습장이 들어설 수 없음은 상식이다. 법적으로 문외한인 사람도 알만한 사실이다. 주민의 터전임은 물론, 울타리를 경계로 ㅊ중학교와 ㅊ초등학교가 인접해 있다. 거기에 300미터 거리에 다른 골프연습장이 이미 운영되고 있다. 그러니 골프연습장 건립 허가는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후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인가를 해준 공무원은 감사원의 지적과 함께 시정 공고를 받았다. 하지만 시정은 이행되지 않았다. 해당 공무원은 서울시청으로 영전하였고, 얼마 동안 근무하다가 정년을 마쳤다.사업주는 법적 권리를 주장하며 공사를 강행하였다. 주민들은 법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대법원까지 항소가 이어졌고, 법원은 업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판결문의 95%는 주민의 주장을 인용하면서도, 마지막 결론은 이미 인가 받은 업자의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법정의 긴 싸움에서 억대의 수임료를 받는 변호사와 몇 백만 원의 국선 변호사와의 싸움은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아파트 부녀회를 중심으로 골프연습장 추진 반대위원회가 결성되고,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처절한 투쟁이 이어졌다. 아파트 외각에 '골프장 건설 추진 반대'를 분명히 하는 현수막을 제작하여 간선 도로변에 걸었다. 수시로 주민 전체회의를 개최하며 정보를 나누며 행동에 옮겼다. 시청, 구청은 물론, 교육청 및 인근 학교 등 유관기관을 방문해 주민들의 의견을 전하고 시정을 요청하였다. 야간에 거리로 나가 촛불 행진을 하고 환경평가위원을 개별적으로 만나 자문을 받았다. 공사 현장 앞에 텐트를 치고 24시간 감시체제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회사에서 동원한 용역회사의 등치 좋은 검은 양복의 사람들과 숱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잊을 수 없는 어제〉 그러던 어느 날 골프연습장 관련 많은 자료와 기록 사진을 저장했던 컴퓨터 파일이 바이러스로 날아갔었다. 여간 낙담이 큰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한번 제대로 정리해 보겠다고 벼르던 것이어서 아쉽기 그지없었는데, 다행이도 '아주 작은 기록 하나'가 usb 하나에 사진과 함께 남아 있어서 큰 위안이 되었다. 이 자체만으로도 타임캡슐의 내용물로 손색이 없는 홈런타자 4호였다.오늘의 공원은 십 몇 년의 진통 끝에 배꽃 향기 그윽하던 동산에 새롭게 조성된 것이다. 이는, 관의 비호 아래 세워지는 골프연습장 건설을 저지하는 데모만 7~8년, 주민들의 처절하고 끈질긴 몸부림으로 되돌린 결실이다. 하지만 '생태'라는 수식어를 앞세운 공원은 그저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도심의 평범한 공원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살려달라고 외치던 아름드리나무들은 뿌리 채 뽑혀 보이지 않는다. 참담했던 당시의 천막과 현수막 사진이 타임캡슐의 5호 내용물이 될 것이다.마침내 2012년 4월 6일, 고대하던 '생태공원'의 준공식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서울시장과 구청장의 축사는 결과의 포장에만 장황했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주민들의 가슴 찢어지는 심적 고통은 안중에 없었다. 박수를 치는 주민들의 손길에 힘이 없었다.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이러려고 우리가 그렇게 긴 싸움을 했던 건가!"먼발치에서 행사를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겪지 않아도 좋을 갈등으로 서로 부딪치고, 시간을 빼앗겼는가. 얼마나 많은 예산이 낭비되었는가. 똑같은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되는데. 시행착오를 통해 교훈을 배워야 하는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특히 후대를 위해서라도,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자체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훈 말이다. 유관기관에 자문을 구하고 협조를 구했지만, 가장 실망스러웠던 곳은 교육기관이었다. ㅊ중학교와 ㅊ초등학교가 골프연습장 반대의 제1선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학교의 책임자들이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면담 성사조차도 쉽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글짓기와 그림을 통해서 환경 교육을 하고, 그 뜻을 서울시나 구청에 전달한다면 효과가 클 텐데 무슨 이유인지 몸을 사렸다.당시 서울시 북부교육청에도 ㅊ초‧중학교 인근의 골프장 설치로 인한 타구 소음에 따른 집중력 저해 등 수업 방해와 늘어날 교통 체증과 사고 위험에 대한 예방책에 대해 질의를 하였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학생들의 학습권 피해예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는 형식적이고 무책임한 답변이 전부였다.이러한 자료들 또한 타임캡슐에 보관할 6호의 목록이다. 타임캡슐도 좋지만, 교육청과 학교를 운운하다 보니 세계를 놀라게 한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떠오른다. 말랄라는 탈레반의 총탄에 맞서며 17세의 나이에 여성인권 사각지대인 이슬람권에서 여성의 교육 받을 권리를 목숨 걸고 사수하여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한편, 만 17세의 스웨덴의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는 전 세계적인 기후 관련 동맹휴학 운동을 이끈 인물로 2019년 타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 툰베리는 작년 4월 22일 '지구의 날' 50주년을 기념해 열린 UN총회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연설을 한 바, 우리 청소년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 들어본 적이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새겨보아도 좋을 것 같다."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와 기후변화라는 두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후변화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감염증 만큼이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확실하게 알려준 것은, 우리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좋든 싫든 세계는 몇 달 전과 확연히 다르게 변했습니다.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므로 이제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정신 차리고 변화해야 할 때입니다." 〈후대에 빌려 쓰는 자연〉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에서 확인된 분명한 사실은, 그 원인이 자연파괴에서 기인하였다는 것이다. 먼 동굴 속 깊은 곳, 박쥐의 서식지가 파괴되며 서로의 성역이 무너진 탓이다. 그 경계선을 누가 허물었는가, 인간의 자승자박이 아닌가. 툰베리가 말하는 새로운 길은 너무나 평범한 데 있다. 우리가 지금껏 배운 과오의 교훈을 한마음으로 실천하는 길이다."자연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후대에게 잠시 빌려 쓰는 것일 뿐"이라는 박경리 선생의 말씀과 삶이 떠오른다. 오늘을 아끼고 아끼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자연에 떳떳하고, 후대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유지하는 자세와 노력을 활자로 남겨놓아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겠지만, 그래야 후대들이 고마워하고 원망을 덜하지 않을까. 이러한 자세를 후손이 물려가며 전한다면 세상이 보다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그렇게 '온고이지신'이 이루어지리라.혼자서, 또는 손을 잡고, 유모차를 밀고, 강아지를 데리고 삼삼오오 공원을 찾는 수많은 발걸음들이 한번쯤 멈추어 공원의 아팠던 과거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지금도 공원 내 대형주차장을 동반한 목재문화 체험 공방, 정원학교 설립 등 크고 작은 문제가 속출되고 진행 중이다. 상처를 어루만지며 장기적인 안목에서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내 집 정원에서처럼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아끼고, 휴지 한 장 버리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시민의식이 빛나고, 어제의 지난한 문제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위정자의 미래지향적 가치가 빛을 발하는 공원을 꿈꾼다. 나는 언젠가 숲길에서 내 발에 차였던 솔방울들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들은 마치 나무들 하나하나가 떨어뜨린, 미래를 향한 그들의 간절한 마음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것들도 타임캡슐에 넣고 싶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가까이에서 생태공원을 마음으로 아끼고 몸으로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우리의 자부심'이라는 헌시를 기쁨으로 지어 바치기로 한다. 공원 한쪽에 시화전을 위한 상설 전시장을 꾸며, 아름다운 자연과 공원을 노래하는 감동의 시들을 함께 전시했으면 하는 바람도 갖는다. 몇 밤의 궁리 끝에 기쁨으로 태어날 헌시는 타임캡슐에 넣을 럭키 세븐, 행운의 7호가 될 것이다.아니, 가능하다면 동네 주민의 이름으로 쓴 헌시가 '숲공원' 개원 만 10주년이 되는 날 공원 안내판 옆에 나란히 걸개의 형식으로 소박하게 소개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헌시) 〈우리 공원의 자부심〉 여기 주민의 아름다운 공원이 있습니다.눈물과 땀과 함성으로 지어진 '꿈꾸는 공원'입니다. 1. after온갖 풀꽃 꽃나무가 철철이 옷 갈아입고귀한 새들 찾아와 동네의 아침을 깨우고광장에 전망 데크 생태연못에 잣나무 숲여름엔 발 담글 수 있는 물길도 흐릅니다 유모차 아가들이 산책로 드라이브하고온 동네 아이들이 까르르 뛰어놀고어르신들 잔디밭에서 손주 자랑 펼치고강아지가 사람 가족을 끌고 다닙니다 하지만 공원이 진짜 아름다운 이유는주민의 뿌듯한 자부심이 서려있음에주민의 주민에 의한 공원이어서 입니다땅바닥을 지켜온 잔디가 산 증인입니다 1. before업자와 담당자의 결탁이 만든 이권은학교 근처는 금한다는 법을 초월하여밤사이에 철탑을 높게 세워 올립니다주민 후생 위한 골프연습장이라면서요 자라는 아이들에게 숲을 물려주고 싶다!동네의 허파를 살리자 안초산을 살리자!새들 노래 소리 맹꽁이 소리 듣고 싶다!스러진 나무들의 울부짖음을 기억합니다 8년 가까이 주민이 업자와 몸싸움하고대법원까지 법으로 투쟁을 벌였지만일단 허가 난 업자는 보호한다 합니다그동안 아름드리나무들은 죽어갔지요 개장 10주년에 붙여 숲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함성으로 지켜낸 우리들의 공원자랑스러눈 공원, ‛숲소리 공원, 꿈꾸는 공원' 영원하여라!2022. 4. 6.자랑스러운 주민 일동x x x 숲정원을 거닐다 내가 눈여겨 본 큰 나무 하나가 있다. 만일 생태공원 입간판 아래에 타임캡슐을 묻을 수 없다면, 그 나무 아래에 꼭 타임캡슐을 묻고 싶다. 그리고 나무 둥치에 손을 대고 나무에게 속삭이리라, 내가 숨을 거둔 뒤라도 네가 숲이 되고 그렇게 우리의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언제 타임캡슐이 개봉될까. 누가 이 이야기를 읽을까. 그 때는 공원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또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해 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에 누군가 타임캡슐을 열었을 때, 내가 넣어둔 물건들을 보게 된다면 그것들은 마치 어린 시절 보물찾기를 한 기쁨이 되어, 숲정원의 몇 십 년 전 전설로 피어올라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기억되지 않을까. 그러면 내 소망의 등은 미래의 꿈꾸는 숲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날 것이다.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88올림픽과 나' - 김종석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88올림픽과 나' - 김종석

