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 섬유 전문연 통폐합, 이젠 생존의 문제다

신중언 경제부 기자

신중언 경제부 기자
신중언 경제부 기자

한국패션산업연구원(이하 패션연)의 실태가 최근 언론을 통해 속속 드러나며 지역 섬유업계가 다시 한번 시끄럽다.

오랜 기간 적자를 이어온 패션연이 지난 6월 직원들 월급조차 지급하지 못했으며, 각종 세금과 공과금을 수개월째 체납해 단전·통장 압류 조치 통보까지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는 소식이다. 사실상 연구기관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는 얘기다.

극한으로 치달은 사태의 책임을 패션연에만 묻기에는 무리가 있다. 방만한 운영과 노사 간의 갈등 등 기관 내부의 잘못도 있겠지만, 패션연을 비롯한 섬유개발연구원, 다이텍연구원 등 대구의 섬유 분야 전문생산기술연구소(이하 전문연)의 구조적인 문제도 크다.

시작은 지난 2018년 보조금 등 섬유 분야 전문연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이 끊기면서부터다. 대부분의 전문연이 기관의 존속을 위해 정부나 지자체 공모 사업에 도전해 사업비를 따내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당초 섬유 소재, 염색·가공, 패션·봉제 등으로 구분돼 있던 각 전문연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밥그릇 싸움을 벌이게 된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모두가 한정적인 공모 사업에 목매는 가운데 패션연이 가장 먼저 나가떨어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업종 특성상 연구‧개발 기능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담당하는 시장의 규모도 작기 때문이다.

영역 침범보다 더 큰 문제는 현행 구조가 섬유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공모 사업에만 목매는 상황이다 보니 산업기술의 실용화라는 설립 목적은 희미해지고 과제를, 그리고 사업비를 위한 연구·개발만 되풀이되는 실정이다.

당장 지역 기업들조차 전문연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이다.

"섬유 전문연들은 과제 하나를 따내려고 박 터지게 싸우지만, 정작 개발한 기술이 현장에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들의 연구가 기업이 아닌 과제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최근 취재차 만난 지역의 한 섬유기업 대표는 지역의 섬유 전문연에 대해 이같이 평했다. 기업 입장에선 '그들만의 리그'인 셈이다. 현장과 괴리된 기술개발은 전문연의 목적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비효율과 예산 낭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상화를 위해 시도해봄 직한 해법은 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수년째 제기되고 있는 섬유 분야 전문연 통폐합이다. 각 전문연의 기능을 한데 모으고 지역 섬유업계의 소재 생산부터 제품 기획까지의 역할을 맡을 사령탑을 만드는 것이다. 전문연 간의 무한 경쟁 체제를 없애고 예산을 집중시키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

섬유 전문연 통폐합은 앞서 수차례 시도된 적이 있지만, 기업인 위주로 구성된 각 전문연 이사회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좌초됐다. 업계의 이해관계가 강하게 작용한 셈이다. 대구시와 관리감독 기관인 산업통상자원부도 '지역 업계가 의견을 통일해야 한다'는 식의 방침을 내세우고 있다. 누구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고 실망스러운 악순환만 반복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역의 섬유산업은 전문연이 비효율을 반복하는 것을 두고 볼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 긴 추락을 멈추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선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탈피해 기술집약적인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 때문에 전문연 통폐합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이제 지역 업계와 관계기관이 대승적인 차원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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