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역 틀에 가두지 마라”…타계 이완구 전 총리 TK와 깊은 인연

최경환에 원내대표 바통 받아 김재원 수석부대표·주호영 정책위의장과 세월호특별법 등 처리

충청 출신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꼽혔던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14일 별세했다. 향년 71세.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충청 출신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꼽혔던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14일 별세했다. 향년 71세.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충청 대망론'의 주인공으로 불린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대구경북(TK)과 인연이 깊었다. 이 전 총리는 TK의 결집력에 부러움을 나타내곤 했고 "화끈해서 내 성격과 잘맞는다"고도 했다.

그는 최경환 전 의원의 바통을 받아 충청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2014년 5월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됐다. 당시 주호영 정책위원장(현 국민의힘 의원·대구 수성갑)·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현 국민의힘 최고위원)와 호흡을 맞춰 세월호특별법 처리를 이끌어냈다. 후임은 유승민 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다.

개인적으로도 각별했던 김 최고위원은 지난 14일 빈소를 찾아 "이렇게 황망히 떠나실 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매일신문과의 통화에서 "세월호특별법 문제로 당시 박영선 민주통합당 대표와 엄청나게 싸웠는 데 헤어질 때면 박 후보의 손을 꼭 잡고 '앞날이 창창하니 도와주겠다. 잘 대화해보자'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양당의 원내대표단은 서로 생일잔치를 해줬고, 짜장면 반짝 회동을 가지면서 특별법 처리를 매듭지었다.

이완구 전 총리는 통합과 상생을 중시했다. 세월호특별법 처리를 놓고 민주통합당과 대척점에 있던 2014년에도 상대의 생일을 서로 챙겨주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대화를 이끌어갔다.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 제공.
이완구 전 총리는 통합과 상생을 중시했다. 세월호특별법 처리를 놓고 민주통합당과 대척점에 있던 2014년에도 상대의 생일을 서로 챙겨주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대화를 이끌어갔다.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 제공.

주 의원은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어른인데 너무 일찍 가셨다"며 침통한 표정으로 안타까워했다. 유 후보는 "제가 원내대표가 돼서 했던 첫 일이 이완구 총리 인준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며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애도했다. 빈소에는 김부겸 국무총리,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대표 등 발길이 이어졌다.

고인은 사실 '충청의 맹주' 같은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역 프레임에 가둬 놓지 말라는 의미였다. 지역주의 타파뿐 아니라 특정 지역을 넘어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큰 그림'을 그린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TK의 결집력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싸울 땐 하나로 뭉쳐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충남 청양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성균관대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일하다가 경찰로 옮겼다. 최연소 경찰서장(31세), 경무관(39세) 기록을 세웠다. 충북·충남지방경찰청장을 거쳐 1995년 2월 제복을 반납한다.

이듬해 총선 때 신한국당 후보로 청양·홍성에 출마해 첫 금배지를 달았다. 신한국당 후보로는 충남에서 유일했다. 1998년에는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해 대변인과 원내총무(원내대표)를 지냈다. JP는 "번개가 치고 나면 먹구름이 올지 천둥이 올지 아는 사람"이라며 정무감각을 높이 샀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충남도지사에 당선됐고, '강한 충남'을 모토로 서해안 기름유출 사태 등 현안을 해쳐나갔다.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밀어붙이자 지사직을 던지는 강단과 결기를 보여줬다.

당시 청와대의 잇단 면담 요구를 뿌리친 뒤 측근의 통장 하나 하나까지 샅샅이 털렸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공감의 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 즈음 도지사 관사에서 집무실로 걸어 출근할 때면 응원 박수가 터져 나오는 일도 있었다. 사퇴 직전에는 부인에게 "은행 좀 다녀와라. 버스 좀 타봐라"라고 하며 '민간인 복귀'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2012년 총선 출마를 준비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다발성골수증 진단을 받았다. 병마를 이긴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4월 재보선에서 당선돼 3선이 됐다. 뒷날 새누리당 대표 자리에 오른 김무성,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동시에 여의도에 입성해 화제가 된 선거였다. 이 전 총리는 77.4%를 얻으며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 전 총리는 안대희·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잇따라 낙마하자 2015년 1월 총리로 지명됐다. 취임 두 달 만에 '성완종 리스트'가 터졌고, 63일 만에 물러났다. 2년여에 재판 끝에 2017년 12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칩거하면서도 인간적인 정리를 이어갔다. 도지사 시절 정무부지사로 보폭을 맞춘 김태흠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이 지난 2019년 출판기념회를 할 때 축사를 하는 등 후배들을 살뜰히 챙기고 키우는 데 힘썼다. "지역, 여야, 당파를 떠나 지역이익과 국가발전을 위해 협력할 건 하고, 경쟁할 건 하자"는 신념이었다. 그만큼 통합과 상생을 중시했다.

주변에서는 지난해 총선 출마를 강하게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둔 가운데 역할이 기대됐지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비보가 전해진 뒤 정치권뿐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애도를 표했다. 김수현 행정수도완성 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정파를 초월해 행정수도 완성과 국가균형발전, 충청권 상생발전을 위해 헌신한 고인은 위기와 고비가 있을 때마다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며 역경과 도전을 함께했다"며 "세종시가 행정수도로 완성될 수 있도록 고인의 뜻과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나아 가겠다"고 추모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백연씨와 아들 병현·병인씨, 장례식장은 서울성모병원이다. 발인은 16일, 장지는 충남 청양 비봉면 양사리 선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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