〈글을 쓰면서〉잠실벌에 달아올랐던 올림픽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1988년의 가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SLOOC)로부터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88올림픽 육상경기장을 만든 기술자의 이름과 국적을 말씀해주실까요?""한국의 김○○입니다.""아니요, 감독한 사람 말고 직접 시공한 외국인 기술자 말입니다.""순수한 한국의 기술로 만들었는데 무슨 말씀인가요?""외국사람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그렇지 않습니다. 외국인은 한 사람도 동원되지 않았습니다.""올림픽 백서에 기록하려는데 사실대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우리 기술로 애써 만든 경기장을 외국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힌다. 몇 차례 반복해서 설명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이 전화는 결국 끊어져 버리고 다시는 걸려오지 않았다.우리들은 스스로를 낮추고 과소평가하거나 우리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특이하고 앞서가는 것을 보면 외국산이라고 서둘러 단정해 버린다. 이것은 겸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올림픽경기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관심과 이권이 걸려있기 때문에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IOC의 간섭을 받아야 하고 국내외 언론과 체육인의 방해까지 가세하였다. 경험도 없는 일을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올림픽대회를 망칠 수도 있으니 시공경험이 있는 외국인에게 경기장 건설을 맡기라고 야단이다. IOC의 반대, 언론과 체육인의 방해, 기능 인력의 부족 등으로 나는 불안과 긴장 속에서 시달려야만 했다. 무쇠의 몸도 견디지 못할 고통과 시련을 겪다보니 일이 끝날 쯤에는 나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을 때에 조직위원회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일을 시작할 때부터 기술자인 나에게 하늘이 내린 소명(召命)이라 생각하고 사명감으로 일하였다 어려운 난관을 뚫고 필성(必成)의 신념으로 몸을 던져 일군 결과이다. 일은 일꾼이 하고, 그 결과는 정부가 홍보하고, 실상은 언론이 알려야 한다. 그런데 일을 시작할 때에는 그렇게도 불가능하다고 방해만을 일삼던 국내의 언론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둔 뒤에는 침묵하였고 정부산하조직인 SLOOC는 외국인 기술자 운운하였다.육상경기장의 평가는 경기에서 얼마나 신기록을 내느냐에 달려있다. 달리는 패션으로 불리는 미국의 여자선수 조이너스는 100미터에서 세계신기록을 내고난 뒤 바닥에 입을 맞추면서 경기장에 고마움을 표했다. 또 '도핑테스트'에서 실격당하기는 했지만 캐나다의 벤 존슨도 올림픽기록을 갱신하였다. 매스컴은 100미터 경기에서 남녀 모두 신기록을 세웠다고만 보도하였다. 이 경기장이 국내기술로 만들어졌다고 알렸으면 국위선양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인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우리나라는 88올림픽을 통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지정학적 열세를 극복하고 인류의 미래로 비상하여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없는 것도 만들어서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나라들에 비해 한국은 있는 것도 묻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어렵사리 이룩한 실적을 외국의 것으로 돌려버리려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역사기록에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이제는 우리 것의 소중함도 그리고 그 우수성도 찾고 보전할 때가 되었다.올림픽경기장을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작은 일로 생각될지는 몰라도 내 힘으로 이루고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신념만은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책임을 느낀다. 잃었던 건강을 되찾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올림픽경기장을 만들면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함께 공유하고 싶다. 〈올림픽유치와 나의 각오〉제24회 올림픽대회의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되는 순간, TV를 지켜보는 많은 국민들은 기쁨과 환호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었다. 나고야와의 경합에서 열세를 보이다가 막판에 뒤집는 이변에 모두들 놀랐다. 한국인의 끈기와 저력이 만들어 낸 노력의 결과이다. 올림픽대회 유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애를 썼지만 특히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노력은 대단하였다. 올림픽대회를 개최하여 얻는 경제적인 효과는 물론 국격을 높이고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잿더미 속에서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하여, 이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기회가 되었다.대통령은 올림픽과 관련되는 산업의 육성과 발전을 위해 경기에 쓰이는 용품과 경기장 시설을 국산화하고 올림픽을 통해 기술한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올림픽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이 땅에 유치된 인류의 제전이다. 국민 모두가 제각기 맡은바 일에 열중하고 역할을 분담하여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 국민은 옛날부터 나라에 일이 생기면 자진해서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나섰다. 외침을 받으면 스님들이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 아낙네들까지도 행주치마를 두르고 돌을 날라 외적을 물리쳤다.올림픽대회의 서울유치가 발표되었을 때, 나는 합성수지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회사의 연구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국민이자 기술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땅이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술자의 본분이고 하늘이 나에게 내린 소명이라 생각하고 88올림픽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곰곰이 찾아보았다. 마침 내가 연구하고 있던 것이 '폴리우레탄 엘라스토머'였다. 이 재료가 전천후 육상경기장에 사용된다는 기술문헌이 있었기에 올림픽육상경기장을 내손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88올림픽은 내 인생에 큰 획을 그은 대 전환점이었다. 고분자화학에서 토목으로, 연구실에서 공사현장으로 하는 일과 환경이 바뀌는 변화의 물결이었다. 서둘러 필요한 기술 자료를 수집하고 빈틈없는 시공을 위한 체제를 갖추기에 바빴다.일정한 길이를 얼마나 빠르게, 높게 그리고 멀리, 뛰고, 던지느냐를 겨루는 시합이 육상경기이다. 그러기에 길이가 생명이다. 길이의 허용오차가 4만분의1 이하이다. 또한 전천후 경기장이므로 비가 올 때는 표면으로 물이 잘 빠져야 한다. 작은 구배를 유지하면서 표면배수가 되어야 한다. 한 군데도 물이 고이는 곳이 있어서는 안 된다. 표면 구배의 허용오차는 1000분의 1이하이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능이다. 사용한 재료의 품질과 시공기술에 따라 성능이 좌우되는 정밀시공이다.과거에는 올림픽이 열리는 육상경기장은 흙바닥이었다. 육상경기는 바깥에서 열리는 경기이므로 대회기간 중에 비가 오면 경기장 바닥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서 경기가 어렵게 된다. 그렇다고 많은 비용을 들여 개최하는 대회를 취소하거나 연기할 수도 없기 때문에 날씨와 관계없이 경기를 진행할 수 있는 대안으로 고안된 것이 전천후 육상경기장(all weather track)이다. 가능한 한 흙바닥의 조건에 맞춰 경기장의 기능을 최대한 살리면서 기후변화에 상관없이 경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육상경기장의 성능은 얼마나 경기력을 올릴 수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 경기력의 향상은 경기 중에 바닥에서 생기는 반발탄성을 운동역학적으로 응용하는 고도의 이론과 기술이 필요하다.전천후육상경기장은 1980년대만 해도 시공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독일 두 나라 뿐이었다. 한국이 독자의 기술로 경기장을 만들겠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반대가 많았다. 가장 큰 벽은 IOC의 반대였다. IOC는 자기들이 추천하는 대로 경기장을 만들 것을 고집하고 이를 종용하였다. 어느 날 IOC에서 SLOOC에 보내온 전문은 '한국이 IOC의 요구에 불응하여 올림픽경기장을 국내기술로 만드는 것을 고집할 경우, 88올림픽대회의 서울개최권을 박탈하고 다른 나라로 장소를 바꾸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이것은 횡포이다. 〈경기장 국산화를 건의하다〉육상경기장 국산화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시청을 먼저 노크했다. 우리는 힘이 없으니 상급기관에 가서 상의하라고 발뺌을 한다. IOC의 반대를 의식한 것이다 도리 없이 국무총리실을 찾기로 하고 유창순 국무총리 앞으로 보내는 건의서를 준비하였다.나는 회사에 들어온 이후, 연구실에서 줄곧 근무하였기 때문에 관청에 출입하는 경험이 전혀 없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다. 미리 설명을 듣고 긴장된 마음으로 건의서를 들고 중앙청으로 가서 서류를 접수하였다. 며칠 후 총리실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행정조정실장실로 오라고 한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비서관의 안내로 행조실장을 만나보니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소신을 말했다. "저는 고분자화학을 공부하고 있는 순진한 기술자입니다. 올림픽경기장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목숨을 걸고 성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경기장을 미리 만들어서 86아시안 게임에 써보고 아시아 육상인 들의 평을 받아서 올림픽경기장으로 쓸 수 있는지 면밀히 검토한 다음, 만약에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올 때는 저희 회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여 경기장을 철거하고 IOC가 지정하는 대로 재시공 하겠다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IOC는 반대할 명분이 없어지고 한국정부도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든 경기장을 철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나의 진지하고 결의에 찬 말을 끝까지 듣고 난 행조실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는 정부를 대표하는 88올림픽 실무준비위원장입니다. 올림픽이 처음 열리는 것이라서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 걱정하고 있는 중인데 경기장 준비의 대안을 일러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비서관을 불렀다."비서관, 이분 얼굴을 잘 보고 기억하세요. 앞으로 이분이 찾아오면 나를 꼭 만나고 가도록 해주세요." 기상천외의 말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비서관이 나가고 난 뒤 행조실장은 보다 다정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외람된 말이지만 내가 세종대왕이라면 당신은 이름도 비슷하니 김종서 장군 하세요. 세종대왕은 김종서와 같은 충신을 두었기에 훌륭한 일을 많이 하여 성군이 될 수 있었고, 김종서 역시 세종대왕 같은 성군을 모셨기에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장군이 되었습니다. 우리 함께 국가를 위해 힘을 모읍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과분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이 일이 성사되면 몸이 어스러지도록 일해야겠다는 결심과 각오가 앞선다. 〈반대를 무릅쓰고〉올림픽경기장의 국산화작업이 총리실을 통해 행정적인 절차를 밟고 있는 동안, 각계에서반대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국내에서 가장 심하게 반발하는 곳은 체육계이다. 여기에 편승하여 매스컴의 풀무질은 도를 넘었다. 한국의 기술수준이 어디쯤 와 있고, 우리의 기술로서 가능한 일인지는 알아볼 생각조차도 않고 해보지도 않은 일을 못한다고 반대만을 일삼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없이 설명회를 열어 우리기술로서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역설하여 반대의 아우성을 잠재우기에 바빴다.총리실을 처음 들어갈 때의 두렵고 망설여지던 나의 수줍음도 일의 어려움 앞에서는 눈 녹듯 없어져버리고 어디서 생겼는지 백절불굴의 투지와 용기가 샘솟듯 일어났다. 마치 열여덟 처녀의 수줍음이 40대 장사꾼 아줌마의 용기와 뱃심으로 변해 버린 것 같다. 