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기의 필름통] 노매드랜드

영화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영화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도대체 희망이란 있는 것인가? 주어진 삶이니까, 그냥 살아야 하는 것인가? 나에게 하루는, 숨 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노매드랜드'(감독 클로이 자오)는 이런 물음에 답을 하는 영화다.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한 여인의 '길 위의 인생'을 통해 우리 삶을 성찰하게 해준다.

해발고도 1,219m 네바다주 엠파이어. 한때 잘나가던 공업도시였지만, 경제 위기로 버려진 도시가 됐다. 도시가 무너지자 모두 떠났다. 그러나 펀(프란시스 맥도맨드)과 남편은 떠나지 못했다.

이제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고 펀은 혼자 남았다. 일용직을 전전하면서 낡은 밴에서 살아간다. 홈리스(Homeless)냐는 물음에 그냥 집이 없을 뿐(Houseless)이라고 답한다. 그 어떤 여유와 희망도 없다. 그녀는 동료의 권유로 애리조나주에 있는 노매드(유목민처럼 자유롭게 이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한다. 펀과 같은 사람들이 황량한 벌판에 모여 함께 지내며 얘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노매드랜드'는 2017년 출간된 제시카 브루더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3년간 취재해 엮은 책으로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라는 부제를 빼고 '노매드랜드' 제목만 썼다. 원작의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걷어내고, 살아남은 펀의 일상과 내면만 그렸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영화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그녀의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삶의 목표를 잃은 지도 오래다. 이젠 희망이란 단어조차 낯설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아마존 물류센터, 식당, 농장일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만 손에 쥐는 것은 겨우 하루를 견딜 수 있는 돈뿐이다. 차 안에서 용변을 보고, 공중화장실을 찾아 씻고, 밤이 되면 주차장을 찾아 전전한다. 그녀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노매드랜드'는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 영화이다. 펀의 하루하루를 다큐멘터리처럼 담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연들을 그 위에 쌓을 뿐이다. 내러티브도 단순하고, 캐릭터들의 톤도 저음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울림을 주는 영화다.

영화는 제도와 국가를 탓할 만도 하지만, 어떤 주장과 비판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삶이 당연한 듯 노매드로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도는 부초같은 인생들이다. 길 위에서 만난 부서진 작은 돌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켜켜이 쌓이면서 삶의 가치와 의미들이 살아난다.

생명은 서약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위대한 삶의 존재 이유가 스크린을 뚫고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펀이 만난 위대한 자연들이 그것을 간증한다.

천 년을 이어온 거대한 나무와 공룡, 깎이고 깎인 바위와 하늘, 아름다운 석양, 절벽에 붙어 살아가는 바다제비. 심지어 제비가 날고 부화된 알 껍질에서도 위대한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자연의 신비로운 황홀경은 작은 소통에서도 일어난다. 펀이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작은 정과 그들의 소박한 삶 또한 위대한 것이다. 소통과 연대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차를 끓여 나누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일은 사소하지만 길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일이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영화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펀의 일상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다. 갈피를 못 잡는 방랑도 아니다. 나를 찾기 위한 길고 긴 여정이다. 그녀가 이미 버려진 도시에서 옛 기억을 떠올리며 흘리는 눈물이 가슴을 처연하게 해준다. 우리가 찾아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영화는 세속적인 가치가 아닌 그 어떤 영성적인 것을 느끼게 해준다.

배우 프란시스 맥도맨드의 연기가 또다시 감탄을 자아낸다. 그녀는 '파고'(1996), '쓰리 빌보드'(2017)로 두 차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에선 그녀가 제작까지 맡았다. 감독 클로이 자오를 영입한 것도 그녀였다.

'노매드랜드'는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감독상 등 전 세계 주요 영화상을 휩쓸고 있다. 지난 10일에는 미국 감독조합상 시상식에서 아시아계 여성 최초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오는 26일(한국시간) 열리는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촬영상, 각색상, 편집상 등 주요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큰 이변이 없다면 여우주연상을 비롯한 주요 상을 휩쓸 것으로 예상된다. 108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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