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 그림읽기] 김길후 작 '무제'

162x130cm Acrylic on Canvas(2019년)

김길후 작 '무제' 162x130cm Acrylic on Canvas(2019년)

 

김길후의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이 글의 독자들에게 제안할 것이 있다. 일단 당신을 둘러싼 '세계가 실재한다'는 보편적 믿음을 싹 지워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여태껏 살아온 삶의 전체 녹화물을 지운다고 생각하자. 사랑스런 자식의 보드라운 뺨, 아내의 부드러운 입술, 눈앞에 아롱대는 아름다운 꽃송이 등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방법론적으로 그렇게 해보자는 말이다.

'현상학'을 창안한 에드문트 훗설은 즉자적으로 실재하는 이 현실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의 중단을 일컬어 'Epoche'(에포케) 즉 '판단중지' 또는 '환원'이라고 개념화했다. 환원을 통해 보편적 믿음이 없어지면 우리의 '의식' 또한 존재할 곳을 잃어버리면서 의식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자아'도 자연히 소멸된다.

자아를 차단했을 때 갖는 첫 경험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는 상태인 '비(非)자아'로의 진입이다. 이른바 '선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는 이 경지는 동양에서 말하는 '물아일체' 불교로 말하면 '삼매'에 비유될 수 있다.

김길후 작 '무제'는 검정 화면에 추상적 형상이 그려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해체된 형상 속에서 구체적 형상을 유추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두고 있다. 마치 무녀가 고깔모자를 쓰고 무엇을 기원하는 모습 같지 않은가. 그림의 전체 구도는 검정과 흰색의 대비가 강한 만큼 보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얼핏 봐도 널따란 평붓으로 단번에 그어내려 나간 필법의 강도는 어느 누구보다도 힘차게 보인다. 무엇을 억지로 그리려고 했다기보다 선정(禪定)에 들었던 고승이 사자후를 터뜨리듯 단숨에 화면을 채워나간 경지를 보여준다. 주체와 객체의 분별 아래 이뤄진 의식적 행위가 아닌, 선험적 태도로 찰나의 순간을 묘사한 느낌이 확 들어온다. 바로 김길후 작품의 특징이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김길후의 이런 작업 방식을 두고 "그는 허공에 긴 칼을 휘두르는 검객일 수도 있고, 흐드러지게 한 판의 춤을 추는 춤꾼일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흔히 화가가 그림에 미치면(狂) 그림과 일체가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강렬한 정신적 에너지가 터져나와 물감과 같은 물질로 전도된다는 말이 있다. 또 화면 바탕이 되는 검정은 모든 파장의 색을 흡수하는 포용의 색이다. 이 때문에 작가가 지닌 강력한 정념과 검정에서 나오는 포용의 분위기는 한편으로 예술이 지닌 힘찬 치유의 기능도 내재돼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주변의 세계가 검정에 의해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강한 엑스터시를 느꼈고, 다시 흰색의 형상에 의해 되튀어져 나왔을 때 세상은 더 이상 조금 전 그 세상이 아니었다. 그의 붓 춤을 따라가다 보니 잃어버렸던 먼 태곳적 '영기'(靈氣)와 마주한 느낌이랄까. 김길후 작품의 탁월함이 번쩍였던 'Epoche'의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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