여러 사람 앞에서는 말하기를 주저하던 숙맥이 원고도 없이 청중을 사로잡는 설득력도 생겨났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 직원이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고 뒤에 술회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되는데. 내 자신도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해서 총리실과 청와대에 건의하여 해결방안을 찾았다.말로서만 "할 수 있다. 한국의 기술로 가능하다."는 탁상공론 대신에 전국에 2개 이상의 경기장을 샘플로 만들어서 실제 한국기술로 가능한 것을 보여주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반대여론이 가라앉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가는 기미가 보일 때, 정부고위층과 체육계인사가 모인 자리에서 현황브리핑을 가졌다. 기술적인 내용설명과 한국기술로 올림픽 경기장 건설이 가능하다고 설명한 뒤, 한강의 기적은 잘못된 표현이라는 요지의 말을 곁들였다."6.25 전쟁 때 종군기자였던 캐나다인이 이라고 했습니다. 6.25 때 한국을 도우러 온 유엔군은 두 적과 맞서 싸웠습니다. 하나는 북한의 정규 공산군이고 또 하나는 놀랍게도 한국민이었습니다. 화력이 우수한 유엔군은 공산군과의 전쟁보다 이들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더 괴롭고 어려웠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 살길이 막연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려야만 했습니다. 먹고 입을 것을 구하기 위해 유엔군이 주둔한 병영기지에 구름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용하게도 군속으로 취직이 되어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호구지책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유엔군은 모든 출전 준비를 다 갖추고 다음날 전투를 계획하고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병기가 귀신도 모르게 없어진 것입니다.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투에 지고 마는 낭패를 맛보았습니다. 한국 사람의 신출귀몰한 머리를 유엔군이 당하지를 못하고 한국민과의 두뇌전쟁에서 형편없이 지고 말았습니다. 전쟁의 포화는 멈추고 휴전이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도 유엔군을 괴롭히던 그 머리가 이제는 경제개발현장으로 호구지책을 찾아 모여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세계는 이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이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일어나야 하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사람을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유엔군을 놀라게 만든 그때의 우리들 머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걸작품입니다. 한국사람 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불가능을 모르는 민족입니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제철소가 그러했고 자동차, 조선소가 그러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들은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온 세계가 안 된다고 말한 것을 한국은 해내고야 말았지 않습니까?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정도를 한국기술로 못 만든다고 하는 말은 어디다 근거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이 정도의 기술은 한국이 해내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88올림픽대회를 앞두고 3개의 나라에서 올림픽육상경기장을 무상으로 만들어 줄 것을 한국정부에 제의해 왔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에 손상이 가는 말입니다. 저는 6.25동란 때, 유엔군이 주둔하는 김해공항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낙동강 강둑에 소를 몰고 가서 풀을 먹이며 친구들과 노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강둑을 따라 있는 도로에 멀리서 유엔군 스리쿼터가 달려오면 우리 어린이들은 손을 흔들며 열열이 환영한 후 차가 지나가고 난 뒤 앞이 보이지 않는 먼지 속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유엔군이 던지고 간 씨레이션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 어떤 흑인은 차를 멈추고 우리들과 잠시 놀다 갑니다. "할로 주잉감 기부미(hello, chewing gum give me)" 입을 가리키며 형들로부터 배운 엉터리 영어를 하면서 흑인이 씹고 있는 껌까지도 얻어먹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씨레이션'을 던져주던 유엔군이 전쟁이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사업가가 되어 다시 이 땅에 와서는 그 때 씨레이션을 던지던 기분으로 공짜로 경기장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올림픽메인스타디움의 시공실적을 가지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 메리트를 우리가 가져야하고 이 기회에 발전된 한국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먼지 속에서 던져주는 씨레이션을 받아먹던 나라가 이제는 아니라는 것을 꼭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브리핑을 마무리 하였다.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첫 삽을 뜨다〉한바탕 부산을 떨던 여론은 샘플 경기장을 만들어 우리의 솜씨를 보여주겠다는 나의 제의에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한시 바삐 전열을 가다듬어 공사에 임할 준비를 했다. 건설면허를 구비한 후 공사 장비를 갖추고 일할 사람을 모집하여 새로운 진용을 짜고 나니 내 자신이 막노동꾼이 된 기분이다. 연구실에서 연구에만 몰두하던 일이 옛날이 되어버렸다. 마치 삭발을 하고 출가하는 비구니 스님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총리실의 권고로 대구에 급히 내려갔다. 대구시민운동장의 바닥을 개조하여 전천후 육상경기장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대구의 대영건설이 원청공사를 맡아서 전문시공자를 찾고 있었다. 이미 독일회사가 대구에 있는 에젠트를 앞세워 입김을 넣고 있었다. 뒤늦게 한판 끼어드는 입장에다가 서울에서 내려갔으니 텃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육척 장신의 거구에 주먹이 솥뚜껑만한 깡패 녀석이 노골적으로 폭언을 쓰고 폭력을 휘두르며 포기할 것을 강요한다. 공사판이 이런 걸 미리 들어서 알고 있는 터라 여기서 밀리면 아무것도 안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주먹이면 주먹, 기술적인 능력이면 능력, 어느 것이라도 좋으니 한번 해보자고 맞받아쳤다. 혈혈단신으로 사즉필생의 처절한 경쟁 끝에 결국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기초바닥 콘크리트는 원청회사인 대영건설이 직영하고 전천후포장재의 포설과 전체적인 기술 감리를 우리가 맡기로 하고 하청계약을 체결하였다.가운을 벗고 대구로 내려갔을 때, 처음에는 황량하고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국산화에 반대하는 것은 비단 체육인과 언론만이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적극적이어야 할 회사가 극력 반대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공경험이 없어서 성공할 확률이 적고 실패하면 회사가 곤경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가죽은 탐이 나는데 범의 발톱이 무서운 것이다. 안 된다는 결론으로 보면 회사의 말이 맞다. 할 수 있다는 말은 나 혼자 밖에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를 미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회장을 포함해서 모두들 관심이 없다. 도울 생각도, 돕는 사람도 없다. 혼자서 하다가 살아서 돌아오면 내 자식으로 인정하겠다는 식이다. 스프링은 누르면 누를수록 위로 튄다. 반대를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굳어만 갔다. 뼈를 깎는 아픔이 있더라도 꼭 이 일은 내 손으로 해내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회사의 지원은 전무한 상태이다. 기동성이 있어야할 공사현장에 차량한대 지원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잔일은 자전거를 준비하여 처리하였다. 한마디로 찬밥신세가 되었다.포설기 대신 나무로 포설용 도구를 만들어서 공사를 하고 있는데 감독관인 운동장장이 한마디 한다. "독일사람들은 자동포설기(paving machine)를 가지고 공사를 한다고 하는데 일하는 걸 보니까 너무 원시적이다."라고 한다. 나는 이말을 받아서 즉시 장장에게 되물었다. "구두가 두 켤레 있는데 하나는 기계화이고 또 한 켤레는 수제화라면 같은 가격 일 때 장장님은 어느 구두를 고르시겠습니까?" "그거야 수제화를 고르지요.""맞아요, 자동포설기는 적은 인력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률 위주의 장비이지 품질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품질은 손으로 꼼꼼하게 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포설기를 구비할 돈이 없어서 손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것은 궁지에 몰린 나의 임기응변이었다. 회사에서는 반대를 하고 있으니 값비싼 포설기를 구비하는 것은 엄두도 못내는 일이었다. 바로가든 모로가든 무사하게 서울에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가는 방법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이렇게 하여 어려운 여건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한국사람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제1종 전천후육상경기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육상경기장은 대한육상 경기연맹의 공인 검사에 합격하여야 사용할 수 있고 경기의 기록이 공식적으로 인정이 된다. 공인검사를 나온 대한육상경기연맹의 김용덕 기술이사는 각 부분을 꼼꼼히 살펴보고는 우리 손으로 이런 훌륭한 경기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체육인의 한 사람으로 너무나 기쁘고 긍지를 느낀다고 말한다. 단 한 번의 검사로 합격판정을 받았다. 이것으로 1차적인 관문이 통과된 셈이다. 체육계도 만족하였다.그제서야 회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고 행조실장도 매우 기뻐했다. 경기장 공사에는 회사가 직접 생산한 고가의 합성수지재료만도 백 톤이 훨씬 넘어서 새로운 판매신장과 함께 올림픽을 통해 회사의 선전효과도 기대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회장은 물론 기뻐한 사람은 경리 부장이었다. 당시의 제조업은 물건을 팔아서 받는 물품 대는 거의가 약속어음으로 결제되는데 관공사는 모두가 현찰결제이다. 거기에다 공사 진도에 따라 선급금까지 받으니 자금난을 해소하는 데는 금상첨화이다. 돈도 벌고 자금난도 해결하고 명예까지 얻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니 회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대구시민운동장의 공사로 인하여 구겨졌던 나의 회사 내 이미지는 확 달라져서 그 공로로 부장에서 승진하여 나는 그룹에서 최연소 이사가 되었다〈전주공설운동장 공사〉전주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대구의 성공사례를 듣고 미리 시공업체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샘플 시공의 효과가 이처럼 대단한 것에 놀랐다.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생소한 분야의 공사인지라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담당 공무원은 무척 반가워했다. 내역설계자료를 만들어주었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다. 금방이라도 계약이 이뤄질 것 같은 분위기다. 여관으로 돌아와서 며칠을 기다렸는데도 시청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다. 곧 결재를 받는 대로 연락을 하겠다고 했는데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청사에 들어가서 담당 직원을 만났더니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만 뜻밖의 말을 한다.결재과정에서 도지사의 특별지시가 떨어져 일이 보류 되었다고 한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암초에 걸려버렸다. 