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41>맞춤 양복

 

 

 

1945년 광복이 되자 중앙로 일대에 맞춤 양복점이 하나둘 들어섰다. 맞춤 양복이란 미리 고객의 주문을 받아서 옷을 지어주는 것을 말한다. 천이며 모양새 같은 취향은 물론, 신체의 치수에 이르기까지 고객이 원하는 대로 주문을 받았다. 그리고는 재단을 해서 옷을 대충 만들어 미리 입어 보게 하였다. 그 같은 과정을 가봉(假縫)이라 하는데, 재단사가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고치고 다듬어 옷을 완성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자 맞춤 양복점이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솜씨 좋은 재단사와 양복지의 원활한 공급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당시 대구에는 제일모직과 삼호방직이 있었다. 그 가운데 제일모직은 1965년 국내 최초로 국제양모 사무국으로부터 '울 마크'의 사용 허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다양하고 품질 좋은 고급 양복지가 공급되면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맞춤 양복은 가격이 비쌌다. 웬만한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 시절 양복 한 벌 값이 6급 공무원의 한 달 치 월급보다 많았다. 그래서 상당한 재력이 있는 집안의 자제들 또는 결혼 예복 정도를 맞춤으로 지어 입었다. 결혼을 앞둔 신랑 신부가 부모를 모시고 중앙로의 양복점을 드나들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중앙로에 있는 유명 양복점의 상품권이 선물로 인기가 높았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은 영진양복점이다. 1945년에 창업하였으며, 지금도 자리를 옮겨서 영업하고 있다. 모모양복점․런던양복점․신성양복점은 그곳에서 일을 배운 사람들이 차린 양복점이다. 또한 향촌동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은 형제양복점이다. 1955년 창업하였으며,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그밖에 명통구리양복점․보스톤양복점․이글양복점․양치상양복점․신성양복점․만우라사․일신라사 같은 양복점이 유명세를 누렸다. 1980년대에 이르자 전성기를 구가하며 1천여 개 양복점이 있었다.

만우라사를 창업한 이상동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당시 중앙로에는 양복점이 줄지어 있었다. 그 때는 다들 양복을 맞춰 입었으므로 양복점은 성업이었고, 일을 시키고 밥만 먹여주어도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기술까지 가르쳐주는 양복점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양복은 유행을 많이 탄다. 기성복의 등장과 패션문화의 변화로 많은 양복점이 문을 닫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맞춤 양복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맞춤 양복 한 벌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양복점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연전에 대구에서 '아시아 맞춤 양복점 총회'가 열렸는데, 대구․경북지역의 맞춤 양복점이 263개소로 서울․경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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