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학교] "국권 회복, 아는 것이 힘" 애국지사 뜻 담긴 민족사학, 대륜중·고

  • 0

〈7편〉 대구 대륜중·고…홍주일·김영서·정운기 등 애국지사 헌신으로 탄생
1921년 설립 교남학원이 시초…입학 조건·나이 제한 두지 않고 다양한 연령층에 신학문 제공
사설 강습소에서 정식 학교로…항일 운동 주도한 학생들 많아
일제강점기엔 학생비밀결사 조직, 6·25땐 학도병으로 나라 위해 일어서
모형항공반·문예부·스키부 등 우수한 인재들 여러 분야서 두각

대륜중·고등학교 전경. 대구시교육청 제공
대륜중·고등학교 전경. 대구시교육청 제공

오래된 학교는 오래된 염원 위에 서 있다. 학교는커녕 종이조차 귀했던 시절, 학교 하나를 세우기 위해선 많은 이들의 의지와 갈망이 필요했다. 일제강점기엔 교육을 통해 힘을 길러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이러한 염원을 바탕으로 애국지사들의 헌신 끝에 탄생한 대륜중·고등학교를 소개한다.

1923년 3월 찍었던 교남학원 고등과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대구시교육청 제공
1923년 3월 찍었던 교남학원 고등과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대구시교육청 제공

◆ '배워야 산다', 청년 교육 위해 뭉친 애국지사들

지난해 개교 100주년을 맞은 대륜중·고등학교의 시초는 1921년 9월 15일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 등 애국지사들이 세운 '교남학원'이다.

교남학원의 '교남(嶠南)'은 조령(鳥嶺,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의 남쪽 땅에 속하는 경상도를 의미한다. 그 이름에 맞게 교남학원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민족 인재 양성소이자, 순수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애국지사에 의해 설립된 학교였다.

홍주일 선생. 대구시교육청 제공
홍주일 선생. 대구시교육청 제공
김영서 선생. 대구시교육청 제공
김영서 선생. 대구시교육청 제공
정운기 선생. 대구시교육청 제공
정운기 선생. 대구시교육청 제공

천도교 대구교구장이자 항일 비밀결사인 조선국권회복단의 지도자였던 홍주일 선생과, 당시 계성학교 교두(敎頭, 현 제도의 교감)로서 1919년 3월 8일 대구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영서 선생은 서로 종교도 다르고 평소 친분이 두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두 선생은 신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주축으로 3·1운동을 이끄는 모습을 보고 '아는 것이 힘'이라 것을 깨닫고, 민족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자 결의하게 된다. 3·1운동 전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 사이에서 신학문을 '일본 개명 왜놈 학문'이라며 거부하는 정서가 만연했던 터라 이러한 결의는 더욱 뜻 깊었다.

두 선생 모두 항일 활동으로 옥고를 치른 적이 있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는 처지였고, 일제가 조선인 교육을 위한 조선인 학교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학교 설립은 순탄치 않았다.

고민 끝에 두 선생은 조선국권회복단 간부였던 정운일 선생의 동생이자, 때마침 일본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정운기 선생에게 포부를 밝히며 설득에 나섰다. 그 결과 정운기 선생을 학교 설립 신고자로 하고, 대구부 팔운정(현재 대구은행 북성로지점이 있는 자리)에 있던 '우현서루'를 임시 교사로 빌려 사설 학습 강습소인 교남학원이 탄생하게 된다.

당시 학교들은 보통학교 입학 나이(8세)의 아이들도 다 수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입학 나이를 넘은 이들에겐 신학문을 배울 기회가 더더욱 없었다. 특히 대구는 교육기관 자체가 부족했던 터라 교남학원 설립이 갖는 의의는 엄청났다.

교남학원은 초등과, 중등과, 고등과, 특과를 둬 다양한 연령층에게 배움을 제공하고, 입학 자격에 어떤 조건이나 나이 제한을 두지 않았기에, 개교 이후 얼마 되지 않아 800명 이상의 학생이 모여들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대륜100년사에 따르면 1922년 재적인원 631명 중 65%(408명)가 16세 이상이었는데, 이를 통해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상당수가 고등과가 개설된 교남학원에 몰렸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우현서루 서고. 대구시교육청 제공
우현서루 서고. 대구시교육청 제공

◆조선 학생으로서 일본 학생에 맞서다

1924년 점점 늘어나는 학생을 수용할 교실이 부족해지자 세 선생은 빚까지 내며 건물을 매입해 증축·보수를 거쳐 새 교사를 마련했다.

여기에 한 일본인 승려가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해 받아 놓은 '국어(일어)학교'의 개설 인가장을 200원에 매수해, 정운기 선생 명의로 일제로부터 정식 학교 인가를 받아 '교남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교사를 남산동으로 이전한다.

일제강점기 척박한 교육 환경 속에서도 애국지사들의 뜻을 이어 받은 교남학교 학생들은 용기와 저항의식을 잃지 않았다.

1943년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대륜중 학생들. 대구시교육청 제공
1943년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대륜중 학생들. 대구시교육청 제공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일화로 1929년 가을에 있었던 대(對)의전학생투석사건을 들 수 있다.

