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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재의 대구음악유사]공순이 비가(悲歌).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고려 공민 왕 때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서 갖고 온 목화씨를 경남 산청면 사월리 배양마을에 살던 장인 정천익이 시험재배에 성공하고 베도 한 필 짠다. 그러나 대량 생산된 곳은 경북의성이다. 조선 태종 때 삼우당의 손자 승로 선생이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 세오리에 면화를 많이 심은 후 실용성 있는 베가 만들어 진다. 대구가 섬유도시로 커진 것은 일제시대부터 지만 시작은 조선조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05년 '추인호' 사장이 인교동에 족답기 20대로 '동양염직소'를 설립한다. 이 때부터 대구의 섬유생산의 공장화가 시작된다. 동양염직소가 달성동으로 옮겨지면서 달성동과 비산동 일대는 직조공장 단지가 조성된다. 1917년부터는 여공도 대량 채용되기 시작하고 1920년이 되자 달성공원 부근에는 20여개의 직조공장이 생겨간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흰구름 솜구름 탐스런 애기구름, 짧은싸스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돌아가네." -노래를 찾는 사람- '사계'

공순이들은 땀 속에 헤엄치고 노래는 매끄럽다.

기원전 2천년경 "아내가 짠 세초(細草)가 있으니 이 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고 임금에게 비단을 바쳤다. 임금은 비단을 사용하고 남는 것은 창고에 두고 국보로 삼았다."

세오녀가 짠 비단을 연오랑이 임금에게 바쳐 제사를 지내고 나머지는 국보로 삼았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연오랑 세오녀' 편에 실려 있다. 우리나라는 삼한시대부터 견직물을 생산하였고 신라시대에는 마직물과 견직물 생산이 활발해진다. 경주의 배후도시였던 대구도 이 무렵부터 비단생산의 시작이 된다. 비단이 공장단위로 대량 생산되는 것은 1918년에서 1920년 사이다. 일본인들이 설립한 '이다주', '가다포', '조선제사' 등이 생기며 대구는 성주, 군위, 예천지역에서 원료를 들여와 양질의 생사를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되고 중하품은 시중으로 흘러나와 '동양 염직소'가 명주를 생산하게 된다. 1943년부터 1,700여 대의 직기가 명주의 대량 생산을 시작하게 된다.

"저기 가는 저 각시 공장에 가지마소, 한 번 가면 못 나오는 저 담장이 원수라오, 가고 싶어 가는 가요? 목구멍이 원수이지, 이내 몸 시들거든 사다리나 놓아주소," -전래 노랫가락.

생사공장 여공들의 한 맺힌 노래다.

일제 강점기 대구에는 '가다쿠라', '대구제사'와 '조선생사' 등의 국내최대의 3대 생사공장이 있었다. 생사는 미국으로 수출되어 한 해 약 400만원의 거금을 벌어들었다. 세 곳의 생사공장 여공을 약 2,200여명이 있었는데 20%가 대구, 달성 출신이고 80%는 군위, 경산, 칠곡, 선산, 김천, 청도, 상주, 밀양 등지에서 온 15세에서 18세의 어린 처녀들이었다.

끓는 물에 고치를 삶아 번데기를 빼내고 남은 고치로 실을 뽑는다. 제사를 위해 여공들은 하루 종일 끓는 물에 손을 넣어야 하니 살이 짓무르고 벌건 살점이 들어났다. 김에 뜨고 더위에 달아 얼굴은 항상 푸석푸석하다. 하루 14시간 일하고 쉬는 시간은 점심 먹는 15분뿐이었다. 어린 공순이들이 가족봉양을 위해 한번 가면 못 나올 수도 있는 화탕지옥(火湯地獄)에서 목숨을 건 고달픈 일을 하루 종일하였다.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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