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세종 7년 한 갖바치의 죽음

하응백 문학평론가

하응백 문학평론가
하응백 문학평론가

세종 7년(1425년) 가죽신을 만드는 이상좌라는 사람이 집 앞의 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개국 초기부터 조선 조정은 화폐개혁에 착수했다. 고려 때부터 화폐를 만들어 거래에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으나 거의 실패를 했기에, 태종은 종이돈인 저화(楮貨)를 본격적으로 유통시켰다. 하지만 저화의 화폐 가치가 날로 떨어지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태종은 "나중에 명군이 나오면 이를 시행할 것이다(後有明君出而行之)"라는 말을 남기며 저화 유통 정책에서 한 발 물러났다.

세종은 아버지의 실패를 교훈 삼아 새로운 시도를 했다. 저화와 함께 조선통보라는 동전을 제조하여 온 백성이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세종 5년부터 조선통보를 제작, 유통에 착수해 세종 7년 2월 18일 공식적으로 이를 사용하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면 백성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백성들은 포나 쌀로 교환하는 관습을 바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벌금이나 세금도 조선통보를 내도록 했으며 일반 소액 상거래에도 반드시 조선통보를 사용하도록 했다. 만약 상인이나 장인들이 조선통보를 사용하지 않으면, 중범은 사형에 처하고 경범은 장 100대에 가산 몰수 후 수군(水軍)에 편입시키도록 하는 어마어마한 처벌 조항을 함께 제시했다.

이런 조치가 시행된 직후에 갖바치 이상좌는 자신이 만든 가죽신을 쌀 1말 5되와 바꾸었다가 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시서(京市署·상인 및 시장 감독관청)에 잡혔다. 법대로 하자면 가죽신을 팔아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쌀을 사야 했으나 그는 관습대로 거래했던 것이다. 경시서에서는 이상좌의 나이를 감안하여 곤장을 때리지 않고 8관의 벌금을 내도록 했다. 가난했던 이상좌는 이웃에게 빌려 1관의 벌금을 냈으나 경시서의 독촉이 계속되자, 자살로 삶을 마감해 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세종은 깜짝 놀라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나라에 입법(立法)한 것은 돈을 많이 이용하도록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죽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상좌가 죽은 것은 반드시 경시서에서 가혹하였기 때문이니 내 마음이 아프다. 너희는 그 실정을 조사하여서 아뢰어라. 만약 가혹하였다면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 더불어 이상좌의 집에 쌀 3섬을 주고, 받았던 속전은 되돌려 주도록 명했다.(1425년 8월 23일 실록)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삶을 기름지게 하려 했던 태종과 세종의 화폐개혁은 결국 실패했다. 숙종 대에 이르러 상평통보가 주조되면서 태종과 세종이 그토록 바랐던 동전화폐의 유통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라의 새로운 정책이 백성을 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정책 입안자의 의욕이나 논리적 당위성만으로는 백성들의 삶이 실제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책의 입안이나 입법도 중요하지만, 세종도 그랬듯이 그 시행 과정에서의 부작용을 세심히 살피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부작용이 심하다면 그 입안 자체를 무효화할 수도 있어야 한다. 세월이 몇 백 년 지났어도 그러한 원칙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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