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 그림읽기] 한승협 작 '역사 앞에서 수암림인' 장지에 수간채색 168x80cm

호젓한 산길. 지난여름 지표면 나무들을 적시고 땅을 축이며 바위를 훑고 흘러내리던 석간수(石間水)의 양은 확 줄어들었다. 계곡 옆 나무들의 푸르던 이파리도 그 찬란한 생명의 빛을 잠시 감추었고, 곧이어 가지들은 앙상한 몰골만을 드러낼 겨울을 맞을 것이다.

가을은 오행상 '금'(金)에 속한다. 건조하고 청량한 기운의 금은 쌀쌀하고 매서운 '숙살'(肅殺)의 기운을 대변한다. 봄과 여름을 거치면서 만물은 제각기 성장과 결실을 위해 달려왔다면, 가을은 그 결실을 모으거나 다음해 성장을 위해 휴지기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비단 자연만 이러한 것은 아니다. 사람의 삶 또한 준비하고 이루고 맺는 과정을 통해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준비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영혼의 자양분을 충실하게 만들어 더 나은 삶을 대비하는 계절이 또한 가을이다.

한승협 작 '역사 앞에서 수암림인'은 메말라지고 있는 계곡 바위의 굳셈과 산기슭 수풀들이 가냘프게 품고 있는 낙엽을 통해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난다. 특히 계곡을 걸어 들어가는 인물의 뒷모습은 화가 자신일 수도, 관람자의 투영된 모습일 수도 있는 메타포(metaphor)를 보여줌으로써 단순히 가을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작가적 심상을 넉넉하게 전달하고 있다. 동양화에서 화가의 생각이나 의중을 그림에 표현하는 화법인 '사의'(寫意)가 이러하다.

한승협의 이 작품이 풍경 자체를 넘어 이러저러한 생각의 꼬리를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작가만이 지닌 그림 그리는 법 때문이다. 그림은 원래 점, 선, 면으로 이어지는 2차원의 예술이지만, 원근법의 발견과 명암법의 대입을 통해 2차원의 평면에도 3차원적인 공간감을 구현할 수 있었다.

한승협의 작품이 깊어가는 가을의 계절적 산색을 완연하게 묘사하고, 고즈넉한 계곡의 깊은 공간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점묘법을 사용한 붓의 운용에 있다. 그것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인내의 먹 점이 그림 전체에 깔려있다.

또한 자칫 유채색만으로는 가벼워지기 쉬운 그림의 바탕에 먹을 사용함으로써 작가는 그림 전반을 중후하게 처리했다. 색의 운용도 눈에 띈다. 먹을 배경으로 한 색감은 담박하여 무리가 없다. 그래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능가하는 화면만의 짙은 서정성을 구가하고 있다.

게다가 먹 점을 통해 작업한 한승협의 이 그림은 마치 구조와 맥락이 잘 짜인 한 편의 시처럼, 또는 촘촘히 짠 옷감처럼 구성이 치밀하다. 계곡 사이로 물이 흐르고 구불구불 이어진 화폭 저 너머 산길까지 자연스레 인물의 발걸음을 이끌어낸다.

작가는 전통 산수화처럼 산수와 도자기, 사찰, 옛 명승지, 낡은 사진 등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지만 표현방법에서는 전통에 머물지 않고, 풍경을 넘어 실경다운 역사로 남기고자 하는 그의 의도에 맞게 사실적 이미지를 위해 먹 점과 색 점을 이용한 치밀한 점묘법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일상을 소중한 역사로 생각합니다. 그림을 빌어 시대의 시간과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작가 자신 또한 하나의 역사가 되어간다. 바로 이 점이 한승협 그림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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