이 정도 규모의 공사를 도지사가 직접 관여하는 일은 드문 일이다. 여러 사람을 통해 그 내막을 알아보니 참 어렵게 얽혀있었다. 1년 전에 광주의 무등경기장을 일본의 회사가 시공하였는데 전남도청에서 전북지사에게 시공업체를 소개한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도지사를 만났다. 전북지사는 김제 사람으로 육사 8기생이다. 마침, 그룹에 임원 한 사람이 육사 8기생이 있어서 도움을 청하여 함께 만나 보았으나 점잖게 거절당하였다. 속된 말로 손톱도 안 들어간다. 눌러진 스프링이 또 다시 튀어 오르기 시작한다. 지사와 단판을 지을 생각으로 지사관사로 찾아가기로 했다. 지사가 출근하기 전에 아침 식사시간에 맞춰 가기로 했다. 식사시간을 이용하면 좀 심한 말을 해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 이다. 예정시간에 맞춰서 관사에 도착하였다. 아침부터 불청객이 들이닥치니 다소 의아한 표정이지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식사를 준비하던 사모님이 "아직 식사 전이지요?" 하면서 같이 상을 차린다. 지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는 요점을 간추려서 짧은 시간에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다."지사님, 저는 지금 대통령의 국산화 시책에 따라 올림픽경기장을 우리 손으로 만들기 위해 총리실을 통해 건의서를 제출하고 그 가능성을 입증시키기 위해 대구에 샘플경기장을 시공하여 체육계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외국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올림픽경기장을 우리기술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전주가 나서 주십시오. 그 길이 대통령의 국산화지시에 따르고 나라를 위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우리와 감정이 많은 과거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에게 공사를 맡기는 것은 국민정서에 반하는 일이라 감히 말씀 드립니다." 지사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기어이 일본에게 일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나는 드디어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는 국가관 하나는 철저하게 교육시키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지사님은 육군사관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신 게 맞습니까? 며칠 후에 전주 실내체육관에서 WBA 세계 복싱 타이틀의 한일전이 열리는데 지사님은 일본 선수를 응원하실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없어지지 않고 발전하고 있는 세 개의 단체모임이 있습니다. 해병대 전우회, 고대동창회, 호남향우회가 그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전라도 사람에게 하나는 꼭 배워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향을 생각하고 결집하는 애향심 말입니다. 가족 사랑하는 마음이 커져서 내 고향을 사랑하게 되고 그 애향심이 모여서 애국심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향을 사랑하고 국가와 민족을 누구보다 먼저 생각하시는 지사님,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지사님의 앞날에 도움이 되도록 저도 일조를 하겠습니다."듣거나 말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실례를 무릅쓰고 생각나는 대로 말해 버리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관사를 빠져나왔다. 그 날 도 건설국장이 나를 찾았다."지사님이 대노하여 김 이사의 청사출입을 금지하라는 지시가 있습니다."충격요법으로 지사를 움직이려던 나의 계획은 역효과를 내면서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시청 실무부서에 내려갔더니 이미 일본회사와 상담이 많이 진행된 상태 같았다. 나는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을 직감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편치 않은 며칠을 보내고 있는데 총리실에서 연락이 왔다. 제1행정조정관의 전화이다."전주일은 잘되어가고 있지요?""잘되어 가다가 지사님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서 포기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지금 당장 총리실로 들어와 주세요."행정조정관은 도지사보다는 직급이 낮고 나이도 많이 아래인 고향 후배이다. 자초지종을 듣고는 내가 있는 앞에서 전북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사님 안녕하세요. 총리실입니다." 조정관은 지사와 평소에 잘 아는 사이 같았다."총리실에서는 대통령의 국산화 시책에 따라 경기장 국산화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주에서도 동참하시겠지요?""아직 국산기술을 믿을 수 없으니 전주는 위험부담을 안고는 따를 수 없습니다. 조정관께서 고향의 행사가 대과 없이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지요.""저도 그런 점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국산화에 우리 전북이 앞장서야지요. 대구에서 좋은 평가가 나왔으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두 사람의 공방은 점점 심해가면서 서로의 음성이 커졌다. 조정관은 마지막으로 "총리실의 지시입니다. 국산으로 하세요."라고 잘라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김 이사, 오늘 당장 전주로 내려가세요. 그리고 그 결과를 급히 보고해주세요." 총리실과 도지사 사이에서 나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지만 마음은 후련하였다. 〈오뚝이처럼 일어나다〉총리실의 지시를 받고 급히 전주로 내려갔다. 먼저 시청을 들러서 그 동안의 진척 상황을 알아보았다. 지사의 열화 같은 지시에 따라 이미 일본회사와 계약이 체결되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지사를 만나야 소용이 없는 일이다.그냥 돌아서서 서울로 가려다가 총리실에 보고하는데도 필요하고 미련이라도 떨쳐 버릴 생각으로 그 동안 사이가 가까워진 담당자에게 공사계약서를 보여줄 것을 간청했다. 내 눈으로 직접 계약서를 확인하고 싶었다. 어렵사리 보여주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보던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 마지막에 있어야 될 시공자의 인감이 찍혀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계약 시에 인감을 잊고 온 것이다. 계약서의 날인을 뒤로 미루고 우선 일을 시작하고 있는 중에 내가 나타난 것이다. 하늘이 도운 일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일하기를 바라던 담당자에게 총리실의 지시사항을 귀띔하고 시공자의 날인을 보류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부리나케 지사실로 달려갔다. 비서를 통해 내가 왔다는 말을 들은 지사는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대갈일성으로 고함을 지른다."나가시오. 당신은 보기도 싫소. 총리실에 가서 정치나 하고 다니는 당신이 기술자요?"손가락질을 하면서 야단을 치는 지사의 뒤를 따라 나는 막무가내로 지사실로 밀치고 들어갔다. 펄펄 뛰는 지사를 모셔서 소파에 억지로 앉히면서 차근히 말했다."지사님, 노여움을 푸십시오. 저는 지사님을 괴롭힐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총리실과 청와대는 국산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사님 혼자만 엇길을 걸으시고 있습니다. 저가 서울에 올라가서 정치한 적이 없습니다. 총리실에서 불러서 들어갔습니다. 제가 지사님 편에 서서 지사님을 돕겠습니다. 다시 한 번 다른 눈으로 저를 봐주십시오."눈물을 글썽이면서 호소하는 저에게 지사는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한다."늦었소, 이미 계약이 체결되었소.""아닙니다. 저가 공사계약서를 확인했습니다. 아직 시공자가 인감을 찍지 않았습니다. 법적으로 효력이 없는 계약서입니다.""그래요? 그런데 공사를 시작했는데.""지금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습니다. 뒷수습은 제게 맡겨주십시오."드디어 지사는 경기장 국산화를 지시하고 후선으로 물러났다. 다행히 작성한 계약서 2부를 모두 발주청이 보관 중이어서 계약취소는 간단 하지만 사전 공사를 묵인한 것 때문에 약간의 시비가 있었으나 그 비용을 지불하고 일을 매끄럽게 해결하였다. 기사회생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나는 오뚝이처럼 우뚝 서게 되었다.서둘러 계약을 끝내고 공사에 들어갔다. 이제 공사에 지장을 주는 문제점도 없어지고 날씨도 좋아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지사도 자주 현장에 들러서 진행과정을 지켜본다. 어느 날 엎드려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지사가 웃으면서 작업하는 나를 보고 있다. 악수를 청하기에 붉은 재료가 묻은 손이라서 안 된다고 하니까. "그 재료, 나도 한번 묻혀보고 싶다."고 하면서 억지로 손을 잡는다. 처음의 매정하고 서먹하던 사이가 완전히 달라졌다. 공사현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필사적으로 일하는 나를 보고 나의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다.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는 어느 날, 운동장 주차장에 헬기 한 대가 날아와 앉았다. 이영호 체육부 장관과 정주영 대한 체육회장이 소년체전의 준비 상황을 살피러 온 것이다. 현장소장인 내가 두 분을 안내하여 공사 진행 상황을 설명하는데 뒤를 따르던 대한육상경기연맹 김용덕 기술이사가 "회장님, 저가 년 초에 독일에 출장을 가서 독일의 육상경기장을 전부 돌아보고 왔는데 이만한 운동장을 보지 못했습니다. 완공이 되면 스탠드의 수용인원을 빼고는 당장 올림픽을 개최해도 손색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정 회장은 "수고합니다." 라고 하면서 나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옆에 서 있던 지사가 나를 쳐다보면서 "이 친구 처음에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괴롭힐 때는 몹시 미웠는데 이제는 미움이 사랑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라는 말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이렇게 숱한 문제점과 난항을 겪으면서 전주공설운동장은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만든 국산재료를 사용하여 외국의 손을 하나도 빌리지 않고 순수한 우리의 기술로서 만든 또 하나의 1종 전천후 육상경기장이 완성되었다. 〈전국소년체전이 열리고〉83년 5월 21일, 전주공설 운동장에서 대통령 내외분이 참석한 가운데 제12회 전국소년체전이 성대하게 열렸다. 대통령은 하루 전에 미리 내려와서 업무보고를 받은 뒤 저녁에 만찬회를 가지고 지사 관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개회식에 참석하였다. 관계자가 전해주는 말에 의하면 업무보고에서부터 만찬석에 이르기까지 전주 종합운동장에 대한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전북지사는 업무보고에서"대통령 각하의 국산화시책에 따라 다소의 위험을 감소하고 경기장을 국내기술로 만들었더니 전 세계 어디서에도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경기장이라는 대한육상경기연맹의 평가를 얻었습니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은 스탠드의 수용능력을 제외하고는 당장 올림픽을 개최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이번에 경기장을 만들면서 국내기술의 우수성이 입증 되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대통령은 만면에 희색을 띄우며 수행관계관에게 전북지사와 같이 소신을 가지고 업무를 처리해야 된다고 강조하면서 올림픽경기장도 전주와 같이 국내기술로 만들 것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 내가 처음부터 예상하고 바라던 그대로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나는 개회식에 초대되어 본부석에서 개회식 광경을 지켜보았다. 대통령내외분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내가 마련한 공사 때의 공정 사진첩이 놓여 있었다. 대통령이 수시로 그 사진첩을 펼쳐보는 모습을 가까운 거리에 앉아 보면서 나는 무한한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반대를 하면서 나를 홀대하던 지사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운동장공사로 인하여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일이 너무나 좋아 보였다. 