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컬럼

 
조수정 대구가톨릭대 교수

[세계의 창]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

예루살렘 점령 기념으로 건립 성전 파괴로 흩어진 유대인들 전 세계 떠도는 삶 시작됐지만 승자도 패자도 영원하지 않아로마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을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 지어진 콜로세움(Colosseum·원형경기장)이라고 답할 듯싶다. 거대한 규모로 보나 이곳에 얽힌 이야기로 보나, 콜로세움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곳도 드물 것이다. 로마 시민을 위한 축제와 서커스, 그리고 검투사 경기와 각종 행사가 벌어졌던 곳이며,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처형되었던 곳이기도 하다.그런데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자리를 옮기면, 콜로세움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이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유적을 만나게 된다. 바로 티투스 개선문이다.로마 건축의 독특한 형태인 개선문은 매우 중요하고 명예로운 일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성벽이나 성문에 연결되지 않고 따로 독립적으로 세워졌다. 현재 로마에는 3개의 개선문이 남아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로마제국 시대에 30개 이상의 개선문이 있었다고 한다.티투스 개선문은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 불리는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광장에 자리 잡고 있다.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에 있는 이 광장은 고대 로마제국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부로서 주요 정부 기관이 여기 모여 있었으며, 티투스 개선문은 이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졌다.높이 15.4m, 폭 13.5m, 두께 4.75m로 이후에 지어진 개선문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비아 사크라(Via Sacra, 신성한 길) 벨리아 언덕의 정상에 우뚝 서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로마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지어진 이 개선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티투스 개선문은, 그 이름이 알려주듯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39~81)라는 로마 황제의 승리를 기리려 건립한 것이다. 개선문의 내벽에는 여러 주제의 조각을 새겼는데 전리품을 들고 행진하는 병사들,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이륜 전차를 타고 의기양양하게 개선하는 티투스 황제, 그리고 그에게 승리의 관을 씌워주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모습을 볼 수 있다.그런데 작품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병사들이 메고 가는 전리품이 예사롭지 않다.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커다란 촛대는 유대교의 상징인 메노라(menorah)이며, 커다란 탁자는 유대교 성소의 황금 제대다. 그런가 하면 유대교의 은 나팔도 보인다. 티투스 개선문은 유대·로마 전쟁(66~73)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전쟁은 아주 참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70년,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인을 살육하였고, 솔로몬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버렸다. 서쪽 벽은 간신히 파괴를 모면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유대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 즉 나라 없이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며 떠도는 삶이 시작되었다.로마제국 승리의 상징이자 유대인 박해의 상징이었던 티투스 개선문. 그러나 역사는 승자도 패자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로마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개선한 티투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로마를 정비하며 콜로세움까지 완성했지만,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제국의 중요한 두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파괴되었고, 로마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또 역병이 돌아 많은 로마인의 목숨을 앗아갔고, 티투스 자신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치세 2년 만에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반면 유대인은 오랜 방랑 끝에 결국 이스라엘에 되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민족으로 성장했다.18세기 이래 유럽 각국은 티투스 개선문을 모델 삼아 승리의 개선문을 세웠다. 하지만 승리의 문을 지나는 주인공은 언제나 바뀌었다.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는 우리 사회에 티투스 개선문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2019-12-02 11:04:19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매일춘추] 현장리서치-연극 '887'

올해 6월, 국내에서 이미 꽤 이름이 알려진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의 '887' 연극을 보기 위해 LG아트센터를 방문했다. LG아트센터는 공연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가 공존하는 곳이다 보니 구석구석에 볼거리가 많아 셀피의 배경으로 인기몰이 중이었다. 로비는 사람이 많았음에도 넓어서 그런지 분주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는 조명과 무대 전체를 보는 것을 좋아해서 2층 객석을 선호하는 편인데 항상 앞사람 머리가 무대를 가리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극장의 객석은 경사도가 높아서 시각선이 방해되진 않아 좋았다. 반면에 좌석은 폭이 좁아 어쩔 수 없이 옆 사람과 어깨싸움을 해야 하는 것은 아쉬웠다.르빠주는 엑스마키나(고대 그리스극에서 사용된 무대 장치로, '바퀴 달린 수레' 를 이르는 말. 지금의 왜건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라는 단체를 설립했는데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통한 혁신적인 공연을 만드는 것을 시도한다고 했다. 역시나 의 무대는 경이로웠다. 높이가 2미터 정도 되는 육면체의 무대 세트를 돌리기도 하고 펼치기도 하며 다양한 형태로 변형이 가능했다. 그래서 무대 전환이 암전 없이 이루어졌는데 세트는 매우 섬세한 미니어처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걸리버가 소인국에 온 듯 르빠주는 작은 카메라를 들고 무대 이곳저곳을 비추었다. 카메라로 촬영되는 화면은 무대 전면에 중계되었는데 흥미롭고 기발한 장면들이 꽤 연출되었다.이 연극은 르빠주가 직접 연출하고 출연하는 1인극으로 자서전적 성격을 띤다. 르빠주는 '시(詩)의 밤' 행사에서 시인 미셀 라롱드의 시를 낭송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시를 외우기 시작하지만 3페이지나 길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기억력이 뛰어났던 옛 친구의 도움도, 기억의 궁전이라는 암기법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것은 뭘까? 자신의 핸드폰 번호도 기억하지 못하는 르빠주는 어린 시절에 살았던 아파트의 번지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360도 돌아가는 자신의 키 정도 되는 무대 세트를 돌리자 미니어처 같은 아파트가 나타난다. 자연스레 1960년대 퀘백으로 시간을 돌려놓는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평범한 이웃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택시기사가 된 아버지, 치매에 걸려 요양원으로 가야 했던 할머니…. 르빠주는 왜 과거를 불러왔을까? 퀘백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지켜보는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과거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왜 기억해야 할 것 들을 쉽게 잊는 것일까? 혹은 왜곡된 기억의 조각으로 이미 완성된 상상의 세계에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것일까? 르빠주가 시를 낭송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마 과거 퀘백과 우리나라의 어느 시절이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인 농장주들이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영어를 쓰도록 강요했던 말, "speak white." 당신은 빨간 강요에 의해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2019-12-02 11:02:36

남화영 경북소방본부장

[기고] 무관심이 화(火)를 부른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자연스레 불을 가까이 하는 시기가 다가와 동시에 화재 발생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 시기가 오면 매년 소방관서에서는 겨울철 소방안전대책을 추진해 화재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화재는 거창하게 일어나는 것 같지만 큰 피해를 일으킨 화재도 확인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안전규정 무시나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라는 부주의(무관심)에서 시작하는 경우를 흔하게 목격하게 된다.실제로 최근 5년간 겨울철에 발생한 화재 중 부주의로 인한 화재 발생률이 전체의 절반(51%)이나 차지해 놀라움을 안겨줬다. 부주의의 주요 원인으로는 담배(26%), 불씨 방치(19%), 음식물 조리(15%) 순으로 나타났다.이처럼 대부분의 화재가 부주의에서 비롯되기에 우리가 조금의 관심만 가지고 생활한다면 화재로 인한 불행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경북소방본부는 현장에서 도민과 소통하는 것이 화재 예방의 지름길임을 인지하고 화재취약대상에 대해 '소방간부 현장 확인제'를 실시, 자율안전관리의 초석을 다지고 있다.이는 겨울철 현장 경험이 많은 소방간부들이 직접 사업장에서 소방안전관리 컨설팅을 통해 민·관이 함께 현장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사전에 화재를 예방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또 경북지역 환경을 고려해 재난위험 특성을 분석,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예방대책인 '지역 맞춤형 특수시책'을 발굴하고 화재안전 환경 기반 조성은 물론 민간자율 안전관리 역량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요양병원 등 피난약자시설에 대해서는 '무각본 대피훈련'을 실시해 관계자들에게 초기 대응방안을 숙지하도록 하고 있으며, 노래방 등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다중이용업소에는 '비상구 등 테마 불시단속'으로 불법행위가 근절될 때까지 꾸준히 추진할 예정이다.소방청 자료에 의하면 부주의가 원인이 돼 발생하는 화재가 56%인 주택의 경우도 음식물 조리, 담배꽁초 등 사소한 부주의로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따라서 주택화재 저감을 위해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다. '주택용 소방시설'이란 주택(아파트, 기숙사 제외)에서 발생하는 화재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하는 '소화기'와 '단독경보형감지기'(화재 발생 시 경보로 사람을 대피하게 하는 기기)를 말한다.경북도는 2020년까지 재난약자에 대한 '주택용 소방시설' 100% 보급을 목표로 소방협력단체 등을 통해 기초생활수급자나 화재 취약계층에 무상으로 보급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그럼에도 화재가 발생한다면 초기에 소방력을 집중 투입하는 '최고 수위 우선대응' 방식으로 소방력을 현장에 출동시켜 조기 진화로 인명 및 재산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경북소방본부도 도민의 안전한 겨울나기를 위해 여러 시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겨울철 대부분의 화재는 부주의로 발생하는 만큼 소방관서의 노력만으로는 화재로부터 도민의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평소 화재를 유발할 수 있는 주변 상황을 세심히 살피고 예방을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는 모습이 필요하다.특히 겨울철 화재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주의 화재저감을 위해 전열용품 안전사용, 담배꽁초 무단투기 금지 등 도민들이 일상생활 속 실천할 수 있는 화재예방에 동참해 '화재로부터 더 안전하고 더 행복한 경북 만들기'에 앞장서줄 것을 부탁드린다.

2019-12-01 15:34:20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 국민의 자존심도 국익이다

"지소미아(GSOMIA)? 그게 뭐지?", 대개의 반응은 이랬다. 그러다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라 하면 "아! 그거"라고 하다가도 이내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일본과 무슨 군사 협정이냐는 거였다. 그것도 그렇게나 급하게', 사실이 그랬다. 지난 정부가 국민정서상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협정을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워버렸다. 일본이 우리에게 요청하고 실무자회의 달랑 두 번하고 협정까지 체결하는데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그게 지소미아였다.반대 여론도 물론 있었고 여기저기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오래 세간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2016년 11월 23일, 탄핵 정국이 한창이던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뒤 집권당이 대통령의 조기 퇴진을 당론으로 결정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튼 그때의 지소미아는 지금과 좀 달랐다. 국가안보를 위해 세계 각국과 맺은 30여 개의 지소미아 중 '추가된 하나'였다. 다만 상대가 일본이라는 게 문제였다. 광복 이후 처음 맺는 일본과의 군사 협정, 그걸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무조건 고울 순 없었다.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말이다. 지난여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부가 일본 수출규제의 맞대응 카드로 지소미아를 거론하자 '해선 안 될 협정이었으니 이참에 아예 끝내자'고도 하고 '함부로 그래선 안 된다'고도 했지만 대략 그 정도였다. 지소미아는 우리 안보의 근간이자 핵심이니 없으면 큰일 난다고까지 하지 않았다. 그저 일본에 대응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 다행이라 여겼고 여론이 그랬듯 언론과 정치권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지소미아는 일본이 아쉬워서 우리에게 먼저 맺자고 한 협정, 그러니까 우리에게 유리한 카드였다. 따라서 '일본이 안보상 우리를 믿지 못해 백색국가에서 배제하고 수출규제를 하겠다는데 우린들 왜 그런 국가를 상대로 지소미아를 유지해야 하느냐?'는 정부의 주장은 하나 잘못된 게 없어 보였다. 그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그런데 돌연 상황이 급변했다. 이 지소미아가 우리에게 유리한 카드가 아니라 놓치면 죽는 카드가 되었다. 그런 만큼 지소미아 종료를 예고한 정부 또한 단박에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리 급해도 건드릴 게 따로 있지 어떻게 나라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을 가지고 도박을 하느냐?"는 질책이 쏟아진다. 지소미아 종료는 미국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고 그렇게 되면 한미 동맹이 깨질 것이고 결국 우리의 안보는 파국을 맞게 될 거란 이유에서다. 지소미아의 역할 또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필요한 하나의 연결고리에서 전체 전략을 지탱하는 중심축, 또는 기둥으로 급진전했다. 어떨 땐 반세기 훨씬 넘게 이어온 한미상호방위조약보다 더 중요해 보이기까지 한다. 결국 지소미아 카드를 꺼내든 정부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게 되었다.그런데 지소미아가 그렇다 치면 그럼 우리가 일본에게 할 수 있는 건 무엇인지에 대해선 별 말들이 없다. 그래서 불현듯 궁금해진다. '미국이 한일 간의 지소미아 종료를 싫어하는 건 맞지만 그것 하나로 한미 동맹이 끝장나고 진짜 나라가 망하기까지 할는지?' '그럼 지소미아가 없었던 그 긴 세월을 우린 어떻게 살아낸 건지?' 자꾸 따져보게 된다. 일본이 강제 동원 노동자를 여전히 '조선반도 노동자'라 부르며 시종일관 거짓말을 일삼아도 우린 그저 가만히 참고만 있어야 하는지도 묻고 싶어진다.지소미아 종료 유예를 발표한 청와대도 참 이해하기 힘들다. 국민에게 말 한마디 없다가 일본 정부가 '한국이 완전히 항복한 것'이라고 하자 "쟤네들이 또 거짓말했어요"라고 이른다. 불매 운동하느라 고생한 국민에게, 그렇게 하면 나라가 곧 망할 것같이 이야기한 사람들로부터 사과조차 받지 못한 국민에게, 늘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며 훈계를 받던 그 감정적이기만 한 국민에게 다시 기댄다. 국민의 자존심을 다치게 해놓고 국익을 위해 그랬으니 또 참으라고 한다.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면 국민의 자존심도 국익이다. '그 덕분에 대일 협상이 잘 되었다'며 야당 대표를 찾아 인사를 할 게 아니라 국민에게 '기대에 못 미쳐 미안하다'고 해야 하고 국민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한다. 매번 급할 때만 국민을 찾아 뒤치다꺼리해 달라고 하면 안 된다. 그건 염치없는 짓이다.

