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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식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34 공원/이완식

낙엽이 담긴 마대들을 차에 옮겨 쌓는데 평소 담당하던 동료가 다리가 아프다고 한다. 대신 올라가는 공원관리원이 없다. 힘들고 위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달마대사를 쏙 닮은 S동료가 웃으며 말을 건넨다."완식이 형이 올라가줘.""응, 그래. 알았어."그간 몇 번을 해보았던 터라 나는 가볍게 대답하고 덤프차에 올랐다. 동료가 낙엽 마대를 던져주면 이를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데 이게 보통 작업이 아니다. 한쪽에서 작업하는 동료는 숙련된 솜씨로 잘 쌓는다. 나도 열심히 안쪽에서 쌓아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쌓은 곳에서 마대 2개가 도로 2차선으로 떨어졌다."어, 형 내려가 있어. 내가 할게."아찔한 순간이었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에 마대가 잘못 떨어지면 자칫 큰 사고로 번질 수 있다. 한편에서 마대를 쌓던 동료가 말한다."사람이 많으면 뭘 해. 차가 오는 쪽을 보고 수신호 하는 사람도 없이 말 여."낙엽마대를 쌓는 데도 요령이 필요하다. 불룩한 마대자루를 잘근잘근 밟아가면서 차분하게 쌓아야 한다. 아직도 나는 경험이 부족하다. 막일을 하는 데에는 사회초년생이나 다름없다. 공원관리원으로 들어 온지 어언 5개월. 근로계약기간이 12월 말까지니까 일주일도 채 안 남았다. 평생 이런 일을 해 보지 않은 내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오늘, 차에 올라가 마대 자루 작업을 쌓다가 하마터면 큰일을 당 할 뻔 했다. 군대에서 제대 특명을 받아놓고 몸조심을 해야 할 처지와 같은 요즘인데 함부로 일을 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생겼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런 작업을 앞으로 몇 칠 간은 오후에 매일 해야 한다. 사실 금번에 다시 모집 공고된 재계약시험접수를 포기했다. 그간 육체적으로 지친데다 근무 중 다친 손목치료를 하기위해서라도 몇 개월 휴식기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지난 6월 초순이었다. 산불감시원 근무를 마치고 동료들과 남해로 일박이일의 모처럼 따끈한 여행을 다녀왔다. 그 후 며칠이 지나 000시청에서 기간 제 공원관리원 모집공고를 냈다. 처음엔 내가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있어야 하고 예초 기나 기계톱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근무는 8월1일부터 12월말까지다. 근무 조건은 주 5일 근무에 기본급이 월 172만원이다. 지원을 마음먹고 담당부서를 찾았다. 담당자가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본다. "필기시험도 있고 체력검정도 있습니다. 아, 차가 없으시군요. 자전거라도 있어야 됩니다.""아, 네, 그리하겠습니다."예초기와 기계톱의 사용 가능여부를 묻는 난이 있다. 예초기에 할 수 있다고 동그라미를 쳤다. 그건 며칠 배우면 된다. 시험 보는 날, 많은 지원자들. 같이 산불감시원 근무한 동료가 열 명은 넘어보였다. 그런데 그날 응시자 중 내 이름이 첫 번째로 올라가 있다. 필기시험은 객관식 20문제다. 상식적인 문제라지만 어렵고 알쏭달쏭하다. 문제를 여러 번 읽어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가장 근사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 동그라미를 쳤다. 나도 어려우면 다른 사람도 어려운법,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체력검정이다. 15키로 마대 8개를 쭉 쌓아놓고 그걸 반대편으로 운반하는 시험. 물론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한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반대편에 갖다 쌓았다. 앞에서 스톱워치를 누르던 담당자가 크게 얘기한다."48초 9입니다."처음이라 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된다. 주변에선 체구도 작은 사람이 어디서 그리 힘이 나오느냐는 말들을 풀어놓는다. 다음 내 뒤로 나보다 나이어린 지원자도 같은 산불동료인 G형도 50초를 넘는다. 지원자 중엔 아예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조심조심 나르는 사람도 있고 가다가 넘어지는 사람도 있다. 여성도 한 분 있었는데 배려차원에서 들고 달리기 횟수를 남성보다 2회 줄여준다. 나는 어느 정도 이번 시험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한 순간, 나 보다 잘하는 지원자가 제법 눈에 띤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상중하로 구분하면 아마 상에 든 것 같다. 기존에 일하던 직원도 대부분 다시 응시했다. 종전의 근무 직원이 훨씬 잘 하는 것은 당연하다. 추가로 채워지는 지원자들끼리 경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경쟁률은 5대 1이 넘는 것 같다. 내 응시순서가 첫 번이라 약간은 불리함을 안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더 빨리 할 수 있었을 텐데. 합격자 발표는 다음 날 오후 5시다."내일 오후 5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문자를 보낼 겁니다. 문자가 안 오면 떨어진 것으로 알고 계시면 됩니다."다음 날 오후 5시가 되었다. 나는 신시가지를 한 바퀴 돌았다. 그 시간이 넘어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십분, 이십분, 떨어졌음에 틀림없다. 기존의 공원관리원이 있으니 결국 몇 명에 불과한 인원을 새로 충원하는 시험이기에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씁쓸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마음껏 취하고도 싶었다. 이번 시험에 같이 지원했던 산불감시원 시절 동료에게 전화를 했다. 자신도 문자를 안 받았다며 오후 6시까지 기다려보자고 한다. 공고문에 분명히 합격자 발표 시간은 오후 5시로 되어있는데. 내가 잘못 본 것도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정말 한 가닥 실 날 같은 바램이었다.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갑자기 문자가 뜬다."(Web발신) 공원관리원 모집에 최종 합격하셨음을 알려드리며 근로계약서 작성 등을 위한 공원녹지 과 방문 날짜는 7월 중 문자로 재 통보하여 드리겠습니다."그 시간이 오후 5시 49분이었다. 잠시 후 동일한 문자가 다시 뜬다. 참, 이럴 수가 있는가 싶었다. 불합격이라 알고 있었는데 합격통보를 받은 기분, 날아갈 듯 했다. 이제 자전거도 사고 예초기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 달 남짓한 여유기간이 있지 아니한가.자전거를 구해야 한다. 나는 평소 약초관리사 양성과정 강의를 받던 중 알게 된 U회장에게 혹 사용안하는 자전거라도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2대가 있는데 한 대는 집에 있고 한 대는 농장에서 사용하려고 사놓은 자전거가 있다는 것이다. 농장에서 사용하는 자전거를 흔쾌히 주겠단다. 며칠 후 농장에 갔다. 그 분이 아는 사람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건데 제법 쓸 만하다. 몇 군데 손만 보면 될 듯싶었다. 자전거 새것은 도둑맞기 십상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시건장치를 해놓아도 절단하고 가져간다는 것이다. 차라리 도둑맞을 염려가 없는 중고가 좋은 것이라고 주변에서 알려준다. 하지만 수리비로 무려 십만 원이나 들었다.드디어 입사 첫 날, 8월 1일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신입사원은 마음에 설렌다. 아, 어떤 동료가, 어떤 선임이 있을까. 공원관리팀장은 사십대 후반의 여자였다."여러분은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분들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공원관리를 잘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그 말만 하고 자리를 뜬다. 관리원은 모두 19명인데 기존의 관리원은 15명, 이번에 신입은 4명이다. 반장이 들어와서 모두에게 소개하지도 않고 4명에 대해 담당공원과 같이 근무하는 관리원을 말해준다. 제일 막내로 보이는 동료가 만원씩 걷는다. 한 달에 만원 씩 걷어 커피도 사고 작업 시 이따금 간식도 하는 데 쓰기 위해서란다. 대기실 옆 창고에서 신입직원인 우리는 보급품을 받았다. 푸른 바탕에 시청마크가 붙어있고 공원 관리라 표시된 옷, 신발, 모자 그리고 군대로 말하면 총에 해당하는 집게를 나눠준다. 키가 훤칠하고 깔끔하게 생긴 막내 동료가 손잡이 상단 부분에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청 테이프를 칭칭 감아준다. 처음 내게 맡겨진 곳은 00공원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오전에 청소하고 오후엔 단체작업이고, 다음 일주일은 오전에 청소, 12시부터 분수대관리였다. 9월 중순까지 일주일마다 교대해서 관리한다. 신시가지 바로 주변에 있는 분수대라 꽤 넓고 쾌적했다. 입사한 달인 8월은 유난히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30도를 넘는 불볕더위가 계속되는데도 작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살인 더위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작업에 열중했다. 무성한 풀 깎기와 민원이 들어온 지역의 잡초 뽑기가 주 업무였다. 낫은 별로 소용이 되지못했다. 대신 선임들의 기계톱이 능숙하게 나무와 풀을 자른다.민원이 들어오면 민원인의 인적사항을 적고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민원사항을 확인해야 함에도 관련 팀 직원의 전달만 받고 현장에 투입되니 헷갈리기 일쑤였다. 선임들은 이런 사항에 대해 불만만 털어놓는다. 정작 반장에게는 한 마디도 못하는 듯했다. 이런 데도 있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8월부터 9월 중순까지 일주일 씩 교대로 하는 분수대업무는 내게는 생소한 업무였다. 신시가지 중심지 도로 옆에 자리한 널찍한 분수대. 이곳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어떤 일이건 처음엔 많은 갈등이 찾아온다.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이 일이 내게 맞는 일인가 하고. 하지만 내 나이엔 그건 사치다. 총대(쓰레기집게)를 들고 지나가면 혹시라도 듣는 게 아닐까 하는 말."저, 꼰대, 노숙자 같은 사람, 육십 중반이 훨씬 넘었는데 참 얼마나 잘못 인생을 살아왔으면 저렇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될까."공원관리원이 된 지 이틀 째였다. 나와 같이 근무하는 분의 대체휴무일이다. 내가 그 시간에 나가 분수대를 볼 수밖에 없었다. 분수대의 작동요령 숙지는 기계에 문외한인 내게 쉬운 일은 아니다. 눈앞에 떨어진 일, 분수대 일을 마스터해야 한다. 인근 선임에게 물어보면 일사천리로 대답한다. 나는 나름대로 들은 사실을 토대로 매뉴얼을 작성했다. 그 선임은 예전 공무 과 출신에다 전기, 지게차, 열관리, 보일러 등 많은 자격증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지금껏 사무직에만 종사 했던 터라 그 외의 업무는 초보자나 다름없다. 필요사항을 들으면 꼭 기록해야 하기에 항시 메모지와 필기도구를 지참했다.분수대는 정오부터 작동한다. 작동은 40분하고 20분 중단되었다가 재 작동하기를 반복, 오후 5시 40분에 종료된다. 경우에 따라 최대 3분까지 시차가 생길 수 있다. 만일 그 이상의 시차가 발생하면 에러가 생긴 것으로 보고 제어판의 1번째 시계를 확인한다. 시계가 일치하지 않으면 현재 시간에 3분을 더한 시간에 시계 판 우툴두툴한 부분을 돌려 맞춰주면 된다.그 날 분수대가 작동되고 있는데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들 세 명이 분수대로 온다."학생들, 이거 5분 후에 물 중단해, 알았지?"얘들이 서로 쳐다보고 웃는가 싶었다. 그 중 한 아이가 어깨를 으쓱대며 말한다."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대."무슨 의미로 얘기한 것일까 궁금했지만 나는 그 순간 경전하사(鯨戰蝦死)라는 고사 성어를 생각했다."어이, 학생들, 그거 한자로 가르쳐 줄게. 고래 鯨, 싸움 戰, 새우 蝦, 죽을 死 알았지? 경전하사"학생들은 나를 그윽한 눈초리로 올려다본다."아저씨, 섹스가 뭐래요?"참, 어처구니가 없다."아, 그거 서로 좋아하는 것이지.""아저씨, 자위가 무엇이지요?""아, 그거 스스로 지키는 거지, 뭐."담담한 내 답변에 학생들은 머쓱 한다. 표정이 무척 장난스럽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고사 성어를 가르쳐줄려다가 나만 시험대에 오르고 말았다. 학교 교실에서의 장면들이 어쩌면 이런 질문들로 우글우글 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절교육과 인성교육의 첩경인 한자교육, 이를 너무 등한 시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아저씨, 바보, 그것도 몰라요. 이거예요."한 학생이 내게 자위의 표현을 한다. 자신의 주먹으로 거시기 흉내를 내며 '끄덕끄덕'하는 사실 행위를 보여준다. 맞다. 경전하사가 아니라 하전경사가 아닌가. 속담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는 말이 있다. 그날은 모처럼 산불감시원 할 때 알게 되고 그 덕분에 농작물을 지어먹게 된 쉼터 할머니 집 텃밭에 갔다. 그 날도 민원이 들어온 사안을 현장에 나가 처리하느라 온몸은 땀에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그 상태로 자전거를 몰았다. 아,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옥수수 심은 자리가 휑했다. 고구마 밭은 엉망이 되어있었다. 고구마 줄기가 이곳저곳 뿌리 째 뽑혀져 나뒹굴었다. 멧돼지에 당한 거였다. 아마 가족끼리 떼로 몰려와 잔치를 벌인 모양이었다. 허전하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참외밭도 마찬가지였다. 가지와 고추, 몇 개 남은 참외, 토마토를 따서 자전거에 실고 집에 가는 길, 인도에 차가 떡 버티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차도로 내려서 가다가 뒤에 차가 오기에 인도로 들어서는데 앞바퀴가 도로 턱에 걸려 그대로 길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옆으로 붕 뜨더니 헛바퀴만 돌았다. 내 얼굴 오른쪽 광대뼈부위는 땅 바닥에 닿아 흙냄새가 물씬 들어왔다. 얼떨결에 짚은 오른손 바닥살갗이 약간 패었다. 살다가 이렇게 길바닥에 패대기쳐지기는 처음이었다. 다행히 몸이 가벼워 그런지 대형사고는 없었지만. 조금 지나 살펴보니 양 무릎 정강이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멧돼지에 당하고 자전거 사고도 난 그 날은 힘든 날이었다. 게다가 그 날은 선임티를 내고 신입관리원을 마치 군대시절 졸병 대하듯 하는 기존의 관리원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한 날이기도 했다. 사실 동료이고 나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 사람이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일침을 놓는다."당신, 그걸 청소라고 했다는 거요?"34공원 앞에 있는 빌라 뒤에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있다는 것이다."아니, 그곳도 담당지역이라고 처음부터 확실하게 알려줬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나도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쏘아붙였다. 그 날 하루 임시 청소구역을 대충 알려줄 때 내가 세심하게 물어보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내 마음을 다 내려놓지 못한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 나이 들어 일하려면 대단한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을. 예전의 직장에서 근무할 때 청소담당 차장까지 해본 경험이 있었는데. 그 동료는 관리원 중에 총무직책을 맡고 있는 듯 했다. 그 동료에 대한 들리는 소문이 썩 안 좋다. 신입관리원이 들어오면 일차 청소상태점검을 하고 수거하지 못한 쓰레기가 발견되면 카메라에 담아 반장에게 보고한다는 것이다. 자세히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일하다보면 부족한 점이 보이기 마련이다.8월에 내가 담당한 시민공원은 토요일엔 더러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이곳 지역의 주민들을 이한 한마음 잔치라고 할까. 문제는 다음 날이다. 행사 주최 측에서 청소를 한다지만 별반 도움이 안 된다. 의자에 널 부러진 음식물, 컵, 깨진 소주병, 닭튀김에서 나온 적지 않은 뼈다귀들이 난무한다. 가득 채워진 쓰레기봉투가 9개나 나온다. 깨진 소주병을 하나하나 줍다보면 시간이 잘 간다. 잔디밭이라 빗자루로 쓸 수 도 없다. 비닐 봉투의 배가 터져 질질 흐르는 음식물은 까치의 좋은 먹이가 된다. 봉투에 담아 놓고 잠시 자리를 비우면 어느새 와서 시식하는 까치들은 봉투를 풀어헤쳐놓기 까지 한다. 공원에 사는 까치 들은 통통하다.팔월의 더운 날, 분수대는 이곳의 명물이 된다. 시원한 물줄기, 아파트에서 엄마들이 자신의 어린애를 데리고 나와 더위를 식힌다. 신발을 안 벗고 들어가는 어린이들이 많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달라는 현수막이 떡하니 걸려있는데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아주머니, 애들 신발을 좀 벗겨주시죠. 신발에 묻어 있는 흙이 분수대에 흘러 들어가면 그 흙이 물에 섞여 다시 나옵니다. 아셨죠?"마지못해 신발을 벗긴다. 지나가던 학생들이나 나이든 사람들이 가끔 분수대에 와서 신발을 아예 깨끗하게 씻고 가는 사람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그냥 쑥 분수대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보인다."아저씨, 들어가면 안 됩니다."지나가는 여학생들이 신발 신은 채로 분수대 안으로 들어가 손에 물을 적신다."학생, 그렇게 들어가면 어떡해,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지."그 말을 듣고 슬그머니 나와 갈 길을 간다. 심지어 털이라도 씻기려는 듯 털이 유난히 많은 애완견을 데리고 들어가려는 삼십대 초반의 여자도 있다."아주머니, 개는 안 됩니다."이래저래 분수대는 몸살을 앓는다. 어린애를 데리고 온 엄마들이 애들을 지켜봤으면 좋은데 한쪽 쉼터 의자에서 자기들끼리 수다 떨기에 바쁘다. 분수대는 40분간 작동하다가 20분 멈춘다. 그 사이 나는 분수대안에 떨어진 쓰레기도 줍고 분수대 물 분출구에 껴 넣은 이물질을 제거한다. 종이, 껌, 풍선 등이 들어가 물이 잘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 제일 걱정되는 게 하나 있었다. 물주입구를 덮고 있는 돌 판이 유독 미끄러워 애들이 지나가다 훌러덩 넘어진다. 머리라도 돌에 부딪치면 큰일이다. 어느 땐가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두 살 가량의 어린이가 그곳을 지나가다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꽝"둔탁한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잘못하면 책임문제가 따른다. 분수대 관리 해태 책임이라는 법률적인문제 발생의 소지가 충분하다. 그 어린애의 할머니 되는 분이 와서 뒷머리를 쓰다듬고 우는 어린애를 달랜다.나도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괜찮아요? 잘 보셔야죠."그 상황을 노트에 적었다."8월 19일 오후 2시15분경 두 살 여자 어린이 물 주입구 돌에 미끄러져 넘어짐, 개선요망"기분이 찝찝하다. 저 돌을 미끄럽지 않은 것으로 당장 바꿔야 한다. 이 사실을 같이 교대로 근무하는 선임에게 얘기하니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여러 차례 넘어지는 사례가 발생한 듯 했다. 위험이 상존하는데도 이를 시정하지 않고 있다. 별 수 없이 나는 그 돌 앞에 지켜 서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얘들이 그 옆에 올까봐 두려웠다. 그래도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돌을 딛고 어린이들은 또 지나간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여기 이 돌이 무척 미끄러워요. 애들이 이 돌을 밟지 않도록 해주세요."이렇게 말해보지만 그 순간 뿐 이다. 사실 그 돌로 인해 내 오른 손 가운데 손가락에 문제가 생겼다. 물 주입구를 덮고 있는 돌의 무게가 엄청나다. 분수대 업무를 맡고 5일 후인가. 그 돌을 드는 순간 손가락이 젖혀졌다. 그 영향으로 쥐고 펴기가 원활하지 못하였는데 그 다음 날 이번에는 그 돌을 들다가 그냥 순간 돌에 손가락이 끼고 말았다. 이후 손가락이 저리고 물건을 들기도 불편할뿐더러 병마개도 못 딸 지경이 되었다. 정형외과에 들렀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다행히 뼈는 이상이 없단다. 가운데 손가락에 작은 받침대를 대고 감아주고 약 3일분을 처방해준다. 아마도 며칠 전 제초 작업할 때 너무 무리하게 손으로 풀을 뽑은 데도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다. 분수대 일을 하면서 그 돌을 드는 게 제일 조심스러웠다. 무겁기 그지없는 돌을 들기 위해 장날, 재래시장에 가서 쇠갈퀴를 샀다. 오후 5시 40분이 되어 주변을 돌다보면 500원, 100원, 10원 짜리 동전들과 어린이 장난감들이 가끔 발견된다.9월, 담당구역이 바뀌었다. 철길B다. 이곳 지역에서 쓰레기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곳으로 모두 꺼려하는 지역이었다. 처음 지역 인수를 받을 때 보니 범위도 넓을뿐더러 검은 수렁 같은 녹지대가 늡늡하게 자리하고 있다. 뭔가 나올 것 같은 어둑한 수풀이 군데군데 있는 철길B지역은 역을 중심으로 인근 역 까지 그거리가 상당하다. 조리대 풀과 황매화사이에 왜 그리 검은 비닐봉지는 많은지, 산책로엔 왜 그리 담배꽁초가 많은지, 빌라 뒤편엔 왜 그리 막걸리와 소주병이 많은지, 모두가 놀라움 그 자체였다.역 주변과 철길 밑, 자전거도로와 인도, 산책로, 33공원, 34공원, 역 밑 녹지대와 빌라사이의 경계선 주변, 이 모두가 내 담당지역이다. 이곳을 다 돌고나면 10시 50분 가까이 된다.19명의 공원관리원을 총괄하는 반장은 아침 8시 40분에 인원을 체크한다. 눈으로 좌에서 우로 인원수를 헤아린다."다 오셨지요. 자, 일 나가시죠."각자 맡은 담당지역으로 간다. 봉투와 집게를 들고 나서는 관리원들, 자전거로 오토바이로 승용차로 각자 뿔뿔이 흩어진다. 오전 11시, 공원관리사무실에 다시 돌아와 침상에 쭉 앉아 청소하며 겪은 일등을 얘기하며 반장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11시 10분쯤이면 반장이 문을 살며시 열고 인원수를 헤아린다. 머리를 끄덕끄덕하고 하는 말."자, 식사들 가시죠."일찍 보내줘서 고마웠다. 나는 처음에 자전거로 집까지 점심식사를 하러 다녔다. 신나게 페달을 밟아보지만 20 여분 남짓 걸린다. 집에 오자마자 식사하고 양치질하면 20분이 훌쩍 지난다. 다시 자전거로 내달리기를 20여분, 공원관리사무실에 가면 내가 거의 꼴찌로 도착하게 된다. 내게 모여지는 눈초리들."졸병이 겁도 없이 고참 들을 기다리게 하는 거야."그런 표정들이 역력하다. 한 동안 내가 선임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듯 했다. 작은 체구에 얼굴도 동안이라 육십 대 초반쯤으로 생각했는지 대부분의 동료가 내게 거의 반말을 했다. 부를 때도 손짓으로 불러놓고 이것저것 시키는 것이었다. 동료 간의 호칭 문제가 무척 마음에 걸렸다. 같은 나이 인데도 누구는 000형이라 부르고 우리는 00씨라고 한다. 뭔가 일을 시키려면 손가락으로 까딱까딱하며 부른다. 내 전입동기 K형은 그 점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몇 사람 선임동료가 고칠 줄을 모른다. 심지어 자신들보다 7살에서 10살 아래인 동료들에게는 '00야'하고 큰 소리로 부른다. 모두 예순의 나이는 넘었다. 요즘은 자기 아들도 삼십대 이상 나이가 되면 '00야'로 부르기가 쉽지 않다. 한편으로 애정표현이나 친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여기는 직장이다. 한 번은 나 보다 6살 아래인 선임동료가 작업 도중 송풍기에 기름 넣는데 도움을 요청하면서 오른손 검지로 까딱까딱 한다. 나는 말없이 가서 거들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나보다 덩치가 크고 키도 한 뼘은 더 있는 동료였다. 나는 공손하게 불렀다."박 형, 그런데 '까딱까딱' 이 뭐요? 이 형이라 부르면 안 돼요?""아, 귀를 가리고 있어서 그랬어요.""앞으로 이 형이라 부르세요. 그래도 이곳에서 나이 많은 연장자 측에 들어가는데."이런 일을 K동료에게 얘기하니 잘 했다는 것이다. 누구하나 지금껏 호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동료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그 동료는 다시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또 한 번은 누구를 부르는 것 같은데 관리사무실 안에서였다."이 씨, 이 씨."나는 그게 나를 부르는지 몰랐다. 그는 나보다 2살 아래인 Q라는 전입 동기다. 내가 전혀 응답을 않자 총무역할을 하는 동일한 성을 가진 L선임이 대신 관물사물함에 가서 뭘 꺼내다 준다. 이 씨라는 호칭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내게는 딴 세계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보니 0씨라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는 듯 했다. 서로의 호칭에 대해 통일이 없어서 그럴 것이었다. 호칭하나로 서로의 기분을 나쁘게도 하고 좋게 하기도 한다. 형님, 0형, 동생, 아우님, 이라는 좋은 표현이 있지 아니한가. 어이, 0씨, 00씨, 00야, 라는 표현은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품위도 지키면서 상대방도 생각해주는 상호간의 호칭은 조직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막내 둘이 가끔 불러주는 '완 식이 형'이란 말, 얼마나 정감 가는 말인가. 나는 후줄근한 땀을 안고 한 시간 반 이상을 담당 지역을 돌면서 쓰레기를 줍는다. 모자도 꾹 눌러쓰고 오로지 쓰레기를 찾는데 목표를 둔다. 나이 들어 운동도 되고 누구 말대로 돈도 생기고 일거양득이다. 철길 밑에는 운동기구도 있고 쉼터도 있다. 반달 모양의 탁자와 대리석으로 된 의자 위는 전날 밤에 회식을 했는지 다양한 메뉴를 펼쳐놓고 간 흔적이 자주 목격된다. 이곳저곳 나뒹굴고 있는 소주 병, 막걸리 병, 안주부스러기, 닭튀김 찌꺼기, 담배꽁초, 과자봉지, 등. 으레 먹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 사고방식들이 인식되어 버린 듯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풍경들. 심한 악취를 풍기는 족발담은 그릇도 조경수 안에 숨어있어 꺼내다보면 절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한숨까지 나온다. 정말 이곳 지역에 사시는 분들의 공중도덕에 대한 개념이 이것뿐이 안 되는가 싶었다. 물론 일부분이겠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치우기까지는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온갖 악취와 고통을 감내할 수 밖 에 없다. 음식물을 토해놓은 탁자를 치우는 경우도 많다. 더러는 애완견의 배설물들을 검은 비닐봉지나 흰 봉지에 넣어 자전거 도로 위나 나무 밑에 놓고 가는 경우도 있다. 자전거도로 한 복판에 뎅그러니 의젓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개똥은 추상화의 소재가 될 만한 운치까지 풍긴다. 차라리 담배꽁초는 봐줄만하다. 하지만 아무데나 냅다 쏟아 뿌려버린 음식물찌꺼기를 치우다보면 머리도 마음도 어지럽다. 하기는 이런 사람들로 인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그 날도 역시 내 담당구역을 이 잡듯이 뒤졌다. 어디서 꼭꼭 숨어있는 쓰레기야, 내 눈에 띠기만 해봐라 하는 심정이 된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쓰레기를 줍다보면 내 자신이 절에 들어가 도를 닦는 수도승이 된 듯하다. 음식물쓰레기를 비닐봉지에 담아 아무데나 버리는 행위만은 제발 해주지 말아주었으면. 소주병을 난도질하여 공원풀밭이나 도로가에 패대기치지는 말아주었으면. 그래서 이런 문구도 등장한다."난, 네가 쓰레기를 버리는 걸 알고 있다.""쓰레기 버리는 인간은 000다. 잡히면 죽는다.""쓰레기 인간 보소 이곳에 쓰레기 버린 ***. 잡히면 손목아 지 %%%, 당신 집 앞에 종량봉투 사서 버려라." 공원관리원이라면 쓰레기에 대한 법률 조항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메모해 두었다. 폐기물관리법 제 8조(폐기물의 투기 금지 등) 무단투기는 개인은 과태료 20만원 사업장은 100만원, 신고자에 대한 포상금은 과태료 부과금액의 20%라는 것도. 담배꽁초 투기는 과태료 5만원이다. 운행 중 도로에 쓰레기 무단 투기 차량은 교통법 제68조 제3항 제5조(운전자)에게 범칙금 5만원과 벌점 10점에 해당되는 응분의 대가를 치른다.그 날은 최선을 다했다. 평소 하나만 쓰던 봉투를 2개나 사용했다. 도로 가 전봇대 옆에 놓아두면 시청 환경관리팀에서 다음 날 수거해간다. 그 날은 오후에 공원소재 나무들의 전지작업이 있었다. 기계톱으로 자르고 다듬어 모양을 내고 하는데 그 소리가 장난 아니다.소리 없는 기계는 없는 것일까. 여럿이 덤벼들어 하니 금세 진전이 된다.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제 할 일을 알아서 척척 하는 동료들의 모습들, 진지한 삶의 자세가 묻어난다.그날 업무가 끝나고 자전거로 집에 가는 중이었다. 내 담당지역은 자전거 도로도 포함되는데 매번 그 길을 이용한다. 그런데 내가 담아놓은 쓰레기봉투 2개가 시야에 들어와야 하는데 하나 뿐이 없다. 순간 그 옆을 보니 한 무더기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가 쓰레기봉투를 가져가려고 다 쏟아놓은 것이었다.도대체 어떤 사람의 소행일까. 나는 내려서 소지하고 있던 비상용 봉투에 다시 담아 전봇대 옆에 갖다 놓았다. 설마 이것까지 다시 쏟아놓지는 않겠지. 처음 겪는 일. 어이가 없지만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게 얼마 후에 다시 일어났다. 이번엔 애당초 놓은 자리에서 오십 미터 가량 떨어진 철길 밑에 있는 수로 위 경사진 곳이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2열로 쭉 쓰레기가 도배를 하듯 널려있었다. 한 숨이 나왔다. 온갖 더러운 내용물을 마스크와 안경을 쓰고 일일이 새 봉투에 담았다. 어떤 사람의 행동일까. 전혀 죄의식을 못 느끼거나 양심을 저당 잡힌 사람이겠지.낭자야심(狼子野心)이라는 한자성어가 문득 생각난다. 양심이 없고 배려나 사회적 질서에 무관심한 이리 같은 야성이 몸에 배어있어 쉽게 교화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일 것이다.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재미가 갈수록 붙는다. 집에서 나와 길을 더듬으면 약간의 경사진 거리 1키로 미터는 자동으로 간다. 바람을 안고 씽씽 달리면 엉덩이는 신이나 옴지락옴지락 거린다. 자전거 타는 기분은 타보지 않으면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인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무겁고 길이가 아주 장난 아닌 짐 운반용 자전거를 겁도 없이 뒤뚱뒤뚱 거리며 배우던 그 시절이었다. 삼년 전에 폐암으로 삶을 마감한 막내 동생을 그 자전거 뒤에 태우고 가다가 운전을 잘못하는 바람에 도랑 속으로 풍덩 빠뜨린 적이 있다. 막내 동생의 나이 네 살이었다. 자전거를 타고가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혼곤하게 가슴을 여민다. 주조장의 술 배달 아저씨도 나와 똑 같은 자전거로 술통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주막이나 식당에 배달했다. 아는 분에게서 공짜로 받은 허름한 중고자전거, 꿀 허벅지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까 생각도 해보지만 나는 틀린 것 같다. 선임동료는 벌써 허벅지 둘레가 손가락한마디 쯤 늘었다며 은근히 자랑한다. 미상불 나도 허벅지 힘이 불쑥 늘어난 것을 느낀다. 경사진 높은 길도 안 쉬고 올라간다. 중고 자전거를 받은 후 수리비가 무려 10만원이나 들었다. 브레이크, 뒷바퀴 버팀대, 짐 받침대를 갈았다. 얼마 전엔 앞바퀴에 펑크가 나 때웠다. 동료들 중엔 내가 제일 서툴다. 3개월도 안되었는데 벌써 세 번의 전복 사고를 당하고 한 번의 인사사고까지 일으켰다. 그 중 한 번의 인사 사고는 공원관리사무실 입구 모퉁이에서 일어났다. 오전에 담당구역을 청소하고 동료 관리사무실에 들러 얼굴을 씻고 화장실을 다녀 온 후 다시 공원관리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무실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화장실에서 나오던 팔십대 초반쯤 보이는 노인의 발을 밟고 손을 스쳤다."아니 어떻게 자전거를 모는 거요?"이거 큰 낭패가 아닌가. 머리가 아득했다."아, 제가 자전거가 아주 서툴러서요. 죄송합니다."나는 바로 사과했다. 그 노인은 나를 위 아래로 째려보더니, 자신의 손 등을 쓱 쳐다본다.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다."가세요."다행이지만 기분은 씁쓸하다. 그 날은 집에 가서도 마음이 꺼림직 했다. 그 모퉁이가 내겐 위험지역이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면 날아갈 듯 기분이 좋다. 삶의 기운이 퐁퐁 솟아오르고 세상의 모든 길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충만감을 느낀다. 낡은 흔적들을 삭혀서 모두 흘려보내는 기분이 된다. 가슴은 뻥 뚫리고 세상이 모두 내 것 같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울타리는 측백나무였다. 그 나무 사이사이로 번지르르하게 뚫린 개구멍이 군데군데 있었다. 우리는 쉬는 시간을 이용해 군것질할 것을 사러 점방에 갔다. 교문까지는 거리도 멀뿐 아니라 주변의 시선도 피해야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개구멍을 더러 이용했다. 이번에 근무하다 나온 공원관리사무실은 그 가는 길이 회양목 울타리를 따라서 비스듬히 나 있다. 동료 4명이서 자전거로 관리사무실을 가고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갑자기 대오를 이탈해 직선 코스로 내달린다. 시원하게 달리는 그 동료 앞에 뻥 뚫려진 울타리 사이의 개구멍. 그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지금도 개구멍은 있다는 것을.한자 좀 몇 자 안다고 고사성어 몇 개 기억하고 있다고 가끔씩 써먹다가 상대방의 되물음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나 보다 8살 아래인 S동료는 인생을 달관한 수도승 같은 인상에 키도 농구선수같이 훌쩍 커 내심 부러워했다. 자전거를 타고 같이 가는데 빙그레 웃으며 말 한다."완 식이 형, 일전에 말한 상선약수 있지요. 바로 개구멍이 아닌가요? 왜 그런 구멍을 막는지, 원. 사람들이 가고 싶은 데로 길이 나면 얼마나 좋겠어요."개구멍이 뚫렸다는 건 그곳이 바로 사람들이 지나다니기에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스라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 주는 그 동료가 다시 보였다. 그 땐 얼마나 개구멍을 많이 드나들었던가. 번지르르하게 난 정겨운 좁디좁은 길을.아파트단지내도 화단 가운데를 가로질러 반들반들한 길이 곳곳에 나 있다. 주민들이 주로 다니는 길이다. 이에 부응해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그런 곳을 찾아 뜀 다리를 놓는다. 처음엔 생각지도 못한 곳에 만들어진 징검다리인 셈이다. 예전의 개구멍이나 샛길을 양성화하는 것일 것이다.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영어로 Out of control 이라는 말인 통제 불능과도 통한다. 노래로는 비틀스의 Let it be 가 있다.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라는. 자기 욕심을 위해 어린 자녀에게 억누르며 시키는 적성에 안 맞는 공부도 이 같은 상선약수의 말에 상충한다.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하고 싶은 공부 하고, 가고 싶은 데로 가고, 마음에 없는 말은 안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하는 게 바로 상선약수 아니던가.개구멍은 상선약수다. 국민기초질서 확립차원에서도 지금 우리 주변엔 제재나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경우가 적지 않다. 분명 관련 법조항이 있건만 왜 실천을 못 하는지. 양심을 버리는 사례가 발견되면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업무 중엔 호주머니에 주머니칼을 가지고 다닌다. 공원이나 녹지대에 이따금 걸려있는 현수막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건설회사의 분양공고는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 제거하면 또 걸고 걸면 또 제거하고. 식당개업 현수막도 보이고 더러는 가정은 행복의 궁전, 미혼 남. 여, 재혼 하실 분은 전화 달라는 안내문이 운동기구와 지하철 기둥을 도배한다. 어느 땐 며칠 놔두고 싶기도 하다. 차라리 금요일 오후에 붙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이틀은 제거하지 않으니까. 청소 담당 업무는 일종의 사명감이나 봉사심이 없으면 쉽게 지치기도 하고 자신이 황폐해질 수 도 있는 직업이다. 경제적 이유로 이 일에 나왔던 소일거리로 나왔던, 일 할 때만큼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내가 담당하는 곳엔 비둘기 들이 지하철 천장에 많이 살고 있다. 그 천장에서 무더기로 내싸지르는 비둘기 똥들은 마치 핵폭탄 같은 생각이 든다. 비가 오는 날은 옻오른 곳에 약 쳐 발은 듯 여기저기 몽글 몽글 흩어져있기도 하고 떼로 뭉쳐 있는 똥들을 치운다. 삽으로 마치 솥에서 누룽지 긁듯 해 모은 비둘기의 배설물. 물감 짜듯 버려진 평화의 전신이다. 비둘기 담배까지 생겼을 정도로 우리에겐 가까웠던 존재가 어느 순간 혐오의 대상으로 변했다. 일체 모이도 주지 말라는 경고의 글도 이젠 어색하지 않다. 격세지감 隔世之感인가. 상전벽해 桑田碧海인가."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산새들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예전의 노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가을의 끝자락이 되면 무상이란 단어가 꾸역꾸역 내 마음을 파고든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휴지통에 버려지는 물건처럼 낙엽도 그렇게 느껴진다. 저렇게 나동그라진 흔적들을 지우기 위해 또 사람들은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엉금엉금 기어오는 '게'처럼 대왕 참나무의 잎들은 얼마나 징그럽게 다가오는가. 담당지역을 청소하다보면 별의별 상념에 잠기게 된다. 이곳 지역의 시화인 황매화 사이사이로 검고 흰 비닐 들이 끼어져 있다. 오래된 음식물인 경우도 있고 빈 소주병과 과자부스러기가 들어있을 때도 있고 먹다 남은 닭튀김이나 만두가 포장된 채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다.며칠 전인가. 지하철 역 입구 바로 건너편에 있는 회양목 울타리 안쪽에 00식자재 표시가 된 하얀 비닐 봉투가 보였다. 집게로 들쳐보니 소주병 깨진 게 들려진다. 옆엔 4홉들이 병맥주가 다섯 병 있었다. 빈 병 인줄 알고 들었는데 묵직하다. 새 것이다. 카스. 나는 그대로 놔두었다. 혹시 누가 잠시 두고 간 것은 아닌지 싶어서였다. 그 때가 오전 9시. 담당지역을 다 돌고 나서 자전거로 공원관리사무실 가는 길에 흘낏 보니 아직 그대로 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걸 다 쓰고 버린 쓰레기로 생각했나보다. 사무실에 와서 S동료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사무실에 갖다놓으라고 한다. 새것이고 어차피 치워야 할 것인데 그렇다고 새것의 마개를 따서 버리는 것도 아깝다. 누군가 버린 새것은 가끔은 의심을 하게 된다. 혹여 그 안에 무엇인지 모를 독약이라도 타거나 하지 않았을까 하고. 반장이 하는 말."갖다 놓으세요. 혹시 다른 동료들이 업무가 끝나고 출출할 때 마실지도 모르니까요."점심 때 C동료와 노인복지관으로 식사하러 가면서 그 병들을 가져왔다. 타인의 물건을 남몰래 훔치는 심정이었다. 주변을 살폈다. 관리사무실 냉장고 안에 넣어둔 그 맥주들은 며칠 후 말끔히 치워졌다.얼마 전 부터 자전거로 집에 가 점심하던 것을 노인복지관으로 바꿨다. 2천원을 받는데 나이 만 65세 이상 주민이면 이용할 수 있다. 회원증과 2천원을 내면 식권을 준다. 지하에 있는 식당은 언제나 줄을 서야 한다. 자가용을 몰고 오는 사람, 부축을 받으며 오는 사람, 휠체어를 타고 오는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점심을 즐긴다. C동료는 나와 같은 산불감시원 출신이다. 월남 참전 용사로 유공자 증이 있어 식사는 공짜다. 점심때가 되어 그 동료 차를 타고 노인복지관에 가는 순간은 편안하다.싱 씽 싱, 자전거 바퀴를 타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부챗살처럼 올라온다. 아침 8시 10분이다. 고등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과 남학생 한 명이 지하철 밑 반달 탁자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40분 후 다시 와 보니 학생들이 떠난 그곳은 예상대로였다. 빈 소주 병 3개, 라면 몇 올 남은 종이그릇 1개, 파랑색 음료수 한 병, 캔 맥주 하나, 아이시스 물병 하나, 진한 입술연지가 묻은 종이컵 둘, 검은 비닐에 안겨있는 빈 종이컵 5개가 널 부러져 있었다.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지하철 밑 탁자에서 술잔을 기울였던 그 학생들, 사자소학을 예절기본서로 알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울컥한 마음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마침 지나가던 칠십대 중반의 남자분도 혀를 찬다."참나, 에이 000들, 아직 멀었어." 손가락이 여전히 안 좋다. 아침에 일어나면 붓고 저리고 잘 쥐어지지도 않는다. 이곳지역에서 통증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Y병원을 찾았다. 원장의 경력도 화려하고 또한 각종 시설이 최신의 장비인 듯해 믿음이 간다.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말한다."선생님, 손가락 퇴행성관절염입니다. 약 5일 분 지어드릴 테니 드시고 물리치료 받으세요."계속 일을 해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반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힘들지 않은 일을 배정해달라고 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동료들에게 손가락 이상을 얘기했다. 무거운 것을 드는 일은 좀 배려해주었으면 하는 의도였다. 통증은 심해오고 일은 해야 하고 그렇다고 쉴 수도 없고 참으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얼마 전이었다. 공원 내 나뭇가지 줍기가 업무로 주어진다. 나무들의 죽은 가지가 여기저기 흩어져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산책에 방해가 된다. 그 날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갑자기 애완견이 '왕왕' 짖으며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사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애완견 3마리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다. 한 동료가 손을 내저으며 가라는 시늉을 했다. 막무가내로 다가온다. 으르렁 거리며 접근하는 애완견이 금방 물기라도 할 것 같다. 여자는 아무 대책도 없이 쳐다보고만 있다. 화가 난 동료는 '이런 놈의 000'하면서 나뭇가지를 들고 쫓았다. 마치 때려죽일 듯하다. 계속 따라 붙는다."아줌마, 개 좀 목줄 해 갖고 다니쇼.""000, 빨리 와.""아, 이런 놈의 000, 죽여 버릴까보다."아마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무슨 사단이 났을 것이다. 공원 한 쪽에 걸려있는 현수막."애완동물 출입 시,목줄 착용 및 배설물 처리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위반 시 도시공원 관리법 제49조에 의하여 과태료 10만원이 부과 될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000시 공원 녹지 과"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그 여자,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그 개들이 생산한 똥들이 풀 섶을 뒤 덮고 있다. 싸지를 때 누가 보면 치우지만 그렇지 않으면 방치하고 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똥들을 치우지 않는다고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소유자들이다.스스로 알아서 애완견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양심적인 태도가 소망스럽다. 옆의 동료는 어느 할아버지의 사례를 든다. 그 할아버지는 매일 개를 데리고 다니는 데 손잡이 달린 냄비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개가 가다 낑낑 대거나 한 쪽 발을 들려고 하면 바로 냄비를 들이댄단다. 다시 뚜껑을 닫고 운동을 하는 그 할아버지 같은 사람도 있다. 제발 배변위생봉투라도 가지고 다녔으면 얼마나 좋을까.이젠 개똥들은 내게 정겹게 다가서는 친구 같다. 내가 담당하는 34공원을 생각한다. 공원 앞 인도에 음식물 수거함이 있다. 이곳 지역 사람들은 그 옆에 마구 온갖 쓰레기를 버린다. 사업장과 단독주택은 쓰레기 배출장소가 사업장 앞이나 주택 앞 도로변이다. 그럼에도 이곳 지역 사람들은 공원 앞 도로변에 내놓는다. 자주 공원 경계선을 넘어와 흉물스럽게 나뒹굴고 있다. 비닐에 곱게 싸서 놓고 가는 것은 그래도 봐줄만 하다. 온갖 잡동사니는 다 모여 있다. 쓰레기 분리수거에 대해 전혀 개념이 없는 사람들의 행위 같다. 종량제 봉투를 사용한 것은 이따금 가뭄에 콩 나듯 보인다. 아마 수없이 민원도 들어갔을 것이다. 완전히 쓰레기천국. 내가 이곳 지역을 담당한지도 벌써 2개월이 넘는다. 그간 딱 한번 깨끗하게 청소된 적이 있다. 말끔하게 정리된 도로를 보기는 처음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 때뿐이었다. 다시 쓰레기들이 두런두런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수막이라도 붙이면 어떨까 생각했다. 담당공무원도 그런 생각을 수없이 했을 것이다. 차라리 공원관리 담당인 내가 하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지금까지 이 지역을 담당한 동료들은 얼마나 고민했을까. 담당지역 변경만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청소, 봉사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간 나는 봉투의 빈 여백만을 채운다는 입장에서만 조금씩 그 쓰레기들 중 일부를 수거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 하리라. 무단 투기 단속반이라도 편성해서 거리를 정화하겠다는 어느 구청의 발표를 본 것도 생각난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다. 내 집 앞 내 거리를 깨끗하게 해야겠다는 가슴에서 우러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인권이 강화되고 민원인 중심의 행정이 되다보면 정작 해야 할 일이 왜곡되기도 한다. 자기위주로 생각해서 주장하는 민원들이 적지 않다.낙엽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아파트 사이길 공원에서 낙엽을 치우고 있었다. 갈퀴로 긁고 부로어로 불고 자루에 차곡차곡 쓸어 담고 있었다. 이때 어느 칠십대 여인이 우리에 다가온다."여보세요. 이00 씨를 찾는데요. 아파트 몇 동인지 몰라서요."옆에 동료는 노인정을 찾아가보라고 한다. 말없이 돌아선 그 여인은 발걸음을 옮긴다. 다시 또 낙엽제거작업을 했다. 삼십 분 쯤 지났을까. 다시 또 그 여인이 우리에게 온다."아저씨, 이00 씨를 찾는데요.""아주머니, 언제 이사 오셨어요?"열흘도 채 안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여인을 데리고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갔다. 관리소 여직원은 최근에 입주카드를 작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다시 나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이사 오기 전 어디서 사셨지요?"경기도 00에서 사셨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해당 주민자치센터에 물어보면 되겠네요.' 하고 물었다. 관리소 직원이 얘기한다.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서 아무나 안 알려준다는 것이다. 파출소에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여인을 데리고 인근 000경찰서 00지구대를 향했다."아주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네, 저 오십이에요."칠십대 중반 이상은 되어 보이는데. 아, 이분 치매로구나. 내가 주민등록증이라도 있는 가 물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파출소에 들어가니 경찰관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긴다. 그 여인의 남편인 할아버지가 아마 신고한 모양이었다. 뒤이어 두어 명의 경찰관이 들어온다. 할아버지 집에서 오는 듯했다."이분 집이 어디시죠?"내가 물었다. 00 주공 2단지라는 것이다. 이곳은 전연 다른 B아파트단지인데. 선임으로 보이는 경찰관이 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내가 왜 그러냐고 하자 혹 사례를 할지 모르니 그런다는 것이었다."네, 000-0000-0000, 공원관리원입니다."그 경찰관은 메모장에 적는다. 경찰관은 곧바로 그 여인을 데리고 나갔다.나는 문득 이미 고인이 되신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를 생각했다. 작은 아버지는 치매증세가 심해져서 벽에 0칠을 하는 등 심각한 모습을 보이셨다. 결국 작은 어머니의 결심에 마침내 형벌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여보, 우리 다 같이 죽읍시다. 얘들 더 이상 고생시키지 맙시다. 여기 농약 어서 마셔, 어서."두 그릇의 농약을 놓고 그렇게 삶의 종지부를 찍으려고 시도했다. 작은 어머니가 먼저 마셨다. 치매라서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작은 아버지는 농약을 안마셨다. 작은 어머니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일, 그 선연한 아픔의 칼날이 눈앞을 스친다. 작은 아버지는 그 후 큰 딸과 함께 살다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셨다.오늘 낙엽을 치우면서 그 여인의 모습을 보고 다시금 느낀다. 암보다 더 무서운 치매 걸리지 말아야 된다. 주소와 연락처를 적은 목줄도 치매환자자신이 떼어버린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목에 줄보다는 차라리 팔뚝에 연락처와 이름을 문신하는 게 어떨까.무표정하고 아무 감정도 없는 그 여인의 얼굴, 섬뜩하다. 쓸쓸한 인생의 우리네 뒤안길을 보는 듯하다.담당구역 청소를 마치고 전 담당구역 관리사무실에 들렀다. K동료가 사무실 밖에 나와 있다. 이때 사십대 중반의 여인이 달력을 한 부 들고 사무실 앞에 와서는 곱게 말을 꺼낸다."아저씨, 뵙고 싶었는데 올 때 마다 안계시데요."나는 공원관리 하는데 수고가 많으시냐며 일부러 들른 듯 보이는 그 여자를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달력 주시려고요."동료는 웃으면서 맞이한다. 돌아온 답변은 전혀 예상외였다."아저씨, 여기 불이 항시 켜있던데 왜 안 끄시죠? 전기세가 아깝지 않아요?"보니까 여자 화장실이다. 불이 켜있다. 공원관리원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다."아, 어떻게 남자가 여자화장실을 맨 날 점검하면서 끈대요?""아저씨, 시청에 민원 넣을 거예요."동료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벌써 이런 행위가 한 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여자화장실인데 맨 날 화장실 이용여부를 확인하고 전기를 끄라는 그 여자의 요구사항, 정말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화장실, 좀 밝게 하면 어때서 그럴까. 세금 내니까 할 말은 해야겠다는 그 취지는 좋지만 이건 좀 너무 하다. 조금 있다가 삼십대 후반 쯤 보이는 여자가 유모차에 흰 개를 태우고 지나간다. 다른 동료가 그걸 보고 눈 쌀을 찌 뿌린다."그냥 넘어가 왜 그래."나는 그 말을 불쑥 내 뱉었다.34공원이 갈수록 지저분해진다. 각종 쓰레기들이 공원 경계선을 넘어와 고물상을 방불케 한다. 나름 안내문이라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A4용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이곳은 여러분의 소중한 공원과 녹지입니다. 제발 생활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마구 버리지 마십시오. 공원관리원 드림"코팅을 했다. 3장을 만들었다. 다음 날 출근해서 반장에게 보여주자 처음엔 망설이는가 싶더니 해보라고 한다. 옆에 S동료도 있었다. 한마디 덧붙인다."빌라 000들"안내문을 쓰레기가 웅크리고 있는 곳 바로 앞 나무에 끈으로 묶었다. 지저분한 도로변 잡동사니 쓰레기를 치웠다. 전후의 모습과 안내문을 스마트 폰에 담았다. 내용을 반장에게 문자로 보냈다. 잠시 후 반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공원관리사무실 밖에서 점심시간 전이라 모두 서성거리고 있었다. 내게 온 반장은 낮 빛이 싹 변하면서 몰아붙인다. 전혀 예상 밖이었다."이 완 식 씨, 너무 앞 서 갑니다. 여기 들어 온지 얼마나 됐어요? 왜 그리 앞서 갑니까? 공원관리원 이름으로 안내문을 붙이지 마세요."아침에 안내문을 붙이겠다고 의견을 분명하게 말 했을 때 허락하지 않았던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붙여도 좋다고 해서 그리했고 34공원이 너무 지저분해 안내문이나 붙여봐야겠다고 생각한 것 일 뿐임을 조용히 얘기했다. 동료들의 시선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다시 반장이 내게 누그러진 목소리로 주의를 준다. 도로는 미화원소관이며 그것까지 신경 쓰지 말란다. 다시 덧붙인다."이 완 식 씨, 앞으로는 너무 앞서가지 마세요. 그리고 다른 건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짐작이 갔다. 반장은 얼마 전의 일로 인해 내게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다. 들어 온지 몇 개 월 된 풋내기가 도대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감히 훈계하느냐는 투였다. 나이든 사람은 그 자체로 비하를 당하게 되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동료들은 모두 예순 살이 넘었다. 반장의 부모와 비슷한 나이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반장이 내게 와서 내일까지 안내문을 제거하라고 한다. 얼마 전에 내가 보낸 한 통의 서신, 물론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일언반구의 답변도 없었다. 그 서신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다. 몇 명이 점심시간에 주변에서 식사를 하는데 시간적으로 좀 이른 시간이라 보는 눈도 있으니 멀리 가서 식사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바로 그날 그런 당부를 아랑곳 하지 않고 주변에서 식사를 한 모양이었다. 이에 발끈한 반장이 점심시간을 20분 늦춰버렸다. 결국 피해를 보는 사람은 자전거로 집에 가서 점심을 하고 오는 동료들이었다. 몇 명의 잘못으로 다수가 불편을 겪고 있다. 누군가 이에 대해 선처해달라고 부탁한 듯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결자해지, 맺은 자들이 풀어야하는데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불만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누구하나 앞장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종내는 내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반장에게 문자로 보냈다. 0반장님에게 드리는 말씀 요즘 오후 다섯 시 경에 퇴근을 하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둠이 빨리 찾아오니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려면 조심스럽습니다. 공원관리원의 일은 소중한 시민의 휴식공간을 좀 더 청결하고 아름답게 하는 데 있겠지요. 적지 않은 공원과 녹지 등의 관리와 각종 민원해결을 혼자 주관하시느라 고군분투하시는 0반장님의 애쓰시는 모습. 가끔 안타까울 때도 있습니다. 0반장님을 보면서 사명감과 봉사라는 단어가 살아있음을 떠올립니다. 낙엽 수거를 위해 송풍기로 불고 갈퀴로 긁어모으고 마대자루에 담아 상하차를 해서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러는 젖어있고 때로는 썩어있는데다 미세먼지까지 잔뜩 안겨있는 냄새나는 낙엽. 열악한 환경에도 모두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일 하시는 동료 분들의 진지함에서 저는 참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이제 근로계약기간도 한 달 하고도 며칠 남았습니다. 같이 일하시는 동안 화기애애하고 훈훈한 정을 나누며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것은 모두의 희망이겠지요. 오전에 담당구역을 청소하고 나면 오늘 오후에 무슨 일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간 전지작업, 풀 제거, 그레이 팅 청소, 공장단지 주변 청소, 연못 청소하기, 의자 페인트칠 벗기기와 벗긴 곳 다시 칠하기, 보도블록 깨진 것 보수하기, 나무 가지 줍기와 가지치기를 주로 했었지요. 요즘은 낙엽수거로 거의 결정된 일이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을 해서 시간 내에 맞출까 동료 분들은 부심합니다.지난번의 점심시간 변경 이후로 대부분의 동료 분들이 집에 가 식사를 하고 오는 데 조금의 틈이나 짬이 없어 보입니다. 부탁드리오니 종전처럼 점심시간을 허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매식을 하는 분들은 주변에서 식사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점심을 해 혹여 발생할지모르는 불미스런 민원은 추호도 없도록 하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고령임에도 정말 치열하고 진지하게 공원관리 일을 하시는 동료 분들입니다. 남은 근로계약기간 한 달 남짓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여 보람 있는 마무리가 될 수 있기를 학수고대합니다. 공원관리원의 일사불란한 마음가짐은 오직 0반장님의 얼굴표정과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달려있습니다. 일할 맛 나는 상큼한 분위기속에 공원관리원으로서 근무한 추억이 오래 오래 저희들 가슴에 남아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셨으면 합니다.고맙습니다.이 완 식 드림 내 간곡한 글을 읽고 반장이 흔쾌하게 받아줄 줄 알았다.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오히려 앞장서 간다느니 새까만 공원관리원이 건방지게 하늘같은 반장을 회유하려한다는 의미로 비쳐져 미운털만 옹골지게 박힌 꼴이 됐다. 어느 동료의 말이 절절히 다가온다."여기 하도 말이 많아 놔 갔고 나대봤자 하나 이득 없어.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한쪽 귀로 바로 흘러버려.""맞아"즉시 응수하는 동료들.얼마 전 00근린공원 어린이 놀이터에서 낙엽수거작업을 했다. 갈퀴와 플라스틱 삽으로 듬뿍 담아 마대자루에 넣는다. 마른 낙엽은 한 번 이상 눌러주어야 한다."한번 누르자고요."자루 잡는 한 쪽 동료와 나는 손을 각개로 하고 누른다. 낙엽이 풀썩 쪼그라진다. 한두 번을 더 넣은 후 하는 말."됐어요."옆에서 마대자루를 묶는 동료에게 인계한다.갑자기 시야에 야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 들어온다. 놀이기구에 청색홈통이 있는데 꼭 남자의 거시기 같다. 버섯 모양의 맨 끝 부분. 어린이들이 그 안에서 나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쑥쑥 잘도 나온다. 어쩜 그리 생각을 잘 했을까. 마디마디 주름이 진 대롱이다. 참 굵다. 옛날에 서당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자의 기초서적, 사자소학의 첫 구절이 생각난다."부생아신(父生我身) 모국아신(母鞠我身)"아버지는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도다. 대롱을 통해 나오는 어린이들. 참으로 멋있는 발상이 아닌가. 이제 근무할 날도 하루 남았다. 영하 15도를 웃도는 날씨, 오전 청소를 하고 오후엔 3시 까지 대기하란다. 몇 명씩 나누어 몇 군데 있는 공원관리사무실에 가 있으라는 것이다. 마지막 낙엽수거작업을 이 추운 날씨에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과거 이곳에서 반장을 역임한 바 있는 B동료와 전입동기 K동료와 내가 한 조가 되어 0역 관리사무실에 배정됐다. 지갑을 주웠을 때는 어떻게 했느냐고 B동료에게 물었다. 그 동료는 처음에 지갑을 주웠을 때 인근파출소에 습득물이라면서 전달했다고 한다. 경찰관 하는 말."이 지갑에 돈 없었어요?""네, 없었어요."숫제 자신을 의심하는 말투로 물어보더라는 것이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 자신도 지갑을 잃은 적이 있는데 나중에 우체국을 통해서 주민등록증과 카드3장을 돌려받았단다. 택배비 3천원을 부담했다. 이미 모든 것을 재발급 받은 후였다. 그 후론 지갑을 발견하게 되면 바로 쓰레기봉투에 담아버린다고 한다. 타인의 개인정보가 잔뜩 있는 지갑을 보면 나는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알고 싶지 않은 타인의 정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쓰레기 소각장에 들어가 깨끗하게 소각되는 게 차라리 좋다. 핸드폰 역시 발견되면 하루나 이틀 쯤 지켜본다. 물건을 잃은 소유자는 자신이 들른 장소를 다시 가보게 마련이다. 그래도 있으면 가까운 핸드폰 대리점에 가서 확인 후 본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쥐똥나무 울타리 옆에 대형 가방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가방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했다. 물컹하고 이상한 것이라도 있을까 두려웠다. 저것을 열어봐야 하는지 어떤지 갈등이 생겼다. 그렇다고 안 치울 수도 없다. 나는 그 때 며칠을 지켜보았다. 그대로 있었는데 일주일 쯤 지나니 가방이 칼로 옆구리가 터져 있었다. 나는 빈 가방을 100리터 봉투에 담아 전봇대 옆에 내 놓았다. 채 3분도 안되었다. 환경정화 차량이 멈추더니 재빨리 차에 싣는다. B동료는 가방을 발견하는 즉시 거리 전봇대 옆에 내놓는다고 한다. 진작 물어볼걸 그랬다.지난 금요일, 서로의 석별을 나누기위해 회식을 했다. 맛이 있기로 소문난 000 정육식당. 그래도 5개월 간 같이 보낸 동료들이 아닌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었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값진 추억으로 여겨야 한다.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공원 관리 일을 한 것은 천금을 주고도 얻지 못할 귀중한 경험이고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는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회식자리에서 한 동료가 건배사를 한다. 언젠가 프랑스 시인 구르몽의 시'시몬, 그대는 좋은가, 낙엽 밟는 소리가.'를 흥얼대던 동료다."인생무상"내가 가만히 있자 묻는다."이형, 이어서 말해야지요. 아니 그것도 몰라요?"그러면서 술 한 잔을 꺾더니 말한다."삶의 허무요. 허무."소주가 유난히 달콤하다. 안 해본 일도 하고 걸러내지 못한 말도 들어보고 한 지난 5개월, 끊임없이 삶의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공원관리원 생활을 하며 내 자신을 숙성시켜서 그럴 것이다.내가 제일 마지막 코스로 가는 34공원, 내가 떠나가도 또 누군가 담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기초질서 의식이 바로 잡혀지지 않는 한 늘 담배꽁초는 여기저기 나 뒹굴 것이고 먹다만 음식물찌꺼기와 한 물간 음악 테이프, 가방, 신발, 그릇, 병 등 잡동사니 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물상 같은 풍경들은 계속 그려질 것이다. 내다버린 자전거의 안장만 뚝 떼어서 가져간 주인 없는 자전거들. 흉물스런 모습으로 자전거 보관소 옆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기초질서위반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하든지 아니면 과거 반상회와 같은 제도를 이용해 계몽도 하고 서로간의 협조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공원경계선에 담을 쌓고 벽에 동심의 세계를 그리고 그 밑에 꽃들을 심는 것도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산업용과 생활 쓰레기의 처리모습은 그 나라국민의 의식수준을 가늠하는 기본적인 척도가 된다. (♣)