지사는 소년체전이 끝나고 나서 보훈처장을 거쳐 노동부장관으로 승진하였다.소년 체전이 끝나는 날, MBC의 이종성 기자가, 병석에 계셨던 아버님의 안부를 묻는다. "아버님은 그동안 건강이 회복되셔서 아들이 만든 운동장을 보시고 싶다기에 여기에 모셨습니다."고 했더니 카메라를 돌려 한 컷을 찍어 준다. 아들과 함께 TV카메라에 얼굴을 보이시면서 흐뭇해하시던 아버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이제 공사도, 체전도 끝나고 전주를 떠나야하는데 소감이 어떠냐?"고 묻길래 나는 이렇게 말했다."문화와 예술의 도시, 전주에 와서 전주시민 내지는 전북 도민의 순박하고 진실함에 홀딱 반해서 여러분께서 들으시는 대로 이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의 사나이는 돌아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동안 보살피고 아껴주신 따뜻한 정을 제 가슴속에 오래오래 간직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이 말은 그냥 입버릇처럼 한 인사말이 아니다. 공사과정에서 느낀 그대로를 말한 것이다. 그 지방의 인심을 보려면 공사판에서 인부들을 일을 시켜 보면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지금도 전주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맞이한다.다음날 서울로 떠나기에 앞서 인사차 도청에 들렀다. 마침 국장들과 회의를 마친 후여서 다들 같이 있었다."김소장, 서울 가지마소. 여기서 국회의원 나오면 틀림없소. 어제 TV인터뷰를 보고 우리국장들도 모두 다 이구동성이요.""에이, 무슨 말씀을요. 저는 그런 거는 관심이 없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요."유종의 미를 거두고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간의 경과를 회장님께 보고 드리고 한 가지 진언을 하였다."그 동안 전주시민과 지사님에게 심려도 많이 끼치고 또 전주에 사업체도 가지고 있으니 한번 인사를 가셔야겠습니다."고 했더니 흔쾌히 승낙하였다. 며칠 후 지사실과 미리 약속된 시간에 맞춰서 회장님 전용 벤츠를 타고 전주로 내려갔다. 난생 처음 타보는 벤츠는 굴러가는지 미끄러지는지 분간을 못하겠다. 회장님과 그간에 있었던 숨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전주에 도착했다.지사는 몇 사람의 국장들과 함께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회장이 인사말을 한다."그동안 여러모로 보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김 이사가 지사님을 많이 괴롭혔지요? 진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몸이 불편하여 오지 못하다가 오늘 무리를 해서 내려와 지사님을 뵈니 아프던 병이 어디론가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는 말에 지사는"오늘 회장님을 뵈니 큰 산 밑에 유명한 장수가 난다더니, 회장님 밑에 김 이사 같은 사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고 화답하고는 우리 회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다. "회장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이번의 공로를 인정하여 김 이사를 진급시켜 주십시오."라고 엉뚱한 부탁을 한다. 마치 나의 출세를 위해 회장과 지사를 만나게 한 것 같아서 좌불안석이 되어버렸다.웃음 띈 얼굴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전북도청을 나섰다. 서울에 올라온 다음날 회장은 성급하게 나를 상무이사로 승진발령 하였다. 나는 강력하게 사양했다."회장님, 저는 일을 하는데 승진이 필요치 않습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저를 이사로 그대로 두는 것이 일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동료들의 시기 질투를 염려한 말이다."아니야, 이번의 자네 승진은 나라가 시키는 것이니 여러 말 말고 받아드려야 한다. 내가 40여년 사업을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다."고 하면서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이사가 된지 1년 만에 파격적으로 상무이사로 승진하였다. 〈잠실주경기장 공사〉대구, 전주의 운동장을 차례로 만들면서 국내기술로도 충분히 올림픽경기장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입증되었다. 그렇게도 방해를 일삼던 반대여론은 봄볕에 눈 녹듯 가라앉고 IOC도 반대의 명분을 잃고 이성을 찾는 분위기가 되었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뒤의 맑은 하늘을 보는 기분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어제의 적군이 모두 우군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수가 제집을 찾아가듯 아무런 저항도, 장해물도 없이 나는 자연스럽게 올림픽경기장을 만드는 주역이 되었다.올림픽메인스타디움의 설계는 한국건축계의 1세대라 불리는 김수근의 공간연구소가 맡고, 공사는 공개경쟁입찰에 의해 대림건설로 결정되었다. 이조백자의 모형을 따서 설계한 올림픽메인스타디움의 설계도면에는 육상경기장 부분은 공백으로 있는 상태였다. 이 공백을 전천후육상경기장으로 꾸며서 채우는 작업은 나의 몫이었다. 공간사옥을 수없이 들락거리면서 공사에 필요한 설계도면을 완성하였다.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김수근은 올림픽메인스타디움을 설계한 직후 향년5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육상트랙을 설계, 시공한 나는 죽음직전까지 갈 정도로 오랜 동안 병마에 시달렸다. 남이 안하는 일을 하면 신이 노한다는 징크스일까. 사람들은 이를 두고 천기누설로 받는 형벌이라고도 하고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도 부른다.올림픽메인스타디움의 공사는 서울시가 발주하여 대림건설이 일괄 도급하였다. 발주관청에 들락거릴 필요 없이 원청회사인 대림건설과 하청계약을 맺으면 그만이다. 수주과정에서 겪었던 번거로움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대림산업의 연락을 받고 임경빈 현장소장을 만났다. 오랜 시간 수주상담을 벌일 필요도 없이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이미 완료한 샘플시공단가를 적용하여 공사계약이 맺어졌다. 쉽게 그리고 너무나 간단하게 일이 처리 되어가니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계약이 끝나고 난 뒤 임 소장이 혼자말처럼 되뇌인다. "30년이 가깝도록 건설회사에 근무했지만 대통령이 하청업자를 정해주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인데.... !"실제 실무적인 일을 해왔던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나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감쪽같이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총리실의 올림픽경기장국산화에 대한 상신, 전북지사의 국산화성공사례보고와 소년체전에서 대통령이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한 것에 따라 내린 국가최고책임자로서의 결심이지 정실이나 청탁에 의해 이뤄진 일이 전혀 아니다.그런데도 세상은 비뚤어진 관념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이번 일을 하면서 특히 느낀 점은 청와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곳이라고 생각한 나의 고정관념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다. 원리원칙만 내세우는 하급관청에 비해 대의명분만 있으면 일처리가 훨씬 쉽고 빠름을 보았다. 받아들이는 공무원의 자세부터가 다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약간의 규정을 비껴서라도 해결해 줄려는 열의와 적극성이 있었다. 물론 어두운 부분도 있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접한 청와대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대림건설로부터 잠실 주경기장과 보조경기장, 두 건의 공사를 수주하여 시공하게 되었다. 그간의 샘플시공을 통해 닦은 경험과 기술을 토대로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원청회사인 대림건설과는 호흡이 잘 맞았다. 바닥의 아스팔트포장공사는 표면배수구배와 평탄성이 생명이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내가 지적하는 대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수정하여 보완하면서 시공하였다. 누가 원청회사인지 하청회사인지 갑,을의 구분도 없이 한마음 한 몸이 되어 한곳에 올인 하였다. 대한육상경기연맹도 공사 도중에 하나하나씩 체크하면서 공정을 진행하였다. 모두다 올림픽경기장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춰서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였다.이른 봄에 시작된 공사는 여름을 넘기면서 공기에 여유를 가지고 세심하게 다듬어져 1984년 9월에 공사를 마무리하여 준공되었다. 이로서 올림픽 역사상 3번째로 전천후올림픽육상경기장을 만드는 실적을 한국이 가지게 되었다. 하늘의 별을 딴 기분이다.86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올림픽을 열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AGF)의 평가를 받았다. 실로 힘들었던 대장정이었다. 망망대해에서 파선된 널빤지 하나를 부여잡고 표류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조난자의 기분이었다.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인생이 이런 것인가 보다, 피나는 노력 끝에 머리에 씌워지는 아폴론 신의 월계관, 이 희열의 순간을 얻기 위해 그 험한 준령을 넘어와서 지금 여기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뜻 깊은 일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희열의 산마루에서 지난날 내가 걸어왔던 험한 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때는 괴롭기만 했던 순간들이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다. 그 인고(忍苦)의 과정 속에 내가 있고 나의 삶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어떤 동물학자는 말한다. 먹이를 쫓는 사자는 얼룩말을 쫓을 때나 토끼 한 마리를 쫓을 때나 뒷다리에 주는 힘은 같다고 했다.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지혜를 모두 쏟아서 이룬 결과이다 . 〈병마와의 처절한 싸움〉올림픽경기장이 성공리에 마무리되고 몸과 마음이 한가롭게 되니 기다렸다는 듯이 병마가 찾아온다. 이미 예상하고 각오는 하고 있었다. 병원에 가서 의사의 문진에 답하다 보니 증상이 30가지가 넘는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여론에 시달리면서 힘든 공사를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기가 빠져 병이 된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우울증 보다 무서운 공황장애였다. 심한 스트레스와 압박감에서 생긴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병이다.어느 날 거래처의 임원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는데 아프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니 어김없이 컨디션이 나빠진다. 걱정하는 자체가 부담이 되어 병을 불러오게 된다. 이럴 때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혼자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 식사를 하다 말고 화장실에 가는 척 하고 자리를 빠져나와 식당주위를 배회하면서 불안을 가라앉힌다. 그러는 사이에 손님은 식사를 끝내고 일어나서 먼저 식대를 지불하고 나를 찾고 있다. 이만 저만한 실례가 아니다.버스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가 없다. 가다가 불안을 느끼면 차를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을 떠올리면 영락없이 진통이 찾아온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가다기 졸도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마음대로 갈 수 있는 택시나 자가용차만 이용하였다. 진통이 올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회사에서 회의를 하다가 말도 없이 사라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선 내가 살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에 출근하면 서둘러서 대충 결재를 끝내고 도망을 치듯 기사와 함께 차를 타고 하루 종일 헤맨다. 아무런 실적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으니 승진은커녕 해고당하지 않은 것만도 천만 다행이다. 상무이사를 13년간 달고 있었다.월급쟁이는 몸이 자산이다. 몸이 망가지면 모든 것이 함께 망가지게 된다. 