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쓸모를 증명할 시간

이응규 EG 뮤지컬 컴퍼니 대표

이응규 EG 뮤지컬 컴퍼니 대표 이응규 EG 뮤지컬 컴퍼니 대표

8가에 위치한 뉴욕대학교 티쉬스쿨 입구를 황급히 빠져 나와 매디슨 스퀘어 공원이 있는 23가까지 브로드웨이를 따라 한참을 달렸다. 거친 소방차들의 사이렌 소리와 성격 급한 운전자들의 경적소리, 마약에 취한 방랑자들과 길 바닥에 앉아 적선하는 히피들, 커피를 들고 어디론가 바쁘게 지나는 뉴요커들을 곁눈에 품고 청년은 숨을 몰아 쉬며 무작정 달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달려 어느덧 보자르 양식의 '플랫 아이언' 빌딩 앞에 다다랐다. 19세기 후반 여기엔 거리 세 곳이 교차하며 생긴 삼각형 모양의 좁고 쓸모 없는 땅이 있었는데 건축가 다니엘 번햄은 이런 핸디캡을 역이용해 도시의 랜드마크를 만들어냈다. 청년은 잠시 숨을 고르며 다리미 모양의 플랫 아이언 빌딩을 바라본다.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이 건축이 주는 철학이다.

빌딩 건너편 광장으로 들어서서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아 책가방을 내려놓고 사과가 그려진 얇은 노트북을 꺼내 열어 젖힌다. 느려터진 3G 인터넷 대신 남의 집에서 와이파이를 잽싸게 끌어당긴 후 스카이프를 연결해 화상 전화를 건다. 그간 미드 타운의 통 큰 사장님 집을 청소하며 눈치껏 연결시켜둔 와이파이 연결망은 오늘같이 아주 중요한 날 제 몫을 한다.

"저예요 저! 얼굴 잘 보여?" /

"아이고. 그래. 그래.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낯선 땅에서 오랜만에 엄마 얼굴을 보니 가슴도 뜨거워지고 눈시울도 뜨거워진다.

"엄마! 방금 막 최종 시험 끝났는데…. 나 합격이래! 이제 뉴욕에서 뮤지컬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구!"

새벽기도를 막 다녀오신 어머니는 멀리 떠나 보낸 아들의 희소식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다. 이뤄야 할 것들을 이루지 못한다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제 자식의 성질머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한국에서의 작은 성과 뒤에 따라온 무거운 실패와 좌절감. 이후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무작정 날아온 뉴욕에서의 1년은 그에겐 한없이 낮아지는 자존감과의 싸움이었다.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기 위해 청소용품 꾸러미를 메고 5번가와 브로드웨이, 23가를 돌아다니며 이 공원을 중심으로 빌딩 곳곳에서 청소부로 일해온 지 어언 1년, 이 공원에서 파는 할랄 음식을 좋아하게 된지도 1년이 지났다. 뉴욕대 주변을 서성이며 재학생들을 곁눈질 한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드디어 청년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기회의 열쇠를 받아 들게 된 것이다.

울컥 밀려드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뉴욕의 하늘을 등지고 우뚝 솟아 있는 플랫 아이언 빌딩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좁았던 너의 세상이 이제 얼마나 넓어질 지 지켜보라고 말하는 듯 했다.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뜨거움을 느끼고 있을 즈음, 화면 속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수고했다."

충분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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