2019-08-08 18:15:35

이영백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파도소리, 풍금소리/이영백

● 프롤로그 내 인생에 첫 직장으로 "국민(요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예전에 흔히 '할일 없으면 국민학교 선생이나 하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요즘도 취업이 어렵다고 하지만 취업은 어느 세대, 어느 시대에서도 어려웠다. 고교를 졸업하던 1971년 그때에도 막연히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취업은 마뜩찮았다.아버지 전 근대(1899년생, 근세조선 고종 광무3년)에 사셨던 분이라 겨우 시대가 바뀌어서 초등학교 입학과 졸업만으로 공부를 못하게 하셨다. 초교 졸업하고 동네 서당으로 직행하니 신학문 하던 초교동기들이 매일 찾아와서 '가출이라도 해서 중학교 다녀라'고 꼬드겼다. 2년 동안 서당 다니다 겨우 사회 돌아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강의록으로 중학교를 몰래 마쳤다. 이어서 고교 졸업하려니까 서당 다녔던 잃어버린 2년이 남자에게 닥치는 것으로 군대영장이었다. 그 시대 시골에서 공무원이라도 하려니까 연봉이 너무 적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를 작심하고 교육대학을 선택하였다.교육대학을 지원하면 2년짜리 초급대학이지만 졸업하고 나면 직장 구하기도 쉬울 것이라 하였다. 이미 영장을 받은 나로서는 대학에서 2년간 훈련마치고 시험에 통과하면 RNTC제도로 군대제대까지 약속 받을 수 있었다. 또 부족한 학자금을 보충하여 주는 한 학기당 8,000원 사도장학금이 있어 가난한 대학생으로서는 꿀 발린 금상첨화의 유혹이었다.그러나 막상 교육대학을 졸업한 1973년부터는 정말 선생 되기도 어려웠다. 사회적으로 취업이 어려웠고, 교육대학 졸업생이 비사범계 교사들보다 50%를 넘기던 해였다. 사회 환경도 어려워져서 직장이동도 줄어들었으며 이래저래 각종 변수가 많아 초등학교 교사 발령받기도 어려워졌다.교사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노부모님을 큰 형님이 모시는 것만 해도 송구했는데 시골에서 대학졸업하고 발령도 못 받고 빈둥거리기가 싫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마침 "하처가(何處可)"희망원을 제출하였음에 따라 경상북도 영일군 바닷가에 1973년 5월 1일자로 발령이 났다. 2개월 쉬었다.나는 발령이 난 줄도 모른 채 울산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우편배달 사고가 난 것이다. 우편집배원은 불러도 사람이 없으니까 엽서 쪼가리 한 장을 대수롭지 않게 대문에 던지고 가 버렸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아침에 우연히 질녀가 거름더미에 날아다니는 엽서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내려와서 나의 발령을 알려 주었다.당시 영일군교육청에 발령 후 3일 만에 갔더니 장학사라는 분이 불호령을 쳤다."당신 말이지. 국가 명령이 그렇게 우스운가?""예? 제 얘기도 들어 봐야 하지 않습니까? 국가명령이 그렇게 중요했으면 일반엽서로 보낸 통지가 말이 되십니까? 마침 시골집 거름더미에서 찾았기에 망정이지 몰랐으면 오늘도 못 왔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통지서를 등기로 보내는 것이 관례 아니십니까?""그랬군요. 송구해요. 우리는 험지라 발령을 포기한 줄 알았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7일이 넘었으면 발령포기로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는데 참 다행입니다. 어서 발령이 난 학교로 가세요. 그 학교 교장선생님이 학수고대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나로서도 할 말이 많았지만 근무해야 하는 교육청 장학사에게 더 대들지도 못하고 말았다.그리하여 나는 평생 최초 나의 첫 직장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제1부 파도소리1. 첫날밤 대학졸업하고 2개월간 취직 못하고 발령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1973년 5월 1일자로 영일군교육청 교번 55번 모포(牟浦)초등학교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포항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버스타고 허위허위 산모롱이를 감돌아 산골을 헤치고, 물어물어 찾아온 모포항구, 보리항구였다.내륙지방(경주 불국사)에서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발령통지서 한 장으로 이 낯선 바닷가 근무지로 왔다. 모포! 첫 인상은 참 좋았다. 답답한 산골짜기보다 앞이 훤히 트인 바닷가라서 속이 후련하였다. 학교 교문에서 채 10여 미터 앞에 바로 바다다. 내륙에서만 살다가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바로 바다냄새였다. 짭짤하면서 비릿한 냄새가 나의 코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어찌 여기서 계속 살 것인가?우선 하숙을 구해야 했다. 나의 하숙집을 구하는데 교무 주임선생님께서 적극적이셨다. 그리하면서도 하숙집은 이미 정해 두셨다고 했다. 가히 멀지도 않은 학교 담장너머 첫째집이라고 했다. 당장 당일부터 하숙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정말 다행이었다. 하숙비는 1개월에 3,000원이라고 했다. 첫 월급이 27,000원인데 9%가 하숙비였다. 당시 막걸리 한 되 30원, 택시 기본요금 90원, 맥주 한 병에 70원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학교를 파하고 하숙할 집에 들렀다. 주인장과 그 부인이 계시고, 아들 하나, 딸 둘이었다. 그리고 앞방에는 선배 선생님이 이미 하숙하고 계셨다. 내가 쓸 방은 선배님 방과 붙은 안쪽 방이었다. 그러니까 왼쪽 앞방이 선배님 방, 뒷방이 내가 쓰는 방, 가운데 마루가 있고, 마루 안쪽에 주인 방, 자녀들 방, 그리고 동쪽으로 부엌이 있었다. 화장실은 밖으로 나와 동쪽인데 학교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다.하숙집은 바로 학교담장 곁이고, 사이에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가 있었다. 오르막으로 올라가야 들어올 수 있다. 오르는 길 양옆으로 채전이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파밭이고, 왼쪽으로는 부추 밭이다. 그러니까 아래 도로에서 보면 쳐다보이고 집터가 높이 들어 얹혀 있었다.그래도 하루 만에 하숙집을 구했고, 직장도 아주 가까워 편리하며 선배님과 함께 다닐 수 있어 좋았다. 첫날 학교가 파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었다.주인장이 바둑을 둘 줄 아느냐고 물었다."아닙니다. 못 둡니다. 잡기는 아무것도 못합니다.""아이고! 잡기? 바둑손님 하나 줄었네.""예?""아니, 괜찮아요,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연구를 해야지. 잡기를 하면 쓰나? 하하하…."의미 있는 웃음으로 들리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님과 곧장 바둑을 두시었다.달은 휘영청 밝아 뇌성산(磊城山) 멀리서 부엉이 소리 들리고, 화장실로 나와 바람을 쏘이는데, 교감선생님께서 휘영청 달밤에 학교 운동장을 돌고 계신다. 달밤에 운동이라니? 멋쩍어서 슬며시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태어나고 처음으로 하루 종일 여러 사람을 만났다. 교장, 교감선생님, 교무 주임선생님, 동료 선생님과 낯설면서도 오늘을 맞이하였다. 게다가 눈이 초롱초롱한 쉰한 명의 나의 제자들이 있었다."우리 선생님"이라는 제목으로 낮 시간에 글짓기 한 것을 읽어 보고 있었다. 내용이 거개가 '우리 선생님은 무섭게 생겼다. 우리 이제 다 죽었다. 숨도 못 쉬겠다. 그래도 총각 선생님이다. 우리를 잘 가르쳐 줄 선생님이다.'라는 등 어린아이들이라 진솔하게 저마다 느낀 대로 잘 적고 있었다. 이 작품(?)들을 큰 봉투에 모두 넣어 두고 1년간 한번 가르친 후에 종업식 전날에 다시 글짓기를 할 생각이었다. 이제 잠을 자려고 베개를 베고 누었는데 눈은 따가운데 잠이 오지 않았다.아이들 작문한 것을 읽느라고 잠시 잊고 있었는데 뭔가 나의 귀를 때리는 소리가 이제야 들리기 시작하였다. 다시 누워 잠을 청하는데,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쏴∼아! 처∼얼 석! 쏴∼아! 처∼얼 석!'누워서 가만히 귀대고 들으니 기어이 파도소리가 나에게 들리고 만 것이다. 아! 이곳이 바닷가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륙사람으로 이제껏 이런 파도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쏴∼아! 처∼얼 석! 쏴∼아! 처∼얼 석!'이 소리는 끝없이 들려온다. 마치 때리듯 아프게 들리었다. 누가 이 파도소리를 자꾸 만들어 나의 귀에다가 전달하는가? '쏴∼아! 처∼얼 석! 쏴∼아! 처∼얼 석!'이 소리는 낮 시간에 자연 소음과 바삐 지내느라고 못 들었는데 이제 잠을 자려니까, 사방천지가 조용하니까 이 소리가 계속 들린다.'누가 그랬던가? 바닷가에 가면 사흘이 지나야 파도 소리를 잊어버리고 잠을 잘 수 있다는데'큰일이다. 사흘간이나 곤욕을 치러야 한다 하지 않았든가. 하기는 이 기운을 이용하여 조력발전소도 있지 아니한가.모포항에 정박한 후 파도소리 때문에 첫날밤을 한숨도 못 잤다. 나는 무명교사로 모포항에 잘 정박하였다. 그러나 파도소리를 들어가며 첫날밤을 그냥 지새웠다. 단지 헨리 반다이크(Henry Van Dyke)의 무명교사 예찬론을 낭하였다. 2. 달빛 섞인 풍금소리 ♪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파∼란 하늘 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손∼이 되지요 초록빛 여울물에 두∼발을담그면 물결이 살∼랑 어루만져∼요물결이 살∼랑 어루만져요. 초등학교 음악책에 실린 동요다. 박경종 작사, 이계석 작곡으로 바로 내가 근무하는 교실에서 초록빛 바다가 보이는 교정(校庭)이다. 교실에서 초록빛 바다가 보인다. 나의 보물들이 작은 손, 손바닥으로 손뼉을 치면서 "초록빛 바닷물에"노래를 풍금소리에 맞춰 연신 따라 부른다. 합창이 되었다. 이윽고 학생들이 모두 저네 집으로 돌아가고 사방이 조요하다. 어둠이 내려 악보는 희미하지만 컴컴한 교실에서 나는 달빛 섞인 풍금소리를 손가락으로 자꾸 만들어 내고 있었다.나는 대한민국 초등학교 교사다. 초임에 발령받은 학교는 바닷가다. 1973년 5월 3일, 아니 5월 1일자 발령인데 발령이 난 줄 모르고 있다가 부랴부랴 포항시교육청에 들려 모포초등학교를 찾아가야 했던 것이다. 물론 발령이 나고 큰 지도에서 지명을 찾아도 나오지 않는 작은 마을의 학교 이름이었다.당시 하루 세 번 들어왔다 나가는 '포항-구평'간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내버스는 곧 출발하지 않았다. 출발시간까지 무한대로 기다려야 했다. 무료하였다. 맞은편에'포항시내버스회사'간판이 보였다. 사장님께서 작은 네모난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그 사장님은 포항지역 유지셨다. 마침내 시내 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형산강 검문소를 지난다. 위용을 자랑하는 포항종합제철소 곁을 지나고, 시금치의 고장인 청림을 지나 동해면 해수욕장이 있는 도구에 정차하였다. 이내 비포장도로로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 약전을 거치고, 백토공장이 있는 상정의 희날재 오르막을 지나면 버스도 한꺼번에 오르지 못한다. 기사의 재빠른 변속에도 힘든 하루가 역력하다.산속 외로운 기행을 하면서 상정검문소 앞 오른 쪽으로 틀어 공당을 지나면 내북초등학교가 나타났다가 뒤로 비껴지나간다. 그리곤 냅다 영천 황보씨 집성촌인 구룡포읍 성동을 지나 또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드디어 새바우, 땅고개 옆 공동묘지 앞에서 나는 뒤 차문으로 내렸다.우선 띄엄띄엄 바다가 보인다. 아니 첫인상은 바다가 마치 시골의 큰 못 같았다. 버스는 종착지인 구평리를 향해 또 가야하는 모양이다. 부릉~부르릉 하면서 자동차 뒤꽁무니에 불완전연소가 된 시커먼 연기를 냅다 뿜어 내 주곤 가버렸다.공동묘지에는 무덤 외에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모포초등학교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어 보려고 해도 주변에는 무인지경으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가 답해주랴. 오른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땅고개를 돌아 내려선다. 산속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해풍이 나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었다. 길바닥엔 흙이라고는 모두 파이고, 뾰족 뾰족한 돌이 솟아올랐고, 소나무 뿌리만 앙상하게 추상화마냥 남은 내리막길이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이제 확 트인 항구가 보이면서 길 아래 초록빛 바닷가에 다소곳이 전형적인 시골 초등학교 교사(校舍)가 얌전하게 슬레이트 지붕으로 살포시 자리 잡고 있었다.바로 저곳이구나! '내가 근무 할 곳이구나.'하면서 학교 뒷길을 돌아서 교문 앞으로 찾아 들어갔다. 아! 모포초등학교! 내가 드디어 찾아 왔다. '보리 모(牟)자에 물가 포(浦)자'다. 그 후 그리고 지속적으로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담그고 살았다. 정말 마음에 드는 고장이었다. 쉰한 명 제자가 있는 모포리 95번지 말이다. 초록빛 바다 물가에 살면서 출근길에도 바로 교문앞 바다가 있어서 더욱 좋았다.어떤 이가 나에게 물었다면 '아! 나는 바로 초록빛 바다가 보이는 교정에 근무하고 있으니 한번 놀러 오시라고.'할 참이었다. 정말 첫 초임지인 나의 근무처는'보리가 일찍 핀다.'는'버리꾸지'인 보리항구 모포에 잘 근무하고 있다고 말할 참이다. 3. 대한민국 초등교육을 하다 공식적으로 모포초등학교 제4학년 1반 마흔아홉 명의 담임이 되었다. 즉 3월 1일자 발령이 아니고, 2개월이 지난 5월 1일 자이었다.사실 그 시절 교육대학을 졸업하고도 발령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처가라는 지원서로 다행히 2개월 지나서 바로 발령이 났다. 물론 내가 맡기 전에는 49명에서 이후에 세 명이 전학 와서 또 쉰 두 명이 되었다. 사실상 1반이라는 것은 유명무실했다. 학교 전체가 학년마다 한 반씩 뿐이었다. 여섯 학급 중에서도 내가 맡은 반의 인원이 제일 많았다.학급을 맡으면 그 반의 전력을 알아보아야 한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만나면 먼저 진단부터 하듯이 내가 맡은 학생들의 학습 진단을 하였다. 집단의 실력을 알아보려면 '위계학습이 어떻게 되어 있나'를 알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바로'산수실력'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진단문제지로 진단한 결과 객관식 50문제를 가지고 치른 것인데 100점 만점에 학급평균 25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4지선다에서 확률로 보아 1/4인 25%, 이는 아무 답이든 지정해도 25점은 나온다는 말이다. 난감했다.이제는 국어읽기를 해 보았다. 읽기를 원활하게 읽는 아이가 30%도 안 되었다. 이것도 문제이었다. 도구교과인 국어, 산수과목의 실력이 이러 할진데 4학년의 교육과정을 어떻게 수업할 수 있으랴. 그러나 명색이 4학년까지 올라 온 학생을 어쩔 수 없이 이해가 되던 안 되던 교육과정은 진행하여야 했다.내가 해야 할 교육방법이 참 난감했다. 담임 선생님의 전력도 화려했다. 1학년 담임(여선생님) - 여선생님의 사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반장의 말로는 1학년 수업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2학년 담임 선생님은 교감 선생님이었다. - 당시 편제상 6학급만 있는 단일 학교에서는 교감선생님이 한반의 수업을 담당하여야 했다. 문제는 1학년과 마찬가지로 교감선생님이 수업을 거의 하지 않았고 자습만 하였다고 한다.3학년 담임 선생님은 할아버지 선생이셨다. - 당시 교육과정 운영에서 학습정착 확인이 안 되어 학습효과가 거의 없었으며, 음악은 아예 풍금소리 한 번 못 들어 보았다고 한다.4학년 담임 선생님 - 총각선생님으로 1개월 20일 담임하다가 군대 입대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4학년 2개월이 지난 학생들을 만나 담임을 맡았다.이러한 학급의 전력으로 보아 어떻게 담임으로서 학습지도의 효과를 나타낼 수가 있을 것인가? 정말 암담하였다. 이를 어째, 전연 기초가 자리 잡지를 못했으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오후에 교장실에 들렀다."교장선생님, 우리 학급을 진단 해보니 앞이 캄캄합니다. 제가 제안을 하겠습니다. 낮에는 정규 교육과정을 진행하고, 방과 후에 개인적으로 1학년부터 다시 가르치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교장선생님께서 방법을 알려 주셨다."예, 선생님의 열의에 감사드립니다. 방과 후에 수업을 하되, 그냥 하지 말고, 반드시 학부형의 동의를 받아서 지도하십시오."그 말씀을 들은 후 바로 등사판을 찾아서'방과후 학습동의서'라는 양식을 찍어 학생 편으로 동의서를 보내 보았다. 이튿날 전원 동의서를 제출하였다. 학습능력에 따라 소그룹을 만들어서 1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지도하였다.국어와 산수를 1, 2, 3학년 책으로 소화하였다. 5월말고사에서 꼴찌를 하다가 6월말에 전교 3등을 차지하였다. 상위집단이 하위집단을 지도하고, 중위집단은 내가 직접 지도하였다. 상위그룹이 하위그룹을 끌어 올리고, 중위집단 실력을 올려 주니 7월말 고사에서 2등을 하였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하루아침에 모두가 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실력이 맨 꼴찌에서 성적을 그것도 학년비교를 하게 되니 난감했다. 그래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모포초등학교 4학년 1반의 실력은 지속적으로 향상시킬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렇게 성적이 올라가자 경주시내에 다니던 교장 선생님 딸을 전학시켜 왔다."이 선생님! 우리 딸 좀 잘 가르쳐 주이소."허허허. 이 또한 마음의 짐이 되었다.이리하여 4학년을 마치고 5학년에도 담임을 맡았고, 6학년에도 담임을 하여 연속 3년간 맡아 지도하였다. 중학교 입학시험은 없었지만 반 배치고사라고 시행하였다. 모포초교, 봉산초교, 양포초교, 산서초교, 계원초교, 장기초교 등 면내 6개 학교에서 장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반 배치고사에서 1, 2, 3, 5등을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생이 차지하였다.장기초교 K교감선생님께서 졸업식에 들리셨다."모포초등학교 금년에 누가 6학년 담임을 했습니까? 우리학교가 면소재지에서 그 동안 실력이 인정 되었는데 금년에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따지듯 말씀하셨다. 후문에 장기초교 6학년 담임 선생님 두 분이 모두 교육대학 선배님이셨는데 내 탓(?)때문에 아주 미안스럽게 되고 말았다. 하기는 오늘날 중국에서는 초등학교 담임을 아예 책임제로 하기 위하여 1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담임을 맡아서 철저한 책임제로 한다고 누가 들려주었다.교육은 정말 어렵다. 교육에서 교(敎)자를 파자하여 보면 '자식을 등에 업고서 글을 가르치는 형상'이다. 교육은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교육은 A를 A′가 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교육은 가르치는 자의 정성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야 한다. 고로 교육은 곧 성(誠)이다.내 생애 최초교육을 한 사람으로서 담임을 오래(4·5·6학년 연속 2년 10개월) 맡았으니 제자들에게는 장·단점이 있었겠다. 4. 총각선생 총각선생 하면 남자인 내가 왠지 마음부터 설레 이는가. 물론 내가 총각선생이 아니었던가? 아침에 출근하여 보면 교탁 위에 네 번씩 접은 쪽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나씩 펴보니 난감하였다. 그저 누구의 언니인데 만나 달라는 쪽지이었다.왜 이럴까? 내륙지방에서 자라다가 학교공부만 하고 선생하려 왔는데 사회 환경으로 급격하게 변하다보니 겁부터 덜컥 났다. 상수도가 설치되지 않아서 칠전(모포 2리) 우물로 물 길으려 다니는 모포 1리 처녀들이 학교 앞으로 70 ~ 80여 명이 양동이를 곁에 끼고서 지나 다녔다. 갈 때는 '우로 봐', 돌아 올 때는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서도'좌로 봐'하며 다니곤 하였다.스물여섯에 부모님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바닷가에 선생하려 간다니까 걱정이었다. 혹시 문란한 생활(?)을 할까봐서 걱정이셨다. 제발 조심, 또 조심하여야 한다고 여러 번 타이르셨다.쪽지가 먹히지 않으니까 이제는 내가 하숙하는 방으로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계획적으로 시간대별로 두세 명의 처녀들이 팀을 만들어 들이닥쳤다. 이유는 모두가 있었다. 사실은 어떤 총각이 선생하려 왔는지 관망하러 온 것이었다.저녁 8시, 다음으로 9시, 10시 하물며 11시까지 들이 닥쳤다. 이런 일이 연 일주일째나 파상적으로 공격(?)해댔다. 그래도 처녀들이 오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여름이니까 수박, 포도, 참외 등등 과일이 쌓여갔다. 그것도 모포 1리, 모포 2리(칠전), 대진리, 학계리에서 번갈라 가면서 나를 괴롭게(?) 하였다.문제는 한 여고학생이 있었는데, 방문이유는 책 빌리러 온다는 핑계였다. 그런데 난감한 적이 있었다. 앞방에는 선배님이 하숙을 하고, 뒷방에는 내가 하숙하였으며, 주인댁은 큰방이고, 큰방과 나의 하숙방 사이에는 마루가 놓여 있었다. 이 여고생이 방에 들어오면 꼭 방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급히 방문을 열어젖히고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문지방 사이에 삼각형 나무를 고아 두었다. 어느 샌가 방문을 또 닫았다. 방문 닫고 열기를 반복하여서 자꾸 시간이 흘러갔다. 책을 빌려서 곧장 가는 게 아니라 아예 들어 누워서 책을 보는 척 하기도 하였다. 저만치 떨어져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오지 않았다.나흘째 되던 날 빌려간 공무원시험 대비용 수학문제집을 들고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 찾아 왔다. 여름철 소낙비가 한창 오던 날이었다. 우레와 번개가 번갈라 쳤으며 비가 내리퍼붓고 있었다. 책을 들고 들어오는데,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교복을 입었는데 비를 흠뻑 맞아 윗몸이 젖어 있었다."아니 이를 어째! 학생, 책은 그 곳에 두고 가지요."그러자 책을 던져두고 휭 나가 버렸다. 아니 우리 집에 형님 넷, 누나 다섯이 있었지만, 모두가 연배가 차이나서 시집, 장가 모두 가버리고 나는 학창시절을 외딴 집에서 홀로 보냈다. 그래서 다른 여학생을 볼 겨를도, 그런 생각(?)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며칠간 조용해졌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처녀들의 방문이 조용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에 선배님의 제안이 있었다."건너 마을에서 이 선생 고향에 놀러 가자는데."고 하셨다. 내 고향이 경주 불국사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자랑도 할 겸 경주여행을 하자고 먼저 말하고 싶었다. 게다가 처녀 3명과 선배, 나, 남자 사진사 등 여섯 명이 버스를 타고 경주를 향했다. 우선 경주시내에 방 2개를 얻어 놓고 시내관광을 하고 삼겹살에 소주와 맥주까지 걸쳤다. 술을 조금 과하게 마셨다. 어둠을 맞이하여 반월성에서 야경 본다는 핑계로 헤매다가 어떻게 돌아와 잠이 들었는지 모두가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A아가씨와 남자 사진사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참 괘이(?)하다고 생각하였다. 남아있던 네 사람은 이튿날 불국사를 향했다. 구경 한 번 잘하고 모두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 와서도 찜찜하였다.문제가 발생하여 못내 걱정이었다. 그 두 분은 어디로 가셨을까? 아니나 다를까 월요일 교실에서 한창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교무주임이 교실을 찾아 왔다. 장기지서에서 조사한다고 수업 마치고 숙직실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보니 순경 두 분이 벌써 대기하고 있었다."고향 구경을 잘 하고 왔소?""그렇습니다만….""이 사건에 대하여 경위를 말씀하시오."우리들이 함께한 두 분들이 사라진 것을 그대로 설명을 하였다. 그런데"내가 무슨 잘못을 조장하였나?"고 하니까,"알았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하고 가 버렸다. 아주 싱겁게 끝나버렸다. 사라진 사람을 내가 뭐 어찌 하라고 싶었다.'아! 부모님께서 이러한 것을 걱정하셨구나. 큰일 날 뻔 했다.'고 속으로 자성하면서도 더욱 총각선생이기에 고뇌에 빠졌다. 이런 사건으로 차후에 교장·교감선생님도 알고 계셨고, 또한 동료 선생들도 모두 알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에게 별다른 혐의가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이 선생! 토·일요일 당직이 되거든 나에게 부탁 하이소."경남 진영에서 오신 B선생님이 나에게 그것도 간곡히 말씀하셨다. 아!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그리고 이후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그리고 B선생님 왈,"여기 처가를 두지 않으려거든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예?"바닷가 총각 선생으로는 고뇌가 참 많았다. 나는 낙찰계를 들어 그 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대구 아가씨와 결혼하였다. 그날이 1974년 4월 20일이었다. 발령 받은 지 꼭 1년 만이었다.집에 내자가 있으니까 이후로 처녀들이 오지 않았다. 참 행복한 고민(?) 한 가지가 해결 되어 버렸다. 5. 과메기 1974학년도 적령취학아동 조사가 실시되었다. 적령조사는 면사무소에서 통지가 온 자료를 들고 현장 확인을 하러 가는 것이다. 바닷바람이 부는 아직 덜 풀린 겨울 2월 말이었다. 마침 선배님과 한 조가 되어 대진리로 향했다.할아버지 혼자 댁에서 이엉을 엮고 계셨다."할아버지 안녕하십니까? 댁의 손자가 이번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뵈었습니다.""아!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들이 오실 줄 알았습니다. 우선 누추하지만 앉으시지요. 내 안주 장만해 올 테니 막걸리라도 한 잔 하고 가이소."선배님은 이엉 엮는 옆의 지푸라기 모인 쪽으로 자연스레 자리를 만들어 앉고 만다. 내가 주춤거리고 있으려니까 같이 앉으라고 해서 나도 앉고 말았다. 할아버지께서 왼손에 주전자 위로 잔 두 개와 오른 손에 생선을 엮은 꾸러미를 들고 나오셨다."바닷가라서 특별한 것은 없고, 이것하고 안주하면 좋습니다."나는 내륙지방에만 살아서 생선이름도 잘 몰랐다. 그러자 선배님은 숙달된 모습을 보이었다."할아버지 한 잔 하이소. 이 안주 참 좋고말고요."그리고 할아버지 한 잔, 선배님 한 잔씩을 하셨다. 그리고서는 이내"이선생도 한 잔 하이소.""저는 아직 술을 못 배워서 못합니다.""허허, 술 배워서 먹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마아 마시면 되지요. 자! 한 잔 받으시오."나도 얼떨결에 술잔을 받아 놓고 끝내 마시지는 못했다. 선배님은 자연스레 고기를 직접 찢어서 껍데기를 떼어 내고 잘도 잡숫기 시작하였다. '아니, 이런! 이것은 생고기잖아. 저걸 어떻게 먹어. 심지어 머리 쪽엔 붉어 죽죽한 피가 흐르잖아.'어느 샌가 선배님이 모두 찢어서 안주 삼아, 심심풀이 삼아 모두 잡수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할아버지께서는 또 한 꾸러미를 더 갖다 주셨다.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저 생선 이름이 무엇인데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선배님 혼자 그렇게 잘 잡숫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학교로 돌아 나오면서,"아니 선배님, 그 생선이 그렇게 맛이 있습니까? 도대체 생선이름이 무엇인데 그렇게 맛이 있습니까?""아니 그렇게 맛있는 생선을 왜 안 먹어요?"오히려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선배님은 되물었다."정말 생선이름이 뭔데요?"하니까 그때서야,"과메기라고 해요."그래도 나는 몰랐다. 과메기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맛있게 드시는지 무척 궁금했다.선배님이 자연산 과메기를 만드는 법을 설명하여 주셨다. 과메기는 본래 청어를 잡아서 하는데 요즘은 청어가 귀해 꽁치를 잡아서 만든다. 눈 온 밭에다가 흩어 두었다가 어느 정도 피득 해지면 한 꾸러미에 스무 마리씩 짚으로 엮어서 말리는 곳은 반드시 해풍이 부는 그늘에다 말려야 한다고 했다.방금 먹은 과메기가 그런 절차를 밟아서 만든 오리지널 과메기이기에 혼자서 두 꾸러미, 당당히 40마리를 먹어도 괜찮은 것이라고 했다. 먹을 때 손으로 찢어서 껍데기를 벗기고 쫀득한 고기를 먹는데 아까처럼 머리에 피가 보여도 안주로는 과메기가 최고라고 일러 주셨다. 과메기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소화에 걱정 없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선배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십니까?""저런! 이 선생보다 일찍 바닷가에 발령을 받아 생활하다 보니까 잘 알게 되었지. 그리고 내 전임지가 석병초등학교 이었거든."정말 듣고 보니 그렇게 한꺼번에 마흔 마리를 혼자 모두 잡수셔도 괜찮은가 보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좋은 안주를 혼자 다 잡수신 것이 아닌가. 나는 아깝게도 그 때 단 한 마리도 못 먹었다. 아니 안 먹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 과메기를 잘 먹지만, 그 때는 천연 그대로 우리 조상들이 만든 현명한 안주를 못 먹은 것이 못내 아쉽다.학부형 중에 대진리에 사시는 K씨가 있다. 학교를 파하고 나면 자주 나오셔서 우리를 만나고 하셨다."어이, 이 선생 막걸리 한 잔 어때?""그럽시다. 술을 잘 못해도 한 잔은 합니다."모포 칠전에 오직 한 집 있는 술집에 들러 막걸리를 마시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막걸리 말고 맥주 마시자고 해서 또 섞어 마시기 시작한다. 그러자 교감선생님, 총각 선배님, 교무주임님, 할아버지 선생님, 경리선생님 등 차례로 모여들기 시작해서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왕 사발에 놓인 술을 마시지 못했다. 그러자 교감선생님 왈,"이 선생 술 마셔.""저 술 못 먹습니다.""아니, 이 선생 물은 마실 줄 알제?""예, 물은 마십니다.""됐어, 그러면 물마시듯이 그냥 마시면 되는 거라. 자아~ 자! 한 잔들 합시다."그리고 못 먹는 술에 많은 양을 들이부었으니 내 몸이 견딜 수 없었다. 키 163Cm에 몸무게 49Kg, 호리호리하다 못해 바짝 말랐었다. 게다가 4년간 자취하고, 못 먹어서 비실이었는데 술을 과음하였으니 선배님 두 분께서 하숙방에 나를 데려다 뉘어 주었다.도저히 이래서는 근무를 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출근해서 출석부를 부르는데 자꾸만 출석부 학생명단이 오르락내리락 해서 반장에게 물었다."반장, 출석부가 왜 이리 자꾸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느냐?""쌤요! 출석부가 그런기 아이고요, 쌤이 자꾸 몸을 아래위로 흔드네요."하하, 뭔가 잘못 되었구나. 자습을 시키고서는 책상에 엎디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곤 며칠간 술자리에 앉기도 싫었다. 그러나 어찌 전체 일곱 명 중에 교장 선생님 빠지고, 여섯 명자리에 빠질 수가 있으랴.이건 나의 운명이다. 선생을 하려면 아니 조직에 속하려면 술을 배워야 하겠다. 술을 배워야지. 그래야 모포 과메기도 먹지. 멀지 않아 장대한 꿈(?)인 술 배우기가 곧 시작 될 것이다. 6. 술 처음 배우다 모포초등학교에 선생으로 생전 처음 근무하면서 몇 번인가 술자리에서 다운되어 끌려오다시피 하숙방에 쳐 박히고서는 오로지 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자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술과 담배가 아니던가? 담배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 배웠다. 그것도 중 2학년 때 선배로부터 "새마을"이라는 이름의 담배를 하루에 2갑씩 한 달간을 피우다가 아무런 재미(?)도 못 느껴 그 때부터 담배는 일찍 끊어 버렸다.그런데 술은 배워서 배운 게 아니라 배가 고파서, 술 사오는 심부름을 하면서 주전자꼭지를 통하여 빨아 먹었던 게 시작이기는 하다. 배가 고파 술을, 막걸리 5∼6도 술을 한참 빨아 먹다가 덜컥 겁이 났다.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보니까 제법 쑥 내려갔다. 엉겁결에 도랑물을 손으로 퍼 담아 아버지께 갖다 드렸더니 아버지 왈 그날따라'오늘 술맛이 와 이러노?'해서 하늘이 노랜 후로는 다시는 주전자꼭지로 술을 빨아먹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때 하도 배가 고파서 술 찌게미를 아침부터 먹고 학교에 갔다가 술에 취해 담임 선생님께 꾸중들은 적도 있다.사실은 젊어서 그랬지. 한꺼번에 술을 먹고 폭주로 다운된 것이 아닐까? 나도 술에 대하여서는 아버지의 유전자가 조금은 있지 싶다. 아버지는 반농반목수하시면서 새참으로 집에서 담근 동동주를 시작하여 나중에는 밀주금지로 인하여 막걸리를 사다 드셨다. 연세가 드셔서는 소주를 잡숫게 되었는데, 하루는 아랫동네서 한 자리에서 소주 한 되를 혼자 다 잡숫고 나서 목에 피를 올리고는 술을 끊으셨다. 그 때 연세가 꼭 일흔이셨다. 이러한 유전자가 있는 내가 술을 옳게 배우지 못해서 못 먹었지. 잘 배우면 넉넉히 먹을 수 있을 것으로 나도 모르게 추측하게 되었다.도대체 누구에게 술을 배운다 말인가? 참 난감하였다. 학교에 발령받고 나서 일찍 하숙집으로 왔다."아주머니, 혹시 술을 어떻게 먹어야 잘 먹을 수 있는지 아십니까?""아이 고오. 이 선생 술 잘 못 드시는 구나. 그래. 술 잘 취하면 안 되는 데 우야꼬. 그래도 남자 선생이면 한 잔은 할 수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내가 술 먹는 법은 쪼금 알기는 하는데. 그래 한 번 배워 보겠닝교? 사실은 술을 먹는 게 아니고, 이기는 것이라야 한다 아닝교?""그러면 우야면 되는 데요?""그래요. 그라면 돈부터 내이소. 술 사와야 술 자시는 방법을 배우 제.""그렇습니까. 여기… 돈이."바로 하숙집 아주머니께서 곧장 술도가에 가셔서 술을 사 오셨다. 당시 칠전에 유명한 술도가가 있었다. 칠전에 유명한 우물이 있어 막걸리도 그렇게 술맛이 좋은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게다가 술도가 주인집이 바로 하숙집 옆집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드디어 아주머니께서 술을 사 오셨다. 그것도 두 되짜리 주전자 가득히 막걸리가 차 있었다. 소반에 김치 한 쪽하고 숟가락 한 개, 왕사발이 놓였다. 있어야 할 술잔이 안 보였다."아주머니 술잔은 왜 없습니까?""그래 예. 오늘은 술잔이 필요 없심더. 아따 술을 처음 배우시는 분이 의문도 많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요.""예~? 예."그리고서는 왕 사발에 막걸리를 부어 놓고 숟가락으로 술을 한 숟갈 떴다."애걔, 이게 무에요. 제가 아무리 술이 약하더라도 이건 아닌데.""아이~고오. 마아~!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구만은."왕사발의 술을 숟가락으로 퍼서 맛보라는 것이다. 즉 술 사부님께서 아시는 비법이란다. 그래서 숟가락으로 한 숟갈을 퍼 올렸다. 그 한 숟갈이 왜 그리도 독한지. 이제 두 숟갈 째 퍼 올렸다. 이제 술의 도수가 더해지는 듯 혀끝에 술맛이 느껴진다. 이리하여 열 숟가락을 퍼 올리니깐 이제 나에게도 취기(?)가 올랐다.술 사부 왈,"고만, 오늘은 됐심니더. 여기까집니더. 이제 마아~ 그만 잡수시소."'예? 그만 먹으라고요?'"예에, 이제 됐심더."차린 술상을 그만 들고 나가버리신다. 아니 차려온 술상을 열 숟가락 퍼 먹었다고 뺏어 가버리시다니. 한편 황당하였다. 그래도 그 열 숟갈의 술기운이 오래 몸에 남아서 그저 몽롱하여 왔다. 아무 소리 못하고 오늘 익힌 술 마시는 법을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베개를 내어 놓고 담요를 덮고 잠깐 사이에 잠이 들고 말았다.아버지를 만났다. '얘야! 막내야! 술을 배우려거든 제대로 배워야지. 그리고 사내라면 술을 먹고 이겨야지. 그리 약하냐?'홀연히 아버지 꾸중을 들으며, 저녁 먹으라는 주인아주머니의 소리에 잠을 깼다.또 날이 밝았고, 하숙집에 돌아오니까 다시 술 배우는 세리머니가 시작 되었다. 이제는 술상에 작은 종지기가 놓였다. 종지기 술잔으로 다섯 잔을 먹으니 또 들고 나가신다.다음 날에는 종지기에 열 잔, 또 그 다음날엔 종지기로 열다섯 잔, 그리고 그 다음날에 드디어 작은 사발이 놓이고 본격적인 술을 먹기 시작하였다. 자! 이러고 나니 일취월장 술 실력이 막강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즉 드디어 술을 먹고 이기는 노하우를 터득하고야 말았다.그리고 팁으로 절대로 빨리 마시지 말고, 이야기를 크게 떠들면서 신나게 하면서, 손도 조금 흔들고, 천천히 그리고 취기가 오면 모른 척하고 생수를 갖다 놓고 그것도 몰래 자주 생수를 마시면 술을 이기는 비법이 된다고 일러 주셨다. 정말 술 사부님께서는 철두철미 하셨다.한 가지 더 있었다. 성질이 조금 급한 편이라서 술잔을 보면 바로 마셔 버리는데 빨리 취하지 않는 법은 상대방이 소주잔을 세 번 비울 때, 나는 한 잔을 먹게 되면 덜 취한다는 것이다. 특히 상대방이 석 잔 마신 후부터는 같이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편이 먼저 술을 채운 후에 한 박자 느리게 내가 시작한다는 것이다.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이후 술 마실 일이 있으면 이것을 원칙으로 삼고 멋지게 술 먹고 이기는 것을 자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시 술은 못 먹었고, 못 이겼는데 이후는 정말로 감쪽같이 술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술 마시는 법을 모포에서 배운 후인 것이다. 7. 백합과 황놀래기 선생을 하면서 이런 묘함이 또 어디 있었겠는가? 1973년 모포초등학교의 여름날이었다. 체육수업은 오전수업만 하는 수요일 3∼4교시로 연속수업이다. 교육과정을 잘 지킨다고 먼지 나는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고 있었다. 체육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서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다른 선생님들은 자주 지적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자니 교장선생님이 자연히 전교 체육시간표를 체크하실 수밖에 없었다. 내 딴에는 교장선생님께서 혹 보는 중이라서 교육과정대로 철저히 지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 발령 받아 와서는 그런 것이 아닌가 보다. 먼지가 날리는 여름날 운동장에서 땀 흘리는 우리 반 아이들을 바라보시면서 측은해 하셨던지 한 말씀 하셨다."이 선생! 더운 여름날에 아이들을 먼지 속에서 고생시키는구먼.""예? 저는 교육과정을 지키느라고 합니다마는….""그래. 그게 아니고. 내 이 선생 철두철미 하는 것 잘 알지. 그래도 많이 덥잖아, 마아 아이들 바다에 집어넣어라 카이.""예? 교장선생님! 바다에는 위험하고, 그리고 교육과정하곤 안 맞고, 저는 수영도 못하는데 괜찮겠습니까?""허어, 이 선생 여기 아이들은 태어나자말자 걸음마만 하면 바다에 들어가 살고 있구먼, 걱정 붙들어 매고, 바다에 집어넣어 봐!""예? 예."나는 정말 반신반의하고 바닷가로 데려갔다. 바다라야 교문에서 10m도 채 안 되는 곳이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는 데 반신반의하고 큰맘 먹고 일단 교문을 벗어나 칠전 앞 바다가로 갔다.오늘은 바다에서 수구한다고 발표를 하자 일제히 학생들이 즐거운 환호성을 냅다 지른다. 내륙지방에만 살다 왔기 때문에 나는 겁이 더럭 났다. 시퍼런 바닷물에 아이들을 집어넣다니 내가 무슨 큰일을 내려는 것이 아닌가? 정말 가슴이 두 근반 세 근반 하였다.수구에 대한 기초를 일러두고 상대편을 정하였다. 나는 바다 물만 보고도 겁이 나서 들어가지도 못했다. 웬걸 준비체조도 끝나기 전에 우~루~루 남학생들부터 바다물속으로 마구 들어가는 것이다. 반장이 주축이 되어 남녀 학생들이 반반으로 수구를 시작하였다. 나는 정말 신기하였다. 그 시퍼런 바닷물에 마구 뛰어 들어가다니.약 30분이 지나자 이제는 지친 모양이다. 아이들이 한 둘씩 바다 물속에서 나오지도 안하고 곧추서기 시작하더니만 몸을 뱅글뱅글 돌리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52명 모두가 곧추서서 뱅글뱅글 춤을 추다니 말이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 본다면 남녀학생들이 마스게임 하는 꽃송이가 아니던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 나를 향해 팔매질을 시작하였다.(아니 이런! 이놈들이 감히 나에게 돌팔매질을 하다니? 아니 내가 선생이면서 바다에 같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이러나?) 그런데 나를 향해 자꾸 날려 보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합조개이었던 것이다. 쉰 두 명이 한 개씩 던져도 52개요, 2개씩 던지면 104개 이었다. 이제 반장이 양동이 2개를 들고 와서 가득 담았다. 곧장 학교 수돗가로 가져왔다.고용원 아저씨가 눈치 빠르게 말을 걸었다."아이고 선생님 오늘 큰 수입 잡았구마는요. 어떻게 제가 도와 드릴까요?""예. 저는 어떻게 장만하는지도 모릅니다. 좀 도와주십시오.""예. 제가 모두 장만하겠습니다. 염려 놓으소."고맙게도 양푼 이를 가져오고, 망치로 백합을 깨니 싯누런 백합이 쏟아져 나왔다. 흐르는 수돗물에 모래를 씻고 모으니 큰 그릇으로 몇 그릇이 나왔다. 물론 교장선생님 댁에도 보내 드렸다. 숙직실에서 도시락을 열어 두고 고추장에 싯누렇고 싱싱한 백합조개를 마음껏 먹었다. 정말 체육시간이 살아 있는 시간이 되었다. 모포의 백합은 지금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때서야 그저 교장선생님의 충고가 고마울 뿐이었다.또 하루는 자유학습의 날에 자연보호 겸 마을청소를 나섰다. 모포1리 바닷가로 집들이 죽 연이은 마을 앞길을 선택하였다. 늦은 오후가 되자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진 갯가로 갔다. 바닷가 아이들이라 그런지 바로 갯가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조개와 물고기를 잡아 올렸다. 저만치 학부형들이 해초와 조개를 캐고 있었다. 특히 발이 빠른 L군이 어디에 가서 벌써 고기 낚을 바늘을 구하고 지렁이를 미끼로 놀래기를 낚는다. 저 멀리 동남수산 통통배가 만선이었는지 동그란 연기를 퐁퐁 뿜어 유선을 그리고 항구로 들어온다. 바닷가 체험은 시간이 잘도 흘러간다. 조개를 줍고 몇몇 아이들이 낚시도 하고, 바람에 밀려 나온 미역도 주어며 해조류를 모아들고 나온다.바닷가 낚시에 재미를 붙인 학동은 벌써 꽤나 잡아서인지 여남은 마리가 되었다."이 고기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쌤에. 황놀래기라고 하는데요?""황놀래기? 그 참 이름도 좋네. 그런데 이것 먹어도 되나?""쌤에. 그냥 회로 먹는 것은 괜찮다고 하데 예.""그래. 그러면 다른 선생님이 계실 텐데 숙직실로 가져가야겠다.""마아 그라이소."우리아이들은 마음도 좋네. 지가 잡아서 집에 가져가지 않고 고기 이름도 모르는 선생님에게 주다니 말이다. 잡은 고기 중에 정말 큰 고기도 있었다. 이를 바로 숙직실로 가져와서 고용원 아저씨에게 드리니 곧장 회를 치기 시작하였다."자아! 선생님 이리 오십시오. 오늘 황놀래기 회 시식 좀 하시지요?"그러자 여러 선생님께서 오셔서 황놀래기 회를 맛보기 시작하였다. 이 또한 즉시 잡아서 그런지 정말 쫄깃하고 맛있는 일미의 회가 되었다. 바닷가 발령을 정말로 잘 받아왔다고 생각하였다. 이 또한 바닷가에서 선생을 하면서 느끼는 묘미가 아닌가?자유학습을 마치고 재미를 더하여 모포 1리로 죽이어 걸어가니까 나무화석이 있었다. 모포는 지형이 특이해서 나무가 화석이 된 흔적이 많이 나타났다. 8. 나무화석 모포초등학교에서 1973년 첫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한 학기 학사업무를 정리하느라 바쁜데, 우리 반 아이 둘이 느닷없이 학교에 찾아왔다."쌤에! 오늘 바쁜 교?"왜? 정리할 것도 많고, 바쁘지. 뭐하려고? 집에서 공부하거나 부모님 일 좀 도와 드리지 않고. 무엇하러 나왔을까?""쌤에! 여기 모포는 나무화석이 많이 발견 됩니더. 지가 알고 있는 곳으로 한번 가 보입시더. 찾으면 쌤께 선물 하겠심더.""그래? 진짜 있을라고. 이제 조금만 정리하면 다 되었다. 그러면 우리 어디 속는 셈치고 한 번 가 볼까.""아이고, 마아 쌤요. 절대 안 속심니더.오고가는 제자와 하는 대화에 이상하리만치 의심도 의구심도 없이 그저 농조로 선생과 학생간의 웃음 끼 있는 농이었다.그러면 나무화석은 무엇인가? 나무화석은 광물들이 나무들의 빈틈을 채워 나무의 조직과 모양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지하수 속 이산화규소(Sio2)가 나무의 조직으로 치환되기 때문에 규소의 규(硅)자를 써서 규화목(Silicified Wood)이라고 한다. 외국에서는 미국에 아리조나주에 위치한 홀브록 근처의 화석림으로 직경 2m, 길이 20m에 달하는 규화목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한다. 우리나라는 평양부근에 발달한 중생대 주라기 초기지층에서 발견되었으며, 포항지역의 제3기 장기층군의 응회암촌에서 발견되기도 한다고 한다.이제 나무화석에 대하여 알아보았으니 리어카와 곡괭이를 빌려서 모포 1리 땅고개 쪽으로 비포장도로를 올라갔다. 그저 덜컹덜컹 거리는 리어카만 몰고 올라가려니 심심했다. 그리고 도로만 난 곳으로부터 산모롱이를 돌려니 뭔가 섬뜩했다."얘들아 나무화석이 어디에 있을까? 마아 없다. 그만 집에 가자.""아이니더. 조금만 더 올라 가 보입시더. 제가 봐 둔 게 있심더."그래도 굽히지 않고 나에게 나무화석을 보여 주겠다고 세우니 할 수 없이 자꾸 먼지 나는 비포장 길로 비틀거리면서도 덜컹거리는 리어카만 끌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가니 흡사 나무 같은데 딱딱한 것이 나무화석이다. 분명 나무화석이었다."얘들아! 진짜 나무화석 맞네?""예에. 보이 소 있다 안 합디까?"마치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한 것처럼 기쁜 것이었다."심봤다!""쌤요! 그래 좋은 교?""그래. 아무것도 못 찾다가 발견하니까 안 그러나."땀을 뻘뻘 흘리면서 상당히 깊게 괭이로 캐내어 보니 직경 70Cm에 높이 50Cm는 족히 되는 것이라. 정말 말로만 듣던 나무화석을 발견하고서는 꾀나 기뻤다. 그리고 둘레에 나뭇잎화석 몇 개도 덩달아 주웠다.얼른 리어카에 실어서 내 교실 복도에 갖다 두고 학습 자료로 쓸 생각을 하였다. 나뭇잎이 박혀있는 화석은 작아서 몇 개를 하숙집에 갖다 두었다. 나무화석을 우리 반 교실입구 복도에 갖다 두었더니 자연히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묵묵히 두고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복도에 이게 무엇이고 하면서 나무인줄 알고 들어 보려고 하다가 무거우니까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그리고는 꽤 시간이 흘렀다. 2학기가 시작 되고서 장학지도차 군장학사님이 오셨다. 분명 장학사님은 그것이 귀하고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신 모양이시다. 장학사님이 학교를 나서실 때 나를 데리고 나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이 선생 그 복도에 나무화석 날 주면 안 되겠나? 날 주시려니까 사실 많이 아깝겠지요? 혹시 나에게 줄 생각이 있거든 좀 갖다 주실래요.""예? 예."나도 모르게 긴가 민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장학사님께서 새집을 꾸미시는데 마당이 텅 비어 있어 나무화석이 장식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나는 한동안 고민을 하였다. 생각을 골똘히도 해 보았다. 교번 끝번인 학교에 발령이 나서 1년 만에 장학사님이 탐이 나는 물건을 내가 가지고 있어서 요청이 들어 왔으니 돈도 아닌 나무화석으로 장학사님과 연결이 될 수 있을까? 혹시 인사부탁도 할 수 있거나 높은 분을 알고 있다면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번쩍 스쳐 지나갔다.한참을 지나 스산한 바람이 불고 겨울이 들어 인사철이 가까워 오면서 나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모포의 명물을 갖다 드리자고 결정을 하였다. 나무화석을 시내버스에 싣고 시내에 가서 택시에다 또 실어서 기어이 갖다 드리고 말았다.정말 이게 아닌데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나도 모르게 마치 무슨 종교에 홀린 듯, 뭐에 정신이 빼앗긴 듯 정말 갖다 드리고 만 것이다. 이후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장학사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저 모포의 명물인 나무화석을 갖고 싶어 하시는 분에게 드려서 묻혀있는 옥을 빛나게만 만들어 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나뭇잎화석은 목공예를 하시는 장인께 3개를 갖다 드렸는데'이것 신기한 물건이네, 잘 가져 왔구나.'하시면서 나무 받침을 만들고, 받침에 니스를 칠해서 멋진 나뭇잎화석을 작품으로 변신시켜 주셨다. 지금도 방에 두고두고 바라보신다.정말 모포에서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모포에서 발견한 그 나무화석을 내가 보관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포항 어느 댁 마당에 떡 버티고 앉아 있을 모포의 나무화석이 간혹 생각이 난다. 그저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하는 일들이다. 9. 후릿그물 매일 4학년 1반 교실에서 아이들과 씨름만 하다가 밤이면 술과 싸움을 하니 정신이 얼얼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해도 어찌 그리도 학교가 파하면 곧장 술집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학교가 파하면 교감선생님을 따라 함께 모여야 하는 줄만 알았다. 교감선생님께서 대구 S초등학교에 근무 하시다가 촌으로 발령을 받아 왔다. 낙향이라 생각하니 오로지 술을 낙으로 생각하셨다. 동료교사들도 덩달아 아무 좌표도 없이 그저 교감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약주를 같이 마셔 없애버리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이런 삶에서 헤어나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 고장을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다. 오늘은 이 고장 모포에 대하여 좀 알아보자. 크게 보면 이 지역의 경제·사회·문화나 지역의 특성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모포를 빨리 알 수 없을까 고민해 보았다. 그저 훌쩍 교정을 나와 보자고 생각했다. 칠전 쪽에서 '어~샤! 어~샤!'하는 군중의 함성이 우렁차게 들리었다. 자꾸 그 소리에 끌리어 칠전 쪽으로 나도 모르게 걸어갔다.모포 뒷산은 돌무더기가 솟아서 그런지 이름조차 뇌성산(磊城山, 혹은 봉화산)이다. 그리고 아래에 바다는 푸르다 못해 흰색을 띤 바닷물이 흰 포말을 휘날리고 있다. 자꾸만 아까 그 소리가 들리고 저절로 발길이 그 쪽으로 따라만 갔다. 아니 그곳에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무엇하고 있는 것일까."아이고! 이 선상님 아잉 교?""예에. 이장님! 지금 이 시간에 무엇하고 계십니까?""예에. 후릿그물 안합니까.""후릿그물이 뭡니까?""에∼? 꼭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우리 선상님이 빨리 알아들을 난가. 몰라? 마아 쉽게 말해서 그물을 바다에 던져두고, 양쪽 끝줄을 오므려 당겨 고기를 잡는 전통 어뻡(漁法)이지요.""아∼! 예. 잘 알았습니다."사실은 내가 내륙사람으로 그것도 발령 받아와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전통 어법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기는 6학년 교실 뒷벽 위에 고기잡이하는 그물의 종류 그림을 언뜻 보기는 한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저 아는 척 대답을 하고 만 것이다.이런 설명을 하는 사이에 동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아이들까지 모두가 달려들어 후릿그물 작업을 하였다."어기어차! 어∼영차. 어기어차! 어∼영차!"이 소리에 따라 그물이 조금씩, 조금씩 자꾸 뭍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연자방앗간을 차리듯 그물을 감아올리는 나무틀이 있고 뭍에서는 네 군데 손잡이에 나온 나무막대를 잡고 여럿이 붙어서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천천히 그물이 땅으로 몰아 올라오고 있었다.우리 조상들의 진짜로 현명한 고기 잡는 방법이 여기에 있었다. 그물과 이 나무틀을 설치하신 동장님이나 그저 구경하는 나까지도 신이 났다. 그 그물 속에서는 이름도 모를 다양한 잡어가 가득 차 있었다. 이마엔 땀이 나고 숨이 차드라도 잡혀 오는 고기가 있으니 더욱 '어기여차! 어~영차!'로 소리 높여 힘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시만 해도 먹고 살기가 힘들었는데 하루 한 번 이렇게 해서라도 고기를 잡고, 또 공동으로 나누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두레'이다. 우리 조상님들의 현명한 삶의 방법인 것이다. 내가 올라오는 그물에 정신을 팔리고, 함께 부르는 구령 소리에 심취해서 저절로 끄덕이고, 흥얼거리고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선생님 여! 뭐 하시닝교, 퍼떡 그릇 안 가져 오시고요?""그릇 없는데요?""그라면 됐심더.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나중에 가지고 가이소."이장님은 삽으로 구덩이를 '쓱쓱'두 번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서 잡어를 한 양동이 갖다 부어버렸다. 고기와 함께 온 바닷물이 금방 모래사이로 빠지고 고기만 파닥거렸다.후릿그물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한 양동이씩 퍼 담아 주는 것이 그 당시 인심이었지 싶다. 바닷가 모래바닥에는 저마다 집에 있던 형형색색의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총 동원되어 대기 중이었다. 이 또한 장관이었다. 이 어찌 내륙지방에서만 살다 온 백면서생이 이런 장면연출에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이렇게 잡은 고기는 저녁에 집으로 가지고 가서 온갖 방법인 반찬으로, 회로 밥상 위에 오를 것이다. 그러면 살기가 어려워도 오늘의 후릿그물은 기억에 영원할 것이다. 바닷가에 발령을 받고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니던가?다음에 연락이 왔는데도 나는 그냥 물동이만 들고 나가기가 민망해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저녁이었다. 그날도 후릿그물을 한 날이었는가 보다. 이장님께서 우리 집으로 직접 오셨다."오늘 왜 후릿그물 한다고 했는데 안 나오셨닝 교?""아이고. 한 번 구경했으면 됐지 예.""선생님이 안 나오셔서 직접 고기 가져 왔심 데. 퍼떡 그릇 주이소."겸연쩍게 내어 놓은 우리 집 양동이에 한 가득 부어 주시고서 한 말씀하셨다."우리 모포 고기 맛있게 드시소."아니 이런 정말 황송하고,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나는 속으로'이장님 고맙습니데이. 모포가 최곱니다. 모포가 아니고서는 이런 후한 인심이 어디 있을라고.'후릿그물 고마움에 그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10. 학교운동장에서 순회영화 상영 1970년대만 하여도 우리나라는 사는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모포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숙직을 할 때마다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숙직을 한다고 당직실인 숙직실로 가면 그것도 해가 지고 어둑해 지려면 숙직실에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다. 이게 왜 이럴까? 도대체 누가 숙직실에 불을 켜는가? 정말 놀랄 일이었다. 아니 숙직실엔 내가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가까이 사시는 동네 분들이 숙직실을 차지하고 모두가 무언가에 심취해 있었다. 모두가 TV를 보고 계셨다. 텔레비전이 잘 없었던 시대였다. 그것도 커다란 진공관텔레비전인데 흑백이었다. 그래도'웃으면 복이 와요'라든가, '연속극 여로'에 푹 빠져서 매일 오시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개그'나'코미디'같은 용어도 잘 쓰이지 않던 시대였다. 달리 문화미디어가 없던 시대라 학교 자료용 텔레비전에 톡톡히 맛을 들이고 있었다. 한번 숙직실에 자리를 하면 소변이 마려워도 자리 때문에 일어 나오시지를 않았다. TV가 끝 날 때인 애국가가 나와야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시대이었다.어느 날 대구 TH영화사에서 영화 순회공연이 있다고 교무실에 찾아 왔다. 넓은 터가 없어서 학교운동장을 빌려야 한다고 했다. 교장선생님께서 당직인 나에게 운동장을 빌려 드리라고 지시를 하셨다. 영화 순회공연회사 담당자와 만났다.운동장 사용료도 없이 마치고는 청소를 잘해 주는 조건으로 장소를 제공하여 주었다. 초청장이라면서 처음에 입장권 10장을 주셨다. 10장에 덤으로, 20장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 계시는 선생님께는 2장씩을 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평소 알고 있는 학부형, 학교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학부형, 초소 순경 두 분께도 표를 드렸다.학교가 파하고 나서 산그늘이 지고, 어둠살이가 오는 저녁이 되자 대형 스피커를 통해 오늘 저녁 모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는 멘트가 나가고 이어서 유행가가 든 LP판에서 요란스러운 대중가요인 노래가 흘러 나왔다.나도 어쩔 수 없이 저녁을 일찍 먹고 당직을 하러 나갔다. 교장, 교감선생님 사모님까지 벌써 나오셔서 입장하고 계셨다. 나는 당직이랍시고 숙직실에 앉아 있으니까 지역파견 순경이 두 분 계셨는데 오늘 저녁에 두 분 모두 동원되어 숙직실로 오셨다."이 선생 오늘 저녁당직은 우리가 설 테니까 영화구경이나 하러 가이소.""아니, 명색이 당직인데 숙직실을 지켜야지요."하기는 전화라고는 경찰전화와 군용전화밖에 없던 시절이다. 교육청에서는 수시로 관리과에서 점검차 오는 외에는 학교에 공무로 오시는 손님이 없던 시절이었다."전화도 없는 숙직실,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누가 학교 훔쳐갈까 봐요? 마아 영화구경이나 하러 가이소. 우리가 있을 테니까는….""K순경님! 그래도 될까요?""그럼요. 가이소. 시골영화가 어떤 것인지도 알아야지요. 그래야 지역문화도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아닙니까?"이제는 총각이신 P순경까지 거든다."아이 구. 이것 미안 해 서리. 이렇게 편리를 봐 준다니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 좀 해 주이소. 무슨 일 있으면 연락 해 주고요."정말로 영화상영장인 운동장으로 갔다. 시골에 영화사가 들어오면 그 주변이 영화 마칠 때까지 시끌시끌하였다. 우리 학구 주변사람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 심지어 구룡포읍이나 동해면, 아니 당시 지행면 소재지에서도 구경하러 오곤 하였다. 그리고 대개 처녀, 총각들이었다.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흑백텔레비전도 좋은 세월이었는데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영화야말로 대단한 문화미디어가 아닌가. 물론 그 때는 애국가가 울러 퍼지고 끝나면, 이어서 '월남전 소식'과 '대한늬우스'를 꼭 상영하였다. 제목은 지금 잘 생각나지 않았지만 본 영화가 상영되었다. "섬마을 선생님", "귀신 잡는 해병", "돌아오지 않는 해병", "빨간 마후라", "동백아가씨", "흑산도 아가씨"등 제목이 흥행할 때이지 싶다. 물론 지방흥행영화는 도시에서 흥행을 하고 조금 늦게 이런 제목의 영화들이 주로 상영되곤 하였다.본 영화가 상영될 때 한창 재미있는 장면에서 꼭 필름이 끊어지면 암흑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특히 필름이 끊어지려면 필름과 필름 사이가 마치 감자를 삼다가 눌어붙어서 누글누글한 색에서 동그라미가 생겨서 탁 끊어지고 마는 것으로 예고가 되는 것이었다.이때가 문제다. 영화필름이 끊어지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총각들이었다. 상영 중에는 어느 정도 빛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예쁜 처녀라고 생각하는 옆자리에 앉거나 서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뒤의 이야기는 여기서 더 하지 못하겠다. 이후는 19금이다.이런 필름 끊어지는 횟수가 많을수록 총각들은 휘파람을 불며 야단법석이었다. 이 또한 그 시대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시골장관이었다. 필름이 끊어지면 덩달아 처녀들의 괴성이 어디선가 들리고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필름을 장전해서 상영이 되면 언제 그런 아수라장이 있었든가하게 조용하였다.영화가 어느 정도 끝나려고 할 즈음 영화사 직원들이 둘러싼 흰색 천막을 모조리 풀어 버리면 영화가 끝나간다는 예고이기도 하다. 영화가 마침내 끝이 났다. 그렇게 시끌벅적 하다가 일시에 모두가 나가 버리면 학교는 천지가 적막강산이 된다. 그러나 당직자로서 시설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플래시를 들고 순회를 하려니까 K순경 왈,"아니 이 선생님 조심하셔야지요. 지금 직접 순회를 하지 마시소. 뒤처리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시간을 조금 두고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마아 숙직실로 들어 오이소.""예? 예…."정말 그랬다. 이래저래 한 시간여를 넘어서 확인한 후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했다. 이튿날 교실마다 문이 열려있고, 의자와 책상이 모아지고 난장을 만들어 놓았다. 내가 순찰 돌면서 플래시를 켜서 확인했다가는 맞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니 정말 아찔하였다.우리 학구지역은 아니었는데 등 너머에서 영화구경 온 총각이 기어코 처녀와 사건을 저질러서 경찰서로 잡혀갔다는 후문이 들렸다. 한편으로 이 일을 겪은 후에 K·P순경이 고맙기도 하였다. 순회영화 일정이 모두 끝나고 K·P순경에게 고마워서 밤에 막걸리 일배주를 사 드렸다.세상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선생이기 전에 나도 사람이고, 지역민이고 공생공사 하여야하기 때문이었다. 선생을 떠나서 지역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지역민을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이후 영화 순회공연이 왔을 때 교장선생님께서 장소허가를 하지 않으셨다. 기여보다 사회병폐(?)가 너무 많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후 영화 순회공연은 칠전회관 앞에서 상영하였다. 제2부 풍금소리11. 뇌성산 소풍 모포초등학교에서 선생을 시작하고 한 학기를 마쳤다. 이제 2학기가 시작되고 바쁘게 일상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월 18일, 2학기 소풍을 가게 되었다. 소풍 장소는 학교 뒷산인 뇌성산으로 정했다. 어느 학년으로 구분 해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전교생 270여 명이 함께 가기로 교무회의에서 결정이 났다. 그러면 제일 먼저 뇌성산에 대한 문헌조사를 하였다.뇌성산은 포항시 장기면 모포리와 구룡포읍 성동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에 돌이 많고  뇌록(磊綠)-매새(매 : 매흙의 준말, 새 : 광석 속에 금분이 끼어 있는 잔 알갱이)  인삼  지치(紫芝)  오공(蜈蚣)-지네  봉밀(蜂蜜)  치달(雉獺)-꿩과 수달  동철(銅鐵)의 칠보가 나서 칠보산(七寶山)이라고도 한다. 높이 211.4m. 산성의 높이가 10척이나 되는 돌로 쌓은 성이 있고, 그 안에 못과 우물이 있는데 고려 현종 때 쌓은 것이라 한다.뇌성산에는 지금 안타깝게도 곧 사라져버릴 위기에 놓여 있는 중요한 사적지 한 곳이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 있다. 바로 "뇌성산 뇌록지(磊碌趾)"로 마을에서 보면 왼쪽 산허리 움푹 팬 곳이다. "뇌성산 뇌록"은 조선조 때 국가 중요 건물에 단청을 할 때 처음으로 가칠(假漆)을 하는 푸른색의 바탕칠 재료로 사용하던 돌이다. 이 돌은 어린 쑥이 올라올 때의 색보다 조금 더 진한 청녹색을 띤다.시골학교에서 소풍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궁금하였다. 뇌성산은 위에서 보듯이 칠보산이라고도 하였다. 높이는 211m이지만 그 높이로 상상이 별로 가지 않겠지만, 바로 바다 앞에서 치어다보는 산은 그렇게 높은 것으로 느껴진다. 소풍을 가기 전에 교무주임 선생님과 함께 사전답사를 갔다. 학교 뒤 지름길로 올라서 산 입구를 지나 가파르게 오르니 정말로 뇌성이다. 즉, 돌로만 이루어진 성이다. 그저 둘레에 있는 나무 외에는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래서 이 돌무더기만 있는 곳으로는 소풍으로 적지는 아니므로 조금 옆으로 가서 평지를 찾았다. 조금 지나가니 작은 돌담이 보이고 우물터도 있으며, 작은 평지도 있고 확 트인 앞바다가 보인다. 앞에 보이는 곳이 대진리 해수욕장이다. 이곳은 일명 해어포(海禦浦)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고, 영암리 수영포와 더불어 포이포 수군 만호진의 진보(鎭堡)가 있었던 곳으로 우리 수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것을 조사하여 사전답사를 마치었다.드디어 전교생이 소풍 가는 날, 1973년 10월 18일. 평소 수업이 있으면 9시에 수업이 시작 되지만, 소풍간다고 10시에 조례를 하니 일찍 온 아이들은 운동장 나무그늘에서 앉거나 삼삼오오 달리기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고 대기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의 조바심이 더욱 났다. 그래도 아이들은 통제가 없으면 잘들 논다.학년별로 줄지어 서서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있었고, 반장이 앞에 서고 남학생도 두 줄로, 여학생도 두 줄로 행보하고 나가고 그 뒤에 담임 선생님이 따라 간다. 제일 먼저 6학년이 앞장서고, 다음에는 1, 2, 3, 4, 5학년 순서로 줄줄이 연결되어 소풍 가는 날이다. 그것도 전교생이 줄지어 모두 한 곳에 가다니 참 신기하였다.다람쥐 노래도 불렀다. 그래서 더욱 즐겁게 출발하였다.(1절)산골짜기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번 넘으렴 파~알딱 파~알딱~ 팔딱 날도 참말 좋구나.(2절)산골짜기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번 넘으렴 파~알딱 파~알딱~ 팔딱 날도 참말 좋구나.우리 반 52명이 소풍을 가는데 도시락 없이 온 학생이 절반을 넘을 것이라는 사전 내용을 파악하였다. 며칠 전부터 소풍을 간다는 들뜬 생각도 있었지만, 난감한 일이 도시락 없이 오는 학생을 위하여 김을 사서 김밥을 하숙집 아주머니를 동원하여 30여개 말았다. 우리 반 아이들의 도시락 챙기기였다. 아울러 비닐 통에 물까지 준비하였다. 나의 생각이 적중하였다. 과연 소풍을 가는데 학생들 거개가 빈손으로 오는 것이다. 도시면 소풍을 간다고 하면 학부형 몇이라도 선생님 도시락을 준비할 텐데, 시골이라 본인 도시락도 없이 빈손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바닷가 산골길을 올라가면서 누군가 혼자 "과수원길"동요를 부르니까 저절로 모두 따라 합창한다.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이 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그러면 길가 민들레도 고개를 흔들어 합창한다. 소풍 나온 아이들은 활엽수 상수리나무 밑을 지난다. 키 큰 해송 밑을 지나 잔풀이 돋아 난 작은 길로도 지나간다. 그러는 사이 모포 앞바다 산들 바람도 같이 소풍을 따라 나선다. 가끔 이름 모를 새들이 울어 대고, 바로 앞쪽에서는 장끼와 까투리가 놀라 스스로 "꿔~엉~ 꿩!"소리치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날아간다. 그러면 작은 산새들도 우리도 있다고 함께 재잘재잘 거린다.바람 따라 새소리 따라 올라오다 보니까 어느덧 도착지에 왔다. 제일 위쪽에 5, 6학년이 중간에 3, 4학년이, 아래쪽에 1, 2학년들이 앉았다. 우리 반은 4학년이므로 중간에 앉았다. 모두를 평지에 그늘이 있는 곳을 골라 앉혔다. 그러자 일부 아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가지고 온 것을 나에게 제출한다. 52명 중에 26명이 자기 도시락은 물론이고 담임 선생님에게 준다고 신문지에 꼬깃꼬깃하게 말아서 고사리 손에 땀이 밴 물건들이다. 삶은 달걀 1개, 담배 한 갑, 양말 한 켤레, 오이 1개, 사과 1개, 참외 1개, 날계란 1개, 쑥떡 한 쪽, 절편 한 쪽 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자기만의 성의로 뇌성산 꼭대기까지 들고 온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무엇을 가져 온 것인 줄 모르니까 내가 고맙게 받으면서 볼펜으로 출석 번호를 적었다.이제 놀이시간이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을 섞어서 동그라미가 되도록 두 팀을 만들었다. "수건돌리기"도 하고, "노래 부르다가 부르는 사람 수대로 만들기"등으로 벌칙이 생기면 장기자랑을 하는 등 즐거운 놀이를 하였다."둥글게~ 둥글게"라는 동요도 부르면서 짝짓기로 놀았다.(1절)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춥시다.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랄~랄~랄~라 즐겁게 춤추자 링가~링가~ 링가~ 링가~링가 링 링가~링가~ 링가~ 링가~링가 링/손에 손을 잡고 모두 다함께 즐겁게 뛰어 봅시다.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춥시다.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랄~랄~랄~라 즐겁게 춤추자.마침내 점심시간이다. 도시락 지참이 없는 학생에게는 김밥을 나누고 생수를 준비하여 주었다. 나의 점심도 역시 김밥이다. 선생님들이 모이고, 사모님들도 동참하셔서 함께 음료수도 마시고 담소도 하였다.우리학교는 저 아래 마치 장난감처럼 보인다. 포항에서 구룡포를 경유하여 영암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저만치 꽁무니에 먼지를 뿜고 대진리 수양산으로 산굽이를 돌아간다. 그리고 시원한 모포 앞바다는 확 트인다.저 멀리 모포등대도 보이고, 축항이 있어 큰 파도를 막아 준다. 항구로 통통배가 들고난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조감도처럼 보인다. 정말 소풍을 뇌성산으로 오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덤으로 사전답사까지 하여 두 번을 오르게 되었고, 역사적 자료를 찾아보는데 상당한 이론무장을 하게 된 것도 참 다행이다. 뇌성산 소풍을 정한 것은 참 다행이었다. 어렵사리 모포에서 가을 소풍을 마치고 아무 사고도 없이 학교로 돌아 왔다.이제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아직 학교가 파할 시간은 많이 남아서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고용원 아저씨를 포함해서 모두 여덟 분이 숙직실에서 회식을 하였다. 물론 이 자리가 준비되기 전에 모포에서 나는 바다고기로 회를 준비하여 두었다. 모두 모여앉아 정말 작은 시골초등학교 전체회식이었다. 이렇게 모포초등학교 가을소풍은 모두 끝이 났다. 12. 버스여차장과 선생 요즘에야 시내·외 버스를 타도 차장(車掌)이 없다. 그러나 1970년대는 버스 차장이 있어서 차문을 탕탕 치면서 "오라 잇!"해야 출발하는 시대였다. 버스에는 차장이 최고다. 차장이란 기차·전차·버스 등의 안에서 차중의 일을 맡아 보는 사람이다. 어른 장(長)자가 아니라 손바닥 장자를 쓴다. 손바닥으로 차를 쳐야 하니까 그런가."포항-모포(땅고개)-구평"으로 오가는 황색 선을 두른 시내버스가 하루에 3회밖에 없었다. 만약에 이 차를 놓치면, "포항-구룡포-모포-영암"으로 돌아오는 푸른 색 선을 두른 시외 직행버스를 타고 구룡포에 도착해서 약 30분간 쉬고 오는 것이다. 이 코스 말고 또 다른 코스는 "포항-오천-금오-장기"로 오는 버스를 타고 오면 금오에서 내려 약 2km를 걸어 들어와야 했다.간혹 시간이 나면 구룡포 경유 직행버스를 탔는데, 항구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포항에서 구룡포까지는 정류소마다 내리고 타고를 반복하여 그래도 잘 운행이 되었다. 구룡포 항구에만 들어오면 차장이"30분간 정차 합니데이."하고 사라진다. 어디에 갔는지 소식이 없다. "포항-구룡포"간에는 손님이 많이 있지만, 구룡포에서 모포경유 영암 가는 버스에는 30분간 정차하면서 손님을 다시 모아야 운행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구룡포 항구에서는 '고래 고기'가 주종을 이루었다. 운 좋을 땐, 잡아 온 고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런걸 보고 흔히 '고래가 집채만 하다'고 하는 말이 있을 법하다. 고래가 하도 커서 사다리를 놓고 대도(大刀)를 들고 칼로 쓱쓱 베고 난 뒤 호스로 물을 뿌리면 검붉은 고래 피가 막 흘러내려 바다로 다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큼지막하게 베어 놓은 고래 고기를 갈고리로 이용하여 장정 넷이서 힘겹게 옮기는 것이다. 고래를 잡는 모습은 못 보았지만 그 큰 고래를 해체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를 둘러서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니 이 또한 장관이 아니랴.문제는 이 이야기가 아닌데 옆길로 갔다."포항-구룡포-영암"버스가 구룡포에서만 오랜 시간을 정차 하는 것이 아니라 칠전정류장에서도 오랜 시간을 정차하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왜냐하면 나는 학교 옆 모포정류장에서 항상 내리고 말았으니까 잘 몰랐던 것이다.오후 나른한 시간에 수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교실 오른편 높은 언덕배기 도로에 버스가 정차하면서 차장이 무어라고 소리를 쳐댔다. 알고 보니 수업하고 있는 나를 찾는 모양이다. 수업 중인데 웬 소란인지 나가 보았다. 다짜고짜로 차장이 삿대질을 하고 씩씩거린다."4학년 다~임 선생 맞지요?"엔진소리로 잘 안 들리니까 고래고함을 쳤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예. 왜 그러십니까? 예…!""내가 다음 파수 들어올 시간에 칠전정류장에서 만납시데이."그리고는 대뜸 오르막길이라"부르르∼릉!"하면서 불완전연소의 검은 매연을 뿜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이것 참 너무 고약하고 황당했다. 그것도 직행 시외버스 차장유니폼을 입고 모자까지 쓴 예쁜 차장아가씨가 순간에 나를 확인한 후 냅다 소리 지르고, 다음 들어오는 시간에 칠전정류장에서 만나자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기가 찼다. '아하, 이것 분명 우리 반 아이가 사고를 쳤구나.'싶어서 반장을 조용히 불러 물어 보았다."반장, 차장이 왜 저렇게 고함을 치고 가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니 가관이었다."쌤예, 우리 반에 L이 세워 놓은 버스차장 돈주머니에 돈을 가져갔다 컸데예. 우리학교 아이들은 웬만하면 다 알고 있어요!""그래 고맙다. 아이들은 다 아는데 세상에 선생이란 나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니! 이것 참 큰일이구만."드디어 일이 터졌다. 아니 큰일이네. 제일 먼저 다음 들어오는 버스가 오기 전에 사고 내역을 파악하고 이를 수습하여야 할 방안을 만들어 내어야 했다. 나는 조용히 L을 불러서 얘기를 들어 보아야 했다. 그런데 이 L이 아예 나와 마주치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L 이웃아이인 L1을 불러 물어 보았다. L1의 이야기는 황당했다."쌤예, L이 돈을 가져오다가 다른 아이들이 봤어요. 그 광경을 본 10여 명 아이들 모두를 데리고 가서 돈을 똑같이 나누어 주고 그 돈으로 모두 과자를 사먹어 버렸다 카데 예."라고 한다. 이것이 일이 크게 번지게 되었다. L은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홀어머니만 계시고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해초를 따고 미역 덕장에서 일하시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를 어째 일이 벌어지기 전에 수습을 빨리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우선 변제를 해 주고 마무리를 빨리 해야만 조용해지지 싶었다. 시간이 되어서 시외버스가 도착해서 차장이 내리고 나를 만났다."4학년 담임선생 맞습니까?""그렇습니다만….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사실은요. 귀 반에 아이가 우리 회사공금을 훔쳐 갔는데 말입니더. 이걸 우짜믄 좋겠습니까?""그래 예.""어짜던동 변제를 해 주셔야 하는데. 우얄까요? 안 그러면 고발이라도…""예? 뭐라 꼬요? 고발…? 도대체 그 돈이 얼마나 되는데 그럽니까?""한7,000원 쯤 되겠지요.""그런데 정확하지도 안쿠마는…. 학모자님께는 확인해 보았습니까?""예…. 그런데 하도 집이 가난해서 돈이 한 푼도 없다 안 캅니까.""그러면. 진짜, 아이를 고발 할라고 합니까?""예…, 지도 형편이 어려워서요."하기야 그 당시 얼마나 살기 어려운 시절인가? 시외버스 여차장을 하려면 강단도 있고 그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그런 세월이었다. 정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그러면 제가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예에. 어떻게 해 주실랍니까?"여하튼 여차장은 회사공금을 변제해 달라는 것이었다."이것을 알아보니까, 돈은 혼자 훔쳤지만, 10여명이 나누어 모두 써 버렸으니 혼자에게 책임지우는 것도 그렇고, 또 버스차장님이 식사를 하러 가려거든 그 돈 주머니를 가지고 내렸어야지요. 차장이 주의를 하지 않은 것도 문제가 안 있습니까?""예, 그걸 그렇게 훔쳐 갈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여태 이 코스로 다녀도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물론 지도 조금은 책임이 있기는 있지 예…."그때는 가냘프고 힘든 그 버스여차장이 얼마나 애련해 보이는지 나도 몰래 코끝이 찡긋하였다."그렇지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도 담임으로 이런 일에 휘말리는 것이 좋지 않으니까 내가 가진 돈이 이것 밖에 없으니 4,000원으로 해결합시다.""예? 예에…. 고맙심더. 고맙심데이. 참말로 고맙심데이 선쌤예…."돈을 여 차장에게 건넸다. 그러자 갑자기 여차장이 나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기어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였다. 또 나의 마음이 찡해왔다. 공연히 나의 마음이 울컥하기도 하였다. 아! 이것이 사람 살아가는데 주는 감동이던가?금4,000원으로 이의를 걸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해결했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이든가? 이 일로 왈가왈부한다면 초자선생이면서, 총각선생님으로서, 담임으로서 그 벅찬 사회적 책무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지금이야 4,000원이 그렇게 큰돈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내 월급 27,000원에서 4,000원을 공제하여야 하니까 말이다. 1973년에 처음 시작한 교사의 월급이 27,000원이던 세월의 이야기이다. 이를 해결하고 난 후에서야 학부형들이 알고서 이를 또 해결 하시려고 해당 학생의 학부형들께서 모두 모이셔서 십시일반으로 거둔 돈 금4,000원을 가지고 교실을 찾아주셨다.정말 안 이래도 되시는데. 정말 괜찮은데. 모포사회의 인심이 이렇게 좋을 수가. 그런데 꼭 '학부형들이 미안해서 안 되겠다.'고 하시니 그 정성 내 또한 마음 약한 총각선생으로서 어찌 뿌리칠 수 있었겠는가?(이건 아닌데, 정말 아닌데…) 기어이 모아 오신 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상 안 받아도 되는데,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저지른 일인데….). 그러나 내 양심에는 정말 못내 송구스러웠다.이것이 모포사회에서 일어 난'버스여차장과의 나의 스캔들'이다. 13. 해삼 늦게 배운 도둑이 무엇을 못한다더니만, 늦게 배운 술로 인하여 모포사회 전체에 소문이 났는가 보다. 술 잘 먹는 이 선생으로 소문이 났으니 말이다.결혼을 하고 장모님이 와계셨다. 바닷가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딱히 하는 일 없이 학급 경영록을 정리하고 있자니 마침 심심하던 차에 누가 왔다."선쌤, 계십니꺼?""누구십니까?"창문을 여니 어떤 아저씨가 나와 보라고 손짓을 하였다. '내가 모르는 아저씬데 왜 저러지?'하고 나가니까 양동이 한 가득 해삼을 들고 왔다."선쌤예. 오늘 비도 오고 해삼을 잡았는데 팔리지도 않고 해서 술 잘하시는 선쌤댁에 가져 왔심더. 마아 3,000원만 주이소.""아이고. 내가 무슨 그런 소문이 났습니까? 누가 해삼 산다 캤습니까? 가지고 가이소."아예 부정적으로 들리는 말도 그렇고 손사래를 치니까 그 아저씨께서 기가 찼는지,"그러면 1,500원만 주소.""아니, '해삼 산다.'고 안했습니다.""아! 예에. 내가 가져가도 못 먹는데, 그라믄 마아 선생님께 그냥 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릇 주소.""됐다 카이 그러십니다. 왜 자꾸 그러는 대요."사실은 나도 그 당시 안주로 나오는 해삼을 잘 먹었다. 그런데 막상 해삼을 내 손으로 장만해야 한다는 데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렇게 나도 모르게 거절하게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이번에 그 아저씨께서 우리 집 마당에다가 아예 부어 버리고 나가 버렸다. 물론 그 아저씨도 단단히 화가 치밀어서 그냥 그렇게 어렵게 잡은 해삼을 내동댕이치고, 확 부어 버리고 나가신게 분명하다. 이를 어째 돈을 치르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해삼을 장만해야 하는데 장만할 줄 몰라서 난감해 하고, 무슨 일이 이 비오는 날에 이렇게 일어났담? 자아! 이것 참 난감하였다.나도 술을 설 배워서 그저 술집에서 나오는 안주나 받아서 먹어 보았지. 장만하는 것 한 번도 못해 보았다. 해삼을 장만해 놓으면 맛있게 먹었지. 그것도 꿈틀거리는 이 해삼을 겁이 나서 손도 못 댔다. 게다가 뒤집으면 싯누런 배때기는 어찌 그리 내륙지방 사람으로서 겁이 났는지 모른다. 해삼 등은 보면 볼수록 징그럽고 오글오글 느껴지는 것이 그 때는 그렇게 겁나 하였다.마침 장모님께서 와계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홱 버리고 간, 살아 있는 해삼을 주워 담아서 장만을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장모님! 해삼 좀 장만 해 보실랍니까?"그러자 장모님께서 나오셔서 보시더니,"아이고! 이 사람아 나도 겁이 나서 못 장만켔다. 해삼을 먹기는 먹어 봤는데…. 아이구우! 이 서방, 나 못해."아이구우 이런! 이를 어째! 해삼은 살아서 마당에 기어 다니고 있었다. 술은 잘도 마시면서 안주를 못 만들다니 나도 한심했다. 그것도 장모님께서도 계시는데. 내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생각났다. 앞집총각에게 한번 여쭤보자. 바닷가 사람인데 설마 못하랴.'그리고 앞집총각을 찾았다."K총각! 계세요? 비도 오는데 소주 한잔 합시다.""누구십니까? 아예…. 이 선생님! 그래. 좋지요, 좋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 무슨 좋은 안주가 있습니까?""마침 해삼이 좀 생겨서 그런데 해삼 장만을 줄 압니까?""해삼? 해삼 장만은 거야 많이 해봤습니다. 명색이 바닷가 사람인데…. 그런데 어디로 갈랍니까?""예. 우리 집으로 가입시다.""예에? 집에 해삼 잡아 뒀습니까.""예에, 집에 해삼이 갑자기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앞집 총각을 모셔 왔다. 대구 유수대학교인 Y대학교 사대를 나오셔서 발령을 받기 전에 쉬는 중이라고 했다. 대학교에서 축구선수도 했다고 한다. 진짜로 도마 위에 한 마리씩 얹어서 장만하는데 전문가를 뺨치게 잘 했다. 해삼 안주가 모두 장만해지고 소주가 나왔다. 비오는 날 내 입이 궁금하던 터라 해삼 안주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해삼을 가지고 오신 그 아저씨께는 미안하고 송구스럽고 이를 어째. 아까는 분명 나도 모르게 비오는 날 해삼을 사라고 하니까 공연히 퉁명스럽게 대한 것이 미안하였다.주자 십회훈에 "부접빈객거후회(不接賓客去後悔-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떠난 뒤에 뉘우친다. 손님이 왔을 때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대접하지 않다가 가고 난 뒤에 후회해 보았자 이미 늦었다는 말이다.)"라 하지 않았든가? 즉 이런 말을 내가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지행합일하지 못한 내가 선생으로서 미련하고, 순간 판단이 왜 그리도 모질었는가 말이다. 어찌 남이 공들여 이룬 일에 대가도 없이 공짜로 아니 날로 먹겠는다는 말인가? 이를 어째 두고두고 이 일에 나 자신의 원망이 뇌리에 박혀 있을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정말 송구하고 죄스러운 일이었다. 추후에 우리 집에 다시 그 아저씨께서 꼭 오시면 만약에 다시 오신다면 기꺼이 돈을 더 치르더라도 꼭 사드려야 하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주제에 나는 흥이 나서 글을 썼는데 막상 그 결과로는 그 해삼 아저씨가 지금도 못내 아쉬움으로 밖에 남지 않는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한편 그날 장모님께도 대접하고, 덩달아 내자도 맛있게 먹게 되었다. 확실히 모포에 발령 받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먹어도, 먹어도 해삼이 너무 많아 줄어들지를 않자 앞집, 옆집, 앞에 앞집, 옆의 옆집 모두 모셔서 해삼과 소주파티를 즐겼다.끝내 그날 이후 그 해삼 아저씨는 결코 만나지 못했다. 아니 그날 아마도 대구에서 장모님도 오셨고, 대접은 하여야 했고 해서 용궁에서 보내어 준 아저씨인가? 아니면 그 아저씨로 현신을 하여 나를 깨우치게 했단 말인가? 지금도 그 미스터리에 나는 잠 못 든다. 14. 장교와 선생 나는 군대에 현역으로 입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군번과 제대증이 있다. "5관사(병)제18호로 전역되었다."는 증명서가 말해 준다. 흔히 말해서 단풍하사다. 군번 8400526×. 계급은 하사.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하여 국가에서 배려해 준 제도로 RNTC(하사관 무관후보생) 제4기 수료자이다.2년간 750시간의 호된 교내훈련으로 군사학 27과목을 이수하여야 한다. 1년차 주당 9시간, 2년차 주당 6시간 등 군사과목을 이수하여야 함으로 군복을 입었다 벗었다 하여야했다. 아울러 1년차 3주간, 2년차 3주간 모두 6주간 군대 병영에 입소하여 실습을 이수하여야만 했다.그것도 임용 전에는 5관구에서 필기와 실기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임용을 해 주던 제도이다. 물론 동기 160명 중에는 탈락하여 현역 하사관으로 차출된 수가 10%정도 되었다. 임관 후 예비역으로 학교 발령을 받아 8년간 복무하여야 한다. 예비군훈련은 일반 제대군인과 똑같이 받았다.1973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고 있었다. 체육은 2시간을 연결하도록 운영하였다. 먼저 순환운동 등 체조를 간단히 하면 교육과정에 맞는 체육수업을 하여야 한다. 그날은 교육과정으로 4학년 피구를 하고 있는데, 군용 트럭 한 대에 병사들이 단독군장한 채로 가득 태우고 운동장에 먼지를 일으키면서 들어왔다. 그리고 내렸다. 그 중에 한 사람만이 새하얀 소위 계급장을 달고 반짝 빛났다."수고하십니다. 말 좀 여쭙시다."하면서 나에게 군대인사인 거수경례를 붙였다."어떻게 오셨습니까?""아, 우리 부대원들이 총검술훈련을 하려니까 잠깐 운동장을 빌렸으면 합니다.""예. 그러면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되니까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교장 선생님은 체육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운동장 한쪽에서 사용허가를 내어 주어라고 하였다. 소대원 20여 명이 일목요연하게 줄을 맞춰 기합 소리도 우렁차게 총검술을 하였다. 우리 반 아이들도 덩달아 총검술을 구경하다가 마칠 시간이 되어 체육수업을 마쳤다.그러자 해병대 장교가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 왔다."혹시 아시는 분 아닙니까?""아! 예, 어떻게…."라고 하는데 해병대 빨간 명찰을 보니까 소위 서종×가 아닌가! 그러니까 고향 불국사초등학교 동기생이었다."아니, 너 종× 아닌가? 어떻게 해병대엘 갔나?""응. 해병대에 지원했다. 여기 근무지 관할이지.""그래. 나도 올해 5월 1일자로 이곳에 초임지로 근무하게 되었네.""그래. 여기 내가 근무하는 관할지이니까. 그래 앞으로 자주 보자."철모를 쓴 아래 얼굴은 온통 햇볕에 그을려 얼굴이 새카맣다. 정말 이름을 확인하지 못했더라면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 얼마 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기생인가? 아니 여기서 이렇게 만날 수가 있을까? 하기는 서울에 한양대학교 공대로 진학했다는 소문은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바닷가에서 아니 모포에서 만나다니 정말 반가웠다. 훈련을 모두 마치자 군인들이 차에 오르고 '고마워. 나는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휭 가버렸다. 마치 뭣에 홀린 듯 했다. 그저 그 옛날 불국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같이 뛰어 놀았던 것으로 오버랩 되고 말았다.그리고 나의 교사생활로 일상 시간이 흘러갔다. 토요일이 되자 고향으로 나가려고 "구평-포항"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성동리로 시내버스가 내리 쏟아지면서 내북초등학교 푸른 숲 앞을 지났다. 공당리 마을회관을 지나면 상정리 검문소가 있었다. 검문소에서는 검문하는 군인과 경찰이 함께 차에 올라 하나하나 확인한 후 포항으로 내닫게 되었다. 상정리 오르막길을 힘들게 버스가 올라간다. 산골길을 돌아 내려가면 약전이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흥환이 나오고, 직진하면 동해면 도구였다. 도구에는 해수욕장이 있어 제법 번화하였다. 어느새 포항해병대사령부 앞을 지나고 BOQ 앞에 멈춘다. 그 때 각진 모자의 해병대 장교 한 사람이 탔다.나는 버스 뒷자리에 똑 바르게 잘 앉아 있었다. 군인 장교가 성큼 들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털석 주저앉는다."누구야! 아니 너 서 소위 아니가? 어디 고향가나?""그래, 그래. (고향)집에 안 가나. 니는?"이때는 장교 체면도 없이 그저 경상도 사투리가 막 튀어 나오네."마침 잘 되었네. 나도 고향에 간다.""그래. 오늘 만난 김에 죽도시장에서 한 잔하고 가자.""응, 좋지."우리 둘은 의기투합하여 포항버스주차장에 내려 죽도시장으로 갔다. 서 소위는 우선 무엇이라도 먹자고 운을 떼었다."나는 회는 그렇고, 우리 통닭 먹을까?""그러지 뭐, 나는 아무거나 잘 먹지."둘이 통닭에 소주를 먹고, 마시고, 또 퍼 먹었다. 집에도 가기도 전에 포항 죽도시장에서 벌써 흠뻑 취하였다."아니. 우리 이러다가 집에 언제 가겠노? 이제 시외버스 타러 가야지.""그러지. 택시타자."시외주차장에 내려 표를 끊고, 또 경주를 향해 떠났다. 아차! 이것 큰일 났다. 경주역까지 35분 걸리는데, 문제는 소변을 보지 않고 탄 것을 알아 차렸을 때는 이미 직행버스가 출발하여 효자 검문소를 통과하고 있었다.한참 다리를 꼬다가 포기했다. 또 다리를 꼬아 보았다. 술을 먹고 시외버스를 타려면 반드시 화장실에 다녀와야 하는데…. 그런 준비성도 없이 그저 시외버스를 보자말자 고향에 가야 된다는 급한 강박관념에 차를 타고 만 것이다. 드디어 경주역에 도착했다. 경주역 앞 직행버스정류장에서 기차역 화장실까지 그렇게 빨리 달려 본 적이 없었다. 익히 알다시피 술을 먹고 소변 마려운 것 참기가 그렇게 어려운 줄은 당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것이다.그 이후 어김없이 토요일 고향에 들리려면 타이밍이 잘도 맞아서 우리 두 사람은 장교와 선생으로 늘 만나게 되었다. 심지어 비오는 날에도, 겨울에는 눈 오는 날에도 그렇게 정확하게 약속이나 한 듯 만날 수 있었으랴. 모두가 모포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다시 찾은 초등학교 동기생인 해병대 장교 서 소위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당시 해안지역에는 밤 10시면 통금이다. 바닷가에 철조망이 쳐있고, 그 철조망에 매달린 빈 깡통을 보면서 참 무서움을 느꼈다. 해안가는 바로 국경이요, 전선이었다. 밤이면 매복으로 군인들이 경계를 선다. 이러한 국경 아닌 국경에서, 전선 아닌 전선에서 수고하는 군인들이 있어서 우리는 밤에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것이었다.1973년 12월 24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브 날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반 아이들이 군 초소방문을 계획하였다. 우리 학구에, 아니 모포 지역에 군 초소가 3개나 있었다. 45, 46, 47초소. 먼저 칠전에 있는 46초소에 들러 준비한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전하고 크리스마스 송가를 합창하였다. 또 이런 계획도 물론 서 소위 관련도 있었지만, 그 당시 간첩색출도 상당히 있어 군인들의 고생이 아주 많았다. 국토방위에 노력을 많이 할 때라 시의 적절하게 학교의 허가를 받아 국군위문을 실시하였다.지금 생각해도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 결국 서 소위와 상당히 관련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그 동기를 만나면 그때 그 모포의 운동장에서 만난 이야기에 꽃이 핀다. 그 장교의 부인은 모교 교육대학 한 해 후배이기도 하였다. 세상 살면서 그 인연이란 어찌 그리도 끈끈한 것인가. 바로 그 선생과 장교 말이다. 15. 모포초등학교의 위상 1973년 5월 1일자로 발령 받아서 어떻게 하면 초등교육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내가 발령을 받아보니 주특기 교육이 체육 분야인 축구종목이었다. 축구감독 겸 지도자로는 A선생님께서 맡고 계셨다. 이미 4월에 축구선발전 등을 치렀다. 그러나 축구대회 참가 전에 부전선수참가로 불상사가 발견되어 해체된 상태이었다. 이 조그만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해야만 교사로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학교는 작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노력으로 찾아내는 것이다. 무엇일까? 또 다시 매일 매일 밤마다 고민하였다. 때마침 한국교육개발원(=KED)에서 연구자료를 배포한다고 하였다. 교육대학을 다닐 때 특별 연구과목에서 "도서관학"과 "현장연구"중 택일에서 연구는 나중에 현장에서 꼭 해야지만 도서관학은 낯이 선 학문이라 "도서관학"을 선택하였다. 학교 규모가 너무나 작아서 "도서관학"은 현재는 별 쓸모가 없었다. 현장연구에 눈을 돌렸다. 아울러 당시 KED에서 현장연구라는 잡지와 함께 신청만 하면 준다는 연구보고서이었다. 회원에 가입하였고, 매월 무료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에서 연구보고서가 쏟아져 나오면서 시골 바닷가 작은 학교에 근무하는 나에게 까지 어김없이 10여권의 보고서가 매월 도착하였다. 물론 선배님들에게는 낯이 선 자료 들이었다. 나는 잡지와 함께 이 보고서를 차곡차곡 모았다.드디어 이론정립이 나에게 정착되어 그 당시에 『배움책(=Work Book)』이라는 우리말의 생소한 용어가 생성되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교육현장에서 해야 할 일이 이것이다.새 이론의 요약은 이것이었다. 존 듀이의 교육서적 중에 "목표이원론의 분류"에서 모든 교육에서 목표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 단위시간의 수업에서 목표를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목표는 "행동목표"로 반드시 장기목표와 단기목표가 있으며, 하위 단기목표로 구체적인 행동목표를 설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한자리 수 받아 올림에서 이것을 알면 이후 인간생활에서 모든 합계의 합을 산출할 수 있다." 그렇다. 수학은 왜 배우는가? 결국 인간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한 시간 공부하여 구체적인 목표가 나올 수 있는 학습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가장 수업전개가 어려운 것이 자연 과목이었다. 한 학년 과목을 선택하여 연구 과제를 삼아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자연 배움책(=Work Book)"이라는 주제이었다. 물론 이론 무장을 하였고, 아울러 현실적으로 자연과목을 배울 수 있는 배움책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 준비로 1974년을 맞이하였다.1974년에 "인쇄매체"라는 연구영역도 생소하여 교육청 담당자도 이런 영역을 연구를 할 수 있습니까? 반신반의 하던 시절이었다. 경상북도교육연구원에서 답변이 왔다고 했다. 대단히 선진적 사고를 가진 교사의 생각이고 KED에서 지향하는 뜨는 연구과제이라고 답변이 왔다. 문제는 인쇄매체이므로 글을 인쇄하여야 하는데 당시로는 시골에서 타자를 칠 수밖에 없었다.결혼후 타자기(=동아 마라톤 타자기)를 구입하여야 했다. 급료가 31,000원일 때 120,000원짜리 타자기를 구입하였다.〔타자기가 4개월치 급료이었다.〕 마침 내자가 타자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타자치는 것은 내자에게 부탁을 하였다. 이론을 분석하여 자료를 내어 놓고, 배움책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낮에는 수업을 하고, 밤이면 낯 삼아 이론을 쏟아 내어 원고주고, 타자를 치고, 수업진행을 위한 지침서를 만들고 3개월을 고생해서 자료가 완성되어 마침내 포항시교육청 산하 교육자료전에 출품하여 "우량상"을 받았다. 경상북도 교육자료전에 출품하여 역시 "우량상"을 받았다. 참고로 우량상은 3등급의 상이다.교육자료전에 빠져 1975년에는 새로운 모색을 하였다. 매년 건강기록부를 정리하는데 문제는 담임 혼자서 시력검사를 하는데 힘이 들었다. "자동시력검사기"를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마침 중학교 과학 은사님께 찾아가서 아이디어를 요청하였다. 은사께서 중요한 것은 돈이 가장 적게 들면서 실용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집에 돌아와 고민을 하였다. 사실상 학교에서 시력검사는 1.5m에서 떨어진 곳에서 한 쪽 눈을 가리고 숫자, 그림, 원에서 어느 쪽이 트인 것인가를 알면 시력검사가 결정되는 것이다. 머리 좋은 아이는 1분 이내 그것을 모두 외어 시력이 상당히 좋은 학생으로 정해지는 것이다.이를 조사하기 위해서 당시 울산에 있는 유명안과에 갔다. 그 당시에 벌써 프로젝트 기계로 자동시력검사기가 나와 있었다. 그 기계 값이 1,200만원이나 하였다. 나는 교사 한 사람으로 감춰서 지시하고, 확인하고, 시력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자동시력검사기를 만들고 싶었다.자동시력검사기의 원리는 대강 다음과 같이 하였다. 파트를 크게 두 가지로 만들었다. 검사기가 자동으로 나와야 하고, 이를 지정·조작할 수 있는 조정기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내가 생각한 원리는 대단한 아이디어가 숨어 있다.첫째, 검사기가 있는 곳은 원통을 만들어 시력의 결정 단위별(1.5, 1.2 등)로 지정되고 난 후 나타내어 보일 수 있는 장치와둘째, 검사기와 2m 떨어진 거리에서 조정할 수 있는 조정기가 있어야 한다.이러한 내용을 설명하니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신 은사께서 왈, '이 떨어진 거리를 무엇으로 조정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조정할 수 있는 장치를 연구하여 오면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다.참 이론은 근사하였는데, 이것이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와서 포기하려 하였다. 마침 B선생님께서 일본에 친척이 있어 당시 돈으로 12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잽 사게 브레이크를 밟고, 브레이크를 조절하셨다. 바로 저것이다. 자동시력검사기를 만들려면 브레이크 줄이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시골에서 자전거 브레이크를 찾으니 겨우 1m도 안 되었다. 최소한 2m는 넘어야 하는데 자전거 브레이크 줄이 2m가 넘는 것을 파는 곳을 몰랐다. 또 고민에 빠졌다. 마침 대구 처가에 들렀다. 장인께서 고등학교 서무과장을 하셨다."뭐 좀 여쭤 보겠습니다. 자전거 브레이크 줄이 필요한데 그것도 긴 줄이 필요합니다. 어디가면 살 수 있겠습니까?""뭘 그걸 가지고 고민 하노? 삼덕 네거리에 가 봐라."하셨다. 정말 삼덕 네거리 윤업사에 들려 보니까 브레이크 줄이 3m짜리도 있었다.당장 구입하여 만들기 시작하였다.첫째 원통을 만들었다. 원통 바깥에 다섯 군데 문을 만들고 원통에 브레이크 줄을 연결하여 감았다 풀었다 할 수 있게 하였고,둘째, 조정기까지 이 브레이크 줄을 가져와서 조정기 위판에 꺾기를 만들었다.이를 시험하였다. 자동시력검사기 사용법은 먼저 검사자(=담임)가 조정기에서 얼마의 시력 판정치(예: 1.5, 1.2 등)를 보여 주기 위해서 지정한 후 조정기를 꺾은 후 다섯 가지(숫자, 그림, 원에서 어느 부분으로 트임 등) 중에 무엇을 하려는가를 정하면 2단계로 구분한 후 셋째로 두 가지가 결정된 부분에서 검사기창을 열어 주는 것이다. 피검사자가 틀릴 경우 다시 다른 것을 지정하여 열어주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1.5m 거리에서 이 내용으로 검사를 하는데 문제가 있다. 검사기 안에 전기를 설치하여 밝기(=조도, 룩스)를 정해 주어야 한다. 밝기는 안과 전문의께서 200룩스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 자동시력검사기로 측정하면 아주 편리하고 교사 혼자서 지정하고, 확인하여 판정하고 기록할 수 있는 장치이었다. 그야말로 외국에서 들여온 1,200만 원짜리 프로젝트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고 준비하여 경상북도 교육자료전(대구명덕초등학교 강당)에 출품하여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이 결과로 포항시교육청에서도 "우수상"을 주었다.1975년 모포초등학교는 조그만 시골학교로서 포항시교육청 우수상, 경상북도교육청 우수상 등 자료전 종합점수 "포항시교육청 4등"을 하여 모포초등학교의 위상을 날렸다.이후 이 자동시력검사기는 경상북도교육자료전에 전시되었다가 포항시교육청이 인수하여 "포항시교육청학생과학관"에 장기전시를 허락하다가 이후부터는 영구기증을 하였다. 16. 대비정규전 훈련하다 요즘도 간혹 바닷가를 가다 보면 군 철조망이 보이기도 한다. 1973년도만 하여도 동해안 바닷가는 거개가 철조망이 쳐져 있거나 그렇지 않은 곳에는 밤에 매복하기 위하여 모래를 잘 정리하여 둔 곳이 많았다. 철조망에는 빈 깡통이 연속으로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전선 아닌 전선을 느꼈을 것이다. 내륙지방에서만 살다가 이런 광경을 보니 화들짝 소스라치기도 하였다. 밤이면 더욱 통제되는 지역에 살다 보니까 생활이 위축되고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 왔다.간혹 밤이면 군용 터럭이나, 안테나 달린 네모난 검은색 특수차량이 출몰하였다. 혹시 모를 간첩의 통신체크를 위하여 군 수사부대에서 자주 이곳을 순찰, 점검하는 것도 보아 왔다. 밤 10시만 되면 해안가를 통제구역으로 만들어 버렸다.발령 받기 전에 모포지역에 간첩이 출몰하여 뇌성산 꼭대기에서 학교를 향해 총질을 하여서 교무실 캐비닛에 구멍이 나 있었다. 아직도 이 나라는 휴전하고 있지, 평화가 아니었다. 교무실에 앉아서 회의 때마다 그 캐비닛에 난 총구멍을 현장에서 보고나니 더욱 섬뜩했다. 모포 1리 이장님께서 간첩 잡은 무용담을 들려 주셨다. 열심히 채록하여 정리하였다. 결심했다. 이 무용담을 절대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싶어 이야기를 적고, 콘티를 짜고 해서 그림 극을 만들었다.이름 하여 "모포리 용감한 예비군아저씨 간첩 잡다."라는 제목이었다. 이를 가지고 "반공그림극수업"을 하고 내친 김에 포항시교육청 교육자료전에 출품하여 "우량상"까지 탔다.일상에서 또 공문이 왔다. 귀교에서는 "매월 대비정규전훈련"을 실시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을 위해 교전이 붙었다고 가정한다면 학교에서는 제일 우선이 학생대피이고, 다음으로 학적부 반출이었다.서무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대비정규전훈련 계획을 세워 실시하여야 한다. 우선 "모포초등학교 대비정규전 상황도"를 그려 두었다. 학적부 반출 준비, 학생이동 대피경로, 인도자 결정 등이었다. 총괄은 교장선생님이시고 현장에는 교감선생님과 교무주임 선생님이 맡으셨다. 실무는 내가 맡았다. 작은 상자를 만들고 그 위에다가 "학적부 반출함"이라 기재하고 교무실 등 학교 열쇠꾸러미를 넣고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의 실시상황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고도 하였다.하루는 장기면에 출장을 다녀오는 중이었다. 오후 3시 반으로 기억한다. 금오에서 버스를 내려 학계리(재필)로 걸어오고 있는 순간이었다. 밝은 낮에 갑자기 대포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사격하는 총소리가 가깝게 들리었다. 동해 공해상으로 대포가 날아가는 것이 보이고 시뻘건 불을 뿜어댔다. 조그만 쾌속선이 쏜살같이 공해선상으로 날아간다. 이어서 포항 오천(=해병대 사령부)쪽에서 군 헬기가 연속적으로 날아왔다. 완전히 입체적으로 마치 실전이 일어났나 보다 했다. 군 헬기도 따라가다 공해상에서 사라졌으니 더 따라가지 못하는 가 보다. 아예 대낮에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아마도 계원리 앞바다인가 보다.나중에 들리는 소리에'계원리 해안가에 비트를 파고 숨어 있던 간첩이 발각되자 몇 명은 죽고, 몇 명이 우리국군 소대장을 쏘고, 쾌속선으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것이 아마도 전쟁시초일 것이다. 대비정규전 준비가 꼭 필요했다. 준비하면 언제나 안전하다. 대통령의 말씀에도 유비무환이라 하지 않았던가.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매월 대비정규전을 훈련하고 보고를 하여야 하는 것이 나를 더욱 바쁘게 만들었다.이번 달에도 대비정규전을 훈련하여야 하는데 무슨 좋은 이벤트가 없을까 고민, 또 고민하였다. 그러자 선배님 왈,"이 선생! 매월 반출함만 들고 나오지 말고 M16 소총 좀, 구경할 수 없을까?""예. 소총 M16!"그렇다. 초등학교 동기이면서 해병대 초급장교 서 소위에게 부탁을 좀 해 보자. 사전에 만나서 대비정규전 경각심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벤트를 하고 싶다고 하니까 흔쾌히 나의 청을 들어 주었다.수요일 학교가 일찍 파하고,『대비 정규전 이벤트』를 시작하였다. 군에서 서 소위가 M16 소총, 기관총, 유탄발사기, 수류탄 등을 비롯하여 각종 소형장비를 가지고 와서 우리 군의 무기재원과 최대사거리, 유효사거리 등을 설명하여 주었다. 진짜 무기를 보고 홍일점 선배 W여선생님은 아주 놀라워 하셨다. 학교 사진기로 이런 장면을 열심히 촬영도 하였다. 교무실에서 서 소위의 특강을 들으며 더욱 훈련의 강도를 높이고, 호국안보의 강한의지를 보였다.이번 달 대비정규전은 실감나는 이야기와 장비를 보고 대비정규전을 기관에서 꼭 하여야 하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계원리 해안가의 비트사건도 있었고 이곳이 뒤숭숭할 때 용케도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교장 선생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바닷가가 아니고서는 겪어보지 못할 것이다. 편입된 예비군훈련도 교사에게 순회교육을 해안가 거주자는 4일간을 훈련하였다. 내륙지방에서는 2일이면 교육이 끝났다. 모두가 바닷가 해안에 근무한 덕(?)으로 안보에 철저히 호응하였다. 모포초교에 근무하면서 대비정규전 훈련을 확실히 실시하였다. 17. 영화기사하다 선생으로 참 복이 많은가 보다. 일 많은 복 말이다. 초임교사를 발령받고 나니 여러 가지로 행운이 따라 왔다. 내가 발령 받을 것이 아니라 여선생님 TO이었는데 마침 내가 발령을 받았다. 시골 초등학교(6학급 규모) 인사 구성상 교장, 교감, 교무주임, 회계선생, 여선생 1명, 남자 선생님 2명인데 여선생님 TO에 내가 발령을 받았다. 단일학급으로 구성된 학교에서는 특히 여선생님이 꼭 필요했다. 운동회 때 무용담당, 양호업무, 또 홍일점으로도 필요했다고 본다. 내가 발령을 받고 나니 교감선생님의 걱정이 태산이었다.남자선생으로 발령을 받고나니 4학년 1반 담임에 주 업무는 서무, 양호, 자료, 과학, 생산, 도서 업무 등 나열할 수없이 많았다.첫째 서무업무는 주요공문서 접수 및 수발, 기타업무 담당자가 없을 때 처리하여야 하고, 수시보고통제 공문서는 시도 때도 없이 와서 괴롭혔으며, 졸업증명, 직인관리, 재물조사, 당직배정 등 무수히 많다.둘째, 양호업무는 지역에 약방도 없었고, 군위생병 출신자가 경영하는 약포 하나가 오로지 있을 뿐이었다. 웬만하면 작은 부상은 양호담당선생이 치료까지 해 주어야 했다.셋째, 자료업무는 1∼6학년 전 과목에 쓰이는 자료실을 모두 관리 하여야 한다. 게다가 중간놀이 시간을 위한 음악선곡, 체조, 음반관리까지, 심지어 숙직실에 있는 TV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수시로 교육자료 구입과 대장정리, 분기별 자료 확충보고서 제출 등 이런 일들이 중첩되어 있다.넷째, 부수적으로 과학업무는 실험·실습자료 관리 및 시약·시료관리, 과학경진대회, 교육자료전 등 이의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다섯째, 생산 업무는 본래 11학급이상이면 새마을주임이 있어야 하는데, 새마을주임이 없으니까 이 업무도 나에게 배정이 되었다.여섯째, 도서업무다. 교양을 위한 도서뿐만 아니라, 교과서 수급·배정 및 교수학습지도서 관리, 연구보고서 관리 등 무수히 많았다.크게 나누어 보아 6가지 업무이었으나 이외에도 자질구레한 업무들이 모두 나에게 떨어지고 말았다.발령을 받자말자 교무주임선생님께서,"이 선생 공문서 작성할 줄 알지요?"라고 물으셨다."기본으로 작성하는 것은 『학교행정』과목 시간에 배웠습니다."고 하였더니,"허허허…. 그래서는 안 되고, 이리 와 보이소."작성의 기초실무를 보여주시고서는 당부가 있다고 했다. 앞으로 공문이 오면 해당 업무별로 분류하시고, 교무 및 연구업무에 대한 공문이면 접수와 동시에 기안하여 책상 고무판 밑에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시면 공문서 작성 기술이 빨리 익혀질 것이라고 하였다.정말 그랬다. 매일매일 공문서가 오는데 학급 수가 많던 적던 관계없이 공문서는 교육청이나 협조기관에서까지 똑같이 매일 오는 것이다. 초임에서 교무·연구업무에다가 기안하는 영광(?)을 안았다. 하도 기안을 많이 하게 되니까, 공문서 작성 기술은 일취월장(?)하였다.본래는 이것이 아니었고, "생산 업무"관련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너무 옆길로 빠졌다.생산 업무는 원래'새마을주임'이 맡아야 하는 업무인데 정원이 적어서 신참인 내가 맡았다. 교육청공문도 그렇지만, 협조기관인 면사무소나 군청 등에서도 공문이 온다. 공문이 온 것 중에 거창한 공문이 왔다. 당시 유신시대가 막 끝난 1973년이니까, 학부형에게 교양교육을 시키라는 공문이었다.첫째, 애국가를 4절까지 가르치고,둘째, 접붙이기 기능을 교육하고,셋째, 정신교육으로 "제주도 출신의 새마을 사업에 성공한 '돌하르방'이라는 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고 했다.교육받는 학부형들에게 점심을 대접하여야 한다는 추신도 있었다. 교육을 위한 예산까지 배정이 되었다. 아이구나! 이를 어째, 계획을 세워 실시를 하고, 사진도 촬영하여 결과보고를 하여야 한다. 마침 자료담당자로 포항시교육청에서는 각 면소재지마다 AV기자재센터를 두어서 "영사기 상영기술"을 배워 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실시계획을 작성하여 결재 맡고, 지정된 날에 참석할 수 있도록 안내장을 발송하였다. 학교가까이 계신 학부형을 동원하여 점심준비를 계획하고, 면소재인 장기초등학교 AV기자재센터에 영사기와 영화필름을 빌려왔다. 영사기 필름 끼우는 것도 연습하였다. 이제 만반의 준비를 하여 실시만 기다렸다.초등학교에서 이러한 학부형교육을 맡아서 하도록 한 최초의 공문 발상은 누가 하였을까?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씀에 이어 연수일정을 설명하고, 1차시에 애국가 4절까지 부르기를 하였고, 2차시에 실습지에서 접붙이기도 실습하였다. 이제 점심시간이 되어 국수를 준비하였다. 오후 교육은 정신교육시간이라서 "돌하르방"영화를 감상하면 되었다.드디어 솜씨를 발휘하여 필름을 16mm영사기에 장전하고 스위치를 올렸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바로 문제가 발생하였다. 100V 전기시설인데다가 학교에서 사용하는 전기이며 영사기를 돌리는데 자꾸 끄지는 것이었다. 40명이 앉아서 영화를 감상하여야 하는데 문제였다. 학부형들은 불평한마디 하시지 않으셨다. 시골이라서, 전압이 약해서 영사기가 돌아가지를 않는다. 안 그러면 조금 돌아가다가 서 버린다. 참 난감하였다. 일단 교장선생님께 보고를 드렸다. 그러자 이장님께서 마을회관으로 가자고 했다. 허가를 받아 마을회관으로 갔다.영사기와 필름을 들고 낑낑거리면서 이동하였다. 온 몸에 땀범벅이 되었다. 칠전 마을회관은 당시에 매우 협소하였다. 40명을 수용할 수 없어서 바깥에 서고, 겨우겨우 영화를 상영하고 학교로 돌아 왔다.이런 상황에 처해서도 천만다행인 것은 당황하지 않았고, 수료식을 마쳤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처한 상황이 과연 어떠했으랴. 정말 속으로는 당황하였고 초임에 온갖 일을 나에게 맡겨 두고 선배님들은 속으로 희희낙락(?)하였을 것인가?학교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만 하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교사이기 전에 한 기관의 조직원이고, 그 일원으로서 처리해야 할 잡무가 너무 많았다. 아이들 가르치는 것 1/3, 잡무 보는 것 1/3, 학부형 상대로 1/3이다. 정말 선생을 사표내고 극장이나 차릴까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어쨌든 나는 초임교사로서 모포초등학교에서 16mm 영사기를 돌렸다는 것이 나의 인생여정에서 가장 커다란 영광(?)이었다. 18. 보리 베기 하다 오늘은 봉사활동을 하는 날이다. 1973년 당시는 유신과업으로 교육기관에서는 매일 무척 바빴다. 국가 정책의 파급효과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에서 확인하는 것이 제일 빠르다고 하였다.모내기를 하려면 먼저 보리를 베어야 한다. 수요일 오후에 봉사활동을 하여야 하였다. 모포는 보리항구다. 보리항구답게 보리 베기 봉사활동을 하여야 했다. 그것도 초등학생을 대상이다. 모포학구에서는 기관이라고 모포초등학교, 파출소의 지소격인 초소(경찰 2명 근무), 행정으로 모포1리, 2리, 대진리, 학계리(재필)의 이장님이 계시는 것이 전부다.보리 베기 농촌봉사활동! 4학년이상 전원이 봉사활동을 나가야 한다고 한다. 4학년이래야 이제 6월로, 4개월이 된 고학년이다. 크게 저학년으로 1∼3학년, 고학년 4∼6학년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저학년에서 4개월이 된 고학년인 '4학년 봉사활동'을 어떻게 하여야 하나 그것이 걱정이었다. 날카로운 낫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보리를 베어야 하기 때문이다.나는 시골출신이라 낫질을 많이 한 축에 들어간다. 소 풀베기. 보리 베기, 벼 베기, 나무하기 등을 오랫동안 해 왔기 때문에 위험을 줄일 수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들 52명을 어찌할 것인가로 걱정이 태산이었다. 학교에서 양호업무도 맡았기로 응급상자와 붕대를 가지고 고학년(?) 농촌봉사활동을 하러 출발하였다.6학년은 6학년대로, 5학년은 5학년대로 출발하였고, 우리 반은 타 학급보다 인원도 많고 게다가 초보담임(겨우 한 달하고 며칠간)이라고 4학년에는 지도교사가 한 분 더 따라 오셨다. 보리밭으로 지나가면서 왠지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가 생각났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줄지어 보리밭으로 가는데 아이들은 재미가 나는지 곧잘 "꽁당보리밥"동요를 부르며 즐겁게 출발하였다.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둘러앉아 꽁당보리밥 꿀보다도 맛좋은 꽁당보리밥.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보리를 베어야 하는 밭으로 가서는 이장님의 주의사항을 들었다. 오늘 보리는 일단 밭의 보리를 베어 바닥에 깔아 놓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어서 내가 보리 베기를 시범으로 하였다."자! 모두들! 보리는 이렇게 베는 것이다. 아직 여러분들은 어리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이 잡지를 말고, 적게 잡아서 보리의 밑동에 낫을 넣어 당기면 베어진다. 이 때 낫은 왼쪽 보릿대 잡은 손가락을 주의 하여야 하고, 손가락을 베거나 다쳤을 때는 즉시 논에서 나와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야 한다."고 설명을 하였다.남학생들은 소 풀을 베고 한 경험이 있지만 문제는 여학생들이었다. 걱정이 태산 같아 조마조마 하면서도 시행을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난감하였다."자! 지금부터 보리 베기를 시작 합시다!"우리 4학년 52명이 일제히 보리밭 고랑에 붙어 서서 연거푸 낫질을 해 대었다."아야! 피….""선쌤요! 여기 손 베었어요!""여기도 손 베었어요!""여기서도 베었어요?""저기도 손 베었어요!""저기서도 베었어요?"마치 모기소리가 앵앵거리는 것 같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따라오신 한분 선생님은 붕대를 감다가 붕대도 모두 떨어졌다. 할 수 없이 러닝셔츠를 벗어 찢어서 감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진행을 할 수가 없었다. 남학생 중에는 왼손잡이도 제법 있었다. 여학생들은 아예 낫질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슨 보리 베기를 한다는 말인가?"자! 학생들은 모두 논에서 나오세요!"그래도 안 나오자 호루라기를 불어서 모두 밭둑으로 불러내었다. 그만 중지 시키고 그늘 밑으로 가서 앉아 쉬도록 하였다. 할 수 없이 나 혼자 밭에서 보리를 베기 시작하였다. 모포는 보리가 많은 보리항구라서 그 무덥고 긴 하루에 배당된 보리를 베고 나니 전신이 내려앉고 땀범벅이 되었다.학생들은 모두 낫을 위험하지 않게 가지고 온 낫집이나, 없는 학생은 헝겊으로 감게 한 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이렇게 선생 둘이 남아서 땀을 뻘뻘 흘리고 오후 참까지 베고 있으니까 그 때 6학년은 배당 받은 보리밭을 모두 베고 돌아오고 있었다.6학년 선생님 왈,"아이 구! 이 선생, 고생하네. 그런데 학생들은?""(…)집에 모두 보냈습니다.""아이, 그 저… 말이 고학년이지, 손을 베어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모두…."정말 속으로 울먹였다. 아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도 잘 몰랐다."그래 이것은 무리지. 말이 4학년이지. 3학년에서 올라 온지 이제 넉 달인데 집에서 낫질이나 해 봤겠어. 보리 벤다는 것이 무리지. 여하튼 수고했습니다. 이제부터는 6학년이 한꺼번에 베어 드리겠습니다.""예? 고맙습니다."역시 초등학교에 담임교사를 하더라도 6학년 담임을 하여야겠구나 생각하였다. 6학년이 오자 한 이랑씩 들어서서 보리를 베기 시작하였다. 한 이랑씩만 베어도 일시에 누에가 뽕잎을 먹어 들어가듯 솔발솔방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세워져 있던 보리가 가지런히 눕혀 버리고 말았다.모포에서 보리가 많이 생산되는 보리항구 버리꾸지[包衣浦]에서 농촌 보리 베기 봉사활동은 그래도 잘(?) 마쳤다. 19. 퇴비증산하다 참! 1970년대 교사라는 직업은 농촌에서 어렵고 힘들었다. 초임교사로서 업무를 여러 가지를 맡았다. 서무, 양호, 자료, 과학, 새마을(생산, 학부모 계도) 등 업무가 이래저래 겹치기도 하였다. 6학급 규모에서는 새마을 주임이 없어서 새마을업무를 내가 맡았기 때문에도 일이 더욱 번잡스럽게 많았다. 새마을업무는 대개가 면사무소에서 오는 공문으로 처리하고 보고하여야 하는 것이다.파리잡기, 모기잡기, 퇴비증산, 시범 묘포장 관리, 학부모 계도에는 애국가 교육, 새마을정신교육용 영화(16mm)상영, 생활개선 등 부과되는 일이 학교선생이기 전에 잡무가 쏟아졌다. 그것도 모두 실시한 후에 사진을 찍고 일목요연하게 보고서를 만들어 발송하여야 했다.이 새마을업무를 하면서 우스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면장 명의로 공문이 왔다. 담당 선생님이 바빠서 실시하지 못하고 보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면장이 학교를 찾아와서 교장선생을 찾으니 마침 출장을 갔다고 하니까, 이제는 교감선생님을 찾으셨다. 교감선생님이 나오셨다. 면장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다짜고짜로 교감선생님의 뺨을 때려 버렸다.교감 선생님 왈,"왜 나를 때립니까? 이렇게 때릴 수 있습니까? 급수가 높아도 내가 높을 낀데."그러자 면장 왈 서슬이 시퍼렇게,"그래? 왜 못 때려. 당신은 감이지만, 나는 장이기 때문에 때렸다. 왜? 내가 왜 못 때려?"적반하장이지. 교원은 별정직이고, 아울러 급수가 교장선생님이 한참 높으며, 아울러 교감선생님도 급수가 높다. 면장이래야 당시 4급 을직 사무관(오늘날 5급)이다. 정말 웃지도 못할 해프닝을 벌리고도 행정이랍시고 하고 있을 때였다.또 퇴비증산으로 우스개 이야기가 전해 왔다. 대통령께서 청하 보경사로 방문이 있었는가 보다. ××면 어디 마을이지 싶다. 관광지라서 분명히 대통령께서 퇴비증산에 관심을 보이실 거라 생각은 했다고 한다. 급하게 퇴비증산을 한다고 마을 어귀에 퇴비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할 일이지. 물론 갑자기 퇴비를 모으려니까 힘은 들었겠지. 꾀를 내었다고 한다. 산에 소나무를 아름 채 베어다가 속에다 쌓고 정말 거나하게 퇴비를 겉에다 발라 쌓아서 대단한 퇴비증산의 시범지처럼 만들게 되었다. 드디어 대통령이 지나가면서 유별나게 퇴비를 잘 만들어 둔 것을 보시게 되었다고 한다. 대통령께서는 마냥 흐뭇해하면서 반드시 현장을 확인하시는 것이었다. 퇴비가 잘 쌓아진 현장에 도착해서 속을 헤집으니까 과연 퇴비가 그 속에까지 있었겠는가. 담당공무원은 즉석 징계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다.이런 얘기를 듣고서 아무 일없이 넘기려면 보고를 잘 해주어야 하는 시대이었다. 사실 학교와 면사무소 사이에 위계가 어디 있으랴. 기관으로서 협조할 수 있는 것은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 않는가. 면사무소에서 온 공문도 있고 해서 학교에서 퇴비의 양을 채워 두어야 했다.자유학습의 날에 퇴비를 모으기 위해서 고학년이 동원되어 풀베기에 나섰다. 풀베기는 위험요소가 있었다. 무성한 풀을 덥석 베다가는 그 속에 뱀이 나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말벌이 나오기 때문에 세심한 준비와 응급약품을 반드시 지참해서 가야했다.집에서 가져 오는 것은 1인 한 자루의 낫과 장갑, 새끼를 약3m 정도를 준비하라고 했다. 고학년이 출발하여 지역 하천가 제방에서 풀을 베기 시작하였다. 응급약품을 준비하여 갔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무 불상사가 없었다.모두가 풀을 베어 새끼로 묶어서 학교 퇴비장에 가지고 왔다. 남학생들은 어께에 짊어지고 오고, 여학생들은 머리에 이고 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이 또한 장관이 아니랴. 그리고 퇴비를 갖다 잘 쌓아 두었다.매일 공부하던 학생들은 방학이 되어 모두 각 가정으로 돌아갔다. 나는 업무상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퇴비장에 가 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고학년 전체가 그렇게 많은 풀을 베어다가 퇴비를 만들어 두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어졌다. 풀이 삭아서 모두 녹아버렸다. 퇴비가 되려면 풀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하나?고용원 아저씨 왈,"방학이 끝나는 동시에 면에서 퇴비증산 심사가 있다."고 일러 주었다. 이제 큰일이 났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풀을 베어다가 퇴비장을 만들어 두었는데 모두가 삭아 없어져 버리고 심사는 온다고 하니 이 일이 큰일 아닌가?어쩔 수없이 교장선생님의 허가를 받아서 비상연락망을 동원하여 학생 1인당 2Kg씩 퇴비를 베어 오라고 했다. 등교하는 첫날에 풀을 지고, 이고 또 오게 되었다. 이 모두가 초자선생의 업무 미숙의 탓이었다. 새로이 퇴비장을 만들고 수선을 떨어야만 했다.풀을 끌고 와서 퇴비를 만들어야 되는 곤욕을 상상해 보라. 이 일을 하기 싫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무던히 참고 국가시책에 공공기관으로서 협조를 하여야만 했다. 내가 업무 잘못하면 나도 면 직원에게서 뺨 맞으랴.풀을 베어모아 묶어 학교까지 가져오기가 그 절차며 그 수고로움이 어떠하였겠는가? 그 당시로서는 아무도 불평 없이 모두가 국가시책이라는 새마을정신으로 그저 꿋꿋이 지킬 수밖에 없었다. 20. 논두렁콩 심다 1974년 면사무소로 부터 온 공문은 논두렁콩심기 지원을 나간 후 그 실적을 보고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 또한 대통령의 농촌에 대한 대단한 정부시책이었다. 왜냐하면 한 치의 땅도 귀중한 시대였다. 논에 모만 심어 둘 것이 아니라 논과 논 사이에 논둑이 있어서 둑이 물만 가두는 역할이 아니라 그 둑에 무언가를 생산하여야 한다는 취지이었다. 즉 이 취지가 어린 학생이 있는 개개인 가정마다 어릴 때부터 머릿속에 심어 주라는 의미가 부여 되어 있었다.어려서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호박과 배추를 심은 적이 있다. 물론 이를 잘 가꾸어서 가정마다 호박과 배추를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주었다. 이는 그것의 생산만으로 다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공간에도 그냥 두지 말고 무엇인가 생산을 하여서 가정에 도움이 되라는 의미일 것이었다.아무도 불평 없이 또 자유학습의 날을 이용하여 모내기가 끝난 논두렁으로 동원이 되었다. 이러한 일도 이장님과 함께 동원되어 지정하는 논두렁에 콩 심기를 하여야만 했다. 논두렁콩심기는 단단히 주의하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논에 빠지기는 예사고, 문제는 논두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으며, 심어 놓은 모도 헤치기 십상이다.이장님께서 학생들을 불러 모아 놓고 "논두렁콩심기 시범"을 보여 주셨다. 먼저 논두렁의 흙이 손으로 잘 매만져 있는 둑에 작대기로 일정량의 간격으로 구멍을 뚫고 먼저 지나가면 뒤따라가는 사람이 한 구멍에 논두렁 콩 2∼3알씩을 넣어주어야 한다.이제 학생들이 논두렁 콩 심기를 시작하였다. 정작 많은 학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작대기로 구멍을 뚫고, 따라가면서 콩을 2∼3알씩 넣어 주면 되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구멍을 뚫는 사람이 적당한 깊이로 뚫어 주어야 한다. 작대기에 깊이 한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헝겊을 묶어 주었다. 그 깊이만 눌러주면 되는 것이다. 이제는 몇 조를 나누어 논둑 중간마다 시작하여 일을 빨리 마치도록 해 주었다.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은 장난도 치므로 논두렁콩심기 현장을 견학하도록 줄 지어 앉히었다. 그러자 체계도 있고 현장관찰공부가 되었다.요즘은 밭에 콩 심을 때는 기구로 하여 혼자도 심을 수 있다. 좋은 세상이다. 농기구는 이렇게 편리하게 발전하였다. 구멍 뚫고, 콩이 내려오고, 뒤에 롤러에서 묻어 주고 일목요연하게 혼자서도 콩을 잘 심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과학이 농기구까지 이렇게 만들어 많이 발전하게 되었다.안 된다고 손 놓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연구하고 생각하면 없던 돈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작은 종자돈으로 또 그 생산을 늘리게 되면 급기야는 큰 공장까지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새마을정신이다.점심시간에 배곯았던 지난날 우리 시대를 보라! 지금은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그 원동력이 되지 아니한가? 논두렁에 콩 심기까지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다. 작은 일이 큰일을 만들어 주게 되니까 그러한 것이다. 그것이 잘 살게 될 수 있는 힘이다. 모포초교에 발령을 받아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 논두렁에 콩 심기를 체험하고 그 현장을 관찰학습까지 하였다. 21. 피사리하다 또, 면에서 공문이 왔다. 피사리에 협조하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계획을 세워 고학년(4∼6학년)은 수요일에 또 동원하여야 했다. 초등학교이면서 곧잘 정부시책에 동원이 되었다.피사리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농작물에 섞여 자란 피를 뽑아내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 피사리 하는 이 식물의'피'란 무엇인가? 벼와 같이 자라지만 나중에는 월등하게 자라서 벼 생육에 방해가 된다.피는 외떡잎식물인 벼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이다. 키는 1m에 이르며 뿌리는 깊게 내린다. 잎은 벼의 잎과 비슷하지만 잎혀와 잎 귀가 없어 구별된다. 꽃은 8 ~ 9월경 줄기 끝의 수상꽃차례에 무리 져 피고, 이삭의 길이는 10 ~ 30㎝이며, 낱 꽃에 까락이 있거나 없다. 열매가 맺힌 이삭은 조와 비슷하지만 조보다 좀 엉성하고 암 황갈색을 띤다.논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모판에서 아예'피사리'를 한다. 왜냐하면 2∼3포기로 모내기를 하는 데 잘못하면 이앙 후에 논에 자라면서 벼 생육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 방해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논에 벼가 보이지 않고 새카맣게 피만 올라 와 보인다. 그 논벼는 폐농이 된다. 옛날에 가뭄이 들면 벼는 물이 없어 죽어도 이 피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시골에서는 "피 논"이라고도 한다.어려서 아버지의 명령으로 모판에서 피사리를 하여 보았는데 정말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모판에서 피사리를 잘못하면 모종인 벼를 다 뽑아 낼 수 있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웠다. 모판에 피사리를 할 줄 알면 농부가 다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판에서 피사리를 하려면 어지간히 자세하게 관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햇볕이 쨍쨍하게 나서 똑같이 생긴 모판에서 천천히 관찰하면서 특이하게 드러나는 피를 골라서 뽑아내어야 한다. 얼핏 보면 그놈이 그놈 같다.학생들의 피사리는 모내기를 하여 벼가 논바닥에 자라고 있다. 이미 피키가 더 큰 것을 제거하려는 것으로 '피사리'라고 한다. 즉 이미 벼와 함께 자란 피를 제거하여야 내년 농사에 방해가 되지 않으며, 피가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면 늦기 때문이다. 피가 열매를 확산시키면 다음 해 논농사에서 다시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왜 이러한 피사리를 학생들까지 동원하였나? 본래 논농사를 하면서 소득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소득을 줄이는 역할을 이 피도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 모판에서 못한 피사리를 크게 자란 후 벼와 구분이 잘 될 때 일손이 부족한 논부터 동원하여 이 피를 제거 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말이 4학년이지 아직 어린아이인데 피사리를 어떻게 하여야 하나 오늘도 이장님이 함께 하셨다. 오늘 하는 일을 설명 하셨다."여러분! 이곳은 우리 동네에서 농사짓는 곳입니다. 여러분들! 보십시오. 벼보다 높이 자란 놈이 '피'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뽑아내면 됩니다. 뽑은 것은 반드시 밖으로 가지고 나와야 하며, 그 자리에 버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벼를 다치지 않게 조심하여야 합니다."주의사항을 마치고 아이들은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무논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신나하면서 피를 뽑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여학생은 어려워하고 힘이 모자라서 피를 잘 뽑지도 못한다. 정말 힘든 봉사활동이다. 물론 국가에서 이 초등학생까지 동원하여야 하는 정부시책도 그렇지만 이를 실행하러 나온 나도 힘들어 하였다.시간이 흘러갔다. 남학생들이 뽑고 여학생들이 들고 나오기 시작하였다. 큰길가에는 뽑혀진 피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자꾸자꾸 쌓였다. 정말 이 학생들이 얼마큼 도움이 되랴 했는데 막상 해보니 많이도 뽑아내었다. 이것이 봉사활동의 묘미이기도 하였다. 고사리 손이 정부시책에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한창 피사리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자전거 한 대가 급히 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면서 인사를 꾸벅하였다."아이 구! 선생님 수고하십니다. 모포초등학교 학생들이 피사리 봉사활동을 나오셨구만요?""아, 예. 누구십니까?""면에서 나왔습니다.""그래요.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하지요.""그래도 학생들이 잘 하고 있습니다.""예?"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불만이 없을 수 없다. 말이 고학년이지 이제 4학년을 남·여학생 52명이 혼신을 다 하고 있었다.피사리는 아주 간단하지만, 어린 학생을 동원한다는 것이 못내 미안하였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피사리"라는 것을 흠뻑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1973년의 피사리 농촌봉사활동이었다. 22. 초등교사의 출장애환 이제 발령을 받은 지 3년차이다. 그리고 6학년도 맡았다.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교사생활을 하였다. 나는 특히나 이 학교에 처음 발령을 받아서부터 4학년을 받아서 그 학생들을 5학년, 그리고 6학년까지 지속적으로 3년간 담임을 맡았다. 아울러 결혼도 하여 가정이 있고, 아들까지 낳은 상황이었다. 그저 모두가 살아가는 진행(?)이 잘 되고 있었다. 나는 열 번째 막내로 이제 자리를 잡아서 아내와 아이와 함께 그것도 바닷가에 작은 초교에 발령을 받아서 열심히 근무하고 살았다.경주 고향에서 어머니께서도 가끔 들리셔서 고마웠다. 내자도 어머니를 좋아하였다. 늦게 낳은 막둥이와 손자도 보시고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랐다. 그리고 맡은 업무도 나날이 더해 갔다. 일요일도 없이 학교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성취하였다. 아니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 하였다. 교사이면서 행정을 모두 도맡았다.출장이 잦았다. 6학년 담임으로서 어느 달엔가 확인해 보니까 30일 기준에 일요일 빼고 26일 근무 중에 출장이 자그마치 17일! 학생들 공부는 언제 가르치랴! 65%가 출장이다. 물론 출장도 하루 종일 가야 되는 것도 있지만, 잠깐 면소재지로 사진 현상하러 갈 때도 있다. 출장 가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한번은 아침밥을 거르고 첫차로 포항시교육청에 출장을 갔다. 그날따라 비가 왔다. 모포의 유명세가 있는 땅고개! 땅고개는 유명하였다. 왜냐하면 '모포 처녀가 시집을 가서 10년 살아도 한번 붙은 고무신의 흙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 유명한 땅고개 흙이다. 출장을 간다고 구두를 깨끗하게 닦고 나왔는데, 그 땅고개 흙이 달라붙기 시작하여 온통 내 구두에는 밑바탕을 넘어 구두 위까지 올라 앉아 흙 구두가 되고 말았다. 버스에 오르기도 민망할까 보아 정류소에 기다리면서 무덤 옆 잔디에 구두를 닦고 또 닦았다. 그래도 완전하지를 못해 버스를 타면서 버스기사 눈치를 안볼 수가 없었다. 포항에 도착했다. 문제는 회의시간이다. 급히 택시를 타고 교육청에 들렸다. 회의장소가 바뀌었다. 또 급히 택시를 타고 당시 중앙초등학교 강당으로 들어갔다. 웬걸 학무과장님의 훈시가 있었다. 훈시 중에 들어갔으니 훈시를 중단하고서는,"방금 늦게 들어오신 선생님은 어느 학교 선생입니까? 회의에 오시는 분이 정신이 빠져서 이렇게 늦게 오시다니 되겠습니까? 새마을정신이 빠졌습니다. 빠졌어, 나중에 보고하십시오."억울했다. 시골초등학교가 있는 것을 모를 리 없겠는데, 그렇게 혹독하게 나무라시니 정신이 확 들었다. 아침도 굶고, 비오는 날에 흙과 사투를 하면서 버스를 타고, 택시타고 해도 늦는 것을 어찌하랴. 개인적이라면 몰라도 공무 출장을 와서 내가 늦게 도착했으니 당연히 들어야할 소리쯤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명색이 교육청 학무과장님이 시골교사의 항변을 받아 줄 것인가?또 출장비는 문제 중에 문제이었다. 출장비는 "공무원의 출장 여비는 법령(공무원 여비규정 제28조-여비의 조정)에 의거 각급기관장의 책임 및 재량 하에 예산의 범위 내에서 지급하도록 되어 있으며, 해당 공무 여행시 여비의 전부 또는 일부항목의 지출이 불필요하거나, 해당 정액보다 적게 소요되는 것이 명백한 경우에, 여비지급액이 예산의 범위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여비의 정액을 감액하거나 여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급하지 아니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비의 조정 및 지급결정은 각급 기관장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물론 그 당시는 이런 법령이 있는 것조차 몰랐다. 그저 교감선생님이 확정하여 경리선생님이 돈을 주면 받는 것뿐이었다. 예를 들어 포항까지 왕복 시내버스비가 160원인데 출장비라면 하다못해 최소한으로 버스 왕복 차비 320원은 주어야 할 텐데, 출장비라는 게 고작 250원이다. 이것도 감지덕지다. 출장비 예산이라는 것이 3개월마다 배정되어 오는데, 분기(3, 6, 9, 12월) 초에는 교장, 교감선생님이 출장을 자주 가시면서 출장비를 모두 받아 가 버리면 분기 말에는 이마저 출장비가 없다.그것도 교장·교감선생님의 출장 책정비는 관내 1회 1,000원씩으로 많이 배정해 주고, 교사가 출장을 가면 겨우 250원이다. 실비도 아니고 아예 실경비인 차비왕복비도 모자라는 금액이다. 지금에서야 겨우 알았다. 기관장이 결정하는데,『여비 지급액이 예산의 범위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여비의 정액을 감액하거나 여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급하지 아니 할 수 있다.』하였다. 이것이 법령이요, 법(法)이다. 그러면 평교사는 무엇인가 박봉에 공무 출장비까지 뜯어 가다니. 출장비가 적다고 하면 교감선생님은 이 법령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쉽게 말해서 법을 최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었다.