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컬럼

 
[백옥경의 과학둘레] 생각 깊은 모방

[백옥경의 과학둘레] 생각 깊은 모방

독창성은 단지 사려 있는 모방이라고 한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의 말이다. 독창성이 세상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기존에 이미 나와 있던 것을 조금 더 재치 있는 방식으로 개선하는 데 있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창의적인 발명이라 여기는 많은 것들이 알고 보면 그렇다. 제임스 와트가 끓어 넘치는 주전자 뚜껑을 보고 홀연히 증기기관을 발명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인류 역사 최고의 발명품으로 많이들 꼽는 것에 종이, 문자, 도르래, 페니실린, 칼, 도자기, 나침반, 시계 같은 것들이 있다. 모두 우열을 다투기 힘들 정도로 인류 문명에 크게 공헌해 온 것들이다. 그러나 그중 기술적인 정교함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다. 시계, 특히 기계식 시계다.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기계식 시계의 내부에는 여러 개의 톱니바퀴들이 연결되어 시곗바늘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근대 이후 시계는 그것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태엽을 사용하고 있으나 최초의 동력은 줄에 연결된 무거운 추였다. 기계식 시계는 14세기 유럽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것의 제작을 가능케 한 것이 13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폴리옷-굴대 탈진기라는 이름도 낯선 부품의 발명이다. 탈진기는 추의 중력으로 톱니를 움직일 때 그 움직임이 규칙적이 되도록 고안한 장치다.그것으로 시계는 특유의 똑딱똑딱 소리를 낸다. 탈진기의 구조에 대한 발상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누가 그걸 처음 발명했는지 확실치 않다. 당시 유럽에는 적지 않은 수의 수공업자들이 있었고 탈진기는 그 당시 시계 제작자들 사이에서 구름처럼 일어난 깊이 있는 모방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 후 그것은 여러 과학자들이 알아낸 진자의 등시성 같은 과학 원리의 적용으로 정확도는 물론 실용성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기계식 시계가 조선에 전해진 것은 북경으로 건너간 사신이 서양 신부로부터 추동식 시계를 얻어온 1631년이었다.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이란 책에 의하면 조선에서의 기계식 시계는 신기한 서양 물건이라는 것 이상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일각을 다퉈야 하는 사회가 아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만드는 데 몰두하는 행위를 학자들이 학문을 통해 수양해야 할 근본을 해치는 행동이라 여겨 그랬는지도 모른다.조선에서 기계식 시계를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매우 적었다고 한다. 그들이 시계를 만들고 깊이 있는 모방의 단계까지 나아가기에는 어깨너머로 가르치고 배울 기술도 사람도 부족했던 것이다. 해시계와 물시계를 발명한 세종 이후 새로운 시계의 제작과 확산이 이뤄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기술은 또 다른 기술을 낳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기술이 과학의 발전과 맞물려 수레바퀴 구르듯 전진하고 있었다.얼마 전 한 과학발명대회에 심사를 하러 갔다. 심사위원 중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 법무사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디어란 세상에 없다는 전제하에 심사가 이루어지지만 표절에 대한 검열은 필수다. 학생들의 발명품은 기존 것을 모방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러한 과정을 겪어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곳에서 원래의 아이디어를 비틀고 변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계속 고민하다 보면 생각과 생각을 연결하고 언젠가는 기존의 것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결과에 상관없이 그러한 과정을 경험하는 일이며 그걸 통해 재미와 성취감을 맛보는 것이다.요즘 초등학생 장래 희망으로 과학자는 순위에서 멀리 밀려나 있다. 과학자가 1위였던 적도 있다. 1970, 80년대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때였다. 서구에 비해 출발에서부터 한참을 뒤져 있던 우리의 과학기술은 선두 그룹의 뒤를 쫓아가기에도 벅찼다. 비록 짧은 시간에 큰 성과를 이뤘지만 닮고 싶은 대상에서 과학자가 멀어지게 된 건 그 속에 깊이 있는 모방의 과정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모방은 창조로 가기 위한 출발점이라지만 무언가를 빼보고, 곱해보고, 변경해보고, 뒤집어보고, 합쳐보고, 연결해보는 생각 깊은 모방이라야 빛을 발한다.

2020-06-15 17:30:00

[석재현의 사진, 삶을 그리다] 진실의 기억

[석재현의 사진, 삶을 그리다] 진실의 기억

요즘 언론에서 이용수 할머니를 뵐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했듯 '위안부의 역사' 그 자체인 할머니들, 그분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참혹한 삶을 용기 있게 증언한 분들이자 인간의 존엄을 향해 누구보다 용기 있는 걸음을 걸어온 분들이기 때문이다. 한 발 한 발 아픔으로 내디딘 귀한 길에 '돈'이 얽혀 세상의 가십거리가 되니, 할머니의 눈물이 더욱 안타깝다.내가 위안부 이용수 할머니와 김분선 할머니를 처음 뵌 것은 2004년이었다. 탈북자들의 해상 탈출을 취재하다 중국에서 감옥살이를 한 후 1년 2개월 만에 돌아온 한국, 한동안은 작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렸지만 2005년 김분선 할머니의 장례식은 나에게 카메라를 다시 잡게 만들었다. 그렇게 할머니들께서 들려주신 진실의 기억은 내내 내 마음 한곳에 자리하고 있다가 2014년 대구사진비엔날레의 특별전 기획으로 이어지게 되었다.필자가 기획한 '전쟁 속의 여성 Women in War'는 전 세계 여성 종군기자 11명이 기록한 참혹한 '전쟁의 기억'과 죽음보다 힘겨운 시간을 살아오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진실의 기억'으로 구성되었고 한국, 일본, 미국, 대만, 중국의 사진가들이 함께 참여했다. 그때 만난 일본의 사진가가 이토 다카시였다. 가해국인 일본의 국민이자 전 세계 최초로 위안부 문제를 기록한 사진가, 이토 다카시는 일본이 그토록 감추고 싶은 진실을 세상에 알려온 시대의 증언자였다. 그는 1991년부터 1997년까지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해 한국, 북한, 대만, 필리핀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생한 육성 증언과 사진을 책으로 남겼는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일본 지도를 벚꽃이 아닌 나팔꽃으로 수놓았다는 이유로 일본 형사에게 연행된 심미자 할머니. 혹독한 전기고문 후 정신을 차려 보니 그곳은 후쿠오카의 육군부대였고 그녀는 위안부가 되었다. 제복을 입은 일본인들에게 다짜고짜 머리채를 휘어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또 다른 소녀 역시 위안부가 되었다. 한밤중 집으로 쳐들어온 일본인은 말리는 아버지를 칼로 베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끌려간 소녀 역시 그렇게 위안부가 되었다. 순결했던 젊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소녀들, 일본군들은 거부하는 소녀들을 나무에 매달아 칼로 목을 내리쳤다. 뻔히 죽을 것을 알지만 고향까지 헤엄쳐 돌아가겠다며 검푸른 바다로 몸을 던진 수많은 소녀들….수많은 사진전을 기획했지만 돌아보면 그 전시를 준비할 때만큼 마음이 힘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한국인이지만 우리 역시 너무도 몰랐던 역사의 진실들, 내가 살아있는 증거라 외친 할머니들의 기억을 사진으로 기록해 준 사진가들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었다. 죽으면 천국에 가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다는 할머니들의 눈물은 우리가 끝까지 알아야 할 '진실의 기억'이자 일말의 숨김도 없이 미래에 고스란히 새겨져야 할 역사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2020-06-15 17:30:00

[기고] 포스트 코로나, TK 경제가 위험하다

[기고] 포스트 코로나, TK 경제가 위험하다

"코로나19 이후가 실질적으로는 더 힘들 것이다" "차라리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져 정부 지원금으로 연명하는 게 더 낫다"는 하소연이 빗발친다.필자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 20여 년 동안 대구경북에서 성공한 여성기업인으로서 한국여성경제인협회장을 역임하며 지역의 다양한 여성 경제인을 접할 기회가 많다. 국회의원 당선 인사 자리마다 기업인들은 축하 인사를 건네기 무섭게 경제 걱정으로 위기감을 실감케 하는 이야기를 쏟아낸다.특히 대구경북지역은 코로나19 확산으로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지역이기에 경제적 타격이 제일 심한 지역이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사실 이러한 기업의 어려움, 특히 지역 경제, 지역 기업의 위기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많은 지적들이 있어왔고, 오래전부터 위기가 감지되어 왔다.경제학 교과서에도 없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인해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의 결과는 아르바이트와 식당 일자리 등 단순노무직을 더욱 위기로 몰아넣었고, 실질임금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소득이 줄어드는 부작용을 보였다. 주요 일간지 경제면에는 연일 '사상 최고치 실업률' '일자리 감소' 등 기사가 넘쳐났다.여기에 코로나19가 확산되며, 설상가상으로 경제는 더 쪼그라들었다. 2017년 3050클럽(인구 5천만, 1인당 국민총소득 3만달러)에 가입한 지 2년 만에 1인당 국민총소득이 4.3%나 줄어 2009년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에 최대 폭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소득주도성장의 부작용과 코로나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소득주도성장 부작용은 숨긴 채 '기승전 코로나' 때문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문 정권의 코로나 극복 방안 또한 3차례의 추경을 보면 소득주도성장으로 해결하겠다는 고집만 보인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지역화폐, 농수산물 할인 쿠폰 지급 등 일회성 복지-현금 지원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풀어 통계 수치를 높여보겠다는 심산이다. 어느샌가 소득주도성장은 '소득 창출'보다는 '소득 소진'을 통한 단기 경기회복 정책으로 전환되고 있다.이런 연유로 지역의 수많은 기업인들은 코로나 이후를 오히려 더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과 기업에 지원금이 끊기기라도 한다면 국민은 소비를 할 수 없고, 기업은 물건을 팔 수도 없으며, 미·중 무역분쟁과 전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수출도 쉽지 않은 구조이기 때문이다.문재인 정부는 코로나 이후 비대면화-디지털 전환으로의 산업구조 변화를 지원하겠다고 하지만 이는 제조업 위주, 소규모인 지방 기업에는 그림의 떡이며, 혜택의 대부분은 첨단화된 수도권 기업들이 받을 수밖에 없다.지금이라도 정부는 코로나 이후, 매출 감소로 어려움에 처한 지역 중소 제조업체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다양한 기금 운영의 특례보증 확대로 버틸 여력을 증대시켜 주고 다양하고 과감한 단기, 중장기 지원책을 펼쳐야 한다.특히 코로나로 제일 큰 타격을 받은 대구경북 기업들이 회생할 수 있도록 정부 정책의 일부를 나눠주는 형식이 아닌 지역 맞춤형 중앙정부 지원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2020-06-15 15:25:33

[세계의 창] 미국 흑백 갈등과 정치

[세계의 창] 미국 흑백 갈등과 정치

코로나바이러스와 이에 따른 경제난 와중에 미니애폴리스의 백인 경찰관이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질식사시킨 데 대한 공분으로 연일 미국 전역에서 항의 시위가 열리고 여러 도시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Black Lives Matter' 운동가들과 정치인들은 차별 금지를 해법으로 내세우지만 흑백 갈등은 흑인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해결이 어렵다.흑인종 차별은 오랜 역사가 있다. 셰익스피어가 1603년에 쓴 '베니스의 흑인 오셀로의 비극'에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비밀 결혼을 검고 늙은 숫양과 흰 암양의 성적 관계로 흑인을 비하하는 악인 이아고의 대화가 나온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55세 이상 인구에서 흑인의 고혈압 비율이 백인의 2배에 달한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스트레스도 하나라고 한다.미국은 이민자의 국가다. 원주민 인디언은 수적으로 미미하다. 영국인(WASP·백인 앵글로 색슨 퓨리턴)에 이어 유럽 각지에서 종교적 박해, 사회 혼란, 경제난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왔다. 뒤에 온 독일인, 아일랜드인, 남유럽인, 동유럽인, 유태인은 선착순으로 차별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결국 그들은 모두 백인 그룹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흑인은 남북전쟁 종식으로 노예에서 해방되지만 차별이 계속되다가 1964년 민권법안 통과로 법적 동등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민권법 6조에 의하면 "미국인은 연방 지원을 받는 모든 프로그램과 활동의 참여나 혜택에서 인종, 피부색, 출신 국가로 인하여 제외되지 않는다"고 한다.그러나 제도와 법으로 개인의 편견이나 취향까지 규제할 수는 없다. 또 인종쿼터제에 의한 흑인우대정책은 (특히 아시아계의) 역차별을 낳고 있다. 신입생 선발에서 하버드를 위시한 일류 대학들이 흑인-히스패닉 지원자를 우대하고 아시아계를 차별하고 있다. 예컨대 2009년 프린스턴 대학은 입학사정에서 수능점수(SAT 2천400점 만점)를 아시아계는 백인보다 140점, 히스패닉보다 270점, 흑인보다 450점을 더 받아야 동등한 취급을 받았다.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사건과 같은 흑인에 대한 경찰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을 없애고 복지사(social worker)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우범지대에서 경찰이 없어지면 범죄 증가로 흑인 주민이 더 큰 피해를 본다.공무 중 민간인을 사살한 미국 경찰의 비율은 669명 중 1명(2015년)으로 크지 않다. 다만 민간인 사살로 경찰관이 유죄 처벌을 받는 비율은 1천분의 1로 극히 낮다. 경찰노조의 보호막 때문이라는데 이를 개선하면 경찰의 과잉 폭력을 줄일 수 있다.2018년 미국 인구의 13.2%가 흑인이지만 경찰에 사살당하는 비율은 26.2%로 평균보다 2배 더 높다.(그들의 95%가 남성) 그러나 살인자의 39%가 흑인임을 감안하면 경찰이 유독 흑인에 대한 검문, 수색을 심하게 하는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흑인의 범죄율이 높은 이유는 결손가정에 있다. 흑인 아동의 미혼모 가구 비율은 2018년 65%로 전체의 35%보다 월등히 높다. 아버지의 훈육 없이 자라다 보니 문제아가 많아진다. 교원노조가 장악한 학교는 아동교육보다 교사들의 철밥통 보호가 우선이다.흑인 가정이 파괴된 원인은 흑인 빈곤을 묻지마식 복지 프로그램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없어도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할 수 있으니 미혼모 가정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는 흑인 차별을 정치 선동화하고 복지지출 확대 경쟁에 나섰던 정치인, 특히 흑인 정치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차별금지법과 복지 프로그램으로 미국 흑인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한계가 왔다. 근본적인 해결은 흑인 아동이 충실한 교육을 받고 건전한 성인이 되어 취업하고 온전한 가정을 이루는 것, 즉 흑인 문화의 개선이다. 흑인 지도자들의 역할은 흑인 가정의 보호와 자조 운동에 있다고 생각된다.한국은 다행히 국내의 인종 갈등은 없다. 대신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인이 있다. 정치적 위기를 때우려고 죽창가, 토착 왜구 등 인종주의적 발언으로 국민을 선동한다. 그것이 초래하는 안보 위협과 국익 훼손을 숙지하고 대일 선린외교의 큰 정치에 나섰으면 한다.