2019-12-01 15:33:43

채명 무용평론가

[매일춘추] 어느 가을 저녁, 멋진 피아니스트

어느 늦은 가을 저녁, 유망한 젊은 연주자니 한 번 보라는 지인의 소개를 받고 피아노 리사이틀을 가게 되었다. 피아노 연주회는 오랜만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가고 오는 시간이 번거롭긴 하지만, 공연장에 들어가는 순간 즐거움은 보장된다는 나의 지론을 따르고, 피곤해서 졸리면 잠깐 눈 붙이는 것도 염두에 뒀다.큰 무대에 피아노 한 대,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늘 그득한 무대를 보다 피아노만 달랑 얹혀 있으니 썰렁했고 무대는 더 커 보였다. 음악전문 콘서트하우스에 독주의 단출한 공연을 위해서 무대 세트가 없는 걸까? 음악 전문인은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내림막이나 가림막 등으로 무대를 아늑하게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음악공연을 가면 친절하게 여러 시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곡 해설을 자막으로 띄우기도 하고, 샹들리에를 천정에서 내리고, 커튼 등으로 무대를 아름다운 거실처럼 꾸미기도 한다.프로그램엔 휴식시간을 경계로 전반부 베토벤, 후반부 쇼팽의 작품을 각각 소개했다. 극장 안내자에게 러닝타임을 물으니, 100분인데 조금 단축될 수도 있다고 여지를 두었다. 독주를 하는데, 그렇게 길게 할까, 반신반의했다.커다란 무대의 휑한 분위기 속 키 큰 피아니스트가 등장했다. 성큼성큼 무대를 쉽게 가로질러 피아노 앞에 섰다. 20세 청년이 정말 수려한 외모에 수줍은 미소를 띠며 꾸벅 인사를 했다. 그는 슈트의 앞 단추를 풀고 피아노 앞에 앉더니, 오로지 연주에 몰두했다. 모두를 숨죽이게 만드는 그의 실력은 관객들마저 긴장하게 하는 파워를 가졌다. 필자도 거의 눈을 떼지 못하고, 자유로이 넘나드는 손가락에 집중했다. 50분간 2개의 연주가 끝난 후 휴식시간은 관객에게도 긴장을 푸는 시간이었다.베토벤 작품이 조금 장엄한 분위기였다면 후반부 쇼팽의 작품은 강도 높은 기교를 요구했고, 건반 위의 그의 손가락 움직임은 CG처리를 한 것처럼 빨랐다. 숨 가쁘게 따라갔다. 앙코르 곡에서 그는 더 자유롭게 실력을 발휘했다. 관객들의 요청이 쇄도하니, 그는 가진 기량을 맘껏 풀어냈다. 공연시간은 100분이 넘었고, 가슴이 후련했다.극장 2, 3층에도 많은 관객이 있었다. 멀리서 보는 이들을 위해서 이제는 실시간 공연실황을 무대 뒤편에 확대하여 비춰주는 친절함도 필요할 때이다. 피아노연주에서 어느 좌석이든 연주하는 손과 표정을 함께 보기는 어렵다. 필자는 손가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는 행운을 가졌으나, 그래도 답답하고 아쉬웠다. 아직도 20세기 연출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클래식예술계의 고집은 관객을 위해 내려놓을 때도 되었다. 친절한 진행과 배려가 연주나 공연의 감동도 배가 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채명 무용평론가

2019-12-01 06:30:00

김동인 저 '약한 자의 슬픔'이 게재된 '창조' 1919년 2월호. 국립중앙도서관소장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김동인은 어떻게 새로운 문체를 만들어낸 것일까

김동인은 이광수와 함께 한국근대문학의 새로운 장을 연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막상 김동인의 문학적 업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누구건 제대로 답하기가 어렵다. 누군가는 중, 고등학교 때 배운 지식을 되살려 '삼인칭 대명사' 사용과 '과거 시제 성립'이라는 교과서적 내용을 입에 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뿐, 삼인칭 대명사 사용과 과거 시제도입이 왜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울러 김동인이 그 새로운 생각을 어떻게 해낸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삼인칭 대명사와 과거형 시제가 우리 문학에 처음 사용된 것은 백 년 전,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1919)에서였다. '약한 자의 슬픔'은 강엘리자벹이라는 신여성이 강간과 원치 않은 임신, 유산을 겪으면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김동인은 이 충격적 과정을 스케치를 하듯 세밀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해내고 있다. 여기에는 이전의 문학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는 새로운 문체가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일단 그는 조선의 전통문학에서는 사용되지 않던 '그' 혹은 '그녀'라는 삼인칭 대명사를 소설에 도입했다. 아울러 전통적 문학의 주된 서술형태였던 '하더라', '하노라' 대신 과거형 서술어 '했다'로 문장을 끝맺었다. 예를 들자면 '홍길동이가 울며 집을 떠나더라'라는 문장이 김동인 소설에 오면 '그가 울며 집을 떠났다'로 된 것이었다. 이 새로운 문체는 큰 변화를 이끌어냈다. 무엇보다 소설의 과거시제와 현실의 현재 시제가 분리되면서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가 가능해졌다.김동인이 천재여서 '하노라'를 '했다'로 바꾸는 등의 혁명적 생각을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리에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김동인은 이른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이 흡수한 서양근대문물을 몸소 체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경험한 다양한 근대문물 중에는 소설도 들어 있었다. 그 수많은 일본근대소설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새로운 문학을 어떻게 하면 조선에서도 이루어낼 수 있는지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일본어로 먼저 소설 내용을 구상한 후, 다시 그 내용을 조선어로 쓰는 방법을 통해 일본문학이 서양문학에서 흡수한 새로운 문학 형태를 배워갔다.삼인칭 대명사 사용과 과거시제 활용은 물론,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틀림이 없다'라든가 '-라고 느낀다'라는 표현 역시 이 과정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었다. 이 노력의 결과가 바로 '약한 자의 슬픔'이다. 김동인의 이 노력을 두고 '왜 하필이면 일본!'이라며 불쾌해 할 필요는 없다. 일본 근대문학을 열었던 소설가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 역시 러시아어로 소설을 쓴 후, 다시 일본어로 옮겨 쓰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문체와 문학을 만들어갔기 때문이다.우리의 근대문학은 이처럼 치열한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눈물겨운 노력을 생각하면 한국근대문학에 대한 현재 우리의 존중과 관심이 너무 약한 것은 아닐까.

2019-11-30 06:30:00

김준현 작 '백양사의 가을'

[내가 읽은 책]프로타고라스/플라톤 지음/박종현 역주/서광사/2010년

누가 독자에게 같은 주제를 여러 측면에서 집요하게 묻는다면, 독자는 몇 차례 대답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예닐곱 번 답변할 수준이다. 2400년 전 소크라테스에게 맞서 자기주장을 펼친 사람이 있다. 마지막엔 말문이 막혔지만, 상대가 '질문 왕'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훌륭하게 방어한 셈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로 유명한 프로타고라스 이야기다.'프로타고라스'는 플라톤이 40세 이전에 쓴, 초기 대화편 중 한 권이다. 책은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의 '훌륭함(aretē, 아레테)'에 관한 논쟁을 기록했다. 두 사람이 논쟁한 시기는 기원전 433~432년경으로 아테네의 전성기이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소크라테스의 나이 37~38세 때로 추정한다.기원전 5세기 후반, 소피스트(sophist)는 당시 헬라스 문화의 중심지 아테네로 몰려든다. 이들은 아테네의 부호 칼리아스의 집에 유숙하는데, 프로타고라스도 여기에 머물러 있다. 프로타고라스에게 배우겠다는 히포크라테스를 데리고 소크라테스가 이곳을 방문함으로써 대화는 이루어진다.책은 '훌륭함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논제를 중심에 놓고 훌륭함과 그 부분들의 관계를 살피고, 훌륭함과 관련된 시모니데스의 시를 논의한다. 소크라테스가 주로 묻고 프로타고라스가 대답하면서 훌륭함과 관련된 것들이 어떠하며, 훌륭함이 도대체 무엇인지 고찰한다. 프로타고라스는 '훌륭함은 가르칠 수 있다.'는 주장을 논증하고, 소크라테스는 '훌륭함은 가르칠 수 없다.'는 논지로 질문하며 논박한다. 두 사람은 때로는 같은 의견을 내놓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맞서면서 논증에 온 열성을 다한다.소크라테스는 평소 소피스트를 탐탁지 않게 여긴 듯하다. 소피스트의 스승 격인 프로타고라스를 지혜로운 사람은커녕 '언변에 능란하도록 만드는 일에 통달한 사람'으로 본다. 이런 사람에게 사례를 주고 배우기 위해 히포크라테스가 자기를 찾아왔으니, 이번 기회에 소피스트의 본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수십 번 묻는다.논쟁 첫 부분에서는 프로타고라스가 설화(mythos)와 논변으로 의기양양하게 논증을 펼치지만, '산파술의 제왕' 소크라테스가 질문할수록 그는 궁지에 몰린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짧게 동의 여부를 말하거나, 정색하거나, 거칠어진다. 심지어 대답하는 내용과 관련해서 싸울 태세로 보이기도 한다. 더 대답하지 못하는 프로타고라스는 침묵한다. "그대 스스로 마무리하시오." 프로타고라스의 항복 선언이다. 소크라테스 쪽으로 승기가 기울지만, 독자도 알다시피 이 대화는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논쟁이 아니다.소크라테스는 왜 프로타고라스를 찾아갔을까? 그가 당대 최고의 소피스트라서. 히포크라테스에게 소피스트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둘 다 아니다. 진리에 다가가고자 함이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심도 있게 논의를 펼친 두 사람은 훌륭하다. '프로타고라스'는 독자가 '훌륭한 상태'에 이르도록 사유할 시간을 준다. 그렇다. '훌륭함'을 가르칠 수는 없고, 터득할 수는 있다.김준현 학이사독서아카데미회원

2019-11-30 06:30:00

송석화 메시지 캠프 대표

[광장] 너만 모르고 다 알아

누구나 알 법한 유명 정치인이 뉴스에 나왔다. 축하하는 장면,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달리 그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이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나온 표정이었을 테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게 저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우리는 종종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싶은 순간들이 있다. 보여지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노출되는 모든 순간, 모든 모습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우리가 본래의 모습을 장식품으로 꾸미고 뒤덮는다 한들 내면의 속성은 우연한 기회에 수면 위로 노출되기 마련이다.우리는 겉모습이 진정한 자아인 줄 착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마음의 창은 다르다. 요하리의 창(Johari's window)은 한 개인의 자아가 노출되는 정도에 따라 4가지 영역으로 구분했다. 나도 알고 상대방도 아는 '열린 자아', 상대방은 알고 있으나 정작 나는 모르는 '눈먼 자아', 나는 알고 있지만 상대방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자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자아'가 그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너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눈먼 자아다. 국민이나 타 조직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잘 보이는 문제점을 정작 그 내부에서는 집단사고에 빠져 깨닫지 못하거나 외면하려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국민 정서와 괴리'됐다고 표현하기도 한다.서두에 나왔던 유명 정치인은 왜 눈먼 자아에 빠져 있었을까. 언론 노출이 잦은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신체언어가 반복되는 것은 주변에서 아무도 그의 눈먼 자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직급이 올라가고 조직 내부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질수록 리더십의 사각지대도 커지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승진과 연봉을 결정하는 사람에게 돌직구를 날릴 만큼 용기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정치는 소망의 총체라고 했다. 때로는 지나친 자기합리화로, 때로는 감언이설에 둘러싸여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놓치곤 한다. 본인에 대한 눈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대개 리더들은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고 하지만 막상 결점을 지적하면 속상해 하거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십상이다. 나를 무한히 사랑해주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객관적인 현실 인식으로 조언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 또한 복이다. '내가 모르는 나'의 크기가 줄어들수록 자기 이해는 정확해진다. 눈먼 자아는 피드백 즉, 상대방의 조언을 통해 나 자신을 알아갈 수 있게 되고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다. 타인과 소통하는 영역이 넓어질 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보다 수용적인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아프지만 필요한 것이다. 그 가능성을 위해서는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열린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공적인 조언을 사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보복하는 것은 입을 닫게 할 뿐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외골수형 리더들이 어떠한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는지 확인해 왔다. 자신을 향한 조언은 달콤하지는 않지만 성장에는 무한한 자양분이 된다. 조직의 발전으로도 연결된다.나에 대한 진실은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지 그들이 내게 하는 말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리더의 자리, 갑의 자리에 있어서 들려오는 좋은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대승적인 관점에서 애정 어린 조언을 포용할 줄 아는 권력자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2019-11-29 19:53:54