바로 억울하면 '출세하라.' 그래서 나는 회식이 있어서 노래를 하라면 반드시 "회전의자"를 불렀다.(1절)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사람 없어 비워둔 의자는 없더라.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 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2절)돌아가는 의자야∼ 회전의자야 과장이 따로 있나 앉으면 과장인데 올 때 마다 앉을자리 비어있더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보자고 밟아버린 젊음을 즐겨보자고 아∼ 억울해서 출세했다. 출세를 했다.이것이 시골학교 교사의 출장애환이다. 또 사무(私務)는 교장, 교감선생님께서 하셨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다. 제3부 청춘을 묻으며 23. 당직 몰아하다가 아버지 여의다 나는 열 번째로 태어난 막내다. 아버지 51세, 어머니 44세에 나를 낳아 주셨다. 형님 네 분, 누님 다섯 분으로 모두 윗분이시고 나는 막내다. 흔히 남들은'열 번째 막내는 얼마나 행복 하였을까?'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초등학교 3학년 때에 아버지께서 회갑을 맞이하셨다. 1959년이었다. 오래 살지 못하는 시대였었다. 예순 하나가 되면 회갑이라 하여 성대한 잔치를 하는 것이 사회적인 관례이었다. 회갑연에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부조를 가지고 오는데 현금은 없으며 거개가 현물이었다. 부조기에 본동 김××댁 감주 1동, 본동 이××댁 탁주 1동 등이라고 적었다. 마치 향약두레로 보인다. 회갑연에 모두가 돈을 내지 않고 이러한 예물을 들고 오시는 것이 부조인 시대였다.막내라서 장가를 일찍 들여야 한다고 하셨다. 일찍 결혼한다는 것에 뜻이 별로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중등준교사 국어시험을 보아서 중등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초교 교사로 부임한 첫해에 그 뜻을 펴기 위해서 겨울방학 당직을 일찍 당겨 정해서, 빨리 마치고 대구 학원에 등록할 생각으로 당직(일·숙직)을 당부하여 방학 앞 일정에 몰아 두었다. 방학이 되자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고향 가고 휴가를 가고 하셨다. 당직 15일간을 당겨 모아 하루하루를 근무하고 있었다.1973년 12월 21일에 전보가 날아들었다."부친상급래."당시로서는 초교에서조차 전화가 없을 뿐 아니라, 이 전보가 최고의 통신수단인 시대이었다. 설마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아버지가 돌아 가셨겠나 아니겠지. 그냥 흘려보냈다. 그런데 당직을 근무하고 있는데, 또, 전보가 왔다."부친상급급래."설마 나의 아버지가 진짜 돌아 가셨겠나 아니시겠지, 또 그냥 흘려버렸다.이튿날 전보가 또 왔다. 이번에는,"부친상급급급래."아니 이게 정말일까? 벌써 전보를 3통이나 받고 보니 당황하고 황당했다. 전보를 치고, 받는 사람의 문자 표기가 부정확하였다. 그래도 자꾸 전보가 오니까 반신반의하면서도 교무선생님께 당직을 당부하고 땅고개로 올라가서 버스에 몸을 실었다.경주시외버스주차장에 내리는데, 질녀가 포항 가는 시외버스를 타려는 찰라 였다. '아차! 기어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구나.'하고 그제야 겨우 정신이 확 들었다."야! 희야 어디 가니?"유일하게 내가 근무하는 이곳 모포를 알고 찾아 올 수 있는 사람은 백형의 큰딸인 큰 질녀뿐이었다."삼촌! 삼촌 아이가? 그래. 여태껏 뭐하고 있었노? 응? 와~ 이제 오노.""와? 무슨 일이 일어났나?""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카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전보를 몇 번이나 쳐도 안 오고…."질녀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하여 보였는가 보다. 질녀지만 나와는 세 살 차이로 대화가 마구 되었다. 전보를 혹시 못 받은 줄 알고, 다시 전보를 치다가, 치다가 그래도 안 오니까, 이제는 직접 찾아가는 중이었다. 요즘이야 휴대폰도 있지만, 그때는 기관인 학교에서조차도 전화가 없던 시대였다. 시대가 시대인만치 정말로 아날로그인 그런 시대이었다.집에 도착하니 마을입구부터 시끌시끌하게 북적되고, 벌써 여러 장의 만장들이 펄럭이었다. 들판에까지 천막이 쳐지고, 친지들이 많이 와 계셨다. 또 이웃사람들로 북적이었다. 친지들은 재․종반 외에도 삼종, 사종까지도 많았다. 아버지 재․종반이 스물여덟 집이나 되니 정말 많았다.늦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뵈었다. 궁금했던 것은 평소 편찮으시지도 안했으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여쭤보았다. 숙형께서 알려 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초겨울이 들면서 아버지는 사흘 동안이나 감기를 하셨다고 한다. 그 날도 백형, 중형, 숙형 등 세 분이 같이 자리를 했다고 한다. 계형은 멀리 경남 충무 한산도에 돈 벌러 가셨고, 막내인 나는 시골초교에서 선생 한다고 못 왔다. 오전에 세 분이 모여서 기다리는데 아버지 왈 바쁜 사람들은 일하러 가라고 말씀을 하셔서, 백형은 시장에 나가시고, 중형은 앞산에 나무하러 가셨고, 숙형 혼자만이 그래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버지 곁에 종일 계셨다고 한다. 덕분으로 숙형만이 종신을 하셨다.어떻게 보면 아버지께서는 참 건강하셨다. 우리 열 자식뿐만 아니라, 큰 집, 작은 집 등의 조카, 질녀 모두를 혼사시키셨다. 큰아버지는 일찍 돌아 가셨고, 작은 아버지도 회갑 전에 돌아가셨다. 하기는 할아버지도 예순 전에 돌아 가셨으니 단명 집안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만큼은 집안에서 최장수를 하셨다. 당년 일흔 여섯에 운명을 하셨다.나는 눈물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셋째 누님께서는'아이고! 저것 봐라, 저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네.'라고 나무랬다. 사실 나는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안 나온 것인지, 매몰차서 눈물이 없었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스물다섯 살 총각만 두고 가셔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약 한 첩 올리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아파 했을 뿐이다.하기는 막내를 두고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당 다니고 신학문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초교 졸업하고 또 서당에 2년간 다녔다. 독학으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하려고해도 또 신학문을 하지 말라고 말리셨던 아버지, 그래서 직접 돈 벌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려는데 끝까지 말리시던 아버지라서 그랬는지. 정말 나도 모르게 아버지와 나와의 거리가 있었고, 대학을 다니면서 하루 5시간 아르바이트에 3시간 군대훈련, 아침 끼니를 직접 끓여 먹어야 하고, 점심은 굶다시피 저녁은 아르바이트 집에서 만찬을 얻어먹고 돈 벌고, 공부하기에 내가 너무나 지쳐서 그런 거리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나 늦은 도착으로 아버지 장례일정은 하루를 늘인 4일장으로 치르게 되었다. 그것도 경주에서 50년 만에 추운 맹동, 영하 14도 날씨인 197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어머니께서는 나를 안 보려고 돌아 앉으셨다. '그렇게 네 아버지 살아 계실 때에 장가를 가라고 했는데, 말 안 듣는 자식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난감했다. 어쩔 것인가? 나의 뜻을 굽힐 것인가? 굽히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많은 불효를 저질렀다. 막내 자식을 결혼시켜 놓고 편안히 눈감으셨으면 좋았을 것이다. '부모님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여도 바람에 흔들리며,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왜 몰랐던가? 아주 늦게야 알았다. 나 같은 경우는 막내로 부모님이 나를 기다려 주실 수 없는 것이다.6학급 규모에서 50여 일간이 넘는 긴 겨울방학! 이의 관리를 위하여 선생이기 전에 당직자로 일․숙직을 하여야 했다. 정말 선생이기 전에 양 어께에 무거운 중압감이 가득했다. 당직자는 학교시설을 보호하고, 공문서를 처리하여야 하며, 어려운 업무가 있을 시에는 담당 선생님을 또 호출하는 것이었다. 정말 교사로서 국가공무원으로서 그 책임이 막중하였다.아버지를 여의고, 아니 돌아가시고서 많은 갈등이 왔다. 중등준교사 국어선생님의 꿈을 버렸다. 결국 그 갈등이 오래 가지 못하고 1974년 2월 25일 종업식 하고 나서, 선보고 그해 4월 20일에 결혼하고야 말았다."아! 아버지! 나의 아버지! 죄송합니다."땅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응당 결혼은 할 것인데 그 타이밍이 문제이었다. 같은 값이면 붉은 치마라고 하였는데, 아버지 살아계실 적에 결혼을 하였더라면 나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지금도 이의 갈림길에 누가 답을 옳게 해 줄 것인가?결혼인 인륜지 대사를 놓고, 아버지를 여읜 자식으로서 나의 지론과 모포초등학교의 당직과 공직으로 얽매인 몸으로서 판단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는가는 오늘도 자꾸 의문이 생긴다. 24. 숙직실에서 계형 만나다 지금은 세상이 모두 참 빠르고 편의하다. 삶에서 상당한 선진국형으로 진입하면서 도로 포장과 교통의 편리, 개인의 통신이 극도로 발전되어 살기 좋은 금수강산의 대한민국이다. 집들도 건축재가 수입되고, 언덕 위에 그림속의 동화처럼 집 짓고 살게 되었다.간혹 시간이 나면 대포도로(대구-포항고속도로)를 통하여 포항 북부시장 입구 포항 물회집에 들러 한 그릇하고, 포스코를 지나 부추의 고장 청림, 아니 청포도가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청림을 지나 도구, 약전, 흥환, 구만리, 호미곶을 거치며 석병, 강사, 구룡포 해수욕장, 그 옛날 고래 해체작업을 하던 구룡포항, 삼정, 구평을 지나 모포에 간다. 그렇게 자가용을 타고 질주를 하여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기는 칠전, 대진, 신창, 앙포, 계원, 두원, 연동, 오류 감포 해수욕장을 지나 전촌, 팔조 고개를 넘어 노동, 양북면 어일, 와읍, 토함산이 보이는 곁으로 경주 관해동(觀海洞) 추령(秋嶺)을 넘어 덕동, 천군 보문호를 지나면 경주를 통과하고 건천, 영천, 경산을 지나서 대구로 들어선다. 휴우! 세월 한번 좋다.요즈음 이렇게 좋은 세월에, 좋은 세상에 살아간다. 내가 근무하던 모포초등학교는 정말 바닷가 오지 중에 오지이었다. 교통이 불편하여 잘 찾아오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파도 약을 살 수 없던 그런 곳이었다.1973년 5월 첫 발령을 받고서 나의 청춘과 정열을 모두 바치었다. 학습지도와 출장과 학내 담당업무와 또 퇴근 후 교사간의 화목과 방문해주시는 학부형과 교장 선생님, 교감선생님의 지시사항, 교무주임선생님의 업무지시 등도 모자라서 학년간 예체능 수업(나는 풍금 치는 음악학습)협조까지 가리지 않고 무엇이고 적극적으로 무서우리만치 처리하였다.모든 것을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싫어하지 않고 마다하지 않고 무조건적 헌신으로 진행하였다. 심지어 자료실 관리에서도 몇 십 년이고 묵은 때를 모두 닦아 내었고, 도서실 업무에도 모든 책을 쓸어내리고 닦고, 조이고, 떨어서 새로 설치하다시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놓아 둔 묵은 때를 떨어내었을 때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하였다. 수업에도 열심히 하여 너무 열심히 하여 기어이 목이 부었다. 야간에 과외로 1, 2, 3학년 내용의 도구학습인 위계수업을 맡아 지도하였다.침도 넘기지 못했다. 먹지도 못했다. 아니 찬물도 넘기지 못했다. 이를 어찌하여야 하나? 그래도 현장수업은 바로 들어가야 하고, 목이 아파 소리를 내지 못하고 판서로 대치하고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이제는 기운이 없어서 걷지도 못했다. 이러한 마당에 교무주임선생님이 오셨다."이 선생! 이러면 안 되지, 죽지. 아니 끝나지. 오늘은 좀 쉬어 봐!""…(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하면서 예로 대신함)."드디어 쓰러졌다. 반장이 소리치고, 교무주임선생님이 다시 오셨다. 나를 숙직실로 데려갔다. 이제 비로소 눕혔다. '아! 모든 사람은 이래서 죽는다. 나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삼단 논법이 따로 없었다. 내 몸이 쓰러지라고 달려드니 기어이 쓰러지고 마는구나. 죽는구나. 숙직실에 누워서 이불을 덮고 있으려니 더욱 쓸쓸했다. 여학생 부반장이 떠다 준 냉수 한 주전자! 냉수만 동그마니 남아 있었다. 서글픔에 못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장가도 못가고 총각 귀신이 되는 구나. 내가 왜 이러나.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선생이기 전에 행정 사무원이요, 선생이기 전에 경영관리자요, 선생이기 전에 사회 조직원이었다. 이 모두를 떠안고 가야 하는 '선생이란 직업'이 주어진 긍지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가. 왜? 너무 힘들었다. 이 직업을 어떻게 뚫고 저 노련하신 선배님들의 뒤를 개척하여 따라 간단 말인가? 이래저래 아픈 사이에도 고민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고민 또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숙직실에 어둠이 내렸다."계십니까?""….""아무도 없는가?"하고서는 숙직실 미닫이문이'드르륵'하고 열렸다. 불도 켜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방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알아보고서는 아니 깜짝 놀라 하신 분이 계셨다.겨우 몸을 추서려 일어나면서 보니까 나의 계형(季兄)이셨다.나는 형님이 네 분 계신다. 백형이 계시고, 중형, 숙형, 계형이 계신다."…(아이 구 형님!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말도 못하나? 우예 됐노? 사람이 왜 이래? 응? 말 좀 해 봐라."그때야 내가 연필을 찾아 글로 썼다. 그런 것이 아니고, 목이 아파 말을 못한다고 하니까, 그러면 약이라도 지어 먹지 무엇했느냐고 하신다. 여긴 약국이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뭐라도 있을 것 아니냐? 약포만 있어서 그런 약은 없다고 하니. 그러면 포항이나, 장기라도 나가면 된다고 한다. 그것 몰라서 안 나간 것이 아니고, 업무가 바빠서 약 지어먹을 생각조차 못하다가 오늘 드디어 넘어져서야 이렇게 누워 있다고 하였다. 아이 구! 답답한 이 동상아 하신다. 내가 생각해도 답다운 사람이다. 그 날 저녁에 숙직실에서 내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계형이 지나는 화물차를 잡아타고 구룡포에 나가서 용케도 편두선염 약을 지어 오셨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계형께서 지어 오신 편두선염 약을 먹고 푹 쉬었더니 그래 이제 입이 떨어진다. 나에게는 네 분의 형님이 계신다. 백형, 중형, 숙형, 계형으로 모두 친형님이시다. 보통사람으로는 이런 명칭까지도 없을 텐데 말이다.계형은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시다. 그러니 방문한 해에 서른 살이시었다. 울산에 사시면서 감포에 우연히 오면서 모포초등학교에 선생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어서 찾아오신 것이었다. 계형은 기어이 걸어서 밤새 금오로 나가시고, 화물차를 얻어 타고 감포로 가시고 말았다. 못내 주무시고 가시라는 나의 뜻이 전달되지 못하고 그냥 헤어졌다. 그 후로 계형은 보지 못했다.넷째 형수님과 조카, 질녀를 두고 전기기사로 열사의 나라인 바레인으로 출국하셨기 때문이었다. 3년이 지난 뒤 형수님이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그 때서야 계형이 다시 귀국 하셨다. 우리네 인생사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열사의 나라에서 돈을 벌어 오면 행복하게 사실 줄 알았는데 형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형수님께서 운명하시다니 애석하기 그지없었다.넷째 형수님이 살아 계실 때 형수님 집에 갈 때면, 내 목소리가 계형의 목소리와 흡사하다고 하셔서 마치'형님이 오신 줄 알고 깜짝깜짝 놀라'하셨다. 이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시고 영면하신 형수님 못내 송구합니다. 지금이사 이 말씀 드리니 송구하고, 죄면 서럽습니다. 부디 구천에서라도 계형을 보살펴 주옵소서. 그리고 구천에서라도 행복하십시오.나는 그 후로 무리하면 꼭 편도선염이 와서 침도 못 넘기는 고생을 하다가, 1974년 4월 25일 결혼 후부터는 내자가 있어서 보신을 많이 하고 목을 보호하는데 충실하여 많이 나아 졌었다. 누구나 직업병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목에 신경이 쓰인다. 가족력으로 먼저 숙형께서 후두암으로 65세에 돌아가셨다. 이어서 백형께서 후두수술 후 한 달 만에 71세에 돌아가셨고, 그러나 용케도 중형은 천식으로 해서 79세에 돌아가셨다. 계형은 오늘날까지 생존하신다. 아마도 위장이 안 좋으신 모양이다. 나도 어떤 질병으로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후두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또, 요즈음 여성에 흔한 갑상선 중에도 저하증이 의심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태어난다. 그러면 살다가 죽는다. 물론 이 죽음이 어떠한 과정을 가지고, 삶의 종지부를 찍히느냐에 차이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죽는다.나의 학위 졸저인'김동리 소설에 나타난 죽음의 양상연구'에서는 비록 문학이지만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이라는 대명제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보면 시대 차이는 나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에 따라 결론이 나고 마는 것이다. 즉, xyz 좌표상에서 보아 태어나면서 그 과정에 따라 자연회귀냐, 영원회귀냐, 구법적(求法的) 회귀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25. 신혼살림 성공기 아! 1974년! 나의 인생에서 1974년 4월 20일 10:00 대구 삼성예식장에서'따~안~ 딴~따~ 단, 따~안~ 딴~따~ 단…'웨딩마치를 울리고 한 쌍이 나의 일가(一家)를 이룬 날이었다.초등학교 교사생활 1년 만에 낙찰계를 들어 그 돈으로 결혼을 하였다. 아니 고민스런 총각딱지를 후딱 떼게 되었다. 물론 결혼 전에는 하숙을 하였다. 당시로는 사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다시 말하면 나는 우리 집에서 형님 네 분, 누님 다섯 분으로 막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생존하실 때 나를 장가가라고 했는데도 불효를 하고 말았다. 문제는 조카, 질녀들이 많아서 삼촌이 장가를 안 가면 저네들이 시집, 장가 못 간다고 나를 만날 때마다 결혼 하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용케도 요즘 같았으면 못갈 뻔한 장가를 드디어 가게 되었다. 나의 키는 작았지, 얼굴은 못생겼지. 경제적으론 돈이 없었지, 도대체 무엇보고 누가 나에게 시집오려고 할 것인가 말이다. 그랬다. 그러나 나는 나, 혼자 벌어서 사는 몸이었다.결혼하기 전에 방 준비 때문에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서 오셔서 방도 한 칸 얻었다. 신혼 준비를 한다고 해도 그저 백지 상태에서 준비하였다. 단돈 1만원을 들고 포항시내에 생필품을 사러 나갔다. 최소한의 인간생활에 필요한 찬장 하나, 커피 잔과 받침 세트, 차 숟갈, 냄비 두 개, 숟가락·수저 다섯 벌, 밥그릇, 국그릇, 종지기 각 몇 개씩, 물동이, 바가지, 주전자, 방비, 쓰레기 통, 휴지 약간, 자루 몇 개, 도마, 칼, 연탄집게 등을 장만하여 부엌에 정리하여 놓고 보니 마음에 부자가 되었다. 하기야 그 당시에도 잘 사는 사람은 얼마나 잘 들여 놓고 살았을까? 과연 대구에서 살던 처녀가 이런 형편의 나의 집에 시집와서 살 수 있을까? 한편 여러 가지 걱정도 참 많이 했다.그래도 모친이 오셔서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가 밥을 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 마음에 드신 것인지 방문을 열고 부엌을 들여다보시면서 한 말씀 하셨다."야야! 그래도 아무 것도 없었던 부엌에 많지는 않지만 잘 정리 해 두었네. 그런데 정말 도시처녀가 여기 와서 네한테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참 걱정이다 야.""뭐 사람 사는 것이 별거 있겠습니까? 그리고 살다가 필요한 것 있으면 하나씩 돈 벌어 사다주면 돼지 뭐. 걱정하지 마이소.""그래도 너무 허술하다 야. 이를 우짜노?""아이 구우! 참 걱정도 팔자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니깐요.""시간 날 때 부엌으로 나다니는 데 슬리퍼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또 걱정이신 어머님이 지나가는 사람 남 말 하듯 툭 던지신다. 안 그래도 막내가 장가를 간다는데 아무런 도움 없이 이렇게 살아가려는 아들을 보면서 어느 누가 엄마라도 걱정 안할 수 있으랴마는 그저 눈에 눈물이 글썽이신다."예, 포항 출장 갈 때 사 올게요."어머니는 나를 마흔 넷에 낳으시고, 천연두 마마를 앓아서 얼굴에 코 쪽으로 좀 얽으셨다. 나를 낳으면서 천연두 마마까지 하시니 그 몸이 어떠했으랴. 그리고 자식을 많이 낳으면 여성으로서 그냥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하시는데 특히나 신경통으로 약을 장복하고 계신다. 게다가 화병이라도 나신건지 못 피우시던 담배까지 줄담배를 피우신다.막상 걱정이 되어 나의 신혼집에 오실 때 연세가 68세이셨다. 게다가 자식을 많이 낳으셨으니까 관절염이 오셔서 잘 걸어 다니시지도 못하셨다. 손가락이 편찮아서 연탄불도 잘 맞춰 넣기가 어려우시면서도 막내아들이 장가간다고 하니까 걱정이 앞서서 와 보신 것이다."어머니! 연탄불도 내가 시간에 맞춰 와서 갈아 넣으면 되고, 모든 것에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방에만 계십시오.""알았다. 학교나 잘 다녀오너라."하시면서도 내가 오기 전에 연탄불을 갈고, 연탄재까지 치우시고, 하물며 밥까지 해 놓으시니 제 때 맞춰 밥 먹으라고 하신다. 부모님은 자식이 스무 살이 넘어도 걱정을 못 버리시는 것이다.결혼하여 경주 큰집에 하루를 보내고 바로 트럭에 짐을 싣고 나의 신접살이가 있는 모포로 오고 말았다. 물론 근무도 근무고, 무엇보다 나의 반 학생들이 걱정이었다. 그러자니 자연히 일찍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아이 고오! 이런 정말 아무것도 없네."입성 첫 날 내자의 첫 목소리다. 그래도 어쩌랴.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살고 형편대로 사는 것이 인간이제. 모든 인간이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라고. 특히 1970년대에 사는 우리들 군상들로는 말이다.학교에서 결혼을 하자말자 실습지 한 이랑을 주셨다. 고추심고, 파 심고, 무 심고, 배추 심고, 웬걸 반찬을 만들 수 있는 채소는 형형색색으로 모두 심어 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된장, 간장, 고추장과 참기름, 소금만 준비하면 될 것이다. 아울러 생선이 있으면 결혼 초보로서 그런대로 갖추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공자님께서 하신 말씀으로"반소사음수(飯疏食而飮水)하고 곡괭이 침지(曲肱而枕之)라도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矣)이라."이는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 하고 누었으니 사나이 대장부 이 보다 즐거움이 더 있으랴.사실 내가 너무 자만하였나? 신혼살림에 많지는 않았지만, 방 두 개에 부엌 하나 이렇게 살면 되지 않겠나 싶었다. 방1에 신혼 방, 방2에 서재로 방하나 가득 책이 쌓여 있다. 곧 이것이 마음의 부자요, 선생으로서 지식의 운용자다. 그래도 내가 신부에게 선물로 「여성중앙」잡지를 매월 포항에서 사 오는 것이었다.모포에서 신혼살림은 신부로서 고역이었다. 빨래를 하고 빨랫줄에 늘어놓으면 모래가 수북하니 쌓여 빨래를 바깥에 못 늘어 둔다는 것과 여성으로서 강한 바닷가 자외선 때문에 모자를 항상 써야 되고, 차단제를 발라야 외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당시 하루 버스가 3회 왕복으로 밖에 운행되지 않으므로 꼼짝 못하는 것이 불편 중에 불편이었다. 그리고 문화생활이랄까 다방 하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약방도 없고 "약포"라는 것이 겨우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새색시로서는 이곳 생활은 바로 갇힌 것으로 당시 그저 라디오나 듣고 집안에서 책이나 읽어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당시 나는 다른 것에는 아껴도 책 사는 것에는 아끼지 않았다. 문학에 뜻이 있어 한국문학 100권 선집을 사 두었다. 부활과 대망, 후대망 시리즈를 준비하여 두었다. 내자는 시간 나는 대로 곧잘 독서삼매에 빠지곤 하였다. 하기는 지금까지 그 책을 윤독하고 있지 아니 한가?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한국문학전집을 정독으로 3회나 읽었다고 한다.당시에 흑백 TV사기도 어려워 신혼집에는 없었다. 물론 바람 잘 나야 하는 선풍기도 없었다. 가장 손쉽게 바람을 나게 하는 부채가 겨우 둘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부챗살이 많은 노란 종이판에 콩기름을 먹인 부채다. 하기는 바닷가라 기온이 늘 시원하였다. 1년 여름 중에 1∼2일간만 반짝 더웠지 모포지역이 바닷가라 선선한 편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모포에 살면서 1년에 가장 무더운 날이 1∼2일 정도뿐이라는 것이었다.차츰 시간이 지나니까 결혼한 것을 아신 학부형님들께서 고추, 마늘, 파, 무, 배추, 오이, 호박, 감자, 고구마, 생선 등 반찬을 할 수 있는 채소와 고기를 수시로 갖다 두시고 가셔서 천만다행으로 걱정이 없었다. 아울러 이런 학부형들이 무척 고마우셨다.이렇게 하여 모포에서 대구처녀와 결혼하여 장남을 출산하고 나의 대를 잇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모포에서 신혼살림 성공기다. 26. 모포와 장인 모포에서 신혼집으로 살다보니 주인집이 도로가 나면서 헐리게 되어 두 번째 사는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1975년 여름이었다.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내자가 나를 붙들고 귓속말을 한다."저거, 노란 것이 무에요?""으~어…? 뭐라고 말을 해야 빨리 알아듣지?"멍석에 산골짝에서 추수한 것을 우케(=찧기 위해 말리는 벼)에 늘어 두었다. 아침 햇살에 샛노란 벼가 멍석에 가득 늘어놓은 것이 내자가 무척 궁금하였던 것이다. 내자는 도시에서만 살다가 와서 이 나락(=벼 알)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은 소리로 궁금해서 물었을 것이다. 하기는 대구시내에서만 살다가 이곳 바닷가로 시집을 왔으니 모를 만도 하지. 하도 갑자기 물으니까 나도 얼른 대답이 안 나왔다."우리 밥해 먹는 것이 뭐지요?""쌀!""그래요. 쌀을 알았으면 말이지, 이것을 방앗간에 가서 찧으면 껍질이 벗어지고 안에 쌀이 나오지요. 그런데 껍질이 벗어져도 그 정도에 따라 더 깎을수록 7분도, 8분도라 해서 색깔이 조금 달라져서 흰쌀이 됩니다.""아니 벼를 찧으면 쌀이 된다. 이런 건데 무엇을 그래 길게 설명해요?"괜히 모른다고 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 주고도 핀잔이었다. 내가 너무 자세히 설명을 하였나 보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아침부터 핀잔을 듣고 보니 나도 쌤통이 났다. 다시는 설명 해 주는가 봐라~!나는 시골 출신이라 벼를 물에 불리고, 소독도 하고, 볍씨를 뿌려서, 모판에서 거꾸로 엎디어 그 힘든 피사리도 하고, 모도 찌고, 쏟아지는 장대 비 속에서 모내기도 하고, 초벌에서 서너 번 땀 흘려 가면서 김매기를 하여, 곡식이 익으면 벼를 베고, 말려서 탈곡하여 가마니에 담고. 창고에 넣었다가 방앗간에 가려면 이렇게 우케에 늘어 말려서 수분이 적당할 때 실어 가서, 찧어서 등겨와 쌀을 구분하여야 한다. 그리고 집으로 운반하여 곳간에 넣어 보관하면서 적당량을 퍼내어 밥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데 내자는 완전히 초보단계다.이를 어째…? 토요일 오후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서 공부를 시켰다."저것이 감자 꽃이고, 이것이 들깨다. 이것이 보리요, 저것이 밀이다."라고 하는데, 밀하고 보리를 또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밀은 조금 덜 진하고, 미끈하게 생기고 밋밋하게 자라지만, 보리는 색깔이 진하고 통통하게 자란다."이런 식으로 소나무, 오리나무, 감나무 등을 하나하나씩 깨우쳐 갔다.점심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집에 들렀는데, 내자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왜 울었어요?"고 하니까, 대구에서 아버지하고 어머니께서 오셨다가 그냥 가 버리셨단다."그 참, 난감하네."나도 할 말이 없고, 왜 오셨는지, 그리고 왜 가셨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 그저 짧은 시간에 자전거 타고 집에 와서 점심 먹고,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상생활을 하여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때는 오늘 날처럼 휴대폰도 없던 시대다. 그저 속이 답답할 뿐이었다. 무슨 속내가 있으시겠지. 아니면 명색이 맏사위 집인데 그냥 가 버리시다니? 그것도 처음 오시는 사위집에 말이다. 참, 섭섭하게. 물론 우리 사는 게 말이 아니었지. 큰방에 보면 농도 없고, 쌀자루와 옷 보따리와 이불이 그대로 놓여 있고, 라디오 한 대와 전기다리미(=혼수품) 한 개만 있으니 두 어른께서도 기가 찼을 것이다. 작은 방에는 내 책이 가득히 들어 있고 허드레 물건만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가셨을 것이다. 아니 내가 지금 생각해도 물론 황당하셨을 것이다. 딸을 이런 곳에 왜 시집을 보냈을까 후회도 하셨겠지.수업을 마치고 어두컴컴해서 돌아 왔다. 마당에 높다란 물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방에서 나오는 내자가 역시 시큰둥하다. 그 시추에이션이 그렇게 느껴졌다."오늘 하루 종일 왜 그래요? 마당에 이 두 큰 물건은 또 다 무엇인가요?""아버지, 어머니께서 캐비닛만 사다 내려놓으시고 바로 가셨어요.""캐비닛은 왜 사오셨는데?"내가 혼자 있을 시간에 심심할까봐 TV라도 한 대 사 오실라 하다가 혹시 몰라서 들렀다가 옷장이 없어서 캐비닛을 사 오셨다 하네요.""이런 고마우실 데가…."그런데 캐비닛을 혼자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동네 청년을 모셔서 큰방에다 들여 놓고 막걸리 한 잔씩을 하였다.그래 명색이 맏사위가 결혼해서 살아가는데 형편이 어려워서 이렇게 옷장을 사 주시다니 고마우시기가 한량없으시다. 그렇지 않아도 돈이 모이면 사려고 했는데. 물론 다음 이사에 가서는 TV도 사고, 선풍기도 샀다. 그 캐비닛은 7년 동안 이사 갈 때마다 이동하여 요긴하게 쓰면서 대구로 이사 오면서 하양에서 버렸다.장인은 풍채가 아주 좋으셨다. 본래 고향은 '경북 영양'이시지만, 중국 길림성 길림시 교하에서 출생하셔서 고교까지 다니시고 한국으로 다시 오셔서 살게 되셨다고 한다. 중국에서 고교까지 공부하시면서 일본어를 잘 하셨다. 그리고 예인이셨다. 목각·박 공예와, 서예, 수석, 우표, 화폐, 코인 수집을 하시면서 복권수집까지 하셨다. 젊어서는 트럼펫에 럭비까지 하셨다고 하니 취미가 다양하셨다. 그리고 상당한 주량이 있어서 밥 반주에 1, 3, 5, 7, 9잔으로 술을 드셨다.여러 직업을 거쳐서 나중에는 대구에서 당시 K여상 초대 서무과장을 맡아 하셨다. 이건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아들 둘이 함께 살게 되었을 때 둘째 아들이 친할아버지인 줄 알고 있다가 자라니까 외할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장인께서는 둘째 아이를 지금도 무척 좋아하였다. 스포츠 신문을 자주 사러가게 되었고, 필요할 때마다 시중을 잘 들어 주었기도 하다.6.25 전쟁에도 참전하셔서 오른쪽 다리에 탄피가 3개, 왼팔에 두 개, 좌골신경 마비로 요즈음은 걸음을 못 걸으셔서 P요양병원에 계시게 되었다. 당년 87세이시다. 2003년에 국가보훈대상자로 신청하여 인정을 못 받으시다가 다음 해에 "국가유공자 7급(최하위 급수)"을 받으셨다.그때 장인께서 한 말씀 하시기를,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국가에 세금을 내고 살아야지, 함부로 국가의 돈을 축 내면 되겠느냐?"고 하시면서 한사코, 국가보훈대상자 신청을 거부하시다가, 이 맏사위의 간곡한 부탁에 모쪼록 응하셔서 국가유공자의 최 하위급수인 7급을 받으시게 된 것이었다.물론 국가보훈대상자를 임의로 신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증빙은 충분했다. 육군병원에서 치료하신 근거와 육군본부의 인사기록카드에까지 등재 되어있는 사실적 근거로 신청하고, 병원에 가셔서도 사정 한번 없이 신청시 현 상황으로 그대로 진찰을 받으시고 겨우 유공자 7급을 받으시게 되신 것이었다.장인께서 한 말씀 하시기를,"자네가 근무하던 거기 모포에는 바다낚시를 할 때 자주 들린 곳이었다. 특히 모포 앞바다와 영암리 신창에 밤바다 낚시를 자주 들렸었지."하고 마치 지나가시듯 말씀하셨다.장인께서는 알게 모르게 모포와의 인연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27. 교사와 이사 나의 이사가 발생한 시점은 결혼을 하고 난 후 가정을 꾸리면서 빈번히 일어났다. 매년 2월말이면 교사로서는 인사이동이 되어 곧잘 이사를 하여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사를 가지 않아도 공연히 오가는 선후배님들로 인하여 무언가 허전하고 씁쓰레해지는 것이 인간의 정 붙이고 산 결과인 셈이다. 이 또한 인간의 삶의 한 모퉁이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이사란 무엇인가? '집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단순할 것이다. 뭐 그냥 집 옮긴다. 정말 이것이 아니었다. 결혼하고 신혼살림을 하던 차에 갑자기 주인이 집을 비워 달라는 것이었다. 1975년 모포에서 새집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사는 하여야 한다. 옳지! 내가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는가? 나의 제자들이 있지 어니한가?"여러분! 내가 지금 살던 집이 헐리게 되어 이사를 가야 하는데, 자기 집에 세놓을 집이 있는지 알아보아라."하였는데, 그러자 말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선생님! 우리 집에 사랑채가 비워 있어요. 새로 지은 집이에요. 아버지께 여쭤 보이소."H양이 이사할 수 있는 집 정보를 주었다."그래. 고맙구나."바로 점심시간에 알아보았다."아! 예. 우리 집에 선쌤이 오시면 좋지요. 마침 H의 담임 선생님이시네요. 이삿짐은 오늘 저녁에 마아~ 옮기지 예."그리하여 H양의 집 사랑채로 짐을 옮겼다. 바로 최초에 신혼으로 살던 집에서 100여m 정도라서 차도 필요 없고, 리어카와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한 아름씩 안고 이사를 하였다. 짐은 다른 것이 아니고 전부 나의 책뿐이었다. 줄줄이 책을 머리에 이고 마치 개미가 비 온다고 이사하는 광경이었다.나는 책에만 신경을 쓰는데, 내자는 유리그릇이었다. 이사를 하고 나면 반드시 후회가 되는 것이 유리그릇이라고 한다. 아무리 이사를 잘 하여도 유리그릇, 그것도 제일 아끼는 그릇이 잘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란다. 내자는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유리그릇을 하나하나 신문지를 끼워서 패킹처리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밤을 꼬박 새우는 것이었다.새로 이사하는 집은 방이 두 칸이라서 큰방은 잠자는 방, 나머지 작은방은 나의 책방이다. 부엌에는 찬장을 넣고 연탄을 넣어도, 그래도 넓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새로 지은 집이어서 내자가 무척 좋아하였다. 모두 연탄을 사용하던 시대이었다. 부엌에는 연탄을 쌓아두고 쌀통도 함께 두어야 했다. 단지 그때까지만 해도 모포에서는 상수도 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 이사를 한 집에는 뒤꼍에 마침 펌프가 있어서 식수로 퍼 쓸 수 있어서 아주 편리했다.큰방에는 농도 없이 쌀자루 하나, 외출복을 걸쳐두는 횃대보가 쳐져 있고, 이불을 개어서 쌓아 두고, 옷상자가 하나 있었다. 그 위에 나란히 베개 두 개. 이것이 신혼살림 전부였다. 작은 방에는 내가 주문 제작한 책장 하나에 책은 가득히 꽂아 두었다. 그리고 헌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부엌에는 포항에서 1만원 주고 사온 찬장 하나, 작은 쌀통 하나, 연탄이 100여 장, 번개탄이 20여 장이 있다. 냄비와 작은 솥 하나, 나무 주걱, 주발, 국그릇 3벌씩, 기타 종지기 여럿, 숟가락 3개. 그리고 커피 통, 찻잔, 차받침, 찻숟갈이 전부다. 그래도 간은 맞추어 먹어야지. 된장, 간장, 고추장, 참기름, 소금, 마늘 등은 상비하여 두었다. 이상이 우리 집 첫 이사를 하고 정리한 양상이다.이리하여 첫아들이 있어서 큰방의 부족한 부분을 매우고 살았다. 나는 기억을 잘 못하였는데, 내가 시골 선생 8년 하는 동안 차에 싣는 이사는 8번, 짐을 손수 날라서 한 이사까지는 모두 9회라고 한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8년 동안 다섯 군데 학교를 인사 이동하여 다녔으니까 그런 모양이다. 초임인 모포초등학교(3년에 2회), 두 번째 내북초등학교(2년에 1회), 세 번째 감포초등학교(1년에 1회), 네 번째 괘릉초등학교(2년에 2회), 다섯 번째 하강초등학교(2개월에 3회) 등이다. 이사를 자주 가게 되면 나는 책 박스꾸리기 선수가 되어야 했고, 내자는 그릇꾸리기에 선수가 되어야 했다.문제는 전근하여 장거리를 이사 갈 때, 같이 지내던 동네 분들, 아니 학부형들이 함께 나오셔서 어떨 때는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을 보고 이것 역시 이사를 자주 하여서는 안 되는 구나를 느꼈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것이 인지사정이 아니겠는가? 이사를 가는데도 '그 사람 잘 갔구나.'하면 역설적으로 정말 잘못 살고 간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으로 자동차에 짐을 싣고 떠나는데, 온통 동네 분들과 학부형들이 두루두루 모두 나와서 배웅을 하여 주면서, 손까지 흔들 때는 눈시울이 시큼하였다.그러자, 이삿짐 화물기사분이,"아이 구! 선생님은 인심을 많이 얻고, 살다 가시는 모양입니다.""예에?""어떠신 분은 이사 가면서 새벽에 몰래 가시는 분들도 있고, 빚을 안 갚아서 살림까지 끄집어 내리는 경우도 있습디다. 안 그러면 욕을 얻어먹고 도망가다시피 하는 분들도 있습디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늘 보기 좋습니다.""아이고! 그래요. 앞으로는 우리도 더욱 이웃 분과도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그렇지요. 선생님들 이사를 많이 해 봤으니까 잘 압니다."이런 얘기를 어제같이 들었는데 살다 보니까 정말 그 말이 옳은 말씀인 것 같다.심지어 두 번째 전근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그 집 주인 아주머니께서 쑥떡을 이고 나의 고향까지 찾아오신 적도 있었다. 시골에서 처음에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가는 곳마다 정을 붙여 드리고, 떠나서 다시 찾고, 지나서도 다시 찾고, 그래서 남다른 정을 쌓아 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공립학교 교사를 하면서 이사는 자연히 따라 다니게 되어있다. 특히 가정살림을 하다보면 더욱 그렇다. 공립교사와 이사는 엄연히 붙어 다니는 짝이다. 이사를 마치고 나면 1주일간 몸살을 한다. 나도 그렇고, 내자도 그랬다. 하는 것 없이 고되다. 그래서 이사는 더욱 고되다.이사를 하고, 정리를 하고 나면 또 '집들이'라는 것을 꼭 하여야 하는지 이 또한 내자의 고생을 더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사와 집들이는 연결고리이다. 그런데 이 집들이를 하여야만 또 끈끈한 이웃 간의 고리를 만들지 않나싶다.교사를 하면서 이사해야 하는 것은 정말 세상사 중에 힘들고, 고된 일이지만 그래도 초임지인 모포에서 살다가 한, '이사 가는 날'이 내 생애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이사였다. 이삿짐에 포함한 내자와 아들이 늘었고, 나를 아끼시던 여러 학부형들의 애잔한 헤어짐의 아쉬움을 그날에야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28. 모포와 아내 빨리 장가를 가서 어여쁜 아내를 맞이하고 싶었다. 나는 무슨 일이 그렇게도 많았는지, 장가를 갈 시간이 없었다. 아니 일을 만들어서 자꾸 하니까 교장선생님께서는 그래서 나를 좋아하셨나 보다. 그래도 장가를 빨리 가야지 하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나의 결혼 이야기는 이래서 여러 가지로 복잡하였다. 본시 아버지께서 권해 주시던 곳은 경주 안강읍에 있는 어느 사과밭집 규수이었는데, 내가 그 당시는 장가를 가기 싫어서가 아니고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심에 거절하고 말았던 것이다.아버지는 교사 발령을 받고서부터 막내아들을 곧 장가보내시고 싶어 하셨다. 그러던 차에 가을 농번기 때 큰집에 들렸는데 무논 벼를 베는 곳에서 아버지께서 결혼 말씀이 나왔다. 그 얘기를 듣다가 그만 도망을 가고 말았다. 그런 후부터는 아버지는 결혼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자 백형, 중형, 숙형 세 분께서 자꾸 장가이야기를 하셨다.백형은 막내 뜻도 모르고 지가 사귀는 여자가 있는지도 모르겠으니 여하튼 빨리 장가를 들어야 '딸(=질녀, 당시 22살)인 질녀를 시집보낼 수가 있다.'라고 하셨다. 중형은 막내가 빨리 장가가야 '우리 아들(=조카, 당시 24살)도 장가 들일 수 있다.'고 하였다. 숙형은 아마도 막내가 사귀는 처녀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셨는지 자꾸 꼬치꼬치 물으셨다.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 홀로 남으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면 아무도 나를 생각해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장가라도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곤 하였다.우여곡절 끝에 장가를 들었다. 결혼 3일 만에 1.5T 화물차에 살림을 싣고 내자와 숙형과 함께 모포(=칠전)로 이사를 하였다. 물론 그 전에 신혼집을 구해서 기본은 준비를 하였지만 나의 살림이 처음으로 생기고 아내가 생겼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경주를 지나 보문, 덕동을 지나 감포-두원-계원-양포-신창-대진-모포2리인 칠전으로 왔다. 시내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비포장 길이었다. 새색시를 태우고 좋은 길로 가야 하는데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을 그것도 화물차를 타고 시집을 가야 하니 정말 면구스러웠다. 대구에서만 살다가 산골로, 바닷가로, 산(수양산을 돌아서)꼭대기로, 기어코 바닷가에 낯설고 물 설은 그 바닷가에 내려놓았다.짧게 말해서 대구에서 경주로 시집 온 것이 아니고 모포2리 칠전으로 시집을 온 것이었다. 숙형은 화물차에서 짐을 내렸다. 무거운 것(조립식 책장 포함) 몇 개를 들어 넣어 주시고 그 화물차를 타고서는 경주로 돌아 가셨다.모두가 낯설고 부엌까지 낯이 선 이 곳에서 이제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어떻게 보면 아내는 하루아침에 그냥 던져두어진 신세이었다."이제 내일부터 내가 출근하고 나면 혼자인데 무얼 하고 살지요?""나는 책을 많이 좋아합니다. 출근하고 나면 다행이 책이 많아서 책을 읽겠습니다. 그리고 푸른 바다도 가끔 보고 살지요."이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책에라도 낙을 붙이겠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국문학 전집" 100권 들이가 있었고, "부활", "속 부활"등을 준비하여 두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대구 시내에서만 살다가 시골로 와서 소일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는 궁금하였다. 그렇다고 밭일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일도 아니면서 무엇으로 소일을 할 것인가? 나는 일이 많아서 코피를 흘리지만 말이다. 한 가지 제안으로 1주일이나 2주일에 극장 영화구경 1회,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는 것이었다. 흔쾌히 들어 준다고 하고 일요일이면 포항으로 영화구경을 다녔다. 돌아 올 때 상정으로 오지 않고 구룡포로 돌아오거나, 감포로 가서 구경도 하고, 오천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결국 도시 사람이었던 아내를 점차 시골풍에 익히는 실습을 하였던 것이다. 내자는 매일 일찍 일어나서 마당에 물 뿌리고, 마당을 쓸어서 깨끗함을 돋보이었다.바닷가라서 강렬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 아내는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나폴 거리는 흰 모자를 눌러 쓰고 얇은 망사 장갑을 끼고, 그렇게 중무장을 하고 버스를 탈 때도 작은 망태를 하나 꼭 준비하고 나다녔다.그래서 오늘은 구룡포 항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려서 30분 여유가 있으므로 고래 해체작업을 구경하고서 고래 고기 맛을 보았다. 그리고 구룡포 항구를 이곳저곳 구경하기도 하였다.또 다른 날은 장기장이라 5일 시골 장을 구경하였다. 난전에 펼쳐진 온갖 물건들을 보고 참 신기해하였다. 도시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눈도 덜 뜬 강아지가 있는 동물 장, 옷전, 신발전, 채소전, 곡식전을 둘러보았다. 장터국밥 하나로 배고픈 것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 장기읍성과 향교를 둘러보고서는 새삼 우리 역사를 재인식하기도 하였다.이제는 가까운 대진리 매진으로도 갔다. 바다가 솟아올라 온 바다 속의 바위, 그 곳에서는 이름 모를 해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아는 이름들은 겨우, 미역과, 다시마, 파래, 곤피 정도이었다. 문제는 곤피다. 경주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도시에서는 낯설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해대(海帶), 곤포(昆布)를 미역이나 다시마로 혼용해 쓴다. 곤피는 정확하게 미역보다 울퉁불퉁하게 생겨 곰보 자국 난 다시마다.또 하루는 이곳 바닷가가 아닌 구평으로 갔다. 모포에서의 바닷가가 아닌 구평에서 바닷가는 또 다른 곳이었다. 이 구평은 모포를 오려면 구평버스를 타야 하는데, 어쩌다가 땅고개에 일찍 오면 구평가는 버스를 타고 앉아 있으면 다시 땅고개를 거쳐 포항으로 나가게 된다.내가 출근을 하고 나면, 총각 때 찾아오던 처녀들이 우리 집으로 침입(?)하여 온다. 그리곤 진한 커피를 한 잔씩 청해 들고 간다고 한다. 어떨 땐 혼자 있는데 마치 시위라도 하듯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도 아내가 잘 설득한 탓(?)인지 아무 탈 없이 차 대접을 하여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시골인심이라 후할 때는 후하지만, 따질 땐 따지는 것이다. 용케도 사탕을 나누어 먹고, 커피를 마시고 도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아울러 곁에 계시는 교장, 교감사모님께서도 들리시고, 과거에 초등학교 교사를 하시던 Y선생님(=나중에 대구예고 교사로 봉직) 사모님도 함께 모이시곤 하였다. 의문을 모두 풀고 시골 바닷가에 모이셔서 오순도순 얘기로 꽃을 피우기도 하였단다.무엇보다 내가 초임에 하숙하던 집 아주머니, 아니 술을 가르쳐 주시던 술 사부님(?)께서 아내 혼자인 것에 자주 들려 주셔서 내가 좋아하는 호박잎, 물외 오이, 가지 등 반찬도 갖다 주시고 기타 곡물도 주셔서 무엇보다 고마움을 느끼고 살았다.이러한 고마움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인정에서 그 좋은 뜻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 정말 인생의 선배님이시며, 삶의 선배님들이시다. 그리고 곧잘 지도해 주셔서 백골이 난만망인 것을 깨닫고 살고 있다.항상 거주할 집을 얻더라도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 아니 너무 자주 어울리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이중환의 택리지인 복거(卜居)이다. 혹시 너무 가까이 하여 무슨 오해나 곡해를 불러일으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므로 조금은 이것을 아내가 알고 있기도 하였다. 그 후로 이사를 하려면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 낮에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어도 모를만한 거리에 항상 집을 구했다. 물론 아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그렇게 하게 되었다.한번은 강사, 석병을 지나 장기갑(=오늘날 호미곶)등대로 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박물관이 있었고, 그 옛날 불을 비추이기 위해 사용한 여러 가지 형태의 등불이 있었고, 그 사용 또한 특이했다.정말 이렇게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한 번은 우리 반 아이들이 우리 집 곁에서 놀고 있었던 모양이다. 들어오라고 해서 대구에서 가져온 롤빵을 잘라 주었다고 한다. 그 시골 바닷가 아이들에게 당시에 롤빵을 주었으니 그 맛을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집으로 갈 땐 설탕이 잔뜩 묻힌 큰 사탕 한 개씩을 주었으니 이 또한 아이들이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었겠는가? 초임지 모포초등학교 제9회 동기회 창립일(2011년 8월 8일)에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제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내자는 곧 나의 큰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그저 그렇게 시골학교, 초임교사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었다. 29. 큰 아들을 얻다 집에서 열 번째 막내고, 다섯 번째의 아들이다. 우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결혼을 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한 것을 아주 좋아 하셨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을 때 결혼을 하였으면 더욱 좋아하셨을 것을 그것을 지키지 못하여 어머니께 항상 미안해하였다. 대구색시를 얻어 결혼한 것이 더욱 어머니는 좋다고 하셨다. 시간이 나는 대로 내자와 함께 어머님이 계시는 경주 큰집에 자주 들렸다."얘야! 소식 없느냐?""예? 무슨 소식 말입니까?""아∼아 소식 말이다?""아∼아 소식이라니요?""결혼 했으면 아이를 낳아야지요?"이제는 형수님들까지 동원되었다. 참 얼마 됐다고? 이래 난리냐? 그러면서도 혹시 내가 부실(?)하여 자식이 없는 것이 아니냐? 별 걱정이 다 들었다. 그러는 차에 자꾸 몇 개월이 흘렀다.내자가 대구 친정에 다녀 온 후에 임신이 되었다고 하였다."아! 나도 남자(♂)는 맞구나! 임신이 되었다니… 다행이다."임신 중에 아버지 기일을 맞았다. 내자가 도시에서만 살다가 시골에서 제사 드리는 일을 도우려니 벅찼던 모양이다. 당시만 하여도 우리 집에서는 재래식으로 준비하여야 했다. 부엌에 불을 때며 일을 하여야 한다. 놋그릇을 닦아야 했다. 놋그릇을 닦으려면 기왓장을 부수고, 갈아서, 짚에다 싸서 닦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제기며, 병풍을 준비하였다. 전을 직접 붙이려면 뒤 곁에 솥뚜껑을 뒤집어 걸어 놓고, 기름을 칠하여 전을 붙여야 하였다. 산적할 고기를 장만하고, 고사리, 도라지, 배추 등 3색 나물을 챙기며, 탕(=육탕, 어탕, 계탕)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과일을 준비하고, 특히 계절에 따라 특이한 과일을 준비하여야 한다. 아울러 떡(편)은 백설기를 준비한다.조상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보본(報本)이요 천지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정성일 뿐이다. 아무런 욕구나 욕심이 아닌, 오늘날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주신 조상님과 낳아 길러주고 사랑하여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정성의 표시일 것이다. 그것은 효도의 연장일 뿐 어떠한 기복이나 피화를 원하는 욕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리는 사람은 자연히 만사가 순탄하게 되는 복이 얻어지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심신을 정결하게 하는 재계를 하여야 한다. 재계는 몸가짐을 깨끗이 하고 마음과 정성을 집중하여 신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다.제사 음식은 정결하게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고, 제례 지낸 음식은 저장해 두지 않으며, 즉시 많은 사람이 골고루 나누어 먹어야 복을 받고 물자가 부족한 그 당시 영양 보충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제사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두려워하면서 예를 받들면 복을 받게 되나니, 복이란 백가지 모든 것이 순하지 아니함이 없게 되는 것으로, 안으로 몸을 다하고 밖으로 도에 따르는 것이다. 조상의 제사란 어떤 기원의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정성과 공경을 다해 제물로 받드는 자손 된 도리를 다하여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는 정신으로 나가는 일이다. 여기에서의 복이란 속된 복이 아니라 모든 일이 순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와 조상의 제사를 통하여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자매 사이에 우애하며, 일가친척 사이에 화목하게, 가족애를 다지는 일이다.오늘날 전통적인 제사 의식이 서양 종교의 영향으로 많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는 하나 제사의 의의를 바르게 인식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우리의 전통적인 제사 의식을 바르게 계승하여 제사가 미신이나 우상 숭배가 아닌 크게는 인류 화합을 도모하고 작게는 효도의 연장으로 일가의 화친을 이루게 함을 알아야겠다. 제사 올리는 것과 부모를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 그저 나의 큰 아이 출생을 기다린다.출산예정일이 1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낳지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토요일이라 학교를 파하고, 모포 땅고개에 올라 중간버스를 타고 포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곤 이내 시외버스 주차장으로 냅다 달려 대구행 고속직행에 몸을 실었다. 오늘은 출산을 하려나 어쩌려나 생각에 잠기면서 대구 처가에 들렀다.장모님만 계셨다."오이! 자네 잘 왔네. 선교가 몸 풀었다 아이가.""예? 몸을 풀었다고요?""와아? 모르겠나?""선교가 아∼아를 낳았다 말이다.""뭐, 낳았는데요?""따라와 보라카이."무엇을 낳았는지 말씀은 아니 하시고 나를 끌다시피 대구 '중앙산부인과'로 데려갔다. 2층으로 올라갔다. 아니 곱상한, 아직도 얼굴이 바알간 아기를 낳았다."아이고! 수고 했어요. 밥은 잘 묵나요?""….""언제 낳았제?""6월 16일(월)에 낳았지.""아니, 오늘이 6월 21일(토)이니까, 벌써 한 칠이 다됐네."그러니까 당시로는 전화도 없었고, 개인통신이 어려운 시절이라, 출산한지 6일째 되는 날, 내가 온 것이었다. 끝내 무엇을 낳았는지 물어 보지도 못했다. 저녁에 장인께서 퇴근하셔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이 서방! 축하한다! 아들을 낳아서 참 기뻐 제?""예? 예…."얼떨결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나도 이제 아버지가 되었다. 나의 아버지 돌아가시고 꼭 1년 6개월 만에 대를 이어 주셨다. 내자는 남매가 없고, 자매만 셋 있어서 은근히 나도 장인을 따라 딸만 낳는 게 아닌가 걱정도 많았는데, 용케도 내자가 아들을 낳아 주었다.나는 모포초교에 초임으로 발령을 받고 그렇게 재산 1호를 챙겼다. 30. 고기반찬과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논·밭 일구고 경작 하시다가 생을 마치셨다. 나를 쉰하나에 낳으셨으니 이 또한 오늘날에서는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겠는가? 아버지(1899년 고종 광무 3년 출생)의 목표는 나를 초등학교에 졸업시키고, 서당에 다니게 해서 인간생활에 필요한 사성을 쓸 줄 알고, 기제사에 축문만 쓸 줄 알면 된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셨다."아버지, 이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는 밥 못 먹고 삽니다.""그래도 살아야지. 농사짓고, 밭농사하고 그러면 살지. 장가가서 그래그래 살지.""아버지 이제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 사는 것은 그저 그런 것이다.""아닙니다. 전 공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이 꼭 될 겁니다.""뭐~까(무엇으로) 공부한데…""제가 벌어서 하지요.""몰라. 어떻게 지가 벌어서 한다고?""예. 제가 벌어서 합니다."독학하고 경주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돈이 되는 아르바이트는 모두 하였다. 교육대학에 입학하였다. 교사자격증을 취득하고 드디어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당시 경상북도 영일군 교번 끝번 55번 모포초등학교에 발령이 났다.그때서야 아버지는'나는 정말 못할 줄 알았는데 네가 정말 선생하게 되었구나.'하고 항복(?)아닌 항복을 하셨다.뜻이 있어 장가가라는 것 뿌리치고, 공부(=중등준교사 국어 공부)를 더 하려고 했는데 자식을 더 기다려 주시지 않고 그만 돌아가셨다. 늦게야 정신 차리고 장가를 갔는데 아버지는 안 계시었다. 늘 어머니께 미안하였다. 열 자식 낳아 막내인 내가 결혼을 하고 아버지께서 눈을 감으셨다면 좋았을 텐데 기어이 내 아망에 그것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 결혼하게 되니 정말 미안하였다.모포에서 후릿그물로 얻은 고기하며, 학부형님께서 일찍 일 나가신다고 새벽에 마루에다 고기 두고 가신 것하며, 늘 고마운 일들이었다. 모포에서 해조류인 미역도 먹고, 생선이 떨어질 날이 없이 지속적으로 쌓이게 되었다. 내자는 많은 생선을 감당하지 못했다."여보! 저 많은 생선을 어쩐다지요?""자, 지금부터 시범을 보일 테니 보십시오."말을 마치게 바쁘게 도마와 칼을 준비하고, 큰 물동이에 물을 가득 들여다 놓고 마당에서 시범을 보이었다. 싱싱한 고기는 반찬을 해도 나 혼자 먹거나, 아니면 구워도 먹었다. 고기가 지천으로 쌓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생선은 한 마리, 한 마리 배를 갈라서 내장을 끄집어내었다. 물에 깨끗하게 씻어서 철사에 꿰었다. 철사에 자꾸 꿰었다. 빨랫줄처럼 자꾸 꿰었다. 늘어서 말리었다. 큰집에 갈 일이 있으면 포대기에 꼭꼭 눌러 담아서 갖다 드렸다. 경주 내륙지방에서는 바닷가에서 말린 생선을 어머니께서 잘 잡수었다.참! 아버지께서 계셨더라면 일단 싱싱할 땐 회로 술안주 하실 수 있었을 텐데. 안 그러면 적당히 소금을 쳐서 바로 구워 먹어도 좋았을 텐데. 마르면 적당히 무를 넣고 끓여서 두고서 밥반찬으로는 생선이 제일 좋았을 것이다. 경주만 해도 내륙지방이라 생선을 사다 먹어야하기 때문에 겨우 갈치나 멸치로 족한 것이었다.우리 집에는 누나들이 많아서 매형들이 자주 오셨다. 당시 최고 반찬이 무를 썰어서 넣고 마른 생선을 함께 찌져 먹는 것이 최고 반찬이었다. 오늘 내자가 생선을 굽고, 찌지고, 조려서 한상 가득 올려 주는데 진수성찬이 이 아니랴? 바닷가로 발령을 받아서 생선은 정말 많이도 먹어 보았다. 이 또한 모포초교로 발령받아 온 덕이 아니던가?근무를 하면서 제사 지낸 집에 초대되어 갔는데, 이 아니 웬 일이냐? 나오는 것 반찬 모두가 생선 일색인 것을 정말 모포초교로 발령 받아 온 것은 행운 중에 행운이었다. 내륙지방에서 채소 반찬만 먹다가 생선 반찬을 먹으니까 밥맛도 좋을 뿐만 아니라 소화도 잘 되고, 우선 반찬을 구해 먹는다는 데는 얼마나 좋은 일인가?늘 아버지의 밥상이 걱정이었던 어머니는 모포 초임지에 오셔서 몰래 아버지를 생각하고 계신 듯 했다."아이고! 이런, 밥상에 생선이 이렇게나 많이 있네.""왜 반찬이 마음에 안 듭니까?""그런 것이 아니라, 이 좋은 생선반찬이 그 옛날에 있었더라면 네 아부지가 얼마나 잘 잡수었겠노?""갑자기 아버지는 왜?""아니. 그래 생선을 보니까 생각이 나네.""내 어렸을 때 아버지는 갈치 구어서 반찬 잘 하시더구먼.""그래. 그 때는 그랬지. 아이들에게 안 주고 어른이 밥을 잡수어야 일을 하시지. 그래서 그랬지. 너희들에게는 주지 못했지.""아니, 갈치꼬리 가느다란 것을 새카맣게 구어서 나에게 주더구먼.""맞아, 맞네! 너희들에게는 그저 생선 흉내를 내면 되지. 그래서 꼬리라도 버리지 않고 꾸어서 주었지.""그런데 구운 갈치 꼬리도 나만 주데 예. 그때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습디다."이제 효도를 하고자 하나 나의 부모님은 모두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 두 분 모두 고향 선산에 누워 계신다. 나를 쉰하나에 두신 아버지께서 오래 사실 수가 있었겠나?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회갑 맞으셨다. 아버지 연세 76세에 수(壽)를 다하셨으니 우리집안에서는 장수하신 축에 드신다. 시골 농경시대를 겪으신 분이다. 조부 59세, 백부 60세, 작은아버지 60세에 돌아가셨다.기어이 나는 선생을 하고서, 모포에서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제4부 파도소리, 풍금소리 31. 용의검사와 자연목욕탕 1973년! 4학년 담임을 맡고서 매주 월요일에는 용의검사를 하였다. 손톱, 발톱, 목의 때와 머리카락 길이 등 검사하여 개인용의검사 누적표를 완성한다. 그런데 아무리 검사를 하여도 발전이 없었다. 즉 목이나 손의 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아무리 검사를 위하여 씻거나 자르고 단정히 하여 오라고 하여도 진전이 없었다. 이를 어째, 무슨 방법이 없을까?마침 교무회의에서 이번 주 '자유학습의 날'에는 단체로 자연목욕탕인 시냇가로 간다고 발표가 있었다. 드디어 수요일 자유학습의 날이 왔다. 집에서 사용하던 수건과 비누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형형색색의 수건을 가져오고, 비누도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단체로 시냇가목욕을 위해 데리고 가야했다.교실을 벗어나서 단체로 시냇가로 가는 도중에는 동요도 부르고 두 줄을 지어 끝없이 이어서 걸어갔다. 그것도 비포장도로에 먼지 날리며, 가끔가다 화물차가 지나가면 도로먼지를 모두 덮어 쓰기도 하였다. 길가 이름 모를 풀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간혹 아는 이름의 꽃을 볼라치면 자기가 아는 꽃이라고 떠들면서 갔다. 이름 모를 노란 꽃, 제비꽃, 민들레도 우리가 지나가면 마치 환영이라도 하듯 반겨준다.가는 곳이 궁금하였다. 교감선생님께서 훈시를 할 때 오늘 가는 곳은 학계리 가는 길에 민물과 바닷물이 합수되기 전에 있는 시내로 간다고 하여 모포 2리 칠전을 지나갔다. 이제 칠전 마을회관 앞도 지나니 동네 어르신들께서 "너희들 오늘 어디가나?"하신다. 뇌성산이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오늘 모포초등학교 자연목욕탕에 가는 구나.'하는 것처럼 높이 서 있다.1∼6학년 270여명이 단체로 줄지어 목욕하러 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정말 시골이 아니고서는 이런 광경이 어디 있으랴. 그것도 가림도 막힘도 없는 시내 거랑인 자연목욕탕인 것을. 거랑에 도착하였다. 주의사항을 듣고서 제일 먼저 1·2·3학년이 한 그룹으로 물이 얕은 곳으로, 4·5·6학년 남학생은 학계리 재필 쪽으로 저학년 그룹을 가운데로 4·5·6학년 여학생은 칠전 쪽으로 자리를 지정하여 주고서는 목욕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키가 큰 남학생들은 자꾸 4·5·6학년 여학생들이 목욕하는 쪽으로 기웃거렸다.시골은 시골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큰 목욕탕에서 목욕을 시작하다니. 자연이 주는 최대한의 혜택이다. 물을 덥히지 않아도 목욕물이 되고, 자연히 흘러가는 도랑물에 몸의 때를 불리고, 벗기고 있다.한편 성질 급한 아이들은 물에 들어가자 말자 자갈돌로 때를 벗기고서는 따갑다고 호들갑을 떤다. 일단 때는 물에 몸을 불려야 된다고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수영할 줄 아는 아이는 벌써 깊이 들어가서 물장구를 친다. 그러면 옆의 아이들은 이 튀는 물을 피하기 위해서 물가로 나오고 만다. 이러나저러나 자꾸 시간이 흘러가니 저절로 몸에 때가 불기 시작한다. 자갈돌로 쓱쓱 문지르고 비누칠을 열심히 해대고 비누거품을 만드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은 장관이다. 270여 명이 단체무료로 자연목욕탕에서 때를 벗기고 있다니. 게다가 시끄럽기는 시장같이 와글와글 거렸다.때를 다 벗기고 단정하게 된 사람부터 검사하여 합격하면 집으로 먼저 돌려보낸다고 하니까 키 큰 남학생들은 부리나케 검사를 하러 나온다. 물론 합격할 리가 없다. 빨리 집으로 가서 놀려고 검사만 맡으로 온 것이었다. 불합격을 받고서는 기분이 상했는지 물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40분이 지나자 이제부터는 학년별로 검사를 제법 받으러 나왔다. 제법 합격을 받고 일찍 가는 여학생들이 보였다.늦게까지 모두 합격을 시키고서 교사들도 교감선생님과 함께 귀교했다. 자! 오늘 이렇게 자연목욕탕 단체목욕을 했으니 월요일 개인별용의검사 누적표에는 ○표가 많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손·발톱, 머리카락은 또 어떻게 될까? 포켓검사도 가끔 같이 곁들일 때도 있었다. 물론 호주머니 검사에서는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남학생들 호주머니 속에는 가끔 미역 귀다리를 넣고 다니기도 하였다. 점심 거르는 학생은 미역귀가 밥이기 때문이었다.월요일이다. 개인용의검사 누적표를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역시 단정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첫째, 남학생들 바지는 헤어 진 곳이 많았다.둘째, 여학생들 신발이 많이 낡았다.셋째, 남학생들 머리카락은 제 때 자르지 않아 너무 길다.넷째, 남·여 모두 세수만 하고 얼굴에는 아무것도 바르지도 않았고, 또 얼굴에 부스럼이 많이 나기도 하였다.이를 어째, 아무리 용의단정을 강조하여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헌옷이라도 깨끗하게 세탁하여 단정히 입으면 달라졌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를 검사하고 표시하고 변화를 일으키려고 계속 검사하였다.차츰 용의가 달라지고, 남·여 학생들의 전체 모습이 좋아 보였다. 이제는 개인별용의검사 누적표를 스스로 기록하도록 하여 그 발전됨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자율화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통제보다 자율이 좋은 것인가 보다. 확실히 스스로 용의단정을 꾸려 나갔다.그러자 이제는 자연의 목욕탕이 사라졌다. 이것이 교육이다. A를 A′로 만드는 것이 교육(敎育)이다.정말 교사의 경험으로 보아 시골에서는 업무도 많지만, 변화하는 결과인 교육의 재미(?)를 톡톡히 느꼈고, 교사도 인간으로서 엔도르핀을 많이 생산하여 삶의 욕구해소도 늘어난 것으로 느꼈다. 32. 새마을 조기청소하다 학교 생산관련(=새마을) 업무를 맡고, 자료업무를 관리하다 보니까 자연히 앰프를 관리하여야 하고, 조기청소 하는 것도 관리하여야 했다. 모포초등학교 각 마을애향단을 구성하였다.내가 어렸을 때, 아니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 보이스카트나 걸 스카우트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집 아이로 분류되면서 아예 그런 단체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입단비, 단복비, 그리고 잡지구독비 등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 어린 심정으로 상당히 사회적 배신감을 느꼈다. 모두가 돈이 관련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예 시골아이라 돈을 내지 못할 것으로 낙점이 찍힌 것이었다. 나도 사회에 봉사할 수도 있었는데….내가 초등학교 다녔을 때는 성인들이 문맹자가 많아서 '문맹자교육'에도 동원되었다. 학교를 파하고 나면 소 흑판을 둘러매고 동사(洞舍)에 갖다 두고, 야간에 유리 깔때기에 시커먼 연기가 나는 램프를 켜고, 동사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동네 어른들께서 모이셔서 내가 쓴 가로에 ㅏ, ㅑ 순으로 적고, 세로에 ㄱ, ㄴ 순으로 적어서 우리 한글을 가르쳤다. 발간된 한글초보 책자를 통하여 문맹자교육을 한 기억이 난다. 'ㄱ에 ㅏ하면 가하고, 가에 ㄱ하면 각하고'등 이렇게 가르친 기억이 난다.그러나 모포초등학교에서 애향단에는 그 마을 최고학년 중에 대표를 뽑고, 아침에 학교를 오려면 모아서 새마을노래도 부르고, 반드시 모여서 줄을 서서 오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단체로 다니면 차조심도 되고, 단체로 협동심도 발휘하게 된다는 취지이기도 하다.애향단은 마을대표가 있어서 남학생이 한 줄로 먼저 서서 따라오고, 다음이 여학생이 한 줄로 서서 따라온다. 하교를 할 때는 마치는 시간이 달라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마을에서는 멀리가기에 저학년이 빨리 하교하지 않고, 놀면서 기다리다가 고학년과 같이 아침에 오듯이 함께 행동하는 마을도 있기도 하였다.아침 5시 반에 일어나면 먼저 학교에 가서 조용한 바닷가를 깨우는 일을 하였다. "새마을노래"를 켜고, 신세기 체조인"국민체조"음반을 찾아 켜 놓고 내 담당마을인 대진리로 가야 하므로 모포 2리 칠전을 거쳐 바닷가로 뛰어 간다. 운이 좋은 날은 바닷가에서 한치 한 마리라도 주울 때 있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좋은 밥반찬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봉사활동도 되고 불로소득도 된다. 이것이 일거양득이 아니랴."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이 '새마을노래'가 힘이 되고 의지가 되며, 이 노래로 인하여 마을에 활기가 띠는 것처럼 느꼈다. 각 마을마다 고학년 대표를 두어, 아침청소를 마치고 아침체조를 하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서 아침밥을 먹고 등교하기 위하여 모이게 되어 있다. 각 마을 대표자가 새마을 기를 들고 기다리면 모아서 학교로 함께 온다.나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 와서 아침을 먹으면, 그 아침밥이 바로 보약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일을 눈·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매일 진행하였다.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서 어려움도 겪었지만 중요한 것은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까 오히려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였다. 물론 방학 때도 이러한 새마을 조기청소를 계속 지도하니까, 이제는 저학년까지 제 키보다 큰 비를 들고 자기 마을청소를 하겠다니 이 운동이야 말로 밑바닥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짜 "애향청소년단"이 된 것이었다.이러한 진풍경은 시골학교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그런 장면일 것이다. 처음에는 내자가 오해도 하였다. 왜 새벽같이 일어나서 학교를 가고, 남이 잠을 잘 시간에 노래를 틀어서 잠을 깨우는가와 새벽 동네까지 마을청소 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그러나 차츰 습관이 되고, 한치도 주워 오게 되니까 즐거워하였다. 국가의 정책도 그러하거니와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면 하기 싫어지고 하지도 못하고 만다. 그러나 스스로 찾아서 즐거이 할 때는 말려도 안 되고 말릴수록 더 하려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모포초등학교 새마을조기청소는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학생들에 의해서 만들어져 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행동일까? 물론 처음에는 학교에서 강제성이 있었지만 조금 지나서 자율적으로 행동하게 되니까 이것이 바로 습관이요, 행동으로 굳어지는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하게 되었다.새마을정신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어려서부터도 적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에 누적된 봉사활동은 그 사회를 빛나게 만들 수도 있고, 그 역할이 확대되면 그 마을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어쩌면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 '문맹자교육의 기수'를 한 기억에서 일찍부터 봉사활동에 대한 이미지가 오버 랩 되어서 천상 교사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모포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참 많은 업무를 접하고, 교사이기 전에 조직 속에서 작은 열매를 맺어 주는 매개자 역할을 스스로 찾아나서 준 것 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어서다. 33. 혼식검사하다 오늘도 나의 어린 날 얘기부터 먼저 하여야겠다. 우리 집에는 형님이 많았었다. 점심밥을 큰 대소쿠리에 퍼 놓아서 저마다 숟가락을 들고 그 소쿠리 보리밥 위에 금을 그어 놓고 먹어야 했다. 형님들은 내 금 밑으로 파고 들어와서 다 먹어 버리고 내가 먹으려고 하면 밑이 푹푹 꺼져서 먹을 밥이 항상 부족하였다. 그나마 날이 가물지 않아서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었지, 한해(旱害)가 심하면 조, 무, 감자, 고구마 밥으로, 저녁에는 아예 산나물 죽으로, 희멀건 물로 된 죽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허기진 배를 채울 길이 없었다.날이 가물어 심할 땐 쌀 한 톨이라고는 구경 못하는 농촌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노란 좁쌀로 밥한 것이 전부 일 때, 조밥 위에 10% 쌀이 아버지 밥그릇에만 얹히고 우리들 밥그릇에는 항상 노란 조밥뿐이었다. 정말 어려서도 흰 쌀밥을 먹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었던 시절이었다.점심이 아예 없었던 적이 많았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께서 무명베, 삼베, 명주를 고루고루 직접 짜셨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마당 한가운데 불을 피워 놓고 '베 맨다.'고 하였는데, 다시 말하면 씨줄의 실에다가 풀을 먹인다는 것이다. 풀을 쑤기 위해서는 풀매를 완전히 갈리지 않은 찌꺼기 쌀들을 모아서, 먹고 버린 달걀 빈 껍질에 달걀밥을 하는 것이었다. 배 매는 불 속에 계란밥을 2∼3개 구워놓았다가 나에게 먹이곤 하였다. 이것도 점심을 대신하는 지혜이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인 1957∼1963년, 이 시대가 정말 배고픈 시대이었는가 보다.1974년에 "영양 많은 잡곡혼식 건강 주고 나라 부강", "너와 나의 혼식으로 국력증강 찾아온다.", "풍년에 쌀 아껴 식량자급 이룩하자." 등 식량 소비절약운동 표어가 등장했다. 아울러 더 멋있는 표어도 있다. "살림위해 분식하고 건강위해 혼식하자." 이러한 표어가 수백 장씩 인쇄되어 벽마다, 교실마다, 가정마다, 보이는 곳곳 마을마다 붙여서 홍보활동을 한 적이 있다.이것도 국가시책이다. 국가시책은 초등학교로 부터인 것처럼 모든 초등학교를 통하여 가장 많이 시행되었다. 물론 중·고·대학에서도 하였겠지만, 정부시책이 잘 먹혀들지 않았는지 대통령께서 초등학교 경력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초등학교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나 생각된다.지금도 흰쌀밥만 해서 먹지는 않는다. 스스로 숙달이 되어서 내자도 반드시 잡곡을 섞어서 혼식을 해서 먹는다. 1970년대에는 학교에서 혼식검사라는 것을 하여 매일 표시를 하고, 누가표를 만들고 장학지도시 확인하게 하였다.4학년 우리 반 아이 51명이 있다."모포초등학교 개인별 혼식 조사표"라는 양식의 표가 배부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 도시락을 매일 조사 하려니 매우 귀찮았다. 그래도 정부시책이라고 하니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일단 표를 걸어 두고 30%이상이면 ○표, 10%정도면 △표, 잡곡이 하나도 섞이지 않았다면 ×표 등으로 구분 표시하여 누가표를 기록하여 두는 것이다.수업을 하다가 무슨 음식 먹는 소리가 자꾸만 들렸다. 판서를 하다가 재빠르게 돌아보니 L군이었다. 딱 걸렸다."L군! 지금 수업시간에 무엇하고 있습니까?""…."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우물거리던 입이 꽉 닫혀 버리고 함구하고 있었다."L군! 왜 그러느냐?"다가갔다. 책상 서랍 속으로 손이 들어가 있고, 꼼지락 거렸다."아니 L군! 이게 뭐고?"교실의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이제야 반장이 한마디 한다."쌤요! L은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이제 아침 먹는가 보네요."또, 학동들이 까르르 웃었다."뭐라고! 아침이라고? 아침이 어디 있나?"아이들이 일제히 '미역귀다리'라고 한다."아니, 다른 아이들은 혼식을 확인하여야 하는데, L군은 아침밥을 먹지 못했으니까, 배가 고파서 미역귀다리를 먹고 있지 아니한가! 참 세상이 고르지 못하다.그런대도 혼식검사는 계속해야만 하였다. 그러면 왜 정부에서는 혼식하여야 하는가를 정부시책으로 삼았는가? 새마을정신으로 농촌을 부흥시키려면 국민 개개인이 잘 살아야 한다. 대통령께서는 옛날에 논 한마지기에 벼 한 가마를 생산하던 것을 통일벼를 만들고 나서 최고 17가마를 생산하였다니 이 또한 대단한 부자로 만들어 주려는데 일조하지 않았는가. 또 그뿐이랴. 술, 막걸리를 빚을 때 쌀로 술 못 만들게 까지도 하였다. 옥수수 술, 좁쌀 술 등 여러 가지 기술연구로 쌀을 증산하고, 쌀을 아껴 국민들 스스로 절약정신과 내핍생활이 몸에 배이도록 철저히 시행하였다. 국가정책인 혼식검사를 하고, 그만큼 쌀의 중요성과 국민의 건강을 알도록 한 것일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길 잘 선택했다고 생각하였다.분식하고 혼식해서 잘 살아 보자고 국민들에게 강요한 것을 굳이 아무도 싫어하지 않았다. "살림위해 분식하고 건강위해 혼식하자."이러한 표어는 신문을 통하여 응모 받아 국민정신 계도에 한 몫 하였다고 생각해보면 그 깊은 뜻을 알고도 남을 일이다. 바쁜 국정 속에서도 국민 개개인이 잘 살아 보라는 깊은 뜻이 담긴 것을 말이다.매일 도시락 뚜껑을 열고, 여러 가지 반찬 냄새를 모두 맡아 가면서 열심히 도시락 혼식검사를 한 교사로서 책무를 다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된 원동력이 아니었는가 싶다. 34. 파리잡기하다 어렸을 때는 웬만하면 한 집마다 소를 키우는 것이 관례이었다. 이 소를 키우면 자연스레 파리, 모기, 쉬파리 등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손님으로 가면 집집마다 파리채가 있었고, 심심찮게 파리를 잡아 댄다. 여기서도 딱! 저기서도 딱, 파리 잡는 소리가 요란했었다. 일손이 바빠서 사실상 파리 잡을 어른도 별로 없었다. 파리는 자연 발생적으로 사람과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밥상에도 자주 내려앉고, 심지어 밥그릇에도 붙어 버린다. 고기라도 구우면 더욱 파리가 기성을 부리기도 한다.나의 초교시절에서도 파리를 잡아 오라는 특명이 있어서, 이러한 정책이 실시되었다.첫째, 파리를 잡으려면 파리보다 빨라야 일단 잡을 수 있다. 맨손으로는 안 잡히고, 그래도 파리채가 있어야 90%이상을 잡을 수 있다.둘째, 파리는 도구로 잡을 수도 있다. 도구는 기름종이를 천장에 매어다는 방법이 있고, 또 유리항아리 속에 물을 넣어서 파리를 유혹하여 잡는 것도 있다. 어렸을 때는 작은 성냥갑이라도 하루에 두 통을 잡기에는 힘이 들었다. 어머니나 누이들에게 부탁하여 잡아서 채워가는 것이었다.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지만, 작은 성냥갑에 파리를 잡아오라는 숙제가 간혹 있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에서는 잘 이행되지 못하였다. 즉 잘 잡아오지 못하였다.파리와 사람의 관계는 어떠할까? 파리의 발생원은 주택가의 쓰레기 처리장(집파리), 산과 들의 쓰레기통(검정파리·금파리·쉬파리), 해변의 어물 건조장(금파리), 양돈과 양계장 및 퇴비장(애기집파리·큰집파리·붉은종아리큰집파리), 목장의 축사와 배설물(검정집파리·제주등줄집파리·침파리) 등이다. 그 밖의 발생원으로는 산과 들에서 죽은 동물시체와 배설물, 야외 재래식 변소에서 쉬파리·검정파리·금파리가 발생한다.집파리는 장티푸스·콜레라·아메바성 이질·세균성 이질 등의 병원체를 몸에 난 털과 발에 묻혀 전파시키기도 하고, 병원체와 함께 먹은 것을 토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병원균이 직접 전파된다. 집 밖에서 활동하는 파리로 가끔 집안에 침입하는 검정금파리는 소아마비바이러스를 옮기고, 아프리카의 체체파리는 열대수면병의 병원체인 트리파노소마를 매개한다. 검정집파리는 가축의 눈언저리와 입, 상처 등을 맴돌면서 병을 옮겨 승저증을 일으켜 큰 피해를 준다. 또한 농작물에 세균성 병을 옮기기도 하고 진딧물을 몸에 난 털이나 다리에 붙여 성한 작물에 전파시킨다.간혹 중국 영화를 보면 젓가락으로 파리를 잡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그것은 그만큼 빠르다는 것으로 검객을 돋보이려는 수작일 것이다.1970년대 시골에서는 파리가 많았다. 귀찮을 정도로 파리가 많았다. 일부 집에서는 모기장으로 쓰던 것을 계속 방문에 걸어 두기도 하였다. 학생 1인당 작은 성냥 통에 두 갑씩 잡아서 제출하라는 것이다. 실적을 사진으로 찍어서 교육청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정책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이 드는 시대이었다. 시골 가정집에 가보면 파리 잡는 기계가 웬만하면 한 개씩 있었다. 하루 종일 잡아서는 그냥 버리면 또 살아남기 때문에 깡그리 태워 없애 버렸다.파리 잡는 기계방식이 재미나다. 유리그릇처럼 생긴 파르스름한 통에 안으로 오그라진 그곳에 물을 붓고 바닥에 밥풀을 헤쳐 놓아두면 밥을 빨아 먹으려고 날아들다가 그만 물에 빠져 날개가 파닥이면서 제 스스로 물에 빠져 잡히는 원리이다. 식당에서는 파리 잡는 기름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리던 시대이었다. 물론 제일 흔한 것이 파리 잡는 파리채다.집파리와 아기집파리는 대다수 화장실과 주방을 오가며 생활하는 특성으로 인하여 전염병 매개의 이동과 정신적인 불결감, 시각적 불쾌감을 높이고 있다. 특히 파리는 각종 전염병의 기계적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파리는 사람의 음식물 이외에도 분뇨, 침, 콧물, 고름 등을 섭취하는 습성이 있으며, 반고체성 먹이를 먹을 때 먹이의 임시저장 역할을 하는 소낭의 내용물을 토해내는 습성이 있다.이러한 파리의 족속이 우리를 귀찮게 하고 있으니 '정부시책으로 파리를 대대적으로 잡아라.'는 공문까지 오는 것이 아닌가. 시골의 가정환경이 이러 할진데 어찌 이를 잡지 않으랴. 잡으면 그만큼 각종 질병을 예방할 수 있고 아예 시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쾌감도 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정부에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물론 각 가정마다 어른들이 시간을 내어 잡을 수도 있지만, 초등학교 학생들이 파리채로, 기름종이로, 파리 잡는 기계로 여러 가지 수단으로 파리를 박멸하자는 국민운동에 동원되기도 한 것이다.파리를 작은 성냥 통에 각 2통씩 잡아왔으니 우리 반에서만도 100여 통이나 된다. 한 통에 200여 마리로 환산하면 2만 마리나 잡았다는 결과다. 이것을 전국적으로 초등학교만 해도 대단한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꼭 잡지 않아도 파리를 박멸하는 국민운동으로 벌인 것이 새마을정신에 꼭 부합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만큼 환경에서 좋아지고, 국가시책에 부응하여 단합된 국민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상하게도 제출된 성냥갑이 보통 갑보다 무거웠다. 그래서 열어 보니까 윗부분에만 파리가 있었고 밑에는 모래알을 넣어서 갑을 채워 제출된 것이었다. 생각보다 파리잡기가 귀찮고, 힘이 드니까 잔꾀를 부린 것일 게다. 혼자 씁쓰레한 결과에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성냥 통에 출석번호를 써서 제출하라고 하니까 바로 들통이 났다.학교 전체로 모두 모아서 파리를 화장하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화장 즉 불에 태우는 것이다. 하물며 이런 사진 찍어서 교육청에 보고하는 시대이었다. 35. 쥐꼬리 모으다 또 교육청에서 공문이 왔다. 이제는 학생들 각 가정을 통하여 쥐잡기를 실시하여 잡은 쥐의 꼬리를 끊어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배부된 '쥐잡기의 날'포스터를 배부하여 경각심을 깨우치고 정부시책의 홍보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철저히 교사들을 활용하는지 정말 대단하였다. "쥐 잡는 날"은 전국적으로 같은 날짜로 정해서 한꺼번에 쥐가 발붙일 곳이 없도록 통일한다고 이를 지키기 위해 대단한 당부가 있었다.쥐의 특성을 알고 쥐약을 놓는 방법도 상당한 이론이 있다. 물론 쥐를 잡는데 약이 필요하고, 쥐약은 위험하기 때문에 쥐약 배포는 면사무소를 통하여 성인들에게 배부되었고, 학생들에게는 잡은 쥐들의 꼬리를 끊어 오게 하는 것이다. 집집마다 표어와 포스터를 붙이고 전국이 같은 날짜에 공동으로 쥐를 잡게 정신적으로 홍보를 하는 것이었다. 쥐 잡는 날 하루 전에는 학교에서 표어작성과 포스터그리기를 하여 시상도 하였다.쥐잡기가 정부주도로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라지만 군사작전을 방불케 해 조직적 거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박대통령 시절이었고, 보건위생보다 식량자급 목적이었다. 1970년대 초 통계로 우리나라의 쥐를 1억 마리로 쳤을 때 쥐들이 축내는 양곡이 연간 32만t에 달했다. 1970년 1월 26일 시작된 제1차 쥐잡기 사업에서 "4,300만 마리를 잡아 106만 6천 석의 양곡손실 방지효과를 올렸다."는 것은 대통령에게 보고된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가히 놀랄 만한 효과다. 각 도별로 마릿수까지 할당 지시했던 그 시절이다.전국 쥐 잡는 날로 정하고 그 이튿날에는 쥐꼬리를 두 개 이상을 가져 오는 날이다. 문제는 쥐가 잡히지 않은 아이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쥐꼬리를 두 개 이상 제출하여야 하는데 쥐는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징어 꼬리를 적당하게 거슬려서 흡사 쥐꼬리같이 만들어 제출한 학생도 있었다.전 국토에 쥐도 참 많았다. 사람 먹을 쌀도 없는데 쥐가 축내는 식량이 정부가 발표한 통계로 정확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쥐는 쌀만 축내는 것이 아니라, 문이나 창틀 가구를 이빨로 갉아 구멍도 내놓고, 전염병도 옮기고, 전기 줄도 이빨로 갉아 누전되어 심하면 화재까지 불러오는 등 한마디로 아주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그때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정말 쥐가 많았다. 부엌이 하수구와 바로 연결되어 있어 하수구에 사는 모든 쥐들이 집 부엌은 다 한 번씩 와보는 것 같았다. 식은 밥과 반찬이 들어있는 부엌의 찬장은 하도 쥐가 여기저기를 갉아놓는 바람에 흉한 모습으로 변했고 찬장 뒤에는 항상 쥐똥이 수북했다. 밤에 천정에서 우당탕탕 뛰는 것은 기본이고 밤새 방문이나 창살을 바각바각 이빨로 갉는 바람에 그 소음에 잠에서 깬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어떤 용감한 쥐는 방에까지 들어와 책상 밑에 쌓아둔 책 뒤나 장롱 밑에 아지트(?)를 꾸며놓고 살기까지 했다. 새까만 쥐똥이 수북이 쌓은 곳을 발견하고 쥐똥을 치우는데도 화가 났다. 그때 쥐를 잡는 방법은 쥐약, 쥐틀이 대종을 이루었다. 쥐약은 쥐잡기에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쥐약을 개가 먹거나, 쥐약 먹고 죽은 쥐를 개가 먹어 애꿎은 개가 희생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사람도 자살도구로 쥐약을 사용하여 신문에 쥐약 먹고 자살한 기사가 심심찮게 나왔다. 어디 그뿐인가? 쥐약을 먹은 쥐가 괴로워 이리저리 헤매다가 마당 한가운데에서도 죽고, 부엌에서도 죽고, 어디 보이지 않는 곳에 기어 들어가 죽기도 하는 바람에 쥐약을 놓는 것은 죽은 쥐를 찾아야 하는 애로사항이 뒤따랐다.'찰카닥'하는 소리와 함께'찌익~'하는 쥐의 비명소리가 들리면 유유히 방문열고, 부엌 한쪽에서 버둥대는 쥐를 연탄집게로 한방에 내리쳐 즉사시키는 방법으로 많은 쥐를 잡았다. 어처구니가 없다. 하기는 이런 식으로라도 했어야 학교에 쥐꼬리를 제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도시에서 살아도 일반 주택에서나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쥐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요즘은 누가 쥐를 잡아 꼬리를 제출할 것인가? 정부시책도 그렇지만 이제 옛날처럼 시행할 사람도 없다. 그때는 그런 정책을 싫다하지 않고 국민 모두가 함께 뜻을 모았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삶의 바탕이 된 것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36. 재필에서 도깨비 만나다 고학년 담임이라 오후 수업이 있었다. 시골 초등학교 근무는 작은 일이라도 출장을 다녀와야 한다. 출장지는 면소재지 장기이었다. 금오까지 2km를 걸어가야 한다. 그날따라 날씨도 우중충한데, 시골 논밭 사이로, 도랑가 언덕길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오늘 출장은 반드시 필요하였다. 학계리 재필을 넘어 걸어가다가 깜짝 놀랐다. 제 스스로 가만있다가 길가로 사람이 걸어가니까 제를 잡으러 오는 줄 알고 스스로 놀라서 우중충한 창공을 날아오르는 장끼 한 마리가 "꿔~엉 꿩!"제 이름을 말하니까, 덩달아 따라 다니던 까투리와 꺼병이까지 놀라 함께 퍼덕이면서 날아오른다.누가 그랬던가? 장끼를 잡는 방법은 아주 쉽다고 한다. 입고 다니는 잠방이를 벗어 돌 넣어 감싸들고 다니다가 장끼가 놀라 하늘가를 날아오를 때 힘껏 던져서 장끼를 꼼짝 못하게 잡는다고 한다. 그것이 생각처럼 어디 쉬울까 의문을 품고 있는데, 어느새 금오까지 도착하자말자 포항-감포 시외버스가 도착하였다. 금오에서 장기까지는 마치 골뱅이 속을 돌듯이 뱅글뱅글 돌아서 감돌아 산속으로 올라가야한다. 노후 된 버스도 사람을 태우고 올라가기가 힘이 드는가 보다. 연신 기어를 바꾼다. 그리곤 길길~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오후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겨우 출장지인 장기에 내렸다. 빠른 시간에 출장 업무를 모두 마치고 다시 고개를 넘어 모포로 가야 하는데, 이게 어찌 되려나? 막차가 떨어지면 난감했다. 왔던 길로 가려면 예서 금오까지 걷고도 학계리 재필을 걸어서 칠전까지 가야 하는데 오늘은 급기야 우중충한 날씨에 비가 되고 만다. 급히 서둘러 일을 마쳤다. 용케도 포항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에 몸을 싣고 금오로 향했다.여름 해라지만 비오는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도 벌써 어둑한데 금오에서 언덕길 도랑 길, 논 사이 길을 어떻게 혼자 걸어가야 하나 하는 생각만이 머리를 꽉 매우고 있었다. 벌써 버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행동이 자동필름처럼 돌아가는데 어느새 금오에 버스가 닿았다. 역시 이 시간에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무거운 가방을 둘러매고 우산도 없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빗줄기는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오전, 오후 내내 수업하다가 그것도 2km 도보로 왔다가, 다시 2km를 걸어가야 하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나를 걷게 하다니? 몸이 솜뭉치가 되면서 피곤이 엄습한다.한참을 걸으니 비가 잦아진다. 그저 희끔한 달빛이 길을 비쳐 주고 길 가운데 뾰족한 돌들이 뒤숭숭 올라 있는 비포장 길, 시골길을 하염없이 걷고, 또 그저 걷고만 있었다. 불현듯 생각이 났다. 재필을 지나면 자연목욕탕인 거랑이 있고 그 거랑 옆으로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그래도 칠전 마을 불빛이 조그맣게 깜빡거리고 있다. 저 멀리 칠전 끝 동네에 솔숲이 보이고 군데군데 무덤이 보인다. 이러한 곳을 지나려면 한적한 그런 길인데 어떻게 통과를 해야 하는지가 궁금하였다. 오늘같이 이슬비가 내리고 희끔한 달빛만이 겨우 길을 밝혀 주는 이 시간에 말이다. 나도 시골출신이라서 이런 날씨에 길을 걸어보긴 했지만 오늘처럼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는 곁에 동행자가 있었지만 오늘은 나 혼자다. 어쩐지 어시시하다.그러는 사이 재필을 지나 인적이 끊인 언덕길로 올랐다. 어깨에 가방은 무게를 더했다. 고개를 들어 대진리 쪽으로 바라보는데, 시커먼 숲과 검은 거랑물 위에 도깨비불이 춤을 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섬뜩했지만, 속으로는 아무리 도깨비불이 춤을 추지만'내가 간다'는 자신감으로 막 뛰고 또 뛰었다. 큰 목소리로 아는 노래를 모두 냅다 불러댔다.도깨비불은 밤에 습지 위로 어른거리는 신비한 빛이라고 한다. 즉, 다가가면 항상 잡히지 않는다. 전설 속에서는 불길한 대상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저승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한 사람의 영혼이 떠다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이 현상은 메탄가스나 죽은 식물이 분해되면서 생기는 가스가 자연발생적으로 연소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명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현실은 그것이 아니다. 우선 눈앞에 어른거리는 저 불빛! 특히 한 뭉치의 횃불처럼 나타났다가 작은 불이 먼저 진행해 가면서 작은 불덩어리를 흘리고서 잽싸게 지나간다. 다시 어디쯤엔가 나타나서 그러한 보임을 지속으로 연출한다. 벌써 마음은 급하고, 바짓가랑이는 후줄근히 빗물에 젖어서 걷는데 거치적거렸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겁이 나는 그런 형상의 동물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이며,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선생으로서 교육으로도 잘 알고 또 그렇게 믿고 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반대편 저 거랑 둑으로 확 나타났다가 작은 불을 흘리면서 유유히 불춤을 추는 광경을 어찌할 것인가? 물론 내 어렸을 때 외딴집에 살아서 저녁에 늦게 놀다가 내려오면 집 뒤, 언덕에 도깨비불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자랐지만, 현실은 지금이 문제다. 이 길을 빨리 통과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곁을 지나니 이제는 저 멀리서 도깨비불이 유영하고 있다. 마치 도깨비불이 '나 여기 있으니 잡아봐라!'하는 것 같다. 아니면 '나 여기 있으니 같이 놀자!'하는 것 같다.밤에, 그것도 비 내리는 희뿌연 달빛아래 도깨비불이 춤추고 있는 검은 거랑 물과 무성히 자란 거랑 가에 키 큰 풀 곁을 빨리 지나야만 했다. 그러면 무덤 앞을 지나면서 칠전교회 첨탑이 보인다. 이제 안심이 되는 것이다."휴우!"길게 한숨을 내어 쉬고 집에 도착하니 내자가 보고 한마디 한다."옷이 와 그렁교?"비가 오니 그렇습니다.""비 온다고 이래 옷 버려 오다니 참?""비오면 옷에 흙이 묻습니다."말은 그래도 나는 속으로 금방 지나 온 길로 인해 오금이 저리고, 마음이 콩닥콩닥하여 말할 힘조차 없었다. 과연 얼마나 빠른 속도로 뛰었으면 바지 뒷부분까지 온통 흙탕물이 튀었을까?누가 뭐라고 했는가? 그냥 그 길로 혼자 오면서 마음의 도깨비불과 스스로 싸운 것뿐이었다. 비 오는 날의 도깨비불과 씨름을 하다니. 20세기 과학을 배웠으면서도 이런 현실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하기는 듣는 얘기로 밤새도록 도깨비와 싸움하고 이튿날 그 자리에 가보니 사람 피 묻은 몽당 비 한 자루 뿐이었다고 한다.시골에 근무하면서 세상의 온갖 경험을 다 해보는 것이다. 지금도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에 그 길을 걸으면 나를 맞이하는 도깨비가 나타날까? 학계리 재필을 지나서 강구테에 나타나는 그 거랑물이 흐르고 저 만치 비 내리는 언덕에 솔숲이 보이는 그곳에 도깨비불 유영을 아직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옛날에 선생 했다.'는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37. 나도 운동화를 신고 싶어요 어렸을 때 집에서는 짚신을 신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짚신 삼는 법을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다. 2∼3일간 먼 거리를 가려면 짚신을 많이 삼아서 봇짐에 매달고 가다가 닳으면 버리고 새로 꺼내 신고 갔다. 일찍부터 짚신 신는 것이 일상화가 되었다.초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검정고무신을 사 주셨다. 그 검정고무신은 꼭 학교 오갈 때만 신었다. 집에서는 반드시 짚신이다. 그러나 비가 오면 꼼짝 못하니까 아버지께서는 나무인 나막신을 만들어 주셨다. 아버지는 반농 반목수를 하셨다. 목수 즉 농사철에는 농사짓고, 비가 오거나 추운 겨울에는 동네에 집을 지으셨다. 목수이셨기에 나무로 만드시는 것은 곧잘 만드셨다. 지게, 대바구니, 짚공예품도 곧잘 만드셨다. 밧줄 엮기,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등도 하셨다.초등학교 시절에는 그 때도 잘 사는 집에서는 운동화를 신었고, 안 그러면 새하얀 고무신에 파란 테가 있는 백고무신도 신었다. 그런데 나는 검정고무신도 마음껏 못 신어 보았다."선상님 요! L2가 장기 장(4, 9일)에 갔다 왔어요.""장기 장에 무엇 하러 갔는데, 왜?""그런데 예. 아이 구 말씀 해드려야 하나, 우짜~꼬?""그래. 무슨 말인데, 해 보아라.""그런데 예. 뭘 훔쳐 왔데 예.""뭘? 뭘 훔쳤데.""운동화요…."그러자 반장에게 물었다."이게 무슨 소리고, 장기 장에 누구누구 갔다고 하나?""여럿이 갔답니다. L1도 갔고, K도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만 간 것이 아니고, 저학년들도 몇 명이 같이 갔답니다.""응. 알았다."아! 이것이 또 문제이었다. 어릴 때 물론 좋은 운동화를 신고 싶겠지. 이를 어째, 조용히 L1, L2, K 등을 불러냈다."그래 몇 켤레를 가져 왔나?"L1은 한 켤레, L2는 두 켤레, K는 한 켤레라고 한다."갖고 싶었겠지. 어릴 때부터 그러면 안 된다. 다음 장날에 주인에게 갔다 드려라. 잘못을 빌고, 꼭 그렇게 하여라.""예에.""옳지. 그래야 착한 어린이지."바쁜 업무로 잊어버리고 있었다. 수업과 수업준비, 업무 등에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었다.내 얘기로 돌아가 보자. 아버지께서 불국사 장날(4, 9일)에 검정고무신을 사 오신다고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무신을 보고 싶어서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버지께서는 일찍 오시지 않으셨다. 집에 돌아와서 기다려도 오시지 않으셨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날따라 아버지께서 늦게 오셨던 모양이다.아버지께서 검정고무신을 사다가 내 머리 맡에 갖다 두셨다. 이튿날 아침에 검정고무신을 보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다섯 살이 많은 계형께서 나를 보고 웃으신다."왜 웃으시는 데요?""임마! 네 신발 봐라. 왼쪽 두 짝이잖아.""아. 그러네. 아버지 왜 왼쪽 두 짝이지요?""응, 그래 왼쪽 두 짝 맞다. 아이가 발에 신으면 되지. 그것도 시간이 없어서 못살 뻔 했는데, 흔틀 고무신전이라 제 짝 찾기가 어려웠고, 모양만 반듯하면 되지, 괜찮다. 신어 봐라.""예? 예."아무 말도 못하고 나는 검정고무신 왼쪽 두 짝을 신었다."봐라. 신으면 왼쪽 두 짝인지 모르잖아. 이제 되었지?"정말 신으면 모른다. 나는 왼쪽 두 짝 고무신도 좋았다. 짚신만 신다가 살갗이 매끄러운 고무에 닿으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단지 벗으면 왼쪽 두 짝이 되지만.그렇게 학교에서는 바쁜 일정에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선상님 요. 다른 애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는데, L2는 한 켤레만 갖다 주었어요."L2를 불렀다."왜 너는 모두 갖다 주지 않았나?""….""정말 말을 안 듣는 구나. 너! 그러면 안 되지.""….""다음 장날에 꼭 갖다 드려라.""예…."그런데 대답이 영 시원하지 않았다. 끝까지 반납되지 않았다. 정말 끈질기게 말을 안 들었다. 정말 대단한 아이였다. 나는 검댕고무신 왼쪽 두 짝도 반갑고 고마운 신발이었는데 말이다.그러나 나는 못내 그 아이에게 미안했다. 새 운동화 한 켤레라도 내가 사 주었으면 지금도 미안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저 그 아이가 신고 싶었던 운동화와 나의 왼쪽 두 짝 검댕고무신이 오브랩 된다.지나고 나니 후회가 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운동화 한 켤레 선물이라도 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모포초등학교 그 선생이 말이다. 38. 모포에는 밥이 없어 나는 고등학교 때 4일간을 굶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이었다. 어머니께서 신경통으로 거동을 못하시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모두 큰형님 집으로 들어갔다. 나도 덩달아 큰형님 집으로 가서 함께 살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는 것이 큰형님과 큰 형수님은 무척 못 마땅해 하였다. 본래 따로 살다가 합가하니 서로가 불편했다. 1Km정도 떨어진 전에 살던 집 사랑채에서 램프를 켜고서 밤새 공부하였다. 밥은 큰형님 집으로, 공부와 잠은 전에 살던 집 사랑채에서 이렇게 다니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짧은 시간이라도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오르내리려니 불편했다. 아예 큰형님 집에 가지 않기로 하였다. 4일간을 굶었다. 큰형님 집에 가지 않자 낮에 어머니께서 와 보시고 쌀자루와 풍로를 갖다 놓았다. 직접 밥해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따로 혼자 살았다.판서를 하고 있는데, 그때 책상 서랍소리가 달그락달그락 났다."누가 필기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다시 판서를 하는데 또 달그락 거린다."누구지! 이 소리 내는 사람이 누구지?"하면서 고개를 획 돌리자 L1이 손을 서랍 속으로 넣었다. L1에게 다가갔다. L1이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L1! 무엇하지?"입이 불룩하였다. 무엇을 씹다가 나에게 들키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책상 서랍 속을 들여다보았다. 서랍 속에 책과 공책은 없고 온통 바다 해조류가 가득 담겨 있었다."이게 무엇이고?""미역귀다리 인데요."역시 L1이 말을 못하자, 반장이 대신 대답하였다."미역귀다리를 수업시간에 먹으면 되나?""….""미역귀다리는 쉬는 시간에 먹고, 서랍 속에 이것을 넣다니 대단 해?""…."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 정말 밥이 없었구나. 밥이 없으니 배가 고프고, 그래서 미역귀다리라도 먹는구나. 아이 구! L1 가엾어라. 이를 어째!1973년 여름! 그 긴 세월에서 또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정말 그 당시는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밥이 없어서 미역귀다리를 먹는 시절이었다.하기는 나도 어렸을 때 5년간 가뭄이 들어 조밥과 고구마 밥으로 연명하고, 나중에는 무밥까지 해 먹었다. 조밥과 고구마 밥은 식어도 맛이 좋은데, 무밥은 식으면 물이 생겨서 된장을 넣고 비벼 먹어도 좋지 않았다. 저녁에는 나물죽을 먹는데 보리쌀도 없어서 그저 시퍼런 산나물로 연명하였다. 그 때는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서 그랬는지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어쩔 수 없어서 소를 먹이러 가면 소는 도랑에 몰아넣고, 나는 방죽에서 꼼밥을 비벼 먹기도 하였다. 그리고 배가 고파서 삥기도 비벼서 바람에 날리고 한 움큼씩 먹었다. 그러다 견디지 못하면 감자서리도 하고, 밀서리도 하였다.정말 가난은 국가도 어쩌지 못하는 시대였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 4·19 의거가 있었고, 5학년 때에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는 매일 데모가 있었다. 제일 맛있는 서리는 단감서리였다. 단감은 서당 훈장집 단감이 좋았다. 그래서 곧잘 배가 고프면 서당집 울타리에서 단감을 몰래 따 먹었다. 배고픈 시절에 태어나서 옳게 먹지도, 입지도, 신지도 못한 세대이었다. 농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다. 배고픈 사연이 많았다.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교대 후배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이 없어서 수도에 물을 틀어 놓고 배가 부르도록 먹고서는 양지바른 자갈 선에서 졸다가 그만 오후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가서 뺨맞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 때 맞는 것은 안 아픈데, 배가 고파 서러워서 울었다고 한다.아! 정말 배고픈 사정을 아는 자 누구인가? 그것은 배가 고파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51명 중에 점심 굶는 아이들이 거개다. 용의검사와 함께 소지품검사를 하면 남학생 50%가 호주머니에 미역귀다리, 그것도 날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시간 나는 대로 씹고, 씹고 또 씹는다. 오늘날 급식을 하는 시대로 맞아 많은 도움이 되지 싶다. 그런데 모포초교에서 5학년이 되자, 빵 급식이 무료로 되었다.내가 1957년에 초등학교 다닐 때는 우유를 끓여서 한 컵씩 받아먹었다. 그런데 낭랑하고 단 우유를 먹지 못해 자갈선에다 모두 쏟아 버리자 학교 선생님이 아예 우유가루를 도시락 채 주셨다. 그러나 이 우유는 모아서 장에다 내다 팔자 우유를 그대로 주지 않게 되었다. 5학년 때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서는 옥수수가루를 주었다. 이 또한 가루를 아이들에게 먹이지 않고 장에다 파는 것을 알고서는 이제 6학년 때는 옥수수 가래떡을 방앗간에서 만들어 아예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먹고 가게 하였다. 아이들에게 배고픈 것을 앞으로 어떻게 해결하려나, 서울특별시에서는 무상급식에 대하여 선거까지 한다니 세월이 많이도 변했다.나중 얘기지만, 네 번째 학교에서는 일부부담 급식을 하였는데 정말 효과가 좋았다. 문교부지정 자활급식 연구학교이었다. 1학년 아이들이 입학할 때는 집에서 옳게 먹지 못하다가 6개월 동안 학교급식을 먹으면 생기가 돌고 아이들이 달라졌다.아이들이 밥이 없어요. 세계경제 대국 10위에 드는 나라가 아이들 급식을 충분히 해주어서 건강한 학생이 되고, 공부 잘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는'밥이 없어요.'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39. 합동 수학여행가다 교무회의가 열렸다. 6학년이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데, 학생 수가 적어서 이번에는 5·6학년이 함께 간다고 하였다. 아직 우리 반은 5학년인데 어떻게 수학여행을 함께 가야한다고 할까 처음에는 망설여졌다. 문제는 분명 있었다. 기차를 타 본 학생은 강원도에서 전학 온 K군 1명뿐이었다. 내년에 6학년이 되어도 학생 수가 적으면 진행할 수가 없다. 또 지도교사도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판이다. 교감선생님께서 따라 가셔도 운영이 어려울 것이다.교무회의에서 5·6학년 합동 수학여행단을 운영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먼저 교육청에 승인신청을 내어야 하였다. 일정을 정하고, 기차를 예약하여야 했다. 5·6학년 학부형 댁으로 방문하여 수학여행 참가를 독려하여야 했다.일정이 잡히고, 예산을 세워서 학부형회의를 소집하였다. 예산 정한 것을 등사하여 나누어 드리고 회의에 부쳤다. 수학여행도 공부의 연장이고, 이번에는 5·6학년이 동시에 간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당일 참석 학부형으로서는 대단히 만족해 하셨다. 이제까지 수학여행하면 얼마의 돈을 내라고 하고 바로 시행하였는데, 이렇게 자료를 만들고 학부형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대다수 찬성하여 주셨다. 정말 고마우셨다. 90여%가 찬성을 하여 주셨으니 나머지 10%는 교사의 몫이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학부형댁을 계속 방문하였다. 우리 반은 51명 중에 47명이 찬성하고 돈까지 내어 주셨다. 4명은 정말 어려워하였다. 나머지 4명에게는 내가 돈을 내고 100% 참석을 목표로 삼았다.수학여행에서 제일 어려움은 아직도 도시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이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도시의 교통신호도 이해하여야 하고, 또 기차를 장시간 타면 차멀미와 한 번도 집을 떠나서 혼자 잠을 자본 아이들이 없는지라 이것이 걱정이었다.준비물로 기차멀미를 없애기 위해 노래책 복사와 도시에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특색 있는 색깔의 개별 모자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노래책은 내가 직접 등사하여 50여 페이지를 만들었고, 모자는 눈에 잘 띄는 노란색에다 "모포"라는 글자를 넣었다.모포에서 전세 시내버스를 타고 포항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를 경유하여 대구에 가서 학생과학관에서 최신 과학실험 수업과 자기 얼굴이 TV에 바로 나오는 등 과학기자재 구경이 하고, 대구 달성공원, 신문사, 방송국 등을 견학 하고, 대구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경주 고적지로 출발하는 것이다. 경주에서 1박하면서 혼자 잠자는 것을 체험하고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경주 불국사를 구경하고, 박물관을 거쳐 다시 기차로 포항역에 도착하여 포항에서 대기 중인 버스로 학교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과연 90명을 데리고 무사히 귀교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모포초교 5·6학년 수학여행단이 모포에서 전세 시내버스를 타고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버스 2대에 나누어 타고 포항역을 향해 출발하였다. 자기 동네에 버스를 타고 가니까 이것부터 신기해하였다. 포항-대구 기차를 타기 위해 포항역에서 개찰을 하였다. 선두에 선배 선생님이신 6학년 담임 선생님, 나는 끝에서 인원을 점검하며 뒷문에서 승차하였다. 드디어 기차가 출발하였다.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희한한 기차를 처음 탔는데, 그것도 굴속으로, 컴컴한 굴속으로 들어가니 놀라서 고함을 치는 아이도 있었다.기차는 단체 칸이고 맨 끝 칸이다. 자리를 정돈하고 노래책을 내어서 합창을 하였다. 경주에서 기차를 회차 하여 건천을 지나고, 영천을 지나고, 하양을 지나서 드디어 대구역에 도착하였다. 기차멀미를 없애려고 계속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경상북도 도청 옆에 있는 학생과학관에 들렀다. 문제가 일어났다. 잔돈을 많이 바꿔가서 타보고, 만져보고, 느껴보고 하느라 도대체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11층 학생과학관을 제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서 노란모자 쓴 학생들은 무조건 가자고 당겨내었다. 모자에 "모포"자를 보고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목포에서 왔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한글도 모르느냐? 모포를 왜 자꾸 목포라고 하지? 겨우 인원점검을 하고 달성공원으로 가야 하는데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시내버스를 타려면 신호등을 건너야 한다. 학교에서 아무리 이론을 가르쳐도 이 아이들이 도시에 오니까 파란불에 건너라고 하는데도 못 건넜다. 문제는 차 소리 등 도시소음 때문에 아이들이 당황하였다. 90여 명을 다 건네고 나니 온 몸에 땀이 후줄근히 났다. 도대체 신호등이 아이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파란불에 건너라면 빨간 불인데도 건너려고 하고 일대 혼란이 왔다. 파란 불일 때 가운데에서 고함을 치고 손짓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모두 건넜다.달성공원에서는 '구경을 마치고 반드시 입구 큰 대문에서 기다린다.'는 주의를 주었는데도 호랑이 있는 곳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호랑이인가? 가짜인가? 쓸데없는 의문에도 빠지기도 하였다. 신문사, 방송국에서는 일렬로 따라 가니까 그래도 안전하였다.대구역에서 오후에 기차를 다시 탔다. 기차를 타기까지 혼이 나갔다. 시내버스 태우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겨우겨우 인원을 확인하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는 경주까지 가서 내리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기차멀미 때문에 다시 노래 책을 내어서 노래를 시작했다. 포항에서 대구 올 때 10번을 노래했는데, 이제 목이 아프다. 이 노래를 시켜야 기차 멀미를 하지 않는다. 다행히 노래책 때문에 차멀미를 잊어버리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경주역에 도착하니 늦은 저녁이었다. 이제 배가 고프다. 경주는 그래도 덜 혼란스러운 도시였다. 예약된 안동여관에 들러 저녁을 먹고 주의사항을 한 후 각자 방으로 돌려보내고 겨우 쉬었다. 수학여행은 어렵고 힘 드는 긴 여정이었다.아침에 일어나 보니 벌써 부지런한 아이들은 아침밥도 먹기 전에 군것질하기에 바빴다. 또 시내버스를 타고 경주 불국사를 향했다. 내 고향을 지난다. 불국사 기차역 밑이 내 고향마을이다. 시내버스 타기는 또 곤욕이었다. 우리만 타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과 함께 타야 하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같았으면 아예 전세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다녔으면 좋겠는데 수학여행 경비를 절약하려고 이런 고생을 자행하였다.천년고찰 불국사에 들러 자하문을 보고 범영루를 지나 석가탑, 다보탑, 대웅전을 보고, 사리탑을 지나 극락전을 나오니 불국사 전경이 나온다. 그곳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박물관에 들렀다.국립경주박물관! 이는 종합교육관이다. 박물관에서 제일 먼저 성덕대왕 신종인 일명 에밀레종이다. 별관에 치미를 설명하고 박이차돈의 순교비와 금관은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박물관에서 경주역까지는 걸어갔다. 조금 일찍 와서 경주역에서 대기하다가 예약된 기차에 몸을 실었다. 포항역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르게 빨리 왔다.포항에서는 전세 낸 버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타니 모두가 파김치가 되었다. 1박 2일 만에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하였으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늦게 어둠이 내려서야 모포초등학교에 도착하였다."모두들 수고하였습니다. 내일은 쉬고, 모레 봅시다. 안녕!"1박 2일 수학여행이 끝났다. 아무 사고 없이 모포초등학교에 잘 도착하였고, 집으로 모두 돌아갔다. 아픈 사람도 없이 무사하였다. 이것이 제일 좋은 결과다. 1974년 모포초등학교 5·6학년 합동수학여행단이 안전하게 해체되었다. 40. 미리 가르친 영어와 한자 초등학교 교사로서만이 아닌 다른 욕심이 동하였다. 처음 선생을 하러 왔던 초임지 모포초교에서 그것도 4, 5, 6학년 3년간을 내리닫이 담임을 하여서 어느 정도 기초공부의 길을 닦아주었다고 생각하니 다음 교육도 걱정이 앞섰다.중학교를 가는 학생은 76% 정도이다.(남자 23/27명, 여자 15/23명 입학.) 결국 14명(남자 4명, 여자 8명)은 중학교 입학이 그 당년도에 하지 못했다. 이를 어째! 내가 1962년에 초교 6학년 때이었다. 당시 중학교 입학이 시골에서는 쉽지 않았다. 나의 동기 160명 중에 고작 20여 명인 12.5%만이 중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에 가지 못한 것으로 나를 포함해서 140여 명이나 되었다.내가 중학교를 가려면 입학원서를 써야 하는데 수험료가 83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1961년, 군사혁명)에 화폐개혁을 해서 830환이었던 것이다. 1~3반 학생을 모두 모아 놓고 1반 담임 선생님께서 설명을 하셨다. 원서를 접수하려면 이래저래 추가 돈이 들므로 150원씩 준비하여 오라고 했다. 제출할 돈이 졸업사진 2장에 150원, 중학교 원서대 150원 합해서 300원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나는 300원을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했다. 겨우 150원을 어머니께서 마련하여 주셨다. 집에서도 중학교를 가지 못하도록 방해만 하니까 포기하고 졸업사진 값으로 150원을 내고 말았다(지금 생각해보니 졸업사진이 무어대수라고 그때 중학교 원서를 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중학교를 당년도에 갔을 텐데…. 나도 참 착한 위인이었나 보다.).그런데 그것이 참 묘했다.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없으셨다. 당시는 초교 교사도 하시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2학년 여선생님이 시집을 가서 사표를 내신 모양이었다. 나는 6학년 3반이었는데, 우리 담임선생님이 2학년을 가르치러 가시고 3반은 남·여학생이고, 1반은 남학생, 2반은 여학생으로 우리 3반 남·여학생을 1, 2반에 합반하여 말만 3반이지 남학생은 1반에, 여학생은 2반에 가게 되어 우리는 개밥에 도토리가 되었다. 중학교 입학을 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을 써 주는 담임 선생님이 없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냥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당에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내가 3반 반장(전교 어린이회 부회장도 겸함)이었는데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는 것을 3반 담임 선생님이 졸업식 날에서야 중학교 입학원서를 내지 않은 것을 아시고서는 나를 나무라셨다."원서 내어야 할 때 못낸 것은 어쩔 수 없었어요.""그러면 나라도 찾아 올 것이지. 시험이라도 한번 쳐 봤어야지. 장학금도 있었고, 그러면 공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걸 몰라? 아이고 답답해. 전교 부회장이고, 반장인 네가 중학교도 못가고? 아이고 내가…!""마아, 그래 됐습니더. 아부지도 안 된다고 하고, 돈도 없었고요.""…그래."나는 중학교를 제 때에 가지 못하였고, 2년 뒤에 우겨서 다시 신식공부를 하였다. 이런 사연을 경험했기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 집집마다 저녁에 시간을 내어 찾아다녀 보았다. 그 당시 사실 중학교 입학을 권유해 보았지만 사정이 딱해서 기어이 내가 처음 가르친 아이들이 14명이나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난 더욱 "영어"와 "한자"를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게 사실인지도 모르겠다.앞으로 어떻게 해서라도 잘 살아가야 할 텐데. 영어도 한자도 모르면 어떻게? 6학년 겨울방학을 시작하기 전에 또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자와 영어를 초보라도 가르쳐 주자. 정규 수업시간을 마치고 나서 영어기초와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한자는 자전을 구하고, 독학할 수 있도록 부수부터 배우고, 한자 찾는 법을 가르쳤다. 그 후로는 개인이 얼마든지 혼자서도 배울 수 있고, 하고자 하는 노력만 있으면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수는 한자자전 찾기를 배우고 나면 한자쓰기 필순을 가르치고서 기초를 준비하여 주었다.다음은 영어다. 영어도 알파벳을 인쇄체, 필기체 대·소문자를 가르치고, 영어 낱말을 배우면서 발음기호를 마스터하게 하였다. 기초영어 책자를 선택하여 낱말을 상당한 수준까지 배우고 기초문장까지 가르쳤다. 이 두 가지 방법은 독학을 하였기에 매우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누가 그랬던가? 아이들에게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고.정말 그랬다. 1976년 2월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 때까지 많지 않은 날에도 나의 첫 제자들이 한자와 영어에 상당한 실력이 쌓아가게 되었다. 특히 영어에 자신을 느낀 제자들 몇은 아예 우리 집 서재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요청하여 다른 학교로 인사이동하기 전날까지 계속 가르친 기억이 난다.아득하고 머∼언 날의 기억들이다. 이제야 겨우 작은 한 조각의 기억을 더듬어 이 글을 남긴다. 물론 나의 뇌리 속에서는 초임지에서 가르친 제자들이 불현듯 다시 되살아나곤 한다. 이제 44여 년이나 흐른 오늘에 와서 한자와 영어기초를 가르치던 그날의 열정이 나의 젊음을 대신 해 주는지 지금도 궁금할 뿐이다. 41. 금반지 받다 1973년 5월 1일자로 발령 받아 제자 쉰 명을 가르치고 나도 많이 배우고 이제야 그 결과로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식 날을 맞이하였다. 처음에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이 아이들 쉰 명을 맡았다. 실력은 말이 아니었고, 업무는 많았고, 교육환경은 열악하였고, 학부형 살림살이도 풍족하지 못해서 이래저래 어려움뿐인 나의 초임지 모포초등학교였다.2년 동안 교육대학에서 배운 것을 바닷가 시골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긍지와 자신감으로 다가선 교단이었다. 교생실습 할 때 지도교사로부터 많은 지도조언을 받았지만 이렇게까지 선생으로서 수업 외적인 잡무가 많을 수 있나 할 정도로 너무 많았다. '잡무를 줄인다.'는 공문까지 와서 또 접수하고 회람하고, 잡무를 만들어 주는 교육현장, 지금도 잡무에 시달리고 있을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머리 숙여진다.교장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대로 이것, 저것을 지시하시고, 교감선생님은 교감 선생님대로, 주임선생님은 주임선생님대로 일을 많이 주셨다. 웬 그런 잡무가 많은지 모를 일이다. 어느 선생님은 그랬다. 이 잡무만 없으면, 학생들에게 뛰어난 실력을 가지도록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모포초등학교 제9회 영광된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사전에 애국가와 졸업식 노래를 가르쳤다. 애국가는 4절까지 하여야 했다. 물론 졸업식 노래는 참 새로웠다.(1절)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2절)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3절)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1절은 재학생이 부르고, 2절은 졸업생들이 부른다. 3절은 재학생, 졸업생의 합창으로 우렁찬 그날의 노래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이제는 송사와 답사가 있다. 당일은 임석관이 오고 육성회 회장님이하 지역의 여러 내빈이 오시므로 상을 수상하는 순서대로 리허설을 하였다. 은박지에다"축", "졸업"등의 글자들을 크게 만들어 붙이고, 아래에 반딧불이 달린 개똥벌레 두 마리도 붙여서 졸업식장을 준비하였다.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식 전날이었다. 내가 6학년으로 담임한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하필 졸업식 날 출장을 가라고 하니 이 또한 무슨 해괴한 일인가 말이다. 3년간 담임을 하고도 마지막 정리를 해야 하는 날에 그렇게 되었다. 출장명령이 났으니 어쩔 수 없이 졸업식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첫차로 출장을 떠나고 말았다. 안코 없는 찐빵이었다. 이 무슨 해괴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내가 업무를 많이 맡았을 뿐 아니라 교원인사 업무이었기에 직접가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학급수가 많았으면 그런 일도 없을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지 않았는지 그날따라 오후에는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물론 졸업식은 잘 진행하여 끝났을 것이다. 막차를 타고 진흙이 달라붙는 땅고개를 돌아내려 와서 어두컴컴한 학교를 들어서는데 졸업식장에는 아직도 학부형회 회장님과 학부모 몇 분이 집에 가시지 않으시고 행운이 따르지 않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마침 제가 출장이라서 죄송합니다.""이 선생님,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렸습니다."졸업 식장은 아직 그대로 정리하지도 않았고, 우리학교 선생님과 학부형께서 일부 앉아서 음식을 드시고 계셨다."잠깐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 선생님이 이번 9회 졸업생들의 담임 선생님이셨는데, 하필 오늘이 출장이라서 졸업식을 함께 하지 못하셨기에 늦었으나마 이 자리에서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그리고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오늘 제9회 졸업생들에게는 이 선생님을 만난 것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그만 성의를 모았습니다."나는 쑥스럽게 앞으로 나갔다."그 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긴 3년 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더 계시지 않고 인사이동이 나셨다면서요. 한편으로는 많이 섭섭합니다. 우리들 작은 성의로 준비한 것입니다."박수와 함께 나는 얼떨떨한 김에 작은 통을 하나 받았다. 열었다. 황금반지이었다."제가 이러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까?""아니에요. 부족하지만, 고맙습니다. 인사말씀을 부탁드립니다.""그저 황송할 뿐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3년간 같은 반을 맡아서 가르쳤을 뿐입니다. 이런 과분한 것을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디에 가나 이 모포초등학교는 잊어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제9회 졸업생들은 정말, 정말 잊지 못할 것이며, 학부형님들도 더욱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그냥 '교육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로 시작하여 밤이나 낮이나 교육에 매진한 결과일 뿐이다. 교육은 무엇을 얻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은 A를 A′로 만드는 것이다. 즉 몰랐던 것을 알게 하는 변화가 교육이다. 설령 그것이 작은 앎이라도 변화를 주었다는 것이 있다면 바로 교육을 한 것일 게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물론 문교부에서 지정된 교육과정을 마스터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고 지식만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변화를 느끼게 교육하는 것이 교사의 사명이다. 물론 잡무는 그 부대적인 업무일 뿐이다. 조직 속에서 튀려는 것 보다는 함께 어울려 공생하는 교육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교사의 진정한 직분일 것이다.주마등같이 지나가지만 1973년 5월 3일! '우리 선생님'이라는 제목의 글짓기와 한 학년이 지나고 '우리 선생님'의 글짓기의 결과는 판이하였다.'우리 선생님 얼굴은 무섭게 생겼지만 우리를 잘 가르쳐 주셨다. 우리 선생님은 정말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셨다. 월요일에는 무서운 선생님이셨고, 금요일 오후만 되시면 옛날 얘기도 해주시고 참 고마우셨다. 우리 선생님 음성은 알아주어야 한다. 아무리 뒷좌석에 앉아 있어서도 똑똑하게 잘 들리었다. 정말 고마운 선생님이셨다.'내 스스로 써 놓고 보아도 낯이 간지러웠다. 황금 3돈짜리 링이지만 나에게는 3톤의 황금보다도 학부형님들의 깊으신 그 뜻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반지 안쪽에는'증 모포초교 9회'라고 씌어 있었다.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생, 학부형님 여러분! 참으로 감사하고도 감사합니다. 42. 파도소리, 풍금소리 그렇게 나는 생애 최초 초등학교 선생을 3년 동안 한 곳에서 같은 학년을 그대로 데리고 올라가서 졸업시켰다. 장단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장점으로는 지속적으로 3년 동안 가르쳐서 기초실력을 쌓도록 지원하여 주었다는 것에 한 표이다. 한편으로는 초등학교 어린 학생들이 같은 선생아래 3년간이나 지속적으로 배웠다는 것에 지겨움과 싫증을 유발한 것이 분명 단점일 것이다.다음 학교로 전근 가서 그곳에서도 교육하였고, 나중에는 고향으로 돌아 와서 역시 바닷가 1년과 고향 곁에서 2년 등 선생 노릇을 하였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교직 8년(7년 11개월 25일)을 마지막으로 그 직을 떠나 전문대학 행정직 7급으로 자리를 옮겼다. 교육자에서 교육행정가로서 그 직을 마쳤다.그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컴퓨터가 나오고 SNS가 발전하여서 못 다하고 두고 온 교육현장이 늘 그리웠다. 파도소리, 풍금소리도 잊고 34년이 흐른 후에도 느닷없이 인터넷 카페에서 초임학교 제자들과 소통하게 되었다. 매년 스승의 날에 전화나 꽃다발, 작은 선물로 나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교육현장에서 아이들에게는 풍금으로 동요나 명곡을 쳐 주었을 때 가장 흥미로워 하였다. 심지어 저마다 신이 나서 책상바닥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함께 즐거워하였다. 그 곡조 그 곡명은 잊히어가지만 그렇게들 좋아하던 그 모습은 이리도 어우러져 함께 보고 싶은지 그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문득 어느 날 스마트폰 벨소리가 나고 쉬이 익히 들은 초임지 여학생 부반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선생님 나미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바삐 살다보니 전화도 못 드려 송구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시간이 나시는 지요""그래. 무슨 일인가? 시간이야 내면 되지.""예. 그날 저녁에 우리 동기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바다고기도 잡고, 밥도 하고, 반주도 준비하였으니 꼭 내려오시기 바랍니다.""그러지. 몇 시까지 가면 되겠나?""꼭 정한 시간은 없습니다만 저녁 8시 전후면 되고요, 장소는 모포축항 불 밝혀 둔 곳으로 오십시오.""그러마. 초청하여 주어서 고맙데 이."그리 약속한 날짜와 시간은 더디 가는 듯 빨리 흘러 그날이 왔다. 나는 운전을 하지 못하여 장거리이지만 내자가 차를 몰았다. 게다가 큰 처제까지 대동하고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경주 교차로를 빠져서 감포로 향하였다. 감포 가는 길도 요즘은 무척 발전하였다. 토함산 중허리로 터널이 생기고서는 곧장 감포로 지나친다. 물론 감포초등학교도 그 예전에 딱 1년을 근무한 적이 있기에 내자도 지난날 추억이 있는 곳이다. 그곳도 우회도로가 생겨서 바로 오류리 고아라 해수욕장을 거쳐 연동, 두원, 계원, 양포에 도착하여 오른쪽으로 영암(신창)을 돌아 수양산의 오르막을 오르면 모포 항구다.대구에서 야행으로 파도소리 들으려고, 예전 풍금소리 들으려고 수양산 고개를 올라 내려간다. 축항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제자 서른 여명이 포장치고 백열전등을 대낮같이 밝혀서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하여 두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벌써 지난날 젊은 선생이 아닌 노구를 가진 선생으로 나타나기가 불안하였다. 주름은 늘었고, 머리카락은 희어지고 깐깐했던 나의 몰골에서 민망하고 미안하였다."선생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 하셨심데이.""그래 마카 오랜만이구나! 모두가 반가워!"그렇게 우리들은 40년이 너머 만났다. 파도소리가 철썩~ 철썩 들리는 모포축항 방파제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만났다. 용문, 종석, 경수, 찬식, 몽구, 길원, 종래, 광조, 성수, 나미, 경숙, 상자, 은경. 그리고 오천초교로 전학 갔던 영옥까지 어렸을 때 얼굴들이 오롯이 보였다. 뿐만 아니고 남학생은 부인, 여학생은 남편, 시간이 허락된 자녀들까지 온통 함께 모여서 박수로 나를 환영하여 주었다.무어라 깊은 고마움을 표시하여야 하는데 주고받는 인사가 파도소리보다 더 크게 우리들 이야기가 마치 풍금소리에 묻히듯 소란스러운 즐거운 장소가 되었다. 차려진 음식이 너무 소담하고 고마웠다. 저네들이 직접 바다에서 잡고 음식을 장만하였으며, 쌀을 추렴하여 밥까지 준비하였다. 적은 금액이라도 모아서 술도 사고 연회를 위해 필요한 것은 모두 준비하였다.대구에서 내려오느라 시장도 하였는데 제자들의 극진한 준비로 인하여 마음만 받아도 절로 배부를 듯하였다. 한 잔의 술을 받아 건배를 하였다."오늘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생들의 발전과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그렇게 우리들 자축연은 파도소리 들리는 축항에서 밤을 밝혀 주는 등대의 불빛을 안주 삼아 직접 들려오지 않은 풍금소리를 요즘은 스마트폰에서 선곡하여 합창을 해댔다. 그렇게 소란스럽게 떠들어도 아무도 소란스럽고 시끄럽다고 항의가 들어오지 않는 모포축항에서 모였다.파도소리, 풍금소리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나의 생애 첫 직장, 첫 추수확인 하러 내려 온 것이 대성황이었다. 누구는 해외 선장도 되었으며, 누구는 장사를 크게 하여 부자가 되었고, 누구는 돈 벌어 금의환향하여 벌써 노후를 준비한다고 하였다. 누구는 읍장 부인이 되었고, 누구는 부녀회장이 되었으며, 어촌계를 관리하고, 회사 경영자가 되기도 하였다. 모두 모두 승승장구하니 모포초등학교 제9회 졸업생들의 앞날이 훤히 보였다.덩달아 2년 동안 모포 주민으로 살았던 내자도 그날따라 나의 제자들이 좋아 하였다. 우린 그런 작은 우리들만의 연회를 만들어 소통하고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되었다.지금도 들린다. 파도소리, 풍금소리가 나의 귀를 열어 즐거움을 준다. ● 프롤로그 파도소리는 내 인생에서 최초의 직장이 있었던 곳이요, 자연스레 들려주던 자장가인 동시에 삶의 채찍이었다. 3년이란 짧은 기간에 쉰 여명의 제자들을 그곳에서 풍금소리로 들려주었기에 인생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얻었다. 그 풍금소리는 교육을 행동으로 행하는 소리이었으며 바로 교육으로 표현하였다.나는 교육자라는 좋은 일터를 사연이 있어서 두고 왔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게 좋은 직장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고사리 같은 초등학교 제자들이 얽히고설킨 애환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나의 마음을 조바심 나게 한 것이다.나는 풍금소리를 좋아한다. 교사도 사람인지라 일과를 마치고 조용하게 내일 교육 준비를 하던 차면 저절로 풍금의 건반에서 흰 건반 검은 건반을 골라 짚어가면서 동요의 음률을 듣노라면 그렇게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근심도 걱정도 어려움도 실패했던 일도 성공했던 일도 모두가 묻히어 노래 한곡의 음률로 바뀌어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근무 하던 시절 그렇게 깨달았다. 쉼 없는 파도소리를 모아서 그 원동력으로 풍금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이미 익힌 명곡들은 건반을 두드림으로 소리가 발생하여 하얀 도화지에 비롯되듯 제자들의 마음에다 풍금소리를 담아주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달빛 섞인 풍금소리를 잊지 못하도록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늘 그렇게 내가 좋아 하던 명곡들을 연주하여 주어서 자연치유가 되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첫 제자들과 나와 나이 차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의 파도소리에 풍금소리를 섞어 전해 준 그 고마움은 몰라도 스스로 즐거우면 되었던 것이다. 그랬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파도소리를 잘 버물어서 달빛 섞인 풍금소리로 전한 것이 내 생애 중 가장 잘한 일이다.Ⓔ