대륜100년사에 따르면, 교남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학생이 길거리에서 사소한 일로 당시 대구의학전문학교(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일본인 학생에게 조선인에 대한 욕설을 들으며 구타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 날 이 사실을 알게 된 교남학교 3학년 학생 20여 명은 격분했다. 이들은 수모를 씻어야 한다는 생각에 교복 양쪽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현재 대구 노보텔앰배서더호텔이 자리하고 있는 뒷거리에 집결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의전학교 일본인 학생 40여 명도 뒷거리에 모였고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렇게 사립중학교 학생과 공립전문학교 학생, 나아가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누가 봐도 전자가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교남학교 학생들은 주눅 들지 않고 우선 당사자인 일본인 학생에게 정중히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 일본인 학생은 요구에 선뜻 응하지 않았지만 거듭되는 교남학교 학생들의 강경한 요구와 기세에 결국 사과했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교남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으로부터 향후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는 서약서까지 받아냈다.

불리한 현실과 맞서 싸우며 교남학교 학생들이 보여준 이러한 용기는 항일 의식, 곧 민족 정신의 발로였다.

이 외에도 학생비밀결사를 조직해 항일 운동을 하다 검거되는 등 교남학교엔 항일 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많았다. 또한, 당시 일제는 학생들에게 방학 때 매일 달성공원에 가서 신사 참배를 시키고 확인표에 도장을 받아 과제로 제출하게 했는데, 교남학교 학생들은 달성공원 관풍루 아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도 했다. 또 지우개로 가짜 확인 도장을 만들어 제출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저항했다고 한다.

1951년 창설된 대륜 모형항공반은 80년까지 전국대회에서 10여 차례 우승했다. 특히 1965년엔 고무동력기에서 한국최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대구시교육청 제공
1951년 창설된 대륜 모형항공반은 80년까지 전국대회에서 10여 차례 우승했다. 특히 1965년엔 고무동력기에서 한국최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대구시교육청 제공
지난 2019년 4월 수성도서관에서 열린 제48회 '씨ᄋᆞᆯ' 시화전. 대구시교육청 제공
지난 2019년 4월 수성도서관에서 열린 제48회 '씨ᄋᆞᆯ' 시화전. 대구시교육청 제공

◆ 시련을 딛고서…모형항공반 등 자랑거리도 가득

교남학교는 어려운 재정 상황과 시대의 핍박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1940년 '대륜학교'로 교명을 변경했고, 1942년 '대륜중학교' 인가를 받아 대구부 하동 624번지(현재 수성동 중동교 남쪽 들판이 있는 자리)로 학교를 이전해 확장했다. 1950년 5월 29일, 6년제였던 대륜중학교는 문교부로부터 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대륜중・고등학교 시대가 열리게 된다.

광복 이후 고등학교 설립 인가까지 받은 기쁨도 잠시, 한 달 뒤 한국전쟁이 발생해 대륜중・고등학교는 또 다시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52년 운동장에 들어선 군용막사와 전시 학생증. 대구시교육청 제공
1952년 운동장에 들어선 군용막사와 전시 학생증. 대구시교육청 제공

전쟁이 발발하자 교사와 학생들은 '학도의용군'이라는 비정규군으로 입대, 이후 정규군으로 편성돼 '학도병'으로서 전장 곳곳에서 피를 흘렸다. 대륜100년사 편찬 과정에서 발견된 '전몰학도명단'과 '군에서 제대해 복귀 전보 위입한 학생명단'에 따르면, 당시 군에 입대한 학생들은 583명에 달한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올해로 대륜중학교는 98회, 대륜고등학교는 95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지금까지 6만8천여 명의 민족 인재를 양성해왔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국가와 지역에 기여해온 대륜엔 우수한 동아리도 가득 있다.

교남학교 출신이었던 일등항공사 김영수 동문의 영향으로 1951년 만들어진 모형항공반은 1965년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의 고무동력기 부문에서 5분 11초라는 한국 최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대륜고의 문예부 '씨ᄋᆞᆯ'은 1972년 문학동인회를 발족하고 제1회 씨ᄋᆞᆯ 시화전을 개최한 후 지금까지 대구시민회관 상설전시관, 수성도서관 등 지역 곳곳에서 매년 3, 4월 시화전을 열고 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을 바탕으로 '씨ᄋᆞᆯ'은 대구 지역 고등학교 문예부의 표상이 됐으며, '슬픔이 기쁨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등을 지은 정호승 시인을 비롯한 문인을 다수 배출함으로써 문화예술계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98년 창단된 스키부 역시 유명한데, 지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던 이재준 선수 역시 대륜고 스키부 소속이었다. 올해 열린 제103회 전국동계체육대회에서 스키 회전 부문에서도 박준우 2학년 학생이 1위를 차지해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김의용 대륜교육재단 이사장. 대구시교육청 제공
김의용 대륜교육재단 이사장. 대구시교육청 제공

김의용 대륜교육재단 이사장은 "개교 100년 역사를 이룩한 대륜중·고등학교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며 민족 인재 양성을 위해 노력해왔다"며 "지난 100년 역사가 민족 교육을 위한 길이었다면 이제 우리 학교는 올바른 역사 의식과 따뜻한 인성을 바탕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미래를 열어가는 길을 걸어가겠다"고 했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