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구 3·5 독립만세운동

김태형 신부·영남 교회사 연구소장

김태형 신부·영남 교회사 연구소장 김태형 신부·영남 교회사 연구소장

"뜻있는 분들이여! 한국의 부모들은 그들의 아들들을 바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학교를 마련하게 도와주십시오." 1914년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를 만들기 위해 세계 각지의 은인들에게 후원자가 되어줄 것을 이렇게 애타게 호소하였다. 그 결과 여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개교한 성유스티노신학교, 그곳은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한 터전으로 착한 목자가 되려는 꿈을 안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수련하고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 3월 5일 바로 그곳에서 대구에서 가장 먼저 대한독립을 위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미 3·1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지만 대구경북 지역엔 그 함성이 아직 울려 퍼지기 전이었다. 성유스티노신학교, 학교 특성상 외부와의 소식이 차단된 곳. 그곳을 드나드는 교사로부터 3·1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해 들은 신학생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직은 착한 목자로서의 길을 준비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민족의 아픔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결의하였다. 3월 9일 시내 약전골목에서 있게 될 만세운동에 합류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침으로 다른 이들과의 연대성을 드러내고 조국의 독립에 조금의 힘이라도 보탤 것을. 그리하여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수작업으로 준비하였다. 하지만 며칠을 더 기다리기에는 조국을 사랑하는 그들의 가슴이 너무 뜨거웠다. 그들은 그날 저녁 학교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이 노래에 그들이 추구하는 희망을 담았다.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사람을 그렇게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인권을 말살하고 인간을 그렇게 짐승 취급하면 안 된다고…. 초대 한국교회의 신앙 선조들이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며 가졌던 그 정신으로, 목숨을 버릴지라도 결코 버릴 수 없었던 그 정신으로, 불의한 세상을 만들고 부당하게 사람들을 억압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향해 저항의 소리를 높여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하지만 내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 선교사였던 교장신부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먹었다. "너희들이 왜 이러느냐. 나라가 독립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희들의 소명은 독립되는 너희 조국 동포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다. 독립운동은 너희들이 하지 않아도 잘될 것이다"라면서 간곡히 만류하는 교장신부로 인해 3월 9일 신학교 밖으로 나가 만세운동에 합류하려 했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신학생들의 열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4월 3일 신학생들은 다시 한 번 만세운동 참가를 계획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수업을 계속할 경우 신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막을 수 없다고 우려한 신학교 교장신부가 방학을 앞당겨 달라고 주교에게 건의하여 그해 방학은 5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3·1운동에 대한 한국 교회 선교사들의 미온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3월 5일부터 시작하여 대중들과 함께 연대하고자 했던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의 만세운동은 조국의 아픔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신학생들의 고귀한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지내며, 대구에서 최초로 울려 퍼진 독립만세운동, 불의에 맞서고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고자 했던 대구 3·5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새롭게 재조명하면서 그들의 정신을 오늘 우리들이 되새기고 계승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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