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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윤덕희(1685-1766), ‘독서하는 여인’

미술사 연구자

비단에 수묵담채, 20×14.3㎝,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비단에 수묵담채, 20×14.3㎝,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고개를 약간 수그려 내려 깐 눈이 책을 향하고 손가락으로 글줄을 짚어가며 책을 읽는 젊은 여성을 그렸다. 독서하는 여성을 그린 유일한 조선시대 그림이 아닌가 한다. 배경에 화조화가 그려진 삽병(揷屛)이 있고 그 뒤로 무성한 파초, 난간이 있는 것은 중국 화보(畵譜) 풍이지만, 사각의자에 앉은 주인공은 이마 위쪽으로 둥글게 돌린 얹은머리와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 여성이다. 남색 삼회장의 푸른 저고리와 옅은 색 치마를 입은 수수한 차림새는 미인도의 일종인 중국의 독서미인도류와 크게 다르다. 여성 인물이 온전한 주체로서 기품 있게 그려진 예외적이고 귀한 그림이다.

조선은 초상화 왕국이라 할 정도로 수많은 명품이 남아 있지만 여성상은 극히 드물다. 고려의 유풍이 있던 초기와 채용신이 활약하는 말기에 부부초상화가 한 벌로 그려지면서 부인초상이 극소수 남아 있는 정도이다. 그런 중에 계월향, 최연홍의 인물상이 전하는 것 또한 조선의 문화 환경을 반영한다. 기생을 그린 이 2점은 특수한 직역에 종사하는 이상적 여성상이어서 그림으로 남게 되었는데 핍진한 초상화라기보다 미인도 범주에 속한다. 계월향은 평양 기생이고 최연홍은 평안도 가산의 청기(廳妓)이다. 이들은 각각 임진왜란과 홍경래 난이 일어났을 때 의열(義烈)을 실천한 의기(義妓)였다. 정절이 남다르거나 특출한 재능을 지닌 기생을 절기(節妓), 시기(詩妓), 가기(歌妓), 성기(聲妓), 무기(舞妓), 현기(弦妓), 금기(琴妓) 등으로 불렀다.

'독서하는 여인'은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의 풍속화이다. 윤덕희는 아버지 윤두서가 개척한 조선후기 회화의 신세계인 풍속화를 계승했고, 윤덕희의 아들 윤용도 이 가풍을 이었다. 풍속화는 해남 윤씨 집안에서 삼대로 이어지며 한 때의 시도나 실험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조영석이 나타나 뿌리를 내리게 되고 김홍도가 크게 발전시켜 새로운 장르로 만개하게 되었다.

윤두서는 어떻게 선구자가 될 수 있었을까. 책을 통해서였다. 밖으로부터의 소식을 책을 통해 섭취한 것이 윤두서 일가 삼대가 선구적 인식을 공유한 중요한 동력이었다. 녹우당(綠雨堂)으로 불리는 해남 윤씨 종가는 책이 많기로 유명해 '해남윤씨군서목록'으로 1927년경 정리되었는데 그 중 중국에서 간행된 출판물이 2천600여종이나 된다. 그림과 관련되는 역대 문인화가들의 문집, 화론서를 비롯해 화보류도 많았다. 해남윤씨 일가는 책을 통해 조선 바깥을 공부했고 거기에서 얻은 통찰을 자신과 일상의 주변에 대한 깊은 성찰로서 실천했다. 그 중 하나가 삼대로 이어진 풍속화이다. 녹우당은 윤두서의 외증손자인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 드나들던 도서관이었고, 대흥사에 머물며 초의선사의 가르침을 받던 허련이 화첩과 화보를 빌려보며 화가의 꿈을 키운 미술관이었다. 이 '독서하는 여인'도 녹우당의 책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왔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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