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엔터인사이드] 한국형 첩보액션의 진화 ‘검은 태양’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 국정원 개혁 현실 담은 첩보액션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제공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제공

어찌 보면 한국만큼 첩보 액션의 소재로 최적인 나라가 있을까.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최근까지 첩보활동이 여전한 나라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첩보액션은 한국이어서 리얼하면서도 특별한 지점이 있다.

◆007시리즈, 본 시리즈도 아닌 '검은 태양' 첩보 액션

최근 개봉한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최근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 작품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죽음을 맞는 제임스 본드는 이로써 새로운 007의 시대를(아마도 여성 007이 등장할 지도 모르겠다) 예고하며 끝을 맺었다. 스파이 첩보 액션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007시리즈가 1990년대 들어 과거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건 미소 간의 냉전 종식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실상 007시리즈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창이던 1962년부터 만들어졌고,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였던 1980년대 초반까지 인기의 정점을 구가하다가 조금씩 힘이 빠졌는데, 냉전 종식 이후에는 소련이 아닌 테러리스트들과의 전쟁을 소재로 다뤄왔다. 새로운 적을 찾아낸 것이지만, 과거 냉전시대의 007이 소련을 상대로 했던 것과 비교하면 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여전히 냉전 상황에 있는 유일한 곳이 한반도라는 점 때문에 '007 어나더데이'는 아예 남북한의 대치 상황을 소재로 삼기도 했지만, 이런 선택은 국내에서 반감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우리가 눈앞에서 직접 겪고 있는 한반도 상황이기에 저들의 시선으로 왜곡되고 심지어 차별적 시선까지 드리워진 영화가 전혀 공감대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건 우리들이었지만 한국의 첩보 액션이 반공 같은 편향된 목적이 아닌 제대로 된 서사로 그려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제공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제공

2002년 '본 아이덴티티'부터 2012년 '본 레거시'까지 이어진 본 시리즈의 글로벌한 성공은 시들해진 007시리즈의 빈자리를 채워주었고, 이 작품은 한국의 첩보 액션물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병헌과 김태희 주연의 첩보액션 드라마 '아이리스'(2009)가 나왔고,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를린'(2013)이 상영됐다. 그리고 2018년에 실제 흑금성이라는 암호를 썼던 북으로 간 스파이의 이야기를 극화한 '공작'이 나왔다. 앞선 작품들이 스파이물이기는 하지만 다소 액션에 집중한 것들이었다면, '공작'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가져온 덕분에 본격 스파이 첩보물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렇다면 이 일련의 첩보 액션물의 흐름 속에서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은 어떤 차별성을 갖고 있을까. 시작은 마치 007시리즈나 본 시리즈를 보는 듯한 액션 블록버스터로 열고 있지만, 이 작품은 갈수록 '공작'이 보여줬던 한국적 분단 상황의 현실감으로 채워진다.

남북 간의 대결이 아니라, 그 대결 구도를 이용하기도 했던 국정원 내부의 어두운 역사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서구의 첩보 액션물로서의 허구성이 분명한, 극화된 스토리로 그려지지만 드라마는 실제 있었던 국정원 관련 사건들을 자꾸만 소환해낸다. 서구의 장르적 문법을 가져왔지만, 한국적 특수성과 현실감을 더해 국정원 개혁이라는 묵직한 메시지까지 던지는 작품. 이러한 혼종적인 차별성이 '검은 태양'을 굳이 '한국형 첩보 액션'이라 지칭할 수 있는 이유다.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제공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제공

◆첩보 액션에 드리워진 한국적 현실

'검은 태양'은 1년 전 중국 선양에서 작전을 수행하다 실종된 한지혁(남궁민)이 밀항선을 타고 국내로 들어오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밀항선 안에서 밀항자들을 대상으로 끔찍한 장기 적출이 이뤄지는 가운데, 야수 같은 형상을 한 한지혁이 그 살인자들을 잔인하게 처단한다. 해양경찰의 신고로 투입된 국정원 요원들에게 발견된 한지혁. 피칠갑을 한 채 털이 뒤덮인 얼굴로 터질 듯한 맨몸 근육을 드러내며 야수처럼 노려보는 한지혁의 모습은 '검은 태양'이 액션 블록버스터가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만들었다.

