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生의 땅 가야산] (34) 나라 잃은 왕족들의 원한

탑 층층마다 비운의 태자들 망국 恨 서려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 나라 잃은 황족·왕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고종이 60세 되던 해에 태어난 옹주는 고종이 그녀를 위해 덕수궁에 유치원을 따로 만들어 줄 정도로 아버지와 황실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국운이 기울며 옹주의 삶은 비극으로 점철됐다. 일본 강제유학-신경쇠약-쓰시마섬 도주와의 정략 결혼-남편에게 버림받음-딸의 행방불명-정신장애로 도쿄 인근 병원에서의 투병 등 그녀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귀국 후 노환으로 고생하던 옹주는 1989년 세상을 떠나 아버지 고종의 능소인 홍릉 뒤에 묻혔다.

그 넉넉한 품으로 찾는 이들을 푸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가야산! 덕혜옹주처럼 나라를 잃은 한(恨)에 몸부림치던 두 망국(亡國) 태자를 품어 안았다. 대가야의 월광태자(月光太子)와 신라 경순왕의 막내 아들인 범공(梵空) 스님이다. 신라에 의해 멸망한 대가야,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며 천년사직을 마감한 신라, 400년의 시차를 두고 두 망국 태자가 나란히 가야산에서 불교에 귀의, 여생을 보낸 것이다.

●마의태자의 아우, 범공 스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로는 마의(麻衣)태자가 널리 알려져 있다.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 태조 왕건에 넘기려 하자 왕의 맏아들인 태자는 울며 반대하다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 후 사람들은 그를 마의태자라 불렀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김부(金傅-경순왕의 이름) 대왕 조(條)에 자세하게 나온다. 더불어 마의태자의 아우인 범공 스님의 사연도 같이 등장, 주목을 끈다.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과 채식으로 한세상을 마쳤고, 계자(季子:막내 아들)는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 중이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사에 머물며 해인사에 드나들면서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쳤다." '해인사지(海印寺誌)'에도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계자 김덕지가 중이 되어 이곳 법수사에 들어가 해인사를 드나들면서 한때 여생을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제수천 전 성주문화원장에 의하면 범공 스님의 이름은 김황(金皇). 형인 마의태자의 이름은 김일(金鎰)이다. 두 사람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29세손이라 한다. 기록에는 범공 스님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있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 마의태자와 함께 이를 말렸으나 듣지 않아, 처자를 버리고 개골산(皆骨山: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 해인사에 들어가 스스로 범공이라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범공 스님이 여생을 보낸 성주군 수륜면 백운동의 법수사(法水寺)는 지금은 폐사가 됐다.(매일신문 2007년 12월 24일자 18면 참조) 하지만 범공 스님이 머물렀을 10세기 무렵에는 가야산을 대표하던 대가람이었다. 해인사와 더불어 성주지방 불교의 중심지로 존재했다. 이제 그 터만 남은 법수사에서 범공 스님과 관련된 흔적을 찾을 길은 없다. 그러나 시름을 삭여주는 가야산에서 천년사직이 스러진 한을 달랬을 스님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범공 스님으로부터 400여년 후의 사람인 이숭인(李嵩仁)이 법수사를 드나들며 쓴 시는 망국 태자인 스님의 처지를 비유한 듯 애잔한 정조를 띠고 있다. '가을 바람에 기러기 남쪽으로 날려 보내며, 한 마리 새로 지은 시를 푸른 산 속에 보내오. 솔의 학과 바위의 원숭이도 응당 슬피 볼 것이니, 지난해 놀러온 나그네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고.'

●달빛에 삭인 망국의 한!

대구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해인사 나들목에서 내려 해인사를 찾아가는 길. 경남 합천군 야로면과 해인사 사이 1084번 지방도로 가에 월광사가 있다. 대가야의 월광태자가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곳이다. 절은 푸근한 가야산을 뒤에 두고, 가야산 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야천(안림천)과 남북으로 흐르는 이천천이 모로 만나는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태자는 나라 잃은 설움과 아픔을 삭였다.

월광태자가 세웠다는 절의 앞마당에는 시를 적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아득한 풍경소리 어느 시절 무너지고, 태자가 놀던 달빛 쌍탑 위에 물이 들어, 모듬내 맑은 물줄기 새 아침을 열었네.' 사라지는 왕국을 지켜봐야 했던 태자의 심경을 후인들이 새겨 넣은 것으로 보인다. 천년풍상을 견뎠을 절의 3층쌍탑도 태자의 한이 아로새겨진 것처럼 쓸쓸한 분위기가 감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대가야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가야산 여신인 정견모주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이뇌왕(異腦王). 이뇌왕은 신라에 청혼,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다. 대가야와 신라와의 '국제결혼'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 책에는 월광태자가 월광사를 창건했다는 기록도 나와 있다. 522~529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월광태자는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는 것을 전후로 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다. 대가야와 신라는 왕실 간 혼인을 통해 동맹관계를 맺었고, 여기에서 태어난 월광태자는 결혼동맹의 증표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7년 동안 유지되던 결혼동맹이 신라의 배반으로 결렬되며 태자의 비운은 시작됐다는 얘기다. 어머니의 나라 신라와의 적대관계는 대가야 왕권 계승자였던 월광태자의 입장을 아주 곤란하게 만들었을 것은 불문가지다. 나아가 태자로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설움과 한도 가슴에 사무쳤으리라.

본래 월광태자는 석가모니가 과거 세상에서 국왕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의 이름. 몸이 아픈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 골수를 빼주는 선행을 베풀었다 한다. 월광태자란 이름에서 불교적 색채가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으로 태어나 나라의 패망을 지켜봐야 했던 월광태자, 천년사직이 문을 닫는 비운을 겪었던 범공 스님! 그 넉넉함으로 두 사람을 품은 가야산을 바라보며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화두와 함께 윤회(輪廻)란 두 글자가 한참 동안 머리에 맴돌았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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