2019-08-08 18:15:21

최상근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빨갱이/최상근

아이들이 송사리 떼처럼 나에게 몰려들었다. 아버지가 오리나무를 산에서 면 지서까지 지게로 져 나르는 것을 보았다며 졸라대듯 와글거렸다. 지게 진 아버지의 모습을 흉내까지 내며 나보다 더 초조해했다. 나는 그때 아랫동네에서 또래와 종일 딱지치기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오리나무를 산에서 지고 내려오는 장면도, 지서로 지고 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며칠 전, 면 지서 경찰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에 온 장면이 떠올랐다. 경찰은 아버지와 무슨 말을 나누는가 싶더니, 어떤 서류에 아버지의 지장을 받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 일이 오리나무와 관련이 있겠다는 정도의 짐작에서 그쳤다. 아버지는 이미 경찰과 안면을 틔운 뒤고, 다 아는 일이 아닌가. 현장에 없었던 나를 나무라는 듯한 아이들의 눈초리를 시답잖게 여겼다. 그러나 그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다.우리 집 과수원 근처 야산에서 자라는 쭉 뻗은 오리나무를 큰형이 가을 벼 베듯 베어 눕혔다. 사과나무의 가지 받침대로 쓸 요량이었다. 큰형의 오리나무 베는 장면은 동네에서 빤히 보였다. 동네 누가 지서에 고발했다. 당시만 해도 벌거숭이 산이 많아서, 산림녹화에 애를 쓰던 때여서, 사소한 벌목도 무겁게 처벌되던 험상궂은 시절이었다.아버지는 오리나무를 지게에 지고 산에서 내려와, 마을 골목을 지나 십 리도 더 되는 지서를 향했다. 큰형이 베어 놓은 오리나무를 지서로 가져오라는 지시를 이미 경찰로부터 받은 터였다. 겨울 농한기였다. 할 일 없는 동네 사람들이 소매 속에 손을 넣은 채 골목에 삼삼오오 모여, 오리나무 지고 가는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혀 차는 소리와 수군거림 그리고 헛기침 소리가 지게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고발한 사람도 구경꾼 속에 섞여 있었다.아버지의 옷은 땀에 푹 젖어 얼룩졌다. 아버지가 땀 흘리는 것은 오리나무의 무게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지서에 불려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날, 지서 근처에도 가기 싫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일을 겪은 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가지 않을 수 있는가. 사건이 부디 조용하게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일 뿐이었다.지서 마당 한구석에는 져다 놓은 오리나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오리나무 사건의 전말에 대한 조서가 꾸며졌다. 고발당한 사람은 큰형이었으나, 아버지는 큰형 대신 당신 이름으로 해줄 것을 경찰에게 빌었다. 아들놈은 앞으로 살날이 창창하다. 전과자가 되어서야 하겠느냐는 아버지의 호소에 입이 합죽한 경찰은 잠시 망설이더니, 아버지의 부탁을 모른 척 받아주었다. 아버지는 큰형에서 아버지로 바뀐 조서에 마지막 지장을 찍었다. 경찰은 큰형 이름이 나타나 있는 조서 앞 장과 마지막 장을 다시 쓰는 수고만 보태면 그만이었다. 경찰은 아버지의 이름까지 대필해 주면서 허공에다 대고 긴 한숨을 쉬었다."하기사 자식 호적에 뻘건 줄 그어져서야 되겠나. 청춘이 구만린데 쯧쯧."경찰은 자신의 처신에 스스로 맞장구치고 싶었든지 했던 말을 되풀이하며 큰형에서 아버지로 바뀐 조서를 내려다보았다. 글을 모르는 아버지는 조서 대신 경찰의 표정을 살피며 사태를 짐작했다.나는 아버지가 글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논문서를 들여다보다가 궤짝 서류함에 툭 던져 넣던 기억이 전부다. 아버지는 아마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던 것 같다. 묻지도 않았지만, 말씀도 없었다. 평생 토지와 어울리면 사실 글은 몰라도 되었다. 글 모른다고 수확량이 줄어들거나, 벌레들이 만만하게 보고 곡식에 탈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아버지의 사주에는 관官이 없었을 것이다. 변변찮은 관이라도 버티고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면 출입 정도는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삶의 매듭을 조금은 수월하게 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관은 고사하고 피고석에 앉아 처분이나 기다리는 처지에서 잠시라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별난 사람들의 재판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나는 방정맞게도 그들 가운데서 있지도 않은 아버지를 발견하곤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아버지의 아픈 과거를 알고 난 후부터였다.6.25 사변이 일어나기 직전 해 겨울, 해방의 어수선함이 미처 진정되지 못한 시절이었다. '산사람'이라 불렀던 무장공비가 면 지서 근처에 출몰했다. 산사람들은 지리산 줄기의 대왕산에 은신처를 두고 있었다. 해발 오백 미터의 대왕산은 청도와 경산의 경계에 위치했다. 지서는 대왕산과는 이십리도 넘게 떨어져 있었다. 국도로만 보면 대왕산에서 우리 마을을 거쳐야 지서가 나온다. 우리 마을은 지서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산사람들은 주로 밤에 산에서 내려와 지서를 기습하는 바람에, 지서 근처에서 소규모 총격전이 자주 벌어졌다. 지서는 산사람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기습이 있는 날이면 꽝꽝거리는 총소리가 동네 사람들의 혼을 빼놓곤 했다.겨울 어느 날, 산사람들이 백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원으로 지서에 들이닥쳤다. 교전 중에 경찰 다섯 사람이 사망했는데, 총지휘하던 경찰서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서는 산사람들에 의해 점령당했으나, 날이 밝아 군인들이 투입되자 산사람들이 달아났다. 이후 지서에는 경찰 외에도 군인들이 주둔했다. 군인들은 주로 전라도 출신이었다. 아마도 경상도 군인들은 전라도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때 사망한 경찰들 이름이 지금도 지서 안에 세워진 위령비에 새겨진 채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지서를 한차례 점령당한 이후부터는 총격전이 더욱 자주 일어났다. 땅거미가 지면 지서 근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뚝 끊어졌다. 밤이면 산사람이 우세한 듯했고, 날이 밝으면 군경이 다시 치안을 유지하는 식이었다. 이 와중에,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우리 동네에 서른이 넘어도 장가가지 못한 바보가 살았다. 그가 어느 날 동네 사람들 따라 장에 갔다가 우리 동네에 산사람이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마침 지나가던 경찰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 바보에게 국밥 한 그릇을 사주며, 동네 사람 중 산사람이 누구인지를 캐묻기 시작했다. 그는 귀에 익은 이름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겼다. 아버지와 동네 김 씨 그리고 박 씨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이튿날, 아버지는 지서에 호출당했다. 아버지가 지서에 들어서자 경찰은 대뜸 바닥에 아버지를 꿇어 앉혔다."너가 빨갱이 새끼냐!"경찰은 무장공비를 빨갱이라 불렀다."아닙니더.""앞에서 다 불고 갔어 임마. 대장이 누구야!""모릅니더.""어디에 숨겨 주었어! 몇 놈이야!""예?"아버지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경찰이 들고 있던 방망이가 아버지의 등에 날아들었다. 아버지는 그대로 앞으로 나뒹굴었다. 경찰은 분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넘어진 아버지를 군홧발로 걷어찼다. 가뜩이나 살벌한 지서 분위기가 아버지의 비명 때문에 더욱 냉랭했다.우리 동네 사람들은 산사람과 무관했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동네에서도 아무도 산사람을 알지 못했다. 산사람들은 먼 타지에서 잡혀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산사람들이 쓰는 말씨도 여기 말씨와 달랐지만 그런 사실은 묵살되었다.얼토당토않은 경찰의 고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바닥에 꿇어 앉힌 다음 정강이 사이에 굵은 막대를 끼웠다. 아버지의 윗몸을 뒤로 재끼더니 정강이 위로 고문하는 경찰이 올라갔다. 정강이 사이에 낀 막대가 압박하는 통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강이의 인대가 늘어나고 말았다. 다시 장작으로 아버지의 등짝을 후려쳤다. 옷에 피가 묻기 시작했다. 경찰은 계속해서 빨갱이 대장의 이름과 숨어 있는 곳을 말하라며 고문했다.밤에도 고문이 이어졌다. 팬티만 입은 알몸의 아버지를 초등학교 철봉에 거꾸로 매달았다. 고춧가루를 넣은 주전자로 코에 매운 고춧물을 부었다. 아버지는 수시로 정신을 잃었다. 더는 원하는 대답을 듣기 어렵다고 판단한 경찰이 초주검이 된 아버지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동네 아무개를 빨갱이에게 협조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면, 당장이라도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뻔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밥을 굶긴 고문은 꼬빡 3일 동안 이어졌다.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의식은 가물거렸다. 고문해도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경찰은 아버지를 총살하기로 마음먹었다.지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낭떠러지가 있었다. 논밭이 큰물에 떠내려가는 바람에 생긴 것인데, 그 아래는 하천이었다. 여름에는 아이들이 그 낭떠러지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며 멱 감던 곳이기도 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아버지는 그 낭떠러지로 가기 위해 지서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때 군 장교 한 사람이 경찰의 행동을 제지하고 나섰다."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소!"그렇지 않아도 성과를 얻지 못해 안달하던 경찰이 발끈했다."어떻게 그렇게 단정한단 말이오!""빨갱이는 여기 지역 사람이 아니잖소."순간 경찰은 말문이 막혔지만 십여분간이나 언쟁을 이어갔다. 마침내 경찰이 바닥에 퇴 하고 침을 뱉더니, 지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버지를 빨갱이로 몰아 어쨌든 실적을 올리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총살해야 무장공비 사살 실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군인이 다가와 지서 마당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지금 집에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군인은 아버지에게 어디 한 번 걸어보라고 말했다. 마당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발이 눈에 빠졌지만 한시바삐 지서 밖을 나갈 생각 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지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버지를 뒤에서 지켜보던 군인이 팔을 휘휘 저으며 빨리 집으로 가라는 시늉을 했다.살았다는 안도감이 아버지의 온몸을 휘감았다. 지서를 조금 벗어났다 싶어 보이자 눈 속에 엎어졌다. 생각을 바꾼 경찰이 언제 잡으러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굶은 데다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그때 멀리서 등불 하나가 아버지를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등불이 구세주 같았다. 할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데리고 온 머슴의 지게에 나뭇짐처럼 얹혔다.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지서에 간 후 돌아오지 않자 안절부절못했다. 저녁마다 아랫동네로 내려가 지서로 뻗어 있는 신작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행여나 아버지가 풀려 나오나 싶어서였지만, 지서 쪽에서는 무시무시한 어둠만 짙게 깔려 있었다. 멀지 않는 곳에 지서가 보였으나 갈 수 없었다. 신작로에만 나가도 밤에는 어느 총에 맞아 죽을지 알 수 없었다. 등불을 든 할아버지는 신작로 인접한 가게에서 매일 꼬박 밤을 새웠다.3일째 되던 날 밤, 멀리서 희끗희한 사람 모습이 보였다. 온 천지가 눈에 덮여 있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틀림없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직감으로 알았다. 이 밤에 신작로를 걸어서 올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작로로 나섰다. 우리 집 머슴도 할아버지 뒤를 따랐다.실없는 말을 지껄인 바보 총각의 아버지가 새벽같이 아버지를 보러왔다. 아버지보다 먼저 지서에 불려갔다가 풀려난 동네 김 씨 박 씨도 아버지를 찾아와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가 고문당한 이유는 바보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거기다 김 씨와 박 씨의 엉터리 증언이 겹쳐졌기 때문이란 사실을 아버지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기가 막혔다.아버지보다 먼저 김씨 박씨가 지서에 불려왔다. 경찰이 허리에 차고 있던 방망이를 빼들어 책상을 내리쳤다."네놈들이 빨갱이냐!""절대로 아닙니다.""그럼 누구냐!"경찰의 호통에 얼이 빠져버린 김 씨가 응겁결에 아버지 이름을 댔다. 박 씨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 박 씨는 김 씨 바로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진술하는 김 씨의 말에 힘을 보탰다. 험악한 지서 분위기에 두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한 시절이었다.아버지를 고문했던 경찰은 처음부터 그 정보를 반신반의했다. 정보를 제공한 자가 동네에서도 바보로 소문난 데다가 진술 역시 횡설수설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혐의자를 호출이나 하고 보자 싶었다. 혹시 무장공비를 잡는 날이면 출세에 적잖은 보탬이 될 게 아니가.굴신을 못 하고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그들은 죽을죄를 지었다며 빌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가져온 닭이 툇마루에서 골골거렸다. 그 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듯한 그들의 목소리와 묘하게 겹치다가 따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몸이 더욱 욱신거리는 듯했다. 사죄받는 것이 오히려 괴로워 그들에게 제발 돌아가 달라고 했으나, 그대로 앉아 있었다. 고문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아버지는 한편으로는 솟구치는 분노를 억지로 삼켰다.한동네에서 태어나 뼛속까지 농부인 줄 서로 뻔히 아는 사이에 빨갱이가 웬 말인가. 다들 그만한 사상을 가질만한 지식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빨갱이가 되다니. 이 사람들과 예전처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아버지는 지서에서 얼핏 본 김 씨와 박 씨의 확인서를 떠올렸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무장공비임이 분명하다는 글과 함께 글 끝부분에 뻘건 지장이 꽉 찍혀 있었다. 고문 경찰이 그것을 아버지 코앞에 바짝 들이대던 기억이 났다. 글자를 모르는 아버지는 경찰의 말을 듣고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이 그럴 리 없다는 생각뿐이었다."내 아들이 요 며칠 전에 조곡댁에 도둑이 들이닥친 일만 경찰한테 이야기해 줬다 하데. 빨갱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안 했지러. 저런 쳐죽일 놈들이 있나. 멀쩡한 사람을 이래 모질게 짓이겨놨네. 하이고 우짜겠노!"바보 아들을 둔 아버지는 입에 거품을 물고 변명했다. 죄인처럼 곁에 앉아 아버지 눈치만 살피던 김 씨 박 씨도 차츰 좌불안석에서 벗어났다. 자기들은 처음부터 빨갱이 용의자 명단에 이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이 보름 전에 도둑을 맞아 황소까지 잃은 아버지에 대한 것만 물어보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둑맞은 일이 있다는 것만 확인해주었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며 스스로 흥분했다.산사람들이 한밤중에 우리 집에 들이닥친 일이 있었다. 산사람은 모두 일곱 명이었는데, 그중 셋은 총을 들고 있었다. 얼굴은 수염으로 더부룩했고, 몸은 야윌 대로 야윈 모습이었다. 그들은 우리 집 대문과 마당 한가운데와 뒤란에 각각 총 든 산사람을 보초 세웠다. 서두르지 않았다. 동네 사람 중 아무도 신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신고했다가는 보복이 두려웠다. 신고하러 간다고 해도 신고받을 지서는 너무 멀리 있었다.마당에는 등불이 켜졌다. 산사람들은 집안을 대낮같이 밝게 해놓고, 천천히 온 집안을 뒤졌다. 대청 구석에 있는 쌀 뒤주에서 쌀을 자루에 퍼 담았다. 쌀 뒤주 바닥 긁는 소리가 났다. 보리쌀을 담아둔 커다란 독을 깨끗이 털었다. 마루에 쌓아 놓은 콩과 고구마도 자루째 마당 한가운데 모았다. 장롱 속의 옷을 몽땅 보따리에 쌌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깨어 있었지만, 밖을 내다보기조차 두려웠다.산사람들은 마구간에서 끌어낸 황소 등에 길마를 얹고, 달구지의 긴 쳇대 사이에 황소를 밀어 넣었다. 마당에 쌓아놓은 곡식 자루들이 달구지에 이삿짐처럼 바리바리 실렸다. 황소는 워낭 소리 쩔렁이며 마당 한가운데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이 손을 들어 출발을 알리자 달구지는 대문을 나서서 골목으로 사라졌다.날이 밝자 동네 사람들이 풍비박산 난 우리 집 마당에 몰려들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동네가 온통 벌집을 쑤신 것처럼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지난밤의 무사함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산사람들을 욕했다. 소도둑 이야기는 들었어도, 양식에 달구지까지 도둑질하는 비적은 처음 본다며 언성을 높였다. 마당에는 두려움과 도둑맞지 않은 데 대한 다행스러움 그리고 우리 집을 동정하는 마음들이 교차했다. 그때 대문 쪽에서 갑자기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동네 청년들이 소대가리와 소 껍질을 지게에 지고 들어왔다.산사람들은 달구지를 끌고 가던 우리 집 소를 잡았다. 더는 달구지 길이 없는 동네 앞 하천에서였다. 살코기는 다른 짐과 함께 짊어지고 가고, 대가리와 가죽만 남겼다. 모여든 사람들은 산사람들이 사라진 쪽을 향해 다시 한번 삿대질하며 고함질렀다. 마치 자신들이 당하기라도 한 듯 분해했다.아버지는 일본에서 3년간 노동해서 번 돈으로 뒤뜰 논 두 마지기와 황소를 마련했다. 죽은 황소는, 그 황소가 밑천이 되어 여러 번 팔고 사기를 거듭한 끝에 남은 황소였다.일본이 한창 군국주의로 치닫던 1940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국이 어수선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기술도 없이 단순히 노동자 신분으로 일본에 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 순사에게 선물을 갖다주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일본 순사에게 줄 모시 적삼 두 벌을 마련해서, 동장을 통해 전했다. 몇 달 후 어렵다던 일본행 여권이 나왔다.일본에 도착하니 먼저 터 잡은 먼 친척이 마중 나왔다. 친척이 하던 일에 아버지가 합류했다. 일본인들보다는 임금이 삼 분의 일 수준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큰돈이었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힘든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로 건설 현장에서 일했는데, 아버지처럼 돈 벌러 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과 함께 합숙 생활을 했다. 그들 중에는 노름판에 끼어들어 애써 모은 돈을 날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아버지는 한눈팔지 않았다. 팔도의 사나이들이 모인 곳이라 싸움도 자주 일어났다. 싸움이 돈 모으는 데 위협적이지는 않았다.저녁에 배가 출출하면 울타리도 없는 일본인 과수원에 들어가 사과를 한 자루씩 따와 한 방 가득한 동료들과 나누어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본인 여자들이 모여 아버지 합숙소를 가리키며 쑥덕대곤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사과 서리는 배고픈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유일한 간식거리였다.아버지의 일본 노동자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조금만 고생하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이 지나고 또 일 년이 지났다. 3년이 다 될 무렵에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아버지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집 대문에 들어서니, 위독하다던 할아버지가 마당을 쓸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이 보고 싶어 일부러 당신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쳤다. 까짓 거 돈 벌어서 다 뭐해. 아들만 객지로 내몰아 고생시키지. 그래놓고 내가 어찌 발 뻗고 사나.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자식 얼굴도 못 보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조급증 나서 못 살겠다.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한두 해는 그렇다 쳐도 3년은 길었다.아버지는 3형제 중 둘째였다. 장남인 큰아버지는 우리 집 대문 바로 앞에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할아버지는 큰아버지가 있는 큰집에서 살아야 했지만, 큰집에는 가지 않았다. 큰며느리는 먼 고을의 부잣집 딸이었는데, 시집올 때 몸종을 데리고 올 정도였다. 큰며느리가 시부모 모시기를 거부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큰집에서 살 수가 없었다. 자연히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사람들이 불효한 집안이라며 흉을 보았지만, 아버지는 사람들의 평판에 개의치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는 것을 은근히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내가 아버지의 효성을 직접 목격한 것은 사과밭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관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어릴 적이었다. 아버지는 산소의 풀을 수시로 깎곤 했다. 과수원에 일하기 전, 새파랗게 날을 세운 낫이 처음으로 사용되는 것은 언제나 산소 잡풀을 벨 때였다. 산소 풀 베는 일을 마친 후에야 과수원의 이런저런 일을 했다. 그런 아버지의 일 습관 때문에 산소 주변은 언제나 파란 잔디만 가득했다.산소 주변에 피었던 오랑캐꽃은 지금도 핀다. 그 꽃을 보면 정성을 다하여 산소를 벌초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나는지 아버지의 얼굴에 번지던 즐거워하던 표정은 잊을 수 없다. 콧노래 흥얼거리던 그 모습까지.아버지는 다시 일본 갈 채비를 서둘렀다. 할아버지는 논밭 농사나 지으라며 아버지의 일본행을 반대했다."왜놈 땅에 뭣 하러 가!"할아버지는 심기가 불편했다. 아버지 없이는 집안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대로하여, 지겟작대기로 아버지의 다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버지는 마당에 널브러져 꼼짝하지 못했다. 그 일 이후로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일본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아버지는 일본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눈에 선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한데 뭉쳐 일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로부터 괄시도 비교적 덜 받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몇 년만 더 고생하면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일본은 기회의 땅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반대에 막혀 어쩔 수 없었다.동네 청년들이 가져온 황소의 유품 같은 대가리와 껍데기는 다시 대문 밖으로 내보내 졌다. 일본에서 힘들게 벌어 온 돈으로 사들인 황소가 껍데기로 돌아오다니.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점심때쯤 이었을까. 소고깃국 냄새가 대문 안으로 번져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이 동사 마당에서 가마솥을 걸어 놓고 소대가리를 삶았기 때문이다. 동네에는 때아닌 잔치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퍼렇게 멍든 아버지 몸을 내려다보면서 잔뜩 움츠려 있었다. 소고기국밥을 먹는 아이들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동네 어느 집 멀쩡하던 소가 죽는 일이 드물게 일어났다. 소가 죽으면 지서에 신고하고, 경찰이 입회한 가운데 죽은 소를 매장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한 위생법은 꽤 엄하게 지켜졌지만,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이 되곤 했다. 사람들은 앞동산 기슭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으로 죽은 소를 밀어 넣었다. 경찰이 오자 죽은 소 등에 인분을 찔끔 뿌렸다. 그것은 아무도 먹을 수 없게 했다는 표식이었다. 이 장면을 지켜본 경찰은 서류에 동 반장의 도장을 받아 돌아갔다. 경찰이 채 산 아래로 내려가기도 전에 구덩이에 들었던 소를 다시 꺼내 하천에서 죽은 소의 배를 갈랐다. 그날은 영락없이 동사에서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우리 집 황소 대가리를 삶아 먹던 그 날 분위기는 죽은 소를 잡아 벌이던 동네잔치와 다를 바 없었다.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아버지는 당신을 살려 준 군인을 잊지 못해 했다. 그 군인에게 무엇으로라도 보답하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얼마간의 돈을 마련해 동장에게 주었다.며칠 후, 동장이 아버지가 건네준 봉투를 다시 들고 왔다. 군인이 깜짝 놀라며 한사코 뿌리치더라고 했다. 오히려 괜한 사람을 잘못 알고 취조한 것이 죄송스럽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돈으로 몸보신할 약값에나 보태라며 미안해했다.동장은 동네일 때문에 사흘에 한 번 쯤은 면사무소에 출입했다. 면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서가 있어서, 아버지의 부탁은 별것 아닌 듯싶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지서 앞을 지나치며 경찰과 안면을 틔운 사이라 해도 지서에 들어간다는 것이 왠지 섬뜩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경찰이 동장을 보는 순간 잊어도 될 사소한 일들을 캐묻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동민들의 동태파악을 동장을 통해서 했는데, 까딱 잘못 말했다가는 동민이 다칠 수 있었다. 동장은 지서에서 겉으로는 웃으면서 말하지만 늘 긴장했다.동장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다시 한번 더 지서에 들러서 군인의 이름과 고향 집 주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지서를 다녀온 동장이 말했다. 고향이 어딘지를 묻자, 군인은 겸연쩍게 웃었다고 한다. 이름은 알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주소는 전남 순천이라고만 했을 뿐 더는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오랫동안 아버지의 기억에는 경찰과 거칠게 다투던 전라도 말씨의 군인만 남고 말았다. 우리 형제 6남매 중 나와 여동생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세월이 흐르자 기억이 가물거렸다. 아버지는 아무리 해도 군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답답해했다. 얼굴이 희고 잘생긴 것도 같고 좋은 집안의 자손 같다는 느낌을 추가했다."조부가 큰 선비였다지 아마."기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특별하거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잊히거나 묻혀서 무던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라도 말씨를 쓰는 군인이 아버지에게 베푼 은혜는 잊힐 수 없었다. 시계 침이 일정한 시각을 가리킨 채 멈춰 선 것처럼 아버지의 기억은 그 옛날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장면에서 멈춰 있었다. 그러나 사라진 줄 알았던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나 스멀거리며 아버지의 몸을 핥았다.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아버지는 지독한 신경통에 시달렸다. 고문 후유증이었다. 골병든 핏덩어리가 온몸을 돌아다녔다. 그때 생긴 어혈이 풀어지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병이 빨갱이 사건의 고문과 관련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 배경을 알 나이도 아니었다.어머니는 무슨 무슨 약이 좋다고 하면 기어코 그 약을 구해왔다. 동네 사람들은 입소문으로 들은 약재를 어머니에게 귀띔해 주었다. 그 정보는 어머니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인 셈이었다.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아버지의 병구완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내 느낌으로도 아버지의 완쾌를 점쳤다. 그때의 어머니는 산처럼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 기억 때문에 이후부터 어머니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백약이 무효였을 때, 누군가가 인분을 처방해보라고 어머니에게 일러주었다. 인분이 약이 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개가 골병들 정도로 타박상을 입어 다리를 절어도 곧바로 걸어 다니는 것은 개가 인분을 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별별 약을 다 써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는데, 인분은 달랐다. 결국 아버지의 통증은 인분을 끓여 먹은 덕분에 완쾌되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아버지가 인분 먹기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도 많은 약을 먹었으나 효과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워낙 냄새가 지독해 아무리 약이라 해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고함을 질렀다. 때로는 애써 달여온 인분 약 사발을 발로 차는 바람에 사발이 벽으로 날아갔다. 사발은 박살이 나고, 벽에는 난데없는 인분 벽화가 그려졌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달래느라 땀을 흘렸다. 어머니는 독한 인분을 마신 입가심으로 아버지의 입에 소금을 넣으면서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인분을 약재로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변소에서 퍼온 인분을 조그마한 항아리에 넣었다. 그 항아리를 물이 반쯤 찬 솥에 담가 불을 지폈다. 소위 중탕이란 방법으로 조제했는데, 온 집안에 구린내가 진동해서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벽이나 기둥에 냄새가 배어, 거기서 다시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집안은 마치 거대한 화장실 같았다.아버지의 고문 후유증은 인분으로 치유되었지만, 전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악몽에 시달리는지 한밤중에도 악악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온 가족은 잠에서 깨어 어둠 속에서도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어서 빨리 새벽이 되어 아버지가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빌 뿐이었다. 아버지의 악몽은 우리 가족 모두의 말 못 할 슬픔이 되어, 집안에 무거운 분위기를 드리웠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 집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생각해두었던 계획에 착수했다. 그것은 사과 농사를 지어보는 것이었다. 벼 보리농사보다 수익이 월등했다. 가세를 떨치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천수답에서 나는 곡식에 만족하지 않았다.몇 안 되는 우리 집 전답이 모두 팔렸다. 그것을 밑천으로 산기슭 땅 이천여 평을 사들였다. 개간이 시작되었다. 온 가족이 달라붙어 나무를 베고 돌을 들어냈다. 딱딱한 청석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버지는 계획한 대로 사과나무를 심었다. 동네 사람들이 청석에 나무가 살겠냐며 쓴소리를 했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가뭄에 대비해야 했다. 과수원 안에 물웅덩이를 만들었으나, 바닥이 청석이라 고여 있어야 할 물이 죄다 새버렸다. 한 방울의 물도 가두어 둘 수가 없게 되었다. 황토를 져다 날라 웅덩이 바닥을 다졌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궁리 끝에 과수원에서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 조그만 연못을 만들기로 했다. 산 주인에게 보리 쌀말을 주고 얕은 골짜기를 빌렸다.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못 둑을 쌓았다. 내가 중참을 가져갈 때마다 못 둑은 조금씩 솟아올랐다. 둑이라고 해봤자 높이 3미터 길이 20미터 남짓했다. 아버지 혼자로는 버거운 공사였으나, 과수 농사를 지으려면 도리가 없었다. 봄 한 철 지나자 겨우 연못이 완공되었다. 이제 가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비가 오면 골짜기에 물이 흐를 것이고, 그 물은 고스란히 아버지가 만든 연못에 모여들 것이었다.못을 완공한 그해, 우리 집 사과밭에는 처음으로 구슬만 한 사과가 열렸다. 열린 사과는 아버지를 연신 웃게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던가. 몇 년 만에 처음이라는 가뭄이 시샘하듯 끼어들었다. 물기라고는 머금을 수 없는 청석이 한여름 태양 볕에 벌겋게 달았다. 가뭄을 견디지 못하면, 사과가 주르르 흘러버릴 판이었다. 이를 대비해 못을 만들었지 않았나.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기대에 찬 아버지는 연못의 물을 빼서 과수원으로 난 도랑으로 흘려보냈다. 그러나 도랑도 청석인지라 물이 과수원까지 오는 사이에 땅속으로 다 스며들었다. 염소 오줌만 한 물이 겨우 과수원 근처까지 오는가 싶더니 그나마 멈추고 말았다. 과수나무까지 가려면 연못 물이 한참을 더 흘러야 했다."허어…!"아버지는 청석 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급히 물이 청석 속으로 스며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는 더는 물을 구할 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이 없으면 과수 농사는 헛일이 되고 만다. 어찌하든 청석 밭에 물을 대야 했다. 충혈된 아버지의 눈은 과수원 아래로 흐르는 못 도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가물어도 못 도랑에는 못물이 넘실대며 잘도 흘렀다. 물 흘러가는 소리가 아버지의 타들어 가는 가슴을 단숨에 적셨다.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운 아버지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빈 물지게를 지고 못 도랑으로 내려갔다. 도랑물을 물동이에 퍼 담아 물지게로 져 나르기 시작했다. 나는 바가지에 물을 담아 꼬리처럼 아버지 뒤를 따랐다. 비탈길을 올라가느라 발이 미끄러지면, 내 바가지의 물은 반쯤 흘러버렸다. 아버지의 물지게도 비틀거렸다. 그때마다 물동이의 물이 조금씩 밖으로 넘쳐흘렀다. 아버지는 물이 흐르지 않도록 양쪽 물동이 고리를 손으로 움켜쥐며 무진 애를 썼다. 아버지의 목에는 시퍼렇고 굵은 정맥이 일제히 팽창했다.힘겹게 지고 온 물을 사과나무 밑둥치에 붓자, 청석 사이로 슉슉 소리를 내며 스며들었다. 청석은 세수한 것처럼 촉촉하게 젖었다가 이내 까맣게 반짝거리며 빛났다. 아직 목이 타니 더 물을 부어달라는 듯 아버지와 나를 빤히 올려보았다. 분발을 촉구하는 목마름은 아버지의 의욕을 불태웠다. 넘치도록 부어주마. 걱정하지 마라.도랑물은 큰 못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었다. 그 도랑물은 온 들에 있는 수백 마지기의 논에 공급되는 금싸라기 같은 물이었는데, 오직 논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과수원은 논이 아니니, 당연히 못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나는 퍼서는 안 되는 물을 퍼 나르고 있는 셈이었다.나는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자고 졸랐다. 아버지는 조금만 더 하자고 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사과나무가 이 가뭄을 넘기면, 가을에 거두는 사과는 굵고 실할 것이라며 나를 다독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오는 불안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것이 두려워 간이 콩알만 했는데, 아버지는 가을 수확 때를 그려보느라 기분이 들떴다.넓은 들에는 다행히도 논 주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도랑물을 퍼가는 아버지와 나를 봤다면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아버지와 내가 못 도랑물을 퍼가도록 자리를 비켜준 것만 같은 한낮이었다. 그러나 요행은 잠시뿐이었다. 곧바로 못 물을 감시하는 못 도감의 눈에 띄고 말았다. 들의 논 전체를 손금 들여다보듯 하던 못 도감은 넘어질 것처럼 달려와 물지게 지고 가는 아버지 앞을 가로막았다. 벌건 대낮에 이 무슨 짓이냐며 아버지를 향해 호통쳤다.못 도감은 못물을 관리하는 대가로 얼마의 곡수를 논 주인들로부터 받았다. 그 수입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그가 물 관리를 소홀히 하면, 도감 자리는 즉시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리를 유지하려면 죽을힘을 다해 못물을 감시해야 했다.논 주인들도 눈에 불을 켜고 못물이 제대로 흘러가는지를 지켜보았다. 비록 들에서 일하지 않아도, 누가 어디서 논 물꼬를 헐고 막는지 훤히 알았다. 들에는 논 주인들의 촉수가 그물망처럼 처져 있는 곳이었다. 가끔 친한 이웃 간에도 물꼬 싸움이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도감이 나서서 무마했다. 가뭄 끝의 못물은 종자 씨만큼 소중했으니, 아버지는 이마가 코에 닿을 정도로 도감에게 빌어야 마땅했다.아버지가 당연히 그렇게 할 줄 알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도감을 노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도감은 살포를 쭉 뻗어 살포 날을 아버지의 가슴팍으로 들이밀었다."대체 무슨 짓이야, 이 사람아!"아버지는 물동이를 길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물동이에서 물지게 고리를 뺐다. 빈 물지게가 아버지의 손에 잡혔다. 살포가 아버지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하듯 다시 날아들었다. 아버지는 잡은 물지게로 단번에 살포를 내려쳤다."빌어먹을... 그만하지 못해!"아버지의 고함과 동시에 살포가 물지게에 부딪혀 툭 부러졌다. 도감의 기다란 살포는 단순히 물꼬를 트고 막는 연장이 아니다. 들판에서 일어나는 허다한 물꼬 시비를 단 한 번에 잠재우던 권위의 상징이다. 그 살포가 부러졌다는 것은 도감의 체면을 여지없이 짓밟아버리는 것이었다. 도감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이 빨갱이 새끼가...!""뭐시라? 이놈아!"빨갱이 말이 도감의 입에서 나오자,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얼굴색이 하얘졌다. 곧바로 도감의 멱살을 잡았다. 도감도 지지 않았다. 못 도랑물을 지키는 것이 도감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도감과 맞서는 것은 애초부터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밀물처럼 밀어닥칠 사람들의 비난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아버지가 이 뻔한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도감과 엉겨 붙었다. 아버지와 논두렁 아래로 같이 구르면서도 주먹다짐은 계속되었다. 온 들이 쩡쩡 울리며 벌어진 대판 싸움은 점입가경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에 퍼런 멍이 들었다. 도감의 웃옷도 찢어지고, 코에서 피가 났다. 해 질 녘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석양이 싸움판에 붉은 노을을 토하고 있었다.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아버지의 셔츠가 불그스레했다. 도감이 입고 있는 옷도 붉게 물들었다. 석양을 등에 업고 숭고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듯한 도감과 아버지였다.나는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못 도랑물 퍼 날랐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특별한 계기도 없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도감을 향한 아버지의 저항은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그 저항은 굶주림이라는 공포에 직면한 아버지의 무의식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거기다 빨갱이라는 말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빨갱이라는 말은 아버지를 극한의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는 말이었다. 그 말속에는 몸서리쳐지는 아버지만의 아픔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것은 처절한 공포이기도 했고, 원망과 배신이 얽히고 얽힌 응어리였다. 그 응어리가 가슴 속에서 조용히 녹아내리기를 아버지는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아버지의 아픔은 당신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전우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적을 향해 앞으로 튀어 나가는 병사에게는 오직 적개심밖에 없다. 생명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거기에 이성을 대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때의 아버지도 이와 같았다.빨갱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은 아버지만의 것은 아니었다. 큰형은 머리를 박박 깎더니 몇 달을 과수원 농막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경찰 시험에 응시했다. 아버지가 지서에 드나들며 받았을 참담한 고통을 잊지 못해, 경찰에 몸담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말이 적은 큰형은 작은형까지도 경찰이 되도록 했다. 큰형은 모든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서 아버지가 겪었던 온갖 것을 몸으로 알아내고 싶어 했다. 밤중에 고함치는 아버지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마음 깊이 이해한 사람은 큰형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집안에 공무원이 둘이나 있다며 부러워했지만, 정작 우리 가족의 깊숙한 아픔은 아무도 몰랐다.세월이 흘렀다. 아버지를 고발한 바보 노총각은 미워할 수 없었다. 김 씨 박 씨와도 허물없이 지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한 절차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물이 흘러가듯 저절로 이루어진 관계회복이었다. 농촌 삶 자체가 그랬다. 농기구를 빌리고 빌려주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황소를 빌려 부린 값으로 한나절 품을 들기도 했다. 숨 막히도록 바쁜 농사일은 품앗이로 해결했다. 삶이 이러니 설령 억하심정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이 며칠이나 갈까.아버지가 밭에서 일하면 김 씨 박 씨는 오가는 길에 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탱자나무를 사이에 두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섞었다. 농사일이 주된 화제였으나, 장 보러 갔다가 겪은 황당한 이야기나, 잡다하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한 것도 있었다. 면의원까지 지낸 박 씨는 면사무소 출입하면서 술집 기생들과 놀았던 이야기로 아버지를 웃게 만들곤 했다.이른 봄, 병원 정문에서였다. 야산을 깎아 지었던 것인지, 병원은 높다란 계단 위에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아버지가 걸어서 오르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큰형이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더니, 아버지를 업었다. 그리고 바닥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지겟작대기를 땅에 짚고 일어서는 것처럼 가둥거렸지만, 진중한 몸짓이었다.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아버지인데도 용을 쓰느라 큰형의 얼굴이 석류알처럼 붉었다. 아버지가 큰형의 지게에 얹혀 있는 것만 같았다.큰형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쭉정이같이 푹 패인 큰형의 얼굴에서 나는 순식간에 내 어린 시절 오리나무를 지고 가는 아버지 모습을 상상했다. 무슨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수십 년도 더 지난 상황이 한순간에 떠올랐다. 나는 그때 오리나무를 지게에 지고 가던 아버지의 어깻죽지에 몰려있음 직한 더운 땀 냄새까지 맡았다.나는 두 달 넘게 입원하고 있는 아버지를 곁에서 간호했다. 아버지는 수혈한 만큼 입으로 벌건 피를 쏟았다. 수혈한 피가 몸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입으로 분수처럼 퍼져 나왔다. 피 묻은 아버지의 환자복은 지서에서 고문받을 때 아버지 옷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얼룩졌다. 아버지는 나 몰래 몸서리치는 고문 틀에 묶이는 상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밤이 되면 아버지는 두려운지 몸을 떨었다. 눈을 천장으로 향한 채 뭔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잡으려고 애썼다. 평생 하소연하고 싶어도 차마 하지 못했던 그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이었을까.아버지의 오르막 내리막 숨소리는 나의 호흡을 접었다 폈다 했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가늘게 숨 쉬는 아버지의 몸에서 나갔던 온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힘들게 돌아온 온기는 조금씩 식었다. 모든 것은 예정된 듯했다. 병실의 밤을 지배하는 끝 모를 고요는 생사를 암시하듯 엄숙했다. 아버지의 시선은 허공에 박혀 있었고, 나는 아버지의 굴곡진 생애를 어루만졌다.아버지는 결국 그 병원 문을 나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아버지의 사인을 고문 후유증이라고 생각했지만, 담당 의사는 백혈병의 일종이라고 말해주었다.아버지의 과거는 마디마디 가시였다. 아버지 스스로 그것을 치유하려 했다면 그것은 아물어 붙은 상처를 또다시 헤집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없었던 듯 지내면서 과거를 흙 속에 파묻은 채 살고 싶었다. 아버지의 소박한 희망이었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몸에 똬리를 틀고 있는 속 깊은 상처가 부지불식간에 아버지에게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이따금 짓는 긴 한숨에는 지난날의 한이 배어 있었다. 어떨 때는 그 한이 희석되어 없는 듯했다.7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우리 집 흑백 TV에서는 연일 데모하는 대학생들 모습이 방영되었다. 3선 개헌에 이은 유신반대 데모였다. 아버지는 내게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에 뭣 때문에 저렇게 거리로 몰려나오냐는 것이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자유가 억압되고 있음을 말했다. 듣고 있던 아버지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지 한마디로 요약했다."옛날에는 쌀 한 말 팔아 비료 한 포대 샀다. 지금은 쌀 한 말 팔면 비료 열 포대 산다."나는 아버지를 이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시의 시국관을 놓고 아버지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데모하는 대학생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권력으로부터의 이유 없는 억압에 대한 저항. 그것은 아버지가 언젠가 한번 외쳐보고 싶은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데모하는 대학생들의 울분은 바로 아버지의 가슴에 여전히 끓고 있는 울분과 같은 것이 아닌가. 데모 행렬에 당신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오히려 데모대를 못마땅해했다.그때였다. 포항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작은형이 서울 데모 막으러 동원되어 갔는데, 데모대를 저지하다가 가슴을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사건은 아버지가 데모대를 더욱 싫어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도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면박을 주는 근거가 되었다.아버지는 사상이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를 몰랐다. 그것은 알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농사 잘 짓는 일 외에 다른 바람이 없었다. 바람대로 술술 남들처럼만 풀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아버지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갔다는 생각이 든다. 청석에서 자라는 사과나무처럼 고생만 뼈 빠지게 했다. 그것이 그대로 아버지의 일생이 되고 말았다. 단 한 번의 행복한 순간이라도 있었을까. 사소한 돌부리에라도 걸리면, 기어이 피를 흘렸다.마을 사람 중 몇몇은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산사람 협조자쯤으로 여기고 있다. 산사람에게 쌀말과 황소를 잃었고, 지서에서 터무니없는 고문까지 당했건만, 아버지의 몸에는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좌익이었다면 경찰이 된 큰형과 작은형은 우익이었을까. 어쩌면 왼팔은 좌익이고 오른팔은 우익이었을지도.지금 형제 두 분은 고인이 되어, 내가 알고 싶었던 많은 것들이 묻혀버렸다. 이처럼 내가 없다면 아버지와 형제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도 마침내 묻힐 것이다. 그 빈 곳에 맑은 태양이 빛나고 온갖 새 노래하리라. 세월은 중립을 지키며 흘러가고, 자연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구분이 없는 세상을 펼쳐 보일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2019-08-08 18:15:09

이재영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육군 이등병 /이재영

1. 나의 학창시절나는 서부 경남에 있는 인구 20여만 명의 진주시에서 초, 중, 고교를 다녔다.국민학교(초등) 시절에 공부를 잘해서 반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나는 문학, 미술,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팔방미인 소리를 들으며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당시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르고 들어갔는데, 한 학년이 60명씩 8학급인 480명 전체 9등의 성적으로 입학해서 중학교 1학년 때도 반장을 했다.진주시에는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개천절이 되면 지방신문인 '경남일보'가 주최하는 '개천예술제'라는 지방 문화제가 열렸다. 촉석루가 있는 남강에 유등을 띄우는 행사와 가장행렬, 소싸움 등의 축제와 각종 문화 행사가 며칠씩 열렸는데,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구경꾼이 몰려들곤 했다.나는 5학년 때 개천예술제 백일장에 출전해 '가랑잎'이라는 시제를 동시로 써내어 초등부 참방(4등) 상을 받았고, 중학교 1학년 때는 '아침'이라는 시로 선배들을 제치고 중등부 차하(3등) 상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창(窓)이라는 시제의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1등) 상을 받았다.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교내 사생대회를 열어 전교생이 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교문 밖으로 나가도 되었다. 나는 높은 계단 위에 나무 대문이 있는 양철지붕의 아담한 집과 그 뜨락의 석류나무를 파스텔화로 그려서 제출했는데, 1학년 특선(1등)이 되어 액자에 넣어진 내 그림이 한동안 복도에 걸리게 되었다. 그 바람에 미술부에 억지로 들어가 부원들과 함께 촉석루 근처 공원에 수채화를 그리러 몇 번 가기도 했다.중학교 때 나보다 한 학년 위면서 아버지의 지인 아들인 형이 있었는데, 학교 악대부에서 알토 색스폰을 불었다. 멋져 보인 그 형의 권유로 나는 악대부에 들어갔고, 거의 매일 방과 후에 한 시간씩 연습했다.1학년 때는 작은북을 쳤고, 2학년부터 길쭉한 관악기인 트롬본을 불었다. 그런데, 개천예술제 때 가장행렬이 우리 중학교에서 출발했고, 우리 악대부가 행렬의 앞장에 서서 3Km가 넘는 시가지를 행진했다. 학교가 도시의 끝자락에 있으면서 운동장이 가장 컸던 때문이다.그 당시 부유한 집안의 공부 잘하는 애들은 서울의 경기고, 양정고, 용산고나 부산에 있는 부산고, 경남고 등의 유명한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는데, 우리 중학교에서는 매년 한 명 정도가 경기고에 합격했다.아버님이 초등학교 교장이며 부모님이 연로하셨던 나는 그냥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입학시험 석차는 7학급 420명 중에 19등이었다.중학교와 턱이 진 운동장을 마주하고 한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교문도 같이 사용하는 고등학교는 집에서 4Km 거리여서 고교 때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 앞에 있는 태권도 도장에 가서 한 시간 동안 땀 흘리며 운동하고 와서 아침을 먹고 다시 등교했다.그 당시 경남의 다른 명문고교인 마산고등학교와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매년 서울대 합격생이 재학생은 10여 명이고 재수생을 합하면 열댓 명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그래서 고교 3학년부터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겨냥한 '특별반'이 운영되었는데, 정원이 문과와 이과를 합해 40명이고, 중간고사나 특별고사 전체 성적에 따라 아래쪽은 드나들었다.평균 25위권을 유지했던 나는 건축과를 지망했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게 장래희망이었다.그런데, 대입 원서를 쓸 무렵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공대 건축과는 안 되고, 농대라면 무슨 학과든 써주겠다고 했다. 한 명이라도 합격 가능성이 있는 학과에 지원시키려는 학교 방침을 잘 알고 있어 집에 와서 그대로 말씀드렸다.환갑이 지난 어머니는 "니를 농사짓게 하려고 공부시킨 줄 아나?"고 방바닥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셨고, 천장만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서울 다른 사립대학교 건축과를 지원하느니 차라리 가까운 부산대학교 공대에서 제일 좋은 학과에 지원하자"라고 하셨다.다음날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둘째 자형에게 연락하여 확인시킨 결과, 마침 자기 제자가 지원한다면서, 생긴 지 3년째인 전자공학과가 제일 좋다고 해서 나의 진로는 듣기도 생소한 전자공학과로 결정되었다.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시집갔던 둘째 누님은 그때 아들 셋과 넷째 딸을 낳아 잘 기르고 있었다. 2. 방위산업체 입사서울대를 목표로 선택과목을 화학으로 선정했던 나는 부산대 전자공학과에는 화학이 없어 갑자기 선택과목을 생물로 바꿔서 거의 한 달 만에 학습하느라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하고 40명 정원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 겨우 합격했다.그때 의예과를 제외한 1학년생 전원을 '교양학부'라 칭하여 학과별 구분 없이 섞어서 50여 명씩 한 반으로 나누어 교육했다. 공대생이 대부분인 우리 C7 반에도 여학생이 일곱 명 있었는데, 사범대 수학과와 생물과 등이었다.70학번으로 입학한 나는 청운의 푸른 꿈을 금정산 산기슭에 있는 넓은 교정에서 마음껏 펼치며 1, 2학년을 즐겁고 보람차게 보냈다.검도부에 들어가서 죽도(竹刀)로 손목, 머리, 허리를 치느라 왼쪽 발바닥에 물집이 일곱 번이나 생겨 터지도록 운동했다.2학년을 마치고 2월 초에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원주에서 복무했는데, 부모님이 65세 이상인 독자로 6개월 만에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어 휴학은 1년만 하고 3학년에 복학했다.그래서 학과 동기생 40명 중에 방위병으로 복무를 마친 W와 함께 후배들에 섞여 수업을 받은 관계로 3, 4학년은 놀지 않고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4학년 말인 10월 초에 금성전기(주)라는 회사에서 학과장님 앞으로 졸업예정자 한 명을 무시험 특채로 추천해 달라는 의뢰가 왔다.나와 고교 동창이며 방위병 제대했던 W는 공과대학 전체 차석으로 입학했던 수재라 교수님이 추천해서 보냈는데, 면접 보고 와서 하는 얘기가 "금성사 자매회사는 맞더라. 근데, 오래된 목조건물이 너무 작아서 영 내키지 않는다"며 자기는 금성사 공채시험에 응시하겠다고 했다.솔직히 대기업에 공채시험으로 들어갈 확신이 없던 나는 교수님께 대신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2층 계단이 삐거덕거리는, 럭키치약 만들던 공장에 가서 면접을 봤다.그런데 가서 보니까, 정부의 자주국방 계획에 따라 럭키금성그룹에서 군용 통신 장비를 제조할 방위산업체로 2년 전에 설립한 그룹 계열사였다.일본의 NEC(Nippon Electric Co: 일본전기)와 합작이었고 체신부에 교환기도 관납(官納)하고 있으며, 연말에 경기도 오산에 짓고 있는 새 공장으로 이전해 갈 계획이라고 했다.후덕하게 생기고 연세가 있어 보이는 개발부장님과 두 명이 면접을 봤는데, 부장님 자기도 진주고 출신이라며 무척 반가워했다.나는 주저할 이유가 없어 입사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혔고 며칠 뒤에 출근했다.바지에 칼 주름을 잡은 연하늘색 정장에 하얀 도쿠리(목 폴라)를 받쳐 입고 휘파람을 불며 출근해보니 나와 함께 입사한 동기가 한 명 있었는데, 서울대 전자과 출신이라고 했다.개발부에는 서울대 전자과 출신인 부장님 밑에 과장은 없고 '기좌(技佐)'라고 불리는 대리급 두 명이 있었고, K대리님은 서울대 전자과 출신이며 다른 한 분은 인하대 기계과 출신이었다.그 아래로 개발부 연구원이 5명인데, 전자과 출신이 4명이고 기계과 출신이 1명이었다. 그러니 개발부 직원은 부장님과 우리 신입사원 두 명을 포함해서 전부 10명뿐이었다.나는 기사(技士)라는 명찰을 달고 2층 구석의 칸막이로 구획된 작은 사무실인 '개발부'에서 근무했다. 본사는 서울에 있고, 공장 전체 종업원은 150명 정도 되는데 당시 공순이라 불리던 조립부서의 여자 종업원이 다수였다.창고 같은 작은 식당에서 교대로 점심을 먹었고, 젊은 남자 직원들이 손바닥만 한 마당에서 배구를 하다가 공이 담장을 넘어 개울에 빠지면 건지러 가지도 못하고 깔깔거려 웃으며 바라보고만 있었다.회사는 작아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무척 좋은 느낌이었다. 3. 분/소대용 무전기 KPRC-63-1. 생산기술 담당나는 K기좌님의 직접 지시를 받고 근무했는데, 내게 주어진 업무는 분/소대용 무전기인 'KPRC-6'의 생산기술 담당이었다.KPRC-6는 송신부와 수신부가 분리되어있던 미군 군용무전기의 도면을 받아와 ADD에서 송수신 일체형으로 국산화시킨 무전기이다.ADD는 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의 약자로 국방과학연구소인데, 국방에 필요한 병기와 장비에 관한 기술적 연구개발 및 시험을 담당하여 자주국방에 기여할 목적으로 1970년에 설립된 연구기관이며 당시에는 서울 홍릉에 있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는 개발 완료 후 초도생산(Pre-production)이 끝나고 첫 양산(Mass-production)이 수행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곧 ADD에서 검수관이 와서 치르는 첫 로트(Lot)의 출하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회사가 초창기라 제조부서 내에 별도의 담당 엔지니어는 없고, 생산기술을 개발부에서 직접 맡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생산기술 담당자로 지정된 것이다.제조부에 내려가 봤더니 군용무전기를 생산하는 부서가 조립실과 시험실로 구분되어 있고, 조립실에는 PCB(인쇄 회로기판)에 부품을 납땜하는 여자 종업원이 30명 정도, 시험실에는 조립된 제품을 계측기로 시험하는 남자 종업원이 10명 정도 있었다.생산 과장 직속인 조립실과 시험실의 책임자는 '직장'이라 불리며, 조립실은 나이든 특전사 중사 출신인 노OO 직장이 맡아 있었는데, 성격은 온순해서 여직원들을 잘 다스리고 있었다.시험실은 철도고등학교를 나온 최OO 직장이 맡고 있었는데 나보다 네 살 위였으며, 최 직장 밑에 무전기의 시험을 송신부와 수신부로 나누어 각각의 책임자로 두 명의 반장이 있었다.시험실 남자 직원들은 모두 고졸이었는데, 국가에서 기능공 집중 양성을 위해 설립한 금오공고, 부산공고(한독) 등 특성화 공고 졸업생으로 입사해서 5년간 근무하면 병역특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모두 영리하면서도 매우 성실했으며 생산기술 담당인 나의 지시를 잘 따랐다.시험실 최 직장은 입사 선배로서 자기가 알고 있는 기술적인 내용을 나에게 자세히 설명해줬는데, 나는 그가 회로도 위에 빨강, 파랑, 녹색 볼펜으로 메모하는 방식까지 배웠다. 빨간색은 회로도의 전원선 플러스, 파란색은 그라운드(마이너스)이고, 녹색은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 깨알같이 적었다.시험실의 두 반장으로부터 조립된 무전기를 계측기로 시험 조정하는 방법도 설명 들었는데, 최 직장의 회로 설명을 들은 다음이라 그런지 송신부 이 반장과 수신부 김 반장의 시범을 금세 이해하고 직접 시험 조정을 할 수 있었다.길이가 25센티 정도이고 휩 안테나를 장착하는 KPRC-6는 주파수가 VHF(초단파) 대역인 슈퍼헤테로다인 방식 FM(주파수변조) 무전기로 상당히 높은 기술의 복잡한 회로였지만 대학교 때 착실히 공부했던 나는 이틀 만에 회로 전체의 동작 원리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연락하라 이르고 나는 대부분 시간을 개발부 내 자리에서 ADD에 제출할 도면을 작성하며 보냈다. 주요부품 관련 미군의 영문판 도면을 번역하여 한글 도면으로 만드는 일이었다.회로도나 기구도면은 미농지에 기름을 적셔 만든 반투명하고 두꺼운 트레이싱 페이퍼에 펜이나 컴퍼스에 먹물을 묻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서 작성하는데, 나중에 습식 복사기에 넣으면 일반 모조지 종이에 도면이 복사된다.청사진으로 복사된 용지를 꺼내면 막걸리 냄새가 물씬 풍겼고, 물기를 머금어 흐늘거려서 자칫하면 찢어지며 한참 있어야 말랐다.짧은 군대 시절 서무병으로 근무하면서 배웠던 차트 글씨체로 또박또박 직접 써넣었다. 3-2. 사회생활 첫 난관 입사한 지 닷새쯤 지나 양산제품의 출고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생산과 시험실에서 무전기의 전원부 회로가 거의 다 불량이라는 긴급한 연락이 왔다.전원부는 무전기 외부에서 삽입하는 12V 망간 전지의 전압을 안정된 5V 전원으로 바꿔주는 레귤레이터(전압 안정기)로, 무전기의 심장이나 같은 매우 중요한 회로이다.지금은 엄지손톱 크기의 IC(집적회로) 칩으로 만들어지지만, 그때는 손바닥 크기의 PCB 조립체로 만들었다.그 시험 방법은 외부에서 전원공급기 파워 서플라이(power supply)로 인가하는 전압이 8V~13V로 변동해도 레귤레이터(regulator)의 출력은 5V 플러스 마이너스 0.2V인, 4.8V~5.2V 이내로 안정하게 나와야 한다.내려가서 살펴보니 측정 전압값이 4V~6V 수준으로 크게 벗어나 있었다.전원회로에는 두 개의 트랜지스터가 사용되고 있는데 모두 미국에서 수입한 비싼 제품이고, 출력전압을 결정하는 5V 제너 다이오드(Zener Diode)도 수입품이었다.트랜지스터는 고가품이어서 만만한 제너 다이오드 몇 개를 교체시켜 봤지만, 결과는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설령 제너 다이오드를 교체해서 수리가 된다고 해도 불량을 고려한 여유분 재고량이 많지 않아서 수백 대나 되는 전량을 다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내 주변에 우르르 모여서 들여다보는 시험실 직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고민에 빠져 얼굴이 붉어지던 나는, 몇 가지 시험을 해봐야겠다며 직접 인두를 들고 회로기판 앞에 앉았다.일반적으로 다이오드(Diode)는 PN 접합 구조로 양극과 음극을 가지는 반도체인데, 순방향으로 전압이 걸리면 전류를 통과하고 역방향으로 걸리면 전류를 차단한다.제너(Zener) 다이오드는 순방향 특성은 마찬가지이지만 역방향으로 전압을 걸면, 역방향전류가 어느 일정치 이상의 값에 이르면 항복사태(Breakdown)가 일어나 큰 전류가 흐르면서 다이오드 양단전압이 특정한 값으로 일정하게 유지된다.다이오드에 수동소자인 저항(resistor)을 직렬로 연결하여 전류가 흐르게 구성되어 있는데, 나는 불량 제품에서 그 저항값을 바꿔가며 제너 다이오드 양단전압이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했다.몇 개를 시험해본 결과 저항값의 변경만으로도 제너 다이오드의 전압을 표준값 이내에 맞출 수가 있어서 그렇게 수리하도록 지시했다. 값싼 저항은 국내에서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었다.옆에서 구경하고 설명을 들어서 감을 잡은 시험 반장은 불량품을 몇 시간 만에 전부 양품으로 수리하였다. 3-3. 군납(軍納) 검수며칠 후에 양산 첫 로트 납품 검수를 위해 서울 ADD에서 검수관이 부산으로 내려왔다. 기계과 출신인 J기좌님이 나를 데리고 공장장님 승용차로 부산역에 검수관 마중을 나갔다.잔뜩 쫄아서 J기좌님 뒤에 서 있는데, J기좌를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몸집 크고 인상이 굳은 검수관 뒤에 가방을 들고 따라 나오는 대학 동창 S가 보였다.S는 ROTC(학훈단) 교육을 받아서 장교로 임명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통신학교 성적이 우수해서 ADD에 차출되었고, 고향이 부산이니까 검수관 보조로 따라온 것이었다.나도 반가웠지만 J기좌님은 무척 다행스러워하는 눈치였다.납품 검수시험은 로트(Lot) 별로 실시하는데, 한 로트의 제품 숫자가 100대이면 QA(품질보증) 기준표에 의해 13대를 임의로 샘플링해서 검수하며, 그중에 '중 불량'이 3개를 넘으면 로트 전체가 불합격 처리되어 '로트 반송' 되고, 전량을 확인 수정한 후에 다시 검수를 받아야 했다.검수는 'V/M(Visual & Mechanical : 육안 및 물리적) 검사'를 먼저하고 '계측 시험' 및 '환경시험' 순으로 치러졌다. 환경시험은 충격, 진동, 요동, 침수시험과 온도시험 등이다.군용 통신기의 동작 및 사용 온도 범위는 섭씨 영하 –40도에서 영상 +55도이다. 따라서 온도시험은 샘플링된 제품을 온도조절 챔버인 '항온항습기'에 넣고 –40도와 +55도에서 지정된 시간 동안 사이클링을 거친 후에 송신출력, 수신감도 등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의 정상 동작 확인시험을 실시한다.'충격시험'은 1.1m 높이에서 나무판에 자유 낙하시키고, '진동시험'은 시험대에 고정하여 특정 주파수를 인가해 진동시키며, '요동시험'은 차량에 탑재된 상태처럼 널찍한 목제 시험대에 얹고 좌우 상하로 심하게 요동치게 흔든 후에 정상 동작을 확인한다.'방수시험'은 드럼통 수조 1m 깊이에 침수시켜 담근 채 하룻밤을 새우고 나서 뚜껑을 열어 제품 내부에 물이 스며든 흔적이 있는지 확인했다.침수시험에서 이슬만 한 물방울이라도 발견되면 검수관이 "붕어가 팔딱거린다"며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제조업체의 기를 꺾고 통제하기를 원하는 검수관으로서는 가장 만만하게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 맨눈으로 판단하는 V/M 검사여서 치사할 정도로 까탈스럽게 굴었다.제품의 몸체에 난 작은 흠집, 약간 비뚤어져 부착된 명판, 너무 과다한 PCB 기판 납땜 높이, 부품의 다리인 리드선 길이가 조금 길거나 짧게 커트된 것 등을 지적하고는, 불합격 판정을 내릴까 말까 고민하며 즐겼다.만약 불합격되면, 로트 전량의 뚜껑을 열고 지적된 부분을 다 다시 확인해야 하므로, 몇 달씩 잔업을 해온 제조부서 직원들에게는 밤샘을 치러야 하는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그래서였을까? 검수 첫날 저녁에 J기좌님은 나와 함께 검수관을 모시고 숙소로 잡은 동래온천 관광호텔로 가서 저녁 식사를 융숭하게 대접했다.그리고 J기좌님은 내 동창인 S와 함께 검수관님을 모시고 온천장 구경이라도 시켜주라며 적잖은 돈을 내게 주고는 서둘러 먼저 갔다.H대학교 출신인 검수관도 나이 차이는 3년 정도밖에 안 나서 온천장의 도우미 있는 맥주/양주 집으로 모셨는데, 술값이 꽤 나왔다.어쨌거나, 몇 번의 로트 반송 끝에 분/소대용 국산 무전기 KPRC-6 초도품 5백여 대는 일주일 만에 무사히 합격판정을 받았고 잘 포장되어 조달청으로 납품되었다.이것으로 나의 사회생활 첫 직장의 업무는 성공적으로 끝난 셈이 됐고, 생산부서 직원들도 나의 지시를 기꺼이 잘 따랐다.그 덕분에 경기도 오산으로 이전한 후에 다른 검수관까지 내려와 치른 여러 번의 검수도 별 무리 없이 잘 넘길 수 있었다. 4. 오산 공장1974년 12월 말에 금성전기(주) 공장은 경기도 오산에 있는 신축공장으로 이전했고, 1975년 시무식은 대지가 5천 평이고 그 절반이 건평인 오산 공장에서 치러졌다.원래 논을 사서 지목변경을 해서인지 공장 울타리 안에 논이 여러 마지기 있었고, 그해 봄에 각 부서에서 차출된 직원들이 직접 모내기를 했다.연구소는 공장 정문 옆에 지어진 큰 3층 건물의 3층을 다 사용했는데, 잔디 깔린 운동장은 축구장보다 커서 한 번은 군부대 내빈들이 대형 수송 헬기인 시누크를 2대나 타고 온 적도 있다.개발부장님이 연구소장이 되고 두 분 기좌는 과장이 되었으며, 연구원도 계속 들어와 수십 명을 넘어섰다.특히 나는 현장 생산과 직원들이 매년 재미로 뽑는 기사급 인기투표에서 1등을 한 데 이어, 실제 회사 인사고과에서 1등을 했다.입사 3개월밖에 안 되는 신입사원이라서 사규상 호봉 특진은 못 했지만, 내 모교인 부산대학교 전자과에 무시험 특채 의뢰가 계속 요청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 등 7개 대학교에만 요청함)그래서 연초에 전자과 1회 졸업생인 C선배가 입사했고, 뒤이어 매년 기수마다 여러 명씩 들어와서 2년 뒤에는 3회인 내 동기까지 모두 9명이나 되었다.나는 VHF 주파수대역의 무전기인 KPRC-6 생산기술과 함께 별도로 진행된 'KPRC-6 채널조정기' 개발을 맡아서 근 1년 만에 양산 출하시켰다. 채널조정기는 전방 중대급에서 고장 난 무전기를 수거해 수리하거나 채널을 변경하여 조정할 때 사용하는 휴대용 장비이다.1976년쯤엔가, ADD 주관으로 전방부대의 무전기 사용현황을 점검하기 위한 시찰을 가게 되었다. 나는 검수관 3명과 함께 강원도 홍천, 인제 등지의 군부대에 들러 KPRC-6 무전기 사용에 문제점이나 애로사항은 없는지 파악하며 휴전선 최전방 포병부대까지 2박 3일간 시찰했다. 휴전선 최전방 포병 소대에 가보니 대포가 낮은 야산 뒤쪽에서 북한을 향해 거치되어있었다. 대포가 북한군 부대 지역을 빤히 바라볼 줄 알았던 나는 이외의 구조에 놀랐고, 대낮부터 술에 취한 소대장이 자기 침상 밑에서 양주를 꺼내어 권하는 바람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강원도 산골짝 깊숙한 전방부대 곳곳에서 우리가 만든 무전기가 잘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는 것에 대한 긍지를 느꼈고, 앞으로 맡을 개발업무에 더 충실해야겠다는 각오도 새삼스럽게 다져졌다.돌아오는 길에 통신 장비 병참 지원부대가 있는 강릉에 들러서 동해의 짙푸른 바다도 난생처음 구경했다. 5. 지뢰 탐지기이어서 나에게 주어진 개발 아이템은 지뢰 탐지기였다. 그때까진 우리 국군에게는 금속지뢰 탐지기만 있었는데, 미군에서 금속/비금속 겸용 지뢰 탐지기를 사용하면서도 우리 한국군에는 지급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ADD에서 미군 지뢰 탐지기 샘플 1대를 주면서 업체에서 분석하여 그대로 만들어보라고 했다.낚싯대 굵기의 길쭉한 원통 막대의 한쪽 끝에 사각형으로 납작한 머리가 달려있고, 반대편 손잡이 부분에 전자회로 박스(box)가 붙어있는 구조였다.회로 박스를 열어서 PCB를 그대로 베끼면 전자회로는 카피할 수 있는데, 사각형의 머리는 플라스틱 재질로 몰드(mold)를 한 것이어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ADD로부터 들은 기술적인 사항은, 레이더처럼 400Mhz 대역의 주파수를 송신하고 지뢰에 부딪쳐 반사되어 오는 신호를 수신해서 그 미미한 차이를 증폭하고 분석하여 지뢰의 존재 여부를 판단한다고 했다.비금속 지뢰는 플라스틱이 주를 이루고 있으므로 땅의 주요 성분인 모래(실리콘)와 플라스틱의 유전율(입실론) 차이를 이용하여 탐지하는 원리였다. 나는 샘플을 들고 오산 읍내 큰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X-ray)로 사각형 머리 부분을 촬영했는데, 병원 직원들이 신기한 듯 웃었다.여러 컷의 엑스레이 사진 필름으로 분석해보니 머리 부분의 내부는 인쇄 회로기판인 사각형 양면 PCB였고 한쪽 면은 송신안테나이며 다른 쪽은 수신안테나였다. 투명 트레이싱 페이퍼 위에 실물보다 확대한 회로 패턴을 손으로 아트 워크(art work) 작업해서 외주를 주면, PCB 업체가 축소 촬영하여 실물 크기의 필름을 만든다.그 필름으로 FR-4라고 부르는 두께 1.6mm의 유리섬유 적층판인 에폭시수지 위에 회로를 프린트하고 동판을 에칭하여 필요한 회로 패턴만 남은 PCB 기판을 만들게 된다.에폭시 PCB는 유리섬유라서 불에 잘 타지 않고 견고하면서 양면 PCB뿐만 아니라 다중 적층 PCB도 만들 수 있어서, 고급 장비에는 기존의 싸구려 페놀 PCB 대신에 널리 사용되며, 에폭시를 여러 겹 발라서 만든 가벼운 보트(boat)도 있다. 한 번은 기구팀 과장이 된 J기좌님을 따라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 있던 PCB 공장을 방문했었는데, 공장장이 J과장님 친구분이었다.그분의 설명을 듣다가 내가 실크스크린이 몇 메시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며 놀라워했다. 나는 비단 같은 고급 섬유에 무늬를 인쇄할 때 300메시 정도의 실크스크린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물어본 것이다.어쨌거나, 그때 나를 빤히 쳐다보던 J과장님은 귀사 길에 "우리 회사가 PCB 생산을 직접 하면 어떻겠냐?"고 묻길래,좋은 생각이라면서 국내에서 외주해오면서 그 특성이 아주 까다롭고 중요한 전자 부품인 수정진동자 크리스탈(Crystal)도 함께 고려해보면 좋겠다고 했다. 귀사 후에 J과장님이 윗선에 어떻게 보고서를 올렸는지는 몰라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우리 공장 내에 커다란 PCB 생산 라인이 설치되어 가동되었다.방문 갔던 그 PCB 업체는 매우 영세했었는데, J과장님 친구분은 어찌 됐는지 모르겠다. 내가 얘기했던 크리스털은 깊이 파고드니 기술적으로 너무 복잡해서 나중에는 나도 감히 자체생산 검토할 엄두를 못 냈다. 어쨌거나 그 영세한 PCB 공장에서 미제 지뢰 탐지기 머리 부분 송수신 안테나와 똑같은 PCB를 만들었고, 몰드 업체에서 국방색 실리콘으로 압착하여 거의 비슷한 지뢰 탐지기를 만들었다.회사 건물 내에 시멘트로 벽을 쌓아 널따란 모래사장을 만들고 비금속 재질인 파라핀으로 모의 지뢰를 만들어 파묻고는 지뢰 탐지기를 좌우로 스위프(sweep) 시키며 모래 속 여러 깊이에 파묻은 크기별 파라핀 뭉치를 찾아내는 시험에 매달렸다.개발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나는 다른 아이템 개발을 부여받아서 지뢰 탐지기는 후배 연구원에게 넘겨줬는데, 나중에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양산 납품되었고, 지금도 군에서 제식 장비로 잘 사용되고 있다. 6. 땅굴 탐지기6-1. SU-26나의 직속 상관이던 K기좌님은 과장이 된 후에도 계속 나의 직속 상관이었다.내가 기좌가 된 1978년 여름에 K과장님의 지시로 서울 용산 국방부 건물 맞은편, 지금의 전쟁기념관 자리에 있던, 육군본부 '26위원회'의 황 대령이라는 분을 만나러 갔다.군 기밀 사항이라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갔는데, 가보니 땅굴탐지기 'SU-26'에 관한 미팅이었다. SU는 Seoul University의 약자였다. 육본에서 서울대학교 전자과에 땅굴 탐지기 개발을 의뢰했고, 서울대 전자과 학과장 P교수님 제자인 대학원생들이 기본적인 회로시험을 마쳐서, 이제는 군납 제품을 제대로 생산할 방산업체에 이관하려는 자리였다.대학교 학창시절에 P교수님의 번역본 저서인 '교류회로이론'을 교재로 공부했던 나는, 그분을 만나 뵙는 것만도 무한한 영광이어서 그저 황송할 따름이었다. 미팅을 마치고 P교수님을 따라 서울대학교에 가서 대학원생들이 만든 개발 샘플을 받았는데, PCB도 아닌 만능기판에 부품을 꽂고 점퍼선으로 배선해서,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조립된 브레드보드(breadboard) 수준의 조악한 조립품이었다.회로도도 종이에 손으로 그려진 조잡한 것이었지만, 차마 P교수님께 컴플레인도 못한 채 앞으로 내가 만들어야 할 땅굴탐지기의 성능 규격인 스펙(specification)과 그 물건들을 받아들고 그냥 내려왔다. 6-2. 지하 200미터 북한이 지하 200m 깊이에서 땅굴을 파고 내려온다고 한다. 휴전선 근처에서는 폭파를 자제하고 굴착기나 곡괭이로 굴삭 작업을 할 것이므로, 지상에서 피에조(piezo) 압전센서를 설치하고 그 소리를 증폭하여 감청해서 위치를 파악하는 원리이다. 오디오 증폭기의 게인(Gain)은 120dB로 전압이득이 백만 배나 되고, 주파수 범위는 40Hz부터 400KHz까지로 엄청 넓은 다이내믹 사운드 앰프다. 개발 장비의 목표는 피에조 센서를 30m마다 직선으로 길게 묻어서 막사에 있는 탐지기 본체까지는 유선통신용 삐삐 전화선 같은 실드(shield) 선(線)으로 끌어와 연결하고, 본체에는 10개의 LED를 센서별로 채널이 구분되게 장착해서, 만약 어느 센서에 진동음이 전달되어 오면 그 채널의 LED가 진동의 강도에 비례해서 빠르게 깜박거리게 만들어, 굴착지점이 10개 센서 중에 어느 위치에 더 가까운지 쉽게 파악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그리고 녹음기를 내장하여 중요한 소리는 나중에 카세트테이프로 들어볼 수 있도록 했다. 브레드보드를 가져와서 회로도와 샘플을 자세히 살펴보니 적용한 회로가 교과서에 나와 있는 수준이어서 소요 부품의 수급이 어려워 기본 골격만 유지하고 회로도를 대폭 수정했다.PCB를 외주 제작하고 부품을 수배해서 파일럿(pilot) 제품을 서두르고 있는데, 서울 본사 특판영업부에서는 서울대가 다 개발해 놓은 것을 가져와서 똑같이 생산만 하는데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느냐며 재촉했다. 6-3. 자장(磁場) 차폐거기에다 한 가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득이 무척 높은 예민한 탐지기라서 땅속 지자기(地磁氣)의 영향을 받으면 안 되니까, 탐지기가 자장으로부터 안전하게 차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즉, 탐지기 주변에서 자석을 들고 움직였을 때 아무런 영향을 받지 말고 정상적으로 동작해야 한다는 것이다.나도 학교에서 전기자기학 이외에는 자장 차폐를 별도로 배운 적은 없어서, 연구소 도서실을 뒤져 며칠간 관련 서적을 읽어보고야 겨우 감을 잡았다. 오디오 증폭기 회로에 사용되는 트랜스포머가 코일로 잔뜩 감겨있는데, 여기로 자장이 통과하면 코일에 유도전류가 발생하여 잡음을 만들 소지가 있었다.따라서 외부에서 도래한 자장의 영향을 막는 방법은 이 트랜스를 투자율(透磁率)이 높은 금속 재질의 커버로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투자율 '뮤'가 높은 재료는 철(쇠)인데, 순철은 '뮤'가 2만~10만쯤 된다고 나와 있어서, 1.0t(두께 1.0mm)의 순철을 매입하여 주먹 크기의 밑바닥 없는 육면체 금속 커버를 만들었다.그런데 막상 트랜스 위에 씌우고 PCB 기판의 그라운드(ground) 면에 납땜을 철저히 했는데도 자석을 가까이 대고 흔들면 10개의 LED 중 몇 개가 깜박거리며 회로가 오동작했다.나중에 원인을 규명해보니, 순철을 가공하여 용접하는 과정에서 열이 가해져 '뮤'가 낮아져 잡철이 돼버린 것이었다. 납기는 다가오고 특판영업에서 독촉은 빗발치는 가운데, 며칠씩 밤새며 문제해결에 매달리던 나는 혼미한 상태에서 자석을 들고 장비 주변을 돌리다가 뭔가를 건드렸고, 그것이 테이블 아래로 툭 떨어졌다.나는 무심코 다른 손으로 떨어진 물건을 집어 올려보니, 납땜하는 인두여서 그걸 인두 받침대에 꽂아 놓았다.그런데 그 순간 손가락 끝이 따끔하여 들여다보니, 피부가 노랗게 변했고 살이 타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게 아닌가? 내가 무심결에 뜨거운 인두를 손으로 집었던 거다.나는 화끈거리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가 수돗물을 틀고 담갔는데, 금세 서너 개의 물집이 생기더니 점점 커지며 부풀어 올랐다. 그 일이 있자, 사수이신 K과장님이 일본 기술잡지를 건네주며 퍼멀로이(Permalloy)의 수입을 검토해보라고 했다. 퍼멀로이는 니켈과 철의 합금 소재로 일본의 상표명이었는데, 얇은 두께로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실드 케이스(Shield Case)를 제조하여 판매하고 있었다.서둘러 수입한 퍼멀로이 케이스로 문제를 해결하여 근근이 자장 차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6-4. 부평시 은광(銀鑛)이듬해인 1979년에 우리 연구소는 전체 인원이 70여 명에 이르렀고, 전자 부문 K과장과 기구 부문 J과장이 승진하여 부장이 되고, 그 밑에 과(課) 단위인 기구 부문 1개, 전자 부문 5개, 총 6개의 실(室)로 조직이 구성되어, 과장을 실장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과장인 6실 실장이 되었다.땅굴탐지기의 양산 납품 전에 육군본부 26위원회에서 국방연구소(ADD)에 확인시험을 의뢰했다.시험장소는 부평 시내에 있는 폐쇄된 은광이었다. 직원 2명을 데리고 약속된 장소에 갔더니 육본에서 황 대령이 직원 2명을 데려왔고, ADD에서는 O실장이 10여 명을 데리고 왔는데, O실장은 나중에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고 아주대학교 총장도 역임하신 유명한 분이다.부평의 폐광은 갱도가 산꼭대기에서 땅속 200m 정도 아래에 있고 전기시설도 제대로 남아있었다. 산 위에 탐지기를 설치하고 갱도 안에서 굴착기를 가동하면서 탐지기에서 그 음파를 탐지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장소였다.마침 그 당시는 야간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밤 12시까지 기다렸다가 차량통행이 없는 조용한 시간대에 실시하면 되었다. 그런데 하필 산꼭대기가 공동묘지여서 오밤중에 서로 안 가려고 했고, 몇몇은 웃으며 가위바위보로 아래위 임무를 정했다.나는 만 27세의 새파란 과장이었지만, 제조업체 대표로 갔기 때문에 40~50대인 황 대령, O실장과 함께 갱도 입구에 머물며, KPRC-6 무전기로 산 위 탐지기 팀과 갱도 안의 드릴 팀에게 "굴착 시작", "굴착 종료" 등의 지시만 내렸다.시험결과는 아주 좋았고, 얼마 후에 10여 대를 정식으로 납품했다. 6-5. 땅강아지그러고 나서 몇 달 후에 나는 ADD 직원 3명과 함께 현장실사를 갔는데, 임진각에서 육본 관계자를 만나 현장 장교의 안내로 차를 타고 '자유의 다리'를 건너서 한참을 들어갔다.휴전선 근처의 현장에 도착하니 야전 막사가 3개 설치되어 있고, 그곳이 군(軍)에서 검토한 결과 의심이 많이 가는 지역 중 한 군데라고 했다. 파견 나온 군인들이 동서 방향으로 30m 간격으로 팽이처럼 생긴 10개의 피에조 압전센서를 실드선에 물려서 땅속 1m 깊이에 파묻어 꽁꽁 다져놓았다. 그리고 압전센서의 실드선을 막사 안으로 끌고 와서 탐지기의 입력단자 10개에 각각 채널별로 구분하여 연결하고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면서 감청한다고 했다.그런데 저만치에 미군 막사와 미군들이 여러 명 보여서 물어보니, 미군들도 땅굴을 탐지하고 있다고 했다.미군은 땅속에 지름 수십 센티의 쇠파이프를 수직으로 박고 그 속에 카메라가 달린 장치를 손가락 굵기의 케이블에 연결하여 집어넣어 눈으로 확인한다고 했다. 지금의 내시경 같은 장비라는 말인데, 한국군은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고 자기들끼리 비밀리에 작업한다고 했다. 막사 안에 들어가 봤더니 탐지기에 연결된 헤드폰을 끼고 앉아있는 병사는 매10분마다 귀에 들리는 소리를 일지에 적고 있었다.근무 중에 졸지 말고 제대로 감청하도록 조치한 것 같아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일지를 들춰봤는데, 또르륵 똑똑, 빠각 빠각, 틱틱, 찌익 찍찍 등등, 온갖 의성어가 다 적혀 있었다.아무것도 안 적을 수는 없고, 앞사람과 똑같이 적을 수도 없으니까, 자기 나름대로 구별해서 적다 보니 희한한 의성어가 만들어진 것 같다.증폭기 이득이 무척 크기 때문에 하필 압전센서가 묻혀있는 근처의 지상에 개미 한 마리만 지나가도 아주 큰 소리로 들릴 것이다.그런데 넘겨본 어느 페이지에 "뚜루룩 뚝뚝, 우르릉 꽝꽝"이라는 큰 글씨가 보여 살펴보니, 장교 확인 비고란에 "땅강아지로 사료됨"이라고 적혀 있다.몇 년 뒤에 들린 얘기로는 이 땅굴탐지기로 땅굴 2개를 찾았다고 했다. 7. 분/소대용 소형 무전기 PRC-85K1979년에 ADD에서 분/소대용 무전기 KPRC-6의 후속 모델로 미군에 의존하지 않는 손바닥 크기의 아주 작은 순수 국산 무전기 개발을 구상하게 되었다.주파수 발생 방법도 트랜지스터 부품 회로에 채널 주파수에 맞는 수정진동자를 삽입하는 기존 방식이 아닌, IC(집적회로)를 사용하는 주파수 합성방식인 FSS(Frequency Synthesizer)가 요구되었다. 당시 KPRC-6는 우리 금성전기(GSEC)와 다른 방위산업체인 동양정밀(OPC)이 절반씩 나눠서 생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ADD는 GSEC와 OPC에게 새 무전기의 목표 규격만 제시하고 각 회사 나름대로 독자적인 무전기를 개발하도록 통제하면서 경쟁을 시켰다. 그 무렵 나는 생산부 시험실에서 송신부 반장으로 있던 L을 승진시켜 내 부서로 발령내어 연구원으로 삼고 있었는데, L을 이 새 무전기 개발담당자로 지정하여 함께 회로도를 만들어 가면서 시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FSS용 IC는 미국 모토로라 회사에서 나오는 MS-시리즈를 사용했다. 주어진 몇 달이 지나 양쪽 회사가 만든 시제품이 ADD로부터 중간평가를 받았는데, 회로는 GSEC가, 기구 제품은 OPC가 낫다는 판정을 받았다.그런데, OPC가 GSEC의 회로를 따르지 못하겠다고 버티자, ADD는 두 회사가 여관을 잡고 함께 합숙하면서 닷새 내로 기구 및 회로의 통일과 합의를 보라고 요구했다.우리는 합숙 사흘이 지나도록 기구 부분만 수정에 합의했고, 회로도는 각사의 장점만 부각하며 고집을 부렸다. OPC는 책임자가 부장이었는데, 자기나 나나 엔지니어의 자존심과 회사의 이미지 때문에 도저히 양보할 수는 없었다.결국, ADD는 다시 기간을 정해주고 각자 알아서 최종 파일럿 제품을 만들어 제출하라고 했다. 나중에 숱한 회의와 협의 끝에 OPC 케이스에 GSEC 회로가 내장된 제품으로 결정되어 허리에 차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의 소형 분/소대용 무전기로 개발되었으며, 제품의 명칭은 'PRC-85K'로 정해져 제식 장비로 양산 납품되었다. 내 부서의 PRC-85K 개발담당자였던 L은 15년쯤 뒤에 '엘씨텍'이라는 개인회사를 차려 사장이 되었는데, 상호의 뜻을 물었더니 무선통신 고주파 공진회로에 사용되는 인덕턴스 L과 커패시턴스 C라며 웃었다.그리고 다시 10년쯤 후에 SK텔레콤의 외주업체이던 '엘씨텍'은 코스닥 시장에 상장되었고, 은퇴한 L은 지금 개인 재산 100억대의 부자이다. 8. 다연장 로켓포 발사장치 BSP국방과학연구소 ADD가 대전으로 이전하였고, 자주국방의 일원으로 4x9 배열의 36문 130mm 다연장 로켓 발사기인 K-136의 국산화가 추진되었다.로켓탄은 한국화약, 포신은 HD, 탑재 차량은 KIA 등등하여 여러 방위산업체가 공동으로 참여했는데, 발사장치인 '컨트롤 박스(Control Box) BSP'의 개발은 우리 회사에 할당되었다. 크지 않은 BSP 본체는 차량 외부에 부착되고 조종기만 차량 내부에 장착된다.회로 부분은 특별히 어렵거나 복잡한 것이 아니어서 신입사원 한 명을 담당자로 지정해서 맡겼다.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수십 가닥의 전선과 장비의 연결 부위를 고무(rubber) 재질의 외피로 매끄럽게 몰딩하는 작업인데, 당시 국내의 고무 몰딩 수준이 열악하여 수십 번의 시험작업을 거치며 아주 힘들게 성공시켰다. 1980년 어느 날, 충남 태안의 ADD 안흥 시험장에서 국산 다연장 로켓포 K-136의 시험발사가 있어 통보를 받고 참석했다.개발에 참여했던 방산업체 관계자들과 ADD 요원들 모두 시험장 내의 콘크리트 벙커에 들어가서 좁은 창틈으로 멀리 바다 위의 작은 섬을 주시하며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안내자는 혹시 로켓탄이나 차량이 폭파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벙커 속에서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섬 근처 해상에는 군함이 떠서 무전으로 시험장과 교신하는 소리가 벙커 내의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처음엔 한 발이 나가는 단발 사격이 이뤄지고 목표지점에 정확히 떨어졌다는 무선보고가 있었다. 숨죽이고 있던 참석자들이 함성을 지르고 박수로 환호했다.이어서 두 발 연속 및 여러 발 연속 등의 시험이 차례로 이어졌고 개발은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그 며칠 후 내 부서 담당자였던 신입사원이 사표를 제출했는데, 퇴사 사유를 적는 난에 '상사에 대한 불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세상에나!본인 얘기는 내가 너무 빡세게 일을 시켜서 힘들어 못 견뎌, 대학원진학을 고려하며 그만둔다는 얘기였다.그 사직서를 나의 부장님께 올렸을 때 호인이던 부장님이 싱긋이 웃으셨다. 부장님은 체신부(정보통신부)에서 근무하다가 우리 연구소에 부장으로 영입된 분이다. 나의 사수 K부장님은 부소장이 되셨다. 나중에 그 친구가 독일 유명한 통신용 계측기 제조회사의 한국지사에서 잘 근무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그리고 내가 사회생활에서 은퇴하기 직전인 2014년에 쉬고 있다며 내 개인회사로 찾아왔었는데, 나도 막 회사를 접기 직전이어서 함께 저녁 먹고 옛날의 얘기만 하다가 헤어졌다. 9. 백암 1980년 5월비싼 제품을 팔다 보면 가끔 하찮은 물건을 서비스로 줘야 할 때도 있다.본사 특판영업부에서 국가정보부서인 안기부로부터 어떤 물품의 제작을 극비리에 의뢰받아 왔다.1979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덕분에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시절인 1980년에는 중정의 이름이 안기부(안전기획부)로 바뀌었는데, 안기부 산하 전파감시소에서 자기들이 사용할 콘솔(console) 2대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간첩 등 불순세력의 무선통신을 도청하는 전파감시소가 경기도 용인 동쪽 백암에 있는데, 도서관 열람실 같은 칸막이 속에서 근무하는 도청 요원이 100여 명이나 되어, 2개의 큰 감청실 중간에 중앙통제실을 마련해서 요원들의 근무상태를 감시하며 필요한 감청 신호를 보고받는 콘솔 장비라고 했다.콘솔당 통제되는 50개의 칸막이 채널은 LED 램프로 구분하고, 도청 중인 전파의 음성신호를 콘솔에서 함께 들으면서 동시에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면 되는 수준으로, 배선은 좀 복잡하지만, 회로는 개발이랄 것도 없는 간단한 장비였다.다만 콘솔 한 대의 길이가 가로 3m, 세로 1.5m로 피아노 두 대를 연결한 크기여서, 기구 가공제작이 전자회로 조립시험보다 더 큰 문제였다.대부분 연구원이 맡기를 꺼리는 제품인데, 마침 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후배인 신입사원 H가 있어서 그에게 맡기고 코치만 해주면서 진행했다.1980면 5월 15일경 제작이 완료된 콘솔 2대를 작은 트럭 두 대에 나눠 싣고 연구원 3명과 함께 안기부가 알려준 장소로 납품 설치를 하러 2박 3일 예정의 출장을 떠났다.용인 동쪽 양지IC 근처에서 안면 있는 안기부 직원 P선생의 마중을 받고, 남쪽으로 시골길을 30분쯤 들어가니, 야산으로 둘러싸인 꽤 넓은 평지가 나오고 높은 담장 너머로 각종 안테나가 보였다.정문에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안으로 들어가니 운동장 땅바닥에 하늘을 향해 설치된, 지름 십여 미터의 그물망 접시처럼 생긴, 거대한 파라볼라 안테나(Parabolic Antenna)가 눈에 띄었다.중앙통제실에 콘솔을 하역하여 제자리에 놓고 보니, 유리창 너머 양쪽 감청실은 아직 칸막이 설치가 안 된 채 바닥 마감 작업만 되어 있었다.출발할 때는 감청실로부터 끌어다 놓은 100가닥의 케이블을 콘솔 장비에 연결하여 작동 확인만 하면 되는 줄 알고, 근처 민가에서 이틀간 민박하며 토요일 오전까지 끝내고 돌아올 예정이었다.그런데 P선생이 모셔온 꽤 높아 보이는 T선생의 요구로, 감청실 마루 밑 플로어 덕트의 100가닥 배선 작업도 우리가 해줘야 했다.결국, 일요일인 18일도 모자라 월요일인 19일 저녁까지 작업하여 겨우 끝냈다.민박집에서 전남 광주시에 무슨 큰 데모가 있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피곤해 잠자리에 들기 바빴던 터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안기부 선생님들 표정과 행동이 좀 수상하게 변하긴 했었다.콘솔 장비 납품을 마치고 안기부 차량으로 양지까지는 나왔는데, 시외버스 막차 시간이 지난 뒤였다.다행히 용인까지 가는 빈 트럭이 한 대 와서 짐칸에 4명이 올라타고 올 수 있었다.밤중에 트럭 짐칸에 쪼그려 앉아 실려 오는 피곤한 귓전에 논에서 떼창으로 부르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용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개골개골 들려왔다.학교 후배인 콘솔 담당자 H는 귀사 후 한 달 뒤에 사표를 내고 고향 진주로 내려갔다.그곳 양지IC 근처에 육군 휴양소가 있는데, 우리 회사로 통신장교 대상의 2시간짜리 '안테나 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내가 강사로 지정되어서 원고를 타이핑 치고 도표나 그림도 오려 넣어 30쪽이 넘는 '안테나 이론과 실무'라는 교재를 만들어서 100부 인쇄했다.가서 보니 위관급 장교가 대부분인데, 영관급까지 40여 명이 칠판 있는 교실에서 학생들처럼 집체 교육을 받았다. 강의를 마치고 오는 길에 강사료를 봉투에 넣어줘서 기분이 아주 좋았는데, 열심히 듣고 질문도 하던 장교들 반응이 괜찮았던지 그 후에 한 번 더 다녀왔다. 10. 에필로그 1983년 이후에 나는 산업용 무전기와 가정용 무선전화기인 코드리스 폰(Cordless Phone) 및 당시는 셀룰러폰(Cellular Phone)이라 불리던 휴대용 무선전화기 개발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나는 독자이면서 부모님이 연로하여 입대 6개월 만에 이등병으로 의가사 제대했고, 다른 친구들보다 2년쯤 일찍 사회에 진출한 관계로 가끔 미안한 생각이 들곤 했었다.그러나 방위산업체 연구소에서 군 통신 장비 국산화 개발에 참여하여 항상 빠듯한 시간에 쫓기다 보니, "이것이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 덕분에 지금은 육군 이등병 출신인 내가 그 누구 못지않게 자주국방의 일익을 담당했노라고 자부한다.충~성!

