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침묵

박병욱 대구중앙교회대표목사

박병욱 대구중앙교회대표목사 박병욱 대구중앙교회대표목사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나에게 있어서 휴가란 언어와 생산의 시간에서 벗어나 침묵과 관찰과 수용의 시간이다. 매일 듣던 라디오 뉴스도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전혀 보지 않았다. 새로운 소식이 없을까 하여 틀었던 텔레비전에서 종일 무한 반복되는 같은 내용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의 공간이 시원해졌다.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

사건 사고 소식은 앵커가 소개해 주는 제목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잔혹한 범죄에 관하여 시청자의 호기심이 충족될 정도로 보도한다면 그것은 이미 과잉 보도다. 전 국민의 범죄 지식이 올라가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걱정이 시작된다. '모방 범죄를 촉발시키는 거 아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경찰이 부실 수사로 종결 짓는 건 아닐까?'

사건이 보도되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보험은 들었대? 보상액은 얼마래? 그만하면 많이 받았네' 같은 루머가 퍼지고 성급한 언론 보도까지 나간다. 곧바로 관계자의 신상털기가 시작된다. 불과 며칠 안 되는 애도 기간을 지내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빈소에 영정이 아직 걸려 있는데, 사람들은 애도가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이 더 많다. 유족들은 슬퍼할 시간도 없이 온갖 루머에 고통을 당한다. 사회적 애도의 기간이 너무 짧아져버렸다.

우리는 극심한 고통에 처한 이를 어떤 언어로 위로해야 하나? 위로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언어가 관계의 경계선에서 멈추는 것이 침묵이다. 그때는 언어가 아닌 침묵과 동반과 공감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슬픔은 당사자가 스스로 감당해야만 하는 영역이 있다. 극도의 슬픔 가운데서도 스스로 애도할 충분한 시간과 분위기가 주어져야 한다. 침묵의 때에는 존재로서 위로한다. 존재로서 소통하고 느낀다.

성경에 욥이라는 의인이 나온다. 그가 하루 만에 전 재산을 자연재해와 강도를 당해 다 잃고, 10자녀가 다 죽고, 몸에는 불치의 병이 찾아왔다. 아내는 그를 저주하며 떠났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위로하러 찾아갔다. 그들은 위로의 말조차 찾지 못해 침묵하며 슬픔을 함께했다. 언어의 소통 대신 존재의 소통이다. 좀 더 원초적이다. 위로의 시선, 따뜻한 포옹, 꽉 잡아주는 악수, 음식과 잠자리를 챙겨주는 행위로 소통하는 것이다. 이때가 참 위로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말을 시작했을 때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훈계와 저주와 심판의 말이 되었다. 욥에게는 더 큰 고난이었다. 욥은 너무나 억울하여 자신의 고난도 잊은 채 친구들과 논쟁에 몰입한다.

우리는 사고의 궁금증을 어디까지 물어보아야 하는가? 당사자가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서 꼭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싶은 유혹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언어 과잉이 문제다. 바닷속의 쓰레기처럼, 우주를 떠도는 쓰레기처럼, 우리 언어가 존재의 쓰레기가 되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 언행이 SNS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평생 소리 내어 말한 음성이 우주를 떠돌며 메아리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어리석은 말들, 성급한 말들, 잔혹한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 영혼의 빈약함과 사악함을 만방에 알려주고 있다. 빨리 거두어 들이는 방법은 없을까? 중세의 침묵수도회는 1천 년 전에 이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새로 생산되는 언어 쓰레기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언어 소비도 줄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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