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묵호(墨湖)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수필가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 수필가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 수필가

명예퇴직을 신청했던 고등학교 동기가 강원도 '묵호항'이라며 전화를 해왔다. 시를 쓰는 친구인데 퇴직을 하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이 묵호였다고 한다. 송수권의 시 '묵호항', 심상대의 소설 '묵호를 아는가' 등 문학에서 '묵호' 란 지명은 신비롭게 등장한다. 과연 한문 글자의 뜻처럼 '검은 호수' 같은 바다일까?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을 게다. 한마을에 살던 영구 아버지가 야반도주를 했다. 신작로 옆 색시집 골방에서 노름을 하다가 논문서, 밭문서 다 잡혀 전 재산을 날리고는 그길로 읍내 쪽으로 걸어갔다는 것이다. 졸지에 풍비박산이 난 영구네는 초상집으로 변했다. 하얀 쪽머리에 은비녀를 꽂은 영구 할머니는 눈물만 뚝뚝 흘렸고, 어머니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줄줄이 딸린 아이들도 같이 울었다.

영구 아버지는 그길로 읍내로 가서 중앙선 열차를 탔다고 한다. 그리고는 영주역에서 영동선으로 갈아타고 묵호역에 내렸다. 묵호항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고향집에 편지를 보냈다.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 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던 내 친구 영구는 주소를 들고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겨우 열 살짜리가 "영주역에서 내려 '기리까이(바꿔 탐. きりかえ)' 해서, 어쩌고…. " 어른이나 쓸 법한 말들을 하면서 우리와는 다른 세상으로 걸어갔다.

영구 엄마도 묵호로 떠나고, 영구는 학업을 포기하고 친척이 있던 대구로 갔다. 여자 형제들은 식모로, 남자 형제들은 공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집을 내어주고 마을 오두막집에서 지내던 70이 넘은 노모와 어린 딸도 몇 달 후 묵호로 떠났다. 떠나던 날,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와 눈물을 훔치며 배웅을 했다. 꼬깃꼬깃 종이돈을 쥐어 주는가하면, 먹을 것을 싼 보따리를 건네주었다. 그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백발노인의 퉁퉁 부은 눈가에 번들거리던 눈물은 아직도 아른거린다.

영구 아버지가 묵호항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을 했는지, 고기잡이 배를 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육체노동을 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귀하게 자란 외동아들로, 하던 일이 고되어서일까 아니면 파멸의 구렁텅이로 전락한 것에 대한 회한 때문일까 술을 엄청 마셔댔다고 한다. 결국에는 알코올 중독자로 폐인이 되고 말았다. 고향을 떠난 지 십년도 못 되어 간경화로 목숨을 잃고 영구차에 실려 돌아와 선산에 묻혔다. 단 한 번의 일탈치고는 대가가 너무 가혹했던 셈이다.

무지와 가난을 습관처럼 안고 살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참 대책없는 가장도 많았다. 가장이 무능하면 그 고통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돌아간다. 혹자는 '가난은 죄가 아니라 불편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은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가난은 불편뿐만 아니라 구차하고, 때로는 인간의 존엄성까지 위태롭게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제위기를 보면서 50년 전 영구네 가족 잔혹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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