2020-06-15 15:19:24

[매일춘추] 향촌동, 기억의 거대한 수장고

[매일춘추] 향촌동, 기억의 거대한 수장고

지난 수년간 근대 문학자료의 수집 업무를 하면서 해당 문인들과 직접 관련된 자료 외에도 대구에서 발행된 동인지와 문학 잡지 등 실로 다양한 작품들을 아카이브로 구축한 바 있다. 2012년부터 시작된 조사와 수집에서 대구의 근대 대표문인으로 선정된 47인의 유가족과 지역의 원로문인, 고서점들을 탐방하면서 사장(死藏)되어가는 자료를 발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명감을 갖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구문학 아카이브 구축으로 2013년 12월까지 1만2천여 점의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후 향촌동의 선남상업은행자리를 리모델링해 개관한 대구문학관에서도 계속된 작업을 통해 2019년까지 수집한 근대문학 작품만도 2만2천여 점이나 되었다. 하지만 수집 자료가 쌓여갈수록 처음 느꼈던 사명감, 뿌듯함과 더불어 마음 한구석에서는 걱정도 쌓여갔다.방대한 양의 작품을 아카이빙하여 상설전시나 기획전시를 통해 시민들을 위한 교육, 홍보 자료로 활용하였지만 정작 활용되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대부분 인지도가 있는 작품에만 국한되고 나머지는 다시 수장고에서 재사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기관들이 지니는 공통의 고민과 걱정이라 생각된다. 이에 대한 대처로 국립중앙도서관과 현대미술관, 경주박물관 등에서는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전시에서 활용되는 작품뿐만 아니라 수장고에 잠들어 있는 작품의 재사장을 방지하고자 오픈형 수장고를 활용하는 것으로 전시의 형태를 변화해가고 있다.문학관이 자리한 향촌동은 대구의 중심지로서 조선시대에는 관사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대구역과 신작로가 들어선 번화가였으며, 한국전쟁 시기에는 피란 속에 전국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서로 문학과 예술을 교류하던 곳이었다. 또한 산업화 시기에는 대구 상업의 중심지로 지역 경제를 이끈 곳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예전의 화려함과 인파가 북적이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당시의 이야기들과 추억을 간직한 건물들이 간간이 제자리를 지키며 그때의 거리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향촌동 일대는 근대 대구의 문화예술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를 간직한 수장고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근대골목투어'와 '대구문학로드'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향촌동의 옛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지만, 최근에는 도시의 역사와 생태를 복원하는 도시재생과는 달리 전면적인 도심의 재개발이 진행되어 옛이야기들이 부서진 건물의 잔해처럼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권번(券番)이 있었던 대구문학관 자리, 일제강점기 지역의 문화예술인을 지원하며 이근무가 운영했던 백화점 무영당, 대구 최초로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던 백조다방, 한국전쟁기 문화예술인의 만남의 장이었던 르네상스, 모나미 다방, 백록다방이 존재했던 곳이 향촌동이었다.아카이브를 운영하는 공공의 기관들이 재사장 되는 작품을 위해 운영의 형태를 변모해 가듯이 재사장될 우려가 있는 향촌동 일대의 이야기들을 세세하게 아카이브로 구축하여 지역 문화예술인들을 통해 문화자원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방향을 이제부터라도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미래는 축적된 과거의 기억을 통해 합리적으로 재창조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2020-06-15 14:27:27

[매일춘추] 마틸다

[매일춘추] 마틸다

아카데미, 대학생뮤지컬페스티벌, 뮤지컬 스타 등 딤프의 사업들을 진행하다보면 많은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을 만나게 된다. 오디션이라도 볼라치면 저마다 자신을 뽐낼 뮤지컬 넘버를 준비해오는데 본인의 캐릭터와는 잘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개 주인공이 부르는 넘버를 가지고 오기 일쑤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관객은 주인공의 시선으로 그 작품의 스토리를 따라가게 되고, 크리에이터들의 의도에 따라 사건과 시련을 이겨내는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무대 위 누구보다도 주인공은 돋보일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많은 갈채와 박수도 받게 되기에 모두들 주인공의 자리를 꿈꾼다. 하지만 주인공의 자리,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기에 아무나 할 수도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도 믿을 수 없는 실력으로 이 자리를 꿰차는 주인공들이 있다.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깜찍하고 총명했던 '마틸다'라는 한 소녀가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사기를 쳐서 중고차를 파는 아버지와 자신의 외모와 명성에만 관심 있는 댄서인 어머니, TV를 보며 빈둥거리기만 하는 오빠가 있을 뿐이다. 집안의 돌연변이와도 같은 이 천재 소녀에게 가족들은 멍청한 삶을 살길 강요하며 억지로 TV 시청을 권하고, 유아 시절부터 그녀 삶의 유일한 위안이 되어 주었던 독서를 방해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찢고 버려버린다. 하지만 시련은 학교에서도 계속된다. 180cm가 넘는 거구의 투포환 선수 출신 '트런치불'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을 끔찍이도 싫어해서 귀찮고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며 고압적인 태도를 취한다. 늘 엄격한 규율 속에 주눅 들고 위축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 심지어 꼬불꼬불 땋은 머리가 싫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을 투포환 던지듯 던져버리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겐 진심과 사랑으로 대해주는 '허니' 담임선생님이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힘겨운 학교생활을 버텨낼 수 있다. 그러던 중 마틸다와 허니 선생님은 도서관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제지간의 정을 뛰어넘은 우정을 나누게 되고, 허니 선생님과 트런치불 교장선생님과의 관계도 알게 된다. 늘 똑똑하고 총명한 마틸다는 친구들과 함께 힘을 모아 트런치불을 쫓아내게 되고, 가족으로부터도 해방되어 허니 선생님과 새로운 가족이 되어 사랑과 우정을 이어간다. 어린 나이지만 똘똘하고 긍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마틸다의 모습은 모든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아역들의 역할 하나하나가 빛이나 눈길을 뗄 수가 없다.손바닥을 최대한으로 길게 쫙 펼쳐본다. 내 손바닥 한 뼘의 길이는 겨우 20cm가 넘는다. 하지만 60cm는 내 손바닥 세 뼘도 채 안되는 길이라는 것 또한 깨닫는다. 지난 주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던 뉴스에 많은 사람들 또한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로알드 달'의 상상 속 마틸다처럼 누구나 시련과 위기를 해피엔딩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면? 적어도 '허니 선생님'처럼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소중한 단 한 사람만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부질없기만 하다. 저마다의 인생에서 각자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눈빛과 관심조차 받아보지 못한 채 떠나버린 한 영혼이 이제라도 하늘의 주인공이 되어 마틸다처럼 반짝이는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2020-06-14 16:30:00

[이른 아침에] 보수 정당과 기본소득 논의

[이른 아침에] 보수 정당과 기본소득 논의

모두에 지푸라기 던지는 것보다물에 빠진 일부에 동아줄 주는 게더 좋은 정책임을 납득시켜야 해김종인 비대위·보수 정당이 할 일4월 20일 자 본란 칼럼에서 나는 보수 정당이 재난구호금, 기본소득 등에 대해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단순히 포퓰리즘이라고 비난만 한다면 과거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고, 동의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그 배경은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노인 일자리 사업, 재난구호금 등 돈 뿌리기 정책을 이번 총선 패배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하는 사람이 많다.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정부·여당의 정책에 대응하는 야당의 자세도 문제였다.전가의 보도인 '재정건전성'을 들어 반대하다가 갑자기 '전 국민 50만원'으로 급선회하였다. 국민들은 반색하기보다 공약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총선 후 다음 대선 국면에서는 이전의 '복지 공약'과 차원이 다른 돈 선거가 더욱 노골화될 것이다. 기본소득 논란이 그 핵심이 될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기본소득 논의를 이해하고 미리 대비하지 못한 채 수세적·방어적으로만 임하다가는 게도 구럭도 놓치기 십상이다. 정권은 물론 재정건전성도 물 건너간다는 말이다.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취임 일성은 기본소득이었다. 대번에 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이 나왔다.진보 진영과 더 퍼주기 경쟁을 하는 한 집권층을 이길 수 없다는 비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지켜보고자 최종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정말 기본소득 도입에 찬성하기 위한 몸풀기라면 비판에 앞장설 생각이었다. 일자리 자체가 사라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복지정책 및 경제정책에 대한 근본적 패러다임 변화가 불가피하다. 기본소득 논의의 출발점이다.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경제 활성화를 위한 경제정책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핀란드 등 실험적으로 시도한 경우는 있지만 본격적으로 시행한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한 반면 효과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본소득에 대해 냉정한 분석 대신 감성적 접근을 하는 경우이다. 기본소득을 외면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부족이라는 감성팔이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는 익숙한 모습이다. 재정 형편을 들어 재난지원금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도 같은 맥락이었다.기본소득 등에 주목해야 한다는 나의 언급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도입에 찬성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반대만 해서는 백전백패라는 말이었다. 다행히(?) 정치권의 기본소득 논의가 가열될 즈음 김 위원장은 슬그머니 발을 뺐다. 현재 재정 상황으로 보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논의를 시작하자는 얘기였지 당장 도입하자는 게 아니었다는 말이었다.곧이어 김 위원장은 전일 보육 제도, 대학 교육 개혁 등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하나같이 차기 대선은 물론 향후 우리 사회를 흔들 굵직한 사회적 이슈들이다. 최소한 진보 진영의 공세를 차단할 수 있는 행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수비만으로 득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기본소득보다, 현재의 보육 정책보다, 정부·여당의 교육 개혁보다 더 나은 대안을 내놓는 데까지 가야 한다. 단순히 대선을 염두에 둔 선거용이라면 금방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진보 진영 이슈를 선점하는 전술적 차원에 그칠 경우 원희룡 제주지사의 말처럼 '진보의 아류'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기본소득 논의를 중심에 놓고 볼 때 김 위원장의 행보는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보수 정당과 김종인 비대위에 대한 최종 판단은 유보하려 한다. 정책적 유연성과 정치적 정체성을 얼마나 잘 조화시키는지 아직은 지켜볼 일이다. 보수라는 말을 쓰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관건은 보수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설득력 있는 정책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에게 지푸라기를 던져서는 안 된다.튼튼한 밧줄을 던져야 마땅하다. 모든 사람에게 지푸라기를 나눠 주느라 밧줄을 만들 수 없다면 온당한 일이겠는가.모두에게 던져 주는 지푸라기보다 물에 빠진 일부에게 든든한 동아줄을 만들어 주는 게 더 좋은 정책임을 납득시켜야 한다. 기본소득을 예로 들면 그게 보수 정당과 김종인 비대위의 할 일이다.

2020-06-14 15:26:45

[기고] 정치꾼의 소탐대실

[기고] 정치꾼의 소탐대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 혜왕은 촉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혜왕은 옥으로 소(牛)를 조각한 뒤 그 속에 황금과 비단을 채워 넣고 '촉왕에게 우호의 예물로 보낼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혹한 촉왕은 하루라도 빨리 받고 싶어 백성을 동원해 옥으로 만든 소를 맞이할 길까지 새로 닦았다. 길이 완성되자 혜왕은 대형 수레에 소를 싣고, 이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중무장한 병력 수만 명을 붙여 촉으로 향하게 했다. 결국 수레는 진의 군사들과 함께 유유히 도성 안으로 들어왔고, 촉왕을 사로잡았다. 작은 욕심에 눈이 멀어 큰 것을 잃는다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됐다.최근 대구 달서구의회 한 의원이 달성습지를 놓고 소탐대실을 보이고 있다. 해당 구의원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 현실과 동떨어진 말도 안 되는 발언을 해 지방자치단체 간 갈등만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달서구민의 환심만 사려는 이기주의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한다.그는 지난 8일 제271회 정례회 5분 발언에서 달서구의 자연환경 보호와 문화관광 발전의 일환으로 '달성습지 명칭 변경'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달성습지 면적 중 60% 정도가 달서구 대천·호림동에 편입돼 있고, 나머지 40%만 달성군 화원·다사읍이다"며 "그러나 현재 달성습지 명칭은 일반 주민들에게는 이곳이 달성군에만 소속된 곳으로 인식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다수의 달서구민은 달성습지 명칭에 많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달서구뿐만 아니라 달성군 지역 주민들에게도 이해와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명칭 개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구청장은 구민의 열망이 담긴 달성습지 명칭 변경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행정 지원을 바란다"고 촉구했다.즉 '자연생태의 보고'라고 불리는 달성습지를 단순히 면적이 조금 많다는 이유로 명칭을 변경하자는 것이다. 명칭 변경 논란을 빚었던 낙동강 강정고령보는 몰라도 달성습지는 절대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유명사로 알려진 달성습지는 낙동강과 금호강, 진천천과 대명천이 합류하는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보기 드문 범람형 습지로 주변으로는 충적 저지와 범람원이 발달했다. 면적은 199만㎡에 달한다. 봄이면 갓꽃, 여름이면 기생초, 가을이면 억새와 갈대가 장관을 이룬다. 철새도 빼놓을 수 없다. 잡풀과 뽕나무들이 들어서기 전, 달성습지에 모래사장이 펼쳐졌던 시절 이곳은 천연기념물 흑두루미 등 철새들의 천국이었다. 지금은 백로나 왜가리 등의 철새와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2종으로 지정된 맹꽁이 등을 볼 수 있다. 2007년엔 대구시가 이곳을 습지보호지역 및 야생동식물보호구역으로 지정한 뒤, 습지 복원과 철새 서식 환경 복원을 위해 각별히 노력 중이다. 이러한 곳을 어떻게 명칭 변경하자는 말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것도 지난해 대구시가 개관한 '달성습지생태학습관'(사업비 128억원)에 단 한 푼도 보태지 않은 달서구에서 말이다.지금 달서구의회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달성습지를 보존하면서 자연관광사업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을지 대구시, 달성군과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 시점이다. 그래야 코로나19로 고통받는 대구시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삶의 활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020-06-14 15:26:26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정종여(1914-1984), ‘촉석루’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정종여(1914-1984), ‘촉석루’