이은화 대구시 남구 선거관리위원회 홍보 주무관

[기고] 정치 후원금과 깨끗한 정치문화

정치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명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깨끗한 정치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잘 모른다. 이러한 면에서 정치후원금은 청렴한 정치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볼 수 있다.정치란 돈이 필요한 구조여서 정치자금을 충분히 확보해야 원활한 정치활동이 이어진다. 문제는 자금이 매번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정치인이 대기업이나 재력이 뒷받침되는 특정인과 결탁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과거에는 정치자금 제도상의 미비와 솜방망이식 처벌로 이러한 결탁이 만연하여 죄의식도 부족했다. 아무래도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처벌받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이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다.문제는 경각심만으로는 깨끗한 정치자금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정치후원금 후원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올바른 정치를 위한 필수적인 행위가 됐다.정치후원금은 크게 기탁금과 후원금으로 나누어진다. 기탁금이란 국가기관인 선거관리위원회가 정치자금을 기부하고자 하는 개인으로부터 기탁금을 받아 일정한 요건을 갖춘 정당에 지급하는 제도이다. 정치자금 기부자와 기부받는 자 간에 발생할 수 있는 청탁 등 폐해를 예방함으로써 건전한 민주정치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며, 후원금은 특정 정당, 정치인을 후원하려는 개인이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후원회에 기부하는 것을 말한다.이러한 정치후원금은 국민이 정치인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다. 고액 정치후원금을 후원하는 기업이나 특정인에 맞서 국민 다수가 소액 기부를 통해서 정치의 투명한 집행이 가능하도록 돕는다.이를 위해서 다양한 제도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우선 개인의 연간 후원금 기부한도 총액을 2천만원 이하로 잡아 특정 기업이나 단체가 정치를 좌지우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정치후원금센터(www.give.go.kr)를 통하고 있다.정치후원금센터에 기탁금을 기탁하면 '조세특례제한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본인의 세액공제 범위 내에서는 10만원까지는 전액, 10만원을 초과한 금액에 대해서는 해당 금액의 15%, 3천만원을 초과한 경우 그 초과분에 대해서는 25%에 해당하는 금액이 세액공제되며, 계좌이체, 신용카드 및 포인트 등 간편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기부가 가능하다.이러한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것도 결국 정치후원금을 후원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제도적인 부분이다. 이를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이제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새로운 형태로 거듭나고 있다. 정치적인 제도가 마련된 만큼 문화적 성숙의 단계에 이르렀다. 정치후원금 후원은 일반 국민에게는 정치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정당 및 정치인에게는 깨끗한 정치자금의 원활한 조달 역할을 하며 더 나아가 민주주의 국가로서 건전한 민주정치 발전의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오늘부터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후원을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정치후원금은 더 이상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깨끗한 정치문화 정착을 위해 다수의 소액 후원이 필요하다.

2019-11-28 11:16:49

구지영 지오뮤직 대표, 작곡가

[매일춘추] 비주류가 또 다른 주류 만든다

유명하지 않던 인디밴드가 어느 날 방송을 타게 되면서 갑자기 유명해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오랜 세월 이 팀을 응원해왔던 팬들은 그들의 성공을 기뻐할까? 좋아하던 밴드가 대중들의 인정을 받고 인기를 누리게 되었으니 분명 반가운 마음이 들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제 예전처럼 이 밴드를 좋아할 수는 없겠구나' 라는 마음도 들 것이다. 다수의 대중이 알아주지 않는 인디밴드를 오랜 세월 좋아하는 팬들은 남들과 조금 다른 욕망이 있다. 그들은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남들보다 조금 앞서서 열광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힙스터(Hipster)'라고 부른다.힙스터의 시작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간다. 1940년대, 재즈가 서브 컬쳐로서 인기를 끌던 미국, 인종차별이 조금씩 약해지며 백인들은 흑인들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흑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재즈 음악을 듣고 흑인들의 패션을 흉내 내고 그들의 슬랭(은어)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처음으로 흑인 문화를 수용한 백인 그룹들을 1세대 힙스터라 한다.시간이 흘러 1960년대 전쟁과 물질문명에 반대하는 백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히피문화가 유행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개성과 패션을 추구하며 독특한 생활양식까지 만들어냈다. 비폭력과 평화를 주장하며 락 음악에 심취하던 이들 그룹을 2세대 힙스터라 할 수 있겠다.힙스터의 가장 큰 특징은 비주류성이다. 히피 문화가 너무 크게 유행한 탓에 이들 그룹은 더 이상 힙스터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3세대 힙스터인 여피(Yuppie)가 등장하게 된다. 여피는 도시의 젊은 전문 인력을 뜻하는 말로, 이들은 고급 양복을 입고, 유럽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그들은 히피와는 달리 자신들이 유능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하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들도 빠르게 힙스터의 지위를 잃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앞서 히피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너무 많은 여피가 등장한 것이다.요즘 한국에서는 힙합의 인기가 뜨겁다. 힙합이 비주류였던 시절 이 음악 장르를 좋아하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힙스터로 인정받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힙합이 단순한 음악의 장르를 넘어 패션과 삶의 철학을 아우르는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었고 한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한국의 힙스터들이 힙합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그들은 또 어떤 흐름을 만들어낼까? 주류를 따라가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즐기는 사람들. 이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에 좀 더 다양한 문화가 발생하며 이러한 문화들이 취향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구지영 지오뮤직 대표, 작곡가

2019-11-28 11:15:22

김형준 명지대 교수

[춘추칼럼] 무엇을 위한 선거법 개정인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배분 방식 복잡유권자 투표 선택권 훼손시킬 우려어떤 경우에도 힘이 아닌 합의 전제공수처법 연계 밀어붙이기는 곤란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선거법 개정안이 27일 국회 본회의에 자동 부의됐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1' 협의체를 가동해 처리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패스트트랙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 상황에서 극적으로 합의 처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한 사회의 제도는 규칙과 절차의 집합으로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이 전개되는 틀을 제공한다. 한편 선거제도는 정치 게임의 주요 기본 규칙으로 민주정치의 핵심인 대의 과정의 본질을 규정해준다. 따라서 선거제도가 어떻게 짜여 있느냐에 따라 대의 민주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고, 반대로 퇴보할 수도 있다. 각 정당이나 후보가 얻은 득표를 의석으로 전환시키는 장치인 선거제도가 소수 득표를 한 정당이 다수 의석을 점유하면 민의를 의정에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해 대의 민주주의가 퇴보할 수 있다.지난 2016년 총선에서 거대 정당들은 자신들이 얻은 득표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가령 민주당은 정당 득표에서 25.5% 득표했지만 총의석수에서 41%(123석)를 얻었다. 무려 15.5%의 보너스율(의석률-득표율)을 획득했다. 반면 국민의당은 26.7%의 정당 득표를 했지만 실제 의석률은 12.7%(38석)에 불과했다.거대 정당에게 유리한 기존 선거제도에서 비례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다. 하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은 몇 가지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의석 배분 방식이 너무 복잡해서 유권자의 투표 선택권을 훼손시킬 수 있다. 유권자는 자신이 던진 표가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알아야 의미 있는 투표를 할 수 있다. 가령 기존 선거제도에서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후보가 지역구에서 당선 가능성이 없으면 사표를 생각해 다른 정당 후보를 찍고, 정당 투표에서는 자신이 선호하는 정당에게 투표할 수 있다. 이른바 '전략적 분리 투표'가 가능하다. 2016년 총선 직후 한국선거학회가 실시한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지역구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했던 유권자의 12.6%가 정당 투표에서는 국민의당을 지지한 것으로 분석됐다.패스트트랙에 지정된 선거법에는 '비례대표 국회의원 의석은 당별 득표비율에 따라 산정한 의석수에서 해당 정당의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인 수를 뺀 후, 그 수의 50%를 먼저 배분하고, 잔여 의석은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의 득표비율에 따라 산정한 의석수를 배분한다. 그다음 6개 권역별로 최종 의석을 배분한다'고 되어 있다.이렇게 복잡한 배분 방식을 이해하고 투표할 유권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비례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유권자의 전략적 선택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개정인가? 더구나 지역주의 타파 명분으로 지역구(225석)의 3분의 1에 불과한 비례대표 75석을 6개 권역으로 나눠 배분한다는 것도 난센스다.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에서는 지역구와 비례구 의석수가 298명으로 동일하다. 일본에서는 지역구 289석, 비례구 176석, 뉴질랜드에서는 지역구 63석, 비례대표 50석이다. 권역별 비례대표제에서는 적정 규모의 비례대표 의석 확보가 필수적이다. 이를 간과한 채 적은 비례대표 숫자로 비례성 강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전 세계적으로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나라는 없다. 권력구조와 선거제도 간의 조화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제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채택되면 다당제가 부상되고, 이념과 노선이 다른 정당들 간에 '권력 나눠 먹기식 연대'가 이뤄질 수도 있다.어쩌면 정치 갈등과 정치 불안정이 일상화될 개연성이 있다. 미국 정치에서 보듯이, 다당제는 선이고 양당제는 악이란 명제는 없다. '게임의 룰'을 정하는 선거제도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과 연계해 처리하는 식의 정치 공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어떤 경우에도 힘의 논리가 아니라 합의 처리돼야 한다. 득표-의석 간 비례성 증대도 중요하지만 정치제도 간의 조화성, 정책을 중심으로 한 정당정치의 제도화, 그리고 정치 신뢰 회복과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2019-11-28 11:14:10

김은아(그림책 칼럼니스트)

[북돋움]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종영했지만 여운이 꽤 짙다. 올해 가을이 지나는 동안 곳곳에서 만난 여성들의 관심사는 단연 '동백꽃'이었다.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와 저마다 좋아하는 대사를 언급하며 드라마 작가를 향해 찬사를 쏟아냈다.주인공 동백(공효진)은 어려서는 엄마가 없다는 이유로, 커서는 미혼모가 술집을 운영한다는 이유로 잔뜩 웅크린 채 사람들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세상의 편견 속에서도 착한 본성을 잃지 않았고, 안타까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했다. 남의 것을 탐내거나 부러워한 적은 없지만 한 번도 공짜 같은 행운이 없었던 자기 인생에도 기적과 행복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은 있었다.이런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좋아하며 응원해 준 용식(강하늘) 덕분에 동백은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친구 향미를 죽인 범인을 직접 때려잡는 용기를 발휘한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켰고 일과 사랑, 가족, 우정 모두를 성취했다.마지막 회에서 동백은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자고 기를 쓰고 살아? 행복은 좇는 게 아니라 음미야 음미. 발을 딱 붙이고 서서 찬찬히 둘러보면 천지가 꽃밭이지. 이제 와서 보니까 나한테 이번 생이 다 기적 같아."반면 철물점 주인 흥식은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둔 채 고양이 죽이듯 사람을 해쳤다. 까불이라는 별명으로 동백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죽이려 한 이유는 그의 내면에 뿌리박힌 열등감 때문이었다. 동백은 흥식이 가게에 올 때마다 땅콩과 계란찜을 서비스로 줬다. 그런데 그 호의가 열등감을 자극하는 원인이 됐을 줄이야! 동네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동백이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흥식은 자신을 딱하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이들을 죽였다. 수감된 흥식은 경찰인 용식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형이 세상을 너무 천진난만하게 보는 게 어릴 때부터 비위 상했어요. 그래서 형한테 얘기해줘야겠어요. 까불이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될 수 있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거라고."심리학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 때문에 위축되어 살아가면서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불행해 한다고 말한다. 열등감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무서운 질병이다.성형외과 의사이자 심리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두루 섭렵한 맥스웰 몰츠(Maxwell Maltz)는 현대인들의 95%가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시달린다고 했다. 수술 후 외모가 나아졌음에도 여전히 불행하게 살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절실한 것은 외과적 수술이 아니라 '실패'와 '부정적 신념'으로 왜곡된 내면의 자아 이미지를 바꾸는 '마음의 성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한 변화를 위한 실천 프로그램을 창안하는 데 몰두했다.그 성과를 담은 '맥스웰 몰츠 성공의 법칙'은 1960년 출간 이후 3천만 부 이상 팔린 자기계발서로 반세기 넘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몰츠는 성공과 행복은 정신적 습관이므로 적절한 자존심만 있으면 하찮은 경멸 따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으며 그런 것쯤은 간단히 지나치거나 무시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서 눈과 귀가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무시를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한편 열등감을 긍정적으로 본 심리학자도 있다. 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이자 정신의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는 열등감 이론을 심리학에 도입해 널리 퍼뜨린 인물로, 개인에게 주어진 열등한 환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중요하며 어느 정도의 열등감을 갖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열등감은 인간이 지닌 잠재 능력을 발달시키는 자극제 역할을 하며, 열등 상황을 극복하여 우월의 상황으로 밀고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을 예로 들며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서들은 대부분 '마음의 성형'을 얘기한다. 멋진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책을 덮고 나면 물음표가 생긴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될 것도 같은데 왜 돌아서면 항상 제자리일까?" 마음…, 참 어렵다.