실제로 이런 기대감은 2회에 압도적인 차량 추격전으로 충족됐다. 하지만 드라마는 누군가 한지혁에게 약물을 주입해 1년 간의 기억을 지웠고, 그것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드러내면서 추리극과 스릴러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인물이 바로 '과거의 한지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기억을 지우기 전, 미리 영상을 찍어 특정 시기에 자신이 메일로 받아볼 수 있게 세팅을 해뒀다. 그 첫 번째 영상 속에서 '과거의 한지혁'은 국정원으로 돌아온 이유가 배신자를 찾아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기억까지 스스로 지운 이유는 뒷부분에서 밝혀지지만, 이러한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기억을 사이에 두고 분리된 채 서로 공조하는 과정은 '검은 태양'이라는 첩보 액션 드라마의 색다른 관전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제공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제공

한지혁이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을 찾는 과정은 당연히 국정원 내부의 적폐를 드러낸다. 이 부분에서 실제 2015년을 전후해 개혁의 목소리가 커졌던 국정원의 어두운 비리들이 등장한다.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은 물론, 선거 때마다 여론을 만들기 위해 자행됐던 북풍 간첩 조작 사건, 댓글 조작 사건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위기에 처했던 국정원은 국정농단사태가 터졌던 2016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국정원법 개정입법 등을 통해 개혁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 중 핵심사안은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정권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즉 '검은 태양'에서 한지혁의 비극은 국정원이 민간인 사찰과 선거 개입 등으로 궁지에 몰리자, 선거 판도를 바꾸기 위해 북한 고위간부를 망명시키는 북풍을 활용하려 했던 데서 시작된다. 결국 드라마는 기억까지 지운 후 돌아와 국정원 적폐세력을 찾아내 복수하려는 한지혁의 몸부림을 통해 '국정원 개혁'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제공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제공

◆연기에 온몸을 던진 남궁민이 만든 힘

사실 '검은 태양'은 MBC로서는 사활을 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지난 한해 동안 MBC드라마는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준 게 별로 없었다. 그간 쌓인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규모가 클 수밖에 없는 드라마에 대한 투자를 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MBC는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과거 '드라마 왕국'이라고까지 불렸던 시절이 무색해졌다. 이 상황에서 15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검은 태양'의 성패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제작비 150억원이 커 보이지만 드라마는 최대한 가성비를 높이는 방식으로 제작된 면이 있다. 극본 공모 당선작으로 작가료에 대한 부담을 상대적으로 줄였고, 액션도 초반에 집중시키고 중반 이후부터는 추리, 스릴러 중심으로 풀어냄으로써 비용을 줄였다. 가장 큰 비용을 차지하는 캐스팅에서도 사실상 남궁민 원탑으로 효과를 극대화시킨 면이 있다.

남궁민은, 작품을 위해 만들어낸 몸이 보여주듯이, 시작부터 드라마에 강력한 추진력을 만들었고 액션만이 아닌 추리와 스릴러에서도 시청자들을 몰입시키는 감정 연기를 선보였다. 사실상 이 대작을 전면에서 끌고 간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다만 드라마가 전반적으로 어두워 애초 기대했던 두 자릿수 시청률은 기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검은 태양'이 한국형 첩보 액션의 진화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그간 남북대결 구도에만 머물러 있던 국정원 소재 이야기를 그 내부의 문제로 방향을 틀어 놓은 점 때문이다. '검은 태양'은 현실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국정원 개혁에 대한 메시지를 첩보 액션이라는 극화된 장르로 잘 풀어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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