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예술, 나의 삶]현대미술가 박철호

현대미술가 박철호 작가가 그의 화실에서 최근 납과 파라핀을 이용한 작품들 옆에 앉아 활짝 웃고 있다. 현대미술가 박철호 작가가 그의 화실에서 최근 납과 파라핀을 이용한 작품들 옆에 앉아 활짝 웃고 있다.

 

박철호 작 'Ripple 1805' 박철호 작 'Ripple 1805'

"저의 미술 작업을 어느 한 카테고리에 굳이 한정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예술적 행위는, 그것이 표절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 소통의 길이 활짝 열려 있을 때 비로소 예술의 문도 덩달아 열리게 되는 것 같아요. 특히 현대미술에서는 더욱 이 같은 사고가 필요합니다."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로 주택가 2층 화실(200㎡)은 현대미술가 박철호(56)가 15년째 작품 활동을 하는 곳으로, 벽면과 바닥에는 최근 그가 집중하고 있는 파라핀을 이용한 작품들이 세상을 향한 첫선을 기다리고 있다.

박철호는 고향인 경북 의성에서 나서 울산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고 계명대 미술대학 서양화과(82학번)에 진학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오브제의 단순 재현이나 데생보다 작가적 실험 에 관심을 두었고 '작가정신=실험정신'을 슬로건 삼아 지금까지 작품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른 매체에 그림을 그리고 이를 다시 찍어내는 과정이 저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느낌을 받았고,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도 새로운 기법이나 재료에 관한 관심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 "앞으로도 작품 활동에 적합한 물성을 찾는다면 언제든 새로운 작업을 시도할 마음을 갖고 있다"면서 스스로를 현 시점에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작가라고 밝혔다.

박철호는 1989년 대구 태백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대학 3학년 때부터 단순히 정물을 그리기보다 자유제작시간이 너무 행복했다는 작가는 이때부터 작업의 큰 틀을 구축한 판화적 기법과 드로잉 작품 등 실험적 추상작품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사실 저는 한 번도 판화를 한 적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판화적 기법을 작업의 과정으로 이용한 것뿐이죠."

박철호가 말하는 판화적 기법이란 먼저 투명필름에 그림을 그린 후 이를 실크스크린에 놓고 스퀴지 등을 이용해 쭉 밀어내면 물감이 실크스크린 위로 새겨진다. 이런 다음 실크스크린을 다시 캔버스 위에 올려놓고 밀면 작가만의 조형언어가 드러나게 되는 방식이다. 그는 30대까지 동(銅)과 돌을 이용한 판화적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화실 한 켠에 있는 프레스기는 이때 쓰던 도구였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그의 작품들은 추상과 구상이 혼합된 조형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그의 새, 벌집, 꽃, 뿌리, 숲과 같은 연작은 모두 판화적 기법의 산물들이다.

"판화적 작업은 노동력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우연적 요소가 조형언어로 나타나면서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감흥을 주기 때문에 이 작업을 계속하는 겁니다. 현대미술가는 등산로를 따라 가는 게 아니라 길 없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의도하지 못했던 우연적 요소는 결국 작가의 실험정신과도 동일선상에 맞닿아 있는 셈이다.

1992년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약 5년간 대학 강사로 보낸 적이 있다. 그러던 중 33살 때 스스로 부족함을 느낀 그는 훌쩍 미국 뉴욕과 필라델피아로 약 2년간 유학을 떠난다.

그 시절 박철호는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을 만나 미술가로서의 인생을 나눴고, 또 뭔가 새로운 화풍을 찾아 고민하던 때였다.

"새 것을 찾으러 미국에 갔는데 새 것이 없더라고요. 그러던 중 어느 날 창밖을 보니 난간에 비둘기 두 마리가 정답게 스킨십을 하고 있는 걸 보고 나는 절망에 빠져 허덕이는 데 저 새들은 희망적인 속삭임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아 그 모습을 드로잉했고, 그 사이 절망과 희망이란 대조적 심리상태에서 새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박철호의 작품에서 '새'시리즈가 등장한 것이 1996년이다. 이후 그는 작은 유리잔에 내려진 양파 뿌리의 모습을 통해 '뿌리' 시리즈를 제작하는 등 생활주변의 작은 모습들에게서 작품의 모티브를 많이 얻게 된다. 특히 지천명의 나이가 되면서 '세상이 참 따뜻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면서부터는 그의 화풍에 '숲'시리즈도 등장하게 됐다.

박철호는 또한 단색을 많이 쓰는 작가이다. 블랙, 블루, 레드, 화이트 등 대개의 작품에 모노크롬으로 조형언어를 표현하는데 이는 원래 화려한 색들의 향연을 펼치지 않는 작가적 취향과 맞물려 있다. 블루는 군 복무 시절 해변 가의 밤바다 색에 매료되어 주로 쓰며, 블랙은 모든 색을 포함하고 있어서, 화이트는 또한 모든 색을 다 버린다는 의미에서 작가가 좋아하는 색이 됐다.

최근 작가는 그의 화풍에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 화풍은 이전에도 시도된 바가 있지만 요사이 본격적으로 하고 있는 작업들로 캔버스에 바로 붓으로 색을 입히거나, 파라핀과 납을 이용한 물성의 느낌을 실험하고 있다. 특히 파라핀과 납을 이용한 작품은 20여년 전부터 지니고 있던 물성탐구의 한 축이다.

그는 납으로 새와 같은 형태를 손으로 만들고 이를 두터운 파라핀 틀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순수한 물성이 드러내는 심미성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경우 투명한 파라핀에 연두색, 분홍색, 민트색 같은 크레용을 엷게 섞어 전체 화면에 부드러운 색감이 은은하게 비쳐지게 만든 이 작품들은 지난 6월 대구보건대 인당뮤지엄에서 일부 선을 보여 관객의 호응을 얻은 바 있다. 그는 이어 9월 중 대구미술관 그룹전에서도 '파라핀-납'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앞으로 당분간 붓을 이용한 추상그림과 파라핀-납 작업에 몰두해 볼 작정입니다."

박철호는 지금까지 모두 25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지금까지 받은 여러 상 중에서 대학 4학년 때 수상한 '극재 미술상'을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하고 있다. 그의 실험정신이 캔버스 위에서 어디까지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글 사진 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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