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선의 힐링&여행] 담양 소쇄원

1591년 발발한 기묘사화, 스승 조광조 유배 중 사사
문하생 양산보 원통함에 별서정원 짓고 두문불출

소쇄원 전경, 정면으로 광풍각이 보이고 뒤편은 제월당, 원두막처럼 보이는 초가가 대봉대다. 소쇄원 전경, 정면으로 광풍각이 보이고 뒤편은 제월당, 원두막처럼 보이는 초가가 대봉대다.

아파트 값이 다락같이 올라버린 요즈음 마음속에 그림 같은 집 한 채 품고 싶다. 대지는 100~150여 평, 건물은 30~40여 평에 낮은 돌담을 둘러치고 현관문에서 삐딱한 마당 한가운데 동그랗게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연못 하나 파고 싶다. 이른 봄이면 분홍노루귀와 복수초가 번갈아 피고 늦봄을 맞아 앵두는 빨갛게 익고 살구가 살색으로 익어 가면 좋겠다. 여름이면 오얏(자두)이 검붉게 익고 가을이면 단감이 올망졸망 홍색으로 농익어가는 그런 마음속의 별서정원 하나 품고 싶은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소쇄원

전남 담양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조광조의 문하생인 양산보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켜 조성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원이 있다. 한국의 전통정원 중 최고의 원림으로 별서정원을 대표하는 소쇄원이 그곳이다. 별서정원이란 세속의 벼슬이나 당파싸움에 야합하지 않고 자연에 귀의하여 전원이나 산속 깊숙한 곳에 따로 집을 지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만들어 놓은 정원이다.

그가 세상을 등지고 낙향한데는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 때문이다. 그해 겨울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조광조는 화순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이에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 낙향, 현실정치에 거리를 두고 평소 꿈꿔오던 창암촌(지석 마을)에 별서정원을 짓고는 두문불출 스스로 소쇄옹이라 하였다.

소쇄원 들어가는 입구, 대나무가 우거져 있다. 소쇄원 들어가는 입구, 대나무가 우거져 있다.

소쇄원 바깥은 무심히 지나갈 법한 전형적인 시골이다. 안내에 따라 어두운 대나무 숲을 지나자 풍경이 급변하며 갑자기 밝아지는 원림을 만난다. 옛날 고기잡이를 나갔던 어부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찾아든 무릉도원이 이런 느낌일까? 흡사 별천지에 든 기분이다. 소쇄원은 크게 담장 안의 내원과 담장 밖의 외원으로 구분하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쇄원은 내원을 말한다.

원림 안에 들어서자 뒤편으로 까치봉과 장원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동서로 병풍처럼 둘러친 아래 광풍각과 제월당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았고 그 아래쪽으로 광석(너럭바위)사이를 흐르는 물소리가 졸졸졸 귀에 청아하다. 잠시 숨을 고르고자 관리사를 찾아드니 마당에는 전날 내린 눈이 쌓여서 소복하다. 그 가운데 늘어져라 누웠던 늙은 백구는 왜 이제야 왔느냐는 듯 앞발을 가슴팍까지 치켜들어 환영이다.

대봉대 전경 대봉대 전경

◆봉황이 아닌 고귀한 선비를 기다리는 대봉대(待鳳臺)

오두방정을 떨며 달려드는 백구의 환영인사를 뒤로하고 길을 나서자 길섶 아래의 자투리땅을 빌어 조성된 연지가 하얀 겨울을 한아름 끌어안고 있다. 말이 연못이라지만 손바닥마치 작다보니 방지원도(네모 모양이며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는 연못)라면 으레 갖추어야할 석가산을 품지 못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 아래쪽의 계곡에선 상류로부터 이어진 겨울이야기가 조잘조잘 끊임없다.

눈을 들자 저만치로 노란 모자를 쓴 듯 초가를 머리에 인 대봉대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덩그러니 서있다. 대봉대를 글자 그대로 풀면 봉황을 기다린다는 곳이다. 봉황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새다. 사람이 언제 어느 때 찾아들지를 가늠할 수없는 봉황이란 새를 무한정 기다릴 수가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봉황은 새가 아니라 고귀한 선비를 뜻하며 찾아든 손님을 접대, 주안상을 마주하여 담소를 나누던 곳이다. 즉 대봉대는 양산보가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등과 더불어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던 곳으로 조선중기 호남 사림문학의 교류처다.