진주 남강 가에 있는 촉석루 풍경이다. 즉석에서 완성한 스케치풍이어서 필묵의 즉흥감이 주는 사생 수묵화의 눈 맛이 뛰어나다. 강 건너에서 바라본 웅장한 촉석루와 주변의 수목을 화면의 중심으로 삼고 저 멀리 허공중의 산(지리산?)과 아래쪽 강, 촉석루가 자리한 암벽 등으로 회화적 구성의 균형과 경치의 현장감을 동시에 완성했다. 눈앞의 복잡다단한 풍경을 순식간에 한 붓으로 한 장면화 한 실력은 정종여가 현장 사생 훈련을 오래 쌓았음을 보여준다.거창에서 태어난 정종여는 그의 그림 재주를 아낀 해인사 스님의 후원으로 1934-1942년 오사카미술학교에 유학하며 일본화, 서양화를 익히는 중에도 방학 등 틈틈이 국내로 와 청전 이상범에게 산수화를 배우며 당시의 미술을 모두 흡수하려 한 의욕이 넘치는 예술가였다.정종여는 산수, 인물, 화조 등을 다 잘 그렸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시리즈로 2019년 덕수궁관에서 열린 '절필시대' 전시회에 나왔던 '가야산'10폭 병풍(1941년, 28세), '금강산 전망'10폭 연병(1942년, 29세), '지리산 조운도(朝雲圖)'(1948년, 35세) 등을 보면 일본과 조선, 서양화와 동양화를 넘나들었지만 우리나라의 국토와 현실에 뿌리를 둔 실경 산수화가 그의 목표였음을 알 수 있다. 정종여가 전국을 기행하며 화폭에 담아낸 이 대작들에는 우리 산하의 자연 풍광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1940년대를 통해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었던 정종여는 1950년 9월 월북해 남한의 미술사에서 잊혀졌다.1988년에야 6'25를 전후로 납북 혹은 월북한 미술인 41명의 작품이 해금되었다. 해금된 이듬해 서울에서 정종여 회고전이 열렸을 때 도록에 실린 소설가 이병주(1921-1992)의 '지용과 청계의 남해기행'이라는 글에 정종여가 1950년 6월 진주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병주는 고향이 하동이지만 거창과 하동은 모두 진주가 중심도시여서 이들에게는 같은 '진주 문화권' 출신 일본유학파라는 유대감이 있었는데 진주농대 교수로 있던 이병주를 정종여가 시인 정지용(1902-1950)과 함께 찾아간 것이다. 정종여의 그림과 정지용의 글로 구성한 코너를 국도신문에 연재하며 남해를 기행 하는 중이었다. 통영에서는 정종여가 그림을 그리고 정지용이 시를 써 넣어 합작한 시화(詩畵)를 청마 유치환에게 선물하기도 하고 부산에서는 시화전도 열었다.정종여가 진주 촉석루를 그린 삽화는 '남해오월점철(南海五月點綴)' 제14화로 국도신문 1950년 6월 20일자에 실렸다. 며칠 후 육이오가 일어났다. 정지용은 납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고, 북한에서 정종여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내며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화분과위원장(1964년)이 되고 공훈예술가(1974년), 인민예술가(1982년) 칭호를 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하다 1984년 71세로 작고했다. 유월이라 정종여의 남한에서의 절필작 중 하나인 '촉석루'가 떠올랐다.

2020-06-14 06:30:00

[2020 세상 읽기] 21대 국회 '공감정치' 기대

[2020 세상 읽기] 21대 국회 '공감정치' 기대

변호사로서 일을 하다보면 사건처리가 잘되는 경우와 잘되지 않는 경우로 대별되곤 한다. 사건이 잘되는 경우는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공감이 잘되는 경우이다. 공감이 잘되면 의뢰인의 이야기에 집중이 잘되고 의뢰인이 겪은 일이 마치 변호사 자신이 겪은 일인 것처럼 공감이 되어 빙의가 된다. 반대로 의뢰인이 자신의 이야기에 치중하고 쟁점에 대한 구체적인 집중 없이 수많은 이야기를 널어놓으면 변호사는 사실관계를 법률적으로 구성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리고 변호사가 법률적 조언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의뢰인은 자신의 의견을 변호사에게 관철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의뢰인과 변호사 간에 공감이 잘 되지 않다보니 소통도 잘되지 않고 결과 역시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즉, 변호사가 의뢰인에 공감이 잘되고 둘 사이에 소통이 잘되는 경우에는 재판의 진행과정이 순조롭고 결과 또한 좋은 경우가 많다.소통은 인간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익힌 것을 언어를 통해서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전달받은 상대방은 언어를 통해 보고, 들으며 공감을 해나간다. 언어를 통해 소통을 하고 소통을 통해 우리는 상대와 공감하면서 상대의 생각을 읽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훌륭한 소통으로 좋은 공감이 이루어지면 상대와 나, 둘 다에게 좋은 결과가 도출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결과 말이다.소통을 통한 공감능력의 향상이 매우 큰 힘을 발휘하고 있기에 교육학계에서는 이미 지식능력 향상보다 공감능력의 향상을 교육의 주안점으로 두고 있으며, 대기업을 중심으로 직장 내에서도 위계질서를 강조하기보다 다양한 소통이 이루어 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우리 가정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어른이 이야기를 하는데 아이가 말대답을 하면 버릇없게 말대꾸를 한다고 혼내기 십상이었으나, 현재에는 말대꾸한다고 혼내는 가정은 찾아보기가 힘들다.자연과학의 영역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문화·인문의 영역에서 정확하게 정답이라고 단정 지어지는 것은 찾아보기 드물다. 법률 역시 마찬가지다. 법률의 영역 역시 한 국가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약속한 부분을 사회적 합의를 거쳐 만들어진 것일 뿐이고 시대적 변화에 따라 현 시대와 맞지 않는 부분들은 폐지되고 사회적 함의에 따라 새로운 법률의 영역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영역이 정답이 없는 곳이라면 우리는 바람직한 가치체계 정립을 위해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고 소통을 통해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내야만 한다.좋은 소통의 기술이 정치에서 작동되어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면 우리사회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사회모습을 기대하기에 우리의 정치영역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개선되어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실례로 정치적 이슈를 중심으로 정치인이 하는 토론의 모습을 보면 우리 정치권은 소통의 시대에 불통으로 일관하는 듯하다. 토론이라는 성격이 찬·반이 나뉘는 주제에 관하여 각각 서로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근거를 들어 자기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고는 하나 토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쌍방의 입장이 쏟아져 나온 후 변증법으로 가장 조화로운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은 특히 정치적인 주제일수록 서로 상대를 비방하고,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서로 과거 흠집 내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고, 결국 격해진 언쟁 속에 항상 시간이 부족한 상태로 급하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또 하나는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정당정치도 불통의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국회라는 곳은 민의를 대변하는 곳으로 각 지역구의 대표자들이 지역주민을 대표하여 모이는 곳이다. 각 지역의 이해관계가 같을 수가 없기에 대표자들은 자신의 지역주민을 대변하여 싸울 수밖에 없다. 정쟁의 장소인 만큼 소란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다만, 정쟁에 임할 때는 지역의 대표자인 만큼 소통의 수단을 활용해야 하며, 활용법은 품위가 있어야 한다. 국회는 소통이 끊임없이 작동하여야 하는 곳이고, 소통을 통해 서로 합의하고, 조율하며, 치우치지 않는 상생의 정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정당의 정강 및 정책기조에 매몰되어 마치 패거리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우리의 정당정치의 분위기라면 거대 정치세력간의 협상만 존재할 뿐 소통의 기술은 소용없어 보인다.마지막으로 정치권에서 주요 쟁점으로 다루는 사안이 과연 국민들에게 중요한 부분인가 묻고 싶다. 현재 정치권에서 중요한 핵심사안은 '공수처', '상임위 구성', '검찰개혁', '대북전단' 등이다. 이러한 사안들은 코로나 19 사태 이후 도탄에 빠져있는 국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부분은 분명 아닐 것이다. 국민들은 정치권이 국민들의 민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그 문제로 싸워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정작 국민의 민생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부분에 집중하고 그것으로 인해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 때문에 국민들은 정치권을 외면한다.정치 영역에서 '나는 당신의 상황을 알고, 당신의 기분을 이해한다'처럼 다른 사람의 상황이나 기분을 같이 느낄 수 있는 능력인 '공감능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다소 이상적인 것일지 모르나 최근 여·야를 떠나 강조되고 있는 상생의 정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제는 정치권에서도 공감을 바탕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감정치'가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21대 국회에서는 부디 '공감정치'를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김효범 변호사

2020-06-13 06:30:00

[특별기고] 코로나 속에도 '학생 교육' 계속…교사·직원·행정부 진정한 영웅

[특별기고] 코로나 속에도 '학생 교육' 계속…교사·직원·행정부 진정한 영웅

코로나19 여파로 전 세계의 교육기관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 대구국제학교(Daegu International School, DIS)도 예외가 아니다. 대구국제학교 학생, 교사, 직원, 학부모 그리고 주주들에게 지난 5개월은 가장 힘든 시기였다. 설 연휴와 1월 31일에 대구국제학교는 학생, 학부모 그리고 교직원과 함께 어떻게 코로나19 상황에 대응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2월 19일까지만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봐도 교내 수업의 불안한 향방에 대구국제학교가 2019-2020 학년 전체를 닫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2월 20일부터 발효한 대구국제학교 폐쇄 조치는 학교의 행정부가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다. 일부는 갑작스러운 결정을 불편해하고,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대구에서의 확진자 급증세를 감안할 때 학교 폐쇄조치는 적절했다. 대구국제학교 간호사들의 끊임없는 역학조사를 비롯해 학교 사무국과 시교육청과의 지속적인 소통 덕에 학교 행정부는 학생과 교직원의 안전을 위한 최선의 조치를 잘 내릴 수 있었다.학교 폐쇄조치는 사전 예고 없이 돌연 결정돼, 초기에는 일부 학생, 학부모, 교직원 사이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구국제학교는 만반의 태세를 갖춰 온라인 수업 체제를 4일 만에 확충했다. 하지만 대구에서 거의 최초로 문을 닫은 학교인 만큼 우리 교직원들은 학생들을 위해 강해져야 했고, 정상체제를 유지해야 했으며 우리의 본연의 업무인 '교육'을 계속해나가야 했다.온라인 수업 체제에서 대구국제학교의 교사, 직원, 그리고 행정부는 대단하고 진정한 영웅이었다. 교사들은 수업을 영상으로 찍고, 쌍방향 원격수업을 진행하며, 시소(SeeSaw)와 구글의 G-Suite를 이용한 창의적인 학습법을 개발했다. 대구국제학교는 다양한 설문지들을 학부모, 학생, 교사들에게 보내 온라인 수업 방식을 수정해왔다. 중등과 고등학교 수업 시간은 화면을 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단축됐다. 초등학생들을 위한 일대일 화상회의 일수가 늘어 교사로부터 맞춤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대구국제학교의 성공적인 온라인 수업 진행에서 지속적인 소통과 피드백은 필수적이었다.대구국제학교 행정부와 직원들은 대구시와 시교육청과 밀접 소통하며 학생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장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대구국제학교는 걱정하는 학부모들의 질의에 응답하고, 학교 행정부가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이끌어주며, 돌아오는 학년을 맞을 수 있도록 학교에 마스크와 소독제를 지원해준 대구시와 시교육청의 도움에 경의를 표한다. 대구에 있는 유일한 국제학교로서, 대구시와 교육청의 지속적인 지원은 필수적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안타깝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대구국제학교 주주들의 적응력과 단합성은 견줄 데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고, 학교가 어떠한 장애물에 맞닥뜨리더라도 학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어떤 힘든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크리스포퍼 머피 대구국제학교 교장2004년 5월 보스톤대학교 초등'특수교육 학사2012년 3월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학교경영 석사2014년 2월 필리핀 수빅 아메리칸 국제학교 교장2015년 4월 대구국제학교 교감2017년 8월 대구국제학교 교장