2019-08-08 18:15:01

진상용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몽당연필로 쓴 성장일기/진상용

《글머리를 열며》아직 연륜을 들먹이기 뭣한 입장이지만, 육신의 나이테 한 줄씩 늘어갈수록 애벌레 무렵의 기억들이 문득문득 되살아나곤 한다. 덧없이 흘러간 세월 중에서 가장 순수했던 동심시절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본들 진저리쳐질 만큼 고달팠던 삶이 제일 먼저 떠오름에도, 그 속에서 피어나던 가족애와 이웃간의 정과 끈끈한 인간미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수십 년이 지난 요즘 시절에야 대부분 사람들이 먹을 걱정 하나는 덜어냈을지 모르나 오히려 심리적으로 혹독한 보릿고개를 넘고 있다. 집집마다 숨겨둔 근심거리 한둘씩은 있기 마련이고, 빈부 양극화의 소용돌이에 휘둘리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쓸 만큼은 소유하였음에도 못 갖추었다고 안달하는 무한물욕은 아닐까.차가울수록 따뜻함을 안다. '우린 이렇게도 살아왔어.' 요즘 세대에겐 가장 듣기 싫은 넋두리를 늘어놓기보다, 그런 시대를 함께 겪어낸 사람들끼리라도 공감할 수 있을까하여 해묵은 추억갈피를 뒤적인다. 《문창호지 바르는 날》산이 높아 골짝도 깊은 강원도 횡성에서도 가장 오지이다 보니 비좁게 들어앉은 마을 터, 동네 앞을 흐르는 개울 때문에 돌려난 듯 외져서 처음 온 사람은 누가 이런 데까지 찾아내 처음 터를 잡았을까 감탄할 정도였다. 대여섯 집 중 하나는 그나마도 둔덕너머에 있어 초가지붕 용마루만 겨우 보일 뿐.가을꽁무니 바람 한 줄기가 후다닥 앞질러가며 나뭇가지들을 모조리 흔들어놓는다. 가래나무라고 그냥 둘 리 없다. 나무 밑으로 다가가니 새로 떨어진 열매들이 여러 개 널려있다. 고무신발로 내리밟자 울퉁불퉁 동글갸름한 추자 알이 툭 튀어나온다. 냉큼 주워서 어른들이 하는 걸 본대로 손아귀에 넣고 힘주어 비빈다. 하지만 길들지 않아 달그락 소리는커녕 손바닥만 아프다. 에라, 고소한 알맹이나 꺼내먹어야겠다.딱딱한 껍질을 깨려고 막돌을 주우러 다니던 나는 하늘의 해를 쳐다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야 엄마 심부름이 생각난 것이다. 방문에 무늬 새김 넣을 들국화를 따오래서 나선 길이었다. 며칠 전, 종이를 만드는 사람이 울 너머의 닥나무를 베어가면서 창호지 한 다발을 주고 가더니 엄마는 아까운 늦가을 볕 흘려버리지 않으려고 급하게 풀 쑤어 문 바를 작정했을 것이다.휘- 둘러보니 다른 꽃을 다 지운 까깨등 쪽만 강냉이 튀밥을 쏟은 듯 들국화 천지다. 난 급한 마음에 모양이나 때깔 고를 것 없이 손닿아 잡히는 대로 뚝뚝 뜯었다. 고사리 양손에 꽃 한줌이 금방 찼다.한나절 만에 집안이 온통 환하다. 세상이 달라 보일 정도다. 비바람 들이치고 파리똥에 찌들어 얼쑹덜쑹하던 방문을 새로 발랐기 때문이다. 풍풍 뚫린 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 탓에 새벽이면 코끝이 시리던 요즈음이었다.문을 새로 발라서 집이야 깨끗해진 대신 우린 동네 사람들 눈 밖으로 돌려날지 모른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닥나무는 마을공동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집터이긴 해도 울타리 바깥의 노는 땅에 자라는 만큼 아무나 베어다 껍질을 벗겨서 아이들은 팽이채로, 어른들은 쇠고삐나 지게 밧줄을 꼬았고, 여자들이 다래끼 끈을 매는데도 두루 잘 쓰였다.그러던 작년 봄,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사람이 찾아왔다. 대대로 한지를 떠왔는데 닥나무를 베어가는 대신 문창호지를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아까운 땅 차지나 하던 허드레나무를 닥종이와 바꿔간다는데 누군들 싫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가을이 되자 남자는 어김없이 찾아와, 바람 못 견디고 쓰러진 휘추리 하나 남김없이 밑동 바짝 베어 묶고 구두약속한대로 창호지 한 다발을 주고 갔다.마을 사람들은 이제 꼭 쓸 만큼만, 우리 허락을 미리 받고서야 얻어가게 됐으며, 더군다나 올핸 곁가지 하나라도 더 없어지기 전에 챙기느라 된서리 오자마자 낫질해가 버렸으니 이웃은 물론이고 우리도 닥나무 끄나풀 헤프게 쓰긴 다 틀렸다.안방, 웃방과 마루 건너의 골방까지도 우린 연달아 이태를 새 창호지로 문 발랐다. 하얀 방문이 너무 깨끗해서 남의 집에 잘못 들어선 것 같다. 다른 집들에 비해 잔뜩 웅크린 듯 우중충했었는데. 《새들도 추운 계절》칼바람 매서운 한겨울, 밤이 깊어지자 샘머리집 태호 형이 작은 소리로 부른다. 이불속에서 기다리던 나는 어른들 몰래 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밤에 우리 집의 참새들을 잡아서 같이 구워먹기로 약속했었다. 형은 이미 낮에 둘러보며 새들 굴을 다 확인해 두었다. 처마 밑에 지려놓은 똥이 있으면 새가 산다는 증거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워둔 데란다.산 밑에 바짝 붙여 지은 우리 집엔 유난히 새가 많이 산다. 봄부터 가을까지 산과 들에서 살던 여러 종류의 새들이 날이 추우면 여기로 모여든다. 난 남포유리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들고 뒤를 따랐다. 그리고 태호 손짓에 따라 멈추어 섰다.낮에 미리 받쳐 놓은 사다리에 올라간 형이 살금살금 손을 뻗어 초가지붕 이엉 틈새 구멍 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짹짹거리는 새를 움켜잡은 형은 사다리에서 내려오기 위해 내 손에다 새를 넘겼고 난 행여라도 놓칠세라 꽉 움켜쥐었다.털이 따뜻한 새가 꼼지락거릴 때마다 겁에 질린 맥박이 손안 가득 느껴진다. 왠지 모를 두려움이 밀려와 엉겁결에 손을 폈다. 새는 포록거리며 어둠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형은 다음 굴로 가서 또 한 마리를 잡아 넘겨줬지만 이번에도 난 거짓말처럼 홀랑 날리고 말았다. 이미 소동을 눈치 챈 다른 새들은 여기서 저기서 날아가고... 별명이 참새포수인 태호지만 속수무책이었다."에이 망했다. 겨우 두 마리가 뭐나!"투덜거리며 손을 내미는 형. 그러나 난 빈손이었다."새 어쨌니?""놓쳐버렸어.""이런 멍청이, 잡아준 것도 간수 못해. 너 일부러 놔줬지?"아니라고 부인을 해도 형은 믿질 않았다. 오히려 나 혼자 다 가지려고 감췄나 의심하여 주머니를 뒤지기까지 했다."에라, 무녀리자식아. 다음부터 너랑 같이 잡나봐라."잔뜩 화가 난 태호 형이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방에 들어와 누웠어도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파닥거리던 작은 새의 숨결과 고동이 아직도 손안 가득 남아 있었다.이튿날 아침 일찍 나는 뒤꼍으로 갔다. 휑한 구멍이 쳐다보인다. 이제 여긴 한동안 새가 들지 않을 거였다. 아니, 영원히 떠나 가버렸을지도 모른다. 북향인데다 한해씩 건너뛰며 지붕을 잇는 바람에 우리 지붕은 골골이 패이고 거기서 흐르는 낙수 양이 넉넉하니 하루만 둬도 손아귀에 꽉 찰 만큼 굵게 자란다.더구나 엄마는 고드름을 따면 아기 낳을 시기 가까운 엄마 젖이 마른다며 건드리질 못하게 해서 크고 싶은 대로 길어진다. 사람 드나들기에 걸리적거리는 데도 그냥 놔 둔 고드름이 장대발 키를 서로 다투며 촘촘히 자라고 있다.지붕 위에 쌓인 눈이 고드름 되었다가 녹아내리기를 몇 번씩 되풀이하는 동안 날마다 살펴보았지만 우리 처마 밑엔 두 번 다시 새똥이 떨어지지 않았고, 산골의 긴 겨울이 더욱 지루하게 지나갔다. 《금옥이 누나》큰 소리로 부르면 알아듣고 대답할 만큼의 거리를 두고 금옥이 누나네 집이 있다. 행길 쪽에서 보자면 우리 집 위에 금옥이네가 살았으므로 싫든 좋든 꼭 우리 마당을 지나다녀야 한다.금옥이와 난 두 살 차이, 하지만 나이 이상으로 누난 나를 챙겨준다. 집에서 학교까진 시오리길이다. 어른들이 그렇다니까 믿어야지 걸음으로라도 재본 적은 없다.금옥이는 늘 햇귀 돋기도 전에 일찍 밥을 먹고 우리 집에 와 기다리다 내 손을 끌어서 학교엘 간다. 영국이가 나와 같은 반이지만 갠 면사무소에 다니는 삼촌 자전거 뒤에 편히 실려 다닌다.마을 앞 굽은재를 넘으면 제법 마을 꼴을 갖춘 널찍한 동네가 나오는데 거기 사는 애들은 늘 우리를 산골 놈들 취급해 텃세부리기 일쑤다. 심지어 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은 꼬맹이들까지 큰애들 뒤를 믿고, 겁 없는 사마귀처럼 앞길을 막아서며 주먹을 둘러메기까지 했다. 그나마 누나가 나의 방패막이가 되긴 했지만 몸도 약하고 고라니처럼 순해빠져서 힘이 별게 아니었다.그 마을을 지나고서 개울을 건너야 가장 반듯한 건물인 우리학교가 있다. 늦가을에 양쪽마을 사람들이 모여 나무를 베어다가 섶다리를 놓긴 하나 큰물이 져서 떠내려 가버리면 다시 놓는 가을까지 맨발벗고 건너야 한다. 여름 장마철마다 강 건너 쪽 사는 애들은 당연히 임시휴교다.누나가 나를 더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건, 그런 형편에도 내 성적이 뛰어나서다. 다섯 마을 아이들로는 교실이 안 차서 창밖의 참새들까지 모두 불러들여야 한 반을 꾸릴망정, 세상 막바지나 다름없는 골짝 출신이 큰 동네 애들 제치고 공부 잘하는 게 누난 부럽고 뿌듯했을 것이다.그날 첫 시간이 국어였고 담임선생님은 이어읽기를 시키셨다. 앞사람부터 한 문단씩 읽어나가다가 다음 사람이 받아 읽는 것인데 새로 반을 맡은 선생님이 아이들 각자의 수준을 알아보려는 듯했다. 차례가 됐는데도 멍하니 선 채 성에꽃무늬 진 창밖을 바라보는 내 앞으로 선생님이 다가오셨다."수업시간에 딴전을 피우고 있으니까 읽을 데를 모르잖아!"까까머리 위에 톡톡 부딪쳐 오는 막대기는 아픔보다 모멸감부터 얼굴가득 끼얹었다. 그러나 책을 뺏어 뒤적이던 선생님도 옳게 찾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재작년에 금옥이, 작년엔 옆 마을 민우를 거쳐 내 손에 넘어올 때부터 책 앞뒤의 여러 장이 떨어져나가고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책을 이렇게 다 찢으면 어떡해. 옆 사람 걸로 읽어봐."다시 머리통에 느껴지는 막대기, 하얗고 가녀린 손끝으로 내가 읽어야할 부분의 단어까지 정확히 짚어주는데도 불구하고 난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밀려오는 서글픔 때문에 눈물이 솟아 글씨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데다가 애써 읽으려 해도 목소리마저 나오질 않는 거였다."세상에, 3학년이 되도록 글씰 모르는 녀석이 배울 생각도 않고... 남부끄럽지도 않니?"아까보다 더 야무진데다 감정까지 덧들인 막대기가 맨머리를 두드리고 책 읽을 순서는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대신 수업시간 내내 난 교실 귀퉁이에 꿇어앉아 벌을 받아야 했다. 빨리 온전한 페이지까지 나가야 한다. 그래야 끝없이 떨어져버린 위신을 되찾을 수 있다.얼마 뒤, 일기장 검사를 통해 내막을 알게 된 선생님은 조용히 불러 위로 겸, 사과를 하셨다. 다른 과목도 빠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특히 국어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만큼 앞서나갔다.말짱하던 하늘에서 채찍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소나기. 공부 다 끝났지만 나는 빗줄기가 가늘어지길 기다릴 속셈이었다. 그런데 복도에 나오자 금옥이가 기다리고 있다. 학교근처에 사는 친구한테서 살이 여러 개 부러진 비닐우산을 빌려왔지만 함께 쓰나마나, 옷 적시며 개울까지 와보니 철 이른 큰 비에 돌다리가 잠겨버렸는지 떠내려갔는지 사라지고 없다.비가 계속 쏟아져서 황토 강물이 퉁퉁 불어 오르므로 더 늦기 전에 건너야한다. 누나 손에 끌려 물에 들어서긴 했지만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무서웠다.둑으로 물러나 잠시 생각한 누나가 허리에 매고 있던 책보따리를 풀어 나한테 넘기고 등을 들이댔다. 미심쩍긴 했지만 난 작은 등에 업혔다. 사납게 흐르는 물살. 바들바들 휘청거리면서도 누나는 겨우겨우 개울을 건넜다. 따뜻한 누나 등에서 내려온 다음에야 난 움찔 놀랐다. 금옥의 발등 살갗이 찢어지고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거였다. 빗물에 씻겨도 자꾸 배어나는 피.난 몰랐다. 거칠게 흐르는 황토물 밑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뿌리 뽑힌 나무며 돌들이 마구 굴러 내린다는 것을. 그것들에 발을 다쳤지만 누나는 내색하지 않은 채 나를 무사히 건네 놓은 것이다. 빗발이 약해지고 있었다. 절룩거리며 앞서 걷는 누나의 어깨며 등에서 김이 오른다. 빗물 젖은 몸에 나일론 옷이 착 달라붙어 더 야위어 보인다.남한테 고맙다는 감정을 처음 느꼈다. 그 고마움을 평생 간직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보호해주려는 누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린 선녀일 거였다. 《내 학용품 보물창고》우리 집과 종숙이네 집의 경계인 울타리에 조팝나무 꽃이 가득 피었다. 내일 환경미화 당번이라서 교실 꽃병에다 꽂아놓으려고 조팝꽃을 꺾으러가던 나는 너무 놀라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덤불 밑에서 뒤뚱대며 달아나는 까만 암탉 때문이다. 그리고 우묵하게 패인 땅바닥에 달걀 네 개를 소복이 낳아놓은 게 보였다.다른 집 닭이 여기 와서 낳았을 터, 제 둥우리를 두고 왜 여기다 낳았는지 모르지만 가슴이 마구 뛴다. 종숙이네 닭일 것 같은데 여기에다 알을 숨겨놓은 줄 모르고 있을 거다. 걔넨 넉넉한 농토는 물론 소와 돼지, 토종닭이 여러 마리여서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부자다.'종숙이한테 알려주자. 그럼 고마워서 한두 개 줄지도 몰라. 아냐, 이게 꼭 걔네 거라고 할 순 없지. 매일 하나씩 더 나을 테니 가져가도 표시 안 나잖아.'갈등 속에서 나는 그 알을 챙길 명분을 찾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사람이라곤 없다. 하나만 갖기로 작정하고 따뜻한 알을 살그머니 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하지만 몇 걸음 옮기던 나는 끝내 발길을 돌려 알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말았다. 여우같은 종숙이가 숨어서 훔쳐보고 있다가 내일 학교에 가서 소문낼 것 같아서다. 방으로 들어오긴 했으나 네 개의 달걀만 눈앞에 어른거릴 뿐. 숙제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교내 백일장에다 써낼 글짓기를 해야 되는데 원고지는 커녕, 연필이 없다. 오래 전에 산 연필은 손에 쥘 수가 없을 만큼 작아져서 붓뚜껑에다 끼워 썼는데 그나마도 어제 잃어버리고 왔다. 사달라는 말을 어렵게 꺼내자 칠칠맞게 연필 잃어버린 걸 되레 나무라는 엄마가 야속하지만 귀 떨어진 동전 하나 나올 데라곤 없으니 엄마 마음도 답답할 거다.어두워지길 기다려 다시 울타리로 갔다. 조심조심 알이 있을 델 더듬었다. 포근한 닭털이 만져졌다. 밤인데도 암탉은 알을 꼭 품고 있었다. 억센 부리로 내 손등을 콕콕 찍으며 버티는 어미를 밀쳐내고 달걀 네 개를 몽땅 뺏어 와버렸다. 조심스레 가져온 알을 헛간의 항아리 안에 숨겨놓았다.이튿날, 평소보다 일찍 서두른 나는 남들보다 앞서 학교로 향했다. 학교 앞 가게에서 돈 대신 달걀도 받아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받아든 돈으로 연필 한 자루와 원고지 석장부터 사고도 돈이 조금 남았다.많은 물건들 중에서 가장 먼저 내 눈길을 유혹하며 걸린 풍선뽑기판. 남들이 못 뽑고 남은 커다란 풍선 몇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나를 꼬드긴다. 종이판에 동그란 표시가 있고 그걸 뜯으면 뒤에 적힌 숫자가 적혀 있는데 그 해당번호 풍선을 갖는 거다. 뽑을 번호는 딱 하나 남았으므로 크고 좋은 저 풍선들 중 하나는 분명 내차지였다.동전을 건네준 나는 당당하게 숫자판을 떼어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한쪽 귀퉁이에 보일 듯, 말 듯 달라붙은 초라한 풍선을 내주는 게 아니가. 순간 멍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난 무엇에 홀린 것처럼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주인이 뒤의 번호를 들춰본 뒤 좋은 번호는 미리 뜯어냈다는 것을. 다른 아이들은 그런 수법을 미리 다 알고 속질 않았으나 어수룩한 내가 마지막으로 걸려들고 만 거다. 그렇게 남은 큰 풍선들은 몇 배의 웃돈을 붙여서 팔아먹는다.교실로 들어가 밀린 글짓기 숙제를 시작했다. 새 연필과 원고지 덕분인지 글이 잘 써졌고 검사를 하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하지만, 집에 돌아와 책보를 풀어놓자마자 종숙이 엄마가 쫓아왔다. 울 엄마와 종숙엄마 사이에 험악한 말싸움이 오갔고 나는 곧 싸움판에 불려 나갔다."너 종숙이네 달걀 훔쳐왔어?"엄만 '아니오.' 란 당당한 대답이 나오기를 철석같이 믿었을 거다. 엄마의 확신에 눌린 내가 얼버무리며 부인을 했지만 이미 증거를 잡고 찾아온 종숙엄마의 심문을 빠져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엄마 눈에서 노여움의 불길이 새파랗게 피어났다."머리 부스럼딱지도 안 벗은 눔 간댕이가 저렇게 커서 어쩐대. 욕심나면 몇 개나 가져갈 일이지 여남은 개를 몽땅...."네 개를 가져온 죄는 열개나 훔친 도둑질로 부풀어졌다. 성질 못된 수탉을 피해 알자리를 옮긴지가 열흘이 넘었다는 계산을 들이댔다. 엄마한테 손목을 틀어 잡힌 나는 싸리빗자루로 엉덩이며 등짝을 마구 맞았다."웬만큼 해둬. 애들이 몰라서 한 짓인데. 크면서 차차 손버릇 고와지겠지 뭐."팔짱낀 채 옆을 지키고 선 종숙엄마가 이런 소릴 지껄이지만 않아도 매질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옆에는 종숙이가 당당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날로 엄마는 이웃동네까지 다니며 수탉 있는 집들을 찾아가서 유정란을 모아다가 종숙이네를 주었고 세이레, 21일이 지나 깜장, 노랑 갈색 등 여러 색깔이 섞인 병아리 여남은 마리를 깠다. 종숙이네 닭과 나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어 집 근처에 얼씬거릴 때마다 멀리 쫓아버렸다. 그 뒤로 난 달걀을 먹지 못한다. 삼키기만 하면 모조리 토하고 만다.한동안 지난 어느 날, 교실에 들어오신 교장선생님께서 담임선생님이 출장을 가셨으니 옆 반에 가서 합반수업을 하라고 시키셨다. 책과 학용품을 챙겨 옆 교실로 갔으나 책걸상 숫자가 모자라니 우리 반은 바닥에 앉아야 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서인지 교실은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져갔다. 그 반 여선생님의 호령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덩달아 산만해진 나는 지난번에 달걀을 주고 산 연필로 장난을 시작했다. 나무 널판을 깐 마룻바닥엔 옹이 빠진 구멍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그 구멍에 연필 끝을 잡고 넣었다, 뺐다가, 빙글빙글 돌리는 재미에 정신이 팔렸다.그러다 연필을 놓치는 바람에 구멍 속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필기도구라곤 그 몽당연필뿐인데 잃어버렸으니 큰일이다. 다행히 연필을 쓸 일 없이 잘 지나갔다.첫 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들렸고 우르르 몰려나가는 아이들에 섞여 나도 밖으로 나왔다. 살펴보니 건물 밑에 통풍구가 드문드문 있다. 구멍 속으로 기어들었다. 워낙 좁아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들어갔지만 어두워 앞이 보이질 않는다. 머리 위로는 마룻바닥에 박은 대못 끝이 삐죽 삐죽 나와 있고 땅 바닥엔 오랫동안 쌓인 먼지가 수북했다.내가 앉았던 자리쯤을 짐작해 기어가서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무언가 만져졌다. 연필이다. 그러나 내께 아니다. 칼로 깎을 때마다 길이가 줄어드는 만큼 마음도 졸였기 때문에 금방 알 수가 있다. 다시 손더듬질 시작했다. 길고 짧은 여러 자루의 연필과 지우개, 칼, 거기에다 동전 몇 개도 주웠다. 교실바닥 마룻장 틈새로 빠진 것들이 분명하다. 주머니가 곧 불룩해졌다.머리에 거미줄을 가득 걸친 채 밖으로 기어 나오자 이미 시작종이 울려 모두들 교실에 들어간 뒤였다. 작두우물로 달려가 마중물을 붓고 물을 품어 올려서 옷과 몸에 묻은 먼지를 씻어냈다.교실에 들어서니, 깨끗이 닦는다고 했음에도 얼룩이가 된 내 모습을 보고 선생님은 물론 두 반 아이들이 모두 웃어댔다. 비록 놀림감이 되었지만 주머니에 가득 든, 한동안 쓸 학용품을 생각하면 최고로 마음 뿌듯하였다.그 이후부터 나만 아는 학용품 보물창고가 생겼다. 학용품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 교실은 물론이고 학교건물 마루 밑을 기어 다니면 다 해결되었다. 《가뭄의 끝》오늘도 비 올 날씨가 아니다. 들머리 '개늪둠벙'에 고였던 물이 오랜 가뭄에 줄어서 가운데 쪽에만 조금 남았고 온갖 물살이들이 거기 몰려 우글거린다. 봄 내내 넘쳐나던 올챙이들은 상급학교로 진학하듯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여서 다행이다.살아보겠다고 나대는 것들 중엔 미꾸라지도 여러 마리 섞여있었다. 같이 버티던 장구애비며 물방개는 날개를 다 말려서 멀리 날아갔다. 내 뒤를 따라온 검둥이가 목이 마르다는 듯 혓바닥 깔짝거리며 핥아댄다. 아까운 물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개를 쫓아냈다. 이제껏 다정하던 주인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검둥이가 아쉽다는 듯 물러난다.땅을 펄펄 달구는 땡볕. 난 하늘을 원망했다. 머지않아 이 물은 다 마르고 진흙바닥이 드러날 것이다. 가득하던 개구리밥과 마름풀이 땅에 붙은 채 말라버릴 거다.난 샘으로 달려가 대야로 물을 퍼다 웅덩이에 부었다. 성에 안차 다시 떠서 돌아오다가 푸다닥 날아가는 까마귀를 보았다. 이미 웅덩이의 물살이들 절반 이상을 잡아먹고 난 뒤였다. 발자국을 어지럽게 남긴 까마귀는 근처 뽕나무에 앉아 나더러 어서 떠나가라고 까옥까옥 독촉하였다.난 남은 것들을 바가지에 건져 담았다. 그리고 물이 확 줄어든 물떠러지 폭포로 향했다. 웬만한 물줄기는 다 말라버려서 거길 가야 넉넉한 물을 만날 수 있다. 웅덩이에서만 살던 것들이 여기에 적응할지는 모르나 그래도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물에 쏟아놓으니 녀석들은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이리저리 숨을 곳을 찾아간다. 얕아진 폭포 한가운데 있는 큼직한 바위그늘을 따라 한가로이 놀던 버들치들이 내 그림자 때문에 놀랐는지 바위 밑으로 사라졌다.쪼그려 앉은 나는 물속을 들여다본다. 마치 넓은 유리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맑다. 파란 하늘이 물에 비치고 있다. 문득 기다란 장대에 더러운 걸레를 매달아 얼룩구름을 만들고 싶다. 지금은 저 깨끗한 하늘과 맑은 물이 아주 싫다. 구름이 많이 끼어야 비가 올 테니까.대왕고기를 찾는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눈에 띄질 않는다. 낯익은 사람이라 안심이 되는지 작은 고기들부터 다시 모습을 보인 다음에야 열목어가 바위굴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그새 더 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의젓한 몸짓은 그대로였다.저 열목어는 이 폭포수에서 젤 크다.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여기에 살고 있었으니 나이도 비슷할 것이다. 녀석은 왕답게 당당한 모습으로 바위둘레를 빙빙 돌았다. 등에 있는 줄무늬와 검은 점들, 동그랗고 발그레한 눈,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함께 들먹여지는 아가미, 뽐내듯 흔드는 지느러미랑 꼬리. 한참이나 헤엄을 즐기던 열목어는 싫증이 나는지 다시 바위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난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방금 전에 대왕고기가 숨은 바위 밑을 더듬었다. 굴이 있다. 그러나 좁고 깊어서 손이 들어가질 않는다. 바위를 넘겨보려고 온힘을 다 썼지만 양팔로도 단 안지 못할 만큼 큰 바위라서 꿈쩍하지 않았다. 아, 마음이 놓인다.이 바위는 폭포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의 집이고 작은 대궐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바위 밑이 늘 궁금하다. 굴속은 들여다 볼 수도, 손을 디밀어 만져볼 수도 없을뿐더러, 큰 바위를 내 힘으로 뒤집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빨리 어른으로 자라서 저 바위를 휙 넘겨버리고 물고기들의 왕국을 속 시원하게 보게 될 날이 왔으면...난 물을 한 대야 가득 떠서 부지런히 개늪둠벙으로 갔다. 거기 남아있는 것들을 살리는 길이라곤 이 방법뿐이다. 웅덩이 바닥에 구멍이 나서 새는지 아무리 퍼다 부어도 그대로이고, 오가는 거리가 꽤 멀어서 곧 지치고 말았다.밤, 무언가 장독대를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문을 여니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퍼붓고 있다. 얼마나 기다리던 비인가. 반가우면서도 왜 이제야 오시는지 야속한 생각이 더 크다.곧 맹꽁이 소리가 들린다. 개늪둠벙이 떠나가도록 시끄럽다. 아까는 안보이던 놈들이 어디서 나타났을까. 눈물이 찔끔 흘렀다. 안도감 속에 그 소릴 들으며 한여름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부디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어야 할 텐데. 《청보리 여물 무렵》늦봄이거나 초여름, 외할머니께서 다니러 오셨다. 입 하나 덜려고 일찍, 그것도 몸 성치 않은 총각한테 출가시킨 막내딸이 눈에 밟혀 지팡이 의지해 먼 길 나섰을 테지만, 궁색한 형편에 마음 불편한지 바로 돌아가려는 할머니를 엄마가 붙잡았다.쌀독이 비어서 차려낼 것이 마땅치 않은 엄마가 급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자줏빛과 하얀색 꽃이 절반씩 섞인 감자밭에서 돌아왔다. 중간 크기의 감자들이 양푼 절반가량 담겼다. 며칠 간격으로 밑뿌리를 뒤져서 먼저 굵은 걸 캐다 먹고 두럭 수북이 흙을 덮어준들 마음만큼 빨리 크질 않는다.엄마가 툇마루 끝에 앉아 감자껍질을 벗기는 동안, 지체장애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바우배기밭으로 갔다. 비탈뙈기 중간으로 들어간 아버지가 보리를 베면 난 짚으로 묶는다. 어떤 곡식이든 가장자리보다는 가운데에서 자란 놈이 더 실한 이유도 있겠지만 흉 꺼리를 남들 눈에 보이기 싫어서일 것이다.그렇게 먼저 여문 이삭만 골라 베어온 보리를 풋바심해 털기 시작한다. 도리깨질 대신 홀태로 훑는 아버지의 땀투성이 얼굴은 온통 거친 가시랭이로 뒤덮여간다. 햇볕 쬐일 짬이 없어서 가마솥에 불을 지펴 급하게 말린 겉보리를 절구 확에 쏟아 붓는다. 엄마가 열심히 절구질을 하지만 금세 힘이 달리고 절굿공이 오르내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동생이랑 내가 교대로 방아깨비 팔다리 힘을 거들어보나 별 도움 되진 못하고... 보다 못한 할머니가 그나마 근력을 보태자 거칠던 겉보리가 보리쌀로 바뀌어간다. 겨우 찧은 햇보리를 키질하여 등겨를 까부른다. 애만 썼지 다 여물지 않아 소출이랍시고 겨우 두어 됫박의 알곡.엄마가 불쏘시개에다 성냥을 그어댄다. 아궁이 가득 불꽃이 피어난다. 따다다다~탁... 바짝 마른 솔가리가 송진내를 뿜으면서 타고 장작에 옮겨 붙은 불길이 시커먼 이맛돌 밖으로 널름널름 넘쳐난다.맏이인 나한테 맡겨진 아궁이. 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기 쐬어가며 부지깽이질 하는 건 고역이다. 틈나는 대로 행주질하여 윤기 반지르르한 무쇠 솥뚜껑 틈새에선 물방울이 눈물 마냥 흘러내리다가 곧 한숨 같은 김이 푸욱푸욱 내뿜어진다.얼핏 내다보니 엄만 텃밭에 가있다. 부엌에서 몇 걸음 발치에 있는 텃밭은 푸성귀며 양념거리 공급 터다. 열무, 고추, 가지, 오이... 파도 대파, 실파, 쪽파, 고랑마다 종류별로 자라는 것들을 끼니때마다 필요한 만큼 솎아다가 찬거리로 쓴다.엄만 냉국부터 만든다. 봉숭아 몇 포기를 화초로 심어놓은 장독대에 가서 간장을 떠다가 잘게 채를 썬 오이와 실파를 넣고 찬물을 부어 맛을 본다. 참기름 병마개를 열어 조금 따르고는 병 주둥이에 흐른 기름방울을 날름 혀 내밀어 핥는 엄마, 그 모습은 차라리 안 보는 게 좋았을걸. 급하게 버무린 겉절이는 다시 밭으로 기어가고야 말겠다는 듯 숨이 죽질 않는다.꽤 늦었지만 제법 갖추어진 두리반 점심상 앞에 모두 둘러앉았다. 잔정 많은 외할머니가 장마철의 백로 늦새끼처럼 야윈 손주들한테 뜨거운 감자 하나씩을 후후 불어 들려주고 목이 메일까봐 냉국도 떠먹여준다. 그리고 나서야 워낙 시장했었는지 감자를 절반 갈라 맛있게 드신다.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더니 공연히 생긴 말은 아니다. 외할머니 덕분에 우린 봄 감자 얹은 햇보리밥을 남보다 일찍, 배불리 먹었다.하룻밤 묵어가라고 붙들었지만 끼니사정을 눈치 챈 할머니가 해떨어지기 전에 가겠다며 서둘러 집을 나서고 '잘 살펴가세유.' 빈손 잡아주었을 뿐, 여비 한 푼 못 쥐어준 엄만 할머니가 동구 밖으로 사라진 뒤에야 부엌문짝을 짚은 채 올 풀어진 행주치마폭으로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가 다녀가신 이틀 뒤, 외삼촌이 보리쌀 몇 말을 지고 오셨다.그 무렵에 막내도 잃었다. 삼칠일 산후몸조리는 고사하고 이튿날부터 진자리 걷고 일어나 찬물에 손 담근 탓에 어머닌 줄곧 잔병을 앓았고, 아기 역시 태어날 때부터 내내 실하질 못했다. 제 스스로 몸 한번 뒤집어본 적이 없었다.첫돌이 갓 지나고 웅얼웅얼 토막말을 배울 시기, 매서운 겨울을 병치레로 넘긴 동생은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맞았어도 낫기는커녕 더 시들어갔다. 숨 탄 것의 몸이 저토록 깡마를 수 있다는 걸 난 어린 나이에 실제로 보았다.지금 생각하니 아기의 병은 폐렴 비슷했지 싶은데 떠돌이 약장수한테 보리쌀 퍼주고 산 알약 몇 봉지로 고치려 한 건 그놈의 원수 같은 가난 때문이었으리. 가난은 귀신보다도 차라리 모질고 독했다. 아니 선한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다.엄마가 가슴쥐엄해서 훑어 짜낸 젖에 가루약 뭉갠 숟갈을 들이밀면 두어 개 난 앞니 옹다물며 투레질로 쏟아버리곤 하여 볼기가 붉도록 맞고 나서야 제풀에 지친 듯 꼴깍꼴깍 목구멍으로 넘기며 아기는 시간과의 겨룸하듯 시들어갔다.동생이 우리 곁에서 자꾸만 멀어져간다는 걸 비록 열두 살의 나이지만 난 예감하고 있었다. 본능처럼 느낌이 왔다. 이미 잃기로 작심한 것으로부터 정을 떼는 엄마가, 아버지가, 모든 어른들이 원망스러웠다. 남은 자식들 목숨들이나 잘 챙기겠다는 욕심인가. 아니면 맡겨진 부모 책무 다하기가 그토록 힘에 버겁단 말인가.그렇게 밤새우다시피 하길 여러 날. 한밤중이었다. 잠결에 난 엄마의 흐느낌을 들었다. 아기가 실낱 끝만큼 남았던 숨을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어머닌 우릴 모두 깨워 웃방으로 쫓았고 제 베개 부피도 되질 않게 살집 없는 아기를 입었던 옷 그대로, 깨끗한 소창 기저귀에 둘둘 말아서 문 밖으로 내놓았다."올핸 동남쪽이 안 막혔대요."온전치 않은 몸을 추슬러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 뒤에다 대고 엄마가 이미 마음 각오하고 있었던 듯 목쉰 소리를 내셨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식의 마지막 묻힐 방향이나 정해주는 것이었다.짧게 살아온 동안 가장 길고 심란한 밤을 보낸 새벽, 잠이고 뭐고 다 틀린 채, 오줌 누러 마당으로 나온 난 그만 눈을 감기 전까지는 절대 보지 말았어야할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골빼기산자락에서 삽을 메고 내려오는 아버지 모습이 눈에 띈 것이다. 산기슭을 휘감으며 안개가 밀려가고 메밀밭 사이를 지름길 삼아 내려온 아버지의 이슬 젖은 바짓가랑이엔 메밀꽃들이 잔뜩 묻어있었다.난 사립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아버지를 다 지켜보았지만 산발치 어딘가에 동생이 묻힌 사실을 아무에게 말하지 못했다. 영원히 밝혀지면 안 될 비밀 같았다.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겨우 제 피붙이들 얼굴도 못 익힌 채 간 아이한테 마지막으로 깨끗한 옷도 못 입혀 보낸 죄책 때문인지 어머닌 며칠이나 그 시간 되면 목울음을 삭였다.다음해 그맘때, 한살 더 먹었대서인지 그렇게 동생이 보고 싶을 수가 없었다. 이승이랍시고 태어났다가 제 핏줄들 얼굴도 못 익히고 떠난 우리 막내, 마지막 떠나면서도 변변한 입성 하나 못 갖춘 채 슬프고 한 많은 길을 떠난 아이. 아버지를 제외한 식구 누구한테도 묻힌 자리조차 알려지지 않는 불쌍한 동생.작년에 이어 싸리꽃 핀 산자락을 찾아갔다. 하지만, 곧바로 올라와서 확인해 두어야 했을 것을... 벌써 일 년이 흘렀대서 동생 묻힌 자리를 알 수는 없었다. 누군가 몰래 만든 흙더미가 보였지만 동생이 묻혀있을 곳은 끝내 어림되지 않았다. 가족들 대신 애총비알을 지켜온 꽃무더기들이 어린 넋을 위로해주고 있을 뿐이었다.난 산꽃들에게 동생을 맡겨두고 훌훌 내려왔다. 아버지처럼 메밀밭 중간을 타고 오질 않았다. 훤히 먼동이 터오자 사람들 눈에 안 띄려고 밭 중간 지름길을 절룩거리며 서둘러 내려온 아버지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뒤 난 그쪽 산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막내를 버리고 나서 더 달라진 엄만 자식들의 짧은 배꼬리를 채워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4남매라 만만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원두막 정경》여름 방학이다. 방학이래서가 아니라 중학교 입학한 금옥이 누나는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쉰다. 남들한테 드러낼 수 없는 병, 몸이 창백하고 자꾸 마르며 늘 바튼 기침을 달고 산다.그럼에도 누나 집에서는 딸 병을 고치는데 별다른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 같은 병으로 골골거리다가 일찍 세상 떠난 아버지가 그나마 아들들보다 딸한테 물려놓은 게 다행이란 생각일까. 그 어머니나 오빠들이 틈틈이 잡아들인 지네를 말렸다가 가루 내어 먹이는 눈치였지만 누나는 그걸 죽기보다 싫다고 안 먹으려 해서 허구한 날 온갖 악다구니가 울타리를 넘어왔다.엄마는 그런 금옥이와 가까이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못된 병 옮으면 큰일이라는 거였다. 고칠 수도 없는 평생 고질병이라 했다. 누나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걸 내놓고 꺼렸고, 음식을 나눠먹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누나는 그렇게 점점 외톨이가 되어갔다. 읍내에 다방을 차려 나간 큰 오라비에 이어 작은 오빠도 군대에 가서 홀어머니와 둘이 지내는 금옥이. 하지만 나로서야 이제껏 친동생 이상으로 잘 대해주던 누나를 어떻게 멀리 하는가.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럴수록 난 누나한테 점점 정이 갔다.난 엄마를 찾으려고 '범골'로 가는 중이었다. 그 중간에 금옥이네 원두막이 있다. 산날개에 가려 집에선 잘 보이질 않는데 누나는 혼자 지붕 낮은 원두막을 지키고 있었다."용아, 어디 가?"누나는 언제나 웃음이 고왔다. 말보다 웃음이 늘 먼저였다. 난 주위부터 살폈다. 남한테든, 식구들 눈에든 들킬까 해서다."엄마 찾으러.""땀 좀 식히고 가라 얘. 날이 워낙 덥다."난 앙상한 사다리를 밟고 원두막 위로 올라갔다. 밭으로 들어간 누나가 큰 참외 하나를 따와서는 칼로 깎아 내게 건네주었다. 단내가 났다. 그 향기가 묘약처럼 더 침을 돋우었다. 쓴맛 가시지 않은 꼭지까지 알뜰히 씹어 먹고 나자 누나가 말했다."엄마 범골 밭에 가셨니?"난 고개를 끄덕였다."큰일 났다. 거기 호랑이 나올 텐데.""무슨 호랑이?""너 왜 거기가 범골인지 모르지? 옛날에... 갓 시집온 새색시가 말리는 시어머니 몰래 거기로 곤드레나물을 뜯으러 갔대. 그러다 벽장바우 밑에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한테 물려죽었지. 호랑이가 혓바닥으로 싹싹 핥아 왼쪽 가르마를 타서는 머리만 바위 위에 달랑 올려놓았더란다. 마을사람들이 가서 보니까 그 머리랑 분홍저고리만 남았더래. 그걸 화장해주고 귀신이 못 빠져 나오도록 시루를 엎어놓았어. 그때부터 거기를 범골이라고 부르는 거란다. 어때. 무섭지? 어흥!"무섭긴, 거기 가야 되는 나한테 무서움을 태우려는 장난이지만, 내겐 치켜 뜬 금옥이 큰 눈이 우스워 보일 뿐이다. 숱하게 듣고 자라 다 아는 전설인 걸. 그 호랑이가 밤마다 새댁귀신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문구멍으로 들여다본다는 얘기를 들은 날 밤엔 오금이 저려 바깥에도 나오질 못했었다.땀이 들어가자 땡볕에 나가기 싫어지고, 마냥 앉아있자니 졸음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그대로 쓰러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껴든 햇발 견디지 못해 눈을 뜨자 누나도 곁에 잠들어 있었다. 참외 냄새는 아까보다 더 진하고 독했다. 좀 뒤에 난 그 냄새가 금옥이 누나 가슴에다 난다고 생각했다. 몰래 코를 바짝 대고 맡아보았다.그랬다. 금옥이 누나 가슴은 잘 익은 참외였다. 있으나마나한 작은 꼭지가 앙증스러웠다. 언젠가 장마 물에 나를 업고 건너며 생긴 발등의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문득 눈물이 솟았다. 불쌍한 금옥이 누나. 무슨 병을 지녔는지 모르나 핏기 없이 앙상한 누나는 늘 저렇게 홀로 잠들기 일쑤다. 까칠한 모습이 안쓰러워 난 슬그머니 원두막을 내려왔다. 《대목장날》추석명절 준비를 위해 장보러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조상님 제사나 명절이 다가오면 맏이인 나를 꼭 데리고 가신다. 시오리 산굽이 길을 걸어서 장터에 가면 사탕 한 알이라도 입에 들어오니 마음이 설레지만, 걸을 때마다 뒤축 갈라진 고무신이 홀랑홀랑 벗겨져서 짜증이 난다.지체장애로 걸음이 불편하여 많은 짐을 지지 못하는 아버지가 어린 나를 길동무 삼으려고 데려가는 건 아니다. 내 손엔 됫병이 들려 있다. 명절 앞뒤로 여러 날을 방은 물론 부엌과 마루에 불을 켜놔야 되고 우물길 오갈 때 발등 밝힐 남포까지 챙겨야 되니 석유기름을 넉넉히 준비해야 한다. 질긴 닥나무껍질로 엮은 그물망에 담긴 석윳병은 팔이 빠질 듯이 묵직하다.여기부터는 소풍리가 아니라 가담리 땅이다. 그나마 읍내 가까워 여기까진 신작로가 닿았다. 앞쪽에서 뿌연 먼지 일으키며 지프차 한 대가 달려온다. 우린 길가 멀리 떨어졌다. 흙먼지 뒤집어쓰기도 싫지만 차를 비껴 보내기 위해서다.그런데 차는 그냥 지나가질 않고 우리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 명의 미군이 내려서더니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얘기를 지껄이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말만 들었지 외국 사람을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이쪽저쪽 방향을 바꿔가며 사진 여러 장을 찍은 다음 주머니에서 서양과자봉지를 건네주곤 손을 흔들며 갔다. 그나마 가장 깨끗한 옷매무새랍시고 차려서 나온 우리 부자였지만 그네들에겐 신기한 구경거리인가보다.삼방갈림길에 이르자 곡식 중간수집상이 먹이를 노리는 사마귀처럼 기다리다가 다가온다. 아직 지나간 사람이 별로 없는지 빈 마대만 수북이 쌓였다."어이구- 처사둔 양반을 만나니 돌아가신 조상님보다 반갑소. 킁킁."이쪽근방 다섯 장터를 돌며 얼굴 익히다 보니 되든 말든 아무 촌수나 갖다 붙이는데다 말끝마다 킁킁거리는 버릇이 있어 별명이 '킁킁이 거간꾼'이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상봉이기에 무뚝뚝한 울 아버지."명색이 대목인데 이렇게 장꾼 구경 힘들어서야...킁킁."이미 아버지 지게 위의 고추포대는 사내 손아귀에 낚였다. 산적두목 같은 외모, 세수도 안했는지 꾀죄죄한 얼굴의 구레나룻이 흡사 묵밭에 우거진 잡초 같다."고추구먼. 바짝 말렸수?""맏물만 따로 챙겨놨던 거라오. 값이 꽤 뛰었다던데?""킁킁. 먼저 장시세나 똑같애.""농사철까지 먹을라고 애끼던 걸 들고 나온 거니 잘 쳐줘야 팔거래유.""거참, 멧부엉이 같은 답답한 소리 마슈. 대목장 본다고 다들 한꺼번에 들고 나오니 올라갈 리가 있나.""삼대 거짓말쟁이인 장사꾼 말을 누가 믿어.""아따, 조선시대 적부터 단골인데 고추 몇 근 값 속이겠소. 보자. 열닷 근에서 좀 빠지네. 킁킁킁."저울을 내려놓으며 큰 인심 쓰듯 자기 마대에다 쏟아 붓는다."뭔 소리요. 열여섯 근도 넉넉하게 달았는데. 여러 말 할램 도로 내주쇼."넘어져도 손 짚으면 닿을 만큼 가깝게 남은 장터까지 끌고 가면 몇 푼이나마 더 받는다는 걸 아는 아버지가, 마치 산적처럼 길목을 지키는 장사꾼 손을 못 벗어난 게 아쉬워서 자루를 꽉 붙잡고 마지막 싸움삼아 버텨본다."아, 알았어요. 점잖은 사돈님 꺼니 잘 쳐줄 게.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더 주더란 소문내면 안 되우."손때 찌든 전대를 뒤져 셈을 서두르는 능구렁이 사내."만약 장시세보다 덜 왔음 이따 되받아갈 줄 각오하고 있으쇼."아버지가 꼬투리 삼을 말뚝 하나 박아두지만 늘 그렇게 끝나는 얘기다. 곡식장수 눈은 벌써 멀리 오고 있는 다른 장꾼의 짐덩어리를 노리고 있다.명절을 코앞에 둔 장마당은 살 사람 반, 팔 사람 반이다. 아버지가 어전 골목으로 들어선다. 늘 정해놓고 들르는 데라 단골대접 해주는 생선가게로 발길 향한다."조기 한 두름, 도미랑 민어도 몇 마리 줘요. 제상에 올릴 거니 젤 나은 걸로."크고 좋은 걸 정성껏 고르신다. 싸리나무 가지에 키를 맞춰 꿰어진 북어 한 쾌도 집었다. 조상님 제상에 올릴 물건이라 하여 값을 깎지도 않는다. 곡식 거간꾼과는 끝전 한 푼 갖고 다투었지만 조상님께 차려 올릴 제수의 가격을 깎으려고 입씨름하는 것은 불효라는 것을 어린 나도 새겨 배운다.과일은 무게 나가니 나중에 사기로 하고 더 살 것과 쌈지의 돈을 아귀 맞춰본 아버지는 근처 신발가게로 가서 내 발에 넉넉한 칫수의 검정고무신을 한 켤레 사주신다. 헌 고무신은 보따리 틈에 끼운다. 모았다가 나중에라도 고물장수한테 빨래비누라도 바꾸게 챙겨오지 왜 버리고 왔냐는 엄마 군소리를 예상했을 것이다. 장을 다보고서야 노점의 찐빵 몇 개를 사서 내손에 쥐어주신다."너 다 먹어라. 난 아침 먹은 속이 거북해서 안 들어간다."한나절 기울도록 따라다닌 나는 아버지 생각은 않고 혼자 다 먹어치웠다. 아버지는 장에 갈 때보다 더 무거운 제수 거리를 지게에 지고, 난 새끼줄로 질빵을 만들어서 가벼운 것들을 걸머맨 채 온다. 몸은 고생스럽지만 새 고무신 신은 걸음은 날아가듯이 가벼웠다. 《사격장에 핀 들국화》학교 공부 마치고 돌아오는 중간쯤에서부터 난 오늘 사격을 한다는 걸 알았다. 콩 볶듯 하는 총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총소리만 들어도 사격하는 총의 종류까지 가려내는 나다. 마음이 들떠 걸음을 빨리 했다.아니나 다를까. 빨간 깃발을 든 군인이 길을 막았고 이미 여러 사람들이 발이 묶인 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격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군인들은 여기 자주 와서 바위벼랑 쪽으로 사격 연습을 한다. 한바탕 쏘아대고 나면 길 반대쪽 경계병에게서 신호가 온다. 사격 끝났으니 사람을 통과시키라는 뜻이고 그제서야 길 양쪽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간다. 그중의 여러 사람들은 그냥 눌러앉아 있다. 어른이든 아이든 인근 동네에서 총소릴 듣고 와 기다리는 중이다.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떠나자 사격장 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나도 내달린다.총 쏘는 사대를 먼저 차지해 맨발을 벗고 잔디 풀을 자근자근 밟아나간다. 발에 탄피가 밟힌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순간의 희열을 누가 알까. 이걸 찾지 못해 호된 기합을 받고 돌아간 군인들 사정이야 어떻든 나한텐 아주 소중한 돈벌이다.탄피부터 주운 다음 표적지 쪽으로 간다. 사격 끝내놓은 바위 절벽 밑에는 마치 타작 끝난 마당처럼 탄환과 납 조각들이 널렸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주운 다음엔 흙을 파서 땅속에 묻힌 것들을 찾아낸다.동전 한 닢 구경하기 힘든 산골에서 사격장은 아주 고마운 곳이다. 갈포벽지공장으로 보낼 칡 줄기를 끊어다가 파는 건 여름 잠깐이지만 사격장에서는 사철 내내 놋쇠를 주워 고물상에 팔아서 용돈을 벌수가 있다.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챙겨 다니는 헝겊 주머니를 해가 기울기 전에 꽉 채워야 된다.갑자기, 멀리서 요란한 폭음이 났고 난 그쪽으로 했다. 사람들의 아우성소리와 함께 우왕좌왕하더니 한 소녀가 아이를 업고 울면서 내려왔다. 등에 업힌 아이는 피를 흘린 채 축 늘어지고, 낡은 치마저고리의 누나는 사색이 되어 동생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잠깐 봤을망정 우리 학교에 다니다 그만둔 남매였다. 남자 아이의 피 흐르는 맨발은 흙투성이다. 애들 부모는 사격장에서 주워온 포탄을 만지다 터지는 바람에 함께 돌아가셨다고 했었다. 갑자기 고아가 된 남매는 살길이 없었고 어른들이 하는 걸 본 대로 사격장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하긴 어린 나이에 보고배운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 먹고 살려면 방법이 없었을 거다.그 아이가 변변한 치료도 못 받아보고 짧은 인생을 접었다는 소문을, 얼마 뒤에 아이가 사는 동네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다. 한동안 지난 다음에 바라보니 사격장의 바위벼랑엔 들국화가 곱게 피어있었다. 《생명의 봄날》질긴 겨울 끝나 6학년에 올라갔어도 학교 안 나가는지 여러 날 째다. 오늘부터 엄마랑 사방공사 일을 나가기로 했었다. 삽과 괭이 하나씩 챙겨 마을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지난 해 폭우 때 사태를 만난 산비탈을 찾아 계단을 만들고, 돌로 축대를 쌓고, 떼를 떠다 입히고, 뿌리가 빨리 퍼지는 오리나무나 아카시아를 심는 일이다.사흘 해야 밀가루 한 포를 준댔으니 둘이 하면 곱절의 양식이 생기게 된다. 외국원조구호식량을 그런 방법으로 분배해준다. 사방공사는 동네사람끼리의 자치 울력이나 다름없어서 입으로 감독하는 사람, 돌장승처럼 서있기 일삼는 게으름뱅이, 그리고 나처럼 절반 일꾼 구실도 못하거나 이름만 걸러 나온 상노인을 빼면 젊고 바지런한 알짜 일꾼 몇 사람이 일을 주동해나가기 마련이다.어른들 뒤에서 그럭저럭 하다 점심때가 됐다. 배꼬리 짧은 사람들은 펑퍼짐한 델 먼저 골라 각자 챙겨온 밥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슬그머니 계곡으로 내려가는 엄마를 나도 주저주저 뒤따랐다."어디들 가? 점심 안 먹구.""물 먼저 먹고 오게요."우리가 점심 안 가져 온 줄은 대부분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 눈길이 따라오지 않을 가파른 기슭을 기어오르며 엄마는 나물을 뜯는다. 행주치마를 걷어 올려 묶은 옷자락에다 부지런히 산나물을 뜯어 담는다. 나도 함께 뜯는다.나물은 지천이다. 워낙 흔하기도 하지만 내가 웬만한 여자들 못잖게 나물을 잘 안다. 원추리, 곰취, 어아리, 곤드레나물...이른 봄마다 새 풋나물들은 죽음 직전의 우리 식구들 목숨을 푸릇이 소생시켜 주었고 그래서 난 먹어도 되는 풀인지 아닌지를 잘 구별해내는 것이다.손 가득 움큼에 찰 때마다 엄마 치마폭에 담았다. 다시 한 줌이 되면 또 담는다. 나물무게에 휘청거리는 엄마를 따라 나도 일할 자리로 돌아왔다. 점심 먹은 사람들은 빈 그릇을 거둔 뒤고 더러는 양지바탕에 누워 토막잠 코골이를 하고 있었다."점심도 안 먹고 어딜 갔었대? 워낙 적게 가져온 데다 입이 여럿이라 골고루 안 돌아가네. 맛이나 보우."이장댁이 감자떡 두 개를 남겨놨다가 우리 모자의 몫을 나눠주었다."다 잡숫지 그랬어요. 배부른데."쑥스럽게 건네받는 울 엄마, 나는 받아든 떡을 입에 통째로 넣고 깨물었다. 턱뼈가 마치 녹슨 가위처럼 뻑뻑하고 침샘은 터질 것 같았다. 이틀 만에 먹이다운 먹을 걸 입에 넣어본 셈이다. 굶는 것도 처음 한두 끼가 힘들지 그 고비가 넘으면 아예 감각을 모른다. 다 먹길 기다렸는지 엄마가 손에 움켜쥔 떡을 슬쩍 건넸다."배 아파서 못 먹겠다. 너 다 먹어라."난 받아든 떡 귀퉁이를 조금 떼어먹고 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멀리 도랑둑의 영국이를 보았다. 나랑 같은 학년이지만 걔는 읍내 학교로 전학을 가서 공부하다 일요일이라고 집에 온 모양이다. 난 반가운 마음에 그리로 갔다. 중학교 합격하는 조건으로 미리 사준 염소를 풀 뜯기는 중이었다."영국아, 이리와 봐."난 주머니의 떡을 꺼냈다. 이미 딱딱하게 굳고 오후 내내 주머니 먼지가 붙은걸 대충 손톱으로 뜯어내서 영국이한테 내밀었다. 동생들 주려고 남겨왔지만 지난번 한창 배곯을 때 친척집에서 얻어왔다는 고사떡을 나눠준 생각이 나서였다. 그날, 얼마나 고마웠던지."이거 먹어."받아서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영국이 얼굴엔 전혀 고마운 티가 나질 않는다."야 임마, 이런 걸 어떻게 사람이 먹냐. 내 염소도 안 먹을 거다. 볼래?"영국이가 떡을 염소 입에다 물려주었다. 과연 염소는 코를 한번 실룩인 다음 캑- 뱉어내는 거였다. 난 둔덕을 어떻게 넘어왔는지 모른다. 길은 마냥 좁아서 발이 자꾸만 수펑으로 헛디뎌졌다.'영국아. 넌 너무했어.'염소도 안 먹고 뱉은 마른 떡쪼가리를 슬쩍 주워들고 온 나는 뒤를 돌아보며 꼬옥꼬옥 씹었다. 이제껏 숱한 굶주림의 고비에 맞서온 터였지만 그 가난 때문에 눈물 나긴 이번이 처음이었다.엄마한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 집은 왜 남보다 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 소유라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왜 떠나질 못하는지도. 엄만 풋나물을 삶는 중이었다. 이미 다 데쳐서 찬물로 헹궈 맷방석 골고루 펴 널고 있었다. 아직은 묵나물 하기에 이른 철이지만 엄마는 돌아올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그 모습을 보고나서 난 이제까지 벼른 모든 물음들을 꿀꺽 삼켰다. 따로 물을 필요가 없었다. 눈앞의 모습이 가장 확실한 대답일 테니.미루던 끝에 나온 밀가루 몇 포대나마 하루라도 늘려먹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수제비, 칼국수, 쑥버무리... 빵을 해먹으면 하나라도 더 집어먹게 되어 헤프니 웬만해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엄마는 밀가루를 팔아서 더 싼 것을 사다 오래먹어야 한다지만 흉년 보리 겻떡도 흔하면 싸다했듯이 서로 팔겠다고 한꺼번에 장에 내가니 제값을 받기 어렵다."마음을 잘 쓰면 인왕산 호랑이하고도 사귄다더니 별일이 다 있네."밀가루를 바꾸러 장에 나갔다 그냥 가져온 엄마가 요즘 들어 가장 환한 얼굴로 묻지도 않는 말을 꺼내셨다."우시장 앞에 막국수집이 있잖니. 거기에 밀가루를 팔려고 들어갔더니만 글쎄 그러지 말고 찐빵장사를 하라는 구먼. 생가루 그냥 파는 것보다 몇 곱절 이문이 있대. 자기네 가게 앞에 자리를 내준다니 장날만이라도 해봐야겠다."엄마는 마음이 들떠 붉은 팥을 삶아 소를 만들고 밀가루 반죽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랫목에 이불 씌워둔 반죽은 아무리 기다려도 부풀질 않는 것이다.깊은 밤, 엄마는 실패했다는 걸 느꼈는지 식구들이라도 먹으려고 솥에다 쪘다. 금방 꺼내 뜨거우니 입에 조금 떼어 씹었다. 그러나 이건 찐빵이 아니었다. 역겹고 쓴 맛. 엄마와 동생이 돌아가며 혀에 댔지만 모두 얼굴을 찌푸리며 뱉어냈다. 한참만에야 이유를 알았다. 글씨를 모르는 엄마가 소다로 잘못 알고서 지난여름에 쓰다 남은 디디티 농약을 넣은 것이다.디디티는 농사에만 아니고 사람이나 짐승들한테 꾄 벌레도 잡는 약이라 웬만한 집엔 다 있다. 다행히 약이 조금만 들어갔고 빵을 많이 먹지 않아서 사고는 나질 않았다. 아까운 찐빵은 먹질 못하고 퇴비장 깊이 묻었다. 남의 짐승들이라도 파내 먹으면 안 되니 나는 며칠을 두고 자주 둘러보았다. 《풋살구 향기》학교 마치고 개울 건너 샛길을 올라오면서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 뒷모습이 금옥이라는 걸 알았다. 난 자치걸음으로 열심히 따라잡았다."누나, 어디 갔다 와?"깜짝 놀라 돌아보는 금옥의 얼굴이 빙그레 웃지만 많이 상기되었다. 보건소에 가서 약을 타 올 거란 생각이 퍼뜩 든다."어, 미래 음악가님을 여기서 만나네.""창피하게, 그거 무겁지?"난 누나 손에 들린 큼지막한 보따리를 뺏어들었다."이 먼 길을 매일 오가자니 고생되겠다."힘에 부친 누나가 다릴 쉬려는지 고개목의 쉼터에 앉는다. 미루나무 그늘이 넓고 평바위가 있어 쉬기 좋은 자리에 나도 따라 앉았다. 전보다 더 핼쑥한 금옥이 얼굴. 거머리 힘줄 까맣게 돋은 손으로 길가 애기똥풀을 툭툭 뜯는 걸 보며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꺾인 자리에선 금세 애깃똥 같은 노랑물이 배어났다. 고운 색깔만 보고 무심코 입에 가져다댔던 금옥이는 죽을상이 되어 침을 뱉기 시작했다. 바튼 기침 할딱이며 한참을. 난 거짓인가 하여 덩달아 입에 댔다. 아 정말 지독하게도 썼다. 미소를 지워버린 누나가 얼른 말을 돌렸다."용아. 오늘 우리 집에 와서 안 잘래?""왜?""엄마가 조카 돌상 차린다고 오빠네 집에 가서 집이 비어.""같이 가지 그랬어.""응, 내가 안 간댔지. 혼자 있을램 무서울 텐데 어떡하냐. 올 거지?"안간 게 아니라 안 데리고 갔을 게다. 금옥이 누나는 마치 못 쓰는 물건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식구들한테도 저렇게 내팽겨지기 일쑤다."숙제도 할 겸 웬만하면 와라. 기다릴 게."저녁을 먹고 나서 누나네로 향했다. 엄마가 알면 큰일이라 눈치껏 집을 나섰다. 약하고 겁이 많은 누나를 혼자 있게 하면 안 된다. 방에 들어서자 반색을 한 누나가 기름 아끼느라 낮췄던 등잔 심지를 훌쩍 돋우었다. 방안이 좀 밝아졌다.내심 기다렸다는 듯 보구미에 챙겨두었던 살구를 건네준다. 아직 신맛 가시지 않았어도 향기 머금은 몇 알씩 나눠먹은 다음 옆구리에 끼고 간 숙제거리를 펼쳐놓았다. 다가온 금옥이가 거들어주겠다고 몇 문제 참견하더니 곧 포기하는 눈치다. 말이야 2년 앞섰지만 학교에 다니다 마다해서 나보다 나을게 없다. 숙제를 해치우고 나니 어색할 만큼의 시간이 남았다. 듣기 좋은 가곡을 불러보라기에 몇 번 망설이다가 '매기의 추억'을 옥타브 낮춰 흥얼거렸다."몇 곡 더 불러봐. 네가 있어서 안심되고 잔잔한 노래 들으니까 저절로 눈이 감기네. 나 잠들거든 너도 불 끄고 자라."누나가 돌아누우며 말했고 '오, 수잔나'를 중간쯤 부르다가 멈추었다. 금세 잠든 누나. 난 내 몫으로 펴준 옥양목 호청을 끌어다 덮었다. 쉽게 잠들지 않았다. 조용한 시간에 바로 옆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숨소리. 그건 다른 사람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증명이다. 내가 살아있고 또 누군가 내 곁에 있음을 뜻한다.몸을 뒤척인 누나의 작은 가슴이 바로 들어왔다. 속옷자락에 가려졌다가 살짝 흘러나온 속살은 머리맡에 남겨둔 살구를 연상시켰다. 그 상큼한 내음까지 되살아났다. 언제 스러질지 모르기에 더 아쉽고 애잔한 풋향기...이상한 일이었다. 한 번도 그런 적 이 없었다. 몸에 야릇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르르 떨려오는 이 느낌은 무얼까. 누나가 갑자기 눈을 뜨면 고스란히 들켜버릴 것 같아 불을 껐다. 여느 때의 원수 잠들은 어디로 갔는지 머릿속이 점점 하얘진다. 이러면 안 된다고 느끼면서도 나도 모르게 누나의 갈래머리에 손가락을 살짝 댔다. 아무런 반응도 없다. 난 손끝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나쁜 짓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마치 마당가에 갓 피어난 봉숭아꽃을 만져보고 싶은 호기심처럼, 다만 그랬다. 깊이 잠들었는지 미동도 않는 누나. 약한 몸으로 읍내 다녀오느라 피곤했나보다.밤엔 모든 게 자고 있어 조용하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산골의 많은 것들은 밤을 꼬박 새운다. 아니, 밤에 더 요란하다. 철 이른 귀뚜라미, 온갖 풀벌레와 밤새들, 나무나 풀잎에 몰아치는 바람, 간간이 짐승 우는 소리도 났다. 당산나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지난번 고사 때 무당이 치던 북소리도 들렸다. 누나 혼자라면 이 밤이 정말 무서웠을 거였다.가위에 눌리거나 나쁜 꿈을 꾸는 것일까. 누나가 나뭇잎에서 떨어진 애벌레처럼 동그르르 몸을 오그렸다. 깜짝 놀란 난 누나 머릿결에서 얼른 손을 뗐다. 누나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말했다."용아. 너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지?"...""다음부턴 용서 안할 거야. 어서 잠자."아, 그런 게 아니었는데. 누나가 오해하고 있다. 더 못된 짓이라도 했을 거라 의심하는 것 같다. 머리를 방바닥에 내리박아서라도 없어져버리고 싶었다. 창호지가 밝지만 아마 싹둑 달빛일 거였다. 부끄러워서 다시는 누나 얼굴을 똑바로 보질 못하리. 난 슬그머니 일어났다. 환해지기 전에 어서 도망쳐야 한다. 걸린 문고리를 따는데 누나가 말했다."용아. 너 빨리 자게 하려고 일부러 화냈어. 알지? 조금만 있으면 날이 샐 거야. 그때까지 좀 있어줘."그렇다. 누나 홀로 남겨두고 가는 건 더욱 못할 일이었다. 난 미닫이만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먼동이 터온다. 문을 열고 집으로 내달렸다. 비단버선을 신고 온 듯, 소리 없는 안개가 몽땅 차지한 새벽. 그날 낮에 우연히 마주친 누나는 여느 때처럼 밝고 싹싹한 모습이었고 바람결에 이슬 털어낸 버들잎처럼 싱그러웠다. 《개여울과 섶다리》올해 역시 앞, 뒷방 문짝에 창호지부터 새로 바른 엄마랑 곡식이삭을 주우러 나왔다. 날 더 춥기 전에 한 톨이라도 더 모아 들여놔야 겨울고생을 덜 하게 된다.가을엔 놀아도 들에 나가 놀라고 했고, 가을밭과 친정에 가면 쥐고 올 게 있다고 엄마가 말했지만 너무 늦은 철이라 들판은 텅 비었다. 손 부지런한 사람들에 이어, 곧 삭아버릴 가을볕이 아쉬운 게으름뱅이들까지 거쳐 간 뒤에다, 쥐와 새들조차 제 몫은 다 챙겨갔으니 흘린 이삭 하나 변변히 남았을 리 없다.일손 꼼꼼한 해숙이네 '세모텡이밭'을 절반이나 뒤졌어도 고구마 몇 개, 성이 안차서 집으로 내려오는데 양쪽마을 사람들이 놓다가 가을장마로 중단된 큰개울의 지네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틀 전에 금옥네는 저 개울을 맨발로 건너 떠났다.귀에서 입으로, 뜻밖의 소문이 돈 건 첫서리 찬바람 무렵이었다. 금옥이 누나네가 이사를 간단다. 큰 오빠가 읍내에 차린 다방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땅을 다 팔아도 빚이 남는다고 이웃들이 수군거렸다. 잘 돼서 떠나는 거라면 좀 나으련만 이렇게 허무한 이별을 맞다니.누난 병을 거의 이겨내고 있었다. 나날이 몸이 좋아져 뽀얀 얼굴과 훌쩍 큰 키까지 한창 피어난다는 칭찬이 동네 어른들은 물론 엄마 입에서도 자주 나왔다. 그런 말이 돈대서만 아니라 내 눈에도 엄청 예뻐 보였다. 얼굴 마주칠 때마다 자꾸만 쑥스러워지고, 그렇다고 생각해선지 누나 역시 수줍음 타고 볼을 붉혔었다.마을사람들이 줄줄이 짊어진 이삿짐 맨 뒤를 따라 우리 마당을 지나가던 누나가 걸음 멈추며 말했다."용아, 잘.. 지내."엉엉 운 것이 아니고 눈물 펑펑 쏟은 것도 아니었다. 겉에 비치진 않지만 말 끝나면 바로 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이었다. 여길 떠나고 싶다고 번번이 하소연하더니 막상 떠나면서는 왜 저렇게 슬퍼할까.누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굴뚝께로 갔다. 거긴 아무도 볼 사람 없는, 가장 은밀한 장소였다. 서로 마주볼 땐 담담했었지만 외레 내게서 더 많은 눈물이 쏟아지다니. 마치 동네 사람이 한꺼번에 왕창 떠난 듯 휑한 감정에 눈물이 솟았고 그치질 않았다. 어차피 우리가 먼저 마을을 뜨든, 누나가 떠나든, 곧 헤어질 거란 질긴 예감 끝이어서 서러움은 더했다.살얼음 끼기 직전의, 늦가을과 겹친 초겨울이라 냇물 몹시 차가운 계절. 내일은 엄마랑 섶다리 놓는 울력에 다시 나가야 된다. 누나가 황새종아리 내놓고 건너간 개울 위, 중간이 끊긴 채 걸려 있는 지네발다리를 완성해야 학교 다니기도 편하다.(바보 누나, 며칠만 더 있다 가든가. 그럼 섶다리로 건널 수 있었을 거 아냐. 나 때문에 흉터가 생긴 맨발, 엄청 시렸지?) 《산불, 그 후》불길을 처음 알려준 건 사람이 아닌 동물들이다. 순하기로는 세상에 둘도 없을 검둥이가 갑자기 짖어대고, 제 둥지를 찾아 깃을 내리기 시작한 백로들이 요란스레 우짖었다.심상치 않은 걸 짐직한 엄마가 문을 열어보더니 비명에 가까운 소릴 지른다. 덜컥 놀란 나도 덩달아 밖으로 나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시커먼 연기가 먼저 산등을 넘어오고 뒤따라 검붉은 불길이 기세를 올리며 산비탈을 휘덮어가고 있었다. 개밥바라기 무렵의 이른 저녁밥상을 채 거두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다.오래 묵은 숲이 타면서 내는 요란한 소리, 눈조차 뜰 수 없도록 매캐한 냄새, 온 하늘을 가득 덮으며 날아오르는 재티들, 모든 걸 다 녹일 듯이 닥쳐오는 뜨거운 열풍, 온 마을은 공포의 불도가니가 되어갔다. 집을 세는데 다섯 손가락이면 되는 작은 골짝 사람들이 모두 뛰어나와봤자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삽시간에 나무들을 삼킨 불은 산 밑에 바짝 붙여 지은 우리 집으로 옮겨 붙었다. 어떻게든 불길을 잡아보겠다고 물을 퍼 나르는 사이, 동네 복판에 있는 샘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전쟁 이후 가장 참혹한 재앙은 하필이면 가난하디 가난한 동네의 알량한 우리 살림마저 몽땅 살라버릴 모양이었다.공포의 밤을 지새우고서야 불길은 잡혔다. 아니, 잡힌 게 아니라 태울 걸 다 태우고 제풀에 꺼진 셈이다.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불끈 오른 돋을볕에 드러난 모습이 아주 낯설어 보인다. 드문드문 남은 주춧돌이 사람 살던 터라는 걸 알려주는 흉물스러운 집터에 이웃사람들의 도움으로 당장 몸만 누울 움막집이 급하게 지어졌다.우리 마을사람들은 화전을 일구기 때문에 다들 불을 잘 다루었다. 불을 겁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그런 오만과 방심이 불행의 빌미가 됐을지 모를 일이다. 밥밑콩 한 포기라도 더 심어먹을 욕심으로 밭두렁을 태우다 불을 냈다고 지목된 태호 할아버지가 잡혀가면서 동네는 폐촌되 듯 점점 뒤숭숭해졌다.여러 날이 흐르고 그 사이 밖엔 봄이 와 있었다. 불탄 민둥산에 올라갔다. 죽은 듯하던 산자락의 나무 그루터기에 작은 순이 돋고 있다. 그 밑 움푹한 그늘에서 개개비가 둥지를 지어 하얀 알을 품는 중이었다. 불기운에 데어 죽었을 줄 알았던 나무들도 난 꿋꿋하다는 듯이 여느 해보다 서둘러 잎을 틔웠다.엄만 키가 껑충하도록 철부지 짓만 골라하는 맏자식을 그냥 놔두지만 않을 눈치다."황토구뎅이에 가서 흙 좀 퍼오너라. 집 손질을 해야겠다."난 황토 구덩이로 간다. 다른 데와 달리 붉은 찰흙이 나오는 데다 온 동네사람들이 파가서 큼지막한 굴이 생긴 곳이다. 함지박 가득 퍼 담으니 무게도 만만치 않아 두어 번은 쉬어야 집에 닿는다.엄마가 흙에 물을 부어 고루 개서 곤죽을 만든다. 급하게 만드느라 엉성해보이던 아궁이와 부뚜막에 진흙을 덧바른다. 모자랄 것 같으니 더 퍼오라는 성화에 난 군말 없이 황토구덩이를 오간다.이번엔 바람벽 틈을 찾아 메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갔다 오라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부아가 솟는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큰 소쿠리 얹은 지게로 져 날라서 여러 번 왕복하는 생고생을 덜었을 것 아닌가.흙을 지게가득 넘치도록 듬뿍 퍼다 심술스레 부려 놓는다. 엄만 집을 한 바퀴 돌며, 황토반죽으로 틈새를 메우고 거친 덴 진흙물을 발랐다. 품 좀 들었대서 엉성하던 집이 훨씬 나아졌다. 남은 진흙이 아까워 구석구석 쥐구멍까지 다 찾아내 막은 엄마가 결심한 듯 조곤조곤 말했다."그동안 여러 번 망설였다마는 더 미룰 거 없이 이사를 가기로 작정했다. 다 니들을 위한 일이여. 옳은 결정인지야 나중에 판가름 날 테지만."희망 없고 암담한 나날들에 지친 부모님은 가족을 이끌고 이농 대열에 합류하였다. 우리 몫으로 가진 거라고 별로 없으니 작심하기 홀가분했을 것이다. 어차피 버려두고 갈 집인데도 엄마는 왜 꼼꼼히도 손질했을까.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고, 우리 대신 와서 살 그 누군가를 위해서였나.이삿짐 보따리 몇 개를 여섯 식구가 나누어 이고지고 나란히 섶다리를 건넜다. 지체장애로 가장역할 다하기 버거운 아버지와, 그 짐을 대신 져오던 엄마가 뒤를 돌아보며 눈물을 삭였지만 난 앞길만 내다보며 모진 발길을 옮겼다. 어딜 가든 여기보다 더 막다른 땅을 만나기야 하겠는가. 떠난 뒤 찾아오지 않는 금옥이 누나도 어디선가 만날 수 있으리. 꼭 잘 돼서 난 다시 돌아올 거다.지난 가을에 챙겨둔 호주머니 속의 추자 두 개가 걸을 때마다 달그락거렸다. 내 나이 열세 살이었고, 50여 년 객지살이 세월이 느린 강물처럼 흘러갔다. 《매듭 글》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그 땅을 잊지 못한다. 언젠가 떳떳이 돌아가야 하기에 죄를 지으면 안 된다.하지만, 그런 심정으로 살았다는 뜻이지 입바른 소리하는 나인들 그동안 크고 작은 허물이 왜 없었으랴. 나름 고달팠던 타향살이 접고서 노후 안식처로 삼으려는 듯한 몰염치도 선뜻 내키지 않거니와, 귀촌이든 귀농이 됐든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개인사정 앞에서 난 아직도 나그네일 뿐이다.몸이 갈 수 없다면 마음만이라도 돌아가서 풀어놓을 봇짐을 꾸리듯이, 이렇게나마 애증과 그리움을 찾아 떠난 기억회귀여행에 아직 미완인 마침표를 찍는다. (끝)

2019-08-08 18:14:46

옥숙희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미망 (未忘) /옥숙희

가슴에 총알처럼 깊이 박힌 옹이 하나가 있었다. 아무한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체증 같은 내 치부(恥部)였다. 뉘라서 일생에 상처 하나 없는 이가 있을까마는 배신에 의한 상흔은 한번 묻으면 지우는데 애를 먹는 송진하고 비슷해, 여태까지 난 사람에 대한 환상이 없다. 그래도 세월이 약이란 말은 허구가 아니었던지 활화산 같던 분노가 얼추 눅어졌지만 정적(靜寂)한 상태로 회복이 되려면 필경 '내가 누운 관 뚜껑에 떵떵 못질하는 날'이나 되어야 풀릴 미망(未忘)이다. 세월 따라 자연히 문리도 트이고, 늙음을 일러 쓸모없이 낡은 것이라기보다는점차 익어간다는 걸 의미한단 말이 적지 않은 위로와 공감으로 다가든다.언제 연륜의 더께는 이만치나 두터워졌는지 깨단하고 보니 이미 해질녘이다.팔팔하던 청춘은 어디로 가고, 정배기엔 어느 새 무서리가 희끗희끗 황혼이 완연하다. 강물에 뜬 풀잎같이 떠내려 온 한 생애라니, 덧없고 속절없기가 꿈인 양 허망하다.느닷없는 폭풍우에 번롱(翻弄)되는 난파선 같이 숱한 시간, 내 안에다 날 가둔 채 고투했던 나날들... '어느 방향에서 부는 바람인들 난파선에 역풍 아닌 것이 있을까'마는, 지금까지 살아있으므로 자신과의 치열했던 고락을 회억할 때마다 안타까운 아쉬움만 항하사(恒河沙)같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 속살속살 새살 돋는 조짐은 세월로부터 한 수 받은 가르침 중, 가장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인다. 덕분에 이제는 남 말 하듯 담담하게 내 이야기도 꺼내 보일 수가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한 생애를 두고 지향 하는바 이상을 추구하고 실현하다 간다. 개중엔 배우자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배신 사례도 없진 않지만 당최 그런 부도덕한 일 같은 건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려니 무심하였다. 헌데 일고의 가치를 두지 않았던 그 문제가 정작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나, 억장이 무너졌다. 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목숨 값 참되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다 가리라, 신망도 굳세었건만 한 어머니한테서 나온 내 동생과, 평생을 약속했던 남편과의 불륜이 내 원(願)을 무참하게 박살내고, 회복을 기대하기 난감한 상태로 영혼을 황폐화 시켜버렸다. 충격은 세기(世紀)적인 것이었고 상처 또한 치명적이었다.그 일을 통해 절실하게 느낀 것이 대저 사람의 인격은 그리 신뢰함직한 것이 못 되는구나, 하는 회의(會意)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속성을 새로운 측면에서 보게 된 성찰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여자와의 하룻밤 객기였다면 아마 불쾌해도 이미 엎질러진물이거니 체념하고 상응한 화풀이 정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허지만 남편이 상대한 여자가 천만뜻밖에도 내 동기간(同氣間)이고 보니 입을 열려 해도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어서 속으로만 전전긍긍 펄펄 뛰었다. 졸지에 벼락 맞은 것 같은 일이 얼마나 기막힌지 그 카오스(chaos)적인 충격은 내 정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상처와 좌절을 다스리기 위한 어떤 위로와 격려도 소용이 없었다. 오직 극기로써 배반의 욕됨을 다스려야 하는 번뇌는 시간이 자날수록 더 심화되고 증폭 되었다.내가 어른이 된 지금까지 배운 모국어를 총동원한대도 그 고통을 적절하게 형언키가 어렵다. 자존심은 언감생심, 수치스럽고 망신스럽다는 자괴감에 치어 한바탕 분풀이를 할 만한 용기는 싹을 내어보지도 못했다.'가벼운 고뇌는 큰소리로 외치지만 워낙 큰 고뇌는 침묵 한다' 던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나 상처도 인생의 일부라면 그 마저도 감수할 수 있어야 사람인 것을, 극렬하게 일어나는 분심에 꺼둘리어 애 터지게 살아야 할 명분을 잃 게 되자 종내 이런 치욕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어버리자는 작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생의 한 수를 도로 물리고 싶다는 고백이거나 탈 도덕을 지탄하는 항의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랑하면 늘 가슴에 푸른 신호등이 켜진다고 믿었던 내 어리석음의 극치에 절망한 것일 수도 있었다. 곧은 성정에 과부하가 걸리자 피폐해진 심사가 도망치듯 선택한 자구책이 음독이란 극 처방이었던 셈이다. 그런 결심을 하고 나자,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급선무가 내 사후 문제였다.D-데이(day)를 어느 날로 정하느냐, 하는 것도 관건이었지만 그보다는 당장 내가 없어지면 저 어린 6살, 4살짜리 자식들을 누가 돌보나, 기기 차고 막막하였다.'새 둥우리가 망가졌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알인들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낭패한 심사에 노심초사 궁구 해봐도 달리 이거다 싶은 묘안이 없다보니 암담하기가 캄캄한 밤바다에서 폭풍우와 사투하는 난파선이라 한들 보다 더할까.제일 좋은 방법으론 내배아파 낳은 자식을 어미인 내가 키우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무엇일까만 나는 이미 생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사람. 뒤에 남은 자식들의 충격이나 슬픔은 누가 달래고 최소화 할 수 있을지, 또 항구적인 대안은 무엇인지 답을 찾지 못해 고심참담하였다. 질정 없이 일어나는 번뇌 가운데서도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라면 자식에 대한 남편의 기본 인성과 부성애만은 썩 신뢰함직하다는 사실이었다. 허기사 짐승도 제 새끼는 함, 한다는데 아비 된 자가 어미 잃은 자식한테 어찌 무심할 수가 있으리.분명 내 몫까지 두 배로 잘 거두리란 믿음은 자신을 달래는데도 다소 효과적이었다.괘심하고 끔찍한 소행으로 치자면 뒤돌아볼 여지가 없는 일이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는 아이러니(irony)하게도 그들의 불륜 사실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졌다. 소행머리로 치자면 부처도 돌아앉을 패륜인데도, 기왕에 벌어진 일, 차라리 두 사람이 합쳤으면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는데, 솔직히 절박한 상황에서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내 희망사항이기도 하였다. 남이 아닌 이모니까 누구보다 잘 챙기고 거둘 것이란 생각이 저간의 허물을 싹 덮어버려 역설적이지만 그런 사념(思念) 자체가 위로이자 조금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죽어도 갈등 없이 눈을 감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그마저도 내 사후의 일이므로 가정(假定)이나마 그리 해볼 수가 있었던 것이지만 막심한 심로(心勞)에 그만한 위안도 없었기에 윤리적으로 과연 얼마나 타당한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아예 념(念)에도 없었다. 그 당시 남편은 국가 기술자격 1급 소지자로 무선 통신사였다. 그의 업무 특징은, 육상에 있는 무선 기지국과 해상을 운항하는 선박간의 통신을 운용하는 것이었다.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하고부터 지금은 오퍼레이터(operator)가 조작을 담당하겠지만, 그때는 순 아날로그 방식인 모르스(Morse)부호(점과 선을 이용, 문자나 기호를 나타내는 전신부호)를 사용, 통신사가 타전함으로써 쌍방 간의 송수신이 이루어지고 그로서만 소통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사단이 났던 무렵, 남편의 입지 정황은 외국적 선사(外國籍 船社)와 2년간의 계약 체결 중이었고, 종료 기간이 아직 1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공식 1개월 휴가를 보내던 참이었다. 한 달 휴가에 재 출국 일자까지는 기껏해야 20일 정도밖에 안 남았었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 늦어도 1주일 안에는 모든 걸 끝내야 일처리가 무난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특히 내 장례 뒷수습에 관해선 아이들을 위해서도 남편이 있는 편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란 계산을 한 것인데 그렇다면 일주일 안에는 실행에 옮겨야 무난할 일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잡아 일주일 정도밖에 없다는 생각은 사람을 무량으로 불안 초조, 절박하게 만들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고,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과 도덕적,윤리적인 측면에서 기본적인 책임이 따른다.내가 자살을 결심하리만치 큰 분에(憤恚)와 배신감에 절망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남편은, 항려(伉儷)가 지켜야 할 기본 원칙에 회생불능인 파울(foul play)을 범한 것이었다. 그 배신의 상처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던지 남편이 곧 우주였던 나한테는 사형 선고나 다를 바 없는 대참사였다. 끊임없는 회의와 자책 사이에서 자신과의 싸움이 치열하였다. 무엇보다 아이들 처지를 생각하면 마치 '내 건너간 놈 지팡이 팽개치듯' 그늘 한 곳 없는 모래사막에다 방치하는 일 같아서 얼마나 애처롭고 가여운지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지나가면 아침이 오듯 산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지고, 죽음이란 현실 밖, 또 다른 삶의 한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일 뿐이라고 부단히 자신을 달래면서 인내하였다. 아직 어리지만 눈치가 마알간 아이들도 엄마 아빠 사이의 냉기류를 체감한 것인지 눈에 띄게 풀이 죽고 불행해 보였다. 좋아하는 쵸콜릿을 주어도 그걸 손에 쥐고만 있지 입으로 가져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웃음기가 가신 침울한 모습이 얼마나 가슴을 찢는지 이래저래 난 극도의 스트레스로 심신이 만신창이였다. 자신의 일탈을 인정한 이후로 내 일관적인 무시와 무관심에 설자리를 잃어버린 남편 역시 딱하긴 매한가지였다. 허나 그는 화를 자초한 장본인이므로 동정의 여지가 없었지만, 오만가지 궁리를 다 해봐도 아이들에게 있어 어미를 잃는 일이란 치명적인 재난일 것이었다. 모정(母情)이란 아이들 정체성과 기본 인성의 자양분은 물론, 성장촉진제인 데다, 사랑의 손길이 절실한 과정에 있는 아이들에겐 절대적 필수 요건이다. 그렇듯 분명한 사유(事由)를 어미가 외면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니 나는 나대로 간장 썩는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솟았다. 저 자식들을 두고 어찌 갈까, 내 새끼들을 어이 할꼬,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할 일에 애가 말라, 극렬한 통한은 흡사 버얼겋게 단 잉걸불을 심장에다 바로 들이대는 것이나 진배없는 고문과도 같았다. 사흘이 멀다 하고 몸져누울 것만 같은 신체적 징후를 정신력으로 버텼는데 사소하게는 입술이 부르트고 눈병에도 시달렸다.드나나나 앉으나 서나 자제력도 바닥 나버린 상태에서 한계를 느낀 순간에는, 욕실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이 들을까봐 수건을 입에 문채 주저앉아 흐득흐득 울었다.그렇듯 절통한 심경에 꺼들리다 보니 사람 진이 있는 대로 다 빠져버렸다. 문제의 발단 " 여보 이게 뭐야? "오랜만에 귀국 휴가로 집에 온 남편이 몇 일간 서울 본가(本家)를 다녀온 직후였다. 이전에는 식구들이 함께 동반여행을 했었으나 시모(媤母)께서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시기적으로 다소 조심스럽기도 해서 부득이 남편 혼자 다녀 온 직후였다. 헌데 돌아온 그의 여행가방에서 세탁물을 꺼내다가 뜻밖에도 문제의 그흔적을 본 것이었다. 와이셔츠 깃에 묻어있던 선명한 여성용 화운데이션과 입술에 바르는 루즈 자국이었다.",,, 뭐 말야? "" 이거,.. 이건 여자들 화장품인데 이런 게 왜 여기 묻어있지?"남편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면서 문제의 와이셔츠 깃을 들이대고 정색하며 물었다." 글쎄에... "순간적으로 남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직감적으로 이건 단순하게 간과해버릴 문제가 아니로구나 싶었다. 그건 분명 원초적 본능이 감지한 동물적인 촉이었다. 저녁에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 둘만 있는 침실에서 다시 물었다."여보, 이건 그냥 어물어물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분명히 하고 싶어 그러니까솔직히 말해줘. 그럼 나도 최대한 이해하도록 해볼게,.. "" 뭘? "" 아까 그 와이셔츠에 묻었던 거 말야....장담할 순 없지만 짚이는 게 있어 그의 시선을 잡고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어허, 이 사람이... 멀쩡한 사람 잡놈으로 만들지 말어 ! "당치도 않다는 듯 그는 의아하리만치 강도 높게 잡아떼었다." 그럼 그런 게 왜 당신 옷에 묻은 건지 납득할 수 있게 해명을 좀 해줘봐 ! " 평소 남편은 무슨 일이든 억지로 강행하는 법이 없을 만치 순후하고, 매사 순리를 좇아 일을 해결하는 타입의 신사였다. 그것은 가장 점수를 후하게 줄 수 있는 그만의 긍정적인 일면이자 대표적 트레이드마크(trademark)이기도 하였다." 당신 대구에서 이모 잠깐 보고 서울 간댔잖아, 그 일은 어떻게 됐어?! "그 시절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요새같이 실시간 보고나 전달 면에서 용이하지 못했다. 빨간색 공중전화기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집 전화가 다였으니까..." 응, 처제 만났지 당신이 갖다 주라던 것도 전하고... "" ... 으음,,, 그러구 나서 ? ""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 ? "" 아니, 그러니까 물어보잖아, 당신이 말한 그, 상상이란 건 또 뭘 뜻하는 건데 ? "" 에잇, 관 두자. !"예상치 못한 일로 추궁을 당하니까 당황해서 그랬겠지만 그의 감정 표출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꼴이 되었다." ...아니, 관두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지? 그러니까, 처제하고 같이 잤단 말을하기가 좀 곤란하긴 한가보네? "거침없는 내 넘겨짚기에 그는 대경실색, 질린 얼굴로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실인즉 내 직사포는 근거 없이 대놓고 막 쏘았던 헛 포(砲)가 아니었다. 그동안 애들 이모는 대구에서 직장을 다니느라 주말이나 휴가기간이면 주로 우리 집에와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천지간에 피를 나눈 동기라곤 저랑 나, 둘 뿐이어서 그건 당연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원체 자질이 곱고 성품이 온화한 남편은 평소에도 처제한테 살뜰해서 속으로 그런 점을 참으로 고맙게 여겼었다. 동생도 주저 없이" 형부 같은 사람 있으면 당장 시집가고 싶다 " 고 할 정도였으니까...거기까진 괜찮았으나 날이 갈수록 형부를 향한 애들 이모의 관심이 순수하기 보다는 이성을 대하는 것 같아 속으로 쟤가 저러면 안 되는데... 우려되었다. 그때마다 아마 부모사랑에 주린 나머지 형부도 아버지나 오빠처럼 미덥고 좋으니까 그러는 것이려니, 애써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사랑은 주머니 속에 든 송곳 같아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법' 이라더니사뭇 위태위태한 적신호가 눈에 띌 때마다 적잖이 거슬렸다. 그래도 행여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싶어 매번 나 자신을 단속하기 바빴다. 허나 어떤 식으로든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다 싶어 어느 날 일부러 둘만 있게 두었다가 인기척 없이 불시에 문을 열었더니 지 형부를 끌어안은 동생의, 말보다 분명한 행위를 보고 그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야 너, 말(馬)만한 처녀가 몸을 좀 조신하게 가져야겠다. 남이 보면 형부가아니라 네 서방 인줄 알겠다. 쯧쯧..."내처 두면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무안하리만치 핀잔도 주고 가급적이면 둘만 만날 기회를 만들지 않으려고 딴에는 머리를 썼는데 결국 사단이 나고 만 것이었다. 구구한 변명이 없어도 정황이 어떻게 돌아갔겠구나, 하는 어림이 훠언하게 잡혔다. " 여보, 사내가 아무리 잘 나기로 양손에 떡은 가당치도 않아!어디 놀데가 없어서 처제야 !?..."조용히 말했으나 지나치게 착 가라앉은 내 말속에서 비수 같은 맹독이 느껴져 스스로도 소름이 돋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남편은 사색이 된 얼굴로 황망히 내 팔을 꽉 붙잡으면서 " 여보 그건 오해야! 맹세코 의도적인 게 아니었어. 어쩌다 그렇게 되고 만 거야. "실토하였으나 진실이 아닌 것에 단호하고, 불의에는 북극같이 차가운 마누라의 곧은 성정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 내가 잘 못했어, 정말 경솔한 짓이었어, 미안해.그건 실수였어. 정말이야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이 그렇게 초라하고 역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어, 행동은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건데 그게안됐다면 당신도 이미 욕망을 가지고 있었단 증거야, 내가 누누이 강조했잖아,당신이 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구,... 어쨌거나 착각하기 딱 좋은 그 모호한당신 태도가 이런 사단을 자초한 거니까 앞으로 잘해 보슈 "내 비아냥거림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실 앞에서 남편은 사색이 되었다. 색소가 든 과자는 몸에 해로운 줄 알면서도 먹게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일까. 소심하고 내성적인 남편의 성격상 먼저 적극성을 띄었을 리는 없다는 심증은 있었다. 그렇지만 내 극렬한 분노는, 그런데 있는 게 아니었다. 명색이 장부(丈夫)라면 먹을 밥, 못 먹을 밥을 마땅히 가리고 삼가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을, 결과적으로 부화뇌동했다는 사실이 용납할 수 없었다. 도대체 형부란 사람이 처제의 유혹에 동조하고 성적인 속성에 굴복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절망스러운지 속에서 태산 무너지는 소리가 끊임없었다. 세상에 먼저 나와 선(先) 경험한 인생 선배로서, 아니면 형부로서 방정(方正)한 충고가 따라야 마땅할 일에 한심하게도 마주 안고 돌아갔단 사실은 어느 모로 따져도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반듯한 사고와 인격을 갖춘 어른이라면 단연코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남자 같으니 절대로'초는 양끝을 동시에 켤 수 없다' 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안타까웠다." 내가 여태까지 당신을 너무 믿고, 과대평가하고 살았었나 봐 "내 말의 함의(含意)는 앞으로 진행될 일의 예고편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없인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념, 매사 목마를 때 물 생각나듯 아쉬웠어도 그리움이나 기다림을 나름대로 누리면서 살았다. 외국적 선사(船社)와 계약을 할 경우엔 일 년에 한 번, 휴가기간 외에는 다시 국외로 나가야 하는 취업 조건 때문에 언제나 기다리고 사는 일상을 당연하게 여겼다. 국제 통화나 편지 말미에는 항상 당신이랑 애들이 보고 싶어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빠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릴 위해 그런 걸 다 참고 일 하는구나 싶어 난 매사 성실하고 검소하게 본분을 지켰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의자 위에만 올라가도 벌벌 떠는데 마땅한 일 앞에서는 천정에 매달린 전구도 혼자 갈아 끼우고, 필요하면 망치질이나 톱질도 불사하면서'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이치를 기꺼이 몸으로 실천하였다. 고액급료자인 가장(家長) 덕분에 중류 이상의 안락한 생활이 가능하였지만 살림을 알뜰하게 잘 하는 일이 보답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당연히 불만도 없었다. 그런데 남편에 의한 느닷없는 졸지풍파(猝地風波)는 우리 가정의 존폐가 광풍 앞에 비닐우산 젖혀지듯 뒤집히는 대 참사를 일으키고 말았다. 상상도 한번 해본 적이 없었던 청천벽력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인지 입버릇처럼 언니가 부럽다고 말하던 동생한테서도 사흘이 멀다 하고 오던 전화가 뚝 끊어졌다. 아마도 나를 자극하면 안 된다는 싸인이 둘 사이에 오고 간 게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었다.나로선 더러운 뻘 구덩이에서 함께 뒹구는 짓거리 같아 내처 침묵으로 일관하였지만 속내는 이미 만신창이었다. 그날 이후, 죄인처럼 내 눈치만 살피는 남편의 비굴한 모습도 딱 꼴 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위해선 아쉬운 대로나마 음독 이후를 대비한 비상조치를 해두어야 될 것 같아 도리 없이 남편한테 부탁을 하였다." 당신, 이모한테 전화해서 주말에 한 번 다녀가라고 해줘 "내 심산에는 집구석이 뒤집어져도 이모가 곁에 있으면 불가불 아이들을 보호하고 건사하는 일은 하게 될 것이란 계산을 한 것이었다. 드디어 터졌구나 싶었는지 남편은 세상 끝난 것 같은 얼굴로 애원하였다." 여보 내가 빌께, 부탁인데 제발 일 크게 만들지 마 응? 내가 죽일 놈이야,처제를 설득해야 했었는데 내가 큰 실수를 한 거야, 잘 못했어. "" 무슨 헛소리야! 이모한테 애들 잠깐 맡기고 난 몇일 바람이나 좀 쐬다오려는 건데..."내 의중을 모르는 남편은 내 능청을 액면대로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눈치였으나, 어쩌면 피차 시간적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하였다. " 그래도 괜찮겠어? "" 소행머리는 패 죽이고 싶어도 어쩌겠어, 내 동생인 걸... "" 여보 제발 날 용서 좀 해줘라, 아무리 무슨 소릴 다해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야! ...믿어줘, 정말 미안해. "그러나 한결 같은 내 무반응에 화가 치미는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한순간, 뚱딴지같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큰소리로 욕이라도 좀 해 봐, 이건 아니잖아! 지독한 지집애..."그야말로 똥 낀 놈이 성을 내었다. 그날 (D- day) 그날 오후, 남편은 모처럼 시내로 외출 중이었고 유치원을 다녀온 아이들은 한결 밝아진 모습으로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날 밤이 내심 정해놓은 어미의 Dㅡ데이 인줄 알 리 없는 아이들은 천지도 모르고 즐거운 얼굴로 놀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날 동안 냉기류가 가득했던 집안에, 가끔 엄마하고 손잡고 춤을 추었던 음악이훨훨 날 것처럼 가득한 데다 예쁜 옷을 입은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중이었으니 기분 좋은 일이긴 할 터였다. 아이들 기억으론 음악이 있는 우리 집은 즐겁고 행복한 때란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아이들을 위해 분위기 전환이 목적이었던 내 의도적인 연출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나 죽은 뒤 장사(葬事)에 소요되는 일자를 계산하고 그의 출국일자를 꼽아봤을 때 시한이 결코 넉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딴에는 상당히 조급하고 불안하였다. 이래저래 살아서는 마지막이 되는 날 저녁이라,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해 내가 해주고 갈 수 있는 특별 식에 정성을 다하였다.'살러 가는 년이 물 항아리 채워놓고 간다'는 우리네 속담은 진리였다. 이 짓도 오늘로서 끝이로구나, 내 자식과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생애 최후의 상차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싸아한 서러움이 해일같이 넘어왔다. 그날 밤,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양쪽 팔에 하나씩 팔베개를 해주고 누워서 세상을 버리기 전 이승에서의 종말인 사랑을 나누었다. 긴 이별일 것이었다." 준이야, 우리 준이는 이 담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 응 난 비행기 조종사 ... "" 그런 민이는? ""엄마, 난 으음, 국군 대장님 할 꺼다? "" 우와, 멋지네. 그럼 비행기 조종사나 국군 대장님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으음, 그거는 시금치랑 파도 잘 먹고 음, 태권브이가 돼야 돼. 엄마 그치이...?"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레코드에선 바버(String for adagio)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이 방안 가득 향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슬플 땐 슬픈 음악이 정서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데다 평소에도 자장가 삼아 시나브로 들려주었던 곡이라, 살아서 마지막으로 자식들과 함께 듣고 싶은 내 의지의 마감 음악이자 위로이기도 하였다.." 흐으응 엄마 좋다, 난 이상(이 세상)에서 울 엄마가 제엘 좋더라 ! "" 그래, 엄마두 세상에서 우리 준이랑, 민이 제일 사랑해 알지? "그러면서 속으로 그랬다.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너희들이랑 안 바꾸지... )작은 놈이 다리 하나를 어미 배위에다 척 걸쳐놓고 내 뺨이랑 귀를 만지작이며 행복해 하였다. 그런데 큰 아이는 말없이 흐으읍, 하고 숨을 들이키더니 손등으로 가만히 눈물을 훔치는데 순간적으로 간이 철렁 하였다. 그 밤이 세상에서 어미와 함께 누리는 마지막 밤인 것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 아이의 느낌은 본능적으로 달랐던 것일까."우리 준이는 왜 눈물이 날까 ? "녀석은 대답 대신 내 목을 끌어안으며"엄마아... ""그래 착한 아들, 엄마가 우리 준이랑 민이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는 거 알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흐드득 삼켰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차오르는 비통함을 꾹꾹 눌러가며 내내 용서를 빌었다. 참으로 모진 짓을 앞둔 이기적인 모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어미인지라, 미어지고 에이는 비감으로 가슴이 저리고 아팠다. (아들아, 비겁하고 무책임한 이 어미를 용서해다오.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용서해주렴. 사랑해, 너희 모두를 사랑해...) 천지도 모르고 잠이 든 두 아이들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난 빌고 또 빌었다.(얘들아, 어떻하면 좋으냐, 아아 어떻해, 미안하다... 용서해줘... )가고 올 줄 모르는 어미를 기다리느라 날마다 저물도록 문밖을 서성이며 지쳐 갈 안쓰러운 내 분신들 생각에, 만약 심장이 헝겊으로 된 것이라면 진즉 너덜너덜 다 헤어지고 철철 삭아 형체도 없어졌을 것이다.나 같은 어미도 어미라고 태산같이 믿고 천사 같은 얼굴로 잠이 든 내 어린 새 두 마리... 아직 날아오를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한쪽 날개를 베이는 상처라니...얼마나 애달프고 절통한지, 터진 둑으로 봇물이 범람하듯 슬픔의 격랑이 쉼없이 넘어왔다. 이 세상 어떤 작별보다 처참한 일은 자식을 외면하고 가는 비정한 어미란 자각은 무분별한 동통의 비창(悲愴) 그 자체였다. 아직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얼마나, 얼마나 그립고 사무치는지 운무같이 어리는 설움에 꺼이꺼이 울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아직 어린 내 새끼들이었다. 허나 종당에는 감행해야 할 일이 남은 상태였으므로 눈물어린 마음 가득 아이들 모습을 끌어안고 내 침실 문을 열었을 때, 마침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가 22시를 알렸다. 뻐국, 뻐국, 뻐꾹...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를 따라 살아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저 어느 것 하나 그립고, 아쉽고, 아름답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회사 친구들을 좀 만나고 오겠다며 외출한 남편은 아직 귀가 전이었다. 나는, 한차례 더 집안을 두루 꼼꼼하게 살피고 점검하였다. 나 죽은 뒤에 들이닥칠 인척들로부터 여자가 칠칠맞단 소리는 안 들어야지 싶은 염려에서였다. 그런 다음 침상 옆에 끓어 앉아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살아생전 마지막이 될 간절한 기도였다. 비록 성경 구절 하나 똑바로 외우지도 못하는 순 나일론 신자이긴 하였으나 명색이 난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었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의지할 곳 없는 제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어미 잃고 천지가 아득할 어린 것들의 슬픔을 하룻밤 꿈처럼 재워주시고 반듯하게성장할 수 있도록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수(流水)같이 쉼 없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그 다음엔, 남편 앞으로 유언이 될 마지막 당부의 말을 몇 자 남겼다.보소! (여보라고 부르는 것도 싫어서 그렇게 적었다.)... 이런 식으로 살다 가리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지금 보니 큰소리 칠 일이 아무 것도 없네요.애처러운 우리 민이, 준이, 내 몫까지 잘 키워달란 바램 간절하고, 다만 믿는 마음 가지고 먼저 갑니다.생의 마감이 이러할진대 어찌 일말의 유감인들 없을 수가 있으리오.무책임한 어미지만 오직 한 가지 소망은, 남겨두고 가는 우리 아이들 흠도 티도없이 잘 키워달란 부탁, 그 뿐입니다.행여 자고 난 아이들이 어미 찾아 울거든 잠시 먼 데로 볼 일이 있어 갔다 하고달래주셔요. ................................................편지지 위로 눈물방울이 투둑 투두둑 질서 없이 떨어졌다. 살아있는 동안의 마지막 한 순간이었다. 모든 걸 포기한 상태라서 그런지 아니면 체념 때문이었겠지만 애들 이모인 동생한테는 괘씸하고 더럽다는 감정보다 앞선 생각은, 부디 와서 우리 민이, 준이, 좀 잘 보살펴줬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그러한 심경도 글로써 몇 자 남길까 하다 내키지 않아 그만 두고, 감기약을 챙기듯 준비해 둔 수면제를 손바닥에 한가득 주르르 쏟았다. 때는 1980년 6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꿈인지, 저승인지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들판을 내가 허위허위 걸어가고 있었다. 노을이 만연한 황혼의 하늘은 찬연하고 아름다웠다. 마악 넘어간 석양의 잔광으로 산능성이 훠언하게 밝았으며 눈길 닿는 곳마다 작고 예쁜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그런데 도무지 무슨 일로 나는 그런 곳을 나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흡사 무중력 상태 같았다고나 할까. 그 와중에 무심코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번쩍 그렇게 아이들 생각이 났는데 마치 빛의 에너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 어떡해, 애들이 엄마 없다고 난리가 났을 텐데 싶자 "샛강 물소리 멎을 때 주막집 아낙네 빈대떡 주무르는 바쁜 손길' 만큼이나 마음이 화급해졌다. 빨리 가야해, 어서 가야지, 뇌리에는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서둘러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나, 사방을 둘러보는데 마침 저 멀리 강 쪽으로 다리 같아 보이는 물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옳거니, 앞뒤 가릴 사이 없이 난 그곳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하였다. 있는 힘을 다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서 당도해보니 아, 그것은 틀림없는 나무다리였다. 뒤도 볼 것 없이 난 단숨에 그 다리위로 올라섰다. 그때 다리 아래쪽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아낙 한 사람이 날 올려다보면서 참의아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봐요!, 저 위쪽으로 가면 좋은 길이 있는데 왜 하필 이쪽으로 왔어요? "난 어서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 밖에 없었으므로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안 될 것 없다면 이 다리를 건너가고 싶다고 말했다." 허기사, 건널 수만 있다면야 머... "뉘앙스가 묘한 아낙네의 말투가 다소 저어하긴 했으나 그 한마디에 난 금방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용기가 솟았다. '물에 빠진 놈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으므로 나중에야 어찌되든 일단은 내 의지대로 희망적인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크고, 길고, 넓은 다리 위를 서둘러 달려 나갔다. 그런데 아뿔싸, 다리 전체 3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자칫 내려앉기 일보직전인 상태로 다리가 썩어있었다. 덩치는 크고 육중한데 너무나 오래 묵어 낡을 대로 낡아빠진 다리는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당장 우지끈 뚝딱 내려앉아 버릴 것 같이 형편없었다. 낭패도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절망만 하고 있을 촌분의 여유도 내겐 없었다. 내가 처한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대문 앞에서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을 애들 생각에, 속이 타들어갔다. 어떤 무모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이 그 다리를 건너야만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궁여지책, 찰나에 생각해 낸 것이 그야말로 뒤로 한껏 물렀다가 육상선수가 달리기 하듯 빠르게 뛴 탄력을 이용해서 힘차게 한번 건너 뛰어보자는 요량이었다. 무모해도 도전 정신만큼은 그랑프리 감이었는데 결과는 아뿔싸, 뛰어넘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여지없이 나는 풍덩,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 엄마아... "" 엄마아... "애절하게 날 부르는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두 녀석이 와락 내 가슴위로 엎어지면서 홰 울음을 놓았다. 남편도 거기 있었다. 쑥 들어간 옹이눈을 한 그 초췌한 모습에서 저간의 고초가 어땠는지 단박에 읽혀졌다.찰나에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이 전류마냥 빠르게 지나갔다. 함께 살았던 인간적인 세월의 두께가 거품은 아닌 것이었던가." 엄마, 무서워, 싫어, 인제 고만 자아!"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아이들을 보자 간장이 녹는 듯 무분별한 통증이 싸아아 전율처럼 내창을 훑고 지나갔다. 나중에 들은 소리지만 새벽에 돌아 온 남편이 방안에서 나는 신음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혼수상태였고 입가에는 흰 거품이 보글보글 하더란다.그렇게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지 즉각 응급실로 옮겨진 것이었고 마침 7일 만에 눈을 뜬 것이라고 하였다.어리석게도 수면제를 먹으면 자는 듯이 고운 자태로 죽을 것이라 기대했던 내 예상은 얼 척 없는 무지의 소치 그 자체임을 알고 아찔하였다. 엄청난 자괴감이었다. 그랬었구나, 그랬던 것이로구나... 치사량이라고 다량의 수면제를 한 입에 털어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엔 의사의 처방전이 없어도 원하는 전문 의약품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남편의 불륜 사실에 절망하고 참척해서 자살로 응징을 한 것까진 동정의 여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어린 자식한테는 어미로서의 도덕적 의무와 윤리적인 책임을 외면해버린 독하고도 비인간적인 추태란 자성(自省)은 비할 바 없는 죄책감을 동반해 아이들한테 면목이 없었다. 그런 어미를 붙들고 목 놓아 우는 자식들을 보면서 그지없는 통한에 나도 같이 울고 말았다. 자식한테 평생을 두고 갚아도 못 갚고 죽을 빚을 졌다는 자책이 고문 같았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결행하기까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마음고생을 이미 존재세로 바쳤지만 어미란 자가 자식을 팽개치고 차마 못할 일을 저지른 비겁한 현실도피는 어떤 식으로든 변명의 여지가 없어, 상할 대로 상한 속이 헐어빠지는 듯 괴로웠다. 그래, 이제부터 갚으리라, 죽는 날까지 이 빚을 자식에게 갚으면서 살리라 다짐하였다. 그런데 엄연한 것은 온 세상을 다 준대도 안 바꿀 자식이건만 정작 천륜을 외면한 모정이라니 통탄할 일인데도 진실은, 사람이 극에 달하면 자신밖에 안 보이더란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결론적으로 난 천하에 매정하고 몹쓸 어미였단 그 기억이 지금까지도 죄인 인양 면목 없고 아프다. 지독하게 따가운 동통이다.'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무조건적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은 본능적이라서 더강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가장 근본적이다.'(안양규/붓다,자기 사랑을 말하다 P101)이별 준비 열흘 만에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이전 같은 생활일 수는 없었다.이모한테 연락해서 다녀가라고 했던 내 부탁은 지켜지지 않은 듯 동생이 다녀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루어 짐작키는 아마도 남편은 내가 혼수상태인 그 1주일간을 애들 데리고 혼자 고스란히 감수한 것 같았다. 평소 내 주관이랄지, 가치관은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다울 때 아름답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항차 그것이 꽃이건, 사람이건 간에보는 순간 아름답다 느낀다면 그것은, 보고 느낀 대상이 절대 가치적 산물일 때 본능이 먼저 진실에 반응하는 까닭이다. 같은 맥락에서 부부관계에 대한 내 철학이랄지 정립된 사상 역시도 부부는 당연히 부부다워야 한다는 데 있었다.모름지기 부부란, 미덥기로는 세상에 둘 없는 친구요, 든든하기는 비빌 언덕이며, 사랑하는 것으로 치자면 뿌리 깊은 나무의 과실(果實)과도 같은 사이일 때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느라 일생을 소처럼 수고하는 사람이 남편일진대 허물없이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동안엔 언제나 안녕하길 살피고 보필하는 일이 아내의 몫인 줄로 여겼다. 부부가 일심동체라고는 하나 개성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 데서 성장한 이성끼리 만나 사는데, 예별(禮別)없이 제 한 몸만 위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독선일 터, 행여 말 못하는 가슴으로 문풍지의 휘슬 같은 외로움을 혼자 묵묵히 견디는 일은 없는지 살피고 배려하며 사는 일. 그것은 피차 행해야 할 가시버시로서의 도리라는 게 내 굳은 의지이기도 하였다. 그 반석 같은 사랑과 신뢰를 남편은 스스로 엎어버린 망발을 한 것이었으니... 일관된 내 무시와 항의성 침묵으로 남편의 정서가 대단히 불안하고 위축되어 보였다. 나중엔 도저히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여보, 차라리 내 뺨이라도 한 대 갈겨라 !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까...난, 당신이 설마 이 정도로 독한 사람인 줄 몰랐어... 정말 무섭다."해선 안 될 일에 대한 내 묵언(黙言)성 항의에 그의 원성은 마치 투정하는 아이 같이 유치하였다." 그래, 그렇게 독해서 난 길이 아닌 곳으로는 못 가 ! 아니, 절대 안 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를 봐도 더 이상 안됐다는 연민조차 없었다. 부부라는 건 반드시 사랑 하나만이 아니라 친구 같이 막역한 정(情)으로도 얽혀 사는 건데, 곁에 있어도 정을 느낄 수가 없다면 그건 부부로선 이미 끝난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위기의식이랄까,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내 모습이 가시권역(可視圈域)을 벗어났다 싶으면 질색하고 찾으면서 울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갈 때도 미리 아이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득하거나 데리고 움직여야만 조용해졌다.심지어는 유치원에 가는 것도 마다하고 엄마가 잠만 많이 자서 죽을 뻔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마치 호위무사처럼 내게서 시선을 거두려 들질 않았다.그 때문에 밤에도 내가 안고 같이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앉아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도무지 누우려고 하지 않아 딱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이도 어른인 나도 완전한 정서불안에다 트라우마 증후에 노출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찾아야만 하였다. 사는 일남편의 출국 일자가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비행기 예약시간은 다음 날 19시 30분발 뉴욕 행이었다. 축 처진 모습으로 말없이 가방을 챙기고 있는 남편을 지켜보자니 갈등이 생겼다. 하지만 그래, 이 짓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싶어 군말 않고 짐 싸는 걸 도왔다. 비록 부도덕한 행위를 한 사람일지라도 아이들한텐 둘 없는 존재인지라 다시 귀국하는 날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다 오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당시엔 '에이즈'라는 끔찍한 성병이 심심찮게 뉴스를 타던 무렵이어서, 어떤 이유로든 불치로 알려진 병으로부터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미리 챙겨두었던 소포장 콘돔 한 상자를 그의 옷가방 맨 밑에다 몰래 넣어주었다. 본인이 알면 미안하고 쑥스러울까봐 옷을 꺼낼 때 우연히 발견하고 필요할 때 사용하라는 순수한 취지였고 딴에는 그나마 떠나기 전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인간적인 배려라고 스스로를 부추겼다. 평소 섹스의 정체성에 관한 내 해석은 성생활이 단지 쾌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주의였다. 절대 난잡해선 곤란하지만 심신이 건강한 상태라면 성인의 섹스는 필요 요소 가운데 중요한 기능의 하나라고 믿었던 까닭이다.'까마귀라고 하여 모두 오디에 환장 할까' 마는 내 남편을 포함한 남성 기혼자의 경우, 결혼생활을 통해 이미 성을 아는데다 오랜 기간 먼 타국에서의 생활이라면 단발성 일탈이 절대 없다고 장담할 순 없는 일이라는 게 내 소견이었다.더욱이 나병보다 더 무섭다는 에이즈에 노출이 된 상태에선 조심하고 예방하는 것만이 상책일 터, 만에 하나 보균자가 된 것으로 가정해본다면 본인의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나중에 가족들의 정서나 위생상의 문제 등, 꼼짝없이 모두가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텐데,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였다. 그런 차원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실리가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모르고 속는 것 보다는 차라리 상대의 양심을 믿고 대처할 수 있도록 일깨운다는 취지 측면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내가 무슨 마리아(성모)도 아니면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유쾌하진 않더라도 그렇게 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자신과의 타협인 셈이었다. 믿고 방심했다가 불 난 뒤에 펄쩍펄쩍 뛰기보다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미리 장비를 갖춰두는 편이 보다 현명한 처사라는 측면의 취지였다고나 할까. 예전 같으면 내가 미리 가방을 다 챙겨두고 아이들이랑 가족나들이를 했을 텐데이래저래 심란해서 잠시 감상에 젖기도 하였다. 그래서 모처럼 속내를 밝혔다." 당신 섭섭하겠지만 지금 기분으론 긴말하기 싫으니까 잘 다녀오소,1년 후에 귀국하면 우리 문제는 그때 풀어도 안 늦을 것 같애. 애들 데리고잘 지낼 테니까 우리 염려는 말고...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어서 나도 미안해요."이미 마음의 문이 닫혀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할 말도, 그럴 기분도 아니었지만잘 다녀오란 내말은 진심이었다. 줄곧 내 눈치만 살피던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당신 믿고 갔다 올 테니까 제발 우리 애들봐서라도 날 한 번만 용서해 줘라. 나도 내가 한 짓이 정말 끔찍해.이번에 실감한 건데 당신 그 대쪽 같은 성정이 정말 무섭다 "남편의 말을 듣고 일순, 동정심이 일어났지만 그뿐, 진즉에 닫혀버린 마음의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출국 당일 날 오후.아이들 느낌에도 아빠가 무언가 엄마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생각이 드는지 눈치를 살피고 서먹해져서 이전처럼 아빠한테 매달리지도 않았다.남편이 오면 다시 출국하는 날까지 집안에 아이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떠날 날이 없었는데 온종일 시무룩하고 우울한 기색이 역력해서 보는 내내 측은하고 가슴이 쓰렸다." 얘들아, 오늘 우리 비행장에 가볼까? 아빠 가신다니까 우리도 같이 가보자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온 식구가 함께 승용차에 올랐다.음독 이후에 몸 상태가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운전을 할 정도는 되는 것 같아 전에 하던 대로 남편을 비행장까지 전송하기로 하였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양쪽에 아이들을 보듬고 바라보는 남편의 눈동자에 애틋함이 무량으로 배어있었다." 준씨, 민씨, 아빠가 다시 집에 오는 날까지 잘 지내고 있어, 너희들은 남자니까 대장부답게 엄마도 잘 지키고 보호할 수 있어야 돼, 할 수 있지? "말귀를 알아듣는 건지 어떤 건지 시무룩해있던 두 녀석이 제 아빠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일터로 갈 사람은 가고, 나는 나대로 아이들과 함께 성실하게 살았다. 그것은 내 본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미 산그늘 같은 암영으로 속에 납덩이 하나가 들앉은 것 마냥 마음 한쪽이 늘 무거웠다. 이전의 활력을 되찾기 위한 모종의 돌파구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궁리 끝에 애들이 각각 유치원과 어린이 집을 파하고 오면 형제를 나란히 가까운 태권도장에 보내주고, 나는 나대로 시영(市營) 문화센터로 수영강습을 다녔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조금씩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현업에 복귀한 남편한테서는 각 기항지에서 부치는 항공우편이 자주 왔다.그 당시 컴퓨터는 한국통신의 하이텔이 한 역할을 하였으나 컴퓨터 보급이 아직 대중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주된 소통 수단이 전화가 아니면 편지가 일반적인 주류였었다.보내오는 남편의 편지에는 구구절절 자신의 불찰을 반성하고 용서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지만, 난 내키지가 않아 답을 쓰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내가 먼저 편지를 보냈겠지만 배신의 응어리가 암반 같은 상태에선 답장을 쓰려 해도,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설령 쓴다 해도 내 유아(儒雅)한 정서의 샘이 말라버린 후라 쓴 소리나 비난밖에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아예 큰놈 준이한테 바통(baton)을 넘겨버렸다. " 김 0준! 아빠한테 편지 한번 써볼래? 아빠가 우리 준이 편지 보고 싶다는데어때? 아무 거나 니가 하고 싶은 말 쓰면 되는 거야. 아마 아빠가 되ㅡ게 좋아 하실껄? 다 쓰고 나면 엄마랑 우체국에 부치러 가자. 쓸 수 있지? "취학 전이었지만 준이는 한글을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없어 아이를 부추겨서 내 할 일을 열심히 떠넘겼다. 그런데 어느 날 받은 답장 말미에는, 어디서 들은 소린지, 그냥 자기 소린지, 아님 그만치 아쉬워서인지 '여보 영 쓸 말이 없거든 그냥 오동추야 달이 밝아...' 그 유행가 가사라도 좀 적어 보내줘라...'가식 없는 속내를 느낄 수 있어 편지를 읽으면서 모처럼 웃기도 하였다. 그런 식으로 별 탈 없이, 아이들도 이전 페이스를 찾아가고 나는 그를 보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 편하고 좋았다. 의식의 맨 하층에 죽은 듯이 똬리를 틀고 앉은 상처가 무시로 부상(浮上)하긴 하였으나 그것은 아마도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믿었다.동기간同氣間 어느 날 기대하지도 않은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동안 속에서 치받는 화증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잊으려고 애를 썼는데 어떤 식으로든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할 사안이라 그 문제를 생각하는 자체가 부담인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다." 오랜만이다 너,..."" ... 언니야,.. 그동안 면목이 없어서 전화도 못 했는데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잘 알고 있다. 뻔뻔하게 느낄까봐 용서 해달란 소리도 못하겠더라... "고난이 선생이라더니 놀랍게도 안 본 사이에 인성이 많이 성숙해진 듯한 느낌이 말 가운데서 묻어나왔다. 안 그래도 집채 같은 분노에 꺼둘리지 않으려면 그만 두 사람을 용서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어느 한 순간부터 내 뇌리에서 맴돌고 있던 터였다.하지만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갈등으로 차일피일 하는 사이에 세월은 유장한 강물처럼 1년이란 시간을 데리고 흘러가버린 것이었다.동생은 '눈이 있어도 대상이 없으면 식(識)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불가(佛家)의 말로 제 심경을 토로하고 이제 사문(寺門)에 들면 출가자로서 비구니의 길을 착실히 닦아나갈 것이란 고백을 하였다. 고해성사 같은 동생의 말을 통해 저간(這間)에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였다. 속가(俗家)의 인연도 이젠 마지막이로구나, 싶어 며칠 전엔 우리 집 대문 앞까지 왔다가 막상 언니를 볼 용기가 안 나서 벨도 못 누르고 돌아섰다는 말을 할 땐 목소리가 많이 젖어 나왔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 인생이 하도 가여워 바닷물이 모래사장으로 밀려오듯 내 가슴에도 슬픔이 밀려들었다.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그래서 그랬던가." 그래 대단한 결심을 했다. 기왕에 나선 길이거든 그 길에서 네 뜻한바 원을 다 이루거라 널 위해 기도하마. 언니가 언니 노릇을 다 못하니 나도 부끄럽다"그래놓고 전화기를 사이에 둔 자매가 각각 제 설움에 겨워 숨죽인 채 울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다가 한 숨 돌릴만한 장소에 발가락 끝 하나가 닿은 듯, 묘한 안도감이랄지, 난해한 숙제 한 가지를 풀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도 사람이니 궁극의 해법을 비구니의 길로써 정리하기까지 모르긴 해도 전투 수준의 마음고생이 따랐겠지만 결론적으로 시간 값을 헛되지 않게 운영한 점은 나보다 났다 싶어 기특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당할 일은 단연코 아니었다. 예고된 이혼 내게 1년은 결코 긴 세월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면 지루하겠지만 아직 풀어야 할 난제가 남아있는 상태에선 시간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느껴졌다.그렇지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더니 여축이 없는 시간은 언제 그렇게 다 가버렸는지 남편의 귀국일자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때문에 그가 돌아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관련한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답답하였다. 당일에는 시간에 맞게 차를 가지고 공항으로 가서 그의 큰 가방 두 개를 받아 싣고 같이 집으로 왔다. 안 살 때 안 살더라도 같이 있는 동안엔 잠자리만 빼고는 내 몫의 기본 도리는 전과 같이 할 것이었다. 그래야 유사시엔 나도 할 말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세월과는 상관없이 내 안의 응어리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때문에 잠자리도 안방은 남편한테, 작은 방은 원래대로 아이들이 쓰고, 나는 오디오 기기가 차지하고 있는 넓은 서재를 고수하였다. 아마도 남편 생각엔 어영부영 시간이 가다 보면 내 오그라든 마음도 다소 흐지부지 되리라 기대한 것 같았지만 도무지 달라질 기미가 없자 어느 날 밤엔 내 방문을 두드렸다. 간이 덜컥했지만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 거칠어 열 수가 없었다."얘기할 거 있으면 자고 내일 해 "문을 열어주지 않았더니 잠시 후에 방문을 찍어대는 소리가 났다. 섬뜩하고 무서워서 더구나 열 수가 없었다. 방문을 찍을만한 것으로는 집안에 등산용 도끼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걸 동원한성 싶었다. 그 소란에 잠을 깬 아이들이 달려 나와 자지러지게 울면서 제 아빠를 제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그러지 마세요 "" 아빠, 무서워, 엄마아... !"삼이웃이 깸직한 소란에 기겁을 할 일이었으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아이들이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울고 매달리는 사이에 도끼질도 멈추었다. 이튿날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놓고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않았다. 모처럼 둘이 마주 앉았으나 기분이 께름칙하고 피차 서먹하였다." 난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은데 당신은 어때? "반드시 결말을 지어야 한다는 각오를 했기 때문에 내가 곰살 맞게 물었다.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남편이 볼 멘 소리로 불만을 터트렸다." 당신은 도대체 내가 얼마나 더 빌길 원해 ? ""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용서를 빌어야 하는 일 같은 건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했거든. 그래서 말인데 우리 그냥, 이혼하고 피차 맘 편하게 삽시다.나도 애들 때문에 고민을 참 많이 해 봤는데, 어제 당신이 도끼 들고 설치는바람에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지 분명해졌어.이젠 무서워서도 같이 못 살겠어. 게다가 이전엔 당신이 분명 내 남편이었지만 지금은 제부가 돼버린 거잖아. 제부하고 어떻게 한방에서 살아?눈 질끈 감고 받아들인 데도 그렇게 되면 난 창녀나 다를 게 없는 걸.당신 생각은 어떤데?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하는 내 말에 남편은 스스로도 쇼킹했던지 순순히" 내가 못할 짓을 한건 분명하지만 나로서도 계속 이렇게는 곤란해.당신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나도 긍정적으로 고민을 좀 해 보지 "남편 역시 결심한 바가 있었는지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마도 그것은 분명 한 체념일 것이었다. 다음 날 오전.남편이 어제 말했던 문제를 구체적으로 차분하게 의논 좀 해보자며 먼저 날 불렀다. 밤새 여러모로 고심을 많이 한 듯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피차 도움이 되고 항구적인 대안인지 연구해 봤는데결론은 아무래도 당신 주장대로 하는 편이 좋을 꺼 같애.체념해 버리니까 차라리 이젠 마음이 편하다"어떤 문제에 대한 답이, 그것도 정답이란 확신이 있을 경우 번복하지 않는 내 성정을 감안한 듯하였다. 의외로 순순히 결정을 내려준 남편이 사람처럼 보여 고마운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마음으로 꺼들리는 일 없이 두 사람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측면에서도 기뻤다.원래 인성이 드물게 고운 사람이긴 하였지만 뜻밖에도 근간엔 본 적이 없었던 여유가 그를 훨씬 남자다워 보이게 해주었다." 당신, 내가 이혼해주면 애들이랑 어떻게 살래 ? "" 능력 있는 애비 뒀다 무엇에 쓰게, 위자료 청구는 안 할 테니까 순순히양육비나 제대로 내 놔! "그 말에 남편이 씨익 웃으면서"어이구, 그러면서 뭔 큰소리는 그렇게 치냐 ! 집하고 생활비 줄 테니까 그냥이대로 맘 편하게 살아. 그게 좋을 거 같다.애들이야 당신이 어련히 알아서 잘 키울까, 우리 애들 걱정은 안 해.난 다시 현업에 갈 때까지 오피스텔이나 하나 얻어서 나갈께. 그럼 되겠지?""... 애들 교육비, 대학교 입학할 때까지 책임져야 돼!? "그 말에 남편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날 잠자코 보기만 하였다. 그래서 내친김에 쐐기를 박았다." 애들 대학 입학할 때까지 학비랑 지금까지 한 그 말들 전부 문서화해서싸인 해줘 "" 누가 지아부지 딸 아니랄까봐 ,.. OK ! 원대로 해주께. 아, 근데애들이랑 당신 보고 싶으면 한 번씩 찾아와도 되는 거지? 응? "남편은 내가 짐작했던 것 이상의 휴머니스트(humanist)였다." 찾아오긴... 애들은 당신 귀국할 때 한 번씩 데려가서 놀다가 다시 데려다주면 되겠네. 약속은 서로 지키자고 하는 건데 뒤집거나 잡아떼기 없기다 ... " 그렇게 해서 1981년 10월에 난 정식으로 남편과 협의 이혼을 하였다. 이혼이란 게 사실상 안보고 싶은 일을 안보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란 의미에서 해방감을 느꼈지만, 날이 가면서 아이들은 무시로 제 아버지를 찾았다." 엄마, 아빠는 왜 이케 안 와아? ... "" 아직 크리스마스가 아닌 걸?... "" 그럼 크리스마스 때는 아빠가 진짜 와아? "" 그러엄, 아마 우리 준이 로봇트랑 마징가 제트도 사가지고 오실껄?. "" 아 맞다, 그럼 아빠랑 크리스마스 때 부루 마블 게임 해야지 !... "그것은 분명 아이의 마음속에 옹달샘처럼 솟아나는 그리움이고 기대일 것이었다. 비록 한 집에 살진 않아도 눈에 안 보이는 책임감이랄까, 그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아이들은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성장해 주었고 나는 그런 자식들을 곁에서 지켜보고 챙기는 보람으로 성실하게 살았다. 나이가 아깝다거나 사람이 너무 아깝다거나 하면서 친구나 지인들로부터 중매 권유를 수차례 받기도 했었으나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왜냐하면 재혼은 내가 자식을 또 한 번 배신하는 행위란 생각이 굳세었던 까닭이었다. 자식들이 흠도 티도 없이 성장하면서 나는 자식의, 자식은 어미의 버팀목이자 정신적 지주로써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잘 살았다고 자부한다. 고해성사 같은 마음 자세로 아이들에게 전력투구한 보람이 있어 두 아들이 모두 유수한 학교의 대학원까지 마치고 이제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써 각자 제 역할을 잘 해내는 걸 보면 듬직하다. 무엇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여년 세월 동안 성실하게 아이들을 지원해 준 그 사람의 말없는 응원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약속을 지켜주었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는 아이들이 모두 일가를 이루고 난 이후, 당시 나이로 70이 내일 모래인 즈음에 황혼의 재혼을 했다고 들었다. 아이들을 통해서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청춘은 갔어도 늦게나마 옆지기를 만났다니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해 준 그의 인간적인 면이 돋보이면서도 좀 안 됐다 싶은 연민에 짜안하였다. 얼마 전, 큰아이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몇일 전에 아부지 만났는데 그때 말씀이 늬들, 엄마한테 잘 해야 한다. 늬엄마, 겉은 막강해 보이지만 속은 형편없이 여린 데가 있는 사람이다.서른셋 꽃다운 청춘에 칠십이 넘도록 늬들만 바라보고 살았으니 얼마나 장하고도 고마운 사람이냐 명심해라. " 그러더라길래 그냥 웃었다. 미루어 짐작키로는 그의 재혼이 늦어진 까닭이 어쩌면 재혼하면 내자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거나, 혹은 자식들을 위한 나름의 희생이었지 싶기도 한데, 이건 내가 잠시 해본 생각일 뿐, 진짜 속내는 모르겠다. 사선(斜線)에서 가만히 짚어보니 결코 짧지 않은 인생여정이었다. 돌아보면 안타까운 소회나 아쉬움인들 어찌 없을까만 대저 행복한 삶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 안에 기쁘고 즐거운일만 가득한 것이랴, 또 불행하다고 해서 반드시 괴롭고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다 내 할 탓이고, 생각할 나름이고, 이해할 탓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사 융통성을 발휘해서 포용할 일이었다. 여자로서의 삶은 일찌거니 포기했으나 어미로서 자식들을 위해 진리를 척도로 삼고 가치 있는 삶을 구가하느라 전력투구한 내 뚝심에 자긍심을 느낀다. 어떤 이유로든 한 순간 자식을 배반(?)했던 과거사에 아쉬움은 있을망정 살면서 갚으리라 다짐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견지에서 스스로 대견하기까지 하다.눈물 같은 허물의 때를 지양하고 참살이를 위한 일에 마음이 바빠서 실인즉 옆 돌아다 볼 여유 없이 살았다. 매사가 오직 자식들 위주의 삶이었고 또 최선을 다하는 생활이었던 만큼 그런 어미를 자랑스러워하는 자식들의 효성으로 황혼이 정녕 행복하다. 흔히들 인생 100년이 하루살이 같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더구나 시간을 허투루 쓰는 일은 없는지 살피고 금쪽 같이 아껴가며 운용할 일이다. 내게 남은 유통기한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서부터 인제는 잘 죽을 수 있는 일에 차근차근 준비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나아가서 사람답고 더욱 겸손하게 살다 가리란 각오 또한 새롭게 다지곤 한다. 찬송가 제목마냥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 초라하지만 진정 어디에나 필요하고 의미 있는 귀한 목숨 값 하면서 살다가 가고 싶다. 길고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까닭은 봄 햇살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고있기 때문이다. 근자에는 살아있음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아침이면 제일 먼저 창을 열고 동산 숲을 건너다본다. 장림(長林) 나무들의 기상이 얼마나 푸르고 청정한지 내 인생 여정을 나무에 대비해 보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매번 음미해 보게 되는 말이 있다. '인생의 황금시대는 늙어가는 장래에 있는 것이지 지나간 젊은 날의 무지에 있지 않다'는 임어당의 말이다. 여하튼 시간은,.. 세월은, 매사에 다시 없이 훌륭한 내 스승이었다.ㅡ끝 ㅡ

