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글쟁이의 영화 읽기 (2)

박남일
박남일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

갓 쓸 나이 때의 지기(知己)는 그레고리 펙을 "남궁원과 닮은 미남 배우"라 일렀고, 영화 '칠 년 만의 외출'에서 리처드는 "미녀들은 내가 아니라 그레고리 펙을 원하죠"라 했다. '로마의 휴일' 하면 사람들은 여배우의 청순미니 머리 꾸밈새를 들먹이지만, 나는 외려 그 남자의 매력에 깊숙이 빠져든다.

'로마의 휴일'을 보고 내가 떠올린 낱말은 '득난'(得難)이다. 왕족 아닌 신라 귀족 중 가장 높은 관등이지만, 대아찬(大阿飡) 이상은 될 수 없었던 육두품(六頭品)의 다른 이름이다. 신분 상승도 어렵지만 그 반대, 공주가 평민 노릇 하기도 참 수월찮구나. 공주의 휴일, 아니 일탈을 가능케 한 건 남(그레고리 펙)과 여(오드리 헵번)의 일관된 속임수 덕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남자의 속임수 때문이다. 최고의 신분인 여자야 금방 들통날 수밖에 없는 법. 더군다나 상대는 특종감을 잡으려 눈에 불을 켜는 기자 아닌가. 자신을 숨기고 상대의 거짓을 모른 체하는 남자의 이중적 속임수가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이다. 허위의 재미를 보여 주는 영화. 거짓말하면 손을 물어 버린다는 '전설의 입'에 손을 넣는 두 주인공의 행위는 그러므로 재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허위가 진실로 바뀌면서 남녀는 서운한 감정에 휩싸이고, 나는 거짓이 좀 더 지속되었으면 하는 아이러니 속으로 빠져든다.

'차와 동정'(Tea And Sympathy, 1956).

데보라 커의 지성미와 메릴린 먼로의 관능미, 양끝을 좋아하는 나는 잘못된 것인가. 무슨 상관이랴, 인간은 어차피 양면성을 지닌 모순 덩어리인 것.

작가가 된 톰(존 커)이 동문회에 참석해 기숙사 방 커튼을 젖히며 십 년 전을 회상하는 영화로, 정원을 가꾸는 로라 부인(데보라 커)을 내려다보며 기타 반주로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시쳇말로 '왕따' 이야기인데, 갈등의 삼각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그 삼각점에 톰과 로라 부인과 남자들이 있다. 음악을 듣고 시집을 읽으며 바느질할 줄 아는 톰은 룸메이트를 제외한 글동무들로부터 '시스터 보이'란 딱지가 붙어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친구 사이인 그의 아버지와 선생의 눈 밖에 나 있기까지 하다. 그의 편은 오로지 사모님 로라뿐. 그녀는 한 잔의 차를 애정 아닌 동정으로 받아들이는 톰의 열등의식 때문에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남자도 부드럽고 다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등 끈지게 남편과 맞선다, 결코 낯빛을 붉히거나 목청을 돋우는 법 없이. 우아한 맵시와 나긋나긋한 언행으로 그릇된 편견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 그녀를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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