2020-06-12 19:59:15

[매일춘추] 경계

[매일춘추] 경계

사람들은 어떤 부분이든 각자만의 현실과 상상의 경계선이 정해져 있다. 그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해왔었다. 지금의 음악은 국경도 나이도 장르도 어떠한 경계의 벽에도 부딪히지 않을 만큼 자유롭고, 새로운 아이디어 속에 나날이 상상을 자극한다. 한발자국만 내딛으면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는데 그 한 발자국은 현실을 인지하는 머릿속에서는 머나먼 천리 길과도 같다.음악은 노력과 정확한 구조, 치밀한 계산으로 창조되기도 하지만, 도전 혹은 엉뚱하고 기괴한 상상으로 우연히 탄생되기도 한다. 발명품 중 하나인 녹음기는 그 당시 음악을 저장해두기 위해 쓰였지만, 1950년대 20세기 프랑스 작곡가들은 녹음기를 작곡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여러 소음들을 녹음하고 가공을 거쳐 그 당시 평가로 기괴한 음악이 재탄생하게 된다.존 케이지 역시 녹음기나 테이프를 이용한 작품들이 있으며, 그 외에 일상생활의 소리들이 음악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 사용 되었다. 예를 들어, 그의 4분 33초 동안의 피아노는 '쉼'만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시간동안 발생되는 사람들의 기침소리, 야유, 공연장을 떠나는 발자국 소리 등을 그는 음악이라 칭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20세기의 작곡가들 다수는 음악과 소음의 벽을 허무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과감하고 거침없는 변화, 상상의 자유로움에서 빗대어져 나오는 파격적인 시도 앞에 음악의 기준과 경계를 정하여 이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라는 평가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에너지와 작곡자 혹은 청중의 감정과 시시각각 달라지는 생각이 음악을 다시금 재현시키는 것이지 어떠한 틀을 놓고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실험음악가, 현대음악가들의 새로운 도전으로 빚어진 음악들은 어느새 지금의 현대음악가들의 손에서 다시금 각기 다른 스타일로 흘러가면서 시작도 끝도 예상하거나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음을 인지하게 하였고, 존중해주는 문화가 서서히 형성되기에 이르렀다.벽을 세우지 않는 작곡가들의 걷잡을 수 없는 상상의 자유로움. 시간이, 공간이 막아도 어떻게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의 현대음악에는 경계가 없다. 음악가가 생각하는 음악, 청중이 생각하는 음악의 애매한 경계는 상상의 자유로움을 허락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허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여기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흔히 접해온 음악들과 지금의 주류가 된 현대음악의 소재나 방법이 다르다하여 음악이 아닌 소음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나와 다르다 하여, 나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하여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게 만들어 던진 경계가 그 사람 세상의 자유를 빼앗진 않았을까?음악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경계는 우리가 맞이할 미래를 더디게 만들지 모르니, 과감한 도전으로 첫 경계를 허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2020-06-11 16:30:00

[기고] 뉴노멀의 새 출발은 청렴

[기고] 뉴노멀의 새 출발은 청렴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 경북도청에서는 하루 업무가 시작되는 오전 9시가 되면 경쾌한 음악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직원들은 모두 일어나 '해피댄스'를 췄다. 매주 화요일 오전 7시가 되면 '화공'(화요일에 공부하자) 특강을 듣기 위해 다목적홀로 향했다. 매주 금요일 직원 모두가 청바지를 입는 '청춘데이'도 시행했다. 올해 시무식을 직원들과 검무산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했고 맨발로 천년숲의 황톳길을 걷기도 했다. 도지사와 직원들 간 간격을 좁히고 업무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다.청사 앞마당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곳에 거대한 공룡뼈 조형물이 우뚝 서 있다. '변화하자'는 뜻이다. 민선 7기 이철우 도지사는 '경북이 다시 대한민국의 중심에 우뚝 서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이를 위해서는 "공직의 최고 덕목은 청렴이며 공직 수행은 도민을 위해 공평하고 열성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런 노력으로 경북도는 국민권익위원회가 해마다 실시하는 내부 청렴도 평가에서 줄곧 5등급에 머물러 있었으나 지난해 평가에서는 2등급이 상승해 8년 만에 3등급이 됐다. 공직사회의 변화를 공직자 스스로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전국 꼴찌에서 탈출해 변화의 순풍을 타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명확한 목표는 청렴도 1등급 달성이다.내부 청렴도 측정은 도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스스로 청렴도를 평가하는 것으로 그동안 경북의 공직사회는 스스로를 저평가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경북도는 그동안의 공직사회 내에서 관행처럼 여겨왔던 불법·부당한 공직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나아가 경북도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청렴 대책도 마련했다. 청렴경북 실현 4대 전략과제, 23개 중점과제를 선정해 고강도 청렴 시책을 추진한다. 먼저 청탁금지법 위반 사례 등을 고지하고 불편 사항을 청취하기 위해 부서장 클린-콜(Clean Call)을 시행하고 매월 1회 실국별 자체 청렴실천 교육, 자체 청렴도 향상 대책 수립 등 전 부서 '청렴책임제'를 운영한다.또 '실국별 청렴순회 간담회'와 '청렴 해피콜(Happy Call)'에 대한 피드백을 강화하고 공사·용역 관리감독, 보조사업, 민원 등 '4대 분야 실태 점검'을 통해 자체 감사 및 점검 기능을 강화할 예정이다. 아울러 '불법·부당한 관행 근절을 위한 청렴실천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특히 청렴 식권제, 청렴 퀴즈, 청렴 유튜브 제작 등 다양한 청렴 시책을 추진해 공직자 청렴 마인드 제고 및 불합리한 관행을 개선하고 전 직원의 청렴 생활화를 도모해 도정의 신뢰성을 더욱 높여 나갈 계획이다.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변화할 시기를 놓치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도태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이후 뉴노멀의 새 출발은 청렴에서 시작돼 공정과 정의가 바로 서는 사회가 돼야 한다. 도민에게 봉사하는 공직자들의 청렴도가 향상되지 않으면 경북도가 다시 대한민국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이제 도청 공직자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실의에 빠진 영세상공인, 자영업자, 중소기업인 등 도민의 경제 생활 지원과 신속한 경제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도민에 대한 무한봉사자로서 청렴으로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경상북도 공직자가 돼 '청렴도 1등급 경북'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때이다.

2020-06-11 15:25:45

[춘추칼럼]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다른 세 가지

[춘추칼럼]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다른 세 가지

지난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를 맞이했다. 현 집권 세력은 입만 열면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한다. 이 정신의 핵심은 "사회적 약자 곁에 함께 있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꿈꾼 것은 '사람 사는 세상'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었다.그런데 최근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펼치는 언행을 보면 '껍데기 노무현 정신'이 판을 치고 있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족 비리와 '감찰 무마' 의혹 등 혐의로 기소된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했다. 조 전 장관 아들에게 허위 인턴 증명서를 발급해 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최강욱 국회의원에게는 축하 전화를 걸어 "권력기관 개혁에 대한 역할"을 당부했다.평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각별했던 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국회의원이 정의기억연대 운영에 참여하면서 불거진 각종 논란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최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이라도 만들라"고 엄포를 놓자 정부는 4시간 만에 "법을 만들겠다"고 기민하게 대응했다.보수가 몰락하고 총선 압승으로 여권이 권력에 도취되어 상식 밖의 '친문 사는 세상' '특권과 차별이 있는 세상'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씁쓸하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국회법에도 없는 '4+1 연대'를 통해 제1야당을 배제한 채 누더기 선거법인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관철시켰다. 그 후에 각종 꼼수와 편법으로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만들고 총선 후에 통합했다. 민주당은 총선에서 전례 없는 압승을 거두었지만 노 전 대통령이 평소 가장 싫어했던 '원칙 없는 승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여 세력은 종종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 2기'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노·문 정부의 뿌리는 같지만 정치 열매는 전혀 다르다.첫째, 노무현 정부는 '실용적 진보'를 표방한 반면, 문재인 정부는 '교조적 진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진보 세력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자"라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관철시켰다. 이라크 파병과 제주 해군 기지 건설도 밀어붙였다. 이 모든 것이 이념을 넘어 국익을 위한 실용적 행보였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친문과 운동권 세력을 중심으로 이념 과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주류 세력 교체와 체제 변혁을 핵심 목표로 삼으면서 '토착 왜구' 등 이념으로 가득 찬 구호만 난무했다.둘째, 노무현 정부에서는 '협치 실천'이 돋보인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협치 절벽'이 지배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4월 사학법 개정으로 정국이 경색되자 청와대로 초대한 여당 원내대표에게 "야당 원내대표 하기 힘든데 양보 좀 하시죠"라면서 통 큰 정치를 주문했다. 2005년 8월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권력을 통째로 내놓겠다"고도 했다. 177석의 슈퍼 여당인 민주당은 53년 만에 21대 국회를 사실상 단독 개원했고, 그동안 야당 몫으로 지정된 국회 법사위원장마저 차지하겠다면서 원 구성을 지연시켰다. 힘없는 야당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여당이 양보하는 것이 상식이다. 야당을 적폐 세력으로 몰아가고 진영 논리에 갇혀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면 협치와 공존의 정치는 불가능해진다.셋째, 노 전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핵심 원리로 당·정 분리를 강조했다. 따라서 청와대와 집권당 간에 수평적인 관계가 구축되면서 겸손한 권력이 만들어졌다.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당·정 일치가 강조되면서 청와대가 집권당을 수직·통치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심지어 여당 지도부는 강제 당론을 통해 의원들을 거수기로 만들고 있다. 정당 민주화는 퇴보하고 오만한 권력이 꿈틀거리고 있다. 정부 여당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코로나 국난 극복의 생산적 정치를 위해 '실용 강화 원칙과 상식' '행동하는 협치' '당정 분리'라는 '노무현 국정 운영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언컨대, 국정 안정은 국회 의석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집권 세력의 제도적 자제와 관용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2020-06-11 15:21:58

[이도수의 불가사의 인도] 인도에서 발견되는 한국문화

[이도수의 불가사의 인도] 인도에서 발견되는 한국문화

문화는 흐르는 강물처럼 지역, 계층과 공유하며 또 다른 세계로 전파된다. 한국과 먼 인도 간에도 문화의 전파와 교류가 있었을까? 인도 현지 여행 가이드인 구루 반디 씨에게 인도에서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여행을 하려면 인도의 어느 지역을 방문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는 주저 없이 "남인도 타미르 지역에 가면 고대 한국과 교류한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며 한국과 인도 두 국가의 역사 연구팀들이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남인도 타미르 지역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구루 반디 씨는 "남인도 타밀주 마라 발리 뿌람에 아름다운 해변 사원이 있으며,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라 많은 휴양객들이 찾는다"고 말했다.필자는 그곳에 가면 한국 문화와 관련된 어떤 흔적이 있는지 그에게 물으니 "그 지역 전담 관광 가이드가 한국에서 온 관광객을 만나면 반드시 틀어주는 카세트 테이프가 있다. 그 테이프의 곡을 들으면 한국 관광객들은 하나같이 환호를 지른다"고 전했다. 그는 "제가 지금 그 테이프를 갖고 있지 않아 바로 틀어드릴 수는 없지만 대충 흉내는 낼 수 있다면 한번 들어보란다. Hari Ram, Sri Ram. Hari Ram Sri Ram."그가 읊조리는 곡은 영락없이 우리나라에서 불려지는 아리랑 곡조였다. 양 국가 간 언어의 차이가 있지만 한민족의 한이 묻어나는 아리랑의 구슬픈 곡조는 듣기만 해도 코끝이 찡해왔다. 그 노래 가사의 뜻을 풀이해 달라는 요구에 "Ram"은 인도 민족이 섬기는 힌두교 신이란다. 그 가사 내용은 풀이할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 정선아리랑처럼 삶의 구슬픈 애환을 노래한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구루 반디 씨가 얘기해 준 또 하나의 한국 문화 흔적은 오줌싸개 어린이들을 길들이기 위해 키를 덮어씌워 이웃집에 소금을 꾸러 가게 하던 우리의 옛날 풍습이 이곳 인도 타밀 지역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그뿐만 아니라 '인도 타밀어와 한국어 유사성에 대해'라는 한국의 네이버 블로그에는 두 언어 간 유사 언어를 비교 분석한 자료를 수백 개 올려두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예를 들어 "엄마, 아빠, 소금, 너, 나, 풀, 벼, 코끼리, 사자, 노루 등 생활 필수 어휘가 대부분이 비슷하다"고 말했다.그렇다면 이들 공통 언어들이 인도에서 한국으로 전파되었는지, 한반도에서 인도로 전파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인도에서 한반도로 전파되어 왔을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인도는 일찍이 아라비아 상인들이 개척한 해로를 따라 이웃 나라와의 교류를 활발히 해왔으며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가 중동에서 멀고도 먼 이곳 인도에까지 와서 선교하게 된 계기도 아라비아 상인들의 상선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2천 년 전 동양 문명의 변방이었던 한반도에서 인도나 중동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2천 년 전 한국은 역사의 여명기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고대 문명의 전파는 대부분 발상지에서 변방으로 지극히 느리게 이루어지며 동양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과 인도에서 변방인 한반도 끝까지 전파되는 데는 천 년 이상이 걸렸을 것이다. 고대 금관가야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 공주는 인도의 수많은 왕국 중 하나인 아유타 왕국 출신 공주였다. 꿈의 계시대로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배를 타고 김해 장유에 도착했고, 그 자리에 파고다(돌탑 보르네오 돌)를 세워 지금도 전하고 있다.중국에서는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여 대제국을 건설할 당시 이보다 더 늦게 건국한 신라의 건국설화에서는 나정이라는 우물 옆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인 박혁거세를 언급하고 있다. 그만큼 문명 발상지와 변방과는 상당한 시차가 있다는 전제로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 신라 역사에 등장하는 석탈해나 처용의 경우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해야 될 것 같다. 현재 문명 간 우열의 색안경을 끼고 과거를 해석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피안문화(彼岸文化)에 대한 앎이 차안문화(此岸文化)에 대한 이해 폭을 넓혀 줄 수 있으므로 기회가 닿는다면 인도 타밀 지역에서 한국 유사 문화를 정밀 탐색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보기로 마음먹었다.

