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전투를 기억합시다"…안강전투 전사자 위령비, 내년이면 70주년

문화재 등록·국가수호사적지 지정 등 "관리하고 알려야" 목소리

경주시 안강읍 용운사 경내에 있는 안강전투 전사자 위령비. 안강전투 초기였던 1950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을 방어하다 숨진 이들을 위한 위령비다. 김도훈 기자 경주시 안강읍 용운사 경내에 있는 안강전투 전사자 위령비. 안강전투 초기였던 1950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을 방어하다 숨진 이들을 위한 위령비다. 김도훈 기자

경북 경주 안강읍과 포항 기계면은 6·25 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로 꼽힌다. 지리적 특성상 부산 공격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북한군은 이곳에 주력부대를 투입해 이른바 '8월 대공세'를 펼쳤다. 그런 만큼 국군에게도 안강·기계 사수는 절체절명의 것이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사' 등에 따르면 1950년 8월 9일 북한군 제12사단이 기계를 점령하자 국군 수도사단은 13일 제1연대를 기계 남쪽 안강으로 보내 방어에 나선다. 16일 제17연대가 기계 남쪽 고지를 탈환한 데 이어 제1연대가 안강 서북쪽 일대에서 역습을 펼쳐 18일 오후 국군은 기계를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9월 초 안강은 적의 손에 넘어간다. 같은 달 중순 다시 안강을 탈환한 국군은 안강 북쪽 어래산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산 정상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뀔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다.

1개월여 간의 안강전투는 북한 주력 부대의 부산 침투를 봉쇄하는 결과를 낳았고, 국군이 북진하는 발판이 됐다는 점에서 빛나는 전공으로 꼽힌다.

경주시 안강읍 용운사 경내엔 안강전투 전사자 위령비가 있다. 안강전투 초기였던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을 방어하다 숨진 이들을 위한 위령비다.

비석 받침돌엔 '단기 4283년 7월 7일'이란 한자가 새겨져 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950년 8월 20일이다. 그 아랫줄엔 20여명의 사람 이름이 있다. 안강전투 초기 전사자를 합동으로 장사 지내기 위해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용운사 주지 대성스님의 설명이다. 스님의 설명이 맞다면 6·25 전사자를 위해 세운 위령비로는 시기가 가장 앞설 것으로 추정된다.

위령비 모습도 독특하다. 사각 기둥 비석 위에 태극기를 새긴 철모 형태의 머릿돌을 얹은 보기 드문 형태다.

위령비는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비문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과 그 아들 마의태자가 등장한다. 전투에서 희생된 군인들의 영혼을 이들에게 봉안한다는 내용이다. 경순왕과 마의태자를 모신 왕룡사원이 인근에 있는 점으로 미뤄보면 1950년대까지도 이 일대엔 이들을 신으로 추앙하는 토속신앙이 퍼져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위령비 옆면에 새겨진 비문엔 한자의 음을 빌려 쓴 이두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이두를 혼용한 비문의 의미, 비석에 새겨진 전사자가 정규군이었는지 인근에 살던 학도병이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은 풀어야 할 숙제다.

대성스님은 "신도 외엔 찾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대중의 관심 밖에 있어 안타깝다"며 "내년이면 위령비가 세워진지 70주년이 되는 만큼, 문화재 등록이나 국가수호 사적지 등으로 지정해 제대로 관리도 하고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경주 안강 용운사 주지 대성스님이 안강전투 전사자 위령비 앞에서 비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경주 안강 용운사 주지 대성스님이 안강전투 전사자 위령비 앞에서 비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경주 안강 용운사 주지 대성스님이 안강전투 전사자 위령비 앞에서 비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경주 안강 용운사 주지 대성스님이 안강전투 전사자 위령비 앞에서 비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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