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가을 타기

김정희 대구사이버대 상담 심리학과 교수

김정희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외래교수 김정희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외래교수

아침의 선선한 공기를 느끼면서도 가을이 한동안 실감 나지 않았다. 그만큼 올여름은 유난히 길고 더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짧은 것처럼 시간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시간이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같은가 보다. 그렇게 가을이 왔다.

그러나 가을은 어떤 이에게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 모습은 '가을 탄다'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 보았을 법한 '가을 탄다'는 증상은 별다른 에피소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왠지모를 쓸쓸함이나 울적함이 든다. 혼자서 낙엽 지는 거리를 거닐고 싶거나, 진한 커피 향을 맡으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흘러나오는 노랫말에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다소 우울하게 보이는 '가을 탄다'라는 말은 참 재미있다. 이동수단도 아닌데 '탄다'라는 표현을 쓴다. 마치 어디론가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곳은 붉은 단풍의 화려한 가을 풍경과 달리 바로 우리의 내면이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잊었던 일들을 다시 곰곰이 생각하고, 또 놓친 일들에 대해 반성과 후회를 한다. 때론 '나는 누구인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자문을 하기도 한다.

몇 해 전의 일이다. 대구시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심리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거기서 만난 어느 공무원의 이야기이다. 그는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공무원이 되었다. 자신의 하찮아 보이는 행정 일이 시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명감으로 자녀들과 외식 한 번 제대로 못 했다. 그랬던 그가 한 달 뒤에는 퇴임한다고 하였다. 그에게 남은 건 빛나는 업적도 훈장도 아닌 허전한 이별이었다. 그리고 몇 번의 상담 이후 그는 "내가 시청을 짝사랑했었어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에게 청춘은 조직의 소모품이 아닌 사랑으로 보낸 열정이었다. 그의 삶이 반짝반짝 다시 빛난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었던 뜨거운 가슴을 안고 그는 못다 한 가족과의 시간을 만들기로 했다. 그의 여생은 또 다른 빛깔로 반짝일 것이다.

어쩌면 어느 공무원의 이야기처럼 가을 타는 울렁거림은 봄부터 지내온 삶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매기고, 앞으로 남은 두 달을 잘 마무리할 기회를 주는 증상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번 가을에는 가을을 제대로 타봐야겠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가 될지라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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