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상)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학과 교수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학과 교수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학과 교수

통일신라 말기, 신라의 국력이 쇠퇴해짐에 따라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이 후삼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격전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 가운데 우리 지역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동수)전투는 견훤과 왕건이 목숨을 건 한 판의 처절한 전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견훤에게 크게 패해 쫓기던 왕건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 후삼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은 한편의 역사 드라마이다.

TV 연속사극 '태조 왕건'은 2000년 4월〜2002년 2월 총 200회에 걸쳐 방영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인기 드라마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드라마 '태조 왕건'을 통해 대구의 공산전투가 소개돼 대구 지역 브랜드를 홍보할 좋은 기회를 가졌으나,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당시 팔공산 곳곳에서 벌어졌던 크고 작은 여러 전투를 비롯해 파군재(동구 지묘동)에서 왕건 군사가 궤멸되어 왕건 홀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들은 치열했던 전투 상황과 왕건의 심정을 잘 나타내준다. 필자는 927년 팔공산에서 일어났던 공산전투에 관해 역사적 자료와 구전을 토대로 2차례에 걸쳐 지명 유래를 추적해본다.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탈하기 위해 쳐들어오는 견훤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라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한다. 처음에 태조 왕건은 공훤 장군으로 하여금 1만 명의 군사를 데리고 신라를 도우러 가게 한다. 그러나 상황이 다급하여 왕건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직접 거느리고 출정하게 된다. 때는 고려 태조 9년(927년)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개성에서 출발하여 빠르게 행군한 왕건 군대는 마침내 팔공산 기슭 칠곡 부근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팔공산 자락에서 숙영을 하게 되었고, 그곳이 지금의 팔공산순환도로변에 위치한 대왕골이다. 이곳 지명은 대왕골, 대왕암, 대왕재(동구 덕곡동과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 경계)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대왕은 바로 왕건을 의미한다. 당시 기병 5천 명이 대왕골(현재 대구선명학교와 송광매기념관 등이 위치한 곳)에서 숙영하는 동안 왕건은 수행 장군들과 대왕암에 앉아 전략을 숙의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그때 왕건이 앉았던 바위가 대왕암이며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은 대왕골에서 송광매기념관을 운영하는 권병탁 전 영남대 교수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나이 드신 지역 주민들에게 오래전부터 들어왔다고 한다. 즉, 공산전투와 관련한 최초의 장소는 대왕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낸 후, 왕건 군대는 곧바로 지금의 동화사 방면으로 진군하여 일단의 견훤 측 소규모 병사들과 교전하여 승전하고 주력부대를 치기 위해 다시 진군하게 된다. 이때 견훤의 주력부대는 영천 은해사 옛터 부근(태조지)에 매복하여 왕건 군사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이러한 계략을 모른 채 이곳까지 오게 된 왕건 군대는 매복하고 있던 견훤 군대로부터 불시의 공격을 받아 상당수의 군사를 잃어버린다. 퇴각하던 왕건 군대가 먼 길을 온 탓에 체력이 떨어지고 사기도 저하된 상태에서 지묘동 작은 고개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사기가 오른 견훤 군사들이 진군나팔을 불었고, 그 나팔 소리를 들었던 지묘동의 작은 고개가 바로 나팔고개다. 동화천변을 따라 퇴각하던 왕건 군대는 동화천이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동화천 건너편에 주둔하던 견훤 군대와 다시 전투를 벌여 여기서는 왕건 군대가 승기를 잡게 된다. 동화천을 두고 양 군사들이 쏜 화살은 동화천 바닥을 가득 메우게 되었고, '화살로 가득한 내(川)'라는 의미의 살내 또는 전탄(箭灘)이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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