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시간의 매듭

김일광 동화작가

겨울 시간이 내려앉은 밭에서 뒤늦게 배추를 수확했다. 이웃 할머니는 '추위가 덮치기 전에 배추를 끊으라'며 지날 때마다 재촉하였다. 그러나 좀 더 키우고 싶은 욕심에 차일피일 늦추다가 그만 한 차례 추위를 겪고 말았다. 추위가 들기 전에 추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배추가 계획대로 자라주지 않았다. 9월에 모종 파는 이가 토양 소독을 꼭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무시하였다. 우리 가족이 먹을 배추에 살충제를 뿌릴 마음은 아예 없었다. 더구나 유익한 벌레까지 죽게 한다는 나름대로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모종을 심은 뒤에 도무지 자라지 않았다. 걱정을 하다가 우연히 잎을 뒤집어 보았다. 모종의 그 작은 잎 밑에는 쥐며느리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이놈들이 모종의 진액을 다 취하는 바람에 자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뿌리를 갉아 먹은 바람에 시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시 모종을 구입하여 보식을 하였다. 한 번, 두 번 보식하는 사이에 벌레를 이겨보겠다는 일종의 오기까지 발동하였다. 심고 또 심고 하느라 정작 배추는 자랄 시간을 얻지 못한 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맞고 말았다. 저마다 주어진 시간이 있건만 배추는 그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하였다.

하루 반짝 좋은 볕이 내려서 얼었던 배추를 녹여 주었다. 밑동을 두 손으로 눌러 보았더니 제법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배추에 주어진 그 짧은 시간을 수확했다.

모두들 '송년, 망년'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수확하고 있다.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온 삶에서 잊어야 할 기억과 떠나보내야 할 흔적을 정리하고 있다.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엄연히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저마다 주어진 시간으로 나름의 삶을 경작하고 또 수확한다. 봄날 벚꽃이 휘날리듯 시간이 날린다면, 인동꽃잎이 떨어져 쌓이듯 우리들의 시간이 보인다면 어떨까.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저마다 가졌던 시간의 질과 삶의 결과와 세상의 평가가 서로 다름을 보게 될 것이다. 자랑할 일도 없어질 것이며, 부러워할 일도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배추가 자라지 못한 것은 쥐며느리나 오기 탓이 아니라 텃밭 배추에게 주어진 시간의 모습이 아닐까. 이웃의 배추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텃밭의 배추는 배추 나름으로 제 시간에 맞는 당당한 제 모습일 뿐이다.

잊어야 할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시간 위에 또 시간은 쌓여갈 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따지고 보면 새로운 시간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리라. 다만 생각이 새로울 뿐이다. 그래서 연말이라는 매듭, 그 매듭을 만들어 생각의 새로움을 더하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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