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하빈 육신사를 찾아서…

허행일 시인·낙동강문학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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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에게 죽음으로써 절의를 지킨 신하들이 바로 사육신이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고자 거사를 도모하다가 김질, 정창손 등에게 고발을 당한다. 이들은 능지처참을 당하거나 옥에서 죽고 혹은 집에서 자결을 하였다. 세조 수양대군은 성삼문 등을 처형 하면서 "당세의 난신이나 후세의 충신이다"라고 말 할 정도로 그들의 충절과 재능을 아까워했었다. 하지만 각각의 신체부위를 소가 끄는 수레에 매어 사지를 찢어서 죽이는 '거열형'에 처하고 신체 각 부위를 조선 팔도 곳곳에 뿌렸다. 그리고 가족들 중 남자들은 삼대를 처형하고 아녀자들은 모두 관비가 되었다. 자손을 이을 수가 없으니 당연히 후손도 끊겨버렸다.

하지만 사육신 중 유일하게 친손이 살아남아 자손이 남아있는 분이 계신다. 그 분이 바로 세조의 모진 고문 앞에서도 세조를 상감마마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 부른 박팽년이다. 사육신의 삼대가 모두 처형당하여 멸족의 참화를 당할 무렵 박팽년의 둘째 아들 박순의 부인 성주 이씨가 임신 중이었는데 마침 그의 몸종도 임신 중이었다. 박팽년의 며느리는 아들을 낳고 며느리의 몸종은 딸을 낳았는데 그나마 아녀자들은 관비가 되어 살 수 있었기에 몸종의 자식과 바꿔치기 하여 박팽년의 손자는 몸종의 아들로 자라게 된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박팽년의 손자 박비는 17세 되던 해에 자수하여 성종으로부터 죄를 사하게 된다. 그리고 궁중의 가마와 마필, 그리고 목장을 관리하는 '사복시정'이라는 벼슬을 지내다가 외가인 대구 달성군 하빈면에 내려와 순천 박씨 집성촌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살게 되었다.

하루는 박팽년의 현손 박계창이 고조부(박팽년)의 제삿날에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 사육신 중 박팽년을 제외한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유응부의 혼령이 사당 밖에서 몸을 덜덜 떨며 부러운 듯 제사상을 바라보고 있더란다. 이에 직계자손 없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나머지 다섯 분의 제사도 같이 모시기 위해 하빈사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며 서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 되었다가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충효위인 유적정화 사업'에 의해 육신사로 지금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육신사 하늘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그들의 충절과 기개를 생각한다. 무릇 어진 군주 곁에는 충신이 많고 무능한 군주 밑에는 아첨과 아부로 자신의 득실을 먼저 따지는 간신들이 넘친다 했다. 사리사욕을 정치의 도구로 삼는 위정자들의 가렴주구가 나날이 더해가니 어찌 국민들의 삶이 순탄할 수 있으랴? 국민과 정권에 올바른 소리를 하는 충신들은 모두 내쳐진다. 국민을 기만하고 아첨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충견들이 난무하다. 국민들에게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없는 현 시국을 바라보면서 진영논리와 양극화가 팽배한 이때에 사육신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이다.

허행일 시인·낙동강문학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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