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한여름 밤

박시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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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뒤란을 지나면 큰 우물이 있었다. 두레박을 내려 휘휘 저으면 저 깊은 곳에서 시원한 물이 한가득 올라왔다. 찰랑거리는 물을 꿀꺽꿀꺽 마시면 아무리 땡볕의 더위도 시원하게 느껴지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물에 수호신이 살고 있는데, 물을 낭비하거나 우물을 더럽히면 신이 노하여 마을에 궂은일을 내릴 거라 믿었다. 옆집 상 할머니는 어린 내가 우물에 드나드는 게 영 못 미더웠던지, 해가 지면 신이 짐승이나 사람으로 둔갑하여 나만 한 아이를 잡아간다고 했다. 나는 상 할머니의 말을 찰떡같이 믿었으므로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물을 길어 물두멍을 채워야 했다.

늦게 귀가하신 아버지는 짐승들의 여물을 챙긴 뒤, 마당 구석에 쑥대'익모초 말린 것들과 추진 풀 몇 아름 얹어 모깃불을 놓으셨다. 연기는 바람이 통하는 어디든 들락거렸는데, 그럴 때면 온 집안에 쑥뜸을 놓은 듯 목구멍이 칼칼하고 눈이 매웠다.

갓 지은 보리밥을 고봉으로 푸고, 된장'호박'풋고추만 성글게 썰어 넣어 끓인 된장찌개와, 텃밭에서 갓 따온 가지를 쪄 만든 냉국과, 푸성귀 한 움큼 숭숭 썰어 간장'마늘'고춧가루에 참기름 한 방울 대충 버무린 나물무침으로 차린 밥상은 허기를 달래기에 더없는 만찬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평상을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면 누렁이도 입맛을 다셨다. 어디서 왔는지 두꺼비도 두어 마리 와 있곤 했다. 누가 온들 한 숟가락 밥이 아까우랴. 우리는 곧잘 밥덩이를 짐승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담장이 없는 우리 집은 한없이 너그러웠으며 마당에 발 들이는 생명은 다 한 식구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서로 나눠 먹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금방 밥상을 물리고도 허기진 시절이었다. 갓 쪄낸 감자와 옥수수를 먹으며 온 저녁을 재잘대다 눈꺼풀이 풀리면 평상 위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잠이 들었다. 밤이슬에 이불이 눅눅해질 무렵, 부풀어 오른 오줌보를 어찌하지 못해 그만 스르르 흘려버린 그 따뜻하고도 민망한 액체에 놀라 눈을 떴다.

하늘엔 무수히 많은 별과 환한 달이 밤새 나를 비추고 있었다. 밝아서 더 민망해지는 시간, 아랫도리를 수습하기 위해 슬그머니 마당을 나섰다. 우물이 있는 곳은 이상하리만큼 달빛도 별빛도 미치지 못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함 속에 풀벌레 소리는 등골마저 서늘하게 했다. 보이지 않아 더욱 선명해지는 건 상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결국 우물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고 돌아서던 내 유년의 여름밤은,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왜 그렇게도 서늘하기만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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