2020-06-10 17:30:00

[김은아의 북돋움] 인삼밭에 낀 고구마

[김은아의 북돋움] 인삼밭에 낀 고구마

'거 참, 인색하네! 저렇게 매사 아껴서 부자 되겠어.' 돈이든, 수고든, 정성이든 내놓는 데 인색한 사람들을 볼 때면 이 말이 절로 나온다. '인색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재물을 아끼는 태도가 몹시 지나치다', '어떤 일을 하는 데 대하여 지나치게 박하다'라고 되어 있다.'돈에 인색하다'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칭찬에 인색하다' '마음 씀씀이가 인색하다'라는 말이 나올 법한 상황도 자주 겪는다.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한국 사람들은 웃음에도 좀 인색한 듯하다. 유쾌하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다른 이들의 능력과 장점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사람들도 많이 본다. 상대방이 잘하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한 수 배울 수 있는 스승이 생길 텐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색함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시기심과 아주 비슷하며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인색함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지 않으려는 행동에서 표출되는 심리 기제라는 것이다. 이런 심리가 강한 유형의 사람은 사회 전체나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 인색하며 오직 자신만의 '가련한 보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주위에 높은 벽을 쌓는다. 인색함은 공명심과 허영심, 질투심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아들러의 인간이해'(을유문화사)에 잘 나와 있다.주위에 마음 씀씀이가 인색한 사람들이 많은 세태를 반영해서인가. 고구마를 주인공으로 한 네 컷 만화가 몇 년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500만 뷰를 달성하며 화제가 되었다.인삼밭에서 자신을 인삼이라 믿으며 살고 있는 고구마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매일 콧노래를 부른다. 옆에 있던 인삼은 그런 고구마가 자꾸만 신경 쓰인다. 인삼도 아니면서 저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인삼은 고구마를 질투하기 시작한다. 인삼도 아니면서 행복해 하다니…. 아무나 인삼이 되어서는 안 돼. 그건 고구마의 몫이 아니야. 그래서 인삼은 기어코 고구마의 정체를 알린다. 잠시 후, 고구마는 "내가 고구마라고? 아~ 나는 고구마다! 고구마∼ 나는~ 고구마!" 이렇게 콧노래를 부르며 여전히 행복해 한다.그래서 제목이 '행복한 고구마'이다. 만화책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 합시다'(위즈덤하우스)에도 실려 있다. 인삼도 아니면서 행복해 하는 고구마를 신경 쓰느라 불행해져버린 인삼의 이야기이다. 고구마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 인삼이 기대한 반응은 이랬을 것이다. "으악! 내가 고구마라고?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 죽어버릴 거야."자신의 예상과 달라도 너무나 다른 고구마의 반응을 본 인삼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고구마의 행복을 저지하며 사는 것이 일생의 목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막장 드라마에서 악인이 착한 주인공의 성공과 행복을 막느라 정작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왜 그랬냐고 따져 물으면 악인은 결핍으로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를 토해내며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고 변명을 늘어놓느라 바쁘다.그런데 인삼은 악인의 경우와 다르게 좋은 배경을 가졌다. 굳이 고구마에게 진실을 알려줄 결핍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데 마음 씀씀이가 참 인색하다. 고 박경리 선생의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에 '사람의 됨됨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중략)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더러 보아왔다/ 심성이 후하여/ 넉넉하고 생기에 찬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중략)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인색한 사람은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라는 박경리 선생의 통찰이 주는 울림은 크다. 아들러식 표현으로 '가련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정작 나도 모르게 인색하게 행동한 적은 없는지 돌아본다.

2020-06-10 17:30:00

[오정일의 새론새평] 절대적으로 좋은 정책(政策)은 없다

[오정일의 새론새평] 절대적으로 좋은 정책(政策)은 없다

5월 20일 등교 개학이 시작되어 6월 8일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6학년이 등교하면서 끝났다. 고등학교 3학년,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을 제외한 학년은 등교를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여전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등교를 계속해야 하는가? 연기해야 하는가? 얼마 전 스쿨존에서 2세 어린이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른바 '민식이법'이 적용되는 첫 사건이다. 법원은 운전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경찰은 다시 영장을 청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운전자의 과실이 있었거나 속도가 30㎞ 이상이었다면 무기징역 또는 징역 3년 이상의 처벌을 받는다. 이 법은 과도한가? 적절한가?18세기 영국인 맨더빌(Mandeville)의 말을 패러디하면, 누구에게도 해(害)될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좋은 정책도,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나쁜 정책도 없다. 어떤 정책이 좋거나 나쁘다는 것은 다른 정책과 비교하여 그렇다는 것이다. 정부는 특정 정책으로 인해 발생하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파악해서 크기를 비교해야 한다. 이를 어려운(?) 말로 비용편익분석(費用便益分析)이라고 한다. 비용편익분석 결과, 좋은 점이 더 크면 그 정책을 시행하고 나쁜 점이 더 크면 시행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단순하고 합리적인 기준은 없다. 비용편익분석을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하면 정부는 극단적인 주장에 휘둘리지 않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특정 정책의 비용과 편익이 모두 고려되기 때문이다.신재생에너지 정책을 예로 들어보자. 향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13%에서 40%로 높일 경우 발전 단가가 오르므로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 전기요금 인상은 보다 안전하게 전기를 생산하는 데 따르는 비용이다. 시민들에게 "재생에너지를 통해 전기를 생산하면 더 안전합니다. 당신은 재생에너지 발전에 찬성합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다수가 "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를 통해 전기를 생산하면 더 안전합니다. 이에 따라 전기요금이 인상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시민들의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재생에너지 발전의 편익 외에 비용에 관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찬반 여부를 물어야 한다.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혹자(或者)는 이러한 질문을 할 것이다. "특정 정책의 비용과 편익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최근 미국 와이오밍 주립대학교의 한 경제학자가 사회적 거리두기의 비용과 편익을 계산했다. 이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의 비용은 경제활동 위축으로 인한 국내총생산 감소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없었다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국내총생산이 6조5천억달러 감소할 것이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함에 따라 국내총생산이 13조7천억달러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따라서 사회적 거리두기의 비용은 7조2천억달러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편익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률이 50% 감소해서 120만 명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가정하였다. 통계학적인 생명의 가치는 1천만달러이므로 사회적 거리두기의 편익은 12조달러이다. 이 연구에 의하면 사회적 거리두기의 편익이 비용보다 4조8천억달러 많다.특정 정책의 비용과 편익의 크기가 중요하지만 그러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정책 결정 시 반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정 정책의 편익이 비용보다 크더라도 정부가 시행하지 않을 수 있다. 시민들이 거부할 수도 있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비용편익분석의 결과물은 정치적인 의사결정에 투입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등교 개학이나 '민식이법'을 시행하기 전에 이들에 대한 비용편익분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비용편익분석을 할 것을 제안한다. 분석 결과, 등교 개학이나 '민식이법'의 비용이 편익보다 크면 반드시 철회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해야 하는 이유를 시민들에게 제시하고 설득하면 된다.비용편익분석은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감(感)에 의한 정책 결정,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 조잡한 음모론을 방지하는 현실적인 수단임은 분명하다.

2020-06-10 15:09:41

[기고] 김천~문경 중부내륙철도 건설을 촉구하며

[기고] 김천~문경 중부내륙철도 건설을 촉구하며

경북 김천은 내륙의 중심에 위치해 고속도로, 일반철도, 고속철도를 통해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다.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시장(市場)이 크게 번성하고,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춰 상업·행정·교육도시로 발전했다. 1923년 경북선(김천∼영주)이 뚫리면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입지적 장점이 더욱 강화됐다.2010년 '선로 위의 비행기' KTX가 개통하면서 고속교통망에 의한 교통물류의 중심도시로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이와 함께 현재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김천∼거제 남부내륙철도'가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사업이 추진 중이다.통일시대에 대비한 한반도 철도교통망 확충은 미래 발전의 새로운 신성장 동력이 될 강력한 SOC 사업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유라시아 대륙의 경제권과 연결되고 다양한 교역로를 확보함으로써 '북방 물류 시대'가 열리게 된다.북방 물류는 한반도종단철도(TKR)를 중국횡단철도(TCR), 몽골횡단철도(TMGR), 시베리아횡단철도(TSR) 등과 연결해 중국, 러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유럽에 이르는 물류 교통망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정부에서도 이러한 미래에 대비하고자 국가철도망구축계획 등을 통해 철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수도권과 중·남부 내륙 지역의 경제 발전 거점을 아우르고, 국토 발전의 새로운 중심축이 될 중부선(수서∼충주∼김천∼거제)은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면서 낙후된 중부 내륙 지역의 개발 촉진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사업이라 할 수 있다.이 중부선 사업의 핵심은 전체 노선 중 유일하게 미연결 구간으로 남아 있는 김천∼문경 중부내륙철도를 연결하는 것이다. 김천∼문경 중부내륙철도는 수도권에서 남해안권까지 국토 중심의 종단철도를 완성해 낙후 지역의 개발을 촉진함으로써 지역 간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특히 백두대간의 산악 지형으로 둘러싸여 지역개발 측면에서 소외되어 온 경상북도 서부 내륙권 각 시·군 발전에 기여해 국가균형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경상북도를 넘어, 수도권∼충북권∼경북권∼경남권∼남해안권을 하나의 축으로 연결함으로써 기존 경부선의 물동량을 분산해 효율적인 철도 운영 정책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중앙과 지방, 지역과 지역 간의 화합과 상생, 나아가 대한민국의 대통합을 위한 발전의 첩경이 될 것이다.수서~충주~문경~김천~거제를 연결하는 총 380㎞의 중부선 중 수서~충주~문경까지는 2023년 개통을 목표로 현재 건설 중이며, 김천~거제 남부고속철도도 2022년 착공, 2026년 개통을 목표로 사업이 추진 중이다. 현재 예비타당성 조사 중인 김천∼문경 구간 73㎞에 대한 철도 건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철도망 구축을 통한 국가균형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부 정책에 역행하는 것이자 효율적인 국토 개발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정부가 사업성·타당성만 따지다 보면 본 노선에 대한 예비타당성이 제대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급이 수요를 결정한다'는 말처럼 철도가 연결되고 운행 횟수가 늘어나면 승객도 따라서 늘어나는 노선이 될 것이다.정부는 김천~문경 중부내륙철도를 조기에 건설해 그동안 소외되고 낙후된 경북 내륙의 지역 발전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도록 국책사업으로 반드시 시행하기를 기대한다.

2020-06-10 15:03:03

[매일춘추] 귀향(歸鄕), 머나먼 길

[매일춘추] 귀향(歸鄕), 머나먼 길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이 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쇠붙이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의미다. 실로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의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약점을 잡아내서 궁지로 몰 때도 쓰인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의도치 않게 불길이 번져,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때 당사자로서는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이런 경우는 흔히 볼 수 있지만, 매번 안타깝기 그지없다.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호타루'라는 영화가 있다. 2차 대전 당시 조선 청년이 가미가제로 차출되어 전장에서 산화한 이야기다. 세월이 흘러 그 유골을 우리나라에 전달하러 온 일본 할머니가 한 소녀에게 이런 대사를 남긴다. "꼭 너만 했었지. 너무 어렸는데, 나라를 위해 '만세. 만세'를 외치면서 깃발을 흔들며 떠나보냈지. 죽인거야. 진짜 부모였다면 조국을 위한다며, 떠나보낼 수 있었겠어? 어떤 일이 있어도 내 목숨을 대신했더라도 떠나보냈겠어?" 할머니는 조선청년이 떠나기 전까지 숙식을 제공해주었던 여관 주인이었다.이용수. 그녀는 위안부 피해자다. 수년 전만 해도 종군(從軍)위안부라 불렸다. 지원한 것도 아닌데 종군이 웬 말인가. 그녀의 이름 뒤에는 '할머니'가 따라붙는다. '할머니'가 위안부의 대명사도 아닌데, 누가, 언제부터 이렇게 관용어를 만들어냈을까. 이제 위안부 생존 피해자들의 수가 손발의 개수에도 못 미친다. 역사의 증인들의 사라지는 순간들을 세월호 사건 때처럼 묵도만 할 것인가. 어떤 이유에서도 그녀를 비난할 명분은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직을 수행할 때, 회계 장부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것이 잘못인가. 아니면 시민기금으로 지급된 1억원이 문제인가. 일본 정부로부터 건너온 어용자금 10억엔을 거부한 것이 잘못인가. 정의기억연대의 주인은 위안부 피해자여야 한다. 왜 주인이 실무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가.지난 5월 7일 1차 기자회견을 할 당시 네티즌들의 반응은 냉혹했다.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정도의 악성루머와 댓글들이 인터넷에 난무했다. 일본에게 위안부 관련해서 그들의 당위성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축은 그나마 약하고, '치매' '배후세력' 등 한 개인의 의식을 난도질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심지어 1998년 8월 22일 대만에서 치러진 일본군 장교와의 영혼결혼식조차 문제 삼았다.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이름도 모르는 청년. 가미가제 특공대로 차출되기 전날 그녀에게 '네가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죽어서도 너를 지켜주겠다'고 한 그와 영혼결혼식을 올린 것이 무엇이 잘못된 일인가. 당시 조국은 그녀의 목숨을 버리라 했지만, 그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살아생전에 못다 이룬 인연을 맺어보자는 것도 문제가 되는가.옳고 그른 것은 가리면 된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하고,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풀면 된다. 한 개인의 삶을 함부로 폄하하는 건 잘못이다. 처음도 아니지 않는가. 병자호란 때 힘없는 나라 덕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살아 돌아온 여성들을 '화냥년'이라 매도했던 나라가 부끄럽지 않은가. 이제 두 번 다시 부끄러운 나라, 부끄러운 국민이 되지 말자. 제 자식이 끌려가는데, 뒷짐 지고 있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매도해서는 안 된다. 조국을 구하는 데 초개(草芥)처럼 목숨을 던진 의사들의 얼굴 하나 없는 화폐를 사용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그녀를 다시 사지로 내몰 수는 없지 않은가.