2019-11-27 20:20:28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

[새론새평] 끝없이 몰락하는 우리나라 자영업

비임금근로자 2년간 10만명 감소사업 규모 상관없이 소득 11.7%↓자본'뛰어난 기술 뒷받침돼야 성공 정부는 규제 완화'세제 혜택 정책을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자료는 지난 2년 동안 우리나라 자영업이 두드러지게 몰락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임금근로자(대부분이 자영업자) 및 비경제활동인구에 대한 부가조사 결과와 2019년 3분기 가계소득 통계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첫째로 2019년 8월 비임금근로자 숫자가 680만 명으로 같은 기간 역대 최저 수준이다. 2년 전인 2017년 8월에 비해서는 약 10만 명 줄었고 작년에 비해서도 6만2천 명이나 축소되었다. 전체 취업자는 1년 동안 45만4천 명이나 늘었는데도 비임금근로자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영업의 생태 환경이 어려웠다는 것을 말해준다.둘째로 비임금근로자의 감소는 대부분 도소매, 제조업, 건설업 및 개인사업서비스업에서 나타났다. 지난 한 해 동안 줄어든 비임금근로자 6만2천 명 중에서 도소매업 5만5천 명, 제조업 2만7천 명, 개인사업서비스업 1만9천 명, 그리고 건설업이 1만7천 명 줄어들었다.셋째로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와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 모두 감소했다. 자영업자의 수는 7만 명 이상 감소했는데 그중에서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는 4만5천 명,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는 2만6천 명 감소했다. 2017년 8월부터 2018년 8월까지 1년 동안은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 감소가 두드러졌고 2018년 8월부터 2019년 8월까지 1년 동안에는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의 감소가 두드러졌다. 이는 2018년 적용된 높은 최저임금으로 경쟁력이 약한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가 먼저 폐업하는 가운데 직장에서 퇴직한 사람들이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로 유입이 많이 일어났다가 2018년 8월 이후부터는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들마저도 폐업하거나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로 전락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판단된다.넷째로, 연령별로 보면 40대와 50대 자영업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40대 자영업자는 13만6천 명, 50대는 5만5천 명 줄어들었다. 특히 40대의 경우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와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 모두 줄어들고 있다.다섯째, 지난 2년 동안 자영업자의 사업소득이 빠르게 감소했다. 문재인 정부 이후 2년 동안 전체 가구의 총소득은 2017년 3분기 453만7천원에서 2019년 3분기 487만7천원으로 7.5%, 금액으로는 34만원 증가했다. 그러나 자영업자가 주를 이루는 근로자외가구의 총소득은 같은 기간 370만3천원에서 380만1천원으로 2.7%, 금액으로는 9만8천원 증가에 그쳤다. 같은 기간 근로자가구 총소득은 502만9천원에서 561만원으로 11.6%, 금액으로는 58만1천원이나 증가했는데 이는 근로자외가구 총소득 증가율의 다섯 배에 가깝다.근로자외가구의 총소득 증가가 현저히 떨어진 이유는 사업소득이 210만원에서 185만5천원으로 24만5천원(11.7%) 감소한 때문이다. 근로자외가구의 사업소득 감소는 지난 2년 동안 모든 소득분위(계층)에서 일어났다. 가장 소득이 낮은 20% 가구인 1분위는 사업소득이 50.3%나 감소했고 2분위는 16.4%, 3분위는 18.0%, 4분위는 7.2%, 그리고 가장 고소득 20% 가구인 5분위는 9.1% 감소했다. 감소율로 보면 1분위 근로자외가구 사업소득 감소율이 50.3%로 가장 크지만 금액으로 보면 5분위(44만원)와 3분위(34만원)에서 크게 줄었다. 소득 계층에 상관없이 사업 규모에 상관없이 사업소득이 축소되고 있음을 말해준다.지난 2년 동안 자영업이 어려웠던 근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2017년 하반기부터 수출이 부진하면서 제조업을 중심으로 일자리와 소득이 가라앉은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각종 규제로 인한 민간 경제의 침몰 때문이다. 세계 경제의 어려움이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겠지만 국내 경제정책은 되돌리면 되는 것이다.최저임금 인상을 최대한 억제하고 규제를 풀어주면서 세제상의 혜택 등을 통하여 기업 마인드를 되살려주면 더 가라앉는 것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그와 더불어 자영업의 생태가 어려운 만큼 무분별한 자영업 진출은 자제하고 삼가야 한다. 요행이 아니라 충분한 자본과 뛰어난 기술력이 받쳐줘야만 자영업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

2019-11-27 19:10:04

권미강 작가

[권미강의 생각의 숲] 어미는 몸으로 자식을 기억한다

'부혜생아 모혜국아'(父兮生我 母兮鞠我·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명심보감 효행 편에 나온다. "어떻게 남자가 아이를 낳나요?" 이런 질문을 자주 불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아기 씨를 준 근원(根源)이라는 걸 알고서야 무릎을 쳤던 대목. 아버지건 어머니건 부모가 핏줄인 자식을 제 몸처럼 살피고 아끼는 건 당연하다고 이해했던 구절이다.어미는 몸 속에서 열 달 동안 자식을 키워낸다. 아비가 준 작은 씨앗을 자신의 몸 안에 들여 뼈를 만들고 핏줄을 이어가고 살집을 키워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리와 손으로 자식은 어미의 배를 차고 만지고 간질이기도 한다. 눈을 말똥거리고 냄새도 맡고 입술을 오물거린다. 자식은 어미의 생각도 새겨 넣는다. 어미가 울면 몸을 움츠리고 웃으면 따라 웃는다. 열 달 동안 제 몸 속에 어미를 새겨 넣는 존재가 자식이다. 그렇게 한 몸이었던 어미와 자식은 탯줄을 끊고 나서야 둘이 된다.태어나면 부모가 함께 자식을 보살피지만 태어나기 전 열 달은 온전히 어미와 자식 둘만의 시간이다. 세상에 나와 배우는 첫 말도 '엄마'이니 그 끈끈한 관계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어미는 몸으로 자식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식을 잃었을 때, 어미들은 자신의 몸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 고통에 대해 크다 작다 할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이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면 말이다. '해인이법' '하준이법' '민식이법' '태호-유찬이법' 등 어린이 생명안전법 뒤에는 한 몸이었던 자식을 잃은 어미들이 있다. 자신들과 같은 슬픔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다른 아이들이 똑같은 사고에 노출되지 않게 해달라며 어미들이 국회의원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제발 법안을 처리해 달라고. 자식을 기억하는 몸들이 읍소하는 모습을 보며 순간 몸의 기억들이 울컥 몸 밖으로 품어져 나왔다. 국민을 대변한다는 그들에게는 그 기억이 없는 것일까? 분노와 궁금증도 함께 품어져 나왔다.

2019-11-27 18:00:00

가야명상연구원장·대구대학교 명예교수

[전영평의 귀촌한담] 행복한 숭산보건 진료소

지독한 감기에 걸린 할머니가 어렵사리 부탁해서 들른 곳은 가야면 숭산보건진료소였다. 시골 오지에는 주민 편의를 위해 설치된 보건진료소라는 것이 있다. 면 단위에는 보건지소가 있지만 보건진료소는 그보다 더 열악한 이(里) 단위에 설치된 주민친화적 일차 건강진료소이다. 귀촌해서 살다 보니 보건진료소야말로 오지 주민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의료기관이라는 것을 실감케 되었다.공기 좋은 시골에는 아픈 사람들이 더 많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피할 수 없는 농사 노동과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이다. 아파도 병원에 가자고 자식에게 선뜻 연락할 용기도 없으니 그냥 참는다. 진료소는 그런 주민들이 손쉽게 찾게 만든 특별병원인 셈이다. 문제는 진료소의 문턱이 높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진료소장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지는 국면이다. 65세 이상은 자부담이 없고 그 이하는 900원만 부담하기 때문에 주민들로서는 자주 진찰을 받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진료소가 북적거리는 이유다. 소장 혼자서 많은 주민을 상대해야 하니 근무 강도가 강할 수밖에 없다. 주민들은 민감한 눈으로 진료소장의 눈치를 보고, 진료소장은 적당한 선에서 주민 접촉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봉사 정신과 나이팅게일 정신이 요청된다.한편으론 주민들의 의료 과소비가 지양돼야 할 국면이기도 하다. 친절한 진료소장 소문은 금세 동네에 자자해진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숭산진료소에는 나이팅게일 정신이 넘치는 진료소장님 덕분에 환자가 넘쳐난다. 먼 이웃 마을에서 차량으로 소복하게 오는 경우도 있다. 문턱이 낮다 보니 나도 신세를 진다. 벌, 지네, 깔따구에 쏘이거나 몸이 불편하신 분과 같이 갈 때도 있다. 들른 김에 혈압, 당뇨 체크도 해본다. 진료 도중에 주민의 인정 가득한 봉지도 보게 되지만, 들어서자마자 주사 한 대부터 놔달라고 강짜부리는 사람도 여럿 봤다.시골에 살다 보니 농사는 각종 사고에 취약한 생계 활동임을 알게 되었다. 농민 중에서도 위험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할머니들이다. 오랜 밭농사로 인하여 손목, 허리, 무릎, 근육 등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이고 신경질환, 우울증, 소화 불량, 감기에 시달린다.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이유는 교통 불편 때문이다. 숭산진료소장님은 마을 방문 출장 진료도 해주신다. 그 마음이 진정 행복해 보이기에 주민들마저 행복해진다.

2019-11-27 18:00:00

[기고] 대구시 겨울스포츠 진흥대책은?

2011년 야반도주하다시피 대구를 떠난 프로농구 오리온스가 한때 야속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그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비즈니스가 목적인 프로스포츠를 향해 스포츠 정신을 논하고 의리를 요구하는 건 그들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이다.시(市) 차원의 지원이 미미하고, 연습 상대도 없으며, 관중 동원 또한 중앙에 비해 쉽지 않으니 좋은 조건을 내건 스카우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한 결과 대구시는 광역시라는 자존감에 앞서 야구와 축구 시즌이 마무리된 겨울철만 되면 스포츠 볼거리가 전무한 상태가 되고 만다. 실내에서 농구로 체력을 다지고 이를 관람하면서 여가를 즐기던 청소년들도 스마트폰과 컴퓨터 게임으로 기나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실정이다.흔히 스포츠가 성립되는 조건으로 선수, 관중, 그리고 시설을 꼽곤 한다. 프로스포츠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최근 프로농구단을 다시 유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수놓아 보았다. 우선 선수는 팀에 소속되어 있으니 팀 스카우트만 성사되면 별문제가 없을 것 같고, 관중도 과거의 예를 보아 타 시도에 비해 충성도가 뒤지지 않으니, 문제는 시설, 즉 체육관이었다.대구시는 현재 대규모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이 둘밖에 없다. 하나는 여태껏 사용해 오던 좌석이 3천867석(수용인원 5천 명)인 대구체육관이 있다. 시대적 추세로 보아 규모가 작기도 하지만 그나마 그것도 노후로 인해 곧 철거 예정인 시설이다.서부지역에 새로운 체육관의 건립이 예정되어 있다고는 하나 2025년쯤에나 완성이 가능하다고 한다. 또 한 체육관으로 884석(2천 명) 규모의 소규모 대구시민체육관이 있다. 거대 광역시의 체육관 시설 규모가 기껏 4천751석(7천 명)이라니 부끄럽기 그지없는 수준이다.반면에 타 대도시의 경우(2017년 기준)를 보면, 34개 체육관이 있는 서울특별시는 차치하고라도, 부산시만 해도 4개 체육관에 좌석수 2만7천483석(3만1천500명)이며, 인천시는 4개 체육관에 1만4천986석(1만4천986명), 광주시는 3개 체육관에 1만8천297석(2만1천797명), 울산시는 6개 체육관에 1만1천6석(1만1천435명)을 보유하고 있다. 경상북도는 각 시군 소속의 대규모 체육관을 26개나 소유하고 있으며, 인근의 경산체육관도 규모가 5천36석(5천36명)이다.대구시는 내년 완공 예정으로 현재 건설 중인 다목적 체육센터가 건립되더라도 광역시 규모로는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다. 대규모 체육관이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농구팀을 다시 유치하겠다는 의욕은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대구시는 재차 이와 관련하여 다각도의 중지를 모아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를 체육인들만의 소망으로 보는 편협성은 문제 해결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250만 명 규모의 대도시가 이러한 수준의 체육관을 소지하고 있는 곳은 없지 않은가? 대구시민의 복지를 생각한다면 서서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다.