유명한 약방, 병원을 전전하면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다. 민간요법도 공부하였다. 영험이 있다는 기도처를 다니면서 부처님께 빌어도 보았다. 수차례 구병시식(救病施食)도 받았다. 카이로프랙틱 이라는 생면부지의 물리치료, 요가, 단전호흡 등 좋다는 것은 모두 찾아서 해봤다.국선도 단전호흡을 다니는데 원장이 단식을 권한다. 체질이 바뀌면서 웬만한 병은 낫는다는 말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단식을 하기로 작심했다. 예비 단식을 끝내고 본 단식에 들어가는 초기단계가 어려웠다. 생수만 마시면서 아침마다 1킬로미터의 야산을 오르내린다.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난다. 빠져나가는 노폐물의 냄새라고 한다. 체내에 쌓인 수십 년간의 쓰레기가 모두 제거되는 기분이다. 병도 함께 나가는 기분이다. 단식을 시작할 때 일주일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여유가 생긴다. 나는 단식을 하는 동안 매일 회사에 출근하였다. 가능한 한 아프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다. 원장은 아주 모범적인 단식이라고 한다. 21일 만에 단식을 끝냈으나 안타깝게도 병은 낫지 않았다.병원에 가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한의사에게 침도 맞아보고 뜸, 한약도 많이 먹었으나 간에 부담만 될 뿐 효과가 없었다. 그나마 단전호흡과 참선이 좋았다. 새벽에 가까운 봉은사에 가서 참선기도를 하였다. 전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찾아다녔다. 사자산법흥사와 오대산월정사, 정선정암사의 적멸보궁, 관음도량, 낙산사, 구인사....한약방에서 흙 침대를 이용해보라고 권한다. 멀리 미아리에서 황토를 가져와서 작은 방에 조그마한 흙 침대를 손수 만들었다. 운이 나쁘면 만나는 사람마다 악연이고 하는 일마다 안 될 일만 한다고 한다.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이 흙 침대인 것을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흙 침대를 사용하면서 불면증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더니 꿈자리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깊게 잠은 들지 않고 비몽사몽간에 눈만 감으면 요괴(妖怪)가 나타나서 괴롭힌다. 아내는 대낮에도 그 방을 보면 무섭다고 하소연한다. 급기야 수소문해서 흙을 파온 곳을 알아봤더니 과거에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참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주위에 알아보니 놀랍게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도 옛날에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서둘러 집을 팔고 근처에 전셋집으로 이사를 하였다.여러 가지 증세 중에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구내염이라고 불리는 소위 베체트병이다.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세브란스병원에 갔다. 베체트 클리닉이라는 전문 파트가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곳이다. 베체트란 스페인 의사의 이름이다. 병명치고 사람이름이 붙은 병은 불치병이 아닌 것이 없다. 검사를 받고 일주일 뒤에 결과를 보러 오라고 한다. 검사결과는 베체트 병 같다고 한다. 확진도 아니고 추측성 진단결과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진료를 온 아주머니를 잡고 물어보니 20년 넘게 치료를 받았는데 낫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는 구내염환자 중에서도 중증 환자이다. 장기에서 발병하여 입안으로 나타났다가 국부를 거쳐 눈으로 가면 실명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다. 나는 이미 국부까지 병이 심하게 진행되고 눈도 약간 침침해지는 상태이다. 입안이 헐어서 밥 먹기가 힘들고 국부에 생긴 것은 심해져서 걸음 걷기에도 불편할 정도이다. 이러다가 죽는가보다는 불안감이 생긴다.하루는 아내의 감기약을 사러 동네 약방에 들렀다. 약을 조제하는 사이에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내 병을 고칠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예사로 하는 말이지만 절규에 가까웠다."어디가 아프신데요?" 나는 대답대신 "베체트라고 들어보셨어요?" 라고 반문했다."네 알지요. 제가 한 번 고쳐 볼가요?" 기회만 주면 자신 있게 고칠 수 있다는 결의에 찬 표정이다. "그런데 병이 나을 때는 고통이 심한 호전반응이 오는데 참을 수 있을까가 걱정입니다." 워낙 아픈 데가 많은 나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죽음까지 각오한 나는 약사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결심하였다.약을 먹기 시작한 50일까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호전반응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목에 고기 뼈가 걸린 것처럼 몹시 아프고 심장이 심하게 뛰면서 통증이 온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죽기보다 더 괴로운 시간이 6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진통이 멈추었다. 이제는 끝났구나 생각하는 사이에 다시 시작된다. 그치고 시작하기를 반복하더니 그 간격이 늘어지면서 서서히 진통이 사라졌다. 거짓 같은 기적이 나에게 일어났다. 지옥에서 살아나온 기분이다. 나와 가족은 물론, 좋아하는 사람은 약사였다. 이로써 베체트의 지독한 병과의 처절한 싸움은 끝이 났다. 윗불은 꺼지게 되었지만 그 밖의 증상은 그대로 남았다.그후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서 나는 더 이상 근무를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농장으로 내려와서 자연을 벗 삼아 종교에 의지하면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어느 날 아들 친구가 와서는 "아버님, 별 다른 계획이 없으면 캠핑장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저는 대장암으로 4번의 수술을 받았는데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그 비결은 캠핑을 많이 한 것 밖에 없습니다. 주치의도 놀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건강관리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했다몸이 건강해진다면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눈이 번쩍 띄는 말이다. 땅의 한켠에 작은 호수를 만들고 캠핑시설을 꾸몄다. 캠핑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니 남아있던 병이 거짓말처럼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만나는 사람마다 나이에 비해 젊고 건강하게 보인다고 말한다. 나는 건강을 되찾아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고마운 이 땅에 죠이너스 처럼 키스를 해 주고 싶다. 〈올림픽대회 개막〉1988년 9월 17일. 역사적인 제 24회 서울올림픽 대회가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서 십만여 관중과 수십억 인구가 TV화면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올림픽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애국가가 연주되면서 태극기와 오륜기가 게양되고 올림픽 성화가 점화되었다. 올림픽을 통한 세계평화와 전진의 기치 아래 160개국의 선수와 임원이 입장하였다. 올림픽 역사상 최다 참가국의 기록을 세우면서 세계가 하나 되는 화합의 역사적 순간을 맞았다. 단군 이래 한반도에서 처음 열리는 인류의 제전이 우리민족에게 큰 영광을 안겨주는 역사적인 쾌거였다. 동서냉전의 후유증으로 생긴 반쪽짜리 올림픽을 종식시켜 세계평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은 물론 미수교국을 대거 참가시켜 우의를 두텁게 하고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면서 경기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정적'은 잠에서 깨어나는 발전한국을 연상하게 하였다. 60여 년 전에 인도의 타고르는 이미 이때를 예견하고 '동방의 등불'이라는 한 편의 시를 동아일보에 기고하였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나는 병든 몸으로 거실의 소파에서 개회식 광경을 TV로 지켜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얼마나 바라고 기다리던 광경이었던가. 내 손으로 만든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건각들의 파노라마를 보는 순간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나는 이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날을 보냈던가! 필설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나는 절며절며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한 떨기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꼭 할 일을 했다는 보람과 행복이 느껴진다.행복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때 얻어지는 성취감과 자기만족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21-07-21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作] 분이(2) - 김옥순(김아가다)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作] 분이(2) - 김옥순(김아가다)

아들을 낳으면 끓여주려고 사다 놓은 북어를 아베는 다듬잇돌 위에다 놓고 팍팍 두드려 발기발기 째면서 욕을 했다. 아들도 하나 못 낳느니라고! 그놈의 아들이 뭣인지, 점잖던 아베 입에서 오만가지 흉한 말이 튀어나왔다. 북어 대가리까지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씹으면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댓바람에 비운 아베는 대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밤이 지나고 날이 새도 아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매는 퉁퉁 부은 몸으로 삽짝을 열고 고샅길로 나가 목이 빠지도록 아베를 기다렸제.하루 이틀,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꿈엔들 생각했으랴. 그대로 잠적할 것을. 며칠 있으니 고향 남산골이 휘딱 까뒤집어졌다. 동네가 난리 났니라. 우물가에서 떠드는 소리가 산모의 안방까지 들렸으니 얼마나 우세스러웠겠노. 어매는 죽고 싶었다더라. 까딱했으면 나도 어매도 이 세상 사람 아닐 수 있었다. 기가 막히제. 아베가 이웃 마을에 사는 아들 셋 낳은 여편네 손목을 잡고 멀리 달아났단다.남의 집 행랑채에 곁방살이하던 그 집 여편네와 아베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징글징글하게 없이 살다가 돈을 보고 팔자 고쳐먹었는지 누가 알겠냐. 아베에게는 남한테 꿀리지 않을 만큼 재산이 좀 있었단다. 아베는 대를 이을 씨앗이 그렇게 소중했는가 보더라. 나한테는 두 살 많은 언니 연실이가 있다. 첫딸이라 이름이 참하다. 겨우 딸 둘인데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성질도 급한 기라. 내 이름은 저절로 이빨을 앙다물게 된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내 이름을 불러본다. 분이! 그러면 웬만한 일은 다 잊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내 삶의 오기였다.여자를 도둑맞은 여편네의 남자는 내 아베를 찾으려고 전국을 떠돌며 엿장수를 했다. 충청도 내륙 깊은 산골짝에 꼭꼭 숨어 사는 사람을 무슨 수로 찾아낼꼬. 그네는 전국 방방곡곡 삼 년을 찾아 헤매다가 파김치가 되어 고향 남산골로 돌아왔다. 술과 담배로 병이 든 남자는 얼마 못 살고 죽었단다. 그 집 아들 셋은 노모의 손에 커다가 뿔뿔이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졌다고 하더라. 아들 못 낳아 소박데기가 된 어매 역시, 사람들 보기가 남세스러워 언니와 나를 데리고 살던 곳을 떠났다.아베가 집과 전답의 문서를 다 들고 나갔으니 맨몸으로 돌아간 곳이 어매의 친정이었다. 딸년 둘 데리고 돌아온 친정이 뭐 그리 편했겠노. 남의 집 행랑채에 들어 품앗이하면서 근근이 목구멍에 풀칠만 하고 살았다. 먹고 살기가 힘든 어매는 열네 살 먹은 언니를 시집보낸 후 아홉 살짜리 나를 데리고 자식 없이 홀아비가 된 남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는지 재가한 어매는 내리 아들 둘을 낳아 한을 풀었다. 조그만 고추에서 오줌이 나오는 것이 참 신기하더라. 나는 너무 좋아서 그 남동생을 등에서 내려놓지를 않았다. 어매는 매일 들에 나가고 고추 달린 동생 둘을 내가 업어 키웠다. 내 나이 열여덟에 가마 타고 시집가는데 동생들이 문 앞까지 뒤따라와서 울고불고했다.나는 내 이름값을 하고 사느라 이를 악물고 살았다. 경산 솔정고개 넘어 덕산동에서 대구 하동으로 시집왔다. 그때부터 택호가 '덕산 댁'이 되었지. 