2020-06-10 14:22:44

[종교칼럼]인생에서 가장 값진 선물

[종교칼럼]인생에서 가장 값진 선물

6월의 햇살은 생명력이 넘친다. 울 밑에서는 접시꽃과 수국이 피어나고 밭에는 채소들이 무성하다. 따가운 햇살 아래 농부들은 모심기를 마치고 마늘과 양파를 거둔다. 이른 더위에 숲은 뭇 생명과 짙어간다. 백련 연지에는 연잎과 연 봉오리가 맺혔다.내가 사는 암자에는 계절 따라 처음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종종 있다. 우연히 들렀다가 절이 맘에 들어 친구와 다시 오는 분들이다. 또 누구에게 들었거나 사찰이 아름답다는 인터넷 반응에 찾는 이들이다. 주지가 절에 있거나 누각에서 차를 마시다가 만나게 되면 자리에 모셔 다담을 나누지만 외출 중이면 도량만 산책하고 가신다.일반적으로 건축물에는 크기와 형태에 따라 실(室), 방(房), 정(亭), 대(臺), 각(閣), 당(堂), 헌(軒), 누(樓), 재(齋), 관(館), 전(殿)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망월사 누각은 규모가 작다. 아직 정식 명칭은 정하지 못했지만 누각 안에는 다정헌(茶情軒)이라는 현판이 걸렸다.소년 시절 경복궁이나 비원, 용인 민속촌, 안동 하회마을, 여러 고장의 고택을 참관할 때 한옥의 누각이 부러웠다. 저 위에 올라 책도 읽고 차도 마시고 글도 쓰고 대화를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언젠가 나도 건물을 지을 때 저런 누각을 한번 가졌으면 하는 희망을 가슴에 품었다.그 씨앗이 이곳에 와서 다섯 칸 집을 짓고 누각을 한 칸 달아 보탰다. 앞에는 낙화담이 보이고 뒤에는 산이 배경이 된 배산임수 지형이다. 여기에 터를 정비해 대웅전과 원광선원을 신축하고 심우당을 보수하여 조그만 암자를 열었다. 오가는 분들과 만나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인생을 배운다. 때때로 밭에 나가 연꽃을 피우고 채소를 가꾸고 마음 밭을 일군다.불교에서 사람과의 만남은 눈먼 거북이 널빤지를 만난 인연과 같다고 한다. '맹구우목'(盲龜遇木)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인간으로 태어나 붓다의 가르침과 만나는 일이 얼마나 희유(稀有)한 인연인지를 비유하고 있다.태평양 한가운데 살고 있던 눈먼 거북은 숨을 쉬기 위해 백 년에 한 번씩 물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 바다에는 둥그런 구멍이 뚫린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거북의 머리가 수면 위로 올라올 때 그 나무를 만나 구멍으로 쏙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그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로또 1등보다 더 어렵다. 어디 불교와의 만남으로만 한정할 수 있겠는가?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도 이와 같으리라!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란 시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시인의 노래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억겁(億劫)의 인연을 통째로 이끌고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온 생(生)이 오는 것이다.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이 부서지고 또 부서졌을까? 바람만이 그 아픔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했던가. 주인과 방문객은 어떤 감동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어디 방문객이 사람들에게만 한정했을까? 별들과 꽃들과 나무들과 새들과 바람 소리까지 포함하지 않았을까? 늘 곁에 가까이 있는 가족과 무심코 만나는 이웃들의 존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축복이며 맹구우목인지 깊이 느껴야하지 않을까! 순간순간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이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다.이런 만남이 사회 불공정으로 인해 불신과 원망을 낳는다. 대립하고 갈등이 깊어진다. 메마른 정원에 물을 주듯 관계를 복원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겸손하고 친절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값진 선물은 인연이다.

2020-06-10 13:15:24

[박순석의 동물병원 24시] 반려견의 뼈가 골절되면 깁스할까? 수술할까?

[박순석의 동물병원 24시] 반려견의 뼈가 골절되면 깁스할까? 수술할까?

깁스(gips)는 정형외과 교정에 이용되며 독일어로 석고를 의미한다. 과거 석고를 붕대에 발라 외과 교정에 애용되었지만 최근에는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재질의 다양한 깁스 재료들이 이용되고 있다.사람은 팔뼈에 금이 가면 깁스를 한다. 깁스는 어지간한 충격이나 움직임에도 골절 부위를 단단하게 고정해준다. 뼈가 붙는 4~6주 정도 동안 착용하며 치료 효과도 좋다. 골절 수술을 받은 후에도 완벽한 회복을 위해 깁스를 착용한다.하지만 반려견에게 골절이 발생할 경우 깁스 적용은 고민이 된다. 보호자의 입장에서는 수술하지 않고 깁스로 치료되기를 희망한다. 사실, 동물에게 깁스는 사람에게만큼 효과적이지 못하며 오히려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동물에게 적용되는 깁스는 가벼우면서 견고해야 한다. 골절부위를 견고하게 유지하려면 피부와 밀착되어야 하는데 자칫 압박이 강해지면 혈액 순환을 방해하여 다리가 괴사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람이라면 깁스 후의 불편함이나 통증을 곧바로 표현하지만 동물은 서서히 진행되는 혈행 장애나 통증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깁스를 여유롭게 장착하면 골절 부위가 움직이면서 골유합이 방해되기도 한다.우유(포메라니언·1.3㎏)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유는 45일 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 왼쪽 앞다리 발목(경골)뼈가 골절되었다. 보호자는 인근의 동물병원을 방문하여 엑스레이(X-ray)를 찍을 당시에는 골절된 뼈의 변위가 심하지 않아 깁스 치료를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할수록 깁스한 다리가 가늘어지면서 깁스가 처음처럼 골절된 부위를 견고하게 받쳐주질 못했다. 골절된 골단면이 흔들릴수록 뼈의 유합은 지연되고 염증이 발생하여 비정상적인 골단부 변형이 이루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심하게 어긋나 버린다.우유가 본원에 찾아왔을 때는 이미 외관상으로도 앞다리뼈가 심하게 꺾여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우유가 다시 걸으려면 염증화되고 웃자란 골조직들을 제거하고 다듬어 골단면을 최대한 밀착시킨 상태로 플레이트를 시술해야 했다. 처음 골절 상태의 수술에 비해 몇 배나 오래걸리고 힘든 수술이 되어버렸다. 우유의 앞다리에는 견고한 플레이트가 장착되었으며 6개의 스크류가 경골에 박혀졌다.6주 이상 깁스를 하고 있었던 우유의 다리는 심하게 위축되어 있었다. 입원 기간 동안 혈관 재생과 골유합 촉진을 위한 레이저 재활치료를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다리 근육도 심하게 위축되었기 때문에 수술 후에는 깁스를 하지 않고 오히려 앞발을 디디도록 유도했다. 수술 후 2주 뒤부터 우유는 앞다리를 스스로 딛기 시작했고 골단부에도 예쁘게 뼈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으로 4주 정도는 걷기 운동을 권장하고 재활 치료는 꾸준히 받아야 한다.소형견들에게 골절이 잘 일어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약해서이다. 왜소할수록 뼈와 치아는 약하고 가벼운 충격에도 골절이 쉽게 발생한다. '유리 강아지'란 표현이 어울린다.개의 품종 중에는 오랜 기간 환경에 적응하며 서서히 체형이 작아진 품종들이 있다. 하지만 펫샵에서 거래되는 미니사이즈 반려견은 생산자의 의도가 개입돼 있다. 품종 개량이라는 명분으로 왜소증을 고의적으로 유발시키기도 한다. 단시간에 체형을 소형화시키려다 보니 왜소하게 태어난 개체들끼리 교배가 반복되어지고 유전학적 결함들이 빈발한다. 골절, 슬개골 탈구, 고관절이형성, 소간증, 심장병, 선청성 신경병이 이에 해당한다. 왜소한 반려견을 보살피는 가족들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소형견의 골절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두가지를 당부드린다. 먼저 성장기 과체중을 주의하자. 더 잘 먹여 건강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 급속한 과체중을 부추긴다. 성장기 다리뼈는 길이는 길어지는데 단단함이 부족하여 오히려 골절이 다발하는 경향이 있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릴 때의 충격은 몸무게의 수십 배에 해당된다. 착지하려던 앞다리가 잘 부러지는 이유이다. 두번째로 미끄럽지 않은 바닥이 도움된다. 미끄러지지 않는 바닥을 맘껏 달리다보면 성장판이 자극되어 뼈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성장기일수록 몸을 가볍게 유지하면서 달리는 놀이를 권장하는 이유이다.미니사이즈, 미니컵, 초소형견이 등장하는 이면에는 작은개를 선호하는 수요가 있다. 이미 초소형견을 입양한 상황이라면 유리 강아지 다루듯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한 순간의 방심으로 생명을 잃는 안타까운 경우들을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아직 입양을 고려 중이라면 소형견보다는 튼실한 반려견을 권해드리고 싶다. 진료비 부담도 만만찮지만 아픈 동물을 보살피는 보호자의 안타까움은 아픈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수의학박사 박순석. (탑스동물메디컬센터 진료원장)* SBS TV 동물농장 동물수호천사로 잘 알려진 박순석원장은 개와 고양이,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치료한 30여년 간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올바른 동물의학정보와 반려동물문화를 알리고자 '동물병원 24시'를 연재한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동물명은 가명을 사용하고 있음을 양지부탁드립니다)

2020-06-09 18:30:00

[경제칼럼] 민식이법과 불법주차

[경제칼럼] 민식이법과 불법주차

지난 3월 25일 '민식이법'이 시행된 이후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 내 도로상 주정차 문제는 과속에 버금가는 어린이 교통사고 위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최근 코로나19 진정세 속에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등교 개학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면서, 어린이 보호구역 교통안전 시설 개선과 주정차 문제 해결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민식이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35만 명 이상의 국민이 동참했다. 민식이법에서, 어린이 보호구역 내에서 과속하지 않고 운전자 과실 밖의 경미한 과실로 발생한 어린이 교통사고에 대해서도 교통사고 특례법상 12대 중과실로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적용해 가중처벌하는 것은 과잉처벌이라는 주장이다.운전자 과실 이외의 교통사고 위험 요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어린이 보호구역 내의 주정차 문제이다.만약 어린이 보호구역 도로상에서 제한속도 이하로 운행 중에 불법주정차 차량으로 인하여 도로에 갑자기 뛰어든 어린이를 늦게 발견해 어린이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면, 불법주정차 차량에는 과태료 12만원(승용차 기준)이 부과되는 것이 처벌의 대부분이지만, 사고 운전자는 전방 주의 의무 태만 일부 과실로 민식이법에 의해 가중처벌될 수도 있다.최근 3년간 서울시 어린이 보호구역 내에서 발생한 어린이 교통사고 244건 중 28.7%인 70건이 주정차 차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어린이 보호구역 내 주정차 문제는 어린이 교통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동시에 억울한 민식이법 피해 운전자 발생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불법주차로 인해 발생한 교통사고에 대한 모든 사고 책임과 사회적 비용이 불법주차 차량에 부과되지 않고, 다른 운전자에게 전가되는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외부불경제'라 한다.불법주차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원인자(불법주차)에게 부과할 수 있는 효과적인 해법은 불법주차에 대한 높은 사고 책임 및 벌금 부과 그리고 강도 높은 주차 단속이다.서울시는 어린이 보호구역 내에 초등학교·유치원 정문으로 연결되는 주 통학로에 '절대 불법주정차 금지선'인 황색 복선을 그어 모든 형태의 주정차를 금지하고, 주차 단속을 강화하는 고강도 안전 대책을 발표했다.하지만, 이와 같은 단편적인 주차 수요 억제 정책은 오히려 어린이 보호구역 내 주정차 문제를 인근 주택가 지역으로 이전시키는 풍선효과를 유발하기 쉽다.어린이 보호구역 주정차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노상주차 폐지 및 불법주차 단속 강화와 더불어 합법적으로 주차할 수 있는 대체 주차시설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유치원·초등학교는 대부분 주거밀집지역에 입지하고 있어서 공공(공영)주차장을 건설할 수 있는 부지 확보가 거의 불가능하다.차선으로, 어린이 보호구역의 노상주차면 폐지 및 불법주차 단속으로 발생하는 주차 수요를 민간이 유료로 운영하는 민영주차장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민영주차장 건설 여부는 민영주차장 사업 수익성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지주는 상가 건물을 건설할 때 발생하는 임대수익보다 민영주차장을 건설해 운영하는 주차장 운영수익이 높고 안정적이어야만 민영주차장을 건설하게 된다.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택지개발지구 내 공영주차장 부지 대부분은 건축 연면적의 20%를 근린생활시설(주로 마트)로 이용하고 나머지 80%의 주차시설은 대부분 방치 혹은 폐쇄되어 있다.공원의 지하 공간을 활용한 공영 주차시설은 운영 적자를 이유로 폐쇄되어 있는 반면에, 인근 어린이 보호구역 도로변에는 노상 불법주차가 성행하고 있다.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어린이 보호구역 노상주정차 폐지 및 불법주정차 단속 강화 대책은 주차 문제의 임시적인 관리 대책이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주정차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동차 대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주차시설의 공급을 늘리는 방안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