2019-11-27 11:12:50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 수필가

[매일춘추] 영화 '쇼생크의 탈출'과 희망

'쇼생크의 탈출'은 1994년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을 기반으로 프랭크 다라본트가 각본을 쓰고 감독한 영화로 팀 로빈스, 모건 프리먼이 주연을 맡았다. 영화를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복역 중이던 주인공이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20년간 조금씩 땅굴을 파 들어가 마침내 탈옥에 성공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두려움은 너를 죄수로 가두고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영화 포스터에 적혀있는 카피라이터만 봐도 희망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담겨있다.주인공이 탈옥을 꿈꾸는데 비해 다른 장기수들은 오랜 감방생활에 적응을 하고 길들여져서 오히려 바깥세상이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 가석방 심사 때도 부적격 판정이 나도록 일부러 거짓 연기를 하기도 한다. 실제로 가석방 되었던 늙은 장기수는 바깥 사회에 적응을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교도소 담장이 바깥세상을 동경하는 사람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지만, 순치된 장기수들에겐 오히려 보호벽 역할을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 만큼 무서운 일이다.영화에는 교도소에서의 첫날밤을 견디지 못해 울고불고 난리치다가 맞아죽는 죄수도 나온다. 사방이 절망의 벽으로 쌓인 감옥, 폐쇄의 공포가 엄습하는 첫날은 특히나 두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생활이 있는 곳이니 차츰차츰 순응해 가면서 체념도 배워 가야만 한다. 이미 닥친 일이라면 슬기롭게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치고 말 것이다. 적자생존이란 말도 적응하는 자만 살아남는다는 뜻 아니던가.불편하고 지긋지긋한 가난을 습관처럼 껴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그렇게 살고 싶어 사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만, 질병 등의 이유로 그럴 수밖에 없는 분들은 그렇다하더라도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벗어날 수도 있는 이들이 빈곤층이 되어 우리 사회에 부담을 주는 것은 문제이다. 아무리 익숙하고 길들여졌다고 해도 가난은 가까이 할게 못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벗어나야만 한다. 푸시킨의 시 중에 '마음은 미래에 살고...'라는 구절이 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음마저 가난해 지면 안 된다. 그건 희망을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쇼생크의 탈출의 주인공처럼 절대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다.영화는 반전의 묘미 아니겠는가. 후반부에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감정을 이입시킨다.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희망의 끈만 놓지 않으면 우리네 삶도 얼마든지 영화의 주인공처럼 반전을 이룰 수가 있다. 마음이 가면 몸은 따라온다고 했다. 계획을 세우고 줄기차게, 끈질기게 밀어붙이면 희망의 빛은 보이게 되어 있다. 물론 고비는 있을 것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8부 능선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거기만 넘으면 희열의 세계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탈옥 후 환희의 빛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장면은 얼마나 멋지던가.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수필가

2019-11-27 11:00:52

전헌호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종교칼럼]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오늘날 우리 인류가 누리고 있는 과학문명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 땅에서 약 800만 년 전에 시작된 인간의 생존 이래로 이런 일은 처음이다. 불과 10년 후 과학문명이 어떻게 발전해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이전에는 과학문명의 발전을 기대하고 기뻐하기만 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우려도 함께 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우려의 강도가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이러한 것은 자연과학과 응용과학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도 해당되는 것으로서 인류가 그동안 축적해온 지식의 양은 대단히 많다. 필자가 속한 대학교는 도서관에 약 100만 권 정도의 각종 책들과 다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회 도서관은 약 1천만 권 이상을 소장하고 있다.지구촌에서 출판되는 책의 양은 대단하여 우리나라에서만 해마다 약 5만∼6만 권의 신간 서적들이 출판되고 있다. 각종 신문, 잡지, 논문, 수필 등으로 기록되는 지식들도 대단히 많다. 이러한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되어 인류가 쌓아 올릴 지식의 양이 얼마나 될지 짐작하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이러한 일들은 인류가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알 수 없는 영역은 이보다 훨씬 더 넓다.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공간, 시간, 인과율이라는 틀 안에 들어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지닌 인식의 틀 안에 들어오는 것조차 인식하는 데에는 제약들이 많다. 대표적 예로 인류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가시광선으로 탐구할 수 있는 물질은 존재 세계의 4∼5%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역의 물질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는 것이 대단히 많아서 호기심 많은 인류가 앞으로도 많은 것들을 알아내는 기쁨을 누릴 것이고 그것을 응용한 과학기술의 편리함도 누릴 것이다.알 수 없는 영역은 알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어서 대단할 것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무엇을 알아낼 때 사용하는 감각, 감성, 이성을 초월한 영역이기에 지금까지 무엇을 알기 위해 동원했던 것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소용없다. 그래서 이 영역에 대해서는 차라리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고 쉬울 것이다.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조차 궁금하기 그지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호기심이 강해서 그럴까. 에너지 절약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참으로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이 영역에 대해 이렇게도 지속적인 관심이 가는 것은 내가 알려고 해서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이러한 현상은 인간 인식의 틀을 넘어선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영성의 틀로 가야 하는 그분이 우리에게 자꾸만 관심을 보이고 당신에 대해 알아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토록 이 영역에 대한 강한 관심을 지니고 오늘도 어제와 같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완전히 없는 영역에 대한 헛된 관심만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 또한 나의 호기심이나 힘으로만 그러는 것이 아닌 것도 분명한 것 같다.이 영역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면 보이는 세계의 적지 않은 것들을 희생하거나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관심과 열망으로 이 세계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려고 할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곧 보이는 현상세계와 죽음을 넘어선 어떤 것을 열어주는 구원의 세계이기에 이러는 것 같다.

2019-11-27 10:24:00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매일춘추] 11월의 書

주차된 루프에 낙엽들이 소복합니다. 11월의 고백 같고 표정 같기도 합니다. 매년 보내도 처음 보내는 가을처럼, 모든 사랑이 첫사랑인 것처럼, 낙엽은 가을이고 추억이고 그리움입니다. 뒤척이고 뒤척이는 모습은 당신에게서 시작되어 당신에게로 돌아가려는 몸짓일까요? 아무 말 걸지 않으며 슬쩍슬쩍 지나는 행인들 이내 시선을 돌립니다. '이별'의 아름다움은 이 '별'에서 원래의 '별'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해 둘게요.떠나가는 11월은 이상한 솔직함에서 나오는 전염병 같고, 우수수 내 몰린 상처를 펴서 말리는 것도 같습니다. 혈압이 올라 퓨즈가 나간 것 같고, 미친 척하고 한번 웃어보는 것도 같습니다. 죽은 풀무치 소리를 내며 프로판가스가 자꾸 새어나고. 우리 몸의 잎과 귀가 얇아지는 '11월은 불안하다'고 서정춘 시인은 말합니다. 당신에게서 와 아직 당신에게로 돌아가지 못한 말씀들이 11월의 끝을 붙잡고 있습니다.10월은 열매가 무르익고 5월은 꽃이 만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10월과 5월을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 두 달에 대한 시나 노래도 많지만, 이 두 달에는 결혼식도 많습니다. 또한 12월은 연말의 정취나 송년회 스케줄로 바쁩니다. 그러나 10월과 12월 사이에 낀 11월은 별로 조명 받지 못하며 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첫딸과 막내딸 사인 태어난 것처럼, 특별하게 기억되는 날이나 노래도 없습니다.기온이 뚝 떨어져 건조한 몸이 가렵습니다. 속수무책 떨어지는 잎들로 생이 가려운 11월, 가려운 생을 털어내느라 나무들도 괴롭습니다. 당신에게 가 닿으려고 몸에서 무게를 덜어내는 11월, 당신에게 주려고 뭔가를 뒤적뒤적 자꾸만 주억거리는 11월, 어쩔 줄 몰라 감정의 문을 닫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색의 단풍도 좋지만 마지막 잎만 남은 앙상한 가지도 좋습니다. 황금물결 넘실대는 들판도 좋지만 가을걷이 끝난 휑한 빈들도 좋습니다.길 가다가 소복한 낙엽이 발에 걸리면 아무생각 없이 걷어차게 됩니다. 지나는 강아지 꽁무니에 시선이 따라가기도 합니다. 낙엽이 머문 자리에서 또 걷어차고, 멀뚱멀뚱한 강아지에게 왈왈, 추파를 던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또 차 달라고 떼를 쓰며 달라붙는 낙엽들을 봅니다. 맞고도 랄랄랄 춤을 춥니다. 이처럼 11월은 아무 생각 없이 시작되고 아무 생각 없이 끝납니다. 생각 없는 치다꺼리들이 어이없이 기쁘게 느껴집니다.그러므로 11월은 일종의 사계절적 푸가(fuga)인 셈입니다. 詩詩(시시)콜콜한 시름이나 부름이 우리가 잘 모르는 기교로 교차하고 있습니다. 타국에서 느끼는 근본적인 쓸쓸함이나 시름 같은, 11월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10월과 12월을 벌려 주기 위해 11월이 존재한다는 것은 더욱 의미 있어 보입니다.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2019-11-26 11:19:03

개짖음으로 인한 소음을 줄이기 위해서는 개가 짖는 원인을 이해하여야 한다. (사진이미지:Sutterstock)

[박순석의 동물병원 24시] 아파트 개 짖음 문제, 해결책은?

아파트를 비롯해 공공주택에서 개 짖음으로 인한 소음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메리(3·치와와)가 병원을 찾았다. 낯선 병원에서도 금새 친화력을 보이던 메리의 보호자는 성대 수술을 상담하러 왔다고 했다. 늘상 함께였던 언니가 유학가는 바람에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 메리가 최근 들어 아이들 소리, 오토바이 소리에 지나치게 짖어 이웃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심지어 야간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데 창밖을 보며 하울링한다며 보호자는 개가 귀신을 보냐고 묻기도 했다.개가 짖는 것은 당연하다. 주변의 상황들을 보고, 듣고, 냄새로 인지하며 소리로 반응한다. 특히 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청 영역이 사람보다 훨씬 넓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초음파 영역도 개는 들을 수 있다.개가 실내에서 외부를 향해 짖는 것은 주변의 개들과 소통하거나, 자기 영역을 표현하고, 때로는 두려움과 불쾌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짖음이 너무 심해 이웃에 피해를 끼치는 경우다.비글, 슈나우저, 요크셔테리어, 치와와, 발발이가 짖는 경향이 강하며 톤이 높다. 건강하고 호기심 많으며 활동적인 개체들이 잘 짖고, 암컷보다는 수컷이 짖는 경향이 강하다.개가 짖는 것을 자제시키려면 짖는 원인을 알고 그에 합당한 교정법을 적용하여야 한다.개가 짖을 때 가족들 중 일부라도 대응하게 되면 개는 주인이 자기의 짖음 때문에 반응하였다고 판단하여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더 집요하게 짖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개가 관심을 끌려거나 간식을 요구하려고 집요하게 짖는다면 가족들은 짖지 말라고 소리치거나 달래지 말고 오히려 돌아서서 짖지 않을 때 까지 무시할 필요가 있다. 개가 짖음을 멈추었을 때 칭찬해주고 반드시 개가 멈추었거나 앉아있는 상태에서 간식을 보상한다.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짖음을 멈추고 기다리는 시간을 늘려나간다. 5초, 7초, 10초 기다림을 지켜본 후 간식을 보상한다. 개가 짖을 필요없이 주인 곁에서 조용히 기다리면 보상이 주어진다는 약속을 이해시키도록 한다. 가족 모두가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여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개가 분리 불안이나 두려움 때문에 짖는 경우가 있다. "오지마" "저리가" "싫어" 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혼자 남겨진 개가 심리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소리나 냄새로 외부의 낯선 존재를 인식하게 되면 침범받을까 두려워 짖기도 한다.이렇듯 불안감 때문에 짖는 개는 오랜 시간 혼자 지내지 않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가족들이 교대로 귀가하여 산책이나 기분좋은 놀이를 통해 불안감을 덜어주어야 한다. 산책이나 놀이운동을 통해 활동량을 늘리면 혼자 지내는 시간 동안 안정적인 수면을 취할 수 있다. 개가 주변의 소리에 덜 민감해지도록 평상시 개와 가족들이 함께 즐기는 영상을 켜두거나 오디오를 베란다 쪽에 설치하여 음악을 틀어주면 외부의 불안한 소리를 상쇄시키는 효과가 있다.개가 차량이나 오토바이에 대하여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며 짖기도 한다. 생명이 아닌 사물에 대한 막연한 경계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전적인 위협 대상으로 고착화되는 경향이 있다. 엔진의 낮은 주파수의 음역대가 불쾌감과 적대감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가족들은 이러한 경향이 굳어지기 전에 원인을 인지하고 대처하여야 한다. 개가 외부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베란다로 향한다면 커튼으로 가려 시각적인 흥분 요소를 줄이고, 개를 다른 방으로 이동시켜 즐거운 놀이 과정을 함께하며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도록 유도한다. 진공청소기의 백색소음을 이용하거나 비트가 강하게 울리는 음악을 이용하여 외부의 소리를 상쇄시키며 개의 관심을 변화시켜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개가 늑대처럼 울부짖는 소리를 낸다면 하울링이라 볼 수 있다. 멀리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서로의 안부를 나누는 원거리 소통 방법이다. 야생의 습성에서 비롯되지만 습관화되면 야간에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 첼로 음악, 애견전용 음악치료 오디오를 틀어주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마당에 묶여있는 개는 낯선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 심하게 짖을 수 밖에 없다. 외부인의 무단 출입을 차단시키는 효과는 있겠지만 개가 항상 경계심이 고조되어 있기 때문에 물림안전사고가 다발하기도 한다. 실외에서 기르는 개에게는 야생동물이나 외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편안히 잠들 수 있는 내실이 마련된 울타리를 마련해주실 것을 당부드린다.보호자가 개 짖음 자체를 통제하려다 보면 개는 심리적으로 위축되며 오히려 주인이 없을 때 짖는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짖기를 멈추게 하는 "조용해"라는 명령어는 부드럽게 말해야 한다. 감정이 실려 강하게 내뱉다보면 개의 입장에서는 주인이 짖는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명령어의 강도보다는 일관성이 중요하다. 가족 전체가 일관성 있게 대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어릴 때 짖기 훈련을 통해 과도하게 짖는 행동을 예방할 수도 있다. 부드럽게 "짖어" 하고 2, 3번 짖고 멈추면 간식 보상을 한다. 이러한 훈련이 익숙해지면 개가 짖고 있을 때 부드럽게 "조용해"란 명령어를 이해하도록 칭찬과 보상을 반복한다. 아이들에게 언어표현을 가르치듯이 개가 자연스럽게 주인과 소통하는 요령을 익혀주는 것이다.최근에는 개의 불안감이나 경계심을 감소시켜 짖는 행동 문제를 교정하는 음악치료 오디오가 보급되고 있다. 다양한 반려동물 IT상품들이 반려동물 문화와 어울려 개발되고 있다. 반려동물에게 도움되는 제품은 반려인에게는 행복이기 때문이다.박순석 탑스동물메디컬센터 진료원장SBS TV동물농장 수의사로 잘 알려진 박순석 원장은 개와 고양이, 야생동물을 구조하고 치료한 30년간의 임상 경험을 토대로 올바른 동물 의학 정보를 제공하고 바람직한 반려동물 문화를 제시하고자 '동물병원 24시'를 연재한다.

