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이도영·고희동·안중식 '기명절지'

미술사 연구자

1915년, 종이에 담채, 15.1×4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5년, 종이에 담채, 15.1×4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올해는 늦장마로 벼 베기가 좀 늦어진다고 하지만 오곡백과를 수확하는 가을에 어울리는 그림이다. 잎이 달린 동그란 무, 갈대에 꿴 쏘가리 두 마리, 뚜껑이 없는 주전자, 붉은 고추, 가지 채 꺾어온 복숭아와 비파, 수염이 긴 옥수수, 알알이 반짝거리는 도톰한 산딸기, 씨가 가득 박힌 수박 등이 있다. 그림이니 만치 계절은 따질게 못된다. 주전자에 뚜껑을 안 그린 것은 술이 가득 들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이 먹거리들은 안주거리거나 비주류(非酒類)의 간식거리일 테다. 아무렇게나 늘어놓아 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운데 청신한 담채의 아기자기한 색깔과 형태의 특징을 살린 시원스런 붓질이 시각적 흥겨움을 더한다.

골동 그릇과 화훼류를 그리는 기명절지화에서 기명은 술 주전자로, 꽃 대신 술안주와 먹음직스런 음식물류로 실속 있게 구성했다. 주변에 흔한 정겹고 친근한 소재들 속에 출세와 부귀, 장수와 자손 번창을 상징하는 뜻도 담았다. 그런데 복숭아는 반쯤 익은 푸른색 벽도(碧桃)이다. 삼천년 만에 꽃이 피고, 삼천년 만에 열매가 열리고, 삼천년 동안 익기까지 푸른색이어서 벽도라고 한 서왕모의 천도(天桃)를 그린 것이다. 동방삭이 훔쳐 먹고 삼천갑자, 곧 18만 살까지 살았다는 벽도를 그려 부채주인의 장수를 축원한 것이다.

세 군데에 화제와 낙관이 있는 세 사람의 합작품이다. 오른쪽은 이도영이, 왼쪽은 고희동이 맡아 부채를 다 완성했는데, 안중식에게 다시 화제를 요청해 안중식이 왼쪽 모서리에 어울리는 시를 써 넣었다. 안중식이 화제에서 '양형(兩兄)'이라고 했듯이 이도영과 고희동은 그가 길러낸 근대기 한국화가들 중에서도 조교 급의 고제(高弟)여서 스승에게 감히 이런 요청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셋과 부채주인 등이 시주(詩酒)로 어울린 유쾌한 자리에서 스승은 두 제자가 합작한 그림에 붓을 넘겨받아 화제를 쓰며 흐뭇했을 것 같다.

1915년 5월 탄생한 이 부채그림은 근대 화단의 주요 작가 세 명의 손길이 함께 닿았을 뿐 아니라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장승업→안중식→이도영으로 이어진 기명절지화의 계보를 떠올리게 해주는 의미 깊은 작품이다. 기명절지화는 이도영이 가장 잘했던 분야인데 가야와 신라의 질그릇, 고려청자, 조선백자를 중국 고동기(古銅器) 대신 그리기도 했고, 당시 귀한 열대과일인 바나나를 넣기도 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으나 1933년 50세의 이른 나이로 타계하여 자신의 세계를 다 완성하지 못했다. 이도영은 타계 전 몇 달간을 대구에 머물러 그의 작품 10점이 영남대학교박물관 '오정·소정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고, 기석(箕石) 허섭(1878~1934)의 산수화에 화제를 남기는 등 대구와 인연이 깊은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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