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따뜻한 사람 '박동준'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대구 출신 패션디자이너 박동준. 대구 출신 패션디자이너 박동준.

 

당신의 삼우제가 있던 날, 대구 삼덕동의 태국 음식점에 갔더랬습니다. 9월 24일 넷이서 점심을 함께 했던 그 식당 말입니다. 그날 앉았던 그 좌석에서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습니다. 9월의 당신은 좀 초췌해 보이기는 했지만 화려한 벨트로 멋을 냈더군요. 점심 후 카페에서 당신은 달달한 것이 당기는지 케익을 두 조각이나 주문했었지요. 정말이지 그날이 꿈이었나 싶네요. 이렇게 빨리 당신이 떠날 줄 상상조차 못했는데 말입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때가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1979년 연말 아니면 80년 연초쯤 이었나요. 언론계 김귀자 선배와 함께 찾아간 미쓰김 텔러 김선자 선생 자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큰 키에 어깨를 덮는 풍성한 퍼머 머리의 당신은 푸근한 인상과 구수한 유머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더군요. 얼마후 동성로 코코 의상실에서 푸른 빛깔 겨울 반코트를 맞추면서 당신과의 개인적 인연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원단장사를 했던 어머니가 원단값 대신 의상실을 인수한 것이 계기가 돼 대학 4학년때 패션업계에 발을 내딛게 됐다지요.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지만 뭐든 열심히 파고 드는 열정이 당신을 주저앉게 내버려두지 않았겠지요. 지병으로 서울에서 내려와 있던 디자이너 이종천 선생에게 집중적으로 디자인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한후 의류학과 박사과정까지 수료했지요.

박동준 박동준

20대 중반부터는 대학 강의까지 뛰며 동분서주했고요. 때마침 빅 룩(Big Look)이 패션계를 휩쓸면서 큰 옷을 잘 만들던 당신에게 날개가 달렸고, 대구 대표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하게 됐지요. 디자인하랴, CEO로 일하랴, 패션쇼하랴, 공부하랴, 강의하랴……. 한마디로 몸이 부서져라 앞만 보고 달려갔던 시절이었을 겁니다.

대봉동 신축 사옥에 갤러리까지 열었으니 더더욱 바빠질 수 밖에요. 42년간 몸담았던 패션계 은퇴 후에도 여전히 쉴 줄을 몰랐었지요. '아름다운 가게' 공동대표, '세계패션그룹(FGI)' 회장,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이사장 등 사회활동에도 열심이었지요. 병마가 온 몸을 갉아먹는 줄도 모르고 그저 일, 일, 일…….

장례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승집 개(말)가 죽은 데는 가도 정승 죽은 데는 (문상) 안간다'는 옛말이 당신에게는 틀렸다는 사실에 기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애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잘 사셨구나, 실감했습니다. 대구사랑이 남달랐던 당신이었던만큼 재산 사회환원 소식을 들으니 더욱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당신의 부재를 믿기가 힘듭니다. 언니 같은 친구 박동준씨! 평생을 쉼없이 달음질쳐왔던 그대여! 더이상 고통없는 그곳에서는 편안히 쉼을 누리시길 빕니다. 그리워하던 동생 박정우 교수와 못다한 남매의 정도 나누시기를. 샹송가수 줄리에뜨 그레꼬처럼 언제나 검은 옷을 즐겨입었던 그대는 우리에게 '마음 따뜻한 사람' '나누기를 좋아했던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코코 박동준' 그 이름이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전경옥 전 매일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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