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대구 옛이야기]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

김태훈 영남중 교사 김태훈 영남중 교사

대구 동구 공산동 출신의 이종암(1896~1930)은 의열단 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앞서 그는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제2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대구은행 출납계 주임 시절에 가져왔던 자금 1만500여원의 일부를 의열단 창단과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단장 김원봉과 함께 구국모험단에서 폭탄 제조법과 조작법을 익히고 길림으로 돌아왔다.

이후 이종암은 1920년 6월에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려다가 발각되었던 '밀양폭탄사건' 당시 다행히 체포되지 않고 국내에 잔류하여 다음 거사를 준비하였다. 곧바로 그는 최수봉을 의열단에 가입시켜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도록 지도하였다. 1920년 12월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사무실에 던진 첫 번째 폭탄은 유리창을 뚫고 순사부장 구스노키 게이고(楠慶吾)의 오른팔에 맞고 책상 위로 떨어졌으나 불발되었고,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에 놀란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나오는 복도를 향해 던진 두 번째 폭탄은 위력이 약해서 실패로 끝났다.

1921년 12월 무렵에 북경으로 돌아온 이종암은 1922년 3월에 오성륜, 김익상과 더불어 상해에 도착한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장을 응징하고자 '황포탄 의거'를 감행하였으나 이마저도 실패하였다. 이종암은 1925년에 동경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적발된 '경북의열단사건'으로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위장병, 인후병, 폐병으로 병세가 날로 악화되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으나 1930년 5월 29일에 끝내 순국하였다.

현재 대구읍성 달서문 표지석이 자리 잡은 장소가 이종암이 독립자금을 마련했던 옛 대구은행 터였고, 석방된 후에 대구로 돌아와 병든 몸을 요양했던 가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문우관길 30-26'으로서 '이종암 생가 터'라는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이 외에도 이종암의 항일정신을 기억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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