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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애국지사,그들은 달랐다] 일제에 대항해 분연히 일어선 학도들

독립운동 흐름 잇는 한 축(軸) 되다

옥중 순국 장세파(대구)
옥중 순국 장세파(대구)
출옥 순국 이준윤(영덕)
출옥 순국 이준윤(영덕)
출옥 순국 이원현(의성)
출옥 순국 이원현(의성)
출옥 순국 이상호(대구)
출옥 순국 이상호(대구)
옥중 순국 박찬웅(금산)
옥중 순국 박찬웅(금산)
옥중 순국 박제민(울산)
옥중 순국 박제민(울산)
옥중 순국 강두안(통영)
옥중 순국 강두안(통영)

"무쇠골격 돌근육 소년 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후렴)만인대적 연습하여 후일 전공 세우세/절세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소년남자가'에서)

"눈을들어 삼천리 구을려보니 금수강산 대한국 내나라이오/승승하게 자라는 우리소년들 이세국민 자격이 튼튼하도다/앞길에 시험과 장애되는것 조금도 사양말고 달려나가세/내팔뚝 내힘을 시험하는때 태산이 가볍고 우스우리라."('소년모험맹진가'에서)

"대한청년 학생들아 동포형제 사랑하고/우리들의 일편단심 독립하기 맹약하세/화려하다 우리강산 사랑스럽다 우리동포/자나깨나 잊지말고 길이보전 하옵시다//(후렴)학도야 학도야 우리주의는 도덕을 배우며 학문을 넓혀서/삼천리 강산에 좋은 강토를 우리 학생들이 보전합시다."(안창호 작사 이성식 작곡의 '학도가'에서)

독립운동 애국지사들은 항일 가요로 스스로 국권회복 투쟁의지를 다지면서 자라나는 세대, 청년 학도의 역할도 주문했다. 이에 학생들은 학교 담장을 넘어 활동 영역을 넓혔고,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항일 가요 속 노랫말처럼 실천하고자 했다.

◆만세운동 후 달라진 대구 젊은이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의 영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나이가 많은…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들이 정치, 사회생활, 가정에서 지배권을 가졌습니다.…젊은 사람들이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지금은 젊은이들의 시대입니다. 지난 3월에 독립운동이 발발한 이후로 수천 명이 잡혀 들어가 고문을 당하고 수감된 데 이어, 젊은이들은 우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상과 행동의 독립을 이룰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결과에 대한 두려움에 방해받지도 않습니다.…어떤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이…남녀 성별을 구분하는 장막을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악습을 폐지하고…청년 모임도 조직했습니다.…"

대구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부해리(헨리 먼로 브루언)는 1920년 1월 15일 기록에서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 이후 달라진 대구 젊은이 모습을 전했다. 이는 대구만의 현상은 아니겠지만 3월 만세시위로 학생과 젊은이 희생이 컸다.

대구의 경우, 1919년 3~4월 5차례 시위 참여 3,200여 명과 학생 비밀단체 혜성단원 15명 활동으로 1명(김용해)이 숨지고 252명이 체포돼 102명이 기소됐다. 102명의 연령 분포는 10대 28명(27.5%), 20대 51명(50%), 30대 14명(13.7%), 40~50대 9명(8%)이었다. 즉 10~20대가 79명(77.5%)으로 대구 젊은이의 희생을 알 수 있다. 이들 직업은 학생이 58명(56.9%)으로 가장 많고, 농업이 15명(14.7%), 교직원 8명(7.8%), 교회인사 7명(6.9%), 상업 5명(4.9%) 등이었으니 학생 희생을 알 만하다.

3·1운동으로 사법처리된 전국의 피소자 6,417명과 수형자 508명의 직업을 분석한 자료(김영모)도 이와 상통한다. 먼저 6,417명 피소자 직업을 보면 농업이 3,467명(54%)으로 가장 많고 상업 692명(10.8%), 학생 634명(9.9%), 종교인 443명(6.8%), 자유업 363명(5.5%) 등이었다. 또 수형자 508명도 농업 384명(75.6%), 상업 49명(9.6%), 학생 22명(4.3%) 순서일 만큼 학생 희생이 컸고 이는 뒷날에도 이어졌다.