커다란 기와집에 부칠 논이 서너 마지기, 채소를 갈아먹을 밭떼기가 몇 마지기 있는 집이었다. 인물이 둥실한 보름달같이 생겨서 덕성스럽다는 소리를 사람들한테 많이 들었다. 그런데 신랑이 삼대독자라고 하니 아득하더라. 내 어매처럼 소박맞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역시 나는 분이가 맞다. 천지신명이 내 분을 풀어주었는지, 용을 쓰지 않아도 아들을 술술 여섯이나 낳았다. 친정 어매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아들에 포원 진 어매한테 기를 살려 준 셈이다.아베가 집을 나간 지 스물다섯 해가 되던 어느 날, 젊은 총각 둘이 찾아왔다. 어떻게 수소문해서 내가 사는 곳을 찾았는지 아연실색했다. '김해 허씨'며 동생이라고 했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기가 막히고 분한 생각이 들어서 당신들을 모른다고 문전박대를 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얼굴 본 적 없는 아베가 먼발치에 서 있었지만, 대문을 닫아걸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아베고 뭐고 생각나는 대로 대놓고 욕을 퍼부었다. 내버릴 때는 언제고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아베는 미웠지만, 핏줄이 무엇인지 훤칠하고 예의 바른 동생들이 궁금했다. 대문에 옹이 빠진 구멍으로 바깥을 살며시 내다보았다. 진짜 동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희한하제. 업어 키운 동생보다 핏줄이 같은 아베의 아들에게 마음이 자꾸 끌리더라. 그들은 사흘을 여관에 머물면서 우리 집에 매일 찾아왔다. 대문 바깥에서 아베가 용서를 청했다. 죽기 전에 동생을 인사시키려고 왔다는 소리에 내 마음이 무너졌니라.고집을 부리며 버티지만, 관솔 구멍으로 바깥을 훔쳐보는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신랑이 대문을 활짝 열었다. 희한하더라. 내 아베를 안방으로 모시고 절을 넙죽 하는 신랑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맞는가 보더라. 어매가 낳아준 동생은 사랑과 보살핌으로 키웠고, 아베가 낳은 동생은 생면부지였는데 자꾸 그 동생들에게 정이 쏠리더구나. 신랑은 삼대독자다. 친척이 없다가 진짜 장인과 처남 둘이 새로 생겼다고 억수로 좋아했다. 핏덩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떠난 아베가 조상님 볼 면목이 생겼다면서 뻔뻔스럽게 눈물을 흘렸다. 나도 자식을 낳아보니 그 마음 이해가 가더라. 좀 복잡하지만, 아베와 어매가 낳은 남동생이 넷이나 된다. 잘 알아 들었제. 아가, 여기까지가 차렵이불 속사정이다. 백 년 전 어머님이 태어난 시절은 남아선호사상이 유별난 시대가 아니었던가. 오로지 대를 잇겠다는 염원으로 조강지처를 버린 아베의 양심도 고달팠으리라. 그리하여 열매를 얻은 그 씨앗은 또 씨를 뿌리고 지구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씨를 남길 것이다. 아가, 또 한 가지 말할 게 있단다. 분하다. 부끄럽지만, 내가 낳은 자식 여덟에 들여온 피붙이 하나 보태서 내 밑으로 모두 아홉 자식이 있다. 부산에 사는 시누이 말이다. 왜정시대 때 종로에서 빠찡꼬를 할 때였다. 셋째를 낳고 가게에 못 나가게 되어 사람을 하나 두었단다. 청소도 하고 계산도 하라고 들어온 처녀가 네 시아버지와 배가 맞았다. 한 치도 의심 없이 지냈는데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자꾸 내 귀에 들렸다. 사람들이 귀띔을 해줘도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입성이 초라한 여자가 찾아왔다. 안방으로 들어온 여자가 대뜸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처녀의 모친이었다. 딸이 이 댁의 핏줄을 낳았는데 산바라지 할 돈이 없어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억장이 무너지더라. 당장 나가라고 소리 지르며 쫓아냈다.괘씸하고 분했지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모친을 보니 막되어 먹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여자의 집을 수소문해서 산모가 먹을 미역과 쇠고기 그리고 쌀 세 가마니를 소달구지에 싣고 찾아갔다. 찌그러진 움막에 모녀가 살고 있더라. 산바라지가 시원찮아서인지 누렇게 뜬 얼굴을 한 젊은 년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래도 염치가 있었던지 내 앞에 다소곳이 큰절을 하더구나. 두 집 살림을 차릴까 덜컥 겁이 나더라. 자식들이 올망졸망 자라고 있는데 이 일을 어찌할까,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척했다."너나 나나 팔자가 사나워서 인연이 이렇게 되었구나, 어서 몸이나 추슬러라."그 말만 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영감한테 한 마디도 추궁하지 않았다. 그때는 웬만큼 돈 있는 남자들은 첩실 하나쯤은 두고 사는 시절이었다. 더 험한 꼴 보지 않으려면 참아야 했다. 아예 대놓고 살림을 차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몇 달이 지난 뒤 젊은 년의 모친이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고 찾아왔다. 야단을 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줄 알았는데 점잖게 돌아왔으니 미안했던 모양이다. 어찌나 가슴을 치면서 울던지 나도 같이 울었다. 나도 자식 키우는 어미이니 말하지 않아도 그네의 심정을 이해하겠더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다시는 얼쩡거리지 않겠다고 했다. 부잣집 겨드랑에 붙어 팔자 좀 고쳐보려고 하다가 제풀에 꺾인 게지. 젊은 년의 모친은 딸을 다른 데로 시집보내겠다고 손바닥을 비비면서 약속했다. 인생이 불쌍하더라. 그래서 돈을 좀 마련해서 건네주었다.〈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논픽션 '분이' 3편은 다음주 목요일(22일)에 게재합니다.〉

2021-07-13 06:30:00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분이(1) - 김옥순(필명 김아가다)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분이(1) - 김옥순(필명 김아가다)

곱다. 꽃 속에 파묻힌 어머님이 웃고 계신다. 향년 100세. 상객들이 모두 호상이라면서 웃고 떠들썩하니 잔칫집을 방불케 한다. 너도나도 망자와 얽힌 추억을 회상하면서 술잔을 기울인다. 사진 속을 걸어 나온 어머님이 기웃거리며 자손들 이야기에 참견하고 다니시는 듯하다. 무연히 타고 있는 향불 연기 속에서 이태 전의 일이 떠오른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님께 생신을 축하드린다면서 꽃바구니를 안겨드렸다."오늘이 이월 열사흘이냐?"그 말씀에 깜짝 놀랐다. 머리끝이 치솟는 느낌이었다. 간간이 정신 줄을 놓으시더니 자식도 못 알아보고, 아득한 과거 속으로 묻혀 지낸 지 오래되었다. 자식들 얼굴도 못 알아보는 처지에 생일의 기억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월 열사흘은 어머님께 어떤 의미였을까? 단순한 본능일까, 해마다 추억된 학습의 기억일까. 이월 열사흘, 세상에 온 그날부터 버림받은 상처가 한 평생 자신을 지탱할 힘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르겠다.어머님은 문맹이다. 그렇지만 일흔 살에 미국의 딸네 집에도 다녀오셨다. 미국까지 가는데 내 이름 석 자는 알고 가야지 하시면서 글자를 익혔다. 입국심사를 받을 때 서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님은 마음이 바빠졌다. 까막눈이 한이라면서 신문지 한 장에 이름 석 자를 빼곡히 연습했다. 평생 처음 잡아보는 연필이었으나 어머님의 열정은 눈물겨웠다.여장부이신 어머님은 더 넓은 세계가 궁금했다. 젊은 나도 도전하기 두려운데 노인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대단했다. 어머님의 미국행 준비를 하려고 시장에 다녀왔다. 고춧가루, 김, 멸치, 미역 등을 쇼핑백 가득 짊어지고 들어오는 나를 어머님이 반가이 맞으셨다. 연필로 머리를 긁으면서 신문지를 내미는 표정 속에 한숨도 끼어들었다."아가, 내 이름이 조금 다르지."신문지에는 '허분이'가 '허분10'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웃다가 울다가 했다. 어머님의 배우지 못한 한이 안타까워서 울고, 그 열정에 감탄하여 응원하면서 웃었다. 그때부터 나는 장난삼아 어머님을 '허분10 씨!'라고 불렀다.휴스턴으로 직항하는 비행기가 없었다. 요금이 저렴한 외국 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갈아타는 여행이었다. 가슴에다 초보 여행자라는 표지를 달고 안내를 받았다. 무사히 미국 땅에 도착한 어머님에게 한국의 가족들은 손뼉을 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머님의 표현에 의하면, 같은 비행기 안에 탔던 노랗게 생긴 사람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고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 말씀은 어머님의 생존 법칙이었다.지혜롭고 명석하신 어머님은 미국에 살면서 에피소드를 여럿 만들었다. 노인끼리 당신 집의 차는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면서 딸에게 우리 차 이름도 가르쳐 달라고 했다. 'Mercedes Benz'라고 말하자 어머님의 두뇌 회전은 빠르게 돌아갔다. '옳지 모서리를 돌아가면 변소가 있지.' 다음날 경로당에 가서 "모서리 밴소"라고 얘기했다. 그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박장대소를 했다.또 한 번은 옆집에 사는 미국 노인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영어도 못 하는데 자꾸 더 먹으라는 손짓을 하니 어머님은 진땀이 났다. 눈치를 챈 딸이 '아임 소 풀'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무릎을 탁 치면서 '맞아 암소가 풀을 많이 먹으면 배부르지.' 바로 "암소 풀~"이라고 하셨다.어머님은 굳건했고 당당했다. 대농의 안주인으로 살아온 자신감은 옆에 있는 사람들을 주눅이 들게 했다. 시시한 남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쌀 한 가마를 거뜬하게 짊어지는 여장부였다. 치마를 입어서 여자이지 장정 몇 몫을 하셨다고 했다. 아들을 못 낳아서 소박데기가 된 친정 모친의 한이었고 딸로 태어난 삶의 오기라고 할까.어머님은 좋게 말하면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었고, 흉을 보자면 지독한 구두쇠였다. 바느질도, 요리도 서툴렀던 신혼 초에 낡은 순모 티셔츠를 내 앞에 내놓으셨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팔을 잘라서 다리를 만들어 내복으로 입으라고 했다. 어떻게 할지를 몰라 친정엄마한테 가져갔다. 바느질을 잘하던 엄마는 단숨에 가위로 쓱 잘라내더니 윗도리로 아랫도리를 만들어 냈다. 저 시집을 어떻게 살까 걱정되는지, 엄마 눈에 이슬이 맺혔다. 대단한 어른이니 살림을 여물게 배우라고 일러주었다.까막눈이었던 어머님의 생활 방식은 예술이었다. 하루는 금고를 열더니 몇 가지 문서를 보여주셨다.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집문서에는 용마루까지 얹어놓은 기와집이, 산 문서에는 어느 화백의 '바보 산수' 같은 그림이 봉투마다 그려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공과금의 영수증이 색깔별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노란색은 오물세, 파란색은 수도요금, 하얀색은 재산세. 어머니가 가꾸시는 지혜의 숲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십 년 전이었다. 성정이 차분하고 정갈한 어머님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자꾸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당에 다녀오시다가 길을 잃어서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하루는 화장대 위에 있는 클렌징크림 한 통을 다 먹어 치웠다. 종내에는 사람을 의심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더니 당신의 금 브로치를 가져갔느냐고 나를 닦달했다. 자식들이 모두 놀라기는 했지만, 어머님의 병이 치매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결국은 대전에 사는 큰 딸네 집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이 되었다. 고령의 노인인지라 수술을 받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점점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분이는 아들 못지않은 삶을 살았고 소작에서 지주로 수성 뜰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며 한평생 당당했다. 외아들인 신랑에게 시집와서 아들 여섯에 딸 둘을 낳아 시부모님께도 기쁨을 안겨드렸다. 분이는 이제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아기가 되어서 머리카락도 검은색이 더 많아지고 눈빛도 초롱초롱하던 어머님이 하늘의 천사가 되었다.백 년, 한 세기가 끝이 났다. 세기의 끝에서 나는 깊은 상념에 빠진다.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가 새록새록 풀어 헤치고 나온다. 결혼 준비를 하는 나에게 예단으로 차렵이불 네 채를 더 얹어오라고 하셨다. 궁금했지만 새색시는 시키는 대로 했다. 시집살이에 적응하느라 고달픈 어느 날 안방으로 어머님이 나를 불렀다.