2019-11-26 10:06:18

송필용 작 무제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본 것과 믿는 것 사이에서

1990년 8월 23일 어느 시간, 만 31살이 조금 넘은 나는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가 국제선이어서 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국제선은 국내선을 충분히 타 본 후에 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내게 홍콩행 비행기는 홍콩을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목적은 위도 상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하얼빈이었다. 하얼빈에서도 흑룡강 대학이 최종 목적지였다. 당시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교류가 되지 않을 때라 비행기도 바로 가는 것이 없었다.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하얼빈 공항에 내리니 저녁 7시가 조금 넘었었다. 어둠이 많이 내려앉았고, 대륙 북방의 서늘한 기운이 벌써 깊은 가을처럼 느껴졌다. 공항은 한국의 지방 소도시 버스 터미널 같았다. 지방 소도시 버스터미널처럼 보이는 공항을 보고 중국이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한 나라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공항을 떠나 흑룡강 대학까지 오는 풍경은 아직도 내게 깊이 새겨져 있다.이것이 중국의 첫 인상이다. 사람들은 어깨에 별 이득도 없는 무거운 짐 하나를 진 채 그저 걷기만 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처럼 맥이 없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공항이 남루한 것은 공항 자체의 탓도 있지만, 공항을 채운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걸이가 그렇게 보이도록 한 탓이 더 큰 것 같았다. 삶의 생기가 돋아나지 못할 어떤 덫에 갇힌 것 같았다.정비되지 않은 길 양 옆으로는 군인인지 민간 경비원인지가 애매한 사람들이 긴 총을 메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성거렸다. 감시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자세다. 공항을 훨씬 떠나 시내에 가까워 오면서도 공항에서 발견했던 무기력과 가난과 감시와 통제라는 음산한 기운은 내 인식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았다. 첫인상은 상당히 오래갔다. 강렬해서 오래 가기도 했지만, 하얼빈에서 사는 내내 그런 것들이 매일매일 경험되었기 때문이다.하얼빈이라는 낯선 곳으로 오기 전에 학교생활만 줄곧 했던 나는 '비판적인 지식인'의 형상으로 채워진 분위기 안에 잠겨 있었다. 그 분위기는 내가 거기에 얼마나 친화적이었었는지 상관없이 마치 컴퓨터의 바탕화면처럼 보편적이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에게 피격되어 사망했다. 군대 가기 전 2년간의 대학 생활동안 기말고사를 봐 본 적이 없다.기말고사 기간까지 수업이 진행되기 어려울 정도로 학생들은 반독재 투쟁에 여념이 없었고, 심지어 경찰들이 교정에까지 들어와 머물렀다. 매 학기 중간도 못 가 휴교를 반복했다. 박정희를 거칠게 욕하는 일이 지식인에게는 매우 당연시 되었다. 대부분의 젊은 학생들은 학습이 깊어지면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운동권'도 아닌데다가, 경찰에게 잡히거나 경찰서에 불려가 본 적도 없이 그저 데모 행렬 꽁무니나 따라다니던, 당시 풍조에서 볼 때는 외양만 겨우 지식인 꼴을 한 나 같은 사람도 박정희 비난과 자본주의 비판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얼마나 깊은 정도로 발을 담근 운동권이냐는 상관없이 대학생이라면 반정부와 반자본주의 구호는 그렇게 강하게 부정하지 않았다.오히려 그것이 주류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김일성과 사회주의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거기서 무슨 탈출구를 찾으려고 하는 일군의 시도가 강하게 있었다. 당시에는 나에게도 사회주의나 김일성은 우리의 모순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창이거나 대안으로 보이곤 했다.하얼빈에는 북한 유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북한 유학생들과 면식을 트고 지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가능해지니, 호기심이 더 생겼다. 괜히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동포애를 어떻게든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이기도 했던 것 같다.중국은 나에게 한국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으로 제시되곤 했던 사회주의를 직접 보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세력들이 대학가를 지배하던 때라 김일성의 후예들을 직접 상대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나는 여기서 놀라운 경험을 한다. 어느 날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북한 학생 한 명이 어떤 낯선 사람과 함께 얘기하면서 다가왔다.나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고 하는데, 그 북한 학생은 나를 애써 외면하였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모른 체 해야만 하는 어떤 곤혹스러움을 읽었다. 돌아와서 이 이야기를 하자, 나보다 먼저 북한 학생들을 만나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북한 학생들은 아무리 친해도 제3자인 다른 낯선 북한 사람과 동행할 때에는 남한 사람들을 모른 체 했다.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취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라면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지상낙원일 수 없다.나는 하얼빈에 온지 약 100일 만에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 이유도 없이 아팠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혹시 사회주의와 북한을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의 비판적인 대안으로 간주하던 인식을 부정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었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자기 인식의 틀이나 믿음을 자각하여 부정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이 불가능한 일을 하느라 심하게 앓지 않았을까?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본 사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가난이었다. 등소평도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과 사회주의는 이미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북한 학생들의 생활 모습이나 외모나 태도 등을 통해서 북한은 또 얼마나 가난한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하얼빈에 체류할 때는 등소평이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개혁개방을 천명한지 벌써 12년이나 흐른 뒤이다.개혁이란 대내적으로 적용되는 관념으로서 자유 시장과 자본주의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개방이란 대외적 관념으로서 중국이 국제 시장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뜻인데, 자본주의적 요소를 받아 들인지 12년이나 흐른 후인데도 가난은 너무 분명했다. 내가 사회주의와 북한 사람들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얻은 결론은 다음의 몇 가지 단어들로 남았다. '가난', '감시', '통제', '불안', '공포', '독재', '억압'. '타율'. 막연한 상상이나 이론으로만 접할 때하고, 직접 눈으로 보며 경험하며 접할 때가 너무 많이 달랐다.여기서 나는 엄청난 당황스러움에 빠져 괴로워했다. 앓고 나서는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을 수정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아무리 모순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사회주의보다는 낫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리 심하게 독재를 했어도 김일성의 독재보다는 낫다. 대한민국의 언론 자유가 아무리 비판을 받더라도 중국이나 북한의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다."나는 지성을 성장 시키는 분위기가 아니라 지성을 마비시키는 분위기에 압도되었었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지성이었다면, 자본주의 비판하다 사회주의로 바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비판하다가 바로 김일성에게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비판하다가 중국이나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하얼빈에서 크게 앓으면서 현실 속에서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가지고 나를 교정할 수 있었다.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로의 전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수정으로 귀결되어야 하고, 박정희 비판은 김일성 추종이 아니라 박정희 수정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렇지 않았다면,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을 보고,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보고,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성큼 성큼 발전하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 정책을 고집하다가 몰락한 베네수엘라를 보고도 다른 사람들이 한 말들로 채워진 믿음을 계속 믿으려 고집을 피우다가,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외면하는 우를 범했을 것이다.한동안 북한에 대한 인식 방법으로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이론이 상당한 환영을 받으며 유행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을 그들이 설명하는 가치와 이념에 따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북한을 북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대접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론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최소한의 미덕은 객관성과 보편성이다.주관적인 감각을 벗어나야 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매우 넓은 범위 어디에나 치우침이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을 대할 때만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였다. 우리 자신, 즉 대한민국을 대할 때는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인류 보편의 가치 기준을 적용하였다. 북한을 이해할 때는 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기반으로 해서 하고, 우리를 이해하려 할 때에는 '인권', '민주' 등의 보편적인 잣대를 가지고 했던 것이다.편파적이나 임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이론이 아니다. 이론이 아닌 것을 이론처럼 사용하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고, 그것을 변경하지 못하는 지금의 시간들도 있다. 이론을 이론으로 다루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았다는 지식인들도 이 '내재적 접근법'을 편파적으로 사용하고, 정작 자신의 '내재적 상황'에는 한없이 자학적이었으면서도 매우 냉철한 지적 시선을 유지하는 것으로 포장하던 시절이었다.내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나오는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우리가 진리라고 하면, 구체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어떤 무엇인가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진리는 어쩐지 변화무쌍한 구체성과는 다른 어떤 것 같습니다.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어떤 형상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것은 조작된 것입니다. 가공물이고 인공물이지요.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 구체적인 실재의 세계뿐이지요. " 진리의 세계는 실재의 세계에 있다." 그래서 등소평도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진리는 실재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실재의 세계에서 구현될 뿐이다. 남이 정해준 어떤 '주의'(主義)에 대한 믿음 대신에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더 신뢰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정도의 용기와 지적 계몽이 필요하기도 하다.뮤지컬 '시카고'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키티가 자신의 남편이 다른 두 여자를 끼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총을 겨누자, 남편이 말한다. "당신이 본 것을 믿을래? 아니면 내 말을 믿을래?" 말이 끝나자 키티는 자신이 본 것을 믿고 남편에게 총을 발사한다. 남편이 설득하려고 하는 말은 결국 남이 하는 말이다. 우리에게 있었던 거의 모든 '주의'(主義)는 남들이 정한 것들이다. '남의 말'인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믿고 파고드는 자는 총을 발사하는 위치에 서고, 다른 사람의 말을 믿자고 하는 자는 총을 맞는 위치에 선다.

2019-11-25 18:00:00

경기대 미디어학부 특임교수

[김구철의 부의 비밀수학] 수학 방정식과 한국 정치

수학을 배우면 초기 단계에서 방정식이란 것을 배우게 된다. 미지수에 특정한 값을 주어야 성립하는 등식인데, 이 미지수를 찾는 과정이 방정식의 풀이다. 방정식 풀이는 동서고금의 재사들이 재능을 겨루는 좋은 게임이었다. 2차 방정식 즉 χ²이 포함된 방정식을 푸는 공식은 일반적인 통념보다 꽤 일찍 알려졌다.9세기 사라센 제국의 수학자 알-콰리즈미의 「복원과 대비의 계산」에 나온다. 당시 사라센 수도 바그다드에는 '지혜의집'(Bayt-al-Hikma)이라는, 통치자 칼리프가 후원하는 왕립연구소 겸 도서관이 있었다. '지혜의집'에서는 페르시아, 그리스, 이집트, 힌두, 시리아, 중국, 동로마 등 동서고금의 지혜를 집대성했는데, 알-콰리즈미는 그리스 수학과 과학책 번역 담당이었다.3차, 4차 방정식 즉 χ³, χ⁴이 포함된 방정식의 해법은 훨씬 난해해서, 알-콰리즈미 이후 700년 동안 해법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르네상스 후기의 천재들은 상대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3차, 4차 방정식을 자주 들이댔다. 마침내 르네상스도 저물어가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카르다노가 「아르스 마그나」(위대한 기술)를 펴냄으로써 3차, 4차 방정식도 정복됐다. 다음 과제는 당연히 5차 방정식, 300년 동안 여러 천재들이 5차 방정식 근의 공식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마침내 1820년, 노르웨이의 천재 아벨이 6쪽짜리 간결하고 명쾌한 논문을 썼다. '5차 이상 방정식은 근의 공식이 없다.'대한민국이 무척 어렵다. 북한 핵 문제는 답보 상태인데, 한미, 한일, 한중 관계 모두 불편하다. 경제성장률은 하향 수정을 반복하고, 일자리, 교육, 미세먼지 모두 쉽지 않다. 이럴 때 뭔가 역할을 해야 할 정치는 오히려 스스로가 또 하나의 미지수로 등장한다. 정당도 정치인도 모두. 따져보면 한국 정치는 단순한 1차 방정식, 미지수는 단 하나 '당리당략'뿐인데 왜 해법이 없을까? 한국 정치에도 아벨 같은 천재가 탄생해야만 하는가?