2019-08-08 18:14:34

조이섭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가슴에 남겨둔 한 해, 1978년/조이섭

 들어가는 말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근‧현대 번영의 빛에 가려진 가난한 그림자들의 서러운 일렁거림이다. 경제 개발 회오리의 그늘진 곳에서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더 오래 울었던 풀뿌리※1들의 한 단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체험적 고백이다.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1978년은 산업화 길목에 놓여 있었다. 중국의 개방과 제2차 석유 파동이 예고되는 등 경제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으나 정부의 가림막 역할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기업을 받쳐주어야 할 금융기관마저 경기가 좋을 때는 기업에 돈을 마구잡이로 퍼주다가 불황의 기미가 보이면 돈줄을 죄어버리는 횡포를 서슴지 않았다. 경영자는 노동자를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하며 실적과 외형 부풀리기에 바빴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웅크리고 앉아 떨고 있는 우리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자욱한 먼지를 낱낱이 드러내는 형광 등불 아래서 휴일도 없이 주야로 일했던 우리의 이야기, 지울 수가 없어 가슴에 남겨 두었던 기억의 책갈피를 들춰보기로 했다. 한 편으로는 활자화되어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움츠러들기도 했다. 문학적 상상을 핑계 삼아 미화하고 싶은 유혹을 억눌렀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도 가능한 한 사실에 입각해서 쓰려고 노력했다. 1. 새옹지마(塞翁之馬)조바심을 내며 지새우던 하루하루였다. 누님 댁에 얹혀살면서 취직 준비를 하였으나 마땅한 채용공고가 눈에 띄지 않았다. 누님은 당시 대구 근교 W 공단에서 담배포가 딸린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가게 앞에 있는 공장의 본사에서 사무직과 관리직 직원을 뽑는다고 응시해보라고 권했다. 마침 염색 분야의 연구원도 뽑았다. 내심 중화학 관련 대기업 입사를 꿈꾸고 있었던 터라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내아들 취업 소식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계실 시골의 부모님 생각을 하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필기시험 없이 바로 면접을 보았다. 부사장과 이사 몇 분이 직접 면접을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특기가 있느냐는 묻는 말에 기타를 연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면접관끼리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나가 보라고 했다. 정작 전공인 화학이나 응시 분야인 염색에 대한 질문은 꺼내지도 않았다.며칠 후, 합격 통보가 왔다. 회계 분야와 공장의 주임급 이상 인원이 많았고 염색 분야 합격자는 나 혼자였다. 일주일간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다음 날, 근무지를 발표했다."조 선생은 오늘부터 이현 공장에 발령을 내겠습니다."아니, '조이섭'이 아니고 갑자기 웬 '조 선생?' 난데없이 바뀐 호칭이 귀에 낯설었다. 이현 공장은 생산설비가 전혀 없는, 마감도 채 끝내지 않은 건물만 덜렁한 껍데기뿐인 곳이었다. 그곳에 생산설비가 들어올 때까지 직수양성소를 운영할 계획인데 나더러 책임을 맡아 달라고 했다."우선 집에 가서 며칠 지낼 옷이랑 세면도구를 챙겨서 네 시까지 오세요."총무이사는 멍하니 눈만 끔벅이고 앉아 있는 나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참, 기타는 꼭 가지고 오세요."정신이 번쩍 들었다. 면접관들이 내 특기가 기타연주라는 말을 듣고 귓속말을 할 때부터 양성소에 보낼 속셈으로 뽑은 것이 틀림없었다."저는 염색부에 지원했는데요?""염색부 발령은 양성 교육을 끝내 놓고 다시 생각해 봅시다. 자, 자. 여기서 자세히 말할 시간이 없으니 일단 짐을 챙겨 오도록 합시다. 서두르세요."황당하기는 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한번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가방 하나와 기타 한 대 달랑 들고 회사에 돌아오니 승용차가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현 공장 강의실에는 열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녀부터 마흔이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까지 서른 명 남짓한 교육생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강의실이라는 것도 공장이 완공되면 사무실로 쓸 공간에 임시로 탁자 몇 개 갖다 놓은 것뿐이었다.총무과 직원이 나를 여러분들의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교육생 명단이 적힌 종이 한 장을 건네주더니 휑하니 나가 버렸다. 끝이 어딘지도 모를 깜깜한 동굴에 혼자 내쳐진 것 같았다. 당장 7시로 예정된 개소식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교탁도 없이 이동식 흑판 하나만 덩그렇게 놓여 있는 강의실 앞에 섰다. 수십여 개의 눈동자가 신기한 듯 내 몸을 이리 훑고 저리 훑었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 나왔다."저는 오늘 처음으로 발령을 받은 신입직원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여러분과 나는 똑같은 처지입니다. 아니, 여러분 중에는 베 짜는 것을 본 적은 있을 터이니 저보다 낫네요."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옆 사람과 수군거리기도 했다. 나는 눈에 힘을 주어 외쳤다. 그것은 교육생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향한 외침이었고 다짐이었다."저는 여러분을 훌륭한 직수로 만들어야 하는 선생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여러분을 반드시 훌륭한 직수로 만들어 수료시키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믿고 따라오겠습니까?"교육생들은 내 목소리에 절실함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예!" 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술렁이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자기소개를 시켰다. 직물공장이 처음인 교육생보다 직물을 짜기 전 준비단계 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다가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현장에서 제직기술을 배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이곳에서 먹여주고 베 짜는 기술도 가르쳐 준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 반, 절실함 반으로 찾아왔다고 했다.기타를 꺼냈다. 7시로 예정된 개소식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으니 어쩌랴. 그 당시 유행하던 장은아 씨의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를 불렀다. 왜 이 노래를 불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마도 「지울 수가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가슴에 남겨둔 까닭이겠죠.」라는 가사처럼 나중에 우리들의 지금 이 모습이 무의미하지 않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7시가 되자 본사에서 관계자들이 도착했다. 곧바로 개강식이 시작되었다. 교육 기간 3주 동안의 교육일정표와 양성소에서의 생활 수칙이 적혀 있는 인쇄물을 교육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여러분은 3주 동안 여기 있는 선생님 말을 잘 들으면 직수가 될 수 있습니다. 직수가 되면 우리 회사 직원으로 바로 채용이 되고……."총무이사의 양성소 소개에 이어 회사 자랑이 지루하게 계속되었지만, 나는 교육일정표에 시선이 꽂혀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달랑 메모 한 장으로 어떻게 직수를 양성하라는 것인지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하루 기숙사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16시간의 일정표는 거의 신병 훈련소 수준이었다. 요즘 같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하면 된다'라는 사고가 어떠한 합리적인 반대보다 우선적인 가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이른 시일 내에 성과를 내기 위한 의욕이 앞서 무리하게 짠 일정표는 그렇다 치더라도 오전, 오후의 교육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문제였다. 요즘 시쳇말로 콘텐츠가 없었다. 내일 아침부터 교부(현장의 직수들을 도와주거나 관리하는 업무를 보는 사람)를 한 사람 보내주겠다는 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대학에서 배운 전공을 살려 보려고 염색연구직에 지원했더니, 교육생 뒷바라지나 하는 사감 역할이라니.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을 줄 꿈엔들 생각했으랴. 세상일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인생은 열차가 레일 위를 달리듯 딱히 정해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행복이 보장된 길은 어디에도 없다고 마음을 다잡고 보니 오늘의 이 뜻밖의 사태가 오히려 설레기도 했다. 2. 연목구어(緣木求魚)새벽에 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동살이 희붐하게 밝아 왔다. 어제 하루가 꼭 꿈만 같았다. 어쨌든 교육 첫날인 오늘을 잘 넘기는 것이 당면과제였다. 국민체조로 양성소의 첫날을 시작했다. 교육 시간에 맞춰 교부가 왔다. 호칭을 이 선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엉겁결에 불려온 이 선생도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는 나랑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는 조 선생 말만 들으면 된다고 하더란다.이 선생에게 처음 베 짰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선생은 조금 망설이다가,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곧바로 양성공으로 들어가 교부가 될 때까지 겪었던 고생담을 털어놓았다. 잠시 후 강의실 구석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교부와 교육생 가릴 것 없이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바람에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조금 있으니, 본사에서 기사 한 분이 강사로 왔다. 첫 시간에는 직기의 기계적 특성과 각 부품의 명칭과 역할을 가르쳤다. 다음 시간에는 제직의 단계를 설명했다. 교재라고는 A4 용지 두어 장에 요약한 것이 전부였다. 나도 교육생 곁에 앉아서 부지런히 메모하고 공부했다.오후에는 교육생의 눈높이에 맞춰 오전에 배운 내용을 하나하나 복습했다. 내가 제대로 설명을 못하는 부분은 이 선생이 현장의 상황에 맞게 보완해 주었다. 이론 강의가 지겨울 때쯤, 이 선생이 나비매듭 묶는 요령을 가르쳤다.나비매듭이란 실의 양쪽에 고를 내어 나비 모양으로 맺은 매듭을 말하는데, 제직할 때 실이 끊어지면 나비매듭으로 이어야 잘 풀리지 않는다. 매듭을 짓고 남은 실밥을 손 가위로 짧게 잘라주면 이은 흔적이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직수가 반드시 익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기능이었다.이 선생이 나비매듭 시범을 보였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매듭을 짓고, 쥐고 있던 손 가위로 실밥을 자르는 과정을 일 분 동안에 서른 번이나 했다. 나비매듭을 이은 자취도 깔끔했다. 교육생들은 이 선생의 재바른 솜씨를 보는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계를 앞에 가져다 놓고 나비매듭을 묶고, 실밥을 짧게 자르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일 분 동안 대여섯 개를 겨우 잇더니 차츰 스무 개를 넘기는 교육생이 나오기 시작했다.저녁 교육 시간에도 오전에 배운 이론을 복습하고 나비매듭 묶는 연습을 반복했다. 이 선생이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교육생 방 모기장 설치, 식당 보조원 충원, 종이와 연필 등 필기구 지급, 침구 안 가지고 온 교육생 3명에 대해 조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숙사 사감이 할 일이 가득 적힌 종이를 받아들고 피식 웃고 말았다.이 선생이 돌아간 후, 어린 교육생 서너 명이 강의실에 들어와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기숙사에 있던 교육생들이 하나둘 강의실에 나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튿날부터 첫날과 같은 일과가 반복되었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토요일 저녁에 외박 나갔던 교육생 두 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처로 전화했으나 받지도 않았다. 어수선한 강의실 분위기를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다른 공장에서 머리 쥐어 박혀가며 일 년을 눈치코치를 보며 따라다녀도 직수가 될까 말까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밥 먹여주고, 교육비까지 줄 때 야무지게 배워 제대로 직수 대접받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요? 갈 사람은 가고 있을 사람은 열심히 합시다."교육생 모두 내 말에 수긍하는 눈치였다.현장에서 필요한 기능 위주로 교육하기 위해 빈 공장에 직기 여덟 대를 조립해 설치했다. 직물 공장과 같은 형태로 배치해 놓고 보니 그만해도 공장 분위기가 풍겼다. 강의실에만 있던 교육생들의 얼굴에 의욕이 넘쳤다."여기서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직기로 실습하지만, 공장 안에서는 절대로 뛰지 마세요. 의욕만 앞서서 천지 모르고 서두르다가는 다치기에 십상입니다. 돈 벌러 나왔다가 예쁜 얼굴에 흉터가 남거나 불구라도 되면 어쩔 겁니까."안전에 대한 주의를 전달한 다음, 스위치 켜는 법과 직기의 어느 곳에서 실이 끊어지면 재빨리 단단하게 잇는 실습을 시작했다. 가장 어리고 키가 작은 A는 직기 앞에서 팔을 양껏 늘려도 씨줄을 꿴 종광까지 팔이 닿지 않았다. 당황한 A가 어찌하는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A는 한쪽 발을 들고 몸통을 한껏 비틀어 끊어진 실 가닥을 겨우 잡아 나비매듭을 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교복 입고 학교에서 공부할 시간에 채 자라지도 않은 키를 깨금발로 늘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고개를 돌려 버렸다.8자 형 보행 연습도 했다. 현장에서는 직기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며 크고 작은 사고를 미리 방지하거나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이때 직기 사이를 8자 모양(∞)처럼 걷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저녁부터 강의실에서 카드 교육을 시작했다. 회사의 주력상품인 깅감은 면 65%, 폴리에스터 35%의 성분인 실로 만든 옷감을 통칭한다. 깅감(gingham)은 주로 난방 감으로 쓰였는데, 체크무늬가 많고 가끔 줄무늬도 있다.체크무늬를 만들려면 씨줄은 미리 감아놓은 빔(Beam)을 이용하고, 날줄은 북을 이용한다. 색깔별로 4개의 실꾸리가 들어있는 북 집에서 북이 무늬에 맞게 순서대로 나오도록 카드를 맞추어야 한다. 카드는 손가락 하나 크기의 얇은 철판인데 OMR카드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카드를 잘못 맞추면 엉뚱한 무늬가 된다. 그래서 카드 맞추기는 나비매듭과 더불어 직수가 반드시 알아야 할 기능 중의 하나이다.본사에서 가져온 견본 원단의 색깔과 무늬에 맞게 카드를 설계하는 일은 교육생에게는 생소하고도 어려운 과제였다.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는 이해가 잘되지 않자, 실습 도중에 몇 번이나 밖으로 나가서 깊은 한숨을 토해내곤 했다. 이 선생과 나는 처음이 어렵지, 이해만 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끊임없이 격려하면서 함께 연습했다. 다음날, 텅 빈 공장 가운데 직기를 두고 열심히 실습하고 있었다. 그때, 구레나룻 자국이 검슬검슬하고 덩치가 건장한 남자가 공장 안으로 뛰어 들어와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여기서 뭐하고 있노? 모두 모여, 모여."모두 어이가 없어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선생이 깜짝 놀라 그 사람 앞으로 가서 깍듯이 인사했다."사장님, 안녕하십니까?"신입사원 O/T 때 사장님이 외국에 출장 갔다더니 돌아온 모양이었다. 사장은 교육생을 향해 8자 걸음을 아느냐고 물었다. 알고 있다고 대답하니,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탁탁 내리치며 소리가 작다고 소리쳤다. 교육생들은 주눅이 잔뜩 든 채로 큰 소리로 "예"하고 대답했다."자, 모두 한 줄로 서서 내 뒤를 따라와."사장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직기 사이로 8자를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교육생들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마치 한 무리의 병아리가 어미 닭을 따라가는 꼴이었다. 그런데 걷는 속도가 거의 구보 수준이었다. 병아리들은 숨이 가빠 헐떡거렸지만,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뛰었다. 한참을 그렇게 뛰다가 사장이 구보를 멈추고 교육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교육생들이 교육장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사장이 곧바로 구령을 붙였다."자, 나비매듭 준비!""시작!"교육생들은 일제히 나비매듭을 매고, 가위로 자르고, 다시 매고 자르고를 반복했다. 교육장 안은 사각사각 가위소리만 날 뿐, 마치 절간 같은 고요가 감돌았다. 시계를 보고 있던 사장이 "그만" 하고 외쳤다. 교육생들이 맨 매듭을 하나하나 확인해보더니 "다시 준비", "시작", "그만"을 몇 번이나 외쳤다. 교육생 대부분이 나비매듭을 일 분에 서른 개 이상 깔끔하게 매는 것을 본 사장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다음에는 사장이 원단 하나를 꺼내더니 이 무늬를 짤 수 있게 카드를 설계하라고 했다. 사장은 테이블 주위를 돌면서 "빨리, 빨리"를 주문 외우듯 했다. 교육생들은 예의 그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딱딱 치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다 했다고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사장은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이 쌩하고 타이탄 트럭에 올라타고 공장을 빠져나갔다.그날 저녁에 예고도 없이 총무이사가 방문했다.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사장이 낮에 불러서 갔더니 현장에 투입해도 될 교육생들을 거기에 오래 붙잡아 두지 말고, 당장 내일부터 공장으로 배치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총무이사는 막무가내였다. 사장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어쨌든 내일부터 야생의 정글인 현장으로 가서 실습해야 한다. 이런저런 걱정에 빠진 나에게 이 선생은 제자들을 믿으라고 했다. 교육생들이 잘 해낼 거라고 안심시켰다. 3. 천방지축(天方地軸)실습을 나가기로 한 1공장에서 통근버스를 보내왔다. 공장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렸다. 공장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교육생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은 직기든 무엇이든 절대 손대지 말고 눈으로 구경만 하라고 했다.이 선생과 함께 공장 안에 들어가 교육생을 한 사람씩 손을 이끌고 직수와 앞앞이 짝을 지어 주었다. 이 선생이 실무를 지도하는 동안, 나는 직수에게 잘 부탁한다며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 사무실로 가서 남은 교육 일정을 점검했다. 교육생들을 공장 안으로 들여보낸 지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이곳에 근무하는 직수 한 명이 울면서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공장장님, 양성공이 북을 끼워서 실을 이백 개나 넘게 끊어 먹었어요."쏜살같이 말을 내뱉자마자 쪼그리고 앉아 펑펑 우는 것이 아닌가. 바로 뒤따라 이 선생이 들어왔다."OO야 실 끊어진 것 내가 다 이어 줄게. 어서 들어가자. 네가 양성할 때 생각해야지." 하면서 어르고 달래서 데리고 나갔다. 이 선생이 이 공장에서 일했던 교부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 소동이 일어날 판이었다. 이 선생의 텃밭인 1공장에서 일주일 정도 실습을 하려고 계획했으나 교육생들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사고 때문에 사흘 만에 쫓겨나고 말았다.양성공들이 현장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다른 공장에도 퍼져 버렸다. 마땅히 실습하러 갈 만한 공장이 없었다. 본사에서 교육생을 받으라고 지시를 내려도 납기 문제를 들이대며 거절하는 데야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공장마다 서너 명씩 조를 짜서 나누어 보내기로 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그러나 교육생들을 시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공장에 데려다주고, 데려 오는 것이 문제였다. 말썽만 부리는 양성공을 데려가기 위해 일부러 통근버스를 내어 주는 공장이 없었다. 본사도 차량 사정이 어려운지, 원사나 제품을 싣고 다니는 타이탄 한 대를 보내주었다.짐칸에 녹색 비닐을 덮어씌운 트럭에 교육생들을 태웠다. 사람이 짐칸에 타는 것은 도로교통법 위반 인지라, 들키지 않으려고 밖에서 볼 수 없도록 조그만 틈도 없이 천막을 쳐 놓았다. 이미 6월 초순이라 짐칸 안은 찜통같이 더웠다. 짐칸에 제대로 잡을 손잡이가 있을 리 없었다. 교육생들은 오가는 내내 가장자리에 기대앉아 두 팔로 서로를 껴안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저녁이 되면, 교육생들은 다시 강의실에 모여 낮에 꾸중을 들었거나 실수한 일을 말하고 또 들었다. 이 선생은 현장에서 교육생들이 자주 하는 실수를 살펴 두었다가 나무라기도 하고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교육생 대부분은 감수성이 넘치는 어린 소녀들이었다. 누가 꾸중을 들으면 자기가 잘못한 양 시무룩해졌고 칭찬을 받으면 제 일처럼 좋아했다.이야기가 끝나면, 내가 반주하는 기타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그때 강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타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검정색 점프를 입은 두 사람이 경비실에 켜진 희미한 외등 아래에서 나를 막아섰다. 캄캄한 공단에서 왜 노래를 부르느냐고 했다. 직수 양성소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로 노래를 부른다고 대답했다. 형사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운동권 인사가 산업체에 침투하여 학습하는 것 같다는 신고가 들어 왔다고 했다. 그들은 노랫소리가 담 밖을 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교육생들에게 형사가 다녀갔다고 했더니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선생님, 우리 노래 더 크게 불러요."어느 날이었다. 교육생들이 기숙사로 돌아간 후에 사무실에 남은 일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자정을 넘어 한 시 가까이 되었다. 사장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조 선생, 양성 교육은 잘 되고 있습니까?"이때다 싶어서, 양성소 현황을 간단히 설명한 후에 불편한 점을 말했다."날씨는 점점 더워 오는데 차가 없어서 이동하기 어렵습니다. 버스를 배차해 주시면 좋겠습니다.""사장인 나도 지금 트럭 짐칸의 실뭉치 위에서 자면서 서울에서 내려왔소."그 말 한마디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을 넘고 가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녹색 비닐을 덮은 타이탄으로 교육생을 운송하는 기막힌 묘안도 사장이 낸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교육생을 데려다주고 마지막 공장의 사무실에 들어가 막 앉으려는데 경리직원이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교육생을 처음 내려준 공장의 공장장이었다. 아이가 다쳤으니 빨리 오라고 했다. 아이는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병원에 보냈다고 했다.급히 되돌아 가보니 교육생 네 명이 공장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올망졸망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한꺼번에 울음을 터뜨렸다."울기는 왜 우노? 다쳤다더니 누가 다쳤노?"B가 힘없이 손을 들며 말했다."제가 스위치를 잘못 넣어 북이 날아가 직수 언니 이마에 맞았어요."직기마다 성능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북이 오가는 속도와 리듬에 잘 맞추어 스위치를 넣어야 한다. 그런데 교육생이 실수하는 바람에 북이 씨줄을 끊으면서 하늘로 날아가 엉뚱한 곳에 있던 직수의 머리를 맞춰 버렸다.다행히 병원을 다녀온 직수는 이마 옆 부분에 반창고를 붙이기는 했으나 큰 부상이 아니라고 했다. 사과를 거듭하며 몸 둘 바를 모르는 나에게 웃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조 선생님, 사실은 그 직기가 원래 밸런스가 잘 맞지 않아서 숙련공이 운전해도 가끔 말썽을 부려요. 북을 날린 B는 일도 잘하고 착합니다. 너무 꾸짖지 마세요."갑자기 물방울 스카프를 쓴 그녀가 천사로 보였다. 그녀의 의연한 모습과 말에 용기를 얻어 공장장에게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오후에는 이 선생을 여기로 데려와 교육생을 지도하겠다고 했으나 막무가내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면 총무이사에게 보고하겠다고 했더니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자정이 넘어 막 숙소에 들었는데, 누군가 방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식당 아줌마였다. 아줌마 곁에는 교육생 C가 배를 부여잡고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아줌마 말로는 아무래도 맹장염 같다고 했다. C를 사무실에 앉혀 놓고 본사 당직자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보내 달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통금도 통금이려니와 컴퓨터는커녕, 집집이 전화도 없어서 C의 집조차 연락이 되지 않았다.병원에 도착해서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누른 끝에 의사가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턱 짓으로 따라 오라는 시늉을 하고 먼저 진료실로 들어갔다. C는 겁먹은 표정으로 의사 뒤를 절뚝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벽에 걸린 시계는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잠시 후, C가 나왔다. 그런데 들어갈 때와 달리, 아픈 표정이 아니었고 다리도 절뚝거리지 않았다. 뒤따라 나온 의사는 쓸데없이 잠만 설쳤다고 투덜댔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배에 맹장 수술 자국이 있었다고 했다. 맹장은 한 번 잘라내면 다시는 걸릴 일이 없기 때문에 정말 아프냐고 다그쳤더니 그제야 거짓말이라고 털어놓더라고 했다.C는 고등학교에 다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하고 양성소에 왔는데 그나마 교육생 중에서는 나이가 많은 축이었다. 그런데도 엄마 품을 떠나 하루에 16시간씩 실습하고, 개인 시간이라고는 잠시도 없는 합숙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그런 철없는 꾀까지 생각해 내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C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밖에 내가 할 일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 공단의 새파란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크고 작은 사고 없이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었지만, 교육생들이 꾸중 들었다는 소리보다 칭찬받았다는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언니 없이 혼자서 직기를 4대나 보았다고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이제 천덕꾸러기 신세를 벗어나 직수에게 도움을 주는 수준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직수들이 서로 교육생을 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실습을 처음 나갔을 때, 그렇게 손사래를 치던 공장장들도 아무개, 아무개는 양성 교육을 마치면 꼭 자기네 공장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하지만, 처음 30명으로 시작한 교육생들이 시나브로 한두 명씩 자취를 감추었다. 토요일 집에 가면 일요일 저녁까지 양성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꼭 돌아올 것 같은 차림으로 나가서는 그 길로 끝이었다. 여기서 취직이 된다고 해 봐야 양성공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직수라고 속이고 다른 공장에 취직하는 것이 낫다는 속셈이었다. 교육 막바지까지 이리저리 다 베이고 남은 인원은 열여덟 명뿐이었다.1기 교육생들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과일과 음료수, 과자를 준비했다. 식당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떡도 준비했다.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독창을 했다. 그동안의 소감을 말할 때는 이야기 반 울음 반, 울다 웃기를 거듭했다. 내일 아침이면, 비록 양성공 신분이지만 회사의 직원이 되어 떠날 것이다.아무 준비 없이 엉성하게 시작한 교육을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나마 무사히 마친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직수가 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심지 말고, 더 큰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면서 수료를 축하해 주었다.다음 날 아침에 교육생들을 떠나보내고, 오후에는 2기 양성 교육생들이 새로 입소했다. 그렇게 교육생들이 두 차례 더 입소하고 수료했다. 4. 좌충우돌(左衝右突)양성소로 쓰던 이현 공장은 새 직기를 들여놓고 조립이 한창이었다. 양성소를 곧 비워야 했다. 이현 공장의 생산설비 완공이 가까워지기도 했지만, 양성 교육을 원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현실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본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양성 교육을 접기로 했다.함께 일하던 이 선생은 원래 있던 공장으로 돌아갔지만, 내 거취가 문제였다. 입사할 때 염색 분야의 연구직을 희망했으나 그것은 허망한 바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염색부는 밀려드는 물량을 처리하기도 바쁜 실정이었고 연구투자비도 없었다. 하릴없이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데 본사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3공단의 2공장이 무너졌으니, 가서 바로 세우도록 하세요."총무이사가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두 줄짜리 발령장을 내밀며 부연 설명을 했다. 2공장 공장장이 다른 공장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마음이 떠버렸는지 공장 운영에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 선생을 보내 공장장 역할을 맡기라는 사장님 지시이니 잘 해 보라고 했다.의외의 발령이었다. 기껏해야 총무과의 문서 처리나 관리과의 시설 관리 업무나 맡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장장 역할이라니. 거기다 2공장은 회사에서 직영하는 공장 중에서 규모 면이나 직원 수로 보아 두 번째로 큰 공장이었다. 2공장 사무실에 들어가니, 공장장과 서무계장 그리고 여경리직원 등 세 사람이 덤덤하게 맞아주었다. 공장장은 창밖을 내다보며 담배만 잇달아 피워 댔다. 우선 2공장에서 당장 내가 있을 곳을 정해야 했다. 경비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공장장에게 숙직실에서 지내겠다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공장을 둘러보았다.직기가 100여 대 가까이 되고 전체 직원은 80명이 넘었다. 입사한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은 새파란 신입직원에게 이런 큰 공장을 맡긴 회사의 처사가 언뜻 수긍하기 어려웠다. 여기에서도 '하면 된다.'라는 논리가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었다. 경영진에서는 신입직원인 내가 양성 교육을 그런대로 감당했으니 여기서도 한몫을 해낼 것이라는 심사였을 것이다. 어쨌든 다시 한번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아무리 궁리해 봐도 내가 직접 생산에 기여할 방법이 없었다. 전문적인 기술도 없는 주제에 섣불리 공장장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서 설칠 계제가 아니었다. 우선 신입직원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공장 안팎의 환경정리부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생산에 투입된 직원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사무실의 박 계장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사람 좋은 그는 흔쾌히 따라 주었다.공장 건물 바로 맞은편에 있는 벽돌과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은 단층 건물을 여자기숙사로 쓰고 있었다. 방이 열 개 정도 이어져 있었다. 방문에 발을 치거나 원단 자투리로 가리고 잠을 자는 형편이었다. 반대편에 난 창문은 방충망이 떨어져 너덜너덜했다. 방충망을 사서 교체하고, 공장에서 생산되는 천으로 방마다 커튼을 만들어 달았다. 비록 값싼 것이지만, 방문의 발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선풍기를 방마다 넣어 주고 싶었으나 우선은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보기 흉한 화단과 가림판도 깨끗하게 정비했다. 공장 건물과 기숙사 건물 사이에 있는 화단은 말이 화단이지 잡초만 무성했다. 화단의 잡초를 몽땅 뽑아 버리고 호미로 화단의 흙을 반듯하게 다듬었다. 화단 가운데에 나무로 만든 가림판이 있었다. 가림판은 흰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일부는 부서져 보기 흉했다. 부서진 부분은 크기에 맞춰 나무로 덧대고 못을 박았다. 그다음에는 흰색 수성페인트를 사다가 칠을 했다. 박 계장이 앞서 나가면서 초벌칠을 하면, 나는 마르기를 기다려 뒤따라가며 한 번 더 칠했다. 화단과 가림판이 깨끗하게 정비된 것을 보고 직원들도 싱글벙글했다. 나는 이곳에서도 잠자리뿐만 아니라 삼시 세끼도 공장에서 해결해야 했다. 직원들이 교대를 마친 후에 식당에 가서 혼자 밥을 먹었다. 이현 공장에 있을 때 보다 음식이 기름졌다.어느 날 직원들이 식사하는 중에 식당에 들어갔더니 직원들 앞에 놓인 밥이 새까맣고 반찬도 형편없었다. 어제 장을 못 봐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잠시 후, 내가 식사하러 식당에 갔더니 내 밥상에는 흰 쌀밥에 두툼한 갈치 토막이 구워져 있었다. 식탁에는 식당 아줌마와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경리 아가씨가 함께 앉아 있었다. 그네들 앞의 식판에도 쌀밥과 고기 토막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조금 전, 직원들이 먹었던 음식과 우리 밥상 차림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납니까?""원래부터 이렇게 했습니다."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수저를 드는 것이었다."아니, 원래 그렇다니요? 조금 전 어린아이들이 멀건 국물에 숟가락을 담그고 빈 입맛만 쩍쩍 다시던데. 그래, 이 하얀 쌀밥이 넘어갑니까.""오늘부터 당장 상 따로 차리는 짓 그만두세요! 나도 식사 시간에 직원들과 같이 먹겠습니다. 경리 아가씨는 밥 먹고 나 좀 봅시다."식탁에 소리가 나도록 수저를 내동댕이치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씩씩거리고 앉아 있으려니 경리 아가씨가 뒤따라 들어왔다."식자재값은 어디서 받습니까?""본사에서 일주일 치씩 내려옵니다.""그것으로 정말 아이들 먹는 반찬을 그 정도밖에 못 차립니까? 내가 교육생들과 다른 공장 식당에서도 이렇게 박한 반찬은 본 적이 없는데요."식당 아주머니를 따로 불렀다. 어린 직원들을 우리가 엄마처럼, 삼촌처럼 돌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끔하게 나무랐다.그렇지 않아도 변변찮은 식비를 몇몇 사람의 몫으로 따로 떼어 놓았으니 직원들의 반찬이 나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바꾸어 버렸다. 다음날부터 식당의 반찬이 확 달라졌다. 식당 밥이 입에 맞지 않아 공장 앞 구멍가게에 드나드는 직원 숫자도 줄어들었다.야간 근무조가 공장에 투입되고 나면, 나는 또 다른 임무를 수행했다. 교부나 나이 많은 직수들의 말에 따르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어린 준비공들은 공장 앞 구멍가게에 드나들면서 고생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써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밤 열 시가 넘으면 정문 경비실에서 나이 어린 직원들의 외출을 금하는 일도 내가 할 일이었다.어느 날, 방금 외출에서 돌아온 온 D가 또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오늘은 안 된다고 달래서 들여보냈다. 한참 후에 경비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담벼락 아래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달려갔더니 D가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사무실에 데려가 다친 발에 얼음찜질을 시키고 기숙사로 돌려보냈다.이튿날 시골에 있는 집으로 연락했더니, 어머니가 부리나케 올라오셨다. 나 때문에 귀한 딸을 다치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내 말을 듣고 난 어머니는 오히려 D를 나무라면서 말 안 들으면 때려서라도 인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것이었다. 마치 초등학생 담임 선생님처럼 믿고 대하시니 몸 둘 바를 몰랐다. 가실 때, 차비가 든 봉투를 손에 쥐여 주었더니 손사래를 쳤다. 외려 정신이 없어 빈손으로 와서 미안하다면서 봉투를 바닥에 내던지고 나가셨다. 나는 소파에 앉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D에게 말했다."빨리 나가서 엄마 배웅 안 하고 뭐 하노?"D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갔다. 보름이 지나자 공장장이 떠났다. 그는 사무실에서 마련하겠다는 송별식도 마다하고 떠났다. 이제 공장 운영 책임을 오롯이 나 혼자 떠맡게 되었다.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공장의 환경개선을 마치고 생산성 향상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고치기 쉬웠다. 혼자서 생각하고 내 몸을 움직여 할 일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장 안의 미묘한 인간관계는 달랐다.현장에는 주•야간 주임 기사가 따로 있었는데 서로 자기 기술이 한 수 위라고 자부하며 상대방을 헐뜯었다. 요즘처럼 무슨 국가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경험으로 쌓은 기술이고 기능이다 보니, 같은 증상을 보이는 고장이라도 기사마다 고치는 방법이 서로 달랐다. 낮에 어느 직기가 말썽을 부려 수리해 놓으면, 야간 담당 기사는 기계를 엉터리로 만져 놓았다고 다투었다.문제가 많기로는 직수도 마찬가지였다. 낮에 맡은 직기를 밤에 교대하는 직수에게 인계인수를 해 줘야 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으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두 사람의 기능이 차이가 나거나 업무 연결이 순조롭지 않으면 상대 직수를 바꾸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바꾸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기 손에 익은 직기를 바꾸는 것은 개별 노동의 강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부 직수는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아무 말 없이 결근하거나 심하면 짐을 싸서 나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같은 직기를 주야 다른 직수가 운전하다 보니 누가 많이 생산하고 적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열심히 하자고 얘기해 보았자 헛구호에 불과했다. 작업자에게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몇 날 며칠을 고심하고 연구한 끝에 개별 생산량을 정확하게 점검할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일주일 동안 내가 고안한 방법으로 점검해 보니 직기별로 주야의 생산량을 정확하게 산출할 수 있었다. 현장의 주임들에게 그 방법을 알렸더니 온갖 이유를 들어가며 불가하다고 우겼다. 나는 그들이 안 된다고 설명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직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직기별, 직수별로 월간 생산량 통계를 내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포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개별 생산량을 계량하기 시작하자 공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획기적일 만큼은 아니지만, 생산량이 조금씩 증가하였다. 사실은 생산량 증가와 같은 외형적인 성과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생산량 점검을 계기로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보상을 더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2공장에 온 후에 좌충우돌(左衝右突)한 덕분인지, 공장 분위기가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생산이 원활해졌다. 생산 실적 순위가 8개 공장 중에서 상위에서 오르내렸다. 그 포상금으로 가을에 전 직원이 경주로 야유회를 갈 수 있었다. 2공장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모두 즐거워했다. 5. 사상누각(砂上樓閣)찬바람이 불면서 회사가 갑자기 부도 위기설에 휩싸였다. 직수 난이 심각했던 경쟁 공장에서는 그 소문을 빌미로 우리 공장이 곧 망한다면서 직수들을 꼬드겨 내기 바빴다. 엎친 데 겹친다더니,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독여야 할 주임 기사 한 사람이 직수 2명에다 양성공 2명까지 데리고 다른 공장으로 가버렸다.이들이 떠나자 당장 낭패가 났다. 직수와 양성공에게 직기를 추가로 배정하였으나 생산량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8개 단위공장 중에서 1, 2위를 자랑하던 실적은 고사하고 납기를 맞추기조차 벅찼다. 직원들에게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도와 달라고 호소하기는 한계가 있었다.부도 위기에 처한 회사에서 다른 공장의 직수를 구해 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 이직률 때문에 월급을 한 달씩 눕혀서 지급하고 있는 마당인지라, 오히려 체불을 염려해서인지 한 명 두 명 회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그런 와중에, 본사가 은행 감리에 들어갔다. 이른 시일 내에 채무를 변제받는 것이 목적인 은행 입장에서는 수출 일선에서 상품을 개발하고 기술을 축적한 중소기업의 고군분투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의 규모로는 적지 않은 오천만 불 수출탑까지 수상한 전도양양하던 회사도 세계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침몰하기 시작했다.때마침, 전국적으로 노동조합 설립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1공장에서도 노조 설립 신고를 하였다. 은행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1공장의 준비공정 분야와 염색 공정 파트를 폐쇄하고, 직수들만 다른 공장에 분산 배치하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수들은 다른 회사로 떠나 버렸다. 귀중한 기능 인력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셈이었다. 가동을 멈춘 준비 공정과 염색 분야에서 일하던 직원 오륙십 명만 남아 온종일 집회를 계속했다. 회사에서는 노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해고를 하지는 못하고 농성 중인 직원을 본사로 출근시켜 한 곳에 집결시켰다.그러던 어느 날, 본사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총무이사가 내일부터 여기 와서 모아 놓은 노조원들을 재교육시키라고 했다. 2공장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무래도 2공장마저 포기하는 눈치였다.2공장으로 돌아와 저녁 교대 시간에 전체 직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석 달 전에 공장장이 송별식 없이 떠난 것처럼 나도 서둘러 빠져나왔다. 공장을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못한 채 떠나야 하는 아쉬움 때문에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시커먼 공단 길을 지나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본사로 오는 발걸음은 마치 귀양길에 오른 죄인처럼 무겁고 처량했다. 때 이른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이튿날, 총무이사가 나를 노조원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들을 모아놓은 방에는 의자도 제대로 없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삼삼오오 맨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본 거제도 포로수용소 같았다. 출고 제품을 임시로 보관하는 창고에다 휴식 시간과 점심시간을 제외한 8시간을 감금하다시피 몰아 넣어놓은 것이었다.은행에서는 이렇게 푸대접을 해야 김이 빠지고 지쳐 하루라도 빨리 나가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속셈이었다. 말이 재교육이지, 노조원 감시하는 일을 나에게 맡긴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나, 부도 처리된 회사에서 내가 어찌 해 볼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농성자 면면을 살피다 보니, 사촌 동생과 조카 얼굴도 보였다. 1공장에서 준비 일을 하다가 여기로 온 것이었다. 다른 데 갈 곳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갈 데는 있지만, 퇴직금이나 해고에 따른 보상은 일언반구도 없이 무조건 나가라고만 하는 은행의 행태가 괘씸해서 이렇게 투쟁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농성자들도 이렇게 출근 아닌 출근을 하면, 쥐꼬리만큼이나마 기본급은 나오니까 버틸 때까지 버티겠다고 했다.총무이사에게 이런 사실을 전했다. 총무이사는 그러니까 그들을 잘 설득해서 내보내라고 조 선생을 여기 데려오지 않았느냐고 되레 반문했다. 짜증이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 어제는 미안한 마음이라도 묻어 있더니, 오늘은 안면을 싹 바꾸었다. 하기야 자기도 곧 잘릴 판이니, 내 입장이나 농성장 사람 처지를 돌아볼 여유가 있을까 싶었다. 총무이사도 은행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 앞에서 고양이 앞의 생쥐 꼴로 쩔쩔매는 상황이었다.다음날, 총무과 직원에게 은행 책임자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농성장 교육 담당으로 온 아무개라고 인사했다."부장님, 수고가 많으십니다.""그래요? 아무튼 잘 설득해서 빨리 마무리되도록 부탁드립니다.""부장님 같으면 쉽게 나가겠습니까? 회사가 어려워 감원하는 것이야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은행에서 점령군처럼 나와서 아무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공장 문을 닫고 출근을 저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반대 농성을 하니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가두어놓고 감옥살이를 시키고 있으니 화가 날 대로 나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우선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야 됩니다. 이건 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은행을 위해서입니다."내 말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툭툭 튕겨내던 부장이 은행을 위해서라는 말에 갑자기 고개를 쑥 빼 밀었다."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이 사람들도 공장 밖에서는 대부분 이 은행 고객이지요. 이분들이 밖에 다니면서 좋은 소리 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우선, 교육장을 사람이 있을 만한 곳으로 만들어 주세요." "책상이나 의자 같은 집기 말씀입니까? 예산을 들일 여유가…….""공장 뒤편에 많이 쌓여있는 원사나 제품을 포장했던 나무로 평상을 만들고 그 위에 깔 장판 값만 조금 들이면, 그래도 있을 만하지는 않겠습니까? 그 이후에 그 사람들의 마음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는 역할은 제가 감당해 보겠습니다.""음, 한 번 의논해 보지요."잠시 후, 총무이사가 농성장에 부리나케 내려오더니 당장 작업을 시작하라고 했다. 오후부터 농성자 중에 일머리 있는 분이 지시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지런히 도왔다. 모두 현장에서 오래 계셨던 분이라 시멘트 바닥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것보다 신이 난 모습이었다. 사흘에 걸쳐 작업을 끝냈다. 흡사 군대 내무반 같은 평상이나마 내 집 안방에 앉아 있는 기분이라고 좋아했다.자리가 조금 편안해지기는 했으나 온종일 얼굴만 마주 본다고 어떤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씩 요구사항을 말해 보라고 했다. 모두 열변을 토했다. 나는 노트에 열심히 메모했다. 그러나 기록한 내용을 어디 전달할 데가 없었다. 그들도 내가 하는 시늉이 허망한 짓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회사 측 사람이라고 믿는 내가 경청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슴에 맺혀 있던 말을 마음껏 토로해서 후련하기는 했겠지만, 밀려드는 공허함마저 달랠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 사이, 일자리 구하기가 손쉬운 여자 준비공이 하나둘 눈에 띄지 않았다. 여기서 더 기댈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진해서 퇴사했다. 남자 준비공도 시나브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염색부의 나이 드신 분들은 새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줄어드는 인원을 매일 이 층 사무실에 보고했다.하루하루가 참담하게 지나가는 중에도 위안거리가 있었다. 본사 부속 공장에는 양성소에서 교육받았던 교육생들이 벌써 직수가 되어 있었다. 가끔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만나면 다 큰 처녀가 반갑다고 폴짝폴짝 뛰면서 매달렸다. 멀리서 "선생님." 하며 손만 흔들어도 그날은 종일 기분이 좋았다. 회사는 청산 단계로 접어드는 듯했다. 사무실 직원들이 곧 정리 해고될 것이란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았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세모에 송년회를 한다는 공고가 났다. 사무실 책상을 적당히 밀고 붙였다. 그 위에 차린 것이라고는 간단한 다과와 주류 그리고 안주 몇 가지가 고작이었다. 전(前) 사장을 비롯한 간부와 단위 공장 책임자들도 모두 모였다.사장의 인사는 사실상 퇴임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사장의 목소리는 공장 담을 타고 넘던 패기 그대로 쩌렁쩌렁 울렸으나 우리가 듣기에는 공허하기만 했다. 수출 대금을 담보로 땅을 사고, 그 땅을 담보로 공장을 짓고, 또 공장을 잡혀서 운영자금을 대출받아 일으켜 세운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다.송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부도설이 나기 시작하자 능력 있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사표를 내고 떠났기 때문에 더욱 착잡했는지도 모른다. 사회자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까무룩 가라앉고 말았다. 일부 여직원들의 흐느낌 속에 송년회는 흐지부지 끝이 나고 말았다.이튿날 아침, 예상대로 인사 발령 공문이 게시판에 붙었다. 사무실 직원과 공장 관리직원의 반이 넘는 인원이 퇴직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총무이사 이름도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었으나 내 이름은 없었다.한 달 후, 회사 청산에 필요한 사람만 남기고 그나마 남아있던 직원 대부분이 또 잘려나갔다. 이번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내가 회사에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남아있는 농성자들을 은행에서 직접 관리하기가 껄끄러워 목숨 줄을 이어놓은 것이리라. 그러나 그때까지 목을 늘이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이 층 청산사무실의 부장 책상 위에 하얀 봉투를 내려놓았다. 아직 남아있는 농성자의 까칠한 손을 마주 잡고 얼른 좋은 자리 잡으시라고 인사한 후 정문을 나섰다. 경비실의 낡은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영화배우 최은희 씨가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치되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얼마 후, 회사가 완전히 문을 닫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 나가는 말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대구는 섬유 도시로 성장했다. 그 기반은 우리들과 같은 지역의 기능 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가난했지만 삶의 열기로 가득 차 몸부림쳤던 그분들의 가치가 폄하되거나 묻혀서는 결코 안 된다.직수 양성소, 직물공장, 농성장에서 일했던 경험은 내 삶의 귀중한 밑바탕이 되었다. 비록 자랑하고 내세울 만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1978년을 지금까지 지우지 않고 가슴속에 남겨두었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더 오래 울었던 그분들이 벌떡 일어나 함박웃음을 짓는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그 당시 상황의 일부나마 글로 남길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곳에서 만났던 모든 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1: 김수영 시인의 시, 에서 차용

2019-08-08 18:14:23

이정실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폭풍이 일어난 날 /이정실

▶ 포성이 들리던 날1950년 경인년(庚寅年) 유월 마지막 일요일 새벽, 햇살이 얇은 창호지 문틈을 뚫고 나의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늦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인정이 많고 다정하며 부지런한 봉서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어둑어둑한 새벽녘부터 안방은 물론 문지방, 대청, 부엌, 마당, 장독대 등 집안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대청소한다. 이날도 그런 대청소를 하다가 봉서와 내가 잠자고 있는 방의 툇마루를 털고 닦으면서"일어나라. 일어나라∼. 어서∼! 해가 동천에 훤하게 떴다"고 큰소리로 다정스럽게 말하다가 연달아"방문을 활짝 열고 맑은 공기로 바꿔라""꼬리 꼬리하고 퀴퀴한 총각냄새가 나지 않도록 해라"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앉았다가 봉서 어머니의 청소가 끝난 뒤에 잠자던 방을 봉서와 함께 청소했다.나는 지난해 상경해 서울성북구돈암동 전차종점부근에 살고 있는 우리 집과 친분이 두터운 집에서 두 살 연하인 그 집 외동아들 봉서와 함께 한 방에서 기거하고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봉서 부모는 나의 후견인이 되어 있었다.그날은 고향에서 하숙비와 잡비 등을 보냈다는 편지에 적힌 인편을 한국은행 사택에서 만나기로 약속된 날이다. 평소에는 우체국으로 보내던 것을 이번 달은 인편으로 보낸 것이다.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 4가 전차정거장에 내렸다가 서울역으로 가는 전차를 갈아탔다. 서울역 전차정거장에서 용산구후암동에 있는 그 당시 국방부 앞을 거쳐 한국은행 사택에 갔다. 만나기로 약속해 둔 편지에 적힌 인편은 상경을 늦추어 허탕만 쳤다.돌아올 때도 갈 때처럼 국방부 앞을 지나왔다. 갈 때는 정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아 분주했다. 올 때는 갈 때와는 달리 정문 옆 출입구 한쪽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어 출입자를 제한하고 있었다. 또 갈 때는 정문 안쪽 기관총 사격대에 근무병이 없었는데 올 때는 완전무장한 두 병사가 앉아 있어 으스스했다. 그들은 언제라도 명령만 떨어지면 기관총을 사격할 태세도 갖추고 있었다.국방부 앞을 지날 때는 정오가 막 지났고 올 때는 오후 1시쯤이었다. 불과 1시간도 안 된 사이에 국방부 주변의 모습은 달라도 엄청나게 달랐다. 그곳 주변에는 녹음이 우거진 한 그루의 노송이 있었다. 그 노송 밑은 그늘져 있어 바람을 쐬러 온 주민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삼팔선에서 일어난 이번의 국군과 인민군 충돌은 보통 때와는 달리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소곤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 봉서 집에 기거하고 있는 방은 한낮이 되니 통풍이 신통치 않아 무더웠다. 이웃에 사는 두 급우 준병과 종록을 만나 시원한 바람이 부는 그늘진 곳에 갔다. 그곳에서 낮에 본 국방부 분위기와 그 지역 주민들이 소곤거리는 말을 들은 대로 말해 주었다. 인민군은 평소에도 남북의 경계인 남쪽 송악산 삼팔선에서 심심찮게 공격했다. 그때마다 국군은 수복하느라 가벼운 충돌이 있었다. 그들은 그 정도 충돌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그들과 함께 서울 북쪽 경계인 미아리 고개로 오르는 대로에 연결된 돈암동 전차종점 길 건너편에 살고 있는 또 다른 급우 기환이를 만나러 갔다. 그 당시는 큰길에도 횡단로 표시가 없어 누구나 자유로이 길을 건너게 되어있다. 그런 것을 그때는 육군 헌병의 수신호에 의해 건넜다.저녁노을이 지자 외출이나 휴가 중인 군인을 실은 군용트럭을 비롯해 민간트럭, 시외버스 등 각종 차량들이 헌병의 수신호에 의해 미아리 고개로 쏜살 같이 달리고 있었다. 한편, 그 고개에서 내려오고 있는 차량 속에는 부상한 장병들이 신음하는 고통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또다시 인민군이 공격한 이번 삼팔선의 충돌을 끝으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음 날 월요일, 종로구혜화동 로터리 동쪽에 있는 동성고등학교 운동장 조회 때 단상에 올라선 교장선생님은 국군이 외출이나 휴가를 간 일요일 틈을 타서 인민군이 남침을 하고 있다. 국군은 실지를 곧 회복할 것이다.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학교는 정상 수업한다. 추호도 동요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서는 인민군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국군과의 충돌보다 더한 대대적인 남침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교장선생님 말씀과는 달리 단축수업을 했다. 하교 때 학교 앞 전찻길 인도에는 간밤에 인민군에게 침공당한 경기도동두천지역에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종로 쪽 인도로 걸어가고 있는 농민들이 띄엄띄엄 줄을 잇고 있었다. 그들은 시내에서 볼 수 없는 달구지를 몰고 있었다. 어떤 농민은 맨발로 핫바지의 아랫도리를 걷은 채 농기구와 봇짐을 지게에 지고 있었다.언뜻 생각나는 것은 '수도 서울도 안심할 수 있겠는가?'설마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그날이 지난 다음 날도 학교는 단축수업을 했다. 귀가한 대낮부터 봉서 집 동네는 포탄이 터지는 소리인지, 떨어지는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쿠쿵∼쿵, 쿠쿵∼쿵'거리는 가느다란 소리가 미아리 고개 너머 먼 하늘에서 심심찮게 들렸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깝고 크게 들리고 있어 몹시 불안했다. 한편,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경기도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대통령 담화를 뉴스 시간마다 방송하고 있었다. 의정부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없어 그 담화는 알쏭달쏭했다. ▶ 대피하러가던 날여느 때보다 좀 일찍이 퇴근한 봉서 아버지는 정세가 신통치 않음을 지레짐작한 것인지 저녁을 빨리 끝내도록 했다. 그의 아들 봉서와 며칠 전 경북의성에서 다니러 온 나보다 한 살 연상인 봉서의 큰집 형, 주방 일을 맡고 있는 예쁘장한 아가씨, 나 등 네 명에게 남산기슭의 용산구용산동에 있는 어느 집에 있다가 총소리가 멎으면 돌아오라고 하면서 서둘러 떠나도록 했다. 봉서 부모 내외는 집을 지킨다고 했다. 용산동으로 가게 된 우리는 하루나 이틀 지나면 돌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간단한 단봇짐을 꾸리고 봉서를 따랐다. 나는 이번 기회에 잠시 고향에 다녀올 생각을 했다.우선 우리 일행은 종로로 가기 위해 돈암동 전차종점으로 갔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밖에 되지 않았는데 떠나는 전차가 없고 도착하는 전차도 없었다. 차도에는 군인이 승차한 차량만 왕래하고 인도에는 전투복을 입은 군인이 통행인을 통제하고 있어 길거리는 썰렁했다.전찻길을 따라 종로 4가로 가려던 방향을 바꿔 둘러가기로 했다. 꼬불꼬불한 언덕이 많은 서울 성곽 외부의 성북구안암동과 동대문구창신동 비탈길을 따라 동대문 전차종점에 도착했다. 보통 때 같으면 서울역행 전차가 한참 다니는 번잡한 시간대인데 그날따라 마지막 전차가 막 떠났을 때 도착했다. 어쩔 수 없이 종로구장사동과 관수동 청계천 쪽을 거쳐 수표교로 향해 걸었다. 청계천 천변 길을 걸을 때는 밤바람을 쐬러 길가에 평상을 내 놓고 앉아 부채질을 하는 주민이 많았다. 그들은 단봇짐을 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국군과 인민군 충돌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미아리 고개 너머로 포탄이 떨어질 것 같은 요란한 폭음소리가 들려 하루나 이틀 동안 대피하러 가는 중이라 했다. 그때는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시간마다 방송하던 대통령 담화의 녹음방송은 30분마다 하고 있었다. 길가에 나와 평상에 앉아 있는 주민들은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탐탁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수표교를 건너 중구을지로와 명동, 충무로, 남대문로를 거쳐 서울역 앞 광장에 왔을 때는 봉서 집에서 떠날 때처럼 잠시 고향에 다녀오리라는 생각이 들어 봉서와 헤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될까? 하는 의구심으로 흥분됐다. 그것은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전차가 두절됐고 동대문 전차종점에서 막차를 놓쳤기 때문이다.서울역 앞 광장에서 열차표를 구입하기 위해 매표소로 갈 때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뛰다시피 걸었다. 그랬는데도 예고 없이 변경한 마지막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매표소에서 헤어지려던 봉서를 다시 따랐다. 국방부를 거쳐 간 용산고등학교까지의 도로변은 불빛이 비치고 있어 걷기에는 불편한 점이 없었다. 용산고등학교를 지났을 때부터는 꼬불꼬불하고 언덕진 남산기슭의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달도 없고 불빛도 비치지 않는 캄캄한 골목길을 무디어진 걸음으로 봉서 뒤를 따르느라 어떻게 걸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피란하러 간 집에 도착해 안내된 방에서 곤하게 잠든 자정이 지났을 무렵, 벼락 치는 굉음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들렸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위쪽 눈까풀과 아래 쪽 눈까풀이 저절로 떨어졌다 붙었다. 그와 함께 천장에는 불빛이 환하게 번쩍거리다가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그 정도로 의식을 잃고 깊이 잠들었는데도 인민군은 벌써 이곳까지 점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죽음이 코앞에 닥쳐 온 것 같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데도 깊은 잠에 못 이겨 그 생각은 그때뿐 세상모르게 잠에만 폭 빠졌다. ▶ 점령당한 소식자정이 지난 깊은 밤, 골목길에서 큰소리로 횡설수설하듯 짓거리는 노파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내 아들이 살아왔다. 내 아들이 돌아왔다"고 하며 미친 듯이 말하며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한바탕 지껄였다. 자정 때 아들을 찾으러 서대문 형무소(교도소)에 갔다. 인민군 탱크가 잠겨 있는 대문을 닥치는 대로 부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남보다 맨 먼저 감방으로 들어가 아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풀려난 아들은 누구나 잘 살게 하는 공산주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위해 투쟁한 '테러리스트'였다고 자랑하면서 곧 '혁명가'로 추대될 것이라고 했다.고향에서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어느 월요일, 운동장 조회시간에 교단에 올라선 좌익계로 소문난 J주번선생의 훈화가 생각났다. 그 선생은 주훈과 실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떤 이론을, 입에 거품을 물면서 거침없는 달변으로 연설을 했다. 중학교 1학년인 어린 나는 마이크 잡음이 심해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힘찬 목소리로 뭉쳐서 붉은 피를 흘릴 수 있을 때까지 '투쟁'하자는 말만 어렴풋이 들렸다. 주번선생의 투쟁과 노파의 테러리스트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공통점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폭력이 수반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날이 새면 반드시 인민군 점령지역을 벗어나 천 리나 되는 내 고향 경북포항을 걸어서라도 가리라 다짐했다.노파가 지껄이던 말 가운데는 한강철교와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내용도 있었다. 폭파된 순간에 한강인도교를 걸어가던 수많은 시민은 강에 떨어져 죽고 폭파가 끝난 뒤에 걸어가던 시민도 앞이 보이지 않아 수없이 죽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난 나는 피란한 집에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들리던 굉음은 국군이 후퇴하면서 예고 없이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노파의 말이 끝나고 자리를 뜨자 간밤에 집을 지키겠다던 봉서 부모님이 궁금해졌다. 봉서의 성화로 총소리가 멎었으니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때 남산기슭에는 앞이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어두운 적막이 흐르고 있는 새벽이다. 통행인이 없는 새벽, 인민군 점령지역이 된 남산기슭의 골목길을 걷는 마음은 깊은 산속의 울창한 숲 속을 걷는 것보다 더한 지옥과 같은 곳에서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용산고등학교 앞 네거리에 왔을 때는 날이 밝기 시작했다. 통행인이 어쩌다가 있었다. 네거리 한가운데는 하늘을 향해 두 다리를 뻗고 벌렁 드러누운 채 입가에는 붉은 피를 흘린 자국이 있는 검정색 신사복차림의 시체가 있었다. 그 시체 앞가슴에 붓글씨로 무슨 글이 씌어 있는 흰 천으로 된 어깨띠는 붉은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피 흘린 시체라 무서워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벌벌 떨렸다.국방부 앞을 지나 서울역 앞으로 가는 모퉁이를 돌기 전, 주택가 맞은 쪽 남산기슭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소총에 실탄을 장전한 이십여 명의 국군이 웃옷을 벗은 채 될 대로 되라는 듯 맥없이 앉아 있었다. 식검(式劍)을 길게 빼들고 사방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웃옷을 벗은 장교는 부하들이 잠시라도 편안하게 휴식하도록 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그곳을 지나 서울역 앞 광장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나 서울 역사(驛舍)는 보이지 않는 곳이다. 앞서 가던 통행인 무리가 앞을 보면서 뒷걸음으로 비실비실 거리며 되돌아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누군가 서울 역사에는 상당히 많은 인민군과 마차가 있다고 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사실을 노파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소식이 새롭지 않아 그들을 해치고 서울역 광장 못 미친 대로변 상가의 인도로 걸어가서 서울 역사를 바라봤다. 역사 밖으로 전등 불빛이 보여 인민군과 마차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은 듣지 못했다.남대문시장의 중간 정도쯤 되는 남대문로에 이르렀을 때는 쏜살같이 달리던 국군 스리쿼터가 인도 쪽에 급히 정거했다. 무장한 이십여 명의 헌병이 내리더니 부리나케 시장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보니 서울 장안의 거리는 시민과 함께 인민군과 국군이 뒤죽박죽된 것 같았다.남대문시장을 지나 그 시장 가까이에는 신세계백화점이 있다. 그 백화점은 그 당시 동화(東和)백화점이었다. 동화백화점에서 충무로로 건너가는 길에는 간밤에 피란 갔던 통행인의 왕래가 극심해 난장판이었다. 그 길 한가운데는 무전기를 들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수신호를 하고 있는 순경(경찰관)이 있었다. 그는 통행인에게 인민군은 이곳까지 진입했다. 어서 안전지대로 대피하라는 말을 하면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동화백화점 앞 인도에서 충무로로 건너가려다가 그 순경의 제지로 멈칫하던 순간, '타당, 타당'하는 총소리가 한차례 들렸다.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재빨리 동화백화점 정문 쪽 외부의 네모난 굵은 기둥에 기대어 섰다. 내 뒤로 여러 명의 통행인이 줄을 서 듯 벽 쪽 쇼윈도에 붙어 섰다.총소리는 바로 멎었다.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중상을 입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피를 줄줄 흘리면서 그의 아버지 등에 업혀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밖에 몇 사람의 사상자가 났는지 눈여겨보지 않아 알 수 없었다.정신을 차리니 총을 발사한 곳이 확인됐다. 남산에 진주한 인민군 탱크에서 한국은행(화폐금융박물관) 쪽을 향해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에게 발사한 기관포 소리였다. 그때 인민군의 잔인성을 보고 더 이상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 달라진 길거리한낮이 가까워지자 한강로에는 수많은 인민군 탱크가 한강인도교를 향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그 행렬은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도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산기슭의 피란한 집에서 똑똑히 내려다 보였다. 탱크마다 인공기(북한기)가 꽂혀 있었다. 또 인민군 병사가 탱크 뚜껑을 얼어놓고 드나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붉은 천이나 인공기를 들고 그들을 환영하는 시민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며칠만이라도 아니 하루만이라도 시민이 서울을 벗어나 안전지대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한강인도교 폭파를 늦추고 국군이 서울 장안을 지켜주었으면 나는 고향엘 쉽게 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어 지난 밤, 걸은 것이 너무나 어굴하고 한심했다."에∼라! 모르겠다. 나의 운명…"될 대로 되라가 되어 버렸다. 내 아들이 살아왔다고 지껄이던 노파가 골목길에 다시 나타났다.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니 거리로 나와 인민군을 환영하라며 지나갔다. 노파의 말에 귀가 쏠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한강로에 행렬해 있던 탱크는 보이지 않고 아침에 볼 수 없었던 붉은 천이 집집마다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을 환영하러 골목에 나온 주민은 한 사람도 없어 노파의 말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봉서는 부모님이 걱정되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새벽처럼 재차 재촉했다. 나는 우리 같은 젊은이들이 안전할지 의심스러워 좀 더 두고 관망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봉서의 성화로 '에∼라!' 모르겠다. 죽지 않으면 산다. 한방에 잤던 셋은 '이판사판이다'하고 골목길에 나왔다. 그때 주방 일을 맡은 아가씨도 옆방에서 뒤따라 나왔다.용산고등학교 앞 네거리에는 새벽에 걸었을 때와는 달리 피란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봇짐을 진 통행인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들은 네거리에서 새벽에 내가 본 시체를 알지 못한 듯 무심히 걷고 있었다. 나는 그 네거리에 이르기 전부터 한참 지났을 때까지 그 시체를 생각하느라 무섭고 불안했다.서울역 광장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 때는 새벽에 봤던 언덕 위에서 허탈하게 쉬고 있던 이십여 명의 국군이 아롱거렸다. 그들은 인민군 추격에 일부는 전사하고 남은 병사는 포로가 됐거나 처음부터 싸우다가 전원 장렬히 전사됐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민군에게 노출되기 전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렸을 것이라 상상했다. 남대문과 남대문시장 입구 쪽 사이에는 도로를 겸한 자그마한 노상광장이 있었다. 그 광장에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을 '남조선해방'이라 하고 찬양하는 연설장이 생겼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오년도 채 되지 않는 지금에 와서 또다시 해방이 됐다는 것은 무슨 뚱딴지와 같은 말인가? 당치 않는 소리로 들렸다. 오년 전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해방이 됐다고 동네 어른들을 따라 총칼 없는 거리를 태극기를 흔들고 '얼씨구절씨구 좋다'고 춤을 추면서 기뻐했다. 지금은 그런 점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무섭고 두려운 적막만이 흐르는 음침한 분위기가 되어 있어 그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누군가 손가락으로 연설장으로 유인하고 있어 본체만체하면 반동분자로 연행될 것 같아 참석했다.연설자는 광장에 모인 백 명 안팎의 군중들로부터 뺑 둘러싼 가운데 있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화장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눈초리는 아주 매섭게 생긴 서른 미만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입고 있는 치마저고리는 언제 세탁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때가 꼬지지 배여 있는 허름한 차림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은 빗질을 하지 않은 생긴 대로 흐트러진 산발(散髮)이었다. 그런 모습을 한 그녀는 발을 광대처럼 좌우전후로 오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머리카락이 펄럭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여자 귀신이 복수심에서 산발한 채 캄캄한 깊은 밤중, 골목에 휙 나타난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내 곁에 있는 지지하는 극렬분자는, 그녀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새벽에 풀려난 투쟁심이 강한 여성동무라고 했다.그 당시 남북한을 자유로이 왕래하던 삼팔선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단절했다. 그 이전에 인권탄압에 견디지 못한 수십 만 북한주민들이 월남(탈북)해 용산동 해방촌, 만리동 뒷산 일대. 서울역전 도동(남대문로 5가)등 여러 곳에 파란 와서 판잣집을 짓고 난민생활을 하고 있는 세칭 '삼팔따라지' 동네가 생겼다. 나는 그녀가 그런 현실을 알고 있는지 의구심이 생겼다.그녀의 연설은 남조선해방을 위해 지하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방생활을 하게 된 강인성만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내용을 반복하다가 치켜 올린 오른 손을 쳐다보면서"함께 뭉쳐서 투쟁하자~!"는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몇몇 극렬분자도 그녀처럼 오른손을 힘차게 치켜 올리면서 "옳소~!"라고 동조했다. 군중들도 그에 따르면서 박수를 쳤다. 나는 '투쟁'이란 말이 귀에 거슬려 평화스러운 기대는 물 건너 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그녀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합창했다. 또"김일성 장군 만세~!"를 선창해도 따랐다. 마이크가 없는 연설장 맨 뒤편에서 들은 나는 흉내만 내다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이 생겨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 명동과 충무로 거리남대문시장을 지나 동화백화점 정문 앞 도로로 갔다. 아침에 그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교통순경이 남산에 진주한 인민군 탱크에서 발사한 기관포 사격에 희생된 시체는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고 시민들만 웅성거렸다.길 건너 충무로 서울중앙우체국 옆길을 거쳐 명동으로 갔다. 명동과 충무로 길거리는 서울에서도 가장 번잡하다. 평소에도 통행인이 많아 몸을 비빌 정도로 북적거린다. 그런데도 길 폭이 좁아 인도와 찻길의 구별이 없다. 간밤에 엉겁결에 단봇짐을 메고 대피하러 집을 나왔던 시민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총소리가 잠잠해 지자 서둘러 되돌아가고 있어 여느 때보다도 통행인이 더 많았다. 거리 한가운데는 전투모와 야전용 군복에 나무 잎을 소복하게 꽂은 완전무장한 인민군대열이 이십여 명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줄 종대로 질서 있게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의 장총인 소련장총과 인민군따발총 총구 끝에 총검을 끼고 앞에총을 하고 있었다. 또 앞만 보고 행군하는 그들의 상체는 부동자세고 눈은 빛이 날 정도로 초롱초롱했다. 이처럼 완벽하게 훈련된 인민군 병사의 위엄은 칼날 같이 날이 선 듯 했다. 가까이에서 인민군을 처음 본 나는 국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훈련된 것 같고 무장한 장비도 우수한 느낌이 들었다.그런 인민군이 나와 반대쪽에서 행군했다. 소련장총은 총신이 길다. 인민군이 내 옆을 마주치면서 지날 때마다 나는 통행인 틈에 떠밀려 총신 끝에 낀 칼날에 찔릴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명동과 충무로 상가건물에는 외벽마다 북한의 대남선전용 벽보가 붙어 있었다. 벽의 규모가 여러 종류라 붙어있는 인쇄된 선전물도 여러 규모였다. 나는 통행인 틈에서 걸음을 재촉하는 데만 정신을 몰두하느라 벽보를 유심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발짝씩 걸을 때마다 똑같은 내용의 선전물이 밀집된 건물 벽에 부착되어 있어 곁눈질만 해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벽보 상단에는 인공기와 소련 국기가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부착되어 있었다. 또 인공기 밑에는 김일성 사진, 소련 국기 밑에는 스탈린 사진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남조선해방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맨 끝 하단에는 민족반역자로 지목한 십 명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었다. 첫째는 대통령이다. 그 밖에는 미군정 때 치안을 담당했던 인사, 정부수립 후 질서유지에 공헌한 인사 등이었다. 그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하고 그들을 제외한 모든 인민은 남조선해방 전선에 동참해 줄 것과 김일성 장군은 위대한 우리의 영도자라고 자랑했다.종이로 된 선전물이 대부분이었으나 그 당시 명동국립극장(국립예술극장) 같은 대형건물에는 극장 프로 간판 규격의 크기로 된 대형도 있었다. 그런 큰 선전물은 천으로 되어 있었다. 인민군은 삼팔선에서 침략한지 삼일 남짓 되고 서울을 점령한지는 한나절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당시는 활판으로 인쇄할 때라 4색도로 제작된 인물사진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인쇄해 두었을 것이다.그 선전물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새벽에 부착한 것으로 들어났다. 그렇게 단정하게 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착하는 장면을 봤다는 소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 벽보는 북한이 먼저 남침을 시작한 확실한 증거로 확인됐다. ▶ 종로 거리간밤에 피란했던 남산기슭의 용산동 집에서 종로구장사동까지는 어저께 돈암동에서 용산동으로 피란 갈 때와 정반대로 걸었다. 장사동부터는 동대문 쪽으로 가지 않고 질러가기 위해 종로 4가 네거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네거리도 명동과 충무로처럼 통행인이 북적거리는 번화한 지역이다. 그런 지역이 그날따라 너무나 한산하고 고요했다. 훈풍이 부는 유월 마지막 주의 청명한 대낮인데도 통행인이 뜸해 음침하고 서늘한 숲 속에 어두움이 닥쳐온 것처럼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왜 그런 가 했더니 지난 새벽에 미아리 고개를 넘어 종로로 진격해 오던 인민군이 창경원(창경궁)에서 국군과의 전투를 했다. 그 전투를 거쳐 동대문경찰서(혜화경찰서)에서 순경과도 전투를 했다. 그 전투로 경찰서는 시커먼 흉물처럼 탔고 길 건너 맞은편 서울전매서(종로금은쥬얼리) 지하실도 까맣게 타버렸다. 이런 두 흉물을 본 나는 여태껏 인민군은 서울을 무혈로 점령했다는 인식을 달리 했다.초기에는 순경들이 인민군과 교전해 상당한 사상자를 낸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인민군 후속부대가 대거 도착했다. 전투할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순경들은 길 건너 전매서 지하실로 이동했다. 그러자 인민군은 전매서 지하실을 향해 집중 사격했다. 순경도 굽히지 않고 대항했다. 화가 난 인민군은 지하실 출입구, 비상구, 환기통 등에 기름을 뿌리고 가연성이 있는 물질을 쳐 넣은 다음, 불을 질러 순경은 전원 희생됐다. 그런 말을 한 피란 가지 안 했던 그곳 주민들은 공포의 불안으로 간밤은 한잠도 자지 못하고 겁에 질려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동대문경찰서를 지나 돈암동 쪽 창경원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혼자서 히죽거리거나 히히거리는 마흔 안쪽으로 보이는 여성이 있었다. 한복차림을 하고 있는 그녀의 맵시는 남루하고 엉성했다. 답답해서 고쟁이를 벗어 버린 채 네거리의 모퉁이를 재빠르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또 '느릿느릿' 걷기도 했다. 옷고름이 풀릴 듯 말 듯 하고 저고리의 앞섶이 벌렁 벌어져 한쪽 젖통이 덜렁거렸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지난 새벽에 창경원 맞은쪽 서울대학교부속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창경원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전투하는 총소리에 놀라 뛰쳐나오다가 미쳐버렸다는 풍문만 들렸다. 서울대학교부속병원 북쪽 끝자락에 있는 영안실 상공에는 시커먼 연기가 바람이 불지 않아 흩어지지 않고 하늘을 가로막으면서 뭉게뭉게 떠 있었다. 그 연기는 오뚝이 모양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무리를 하얀 색으로 바꾸어 놓으면 여름철의 뭉게구름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누군가 그 연기에서 품어낸 냄새는 병원에 입원했던 사망자를 비롯해 살아있는 환자 또는 간밤에 창경원과 동대문경찰서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 부상자 등을 그 영안실 뜰에서 몽땅 태운 송장냄새라고 했다.창경원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앞뜰에 들어서자 국군 스리쿼터가 세 대 정차해 있었다. 그 차는 타이어가 펑크 났거나 엔진 등이 손상되어 가동하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중 매표소 쪽 스리쿼터 운전석 아래 땅바닥에는 군인 발목 한 개가 야전용 군화를 신은 채 떨어져 있었다. 그 발목을 본 순간, 내 발목이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불안했다.그 부상병은 걷지 못해 포로가 됐다가 이곳 영안실 뜰에서 산채로 화장됐을 것이다. 또 창경원을 지나 혜화동로터리 쪽 서울여자의과대학부속병원(명륜 아남아파트)은 인적을 볼 수 없었다. 그곳 환자도 서울대병원 영안실 뜰에서 화장됐을 것 같아 인민군의 포악한 야만성에 몸서리쳤다. 나는 다행히 화장하는 장면이 지난 다음에 그 지역을 걸었기에 무섭기는 하지만 정신은 멀쩡했다.드디어 돈암동 봉서 집에 도착했다. 간밤에 집을 지키겠다던 봉서 부모도 돈암동 전차종점 부근에서 따발총, 소련장총과 포탄 소리가 나드니 자정이 가까워 질 무렵부터 포탄이 지붕 위로 떨어질 것 같아, 무서워서 남산의 동쪽 기슭인 장충단공원 숲 속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돌아온 즉시 대문 옆 기둥에 붉은 천을 매달아 놓고 계셨다. ▶ 뒤바뀐 세상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다음 날부터 모든 직장은 올 스톱되고 학교는 언제 개교한다는 예고도 없이 자동 휴교됐다. 고향에 가려던 생각은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강을 건널 수 없어 무모하게 되었고 생활비를 보냈다는 인편은 상경을 늦추어 만나지 못해 용돈마저 떨어지게 됐다. 그런 처지에 있는 나를 봉서 집에서는 봉서와 똑같이 대해 주어 다행이었다.물가는 폭등하면서 싸전은 문을 닫았다. 매달 봉급을 수령하고 말쯤 양식을 마련하는 봉서 집에서는 월말이 가까워졌으니 비축해 둔 양식이 거의 동이 난 것 같았다. 또 봉서 집에서는 인사차 다니러 왔던 봉서 큰 집 형이 꼼짝할 수 없게 되어 식구는 평소보다 한 명 늘어났다. 그런 형편이 되어 있는 봉서 집에서는 점심은 굶고 아침저녁만 두세 숟가락 정도의 쌀이 들은 멀건 죽 한 대접으로 지냈다.시청과 구청, 동사무소(주민 센터)는 인민위원회, 경찰서와 파출소(지구대)는 내무서로 바뀌었다. KBS 라디오 방송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찬양, 충성, 그리고 인민군은 남조선해방을 위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정당하다고 방송했다.미쳐 피란 가지 못한 고위직정부요원, 사회적지도자, 저명한 인사 중 일부는 연행되어 강제로 북한의 남침을 지지하는 성명을 육성으로 발표케 했다. 돈암동 인민위원에서는 그 방송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형 확성기로 내보내고 있어 할 일 없는 나는 봉서 집에서 하루 종일 싫증나도록 들었다. 중단 됐던 전차가 운행된 다음 날은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종로 쪽으로 갔다. 그곳에 간 것은 혹시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루트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시민들은 집 밖을 드나들기를 꺼리고 있어 전차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종로구원남동 네거리에서 통행인이 많을 것으로 예측된 동대문을 향해 걸었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길에는 서둘러 내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청소년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군과 좌익계청년들이 합동으로 젊은 통행인을 동원한다면서 서둘러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나도 동원될 까봐 겁이 났다. 방향을 돌려 충신시장에 들어갔다.그 시장은 텅 비어 있어 선들하고 으슥했다. 또 불쾌한 화약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시장창고에서 인민재판을 하고 총살한 탄약 냄새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총살 장면이 떠올라 더욱 무서워져 얼른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지난 달 없는 캄캄한 밤, 봉서와 나는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빈민들이 밀집해 있는 꼬불꼬불한 창신동 언덕진 골목길을 봉서 어머니를 따라 어떤 싸전을 찾아갔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위해 내놔라 하고 있어 골목은 어수선 했다. 찾아간 싸전 주인은 봉서 어머니의 귓속말을 듣고서는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쉿∼!"하면서 봉서와 나를 점방 안으로 불러 들였다.잠시 후 인적이 없는 틈을 타서 우리 일행에게 숨겨 놓은 쌀을 대두로 한 말 남짓씩 쌀자루에 담아주었다. 그 쌀자루를 어깨에 메고 되돌아오는 길에 내놔라 뒤지고 다니는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숨찬 걸음으로 헐레벌떡거리면서 봉서 집으로 걸어왔다.그날이 지난 후의 양식은 봉서 어머니가 주방 일을 맡은 아가씨와 함께 경기도광주에 가서 머리에 이고 날랐다.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동대문 전차종점까지는 전차로, 그곳에서 뚝섬까지는 기동차를 이용했다. 그 다음은 폭파된 광진교 가까이에 있는 광나루 나루터로 걸었다. 그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그곳부터 광주까지 걸어가서 각자 대두로 두 말 정도의 쌀과 야채 등을 머리에 이고 돌아왔다. 이른 새벽, 집을 떠나 밤늦게 돌아온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봉서, 그의 큰집 형과 나 등을 동행하지 않는 것은 도중에 좌익계단체에 동원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 인민위원회 회의7월 초순 어느 날, 각 세대마다 한 명씩 돈암동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가 왔다. 봉서 아버지는 어느 누구를 지명하지 않고 있어 불참할 것 같았다. 반동분자 집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 같아 내가 회의 도중에 참석했다. 회의는 인민위원회 마당에서 몇 인민위원이 번갈아가면서 북한의 남조선해방은 당연하다는 연설만 했다.지지자가 박수를 치면서 "옳소∼!"라 하면 동원된 참석자는 덩 달았다. 그렇게 하면 회의내용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회의한 모든 결의는 그렇게 한다는 것에 실망했다. 마지막 연설은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의 어린이가 했다. 원고 없이 달변으로 말한 그 연설은 막힌 점이 없어 신통했다. 그 연설의 마지막에는 '모든 애국청년은 인민의용군에 지원해 참전하자'고 했다. 그것은 어린이를 동원한 얄팍한 수작이라 생각됐다.연설을 들으니 금년 8월15일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던 전선이 심각해진 것 같았다. 어린이는 연단을 내려오면서 자진해서 인민의용군에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에 따라 인민의용군에 지원하겠다고 연단 쪽으로 나가고 있는 청중은 7∼8명이었다. 그중 3명은 멈칫거리다가 지원했다.나보다 한두 살 위로 보이는 누군가 다가와서"동무는 인민의용군에 지원할 뜻이 없는가?"라는 투로 말을 걸었다. 갑자기 질의를 받은 것이라 멈칫하다가 좀 시간을 두고 생각한 다음에 집에서 동의를 얻겠다고 응답했다."동무는 아직 교양이 부족하다""교양이 풍부해지면 스스로 지원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청소년에게 접근했다.의용군에 입대하겠다고 지원한 7∼8명 중 멈칫거리다가 지원한 3명만 별도로 분류하고 있어 정식 지원한 것이고 다른 일부는 각본에 의해 형식적으로 지원한 것이라 생각됐다. 멈칫거리다가 지원한 3명은 아무런 연고 없이 지방에서 상경한 하숙생일 것이다.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인민의용군에 입대해 굶주림을 모면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봉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나는 것은 나에게 다가와서 말한 '교양이 풍부해지면…?'이란 뜻에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인민의용군 지원을 강요하기 위한 강제성을 수준 높인 얄팍한 용어일 것이라 생각됐다.인민군이 남침을 시작한 초기와는 달리 국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인민군은 국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침략자 편에 지원해 동족을 상대하여 싸우는 것은 어떠한 경우도 용납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더구나 아무리 부강한 국가라도 인권을 무시하는 일당체제는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주의국가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인민의용군에 지원하라는 권유를 거절했다는 것을 봉서 부모님께 말했다. 봉서 부모는 '좋다. 나쁘다'는 말은 없고 앞으로는 어떤 회의에도 참석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그 말씀은 내가 판단한 것을 잘했다는 격려를 조심해서 말한 것 같았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직장인은 소속 직장에 복귀하라고 독려했다. 경성전기주식회사(한국전력공사) 본사 행정직 사원인 삼십대 후반의 봉서 아버지는 직장에 복귀했다. 덩달아 나도 등교해 봤다. 선생님과 사무직원은 없고 본교생은 뜸했다. 낯선 청년과 학생이 들랑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좌익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새벽, 종교철학을 강의한 정진구 신부님이 학교에서 인민군에게 연행되어 교문 앞 혜화동로터리 한가운데 분수대에서 총살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시신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서울대병원 영안실 뜰에서 화장되었으리라 가상해보니 몸서리쳐 서둘러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돈암동 인민위원회와 성북내무서는 집집마다 라디오 성능을 조사했다. 성능이 4구 이상은 인민위원회나 내무서에 보관토록 했다. 성능이 4구 이상은 남한방송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을 제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봉서 집 라디오 성능은 4구다. 발각되어 반동으로 낙인이 찍히게 될지라도 3구라고 신고했다. 봉서 부모는 그렇게 신고하고 몰래 남한방송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 폭격된 용산역 동원7월 10일쯤, 유엔군 제트전투기가 수시로 북녘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그 전투기는 처음으로 개발한 최신무기다. 귀가 쨍하도록 쌕쌕거리는 굉음은 천둥치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하늘을 쳐다보려는 눈 깜작할 사이, 그 전투기는 북녘 하늘의 창공을 뚫고 사라져 버리고 비행했던 하얀 줄무늬 흔적만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그런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목적은 알 수 없었으나 혹시 북한의 인민군 후속 병력과 군수품 수송 등을 차단하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으로 봐서 유엔군이 6⦁25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확인됐다. 앞으로 어떠한 수난을 겪더라도 살아남기만 하면 인민군 점령지역을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이 솟아났다.그런 날이 며칠 연속되다가 여러 편대의 유엔군 폭격기가 서울 상공을 회전하면서 어떤 지역을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창공에서 떨어뜨린 수많은 폭탄은 말똥처럼 뚝뚝 떨어지면서 '콰∼쾅쾅'거리는 맹렬한 폭음소리를 내는 순간부터 하늘을 검은 연기로 시커멓게 물들게 했다. 그 위치는 용산역과 그 주변인 것 같았다. 자세한 위치를 몰랐던 것은 내가 있는 돈암동과 폭격한 위치가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다.다음 날은 더 많은 유엔군 폭격기가 그 지역을 재차 폭격했다. 연달아 이틀 동안 폭격이 끝난 저녁노을이 들 무렵, 돈암동인민위원회에서는 폭격당한 곳에 구명과 소화 작업을 할 인력을 각 세대마다 한 명씩 동원했다. 그 경우는 지난 번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라는 성격과 다르고 고향으로 갈 수 있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봉서 집 몫으로 내가 자원했다. 거주지역마다 동원된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인솔되어 도착한 목적지는 돈암동에서 예상한 대로 용산역과 그 주변이었다.유엔군 폭격기는 용산역과 그 주변에 있는 기관고(機關庫), 조폐공사(造幣公社) 등을 폭격했다. 배치된 장소는 화염에 싸여 있는 조폐공사 창고였다. 그 창고에는 화폐제작용 특수종이가 불타고 있거나 연기만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용산역 기관차 급수탑에서 여성들이 날라다 준 양동이에 담긴 물을, 타고 있는 종이 더미를 향해 정신없이 던졌다.이틀 동안 폭격당한 불은 양동이에 담긴 물을 쉴 틈 없이 던지고 던져도 꺼지지 않고 더 활활 탔다. 불씨가 잡히면 활활 타던 종이 더미가 내 몸을 향해 머리 위로 확 덮쳤다. 그때는 이리 비키고 저리 피하면서 불을 껐다. 그런데도 앞뒤와 좌우에서 꺼졌던 불이 되살아나 순식간에 불바다를 이룬 적도 있었다. 불길은 새벽녘에 겨우 잡혔다. 그래도 종이 더미를 휘저으면 불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런 곳을 깊숙이 들어가 불을 끄던 중 날라다 준 양동이가 보이지 않아 창고 밖으로 나와 보니 아무도 없고 날은 훤하게 밝았다.집으로 오려던 순간, 몸이 웅크려지면서 전율이 일어났다. 밤새도록 소화 작업을 했던 가까이에는 불에 타서 살갗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하얀 해골과 뼈만 쌓아 둔 무더기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악!, 억!"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면서 몸서리쳐졌다. 해골은 모두 두 눈알이 빠진 채 전쟁을 원망하고 비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원망과 비관은 구천에 가서도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됐다.유엔군 폭격기가 용산역 영내의 기관고와 이웃에 있는 조폐공사 등을 폭격한 원인이 들어났다. 인민군과 인민위원회는 점령한 지역의 각종 시설을 활용했다. 그중 용산역 영내 기관고에는 많은 기관차가 있다.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철교 이용은 불가능하지만 북한에 있는 상비병이나 군수물자 등을 서울까지라도 수송하려는 것을 유엔군은 단절시키려고 기관고를 폭파한 것 같았다. 또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민족애국청년단. 여성동맹 등 좌익계단체와 공공기관 운영, 시민들이 남조선해방에 대한 협조 등을 위해 한국은행 화폐를 마구 발행하고 남발했다. 그로 인해 물가는 폭등하고 화폐가치는 떨어지며 민심은 흉흉해졌다. 유엔군은 더 이상 화폐를 발행하지 못하도록 조폐공사를 폭격한 것 같았다. ▶ 연행과 탈출친하게 지낸 고향 친구의 집을 찾아가면 한 끼라도 푸짐하게 음식 대접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작은 누나와 절친한 친구의 결혼한 언니는 나를 만나면 친동생처럼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 집은 서대문구충정로에 있고 생활이 넉넉하다. 양식은 농촌에서 철마다 조달되고 있어 사서 먹지 않는 가정이다. 돈암동에서 그 집까지 왕복하려면 한나절은 걸린다.최근에는 기회가 잡히지 않다가 전쟁이 일어났다. 차라리 지금처럼 빈둥빈둥 놀고 있을 때, 그녀의 언니를 찾아보고 이 난리 통에도 피란 가지 않고 있으면 만나서 고독을 달래는 동안 차려 놓은 한 끼의 밥이라도 푸짐하게 먹으면 일시적이나마 배가 부를 것이라 생각했다.7월 하순이 된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그녀의 언니를 만나러 충정로를 향해 무심코 걸었다. 종로구안국동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 좌익계청년들이 나의 발걸음을 제지시켰다. 그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남조선해방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긍정할 수 없어 침묵으로 대했더니 나를 '교양이 풍부'한 것으로 간주했다. 먼저 제지를 받고 대기하고 있는 청소년들과 함께 종로구수송동의 수송초등학교에 수용됐다. 다음 날 오전 11시쯤, 소속 대열이 정해졌다. 그때까지 허기를 참고 있다가 얼금얼금 짜 놓은 긴 판자 위에 가지런히 얹어 놓은 주먹밥을 왼팔에 완장을 찬 여성동무로부터 한 사람당 한 덩이씩 배당받았다. 그 판자는 교실 밖에 별채로 지은 변소(화장실)에 갈 때, 밟고 다니는 발판이었다. 한여름 더위에 바짝 마른 발판을 걸레질만 슬쩍 훔친 인분은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그 발판을 보고서는 그 위에 올려놓은 주먹밥에 손이 가지 않았다. 옆에 있는 연행된 동료들은 배당받은 주먹밥을 굶주린 이리처럼 단숨에 먹어버렸다. 그 꼴을 본 나도 시장기에만 몰두되어 순식간에 먹었다. 그것도 한 덩이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밤이 되자 수송초등학교에 수용된 동료들은 덕수궁 돌담을 따라 종로구정동에 있는 배재고등학교로 이동했다.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수많은 동료와 함께 배정 받은 교실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그 다음날 아침, 연행된 동료들은 인민군이 인수할 때까지 이곳에 수용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민군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인수해 갈 때까지 며칠이 걸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연행된 동료들이 잡념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전원 운동장에 집합시켰다.운동장 단상에는 마이크를 장치해 두고 밧줄로 포박한 삼십 안팎으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을 세웠다. 인민위원회에서는 포박한 청년의 성명과 거주지, 나이, 직업 등 신분은 알리지 않고 미리 쪽지에 적은 죄질을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었다. 읽던 구절이 멈추어질 때마다 운동장에 연행된 동료들은 우레와 같은 "옳소∼!"소리와 함께 박수를 쳤다.포박된 청년의 죄는 좌익계애국청년을 연행한 일, 뇌물을 받은 일, 계집질을 한 일, 빌린 돈을 갚지 않은 일, 첩을 둔 일 등이었다. 단상에 포박된 청년에게는 한 마디도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아 그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운동장에 연행된 동료들의 옳소 소리와 박수 치는 소리는 그의 비행과 범죄를 심판하는 절차다. 변명이나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없고 나올 기회도 주지 않아 동료들은 조목마다 만장일치로 찬성한 것이다. 마지막으로"사형을 하자∼!"는 말에 더 큰 우레와 같은 옳소 소리와 박수로 동의했다. 어느 누군가 그것을 '인민재판'이라 했다. 인민재판은 그들이 만든 각본대로 처벌하는 재판이었다. 법률적인 지식이나 상식이 없는 강제로 연행된 동료가 판결한 것이다. 그날따라 인민재판을 하게 된 것은 앞으로 어느 누구도 불만과 불복하면 이같이 처벌한다는 으름장인 것 같았다. 앞이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그날 밤, 수용된 교실 바닥에 옷도 벗지 않고 누운 채 낮에 있었던 인민재판의 광경이 떠올라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운동장 단상에서 인민재판을 받은 청년은 벌써 시체로 변해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그는 억울함을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원망만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옆에 누워 있던 몇 살 위로 보이는 키 크고 날씬한 동료가 혼자서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소리로 "도망쳐야지∼!"라는 말을 한 순간, 그의 발가락 끝이 나의 장딴지를 긁적거렸다. 캄캄한 밤중에 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의견을 슬그머니 손잡고 동의했다. 순찰하는 감시가 소홀한 자정쯤, 슬그머니 잠자리를 빠져나와 변소에 가는 체 하고 운동장의 한쪽 귀퉁이 벽돌담 밑에서 그를 만났다. 담 높이가 높아 발판이나 사다리 없이 혼자서는 넘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양어깨를 두 발바닥으로 짚고 담 위로 올랐다. 한쪽 다리는 담 밖으로, 다른 쪽은 담 안으로 덜렁거린 채 펑퍼지게 앉아 그의 오른쪽 손을 양쪽 손으로 꼭 잡고 힘차게 당겼다. 그는 순식간에 담 위에 올라앉았다. 담 위에 올라앉은 우리 둘은 담 밖을 내려갈 때는 숨을 죽이고 운동장 외벽에 손바닥과 배를 바짝 붙여 수직으로 미끄럼 타듯 했다.콩알만큼 작아진 뛰는 가슴은 오랫동안 숨차게 했다. 숨찬 소리를 멈추게 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한밤중의 숨소리는 보통 때보다도 크게 들린다. 혹시 순찰 다니는 감시원이 숨소리를 듣고 의심을 품으면 또다시 연행된다. 숨을 죽인 채 그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수신호로 헤어졌다. 헤어지고서도 통행인을 피하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봉서 집에 돌아 왔을 때는 훤한 아침이었다. ▶ 작심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지나도 국군이 수복할 기색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고향을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가야 한다. 가다가 살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 죽어도 동족을 살상하고 침략하는 인민군 행위에 협력자가 안 되는 것이 떳떳하다. 봉서 어머니가 양식을 조달하러 광주로 갈 때, 광나루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도강한 코스로 서울을 떠나기로 작심했다.뜻이 맞고 마음에 드는 동행할 고향친구를 규합해야 한다.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을 찾아가야만 상의할 수 있다. 도중에 좌익계청년에게 연행되지 않는 묘책이 필요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지금까지 상황을 내 나름대로 참작했다. 아침저녁과 전차 속, 번화한 길거리는 연행하지 않고 한적한 골목에서만 연행한다. 친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이 골목에 있으면 반드시 앞서가는 젊은 남성 통행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좌익계청년이 골목에 나타나 앞서 가는 통행인을 연행하려 설득할 때 뒤 따르던 나는 번화한 도로로 도망칠 여유를 갖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동기생 규태는 그의 누님 집이 있는 종로구효자동에 거주하고 있다. 효자동 전차종점은 전차에서 내리면 오른쪽은 경복궁의 높은 담이 있어 통행인이 뜸하고, 반대쪽은 꼬불꼬불한 좁은 골목길이 많은 고전적인 한옥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그러나 비교적 한산하다. 또 전차종점의 북쪽 자하문 밖은 북한산이 막고 있다. 그런 특징이 있어 다른 정거장에 비교하면 하차하는 승객이 적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만나러 갔다.규태를 만나러 전차종점에서 내릴 때, 좌익계청년과 학생이 나보다 먼저 내린 학생들을 연행하고 있었다. 그중 한 청년이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 순간 '걸렸다'는 생각이 들어 앞서 내린 학생 뒤를 따르는 척하다가 부리나케 효자동 골목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단거리 선수처럼 달리면서 뒤 따라 오는 좌익계 청년과 학생을 따돌리고 반대쪽 통의동 큰길로 도망쳤다. 그 길을 따라 통행인이 많은 체부동, 내자동, 내수동 큰 길을 거쳐 번화한 광화문전차정거장에 갔다. 그 정거장에서 우연히 고향 친구 호진을 만났다. 그와 함께 고향에 갈 것을 약속받았다. 또 내가 거주하고 있는 봉서 집 동네와 이웃한 안암동에는 고향 동기생 영구가 거주하고 있다. 그를 한밤중에 찾아가 동행할 것을 약속했다.이들과 약속했을 때의 풍문은, 인민군은 추풍령과 문경새재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고향에 도착하기 전, 인민군은 내 고향을 진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 봉서 집 가족과의 작별8월1일 오전, 간편한 피란민 차림으로 단봇짐을 지고 정들었던 봉서와 그의 큰 집 형과 헤어지고 안채로 통하는 대청 앞 디딤돌 위에 서서"아주머니 ! 안녕히 계십시오. 고향으로 갑니다"고 하직 인사를 퉁명스럽게 했다. 직장에 출근 중인 봉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도 표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전쟁이 끝나면 다시 오겠습니다"고 하자, 봉서 어머니는 안방에서 듣다가 깜짝 놀라면서 황급히 앞마당에 맨발로 내려 오셨다. 무뚝뚝한 나의 얼굴을 보고 의아스러운 표정으로"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그 먼 길을 갈 수 있겠는가?"고 하셨다. 차편이 없어 뜻이 맞는 고향친구 호진과 영구와 함께 걸어서 간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정이 담뿍 들었던 봉서 어머니는 나의 오른쪽 손바닥과 팔목 사이를 두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굶어도 같이 굶고 죽어도 같이 죽자 !"면서 눈물을 훔쳤다. 나도 그 고마움과 앞으로의 두려움이 겹친 눈물이 한꺼번에 흘러 얼굴을 흠뻑 적셨다. 헤어지는 마지막 작별인사 때 봉서 어머니는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뒤로 제대로 된 식사를 차려주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영구 집에서 만난 우리 셋은 경기도광주와 이천, 충북충주, 경북안동 등으로 걸어갈 계획을 세우고 하루 지난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해 광나루 나루터에 갔다. 그 나루터에는 먼저 온 수많은 시민들이 무거운 봇짐을 지고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었다.인민군은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선전한지 한 달을 넘겼다. 그런데도 시민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피란 가느라 좌왕우왕하는 모습을 보고 만감이 교차하면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서울을 떠났다. 그날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엿새 된 날이었다. ※ [참고] 국군이 서울을 9⦁28수복하자 봉서 집 가족도 그의 고향 경북의성으로 피란 갔다. 피란 가던 중, 봉서 부모는 내가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으로 파괴된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만난 자리에서 내가 서울을 떠난 뒤, 봉서 아버지는 성북내무서로 두 차례 출두했다. 두 번째 출두했을 때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힐 것이라 짐작했는데 다행히 담당 조사원이 급성맹장염으로 부재중이었다. 다시 출두하게 되면 귀가할 수 없게 될 것 같아 감시가 소홀한 캄캄한 깊은 밤중에 가족과 함께 집을 나와 광주지역 산속에 피신해 죽음을 모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찍이 고향으로 내려간 나의 용단이 재치 있는 판단이었다고 말씀하셨다. ※

2019-08-08 18:14:13

김점식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비륵땅/ 김점식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산을 깎아 만든 논이 있었다. 그 논은 원체 박토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았다. 애쓴 보람도 없이 너무 흉작이라 수확을 포기하고 갈아엎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던 그 시절, 곡식을 갈아엎는 일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다.하지만 갈아엎을 수 없는 땅이 있다. 돌도 아니고 흙도 아닌 비륵땅은 쟁기로도 갈 수가 없다. 삽 끝도 들어가지 않으니 곡괭이로 조금씩 파내야 한다. 이런 땅은 객토를 해야 한다. 객토란 산성화되었거나 질 나쁜 토양 위에, 다른 곳에서 양질의 흙을 가져다 넣어 땅의 힘을 상승시켜주는 작업이다.내 삶의 땅이 바로 그런 비륵땅과 같았다. 혹독한 가난 속에 아버지는 내가 말을 배우기도 전에 원인 모를 병환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한국전쟁과 가난으로 점철된 시대에 살아남기도 힘들었던 때라, 나보다 다섯 살 위인 누님은 초등학교 입학도 못 했다. 다행히 나는 제 나이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누구나 살아가는 형편이 똑같은 줄만 알았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우리 집이 몹시 가난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내 옷에서는 가난이 뚝뚝 흘러내렸고 월사금을 제때 못 내는 때가 많았다. 참고서는 물론 없었고 방학 때면 혼자서 공부하도록 엮은 방학책 살 돈도 내지 못했다.이런 가난한 환경 속에서 나는 물만 먹고도 쑥쑥 자라는 콩나물처럼 무럭무럭 자라서,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크고 힘도 셌다. 하지만 늘 기가 죽어있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몹시 가난하기까지 하여 기댈 언덕이 없으니 그리되었다. 아이들은 이런 나를'가우'라고 놀렸다. 가우란,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정신지체 장애자의 이름이었다.내 나이 열세 살 되던 해, 형님이 원인 모를 무릎 통증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형님이 사용하던 지겟다리를 내 키에 맞춰 톱으로 잘라 짊어지고 하루에 두 차례씩 땔 나무를 하러 다녔다.열여섯 살이 되던 어느 날, 지게를 짊어지고 가다가 학교 가는 동무를 만났다. 교복을 멋있게 차려입은 동무 앞에,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서 있는 내 처지가 참으로 처량하게 느껴졌다. 동무가 반갑게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싱겁게 대답하고 헤어졌다. 이때 나는 평생을 이렇게 남을 부러워하면서 살아가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그래도 당장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해 와야 할 처지인지라, 애써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고 이십 리쯤 되는 먼 산으로 갔다. 그곳은 워낙 산세가 험하여 어른들도 가기 꺼리는 삼박골이라고 하는 곳이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하늘밖에 안 보이고, 혼자 있으면 적막 속에 공포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날따라 꿩과 산비둘기 우는소리가 유난히 구슬프게 들렸다. 그중에서 뻐꾹새의 피를 토하는 듯한 울음소리는 깊은 산골짝을 채우고도 넘쳐서 메아리가 되어 내 가슴속을 울렸다.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땔감을 모았다. 덕분에 짧은 시간에 나무 한 짐이 다 되었다. 이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높은 산을 오를 일이 걱정이었다. 집으로 가려면 꼬불꼬불 경사가 심한 높은 산 고개를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산세가 험하고 가팔라서 맨몸으로도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꼭두마리재'라고 불리는 곳이다.시간이 넉넉하여 지붕처럼 생긴 너럭바위 아래 누워 잠시 쉬었다. 무심코 위를 쳐다보니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틈을 뚫고 나와 옆으로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 나무를 보고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도 절망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그중에서 사람만이 자신의 힘으로 어느 정도 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계모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친척 형님이 도시로 나가 크게 성공한 것을 보고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나도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출을 결심했다. 무작정 상경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농촌 현대화를 위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다음 날, 4월 23일 내 삶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부스럼 딱지처럼 덕지덕지 붙은 가난의 딱지를 떼어버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농사일밖에 모르는 시골 무지렁이가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선 먹고 잠잘 곳이 급했던 터라 처음 시작한 일은 전기다리미 외판원이었다. 부지런함을 무기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물건이 팔리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가격조차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판매 실적이 좋지 않아 6개월 만에 결국 직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당장 오고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처럼 나의 남루한 꿈은 도시의 뒷골목에서 사그라들어 갔다.새로운 살길을 찾아 헤매던 중, 마침 석유풍로를 수리하러 다니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석유풍로 수리공은 몇 가지 간단한 공구와 심지만 있으면 되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그 일을 시작했다. 당시 나에게 창피하다거나 고생스럽다는 말은 사치였다. 끼니를 굶지 않고 밤에 잠자리를 구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평소에 석유풍로를 사용해보지도 않았던 사람이 고장 난 물건을 고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수리하다가 잘못 만져서 오히려 더 큰 고장을 내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경험과 기술을 쌓아갔다.그해 겨울은 평균 기온이 영하 10도였으며, 몇십 년 만의 강추위라고 했다. 한동안은 영하 15도를 넘는 날씨가 계속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많은 겨울을 겪어왔지만, 내 기억에는 그해 겨울보다 더 추웠던 때는 없었다. 하지만 날씨가 추운 날일수록 값비싼 석유난로를 고치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더욱 부지런히 돌아다녔다.물러설 곳 없는 나는 바위에 정(釘)을 대고 쇠망치로 쪼아가는 석수장이처럼 내일을 만들어갔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밥값도 교통비도 아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 일 년 만에 전세방을 얻을 수가 있었다. 비록 단칸방이었지만 저택이라도 장만한 것처럼 기뻤다. 이젠 나도 서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치 양어깨에 날개라도 단 듯한 기분이 들었다.여기서 용기를 얻어 더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내 나이 스물일곱 살 되던 해에, 방문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원체 적은 자본금으로 시작한 탓에 3개월 만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제품을 외상으로 공급해주는 업체를 만나 큰고비를 넘겼다. 그때부터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창의력과 실용성이 돋보이는 아이디어 상품을 취급했다. 그러자 판매 실력이 뛰어난 영업사원들이 찾아왔다. 덕분에 관련 업계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많은 매출을 올렸다.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최악의 경제 불황 속에서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덕분에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대지 42평의 단독 주택을 마련했다. 고급 주택은 아니었으나 방이 다섯 개나 되는 그 집이 나에게는 궁궐처럼 느껴졌다. 집을 산 후 제일 먼저 문패를 만들어 대문 오른쪽 위에 붙이고 나서 가슴이 뭉클했다. 내 집을 가졌다는 사실이 꿈만 같아서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기 권리증을 몇 번씩 꺼내놓고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 종점에서 우리 집까지 몇 발자국이나 되는지 세어보기까지 했다.이에 힘입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남이 만들어 놓은 상품만 판매하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여 보람과 가치를 함께 느끼고 싶었다. 그렇지만 기술도 경험도 없으니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처음 생산을 계획한 제품은 무선전축이었다. 녹음기 방문판매를 하면서 무선 마이크를 끼워 주었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그러나 기술도 경험도 없이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 제조업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생산시설을 갖추는 일이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갖추기란 무리였다. 차선책으로 내가 구상하고 있는 제품의 디자인과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위탁 생산하기로 했다.그 시절에는 라디오도 없는 가정이 많았다. 전축도 대부분 턴테이블에 LP 음반으로만 음악을 들어오다가, 8트랙 테이프를 사용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직 스테레오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납품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이런저런 핑계로 자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사업을 성공시키려면 서로 의견을 존중하고 뜻을 모아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시장을 내다보는 안목이 없고, 나는 생산기술이 없어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실랑이를 했다.우여곡절 끝에 제품이 출고되었다. 그 당시 천일사 별표전축과 성우전자 독수리표(쉐이코)전축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였다. 한창 음향기기 붐이 확산되고 있던 때라 무선전축이 출고되면 대박이 날 줄 알았다. 하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낮고, 경험 부족으로 거래처 확보가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1977년 7월부터 정부에서 부가가치세법을 실시하여 시장 경기마저 얼어붙었다.사업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결국 사업을 접고, 32세 되던 해 변두리 재래시장에 그릇가게를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내가 가게를 보고 있으면 장사가 잘 안되었다. 아내가 있을 때는 물건을 사 가는데 나 혼자만 있으면 가격만 묻고 돌아갔다. 심지어는 가게 안을 빠끔히 들여다보고 그냥 가버리는 손님까지 있었다. 내가 아내보다 장사 경험도 더 많고 상품에 대한 설명도 잘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온종일 좁은 공간에 있으려니 답답하고 감옥에 갇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디기 힘들었다.점포 장사는 단골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친절과 미소만으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좋은 물건을 싸게 판매해야 한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손님이 멀어지고, 손님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경영이 어려웠다. 이익을 적게 보고 많이 판매한다는 뜻으로 박리다매(薄利多賣)라는 말도 있지만, 오늘 손님이 내일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다. 또 언제까지 적자운영을 하면,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그런 전략을 쓰기도 쉽지 않았다.장사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신용을 파는 것이라는 말처럼, 신용을 쌓기 위해 좋은 품질만을 고집했다. 그렇지만 상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소비자는 품질의 우수성을 몰라보고 무조건 가격만 따졌다. 반대로 가격이 싼 제품은 그만큼 품질이 낮아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을 수가 없었다.예상했던 것보다 장사가 안되어 가전제품과 생활용품 등, 품목을 바꿔봤지만 현상 유지도 어려웠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첫째 딸이 태어났다. 나도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고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는 딸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를 흔들었다. 하지만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아 사채를 얻어 녹음기 방문 판매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마저 기대했던 만큼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생산업체를 찾아가서 특성이 있는 제품을 주문 생산하기로 했다. 다른 제품과 차별화하여 영업사원들이 판매에 자신감을 갖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새로운 기능은 경음악에 맞춰 마이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LED 불빛이 소리의 진동에 따라 반짝반짝 빛을 발사하도록 했다. 여기에 에코 기능까지 추가하여 가라오케라고 판매했다.판매를 시작하자마자 소비자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러자 다른 업체에서 근무하던 판매원들이 스스로 찾아들었다. 판매 실력이 뛰어난 외무 사원들 덕분에 2년 만에 다시 집을 장만했다. 버스 종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작은 점포까지 있는 건물이었다. 내 실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남의 능력을 끌어다 목표를 달성 한 셈이다.하지만 방문 판매업은 참으로 힘든 사업이었다. 외판원을 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 대부분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청소년들이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고 장사 경험도 없는 사람들에게 판매 교육을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더욱이 외무 사원들 대부분이 자기가 하는 일을 천하고 부끄럽게 생각했다. 때문에 긍지가 없고 직업관이 희박하여 임시 일자리로 여겼다. 따라서 정착률도 낮았다. 판매 가격도 들쑥날쑥하여 소비자와 다투는 일이 잦고, 상품 대금을 떼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내가 처음 배운 일이고, 적은 자본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라 마지못해 계속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방문판매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가 떨어졌다. 판매원의 교육 관리도 힘들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데 한계를 느껴 또다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다시 쏘아 올린 꿈 1992년 내 나이 47세 되던 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 별 1호가 발사됐다. 나도 새 상품 개발에 대한 꿈을 쏘아 올리기 위해 준비했다. 당시 요구르트 제조기가 히트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유명 제약회사에서 생산된 제품 하나를 구입했다. 좀 더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봤다.기존 제품은 1,000미리 우유팩에 시약(종균)을 넣고 요구르트를 만들게 되어있었다. 우유팩 안쪽에는 얇은 비닐 코팅이 되어있는데 여기에 오랜 시간 열을 가하면 환경호르몬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시약을 구하기도 어렵고 요구르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 문제점으로 보였다.그 무렵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한 사촌동생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동생이 요구르트 제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생산된 그 제품은 여섯 개의 작은 유리병에 우유를 넣고 만들게 되어있었다. 유리병은 요구르트를 덜어 먹지 않고, 한 번에 먹기 좋을 만큼 크기로 되어있었다.나는 무슨 일이든 한번 마음먹으면 즉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라 곧바로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알루미늄 열판과 전자 IC 회로를 이용하여 온도 편차를 극소화하고 타이머와 멜로디 음, 램프 표시 기능을 내장했다. 또 차가운 우유가 유산균이 증식하기 좋은 온도로 높여지는 시간이 단축되도록 했다. 그 방법은 두 개의 열선을 이용하여 적정 온도까지 빨리 높여준 다음, 가열 열선 하나는 전원이 차단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즉 전기밥솥이 밥이 다 된 다음 보온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원리다.장사는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것이 사업의 목표다. 하지만 제조업은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존 제품의 단점을 보완하고 품질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곧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다.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다가 뜻밖의 벽에 부딪혔다. 전기제품을 생산하려면 공장 등록증과 제조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 첫 번째로 공장 설립과 제조 허가를 받기 위한 행정절차가 발목을 잡았다. 공장등록이 되어있는 건물에 생산시설을 갖추고 안전성을 인증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공장 설립에 대한 법정 설비와 관련 법령들이 제정된 지가 몇십 년 되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나 전자 전기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 대부분이 제품을 생산하는데 필요 없는 시설들이었다. 그러나 국법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그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품 생산하는데 필요도 없는 값비싼 기계들을 단순히 제조 허가를 받기 위해 설치해야만 했다.이처럼 까다로운 행정절차를 걸쳐 공장등록과 1종 전기용품 제조업 허가를 받는데, 1년이 걸렸다. 사업자금의 대부분이 제품생산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사용되고 결국 빚더미에 올랐다.그러나 기존 제품의 단점을 보완했으므로 상품을 출시만 하면 바로 대박이 나서 그동안 쌓인 빚을 쉽게 갚을 수 있게 될 줄로 믿었다. 그런데 시장 반응은 아주 싸늘했다. 소비자는 품질보다는 브랜드를 더 우선시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친구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KBS 2TV에서'TV 슈퍼마켓'이라는 프로가 방송되고 있으니 빨리 텔레비전을 켜보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텔레비전을 켜보니 마침 아이디어 상품에 대한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 출연을 원하는 업체는 신청하라는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마침 지인 중에서 PD를 잘 아는 분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담당 PD가 마침 잘 왔다고 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겨주었다. 사실을 알고 보니 방송국 측에서는 새로운 상품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누구나 접수만 하면 곧바로 방송을 해주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했었다.친구 부인의 전화 덕분에 1993년 1월 16일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방송이 나가자, 불과 몇 분 동안 주문 전화가 빗발쳐 100여 개의 상품이 팔렸다.이때 마침 설 명절을 6일 앞두고 있었다. 한 참 주문배달이 바쁘던 때에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근무하고 있는 고향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가 근무하고 있는 버스회사에서 설 명절 선물용으로 주문하려고 하니, 노조 사무실로 와서 상품설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경기도 원당에 주문배달이 있어 자동차 운전을 조카에게 하도록 하고 서대문구 문화촌에 있는 버스회사로 갔다.상품설명회를 서둘러 마치고 물건 배달을 위해 경기도 원당으로 향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폭설이 내렸다. 그렇다고 목적지를 가까이 두고 되돌아올 수는 없었다.삼송리를 조금 지나서 갑자기'쿵'하는 소리와 함께 마주 오던 158번 시내버스와 정면충돌했다. 그 순간 운전하고 있는 조카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몸은 다치지 않고 운전대 사이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카는 출고된 지 일 년도 안 된 자동차가 못 쓰게 되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조카가 몸을 다치지 않은 것을 이 세상 모든 신들에게 감사했다.사고가 난 장소는 허허벌판이었다. 당시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사고 수습을 위해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에 불이 밝혀 있었다. 다행히 그곳에 전화가 있어 연락을 취할 수가 있었다.텔레비전 방송 덕분에 광고의 위력을 실감했다. 방송이 나가고 3일이 지나자 주문 전화가 뚝, 끊어졌다. 매출 증대의 해법이 광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오랜 궁리 끝에 각 신문사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와 함께 요구르트 제조기를 하나씩 보내주었다. 고맙게도 10여 개의 신문에서'새 상품 소개' 난에 기사를 실어 주었다. 하지만 광고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전국 발명품 전시관에도 전시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이벤트 행사장을 찾아다니며 최선을 다했지만 한 가닥 빛도 보이지 않았다.희망에 들떴다가 절망을 맛봤고, 비상을 꿈꿨다가 추락을 경험했다. 재물과 사람, 건강까지 잃었다. 나의 무능이 초래한 결과이니,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과 아픔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지난날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다 겪었지만, 삶이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있을까 싶었다.세 번째 사업 실패로 실망감과 좌절감에 빠졌다. 부채의 규모가 컸지만, 주변 사람들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컸다. 당시 나는 건강까지 좋지 않아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의지할 곳이 없으니 내가 더 강해져야 했다. 상처는 오기가 되고 힘이 되었다. 사업은 실패했지만, 가정은 내가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분연히 일어섰다.내가 할 줄 아는 일이 장사밖에 없으니 또다시 방문판매를 하는 방법밖에 대안이 없었다.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서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내 형편에 맞는 아이템 찾는데 주력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세운상가에서 가라오케 반제품을 사다가 직접 조립하여 판매하기로 했다. 전기가 없는 유원지나 행사장에서도 오토바이 배터리를 이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존 가라오케보다 판매 가격이 싸고 사용이 편리하여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내가 직접 조립하여 판매하니 마진도 좋았다. 한 달에 20대만 판매해도 현상 유지가 가능했다.그런데 판매 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부피가 크고 중량이 무거운 제품이라 승용차가 없는 사람은 판매 활동을 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고, 방문판매 실력이 뛰어난 영업사원을 구하는 일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장사란, 도입기와 성장기, 성숙기와 포화기, 감퇴기를 먼저 파악한 다음 판매 전략을 세우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볼 때, 1993년 당시 가라오케 붐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만큼, 성장기와 성숙기에 해당하는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했다.지난날 무선전축을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서 무선전화기처럼 생긴 휴대용 가라오케를 생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그러나 생산시설을 갖추는 일과 사업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마침 종로 세운상가에서 자동차 전용 노래 반주기 생산업체 사장을 만나 내가 구상하고 있는 내용 설명했다. 그도 내 이야기를 듣고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하지만 장사에 경험이 없는 그는 판로를 걱정하여 직접 생산하기를 주저했다. 이때 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판매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금형 제작비용까지 나에게 부담하라고 했다. 자기는 아무런 부담도 짊어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사업성이 높다고 믿고 모든 부담을 떠안기로 했다.그는 아주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와 대화를 할 때면 귀를 기울여야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아주 천천히 말했다. 게다가 그는 누구와 마주 앉아있을 때도 수줍은 여인처럼 상대방과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서 믿음이 더 갔다.나는 노련한 영업사원들을 끌어들여 판매 조직을 구성하고 제품이 출고되기만을 기다렸다. 계약을 체결했던 업체는 본래 노래 반주기를 생산하고 있던 터라 짧은 기간에 완제품 출시가 가능했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다고 했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총판 계약을 제의하여 오자 마음이 돌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착하고 순하게 보였던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되어, 재차 또 재차 확인을 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수많은 배신과 배반을 보아 왔지만, 내가 직접 이런 일을 당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핸드 가라오케 생산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가 배신을 당하고 나니 분노가 치밀었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갑자기 변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어안이 벙벙했다. 어쩔 수 없이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차마 강제집행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그도 나와 함께 망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소행을 생각하면 분노가 끓었지만, 그의 부인과 어린아이들이 고통을 겪게 될 생각을 해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 2천 원짜리의 기적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그해 내 삶의 다리도 무너졌다. 절망의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핸드 가라오케 생산 계획마저 사업 파트너의 배신으로 무산됐다. 평생 갚을 수 없는 빚더미에 앉은 채 결국 사업을 접었다.그때 내 나이 마흔아홉 살 되던 해였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집을 팔아도 빚을 절반도 갚을 수 없었다. 이미 받아 써버린 곗돈과 매월 지불해야 할 이잣돈이 일반 직장인들 두 달 봉급에 가까운 금액이었다.평소에 나를 아끼던 주변 사람들은 채권자들을 불러 모아 빚잔치를 해버리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를 믿고 귀중한 돈을 빌려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을 차마 배신할 수가 없었다. 당장 원금은 갚지 못해도 매월 이자만이라도 밀리지 않고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지난날 내가 편안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산다는 것이 죽는 일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뉴스에서 누가 자살했다고 하면,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그 무렵 둘째 딸이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사업을 하는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미안하여 졸업식에 참석했다. 모두들 선물과 꽃다발을 주고받으며 축제 분위기인데, 풀이 죽어있는 아내와 딸아이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처럼 저렇게 여리고 어린것을 위해서라도 이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힘으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어떻게 하든지 딸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참고 견뎌야 한다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니 창피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우선 창고에 남아있는 상품들을 자동차에 싣고 이벤트 행사장을 찾아 전국으로 돌아다녔다. 행사가 없는 날은 남의 상가 앞이나 노점에서 장사를 하며, 비상할 수 없는 허약한 날개를 한순간도 쉬지 않고 파닥거렸다.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 창고에 있던 재고상품도 모두 팔렸다. 이제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돈이 고작 85만 원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장사가 없었다. 더욱이 행인들의 눈길을 끌만 한 제품을 찾기란 건초더미 속에서 바늘 찾기 같았다. 당장 생계유지가 참으로 막막하던 그 무렵, 청동(靑銅) 장식품 판매하는 한 노인을 우연히 만났다.제품의 크기는, 길이 10cm, 높이 5cm로, 60여 가지의 모양이 있었다. 본래는 연필깎이 용도로 중국에서 수입되는 상품인데 8백 원에 매입하여 2천 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요즘은 연필을 깎는 일이 별로 없으니 사 가는 사람이 없어 장식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심심풀이로 사람들 구경하면서 용돈이나 벌기 위해 다닌다고 했다.1995년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생활필수품도 잘 팔리지 않는 불경기에 이런 물건이 팔릴까 싶었다. 그렇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청동 장식품 장사를 하기로 했다.바로 그다음 날부터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남의 상가 앞에 좌판을 펼쳤다. 몇 시간이 지나도 거들떠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졌다. 점심때가 지나도 배고픈 줄도 몰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점에서 물건을 사 가는 사람은 하루에 한두 명밖에 안 되었다. 그나마 한 사람이 한두 개씩 사 가기 때문에 자릿세도 못 했다. 하지만 원체 장사 밑천이 적어서 취급 품목을 바꿀 수도 없었다. 청동 장식품으로 절망의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하는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매출을 증대시킬 방안을 찾기 위해 고민에 빠졌다. 며칠 동안 궁리한 끝에 다섯 개를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서 1만 원씩에 판매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세트를 구성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자동차나 비행기, 악기 모양으로 된 것은 같은 종류들끼리 쉽게 세트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성격이 다른 것들은 세트 구성을 할 수가 없었다. 골똘히 생각한 끝에 극작가가 시나리오를 쓰듯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만들어서 세트를 구성해봤다.예를 들자면 포장마차 뒤에는 대포를 놓고 그다음 호롱불을 놔두었다. 그렇게 하여 서부영화에서 포장마차 뒤에 대포를 달고 가는 것을 연상하게 하고, 또 밤이면 호롱불을 사용한다는 뜻으로 설명하면 될 것 같았다. 이처럼 퍼즐 조각을 맞추듯 하나하나 연결하여 이야기 줄거리를 만들고 각각 특징에 맞는 세트 이름을 붙였다.이런 방법으로 열 가지의 세트를 구성했다.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그 가치가 달라져 보이듯, 이렇게 뜻을 담아 해석을 곁들이면 매출 증가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세트 구성이 완성된 다음, 진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봤다. 똑같은 상품이라도 어떻게 진열하느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기 때문이다.오랜 궁리 끝에 인테리어 가구공장에서 백색 바탕의 조립식 진열장을 주문 제작했다. 벽에는 거울을 붙이고 한 칸에 한 세트씩 양쪽으로 여덟 세트를 진열해놓으니 보석상 진열장처럼 아주 훌륭하게 보였다. 세트가 구성되지 않은 나머지들은 진열장 앞에 아무렇게나 흩어놓고, 골라가는 재미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이처럼 머리를 짜고 지혜를 모아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좌판 펼칠 장소를 구하는 일이 큰 벽으로 다가왔다. 장사가 좀 되는 장소는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붙박이처럼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좌판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종일 헛고생만 하고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기가 참으로 힘들었다.어렵게 장소를 마련해도, 아이들 소꿉놀이 장난감처럼 자질구레한 것들을 상품이라고 펼쳐 놓고 있으려니 처량한 생각까지 들었다. 중형 아파트 한 채 값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원가 천 원도 안 되는 상품을 취급한다는 것은 노적에 불 질러놓고 싸라기 줍는 격이었다. 가끔 자릿세도 못할 때도 있었지만 손해 보는 장사라도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병이 날 것 같아 더 바쁘게 일했다.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자릿세도 못하고 왔는데 보일러가 고장 났다고 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나는 아내에게"이런 때일수록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라는 말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당장 급하고 필요한 것이 돈인 줄 뻔히 알지만 서로 말을 아꼈다.또 어느 날은 두 딸이 목욕탕을 가려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아 그런 사실을 몰랐었다. 20여 년이 흐른 뒤에 둘째 딸이 추억담으로 얘기하여 뒤늦게 알았다. 그만큼 식구들 모두가 돈이 드는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삼가 했었다.이처럼 생활이 어려워지자,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아내까지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아내도 처음 각오나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어했다. 대부분이 처음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건 사라는 말조차 꺼내기가 힘들다. 그런 줄 알지만 아내가 나서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적극 말리지 않았다.당시 아내도 고혈압으로 인하여 편두통과 현기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구들 앞에서 아프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내가 너무 무능하여 건강도 좋지 않은 아내까지 길거리로 내모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가급적 장사하기 편한 장소를 찾아서 아내에게 먼저 마련해주고, 나는 또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문득문득 아내가 걱정되었지만,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종일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특히 아내 나이 또래의 여인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외출하는 모습을 볼 때면 고생하는 아내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이렇게 아내까지 나섰지만 생활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더욱이 무더운 여름철이 다가오니 더 걱정이었다. 날씨가 맑은 날은 무쇠도 녹일 것 같은 뙤약볕이고, 장마가 계속되면 장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때 마침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부산 무역센터에서 공룡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공룡 전시회는 청동 장식품이 딱 어울리는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할 것도 없이 큰 기대를 안고 부산으로 내려갔다.도착한 즉시 행사 관계자를 만나보니 기념품을 판매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이미 다른 사람이 독점하고 있었다. 매장을 독점한 사람은 삼성동 코엑스에서 여러 차례의 전시회 관계로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안면을 싹 바꾸고 한 달 자릿세를 300만 원이나 달라고 했다. 당시 일반 회사원 평균월급이 100만 원이었던 때다. 책상 하나 놓을 정도의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되는데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그곳에서 꼭 장사를 하고 싶은데 나에게 그만한 목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정사정하여 판매 이익금의 50%를 자릿세로 주기로 합의를 봤다. 나에게 주어진 장소는 전시장에서 가장 으슥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그렇지만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서울로 되돌아가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옹색하게 자리 잡았다.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면 관람객들을 후미진 곳까지 오도록 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오랜 궁리 끝에 진열장 벽면에 거울을 붙이고 양쪽에 100W 전구로 불을 켜두었다. 밝은 불빛이 거울에 반사되어 상품이 최대한 돋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라고 쓴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전시회는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열렸는데 첫날부터 관람객이 물밀듯 몰려왔다. 진열장에 환하게 켜놓은 불빛과 현수막을 보고 사람들이 내가 있는 구석으로 모여들었다. 앙증맞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식품이 연필깎이까지 달린 것을 보고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했다. 많이 사 가는 사람은 다섯 세트에서 열 세트까지 사 가기도 했다. 이처럼 청동 장식품 하나하나가 희망이 되고 빛이 되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다 사그라진 잿더미 속에서 작은 불씨 하나를 찾아낸 기쁨을 맛보았다.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를 부여잡듯 청동 장식품에 희망을 걸었다. 허튼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견딜 수 있기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눈물과 땀방울로 희망의 무지개를 만들어 갔다. 어둠을 밝혀 준 냄비 진정한 가족애는 어려움 속에서 피어났다.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었다. 함께 노력한 덕분으로 1년 동안 노점상을 하여 근근이 모은 돈이 800만 원이 되었다. 그것을 종잣돈으로 또다시 제조업에 도전했다. 도전과 모험으로 실패와 고통을 겪었지만,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길도 오직 도전과 모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금형 값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경험과 신용을 자본으로 냄비를 만들기로 했다. 금형 제작에서부터 포장용 박스생산에 이르기까지 지난날 거래했던 업체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1996년 당시는 경기침체로 대부분이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을 때라, 아무리 친분이 있는 사이라도 도움을 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두들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평소 내가 너무 원칙만 따진다고' '장도칼 또는 탱자나무 가시'라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른 기간에 완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제품의 크기는 지름이 22cm로 아주 조그맣게 만들었다. 금형 제작비가 모자라 양쪽 손잡이는 만들지 못했다. 뚜껑에는 둥근 철사를 귀걸이처럼 끼워서 손잡이를 대신했다. 원체 적은 돈으로 옹색하게 만든 제품이라 고급 주방용품들 틈에서 판매될 수 있을까 싶었다.못난 자식 선보이러 가는 심정으로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쇼핑센터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야외용 가스버너에 불을 켜놓고 고구마를 직접 구워 시식시키는 방법을 응용했다. '물과 기름이 없이도 생선을 구울 수 있고, 높이가 일반 냄비의 절반밖에 안 되므로, 뚜껑의 복사열로 음식이 빨리 익을 뿐만 아니라, 생선이 맛있게 구워진다.'고 설명했다.판매를 시작하자마자'요술 냄비가 나왔다.'며,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절실함이 기적을 일으킨다더니 마침내 꿈같은 현실이 펼쳐졌다. 주야로 생산해도 주문량을 다 맞추지 못했다. 새벽부터 시작하여 숨 가쁜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돈이 인쇄소의 폐지처럼 쌓였다. 큰 종이 상자에 수북이 쌓여 있는 돈을 보고, 딸아이가 하는 말이"아빠 우리 돈 세는 기계를 사야겠어요."라고 하여 우리는 모두 함께 웃었다.일할 때는 물건이 팔려나가는 즐거움에 피곤한 줄 모르다가, 일과가 끝나면 식구들 모두 녹초가 되어 손발 씻는 것도 귀찮았다.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했던 그 돈을 세어볼 기운이 없었다. 큰 종이 상자에 차곡차곡 쌓인 돈을 방 한쪽 구석에 미루어 놓고 그대로 잠이 들 때가 많았다. 어느 날은 거래처 은행 지점장이 선물을 잔뜩 들고 찾아와서 은행 직원을 매일 우리 공장으로 보내 입금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했다.바로 그다음 해 1997년은 IMF 외환 위기로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하여 갑자기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노점상이라도 해보겠다고 찾아왔다. 사무실로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장사 경험이 전혀 없거나 물건값이 부족한 이도 있었다. 이처럼 사정이 딱한 사람들에게는 지난날 나도 힘들었던 때를 생각하여 상품을 외상으로 주었다. 또 많은 량을 주문한 사람보다는 적은 량을 가져가는 상인들부터 주었다. 그러자 규모가 큰 거래처들이 불평했다. 대부분 소규모 노점상이라 더러는 물품대금을 갚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노점상이라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하니 큰 보람을 느꼈다.갑자기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다가, 뜻밖에 장사가 잘되어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고맙다고 음료수나 고기를 사서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와서 주고 가기도 했다.여기에 힘입어 일 년 후에는 삼단 바닥 냄비를 개발했다. 계속하여 12종류의 주방용품을 생산하게 되었고, 2년 동안 45만 개가 팔렸다. 똑같이 내린 비에도 떨어지는 꽃이 있고 다시 피어나는 꽃이 있듯이 온 나라가 불황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나는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덕분에 나는 평생 갚지 못할 줄 알았던 그 많은 빚을, 1년 만에 모두 다 갚고 상가건물도 장만했다. 그리고 1998년 9월에는 발명 진흥회의 추천으로 이태리 밀라노에서 열리는'마제프 가정용품 국제 박람회'에도 출품했다. 외국어에 서툴러 걱정했는데, 마침 이태리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던 조카(이질) 내외가 상품설명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전시회 기간 내내 외국 바이어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아주 좋은 실적을 올리고 귀국했다. 지금까지 나는 비륵땅 같은 삶의 땅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바뀌고 연장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연장도 내 손에 맞지 않으면 나만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땅의 성질에 적합한 새로운 연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패도 하고 상처가 덧나기도 했지만 보람도 있었다.처음에는 곡괭이로도 팔 수 없는 비륵땅인 줄 알았는데 큰 돌 몇 개를 파고 나니 작은 돌멩이들이 나오고 기름진 흙도 조금씩 섞여 있었다. 이때 자갈밭은 모래밭 같고 모래밭은 옥토처럼 느껴졌다.가난이 죽음보다 더 무서워 모험을 했고, 바닥에서 비상할 수 없으니 갈아엎었다. 내 삶의 땅이 햇볕도 받고, 바람도 잘 통하고, 물도 잘 흐르게 한 후, 희망의 씨를 뿌릴 수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와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흙 속에 숨겨진 바윗돌처럼 나를 속이고 더욱 힘들게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돌밭에 섞인 흙처럼 힘을 보태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길을 열어주었다.농촌에서는 가을이 되면 수확의 결과에 상관없이 다음 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땅을 갈아엎는다. 겨울철에 잡초와 해충들이 얼어 죽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묵은 땅은 갈아엎어야 위아래 흙이 서로 바뀌어서 땅의 질이 높아진다.이와 같이 살아간다는 건 삶의 땅을 개간하고 갈아엎는 연속이라 생각한다. 삶의 땅이 아무리 기름지고 풍요로워도 수시로 갈아엎어 주지 않으면 땅의 힘이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묵히고 방치해두면 잡초가 무성하고 돌처럼 굳어진다. 굳은 땅에 물이 고일 수는 있어도 새로운 싹이 움트기는 어렵다. 설령 싹을 틔웠더라도 무성하게 자라지는 못한다. 그래서 박토뿐만 아니라 옥토도 가끔 뒤집고 갈아엎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는 비륵땅은 객토 작업을 해야 한다.농사꾼의 가을처럼 인생의 완성은 노년에 결정된다. 객토 작업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요즘 시민대학과 문화센터에서 내 삶의 마지막 객토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2019-08-08 18:14:01