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된 광주학생들의 대구 달성공원 기념 사진 촬영
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된 광주학생들의 대구 달성공원 기념 사진 촬영

◆독립운동 한 축…비밀결사 참여

1905년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국권회복에 나선 독립투사의 직업 등을 연구한 자료(김영모)에 따르면 학생운동의 흐름과 변화는 뚜렷하다. 즉 의병전쟁기(1905~1918년)부터 3·1운동기(1919년), 사회운동기(1920~1945년)에 사법처리된 독립투사의 공판기록 등 바탕의 분석을 보면 지역별'연령대별'직업별 변화, 특히 학생운동의 흐름은 짐작할 만하다.

먼저 의병투쟁기에 재판을 받은 독립투사 1,337명의 연령대는 10대 30명(2.2%), 20대 530명(39.6%), 30대 471명(35.2%), 40대 170명(12.7%), 50세 이상 100명(7.5%) 등이었다. 이들 직업은 농업이 가장 많은 695명(51.8%), 상업 160명(12%), 무직 106명(7.9%), 교사 45명(3.4%) 등인 반면 학생은 11명(0.8%)이었다.

그러나 학생 비중은 앞서 살핀 것처럼, 31운동 때는 전국 피소자 6,417명 중 634명(9.9%), 508명의 수형자 가운데 22명(4.3%)으로 의병투쟁기 보다 학생 참여세는 달랐고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즉 사회운동기에 재판받은 독립투사 1,486명 연령대는 10대 39명(2.6%), 20대 722명(48.6%), 30대 425명(28.6%), 40대 173명(11.6%), 50세 이상 115명(7.7%) 등인 데, 직업은 농업 495명(33.3%), 상업 81명(5.5%), 학생 80명(5.4%)이었으니 학생 활동을 나름 알 만하다.

대구에서는 3월 만세 시위 이후 대구사범학교 등 여러 학교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한 축으로 비밀결사 등에 참여해 탄압과 고문으로 순국하는 등 희생했다. 특히 1941년 터진 대구사범학교 문예지 비밀잡지 『반딧불』 발각 사건으로 35명의 실형에 박제민(애국장), 강두안(애국장), 박찬웅(애국장), 장세파(애국장), 서진구(애국장)는 젊은 나이에 옥중 순국했다.

1943년 5월에는 대구상업학교 비밀단체 태극단 사건으로 단원 26명이 탄압을 받아 이준윤(애국장)은 출옥 3일만인 10월 2일 삶을 마쳤다. 또 인천소년형무소에 갇혔던 이원현(애국장)은 1945년 3월 30일 늑막염으로 병보석 뒤 6월 14일 순국했고, 김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된 이상호(독립장)도 늑막염으로 출옥했으나 1945년 12월 9일 숨졌다.

◆학생운동 서훈자 얼마나 되나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여러 분야의 유공자료 16,932건이 소개돼 있다. 학생운동 분야 667건은 3·1운동 5,897건, 의병 2,693건, 만주방면 2,386건 다음으로 많다. 특히 분야별 여성 서훈자는 학생운동이 142명으로 가장 많고 국내항일 125명, 3·1운동 120명 등보다 앞서 당시 남녀 학생운동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정부는 독립운동사에 대표 학생항일 사례로 손꼽히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을 기리기 위해 1953년 국회가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의결하자 이날을 기념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1973년 폐지했다가 다시 1984년 부활시키고 2006년에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바꿨다. 이날 부르는 '학생의 노래' 가사는 새길 만하다.

"우리는 이 나라 자손이다/예서 내 살과 뼈 받고 자랐다/내 국토 위해서라면 물불 속에라도/ 뛰어들마 뛰어들마(1절)//…//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모이자 뭉쳐나가자 정의의 횃불을/ 높이들고 높이들고.(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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