2019-11-25 18:00:00

백옥경 구미과학관 관장

[과학둘레] 나이 들지 않게 나이 든다는 것

신체 나이가 실제 나이와 극적으로 어긋나는 상황을 소재로 한 영화와 소설이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두근두근 내 인생'이 그들이다. 두 작품 모두 노인의 신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겪는 가슴 아픈 사연을 다룬다. 차이점이라면 '벤자민 버튼'이 노인에서 아이로 노화가 역행하는 가상의 내용인데 반해 '두근두근'은 아이에서 노인으로 노화가 가속화하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노화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누구나 겪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노화 역시 작품만큼은 아니어도 신체 나이가 실제 나이와 평행을 달리는 건 아닌 듯하다. 주변만 봐도 겉으로 보이는 나이가 제 나이보다 훨씬 많거나 적게 보여 우리의 허를 찌르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노화의 속도가 개인마다 차이 나는 이유는 무얼까. 노화의 원인에서 그 이유를 밝히려는 연구가 세포와 분자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모든 생명체의 세포에는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DNA가 있다. DNA는 세포가 분열할 때 기다란 실처럼 생긴 형태가 돌돌 감겨 짧은 막대 모양의 염색체로 된다. 하나의 세포가 나뉘는 세포분열은 모든 염색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새로운 세포에 똑같이 전달되는 과정이다. 이때 각 염색체는 자신의 DNA를 보호하고 인접한 염색체들과 엉겨 붙지 않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텔로미어'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끝에 있으며 이곳에는 DNA를 구성하는 A, T, G, C라는 4종류의 염기가 특정 서열(TTAGGG)로 수천 번 반복해 있다. 이 부위는 세포 분열 시 DNA를 보호하는 골무 같은 기능을 한다.텔로미어는 나이가 듦에 따라 길이가 짧아진다. 이는 세포가 분열할 때 DNA 복제가 말단까지 이루어질 수 없어 매번 200개 정도의 염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텔로미어 염기 수는 태어날 때 1만 개 정도지만, 35세에는 7천500개, 65세가 되면 4천800개 정도로 줄어든다고 한다. 텔로미어가 너무 짧아지면 세포는 분열을 멈추고 노화되고 질병에 취약해진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줄어드는 텔로미어 길이를 멈추거나 연장할 방법이 있을까. '텔로머라제'라는 효소는 DNA 복제 시 텔로미어의 염기를 복제해 그것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막아준다. 일반 세포에는 거의 없고 줄기세포와 생식세포에만 있다. 그러나 텔로머라제는 양날의 검이다. 분열을 멈추지 않는 암세포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2009년 텔로미어와 텔로머라제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엘리자베스 블랙번은 최근 '늙지 않는 비밀'이라는 저서에서 나이가 듦에 따라 짧아지는 텔로미어 길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외적 요인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중 관심을 끄는 것이 스트레스다. 스트레스에 많이 노출된 만성질환 자녀를 간병해 온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그들의 텔로미어 길이와 텔로머라제 양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더 짧고 적었다. 이는 다년간 지속되는 심각한 스트레스는 텔로미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스스로의 사고 습관을 인지하고 스트레스 탄력성을 높이는 명상 같은 행위를 통해 텔로미어가 더 안정되고 길어질 수 있다고 한다. 이 밖에 운동, 수면, 식습관 등이 텔로미어 길이에 부정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연구 사례들을 알려주며 나이 듦을 촉발하거나 지연시키는 요인이 우리 생활습관과 관련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소설 속 아이가 앓는 '소아 조로증'은 세포 내 핵막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유전자 변이로 정상적인 세포 분열이 저해되어 생기는 질환이다. 일반적인 노화 속도의 개인차도 결국은 새로운 세포를 얼마나 오래 잘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듯하다. 다행인 것은 그것이 우리의 선택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의 균형은 결코 어긋나서는 안 될, 질적인 삶을 위한 첫 번째 요건이다. 활력이나 탄력, 비상이나 도전 같은 단어를 한 번도 가슴에 품어볼 수 없는 삶을 산 소설 속 아이처럼 육체적 고통이 정신을 지배하는 삶이나 정신적 질병이 육체를 무너뜨리는 삶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너무 빨리 나이 들지 않게 나이 들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2019-11-25 18:00:00

㈜빅아이디어연구소 소장.'광고인의 생각 훔치기' 저자

[김종섭의 광고 이야기] '이부망천'이 아닌 '인재의 천국'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말이 지닌 에너지는 무섭다. KBS 한 프로그램에서 행한 말에 관한 실험 사례가 있다. 양파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는 긍정적인 음악을, 다른 쪽에는 욕설을 들려주는 실험이었다. 온도, 습도, 빛과 같은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설정해 다른 변수들을 통제하였다. 긍정적인 음악 속에 둔 양파는 거침없이 싹이 자랐다. 반면 욕설을 듣는 환경의 양파는 싹이 자라지 않거나 조금 자란 것이 전부였다. 양파에도 말의 에너지는 강력하게 전달된 것이다.대구에서는 너무 먼 인천시교육청에서 연락이 왔다. 앞으로 쓰이게 될 교육청 슬로건이 필요하단 작업 문의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문의로 생각했다. 서울에도 광고 회사가 많은데 이토록 먼 대구의 광고 회사에 일을 맡겨 줄지 몰랐다. 대구까지 내려오겠다는 장학사님들을 만류하고 필자가 서울에 올라가 미팅을 진행했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역에서 만난 그들은 말의 에너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력한 한 줄을 필자에게 원했다. 운 좋게 계약까지 진행되었다.작업을 시작하며 찾아본 인천의 이미지는 매우 좋지 않았다. 2018년 6월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가고 망하면 인천 간다)이라는 단어가 매스컴을 타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굳어졌다. 게다가 부정적인 이미지의 전파 속도는 긍정적인 이미지보다 훨씬 빠르고 넓다. 슬로건 작업을 하면서 도무지 '이부망천'이라는 강력한 단어를 이길 문장이 보이지 않았다. 필자의 회사는 아주 난감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광고가 마약과 같이 중독성이 있는 건 언제든지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나에게 유리한 관점으로 상황을 재설정하면 그 판을 뒤집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광고의 묘미이다. 이번 작업 역시 어떻게 우리 쪽에 유리하게 관점을 바꿀까 생각하다 '이부망천'처럼 앞글자 줄임말에 주목했다. 줄임말로 상처를 받았다면 줄임말로 상처를 치료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말이 '인재의 천국'이었다. 이미지를 만들 때 '인' 자와 '천' 자에만 의도적으로 색상을 넣어 '인천'이 두드러지도록 디자인했다. 멀리서 보면 '인천'이라는 단어만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인재의 천국'이라는 전체 문장이 보였다. 이 슬로건을 쓰고 광고주가 거절할 수 없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디어 발표일, 전날 인천에 올라가 하루 묵고 오전에 발표를 진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준비해 간 몇 가지 시안 중 광고주는 이 문장에서 박수를 쳤다. 행복, 자랑스러움, 함께, 도약이라는 구구절절하고 싫증이 나버린 단어보다 간결함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이 슬로건은 공감에 있어서 낮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 '인천이 인재의 천국이라고?' 광고의 기술에서 '공감'이 가장 중요하지만, 필자는 이번 작업에서 공감은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공감보단 씨앗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서두에 '말이 씨가 된다'고 쓴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왕이라 부르면 그 사람의 행동이 왕이 되는 것처럼 인천이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인천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망천'이라는 씨앗을 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인재의 천국'이란 씨앗을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자신들이 그 증거가 되어 주면 좋겠다. 오늘부터 인천은 망천이 아니라 '인재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2019-11-25 18:00:00

고려대 사학과 초빙교수

[김준의 시사로 읽는 한자] 習俗移性(습속이성)-귤이 탱자가 된 이유

안자(晏子)는 중국 춘추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환경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을 중시했는데, 풍토나 습속(習俗)이 인간의 습성도 바꾼다(移性)는 습속이성(習俗移性)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잡(內篇雜) 상편(上篇)에서 유래했다.안자가 초(楚)나라에 출사했을 때의 일이다. 초나라 왕은 언변에 능한 안자를 놀려주고 싶었다. 어느 날 초왕은 술자리를 마련해서 그를 대접했다. 술상이 한창 달아오를 때 간수가 죄수 한 명을 묶어 데리고 나왔다. 초왕이 "그놈은 어디 사람이고,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고 물었다. "제나라 사람인데 도둑질을 했소이다"라고 하는 간수의 말을 듣고, 초왕은 안자를 흘겨보며 "제나라 사람들은 원래 다 도둑질을 잘 하오"라고 물었다. 안자는 정중하게 말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회수(淮水) 이남의 귤이 회수의 북쪽에서 자라면 탱자가 됩니다. 같은 나무에서 자랐지만 전혀 다릅니다. 왜일까요. 수토(水土)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나라에서 도둑질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한다면, 초나라의 수토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안자의 말을 들은 초왕은 웃으면서 "현자와 함부로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구려. 오히려 내가 망신을 당했소이다"라고 하며 사과했다.달고 큰 귤이 열리는 나무를 다른 지역에 옮겨 심었더니 쓰고 작은 탱자가 달렸다는 이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사회에서는 외국인 범죄의 원인을 외국인이기 때문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본국에서도 범죄자였다면 아예 입국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한국에 와서 범죄를 저지르는 데에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지 않은지 따져볼 일이다. 홍콩의 시위를 한국의 촛불운동과 같은 잣대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데에도 약간의 의구심이 있다. 귤이 탱자가 되는 데에는 드러나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2019-11-25 18:00:00

이성환 계명대 교수

[세계의 창] "자민당을 쳐부수자"

日 자민당 혁신 통해 살린 고이즈미 정치 변화 원하는 국민 열망에 부응불출마로 좀비당 해체 촉구 김세연"새로운 보수 탄생" 한국당도 응답을1993년 철옹성 같던 일본 자민당이 38년 만에 정권을 빼앗겼다. 3년 후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여당으로 복귀했으나, 잃어버린 10년의 경제처럼 자민당은 활력을 찾지 못했다. 시대와 공감하지 못하고 민심과 동떨어진 좌충우돌이 계속되면서 내각 지지율은 1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리멸렬했다.2001년 4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비주류로 독불장군 취급을 받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중의원 의원이 "자민당을 쳐부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민당의 해체를 주장했다. 자신이 총재가 되어 무기력한 자민당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계파 간 역학관계가 강하게 작용하는 자민당에서 그가 총재가 되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총재 선거를 위한 그의 가두연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환호했다. 당원・당우(黨友·당원이 아닌 당의 지지자)의 지지를 받은 그는 승리했고, 총재가 됐다.총재로서 총리가 된 후에도 그의 질주는 끝나지 않았다. 자민당의 오랜 관행이었던 파벌 배분형의 각료 임명 방식을 폐기하고 개혁에 대한 의지를 기준으로 장관을 임명했다. 지지부진하던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금기시되던 이라크 파병을 단행하고,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을 하고 평양선언을 발표했다. 사적 기득권에 매달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소속 의원들에게는 공천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철저히 응징했으며, 각종 선거에서 승리했다.내각 출범 시 그의 지지율은 85%로 사상 최고치였으며, 지지하지 않는다가 5%였다. 지지하지 않는다는 5%는 그가 자민당 총재이기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이유를 들었다.일본 국민들이 그를 지지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민당을 철저히 쇄신해 정치를 바꾸고 일본을 변화시킬 것을 기대한 것이다. 물론 그는 자민당을 부수지도 않았으며, 일본도 바뀌지 않았다. 임기 중에 단행한 연금법 개정으로 국민 부담이 늘고, 파견업법 개정으로 비정규직이 급증했다. 소득격차의 확대로 젊은이들의 희망을 빼앗았으며, 일본 사회를 극우화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으로서 일시적으로나마 자민당 쇄신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담아냈다.김세연 국회의원이 자유한국당 해체론을 선언했다. 한국당은 수명을 다한 좀비 정당으로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당은 쇄신을 시도했으나, 새로운 가치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구태의연한 정쟁, 무조건 반대, 여당의 실정에 의한 반사이익만을 좇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김세연 의원의 의도는 분명하다. 좀비 같은 한국당을 해체하면 새로운 보수 세력이 만들어진다는 논리이다. 많은 국민들과 보수 언론이 공감하고 있으나, 한국당은 시큰둥하다. 식탐만 가득한 좀비로라도 버텨보자는 심산일까.김세연과 고이즈미는 자신이 속한 정당의 해체를 주장한 공통점이 있으나, 차이도 크다. 김세연은 불출마를 통해 한국당의 해체와 보수 재건의 물꼬가 트이기를 바랐고, 고이즈미는 자민당을 부수기 위해 총재가 되려고 했다. 직접 행동론과 간접 추동론쯤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두 사람의 권력 의지 차이일지 모르나 전자가 파괴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이즈미는 직접 해체론을 통해 자민당을 살렸다. 김세연의 주장에 답하듯, 한국당 지도부는 내년 총선에서 50% 물갈이를 제시했다.보다 중요한 것은 당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정해야 거기에 맞는 사람을 충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우연인 듯 필연, 그로 인해 결정적으로 바뀌는 삶을 경험한다. 김세연의 선언이 돌출적 우연이 아니라 한국당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필연으로 받아들여질 때 한국당은 살아날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해 새 보수가 탄생하기를 바란다.