2020-06-09 18:29:02

[매일춘추] 1980년대 박현기의 비디오 아트와 행위예술

[매일춘추] 1980년대 박현기의 비디오 아트와 행위예술

1984년 새해 벽두에 한국인들을 밤새우게 한 아트쇼가 있었다. 바로 백남준이 기획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이다.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조차도 전 세계를 한 순간에 위성으로 연결한다는 충격적인 이벤트에 관심을 보였고, 더군다나 이 초대형 기획을 한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는 점은 왠지 모를 자부심과 기대감에 부풀게 만들었다. 백남준이 전 세계를 무대로 미디어의 긍정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안 한국에서 그의 영향을 받아 비디오 아트를 개척한 작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대구에서 건축가이자 현대미술가로 활동하던 박현기이다. 그가 비디오 아트를 처음 접한 것은 1974년경 대구 미문화원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는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편집하여 영상화한 백남준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백-아베 신디사이저)에 강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러한 기술은 방송장비처럼 기성품화 되어갔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 '무제(비디오 돌탑)'(1979)는 실제 돌탑 사이에 가상의 돌 영상을 보여주는 TV모니터를 끼워놓은 작품이다. 그의 비디오 작품 전반에는 실재와 가상의 구조가 등장하는데 이는 단지 비디오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낙동강 물에 거울을 꽂는다든지, 수지로 만든 가짜 돌을 돌탑 사이에 넣는다든지 실재와 가상의 구조는 그에게 지속적인 실험 대상이었고 비디오 작품은 다른 재료의 작품과도 밀접하게 이어진다.특히 행위예술은 박현기가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의 야외 이벤트를 비롯해 다양한 행위예술을 전시실 안에서 뿐 아니라 야외에서 수차례 실행하면서 그의 철학을 잘 실현해 주었다. 담대한 이상가였던 그는 1981년부터 1982년 사이에 대구시내와 대구인근 자연에서 대규모의 퍼포먼스가 감행하였다.1981년에는 '도심을 지나며(Pass through the city)'(1981, 대구 도심)를 보여주었다. 맥향화랑에는 벽을 부수고 대형 모형 돌을 설치하였고, 대구시내 한복판에서는 대형 트레일러에 거울을 단 모형 돌을 싣고 한일로를 관통하였다. 또 도심 곳곳에는 거울을 붙인 돌들을 설치하여, 시민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돌이 돌인지, 누가 누구를 바라보는 것인지 모를 반영과 반전의 곳곳을 탐지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이 프로젝트를 만들어갔다.1982년 '전달자로서의 미디어(Media as translators)'(1982, 강정 낙동강변)는 총 6개의 비디오 설치와 퍼포먼스로 구성되었고, 1박2일 동안 낙동강 어느 섬에서 광활한 자연을 무대로 진행되었다. 그 중 그의 철학을 잘 반영한 작품인 'Fire Drawing'은 깜깜한 밤에 원형으로 피워진 불 가운데 나체의 사람들이 들어가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완성된다. 작품은 불이 사그라지면서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 이 행위를 통해 박현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불완전한 우리의 지각과 인식의 차이일 뿐 그 본질은 사라지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려 한 것 같다.

2020-06-09 13:59:57

[서명수의 일상중국] “부부의 세계” 원작은 중국?

[서명수의 일상중국] “부부의 세계” 원작은 중국?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성황리에 종영되었지만 드라마의 여운은 현실 세계에서도 만만치 않다.워낙 충격적인 전개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드라마는 30%를 웃도는 시청률까지 기록하면서 지난달 아쉽게 막을 내렸다.드라마의 원작은 영국 BBC가 방송한 '닥터포스터'로 전반적인 스토리는 대동소이한 모양이다. 남편의 외도와 이혼 그리고 남편 친구와의 맞바람, 엇나가는 아들 등이 주요 줄거리였다. 부부의 세계를 보지는 않았지만 스토리를 들었을 때, 최근 중국 사회에서 논란이 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보다 더 충격적인 반전의 드라마를 본 기억이 난다. 한때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위협하기도 한 '보시라이'(薄熙来) 전 충칭시 당서기와 그의 부인 '구카이라이'(谷开来)의 성공과 몰락 이야기가 그것이다.이미 8년이나 지나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힌 것 같은 사건이지만 완전하게 잊히지 않고 이들 부부의 동정이 회자되곤 한다.보시라이는 시진핑에 맞서 황제를 꿈꿨다. 공산 혁명 원로의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의 동료인 보시라이는 정치적 경쟁 관계였지만 시 총서기가 후진타오 전 주석에 이어 최고지도자로 등극하자 둘 사이의 경쟁은 해소된 듯 보였다. 그러나 중부 내륙도시인 인구 2천만 명의 변방 '충칭'(重慶)시 당서기로 좌천되다시피 한 보시라이는 충칭을 '홍색혁명'의 전진기지로 삼아 국유경제의 새로운 모델을 구축한 '충칭 모델'을 제시하면서 다시 중앙정치권과 대중의 관심권 안에 들어왔다. 보시라이의 야망은 집요했다. 2007년 이후 충칭시 당서기를 맡은 지 5년 만에 드디어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것이라는 고무적인 전망이 지배적일 정도로 정국은 보시라이 편이었다.몰락의 시작은 아내의 영국인 사업가 살해사건이었다. 2012년 2월 충칭시 공안국장이던 왕리쥔(王立軍)은 중앙의 감찰을 받게 되자 보시라이에게 구명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비밀 파일'을 갖고 청두(成都)에 있는 미국영사관으로 가서 망명을 요청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미·중 간 막후 협상 끝에 미국이 왕의 망명을 불허하자, 보시라이는 충칭의 무장병력을 '청두'로 보내, 왕리쥔을 잡아오려고 했으나 베이징이 한발 빨랐다.이 사건으로 보시라이의 최고지도부 진입 꿈은 깨졌고 충칭 당서기직에 이어 중앙위원까지 해임되고 부패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게 된다. 구카이라이도 왕리쥔의 파일을 통해 영국인 살해 혐의가 드러나 기소되면서 중국판 '부부의 세계'가 낱낱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재판 과정에서 보시라이는 최측근인 왕리쥔이 아내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폭탄 발언을 했고 결국 보시라이는 수감돼 있던 교도소에서 2017년 구카이라이와 이혼하기에 이른다. 보시라이는 "그는(왕리쥔) 나의 가정을 침범했고, 나의 근본적인 감정을 상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도주 배경"이라고 말했다.구카이라이의 살해사건 법정에서는 그녀가 살해한 사업가와의 관계가 백일하에 드러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사건에는 왕리쥔이 깊이 개입돼 있었고 보시라이도 은폐하는 데 일조했다는 폭로가 터져나왔다. 보시라이는 구카이라이가 중학생이던 아들 '보과과'를 데리고 영국 유학에 나서게 된 것이 자신의 외도와 관련된 것이라며 스스로의 외도를 털어놓기도 했다.구카이라이가 영국인 사업가를 살해한 동기도 자신의 외도와 관련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아들 보과과 역시 '홍싼따이'(紅三代)로서 포르쉐를 타는 등의 방탕한 사생활로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다. 부모가 이혼하던 2017년 그가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랴오닝성 다롄(大連)시장 시절부터 보시라이를 후원해 온 스더(實德)그룹의 쉬밍(徐明) 회장은 보시라이 사건 이후 부패 혐의로 기소돼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스더그룹은 공중분해됐다.보시라이는 2017년 간암 투병을 위해 가석방된 적은 있지만 종신형을 선고받은 현재, '호화 감옥'으로 불리는 베이징의 친청교도소, 구카이라이는 허베이성 싼허시에 있는 옌청교도소에 각각 수감돼 있다.코로나19로 연기된 '전인대' 개최 여부가 논의되던 지난 4월 초 중국 최고지도부가 거주하는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주변에 무장경찰들이 배치되자 '보시라이 탈옥설' 소문이 나돌 정도로 보시라이는 여전히 중국 지도부를 긴장시키는 모양이다. 중국판 '부부의 세계'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2020-06-08 16:30:00

[신병주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전염병처럼 무서웠던 호환

[신병주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전염병처럼 무서웠던 호환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 전쟁 등 인류를 위협하는 재난들은 늘 있어왔다. 그러나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지금의 시대에 전 세계를 이처럼 혼돈으로 빠뜨릴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상치 못한 재난들을 극복해가는 것 또한 인류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호환마마'라는 말이 공포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한때는 88올림픽의 마스코트로 등장했고, 지금도 동물원의 최고 인기 동물로서 그 친근감과 함께 위엄을 보이고 있는 동물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호환'(虎患)은 호랑이로 인해 사람들이 희생되거나 다치는 것을 말하는 용어로, 호환과 관련된 기록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기록에서도 나온다.고려시대 문신 최루백은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하자, 호랑이를 추적하였다. 최루백은 도끼로 호랑이를 죽이고,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꺼내고 호랑이의 고기는 항아리에 담아 시내 가운데 묻어두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쇄미록' 등 조선시대 기록 역시 호환의 피해 상황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태종실록'에는 "경상도에 호랑이가 많아, 지난해 겨울부터 금년 봄에 이르기까지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이 기백 명입니다. 연해 군현(沿海郡縣)이 더욱 많아 사람들이 길을 잘 갈 수 없사온데, 하물며 밭을 갈고 김을 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백성들이 호환의 피해를 호소한 기록을 볼 수가 있다."의주에 거주하던 최산석은 10세의 어린아이로 그 아비 최천동과 산으로 갈 때 큰 범이 으르렁거리며 내달아 아비를 잡아채어 가자 최산석이 낫을 가지고 범의 등을 마구 치며 고성으로 구원을 청하였다.… 최산석은 오른쪽 손으로는 그 아비를 잡고 왼쪽 손으로는 낫을 잡고 울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며 온갖 방법으로 범을 막았다.… 동행했던 사람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니, 최천동이 죽게 되어 쓰러져 누워 있었다. 최산석이 간 곳을 물으니 '범에게 잡혀 갔다'고 했다.… 또 범 있는 곳에 가서 자취를 살펴보았더니, 범이 최산석을 잡아가서 몸뚱이를 다 먹고 두골(頭骨)만 남겨 놓았다"는 '명종실록'의 기록에서는 호환의 피해 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호환이 심하여 민가는 물론이고 궁궐에까지 호랑이가 들어와 문제가 된 적도 많았다.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 후원의 숲속에 암범이 새끼를 쳤다는 말이 나돌아 장수들이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임진왜란 때의 피란 상황을 기록한 오희문의 '쇄미록'에도, "지난 밤중에 이 현 관아의 계집 종이 호랑이에게 물려가서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소리가 몹시 간절했으나,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서 나가 보지 않았다. 물고 갈 때 관아의 뒤를 지나가서 사람들이 모두 들었는데도 끝내 구하지 못하여 굶주린 호랑이의 배 속을 채워 주었다. 불쌍하다. 요새 고약한 호랑이가 성행하여 문과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오기도 한단다. 몹시 걱정스럽다"고 하여, 호환으로 매우 힘들어하던 당시인들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포악한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므로 비록 평원(平原)과 광야(廣野), 마을과 잇닿아 있는 곳이라도 사람이 감히 혼자 다니지 못하였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에서는 호환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출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조정에서는 호랑이 포획을 위한 기계나 함정 설치를 독려했고, 호랑이를 잡는 특수부대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두었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는 활과 창에 능한 착호갑사 440명을 편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호랑이 두 마리를 잡은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일부 시험을 면제해 준 것에서도 호랑이에 대한 조정의 고민을 확인할 수 있다.가축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해쳐 호환의 주범이었던 호랑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친근함과 경외심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까치와 호랑이'와 같은 민화나 전래 동화, 각종 장신구, 관복 등에 호랑이가 자주 등장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제 호환은 먼 옛날 속의 이야기가 되었다. 코로나19가 과거에서만 존재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2020-06-08 16:30:00

[김태선의 디자인,가치를 말하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야

[김태선의 디자인,가치를 말하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야

여름이 성큼 앞에 와 있다. 6월, 꽃보다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 여름이 되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미국 뉴욕시이다. 그곳의 강렬한 태양빛이 만든 장면이 잊히질 않는다.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에 들어섰을 때였다. 웅장한 빌딩의 협곡이 펼쳐졌다. 그리고 각 건물의 외벽 위로 뉴욕의 강렬한 태양빛이 만든 다른 건물의 그림자가 놓이자, 건물 외벽에 사선으로 선명한 흑백 대비가 만들어졌다. 너무나 다른 두 존재, 빛과 그림자, 흑과 백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흑백의 조화는 강렬한 아름다움을 만든다. 하지만, 이들의 부조화는 강한 충돌을 야기한다.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인종 갈등과 계층 갈등의 표출은 그러한 흑백 충돌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왜 발생할까? 오랫동안 물어왔지만, 잊힌 질문인 듯 우리는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한 것 같다. 아니, 이미 알고 있지만 찾지 못한 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사람 사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문제들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대개의 경우 그 문제들은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 '민감과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이의 기쁨과 아픔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고(민감), 그 기쁨과 아픔을 함께하는(공감) 세상은 어떠할까? 수많은 디자인 결과물들은 이러한 민감과 공감을 통해 발견된 단서에서 시작된다.미국 주방용품 판매 1위, 옥소(OXO)의 굿그립(Good Grips) 시리즈의 시작 또한 그러했다. 평생 주방용품 제조업체를 운영해 온 샘 파버(Sam Farber)는 어느 날 감자깎기 칼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아내를 발견했다. 그의 아내는 손목 관절염이 심해져서 금속 재질의 가늘고 좁은 감자 깎는 칼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그런 아내를 보며 그는 스마트디자인과 협력해, 1989년 '굿그립' 시리즈의 첫 히트 상품인 감자칼을 만들었다. 철판을 잘라 만든 좁고 긴 손잡이 대신 큼직한 고무 손잡이에 가는 홈을 내어 편하게 잡을 수 있게 하고,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힘을 덜 들이고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옥소는 일반 제품보다 4배 비싼 가격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매년 50%의 매출 성장을 이루고, 세계 30여 개국에 진출, 세계적 주방용품 브랜드가 되었다.옥소가 20년의 짧은 시간에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에 있다. 스마트디자인의 대표 톰 데어(Tom Dair)는 "디자인은 '물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것이다"(design is about people, not things)라고 했다. 사람을 향해야 하는 것이 어찌 디자인뿐일까! 사람의 사람을 향한 마음,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서로에게 꽃보다 아름답지 않은 것 같다. 노랫말처럼, 이 모든 외로움과 어려움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그대들이 있는 세상,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꽃보다 아름다운 세상이 피어나기를.

