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 오디세이] '선비의 절개' 매화나무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인 충효당의 불천위 사당 앞에 있는 수령 150년 이상 된 매화나무인 일명 '서애매'. 류한욱 하회마을보존회장 제공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인 충효당의 불천위 사당 앞에 있는 수령 150년 이상 된 매화나무인 일명 '서애매'. 류한욱 하회마을보존회장 제공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시를 뿌려라'

일제의 국권 침탈로 암울했던 시절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한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 「광야」의 일부다. '지금 눈 내리고' 있는 혹독한 시기에 북풍이 매섭게 불어도 청아한 꽃에서 맑은 향기를 은은하게 내는 매화에는 불굴의 정신과 조국 광복의 희망이 담겨져 있다.

매화는 매실나무의 꽃이다. 꽃을 보기 위해 가꾸면 '매화나무',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키우면 '매실나무'로 부른다. 국어사전에 모두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다.

매화는 요염·농염보다 냉염(冷艶)의 꽃

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은 1, 2월에 피는 설중매를 보면 실감할 수 있다. 한겨울 음력 섣달에 피는 꽃은 봄의 전령으로 여겼고 이는 추위에도 굴하지 않는 기품 있는 선비의 절개로 생각했다. 육감적으로 아름다운 요염(妖艶)이나 모란꽃처럼 한창 무르익은 농염(濃艶)이 아니라 차갑게 아름다운 냉염(冷艶)의 꽃이기 때문에 선비들은 눈밭 속의 매화를 사랑했고 꽃을 찾아 나서는 심매나 탐매를 마다하지 않았다.

또 매화는 심한 추위의 고통을 겪어야 기개가 나타난다는 '梅經寒苦發淸香(매경한고발청향)', 사람은 역경을 만나서야 그 절개를 드러낸다는 '人逢艱難顯氣節(인봉간난현기절)'의 글귀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나 문인화의 사군자에 꼽을 정도로 옛 선비들은 이 꽃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조선시대 최초의 원예서를 쓴 강희안은 『양화소록』의 「매화」 첫머리에 송나라 때 시문(詩文)에 뛰어난 범석호의 『매보』(梅譜)의 말을 따와 "매화는 천하의 으뜸가는 꽃이라. 지우현불초를 불문하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전남 구례의 화엄사 경내에 있는 고매인 홍매화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이원선 시니어매일 선임기자 제공
전남 구례의 화엄사 경내에 있는 고매인 홍매화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이원선 시니어매일 선임기자 제공

매화를 사랑해 '매농'이라 자처했던 선비 유박이 쓴 화훼서 『화암수록』에는 「화목구등품제」가 있는데 매화를 국화, 소나무, 연꽃, 대나무와 함께 최고 등급인 1등급에 올려놨다. 「화목 28우」에서는 춘매(春梅)를 고우(古友), 즉 옛 친구라고 하며 깊은 애정을 표현했고 「화품평론」에서는 '강산의 정신이요, 태고의 면목이다'고 평했다.

매화를 누구보다 사랑한 퇴계 선생은 매화에 대한 시 100수 이상을 모은 『매화시첩』을 남겼다. 매화를 매형(梅兄·매화를 사랑한 중국인들이 매화를 수선화의 형님이라는 뜻으로 칭송하던 데서 비롯된 말)이라 부르며 아꼈을 뿐만 아니라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는 유언은 유명하다.

경북의 고매 안동 '서애매'

수령 150년이 넘는 매화나무를 '고매'라고 한다. '호남 5매'와 경남 '산청 3매', 강릉의 율곡매, 전남 구례 화엄사의 홍매화 등이 널리 알려진 고매다. 경북에는 매화를 시'군화로 지정한 곳이 안동시와 칠곡군, 울진군이고, 특히 안동에는 고매의 고장이다. 도산서원에 있던 '도산매'가 고매의 명맥을 이어왔으나 아쉽게도 1980년대에 고사했다. 다행히 하회마을에 있는 서애 류성룡 선생 종택 충효당의 불천위 사당 앞에 150년이 넘는 '서애매(西厓梅)'가 고매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나무 높이가 7m에 이르는 백매이며, 해마다 3월 쯤 꽃이 활짝 핀 모습이 장관이라고 한다.

대구에는 1990년대 무렵 '송광매' 붐이 일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영남대 권병탁 교수가 전남 순천의 송광사(松廣寺)에서 씨앗을 구해 키운 묘목을 시민에게 분양을 했다. 팔공산 자락에는 그 때 조성된 매원과 송광매기념관(현재 전통산업박물관)이 남아 있다. 또 남평 문씨 세거지인 달성군 화원 인흥마을에도 홍매화와 백매화가 2월부터 3월까지 장관을 이룬다.

옛 문헌에 나오는 매화나무 이름과 종류를 구별하기는 매우 복잡하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구분하는 기준은 꽃잎과 꽃받침의 색상이다. 꽃잎의 수가 5장이면 홑매, 10장 겹이면 겹매, 여러 겹이면 만첩매라고 부르며, 홑매는 다시 색깔에 따라 백매, 청매, 홍매로 구분된다.

홍매는 꽃잎과 꽃받침 모두 붉은 색으로, 그 중에서 유달리 진하게 붉으면 흑매(黑梅) 또는 비매(緋梅)라고 한다. 백매는 꽃잎이 하얗고 꽃받침이 붉으며, 청매는 하얀 꽃잎에 푸른 기운이 돌고 꽃받침도 녹색이다.

매실나무는 같은 장미과의 살구나무와 헷갈리기 쉽지만, 꽃이 핀 후 꽃받침 갈래가 뒤로 젖혀져 있으면 살구꽃이고 꽃과 붙어 있으면 매화로 구별할 수 있다. 열매가 익으면 살구는 씨앗과 과육이 쉽게 분리 되고 매실은 씨와 과육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신맛이 강한 매실에는 구연산이 많아 약용이나 건강식품으로 사용된다. 6~7월 매실이 누렇게 익을 무렵 장마에 접어드는데 이때 내리는 비를 매우(梅雨)라고 부른다.

경남 양산 통도사 경내에 있는 매화나무 '자장매'.
경남 양산 통도사 경내에 있는 매화나무 '자장매'.

위기 탈출 '망매지갈'의 지혜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망매지갈(望梅止渴)이라는 고사는 매실(梅實)의 강한 신맛에 연유한 말이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행군을 하고 있었는데 날은 무덥고 물을 찾을 수 없자 갈증과 피로에 지친 병사들이 거의 움직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조조는 꾀를 내서 "조금만 더 가면 매실나무 숲이 있으니 새콤한 열매를 따 먹으면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며 독려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병사들의 입 안에서는 군침이 돌아 힘내서 위기를 탈출했다'는 일화다. 위기일발의 순간 지도자가 한 번쯤은 써 먹을 수 있지만 '희망'을 남발하면 되레 불신을 초래하고 결국에는 '희망 고문'이 될 수 있다.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문일평은 『화하만필』(花下漫筆)에 '고려 때 시인 정지상은 매화 그림을 잘 그렸고, 어몽룡의 매화 그림은 조선에서 으뜸으로 일컬어졌다'고 했다. 지금도 어몽룡의 묵매(墨梅) 가운데 '늙은 매화나무 둥치에서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가지에 성글게 핀 매화와 어스름한 달이 조화를 이루는' 월매도(月梅圖)는 5만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초상화 뒷면에 들어있어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이종민 선임기자
이종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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