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당부하지 마시라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공동대표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누구도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는

대한민국 국민의 대표 될 수 없어

국민에 '당부하겠다' 말하지 말고

'부탁의 말씀을 드리겠다'고 해야

 

제국주의가 몰려오던 서세동점의 시대, 고종은 대신(大臣) 수십 명만으로 조선을 지켜내려 했다. 당연히 힘에 부쳤지만 그래도 궁궐 밖의 다른 선비, 다른 백성과는 의논하거나 소통하려 들지 않았다. 대개의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어도 백성의 힘에 기댈 생각은 없었다. 그들에게 백성은 훈육의 대상이지 자신들처럼 조선의 근간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서구 열강과 바로 옆 일본이 제각기 수천만 시민계급의 힘을 바탕으로 강력한 무기와 남아도는 힘을 분출하며 짓쳐들어오던 때였다. 그 어마어마한 힘과 맞서야 함에도 고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매국노 이완용,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우국지사 이범진 등의 근왕주의자들에만 의지해 국체를 보존하려 했다. 양반이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람은 빼고 여자는 말할 것도 없이 빼고 대다수 상민(常民)도 빼야 했으니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것밖에 안 된 건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유림, 즉 선비들에게도 함께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충절의 선비, 매천 황현(黃玹)도 그랬다. 그는 경술년의 국치가 있자 "나라가 500년이나 사대부를 길렀음에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하나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할 노릇이 아니겠는가?"라며 음독 자결했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라는 절명시를 남긴 그가 동학교도들을 동비(東匪) 또는 비적(匪賊)이라 칭하며 비하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니 신분의 벽은 그만큼 두껍고도 높았다.

모든 백성의 힘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도 세계사적 격랑 속에 버티고 서 있기조차 힘든 19세기 후반이었다. 이래서 저들과는 함께 못 하고 저래서 이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하니 그렇게 해서 나라를 지켜낸다는 건 기실 가당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 나름 애쓰며 버티던 왕과 그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안녕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일제에 나라를 넘겼다. 주먹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않았던 그들에게 백성의 존재는 마지막 순간까지 머릿속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려진 백성들은 스스로 일어나 자신들이 주인인 나라, 즉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웠다. 과정은 길고 힘들었지만 그 간난의 세월은 전과 달리 평민과 양반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했다.

경북의 혁신 유림들은 솔선해 노비를 해방시키고 가진 재산 모두를 송두리째 독립운동에 바쳤다. 평생 한학을 갈고닦은 유학자였음에도 먼저 나서 수학과 과학 등의 서양 학문을 배웠고 나이 어린 제자에게도 진심으로 존대하며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동지로 대했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양반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되었다.

1917년, 예관 신규식(申圭植) 등은 '대동단결선언'에서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바로 민권이 발생한 때임을 밝힘으로써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1919년 3월, 그 나라의 주인들은 선언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실이었음을 3·1만세운동으로 증명했다. 이어 4월 11일, 이국땅 상하이에서 민주와 공화를 기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임시헌장 제1조로 채택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100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이제 누구도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는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없고 시민과 함께하지 않고는 시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을 수 없다. 정치를 하겠다면 그 마음이 참이든 거짓이든 형식과 절차만큼은 따라야 하고 그렇게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국민이 분명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내년이면 총선이다. 미리 말하건대 '소통하겠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라. 나라의 주인과 소통하고 싶다면 부탁처럼 말해야지 시혜처럼 말하면 안 된다. 우리의 선조들은 나라의 주인인 왕과 소통하려 신문고를 두드리고 격쟁을 해가며 고생고생 애를 태웠다. 그리고 만약 선출되거든 국민에게, 시민에게 '당부한다'는 말하지 마시라. 유권자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나라를 위해, 지역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당부'가 아니라 '부탁의 말씀'을 드리는 게 맞다. 100년 전에 이미 결정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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