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안상철(1927-1993), ‘잔설(殘雪)’

미술사 연구자

안상철(1927-1993), '잔설(殘雪)', 1958년(32세), 종이에 채색, 208×152㎝, 개인 소장
안상철(1927-1993), '잔설(殘雪)', 1958년(32세), 종이에 채색, 208×152㎝, 개인 소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미술애호가들에게 화가를 각인시키는 최상의 무대였던 관전(官展)의 시대인 1958년, 국전에서 부통령상을 받은 안상철의 대작 '잔설'이다. 빼곡한 지붕과 굴뚝에 내린 눈이 아직 다 녹지 않은 풍경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어서 장삼이사의 보금자리를 굽어보는 하심(下心)의 초연한 기분이 느껴지고, 세월을 간직한 기와지붕이 고풍스러움에 대한 상념을 일으킨다.

눈이 한창 쌓였을 때라면 기왓골이 드러내는 예스러움에 대한 향수가 희미했을 테고, 잔설이 없었다면 계절의 순환이라는 자연의 무상감 속에서 기와집이 불러일으키는 전통과 역사에 대한 회고의 감정을 건드리지 못했을 것 같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옥을 소재로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을 부각시켰고, 화면을 규칙적 형태로 꽉 채워 여백이 없는 모던한 구도를 연출했으며, 농담을 얹은 먹 점과 짧은 먹 선을 반복한 개성적인 필묵법을 보여줬다.

실제 풍경을 대상으로 하면서 시점, 구도, 표현법에서 기존 동양화의 상투성을 깬 실험정신을 보여준 '잔설'은 지금 봐도 참신하다. 안상철은 이듬해 제8회 국전에서 그루터기만 남은 논에 볏단이 쌓인 가을걷이 후 풍경을 그린 '청일'(晴日)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국전은 1949년 시작해 1981년까지 30회를 이어가며 많은 작가를 배출했고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으며 스타가 된 화가도 많다. 서세옥, 박노수, 오태학, 이종상, 박래현, 원문자, 이숙자 등의 동양화가들이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문교부장관상 2차례를 포함해 부통령상, 대통령상을 연이어 받으며 국전을 졸업해 추천작가가 된 예는 안상철이 유일하다.

그만큼 동양화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안상철에게 미술계가 박수를 보냈다. 국전에서 성공을 냈으나, 안상철은 국전의 아카데미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실험성은 1960년대에 유럽의 미술사조인 앵포르멜이 국내 화단에 추상화를 유행시킬 때 수묵추상 작품으로 나타났고, 1970년대부터는 돌과 고목 등 자연물을 활용한 작품이 '영'(靈) 시리즈로 나타난다.

안상철은 평면회화뿐 아니라 화면에 자연석 돌을 붙이고 직접 개발한 안료로 채색해 고풍스런 느낌을 낸 부조 작품을 제작했다. 분재 가꾸기가 취미였던 그는 느티나무, 팽나무 등 전국을 다니며 수집한 고목을 활용한 입체작품도 만들었다. 국전에서 성공한 동양화가로서는 드물게 파격적인 실험을 이어갔던 그였다. 그의 실험적 작품은 타계 후 2008년 그의 작업실 근처인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에 개관한 안상철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미술사 연구자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 5월 21일 0시 기준 )

  • 대구 1,316
  • 경북 1,663
  • 전국 23,462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