김은집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미완의 고백 / 김은집

나는 살아오면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받았었다. 그 손길을 뻗어주었던 분들은, 혈연이 있었거나 지연 혹은 학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고 우연히 만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소개로 만나게 된 사람도 있었으므로, 나는 늘 사람이면 누구나 나의 은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인연이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지속시키고 꽃피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나 혼자 품고 있기에는 너무나 고마웠던 분들과의 사연을 글로 써서 남기는 것이 그 분들에 대한 보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경북지방에서 제법 명망이 높았던 유림 김정기님과 양소선님 사이에 태어난 7남매 중 막내였고 늦둥이 외아들이었다.원래는 무인(1938년)생이었으나 태어날 때 너무 허약하였으므로 출생신고를 늦춘 탓에 호적상에는 기묘(1939년)생으로 되어 있다.내가 태어난 직후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최고조로 극악해질 무렵이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은 물론, 내선일체를 앞세워 우리말, 우리글도 사용하지 못하게 억누르던 때였으니까. 그런 중에 일본이 하와이군도를 기습 공격하여 발발한 태평양전쟁이, 유럽지역에서 일어났던 제2차 세계대전에 병합되면서부터,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공격이 강화 되었으므로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패전으로 끝을 맺었던 것이다. 따라서 36년간 일제의 강압통치를 받아오던 한반도가 광복을 맞았으나, 연합군의 양대 세력인 미국과 소련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앞세웠으므로 북위 38도선을 경계삼아 조국산하가 양분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였기에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이 이데올로기 싸움의 틈바구니에 빠진 채 살아온 것이 어느 듯 70주년을 넘긴 것이다. 수성 못 아래에 자리 잡은 중동에서 태어난 나는 수성국민학교(입학 당시에는 사대부속국민학교였음)를 졸업하고, 선지원 후시험인 국가고사를 치르고 경대사대부속중학교에 진학 하였었다.6.25 전란 중이었으므로 벽돌건물에 담장이넝쿨이 뒤 덮여 운치가 있던 본교건물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 건물 정문 앞 큰길 건너에 있던 가교사에서 입학식과 졸업식을 치루었는데 나의 학업은 순탄하지가 않았다.아버님은 청렴한 선비셨으므로 가세가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평소 붓글씨를 써주시거나, 남의 편지를 대필, 대독해 주고받은 사례물품으로 생계를 이어 왔으므로, 당시 중학교 공납금 중 제일 액수가 적었다는 그 학교의 학비마저 제때에 내지 못하여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여러 번 하였던 것이다.그러던 중 내가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아버님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었다.「옛날에는 소학교만 나와도 면서기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요즘 세상은 중학교 졸업장 가지고는 학교소사도 못해.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나와야 말단 공무원이라도 할 수 있다구. 네가 나와 함께 인천으로 가면 우리가 너를 고등학교 까지는 다니게 해 주마」아버지의 장례식에 왔던 둘째 누님의 말에 함께 왔던 자형도 동의하였으므로 어머님과 다섯 누님들이 나에게 권하였다.그러나 나는 선뜻 그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무렵 우리국민 모두가 그러하였듯이 결혼한 누님들 모두 생활이 어려웠었고 나의 바로 위 누나는 그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예정이었으나 쉽게 취직하지 못 할 것 같아 혼자서 어머니를 모시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 여겨졌던 때문이다.「설마,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냐? 내 걱정 말고 넌 둘째누님 따라 가거라. 외아들인 네가 잘돼야 돌아가신 아버님도 마음 편하실게 아니냐?」「그래, 어머닌 우리가 힘을 합해서 모실테니 넌 누님 따라 가거라」「여러 곳에 이력서 내어 놓았으니 곧 좋은 소식 올게다. 그러니 넌 염려 말고 언니 따라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라」어머님 말씀에 첫째누님과 막내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하지만, 중학교 졸업장은 받아가지고 가야 할 것 아녜요?」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말미를 얻으려고 내가 말했다.「그건 그래. 그럼 네가 오는 걸로 믿고 우린 준비하고 있으마」둘째누님의 말이었다. 그 무렵 둘째누님 내외분은 인천의 남녀 고등학교 교사로 각각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그 해 2월 하순에 졸업장을 받아든 나는 어머니와 막내누나의 배웅을 뒤로 하고 완행열차편으로 상경하여 다시 경인선 열차를 타고 제물포역에서 내려 둘째누님 집을 찾아갔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당시에는 고등학교 진학도 선지원 후 국가고사를 치르고 채득한 점수가 지원한 학교의 모집인원수 속에 들어야 입학이 허용되었었는데, 진학을 포기하였던 나는 어느 고등학교에도 원서를 제출하지 않았었고, 고입을 위한 국가고사도 치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내가 J고교에 들어간 건 그해 입학식이 끝나고도 며칠 후였다.교무실까지는 그 학교교사였던 자형이 동행해 주었었고 배정받은 학급에는 담임선생과 함께 들어갔다.「합격한 학생 하나가 등록금을 내지 않아 입학취소가 되었는데, 이 학생이 그 학생 대신 입학허가를 받아 제군들과 함께 공부하게 된 김은집이다. 대구에서 사대부중을 졸업하고 인천으로 유학 온 학생이니 사이좋게 지내기 바란다.」담임선생의 소개를 받은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에 가름하였고, 그 반 학생들은 일단 박수로 환영의 뜻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 학교에서의 학업도 순탄하지가 않았었다. 동급생은 물론, 선배들도 경상도에서 올라와 보결로 들어온 나를 반겨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요즘말로 왕따 시켰기 때문에 늘 외로웠으며, 게다가 2학년 겨울방학 때 자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누님네 생활도 전보다 궁핍해졌었는데, 그 누님에게도 학교에 다니는 3남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어렵게 그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J고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누님에게 폐를 끼칠 수 없어 서울로 일자리를 구하려 떠날 때「도움이 될 진 모르겠다만 이 편지, 충무로에 계신 이봉래감독에게 드려 보렴」제법 도톰한 봉투하나를 누님이 내게 주셨다. 얼결에 받아든 나는 누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이봉래감독은 네 자형과 호형호제하던 시인이신데, 지금은 영화감독을 하고 계셔. 내가 알기로는 영화사도 하나 차리신 것 같아. 그러니 그 편지 보면 도와 주실지도 몰라」누님의 말을 들은 나는 따사로운 혈연이 다시 한 번 고마워 눈시울이 젖어오고 있었다.그 편지를 가방에 넣고 서울로 간 나는, 달리 찾아갈 곳도 없었으므로 영화인들의 활동지역인 충무로에 가서 이봉래 감독부터 찾아보았다. 그는 D영화사 사장이었고 감독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이력서 갖고 왔는가?」D영화사를 세 번째 찾아간 오전, 나는 비로소 이 감독을 만날 수 있었고, 누님의 편지를 읽어본 그가 한참동안 나를 건너다보다가 불쑥 물었으므로 나는 대답대신 고개만 가로 저어 보였다.「잠자리는 구했는가?」다시 물었을 때도 나는 역시 고개만 가로 저어 보였다.「길 건너가면 문방구점이 있으니, 가서 이력서 용지 한 장 사다 써 놓고 기다리게. 난 또 촬영장엘 가봐야 하니까」말하고는 휑하니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주인 없는 사장실에 혼자 앉아 있기도 거북스러워, 나는 길 건너 문방구점에 가서 이력서 용지 1권을 사들고 다시 돌아와 여직원이 앉아 있는 사무실에서 이력서를 쓰려했지만 정말 쓸 것이 없었다.이 감독이 다시 돌아온 것은 세 시간쯤 지난 후였다.나는 그동안 여직원이 쟁반에 담아서 건네준 빵과 우유로 점심식사를 하였었다. 그 빵과 우유는 촬영장에서 연기자와 스텝들이 먹는 간식이라고 여직원이 말해 주었었다.나는 본적과 성명, 생년월일과 성별, 그리고 내가 졸업한 초, 중, 고교명만 기재한 이력서를 이 감독에게 건네주었다. 주소란도 메꿀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불편하겠지만, 당분간은 내 사무실에서 자고, 제작부의 조부장 일을 도와주게. 월급은 많지 않지만 사람들은 많이 사귀게 될걸세.」이력서를 살펴본 이 감독의 말이었다. 정말 뜻밖의 호의였으므로 나는 연신 고개를 숙여 보이며 「고맙습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다음 날부터 나는 「D영화사 제작부차장」이란 직함이 인쇄된 명함을 사용하게 되었고 연기자나 스텝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으며 시나리오 작법을 배우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그때 받은 월급들을 모아 두었다가 겨울이 오기 전에 충무로에서 가까운 남산동에 자취방도 구할 수 있었으며 이듬해 신학년도에는 비록 야간부이긴 하지만 K대학의 사학과에 진학도 하였던 것이다. 동강 조수호선생을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여 뒤였다.동강선생은 내가 중3때 미술을 지도하셨던 분인데 그 무렵 선생께선 배제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기신 후였고, 졸업 후 내가 처음 만난 은사님이셨다.나는 그 무렵, 하숙이나 자취할 수 있는 방을 구하려고 서울의 주택가를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그 무렵 많은 서울사람들은 대구에서 올라온 학생에게는 방을 세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입자의 친구들이 모이면 마치 싸움판이 벌어진 듯 시끄러웠기 때문이라 하였다. 해서, 내가 처음 자취방을 얻었던 남산동 집에 세 들어 갈 때도 시끄럽게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 주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어느 일요일 오전, 내가 신당동 골목길을 기웃거리며 가고 있다가 동강선생과 마주친 것이다.나는 국민학교 3,4학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었는데 당시 담임선생도 수채화를 잘 그리셨고, 그 선생의 눈에 든 내게 수채화 그리는 법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시다가 6.25때라 입대 하셨으므로, 나는 김용환선생의 조언을 들으며 처음으로 유화그리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으나, 아버님은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시면 호되게 꾸짖으셨으므로 숨어서 그리기를 계속하였고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늘 미술부에 몸담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동강선생도 나를 기억 하시고 반겨 주셨던 것이다.골목길 찻집에 마주 앉은 후 내가 방을 구하려 다니게 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나 하고 같이 청운동엘 가 보세. 마침 청전선생님 댁에 방이 하나 비었을 것 같으니 내가 부탁드려보겠네」그래서 나는 그날 청전이상범 선생님 댁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제가 대구에서 중학교에 근무할 때 미술부에 있던 제자인데, 지금도 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유화를 그렸답니다. 헌데 셋집 주인이 기름 냄새가 역겹다고 방을 비우라 한답니다. 마침 선생님의 아드님이 분가했으니 그 방이 비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제자에게 편의 좀 베풀어 주실 순 없을까요?」「동강의 제자라면 문인화 기초는 착실히 익혔을텐데 왜 유화를 그렸답디까?」「김군은 당시에도 수채화와 유화를 잘 그렸습니다. 해서 제1회 한미학생 미술교류전 때도 경북대표 작품으로 선정되어 영남일보에 사진까지 실린 적이 있습니다. 6.25때 피난 오셨던 김용환화백이 김군 집에서 한동안 사셨고, 그때 그분을 만나려고 여러 번 내왕하였던 도상봉화백과 강우문화백과도 인연이 맺어졌던게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하긴, 광복 후 우리나라 미술풍조가 그쪽으로 기운게 사실이지. 학교에서 문인화나 수묵담채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쳤어야 했는데 말일세.」그날 두 선생님께서는 한국미술계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시며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셨고 그 덕분에 나는 그 집에서 1년여를 하숙하게 된 것이다.「굳이 기름 냄새 풍기는 유화를 그리지 말고, 이 기회에 청전선생님에게 수묵담채화를 배우게. 그리고 사학과에 다닌다 했으니 수묵화에 대한 고전들도 좀 많이 구해 보게나」그날 작별할 때 동강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취미로 그리던 유화에 손을 떼고 틈날 때마다 청전선생에게 수묵담채화를 사사 받았고 문인화에도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문학하는 사람이 문인화나 수묵담채화를 배우면, 자작한 시나 시조 등을 화제로 써 넣을 수 있고 그 화제가 관람자들과 소통을 용이하게 해 주었으므로 나는 지금까지 그 작업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은 6.25와 4.19, 5.16과 6.3사태, 1.21사태와 부마항쟁, 그리고 신군부 쿠데타와 광주항쟁 등 숱한 고비를 넘어왔다.그 중에서도 나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은 4.19와 5.16, 그리고 1.21사태이다.4.19때는 D영화사에 근무하며 K대학 야간부에 다녔으므로 K대학과 Y대학이 주축이 되었던 서울시위에 나도 적극 참가 하였었고, 5.16이후 사회정화 차원에서 각종 단체들을 법인화 시킬 때 발족된 한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의 회장으로 이봉래 감독이 추대 되었으므로 그가 영화산업을 포기하여 내가 실업자가 되었고, 그 동안 연기해 오던 군복무를 마쳐야 했기 때문이며, 1.21사태는 순수문학을 하려던 나를 반공작가와 계몽작가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2년 8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대구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막내누나가 모시고 있었다.그 누나는 내가 인천으로 떠난 후 오래지 않아 대구전신전화국에 취직되어 교환수로 3년여 근무하였고 그때 친지의 중매로 내당동에서 조그마한 직물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사람과 결혼 하였었는데, 영일만이 고향이던 그는 6.25때 부모님을 여위고 대구로 나와 비산동에서 직물공장에 취업하여 자금과 기술을 축적한 다음, 내당동에서 독립하였으므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장모이며 내 어머니였던 분을 친어머니처럼 모셨던 것이다.제대 후 나는 한 때 서울로 가서 충무로 일대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영화사에 다시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T.V 연속극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한국영화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내가 D영화사에 있을 때 사궜던 영화인들, 특히 제작부 직원들은 나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었다. 혹시 내가 자신들의 일터를 빼앗고 들어 올까봐 두려웠던 것이리라.그래서 다시 대구로 돌아온 나는 누님네 공장 일을 도우면서 밤에는 시나리오 습작을 하고 있었다. 막연하게나마 제2의 중흥기가 한국영화계에 도래할 것 같았고 또 T.V 단막극 작법이 영화시나리오 작법과 대동소이 하였으므로 「T.V 극작가라도 되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여류화가 K의 유화개인전 초대장을 받았다.그는 내 고향인 중동에서 이웃하며 자랐었고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던 1년 선배였는데 나와는 매우 친숙하게 지냈었으며 제일여중을 거쳐 경북여고에 진학해서도 미술부에서 활동하다가 2학년 때부터는 부장까지 역임하였던 열성파였으나 가정형편상 미대에는 진학하지 못하고 일찍 결혼하였던 여인이었다.그녀의 첫 개인전 오픈식에는 경북여고 미술부 출신 선후배들이 많이 참석하였으므로 나는 축하인사만 하고 전시장을 나와야 했었다.1주일 후 그 개인전이 끝나갈 무렵 내가 다시 찾아갔을 때 그녀는 후배인 한 아가씨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워낙 바빠서 오픈식 날은 미안하게 됐어. 오늘 잘 왔다. 내 졸업 후 한참 뒤에 미술부장을 하였던 후배인데, 인사하고 지내. 얘도 너처럼 아버지가 그림 못 그리게 하셔서 지금은 H여대 국어국문과에 다니고 있어.」여류화가 K가 자신을 소개하자 아가씨가 고개 숙여 먼저 인사했다.「이 친구, 사대부중과 인천 J고교를 졸업했고 서울 K대학을 다녔어. 또 영화사에도 근무했고, 그때 배운 시나리오 작법으로 지금은 습작을 하고 있다니 언젠가는 훌륭한 작가가 될거야. 한 번 사겨 봐. 그림도 잘 그려」여류화가 K는 이어서 나를 소개해 주었으므로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나의 지난날을 소상히 아는 것은 형이라 부르며 나를 따르던 그녀의 남동생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외아들이었던 나는 그녀의 남동생이 형이라 부르는 것이 좋아 대구 와서는 자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이후 여류화가의 후배인 아가씨와 나는 주말이면 이따금 만나 전시장 순례와 영화감상, 문학토론 등으로 시간을 보냈었다.만남의 횟수가 잦아지자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음을 느꼈고, 반려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갖게 되었으나 두 사람의 결합에는 걸림돌이 많았었다.그것은 내가 이렇다 할 직장이 없는 백수의 신세였고, 그녀 역시 1년 이상 지나야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가족들, 특히 아버지와 형부의 반대가 극심하였던 것이다. 영천이 고향인 그녀는 그때 대구에 사는 언니 집에 하숙하며 등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영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인 B형과도 사귀고 있었다. 밖에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정도 방문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1968년 2월 초, 구정 다음날 B형이 내 어머니에게 세배를 드린다고 내당동 누님네 집으로 찾아왔었다.세배가 끝난 후 누님 집에서 나온 B형과 나는 반고개 아래에 있는 신진극장 앞 대포집에 마주 앉아 있었다.「이번에 공보부에서 시나리오 현상공모가 있던데 김형 거기 한번 응모해 보지 그래?」막걸리 몇 잔을 주고받다가 B형이 말했다. 너무나도 뜻밖의 소리였으므로 나는 멀거니 그의 얼굴만 건너다보고 있었다.「하긴 마감 기일이 좀 촉박하긴 하네만…….공보부에서 현상공모 하는 주제는 뻔-하지 않은가? 반공 아니면 농촌 계몽물이지」「언제까진데?」「이달 20일까지」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B형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였다.「이 친구, 시나리오 한 편 쓰는게 뭐 치약 짤 듯 하는 줄 알어? 20일까지면 열흘 남짓 밖에 안 남았잖어?」「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보게. 마침 좋은 소재가 있었잖어? 1.21사태 말일세. 육로로 왔던 놈들이 실패하였으니 다음에는 낙하산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해상을 이용하지 않겠어? 그러니 그 쪽으로 가상적 이야기 하나 만들어 보라구. 시나리오 작법이야 그 동안 계속 연구해 왔으니 참신한 소재 하나 잡으면 열흘 동안 끝내지 못할 것도 없잖어?」듣고 보니 그랬다. 그림이나 문학작품은 붓이나 펜을 들기 전에 구상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 그것을 집필하거나 형상화 시키는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니지 않은가?그날 B형과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밤을 새우며 참신한 소재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찾은 소재로 1주일 만에 원고를 작성하여 소포로 보낸 「파래섬의 딸」이 뜻밖에도 입상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여류화가 K의 소개로 사귀던 아가씨 집의 반대는 그동안 그녀의 언니가 애써 완화 시켜 왔었는데 내가 공보부 현상공모에 입상한 것은 그 언니에게도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그 언니가 아버지와 남편을 설득시켰으므로 사귀던 여인이 졸업한 그해 가을에 우리는 결혼할 수 있었는데, 내가 대구를 떠나 산 것이 10년 가까이 되다보니 주례를 부탁할 만한 지인이 없었다. 그렇다고 예식장에서 계약해 놓은 직업적 주례자를 세우는 것도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 고심하던 중 문득 중학교 때 은사님이셨던 김판영선생이 생각났던 것이다.그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 1학년 1학기 때 영어를 가르쳤지만 2학기부터는 상급반 지도를 하셨고, 내가 그 학년에 이르렀을 때는 고등부 교감으로 떠나셨으므로 두 번 다시 강의를 듣지 못하였던 분이었다.그런데 내가 그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 맺어진 것은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 해 광복절 기념식이 끝나고 일직이 된 나와 당직이 되신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만난 것이었다.「은집인 장래희망이 뭔가? 그동안 지켜봤더니 문예부와 미술부에서 활동하며 온실 출입도 잦던데?」「글쎄요. 아직은…… 싹이 나오는 것 봐서 결정해야겠지요」「녀석, 꼭 눈 덮인 산 같은 소리를 하는구먼」그날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러다가 선생님은 나에게 소산(素山)이란 아호를 지어 주셨다.그러나 그 선생님도 졸업 후에는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하였었다. 내가 대구를 떠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불쑥 찾아가서 주례를 서 주십사고 부탁드리기에는 낯부끄러운 일이 아닌가.여러 날 고심하면서도 그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하여 B형에게 물어 보았더니 경상북도 도교육감으로 재선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찾아뵙고 축하 인사 겸 내가 공보부에서 현상 공모한 시나리오부문에 입상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드리고, 기회를 봐서 어렵지만 주례를 부탁드려 보기로 하였다.경상북도 도교육위원회로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반갑게 맞아 주셨고 여비서에게 차를 내어 오라고 하셨다. 차를 마시며 선생님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고, 나는 그 동안 체험한 일들, 특히 시나리오 작법을 배운 과정과 현상 공모에 응모하여 입상되고 상금을 받았다는 말씀을 드렸더니「내가 사람하나는 잘 보았었구먼」 하시며 웃으셨다.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주례를 서주실수 있겠느냐고 여쭈었었는데 뜻밖에도 선생님은 쾌히 승낙하셨던 것이다.당시에는 누군가의 결혼식에 누가 주례를 섰느냐 하는 것이 신랑의 인품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으므로 내 결혼식에 왔던 양가의 하객들 모두가 놀라워하고 있었다.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감사인사까지는 치루었으나 이듬해 봄에, 내가 문화공보부에 특채되어 아내와 함께 상경하였으므로 다시 그 선생님을 찾아뵙지는 못하였었다. 내가 상경하여 문화공보부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인사계장 이달형씨였다. 그는 내가 현상공모에 응모하였을 때 문화과에서 현상공모 담당주무였으므로 시상식 때 처음 만났던 사람인데 첫눈에 호감이 갔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가 인사계장으로 승진하였고, 문화과에서 필요한 작품 집필에 내가 적격이라 여겼으므로 총무과장에게 나의 특채를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화과에는 빈자리가 없었다.「당분간은 인사계에서 근무하시며 문화과에서 의뢰하는 작품을 집필하도록 합시다. 김작가는 필체가 좋으니 인사카드와 연금카드를 일괄정리 좀 해주시오」그는 나를 총무과장과 문화과장에게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켰다. 출근은 다음 날 아침부터였다.나는 6개월 동안 인사계에서 바쁘게 지냈다. 요즘은 모든 기록이 전산화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육필로 작성하였었는데 문화공보부산하 공무원 전원의 인사카드 및 연금카드는 오래된 것이 많았으므로 한사람의 기록에도 필체가 다른 것이 있어 보기에 좋지 않다고 모두 재작성하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따금 문화과의 호출을 받고 가서 소재와 주제를 받아 퇴근 후 집에서 작품을 집필하여야 했었다.그 기간 동안 나는 두 편의 장편 시나리오와 다섯 편의 단편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문화과에 납본하였었다. 그 작품들은 모두 반공사상 고취와 농촌계몽운동이 주제였다.「힘드시지요? 작가 분들은 소재나 주제가 창작적이어야 집필의욕이 생긴다는데 김작가는 늘 주어지는 소재와 주제를 다루어야 하니 의욕이 감소될겝니다.」농촌계몽물 시나리오인 「물은 위로도 흐른다」의 원고를 문화과에 넘긴 날 퇴근시간에 인사계장의 제안으로 안국동에 있는 어느 술집에 마주 앉았을 때 그가 한 말이다. 하지만 면전에서 즉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어 나는 멋쩍은 웃음만 보여 주었다.「국립국악원 서무과 주무자리가 비었는데, 김작가가 그리로 가시겠오? 그 자린 아주 한직이오. 마침 김작가가 세 들어 살고 계신 장충동에 사무실이 있으니 출퇴근시간도 많이 단축될거요」나는 그의 표정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나를 위한 진심인가? 아니면 나를 떠나보낼 작정인가 하고. 그런데 그의 표정은 정말 진지해 보였다.「국립국악원은 뭘 하는 곳입니까?」나는 원래 음악에는 소질도 취미도 없었으므로 전통음악이나 현대음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국립국악원이 무얼 하는 곳인지 정말 몰랐던 것이다.「해방 전에는 이왕직 아악부라 불리던 곳인데 우리나라 전통음악과 무용의 계승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문화공보부산하 기관입니다. 장악과와 서무과가 있고, 부설인 국악사양성소가 있는데 그 기관 주요업무는 대부분 장악과 소관이고 서무과는 그 보조역할만 하는 곳이지요」인사계장의 설명을 듣고 유혹을 느낀 것은 전통음악과 무용이란 말을 들었을 때 언뜻 뇌리를 스쳐가던 우륵과 왕산악, 그리고 박연선생의 이름과 세종대왕 때 편찬되었다는 악학궤범 등의 고서적 제목들 때문이었다.그래서 나는 인사계장에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국립국악원 서무과로 보내주기를 빌었다.1주일 후 나는 국립국악원 서무과로 자리를 옮겨 앉았는데 그 국악원의 원장은 인간무형문화재 제1호인 성경린씨였다.국립국악원 장악과에는 판소리의 명창인 박동진씨도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는 그 무렵 신축 중이던 국립극장 산하단체인 국립창극단의 임원이기도 하였다.평소에도 유-머와 재치가 많아,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오던 그는 내가 서무과 주무로 가던 날도 원장실에 앉아 있었다.내가 성경린원장에게 부임인사를 끝내자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으므로 대구라고 대답하자, 박동진씨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한바탕 그 특유의 사투리를 쏟아 놓았다.「당신 고향이 대구랑께 문디이구먼, 경상도보리문디이. 그래서 난 더 반갑당께. 대구는 이놈 소리꾼 제2의 고향이여. 6.25때 피난 가서 내가 소리연습 하던 곳이랑께. 영선못과 안지랭이 골짜기가 내 연습장이였지라.」서무과 사무실은 원장실 입구에 자리하였고 원장이 출입할 때는 내가 앉은 책상 앞을 지나 다녔는데 할 일이 없어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여간 눈치가 보이는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원고지를 꺼내 놓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은 내 마음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해묵은 서류철 하나를 펼쳐 놓고, 그것을 검토하는 척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집에 가서 원고지에 옮겨 쓸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그때부터 나는 박동진씨와 가깝게 지냈다. 그것은 국립창극단 임원인 그를 통해서 창극본 집필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그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한 때 인기가 높았던 임춘앵, 김경애 등이 보여준 국극이란게 바로 창극과 비슷한 거여. 그들이 대화체로 말하던 것에 중모리, 중중모리, 혹은 휘모리 등 가락을 덧붙인게 창극이니께 말이여.」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역사속의 이야기 한 토막을 창극 본으로 습작을 시작하였었다.반년쯤 지났을 때 나는 문교부에 자주 출입해야 했었다. 그것은 국립국악원이 10년 가까이 노력해 왔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사업, 즉 국악사양성소를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승격시키는 일 때문이었다. 당시 국악사양성소는 초등학교 졸업생 40명을 전국에서 모집하여 중등과정 3년, 고등과정 3년, 도합 6년 동안 일반교양과목과 전통음악 및 무용을 국비로 가르치던 곳이었으나, 그 양성소를 졸업해도 학력인정이 되지 않았으므로 성경린원장의 전임인 이주환원장 때부터 국립국악고등학교 승격을 도모해 왔었으나 대를 이은 그때까지도 성사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성원장도 고령이라 정년퇴임이 3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조급해진 그가 나를 앞세웠던 것이다.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립국악원과 국악사양성소는 문화공보부 소속이고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승격되면 문교부 산하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 예산도 지금까지는 문화공보부에서 편성하고 지원하던 것을 학교로 승격시키면 문교부가 책임져야 했던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사립학교 설치령을 참고하여 신청서를 작성제출 하였었으나 그 서류는 보통교육국장의 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나는 1년 가까이 문교부에 드나들었지만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제2종합청사 9층에 있는 문교부에 가기 위해 승강기에 올랐다가 뜻밖에도 김판영선생님을 2년여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선생님도 나를 알아보시고 반가워 하셨다. 승강기가 오르는 동안 선생님께서는 나의 신혼생활을 궁금해 하셨고, 나는 선생님이 경상북도 도교육감 자격으로 문교부에 출장 오셨나 보다고 생각하였었는데 9층에서 승강기를 내렸을 때「저게 내방이니, 용무 끝나면 와서 차나 한잔하고 가시게」하시며 장학실장실을 가리키셨다.정부기관 중 일반기관은 장, 차관 아래 기획관리실장이 최상급이지만 당시 문교부 체재는 기획실장 보다 장학실장의 발언권이 더 힘을 받고 있었으므로 나는 「선생님! 차부터 먼저 주세요」하고 장학실장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 방 입구의 비서실에는 전날 경상북도 교육감실에서 보았던 여비서도 있었다.선생님과 마주 앉은 나는 여비서가 내다준 차를 마시며, 그동안 내가 문교부에 출입하게 된 과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였던 것이다. 선생님도 국악고등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공감 하셨다.보통교육국장의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서류들은 다음날부터 차상급자의 결재가 났고 5일 후에는 장관의 결재도 받았으며 며칠 후에는 법제처로 이관되었다가 승인이 떨어져 국립국악고등학교 설치령이 관보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교장선임 문제에 또 발목이 잡힌 것이다.국악인들이 추천하였던 성경린씨의 학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문교부가 인정하는 졸업장이 한 장도 없었다. 승동교회에서 운영하던 야간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이왕직아악부에서 국악사양성교육을 받은 것이 그의 학력 전부였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그는 당시 서울음대와 이화여대 음악과에서 강의도 하고 있었다.「고등학교 교장자격도 인정 않으면서 서울음대와 이화여대에서 강의하는 건 왜 인정하느냐?」나는 담당공무원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보았지만 먹혀들지가 않았다. 그 무렵 김판영선생님은 장학실장 자리를 떠나 인천교육대학 학장으로 가신 후였으므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당시 문교부 측에서는 서울음대의 장사훈 교수를 교장으로 앉히라 하였지만 내가 찾아갔을 때 그는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장선임 문제는 반년이 넘어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8월20일경에 나는 문교부의 복도에서 김판영선생을 다시 만났다. 당시 선생님은 인천교육대학 학장 겸 경기도 교육위원회 위원으로 계셨는데 차관실에 출장차 오셨던 것이다.선생님을 따라 차관실에 들어간 나는 그동안의 고충을 선생님과 차관에게 말씀 드리고 도와주십사고 부탁을 드렸다. 김판영선생께서도 선처해 주라고 차관에게 부탁하셨다.그해 9월 4일, 성경린씨는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으로 발령 받았고, 그동안 나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던 그의 할애요청을 두 부서에서 승인하였으므로 그때까지 문화공보부 소속이던 내가 문교부 소속이 된 것이다.성경린교장이 평가한 나의 역량은 순전히 김판영선생님 덕분에 높아졌던 것이다.국립국악고등학교 개교식 준비 때문에 나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모표, 뱃지의 도안 및 제작, 교기 도안 및 제작, 초청장 기안과 인쇄 및 배포, 교사초빙, 학교건물 대청소 등, 그 어느 것도 내가 아니면 앞장 서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성경린교장이 개교기념행사로 그 무렵 사용이 가능해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할 방아타령, 즉 백결선생의 이야기를 극본화 할 것을 나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극본은 퇴근 후 집에서 밤새워 쓰고 있었다.건강한 30대 초반이었으나 몸에 무리가 갔던 모양이다. 오후만 되면 으슬으슬 추웠고 식욕도 감퇴 되었다. 처음에는 몸살 정도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 증상이 5일 이상 계속 되었으므로 집 가까이 있는 개인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다.두 살짜리 아들의 잔병 치료를 위해 아내와 함께 이따금 드나들던 그 병원의 의사 김중환씨는 포항 출신으로 경대의대를 졸업한 사람이며, 파는 달랐지만 본관이 나와 같은 성씨였고 나이도 동갑이였으므로 가끔 만나면 농담도 주고받으며 함께 소주잔도 기울이던 사이가 되었던 터였다.「몸에 열이 많아 창자에 염증이 생겼으니 거친 음식 먹지 말게」그의 말을 듣고 이틀 동안 통조림으로된 복숭아와 포도 등으로 끼니를 때우며 출근을 하였다.그날 점심때 구내식당에 맡겨 둔 통조림을 찾으러 갔을 때 주방요리사는 양배추를 곱게 채 썰어 무치고 있었다. 새콤한 식초냄새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내 코끝을 스쳐 갔을 때 갑자기 식욕이 생겼다. 원래 나는 육식보다 채식을 좋아하였고 특히 식초나 참기름을 넣고 무친 나물로 비벼 먹기를 좋아 했었다.「아주머니, 오늘은 나도 밥 한 그릇 주세요. 무치시는 나물 보니 군침이 도네요」그래서 그 날 점심은 그 나물에 비빈 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었다. 그런데 퇴근 후 집에서 잡다한 일을 마무리 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랫배가 몹시 아파왔다. 당시 아내는, 우리가 상경하던 해 가을에 출산한 아들을 돌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두 번 째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한 아내가 나의 신음에 놀랐지만 원래 밤에는 겁이 많던 여인이라 어둠을 헤치고 병원까지 달려갈 수가 없어 주인집 아들에게 부탁하여 가까운 병원에 가서 왕진을 청하였다.「음식 조심하랬는데 거칠게 먹었군 그래. 창자가 뚫어졌으니 수술해야겠오. 천공성복막염이라고.」급히 달려왔던 의사 김중환은 내 몸을 두루 살펴보고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의사의 말이 믿기지 않아「헛소리 말고 진통제나 한 대 놔주게」 말했다.「그래 진통제 놔 줄테니 빨리 준비하고 병원으로 오게. 난 먼저 가서 수술준비 할테니까」진통제 주사를 놓아준 그는 서둘러 돌아갔다.아랫배의 통증이 잦아들고 있었으므로, 나는 웅크리고 누워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아내는 내 곁에서 몹시 불안한 심정으로 굽어보고 있었으리라.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였는데 의사가 가고 난 후 얼마 아니 되어 통금 사이렌이 울었던 것이다.이튿날 새벽,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리기 조금 전까지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 원고 집필 한답시고 밤잠을 설친 날이 많았었는데, 그때 부족하였던 잠을 몰아서 잤었나보다.통금해제 사이렌 소리가 끝나고 채 10분도 아니 되었는데 다급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주인집 남자가 나가서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우리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내 곁에 앉아서 밤을 지새웠던 아내가 방문을 열자 뛰어 들어온 사람은 지난밤에 왕진 왔던 그 의사였다.「이 사람 죽으려고 작정 한거야? 일어나! 일어나라구. 빨리 병원 가서 수술 받아야 해」그는 누워 있는 나를 끌어 일으키며 말했다. 그 때문에 다시 아랫배의 통증이 느껴졌다.「애기엄마! 이 친군 내가 업고 갈테니 입원준비 좀 해 가지고 병원으로 오세요」말하고는 나를 등에 업고 방을 나섰다.「내 창자 정말 뚫어진건가?」「가서 X레이 찍어 확인시켜 줄테니 잠자코 있으라구」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을 때 그는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병원에서 찍은 X레이 필름에는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검은 부분이 세 곳 나란히 있었다.「어제 밤에는 한 곳이 뚫어 졌었는데 당신이 꾸물거리는 바람에 두 곳 더 뚫어졌다구.」의사는 그 검은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를 꾸짖고 있었다. 반항할 수도 없이 수술대에 눕혀진 나는, 허둥지둥 달려온 아내에게「교장선생님 댁에 전화해서, 내가 오늘 출근 못한다고 전해줘요」부탁하고는 마취제주사를 맞았던 것이다.내가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입원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남산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내와 교장도 초조한 눈으로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개교기념 행사는 내년 3월초로 연기할 테니 아무 염려 말고 몸조리 잘하시오. 그리고 병원비도 내가 준비할 테니 걱정 마시오」성경린교장의 말이었다. 그날부터 한 달 동안 나는 그 병실에서 지내야 했다.배꼽 바로 밑에서 한 뼘 가까이 배를 가르고 창자를 모두 꺼내어 뚫어진 부분을 제거한 다음 다시 꿰매고 집어넣은 후 봉합한 바깥 부위가 쉽게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동안 학교직원은 물론, 국립국악원직원, 문화공보부의 인사계장과 문화과장 등이 번갈아 가며 문병을 왔었고 성교장은 5번이나 다녀갔었다.퇴원 후 나는 다시 바빠졌다. 연기 시켰던 개교기념 행사준비와 딸을 출산한 아내도 산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일도 많았던 것이다.나는 병원에 누웠을 때도 교장이 부탁하였던 백결선생 이야기를 일반극본이 아닌 창극본으로 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 여겨졌으므로 교장에게 말씀 드렸더니 아주 좋아 하셨다. 그래서 퇴원 후 박동진씨의 자문을 받으며 그 원고를 마무리 지었는데 그 작품에 출연할 연기자는 학생들로 충당 시켰지만 연출을 맡아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연습기간 중 나는 연출자 역할도 해야 했었다.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막을 올린 「방아타령」은 내가 처음으로 집필한 창극본이였는데 절찬리에 막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작품발표를 위해 제작자나 감독을 찾아 다녀야 하는 영화 시나리오 보다 창극본 집필에 더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그 생각은 박동진씨가 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개교식이 끝나고 조금 한가해졌을 때 아내의 건강도 회복되었으므로 나는 다시 전에 습작하다 중단하였던 창극본을 마무리 지어 보려고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문화공보부에서 문예작품 현상공모가 있었고 그 속에 창극본부문도 있어 나는 습작하던 작품 「당태종과 안시성」을 정리해서 응모하였더니 그것이 입상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또 그 입상이 계기가 되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강감찬장군의 일대기를 창극본으로 집필해 달라」는 의뢰도 받았던 것이다.그런 중에도 나는 문교부와 문화공보부에 자주 드나들어야 했다. 문교부는 학사문제 때문이었고, 문화공보부는 예산 편성 때문이었다.내가 가기 전 국립국악원에서는 국악사양성소를 무조건 승격시켜 달라고 하였으므로 매년 거절당하였었는데 나는 문화공보부에서는 예산을 지원하고 문교부에서는 학사만 참견하는 형식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산부담을 느끼지 않은 문교부가 국립국악고등학교 설립을 인가해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그랬다손 쳐도 나는 그 일이 김판영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 하였을 것이라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별정직이던 성경린씨가 교육공무원이 되었으므로 그의 정년은 4년이나 늘어나게 되었었는데 1년이 지나자 그는 나에게 또 중책을 맡겼다.당초 한 학년 1학급이던 학생정원을 두 학급으로 증원시켜 줄 것과, 그때까지 공간으로 있던 건물 1층에 방을 만들어 기숙사로 활용하게 하라는 것이었다.학급증설은 문교부 소관이지만 문화공보부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학생 모두가 국비생이었으므로 문화공보부에서 예산증액이 승인되어야 했기 때문이며 기숙사 설치는 전적으로 문화공보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었다.학급증설은 김판영선생의 도움으로 알게 된 차관과 원고의뢰를 자주하던 문화과장이 힘써 주었으므로 겨우 성사 되었지만 그 뒤에 접수시킨 기숙사 설치 문제는 쉽게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나를 문화공보부에 특채해 준 인사계장이 그때는 이미 문화공보부를 떠나 한국방송공사 사업국장으로 가신 후였고 학급증설 때 도와주었던 문화과장도 바뀐 뒤였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으며, 문화공보부에서는 예산절감을 위해 식비는 학생에게 받으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하면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반찬투정을 하는 등 부작용이 많고, 학교설립 취지에도 어긋나니 전액지원 해 달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그런 중에도 심심찮게 원고청탁이 들어오고 있었다. 특히 그 무렵에 국립 창극단 단장으로 추대 받은 박동진씨가 후삼국시대의 이야기 하나를 창극본으로 집필해 달라 하셨고 문화과에서도 이따금 단편시나리오를 집필해 달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밤낮 구분 없이 바쁘게 살다보니 아침에 세수할 때면 코에서 피가 나는 날이 잦아지고 있었다.나의 건강을 염려한 아내의 권유를 받고 사직을 결심 하였었으나 성경린교장은 승낙하지 않았다. 기숙사 문제를 매듭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그 학교의 교사나 강사들의 이동도 잦았다. 그것은 국립이란 말에 호감을 갖고 지원 하였던 사립학교 교,강사들이 봉급을 받아보면 일반학교 보다 액수가 많이 적었기 때문이다.언젠가는 국어선생이 말없이 사라졌으므로 그 후임자를 교섭하려고 내가 뛰어 다녔었는데 교장선생이 부르더니「작품 써서 두 번이나 장관상을 받았으니 국어는 당신이 가르치시오」그래서 정식 교사가 교섭될 때까지 한동안 내가 교실을 드나들었는데 그야말로 힘든 일이었다. 다른 학교처럼 학급수가 많으면, 국어선생도 학년별로 있었을테지만 그 학교는 한 선생이 전 학년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주일에 학년 당 1시간씩 출강하던 미술 강사도 말없이 결강하였으므로 찾아가서 만났더니 강사료가 너무 적고 교통비가 많이 들어 못 나오겠다는 것이었다.「미술도 당신이 가르치시오. 당신 그림솜씨는 국전작가 못지않잖소?」그의 결강사유를 들은 교장의 말이었다. 교장이 그런 말을 한데에는 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국립국악원 서무과 주무로 근무할 때 어느 일요일, 집에서 그렸던 수묵담채화 한 점을 원장에게 선물로 주었었고, 그 뒤 충북 영동지방에 있는 난계선생기념사업회에서 박연선생의 영정을 마련하기 위해 대표 두 분이, 그 영정원본이 있는 국립국악원으로 성원장을 찾아 왔었는데 그때 원장이 나에게 초상화작가를 교섭해 보라 하셨으므로 운보 김기창화백 등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다들 사례금이 적다고 거절하였기 때문에 내가 대신 그려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미술 강사도 한 학기동안 해 보았는데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국어도 그랬고 미술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래서 참고 될 서적을 두루 구입해서 읽어 보았지만 큰 효험은 없었다.견디다 못한 나는 다시 한 번 사직서를 내어 보았지만 또 다시 반려 되었으므로 방법을 바꿔 주거지부터 멀리 옮기기로 하였다.그 무렵, 서울의 철거민을 강제이주 시켜 시끄러웠던 광주대단지가 성남시로 승격되었으므로 나는 장충동 셋방보증금에 조금 더 보태어 성남의 단독주택을 한 동 구입하고 일요일을 이용해서 이삿짐을 옮겼다. 학교직원이나 국립국악원 직원 누구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다음날 다시 사직서를 써서, 서울음대 강의 때문에 자리를 비운 교장의 책상위에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성남으로 이주한 후 나는 부탁 받았던 작품원고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필할 수 있었다.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므로 그때까지 막내 누님이 모시고 있던 어머니도 우리 집으로 모셔 왔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한 것 같아 내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고, 객지를 전전하며 늘 외로웠던 아내도 의지할 곳이 생겨 좋아 하였으며 어머니 역시 내 자녀인 남매의 재롱을 보시며 아주 흐뭇해 하셨으므로 고부간이 화목하게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그런데 다 쓴 원고를 의뢰자에게 전달하기가 용의하지 않았다. 당시 성남시는 「한국판 아메리카 합중국」이란 별칭을 받았을 만큼 8도에 본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의 일터가 서울에 있었으므로, 성남과 서울을 오고가는 버스노선 3개는 늘 콩나물시루같이 만원이 되었으며, 백색전화, 청색전화란 별호가 붙은 전화도 신청자가 너무 많아 반년이상 기다려야 개설되었기 때문이다.새로 이주한 우리 집에도 전화가 없었다. 맨 먼저 완성된 것이 국립창극단 단장 박동진씨가 의뢰하였던 「포석정의 한」이었다.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완성된 원고들을 모두 전달하고 나니 새로운 원고청탁이 없었다. 우리 집 주소는 알려주었지만 연락할 방법이 번거로웠기 때문이었다.원래 무료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심신을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던 나는, 한 달 가까이 할 일없이 지내다 보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독서신문성남지사였다. 당시 그 신문은 문화공보부가 지원하고 출판협회에서 주관하였었는데 유익한 기사가 많은 주간교양지였지만, 팔도에서 모여 든 가난한 주민들에게는 사실 흥미 없는 신문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독서인구의 저변확대」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어걸고 부지런히 구독자를 찾아 다녔다.내가 독서신문지사를 운영하게 되자 성남우체국장이 서둘러 전화를 가설해 주었다., 언론사에 대한 특혜였으리라.사업에는 워낙 문외한이던 내가 의욕 하나만 가지고 3회 분할납부형식으로 정기독자를 모집하였으나 수금에는 자신이 없어 그 일을 맡길 총무를 채용하였었는데, 성적이 별로 좋지 않더니 2년 만에 온다간다 말도 없이 성남을 떠나 버렸다. 어쩔 수 없어 내가 직접 수금을 하려고 카드를 들고 나가 보았더니, 다들 납부하였다는 것이 아닌가?본사에서는 지대독촉이 성화같고 수금할 돈은 몇 푼 남지 않았으므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지만 나는 그때 많은 지인을 얻었으므로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었다.그래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국방송공사를 찾아 갔었다. 나를 특채해 주었던 이달형씨가 또 한 번 도움을 주실까 해서 였다. 그는 기획실장으로 옮겨 앉아 있었고 어렵게 찾아간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날 우리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퇴근 후 여의도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김작가는 사학과 출신이니 전설도 많이 아실게 아니오? 그리고 역사에 이름 남긴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실테고……, 내 한 번 담당PD에게 말해 보리다. 「전설의 고향」과 「일요사극 맥」이란 프로가 있으니 김작가가 필요할 것 같구려」식사가 끝나고 헤어질 때 그가 한 말이다. 그리고 3일 후, 여의도에 와서 담당PD들을 만나보라는 전화가 그로부터 왔었다.이튿날 나는 방송공사에 가서 담당PD를 만났었고 그때부터 「전설의 고향」과 「일요사극 맥」을 집필하기 시작했다.「아버지 회갑 때 넌 세 살이었어. 그런 네가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큰절을 올리며 「아버님 생신축하 드려요」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대견스러워 하면서도 「쟤가 언제 커서 자식 값 하겠느냐」면서 안쓰러워들 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방송극도 쓰고 있으니 정말 장하다. 네 아버지도 지하에서 기뻐하실게다.」내가 쓴 전설의 고향 첫 작품이 방영될 때 어머님께서는 무척 좋아 하셨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해 가을에 세상을 떠나셨다.그런데 담당PD들은 사례를 많이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자주 방영해 주었으므로 내가 쓴 원고는 1년 동안 몇 편 방영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언쟁을 하게 되었고 화가 난 나는 이달형씨를 찾아가서 집필을 그만두겠다고 하였던 것이다.「김작가는 동양화도 잘 그리시니 이참에 화단으로 한번 옮겨보면 어떨까요? 요즘은 화가들이 문인보다 수입이 좋다고 알고 있는데……」그날 이달형씨가 진지한 얼굴로 해 준 말이었다. 그가 내 그림솜씨를 알게 된 것은, 나로 하여금 다시 수입 있는 글을 쓰게 해 준 그의 정이 고마워, 한 달 쯤 후에 내가 산수화를 그려 만든 병풍 한 벌을 그에게 선물하였기 때문이었다.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속담처럼 당시 나에게는 지속적으로 생계방편이 될 일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며칠 후 인사동 입구에 있는 예총화랑에 들려 전시장 임대계약부터 하였었다. 그림부터 그려 모아 전시하기보다, 전시일정을 잡아 놓고 작품 준비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그런데 그해 10월 26일,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전국이 비상상태에 들어가 버렸으므로 많은 화가들이 계획하였던 전시를 취소하는 소동이 벌어졌었는데, 나는 전시장에 지불하였던 계약금이 아까워 강행하였던 것이다.그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전통수묵화와는 달리 「한가해진 소」, 「병든 왜가리」, 「산불」, 「기계화된 농촌」 등 현대감각과 시사성이 가미된 것들이었다. 그렇게 개최된 첫 개인전은 그나마 성황을 이루었다. 동강 조수호선생과 청람 김판영선생님도 오셔서 격려해 주셨고 동주 박진목선생을 처음 만난 것도 그 전시장에서였다.동주선생은, 대구 달성공원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독립운동가 박상목선생의 아우 되시는 분인데, 형님의 부탁을 받고 대구지방에서 모금된 군자금을 만주로 전하려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의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풀려났던 민족주의자이다. 그러한 동주선생이 내 첫 개인전에 관람 차 오셨다가, 인사를 청하셨으므로 알게 되었었는데 선생은 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그림도 잘 그렸고 시사성도 높으니 내가 제안 하나 하겠네. 자료사진은 내가 줄테니 북한의 명소를 한번 그려 보시게. 혹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이리로 연락해 주면 그 뒷일은 내가 추진해 보겠네.」선생이 주신 명함에는 「민족통일촉진회」 공동대표란 직함이 찍혀 있었다.그래서 전시가 끝난 후 동주선생을 찾아 갔었고, 선생이 주신 「두고 온 산하」라는 책자의 사진을 보며 2년 반 동안 준비하여 안국동에 있던 덕수미술관에서 개최한 것이 「그리운 산하전」이었다.당시에는 신군부의 반공법 적용이 최고조로 강화되고 있을때이므로 주변에서는 나의 신변을 염려하는 사람도 많았었다.「자칫 잘못 되면, 북한을 찬양하였다는 누명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실향민들에게 향수심을 되살려 주는 한편, 비록 이데올로기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산천이나 문화유적은 남북이 동일하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재인식시켜 줄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의욕이 넘쳤던 것이다.그 전시는 대성황리에 끝났고, 나는 그 전시로 인하여 윤길중, 박권흠의원 등 수 많은 정치인과 송지영, 서영훈선생 등 각계의 명사들을 사귀게 되었으며, 고향을 떠나 서로의 생사마저 모르던 많은 이산가족들이 전시장에 왔다가 다시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이산가족 찾기는 K.B.S보다 소산 형이 먼저 시작했던거요」내가 문화공보부에 근무할 때 알게 되어 호형호제하던 한국일보 문화부기자 K가 언젠가 술자리에서 K.B.S의 이산가족찾기 프로를 T.V로 보다가 웃으며 한 말이다.어쨌거나 그렇게 출발한 나의 화단생활은 경희대, 고려대 강사와 조달청 및 한국도로공사의 초빙강사로 10여 년 간 출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경희대는 안치열학장이, 조달청에는 남두진국장이, 그리고 한국도로공사는 손진호본부장이 초빙에 앞장서 주었었는데 그들은 모두 그리운 산하전에 관람 차 와서 알게 된 분들이었고, 고려대는 경희대 미술교육학과에 자주 강의를 들으려 왔던 「고대수묵화연구회」란 동아리회장 C군의 요청으로 출강했는데, 그때 나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미술을 잠시 지도하면서 느꼈던 어려움 때문에 많은 참고서적을 사서 보았던 것과 동강 조수호선생의 권유로 여러 권 읽어보았던 수묵화에 대한 고전들이 큰 도움이 되었으므로 「수묵화의 이론과 실기」라는 책도 출간하게 된 것이다.동강선생과 김판영선생님도 그때부터 자주 뵙고 조언을 들었었는데 그때마다 두 선생님은 자신의 지인들에게 나를 소개 하시면서 실제보다 과분하게 치켜 주셨고, 박권흠의원은 대한체육협회 이사장일 때 내 아들의 결혼식에, 서영훈선생은 대한적십자사 총재 때 내 딸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주시는 등, 계속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그 무렵 나는 서울예술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서울예술신학대학은, 내가 D영화사에 근무할 때 이봉래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던 이상열씨가 설립했던 개신교 쪽 신학교였다.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성남에 이주한 후였다. 그 무렵 나는 독서신문성남지사장을 하면서도 문학적 창작의욕이 강하였으므로, 서울의 판자촌에서 강제 이주된 주민들의 애환을 소재로 한 단막극본 「대이동 그 후」를 습작 하였었는데, 독서신문 독자 중에는 「경북학생극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던 한세훈이 있었고 그 무렵 그는 K.B.S 성우로 활약하면서 성남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한 번 읽어보라고 하였더니「시승격 3주년 기념으로 시민위안의 밤을 개최하고 그때 이 단막극을 공연하면 좋겠오. 마침 내가 그동안 노역을 많이 맡아왔으니 작품에 나오는 복덕방영감은 내가 맡고, 주인공인 회사원은 후배 성우 박성규에게 내가 부탁하면 들어줄거요」그래서 나는 그것이, 독서신문 홍보에 도움이 되겠다싶어 성호시장입구에 자리잡은 천일극장을 빌려서 행사를 치루었는데, 그때 구경 왔던 사람 중에 이상열씨와 영화배우 이대엽도 있었던 것이다. 영화배우 이대엽씨도 내가 D영화사에 근무할 때 이미 친숙해진 사이였는데 그는 나보다 먼저 성남에 들어와서 남한산성 라이온즈클럽 회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독서신문 독자확충에도 도움을 주었던 터이다.그 공연이 계기가 되어 이상열씨는 나에게 선교극본 집필을 의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그는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고 원래는 신실한 불교신자였었는데, 결혼 후 개신교 쪽 신앙을 가진 아내와 종교문제로 갈등을 빚어오다가, 가정의 평안을 위해 스스로가 개신교 쪽으로 개종하고 신학대학을 거쳐 그 무렵에는 성남에서 개척교회 목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내가 써 준 선교극 두 편은 그의 교회에서 부흥회 때 공연하였고, 소록도에 있던 애양원 원장 손양원목사의 삶을 극화시켰던 「카인의 후예와 아벨의 후예들」은 성남시민회관 신축개관기념공연으로 발표하였었는데 이때 그가 연출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이목사는 개척교회를 운영하다보니, 미안해하면서도 소액의 원고료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1주일에 한번 씩 조달청과 한국도로공사, 그리고 경희대와 고려대에서 수묵화와 문인화 지도를 계속하고 있었다.이때부터 나는, 누가 보아도 겸업작가였었고 그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그러다가 그 목사가 성남을 떠나 서울의 N교회 담임목사로 갔었는데 그는 「생명」이라는 선교극단까지 운영하면서 계속 나를 찾아와 선교극본을 의뢰하였었다. 그 극본들은 그가 부흥목사로 초빙된 전국의 교회에서 공연되었다.강압적이던 신군부의 집권 제1기가 끝나갈 무렵, 이목사는 다시 나를 찾아와, 자신이 예술신학교를 하나 설립하였으니 문창과 교수로 출강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대학에서 해당과목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문인협회나 미술인협회에서 실력을 인정해 주면 교수직이 허용 되었었고, 특히 신학교는 문교부의 간섭이 그리 극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나는 그 학교에서 문창과학생 지도뿐 아니라, 회화과학생들의 수묵화도 지도하는 겸임교수가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나는 지금도 화가이기 보다는 문인으로 불려지기를 바라고 있다. 때문에 청송으로 내려온 후 대구시민회관에서 개최하였던 「통일염원전(2008년)」의 도록 서시에도 「화가이기 보다는 문인이고 싶었는데/ 세상사람들은/ 희곡작가 보다는 동양화가를/ 쉬이 기억하더군/ 그래서 나는/ 쓰고 싶은 글을 짧게 줄여서/ 그림 속에 써 넣기를 좋아한다네」라고 썼던 것이다. 아직도 고백하지 못한 사연들이 많이 있지만 지면관계상 마무리 지어야겠다.앞에 언급한 사람들 중에는 아직 살아 계신 분도 많고, 이미 고인이 된 분도 많다.살아있는 분들과는 서로 통화하며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진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으나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인생의 무상함이 피부로 느껴진다.삼가, 고인이 되신 분들의 명복과, 살아계신 분들의 건승과 평안을 다시 한 번 빌면서 이제 자판에서 손을 떼어야겠다.

2019-08-08 18:13:50

김광임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내 안의 아리랑/김광임

나는 누구인가비행기가 낮게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마당에서 백구와 뒹굴고 있는 나를 사색이 된 할머니가 집으로 잡아끌어 문을 잠근다. 학교에 입학하고 더듬더듬 책읽기에 재미를 붙여갈 즈음 비행기 소리와 포쏘는 듯 한 소리가 잦아지고 있었다. 어느날 해는 지고 어두운데 벽 한 켠에 걸린 남포불도 켜지 않고 나와 동생의 입을 막아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셨다. 쉿, 난리가 났다나…….키가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 아버지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였다. 엄마는 쪽머리에 한복차림의 여느 엄마들과 달리 뽀글뽀글 파마머리와 양장차림에 뾰족구두를 신었다. 뾰족구두가 신기해되똑이며 끌고 있으면 엄마는 " 야 이게 얼마짜린데 "기겁을 하며 높은 곳에 올려 놓았다. 엄마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는 무언지 몰라도 기분은 좋아져 하던 짓을 놓고 귀를 기울이곤 했다. 황해도 사리원 빨간 벽돌의 2층집이 있고 넓은 마당을 가로 질러 여러 칸의 집이 있었다. 고모와 고모부, 누구인지 모르는 남자와 여자, 간호사와 또래의 사내아이등 우리식구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 울타리 안에 살고 있었다. 여동생이 있고 할머니와 하얀 앞치마를 두른 고모가 밥이며 빨래며 살림을 맡아하셨고, 할머니 손에는 늘 걸레인지 수건인지 들려있어 2층을 오르는 난간이며 계단은 반들반들 윤이 났다. 엄마가 밥을 짓거나 집안일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고모부는 우리 집에 함께 살면서 총포사와 사냥을 하셨고 긴 총을 만져보고 싶어 졸졸 따라다녔다. 할머니의 잰 걸음에 텃밭의 남새들은 초록 빛을 더하고 초여름 땡볕에 양귀비는 선혈을 뿌려놓은 듯 붉었다. 무적자(無籍者)영문도 모른 채로 어느 날 나는 혼자가 됐고 군부대에서 지내고 있었다. 나를 돌봐주던 육군상사가 한분 계셨는데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니 그나마 나에 대한 전후사정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왜 내가 혼자 떨어졌는지, 정확한 생년월일도 알지 못한 채로 군인들과 함께 살았다. 어름짐작으로 열 댓 살 무렵 장교 한 분의 알선으로 군부대에서 나와 병원에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청소와 물자가 귀한 시절 붕대도 빨아서 쓰니 피 묻은 붕대를 세탁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받는 것이 전부였다. 전쟁고아가 넘쳐나던 시절이라 먹고 잠 잘곳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간호사는 내가 안쓰러운지 먹을 것과 옷가지를 챙겨주고 자기 방 한 켠 에 따뜻한 잠자리도 만들어 주었다. 엄마 같고 누나 같아서 시커먼 남자들만 있는 군부대와 달리 포근함을 맛보며 고단한 하루를 견디는 힘이 되었다. 병원 생할도 그리 오래 가지를 못하고 나는 세상 밖으로 떠밀려 나왔다. 삶은 보리쌀을 소쿠리에 담아 처마 밑에 달아 놓은 것을 통째로 훔쳐다 먹기도 하고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배고픔보다 견디기 힘든것은 혼자인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세상 인심이었다. 어쩌다 싸움이 붙으면 전후 사정이 어찌되었든 일방적으로 내 잘못으로 몰리는 것이 억울해 나는 점점 악바리가 되어갔다. 덩치 큰 아이들과 싸우려니 오래 끌면 불리해 단번에 승부를 내야했다. 한방이 필요했고 기술이 점점 늘어 발등 올려 차기 한방이면 끝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심심한 시골 남자애들의 괜한 시비에 항상 걸려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 싸움대장이 되었다. 지는 날이면 혼자 분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밤중 그 집 장독대를 돌로 깨뜨려 마당을 간장으로 진창을 만들었고 그아이가 지나기를 기다려 어떻게든 되갚음을 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차츰 나를 건드리는 횟수가 줄었고 나름 시골 동네에서 자리 잡아 살게 되었다. 지금도 흉하게 뭉뚝한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보면 그때의 무모함에 쓴웃음이 나온다. 동네에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아이들에게 등 떠밀려 해 본적도 없는 씨름판에 나서게 되었다. 상대는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힘이 센 아이였으나 응원하는 아이들 앞에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리 몇 판을 모래밭에 내동이 쳐진 나는 쳐다보는 아이들 보기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야 이런 법이 어디 있냐 ? 양회다리 가서 다시하자 "동네 개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로 돌다리가 대부분인데 유일한 시멘트 다리였다. 난간이 없어 가끔 술 취한 어른들이 떨어져 물에 떠내려 가고 다치기 일쑤였다." 양회다리 가서 다시하자"억지를 써 양회다리로 가서 다시 한판 붙었으나 기술로나 힘으로나 상대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나는 씨름이 아닌 나의 특기인 발차기로 상대를 넘어 뜨렸다. 넘어진 아이는 매달리며 내손가락을 깨물었다. 물고 늘어지는 아이를 다리 밑으로 힘껏 차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 쳐 왔다. 집에 와보니 새끼손가락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아팠지만 병원에 갈 돈도 없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고약을 붙여 칭칭 동여매었다. 풀어보지도 않고 내버려두니 퉁퉁 부었다 빠졌다 만지지도 못할 만큼 아팠다 하길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 풀어보니 손가락 끝이 부러져 뼈는 따로 놀고 끝은 흉하게 뭉그러져 있었다. 지금은 이동갈비가 유명한 먹거리촌이지만 당시에는 정육점 한곳이 있었다. 정육점 주인은 뚱뚱한 과부댁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려 달려가 보니 과부댁이 물에 빠져 둥둥 떠내려 오고 있었다. 어른들도 발만 동동 구르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영을 못해 뛰어들지는 못하고 아래로 한참을 달려가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곳에서 기다렸다가 간신히 끌어내었다. 이후로 과부댁은 가끔씩 나를 불러 고기를 썰어주어 영양보충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너무 자주 고기를 주는 것이 부담스러워 정육점을 피해 멀리 돌아서 다녔다. 수리시설이 되어있지 않던 시절 봄철 모내기 때에 비가 오지 않으면 논바닥을 깊이 파서 물을 퍼 올리느라 밤샘을 해야 했다. 방앗간에서 쓰는 피대와 펌푸를 개조해 양수기를 만들었다. 쩍쩍 갈라진 논에 물을 퍼 올려 모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 자기논에 물을 대기 위해 나를 데려 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자기들이 알아서 기계를 걷고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가면 다시 펼쳐 설치만 해주면 되었다. 양수기는 봄에는 물을 퍼 올리고 가을에는 탈곡기가 되었다. 벼를 베어 동네 마당으로 싣고 와서 탈곡을 해야 했지만 논에서 바로 탈곡을 하여 사람들의 품을 줄여주는 획기적인 기계였다. 곡물로 삯을 받아 나도 모처럼 양식 걱정 없는 풍요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툇마루에 쌀이며 고구마 잡곡들까지 수북이 쌓였으나 그것을 돈으로 환전 할 줄은 몰랐다. 혼자 먹고 남아 당시 끼니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겨우 밥걱정을 덜었나 싶은 중에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동네에 버려진 네 다섯 살 된 사내아이를 데려와 같이 살았다. 애가 애를 키운다고 동네 어른들 모두 혀를 차며 말리셨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며 고아원에 갖다 주라고……. 그러나 그 시절 고아원이 아이들에게 밥도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보다는 눈 빠지게 나를 기다리는 그 아이와 피붙이는 아니지만 한 이불속에서 느끼는 온기가 좋아 보낼 수가 없었다. 가끔씩 엄마한테 간다고 무작정 신작로 길을 내달리는 아이를 붙잡고 나도 엄마가 보고 싶고 고달픈 현실이 서러워 같이 울었다.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능력도 없는 내가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이 불법이라 하며 관에서 사람이 오더니 아이를 데려가 버렸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군부대에 살면서 미군들이 몰고 다니는 군용차를 태워달라 떼를 쓰면 미군들은 나를 태우고 초콜릿이며 껌이며 당시 우리나라에 없는 귀한 간식거리를 주었다. 군인들도 문맹자가 많던 시절이라 부대에서 저녁이면 야학이 열렸다. 다행이 잠시 다닌 초등학교에서 한글은 깨우친 터라 통신강의록으로 초등과정과 중 고등과정을 엉터리지만 배웠기에 일자무식은 면 할 수 있었다. 하루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생시찰을 위해 헬기를 타고 온다고 동네가 소란스러웠다. 볼거리 없는 시골동네에 대통령의 시찰은 놓칠 수 없는 귀한 행사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어른들은 대통령을 뵙는데 예를 갖추어야 한다며 갓 쓰고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기다렸다. 대통령이 나오기 며칠 전부터 구멍가게며 쌀집 등에는 조사반이 나왔다. 현물가와 다른 대답을 정해주어 대통령의 눈과 귀는 철저히 가려졌다. 나는 솔직히 대통령은 관심이 없었고 헬기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뽀얀 먼지 날리는 군중들 틈 맨 앞으로 끼어들었다. 헬기의 강한 바람에 허술한 초가지붕이 날아가고 싸리나무를 엮어 세운 울타리들이 일제히 넘어졌다. 바람과 먼지를 뚫고 나온 이승만 대통령은 몰려나온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셨다. 앞줄에 있던 나에게도 손을 내미니 얼떨결에 대통령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 내가 본 이승만 대통령은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였지만 동네 어른들은 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박수를 치면서 한적한 시골동네가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불법영업 택시양수기와 탈곡기로 돈을 조금 손에 쥔 나는 미제세단 삐꾸 (브익)를 200만환을 주고 샀다. 부대에서 들은 오케이 댕큐 영어 몇 마디와 어깨너머로 배운 운전실력으로 번호판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는 택시영업을 시작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부대가 있는 산골짜기를 오갔다. 처음에는 얼마를 받아야 할지 몰라주는 대로 받았다. 그랬더니 말도 못하는 나를 무시하고 돈도 안주고 부대 안으로 달아나 버리기 일쑤였다. 닭 쫓던 개 울타리 쳐다 보기로 다른 수를 찾아야 했다. 계산도 쉽고 거스름도 필요 없이 무조건 한 명당 1달러 오케이? 손가락을 일곱 번 세어 보이며 7명 7달러 오케이? 일곱 명이 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렸다. 바쁘다고 재촉하면 7달러를 받았고 불법이지만 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파출소(지서)에는 한 달에 한번 백양담배 한 보루를 사다주면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다 싶으면 지서장이 오늘은 하지 마래이 미리 연락을 주었다. 그런 날은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다가 읍내에 내다 팔았다. 어른들이 하루에 나무를 오전에 한 짐, 점심 후에 한 짐씩 할 수 있었다. 점심도 거른 채 지게에 한 짐을 채우고 큰 나무 하나를 톱으로 잘라 끌고 내려왔다. 끌고 온 나무를 자르면 대여섯 짐은 족히 되어 하루하루 돈 버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서랍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였다. 어느 순간부터 동네 어른들은 돈이 필요하면 내게 달려왔다. 조건이나 이유를 묻지도 않고 원하는 만큼 서랍에서 돈을 꺼내주었다. 말은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었고 받지도 않았다.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도 모르고 번 돈을 어찌해야 할지 정말로 아무것도 알지를 못했다. 시골에서 은행을 본적도 없고 읍내에 은행이 있어도 돈 많은 유지들이나 어른들이 가는 것으로 알고 갈 생각을 못했다. 몇 단짜리 서랍장에 달러와 지폐가 가득 쌓인 어느 날 화폐개혁이 되었다 했다. 지금까지 쓰던 돈은 쓸 수가 없으니 은행에 와서 새 돈으로 바꾸란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가마니 석장에 돈을 담아 리어카에 싣고 털털거리며 은행이란 곳을 난생 처음 갔다. 동네 청년과 함께 리어카를 끌고 가니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았다. 실랑이 끝에 들어가 가마니를 열어보이자 소동이 일어났다. 혼자 사는 애가 돈을 가마니에 담아 리어카에 싣고 오다니…….순사가 달려오고 돈의 출처를 의심받아 지서로 가서 조사를 받았다. 지서장이 나를 알고 있었고 돈을 잘 벌고 있다는 이웃 주민들의 증언으로 세가마니의 돈은 한보자기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더 이상 택시영업은 할 수가 없게 되었고 내 마음도 심란해져 시간만 보내다가 이곳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가자. 가자 서울로갖고 있던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와서 팔았다. 평소에 검은 고무신이나 군화 말고는 신어 본적이 없었다. 신고 싶었던 운동화를 사고 구김이 없어 다림질도 필요 없다는 새로 나온 나일론 남방셔츠를 사 입었다. 이발소에 들러 이발도 하고 한껏 멋을 부린 차림으로 서울로 와서 청량리에 내렸다. 말로만 들어본 남산팔각정을 가보자 걸어서 남산 팔각정을 올라갔다. 올라가서 내 모습을 보니 새로 산 검정 운동화와 새 셔츠, 누가 봐도 시골서 올라온 촌뜨기, 눈에 확 띄었다.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저렇게 집들이 많은데 오늘 밤 어디로 가야하나 상념에 빠진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댓 명의 불량배로 보이는 아이들이"야 너 누구 허락받고 여기 왔냐?"순간 나는 여기가 허락 받아야 오는 곳인가? 속으로 움찔했으나 시골이지만 싸움이라면 누구에게 져 본적이 없는 내가 아닌가." 산에 오는데 무슨 허락을 받아 니가 주인이야 뭐야"?덤벼들었고 우리는 뒤엉켜 치고받는 중에 순사가 와서 남산 밑자락에 있는 파출소로 끌려갔다. 몰매를 맞은 나는 입술이 터지고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으나 연고도 없는 촌뜨기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어른들이 와서 애들은 하나 둘 데려가고 나만 종로경찰서로 인계되어 며칠 구류를 살고 나왔다. 입성기를 톡톡히 치르고 서울 살이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깡패이자 경찰들의 정보원들로 보였다. 우선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했다. 신문이라도 팔아 보고자 동아일보에 가서 신문을 받아 광화문 사거리로 나왔다. 국제극장 앞에서 다른 애들이 하는 대로"석간 동아요 동아" 를 외치며 두 세부 팔았을까 어디서 시커먼 애들이 나를 에워 쌓았다. 누구 맘대로 여기서 신문을 파느냐 시비를 걸었고 싸움이 되어 파출소로 잡혀갔다. 이번에도 다른 애들은 나가고 혼자 남았다. 팔에 무슨 완장을 두른 남자가 오더니 동아일보 옆 건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입구에는 상이군인 감찰대 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두리번 거리는 내게"너 갈데없지? 어디서 온 놈이야?"이것저것을 캐묻더니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면서 심부름을 하란다. 어떤 꼼수가 있을까 두렵기는 했지만 우선 밥걱정 잠자리 걱정을 면하는 것만 다행이다 싶어 주저앉았다. 팔아보지도 못한 신문뭉치를 둘러 메고 광화문 거리에 가서 하늘을 향해 힘껏 뿌렸다. 내 나름 억울함에 대한 화풀이였다. 신문은 호외라도 뿌려진 듯 거리에 날리고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줍기에 바빴다. 전후 상이군인들은 팔에 쇠갈고리를 한 채로 자신들의 희생에 보상이 없는 국가와 세상을 향해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잦았다. 그들을 관리하는 곳이 상이군인 감찰대였다. 힘들이지 않고 의 식 주를 해결한 나는 장차 살아갈 궁리를 해야 했다. 종로 Y M C A 옆에 중앙라디오 전기학원을 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던 나는 졸업을 하고 나서는 신입생들을 가르치는 얼치기 강사노릇을 한동안 했다. 이것저것 회로를 연결하고 납땜을 하여 라디오를 조립해서 당시 유행하는 노래도 듣고 저녁이면 연속극도 들었다. 최 희준의 인생은 나그네길, 한명숙의 노란 사쓰의 사나이, 박재란의 산 넘어 남촌에는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도 조금은 순화가 되었다. 하지만 라디오가 아직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은 시절에 밥벌이는 안되어 다른 것을 찾아야 했다. 신문물이 밀려 들어오고 거추장스러운 한복보다는 편한 일상복을 선호하는 시기였다. 기술을 배우고자 양재학원을 다녔다. 서울생활에 적응하며 살고자 애를 써도 세상은 혼자인 내가 편안하게 살게 놔두지를 않았다. 혼란한 가운데 종로와 동대문 시장 일대는 상권과 이권을 두고 불량배들의 폭력이나 패싸움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다. 공기관이나 사회의 통제나 보호가 미치지 않는 가운데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중심에서 몸과 마음이 성할 날이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싸움판에 끼게 되었다. 싸움에서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 나는 몇 명을 어떻게 상대했는지 모를 만큼 사력을 다했다. 잡혀가면 나만 남는 여러번 의 경험이 있어 용산 역으로 가서 인천행 기차를 탔다. 용산 역에는 새까만 무연탄이 역 가운데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개찰구 반대편에는 기차표 없이도 탈수가 있었다. 대부분의 역들이 개찰구는 허술했고 검표 없이 제물포에 내려 인천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항구가 있는 하인천은 서울보다 일자리 구하기는 수월해 세탁소에 취직을 했다. 처음에는 주로 빨래를 하다가 서울서 몇 달 배운 양재기술을 밑천으로 수선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옷이 미국의 구호물품이다 보니 우리 체격에 맞지 않는 큰옷을 줄이는 일감이 많았다. 성질은 급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내성격상 누구보다 많이 했고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눈 여겨 보던 이웃 양복점 주인이 더 나은 대우를 약속하며 맞춤양복점 기술자로 나를 불렀다. 기술자로 일이 손에 익어갈 즈음 함께 일하며 챙겨주고 환한 미소를 보내는 C에게 딱히 말로 설명 안 되는 묘한 감정이 솟아났다. 휴일이 따로 있지는 않았으나 일이 좀 한가한 날에 근처 공원에서 데이트를 하고 영화도 가끔 보았다. 험하고 거친 삶을 살아온 나에게 C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렘으로 기다림을 품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아마도 첫사랑이 아니었나 싶다. 양복점 건물 주인인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될 만큼 체구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찬 아주머니가 있었다. 건물이 여러 채인 부자라는 소문이다. 딸 둘을 두었는데 작은딸을 내게 소개해 줄테니 데이트를 하라며 자꾸만 찾아왔다. 퇴근 때를 기다려 식당으로 나를 끌다시피 데려다 놓고 가버린다. 성당으로 불러내어 붙잡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편한 상황이 이어졌다. 자기 딸과 결혼하면 시청 옆에 있는 제일 값나가는 건물을 줄테니 거기서 양복점을 하라고 했다. 곤란한 이상황도 벗어나고 남자인데 남들가는 군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사는데 별문제 없었으나 호적도 없이 군대는 갈수가 없었다. 동네 어른 두 분이 보증을 서고 대서소에서 생년월일을 만들어 호적을 취득해 비로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생년월일은 대서소 주인이 자기 딸과 같은 날자로 만든 것이 1946,6,6 일이다. 내가 태어난 해가 단기와 서기에 같은 숫자가 두 개씩 있다는 얘기를 벽에 붙여놓은 한 장짜리 달력을 보며 들은 기억이 있다. 1944년도가 단기로는 4277년이니 아마도 내가 태어난 해가 1944년이 아닌가 추측만 해본다. 물론 날짜는 알지 못하고... ... 해병대 입대인천항에 들어온 해군함에서 내려오는 해군들의 하얀 제복이 멋져 보였다. 이왕 가려고 마음먹은 군대니 배를 타고 먼 곳으로 나가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해군에 자원을 하였으나 불합격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나오는 중 벽에 붙어있는 해병대 모집공고를 보았다. 해병대는 지원자가 적으니 의도적으로 붙여놓은 벽보였다. 내침 김에 어디든 가보자 해병대에 지원을 했다. 1966,5,28 입대를 해서 훈련을 받으니 혼자 독하게 살아온 나도 거품을 토할 만큼 혹독했다. 하루에도 몇 명은 죽어도 못 하겠다 집에 간다며 군복벗어 팽개치고 알몸으로 달아나다 잡혀왔다. 사회에서 대형사고를 치고 해병대 안으로 도망 오는 애들도 부지기 수였다. 무슨 사고를 치고 왔든지 일단 들어오면 그것으로 끝이었으니 그 당시 사회구조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고단하지만 젊은 패기로 하루하루 견뎠지만 고된 훈련에 비해 먹는 것은 부실해서 늘 배가 고팠다. 요즘 군대처럼 식판이 아니라 양은으로 만든 양재기 두 개에 국과 밥이 전부였다. 한 병사가 더 주기를 청하면 양재기로 머리를 내리쳤고 얇은 양재기는 찌그러져 밥은 더 줄어 들었다. 배고픔을 못견딘 한병사는 설거지 물에 떠내려오는 밥알이며 콩나물 꼭지를 손으로 받쳐 건저 먹기도 했다. 해병대가 창설 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훈련을 마치고 신설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신설부대 이니 가는 날로 선임이 되어 장교 말고는 모든 병사들이 후임이다. 처음부터 군에서 가장 어렵다는 쫄병 생활없이 곧바로 선임이 되었다. 개병대로 불리는 군 생활은 모두들 힘들다고 투덜 대었다. 나는 C가 보내온 연서를 받으면 좀더 멋진말로 끙끙대며 답장을 쓰고 기다리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온 내게 두려울게 없었다. 오히려 숨 돌릴 틈 없는 빡빡한 일정에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해병대 정신이 성취감을 넘어 묘한 희열을 느꼈다. 전쟁직후 이승만 정부나 군이나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빨갱이 색출에 심혈을 기울였다. 울산으로 포항으로 군인이면서 민간인으로 잠복하여 작전을 나가느라 부대 앞 민가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부대 안에서 세탁소를 하는 분이었다. 어느 날 부터 조카라는 아가씨를 온갖 구실을 만들어 내 주위를 맴돌게 하였다. 내가 묵는 방을 말끔히 청소를 하고 빨래도 해놓고 먹거리를 들고 무시로 내방을 들락 거렸다. 불편해진 나는 부대로 들어가 버렸다. 중대장은 자신도 고향이 이북이라며 가족이 없는 나를 무던히도 아껴주었다. 제대할 날이 3개월 남짓 남은 어느 날 양복점 주인 아주머니 한테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C가 인천의 아주 유명한 건달 보스와 결혼을 했다. 제대하기 전에 알려 주는게 도리일 것 같아 연락을 하니 편지 하지마라. 생각해 보니 얼마 전부터 편지가 뜸하다 싶었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손에든 편지를 떨어뜨렸다. 믿어지지 않아 이게 꿈이 아닐까? 벽을 힘껏 쳐보니 꿈은 아닌데 당장 쫒아갈 수도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읽어보니 그 건달이 납치하듯 데려가 성대한 결혼식을 했다. 너하고는 인연이 아니니 잊어버려라……. 내무반에 틀여 박혀 꼼짝 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겨우 내린 희망의 실뿌리가 통째로 뽑힌 기분 이었다. 또다시 아무도 없는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머릿속이 텅비었다. 귀신 잡는 청룡부대살아도 좋고 죽으면 더 좋지 하는 마음으로 월남파병을 지원했다. 중대장은 지금이 가장 치열한 전투중이고 열 명 중 여덟은 죽는 전쟁터야 놀러가는게 아니라구, 뽑혀도 안 가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데 제대가 낼 모랜데 돌았냐? 하면서 신청서를 찢어버렸다. 다시 신청서를 넣고 찢기를 반복하다 하루는 술을 잔뜩 마시고 중대장을 찾아갔다."정말 가야 되겠니 왜 가야 되는데?"실랑이 끝에 1966년 5월28일 부산에서 월남 가는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부두에 몰려온 가족들과 대대적인 환송인파의 물결을 뒤로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육지라곤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지났다. 난생 처음 타보는 배 멀미와 알 수 없는 설사병으로 병사들이 쓰러졌다. 처음 보는 좌식 변기에 군화를 신고 올라 앉아 미끄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며 15일을 항해하여 월남 다낭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미군과 월맹군의 전투라는 것이 진지를 뺏고 뺏기는 우리의 6,25 전쟁과는 달랐다. 한 가족 중에도 아버지는 월맹군, 아들은 월남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직장 안에도 적군과 아군이 섞여있으며 오랜 전쟁으로 사회 깁숙히 전쟁은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한쪽에서 총쏘고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이 죽어 넘어져도 죽은 사람 옆을 개구리 한 마리 죽어 있는 양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너무나 태연한 그 모습에 전쟁을 하러온 우리들이 이상해졌다. 도착한지 한 달도 안 되어 많은 동료들이 눈앞에서 스러졌고 우리들은 말을 잃었다. 아침에 보았던 동료들의 얼굴이 저녁이면 보이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우리의 작전도 적군을 찾아내는 첩보작전으로 가정집에서 두어 달을 지내기도 하고 민간인들과의 접촉이 많았다. 자연스레 월남 말을 배우게 되었고 말이 되니 월남군과의 협력은 수월했다. 키가 작은 나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현지인 속에 섞여 더 많은 작전수행에 앞장을 서야 했다. 적군의 요충지로 판단한 그곳은 민가도 있고 일상의 삶의 터전이었다. 전쟁이란 얼마나 억울한 희생을 수반하는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어차피 삶의 미련을 버리고 온 나로서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작전을 나가면 맨 앞에 섰고 피해를 최소화 하기위해 일정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숨막히는 긴장속에 내 뒤를 따라오는 병사는 내 발자욱을 찾아 따라오지만 펑 소리와 함께 불바다가 되었다. 1년 내내 더운 날씨는 우리를 더욱 지치게 했다. 건기와 우기로 구분되는 날씨는 우기에는 석달동안 비가 내렸다. 집집마다 처마 끝에 작은 보트가 매달려 있는데 우기에 도로는 뱃길이 되어 보트를 타고 다녔다. 이어지는 작전중 네명이 적군에게 포위되어 닷새가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소변을 받아 마시는 극한 상황이 벌어졌다. 몇걸음 앞에 물이 있고 헬기가 비상식량을 떨궈 놓았으나 머리만 살짝 들어도 사방에서 포가 날아오니 눈앞에 뻔히 보이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구출작전이 시작 되었다. 목이 타들어가 의식은 멀어지고 헛것이 보였다. 치열한 사투 끝에 두명의 전우가 희생되는 댓가를 치루고 우리는 사지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더위와 굶주림에 탈진했던 한병사는 끝내 의식을 못찾고 낯선 이국땅에서 별이 되었다. 그 병사는 귀국을 십여일 앞두고 있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호이안에서 보트에 시레이션을 싣고 해안선을 따라가면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 파는 곳이 있었다. 갓잡은 싱싱한 생선과 교환을 하곤 했는데 하루는 보트의 시동 거는 줄이 끊어졌다. 몇 시간을 바다를 표류하다가 헬기가 와서 구출되어 중대장한테 구둣발로 사정없이 걷어 차였다. 비포리라고 하는 화포가 몸을 훓고 지나가 온몸이 불고기가 될 만큼 화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헬기로 독일 군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전신을 붕대로 싸매고 한 달 넘게 치료를 받고 병원을 옮겨 서너달 치료를 받았다. 나는 화상을 입었으니 당연히 온몸이 일그러지는 흉터가 남을 것이라 짐작하고 치료를 거부하며 죽기를 청했다. 한국의 남자보다 훨씬 체격이 큰 독일 간호사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다. 주사도 거부하고 식사를 가져오면 내던졌다. 하지만 간호사는 표정한번 찡그리지 않으며 서툰 한국말로 참으세요, 참으세요를 연발하며 나를 달랬다. 두려운 마음으로 붕대를 풀자 어디 한곳 일그러짐 없이 말끔했다. 주근깨가 자글하던 얼굴은 박피효과로 오히려 더 깨끗해져 행패를 부린 간호사앞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청용부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렸는데 월남 전투에서 가장 치열하고 어려운 고지를 탈환해서 얻어진 이름이었다. 우리부대에 가수 남진, 진송남, 태원. 이명진이 연예부대가 아닌 전투병으로 왔다. TV가없던 시절이니 얼굴을 알 리 없고 그렇게 유명한 가수인지 알지 못했다.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 왔는데 사격실력을 핑계로 훈련을 시키며 진상 선임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전투중인 병사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선임의 의무이기에 당연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네가 그렇게 유명한 가수라며? 노래 한번 불러보라 군대이기에 가능한 선임병 갑질을 했다. 라디오에서 들어본 목소리로 가수임을 알았고 치열한 전선의 시간표도 세상과 다름없이 흘러갔다.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이 가끔 있었다. 최고의 가수들이 왔지만 젊은 장병들이 가장 환호하는 것은 아슬아슬한 무대의상의 무용수였다. 여자가수의 흥겨운 노래는 그 순간 이곳이 숨 막히는 전쟁터라는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죽은 자가 되어붕대도 풀고 흉터걱정도 없어지니 병원생활이 지루해진 나는 병원 측에 일언반구도 없이 부상병을 싣고 온 헬기를 타고 근무하던 부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기록이나 전상망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나는 3개월 전 화포공격에 이미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귀신도 아닌 내가 나타나니 채 순구 주 월 사령관은" 너 이 새끼 이게 어케된 거이야 방수병 맞네?"하며 부등켜안아 되레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리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전사 처리 되었다니 웃음이 나왔다. 이미 제대 날짜가 몇 달을 넘은 터에 귀국절차만 남아 있었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PN이라는 냉동전문회사에서 사람을 구한다기에 원서를 내 채용결정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어차피 돌아가도 혼자인데 미국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귀국날짜가 임박해지자 생각이 많아졌다. 뻔데기 장사를 할망정 같은 민족이 사는 내 나라가 낫지 않을까 며칠을 갈등을 하다가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2주가 넘는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 해서 군 트럭에 실려 부대로 갔다. 제대를 위한 특별교육을 받고 밖으로 나오니 세탁소 아주머니와 조카인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선이 올 때마다 항구에 와서 찾았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벌써 죽었다는 소리에도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며……. 기다렸다는 것이다.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온 것처럼 나를 부등켜안고 울어 민망했다. 복무기간이 남은 병사는 부대로 복귀하고 나머지는 제대증을 받고 사지에서 돌아온 영웅이 되어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집으로 흩어져갔다. 전사자가 되어 있는 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웃지 못할 처지가 되어 있었다. 세탁소 아주머니의 간청에 딱히 갈 곳도 없어 우선 그 집에 짐을 풀었다. 무엇보다 주민증을 살려야 어디를 가던 일을 하던 할 게 아닌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모든 서류가 수기로 작성되는 시절 이었다.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나에게 대대장은 백지에 자필로 귀향증이라 써주며 해병대 본부로 가서 해결을 하란다. 차비 2만원을 받아들고 기차에 올랐다. 쫓기며 숨어 들었던 용산역을 지나 서울역에 내려 후암동에 있는 해병대 본부를 찾아 갔다. 귀향증을 내밀었으나 누구 하나 내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뿐더러 믿지를 않았다. 군복에 붙은 명찰과 대대장이 써준 귀향증으로 내가 본인이라는 말도 안되는 설명을 했다. 그러나 사망자가 되어 국립묘지에는 내 이름이 올라 있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으나 내 핏줄이라 증명해줄 사람 하나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서류하나 해다 내밀면 또 다른 증명서를 요구했다. 서울에서 울산과 포항으로 몇 달을 쫓아다닌 후에 나는 죽은 자에서 산자로 복권이 되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장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끊겼던 내 젊은 시간의 한 장이 그렇게 이어졌다. 전투수당과 제대 위문금등 무연고자로 국고에 귀속되었던 약간의 돈을 손에 쥐고 파란 만장한 제대를 하니 1969,10월,30일이다. 연고도 없는 서울로 가는 것을 극구 말리는 세탁소 아주머니에게 서류상 죽은 사람을 살려야 사람 노릇할 것 아니냐 다시 오마 하고 서울로 왔다. 다시가면 세탁소 아주머니와 조카 아가씨에게 잡힐 것 같아 짐도 포기하고 가지 않았다. 짐 속에는 어릴 적사진 등 그나마 내 삶의 흔적들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이북이 고향인 중대장은 이러저러한 물건을 자기 집에 갔다 주라며 나를 불렀다. 가끔 심부름을 가본 적이 있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짐을 들고 갔다. 중대장님의 무슨 사전 언질이 있었는지 사모님은 고향이 평안도이며 친척도 없고 외로우니 동생 누나로 같이 살자 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의아한 나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딱히 갈 곳이 없던 나는 망설이다가 그러마하고 눌러 살게 되었다. 누님 댁 에는 초등학생 아들 하나와 딸이 셋이 있었다. 아이들도 별 거부감 없이 나를 삼촌으로 받아들여 난생처음 식구라는 구성원으로 살아보게 되었다. 누님을 자청한 송 정자 여사는 그야말로 평양 피난민 또순이였다. 남자도 힘든 집을 ( 집장사 )직접지어 팔아 군인 월급으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큰돈을 벌었고 무슨 일에나 거침이 없는 여장부였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서울엔 집이 부족했고 지으면 팔려나가니 누님의 집장사는 호황이었다. 그 무렵 서울시장은 난립하는 무허가 건물도 막고 서민들의 집 문제를 해결한다며 산중턱에 아파트를 지었다. 입주한지 4개월 된 마포구 창천동의 와우 아파트 한동이 통째로 붕괴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났다. 지나가다 보게된 현장은 폭격을 맞은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6개월의 짧은 시공 기간과 터무니없이 적게 쓴 철근이 직접적인 붕괴원인이라 했다. 애초 서울시가 예상했던 건축비의 절반으로 시작한 건설사는 원래 써야하는 철근의 십분의 일도 쓰지 않았단다. 서민들의 생활의 편의성 제고와 도시계획의 측면에서는 훌륭했지만 졸속행정과 부정부패의 결합이 만든 인재였다. 붕괴의 조짐이 있었으나 안일한 대응이 애꿎은 서민들만 희생된 안타까운 사고였다. 말단 공무원이 되다일자리를 찾아야했고 우선은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자 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십대부터 운전을 했으나 한남동 면허시험장보다는 수월하다는 소문이 있어 그리 하기로 하였다. 두 달이 지나고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후 나는 문화공보부 지금의 문화체육부에 기술직 말단 공무원으로 취업을 하였다. 당시 공무원은 월급도 적을 뿐 아니라 지금과 같은 복지혜택이 전무한지라 인기가 없는 한직 이었다. 육영수 여사의 행차에 카메라맨들과 함께 따라다니며 청와대를 오갔다. 극장에서 영화에 앞서 나오는 대한 뉴스를 만드는 일도 우리가 하는 업무 중 하나였다. 모든 영화들이 문공부의 검열을 통과해야 상영이 되었다. 책이든 잡지든 신문이든 대중가요의 가사도 검열을 거쳐야 노래가 되어 세상에 나왔으며 공연도 사전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루는 인기가수 남진이 무슨 일인지 들어 왔다가 나를 보고는 특유의 미소와 사투리로" 앗따 방수병님 아니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여기서 보요이"손을 잡아 흔드니 직원들은 궁금해 물었다. 그렇게 아주 얇은 월급봉투 말고는 내 생활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국장님이 어느 날 부터인지 문공부 근처 호텔로 출근을 하는가 싶더니 부서원들은 퇴근도 안하고 합숙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유신헌법이 만들어져 공표하고는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유신을 반대하는 시위도 날로 격화 되어갔다. 새마을 운동을 시작으로 잘살아 보자는 구호 속에 이지구상에 가장 열심히 일하는 국민이 되었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은 서울로 몰려와 변두리에는 무허가 집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누님은 가정을 꾸리라며 결혼을 재촉하셨다. 친구 조카딸, 누구동생, 선을 보라 약속을 잡아 놓았으나 바쁘다는 핑계로 번번이 거절을 하였다. 그즈음의 나는 하루 열심히 일하고 술 먹고 다른 욕심이 없었다. 여자든 결혼이든 내 머리 속에 지운지 오래였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꿈이 없었기에 돈을 모을 필요도 욕심을 낼 일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술사고 밥 사고 퇴근 길 손내미는 아이들에게는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면허중을 받은 운전학원 아가씨한테 연락이 왔다. 면허증 받았으면 밥을 한번 사야 되지 않느냐? 그러마 어려운 일도 아닌데 퇴근길에 사무실로 가니 화장을 곱게 하고 있었다. 근처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술을 한잔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가끔 지나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다주고 커피도 얻어 마시며 사무실을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 내 마음은 화장기 없는 옆자리 직원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몇 번을 가도 눈길 한번 안주기에 그냥 눈치만 보는 중 이었다. 어느날 술 인심 후한 내가 술 약속을 하고 약속장소에 가니 옆자리 그 직원이 나와 있었다. 의아해하니 언니가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으나 연락은 못하고 아는 사람이니 대신 양해를 구하라 해서 왔다는 것이다. 오호! 나는 쾌재를 불렀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절호의 찬스 아닌가? 나한테 아무런 관심을 안보이니 말을 걸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엉뚱한 사람과 시간낭비를 하는 중 이었으니. 이왕 왔는데 식사나 하자며 붙들어 묻지도 않는 내 얘기를 했다. 그녀는 건성건성 대답만 할뿐 어서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가 생각해도 처음 보는 자리에서 무슨 생각으로 치부이자 자랑거리 없는 얘기를 쏟아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향하는 내 마음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눈뜨면 그녀가 보이고 길을 가도 어디건 눈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전화를 걸고는 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하다 끊었다. 그러나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났다. 사람답게 살아보고 함께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일보다 더 어렵다 해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지만 너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 다 내가 감당 할 테니 내 뒤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도 모르겠다. 절절한 내말에 동요하는게 보였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너무 아픈 사람이라 차마 외면을 못했다. 아직 연애 도 못해본 차에 연민 이었노라, 처음 만난자리에서 자기 얘기를 할 때는 별 미친놈 다 있네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며 )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누구보다도 완고하고 원칙 주의자이신 장인어른은 펄쩍 뛰셨다. 7남매 중 똘똘한 맏딸의 일탈을 인정을 못하셨다. 가진게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근본을 모르는 고아라는 사실에 말도 못 꺼내게 하셨다. 딸의 따귀를 치시면서 내게는 눈길 한번 주시지 않고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하셨다. 나는 오기가 발동했고 결코 물러설 수가 없었다. 퇴근후 날마다 집으로 찾아가 엎드려 사정도 하고 술을 잔뜩 먹고 주정을 부리기도 하였다.극심한 반대에 결국은 집에서 쫒겨 났다. 한 달 월급타서 보증금 걸고 다음 달 월급타서 살림살이 하나사고 우리의 눈물겨운 신혼살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신났고 하루하루가 즐거웠으나 그 사람은 아니었다.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된 생활을 못견뎌했다. 그럴 즈음 임신이 되었는데 장모님께서 찾아오셨다. 호랑이도 제 새끼는 안 잡아 먹는다며 집으로 부르셨다. 그러나 장인어른은 여전히 싸늘한 눈길로 우리를 외면 하셨다. 집안 어른들은 임신까지 했는데 그냥 두어선 안 된다며 서둘러 날을 잡아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누님은 그 사람을 데리고 금은방에 가서 반지를 하나 사주고 색이 고운 한복도 맞춰 주었다. 나도 새 양복을 맞춰 입고 가족이 없는 내게 국장님이 가족대표가 돼주셨다. 지금은 영화진흥공사 사장이며 부산영화제 위원장으로 활약하시고 계시다. TV에 비춰지는 백발이 성성한 국장님의 모습은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말해준다.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오늘까지 우여곡절이 많은 나는 식장에서부터 술을 마셨다. 식이 끝나고 동료들이 권하는 술은 마다않고 마신 탓에 고속버스를 타고는 골아 떨어졌다. 온양의 여관방에도 어떻게 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여관방이고 그곳에서 내주는 아침을 먹고 현충사를 들러보았다. 현충사 관리소장은 얼마 전까지 문공부에 근무하던 아는 분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고 점심도 사주셔서 먹고 돌아온 게 우리 신혼여행의 전부이다. 미국 가볼까도산 안창호 애국지사의 장남인 필립 안 선생께서 한국에 오시게 되어 체류하시는 동안 안내를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을 하시는데 007영화 촬영 중 사고를 당해 보행이 불편하신 분 이었다. 1년이면 몇 차례 오셔서 독립협회며 흥사단 청와대 방문 등 바쁜 일정을 보내시고 돌아가시곤 했다. 그러던 중 나보고 미국으로 함께 가자는 제의를 하셨다. 결혼을 하지 않아 혼자이셨다. 사람은 많지만 퇴근 후 혼자 인 것이 힘들어 믿고 함께 살 가족이 필요하다. 내가 함께 해준다면 미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책임져 준다고 하셨다.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에 사는 부자라 하셨다. 장관까지 나서서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니 가라고 적극적으로 권유를 하셨다. 집에 와 아내에게 넌지시 운을 떼니 펄쩍 뛴다. 부모 형제 가족과 삶의 근간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 필요가 없다며 무슨 꿍꿍이가 있는거냐. 몰아세워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접었다. 하긴 혼자였던 월남에서도 미국으로 갈 기회가 있었으나 접은 내가 아니냐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있는데 장인어른께서 소화가 안 되고 체중이 줄어 우석대학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간암 이었다. 몇 년 전부터 소화가 안되어 동네 의원에서 주는 소화제를 복용하고 계셨단다. 요즘 같은 세밀한 검진이 어려운 시절이라 많이 진행된 후에야 진단이 되었다.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 하니 이일은 어찌한단 말인가. 올망졸망 어린 처남 처제들이 눈에 어른 거렸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한의원이며 용하다는 다른 병원으로 장인어른을 업고 찾아다녔다. 내등에 업혀가면서도 자네가 왜 나를 업느냐며 나를 밀어내셨다. 몇 달을 못 넘기고 장인어른은 쉰둘이라는 젊은나이로 돌아가셨다. 군복무 중이던 큰처남은 이른 제대를 하여 20대 초반의 나이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장녀인 아내도 그 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끝까지 나를 인정 안하신 장인어른에 대한 부채의식을 털어낼 기회도 사라졌다. 보란 듯이 잘살아 처가 식구들에게 인정을 받으리라 다짐을 하였다. 배가 불러온 아내는 허리가 아파 쩔쩔매고 누우면 돌아눕지도 일어나지도 못하여 출근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다. 전화가 없는 시절이니 연락도 못하고 하루 종일 걱정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해 크리스마스 저녁에 어린 처제 처남들에게 케익과 과자를 사주고 돌아왔다. TV를 켜니 22층 대연각 호텔에 큰불이 나서 진화 중이었다. 소방차에서는 연실 물을 뿜어댔지만 8층에 겨우 닿는 턱없이 짧은 물줄기는 헛손질만 하고 있었다. 요즘 같은 초고층도 아니었는데 고가 사다리나 소방 장비가 없어 열기와 유독가스에 쫒긴 사람들이 무더기로 뛰어 내렸다. 창문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가 힘이 부쳐 떨어지는 참혹한 광경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1년에 한번 통금이 풀려 청춘들을 들뜨게 만든 크리스마스가 스크린 속의 한 장면이 되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중에도 중후한 모습의 대만의 외교관 한분이 하얀 모포로 몸을 감싼 채 창가에 서서 구조를 기다리며 왔다 갔다 하는 처연한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가더니 그 외교관은 너무 늦어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나왔다. 침착하게 기다리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은 지 1년밖에 안된 최신식 건물이었고 급속한 도시팽창으로 건물은 고층화되고 있었으나 그에 걸맞는 안전대책은 미흡한 인재였다는 지적이다. 가능한 소방차가 총 출동했고 군인과 주한 미군의 헬기까지 출동했으나 헬리포트가 없는 옥상은 무용지물로 피해를 막을 수 없었다. 대통령도 현장에 나와 독려를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고 세계최대의 호텔 화재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빠가 되다이듬에 3월 산 날이 되어 한밤중에 시작된 진통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녘 양수가 터져 흥건해도 둘 다 무지해서 양수 인 것도 몰랐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아내를 끌다시피 병원에 갔다. 후덕하게 생긴 여의사는 양수가 미리 나와 마른아기를 낳으려면 훨씬 더 어렵다고 겁을 주었다. 출근을 했다가 점심시간에 다시 병원으로 가니 의사는 첫 아이니 아직 멀었어요, 아침도 안 먹은 산모가 요기를 해야 힘을 내 아기를 낳을 수 있다. 병원에서는 아이를 낳아야 밥을준다니 갈비탕 한 그릇을 시켜왔다. 진통이 점점 심해지므로 국물 몇 모금 마시는 것을 보고는 다시 사무실로 갔다.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예쁜 공주님입니다. 퇴근시간이 되기도 전에 병원으로 달려가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가 내 딸이란다 내가 아빠가 되다니……. 내게도 가족이 생겼다 세상사람 들을 향하여" 나도 가족이 있어요. 여우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새끼가 있다구요"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선생님! 세상에서 이렇게 예쁜 아기 보셨어요?"입이 귀에 걸린 내게 의사는 딸 낳고 저렇게 좋아하는 아빠는 처음 본다며 흉을 보셨다. 사흘 만에 퇴원을 하고 장모님이 오셔서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세상을 다 얻은 듯 들떠 있는 나를 보고 조금은 안심이 되는 눈치셨다. 그러나 준비 없이 엄마가 된 아내는 쩔쩔매고 임신 중에 아프던 허리는 출산 후 에도 차도가 없어 아이를 키우는 일이 녹녹치 않았다. 특히 밤잠을 못자고 온종일 혼자 감당하는 육아를 버거워 했다. 퇴근 후에 목욕을 시키고 기저귀를 빨아 거들었으나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딸아이를 보는 것으로 행복했다.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퇴근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오는 딸 바보가 되었다. 그런 어느 날 동네의 세탁소에 아내가 맡겨놓은 양복을 찾으러 갔다. 인천 세탁소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가 나를 알아보며 헤어진 형제를 만난 듯이 반가워했다. 그도 나와 같이 혼자였는데 헤어졌던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나를 부러워하면서 저녁이면 종종 집으로 와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나는 가정이 있음에도 적당한 타협을 할 줄 몰랐다. 동료들의 만류에도 책상을 둘러엎고 사표를 내고 나왔는데 집에는 말을 하지 않고 아침이면 나오니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아내는 불같이 화를 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먹고살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먹고사는 일에 자신이 있었다. 월남에 있는 동안 성능 좋은 카메라를 사서 사진 찍는 일에 푹 빠졌었다. 문공부에서 수준급의 사진사들과 현상과정을 두루 섭렵한 나는 여학교 앞에 현상을 하는 사진 점을 열었다. 한참 개인 카메라를 소지하는 붐이 일어 컬러사진이 보급되던 시기였다. 새로 카메라를 구입한 사람들에게 카메라 조작법이나 사진 찍을 때의 구도 잡기등 작은 팁을 가르쳐주며 세 식구 살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곳에서 청록파로 유명한 시인 박목월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아침마다 사모님과 손을 잡고 산책을 하시는 노부부의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아내는 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분을 아침마다 뵙는 것을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여행이라도 가셨는지 보이지 않으면 걱정을 하다 두 분이 다정히 손을 잡고 나타나면 반색을 하고 인사를 건넸다. 내 또래로 보이는 시인의 아들이 한참 사진에 재미를 붙여 사흘이 멀다고 찾아왔다. 올망졸망 애기들을 찍어 사진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셨다. 해맑은 아이들 사진을 들여다보며 행복한 웃음을 짓던 청년 박동규 선생님은 서울대 명예 교수이시다.둘째를 낳게 되었는데 장모님은 내심 아들을 기다리는 눈치셨다. 아직 애기인 첫애를 안고 입덧을 하느라 아내는 힘들어 했고 엄마를 대신 큰애는 나에게 매달렸다. 첫애와 달리 아내는 진통이 오고 몇 시간 안 되어 수월하게 둘째를 순산했다. 식구가 느니 어깨는 무거웠으나 두 아이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만으로 배가 부르고 흐뭇했다. 두 돌이 된 큰아이는 동생이 생기고 엄마의 손길에서 밀려나자 도로 애기가 되어 매달리며 투정이 늘었다. 밤에는 목을 끌어안고 잠이 들 때 까지 내 귀를 쓸어 내렸다. 둘째의 이름을 짓기 전 큰아이가 부르던 작은애의 별칭은 지금도 본 이름보다 더 익숙하게 불린다. 그러한 소소한 일상의 행복도 그리 오래 가지를 못했다. 다시 인천으로석유파동이 일어났고 공장들은 줄줄이 도산하니 실업자는 늘고 서민들 삶은 어려워졌다. 체감이 더딘 여러 가지 경제 지표는 차치하고 당장 일상생활의 여러 면들이 불편했다. 한 번에 일정량의 기름만 판매를 하니 주유소에는 긴 줄이 세워졌다. 기름 값이 폭등하자 연탄사용이 늘어나고 여유있는 이들의 사재기로 연탄은 수요룰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줄을 서서 연탄을 사 날라야 했다. 쌓아놓을 여유도 없고 사기도 어려운 연탄을 아끼려다가 미처 마르지 않은 연탄불은 꺼지기 일쑤였다. 불 꺼진 냉골에 두 아이를 끌어안고 행여 감기라도 걸릴세라 전전긍긍하는 날이 많았다. 먹고사는 일이 급해진 세상에 사진 영업은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임대료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가게를 접어야 했다. 당장 네 식구 생계가 막막했다. 더운밥 찬밥 갈릴 여유가 없어 당장에 현금을 쥘 수 있다는 택시회사를 찾아갔다.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온종일 돌아다녀도 사납금 채우기 어려워 며칠 만에 그만두었다. 인천의 작은 공장과 탁구장을 겸한 체육관을 운영하는 곳에 취직이 되었다. 내가 먼저 내려가고 문은 닫았으나 정리되지 않은 가게를 정리하고 아내와 아이를 데려왔다. 인천의 외각에 땅이 넓고 한 켠에 방 두 칸이 있는 건물에 짐을 풀었다. 부사장이라는 분이 한울타리 안에 살았는데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라 하였다. 상품에 붙이는 라벨을 짜는 공장인데 석유파동을 계기로 일감이 줄어 땅을 활용하기 위해 체육관을 지은 것이라 했다. 숙련된 기술자들은 떠나고 남아있는 몇 명의 직원의 뒷바라지에 내가 투입된 것 이었다. 부사장님의 사모님은 내 또래의 자녀와 우리아이 또래 손자를 두고 계셨다. 아이들 데리고 떠나온 피난살이가 얼마나 고달팠는지를 얘기하셨다. 어른인 우리도 죽을 고생을 했는데 어린애가 어떻게 살았노 하시며 된장, 고추장을 챙겨주시고 김장도 넉넉하게 담아 주셨다. 넓은 마당에 아이들이 강아지와 뛰어 놀 수 있어 우선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겨울이 가는 2월 바람보다 더 시린 가슴을 안고 내려온 인천에서 여름이 시작되었다. 8.15 광복절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던 중 영부인 육 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충격적인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 되었다. 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는 역사적인 날이었지만 육 여사의 피격으로 빛을 발했다. 며칠 후 청와대를 나서는 장례식을 TV로 보며 아내는 눈물을 훔쳤다. 피난을 겪은 사모님은 공산당이 얼마나 나쁜지를 열변을 토하셨다. 부동산인 공장 부지를 놓고 사장과 부사장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두 분 사이에서 입장이 난처해져 불편해진 나는 이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먹고 살았을 뿐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는 우리는 다시 막막해졌다. 일자리 찾아 다시 서울문공부 다니던 시절에 만들어진 인맥들이 연결되어 한창 잘나가는 밥솥을 만드는 한상전자에 취직이 되었다. 청계천에 있는 회사에는 기숙사로 사용하는 여러 채의 아파트가 있어 그중 한곳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아파트가 보급되기 전 연탄아궁이를 쓰는 집과 달리 욕실과 거실 입식부엌 모든 것이 새로웠다. 8층이면 고층인데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오르내리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행히 5층에 구멍가게가 있어 아이들과 일상생활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3층과 4층에 회사가 있고 대부분 농촌에서 상경한 젊은이들로 기숙사는 필수였다. 당시 외국 여행가면 하나씩 사온다는 일본의 코끼리 밥솥과 기술제휴를 한 회사다. 똑같은 기술로 만들어 훨씬 싼값에 파니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관리 팀으로 발령을 받은 나는 밥솥을 싣고 부산으로 광주로 전국을 누볐다. 대리점주들은 현금을 들고 물건을 기다렸다. 계좌 이체가 없던 시절이니 지사마다 쌀을 담는 푸대에 현금을 받아 계수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현금을 들고 숙박시설을 이용하기도 어려워 밤을 새워 고속도로를 달려와야 했다. 피곤하여 휴게소에 잠시 들러 눈을 붙여 보아도 트럭에 실린 돈 자루가 걱정되어 편히 잘 수도 없었다. 어느 날은 여관에 들었으나 부피가 있는 돈 가방을 놔두고 불안하여 꼬박 밤을 새우고 나왔다. 옆자리 조수석에 젊은 청년이 동행을 해도 많은 현금을 갖고 다니는 일은 긴장의 연속 이었다. 큼지막한 돈 가방을 경리과에 넘겨주고 나면 긴장이 풀려 동료들과 술 한 잔 하는 것이 유일한 낙 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통금을 넘기기 일쑤였고 동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회사 윗 층에 있는 우리 집 으로 올라왔다. 술 한 병씩 들고 당당하게 제수씨를 불러 안주를 요구하면 아내는 말없이 안주를 만들어 냈다. 술 마시다 거실에 제멋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통금이 해제되면 줄행랑을 치곤 하였다. 큰애가 옆집에 놀러가서 TV만화를 한번 보더니 만화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TV가 시작되는 시간이면 그 집으로 달려가 어두워도 올 생각을 않아 우리를 민망하게 하는 날이 많았다. 말리면 우리도 TV 사내라며 엄마를 밀쳐내며 옆집으로 향하는 아이를 두고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우리는 14인치짜리 TV를 할부로 들여놓았다. 딸아이는 같이 뛰놀던 아이들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몰고 왔다. 만화 삼매경에 빠진 내 딸과 했던 실랑이를 또래의 다른 엄마들이 이어갔다. 결혼을 하게 된 큰처남이 와서 TV를 며칠만 빌려 달라했다. 결혼을 하면서 TV를 살 계획인데 며칠만 빌리자고 해서 우는 아이를 달래며 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두어 달이 지나도 돌려줄 생각을 안 하기에 처갓집에 가보았다. 그런데 전후 사정은 모른 채로 어린애 보다 더 재미있어 하는 장모님 앞에서 우리 것이니 가져 가겠노라 차마 말을 못하고 돌아왔다. 애 엄마도 내 눈치만 보고 말을 못 꺼내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렇다고 할부금이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또 살 형편은 안 되어 칭얼대는 딸아이를 달래야만 했다. 아내는 셋째아이를 갖게 되었고 내 어깨는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루빨리 전세금이라도 마련해야 하는 데 월급타서 먹고살고 여유돈은 좀 체로 만들어 지지를 않았다. 두 딸들과는 다르게 입덧이 순해서 평소에 즐기지 않던 고기를 먹고 싶다는 날이 많았다. 위로 두아이 때는 시원한 냉면국물과 아이스크림이 먹는 전부였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고깃집을 지나치면 돌아보며 서운해 하고 처음 먹어본다는 족발을 손가락까지 빨며 꿀맛이라 했다. 통닭이 먹고 싶다기에 한 마리를 사오니 애들과 나누어 먹고는 부족한 눈치였다. 다음날 두 마리를 사다주니 한 마리는 아이들에게 주고 돌아앉아서 닭 한 마리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그렇게 잘 먹는 모습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다. 첫아들을 낳은 아내의 친구가 자신이 입었던 임부복을 들고 달려왔다." 먹고 싶은 음식이 분명 아들이다 얘 "태몽도 아들 태몽이니 분명히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으나 그보다는 수월한 입덧으로 잘 먹고 덜 힘들어하는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10월 국군의 날 아내는 아들을 낳았으나 나는 지방 출장 중이었다. 아내는 처제를 불러 두 아이를 처가댁으로 보내고 혼자 병원에 가서 밤 11시에 아들을 낳았다. 퇴원 할 때도 아내는 혼자아이를 안고 와서는 팔이 아파 한참을 고생을 했다. 이번에도 장모님이 오셔서 산후조리를 도와 주셨는데 한 달 전 큰 처남은 첫딸을 낳았다. 아들로 가계를 이어가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니 손자를 들려다 보고 또 들여다 보시며 기뻐하셨다. 회사는 24시간 풀가동 하여 물량을 대기에 총력를 기울였다. 지방 대리점들은 물량확보를 위해 선수금도 마다하지 않아 회사는 돈방석에 앉는 듯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회사 내부에서 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고발을 했다는 소문과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나왔다. 한밤중에 관련 장부 서류들을 우리 집 천장 위에다가 감추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서도 오래 살수는 없겠다 싶어 쫓겨나기 전에 이사를 가야 했다. 몇 년을 집세 안주고 공짜로 살면서 얼마간의 돈을 만들었다. 집을 알아보니 돈보다는 아이가 셋이라는 말에 복덕방도 집주인도 모두가 안색을 바꾸었다. 아이 셋을 데리고는 셋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그 당시 서울의 가장 변두리인 암사동에 서울시에서 서민들을 위해 새로 짓는 10평짜리 아파트를 샀다. 시내와 가깝고 교통편 좋은 곳에 방 두 칸 전세금이 70만원 내외인데 모자라는 금액은 대출로 충당했다. 두 달된 아들을 안고 한겨울에 이사를 갔다. 부동산에서 열쇠를 받아 분명 우리 집 이라고 며칠 전에 도배를 했다. 이삿짐을 싣고 가니 부동산에서 하는 말이 착각을 해서 우리 집이 아닌 앞 동 남의 집에 도배를 해놓았단다. 지금 도배를 시작했다며 기다리라니 어이가 없었으나 다른수가 없지 않은가. 당시 서민아파트 도배는 입주자가 하게 되어있었다. 똑같이 같은 방향으로 지어진 아파트이기에 벌어지는 헤프닝 이었다. 한겨울에 갓난아이를 안고 떨며 애들은 보채었다. 부동산은 연실 머리를 조아리며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깔린 후에 집으로 들어 갈수 있었다. 비록 방 두 칸의 작은집 이었지만 세 아이들과 주인눈치 안보고 마음껏 뛰어 놀 수 있어 더 바랄게 없었다. 변두리에 새로 짓다보니 버스도 안다녀 시내로 나가려면 30분은 걸어가야 버스를 탈 수 있다. 시장이 없어 아이를 업고 고만고만 두 아이들과 장을 보는 일도 만만치 않았으나 마음은 가벼웠다.얼마안가 회사는 부도처리가 되었다. 직원들은 호황이던 회사의 부도는 이해가 안되었다. 회장이 구속되고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니 직원들은 살 길을 찾기에 바빴다. 몇 달을 월급을 못 받은 직원들은 물건이라도 챙겨야 한다며 밥솥을 트럭에 싣고 나왔다. 서로 달라고 아우성이던 분명 그 물건인데 세상인심이 망한 회사 물건을 돈 주고 사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목숨 줄 같은 몇 달치 월급의 밥솥이 작은방 구석에 쳐 박혀 있다가 몇 개는 지인들에게 인심을 쓰고 덤핑 장수에게 고물 값으로 처분해 버렸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했지만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쉽지가 않았다. 어쩌다 구한 일자리도 어렵다는 핑계로 임금은 체불되기 일쑤였다. 더러는 그런 사회상을 악용하는 사례도 눈에 띄었다. 일은 했으나 수입이 끊기자 아내는 말도 못하고 내 눈치만 살폈다. 궁여지책으로 중정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술기운을 빌어 어려움을 털어놓자 친구는 그 자리에서 전화를 돌렸다. 다음날 돈이 없다던 사장에게 연락이 왔고 이런 저런 변명과 함께 밀린 월급을 전부 계산해 주었다. 중동으로그러다가 한참 사세를 키우고 있는 율산 이라는 신흥 대기업에 취업을 할 수가 있었다. 석유파동으로 오일달러가 넘쳐나는 중동지역 건설에 많은 근로자들이 나가 있었다. 수입이 국내보다는 월등히 많다니 나로선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어려운 시국이다 보니 신청자가 몰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출국을 하게 되었다. 갓돌을 지난 막내를 비롯해 올망졸망 삼남매를 두고 가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무엇보다도 아내한테 미안했으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항에서 즉석으로 찍은 사진 한장 가슴에 품고 말로만 듣던 중동 땅에 내렸다. 공항청사를 나오는 순간 훅하고 밀려오는 열기가 만만치 않았다. 아열대 지방인 월남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열기였다. 같이 온 어떤이는" 오매 오매 이게 사람 사는 데가 맞으요 "청사로 도로 들어가서는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며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억지를 써 마중 나온 직원과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율산 공사현장이 아닌 율산 실업 제다 지사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곳은 중동지역과 유럽의 모든 공사 현장의 물품과 직원수급 수출입 현황을 관리하는 컨트롤 타워였다. 지사장과 함께 다음날부터 시작된 일상은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중동이라는 그들만의 왕국의 특수성이었다. 부를 앞세운 오만에 가까운 자국민 우선과 무슬림 법에 의한 시스템에 무조건 맞춰야 했다. 말이 안 통할 뿐더러 국제 공용어인 영어를 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하려들지를 않았다. 필요한 너희들이 아랍어를 배우라는 식이니 아쉬운 내가 아랍어를 배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류 하나 만들어 관공서에 가서 몇 시간을 기다려 내 차례가 되었는데 기도할 시간이라며 문을 닫아 버린다. 일반인들도 장사를 하다 기도할 시간에는 손님들을 내보내고 나중에 다시 오라며 문을 닫는다. 하루에 다섯 번을 성지가 있는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 모습은 우리로서는 납득이 안 되지만 모든 것이 신의 뜻 이란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눈뜨면 한국말은 들을 수 없고 아랍어만 들리는 환경에 놓이니 몇 달 지나지 않아 웬만한 소통이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해야 할일은 점점 많아졌다. 주방장은 나를 앞세워 필요한 식재료를 구입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돌아가는 직원들과 신입들이 오면 공항에 가서 출 입국 절차를 밟아 인솔해오는 일이 일주일이 멀다하고 이루어졌다. 쉬는 날에도 귀국을 앞둔 이들이 가족에게 줄 선물 쇼핑에 나를 불러내어 휴일에도 쉴 수가 없었다. 마치 관광객을 인솔하고 온 가이드처럼 사람들을 쇼핑센터에 내려주고 값을 흥정하고 물건을 골라주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상점 주인들은 나를 기다리고 고가의 카메라나 아내에게 주면 최고라며 목걸이 등의 선물 공세를 해왔다. 받으면 약점이 되어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될 것 같아 단호히 거절했다. 덥고 먼 이곳까지 와서 힘들게 일하고 가족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근로자들의 작은 행복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좀 더 싼 가격에 살 수 있도록 도움이 되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렇지만 귀국하는 이들을 공항까지 배웅하고 돌아서면 상기된 표정으로 손 흔들며 돌아가는 그들이 부럽고 그날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늦은 잠에 허둥대며 하루는 시작되고 지내다 보니 무슬림이 그 사회의 법이고 사회를 지탱해주는 궁극적 가치임을 알았다. 면허증하나 더 받는 심정으로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교리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들의 절대적 신 알라를 향한 기도에 참석하니 무슬림을 인정하는 증명서를 주었다. 그 증명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 일을 하기는 한결 수월해졌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어디나 그렇듯이 한국 사람들이 경찰서에 잡혀가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남녀유별이 엄격한 이곳에서 여자를 쳐다봤다거나 금지하는 술을 먹었다거나 하는 우리 기준으로는 일도 아닌 일들이었다. 그럴 때면 내가 나서야 하고 주변의 다른 회사들까지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누구인지 알지도 못 하는 사람들을 찾으러 경찰서 유치장으로 달려갔다. 무슬림 증명서를 내밀면 우리는 형제라며 친절하게 앞장서 대부분 풀려 나올 수가 있었다. 아니면 한국사람 어디 있느냐 해도 모른다 안왔다 하면 그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막대한 오일달러 덕분에 이제 새로 건립되는 모든 도시와 건축물은 사막을 지나 멀리 떨어져 있어 장거리 운행은 필수였다. 가는 길도 무슬림이 가는 길과 일반인이 가는 길이 나뉘어져 있다. 무슬림이 갈 수 있는 길은 한 시간이면 족하지만 아니면 세 시간을 돌아가야 했다. 증명이 있는 나는 통행이 가능한데 동승자라 해도 무슬림이 아니면 갈수가 없어 나 혼자 가아하니 할 일은 점점 쌓여갔다. 도로 표지판에도 애니 멀 로드라 해서 무슬림이 아니면 동물취급을 하는 알면 알수록 이상한 나라였다. 제다에서 리야드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앞자리에 있던 잘차려 입은 중동의 젊은 남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간질이었다. 모두들 우와좌왕 하고 있기에 일단 그남자를 편안하게 뉘었다. 이물질이 기도로 넘어가지 않게 머리를 받혀주고 승무원에게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아주며 발작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몸을 털며 일어났다. 사우디 석유산업은 왕족들의 소유였고 일반 경제의 전반이 왕족의 소유인데 비행기에서 발작을 했던 그 남자도 왕족이었다. 그일이 인연이 되어 친분을 맺게 되었고 아랍 말을 하는 나를 형제라며 집으로 초대를 하였다. 집이 아니라 궁궐이었는데 궁궐의 크기도 크기지만 내부 장식의 호화로움에 기가 죽었다. 대리석이며 기둥이 금장으로 번쩍번쩍 그림책에나 나올법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면서 남자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여자는 보이지 않고 비서인 듯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도 차를 내오는 사람도 모두가 남자뿐이었다. 여자들은 외부 사람과의 접촉은 안 되며 외출시에도 남자와 동행을 해야 한다. 젊은 왕족은 알라신 앞에 우리는 한 형제라며 모든 일에 협조를 약속했고 여러 가지 일들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리야드까지 왕족과 함게 전용기를 타고가서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일반 비행기밖에 본적이 없는 나는 넓은 의자며 응접실에 침대까지 있는 전용기를 난생 처음 보았고 타보는 호사를 누렸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점점 많아져 숨돌릴 여유도 없는 시간이 흘렀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좀더 나은 삶을 찾아 먼 이국까지 희망을 품고 왔던 사람들이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경우이다. 뒷수습을 하러 병원으로 장례식장으로 쫓아다녀 시신을 화물기에 실어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황망해할 그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그런 밤이면 아이들과 아내가 간절하게 그리웠다. 바쁘다는 핑계로 편지도 자주 못하는 나에게 막 한글을 깨친 큰아이가 서툰 글씨로 아빠 사랑해요 건강 하세요 쓴 편지를 받는 날이면 하루가 어찌 지나는지 모를 만큼 신이 났다. 아내는 주기적으로 아이들 얘기며 국내의 여러 소식을 보내왔다. 그 무렵 국내에는 중동의 근로자들이 보내오는 달러로 경기가 살아나서 살만하다는 소식 이었다. 반면 남편들이 피땀 흘려 보내주는 조금 여유있는 월급 덕분에 살림은 나아졌으나 마음이 공허한 아내들이 춤바람이 났다, 제비한테 돈을 털렸다는 둥의 뉴스가 실려 근로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신흥 재벌그룹으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이어가던 율산 그룹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나 회장은 구속되고 부도처리가 되었다. 본사에서의 모든 공급이 중단되고 사우디 현지에서도 은행거래며 물품반입이 봉쇄되어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였던 수출 물건들도 압수되었다. 유럽과 중동지사를 겸하고 있던 지사장님은 파리로 가버리고 같이 있던 직원들도 현지사표를 제출하고는 미국이며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최말단인 나와 식사를 챙겨주던 주방장만 남았다. 주거래 은행이던 신탁은행의 차장 한분이 채권확보를 위해 급히 오고 사우디주재 대사님이 달려와 수습에 나섰다. 당시 율산은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이곳에서는 율산이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이 율산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지사정을 전혀모르고 아랍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되지 않는 결정권 하나 없는 은행직원이나 대사가 감당할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권한과 책임도 없는 내가 볼모로 잡혀있는 상황이 되었다. 운동장 몇 개 넒이의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거래되던 물건들을 사러 와서 나를 찾았다. 어디에 무슨 물건이 얼마큼 있는지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 혼자 며칠 밤을 새워가며 트레일러에 시멘트며 온갖 건축자재들을 지게차로 실어 주었다.5층짜리 단독건물을 임차해서 사무실과 직원들 숙소를 겸하고 있었다. 계약만료일이 되자 주인은 망한 회사와 재계약은 하지 않겠다며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이사를 해야 하나 누구도 집을 주려고 하지 않아 길거리에 쫓겨날 상황으로 몰렸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현지인의 도움으로 작은 집을 구해서 이사를 했다. 예멘의 젊은 친구들을 몇 명 불러 짐들을 꺼내보니 꽤 큰 5층 건물에 있던 집기들을 단층집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반 이상을 버리고 쓸 수 있는 공간도 없이 창고에 짐을 부리듯 쌓아 놓았다. 잘 나가던 사무실의 집기들은 크고 호화로우니 무게도 만만치 않아 옮기던 중 허리를 삐끗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가 없어 병원에 며칠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 부자나라여서 그런지 병원비는 내국인 외국인 차별 없이 무료였다. 이사는 했으나 정작 집은 창고가 되어 쉴 공간도 없고 끼니를 걱정하는 웃지 못 할 처지가 되었다. 은행거래가 막히니 전화도 끊기고 식량도 떨어져 근처 다른 회사 건설현장에 가서 끼니를 구걸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걱정은 집에 있는 가족들 이었다. 부도 처리된 회사는 당연히 월급이 정지되었고 앞일은 알 수 없고 편지도 받을 수 없는 오도가도 못 하는 몇 달이 지나갔다. 웃음이 나오고 허망한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보다 더 답답한 일이 또 있겠는가. 잘나가던 회사들이 내가 일 좀 할 만하면 망해버리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가겠다는 나를 은행직원과 대사님이 붙들었다. 나마져 가버리면 감당할 수가 없다며 돈은 자기들이 해결해 줄 테니 수습이 끝날 때까지 있어주기를 원했다. 그럼 지급 당장 여기서 현금으로 주라 그러면 내가 같이 하겠다. 그러나 두 사람은 책임지겠다는 말 뿐이었다. 송금이나 환전이 자유롭지 않은데 어떻게 보낼 것이냐며 회유를 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주기만 해라 그러나 나중에 해결해 주겠다는 말뿐이었다. 책임을 질수 있는 위치에 있는것도 아니니 그들도 답답하기는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 살겠다고 가버린 이 상황에서 아무도 믿지 않는다. 몇 달 동안 월급도 못 받은 우리식구들이 굶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가 마냥 여기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수중에는 비행기 표 살돈도 없었다. 궁리 끝에 5층 건물 층마다 달려 있던 에어컨을 떼어내 중고시장에 내다 팔았다. 간신히 비행기 표를 구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누구세요?계획도 없이 서둘러 오다 보니 아이들에게 줄 선물 하나 변변한 게 없었다. 다른 사람들 선물 쇼핑 길에 아이들 생각하며 한두 개 사두었던 것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는 식구들이 굶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시라도 빨리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 했다. 늦은 시각 공항에 내려 다행히 우리 집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탈수 있어 도착하니 12시가 다 되었다. 기다리라 하고 4층을 뛰어 올라가 벨을 누르니 기척이 없다. 몇 번을 누르니 누구냐 하기에 나야 하니 나가 누구냐고 되묻는다. 소식을 알지 못하고 연락도 안 된 상황에서 밤늦은 시간에 남자가 나라고 벨을 누르니 선뜻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다. 문에 달린 외시경을 통해보고 놀라 문을 연 아내에게 8천원을 받아 택시비를 주었다. 어수선한 소리에 큰아이는 잠에서 깨어 놀란 표정으로 와서 안긴다. 아침이 되자 막내는 아빠야? 하면서도 낯설어 엄마 뒤에 숨고 두 딸은 재잘 되며 좋아라 한다. 지금과 같은 전자제품이 없던 시절에 내가 들고 온 소니 녹음기에 노래와 다투는 소리까지 녹음해서 들려주면 방금전 자기들 목소리를 신기해 했다. 듣고 또 듣고 아들 녀석은 정교한 자동차 모형 장난감에 마음이 팔려 느닷없이 찾아온 아빠와의 낯설음을 지워갔다. 경위야 어쨌거나 나는 모처럼의 아이들과의 소중한 시간이 즐거웠다. 얼마 후 율산에서 미지급된 월급은 다른 회사에서 일부를 받게 되었으나 목돈을 만들고자 시작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매형을 삼킨 연탄가스다시 일자리를 구하러 동분서주하고 있는 와중에 누님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 왔다. 5층 건물인 우리 아파트에 전화가 있는 집은 101호 한집뿐인데 우리라인 대부분이 그 집을 통해서 급한 연락을 전해 듣고 있었다. 아침에 연락을 받았으나 전할 방법이 없으니 저녁에 돌아와 현관에서 신도 못벗은채 성남의 병원으로 뛰어갔다. 한방에서 주무시던 매형인 중대장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누님은 혼수상태로 누워 계셨다. 대학생인 아들, 초, 중학생인 조카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공원묘지를 구하고 장례를 치르는데 요즘 같은 병원의 장례시스템이 자리 잡기 전이므로 염습할 사람이 따로 필요했다. 동네에 경험 있으신 분이 해주시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연락도 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대학생인 조카의 친구 하나를 붙잡아 맨 정신으로는 용기가 없어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엉터리인 내방식대로 염습을 하여 공원묘지에 장사를 지내고 온 다음날 누님은 깨어나 매형을 찾으셨다. 다른 방에 계시다고 둘러 대니 어느 병실인지 가자 안 된다 실랑이를 벌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말을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는 자식들의 표정에서 눈치를 채신 듯 입을 다무셨다. 누님이 퇴원하기 전에 가스가 스며든 방을 수리를 했다. 집에 도착하자 누님은 그제야 꺼이꺼이 우셨다. 그리 허망하게 가느냐 아직 이별은 준비가 안됐는데 혼자서 가버리면 나는 어쩌란 말이냐. 부모 없이 오빠 한분과 피난 와서 고단하긴 해도 자식 낳고 사람 노릇하며 산다 싶었는데 허망 하다 허망 하다. 먼 산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보내시더니 하루는 앞장서래이 어디다 묻었노 산소에 가서는 말 없이 한참을 앉아 계시다가" 내가 정신을 차려야제 야들과 살아 야제 "문을 닫아놓은 식당으로 가셔서 일할 채비를 하신다. 중령으로 제대를 하신 매형은 이것저것 사업을 벌이셨다. 사람만 좋고 군 생활 말고는 세상일을 알지 못해 다른 사람 말만 듣고 시작한 일이 쉽지 안아 빚만 떠안고 있는 중 이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 누님은 시청 앞에 식당을 차렸고 깔끔한 음식 맛으로 식당은 북적였다. 그렇게 동분서주하는 내가 중동에 서 목돈이라도 챙겼다고 생각했는지 지인이 만나자했다. 개인택시를 하면 먹고사는 것은 해결 된다며 택시를 사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만한 여력이 없다 하자 빌려 줄 테니 돈이 매일 들어오면 조금씩 갚으라 하였다. 고마운 마음으로 택시를 구입하여 면허등록과 이것저것 수리를 하고 개인택시를 갖게 되었다. 이틀을 운행하고 하루를 쉬는 일상이 손에 익기도 전에 지인은 돈을 돌려주기를 원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택시를 팔아 돈을 갚았다. 급하게 처분하려니 값도 제대로 못 받았고 등록비며 수리비로 들어간 바용은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나는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속내를 모르는 이들은 왜 해보지도 않고 그리 했는지 의아해 했으나 설명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급해진 나는 다시 중동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가족들과 떨어져야 했다. 한 번의 경험이 있으니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미안했고 밤이면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1년 더 연장하기를 간곡히 권하는 소장님의 말을 외면하고 돌아와 버렸다. 그 무렵 KBS에서 이산 가족찾기 생방송이 있었다. 처음 3시간의 특별 방송으로 시작했다가 전국에서 몰려드는 신청자가 줄을 이었다. 5개월여의 생방송으로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기록물은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다. 당시에 나는 중동에 가있어 직접보지는 못했다. 방송현장에서 눈물의 상봉이 이루어지고 전화로 혈육을 확인하는 장면들을 눈물을 훔치며 보던 아내가 신청을 했단다. 한두번 묻는 전화만 있었을 뿐 이렇다할 진전은 없다고 했다. 후로도 이북 5도청에 여러번 가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총감독이 되어안산의 자동차부품 제조공장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사장님의 모친께서 꽤 큰 주택에 혼자 계시니 2층에 살기를 권하셨고 집구할 돈이 여의치 않은 우리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막내는 초등학교 중학생인 딸들은 버스를 타고 다니는 수고를 해야 했다. 서울에서 안산까지 출퇴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본과 기술과 자본의 협력회사로 일본손님의 접대와 수도권에 공장 부지를 찾어야했다. 지방으로 다니다 보니 집에 오는 날보다 밖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더 많은 돈은 필요하나 수입은 한정되어 불안한 아내는 일자리를 찾는 눈치였다. 전문직도 특별한 기술도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보험회사 영업직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생명보험회사에 다니던 지인의 권유로 화재보험회사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경험도 없고 낯가림이 심한 내성적인 성격의 아내가 하기에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 싸서 학교에 보낸 후 출근하는 아내를 말리지도 못하고 바라보았다. 그런 중에도 배움에 늘 미련을 가지고 있던 아내는 공부를 시작했다. 밤이면 식탁에 앉아 강의 테잎으로 공부를 하고 일요일 아침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은 소풍가는 아이처럼 경쾌했다. 반장을 맡아 어린 급우들을 독려하며 포기하지 않도록 시험 준비를 독려하면서, 토해내지 못해 응어리졌던 배움의 갈증을 채워갔다. 수도권에 공장 부지를 물색하던 회사는 수도권의 개발제한으로 허가가 까다로워 조성된 공단에 공장을 신축하게 되었다. 일복 많은 나는 신축현장에 아무런 실권도 없는 감독 아닌 감독이 되었다. 퇴근하는 나를 건축업자가 부르더니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5천이다 가만히만 있어 달라 끝나면 더 줄 수 있다."나는 정중히 고사를 했고 더욱 꼼꼼히 현장을 더 살피게 되었다. 건축업자는 건장한 청년들을 보내 조심하라 며 협박을 하기도 했으나 그런 것이 두려운 내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축업자는 자금만 미리 받고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공사는 중단되고 다른 업자를 불렀으나 이미 지불된 돈에 추가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원하는 공기를 맞추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사장은 나를 불러 대책을 물었고 어찌 되었건 당신이 해보라 무조건 해야 한다. 안 되면 손해가 너무 크다. 아무런 책임 안 지울 테니 완공만 시켜보자 내가 본 당신은 분명히 할 수 있다. 하도 완강하고 도면대로라면 못할 것도 없겠다 싶어 해 보마 하였다. 그날부터 집에도 못가고 공장 한구석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자며 밤늦게까지 강행군이 계속 되었다. 현금을 한 자루씩 받아 모든 자재와 인부들의 임금을 현장에서 즉시 지급했다.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아 공사는 속도를 내었고 자재비도 예상보다는 적게 들일수가 있었다. 1년이 넘는 동안에 집에는 손에 꼽을 만큼 가보니 아이들이 입학을 했는지 졸업을 했는지 나는 늘 이방인이었다. 아내에게 미안했으나 먹고 살자면 할 수 없다고 자위를 했다. 공사가 끝나고 새로 지은 공장에서 새로운 물건을 생산하게 되자 사장은 나를 불렀다. 건축업자의 유혹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눈치였다."방기사님 고생 많았습니다. 정말 고맙구요 며칠 푹쉬고 나오세요 "하며 봉투를 내밀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2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다음날로 부동산을 찾아간 우리는 산 자락마을 낡은 연립주택을 대출금을 안고 구입해서 이사를 하였다. 위태롭게 겨우 이어지는 살림살이 였지만 세 아이들은 아무런 말썽 없이 공부도 곧 잘하며 잘 자라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했으니 사장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나는 사장을 뺀 다른 고위 간부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타협할 줄 모르는 나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회사를 나와 버렸다. 물론 아내는 알지 못했고 몇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안다고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따져 묻지는 않았으나 나를 못미더워 하는 눈치였다.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난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인줄 알면서도 행동이 앞섰다. 옳거나 그르거나 선택을 해야 하는 현실에서는 나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아내는 보험대리점이라도 해보라기에 몇 달을 공부해서 자격을 얻어 일을했지만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애들 학비며 당장의 생활이 안되었고 대출금이 있는 집에는 독촉장이 쌓여 갔다. 그래도 견뎌보자는 아내의 말을 뒤로 어렵게 마련한 집을 팔아버렸다. 너무 빠른 나의 결정에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말을 못했다. 큰딸이 고3이었는데 야간자율 학습을 마치고 밤늦게 오는 1년동안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아이의 귀가를 도왔다. 한참 여자들의 납치가 사회문제로 떠들썩하고 새벽에 도시락 두 개를 들고 가서 밤 10시가 넘어야 오는 아이를 위해 아비로서 할 수 있는 것이 그 것 뿐이기도 했다. 정 술 생각이 나면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동네에서 한잔하면서. 큰애는 대학에 진학을 하였고 준비가 안된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아내는 동분서주 하는데 나는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아내의 학구열은 계속되어 방송대에 진학을 했다. 자다가 깨어보면 식탁에 앉아 끙끙대며 시험공부를 하고 시간이 되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안쓰러우면서도 한편 못 마땅한 적도 있었지만 밤길을 아내 혼자 오게 할 수는 없었다. 끝나기를 기다려 함께 돌아오는 시간이 나쁘지 만은 안았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쇼핑도 놀이도 마다하고 힘들게 공부를 하는 것은 아마도 공부가 힘든 아내의 삶의 피난처가 아니었나 싶다. 입학은 쉬우나 졸업이 어렵다고 하던데 아내는 유급 없이 졸업을 했고 엄청난 보물이라도 찾아낸 듯 행복한 표정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지만 내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와 준 행복에너지로 나는 달라졌다. 살아온 인생의 덧칠이 아닌 새로운 인생을 펼쳐가고 싶다. 가슴 한구석 응어리진 것이 다 날아 갔노라 며 아내는 뿌듯해했다. 졸업 후 5년 동안 함께 공부한 동아리 회원들이 외조에 감사한다며 식사자리에 남편들을 초대했다. 남편들은 아내를 어떻게 외조를 했는지 자랑하는데 해준 게 없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협조는 없었으나 방해하지 않았으니 오늘 이 자리 참석 자격은 있노라 며 너스레를 떨었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진 나는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지라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나 혼자 도망온 것 같은 모양새로 생활의 모든 문제는 오롯이 아내혼자 감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학생, 중학교 고등학교 눈만 뜨면 돈이 필요한 그시기를 어떻게 넘어왔는지 지금도 알수가 없다.졸업을 한 아내는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속셈학원에서 논술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원이 딸린 작은 유치원의 공동운영을 맡게 되었다. 맞벌이 엄마들의 육아문제로 종일반 이 대세였고 오전만 운영하는 유치원은 점차 아동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국문과 출신인 아내는 어린이집 운영에 필요한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중앙대학교 교육원에 입학을 했다. 공부가 필요하면 주저 없이 시작하는 아내의 학구열이 발동된 것이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고 저녁이면 10시까지 수업을 듣는 힘든 여정이 시작되었다. 귀가 길을 돕고자 저녁이면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아내를 태워왔다. 오전 수업으로 끝나는 유치원과 달리 어린이집은 식사도 잠자리도 가능한 내부시설에 필수 규격을 맞추어야 했다. 처음 시작할 때의 약속과 달리 어려움을 겪게 된 와중에 IMF를 맞게 되었다. 자의반 타의반 운영을 맡게 된 아내는 낡은 건물에다 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임대료 조정을 요구했다. 주인은 들어 주기는 커녕 오히려 나가라고 하니 어린이집을 옮겨야 했다. 30년이 넘도록 같은 사람에게 임대료를 챙기면서 떨어진 문짝한번 고쳐준적이 없었다. 건물 주인은 낡아진 건물을 도리어 원상복구를 해놓아야 한다는 억지를 부리며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임대료가 조금은 저렴한 곳으로 시설을 갖춰 이전을 했다. 가진 돈이 없었으니 빚을 내었고 이자를 감당 하자니 점점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자와 임대료에 직원들 월급주고 나면 남는 게 없어 빚은 늘어만 갔다. 후배에게 넘기기로 했는데 건물주는 시설에 대한 권리금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 생떼를 썼다. 예상 밖의 상황에 혼란스러웠지만 이미 결정이 되어 선택의 여지가 없어 권리금보다 적은 보증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빚으로 남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게 되었다. 온전한 정리가 안 되어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더 어려운 상황으로 내 몰렸다. 일자리를 찾았지만 어린이집 교사로 청하는 곳은 있어도 그 수입으로는 감당이 안되었다. 아내 친구중에 부동산 중개사자격을 취득하여 사무실을 연이가 아내를 불렀다. 마침 건축경기가 좋을 때라 단독주택을 헐고 빌라를 지어 분양하는 건축업이 호황중 이었다. 상담을 맡아줄 직원이 필요하다니 아내를 추천했고 분양사무실에 일자리를 얻어 나가게 되었다. 인상이 좋은 평판을 받는 아내는 사람들을 편하게 대하며 금방 적응해 나갔다. 한 동 여덟 가구를 한 달여만에 완판을 하니 건축업사장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새로 짓는 현장을 오가며 수입도 차츰 나아졌으나 빚을 갚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원점으로그 무렵 500여 가구 아파트 신축현장에 전기공사를 맡아서 하게 되었다. 절반쯤 공사가 진행될 무렵 원청 건설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덩달아 부도를 맞았다. 그동안 들어간 자재비와 인건비는 물론이고 억대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부도소식이 전해지자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인부들이 집으로 몰려왔다. 난리를 치는 바람에 살고 있던 집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인건비와 자재비등을 계산하고 나니 백여만 원이 남았다. 이사는 해야해 원청 사장에게 2천만 우선 변통이라도 해주기를 청하자 그러마 약속을 했다. 남은 돈으로 방 두칸을 계약해 놓았으나 이삿날이 되어도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돈 전부인 계약금도 날아가 버렸다. 말을 잃은 아내는 눈길한번 안주고 나가 버렸다. 집은 비워 줘야하고 갈 곳 없는 이삿짐을 챙겨 보관소에다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애꿎은 살림살이를 깨버리며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한시라도 게으름을 피워본 적도 없고 힘든 일을 마다한 적도 없었다. 공짜를 바란 적도 없이 죽어라 열심히 살았는데 이건 뭐지? 정말 살고 싶지가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아내가 걱정이었다. 돈 한 푼 없이 어디에 있는지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자꾸 전화를 할 기분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한강공원에 있다기에 앞뒤가릴 것 없이 달려가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오도카니 앉아 있는 아내가 보였다. 우선은 반갑고 가슴이 아팠다. 한 달 만에 만난 아내는 차분한 어조로 당신과도 이세상도 그만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무엇 하나 풍족히 해준 것 없는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은 보여줄 수 없다. 우리 다시 해봅시다, 이보다 더 나빠지겠느냐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아내는 그 달 월급을 보증금으로 안 된다는 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지하방 두개를 얻었다. 주머니를 털어 보관소에 있는 짐을 찾아 왔다. 이사는 했으나 생활비가 없었다. 아내는 걸어서 출퇴근을 했고 점심 값으로 주는 몇 만원으로 한 달을 버티면서 우리는 할말이 없어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함께 살지 않아서였다. 우리야 이렇게 견디면 되는데 지금 아이들이 함께라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날아드는 독촉장과 하루에도 몇번씩 걸려오는 전화에 숨이 막힐 지경이나 아내는 오히려 담담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올라갈일 밖에 없지 않느냐며 어느 때 보다 씩씩했다. 아내는 젊은 시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주머니의 간곡한 권유를 못 이겨 교회에 잠깐 다녔다. 그곳을 떠나 이사를 한 뒤로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누가 뒤 꼭지를 잡아 당기는 느낌이라 했다. 교회를 가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어느 교회를 갈까 물색중이라 했다. 큰딸 내외가 성경책을 두권을 사들고 찾아왔다. 사위는 정색을 하며 무릎을 꿇고" 아버님 이제 어머님과 같이 교회에 가셔야죠"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소리다. 큰딸은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교회에서 만나 같이 성장한 청년과 결혼을 했다. 돌아온 주일날 아침 아들 내외가 집으로 왔다." 아버님 같이 가세요. 네? 아버님 "팔을 잡아끄는 며느리를 거절을 못해 어정쩡 끌려갔다. 누구보다도 교회를 비판하고 안티인 내가 교회를 가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아내는 신축한 빌라를 분양하고 나 역시 마른일 궂은일 안 가리고 일을 해 빚을 정리해갔다. 그런 와중에 자꾸만 체중이 줄어 병원에 가 검사를 받았다. 갑상선 항진증 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장 몸져눕는 것은 아니고 약물로 다스릴 수 있다니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강원도에 작은 펜션 몇동 짓는 공사를 하게 되어 아내 혼자 두고 강원도에 가게 되었다. 두어달 동안 정신없이 일을 하면서 밤이되면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가. 열심히 일을 했지만 지금 나는 빈손이다. 마른 하늘에 번개 맞듯 나를 만난 아내는 또 무엇을 위해 그리도 열심히 뛰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며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은 아내를 생각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저녁은? 묻고 나니 할 말이 없다. 나도 힘들지만 지금 누구보다 힘들 아내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고 싶은데 정작 할 말이 궁했다. 간단히 때우고 넘겼으리라 짐작하지만 목소리라도 들어야 잠이 올 것 같아 문단속 잘하라며 끊었다. 강원도에서 일을 하는중에 올해 내가 환갑 이란다. 환갑이 되도록 빈 하늘에 주먹질만 해댄 공허함으로 쓸쓸했지만 아이들게 떠밀려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어느 날 밤 아내는 한참을 끙끙대며 허우적 대다가 깨어났다. 낚시를 하는데 물고기가 어찌나 힘이 센지 아무리 당겨도 요지부동이다. 당신과 함께 당기니 딸려나와 엉덩방아를 찧으며 깨었는데 분명히 태몽이다. 아들네 아니면 둘째가 아이를 가졌나 기다리던 중 며느리가 아이를 가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아내는 꿈 얘기를 하며 아들일 것이다. 반가워 하면서도 둘째 생각에 드러내 놓고 기뻐하지도 못하는 눈치다. 세상에 다시 없는 귀한 보물 손주가 태어났고 내손으로 만든 방 씨 호적이 3대를 이었다. 두 달여의 강원도 공사를 마치고 우리는 돈을 조금 만들어 지하방을 벗어나 햇살드는 3층으로 이사를 했다. 큰 사업도 아니고 단시간에 큰 수입이 있는 일도 아닌데 빚을 갚자니 지쳐 포기해 버리고 싶은 날이 많았다. 빚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위안으로 견디는데 사는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소식이다. 이사 올 때에 주인은 사업실패로 세금이 밀려 경매가 진행 중이다. 본인이 경매에 참여하면 우선순위로 집을 지킬 것이니 걱정말라는 말을 믿고 이사를 왔다. 어이가 없었다. 참 산 넘어 산이라더니 갈수록 태산이며 정말 힘이 빠졌다. 그런데 아내는 화를 내기 보다는 주인집 아주머니도 참 딱하게 되었다며 되려 걱정을 했다.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맞은 동병상련은 이해가 되지만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건강하잖아요 아주머니 남편은 뇌경색으로 쓰러져 휠체어를 타는데 거리로 나앉으니 우리보다 훨씬 딱하지 않느냐며 혀를 찬다. 겨우 만든 보증금도 날아가고 막막한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묘수가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아내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자식들에게 얼마나 하기힘든 말인지 가슴이 저려왔다. 느닷없는 엄마의 부탁을 아이들은 말없이 들어 주어 작은 빌라를 얻어 이사를 했다. 아내는 최소한의 생활비로 견디며 그 돈부터 갚아갔다. 6월에는 초순에 내 생일이, 말일 경에 며느리 생일이 들어 있다.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데 결혼하고 10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던 둘째가 아이를 가졌다한다. 온 식구가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축하를 해주었다. 큰애도 아내도 눈물이 나온다며 애써 웃는 얼굴을 했다. 나 역시 말은 안했지만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었나 하나님 감사 합니다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아내는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각별히 몸조심해라 조바심을 내었다. 다음해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 새벽에 병원에 간 둘째는 종일 진통 끝에 늦은 밤이 되어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 했다. 우리 식구 모두에게 더 이상 바랄게 없는 행복한 명절 선물이었다. 만나도 할 말이 궁하던 사돈댁은 환한 표정으로 편하게 뵐 수가 있게 되었다. 손자 녀석은 건강하게 잘 자라 세상에 다시없는 행복한 돌잔치를 했다. 우리는 쉽게 풀리지 않는 경제적인 어려움 말고는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낡은 집이라 두해 여름을 보내고 나니 천정에서 벽을 타고 내려온 물이 방안에 흥건했다. 장마가 오기 전에 수리를 하더라도 집을 비워야 해서 또 이사를 해야 했다. 돈을 조금 더보태 주택의 1층을 얻어서 이사를 했다. 낡기는 했어도 마당에 감나무도 있고 화분도 놓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에 햇볕이 화사하게 들어와 마음까지 환해졌다. 아내와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경찰서에 일관계로 주차해둔 다른 사람의 차를 빼주다가 급발진 형태의 의문의 사고가 났다.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고를 내 본적 없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형편에는 적지않은 돈을 배상해 주어야 했다. 당장 방법이 없어 아내에게 연락을 하니 아내는 다치지 않았느냐 괜찮다. 어렵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걱정 말아라. 감당할 수 없는 큰 금액이 아니니 오히려 감사한 일이라며 나를 위로 하는 것 아닌가. 일주일 후 아내가 건네준 돈으로 정비공장에서 차를 찾아다 주고 아내를 생맥주집으로 불렀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오지랖 넓게 왜 남의 차는 빼주다 일을 만드냐 는 비난을 예상 했었다. 오늘은 맥주 한잔을 해야 되겠다하니 살다 보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란다. 당신도 안 다치고 무엇보다 사람이 안다쳐서 정말 다행이라면서. 돈도 우리가 감당할 만 하고 벌면 되는 것이라 감사하단다. 풀리지 않고 자꾸만 얽히는 것에 화가 치미는 나와 다르게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니 고맙고 미안하다. 그런 아내가 있어 오늘 나는 행복하다. 생맥주 한잔이 이렇게 맛있어 본적이 있었나 싶게 달았다. 그날 밤 나는 오랫만에 꿀잠을 잤다. 인생휴가빚을 줄여가며 하루를 감사하며 살아있는 것이 축복임을 고백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환갑을 맞게 되었고 캐나다에 있는 처제의 주선으로 캐나다를 경유한 미국여행을 가게 되었다. 부채가 남아있는 우리 형편에 과한 지출이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올까 싶어 용기를 내었다. 저녁 4시에 출발해 11시간을 비행해서 벤쿠버에 내렸다. 9월의 날씨는 여행하기 아주 좋은 날씨였다. 동서는 우리를 조경이 잘된 공원으로 데려갔다. 먼지 하나 없는 공원과 맑은 하늘이 인상적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본 조카며느리 처음 만나는 애기들과 인사를 나누고 미국여행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버스에 몸을 싣고 미국을 향해 출발 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교포와 어학연수를 왔다가 귀국을 앞둔 학생들과 함께였다. 한 시간 쯤 달려 미국 국경을 넘게 되었다. 총을 찬 국경 수비대가 보였고 손가락 열 개의 지문을 찍고 마치 범죄자 취급당하는 기분이다. 반나절만 달리면 땅끝마을인 우리와 다르게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의 스케일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농장의 규모에 주눅이 들었다. 농가 한 채가 있고 온갖 농기구에 경비행기와 끝이 보이지 않는 과수원등이 아롱다롱 소박한 우리네 농가와는 비교도 안되었다. 고속도로는 붐비지 않으며 속도표지판 외에 단속경찰이나 감시카메라가 없어도 규정 속도를 지킨다. 횡단보도에 사람하나 없어도 꼬박꼬박 신호를 지키는 운전자가 오히려 답답해 보였다. 라스베거스를 향해 꼬박 이틀을 달려 꿈의 도시에 왔다. 화면에서 보던 야경이며 분수 쇼 카지노, 약물에 풀린 눈을 꿈뻑이며 길가에 널 부려져 있는 군상들이 환락의 도시임을 보여주었다. LA에 왔으니 LA갈비를 먹어야 한다며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랜드 캐년을 돌아보며 자연속에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새삼 느꼈다. 영화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영화촬영의 묘미와 영화에 나온 배우로 분장한 사람들과 사진을 찍었다. 꿈의 놀이공원 디즈니랜드에서는 시속 300km의 자동차를 타보았는데 어찌나 빠른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공중에 달린 의자에 앉아 안경을 쓰고 가상의 세계를 체험하는 것도 디즈니랜드의 명성을 증명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할리우드에 아카데미 시상식장과 유명배우들의 손도장이 찍힌 거리를 걸으며 가이드는 우리나라 배우 이병헌의 손도장도 여기에 장식될 것이라 했다. 햄버거 두 개를 주문했다가 크기에 놀라 다음에는 한 개를 둘이 나누어 먹어도 남았다. 함께 나오는 콜라는 몇날을 두고 마셔야 될 것 같은 분량이다. 박찬호 선수가 꿈을 펼치던 야구장도 지나가는 길에 보였다. 며칠 동안 밥구경을 못한 저녁 자유시간에 식당을 찾아 나섰다. 한식과 가장 흡사한 것을 찾다가 일본식당이 보여 들어가니 주인이 한국사람 이었다. 가장 한국음식과 비슷한 것으로 주문하고 김치가 있기에 주문을 했다. 2불인데 서비스라며 한 접시를 주어 밥보다 김치를 더 많이 먹었다. 일주일 만에 먹어보는 김치는 그야말로 꿀맛 이었다. 꼭 먹어보아야 한다는 수제 햄버거를 크기에 질린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고 하나만 시켰다. 맥도날드와는 다른 신선함으로 맛있는데 작아서 더 주문을 하자니 시간이 안 되어 아쉬움을 남겨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타이어가 펑크가나 길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십여 분이면 달려오는 우리나라 보험사와는 달리 넒은 땅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살다보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가이드는 6000km를 달리는 버스투어가 평생 탈 수 있는 버스를 열흘에 다 타보는 것이라 했다.벤쿠버 동서네 집으로 돌아오자 동서는 우리를 이 곳 저곳으로 안내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횟집이며 지역의 맛 집과 관광지며 공원으로 우리에게 눈 호강을 시키려 애를 썼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관광길에 나서 빅토리아로 페리를 타고 갔다.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의 이름을 붙인 사계절 휴양도시였다. 사계절 꽃으로 가득한 브차드 가든을 돌아보는데 중국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다. 성조가 있는 말이 시끄럽기도 하지만 부딪히고 발을 밟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버린다. 가이드는 점심을 예약한 식당에 중국인들이 몰려오자 양해를 구하고 우리를 다른 곳으로 안내 했다. 벤쿠버로 돌아와 동서를 기다리는데 빨간 자동차에서 내린 고운 할머니께서 도움이 필요한지 물으셨다. 괜찮다고 하니 마트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온 할머니는 다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지 걱정 어린 눈빛을 보이신다. 약속이 되어있으니 걱정 마시라 고맙다 하니 선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 오른다. 낯선 동양인이 케리어들고 한참 서있는 모습이 불안하셨던가 보다. 친절한 미소에 가슴이 훈훈했다. 다음은 록키였다. 다시 산을 넘고 넘는 긴 여정이 이어졌다. 브레드피트가 나오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눈부신 물살과 신부의 면사포를 닮은 폭포, G7정상 회담을 치렀다는 호텔과 에메랄드빛 호수는 손을 넣으면 파란 물이 들것 같았다. 해마다 산맥의 얼음이 녹아내려 수년 안에 록키 산맥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어두운 이야기를 들었다. 산자락 중간에 산양들이 내려와 잘 보존된 숲과 맑은 하늘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들 이었다. 난생 처음 일상을 내려놓고 긴 시간을 먹고 놀아보는 꿈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돌고 돌아 찾은LH에서 짓는 아파트에 신청을 해도 번번이 떨어지다가 목감 신도시에 당첨이 되었다. 참전용사에게 주는 우선순위 혜택을 받아 서울에서 멀지 않아 선택을 하였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잡히는 모든 일을 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혼자서 많을 일을 감당했지만 손을 빌리는 인부들에게는 어느 곳보다 후한 일당을 주니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 주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 젊은 사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대전으로, 울산으로 전국을 돌면서 일을 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깁스를 한채로 일을 마치고 집에오니 아내는 어이없다며 화를 냈지만 깁스를 풀자 다리는 별문제가 없었다. 제주도를 오가며 일을 하니 아내는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3년 전 암진단을 받은 큰처남이 점점 나빠져 아내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밤이면 목 놓아 울었다. 장인어른 일찍 여의고 맏이인 처남과 아내가 장모님과 어린 동생들과의 애증어린 세월을 함께 보아온 나는 할말이 없었다. 천안에서 일을 하는 중에 처남이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이 왔다. 처남과 매부이기 전에 같은 세대로 어렵고 힘든 시간을 같이 한 동년배로 가슴이 먹먹했다. 참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는데 요령 부릴 줄도 모르고 욕심 없이 착하게 꾸역꾸역 일만 하다가 허망하게 가버렸다. 아내는 울지도 못했다. 울면 머리가 깨지듯 아프다며 장례식 내내 진통제를 먹으며 견뎠다. 처남이 떠나고 아내는 많이 힘들어했다. 맛난 음식을 먹을땐 오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길에 좋은 풍광이라도 보면 오빠도 같이라면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특히 미국여행을 함께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함께가자 했을 때 다음에, 그러나 그 다음이 영영 사라져 버렸다. 빚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집주인은 요즘 같은 세상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사는 몇 년 동안 집세를 올리지 않았다. 우리 앞에 살던 이들도 집세를 올리지 않아 마음 편하게 집을 마련할 때 까지 몇 년씩 살다가 이사를 한 것이었다. 보증금도 떼이고 낡은 집 수리비까지 물어주었던 기억이 있는 우리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다. 부모가 자식 혼수챙겨 주듯 아이들이 새집에 살림을 채워 주었다. 보금자리 카페입주가 시작되고 연말은 지내고 가려 하니 아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새집으로 가기를 권했다. 새해를 사흘 앞둔 영하의 추위 속에 50여년을 살던 서울을 떠나 이사를 했다. 새집에 가구도 모두 새로 들여 이삿짐은 단촐했다. 아이들도 달려와 평생을 떠돌던 우리의 입주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이사에 앞서 난방도 안 된 집에 새로 들이는 가구를 받고 설치하느라 떨었던 아내가 감기인지 독감인지 고열과 두통에 몸져누웠다. 새해 연휴로 병원문을 열지 않아검색해 겨우 찾아간 병원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긴줄이 늘어서 있다. 몇 시간을 기다려 의사를 보고 약을 짓느데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보통의 감기는 병원한번 갔다오면 그약을 다먹기 전에 거뜬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사온지 한달이 넘도록 새 주방에서 라면 한번을 끓여 보지 못했다. 한 달여 만에 아내가 겨우 정신을 차렸나 싶을 무렵 내가 이상이 왔다. 병원에 가도 차도가 없어 독감검사도 해보았다. 독감은 아니라는데 몸은 점점 가라 앉더니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가 운전을 못해 정신이 혼미한 채로 가까운 응급실을 찾아가니 폐렴이라며 곧바로 입원을 했다. 열흘이 넘게 입원치료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건강은 자신 있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기침을 많이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기침에 먹는 약을 주고 별다른 소리가 없어 넘기고 있는데 아내는 다른 병원을 가보라며 성화였다.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하니 의사는 당장 입원해서 시술인지 수술인지를 해야 한다며 겁을 주었다. 사진을 보여주며 흡연여부를 물어 지금은 끊은 지 10여년 되지만 몇십년을 피웠노라. 입원을 하고 수술날을 잡았다. 복강경으로 시작을 하지만 개복의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며 수술이 시작되었다. 다행이 개복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폐에 혹이 있고 한쪽은 굳어 혹과 굳어진 폐를 절제하였다. 암이 아닌지 조직검사를 하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혹여 암이라는 진단이 나올까 아내와 나는 가슴을 졸이며 일주일을 보냈다. 의사는 나쁜놈은 아니네요 하지만 간질성 폐질환이라는 만만치 않은 진단이 내려졌다. 이미 폐가 많이 망가졌고 치료약도 없는 불치병이란다. 남아있는 폐기능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숨이 차기는 하나 의사의 진단과 상관없이 다시 일상은 시작되었고 얼마 후 평소에 좋아하는 바다낚시를 따라 나섰다. 수술한지 엊그제인데 안된다는 아내에게 걱정 말라며 호기를 부렸다. 갈치낚시는 여수에 가서 배로 몇시간을 바다로 나가 밤을 새우는 중노동에 가까운 일이다. 낚시를 바다에 던져보기도 전에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그렇다고 나혼자 돌아올 수도 없는 일이라 배밑창에 들어가 견디었다. 아침에 육지에 올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열이 올라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아내는 내 이럴줄 알았다며 병원으로 나를 끌고 갔다. 일요일이니 응급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입원실이 나올때까지 이틀을 응급실에 있다가 병실로 올라갔다. 다시 폐렴이 온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염증이 잡힌다며 의사는 정말 다행이라 했다. 면역력이 떨어진 노인들은 염증이 안 잡혀 폐렴으로 죽습니다. 하며 급성폐렴은 폐가 많이 상하니 조심을 하란다. 보름동안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러 가면 의사는 매번 같은 말을 한다. 엑스레이에 보여지는 수치와 기능검사가 다르단다. 사진에 보이는 대로라면 호흡기를 달아야 되는 데 폐기능 검사는 젊은이 못지 않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믿음이 좋은 아내는 의사가 모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며 감사하단다. 힘들게 살아오면서 악한곳에 눈돌리지 않고 살아온 당신에게 상주시는 거라며 오늘도 나를 응원한다. 이룬 것 없는 빈손이라 투덜대는 나에게 세상에 홀로 떨어져 죽겠노라 달려간 전장에서 살아왔으며, 그흔한 과외없이 반듯하게 자라 제몫을 하는 삼남매 있지요. 금쪽같은 손자녀와 마누라 있는데 무얼 더 바라느냐며 핀잔이다. 당신은 성공한 사람이니 감사하라고.얼마 전 아내와 베트남을 다녀왔다. 무심결에 어찌 변했을지 가보고 싶다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서둘러 주었다. 50년 전 전쟁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지만 어디든 사람사는 것은 다를게 없었다. 그곳의 일상도 치열하게 분주하고 아이들은 해맑고 먹거리는 풍성했다. 사람 숫자와 맞먹는 오토바이의 물결이 혼란스러웠으나 그들의 삶의 원동력으로 생동감이 넘쳤다. 얼핏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그들만의 원칙이 있어 보기와는 달리 사고는 매우 드물다 한다. 회보라빛 노을이 진다. 해를 배웅하는 이별의 손짓으로 낮과 밤은 소리 없이 자리를 바꾼다. 해가 저물면 새들은 둥지를 찾아가고 사람들도 번잡한 일상을 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눈부시게 초록이 짙어가는 산자락을 바라보며 거실에 앉아 아내와 커피를 마신다. 줄지어선 가로등에 하나 둘 깜빡이는 불빛을 보며 우리집이 카페야 그치? 마주보며 웃는다. 돌아보면 질펀한 그 시간들을 정말 내발로 걸어온 것이 맞는가 싶다. 70여년의 세월속에 시렸던 물줄기가 내안에 핏줄이 되어 소곤대고 있다. 움켜쥔 물처럼 남은 게 없이 허전하나 그핏줄이 모여 언젠가는 더넓은 강물이 만들어지기를 꿈꾼다. 내손으로 만든 호적에 3대의 숨결이 이어지고 풍요속 결핍이 그어느 때보다 혹독한 지금 평범한 일상이 고맙고 감사하다. 오늘의 나를 있게해준 내눈에 영원한 영화배우 아내의 미소 속에 나는 가슴 깊이 숨겨둔 아리랑을 불러본다. 내안의 아리랑을.