2020-06-08 16:30:00

[기고] 전봇대 뽑아 안전한 통학로 만든다

[기고] 전봇대 뽑아 안전한 통학로 만든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다행히도 국내에서는 정부와 국민이 함께 노력한 덕분에 미국이나 유럽보다 심각한 피해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대구경북 지역의 적극적인 대응이 있었기에 'K-방역'이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이 같은 코로나19 대응 성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학생 통학 안전에 대한 지역사회의 노력은 주민들의 요구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학생들이 등하굣길에 전신주 등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 차도나 도로를 이용하다 발생하는 교통사고는 한 해 약 450여 건에 이른다. 또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신문고에 접수된 통학로 개선 요구 민원은 2016년 6천656건에서 2019년 1만8천124건으로 3년 사이 3배가량 증가했다. 통학로 안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증가하는 반면 정부의 해결 노력이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민원 증가의 주된 원인으로 분석된다.지난해 천안시에 사는 한 여중생은 학교에 같이 등하교하는 친구들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안타까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고는 이를 '나쁜 운전자'와 '조심하지 않는 학생'의 문제가 아닌 통학로 자체의 문제로 인식했다. 결국 이 여중생은 "통학로 중간에 설치된 전봇대로 인해 차도로 다닐 수밖에 없어 사고가 자주 발생하니 안전한 통학로를 만들어 주세요"라며 국민권익위에 고충 민원을 제기했다.국민권익위의 조사 결과, 여중생이 문제를 제기한 구간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통학로 구간에는 보도가 아예 없거나 전신·통신주 등 장애물과 불법 주정차 차량들이 뒤엉켜 그나마 있는 보도도 제 기능을 못했다. 결국 학생들은 차도로 통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험한 상황을 반영하듯 이 통학로에서 2018년에 40건, 2019년 상반기에만 11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다.이 같은 문제점을 직시한 국민권익위는 관계 기관과 협력해 통학로를 가로막은 전신주를 철거하면서 전선을 지중화하고 학교 담장을 이전해 보도를 넓혔다. 또 통학로 주변 불법 주정차 단속을 강화하고 학교 주변 횡단보도에 과속방지턱을 설치하는 대책을 마련했다.이를 최종 확정하는 고충민원현장조정회의에 참여한 학부모 대표는 "같은 내용의 민원을 수십 년간 제기했지만 지방자치단체, 경찰, 교육청 등 관계 기관은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돌이켜보면 관련 기관 간 협업 부재가 '안전한 통학로 확보'의 걸림돌이 되어 수십 년간 지역 주민과 학생들을 괴롭혀 왔던 것이다.열악한 통학로는 특정 지역 학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인 문제다. 따라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국민권익위는 올해 기획조사 과제로 '학교 주변 안전한 통학로 확보'를 선정했다. 전국 17개 교육청을 통해 대구 지역은 195개 학교, 경북 지역은 98개 학교 등 모두 2천273개 학교의 통학로 개선 수요가 접수됐다.올해 중 한국전력공사, 도로교통공단, 교육부, 행정안전부, 경찰청, 지방자치단체, 지방 교육청 등 다수의 기관과 협력해 통학로에 대해 실질적인 개선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이번 기획조사로 특히 코로나19로 어려움이 많았던 대구경북 지역의 열악한 학교 통학로 안전 문제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길 기대해 본다.

2020-06-08 16:10:40

[세계의 창] 아베의 역설

[세계의 창] 아베의 역설

아베 정권의 슬로건은 '아름답고 강한 일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 제국'을 지향하고 있는 '일본회의'라는 보수 세력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들에게 파렴치한 전쟁범죄로 남아 있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는 삭제 대상이며, 제국의 기반이었던 한국의 실존은 무시되어야 한다.2014년 아베 내각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1993년의 고노 담화가 발표된 경위를 검증하고, 담화를 사실상 사문화했다. 동시에 위안부 문제를 국제적으로 증폭시킨 주범으로 아사히신문을 지목했다. 아사히신문은 보수 인사들로 구성된 제3자위원회를 통해 과거 20년 이상의 위안부 관련 기사를 검증받았다. 제3자위원회 보고서는 "일본이 미국에서 홍보 활동을 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위안부 문제이다. 미국인들에게는 일본군이 집단적으로 많은 (한국) 여성을 납치하여 위안부로 삼았다는 이미지가 정착되어 있다"고 평가했다.또 보고서는 과거 20년간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10개 신문에 보도된 관련 기사를 분석했다.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관련 기사가 국제적으로 미친 영향은 한정적이며, 오히려 위안부 문제에 관한 외국 언론의 보도에는 아베 총리의 발언과 행동이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의 언행이 국제사회에 위안부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각인시키고 있다는 역설적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 및 유럽에서의 위안부 관련 보도는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담론으로 취급되고 있고, 위안부(comfort women)를 성노예(sex slave)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려는 아베 정권의 시도는 불에 기름을 끼얹을 뿐 효과적이지 않다고 조언했다. 고노 담화와 아사히신문 검증의 연장선에서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졌다. 아베가 위안부 문제를 불가역(不可逆)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이 '합의'는 국내외의 비난과 함께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아베의 역설은 또 있다. 아베는 작년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에 대해 반도체의 핵심 소재 공급을 금지(규제)했다. 거기에는 경제적 타격을 가해 한국의 추격을 따돌리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면, 외려 한국 기업은 국산화 등으로 일본 의존도를 낮추었고, 일본 기업이 더 큰 손실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의도치 않게 아베가 한국을 도운 꼴이다.아베의 진짜 역설은 지금부터일지 모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30일, 9월에 개최 예정인 G7정상회의에 한국, 러시아, 호주, 인도를 초청한다고 밝혔다. G7이 현재의 국제 정세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국제 정세 운운하면서 그 주역격인 중국을 제외하고 러시아를 포함시킴으로써 트럼트는 중국 견제 의도를 드러냈다. 그의 구상이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재선을 앞둔 선거용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거부 반응이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으로 G7에서 쫓겨난 전례가 있어 프랑스, 독일, 영국은 러시아의 G7 가입에 반대한다. 일본도 G7의 확대 개편에 반대한다. 아시아 참가국이 늘어 일본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참가가 못마땅하다는 이야기이다. 아베가 그토록 무시하고 싶은 한국과 어깨를 견줘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면서 아베가 추구하는 '일본 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중국의 부상으로 일본이 아시아 패권국의 지위를 잃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아베는 과거의 그것에 매달리고 있다. '영광'의 재현이라는 환상을 좇는 것이 국내 보수 세력들의 카타르시스 해소에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특히 한·일 관계에서는 역설적 효과만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역설은 대상성을 상실한 자기 절대화에 빠질 때 발생한다. 논리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한다. 아베가 지향하는 아름다고 강한 일본은 국내 정치용 수사였으며, 수명도 다한 것 같다. 한·일 관계에 대해 존재론적 인식을 가져야 할 때이다.

2020-06-08 16:05:57

[매일춘추] 죽순(竹筍), 왕대의 숲을 이루다

[매일춘추] 죽순(竹筍), 왕대의 숲을 이루다

죽순은 해방 이후 최초의 시 전문 동인지로 1946년 5월 창간, 1949년 7월까지 11집과 임시증간호를 포함해 12권을 발간하였다. 지역에서 발행된 시 전문 동인지라는 점에서 문학아카이브 업무 시 우선적으로 수집해야 하는 자료였다. 하지만 '죽순'에 대한 자료수집과 아카이브 구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직접 발로 뛰면서 지역의 원로문인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문학아카이브 구축의 취지를 안내하고 기증을 유도하였지만 정작 12권 전체의 온전한 동인지를 간직하고 있는 원로 인사들은 극히 드물었다. 이윤수의 유가족과 접촉하여 '죽순'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지만, 아쉽게도 자료를 만나볼 수는 없었다. 남겨진 자료가 희소한 것은 발간할 당시 자금난으로 발행 부수가 적기도 했거니와 보존 자체가 어려운 재질인 갱지(更紙)류로 발행되어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파손, 소실되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창간호만 수집해 있다 대구문학관 개관 후 지역 고서적 업체의 경매를 통해서 임시증간호를 포함한 전체 12권을 오롯이 아카이빙할 수 있었다.'죽순'뿐만 아니라 근대에 발행된 자료의 구축에 힘이 겨운 까닭은 일제 치하의 조선과 해방, 미군정 집권 시기, 한국전쟁의 발발이라는 시대상을 살펴보면 쉬이 이해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문화통치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종류의 책들이 일본어판으로 제작되어 발간되었다. 이후 급작스런 일본의 패망과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국어판 서적의 제작으로 출판계는 잠시나마 활황을 이루지만 인쇄 기술의 한계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한 경제난과 용지난을 겪으면서 해방을 맞이한 1945년에서부터 한국전쟁을 겪은 1950년대에 발행되었던 책들은 대부분 보존되지 못하고 분실되거나 소실되었다. 수집 과정에서 확인을 해보면 보존되어 있다 하더라도 갱지류로 발간된 대부분의 당시 책들은 일제강점기에 발행되었던 책들보다 현격히 질이 떨어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죽순(竹筍)'은 이윤수의 주재 하에 죽순시인구락부의 동인 모임 활동 일환으로 발간되었다. 죽순의 창간 동인으로는 김동사, 박목월, 유치환, 이영도, 이호우, 최해룡, 이응창 등이 있었으며, 회차가 진행될수록 구상, 김춘수, 신동집, 이설주, 박양균 등 지역의 문인들이 참여하였다. 김요섭과 천상병은 죽순을 통해 원고를 발표하기도 했다. 목우는 직접 발품을 팔아 원고를 취합하는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으며 실질적인 죽순의 편집과 발간을 담당하였다. 그 노력으로 온전한 동인지로 발간은 되었지만, 회차 마다의 편집후기에는 질곡의 시대에 대한 생생한 속살이 고스란히 담고 있다. 창간호의 편집후기에서 "죽순처럼 힘차게 항상 푸른 대처럼 절개롭게 굳은 마음으로 똑바르게, 이 고장 시문학의 봉화가 되겠다!"고 눈 덮힌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죽순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지만, 7집 이후부터의 편집후기에는 생계와 발간에 대한 자금난, 용지난에 대한 걱정이 유달리 드러난다. 결국 마지막이 된 12집 종간호에는 자조섞인 회한의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하지만 '죽순'의 염원은 꺾이지 않아 30년이 지난 1979년 지역의 문인들과 전국 필진의 참여로 복간되기에 이르렀고, 현재까지 그 의지를 담아 왕대의 숲을 이루며 한 세기 가까이 우리시대의 문학을 현재진행형으로 아카이빙해 나가고 있다.

2020-06-08 13:31:08

[매일춘추] 알렉산더 해밀턴

[매일춘추] 알렉산더 해밀턴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온몸으로 흠뻑 느낀 후, 나는 다시 런던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에든버러를 향한 설렘이 컸던 만큼이나 아주 중요한 스케줄이 런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년 전 브로드웨이 출장길에서도 시도했었지만 80만원이 넘는 티켓 가격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터라 관람 넉 달 전 예약한 30만원이나 하는 티켓 가격이 저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침내 그 작품을 영접하는 날, 나는 빨간색 2층 버스 앞머리에 앉아 극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 극장과 사인물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입꼬리를 잔뜩 올린 채 버스에서 뛰어내리듯 하차했다. 2015년 이후 뮤지컬계에서 끊임없는 붐을 일으키고 있는 뮤지컬 '해밀턴'이 바로 그것이었다.'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10달러 지폐 속의 주인공으로서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으로 초대 재무장관까지 역임했지만 그의 사후에 정적(政敵)들의 개입으로 흔적이 많이 사라져 미국인조차도 잘 알기 힘든 역사적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전기를 읽고 영감을 받아 작품의 대본과 곡, 가사까지 모두 쓰고도 초연 무대의 주인공 '해밀턴' 역할을 맡아 직접 공연까지 하면서 전 세계적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린 마뉴엘 미란다'는 10여년의 시간을 들여 창작에 창작을 거듭한 결과로 본 작품을 브로드웨이에 선보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에 2016년 제70회 토니어워즈에서 역대 최다 부문 노미네이트라는 기록을 남겼고 11개 부문에서 수상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중심을 들여다보면 오랜 기간 해밀턴이라는 인물을 연구하면서 단순히 그를 건국의 영웅으로 미화시키지 않고 그의 희노애락과 인간적인 면까지도 표현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을 힙합과 랩이라는 뮤지컬에서는 다소 낯선 음악 장르를 가지고 완성도 있게 표현해낸 결과라고 보여진다. 그렇기에 내가 봤던 그날의 극장 속에서 런던의 시민들도 남의 나라 역사적 인물에 대하여 충분히 공감하면서 작품을 즐기고 있었고 때로는 함성과 환호를 쏟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인물에 대한 집중과 열정이 국적을 초월하여 공감을 얻어내는 위대한 작품으로 남겨졌다. 그렇게 나도 역사의 현장 속에 녹아들어 함께 있었다.코로나19라는 사상 유래 없는 재난 속에서도 역대 최다 지원자들이 몰린 'DIMF 뮤지컬아카데미'가 마침내 시작됐다. 개최 시기도 미뤄지고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도 식지 않았던 뮤지컬에 대한 열정이 아카데미 현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철저한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강의를 한 번 진행하기 위해선 매일 매일 지켜야 할 수칙도 거쳐야 할 관문도 많아서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역경 없는 세상, 시련 없는 세대에게 허락되는 작은 고난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매번 이 어려운 관문을 뚫고 배움의 현장으로 나오는 교육생들이 이 시간들을 더욱 소중하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더운 날씨 속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 체온이 조금이라도 높으면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 속에 불굴의 의지로 자기 자신을, 자신의 작품을 성장시켜 나갔으면 한다. 마치 뮤지컬 '해밀턴'이 만들어지기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삶과 인생, 역사가 묻어나지만 인간적이며 어떠한 제약도 느껴지지 않는 음악의 형식 속에서도 정통 뮤지컬을 제대로 관통하는 모습이듯이 스스로를 또 자신의 작품들을 그렇게 빚어가기를 바란다.

2020-06-07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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