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왕의 호칭-조(祖), 종(宗), 군(君)에 담긴 뜻은?

[신병주 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조선 영종, 정종이 영조, 정조로... 묘호가 바뀐 사례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 역사를 주제로 한 강의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는 왕의 호칭에 관한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조', '종', '군'을 쓰느냐는 것이다. '군'에 대해서는 그래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반정으로 폐위된 왕들은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왕자 시절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

'조'와 '종'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의 왕 중 '조'의 칭호를 쓰는 왕 대부분은 후대에 추숭되는 과정에서 '조'를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왕의 호칭은 사후에 종묘를 신주에 모시는 과정에서 왕의 업적을 한 글자로 표현하고, '조'와 '종'을 붙이고 묘호(廟號)라 하였다. 예를 들어 학문에 뛰어났다는 뜻의 문종(文宗), 어질었다는 뜻의 인종(仁宗), 효성이 지극했다는 뜻의 효종(孝宗)을 꼽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조'는 창업한 왕에 대해서만 쓰는 호칭이었다. "왕업(王業)을 창시한 임금을 '조'라 일컫고 계통(系統)을 이은 왕을 '종'이라 일컬었음은 고금(古今)의 떳떳한 법식이었다"는 실록의 기록은 이러한 원칙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려의 경우 첫 왕인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의 호칭이 부여되었다. 몽골 간섭 시기에는 왕의 호칭이 강등되어 '충'(忠)을 앞에 붙이고, '종' 대신에 '왕'의 호칭을 사용했다. 태조 이후 '조'를 붙인 왕은 없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창업 군주 이성계에게도 '태조'의 호칭이 부여되었다. 그런데 조선의 왕은 이후에도 '조'를 붙인 사례가 많다.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을까? '종'보다는 창업한 왕에 부여하는 '조'의 호칭을 쓰는 것이 왕을 보다 높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태조 이후 '조'의 호칭을 처음 받은 왕은 세조다. 왕의 호칭은 사후에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물론 세조는 자신의 호칭을 알지 못한 채 승하했다. 세조의 다음 왕인 예종과 신하들은 세조의 묘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조'를 쓰기로 정했다.

세조가 창업한 왕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한 까닭에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목적도 담겨 있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역시 반정 주체 세력들이 인조의 위상을 높여야 자신들의 입지도 커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선조의 처음 묘호는 '선종'(宣宗)이었다. 그러다가 광해군은 1616년 선조가 임진왜란을 극복하여 나라를 재건한 공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묘호를 선조로 바꾸었다. 영조, 정조, 순조 또한 승하 직후의 묘호는 영종, 정종, 순종이었으나 후대의 왕들이 추숭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묘호가 바뀐 사례다.

세 명의 왕 중에서는 순조가 가장 먼저 '조'의 호칭을 받았다. 철종 때인 1857년 순종에서 순조로 묘호가 바뀌게 되는데, 순종이 순조로 될 수 있었던 데는 철종을 왕으로 만들어 준 순조의 부인 순원왕후의 영향력이 컸다. 대비로 있으면서 철종을 움직여 남편의 위상을 높인 것이다.

고종 대에 들어와서는 1890년 영종(英宗)이 영조로, 1899년 정종(正宗)이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다. 순조도 '조'가 된 마당에 영종, 정종처럼 훌륭한 군주에게 '조'의 호칭을 부여하는 것이 왕의 도리라고 고종은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조'의 호칭은 정변에 대한 합리화 작업이나 후대의 추숭 작업 과정에서 부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조'의 호칭을 받은 선조나 인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왕으로 전혀 높은 평가를 할 수 없는 왕들이다. 역사 속에서도 세종과 정조처럼 그 이름만으로도 존경과 자부심의 대상이 되는 왕들이 있다. 현재의 정치 지도자들도 훗날 그 이름을 떠올릴 때 늘 닮고 싶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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