2019-08-08 18:13:37

곽종상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쓰레기가 준 선물/곽종상

도시로 간 촌뜨기나는 늦둥이 외동이다. 아버지는 이름난 학자는 아니고 한문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선비였다. 소작 농사를 조금 지었으나 수확량은 남들보다 못했고, 해마다 가뭄과 홍수로 망쳐 보릿고개를 더 힘겹게 넘었다. 제법 큰 마을 구장을 하신 덕분에 겨우 입에 풀칠만 하면서 내가 중학엔 갈 수 없었다.아버지가 환갑일 때 나는 열여섯 살로 농사와 땔나무를 맡게 되었다. 논밭 갈이는 남의 손을 빌리고, 나머지 자잘한 일을 하는 것도 버거웠고, 민둥산에서 나무하기는 더 고역이었다. 3년을 견디면서, 이대로는 앞길이 너무 막막해서 아버지 승낙을 받아 혼자 도시로 나왔다. 밑천이라곤 아버지한테서 배운 명심보감과 붓글씨뿐. 그걸로 일자리를 구하려고 여러 곳을 찾았으나 왜소한 체격을 보고 모두 손사래를 쳤다. 2년을 간판집, 거울점, 제본소 등을 전전하다가 당시 인기 신문 대구지사에 들어갔다.새벽 네 시에 일어나 서울에서 기차 편으로 내려온 신문을 리어카에 싣고 와서 배달원들에게 분배하는 일을 했다. 배달원들은 신문 속에 광고지를 끼우고, 다시 간추리느라 사무실은 먼지투성이였다. 당시 신문지는 두꺼우면서 질이 낮아서 먼지가 많았다.그래도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고, 신문을 맘껏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일 년에 단 하루(1월 2일)만 놀면서도 신명나게 일했다 . 5년을 그렇게 일하다가 피로가 심하고, 식욕이 없어 밥을 제대로 못 먹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병원에 갔더니 폐결핵이 심하다며 바로 입원하라고 했다.결혼한 지 4년인데 아내는 시골에서 시부모님 모시고 살았다. 1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첫돌 지난 아기와 셋이 살던 아내는 입원 소식을 듣고 올라왔다. 생기 없이 누워있는 나를 보자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서 눈물만 흘렸다. 아기를 업고 며칠 병수발을 하다가 시골로 돌아갔다. 연로하신 시모님 때문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다시 눈물을 지우며 돌아서는 아내에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두 누님이 바느질을 하면서 사는 셋방에 같이 살았던 터라 나의 병수발도 누님이 했다. 다행히 1년 만에 완치가 되어 다시 신문사로 돌아갔다. 그새 월급이 꼬박꼬박 인편으로 전달되어 큰 도움이 되었다. 일도 않고 월급을 받는다는 건 당시로선 엄청난 혜택이라 참 고마웠다. 그 보답을 한다는 심정으로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탁한 공기 속에서 쉬는 날도 없이 장시간 일하다가는 결핵이 재발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2년 뒤 사직하고 나왔다. 밤새 사라진 면서기의 꿈퇴직금으로 열 달 사글세 점포를 얻어 간판점을 차렸으나 잘 되지 않아 빈손으로 시골로 내려갔다. 그 당시는 군사정권 때였다. 마침 같은 마을의 먼 친척 형님이 장교 출신으로 면장을 맡고 있었다. 내가 찾아가 인사를 하니 잘 왔다면서 곧 임시직원 채용이 있을 건데 해볼래? 하기에, 나는 반갑게 승낙하고 그날부터 지저분한 게시물을 깔끔히 새로 써서 붙이고, 차트도 새로 만들어 걸었다. 벌써 직원이 다 된 듯 협조를 했다. 그러나 곧 연락이 있을 거라던 채용은 두 달, 석 달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기다림에 지쳐 잠시 바람이라도 쏘인다며 60 리 거리인 성주 고모님 댁을 찾아갔다. 버스가 없어 걸어서 갔다가 하룻밤 자고 다음날 돌아오니 그 새 면서기가 딴 사람에게 넘어가버렸다. 군인들이 행정을 맡은 때라 작전명령처럼 '내일 오전 열 시까지 임용할 사람을 군청으로 보내라.'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면장이 우리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나는 엉뚱한 곳에 가 있으니 그 명령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부득이 한 마을에 사는 딴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겐 이렇게도 운이 없는가. 여러 달을 기다리다 하룻밤 나들이한 것 때문에 그 행운이 딴 사람에게 가다니...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여러 날 잠을 잘 수 없었다.이 면서기는 내 어릴 적 매우 부러워했던 꿈의 직업이었다.마을 앞 신작로에 아침마다 높다란 자전거 뒤에 도시락을 싣고 휘파람을 불면서 지나가는 모습은 마치 하늘나라 사람처럼 보였다. 그 면서기가 눈앞에 와 있다가 꿈처럼 사라졌다. 명심보감에 운이 돌아오면 가고자하는 쪽으로 바람이 불어 배가 빨리 가서 벼슬을 하고, 운수가 나쁘면 비석 탁본을 해서 몇 푼 벌려고 찾아갔는데 벼락이 그 비석을 때려 그마저 못하게 된다더니 내가 그 꼴이구나.이제 임용 계획이 없다고 한다. 면서기는 포기하고 두어 달 고민하다가 다시 대구로 혼자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글씨를 좀 예쁘게 쓴다는 것뿐이니 등사원지에 글씨를 쓰는 프린트사로 찾아갔다. 그 전 신문사에 있을 때도 가끔 쓴 경험은 있었다. 프린트 사장은 내가 쓴 걸 보고 '좀 연습을 하면 되겠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연습하여 필경사가 되었다. 3년 뒤 제법 인정받는 필경사가 되어 이제 밥벌이는 되겠다 싶어 전 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했다. 7년을 떨어져 사는 동안 아이가 셋이 되었고 어머니도 계셔서 여섯 식구가 방 두 개는 있어야 했다. 셋방살이는 아이들이 기를 펼 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또 연로하신 어머님도 계셔서 생각 끝에 아주 싼 초가를 샀다. 교회 땅 대지 14평, 부엌과 두 개의 방이 있었지만 아주 작았다. 상수도, 하수구가 없어서 뒷집에 호수로 연결하여 밤에 물을 받아서 쓰고, 쓴 물은 다시 대문 밖으로 들고 나가서 버렸다. 고지대라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500미터 떨어진 공동수도에 가서 한 시간씩 기다려 물을 받아 물지게로 지고 올 때가 많았다.네 째 아이가 태어나 일곱 식구가 되고, 맏이가 6학년이 되자 다리를 제대로 뻗고 잘 수가 없었다. 그새 아내는 온갖 부업을 했고, 나도 열심히 일해서 조금 넓은 기와집을 계약했다. 중도금을 내려고, 처남한테 빌려 주었던 돈을 받아 자전거에 싣고 오다가 그 돈을 잃어버렸다. 매사를 야무지게 하는 처남이 노끈으로 단단히 묶어 주어서 난 맘 놓고 타고 왔는데 도중에 뒤를 돌아보니 없어졌다. 얼른 왔던 길로 되돌아가며 살폈으나 신문지에 싼 돈 뭉치는 보이지 않았다. 20만원, 집값의 4분의 1이다. 정신없이 돌아와 혼자 속으로만 안고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다. 아내에게도, 처남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여기저기 아는 사람을 통해 십만 원씩 빌려 이사를 했다. 기와집이긴 해도 원래 초가에 기와를 올린 삼 칸에다 옆과 앞으로 덧붙여 방이 다섯 개였다. 우리가 세 개를 쓰고 두 개는 전세로 주었다. 맏이와 둘째에게 방 하나를 주었더니 맏이의 첫마디가 "와아 방 엄청 넓다. 운동장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워낙 비좁은 방에 살다가 조금 넓은 방이 그렇게 보였던가 보다.이사하기 전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얼음판에서 찾은 건강필경사 일은 월급제가 아니고 원지 한 장 쓰는데 얼마라는 단가에 따라 돈을 받는다. 일은 연말연시 한겨울에 가장 바쁜데 난 겨울이면 감기로 앓아눕는 날이 많았다.일하는 날보다 더 많았다. 원래 허약체질인데다 바쁜 일이 많아서 밤샘 일을 자주 하느라 건강이 더 나빠졌다. 밤일을 해도 저녁 먹는 것 외엔 아무 혜택이 없으면서 무리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허약하니 추위도 더 심하게 느껴 겨울이 무척 싫었다. 겨울이 없는 나라로 가서 살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1971년 1월 2일, 공군사관생도인 생질이 "날씨가 뭐 이래, 겨울이면 겨울답게 추워야지, 미지근하게..." 하면서 들어왔다. 여러 날 매섭게 춥다가 따뜻해져서 나는 참 좋은데 어찌 저런 엉뚱한 소리를 하나? 하면서 쳐다보니 그는 어깨에 스케이트를 맨 채 "삼촌 스케이트 타러 갑시다." 한다.여남은 살 때, 장작을 다듬어 철사를 박아 만든 스케이트를 신고 무논에서 신나게 탔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감기로 누워 있다가 겨우 생기를 찾은 상태에서 따라나설 용기는 나지 않았다. "삼촌은 경험이 있어 금방 탈 수 있습니다. 같이 가십시다." 손을 잡고 끄는 바람에 따라나섰다. 수성못은 마치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북적였다.발에 맞는 스케이트를 빌려 주어 신고, 시키는 대로 무릎을 꾸부리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했다. 처음엔 좀 되더니 5분도 안 돼서 발목이 꼬부라지며 아팠다. 나와서 쉬다가 또 걷다가 여러 번 해도 진전은 없고 발목이 너무 아파서 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벗어 주고 나왔다.그 다음날 또 가자고 온 생질에게 "난 안 되겠더라. 말목이 아파서..." 하니까 "처음엔 다 그래요. 오늘은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따라 나갔으나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겨우 한 시간을 씨름하다 나왔다. 사흘째는 조금씩 앞으로 나가더니 나흘째는 제법 솔솔 미끄러져 나갔다. 신이 났다.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스케이트를 벗어 주고는 돌아와 당장 중고품 스케이트를 샀다.닷새째 날, 생질은 휴가가 끝나 돌아가고 혼자 일찍 나섰다. 오늘은 내 스케이트를 신고 씽씽 신나게 달려보리라. 기대에 부풀어 수성못에 도착하니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며칠 날씨가 따뜻해서 얼음이 녹아 위험하다는 거였다. 실망이 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날씨가 왜 따뜻해져서 이렇게 실망을 시킬까. 이제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 되겠네. (당시엔 실내스케이트장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 스스로 놀랐다. 그토록 추위가 싫어서 겨울 없는 나라로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가 겨우 닷새 만에 겨울을 기다리다니... 이렇게 쉽게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달라진 건 그뿐이 아니었다. 밥맛이 없어서 늘 반찬 투정을 했고, 내가 청했던 반찬을 만들어 주어도 두어 술 뜨고는 못 먹겠다고 수저를 놓았는데, 밥맛이 좋아져서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리고 춥다고 움츠리기만 했다가 가슴을 펴고 나서게 됐다. 운동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아침 한 시간씩 겨우 닷새 만에 이렇게 달라지다니.이렇게 운동이 좋은 걸 알았으니, 겨울만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다른 운동을 해야지. 배드민턴을 치기로 했다. 빠듯한 형편에 새 라켓은 못 사고 중고품을 사서 아이들과 아내와 아침마다 가까이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쳤다. 온 가족이 함께 노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아침밥 짓고, 도시락 준비하기도 바쁜 아내지만 골골거리던 남편이 생기가 돌자 신이 나서 잠깐씩이나마 같이 어울렸다.그렇게 봄, 여름,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왔다. 예년 같으면 벌써 두세 번 감기로 누웠을 건데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가 오고 수성못이 디시 얼었다. 씽씽 얼음판을 달리니 신바람이 났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모두 스케이트를 사서 같이 손을 잡고 즐겁게 놀았다. 일 년 사이, 스케이트도 발목이 꼬부라지지 않는 신형이 나와서 아이들은 쉽게 배웠다. 엄청 구두쇠로 살았지만 운동하는 데 쓰는 돈은 아끼지 않기로 했다.봄과 가을엔 친구들 가족과 어울려 등산도 하고, 여름방학엔 바다나 계곡으로 가서 민박을 하며 놀다 왔다. 그때만 해도 가족 피서가 드물었던지 아이들이 방학을 끝내고 학교에서 놀러갔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니 '와아 참 재미있었겠네.' 하며 부러워하더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지 못해서 군것질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을 건데 그걸로 위로가 좀 되었던 것 같다.상차림 없이 제문만 읽다.앞에서 돈 20만원을 잃어버리고 빚을 내어 겨우 이사를 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 무렵 장인이 돌아가시고 소상(1주기)을 맞았다. 사위로서 당연히 제수를 푸짐하게 차려놓고, 유세차... 오호통재. 라는 제문을 읽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장인의 친구와 조카, 큰사위, 손서까지 제수를 차려놓고 순 한문으로 지은 제문을 읽었지만 나는 앞 사람이 차린 제수를 그냥 둔 채 한글로 쓴 제문을 읽었다."병부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고기와 떡과 온갖 과일을 그득하게 차린 상을 세 번, 네 번 받으시니 흡족하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치 않으시리라 짐작됩니다. 살아계실 때를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병부님께서는 아들이나 딸, 또는 인척 집에 가셔도 융숭한 대접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룻밤 주무시라고 권해도 집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다고 핑계를 대시며 기어이 돌아가시곤 했습니다. 그건 나 때문에 별난 반찬을 장만하느라 수고가 많고 또 돈을 쓰고 하는 것이 마음에 편치 않아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토록 자녀들이나 인척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오신 병부님이 돌아가셨다고 그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압니다. 오늘 소상이라고 이렇게 차리고 또 차리고 하는 건 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병부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것도 차리지 않고 평소 말씀하신 교훈과 정담을 되새겨 보는 걸로 제문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그러고 평소 저에게 말씀하신 것과 앞으로 그 훈계에 따라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면서 끝냈다. 읽기가 끝나자 연세 높은 처남이"저건 예수쟁이들이 하는 거 아닌가?" 하며 못마땅한 듯 나를 쳐다봤다.내가 그렇게 당돌한 짓을 하는 걸 아내는 그냥 따르면서 반대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오래지 않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 당시 형편으로 빚을 내어 상을 차리는 것도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그 2년 뒤 어느 신문에서 생활합리화 수기를 공모하기에 이 이야기를 써 보냈더니 가작에 뽑혔다. '후회 없는 구두쇠'란 제목으로 신문 한 면을 다 차지하는 장문의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로부터 나는 별나게 사는 사람으로 낙인이 되었다. 여남은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할 때여서 그 신문을 보고는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했다"와아 이렇게 신문에 크게 나고 상금도 받게 됐으니 한 턱 단단히 내야겠네."그러자 옆에서 신문을 다 읽은 사람이 말했다."여기 이 신문을 읽어보고 그런 말 하이소. 우리하고는 영 다르게 살고 있는 사람인데."하자 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그 당시 같이 일하는 필경사의 한 달 수입은 6만원 안팎이었다. 그 6만원 중에서 혼자의 용돈으로 3만원을 쓰고 나머지 3만원만 집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출퇴근하는 버스비, 나와서 커피 한 잔, 그땐 믹서커피가 없었고 다방에서 아가씨가 배달해 온 것을 마셨다. 점심도 배달로 시켜 먹고 또 커피, 그리고 담배와 저녁에 술 한 잔, 밤일이 늦을 땐 택시로 귀가하면 3만원으로도 빠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모두 낭비였다. 좀 일찍 집을 나서서 걷고, 커피 안 마시고, 점심은 도시락 싸와서 먹고, 퇴근도 걸어서 가면 된다. 그 여러 사람 중에서 나 혼자만 그렇게 별나게 사니 스스로 왕따가 됐지만 외롭진 않았다. 옆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자기가 할 일만 하면 되는 게 필경사 일이기에 가능했다.그렇게 구두쇠로 살면서 빚졌던 20만원을 갚는데 2년이 걸렸고,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었다. 만일 그 20만원 잃어버린 사건이 없었다면 그토록 내핍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이들 넷 공부를 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으로 공부하고, 투고하고초등 4학년 때 글짓기 시간에 내가 쓴 글을 선생님이 칭찬해 주신 게 떠올라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신문을 맘껏 읽을 수 있는 신문사 근무 덕분에 사설,평론 등을 모조리 읽으며 공부로 삼았다. 당시 신문은 한자가 대부분이었지만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한테서 명심보감을 배운 덕분이었다. 그러다 글을 써서 신문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쓴 걸 보니 나도 쓰면 되겠다 싶어 시작했으나 좀체 실리지 않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써 보냈다. 1년 가까이 노력한 끝에 드디어 실렸다. 제법 긴 글이 이름과 함께 신문에 나오자 하늘에나 오른 듯 뿌듯했다. 그 뒤로도 계속 보냈다. 대구 지방지엔 쉽게 실려서 다음엔 중앙지로 도전했다. 허탕을 많이 치다가 실리게 되었다. 이 투고는 나의 즐거운 취미생활이 되었다.여행을 가거나 등산을 가거나 또 신문을 읽다가도 글감을 찾아 꾸준히 투고를 했다.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보니 주변에 쓰레기가 엉망으로 쌓여있었다. 파리가 득실거리고 냄새도 났다. 이름난 국립공원을 어찌 이렇게 관리하고 있는가. 입장료는 꼬박꼬박 받으면서 어디에 다 쓰는가.'라는 글이 실리고, 얼마 뒤 국립공원 경상남도지부에서 편지가 왔다. '귀하의 글을 보고 O월 O일, 헬리콥터로 쓰레기를 다 치웠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후련한 반응도 있었다. 더러는 비판을 당한 쪽 사람이 와서 '당신이 신문에 쓴 건 사실과 다르니 사과 글을 다시 써 보내시오. 그러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소.' 덩치가 큰 장정 두 사람이 와서 위협하기도 했다. 나는 내성적이고 소심하여 남 앞에서 말을 잘 못했고, 싸우는 사람 옆에만 있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며 겁이 났다. 그러나 글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나면 속이 후련해진다. 거짓말은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위협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맘대로 하시오. 하며 돌려보냈다.투고로 가장 보람을 느낀 건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잘못된 걸 고친 것이다. 맏이가 고교에 입학하여 새 교과서를 받아 왔기에 잠시 펼쳐 보다가 '세시풍속의 의미'라는 제목에 마음이 끌려 읽었다. '태음력은 조석간만과 일치하고 농사력에도 편리하며 노인들의 계절감에도 맞아 지금도 농어촌에서는 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음력이 조석간만과 일치한다는 말은 맞지만 농사력에 편리하고 노인들의 계절감에 맞다. 고 한 것은 틀린다. 이 글을 쓴 사람은 24절기를 음력으로 알고 쓴 게 분명했다. 음력에 따라 농사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노인들의 계절감이란 것도 24절기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력을 쓰기 전부터 절기가 있어서 음력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또 농촌 대부분의 가정에는 ㅇㅇ년 음력절기표(절후표)를 벽에 붙여 놓고 농사에 활용했다. 절기표는 입춘이 음력으로 섣달이나 정월 초순, 하순에도 있기 때문에 꼭 필요했다. 그 날짜를 음력으로 기록한 표라는 말이지 절기 자체가 음력이란 말이 아니다. 입춘이 양력으로는 해마다 2월 4일이고, 하지는 6월 22일, 동지는 12월 22일이다. 간혹 하루 늦을 때가 있을 뿐이다. 또 하지는 낮이 가장 길고, 동지는 밤이 가장 길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 절기가 음력이라고 학교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었다. 이걸 바로잡는 건 내 힘으로 어렵겠다 싶어 국어학자 이숭녕 박사께 편지를 냈더니 답장이 왔다. "귀하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말만 있고 어떤 조처를 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신문에 투고를 했으나 실어주지 않았다. 원고를 들고 신문사로 찾아가 설명을 하니 그제야 수긍하고 특단으로 실어주었다. 문교부에도 편지를 냈더니 고치겠다는 회신이 왔고, 2년 뒤(1980) 고친 교과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국어사전(민중서림)에 24절기는 음력이라고 되어 있다. 최근에 다시 신문을 통해 고치라고 했다.이렇게 신문을 통해 꾸준히 공부를 하고, 투고를 하면서, 비록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무식은 면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로 신문논술대회에 응모하여 동상을 받았다. 가족회의와 가족신문좀 넓은 집으로 이사 온 뒤 토요일 저녁마다 가족회의를 했다. 맏이가 중 1, 둘째가 초등 5학년, 셋째가 3학년, 막내는 입학 전이었다. 각자 하고픈 이야기를 하라고 했더니 맏이는 몇 마디 하는데 둘째는 말을 않고 있기에 아무 꺼나 얘기해 보라고 두어 번 재촉을 하자 앙 울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데 자꾸 하라니까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 다음부터는 할 말이 있는 사람만 하게하고 오락을 많이 했다. 쉽고 시시한 거지만 하다 보니 웃음이 터지고 재미있었다. 회의록도 만들어 기록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다시 보니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이 보여서 좋았다. 십년 넘게 계속하다 보니 처음에 말을 못해 울었던 아이가 넷 중에서 가장 말을 잘하고 웃기는 소리도 잘했다. 아이들에게 용돈도 주지 못하고 지독한 내핍생활을 하면서도 즐거움이 있었고 또 가족신문을 만들자는 의논을 했다.맏이가 군대에서 제대하여 복학했고, 동생들 셋이 중고생이니 가능하리라 싶었다. 맏이와 둘째는 좋다고 하고, 딸 둘은 주저하면서도 따르겠다고 했다. 매월 한 번씩 내기로 하고 그 이름을 뭐라고 할까? 이런 저런 말이 나오다가 "들국화가 어떨까? 이건 우리 부부 모임에서 남자들은 기린, 사슴, 낙타 등 짐승 이름을 따고, 여성은 꽃 이름을 정해서 불렀는데 엄마는 들국화였다. 들국화는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봄, 여름을 다 보내고 늦가을 서리가 내릴 때 피면서 향기가 좋고, 아주 청초하다, 모든 꽃들이 다 피어도 묵묵히 참고 있다가 늦게야 홀로 길가에나 밭 언덕에 다소곳이 피는 꽃, 그 정신도 본받을 만하지 않을까." 그러자 모두 좋다고 했다.1986년 9월, 첫 호가 나왔다. 8절지를 접어서 4페이지로, '들국화' 라는 이름을 가운데 넣고, 한쪽에는 금언이나 짤막한 좋은 글 하나를, 또 한쪽에는 가훈과 우리 주소,전화를 넣었다. 각자 하고픈 이야기를 자필로 쓰고, 그림을 잘 그리는 맏이가 네 칸짜리 만화도 그렸다. 만화 제목은 '와카노'라 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또는 왜 그런 짓을 하느냐의 경상도 방언이다. 또 한 쪽엔 '호롱불'이란 제목으로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 살았던 생활 모습이나 풍습, 예절 등을 내가 담당했다. 마지막 장엔 각자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줄여서 적었다.맏이와 둘째는 글 쓰는 솜씨가 제법 있어서 쉽게 썼고, 세 째와 막내딸은 써 본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제때 써 내는 데 힘겨워했다. 아내는 초등 3학년 중퇴여서 한글을 쓰긴 하지만 문법이 너무 틀려서 내가 다시 고쳐 썼다. 엄마 글씨를 그대로 올리자고 맏이가 주장했지만 이건 남들이 볼 수도 있는 거니까... 하면서 대필로 썼다. 먼 훗날 다시 보니 고쳐 쓴 것이 잘못이었구나 싶었다. 말이 어색하고 문법엔 맞지 않아도 그냥 자필로 쓴 걸 그대로 실을 걸, 그게 그 사람의 참모습인데... 싶었다.한 달에 한 번 내기로 약속 했지만 그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얼마간 격월로 내다가, 또 세 달 만에 내는 걸로 여러 해를 했다. 경력이 쌓일수록 글 솜씨도 늘어서 처음 네 페이지로 하다가 여섯 페이지, 여덟 페이지로 늘어났다. 맏이와 둘째가 결혼을 하여 새 가족이 된 며느리도 참여했고 , 둘째와 세 째도 결혼하니 더욱 지면도 늘어났다. 새 며느리는 좀 더 좋은 글을 써 보겠다고 글쓰기에 도움을 주는 책도 사서 읽고 있다는 말에 고맙다고 칭찬을 했다. 손녀가 나서 자라 서툰 글씨지만 같이 싣게 되니 더욱 뿌듯했다. 맏이 가족이 미국으로 간 뒤에도 꾸준히 계속되어 16년을 내다가 컴퓨터 이 메일이 시작되면서 거의 매일 주고받게 되자 중단하고 말았다.신문을 만들면서 맘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기도 하고 불편한 점을 지적하여 고치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은, 큰딸이 아이 셋을 기르며 정신없는 날만 보내고 있다가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며칠만 쉬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렸다. 이건 좀 심각한 문제다 싶어 도와 줄 방법을 찾다가 아이들 모두를 합숙하기로 했다. 이건 참 좋은 효과를 얻어 좀 자상하게 따로 쓰기로 한다.아이들 넷을 어렵게 키우면서도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그런 소소한 것들이 가족신문에 담겨져 있어 가끔 새로 들추어 보면 뿌듯하다. 또 손자 손녀들이 태어나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최근엔 두 아기의 엄마가 된 손녀가 가족신문을 다시 만들자고 건의했다. 모두에게 의사를 물으니 찬성이라 다시 만들기로 했다. 17년 만에 들국화가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부푼다. 손자 손녀들의 합숙앞에서 잠간 얘기했던 아이들 합숙 얘기를 써 본다."너무 번잡스러운 나날에 정신이 없다. 매일 전쟁을 하는 것 같다. 방과 거실이 난장판이라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좀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그때뿐이다.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자니 마음 안정이 안 된다. 어디 조용한 곳에 혼자 가서 며칠만 쉬었으면 좋겠다."큰딸이 가족신문에 쓴 글의 일부다.그는 중학생일 때부터 제 속옷을 스스로 빨아 입었고, 감기나 몸살이 나도 잘 이겨내며 학교에 갔다. 자상하지 못한 할머니와 동생과 같은 방을 쓰면서 불편한 게 많았지만 말없이 잘 지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청 추운 부엌에서 어른처럼 엄마를 도왔다. 그런 딸이 이런 글을 쓴 걸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구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결혼하여 딸 둘을 낳고 그만 낳겠다고 했는데 아내가 권했다."하나만 더 낳아라. 너는 4대째 장손이라 너희 시부모님이 아들을 무척 기다리고 계실 거다." 그러자 딸은 "시댁에서는 그런 말씀 안 하시던데..." 했다."그건 점잖은 분들이라 말은 않고 계시는 거지, 속으로는 엄청 기다리고 계실 거다."아내가 여러 번 권해서 하나를 더 낳은 것이 아들이었다. 그 뒤 명절에 내려가니 시부모님이 무척 좋아하시며 고맙다는 말까지 하시더라고 했다.그렇게 세 아이를 낳은 것은 우리의 권고 때문이고, 지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고생하고 있는 것도 우리 때문이다. 어떻게든 도와야겠다고 궁리를 했다. 우리가 올라가서 좀 도와줄까? 하다가 그건 별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반찬 걱정만 더 하게 한다 싶었다. 가장 번잡스런 막내만 데려와서 한 달쯤 봐 줄까? 하다가 '아예 손주들 모두를 모아서 같이 놀게 하면 어떨까?' 하니 아내와 딸이 그건 너무 벅찬 일이라며 반대했다.아이 하나, 둘 보는 것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닌데 여덟을 한데 모아 돌본다는 건 너무 힘겨운 일이란다. "일단 해 보고, 너무 힘에 겨우면 되돌아가면 되지. 미리 겁부터 낼 일은 아니다."하면서 내가 고집을 부렸다. 마침 여름 방학 초기라 당장 올라갔다. 서울 도봉구에 사는 손녀 손자를 데리고 수원역으로 갈 테니 너희도 아이를 데리고 나오라고 딸들에게 전화를 했다. 큰딸은 수원에 살아서 셋을 데리고 나왔고, 작은 딸은 용인 수지에서 하나를 데리고 왔다."아버지 혼자 아이들 여섯을 세 시간 동안 감당하시겠습니까?"걱정을 하면서 인계하고 돌아갔다.완행열차 무궁화, 의자를 돌려 여섯을 마주보도록 앉혀놓으니 조잘조잘 얘기하며 잘 놀았다. 나는 옆 자리에 앉아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조금 말소리가 커지면 다른 손님들께 방해가 된다면서 조용조용 얘기하라고 했다. 옆자리의 손님들이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아이들이 온다는 소식에 작은 아들네 남매도 와서 여덟이 다 모였다. 맨 위가 중 2,막내는 네 살이었다. 한옥 대청마루에 모두를 앉혀놓고"자. 여기는 아파트와 달라서 걸음을 조심할 필요도 없고, 큰소리를 질러도 괜찮다.이웃집에도 미리 얘기해 놓았으니 맘껏 떠들고 뛰면서 놀아라."그 말이 떨어지자. '와! 신난다.' 하면서 모두 일어나 일부러 마루를 쿵쾅 쿵쾅 구르며 괴성을 지른다. 마치 야외로 놀러 나온 듯 신이 나서 뛰며 논다. 그러다가 키가 큰 아이는 맨 앞에 서고 차츰 작은 아이가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은 얹고 열차처럼 만들어 마루로 큰방, 작은방으로 돌며 논다. 마음이 놓였다. 저렇게 신이 나서 노는데 며칠은 수월하게 지나갈 것 같았다.더위가 심한 날은 큰 물통에 물을 채워 둘씩 셋씩 들어가 첨벙거리며 놀고, 좀 시원한 날은 놀이터에 가서 땅따먹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했다. 하루는 앞산 골짜기로 올라가 개울물에서 놀고, 나무 그늘에서도 놀았다. 또 모두가 둘러앉아 만두를 만들었다. 만들면서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붕어빵, 국화빵, 거북이, 올챙이 모양을 만들면서 서로 자기가 만든 게 더 예쁘다며 이건 내가 먹을 거라며 따로 모았다. 집에서는 밥을 잘 먹지 않아 애를 먹이던 아이가 옆에서 "와 이거 맛있다." 하면서 먹으니 덩달아 잘 먹고. 봉지에 든 짜장면을 감자와 돼지고기를 넣어서 끓였더니 "와 할아버지 짜장면 최고예요." 하며 잘 먹었다. 간식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먹었다. 아이들이 많아서 어려운 게 아니라 저희들 스스로 언니, 오빠 하면서 서로 챙기며 어울리니 어른들은 할 일이 없었다.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뿐이었다.어쩌다 한 아이가 넘어져 울거나 토라져 있으면 달래다가, "너는 혼자 집에 갈래. 데려다 줄까?" 하면 안 간다며 울음을 뚝 그쳤다.당초 예정은 3. 4일이었는데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그새 아이들이 없는 집에서 조용해진 엄마들은 처음엔 애들이 애를 먹이지나 않는지 걱정하는 전화를 하더니 잘 논다는 소리에 맘을 놓고 혼자 여행을 온 것처럼 좋다고 했고, 사나흘이 되자 애들이 보고 싶다면서 언제 오느냐고 묻는다. 자꾸 더 놀겠다는 걸 다음 겨울 방학 때 다시 모여서 놀자고 약속을 하고 8일 만에 돌아갔다. 약속한 대로 그 해 겨울방학에 다시 만났고, 그 다음 방학마다 계속되어 7년이나 이어졌다.처음엔 아이들 등살에 너무 지친 엄마를 며칠이라도 조용히 쉬게 하려고 시작한 건데 거기서 얻은 게 엄청 많았다. 자주 만나지 못할 사촌들이 여러 날 함께 먹고, 자고 놀면서 정이 듬뿍 들었고, 그 속에서 저희들끼리 지켜야할 질서도 배웠고, 엄마 아빠와의 정도 새롭게 느끼는 것 같았다. 또 집에서는 형제끼리 싸우기도 했지만 여럿 속에서 놀면서 형제간의 정을 새삼 느끼며 보듬어 주고 달래 주는 정도 생겼다. 이 합숙에 우리 부부는 큰 힘 들이지 않고 모처럼 사람 사는 재미를 맘껏 누렸고 정도 많이 쌓았다. 이렇게 좋은 걸 딴 사람들도 해 보라고 친지들에게 권하고, 신문을 통해 알리기도 했다. 아내의 우울증을 봉사로.이렇게 내 딴엔 제법 신이 나서 활발하게 살고 있는데 둘째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날.아내가 같이 갔다가 강당에 가득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여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듯 가슴이 덜컹했다. 이건 우울증이 심한 상태구나. 그 전부터 우울증이 조금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중한 상태인 줄은 몰랐다. 이대로 그냥 있어선 안 되겠다 싶어 고민 끝에 부업으로 하고 있는 바느질을 그만두게 했다.아내는, '당신 혼자 수입으로는 네 아이 공부시키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몇 해만 더 하다가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내는 집에서 온갖 부업을 해 왔다. 밤 깎기, 땅콩 까기,마늘 까기, 홀치기, 편물 뒷손질 등을 하다가 몇 해 전부터는 큰시장(서문시장) 한복점의 저고리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두 누님이 비좁은 우리 집에 같이 살면서 바느질을 할 때 아내가 거들면서 배웠던 것이다. 누님들이 따로 살림을 나간 뒤 혼자 하게 되었다. 연로하신 어머님 시중들면서 아이들 넷과 친정 질녀, 조카도 같이 데리고 있으면서 바느질을 하자니 밤늦도록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다. 그런 속에서 답답함도 많았고, 내가 오랜 기간 골골거리며 앓고 있어서 늘 불안했던 게 더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당시 맏이가 중학교 3학년, 둘째는 중 1, 셋째는 초등 5학년, 막내는 2학년이었다.이제 겨우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였지만 나는 단호히 만류하여 바느질을 그만두게 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더 큰 어려움이 닥칠 게 번하니 그러기 전에 어떻게든 조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이제 내가 건강하니 어쨌든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신 건강부터 찾아야한다고 하자 아내도 따르기로 했다. 단골 한복점에 가서 그 얘기를 하자. 우리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면서, "딴 집의 일을 하려고 그러는 거지요. 우리가 싹을 더 올려 줄 터이니 일을 계속해 주이소." 통사정을 하더란다. '그건 두고 보면 알 겁니다.' 하면서 돌아왔다고 했다.다음날부터 봉사단에 나가도록 했다. 마침 친정 쪽 언니가 뇌성마비장애인 봉사를 하는 상록봉사단 단장으로 있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은 여느 장애보다도 가장 심한 편이다. 말을 제대로 못하고, 손발이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인다.말 한마디 하는 데도 오만상을 찡그리며 손발을 뒤틀면서 겨우 한마디씩 한다. 그래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말을 겨우 한다. 그들에게 밥을 먹여 주기도 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도와주고, 휠체어를 밀며 나들이도 같이 했다, 당시만 해도 승강기 시설이 다 되어 있지 않아서 2층, 3층 계단을 만나면 업고 올라가야만 했다. 여름엔 바닷가로 가서 같이 놀았다. 생전 처음 본 바닷물에서 얼마나 신이 났던지 괴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걸 보자 힘은 들어도 마음이 뿌듯하더라고 했다. 또 고아원, 양로원, 교도소 등도 방문하면서 여러 가지 봉사를 했다.또 봉사단 옆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 주인과 의논하여 무료예식장을 운영했다. 거기서 무료로 결혼식을 하고, 사진 값도 싸게 하고 하객들에게 식사 대접하는 돈만 받아서 운영비로 썼다. 그 일이 매우 번거롭긴 했지만 아내가 힘든 일 대부분을 담당했다. 아내는 그런 일하는 걸 겁내지 않았다. 봉제사 접빈객(奉祭祀接賓客)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사는 집에서 자라, 시집도 종갓집으로 가고 싶어 했단다. 손님 대접하는 걸 겁내지 않고 즐겁게 생각했으니 그런 봉사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장애인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 결혼을 돕는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우리 집의 소소한 걱정은 덜하게 되었다. 그렇게 십여 년을 계속하면서 대구시장 상, 복지부 장관상도 받고, 우울증도 많이 좋아졌다. 꽹과리로 숫기를 찾다.난 어릴 때 숫기가 너무 없었다. 아버지가 백여 호 되는 마을 구장(지금의 이장)을 오래 하시어 아는 분이 많은데 그런 어른을 만나도 나는 부끄러워서 인사를 못했다. 늦둥이 외아들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나를 보는 사람마다"어 구장이구나. 학교 갔다 오나?" "야아 너 어디 가노? 아부지 심부름 가나?" 하면서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도망가곤 했다. 인사하는 게 그토록 부끄럽고 두렵기도 했다. 저만치 아는 어른이 맞은편에서 오면 옆길로 내려가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누는 척하고, 뭘 유심히 보고 있는 척하면서 피했다. 집으로 찾아오신 어른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고 딴 짓만 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한테서 골백번도 더 들은 말, "인사란 사람 인(人)자, 일 사(事)자, 사람의 일 중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아는 어른을 보면 꼭 인사를 하도록 해라."그래도 고쳐지지 않았다.아버지는 성격이 활달하고 말씀도 시원시원 잘 하셨다. 어디 어떤 모임에서도 여러 사람들을 잘 웃게 하고, 구수한 이야기도 잘 하셨다. 한 방 그득한 사람들이 밤늦도록 놀면서도 아버지 이야기에 빠져 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말이 너무 많다고 싫어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이런 소심하고 숫기 없는 성격은 장가를 가고, 군대 생활을 하면서도 그대로여서 별명이 색시로 통했다. 글씨를 좀 예쁘게 쓴 덕분에 중대본부 교육계를 담당했는데. 제대를 하면서 중대본부 사람들이 내게 써 준 추억담에 색시란 말이 많이 나왔다. 특히 부관은 '그런 소심한 성격으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 건지 걱정된다. 좀 대담해지도록 노력하라'는 충고까지 해 주었다.제대 후 직업은 앞에서 말했듯이 필경사였다. 사람을 많이 대하는 게 아니고 맡은 원고를 보고 필경만 하면 되는 거라. 성격하고는 상관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초면의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여성과 대면을 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까지 더듬거리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웅변대회에 나가 보기도 하고, 대화법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어보기도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꽹과리 개인지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꽹과리는 내가 어릴 때 마을 어른들이 놀다가 쉬는 사이에 흉내를 내 봤는데 잘 친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남아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었다. 6개월 열심히 배워서 웬만큼 칠 수 있게 됐다. 얼마 뒤 마을 자치센터 프로그램에서 풍물단원을 모집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아내와 같이 신청했다.지도하는 선생이 내가 치는 걸 보고 꽹과리를 맡게 하고, 아내는 장구를 치게 했다. 스무 사람 중 남자는 나와 두 사람뿐이고 모두 여성이었다. 꽹과리는 항상 앞장서서 이끌어야 하니 없는 신명도 우쭐거리며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부끄럼이 차츰 사라지고 신명나게 놀 수 있었다.연말이 되면 자치프로그램 경연대회가 있어 출전했다. 우리는 '굿놀이'라는 이름으로 나갔다. 나는 꽹과리로 앞에서 이끌고 아내는 무당이 되어 춤을 추면서 복을 비는 역할을 맡아 열심히 연습했다. 신명나게 노는 게 연습이라 날마다 즐거웠다. 경연대회는 널찍한 강당에서 많은 청중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으나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신나게 놀아 우수상을 받았다. 그 다음 해는 아내가 심청이 역할을 맡아서 했고, 또 각설이 놀이도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나의 숫기를 살려보려고 배운 꽹과리 덕분에 부부가 같이 무대에 나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니 신이 났고, 좋은 취미생활이 되었다. 집에서 살림만 하고 부업으로 바느질만 했던 아내가 어디서 그런 끼가 숨어 있었든지. 자랄 때는 엄한 아버지와 오라버니 밑에서 기를 펴지 못했고, 노래 부르는 것조차 용납이 안 되었다고 했는데, 나보다는 훨씬 신명나게 놀아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뿐만 아니라 아내는 여러 곳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힘든 일을 앞장서 한다. 절에 가서도, 공양주를 돕고, 배식도 거들며, 동지 팥죽은 이십 년 넘게 도맡아 끓였다. 그리고 친정 화수계에서 해마다 여행을 가면 차에서부터 모든 치다꺼리를 하면서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웃기고, 숙소에 가서도 모두가 함께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고 한다. 한 번은 너무 짓궂은 장난을 하자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는데 한 사람은 너무 놀라서 잠시 기절을 하는 소동이 벌어져 청심환을 먹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이 여러 가지 효과가 조그마한 꽹과리 덕분이라 생각하니, 작은 일이라도 하고픈 걸 찾아서 취미를 잘 살리는 것도 삶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걷는 여행의 즐거움2000년 봄 대구에서 광주까지 500리 걷는 행사를 노인복지관 주관으로 한다기에 참가했다. 그 재미를 알고, 그해 가을엔 해남에서 임진각까지 1,300리 걷기에 아내와 같이 참여했다. 당시 아내는 무릎이 아파서 한의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퇴행성관절염이라며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라고 하더란다. 겁을 내며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걷다가 안 되면 차가 따라 오니 타면 된다.'면서 같이 나섰다. 7- 8일까지는 아픈 것을 참으며 힘겹게 걷다가 차츰 나아져서 후반엔 신이 나서 우쭐우쭐 춤을 추며 걸었다. 18일 완주를 하고 임진각에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니 나도 아내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걷기 행사는 노인복지관 주관이라 공짜로 했는데, 다음 해 봄, 광주에서 대구로 오는 걸 한 번 더 하고는 끝났다. 참 아쉬웠다.이제 남이 차려주는 밥상만 기다릴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차려서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친구 둘을 설득하여 나섰다. 열차로 포항에 가서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점심은 길가에서 지어 먹고 호미곶까지 가서 민박집으로 들어가 일박하고 다음날 일찍부터 걸었다. 사흘을 걸어 울산에 도착하니 다리는 좀 아팠지만 기분은 참 좋았다. 복지관 주관으로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보다 더 자유롭고 재미있었다. 자신이 생겼다. 다음 해 봄엔 세 친구를 더 부추겨 부부가 함께 12명이 나셨다. 지난번 셋이 걸었던 울산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걸었다. 이번엔 일정한 목표도 없이 쉬엄쉬엄 걷기로 했다. 걷다가 쉬다가 점심때가 되면 갯바위 위에서 버너와 코펠로 밥을 짓고 된장을 끓여 각자 갖고 온 밑반찬을 신문지 위에 늘어놓고 둘러앉아 먹었다."와아 밥맛이 우째 이래 좋노.""그래, 나는 집에서는 밥맛이 없어서 반 그릇도 못 먹는데 여기서는 배도 더 먹는다."모두가 같은 소리를 하며 맛있게 먹고는 적당히 누른 밥솥에 숭늉을 끓여 훌훌 마시면서 참 오래 만에 배부르게 먹었다며 좋아한다.까만 갯바위로 파도가 쳐서 하얀 옥구슬을 수만 개씩 공중으로 날리고, 그 위로 갈매기는 끼룩끼룩 노래하며 춤을 춘다. 마치 우리를 위해 노는 것만 갔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흥이 나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다시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쉬다가 해가 뉘엿거리면 민박집으로 찾아간다. 저녁도 점심과 마찬가지로 밥을 지어 먹고는 윷놀이를 한다. 남녀로 편을 갈라서 놀면 서로 이기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아슬아슬한 고비에서는 모두 일어나 고함을 지른다. 주인집에는 미리 양해를 구했다. 딴 손님이 없으니 맘껏 노시라고 했다. 윷놀이는 이기든 지든 아무 벌칙도 없고 상금도 없는 데도 어찌나 큰소리로 응원하고 이기면 춤을 추고 진 쪽에서도 즐거워하는 사람들 보면 같이 즐겁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 걱정했던 게 웃다보니 소화가 다 됐다며 또 한바탕 웃는다.다음날 아침에 아주머니들이 바닷가로 산책 나갔다가 어선에서 자잘한 생선을 한 뭉치 얻어 왔다. 조금만 사려고 했는데 그냥 가져가라고 하더란다. 그걸로 매운탕을 끓이니. 그 또한 별미였다. 이렇게 맛있는 매운탕 처음 먹는다며 모두가 좋아한다. 두 번째 민박집은 노래방 기기가 있어서 신나게 노래하며 우쭐우쭐 춤도 추며 놀았다.2박 3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열차에서 경비를 따져보니 한 집에 31,000원."아니 한 집이 아니고 한 사람이 그런 거 아닌가?""뭐 빠진 거 없나. 단디이 계산해 봐라.""쌀 갖고 와서 밥하고, 반찬도 갖고 온 거 먹고, 왕복 열차비와 민박 두 번에 10만원,그것뿐인데 빠질 것도 없다.""와아. 둘이 사흘을 놀다 가는데 3만 천원 들었다니. 남들한테 얘기하면 거짓말이 카겠다."이렇게 걸으면서 노는 여행은 남자들보다 부인들이 더 좋아했다. 집에서는 지겹도록 밥 짓고, 반찬 만드느라 신경 쓰는데, 여기 나오면 남자들이 다 하고 설거지도 다 하니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한다."이런 호강이 어데 있노.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오면 좋겠다." 부인들은 평생 해 보지 못한 호강을 하는 듯이 좋아했다.적은 돈으로 이렇게 재미있는 여행을 왜 딴 사람들은 하지 않을까? 싶어 여행스케치에 두 번(03년12월과 04년 6월) 소개하고 신문에도 자랑을 했다.우리는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동해안을 해마다 봄가을 두 번씩 11년을 계속 다녔다.주변에 다른 친지들과도 여러 번 같이 나갔다. 2007년 제주 올레길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걷기에 나서자 전국 곳곳에 걷는 길이 많이 만들어졌다. 내가 걸었을 때보다 더 멋진 풍광을 보면서 걸을 수 있게 됐으니 참 다행이다. 숙명적인 친구친구와 거의 매일 E메일을 주고받는다. 최근에 그 친구가 '우리는 숙명적인 친구'라고 편지에 썼다. 무슨 숙명이라고 까지...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열 살부터 만나서, 편지를 주고받고 하는 게 68년이다. 지금은 컴퓨터만 열면 편지가 와 있어서 읽고, 답장을 써서 보내면 되지만 옛날엔 그게 쉽지 않았다. 우표 한 장 살 돈도 없어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겨우 구해서 반시간 넘게 걸어가 우표를 사서 부쳐야했다. 같은 마을에 살아 같이 학교에 가고 오면서 온갖 짓궂은 장난도 하면서 다니다가 그 친구가 겨우 열여덟 살에 한국전쟁이 일어나 소년병으로 입대했다.나보단 한 살 위인 그는 키가 좀 컸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내게 편지를 보낸 것이 그 시작이다.그의 집에는 어머니와 형이 있었지만 답장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나는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꾸준히 이어지면서 본가의 안부도 내게 묻곤 했다.그가 제대한 뒤 직업을 찾고 있을 때 나는 먼저 대구로 나와 신문사에서 일을 했다. 그 덕분에 신문을 매일 우송해 줄 수 있었다. 그 신문 광고란에서 경찰관임용 공고를 보고 응시하여 합격했고 경찰관이 되었다. 시골 여러 지서 근무를 하면서도 편지는 계속됐다. 그 편지로 인해 내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간판점을 차린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시골로 내려갔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지금은 잠시 실망스럽지만 그대는 영특하니 곧 새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냥 위로하는 말이었지만 크게 용기를 얻었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정년퇴직 후엔 자주 어울려 다니면서도 편지는 더 자주 주고받았다. 컴퓨터가 나와서 더 편리하게 되자 매일 편지가 오간다. 하루만 빠지면 무슨 탈이 났는가 싶어 전화로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는다.해마다 6월이 되면 전쟁 때를 회상하며 전적지를 찾아갔다. 멀리 강원도 철원 인민당사와 백마고지를 바라보면서,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때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다고 소상하게 이야기하면 나도 마치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것처럼 공감이 되었다. 그는 너무 심한 폭음 소리 때문인지 한쪽 귀는 듣지 못하고 한쪽 귀로만 대화를 하고 있다. 부인들도 서로 친 동서나 되듯이 잘 지낸다. 조금만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들고 가서 나누어 먹고,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 죽을 쑤어 가서 같이 먹기도 한다.아흔이 가까워지니 여기저기 아픈 데가 늘어나고 다리가 부실하여 멀리 나들이를 같이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그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다면서 늘 밝게 살고 있다.이렇게 숙명적인 친구가 두 사람 더 있다.한 마을에서 자라 같이 학교에 다닌 동갑내기다. 그도 나와 같이 외아들로 자랐다.조금 다른 것은 살기가 우리보다 나아서 시골에서 중학을 마치고 대구상고 야간부를 나왔다. 고등학교는 시킬 형편이 안 되는 것을 내가 권해서 억지로 다녔다, 낮엔 일을 해서 벌고, 야간에 다니면 된다면서 권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라도 공부를 한 덕분에 식품공장 경영을 맡아 할 수 있었다고. 늘 고마워한다.부산에 살아서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자잘한 일이라도 서로 오가며 정을 나누었고,노후에는 더욱 자주 만나 여행을 같이 했다. 대구 광주 5백리를 같이 걷기도 하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동해안 걷기 11년을 부부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2016년 가을 울릉도에 네 부부가 같이 가서 놀다온 일주일 만에 갑자기 가버렸다. 평소 약도 먹지 않고 건강한 편이었는데 앓아눕지 않고 갔으니 생로병사 중 병은 뛰어넘고 간 것이다.서운하긴 하지만 멋진 죽음이라 부럽다는 고별사를 읽어 주었다.또 한 친구는 같은 필경사란 직업 덕분에 만났다. 우연히 옆에 앉아 일을 하다가 통성명을 하자면서, "고향이 어딘데?" "창녕 이방." "어? 나도 바로 옆이네." 도와 군은 다르지만 십여 리 거리였다. "나이는?" "스물여섯." "어? 동갑이네." "생일은?" "구월 초하루," "뭐? 나는 초이틀인데. 하루 차이네." "형제는?" "혼자뿐이다." "나도 독신인데."이렇게 희한한 만남으로 같은 일을 하면서 같이 놀러 다니고, 부부는 물론 아이들도 두 집이 2남 2녀로 같은 또래여서 다정한 친구가 되어 함께 산으로, 바다로 어울려 다녔다. 겨울이면 얼음판에, 여름엔 강이나 바다로, 친 형제처럼 어울려 다녔다. 또 대구, 광주 5백리를 두 번, 해남에서 임진각까지 천삼백 리도 같이 걸었고, 동해안 걷기도 늘 같이 했다. 집도 가까워서 아침 산책도 같이 하고, 조금 색다른 음식을 만들면 나누어 먹곤 한다.난 외동이면서 사촌도 한 분인데 연세가 높아 그 아들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내 또래의 종질이 있어 참 정답게 지내다가 일찍 가버렸다. 그러니 내게 이런 친구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외로운 신세가 됐을까. 이 밖에도 가끔 만나는 친구가 여럿 있긴 해도 위의 세 사람은 정말 숙명적이라 할 만큼 좋은 친구들이다. 쓰레기가 준 선물아침마다 산길 산책을 한다. 향긋한 소나무 향기와 아카시 꽃향기를 마시며 산새들 노래도 듣고, 다람쥐 재롱도 보고, 가끔은 산토끼와 노루, 멧돼지도 지나간다. 대도시에 살면서 이런 산이 가까이 있으니 참 다행이라 여기며 즐겁게 걷는다. 그 덕분인지 아흔이 가까우면서도 아직 건강에 별 이상이 없다.이 좋은 산길에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었다. 과자 봉지, 음료수 껍질, 담배꽁초, 휴지 등이 지저분해서 상쾌한 기분을 조금 앗아간다. 저런 게 없으면 더 좋을 건데...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다니다가 줍기로 했다. 처음엔 쑥스럽기도 하여 사람들이 지나간 뒤에 줍고 의자에 앉아있는 주변은 그냥 지나갔다, 잘난 체 하네 라며 핀잔을 듣지나 않을까. 더욱이 담배 피는 사람들은 '너 그런다고 내가 못 버릴 줄 아나' 하며 덤빌 것도 같아 겁도 났다. 또 너무 많아서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염려도 되었다. 길 폭은 3미터, 거리는 천 미터 남짓 된다. 며칠 줍다보니 생각보단 힘들지 않았고, 지나가던 사람이 "좋은 일 하십니다." "수고하십니다." 하는 소리에 쑥스러움은 사라지고 용기가 생겼다. 차츰 버리는 사람도 적어져서 깨끗해지자 보람이 느껴졌다. 허리 굽혀 줍는 수고로움만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도 못한 뿌듯함이 다가왔다. 그냥 산책만 하던 때보다 기쁨 한 가지가 더 보태졌다.그게 어느덧 사십 년이 되었다. 처음엔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주웠는데 이젠 맨손으로 다니며 몇 개 줍기도 하고, 하나도 줍지 못할 때도 있다. 그새 버리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고, 또 가끔은 줍는 사람도 만난다. "경쟁자가 생겼네요." 하며 서로 웃었다.작은 쓰레기 한두 개라도 줍고 나면 뿌듯하고, 또 한 개도 없는 날이면 '이 깨끗한 산길은 내가 만든 거야.'자부심이 생긴다. 최근에 이 길이 '앞산자락길'과 연결되어 더욱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다. 더러는 맨발로 다니기도 하고 더러는 길이 하도 좋아서 두 번 세 번 오가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마치 우리 집 정원이 아름다워서 구경 온 사람처럼 반갑다. 또 간혹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을 봐도 밉지 않다. 그런 사람이 있어 내가 이렇게 뿌듯함을 느끼고, 멋진 정원을 가진 부자가 된 거니까. 남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아니 나도 처음엔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봤던 쓰레기가 내게 이토록 좋은 선물을 안겨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앞으로도 이 쓰레기 줍기는 내가 걸을 수 있는 날까지 계속할 것이다. 비록 그러지 못할 때가 온다 하더라도 이 길만 생각하면 뿌듯한 마음은 남아 있을 것이다.앞에서 아내가 봉사단에 나가 장애인 돕는 일을 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걸 보고 나도 봉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 산길 쓰레기 줍기도 그로 인해 시작할 수 있었다.내가 살아온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이 쓰레기 줍는 거만큼 나를 오래도록 뿌듯하게 한 건 없다. 내가 만일 이걸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토록 즐겁지도, 건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때 시니어클럽에 들어가 시각장애인에게 책 읽어주기,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 휠체어를 밀면서 나들이하기, 주민자치센터에서 서예 지도, 가훈 써 주기 봉사도 했지만 그런 건 그리 오래 하지 못했고, 그때의 기쁨뿐이었다. 그러나 이 쓰레기 줍기는 40년이 되었지만 한결같이 나를 뿌듯하게 해준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을 난 받아본 적이 없다.30대 중반, 건강을 잃고 골골거릴 때 아내는 내 걱정을 많이 했다. "저 어린 것들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는 살아야 할 낀데....." 그러고 50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아내가 나보다 다리 허리가 약해졌다. 그만치 몸과 마음의 골몰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 아침마다 산길 산책을 하면서 좀 힘이 되어주느라 손을 잡고 다닌다. 그렇게 걷다가 조그마한 꽁초를 발견하고 그걸 줍느라 잡았던 손을 놓는다. 아내는 잠시 멈추어 서서."당신 그거 알아요?""뭐?""당신이 이 길에서 하는 거, 내한테는 반에 반도 못하고 있다는 거."-끝-

2019-08-08 18:13:17

강문희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오래 된 편지/강문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낙동강의 갈대로 역은 자그마한 곽 뚜껑을 열었다. 곽 속에는 빛바랜 편자 한 통과 가락지 한 개 그리고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는 밀고 밀리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에서 쓴 아버지의 편지였다. '포연으로 가득했던 산하에 가을을 알리는 들국화가 하나 둘 피기 시작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들국화가 피어 있는 진지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쓴 편지였다. 자식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편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꼭 살아서 돌아가 사랑하는 당신을 껴안아 보고 싶다'는 대목에서는 목이 메어와 더 이상 읽지를 못했다. 외롭고 쓸쓸한 날 얼마나 앍으셨으면 편지의 귀퉁이가 헤어져 넘기는 부분에 몇 겹으로 스카치테이프를 붙어놓으셨다. 고향이 수몰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갈 때도 낙동강을 떠나가지 못했던 어머니의 슬픈 세월이 오늘도 마루에 서서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저문 강에서 삽을 씻는 어머니의 가녀린 등 너머로 강의 하루가 저문다. 평생을 낙동강 가에서 살면서, 밭을 일구고 흙을 만지며 살아온 어머니의 생애는 강을 닮았다. 남자일 여자일이 따로 없는 어머니의 억센 팔뚝은 낙동강의 물결만큼이나 울퉁불퉁하게 고랑이 져 있다. 가혹한 세월을 여자 혼자의 몸으로 맛서 싸우며 살아왔던 어머니의 삶은 전사처럼 강인했고 때로는 갈대처럼 가녀렸다.낙동강은 어머니의 강이었다. 안동댐이 건설되고 누대를 살아온 마을이 수몰되면서 조상의 산소가 옮겨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마을을 떠나갔다. 일가친척들이 뿔뿔이 흩어져 고향을 떠나갔을 때도, 꼭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아버지의 편지를 굳게 믿는 어머니는 낙동강을 떠나가지 못했다.갈대꽃이 하얗게 피면 낙동강의 가을은 깊어간다. 첫 서리가 내리고 갈대꽃이 필 무렵이면 어머니는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낙동강의 갈대를 한 짐씩 머리에 이고 왔다. 갈대는 찌고 말려서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섬세했던 어머니는 잘 다듬은 갈대로 이삭은 빗자루를 만들고 줄기로는 소쿠리와 망태, 돗자리와 광주리 등을 만들었다. 그런 밤이면 어머니의 방에는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평소에는 말이 없는 어머니도 갈대를 엮는 밤이면 '전선에서 온 편지' 등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며 밤늦게 까지 갈대를 엮었다.흐르던 강물이 댐에 가두어지고 거대한 구조물이 물길을 막아도 역사의 고비마다 일어섰던 민중의 물결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낙동강의 물길을 막지는 못했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을 넘어 강은 다시 흘렀다.일 년 365일 하루도 밭에 나가지 않는 날이 없었던 어머니가 비탈 밭에 보이지 않던 날, 집에 들르니 어머니는 넋 나간 사람처럼 마루에 앉아 강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사연인즉슨 오늘 아침에 국방부에서 전화가 왔는데 유학산 기슭에서 아버지의 유해가 발굴됐다는 내용이었다며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하거나 유족의 요청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한다고 했다.뻐꾸기도 비명을 지르며 세월을 일으켜 깨우던 늦은 봄, 아버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다. 유해를 받아든 어머니의 손은 떨렸고 기다림에 지친 가녀린 몸은 휘청거렸다. 평소에도 마루에 앉아, 지금도 저 강 길을 따라 손을 흔들며 달려 올 것 같다던 어머니의 가느다란 기다림마저도 내려놓아야하는 인연의 비정을 감당하기에는, 기다림의 깊이와 길이가 너무도 깊고 길었으리라. 아버지의 유해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묻히었다.세월이 흘러 인생의 깊이를 알 나이가 되었을 때 쯤 다시 저무는 낙동강을 걸으면 아직도 강의 깊이를 알기에는 어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누구를 원망 한번 하지 않고 일체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다가 가셨던 어머니의 생애에 이르면 자꾸 목이 메어 온다.낙동강이 저문다. 시시각각 변하는 물빛은 천지의 조화를 담은 듯 장엄하다. 짙푸르던 강물이 암갈색으로 변하고 이윽고 붉디붉은 황혼이 온 강을 적신다. 강도 하루에 한 번씩 사무치는 외로움을 풀려고 저리도 붉게 꿈틀거린다. 어머니도 저 강물처럼 외롭고 슬픈 날은 아무도 없는 저문 강에서 삽을 씻으며 울었으리라. 이윽고 강은 어둠에 몸을 기대며 고요히 눕는다. 어느덧 강은 적막해지고 반딧불이 한 마리가 그리웠던 시간들을 호명하며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어둠속을 유영한다. 사무쳐오는 그리움에 다시 뒤돌아보면 "야야, 어두운데 조심해라" 일흔이 다된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쩌렁 쩌렁한 목소리가 저문 강물에 퍼져나간다.

2019-08-07 18:23:50

김태호 씨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틈/김 태 호

벌어진 창틈 사이로 칼바람이 불어온다. 커튼이 가려져 있어도 방안 공기가 차다. 이불을 뒤척이며 잠을 청해 보지만 좀처럼 눈이 감기질 않는다.고향집을 빈집으로 비워 둔지 수년이 흘렀다. 워낙 두메산골이라 사려는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 여름 한철 피서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며 공부까지 시켜 준 고향집이다. 여름밤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놓아가며, 온 가족이 오순도순 살았던 정든 옛집이 아니던가.모처럼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옛 생각으로 상념에 잠긴다. 걸터앉은 마루 틈으로 애기누에만한 개미들이 바지런히 무엇을 나르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어딘가로 옮기는 모양이다. 마룻장 빈 틈 사이로 줄을 지으며 겨울 양식을 저장하는 것 같다. 고개를 들어 마루 천장을 바라본다. 오랜 세월 손을 대지 않아 천정 틈 사이로 빗물이 스며든 자욱이 보인다. 장마라도 들면 틈이 더 커져 하늘이 보일 것만 같다. 낡은 고향 집의 틈새들을 바라보며, 고택만큼 오래된 내 삶의 빈틈들을 회상해본다. 칠십 평생 동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로 가슴을 아프게 한 적도 있고, 알게 모르게 행동으로 마음의 상처를 주기도 한 것 같다. 아마 이 세상에 빈틈없이 완벽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때로는 내 가슴에 너무 큰 틈이 생겨 인생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공부는 뒷전이고 오락에 빠져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대학을 다니던 맏형의 갑작스런 요절로 우리 집은 한때 대들보가 부러진 황량한 분위기에 잠겨있어야만 했다. 그때 나는 사춘기인 중3 때라 가슴에 빈틈이 구멍처럼 컸었고, 마음으로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마음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그로 인해 대구로 가는 고입 진학은 포기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돕기 위해 인근 면에 있는 농고에 진학했다.가슴의 틈 때문이었던지, 12Km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하면서도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3년간 허송세월만 보냈다. 졸업 후 대학을 가려해도 실력이 모자라 대입시험에서는 결국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눈물을 머금으며 학업을 접고 아버지와 농사를 지으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졸지에 장남이 되어버린 나에 대한 할머니의 기대를 져 버릴 수 없어, 대구로 가서 재수를 했고 결국 이듬해에 겨우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나는 여러모로 빈틈이 많은 사람이 분명했다. 틈새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력 끝에 대학생활은 큰 시련 없이 보낼 수 있었다. 당시에는 교사가 부족해 졸업과 동시에 경북에 있는 오지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첫 발령을 받고는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기분이었다. 본래 낙천적인 성격 탓으로 놀기만 좋아하는 무능력한 소유자였는데, 동반자까지 만나자 더 나태해져 갔다. 편할수록 더 편해지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속성 때문일까.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듯 안일무사주의자로 전락해 버렸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에 빠져 현재에 안주하려는 행동이 부끄러운 것인지도 몰랐다.언제나 그렇듯 폭풍이 한번 휘몰아친 뒤에서야 사람은 자기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그 당시 승진이라는 목표는 안중에도 없었다. 저만치 동기들은 앞서가고 형체가 사라질 쯤 되어서야 그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출발점 행동이 늦을수록 몇 갑절의 노력이 있어야 따라갈 수 있지 않겠는가. 탐욕만 가득한 이기주의자에 대한 형벌은 가혹했다. 제일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