아가, 음력 이월은 영등 할매가 오시는 바람 달이다. 영등바람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절기에 북서풍이 몰아치는 사나운 바람이다. 그래서 이월에는 바람을 재워달라며 영등 할매와 해신에게 바치는 풍어제가 열린다. 여자가 바람 달에 태어났으니 그 팔자가 오죽 드셌겠냐. 내 이름은 분이다. 울 어매가 지었다. 한자의 음이나 뜻도 없이 그냥 분해서 분이라고 지은 게지.내가 울 어매 뱃속에 있을 때 누가 봐도 산모의 배가 남산만 하고 뒤태가 두루뭉술해서 아들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아베는 기분이 으쓱했단다. 들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면 으레 주막을 들렀다. 요번에는 아들을 보겠다는 말이 아베를 들뜨게 했다. 조상님께 낯을 들게 되어 한시름 놓았다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어깨춤을 추었다. 그날은 말만 잘하면 너도나도 막걸리 한 사발을 얻어먹었다. 사대 독자가 대를 잇게 되었으니 아베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신명이 났다.어매의 몸에 태기가 왔다. 아베는 목욕재계하고 조상님께 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툇마루에 좌정하고 하마 소식을 기다렸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더 큰 것일까. 머스마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큰소리를 지르면서 태어난 아기가 가시나였다.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면서 애꿎은 담배를 쪽쪽 빠는 소리를 들으며 울 어매는 하늘이 무너지고 애간장이 다 녹았다고 하더라. ※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논픽션 '분이' 2편은 다음주 화요일(13일)에 게재합니다. ◆당선 소감…수많은 우리 '분이' 어머니·며느리 삶을 위로백발의 인생 2막, 액티브시니어가 되렵니다이 글을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님께 바칩니다. '분이'는 내 어머님이십니다. 어머님의 존함 '분이'를 제목으로 달아 죄송합니다. 주섬주섬 담은 글 화소 중에 혹여 가문에 누가 되는 것이 없을까 적잖이 망설이기도 했습니다.저 역시 여자이고 며느리였기에 동류의식을 느끼면서 한국 여인의 삶을 풀어보았습니다. 백수를 누리고 소천하신 어머님의 빈소 앞에서 까만 밤이 하얗게 될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회상했습니다. 분이의 상처를 통해 지난 세대의 어머니들이, 그리고 며느리들이 함께 치유되고 위로받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지금은 신록이 우거진 계절입니다. 머지않아 또 다른 시간에 접어들겠지요. 시간의 흐름 따라 우리네 인생은 굽이쳐 흘러갑니다. 시니어 반열에 동참한 저 또한 유구한 강물의 역사처럼 한세상 살다가 점 하나 찍게 되겠지요.몸도 마음도 춥게 살았습니다. 흑발이 어느새 백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인생 2막의 시작을 믿고 싶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분이의 삶에 공감하지만, 분이처럼 살지는 않겠습니다. 뒷전에 머무는 시니어가 아니라 액티브시니어(Active Senior)로 거듭나렵니다.수상 소식을 전해 받던 날, 숨어있던 날개가 간질거렸습니다. 마구 날고 싶었지요. 함성을 지르면서 빙빙 돌았습니다. 그동안, 낮은 곳에 머무르면서 오르막 오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씩 조심조심 내딛던 글밭이 제 갈 길이 아닌 듯해서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숨구멍이 트입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참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부족한 저에게 글힘을 격려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제 가까운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2021-07-07 06:30:00

[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생을 돌아보고 표현해내는 발효 과정 탁월"

[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생을 돌아보고 표현해내는 발효 과정 탁월"

◆ 총평"시니어의 경륜이 살아있는 데다 생을 돌아보고 표현해내는 발효 과정이 탁월하다."올해로 7회째를 맞은 매일시니어문학상이 응모작을 심사하며 내린 일관된 평가다. 시니어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경험을 녹인 필력은 여느 경쟁에 뒤지지 않았다.매일신문은 제7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으로 김옥순(필명 김아가다) 씨의 '분이'(논픽션)를 선정했다. 논픽션, 시, 수필 3개 부문으로 나눠 진행한 심사에서 대상작 '분이'를 비롯해 부문별로 당선작 5편씩 선정했다.(당선작 및 당선인 6면)지난달 8일 응모작 접수를 마감한 매일시니어문학상 심사위원회는 이틀 뒤인 10일부터 예심에 들어갔다. 논픽션, 시, 수필 등 3개 부문에 접수된 작품 수는 총 1천304편. 부문별로는 ▷논픽션 49편 ▷시(시조 포함) 842편 ▷수필 413편이었다.부문별 심사위원들은 기대를 넘어서는 수작이 많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당선작에 선정되진 못했지만 일부 작품은 당선작으로 뽑아도 무방할 정도로 좋았다고 아쉬워했다.이미영 수필가는 "응모작의 탄탄한 짜임새와 사유의 깊이에 매료되었다. 당선작의 수준이 여느 문학상과 다르지 않다는 평이 쏟아졌다"며 "세월의 풍파를 겪어온 시니어들의 삶의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한결같이 따뜻했다"고 전했다.이인화 심사위원장도 "세파와 숙명을 이겨온 산업화 세대의 강인한 의지와 따뜻한 인정이 파란만장한 스토리에 담겨 있었다"고 평했다.시상식은 7월 21일(수) 오후 2시 대백프라자 프라임홀(대구시 중구 명덕로 333)에서 열린다.◆논픽션 심사평…짜고 쓴 맛 맛본 진실한 고백에 가슴 두근거려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심사자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문장력과 구성력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인생의 짜고 쓴 맛을 다 맛본 진실한 고백이 강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꿈꾸는 숲'은 서울의 한 근린생태공원을 소재로 한 관찰과 감상을 승화시킨 작품이다. 살아온 동네의 30년 추억으로 채색된 근린공원의 고유한 장소감과 그 장소감을 훼손하는 사회적 과정들을 묘사한 점이 좋았으나 다소 산만했다.'실버 취준생 분투기'는 논픽션의 장점이 분명하고 이야기의 실감이 살아 있는 작품이었다. 세탁, 청소, 주방, 보육, 요양 보호사, 장애인 돌봄이를 전전하는 과정에서 독자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감상주의를 완전히 절제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버즘나무 댁'은 흉한 외모를 가졌던 팔촌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회한의 일생을 회고한 글이다. 언니와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교차시키면서 쓰라린 생애의 진실을 담았다. 소재에 비해 이야기가 작아진 소품성이 아쉬웠다.'코로나19와 마주치기'는 팬데믹의 비대면 상황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노년 남성의 좌충우돌을 유머와 위트로 그린 작품이다. 자기를 희화화하는 솜씨가 노련하고 재미있지만 에피소드들이 너무 사사화되어 보편적인 감동이 약했다.'88올림픽과 나'는 88올림픽 경기장 육상 트랙 국산화의 주역이었던 이의 논픽션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고 주제의식이 훌륭했다. 겸손하고 조용하게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만들어온 서민의 따뜻한 가슴이 생생하게 그려졌다.'분이'는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슬프고 억척스런 일생을 회고하는 며느리의 회고담이다. 고부의 인연으로 만난 두 여인이 깊은 이해와 사랑에 도달하는 과정을 옛 시대 대구지역의 풍정을 배경으로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장에 담았다.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가족애를 소재로 한 시대에 대한 통찰과 공감을 보여준 점과 논픽션의 형식적 완결성을 갖춘 점을 높이 평가하여 '분이'를 대상작으로 선정했다. 나머지 작품들도 수준이 높고 흥미진진했음을 밝히면서 모든 응모자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싶다.◆ 시 심사평…'시니어'에 함축되어 있듯 세월에 숙성된 작품 많아시는 메타포(metaphor, 은유)의 문학이다. 은유는 모든 창조적 사고와 생각의 도구다. 은유가 없다면 인간의 모든 예술과 학문은 거의 불가능하다. 시 쓰기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일상과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시인은 독자의 가슴을 적셔주면서 동시에 참신한 비유와 새로운 충격으로 우리의 잠자는 의식과 감각을 일깨워 준다.매일 시니어문학상은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실험적 작품을 기대하지 않는다. 진한 감동과 깊은 울림, 긴 여운을 남기는 시가 세대를 초월하여 살아남는다. 우리는 응모작을 읽으며 '시니어'라는 말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듯이 세월과 더불어 숙성되고 발효된 경륜과 경험이 진실한 언어로 형상화된 작품을 찾으려고 했다. 올해는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수작이 많았다.홍영수 씨의 '당신의 빈자리'는 '곁에 없어 더 사랑하게 되는 절절한 모순'을 여성의 섬세한 감성과 언어로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이명희(필명 이희명) 씨의 '노인보호구역'은 몸 반쪽은(마비되어) 이미 겨울이 와 버린 노인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서체에 비유하는 독특한 발상으로 진한 감동을 준다.김만옥 씨의 '말이 가는 길'은 '말'에 관한 오랜 성찰이 철학적 깊이와 함께 공감을 주었다. 박인숙 씨의 '만남'은 인간관계와 친밀감의 정도를 바느질에 비유한 수작이다. 피귀자 씨의 '두부를 말하다'는 자신의 삶을 두부에 이입하는 참신성이 돋보였다.시조 부문에는 당선작을 뽑았지만, 확인 과정에서 응모 자격에 맞지 않아 제외했다. 총 800편이 넘는 작품 중에서 수십 편은 당선작으로 뽑아도 무방할 정도로 좋은 시였다. 또 다른 기회에 빛을 볼 수 있으리라 믿으며 계속 정진하시길 빈다. 응모자 모든 분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수필 심사평…심사 잊을 만큼 천태만상 사연, 탄탄한 짜임새·사유 깊이 매료천태만상의 인생사가 펼쳐지는 응모작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심사라는 일을 잠시 잊을 지경이었다. 응모작의 탄탄한 짜임새와 사유의 깊이에 매료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구어체를 그대로 쓰는 습관이 굳어져 주어가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고 목적어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흔했다. 기본기를 잘 갖추면 문장의 의미는 선명하게 전달된다.1차 심사 후 매일시니어문학상에서 이미 수상한 분들의 작품은 당선에서 제외했다. 본 상은 함께 익어가는 인생을 응원하자는 의미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주제가 잘 전달되고 의미화에서 우수한 작품이더라도 진솔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필의 구성 요소에 맞게 만들어낸 것 같은 응모작도 제외했다. 본 상은 역경을 견디고 한 걸음씩 내디뎌온 삶에 대한 공감이며 박수이기 때문이다.이상렬 씨의 '은색 비늘 같은 강의 기억', 박노욱 씨의 '개구리 무름', 정연원 씨의 '귀명창', 김영순 씨의 '마지막 선물', 김춘기 씨의 '조팝꽃'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유려한 문체로 풀어놓은 '은색 비늘 같은 강의 기억'은 강처럼 휘감아 흐른다. 잠보 집안의 에피소드 그린 '개구리 무름'은 그 시절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재를 사용하여 어머니와 함께 재미있게 요리했다. '귀명창'은 고수의 풍모가 넘실대는 품격 있는 작품이다. '마지막 선물'은 함께 출품한 다른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해 망설였으나 감나무와 시어머니가 주신 금반지를 소담하게 연결시킨 진솔한 작품이라 당선작으로 골랐다. '조팝꽃'은 조팝꽃의 형상에서 나병 환자를 연상시켰다. 시대를 아우르는 의미와 함께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응모하신 분들에게는 격려를, 당선되신 분들에게는 축하를 보낸다. 매일시니어문학상은 시니어만 누릴 수 있는 축제의 장이다.

2021-07-07 06:30:00

10위

6 4 9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

기획 & 시리즈 기사

완독률이 좋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