2019-11-25 11:19:22

구현자 대구시교육청 민원담당사무관

[기고] 쇼팽과 함께 이 겨울을

굶주림과 공포에 질린 한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습니다. 장교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독일군 장교가 피아노에 한 손을 올리고 서서 그 남자를 지켜봅니다. 남자는 잠시 두 손을 마주 잡고 망설이다가 연주를 시작합니다. 두려움에 주저하듯 연주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결국 절정을 향해서 폭발합니다.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입니다. 영화는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1930년대 바르샤바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던 스필만은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에게 전 가족을 잃고 맙니다. 간신히 홀로 살아남아 굶주림과 추위, 공포에 떨며 바르샤바의 빈집과 폐허를 옮겨 다니며 지내던 그는 은신처에서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와 마주칩니다. 그는 스필만에게 직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스필만이 피아니스트였다고 말하자 독일군 장교는 피아노 연주를 명령합니다.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바르샤바의 거리로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흐릅니다. 연주가 끝난 뒤 호젠펠트는 유대인인 그를 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음식과 옷까지 챙겨줍니다. 호젠펠트는 연주회에 꼭 가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영화에서 스필만이 선택한 연주곡은 프레데리크 쇼팽의 발라드 1번입니다. 쇼팽은 그가 좋아하던 폴란드 애국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서사시 콘라트 발렌로드에서 영감을 받아서 발라드 1번을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쇼팽이 태어난 폴란드는 18세기 말 세 번에 걸쳐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었습니다. 폴란드인들은 이런 상황 아래에서도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폴란드의 문화와 언어를 지키려 노력하였습니다.쇼팽은 저항과 독립의 갈망이 팽배하던 바르샤바의 공기를 호흡하며 성장했습니다. 1830년, 제정 러시아의 학정에 대항하여 바르샤바에서 혁명이 일어납니다. 쇼팽은 11월 혁명이라 불리는 이 항거가 일어났을 때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쇼팽은 직접 항쟁에 참여하지는 못합니다. 대신 음악으로서 조국 폴란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그 후 쇼팽은 다시는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는 지금도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의 심장만은 코냑에 담긴 채 폴란드로 옮겨져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발라드 1번 작품 23은 강대국들에 국토를 빼앗긴 폴란드인의 깊은 슬픔을 표현하듯 장중하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크지 않은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는 격정을 토해냅니다.격랑 후에는 다시 아름다운 멜로디가 이어집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피아노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슬픔과 애잔함과 망설임, 그리고 환희의 감정을 차례로 만나는 것 같습니다.대구시교육청에는 하루에도 많은 분들이 교육과 관련된 의견과 민원을 가지고 방문하고 있습니다.민원실에서는 방문객들을 위해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잠시지만 쇼팽의 발라드 1번이 흐르는 가운데 의견을 나눈다면 좀 더 아름다운 대화가 오가지 않을까 하는 바람입니다. 혹여 민원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나는 길에 민원실에 들러 따뜻한 녹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쇼팽의 녹턴 20을 감상하신다면 이 겨울이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2019-11-25 11:12:37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매일춘추] 선택할 수 있다면

중요한 약속이 있어 바쁘게 발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멀리 어수룩한 차림을 한 할머니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늘 같은 자리에서 집에 갈 차비가 없다며 차비를 빌리시던 어떤 할머니에게 차비로 쓰이지 않을 걸 알면서 지갑을 열었던 경우가 꽤 있었던지라, '이번에도 차비를 달라시면 어쩌나' 하고 불안함이 몰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끝내 내 앞에서 말을 걸었다. "집 좀 찾아주세요." 추위가 잔뜩 묻은 입술을 하고서 목에 걸려있는 동그란 목걸이를 내미신다. 목걸이 앞면에는 아들 내외 것으로 보이는 전화번호 두 개와 뒷면에는 주소가 새겨져 있었다. 손자뻘쯤 되는 나에게 자신의 허물을 보이시는 할머니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보니 오해했던 내가 한없이 초라해졌다. 할머니를 꼭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 전화해드릴게요" 라고 말하며 전화기를 꺼내는데 할머니가 내 손에 있던 목걸이를 '탁' 움켜쥐시며 전화는 하지 말고 어디로 가는지 길만 알려달라고 하신다.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짐이 되고 싶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마음을 알아채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얼른 스마트폰에서 주소 검색을 했다. 거리는 약 300미터 정도, 그리 어려운길은 아니었다. "할머니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여기서 많이 안 멀어요." 몇 차례 사양하시더니 이내 나와 함께 발을 옮기셨다.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들어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설픈 위로도 어색함을 달래는 물음표 없는 질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골목 끝에 모퉁이를 돌자 할머니가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다고 하신다. 불안했던 나는 그래도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하자 버럭 화를 내셨다. '아, 길을 잃었다는 것을 자식에게 들키고 싶지 않으신 거로구나' 하고 번뜩 생각이 들어 얼른 나머지 길을 알려드렸다.자식과 부모는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부모도 자식을 선택할 수 없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덜컹 맺어진 인연으로 서로 남보다 못하게 싸우기도 하고 남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누구나 한 번쯤 '나는 왜 하필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원망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만의 경험이 아니길…) 좀 더 돈 많은 부모, 좀 더 다정한 부모, 좀 더 지적인 부모…. 하지만 거꾸로 부모가 자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선택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부끄러움이 생긴다.매번 다녔던 길이 낯설게 느껴지는 두려움보다 자식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부모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된다면 부모가 길을 잃을까봐 목걸이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새겨 부모의 목에 걸어준 자식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 부모 자식 간에 자격이 필요하다면 세상에 누가 부모와 자식을 할 수 있을까?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2019-11-25 11:09:21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 지소미아 사태, 복기와 반성이 필요하다

국민과 국가의 안위 걸린 지소미아조건부 종료 유예 결정 다행이지만처음부터 양국 정부 대화 나섰다면엄청난 사회적 비용 들지 않았을 것일단 다행이다. 22일 자정 종료를 몇 시간 앞두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GSOMIA) 연장이 결정되었다. 조건부 종료 유예지만 사실상 연장이다. 시중에는 지소미아 종료 시 후폭풍에 대한 별의별 시나리오가 돌아다니던 참이다. 그걸 감안할 때 다행스럽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미국의 금융 제재 등 현실화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상당수 국민들이 불안감 속에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정치의 요체 중 하나가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번 지소미아 소동은 명백한 정치 실패의 사례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미국의 전방위적 압력, 경제적 파장 등을 생각했을 때 사실 지소미아 종료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표면적인 강경 자세와 달리 정부 관계자들도 오래 물밑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그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었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대처했다면 전혀 필요 없었던 비용이다.새삼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정부·여당을 비난하거나 특정인의 책임을 추궁하자는 게 아니다. 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단추들을 잘못 끼웠는지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바둑처럼 복기를 해보자는 제안이다. "괴롭지만 복기를 해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넘어갈 수 있다." 현재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인 조훈현 국수가 한 말이다. 바둑 팬은 다 아는 얘기지만 그만큼 바둑에서는 복기가 중요하다. 이번 지소미아 사태도 우리 역사상 주요 사건으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국민과 국가의 안위가 걸린 걸 생각하면 바둑과 비교할 수도 없는 엄중한 문제이다.시작은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었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한 게 아니어서 일본 기업이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의무가 있다는 내용이었다.당시 이미 "일본 정부와 언론은 강한 반발을 예고하는 등 한일 관계에 미칠 파장이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일본의 반발에 대한 철저한 대책 마련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일본 정부는 2019년 1월 9일 정부 간 협의를 요청해 왔다. 우리 정부가 답이 없자 일본은 5월 20일 제3국 위원을 포함한 중재위원회 개최를 다시 요청해 왔다.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분쟁 해결 절차였다. 우리 정부는 일본 측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일반 외교 채널을 통한 협의를 지속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사법부 판결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항 조치 발동을 검토'하고 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었지만 일본 정부의 요구에 우리 정부는 무대응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이어진 사태 전개는 다 아는 대로다.사실상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이다. 이런 분석에는 "일본 편을 든다"는 비난이 따른다. 결과는 어떤가. 지소미아 종료 유예는 한일 양국이 문제 해결을 위해 진지하게 협상 노력을 기울인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한일 '정부 간 협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결과이다. '1+1+알파' 등 판결에 대한 그 나름의 해결책도 논의되고 있다. 처음부터 양국 정부 간 대화에 나섰다면 기업들의 어려움은 물론 첨예한 국론 분열, 국민 편 가르기 등 엄청난 사회적 갈등은 겪지 않았어도 되는 일이었다. 사태가 마무리된 것도 아니다. 680여 개 시민사회단체 연대체는 "새로운 한일 관계 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면서 "지소미아 연장 결정을 즉각 철회하라"는 회견을 가졌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해법 마련도 쉽지 않다.한일 양국이 일단 사태를 봉합한 데는 미국이 두 나라 모두를 강하게 압박한 것이 주효했다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때 일본에 대한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는 것은 '글로벌 호구'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지소미아 종료 시한이 다가오자 우리 정부는 공개적으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중재를 요청했다. 주한미군 방위비 협상 등과 관련, 완전한 '갱신'(renewal)을 거론하는 미국 앞에서 글로벌 호구가 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다시 한 번 조 국수의 말을 인용한다. "괴롭지만 복기를 해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넘어갈 수 있다." 지소미아 소동에 대한 복기는 그만큼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2019-11-24 16:03:51

김기태 대구 동부소방서장

[기고] 우리 가정의 파수꾼, 주택용 소방시설

망양보뢰(亡羊補牢).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뜻의 이 고사성어는 화마로 인한 피해를 입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되뇌어봤을 법한 말이다. 아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말이다.건물이 무너지는 재난 같은 불가항력의 사건이 아니라 게으름과 안일함으로 인해 일어난 화재, 즉 부주의로 인한 화재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더욱 안타까움이 남는 것이다.주택 화재의 발생 원인은 1위가 부주의로, 아주 작은 실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로 인한 인명 피해 발생률은 전체 화재의 50% 가까이 되니 작은 실수로 인한 대가치고는 가혹하다. 특히 지금처럼 날씨가 쌀쌀해지는 계절에는 화재 위험 3대 겨울용품인 전기히터·장판, 전기열선, 화목보일러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덩달아 부주의로 인한 화재 가능성도 높아진다. 주택 거주자들이 각별히 안전사고 예방에 주의해야 할 시기다.그럼에도 화재 초기라면 여전히 우리에게 기회는 있다. 주택용 소방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주택화재경보기(단독경보형 감지기)는 화재를 감지하면 경보음을 울려 빠르게 대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소화기는 사람이 수동으로 소화 약제를 방사하는 기구로, 초기 소화에 유용하며 손쉽게 구입할 수 있고 사용 방법도 간편하다. 둘 다 작은 실수에서 시작된 화재를 막을 수 있는 최적의 소방시설이다.그래서 소방 당국은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난 2012년부터 아파트를 제외한 모든 주택에 의무적으로 이런 주택용 소방시설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소화기는 가구별, 층별로 1개 이상 설치하면 되고, 감지기는 구획된 실마다 설치하면 된다.그렇다면 이 주택용 소방시설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우리나라는 설치율이 아직 절반에 미치지 못하지만, 외국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일찍 주택용 화재경보기 설치 의무화를 시행하고 있다.소방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가까운 일본은 2008년 36%에 불과했던 설치율을 2014년 80%까지 끌어올렸고, 6년간 12.4% 화재 사망자 저감 효과가 있었다. 미국은 32년간 56%, 영국은 22년간 54% 화재 사망자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명 피해 예방에 확실한 효과가 입증된 것이다.대구 동부소방서 관할 구역에서도 매년 주택용 소방시설로 인한 화재 피해 저감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지난 여름철에만 에어컨 실외기에서 발생한 화재 중 신암동, 율하동에서 2건 정도가 소화기로 자체 진압됨에 따라 화재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전국적으로 살펴본다면 그 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다.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준 주택 화재 사건 현장에는 어김없이 주택용 소방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우리 가정의 안전을 책임져주는 주택용 소방시설은 소방서와 같은 유관기관의 노력만으로는 설치율 향상을 이뤄낼 수 없다.국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필요하다. 우리 가정의 안전은 곧 이웃과 우리 지역의 안전으로 연결되는 만큼 주택용 소방시설의 설치를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초석으로 인식하고 우리 모두 동참해야 할 때다.

2019-11-24 15: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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