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항상 따뜻한 선배이자 선생님인 여웅연교수님에게"

故 여웅연 교수의 생전모습. 본인제공. 故 여웅연 교수의 생전모습. 본인제공.

여웅연 교수님이 7월 25일 미국 플로리다에서 코로나19로 서거하셨다. 고인은 아주 스마트하셨지만, 긍정적이고 유쾌하신 분이었다.

교수님은 1960년 경북의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생리학전공 조교수로 재직하셨다. 당시 우리는 실험 기자재나 연구비가 부족하여 열심히 노력했으나 만족할 만한 연구 성과를 얻기는 어려웠다고 하셨다.

어느 해 교수회의에서 "학생이 몇 명 정도 낙제하면 그 친구의 공부가 부족한 것이지만, 많은 학생들을 매년 낙제해야 한다는 건 교수들이 잘못 가르친 것이다. 학생보다는 교수들의 문제 아니냐?"라는 발언을 하였다. 당시의 교수 사회는 상하가 유별났기에, 소장 교수로서는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함에도 불구하고 군기 잡는 수업 분위기를 유지하고 성적 미달로 마구 낙제시키는 건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의과대학의 낙제는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반응은 "뭐 이런 버릇없는 녀석이 다 있나?"였다. "조교수급 이하는 모두 나가!"라는 학장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다른 젊은 교수들과 함께 회의장에서 쫓겨났다. 학장의 유감 표명을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교수님은 실망하여 사표를 제출하고 미국으로 떠나 핵의학을 전공하여 시카고대학 교수가 되었다. 의학자로서 유명해졌고, 나중에는 켄터키 대학의 주임교수로 재직하셨다.

20년 전 미국에서 열린 핵의학회서 故 여웅연(왼쪽)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재태(오른쪽 두번째) 교수. 본인제공. 20년 전 미국에서 열린 핵의학회서 故 여웅연(왼쪽)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재태(오른쪽 두번째) 교수. 본인제공.

나는 전공의 시절인 강의에서 선생님을 처음 뵀다. 이후 나도 같은 전공을 하게 되었기에, 지난 30년간 교수님께 자주 연락을 드렸다. 사실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첨단의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늘 무거웠기에 부탁과 함께 어리광도 부렸다. 그러나 교수님은 항상 사랑으로 대해 주셨고, 어려운 부탁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의 모교와 후배 사랑은 유별났고, "국적은 바뀌어도, 학적은 영원하다"를 자주 언급하셨다. 의학학술지와 장비들을 자비로 구입하여 보내셨고, 거금의 장학금도 출연하셨다.

1980년대는 국제학회에서 우리나라의 논문 발표는 드물었는데, 교수님은 모든 한국 발표자를 찾아내어 격려하고 손수 만든 기념품도 주셨다. 이는 90년대 후반에야 중지됐다. 교수님은 학문의 깊이와 폭이 너무나 넓어 일생동안 다가가 보지 못했던 곳도 많았는데, 젊을 때부터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며 축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 후학들에게 듬직한 받침목이 되어주셨던 선생님의 서거는 참으로 애통하다.

모두에게 따뜻하셨던 선생님이 벌써 그립다.

여웅연 교수님의 후배이자 제자인 이재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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