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발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수원대 교수

베드로 성당, 아름다운 성당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 그렇듯이 너무나 많은 인파를 불러 조용히 존재할 수가 없는 성당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알려고도 안했던 것 같네요. 거기 베드로가 영험하다는 사실을. 베드로 상의 발에 입을 맞추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서요?

생각해 보면 '영험'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수많은 인파가 들끓는 곳에서 조용히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서 기도하는 김정숙 여사의 사진이 정갈하니 시선을 끕니다. 성자의 발에 입을 맞추고 그녀는 무엇을 빌었을까요? 거기에 서면 나는 무엇을 빌게 될까요? 당신이라면?

기원은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대부분은 그런 걸 비느냐고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간절한 것이 '나'를 떠난 이에게는 한심한 것, 단순히 기복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빈다는 것은 그것이 기복에서 시작했어도 기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빌다보면 원하는 것도 스스로 정화되니까요.

공부는 꽤 하지만 그래도 모른다는 고3 아이를 둔 친구가 한 말이 재미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밖에 할 게 없어. 결국엔 '운'이 있어야 함을 깨닫는 게 지금의 우리나라 대학입시거든. 운에 기댄다는 것이 한심하지만, 어쩌겠니? 내가 지금 그 깜깜한 터널에 들어와 있는데! 아무 것도 해줄 게 없어. 그러니 비는 거야."

많은 것을 해주고 있는 엄마가 아무 것도 해줄 게 없다고 해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해가 되니까요. 마음이 가지 않은 곳에선 돈 만원을 내고도 생색이지만, 마음이 가면 주고 또 줘도 아무 것도 준 게 없다 믿게 되지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서 아이의 짐, 아이의 고뇌, 아이의 화를 이해하고 받아주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바로 그 '한심한 것', '사소한 것'을 품고 품으며 생은 사소한 것들의 징검다리로 이루어진 신비의 꿈임을 배우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시가 가까웠으니 교회를 가든, 절에 가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에전엔 그런 행위를 기복이라 비웃었는데 이제는 비웃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잘나 사는 것이 아니라 복으로 사는 것임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아마 부처님 발이든, 성자의 발이든 발에 입을 맞추고 기도하고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뭐지요? 거기엔 지금 신화적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얀마에 갔더니 거기 사람들은 부처님 발에 입을 맞추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건한 행위가 인상적이어서 나는 발에 입을 맞추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눈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니지요? 발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가장 낮은 발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가장 낮은 마음, 마음의 깊고 깊은 바닥 자리에서 올라오는 소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품고 있었던 내 마음의 빛일지도 모릅니다.

삽화 권수정 삽화 권수정

사람들이 발에 입을 맞추는 그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소원을 듣는 성자 베드로는 예수를 사랑한 제자, 부활한 예수가 나의 양을 먹이라고 했던 바로 그 제자지요? 그런데 아시나요? 베드로는 예수를 배신한 적이 있는 제자라는 사실을.

예수의 수제자로서 베드로는 스승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거라고 맹세합니다. 원래 맹세라는 게 믿을 게 못되는 장담인 경우는 종종 있지요? 거짓맹세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평화로울 때의 장담이 그만큼 허술한 거지요? 오죽하면 한용운님이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맹세도 차디찬 티끌이 되어 한숨의 미풍에 날아간다 하겠습니까?

스승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거라 맹세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닭이 울기 전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거라고 예언합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었지만 베드로는 스승 예수가 잡히던 날 밤에 예수일당으로 찍히는 것이 두려워 닭이 울기 전 자기 스승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예수는 왜 그런 예언을 한 걸까요? 닭이 울기 전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의 예언은, 베드로 너는 겨우 그런 존재야, 하고 각인하는 것도 아닐 거구요,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불신을 드러낸 것도 아닐 겁니다. 예언의 능력을 자랑하는 건 더더욱 아니겠지요.

때때로 '나'에 대한 '나'의 확신은 믿을 게 못되지 않나요? 자신에 대해 우리는 대부분 무지하고 무식합니다. 왜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문장이 최고의 지혜문장이겠습니까? 베드로를 향한 예수의 예언은 사랑한다면서 사랑도 모르고 자기도 몰랐던, 힘없는 '나'를 대면케 하는 스승의 일갈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기막힐까요.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겠다 믿었던 그런 스승을 두려움 때문에 부인했으니. 연약하고 비겁한 자기 민낯을 대면하고 부끄러움으로 만신창이가 된 겁니다. 복음서 기자는 베드로가 "몹시 울었다, 비통하게 울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자기를 꿰뚫어보았던 스승의 말씀이 몹시도 사무쳤을테니.

비통하게 울어보셨나요? 때때로 울음은 스스로도 놀랄 돌발적인 언어이지 최고의 기도입니다. 눈물이 흐르려 할 때는 울어서 물길을 내줘야 합니다. 답답한 것, 막힌 것, 감춰져 있던 것이 물이 되어 흐르고 흐르도록. 그 정화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요?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인 줄 알았던 스승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스승을 부끄러워했던 부끄러운 자기만 덩그렇게 남은 거지요? 얼마나 막막하고 얼마나 절망적이겠습니까? 자신에 대한 엄청난 실망감에 감당하지 못할 상실감이 쓰나미처럼 덮쳤겠지요.

그런데 비통하게 우는 참회의 시간, 자기 정화의 시간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허물을 벗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 그림자와 대면하는 그 지옥의 시간을 감당하지 못한 유다, 완벽주의자 유다는 너무 큰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참회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실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넘어지고 배신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반면 회심한 베드로는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납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입니다. 베드로는 허물이 없어서 반석인 것이 아니라 허물을 벗었기 때문에 반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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