이어 동쪽 담으로부터 김인후가 지은 "소쇄원사팔영" 가운데 있는 '양단동오'라는 시제를 따서 송시열 선생이 이름 붙인 '애양단'이 있고 바로 옆 북편 담에서 오곡문(五曲門)을 만난다. 오곡문이 생긴 까닭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다. 물길을 돌리지 않기 위해 담 밑으로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을 통해 본래부터 흘러든 물길이 암반으로 이뤄진 계곡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제월당 전경 제월당 전경

◆아들대에 한국을 대표하는 별서원림 완성

오곡문을 지난 북편 담에는 소쇄처사양공지려(소쇄원 처사 양산보의 오두막집)란 흰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쓴 글씨를 만난다. 이어 제월당이다. 제월당은 소쇄원 주인이 학문에 몰두했던 공간으로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군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가 있고 1~2명이 겨우 기거할 수 있을 정도로 소박하다. 대청마루로 누구나 쉬어가며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세속의 찌든 때를 내려놓고 올라앉으면 가슴이 탁 뜨일 정도로 시원하다.

소쇄처사양공지려 소쇄처사양공지려

묏등처럼 동그란 동산 위로 떠오른 달빛을 함초롬 담아낸 제월당 앞의 쪽문을 지나면 광풍각(光風閣)이다. 계곡 옆에 자리한 광풍각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소쇄원을 찾는 이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사람이 기거하기에는 지극히 좁은 공간으로 손님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기 위해 간단한 각종 서적과 거문고 등을 보관했던 장소로 보인다. 광풍각의 풍광을 빛내기 위해 옛날에는 계곡에 물을 안고 돌아가는 물레방아가 있었다.또한 광풍각 옆의 암반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조경은 고려시대의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양산보에 의해 조성되기 시작한 소쇄원은 아들인 자징(子澄)과 자정(子淨)대에 고암정사와 부훤당을 갖춤으로써 일대의 최고의 별서원림으로 완성되었고 이후 임진왜란 때 건물이 폐허가 되었으나 손자 천운(千運)이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 공간 구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밝음과 어두움, 빛과 그늘의 적절한 반복과 조합이다. 그 음영의 효과는 공간의 크기 변화에 따라 증폭된다.

오곡문을 지난 도랑물이 죽림을 지나 아래로 흘러가고 있다. 오곡문을 지난 도랑물이 죽림을 지나 아래로 흘러가고 있다.

◆마음으로 그리는 소박하고 담백한 소쇄원

소쇄원을 온전하게 보고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소쇄원도가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산보의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라는 유훈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환갑을 바라다보는 나이에 문화재와 관련한 공부에 매진하던 지인이 담양 소쇄원을 아느냐 물었다. 지나는 길에 바람처럼 다녀왔다니까 훗날 다시 갈 기회가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란다. 그런 가운데 가슴으로 느껴다보면 속옷 깊숙이 감쳐진 속살을 보듯 또 다른 정원을 볼 수 있을 거라며 깨알 같은 충고다.

별서정원은 담양 소쇄원을 포함, 호남 3대 정원으로 완도 부영동, 강진 백운동이 있으며 그 외에 경주 독락당, 양동마을 무첨당과 관가정, 담양의 면앙정과, 환벽당 그리고 식영정 등등의 민간원림이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왕궁에도 원림을 조성했으니 창경원후원(구:비원)이다. 다른 민간원림에 비해 소쇄원이 특별하게 대접받는 것은 자연에 동화되고 자연 속으로 은근하게 녹아들어 있는 듯 없는 듯 소박하면서도 담백함을 내면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오는 길에 청풍은 대나무 숲에서 비단자락이 스치듯 살포시 일고 나무울타리위에 내려앉은 잔설은 중천에 뜬 햇볕을 고스란히 품어 보석처럼 반짝인다. 무언가 잊은 듯 허전하여 조심스런 발걸음이 닿은 관리사 앞에는 떠나는 객이 못내 서러운 듯 작별을 외면한 백구가 눈밭에 오도카니 앉아 오수에 빠져있다.

 

글·사진 이원선 시니어매일 편집위원 lwonss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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