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무정'이 최초의 근대소설인 이유

정혜영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1918년 발행된 무정 초판본(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1918년 발행된 무정 초판본(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이광수 '무정'은 한국최초의 근대소설이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항상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나 막상 '무정'(1917)이 왜 최초의 근대소설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다수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그나마 답을 한다고 해도 근대적 자아라거나, 근대적 문체 등 어려운 말을 주절주절 내뱉을 뿐 명료하게 의미를 설명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정'은 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일까? 단순하게 답하자면 '나'나 '당신'같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최초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은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우리가 즐겨 시청하는 TV드라마의 주인공과 비슷한 것도 아니다. TV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멋진 외모, 화려한 출신배경, 뛰어난 능력, 고결한 품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소설의 영웅에 가깝다. 이 점에서 본다면 고아출신에 역삼각형 얼굴, 영양결핍으로 비쩍 마른 이형식은 모든 면에서 주인공이 되기에는 함량미달이다. 여기에 더하여 성격은 결단력 없이 우유부단하다.

그는 사회에 대해서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적당한 수준의 세속적 욕망, 적당한 수준의 비겁함, 적당한 수준의 교활함, 적당한 수준의 용기 그리고 적당한 수준의 정의감 역시 함께 가지고 있다. 부잣집 데릴사위 자리를 별 고민 없이 감사하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그 행운을 손에 쥐기 위해서 은인에 대한 은혜 갚음에는 되도록 눈을 감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인간적 도리라든가, 의리에 완전히 눈을 감은 채 오로지 성공을 향해 돌진할 용기도 없다. 언제나 정당함과 부당함 사이에서 멈칫멈칫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멈칫멈칫하면서도 공공의 선(善)을 향한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무정'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완전무결한 영웅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인간을 앉힌 것이다. 유약한 인간이 주인공으로 들어앉았으니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삶의 이야기가 소설 내용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이 아닌가.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용기와 비겁함 사이에서 주저주저하면서도 힘을 내어 한 발 씩 앞으로 내딛는 그 힘을 통해서 인간은 진정한 영웅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무정'은 인간적 영웅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무정'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그려낸 소설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어떤 환상도, 환상을 포장하는 이데올로기도 들어있지 않았다.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무정'의 혁명적 위업은 이처럼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을 바라보는 이십대 이광수의 순수하고도 정직한 시선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우리들은 자신이 선함과 악함, 약함과 강함의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오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다. 그 경계를 기억하는 한 우리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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