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김춘수의 풍경

한 스타일리스트 시인의 흑백사진

김춘수의 풍경/ 이기철 지음/ 문학사상 펴냄

김춘수의 풍경 김춘수의 풍경

"그는 그야말로 시 아닌 것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등산도 바둑도 스포츠도 자동차 운전도 하지 못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비행기도 타지 못했고 쉰일곱 살에 경북대학교에서 영남대학교로 교수 자리를 옮겨 연구실이 연구동 22층 건물의 복판, 12층에 배정되었을 때, 그 방에 들어가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아……!" 하고 주저앉았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하는, 높이에 대한 공포를 가진 병증(病症)의 시인이었다."(16쪽)

이기철 시인은 시인 김춘수의 인간과 문학에 대해 묘사하고 서술하고 관찰하고 해석하는 동안 머릿속에 산재한 소재가 불분명한 생각들과 끊임없이 대화했다. 자료와 연대와 시인의 행적을 일관되게 꿰어 맞추는 일은 고증이라는 까다로움에 막혀 자꾸만 글의 흐름이 더뎌졌다. 초고에서부터 탈고를 할 때까지 필자는 잊힌 생각의 파편들을, 너무 아끼다 깨버린 백자 항아리의 반짝이는 조각을 주워 맞추는 것처럼 조심해야 했다. 시인이 떠나고 없는 자리에 남은 말의 흔적, 만날 수 없는 시인과의 일방적 대화는 때로 독백이 되어 사라져버린 희미한 시간을 원고 위에 재생시키는 두루마리 풍경화로 되살아났다.

필자는 김춘수 시인을 우리 시 문학사상 최초의 '예술시인(Artistic Poet)'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지적이었고 인위적 실험을 체현한 시인으로, 어떤 무늬로 수놓을까를 끝없이 묻고 대답한 시인이다. 동양적 사유보다는 서양적 사유에 더 많이 의존하긴 했으나 그것은 우리 시의 방법적 자장을 넓히기 위한 힘든 시도였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 책은 김춘수 시인의 전기(傳記)가 아니다. 필자는 이 글을 시를 쓰듯 쓰고 싶었고 평론 쓰듯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의 손은 문체를 간섭하지 않았다. 추억록이라면 추억록이고 시의 탐구라면 시의 탐구, 일화라면 일화뭉치일 이 글을 필자나 동세대의 누군가가 남기지 않으면 한 '예술시인'이 살고 간 참모습의 장면들이 영영 어둠 속에 묻힐 것 같아 없는 시인의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가감 없는 이 책을 쓰게 됐다. 이로써 필자는 시인에게 진 최소한의 빚을 갚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영남대 명예교수인 저자 이기철은 1963년 경북대 주최 전국대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에서 시 '여백시초'가 당선되면서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김춘수 시인과 만났다. 저서로는 첫 시집 '낱말추적'을 비롯해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등 다수가 있다. 368쪽. 1만5천원

1977년 대구 만촌동 김춘수 시인의 자택 앞마당에서. 좌측부터 이기철 시인, 김춘수 시인, 하현식 시인, 박청륭 시인 1977년 대구 만촌동 김춘수 시인의 자택 앞마당에서. 좌측부터 이기철 시인, 김춘수 시인, 하현식 시인, 박청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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